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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년여름-농활신문

세계화와 농민의 몰락, 그리고 우리의 과제



  쌀 시장 개방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쌀 수입 10년, 정부는 쌀 관세화 유예 협상을 준비하고 있고, 이에 대한 운동진영의 대응 역시 준비되고 있다. 남한에서 유일하게 자급이 가능한 곡물은 쌀이며, 전통적으로 한국 민족은 쌀에 대한 애착심이 강하다. 때문에 쌀 시장 개방은 다른 어느 문제보다도 민감한 사안이다. 쌀 시장 개방 뿐 아니라 WTO 등으로 대변되는 세계화 흐름은 취약한 농업구조를 가지고 있는 남한의 농민에게 죽음을 강요하고 있다. 낮은 가격을 무기로 다량으로 수입되는 외국 농산물 앞에서 남한의 농산물은 경쟁력을 가지지 못한다. 일련의 세계화에 의한 농산물 시장의 개방은 남한 농업을 괴멸시킬 것이 분명하다.

  자본이 주도하는 세계화로 인해 민중들이 겪는 고통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흐름에 대해 민중들이 저항에 나서는 것은 당연하고도 정당한 일이다.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다. 농민 문제에 있어서도 이들이 세계화 흐름에 저항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일이다. 농민들은 자본에 의해 주도되는 세계화가 가속되면 될 수록, 몰락할 수밖에 없으며, 생존의 위기에 몰린 그/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투쟁 뿐이다. 이런 면에서 농민들의 투쟁을 깎아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농민은 혁명적 계급인가


  문제는 이러한 농민들의 투쟁이 과연 자본주의 사회를 바꾸는 길인가이다. 농민들은 자체로 하나의 동일한 집단이 아니다. 생산수단의 소유 정도에 따라 여러 계층으로 나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농민이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개인으로 존재할 뿐, 조직된 세력으로 등장하지는 못한다. 하나의 공장에서 공동으로 일하며 단일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노동자들과 달리 농민들은 자신의 소유지에서 따로 따로 일한다. 공동작업이라고 해봐야 열을 넘지 못한다. 농민들이 처한 이러한 조건을 고려할 때, 무작정 농민들의 투쟁을 찬양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혁명적 계급은 그/녀들이 가진 전투성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녀들의 투쟁이 자본주의와 정면으로 대치할 수밖에 없고, 그 투쟁이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방향으로 나갈 때만 그/녀들은 혁명적 계급이라 불릴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보았을 때, 농민은 그 자체로서는 혁명적인 계급일 수 없다.

  농민들이 하나로 단결할 수 없다는 말에 대해 매년 겨울이면 열리는 농민대회를 예로 들며 반론을 펼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농민들도 단결해 그/녀들이 가지는 공동의 이해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벌인다. 이 순간만큼은 이질적인 구성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경우, 투쟁의 요구는 소부르주아적인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투쟁은 몰락하는 자신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농민들이 한데 모여 정부에 항의하는 가장 큰 목적은 농산물 시장개방을 막기 위해서이다. 이는 타국 농민들과의 경쟁에서 남한 농민이 불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므로 정부가 나서서 불리한 부분을 보완해 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남한에서 농민들의 투쟁은 지역분산적이고 수공업적인 현재의 농사 방식을 고수하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결국 반세계화 투쟁은 농업에 있어서 취약한 남한 농업을 정부가 나서서 보호할 것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귀결한다.

  일각에서는 초국적기업의 농업지배를 문제삼으며 농민들의 투쟁을 정세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음모 뒤에는 초국적 자본들이 버티고 있고, 농민들의 투쟁은 이들의 음모에 저항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투쟁이며 자본주의를 분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카길과 같은 초국적 기업들의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경우 간과하고 있는 것은 농민들이 어떠한 계급인지에 대한 분석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모순의 배후에는 자본이 존재한다. 때문에 모든 투쟁은 반자본주의적일 수 있다. 각각의 투쟁들이 계급적일 수 있는 것은 참가하는 세력이 얼마나 사회주의적인 정치를 가지고 있는가이지, 대립하는 적이 누구인지가 아니다.


다시 노동자계급 중심성으로


  농민들의 투쟁에 결합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노동자계급의 중심성을 탈각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일한 혁명적 계급은 노동자계급 뿐이다. 여타의 계급/계층이 혁명적으로 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중심성을 인정하며 이들과 함께 미래의 이익을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할 때 뿐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의 지위는 하락하며, 이들은 노동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몰락은 불가피하며, 자본주의 철폐 외에는 대안이 없다. 즉 그/녀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이익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미래사회의 주인인 노동자계급과 함께 싸워야 한다. 노동자계급 중심성은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고 모순을 깨뜨릴 중심세력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이지 결코 민중에 대한 배제나 방기가 아니다. 각각의 투쟁들은 저마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노동자계급의 중심성을 인정한다는 것이 그 투쟁들의 의미를 갉아먹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당 투쟁들의 성격을 더욱 명확하게 해 주며 나아갈 길을 분명하게 할 뿐이다.


세계화의 대안은 노동자계급에 의한 자본주의 철폐 뿐이다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세계화를 지연할 수는 있어도 막을 수는 없다. 자본은 이윤추구만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폭력적으로 제거된다. 이미 자본은 국가의 경계를 넘어섰다. 때문에 자본주의 자체를 철폐하는 것만이 세계화에 대한 대안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세계화로 인해 농민들이 겪는 고통에 가슴아파하고, 그/녀들의 투쟁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맹목적으로 농민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농민집회에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농민들이 자신의 현재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 즉 그/녀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몰락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 그/녀들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대안일 수 없다. 이러한 투쟁은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지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자신의 미래의 이익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자신들의 몰락은 불가피하다는 것,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자신들은 몰락하는 지위에 급급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 이후 얻게될 이익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을 농민들이 깨달을 때, 그/녀들은 진정으로 혁명적일 수 있다.

  우리는 농민들에게 세계화를 적극적으로 반대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는 것은 모순의 지연일 뿐, 해결책은 아니라는 사실을 숨겨서도 안된다. 농민들은 미래의 이익을 위해 싸울 줄 알아야하며, 이는 자본주의를 철폐할 노동자계급과의 연대를 통해 가능하다. 농민들은 노동자계급과의 더욱 굳건한 연대를 통해서만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농업 문제에 대한

민족주의적 관점을 비판한다



  운동 진영 내에서 농업 문제를 바라보는 가장 주된 관점은 아마도 민족주의적 관점일 것이다. 한복 차림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민주노동당의 전농 출신 강기갑 의원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식량주권을 지켜내서 민족농업을 사수하는 것’이 농업 정책의 올바른 방향이라고 역설한다. 학내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인데, ‘신참’ 민족주의자들은 농활 사업이 “농민-학생이 힘을 모아 전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당당하게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식량주권을 세계에 선언”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아래에서는 이와 같은 주장이 왜 공허하거나 심지어는 반동적일 수밖에 없는지를 짧게나마 분석해내고자 한다. 특별한 설명이 없는 한 이 글의 인용문은 모두 『우리농업 지키는 2004년 민족고대 봄 농촌활동』 자료집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혀둔다.


  (1) ‘식량주권 수호, 민족농업 사수’는 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인가


  이 질문에 옳게 답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농업 현안에 대한 각 계급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따져보아야만 한다. “쌀을 지켜내는 것은 우리 민족 모두의 문제, 우리 국민 모두의 문제”라는 민족주의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농업 문제에 있어서 각 계급은 자신의 계급적 처지에 따라 상이한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칠레 FTA 문제를 가지고 이를 살펴보자.

  먼저 농민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농 계급은 FTA가 통과되는 즉시 몰락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려 있다. 정부 스스로도 FTA가 통과되면 400만 농업 인구가 200만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시인하고 있다. 나머지 200만은 죽으라는 이야기이다. 하기야 비행기로 씨앗을 뿌리고, 거대한 콤바인으로 수확을 해대는 대규모 기업적 영농에 남한의 영세한 농업이 경쟁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때문에 소농 계급은 지난 한 해 그토록 전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FTA에 관한 남한 ‘민족’ 자본가 계급의 입장은 어떠한가? 그들의 입장은 농민들과는 정반대로 열렬한 환영이다. 지난 한 해 전경련이 노무현 정권에게 하루 빨리 한-칠레 FTA를 발효시켜 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다는 것을 기억해 보라. 이것은 그들이 ‘민족의 배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계급적 이해에 충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FTA의 발효는 남미의 공산품 수출 시장을 남한 자본에게 활짝 열어준다는 점, 둘째로 값싼 수입 농산품의 유통은 남한 노동자 계급의 임금을 낮은 수준에서 묶어 두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점은 FTA의 관철을 비롯한 농업의 세계적 재편이 결코 농업 선진국 자본의 이해만을 대변하지 않으며, 남한 자본의 이해 역시 동일하게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농업의 세계화’는 제국주의 자본의 남한 침략으로써가 아니라, 남한 자본 역시 그 일부로서 참여하고 있는 세계 총자본의 이윤율을 제고하기 위한 것으로써 이해되어야 한다. (‘미국의 농업 침탈에 맞선 민족 공동의 이해’라는 것은 허황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식량주권 수호, 민족농업 사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분쇄되지 않는 한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목적이며, 이것을 한 자본주의 국가의 농업 정책의 기조로 가져간다는 것은 공상에 불과하다. 농업 문제에 대한 민족주의적 관점은 이 같은 사태의 본질을 그릇 이해하게 할 뿐이며, 더불어 민족 내부에서의 계급적 대립을 간과하게끔 만들 따름이다.


  (2) ‘식량주권 수호, 민족농업 사수’는 어떤 측면에서 반동적인가


  모든 사물/사건은 자신의 내부에 대립되는 두 측면을 지니고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대립되는 양자는 부단히 서로 자리를 바꾸기도 하고, 새로운 질로 이행하기도 한다. 이것은 모든 문제에는 양면성이 있으며, 어느 한 측면을 절대화 시켜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업의 세계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우리 앞에 현상하는 갖가지 세계화 흐름은 전 세계 근로인민을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으며 그들이 누려왔던 갖가지 제반 권리들을 파괴하고 있다. 이것이 세계화의 한 측면이다. 그렇다면 세계화는 ‘절대악’일 뿐이며, 세계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인류의 목적으로 되어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세계화라는 것은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닌데,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이라는 그들의 저작에서 자본의 세계화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자신의 생산물의 판로를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욕구는 부르주아지를 전지구상으로 내몬다. 부르주아지는 도처에서 둥지를 틀어야 하며, 도처에서 정착하여야 하고, 도처에서 연계를 갖추어야 한다. … 낡은 지방적, 국민적 자급 자족과 고립 대신에 국민들 상호간의 전면적 교류, 전면적 의존이 들어선다.” 즉 세계화가 역사에서 수행한 진보적 측면은 생산의 전 세계적 체계화를 수행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더불어 세계화는 “모든 봉건적, 가부장제적, 목가적 관계들을 파괴”하는데, 이것이 자본가 계급이 “역사에서 (수행하는) 매우 혁명적인 역할” (칼 맑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주의 선언』, 박종철출판사)이다.

  따라서 세계화의 참된 모순은 세계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자본가 계급의 이윤욕을 위해 무계획적으로, 무정부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 세계화를 통해 획득된 전체 인류 사회의 거대한 생산력은 계승/발전 되어야 하며, 이것을 전체 근로 인민이 아니라 소수의 자본가 계급이 독점하는 현재의  생산 관계를 변혁해내는 것이 앞으로 역사가 수행해내야 할 과제이다.

  그런데 ‘식량주권 수호, 민족농업 사수’라는 민족주의적 관점은, 역사의 앞을 보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퇴행적 시도이다. 이들은 “원래 농산물은 인간의 생활에 기본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자급자족, 즉 자기나라에서 생산된 농산물은 자국에서 소비한다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전혀 당연하지 않다. 이미 남한의 식량 자급률은 30%도 채 되지 않는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식량주권을 지켜내기 위해 비행기와 콤바인으로 지은 값싼 농산물을 수입하는 대신 소 달구지에 의존하는 민족적 농업을 부활시키는 것이 우선적 과제로 된다. 글쎄, 이들에 대해서 ‘경제에서의 자립’이라는 구호를 내건 북조선의 경제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가를 언급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민족농업의 논리는 그것이 전혀 생산력의 발전을 담보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이미 획득된 생산력의 유실마저도 인정한다는 점에서 반동적이다.


  (3) 결론 : 농업 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어떻게 가능한가


  농업 개방을 앞두고 수많은 농민이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렸다는 것은 우리 앞에 놓여진 절박한 현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절박성이야말로 어설픈 민족적 감정에서가 아니라 과학적인 인식을 토대로 하는 문제 해결의 방법을 절실히 요구한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농업의 세계화’는 남한 자본을 비롯한 국제 자본의 요구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는 것, 문제는 세계화의 흐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본의 이해에 따라 무계획적, 무정부적으로 수행됨으로써 남한 농민을 비롯한 전 세계 근로 인민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상을 통해서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완전한 변혁을 통해 생산의 전 사회적 계획을 수립할 때만이 농업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이 가능하다는 확고한 결론을 얻게 된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분쇄되고 계획에 의한 생산이 전면화 되지 않는 한, 영세한 남한 농민의 생존권이 보장받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민족의 전통을 지키자고 민족 자본에게 외치고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을 위한 비타협적 투쟁을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투쟁하는 농민들의 대다수는 그들의 소소유자적 본능으로 말미암아 정부에 대한 청원 이상의 의식을 획득하고 있지 못하다. 농활을 통해 그들에게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알려내고, 자본주의 변혁의 주력군인 노동자 계급과 연대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결론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 민족주의는 구체적 역사적 현실에 따라 다르게 발현된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남한 사회에서 민족주의는 자본가 계급의 ‘사회 통합’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거나, 기껏해야 몰락하는 소생산자 계급의 이해를 대변해내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점이다. 농업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은 민족적 감성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을 주축으로 한 전 세계 근로인민의 국제주의적 연대이다.



맑스주의로 농업을 바라보자!



1. 왜 ‘맑스주의’인가!


다소 도발적인 질문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왜 ‘맑스주의’라니. 어떤 사람들은 21세기인 지금, 맑스주의는 일면적으로 어떤 부분에 대해서 참조할 수는 있지만 전적으로 여기에 바탕을 두는 이념 논쟁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체제가 어떠한 체제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군사정권과 같은 파시즘의 광풍이 사라졌다고 하여 맑스주의의 유효성이 소실된 것인가, 노동자계급이 이제는 하나의 ‘힘’있는 이익집단이 되어(물론 이에 대해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맑스주의의 참된 의미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인가. 분명 아닐 것이다. 착취와 피착취를 전제로 한 임금노동이 유지되는 한, 계급사회가 유지되는 한 자본주의는 존재할 것이며 여전히도 우리는 그러한 틀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국회 앞에서는 농민들의 격렬한 집회가 연이어 일어났다. 바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국회 비준안 통과를 막으려 했기 때문이다. 올해 4월 총선을 의식해서 인지 자신의 지역구가 농업지역인 국회의원들은 표결에 주저하여 비준안 표결이 아예 실시되지 못하기도 하였으나 결국은 통과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많은 농민들과 연대단체들은 ‘400만 농민의 생존권을 보장하라!’라고 외치며 울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고민은 이제 여기에서부터 이다. ‘400만 농민의 생존권을 보장하라’라는 구호가 과연 그 자체로 옳은 것인가? 남한 농민의 대다수는 농업노동자가 아니라 자그마한 땅이라도 소유한(그것을 직접소유하든 빌리든 마찬가지로 하나의 생산수단을 소유했다는 의미에서) 소농임을 고려할 때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발달과 이들의 요구는 어떻게 배치되는가? 하는 등의 고민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체제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아래 농업은 어떻게 발전하는지, 그 과정에서 농민은 어떠한 처지로 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맑스주의’가 필요함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맑스주의에 입각한 엥겔스와 레닌의 농업에 관한 글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에서의 ‘농업’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자본주의 아래에서 농민의 처지는 어떻게 되는가


-[프랑스와 독일 농업문제](엥겔스 저. [맑스/엥겔스저작선집 6, 박종철출판사]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텀에서는 이 글이 맑스주의에서 농업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가장 기본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바, 엥겔스의 글을 많이 직접 인용하고자 한다.


2.1 소농에 대해


앞서 언급할 때 남한농업에서 소농이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소농’이란 어떤 개념인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 텀에서는 엥겔스의 저작을 중심으로 첫째 소농에 대한 정의, 둘째 사회주의자에 대한 소농의 태도, 셋째 소농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입장을 검토하고자 한다.


먼저 소농에 대한 정의이다. 엥겔스는 소농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소농이란, 대체적으로 자신의 가족으로 경작할 수 있을 만큼 크지는 않지만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작지 않은 약간의 땅의 소유자이거나 차지인을 -특히 전자를- 일컫는다. 이 소농은, 소(小)수공업자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이지만, 자신의 노동수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와 구별된다; 요컨대, 소농은 과거의 생산방식의 잔재이다. (저작선집6 p.404)


즉 소농은 고된 일을 직접해야한다는 의미에서 소(小)수공업자와 마찬가지이지만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생산수단이 없는 무산자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에 비해서는 생산수단을 가진 위치인 것이다. 그러면서 엥겔스가 소농에 대해 ‘과거의 생산방식의 잔재이다’라고 언급한 것은 이들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농업에서도 대규모 경작이 자본의 이해에 따라 시행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의 근거지를 빼앗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요컨대 우리의 소농은 과거의 생산 방식의 모든 유물과 마찬가지로 걷잡을 수 없이 몰락해 가고 있다. 그들은 미래의 프롤레타리아이다.(저작선집6 p.405)


이러한 언급에서 주의를 해야 할 점은 소농이 ‘미래의 프롤레타리아’이라고 하여 그들의 몰락을 바라만 보고, 소농과 같은 봉건적 잔재가 모두 사라지는 즉 자본주의가 최고도로 성장하기만 하면 다음 사회체제인 사회주의라 간다 라는 ‘대기주의’라는 식의 발상은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근거로 조그마한 땅이라도 소유하고 있는 소농은 안락하게 안주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생산력이 점차 발전함에 따라 이들은 이 땅을 빼앗기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농이 자본주의 그 자체가 철폐되는 즉 사적소유가 폐기되는 방향의 사회주의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소농이 반대하는 것은 주어진 안락한 삶을 방해하는 생산력 증대를 위한 대규모 토지의 집적이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땅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농은 매우 불안정한 위치로 자본주의 체제에 동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소농의 태도에 대해 엥겔스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통해 사회주의(자)에 대한 소농의 태도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처지 때문에, 소농은 사회주의 선전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몸에 베어 있는 소유욕 때문에 그는 얼마간은 여전히 그것에 호응하지 않을 것이다. 위험에 처해 있는 자신의 땅뙈기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 그에게 힘에 겨우면 겨울수록, 그는 더욱더 필사적으로 그 땅뙈기에 매달리며, 또한 그럴수록 그는 토지 소유를 사회 전체에 양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 민주주의자들을 고리대금업자와 변호사와 마찬가지로 위험한 적으로 보게 된다. (저작선집6 p.405)


사회주의에 대해 반신반의하며 동요하고 있는 소농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자신들이 피해보는 것을 체득하고 있으므로 이들의 불만은 자본주의 그 자체를 폐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자계급에 훌륭한 동맹군이 될 수 있는 것은 점점 더 명확해져 갔다. (물론 이것의 전제는 노동자계급에 의한 확고한 지도력이 있을 경우를 말한다) 엥겔스는 이러한 점들을 간파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소농들을 노동자계급의 동맹군으로 만들기 위해 ‘사탕발림’의 말을 소농들에게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프랑스 사회주의 당의 소농을 끌어들이기 위한 주장은 ‘다음 총선거를 위하여 소농을 획득하려는 것 같다’라고 하며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새롭게 현재의 상태를 필연적으로 낳게 될 상태로 되돌아 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농민을 해방시키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사형집행을 유예해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단시간 내에 농민을 획득하였다가 우리가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됨으로써 농민이 그 다음에 우리를 다시 떠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이로운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자신의 분할지 소유를 영구화해 줄 것을 기대하는 농민을 우리는 당원으로 필요치 않는바, 이는 장인으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영구화하려는 수공업 장인을 필요치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저작선집6 p417)


즉 단순히 소농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그러한 주장들은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해 몰락하게 되는 소농들에 대해 ‘사형집행을 유예하는 것이다’라고 잘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동요하고 있는 소농들에게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시기적으로 어느 때나 어느 상황에 대해 반드시 옳다는 절대 불변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의 '보편적인‘ 입장으로서 각각의 특수한 국면에 적용되는 ’맥락적 의미‘로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보편‘과 '특수’에 대한 명확한 구별, 그리고 이의 상호침투의 내적관계를 파악하지 못할 경우 ‘보편’의 지나친 강조로 인한 교조주의의 한 편향, ‘특수’의 지나친 강조로 인한 내적 본질을 적용할 수 없는 구체적 상황에만 즉자적으로 매몰되는 한 편향, 즉 양 편향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중략); 우리는 소농의 불가피한 몰락을 예견하고 있으나, 우리의 개입을 통해서 그 몰락을 가속시키는 사명은 결코 갖지 있지 않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가 국가권력을 소유하고 있을 때 소농을 폭력적으로 착취하고(보상을 하든 보상을 하지 않든 간에) 대토지 소유자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는 것도 또한 명맥한 사실이다. 소농에 대한 우리의 과제의 요체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사적 경영과 사적 소유를 협동 조합적 경영과 소유로 이끄는 바, 그것은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례와 이러한 목적을 위한 사회적 원조의 제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지금도 소농이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해야 하겠지만, 그때 가면 당연히 우리는 그것이 소농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수단을 충분히 갖게 될 것이다.(저작선집 6 p.417~418)


이러한 언급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사회주의자들은 소농에 대한 개입을 통해 그들의 몰락을 가속시키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사적 경영과 사적소유를 협동조합적 경영과 소유’로 전화시키기 위해 선전/선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소농들이 반감을 갖고 반대할 수도 있지만 결국 이러한 조치들이 소농들에게 유리한 것임을 인식시켜야 한다는 것 역시 충고하고 있다.


지금까지 소농이란 무엇이며, 이들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지녀야 하는지에 대해 알아 보았다. 마지막으로 엥겔스가 집약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소농에 대한 입장을 인용하면서 소농에 대한 태도를 정리하고자 한다.


요컨대, 우리가 분할지 소유의 지속적인 보호를 기도하고 있다는 가상을 조금이라도 일으킬 수 있는 약속을 한다면, 당뿐만 아니라 소농들 자신에게 그것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농민들이 자신들의 해방으로 가는 길을 직접 막는 것이며 당을 소란스러운 반유태인주의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한 농민들의 처지는 결코 구원될 수 없다는 것, 분할지 소유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 기차가 손수레를 밀치고 나갔듯이 자본주의적 대규모 생산은 무력한 낡은 소경을 밀치고 나갈 것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는 것을 농민들에게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우리 당의 임무이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불가피한 경제적 발전이라는 확신 속에서 행동하는 것으로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경제적 발전은 우리의 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소농의 머리를 일깨울 것이다.(저작선집6 p.420~421)


2.2 중농과 대농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


소농에 비해 중농과 대농들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기에 누군가를 고용하여 자신의 토지에서 생산활동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과 함께 해야 할 대상은 물론 중농과 대농에 의해 예속된 농업 노동자일 것이다. 이러한 전제 아래 중농과 대농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우선 그들의 중간적인 위치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농업에 있어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들을 소농, 중농/대농, 대토지 소유자로 나누었을 때 중농/대농은 소농에 비해 경작하는 토지가 넓기 때문에 농업 노동자를 고용할 수는 있지만 해외의 값싼 농산물에 대해서는 대토지 소유자에 비해 가격 경쟁력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몰락의 운명은 소농과 같은 처지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중농과 대농에 대해서는 이러한 그들의 몰락 운명을 말하며 소농과 같이 ‘협동 조합적 경영’으로 전화해야 한다는 것과 이것이 결국 그들에게 유리하다 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다음의 엥겔스의 언급은 이를 더욱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농민들의 늘어가는 부채와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멸망이 이 농민들에게 증명하고 있듯이, 우리는 대농과 중농도 자본주의적 경영과 값싼 해외 곡물 생산의 경쟁 앞에 반드시 굴복하게 될 것이라는 경제적 확신을 갖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농장을 협동 조합적 경영으로 통합할 것을 권고하고 것 이외에는 이러한 멸망에 대하여 어떠한 것도 행할 수 없는데, 이 협동 조합적 경영에서는 임금 노동에 대한 착취가 점차로 제거될 것이며, 이 협동 조합적 경영은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의무를 갖는 전국적인 대규모 생산 협동 조합의 여러 부문들로 점차로 전화되어 갈 것이다. 만일 이 농민들이 자신들의 현재의 생산 방식이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그리하여 그로부터 나오는 필연적인 귀결을 이끌어 낸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올 것이다.(저작선집6 P.422)


2.3 대토지 소유자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


마지막으로 대토지 소유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앞서 잠시 언급했듯 대토지 소유자들은 소농과 중농/대농과는 달리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몰락하는 과정을 겪지 않는다. 오히려 대규모의 토지 집적/경영으로 더욱더 발전을 구가하게 되며, 역시나 이의 기반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서 일을 하고 있는 농업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통해서 이다. 따라서 이들의 이해와 노동계급의 이해는 결코 동일한 지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농과 중농/대농들에 대해 이들에게 무조건적으로 맹목적으로 동맹을 요청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노동계급의 지도 아래, 굳건한 중심성 아래 자본주의 자체를 폐기시키는 혁명적 활동에 있어 이들의 몰락 운명을 말하며 같이 할 수 있는 힘을 배가하고자 하는데 ‘동맹’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엥겔스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대토지 소유의 경우에는 사정이 아주 단순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경영을 공공연하게 보게 되며, 따라서 어떠한 주저도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위리 앞에 농촌 프롤레타리아를 목격하게 되는바, 우리의 과제는 명백하다. 우리 당이 국가 권력을 갖게 되자마자, 당은 공업에서의 공장주와 꼭 마찬가지로 대토지 소유자를 수탈해야 한다. 이 수탈에 대해 보상이 따르느냐 여부는, 대부분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권력을 갖게 될 당시의 상황과 특히 대토지 소유자 신사분들 자신들의 태도에 달려 있게 될 것이다.(저작선집6 P.423)


3. 레닌의 농업이론-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을 중심으로


-[레닌의 농업이론] - (井野降一 저, 미래사 편집부 역)-이 글을 주된 자료로 보는 것은 이 자료가 ‘원전’이 아닌 2차 자료에 해당하긴 하지만 레닌의 농업이론에 대해 명쾌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레닌을 통해 농업을 바라보려고 한다. 맑스와 엥겔스가 자신의 이론을 ‘도그마’가 아닌 하나의 구체적 활동의 ‘혁명적 이론’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 있었던 바, 레닌 역시 ‘러시아’라는 공간에 맞게 맑스주의를 구체적으로 적용하며 자신의 이론을 다져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레닌의 이론은 러시아‘만’의 특수한 곳에서만 적용되는 이론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맑스주의를 바탕으로 이를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기에 레닌이 주장한 논지들을 바탕으로 농업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풍부하게 알아감으로써 농업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보다 견고하게 잡아갔으면 한다.


*[민주주의 혁명에 있어 사회민주당의 두 가지 전술]을 통해


이 글은 1905년 6월~7월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제 3차 러시아사회민주당 당대회(1905년 4월에 개최되었는데 멘셰비키가 불참함으로써 볼셰비키의 단독 대회가 되었다)의 성과를 바탕으로 1차 러시아 혁명의 전야 시기에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레닌이 무엇보다도 명백히 하고자 한 것은 러시아의 자본주의가 아직 농노제의 잔존물을 뿌리 깊게 지니고 있고, 아울러 이미 부패하여 사멸해 가는 자본주의, 즉 제국주의의 단계로 들어가고 있는 상황을 깊이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가 놓여져 있는 러시아에 대한 당시 정황들을 통찰력 있게 정확하게 짚어 냄으로써 그는 다가오는 1차 러시아 혁명기 때 자신의 주장을 보다 설득력 있게 강고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차르의 전제 및 농노제 유물의 일소를 목표로 수행될 당면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순조로운 자본주의의 상향 발전의 길을 거친 이전의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의 혁명과 어떻게 다르며, 어떻게 특징지워지는가, 그것은 어떻게 하여 착취가 전혀 없는 사회주의를 향한 혁명으로 계속 ‘성장전화’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각각의 혁명에 있어서 적과 아군, 아군 중에서 주력과 동맹군 등 제 계급의 세력배치는 어떻게 되는가라는 점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러한 당시 정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이 글에서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점을 바탕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사회주의 혁명의 경우는 물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 있어서도 프롤레타리아트가 일관하여 그 추진력이 되고 지도권(헤게모니)을 갖는다는 점이다.

둘째로, 광범한 민중의 대중적인 ‘무장봉기’가 강대한 군사력과 경찰력을 갖는 차르전제를 타도하고 혁명을 승리로 이끄는 기본적 결정적인 수단이 되며, 이 무장봉기에 의해 쟁취된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권력을 통해 혁명의 획득물을 확보하여 지주와 부르주아지 측으로부터 반혁명을 저지하고, 당이 내건 최소한의 강령(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과제)을 실현하기 위한 ‘임시 혁명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셋째로, 당면의 부르주아 혁명은 계속되는 다음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전화’한다는 점이다. 부르주아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의 전제조건이며, 양자는 특히 ‘하나의 사슬에 두 개의 고리’라는 관계에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위한 조건은 특히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 그 외의 도시, 농촌의 반프롤레타리아트 대중과의 폭넓고 강고한 동맹을 결성하는 것이다.

넷째로, 어느 혁명의 경우에도 단일한 중앙지도부 아래에서 중앙집권적인 조직체제를 수립한 프롤레타리아트 전위당 볼세비키 당이 그 지도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레닌의 농업이론 p.83~84)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결코 무원칙적인 농민과의 동맹이 아니라 농민과 그 밖의 다른 계급과의 동맹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정당에 의해 지도되는 확고한 ‘원칙’아래 자본주의 그 자체를 폐기하는 방향으로, 즉 노동자계급의 단일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권력을 쟁취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또한 해당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 있어 노동계급이 다른 계급, 특히나 당시에는 농민과의 동맹을 맺는 것은 그 자체로는 사회주의를 달성하는 길은 아니지만, 이를 앞당길 수 있는 전제가 된다는 점은 명심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레닌의 주장은 결코 레닌이 자신의 이론을 정립시키는 것으로만 목적으로 하여 선전/선동한 것은 아니었다. 맑스와 엥겔스도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레닌에게도 이러한 자신의 주장은 무수히 많은 사상투쟁의 하나였던 것이다. 다음의 내용은 이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특별히 지적해 둘 점은, 레닌이 전개한 이들 주장은 사실상 혁명의 승리를 두려워하는 러시아 멘세비키와 서유럽의 사회민주당 지도부, 제 2인터내셔널을 지배하고 있던 기회주의자들에서 나온 잘못된 견해를 분쇄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을 저해하고 분산시키려 하는 그들의 매우 위험한 영향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부르주아혁명의 지도권을 부르주아지에게서 찾고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보조자’로서 그것에 종속시키며, 농민이 지니는 혁명성을 모조리 부정했다. 즉 사회주의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으로서만 수행해야 한다고 함으로써, 동맹군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레닌의 농업이론 p.84)

또한 레닌은 마찬가지로 농민의 혁명적인 역할을 부정하고 ‘차르를 타도하여 노동자적 정부를’이라는 주장을 하여 부르주아혁명을 건너뛰어, 프롤레타리아트만으로 수행되는 혁명을 주장하여 프롤레타리아트를 고립시키고, 결국 혁명의 유산을 꾀하고자 한 트로츠키의 잘못된 ‘영구혁명론’과 가차없는 투쟁을 하였다.(레닌의 농업이론 p.85)


이러한 당시의 정황에 있어 지나친 양 편향을 경계하며 레닌의 자신의 주장을 사상투쟁을 수행하며 견결하게 가져갔던 것이다.


4. 남한농업에 대한 간단한 고찰


지금까지 농업에 대해 엥겔스의 글과 레닌의 농업이론에 대해 분석을 한 글을 바탕으로 맑스주의에서 농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19세기 말엽, 20세기 초에 농업을 어떻게 바라보고 실제 투쟁했었는지가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남한’이라는 곳에서 농업을 어떻게 바라보고 투쟁을 만들어야 하는 점일 것이다.


앞서 잠시 언급을 했지만 현재 남한에서는 농민이 약 400여 만명 정도 되는데, 그 인적 구성에 있어 소농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엥겔스의 분석을 기초로 하자면 중농/대농도 많으나 대토지 소유자는 매우 적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농산물에 대한 개방의 압력은 더욱 가시화 되고 있고, 실제 쌀개방은 이제 초읽기에 들어가기도 했다. 따라서 지난 2월 국회 앞에서의 농민들의 투쟁은 이에 대한 불만이었음은 분명하다.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요구는 그들의 몰락을 반대하는 처절한 요구였던 셈이다.


여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것일까? 그들의 요구대로 개방화를 막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이는 엥겔스가 말했듯 그들의 사형집행을 유예해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에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농민들에게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소농을 포함한 중농/대농들의 몰락은 불가피하다는 점과 그렇기에 가장 혁명적일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를 폐기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노동자계급과 함께 해야 함을 선전/선동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현재 구체적으로 어떻게 싸워야 한다는 ‘전술’적인 문제까지 제시해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농업을 바라보는데 있어 명확한 관점은 제시해 줄 수 있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점은 실천적인 투쟁의 과제뿐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더욱더 분투해야 할 것이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장면 하나.


 뜨거운 여름. 논에 들어간 학생과 아저씨가 함께 웃으면서 피를 뽑고 있다. 피 대신 모를 잘 못 뽑아도, 농부 아저씨는 사람 좋게 웃으시며 친절하게 피와 모가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잘 뽑는지를 다시 한번 보여주신다. 그렇게 기분 좋게 웃으면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아주머니가 머리에 막걸리와 식사거리를 이고서는 천천히 걸어오신다. 그리고 일한 뒤에 먹는 꿀맛 같은 새참 맛에 일하는 보람은 점점 더 커져가고, 농민 분들과 끈끈한 연대의 정을 느낀다.


 보통 사람들이 꿈꾸는 전형적인 환상에서 깨면, 여름 태양보다 더 뜨겁고 열받는 농민과 농촌의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새벽부터 저녁때까지 힘들여서 일해야 함은 물론이요, 일하면서 계속 불거져 나오는 문제는 나를 계속 당혹스럽게 했다.


 첫 번째, 권위와 통제.

 위에 잠깐 언급했듯이, 학생들은 농민들과 함께 일할 수 있도록 일찍 준비를 해 새벽부터, 저녁 6시 정도까지 계속 일 ‘해야 한다’. ‘농활’ 이기에 물론 농민과 학생 사이에 연대감을 키우는데 같이 일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는 하겠지만, 이는 농민들이 학생들을 단순히 일 도와주러 온 것으로만 생각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학생을 일꾼. 더 심하게는 머슴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어 재떨이 좀 찾아오라는 심부름을 시킬 도였다. 그들의 권위주의적 태도는 학생들의 생활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는데, 학생들은 농대장의 명에 따라 숙소에서도 쉽게 드러눕지 못하고, 벽에 등을 대지도 못한다. 이유는 단 하나. 숙소에 무심코 들린 농민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드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오버액션인 것 같지만, 실제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부장으로 군림해온 남성 농민은 자신보다 어린 학생들이 예의 없이 버릇없이 아무데서나 함부로 누워있기를 원하지 않았고, 학생들은 거기에 맞춰야 했다. 물론 공동체 생활과 연대 단위에서의 행동의 통일은 필요한 것이지만, 농활에서는 그 정도가 심하다.

 그들이 권위주의적 태도는 밤에 술 마실 때 많이 마시는 걸로, 남성성을 과시하고, 그걸 남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그 절정으로 치 닿는다. 권위주의적 태도는 농촌 사회의 가부장성과 떼어놓고 말할 수 없는데, 농사일을 잘 도울 수 있는 아들을 선호하는 남아선호 사상은 아직도 농촌 사회에서는 뚜렷이 남아, 그들의 가부장성을 여지없이 폭로했다. 주방 일은 여학생에게만 시키려고 한다든지, “여자 애들을 가르쳐서 뭐해?” 와 같은 여성의 능력을 한정짓는 말은 실제로, 농민들과의 연대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방해와 장애물이 되고 만다. 물론 이는 비단 농민의 문제만은 아니다. 얼마 전에 택시 노동자 집회에서도 있었던 일과 함께 연관지어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두 번째, 누구와 연대하는 것인가.

 또한, 학생들이 농사일을 하는 데 있어서 그 일의 배분은 마을 청년 회장이 하는데, 주로 마을 청년회의 핵심 멤버들을 위주로 나눈다. 따라서, 학생들이 항상 일을 하게 되는 집은 몇몇 집으로 한정되어 있다. 또한 학생들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는 이들은 학생들의 도움을 받을 만큼 사정이 열악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작업량이 만다는 것. 즉 그만큼 부농이라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빈농들의 경우는 학생들이 일을 도와줄 필요가 없이 일거리가 적은 것이 사실이며, 학생들이 할 만한 일거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을 청년회와 잘 연관이 되지 않는다. 농민들은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구분된다. 하지만, 소자영농과 같은 경우에 높은 토지 가격이 문제시 되고, 비료, 농기구를 확보하기 어려워진다. 농업 생산력이 증대될수록 소자영농의 경우, 경쟁력이 뒤떨어져, 몰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주의 선전에 귀 기울이게 되는데, 이들의 몸에 배여 있는 소유욕 때문에 토지 소유를 사회 전체로 돌려야 한다는 사회주의자들을 적으로 보게 된다. 소자영농이 이러할 진대, 학생들이 많은 경우 연대하게 되는 부농의 경우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여기서 우리는 누구와 어떻게 연대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농민의 계급 의식을 상승시키고, 소작농의 경우, 자신들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한다. 맑스가 말했듯이, 단순히 이는 농민들이 미래의 프롤레타리아로 계급 운동에 가담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농민인 채로 사회주의자에 편이 될 수 있는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적 변혁은 더욱더 빨라지고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서 지난 1월 두차례 전농대회에 결합하면서 농민 계급이 가진 한계와 그들을 어떻게 혁명의 전선 앞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지 고민해 보았다.


1. 전농대회와 농민의 문제점


1) 농민들은 모두 애국자?

 전농대회에서 가장 많이 외쳤던 구호는 “민족 농업 사수하자”이다. 대치상태에 있는 전경들에게 그와 함께 꼭 덧붙인 말은 “너희는 어느 나라 쌀 먹냐? 너희는 밥도 안먹냐?”이다. 농업 자체가 수천만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한민족이 직접 행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 일이라 그런지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자부심을 갖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반대하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에 대응되게 서 있는 칠레 농민, 칠레 농민들 입장에선 그들의 민족 농업을 사수하는 한편 농산품을 자유롭게 수출까지 한 것이니 정말 잘 된 것 아닌가? 라고 물었을 때 한국 농민들은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위와 같이 민족의 문제로만 치부할 경우 너무나도 많이 얘기되고 있는 민족주의의 한계에 부딪쳐 근본적인 요인을 간과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데올로기로 전농대회 내내 진행되는데 있어서 좌파 학생진영 쪽에서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것은 전국에서 힘들게 올라온 농민들에게 할 말이 아니기 때문인가? 아님 그 근본적인 요인은 알고 있지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가려진 것이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신자유주의에 폭풍 속에 노동자, 농민, 빈민 모두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 민중주의 좌파 진영에서는 몰계급적인 사고로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는 것이다.


2) 멈추시오!!!!

 전농대회가 계속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이유는 fta 국회 비준안 통과를 막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투쟁은 단지 누군가가 대신 해줄 수도 해줘서는 안되는 것이다. 농민들의 투쟁은 마치 국회의원들이 우리들의 의견을 꼭 우리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농성하는 것과 같다. 비준안 통과에 찬성한 국회의원들의 이름을 부르며 매국노라고 외치는 것은 단지 나라의 근본이 되는 농업을 팔아먹었다는 관점뿐만 아니라 왜 우리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냐고 분노하는 것과 같고, 이 역시 근본적인 문제에 다가가지 못했다. 전국 각지에서 고생해가며 서울까지 올라와 추위에 떨면서 투쟁한 결과물이 고작 농촌 출신 의원들이 비준을  막아주었다는 것에 과연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청원식 투쟁은 농민이 주체로 서지 못한 것이며, 자신의 계급이 직면한 상황에 대해 투덜거리며 징징대는 것으로 그칠 수 밖에 없다.


3) 나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농민가와 앞에서 투쟁을 선동하시는 마이크 잡고 계시는 분의 말이 집회 내내 거슬렸다.  지난 회의 때에도 지적했던 것이지만 농민가에 나오는 “♪~~형제들 있다.♬"라는 가사가 바로 그것인데, 처음에는 문제를 인식했다가도 겨우 외워서 노래를 부를 때면 그대로 따라 부르게 되어 알게 모르게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앞에서 선동하시는 분이 경찰 쪽에 마이크 잡고 있는 사람(명칭이 뭔지ㅡㅡa)에게 거기 숨어서 나불대지 말고 사나이 대 사나이로 맞짱 한번 뜨자고 말하자, 사람들은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집회에 참가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환호성을 지르며 말이다. 위의 두 가지 사례는 농민이 위에서도 논했듯이, 농촌 사회의 특성상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농민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며, 아무도 그 문화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문제의식을 느끼더라도 쉽게 그러한 논의들이 오가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성 억압적인 구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농민들은 단순히, 브나로드 운동을 펼쳐나가야 할 계몽의 대상이 아니다. 많은 농민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과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도태되고, 몰락한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절실하게 체감하고 있으나, 정작 자신들은 그것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위의 전농 대회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 못해서, 이상한 협약을 체결해서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당장의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한 칠레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는 투표를 하고, 국회 앞에서 온 힘을 다해서 투쟁을 하지만 그 한계만큼 농민들은 쉽게 지치고 만다. 그들에게 닥쳐온 문제는 사회주의자, 노동자들과 함께 반자본주의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해결이 가능함을, 명확히 인식시키고 함께 투쟁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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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초) 귀족노동자(노대회 프로그램 중)

 

귀족 노동자 있긴 있는 거야?


고난 

  귀족! 노동자!  귀족노동자? 


· 귀족 : 혈통·문벌·재산·공적 등에 의하여 일반 민중과는 다른 특별한 정치적·법제적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 또는 그 집단.

· 노동자 :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노동력을 팔아 자본가에게 임금을 받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 또는 그 집단

 귀족노동자. 중세 봉건시대의 최상위층과 자본주의로 이행하며 발생한 계급을 나타내는 두 단어가 나란히 쓰이는 아이러니한 용어. 이는 ‘노동자 중에 귀족’이라는 의미로 철밥통을 ‘약속받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된다. 자본과 정권은 이러한 귀족노동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며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치고 있다.


 투쟁과 “밥통”  


 자본가들의 이윤 창출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자본의 나팔수인 부르주아 언론에서는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임금인상 투쟁을 당연히 나쁘게 그린다. 특히, 고액연봉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LG 칼텍스정유나 항공사 노동자들의 경우는 나라경제는 생각도 안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에 빠진 존재로 묘사했다. 항공업계가 파업에 돌입해 휴가철 해외 여행객 뿐만 아니라 반도체나 휴대 전화 등의 효자 수출품의 발목이 잡힐 뿐만 아니라, 이 때문에 수출로 먹고 사는 ‘대한민국호’를 침몰시키려 한다는 등의 기사를 내보냈다.1) 내수침체와 유가 상승, 물가상승이 지속되고 청년 실업이 50만에 육박, 실업률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상황에서 “나라가 잘 돼야 내가 잘되고, 내가 잘 돼야 나라가 잘 된다.” 라는 것만큼 쉽게 수긍되는 구호로 여론을 공략하고 있다. 다음의 기사를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남시 분당에 사는 정유미(여ㆍ24) 씨는 "일반 직장인의 경우 적은 임금과 수준 낮은 사원복지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불황을 이겨내기 위해 회사와 함께 참고 견디는 것"이라며 "업무의 특수성을 이용해 시민과 국가를 볼모로 자신의 밥그릇 싸움에 치중하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성토했다. 네이버 자유게시판에 글을 올린 `독수리`라는 필명의 네티즌은 "대형 비행기를 모는 기장의 경우 최고 1억7000만원이나 받는 것을 안 뒤 허탈했다"며 "해마다 성수기를 이용해 파업에 돌입하는 심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전했다. <헤럴드경제 2004.07.29 “남부러운 고액연봉받으며 툭하면 파업·파업” >

 이처럼 대국민에 대한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세는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비판적인 여론공격으로 노조가 심각하게 고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현대자동차노조는 닷새 만에 파업을 정리했다. 또,  LG 칼텍스 노조는 고임금공세로 인해 여론이 악화된 상태에서 ‘김선일씨 참수 재현’으로 구설수에 오르더니 흐지부지 파업을 종결짓고 말았다. 부르주아 언론은 ‘올해만 같은 협상’이 내년에도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


 하지만 귀족노동자 이데올로기는 단지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은 더 많은 초과 착취를 하기 위해 비정규직을 만들어 놓고 그들과 정규직 사이를 이간질함으로써 이득을 챙기고 있다. 이 때에도 귀족노동자 이데올로기는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비정규직은 정규직 임금의 약 60~70% 정도만 받고, 노동3권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자본의 논리에 휘말리기 쉽다. 정규직 노동자가 자신들의 몫까지 가져간다는 것이나, 강성노조 덕분에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돈 많이 벌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또한 몇몇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을 자신의 밥통을 지켜주는 안전장치로 사고하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노동자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적대감을 느끼고 있으며, 정규직은 비정규직 노조 설립이나, 임금 협상 투쟁에 그들과 함께 하지 않고 방관하는 경우가 많다. 그 예로, 현대자동차 하청 노조에서는 원청 노조와 맞춰서 임금 협상 투쟁을 진행하려고 했으나, 원청노조가 투쟁을 먼저 끝내버리고 만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의 문제를 노동자 계급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자본은 노동계급의 분열과 전반적인 노동유연화를 얻어간다. 자본은 정규직에게 경기 침체를 구실로 삼아 이들에 대한 노동 조건의 하락과 양보를 강요하기 위한 술책을 짜내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2002년 겨울을 생각해본다. 노무현은 비정규직의 이러한 열악한 상황을 ‘가엾게’ 여겼는지, 표를 구걸하기 위해서였는지 알 수 없지만, 2002년 대선 후보 정책토론회에서 이들의 처우 개선을 약속했다. 하지만, 집권 후 열사 정국에서 그는 이제 더 이상 죽음으로 노동자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때는 지났고, 정규직 노동자는 자기 배만 불리지 말고 갖고 있는 ‘밥통’을 비정규직에게 나눠주자고 말했다. 뭐 뀐 놈이 성낸다더니, 애초에 비정규직을 만든 것은 누구이며, 갈라놓고 분열 책동을 한 것은 누구이며, 노동자들을 일상적으로 착취해온 것은 누구인데 이렇게 기만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인가.

  정규직 노동자는 왜 그리도 많은 임금을 받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님 실제로 그들이 ‘귀족’ 이라는 이름을 붙여질 만큼 쉽게 돈벌고 있다고 여겨지는가? 한때 인기 신랑감 후보에도 올랐던 현대자동차 생산직 노동자의 연봉은 6000만원이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이 정도의 돈을 받으려면 20년 근속자가 12시간 맞교대근무로 365일 중에 380여 일을 일해야 한다!!


“당신의 굳센 팔이 원한다면 모든 수레바퀴는 멈출 것이다.”


 왜곡된 실상을 깨닫고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세의 본질을 알아차렸다면 이제 우리는 다음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왜 이러한 파업이 일어나는 것일까? 고임금은 아니더라도 정규직은 비정규직에 비해 먹고 살만하잖아? 라는 질문에 단순히 돈을 더 받기 위해서라고 답하기는 뭔가 부족하다. 레닌이 말하고 있듯이 이는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자본가들에 대항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야기하기 때문이며, 생산이 대규모일 때 투쟁은 필연적으로 파업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이 가진 생산수단에 노동력을 적용하여 가치를 생산한다. 그러나 자본가는 그들이 가족과 함께 겨우 생존할 만큼의 임금만을 지불한다. 반면 노동자들이 이것을 초과하여 생산하는 모든 것은 이윤으로 자본가의 주머니에 들어간다. 따라서 자본가와 노동자가 임금 문제를 가지고 싸우는 것은 당연한 문제가 된다. 그런데 개별 노동자는 자본가 앞에서 절대적으로 무력하게 되므로 노동자들이 함께 싸워나가야 한다.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자본가들과 거래해야 한다면, 자본가들의 이윤을 얻도록 쉬지 않고 노예처럼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소자본가가가 대자본가들에 의해 더욱 더 몰락할수록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저항할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모든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지위가 절망적이지 않으며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며, 자본가 계급 전체 그리고 노동자 계급 전체를 생각하도록 가르친다.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단결했을 때에만 자본가들에 대항해 투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

 즉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는 ‘귀족’ 이 아니라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자일 뿐이며, 개별적으로 활동했으면 그들의 노예가 될 뻔했으나 공동행동을 통해서만이 겨우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귀족 노동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노동자란 자본가들에 의해 착취당하는 계급이기 때문이다.


 “나는 재빨리 그 녀석의 목을 조였지.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그 망할 녀석에겐 목이 없더란 말이야.” 3)


우리는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하는가?

                           - 파견법 개악 저지 총파업에 힘차게 결합하자!!


최바울(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우리는 앞에서의 발제를 통해 가당찮은 ‘귀족 노동자’ 공세를 통해 자본과 정권이 획책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살펴보았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자본과 정권은 ‘귀족 노동자’ 이데올로기를 통해 노동자 계급을 완전하게 분열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개별화된 원자로 해체시키려 하였다. 노동자 계급은 계급으로서 단결하지 않으면 무력하고 연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들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최근 들어 왜 그토록 많은 돈과 열정을 쏟아 부으면서까지 ‘귀족 노동자’ 이데올로기를 유포시키는 데 열을 올렸는가? 역사가 수차례 증명했듯이 본래 이데올로기 공세는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기 이전, 사전 정지(整地) 작업의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귀족 노동자’ 이데올로기의 유포는 지난 구조조정 투쟁의 승리 이후 자신감을 획득한 자본가 계급이 무언가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지표이다. 우리는 이 새로운 공격이 무엇으로 드러났는지 아주 똑똑히 알고 있는 바, 그것은 다름 아닌 파견법 개악4)이다.

  지난한 수작을 통해 노동 운동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 자본과 정권은, 결국 파견법 개악이라는 무시무시한 카드를 빼어들었다. 파견법 개악이 현실화 된다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그들이 주장했던 ‘귀족 노동자’들 역시도 노예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언제나 해고할 수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넘쳐나는데, 툭하면 머리띠 두르고 데모질이나 해대는 정규직 노동자들을 굳이 고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조직 노동자들이 피로써 쟁취해 온 제반 권리 모두가 유실될 것임을 의미한다. 노무현 정권이 지겹도록 지껄여댔던 ‘선진적 노사관계’란 결국 모든 노동자들을 자유롭게 착취할 수 있는 ‘선진적 착취질서’였던 것이다.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노총은 어떻게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가?


  정권과 자본은 비정규법 개악안을 관철시키는 데 있어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 동안 끊임없이 눈웃음을 보내왔던 민주노총의 ‘국민과 함께 하는’ 지도부는 물론이고 어용 한국노총조차 파견법 개악에 있어서는 협상의 파트너가 아니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자본은 본래 자신이 필요할 때에만 민주주의, 대화, 타협 등을 필요로 할 뿐이다. 자신이 아쉬운 것이 하나도 없을 때에는, 고상한 척 자신을 꾸며왔던 갖가지 민주주의의 장식품들을 집어 치우고 자신의 본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들의 본모습은 착취욕으로 가득 찬 흡혈귀에 다름 아닌 바, 노동자 계급이 만만히 보이자 아무런 ‘사전 협의’도 없이 파견법 개악안을 단독 입법 예고해 버린 것이다.

  어쨌든 이 같은 상황은 어용 한국노총은 물론이고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노총 지도부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니, 우리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가들의 황금률이 무엇이던가.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다’ 아니던가. 함께 이야기를 나눠서 자본의 경쟁력도 키우고 노동자의 권익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어야지, 이렇게 일방적으로(!) 파견법을 개악해 버리다니, 신의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나쁜 놈들 같으니라구!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노력해왔는가! ‘귀족 노동자’라 하길래 사회 공헌 기금도 만들어왔다는 점을 잊어버린 것인가?!”

  이것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2004년 임단투를 살펴본다면, 특히 이수호 위원장이 지금과 같은 짧은 스포츠 머리를 하게 된 과정을 살펴본다면 말이다. 민주노총이 정부와 자본에게 끊임없이 요구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직권중재5) 남발마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았다. “정부가 직권중재를 때려 버리면 조합원들의 반발도 거세지고 사태를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민주노총의 투쟁은 우리 지도부가 적정한 선에서 마무리할 테니 정부는 괜히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 우리를 대등한 협상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함께 대화로 풀자.”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건 결코 픽션이 아니다. 실제로 정부의 몇 차례 직권중재와 이에 따른 이수호 위원장의 삭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부르주아 언론조차 향후 노사정위 재편을 앞둔 밀고 당기기로 평가하고 있다. 정부는 민주노총을 압박하면서 지도부가 하루 빨리 조합원에 대한 확실한 ‘지도력’(?)을 확보하기를 요구하며, 민주노총 지도부는 지도부대로 투쟁 분위기를 형성하면서 자신의 값어치를 높이려 한다는 것이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자. 본래는 9월 노사정위 참가를 두고 저울질까지 했던 민주노총 지도부는, 현재 정권의 ‘일방적인’ 파견법 개악에 맞닥뜨리게 되자 “더 이상 사회적 대화는 없다”며 총파업 계획을 입안해 놓고 있다. 지난 10월 25일부터 11월 6일까지 진행된 총파업 투표를 바탕으로 11월 14일 노동자대회 이후 전면적인 총파업을 단행한다는 것이다. 현재 총파업 찬반 투표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민주노총 조합비 납부자 59만 명 중 30만 명 이상이 참여해서 가결 요건을 갖췄으며, 연일 대공장에서 파업 가결 소식이 전해 들려오고 있다. 파견법 개악안이 비정규직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들을 향해서도 겨누어진 칼이라는 사실이 조합원 대중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면서 총파업을 위한 투쟁 동력의 형성이 현실화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냥 벅차오르는 감정만을 가지고 있을 일은 아니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현재 민주노총의 “국민과 함께 하는” 지도부가 정권의 ‘일방적인’ 파견법 개악에 극렬하게 반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것이 ‘쌍방향적’이 될 때에는 거꾸로 충분히 협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때문이다. 또한 민주노총지도부는 파업 찬반 투표 이후 ‘파견법 개악안이 국회 상임위에 상정될 시’ 총파업에 돌입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국회 상임위 상정이 연기될 경우 총파업 역시 흐지부지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실제로 파견법 개악 저지 총파업이 공무원 노조의 총파업과 실질적으로 결합될 가능성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자본과 정권은 여권 일각을 통해 파견법 개정 연기론을 흘리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여러 조건들과 ‘사회적 합의주의’의 질긴 역사를 따져 본다면, 되풀이 하지만 마냥 설레어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투쟁해 나가야 하는가?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와 함께 하자!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본과 정권의 가공할 만한 도발에 맞서,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 비타협적인 투쟁을 전개해 나가는 것에 있다. 노동자 계급 자체를 영구히 해체하려는 저들의 시도에 정규직-비정규직, 여성-남성, 이주-내국인, 장애-비장애 노동자의 완전한 단결로 맞서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파견법의 개악을 저지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파견법 자체를 아예 철폐하는 데로까지 전진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특히 현재의 민주노총 지도부와 같이 투쟁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기풍이 계급 내부에 만연한 상황에서 비타협적 투쟁은 누구에 의해서 선도될 것인가?

  여기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이하 전노투)라는 단체를 소개한다. 위에서 밝혔듯이 현재의 민주노총 지도부는 정권의 ‘일방적’ 공격이 시작되기 이전, 9월 노사정위 참가 여부를 두고 고심하고 있었다. 여러 곳에서 이야기 되었지만, 사실 노동자 계급에게 노사정위는 악몽과도 같은 이름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노동자의 생존권과 몇몇 노동관료들의 지위를 맞바꾸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민주노총이 노사정위 복귀를 생각한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노동자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전노투는 지난 7월 24일 ‘민주노조 운동 위기! 노사정담합 분쇄를 위한 전국노동자 토론회’ 이후 “사회적 합의주의·노사정답합 분쇄!”를 기치로 건설되었다. 전노투는 자신의 제안서에서 “경기침체를 노동자의 책임으로 돌리며 사회적 합의를 통해 민주노조 운동을 포섭하려는 자본과 정권의 전략이 ‘사회적 합의주의’로 등장”하고 있는 데 반해, 현재의 “민주노총 지도부의 기본 입장은 사회적 교섭 전략”에 머무르고 있기에 “전노투는 이름과 형식만 바뀐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적 합의주의에 반대하는 전국의 동지들과 함께 현장으로부터 반격을 조직”해 나갈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분명 의미있는 흐름이다. 전노투의 건설은, 비록 현저히 퇴조하였다 하더라도 여전히 남한 노동운동에 건강한 전통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전노투는 현재 현장 조직, 정치 신문, 학생 단체 등을 망라하여 30여 개에 가까운 단체가 결합하고 있으며, 현장을 기반으로 한 각 지역에서 ‘사회적 합의주의 분쇄!’를 힘차게 선동하고 있다. 또한 전노투는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2004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 때 ‘사회적 합의주의 분쇄! 총파업 투쟁! 열사정신 계승!’의 기치로 독자 집회를 기획하고 있다.

  전노투 활동의 성패는 곧 남한 민주노조 운동이 이대로 체제 내화되어 몰락해 가는가, 아니면 이전의 계급적 연대성, 전투성을 복원하고 노동해방 사회 건설의 주된 동력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6) 현재 노동해방학생연대는 전노투의 일원으로서 이 투쟁을 더욱 계급적으로 밀어올리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아울러 ‘비정규직 철폐! 노동탄압 분쇄! 사회적합의주의 분쇄!’라는 멋들어진 기치를 휘날리고 있는 “다시 싸움을” 역시 전노투와 함께 투쟁해 나갈 것을 제안 드리는 바이다.


  투쟁 없이 쟁취 없다! 투쟁으로 쟁취하자!


  혁명 시인 김남주는 자신의 시 어디에선가 “가진 놈들은 자신의 손아귀에 쥔 것을 놓지 않는다 / 배때기에 칼이 들어가기 전에는”이라고 쓴 적이 있다. 백 번 천 번 옳은 말이다. 노동자를 더욱 착취함으로써만 자신의 이윤을 증식할 수 있는 자본가들과 ‘대화와 타협’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향상시켜 나가겠다는 생각은 봄날 개꿈에 불과하다. 노동자 계급은 자본에 맞서 비타협적으로 투쟁할 때만이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칼은 자본가 놈들이 빼어들었다. 노동자 계급은 가만히 앉아서 자본이 자신의 몸뚱어리를 마음껏 난도질 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칼에는 총으로! 총에는 대포로!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로 집결된 전국의 노동자 동지들과 함께 파견법 개악 저지 총파업과 공무원 노조 총파업을 적극 엄호하여 노동해방의 빛나는 전망을 밝혀 나가자!!


1) 세계일보 2004.07.30 “귀족노조들 해도 너무해”


2) 레닌 「파업에 관하여」1899. 전진출판사 레닌저작집 1권


3) 로자룩셈부르크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96p 우스펜스키의 소설 재인용.


4) 파견법 개악안의 내용을 살펴보면, 무엇보다도 파견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고 기존에는 몇 개의 업종에서만 가능하던 파견을 5개 업종을 제외한 모든 업종에서 가능하게 한 것이 눈에 띈다. 한 마디로, 지금보다도 비정규직을 훨씬 더 늘려보겠다는 수작이다. 그래놓고도 이 법안과 함께 이른바 ‘비정규직 보호법안’이라는 것을 내놓았으니, 참으로 이들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뻔뻔함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하겠다. 저들의 어이없는 ‘보호’ 놀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꾸해 줄 필요가 있다 : “지랄하고 자빠졌네.”


5) 직권중재란, 노조가 파업을 하게 되면 정부가 개입하여 파업을 중단시키고 노사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을 말한다. 직권중재를 내리면 그 기간에는 어떠한 파업도 불법이 되어 버린다. 자본가나 정권이나 그놈이 그놈일진대, 도대체 무엇을 조율하고 있겠는가? 철폐되어야 할 악법 가운데 하나이다.


6) 여기에 두 가지만 덧붙이자. 첫째, 이를 위해서 전노투는 즉자적인 ‘전투성’을 넘어서야 한다. 전노투에 결합하는 모든 동지들은 노동조합 안에서의 활동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지향성을 명백히 하고 투쟁해 나가야 한다.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인 바, 분명한 정치적 목적 없이 행해지는 투쟁이란 언제나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투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 현 정세에서 ‘사회적 합의주의 분쇄!’는 몇몇 민주노총 지도부를 끌어내리는 것만을 뜻할 수는 없다. 현재 노동자들의 의식 역시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강고하게 포섭되어 있는 바, 이것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정규직 노동자들의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사회적 합의주의를 분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대중의 의식을 계급적으로 각성시켜야 하며, 이것은 노동해방 정치를 폭넓게 알려내는 것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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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년8월3일) 파병토론회

 

발제1. 이라크 전쟁에 대한 계급적 관점



이라크 전쟁에서 발견되는 각국 자본의 이익추구


 2003년 3월 20일. 미국의 침공으로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미 1년 하고도 반년이 더 지났지만, 아직도 이라크 민중들의 저항은 거세고, 미국 또한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발표한 상태이다. 더군다나 남한의 경우에는, 김선일씨 사건으로 인해서 반전여론이 급격히 파병찬성여론으로 돌아선 가운데 무수한 논쟁들이 있었다. 이전에는 ‘국익을 위해서 파병을 해야 한다’, ‘우리에게 돌아오는 국익은 없다. 파병을 반대해야한다’라는 논리였지만, 지금은 ‘김선일씨 사건이 발발했기에 우리는 공수부대라도 보내서 이라크놈들 싹 쓸어버려야 한다’는 주장과 ‘아니다. 김선일씨를 죽인 것은 파병을 강행한 정부이다.’라는 주장들이 있다.1)


 우선, 국익이라는 것에 대해서 논해보자. 국익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관점에서부터 필자는 굉장히 회의적인 시각에 있다. 이라크 파병을 해서 생기는 국익. 그것이 누구의 이익을 말하는 것인가? 과연 남한의 노동자민중들의 이익인가? 아니면 남한자본가들의 이익인가?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어 복구사업 몇 개 더 따내어서 사업을 한다면 과연 그 이익은 누구의 이익인가? 자본가들의 이익인가? 노동자들의 이익인가? 전쟁을 수행하면서 그 주체가 된 것은 분명 노동자계급이다.2) 하지만 그에 대한 떡고물은 모두 자본가들이 먹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알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 때문에 전쟁이 발발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 매파의 호전적 정책때문, 그리고 석유패권을 위한 싸움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허나 그것은 이 전쟁의 원인을 미국의 현 정권에만 전가시키고 있다. 과연 미국의 매파가 아니었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역사에 ‘만약’이란 것이 없기 때문에 필자로서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추론해 볼 수 있다. ‘만약’ 미국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되어 이윤율의 저하가 눈에 띄게 하락하고, 경기가 침체되었을 때 미국 자본가들은 전쟁을 획책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라크전쟁이 단지 미쳐 날뛰는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석유패권의 논리에 대해 말을 해보자. 필자는 이것 또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허나 석유패권의 논리는 어디서부터 도출되는가를 생각해보자. 단지 석유를 얻으려고 석유 하나만을 노리고 벌이는 전쟁인가? 중동지역 석유의 독점으로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본의 이윤증대이다. 미국은 자국 자본의 이윤증대를 위하여 자국의 노동자계급출신의 병사들을 파견하여 이라크 인민들을 살육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다른 국가들의 상황을 살펴보자. 영국은 찬성한 가운데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등은 반대를 하였다. 이 이유는 무엇인가? 영국의 블레어가 전쟁광이고, 시라크․푸틴등이 평화주의자라서 반대하였는가? 그러한 이유는 절대 아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이를 이해하려면 이들 국가들 간의 이라크 유전에 관한 세력분포를 알아야 한다. 우선 북부 루마이라 유전 개발권은 중국 러시아에 있었고, 러시아 루크오일, 이탈리아 에니, 프랑스 토털피나앨프등은 이라크와 석유 탐사 및 개발계약을 한 바 있는데, 여기에 미국과 영국은 배제되었다. 이들 반전진영 자본가들은 UN에 이라크에 대한 경제봉쇄를 완화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면서 그 이면으로 후세인과 석유지분권을 거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대해 미국과 영국은 전쟁을 통해 이라크에 친미정권을 세움으로써 중동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다지고자 하였다. 따라서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 등은 중동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가 침해당하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게 되었고, 반전진영을 형성하게 되었다. 모든 것은 자국 자본의 이해가 우선적이었다. 쉽게 말해, 자본가들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전쟁을 반대하는 것도 모두 이윤 동기라는 ‘황금 기준’에 따른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쟁은 필연적이다. 계속되는 자본의 이윤증대에 대한 욕구는 자국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파괴적 행위를 원한다. 이러한 파괴적 행위는 불황과 전쟁 등을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 자본주의는 전쟁을 통해서 새로운 투자지역을 찾아내고, 생산의 요소와 소비의 요소를 찾아낸다. 자본의 파괴적 본능은 오직 이윤을 바랄 뿐이며, 그 속에 살아가는 민중들의 생활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전쟁이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인해서 일어나는데 반해 우리는 자본주의를 타격하는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본의 공격적 모습으로 드러나는 전쟁과 현 시기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대해서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실로 취해야 할 행동은 바로 자본주의 체제 변혁이다. 체제를 바꾸지 않고서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은 근본적 문제해결이 되지 못한다.


노동자 계급중심의 운동


 자본주의 체제의 타격을 위한 설정에서 필자는 노동자계급 중심의 운동을 외치려 한다. 이 글에서 왜 노동자계급에 대한 중심성이 나오는지 의문이 갈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노동자 계급에 집중하는 것은 단지 노동자 계급이 받는 착취가 불쌍해서도 아니고, 그/녀들의 수가 많기 때문도 아니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 근본 체제가 바로 노동자계급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의 존재는 필수적이며, 그들의 노동에 의해 자본주의의 이윤증대가 가능해지는 법이다. 자본주의는 발전해 가면서 노동자계급을 착취/억압하지만,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집단적으로 노동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바로 이점이 다른 계층들과 다른 지점이다. 노동자계급은 탄생할 때부터 자본주의를 철폐할 칼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쯤 해서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운동을 펼쳐나가자고 하였을 때, 다른 여성, 장애인, 농민 등의 여러 소외 계층들은 어떻게 되냐고 물을 수도 있다. 물론 그들도 함께 나가야 한다. 우리는 민중에 대한 어떠한 형태이든지 간에 모든 억압을 철폐하기 위해 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치의 사고에 있어서는 자본주의 철폐의 가장 근본적인 대립지점인 노동자계급의 정치를 사고하자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정치를 승인하고 그것에 복무할 때, 자본주의 철폐가 이루어 질 것이다.


 자본주의를 철폐하기 위해선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연대가 우선적이다. 이라크에도 노동자가 있고, 미국에도 노동자가 있으며, 한국에도 노동자가 있다. 노동자는 현재 세계 어느 나라에도 있으며, 그들은 그 사회의 모든 것을 생산하는 역동적인 계급이다. 하지만 지금 노동자들은 자신의 계급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노동자의 처지에 있지만, 자본가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자본가의 분할책동에 의해 노동자들은 하나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등에 갇혀 버려서 이라크 노동자와 한국 노동자를 따로 보고 있다. 그들의 처지는 자본주의에 핍박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로서 하나의 관점이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민족주의적 관점은 한국 노동자에게 자신은 이라크 노동자와 다르고, 자신은 억압/핍박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본의 광폭은 노동자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구조조정의 형태이든, 비정규직의 형태이든, 전쟁의 수행을 위한 파병의 형태이든- 노동자 계급을 끊임없이 연계시키며 착취하고 있다.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모두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노동자가 민족주의를 넘어 연대할 때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모든 착취의 쇠사슬을 끊고 나설 때 자본에 의한 전쟁은 종식될 것이다.


발제 2. 전쟁에 대한 각 세력의 입장



혼돈의 그 이름. 파병 반대를 외치다.


 매주 토요일마다 광화문에서 있는 파병 반대 집회에서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층위들이 결합하고 있는데, 각종 시민 단체 뿐 아니라, 학생운동 진영에서도 꾸준히 그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각각의 정치적 입장의 차이만큼이나, 그 개입방식도 확연히 구분되고, 내밀고 있는 유인물 등에서 그들이 외치고 있는 구호는 그들이 정치를 명확히 말해주고 있다. 다음에서 그들이 외치는 구호를 살펴보면서, 각각 어떠한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신자유주의 반대” “미국 반대”


 얼핏 신자유주의와 반미라는 것은 별로 연관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의외로 이 둘은 쉽게 연결지을 수 있다. 초국적 자본으로 인한 금융세계화가 이루어지고, 자본의 침탈이 자유로워지면서, 억압받고 있는 민중들의 삶은 파탄내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 그리고 그것을 주도 하고 있는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에 대해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이 만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 미국은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면서, 그 본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전쟁을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러한 금융 세계화와 맞물려, 군사 세계화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역시 대표세력인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위의 구호에 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싶다. 하나는 신자유주의 물결이 일기 전에 계속 있어왔던 국내 자본의 착취에 대해서다. 물론 현재의 상황에서 신자유주의를 얘기하는 것은 정세에 발 맞춰 나가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로, 금융세계화로는 현재의 상황을 오히려 완벽히 설명하지 못한다. 작은 중소 기업장 내에서, 노동자들은 왜 계속 초과 근무를 하며 수탈을 당해야 하는 것인지, 소규모 공장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은 온갖 사람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도 일을 해야만 하는지, 왜 자본가들은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바꿔서 고용하려고 하는지 등등 신자유주의로만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제대로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좀 더 명확히 말해야 한다. 자본의 노동 탄압과 착취는 오로지 자본주의에 반대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본주의에 대해 반대하고, 체제를 전복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노동자 계급 뿐이라는 것을 말해야 한다. 물론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민중들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노동자, 농민, 빈민, 여성 등등. 그 중에서도 노동자 계급을 말하는 것은 오로지 이 계급만이 자본주의를 온전히 분쇄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잉여 가치를 생산해 내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킨 것은 바로 노동자다. 하지만 그들이 산출한 잉여 가치는 자본가들이 가진다. 자본가는 그것을 더욱 많이 얻기 위해 노동자를 더욱 착취하고 탄압한다. 결국, 노동자 계급만이 자본주의를 분쇄함으로써, 신자유주의를 분쇄할 수 있고, 따라서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둘째, “이라크 다음은 한반도다”


 흔히, 민족 운동 진영에서 말하는 파병 반대의 논리는 얕게는 민족주의적 감상을 토대로, 깊게는 첫 번째에서 논했던, ‘미국’ 자본이 주도로 한 전쟁에 반대하자는 것인데, 후자는 앞에서 논의했으므로, 전자에 대해서 얘기하겠다. “다음은 한반도다”나 “조국은 아직도 식민지”라는 구호는 우선 대중에게 우리 민족의 안위를 걱정하게 하면서 즉각적인 분노를 이끌어내는데 효과적이다. 하지만,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명확한 분석을 거쳤다고 보기 힘들고, 미국에 질질 끌려가는 한국 정부의 종속적 태도에 대한 비판에 머물게 된다. 이는 전쟁이 왜 일어났고, 파병을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벗어나 한국은 왜 자주국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으로 흘러가 한미 동맹 파기 주장으로 나아간다. 당장 한미 동맹 파기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차치해 두더라도, 미국이 아닌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윤 증대를 위한 전쟁을 벌였을 때는 과연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궁금해진다. 



 셋째, 반전! 반 세계화!


 앞서의 발제에서 논의되었듯이 파병반대에 대해서,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실로 미약하다. 그런 면에서 한 좌파 단위에서 행하고 있는 꾸준한 신문 발행을 통해 대중에게 반전과 파병 반대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에 대한 평가 지점이 다양하다.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항상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음은 앞 발제에서도 충분히 얘기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부 좌파 단위에서는 이것을 기본 전제로 하여,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 곧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의 이윤 증대를 위한 전쟁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필연적이라는 것.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순서에 맞는 것이지, 전쟁을 반대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선후관계를 반대로 생각한 것이다. 쉽게 예를 들면, 상류에서 쓰레기와 함께 물이 내려오는데, 그 쓰레기를 하류에서 치우면서, 이렇게만 하면 물이 깨끗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하류로 흘러가는 물 속에서 쓰레기를 완벽히 다 치우는 것은 불가능하고, 완전히 물을 정화할 수 없다. 즉, 상류에서 물을 더럽히는 근본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거꾸로 된 논리로 대중들에게 반전과 파병 반대를 외치는 것은 자칫하면 단순히 선전주의 경향으로 흐를 수 있다. 물론, 김선일씨의 죽음 이후로 강경 대응해야 한다며, 파병에 찬성하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반대 논리를 펴나가고 대중들에게 그것을 알려나가는 것은 좋게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선전을 대시민 피케팅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실천적으로는 노동 계급 중심성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앞에서도 논의되었지만, 실제로 전쟁과 파병을 막기 위해서는 노동 계급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토대로, 실제로 이러한 자본주의 전쟁에 막기 위해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투쟁을 벌여나가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듯 하다.



 넷째, “노무현 정권 퇴진하라.”


 김선일 씨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도, ‘눈에는 눈’ 이라며, 강력 대응을 주장하는 여론에 힘입어, 파병을 강행하려는 노무현 정권 퇴진하라는 구호가 집회에서 자주 등장한다. 실천적으로, 노무현 정권 퇴진을 주장하는 것은 파병을 함으로써, 역시 이윤 증대를 꾀하는 국내 자본과 정권에 대해 전선을 확실히 긋는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 있는 구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구호가 다음과 같은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넘어가자. 이 구호에 대해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병 강행을 어떤 면에서, 노무현과 반대했다가 찬성으로 돌아선, 열우당 등 부르주아 정치인의 변덕의 소산으로 판단하고, 대통령이라는 특수한 자리가 노무현을 이렇게 변신시켰다고 여길 수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그들에게 반대하는 것에 머무는 한계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민노당이 집권하더라도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대통령이라는 특수한 자리’ 가 자본의 이윤 증대를 위한 전쟁과 파병에 반대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을 물러나게 하고 나서, 누구를 대통령 자리에 세우고, 조금씩 조금씩 한걸음씩 개혁을 해 나가면서,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 현재 사민주의 국가들이 복지 정책 등을 축소하고 있으며, 다시 오른쪽으로 선회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게 될 것이다.


 다섯째, world peace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명분없는 전쟁에 의해서, 목숨을 잃는 이라크 민중과 전장으로 나가는 ‘우리의 젊은이들’을 말하고, 무고한 희생을 감행하지 말아야 하며, 모든 폭력과 전쟁에 반대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존재한다. 물론, 폭력과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들의 파병 반대 운동은 여기서 그친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이고, 파병이기에 반대해야 하고, 누구를 위한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논의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단위의 파병 반대 운동은 파병하지 말 것을 정부에 강력히 호소하고, 부탁하는 시민운동 양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매일 매일 전쟁같은 하루를 보내는 노동자들과 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구조 속에서 인권과 평화를 외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각각의 학생 운동 단위에서 외치는 정치적 구호에 드러나 있는 각 단위의 파병 반대 운동의 한계는 드러났다. 계급적 학생 운동을 고민하는 자들은 오로지 다음과 같은 구호를 외치며, 실천적으로 개입해 나가야 한다. 우리가 외쳐야할 구호는 “ 노동자 계급 중심에서 파병을 반대한다” 이며, 평화주의, 민족주의, 반미 투쟁으로서는 절대 파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발제 3. 파병철회 운동을 위한 실천적 제안



반전운동의 상황과 노동자계급의 상태


  전쟁은 몇몇 정신 나간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가지는 모순에 의해 발생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외치는 전쟁반대는 단순하게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의 외침과 같지 않다. 반전운동이 전쟁의 원인인 자본주의에 대한 철폐 투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반전운동과 자본주의 철폐 투쟁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반전운동의 전면에 나서거나,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지는 위치와 힘을 인정하는 세력이 반전운동을 주도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노동자계급은 반전운동에 이렇다할 관심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현재 반전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확대를 요구하는 시민운동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이다. 그들에게 자본주의 철폐는 불가능하거나 먼 미래의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전운동은 자본주의를 철폐하기 위한 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인 저항을 진행하는 것에 머물고 있다.

  계속되는 정권과 자본의 공세 속에서 노동자계급은 힘겨운 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그/녀들은 노동법에 보장된 기본적인 권리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이 반전운동의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의식적 각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현장에서 부딪히는 사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더욱 큰 원인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이 무조건 반전운동에 결합하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몽상일 뿐이다. 노동자계급에게 파병철회를 위해 거리로 나서자는 말은 현장에서의 생존권적 요구를 포기하라는 말과 다름없다. 반전운동과 현장투쟁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선택은 현장투쟁이다. 아니 현장투쟁마저 제대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그/녀들의 선택은 교섭을 통한 실리 획득이다.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파병철회를 주장하자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기반한 반전운동을 펼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에게 전쟁과 자본주의가 가지는 연관에 대해 설명하고 왜 그/녀들이 반전운동에 나서는지를 알리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결합이 없는 상황에서 반전운동을 계급적인 시각으로 조직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현장에서 진행하는 투쟁에 직접 결합하면서 반전운동을 선동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는 반전운동은 거리에서의 촛불시위로 한정되고 있을 뿐, 현장으로 뛰어들지는 못하고 있다. 현장에서의 적극적인 선동을 통해 현장투쟁과 반전운동이 결합될 때 비로소 노동자계급은 반전운동의 전면에 나설 수 있다. 그리고 평화주의와 민족주의로 경도되고 있는 반전운동이 진정한 의미의 자본주의 철폐투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대학에서 파병철회를 외치려는 이들에게 노동자계급에 대한 직접적인 선동을 요구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당면한 임무는 학생들에게 전쟁의 의미를 설명하고 이에 대한 저항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당연하게 대학에서 반전을 외치는 일은 노동자계급 중심성을 바탕으로 진행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에 있음을 이야기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과 함께 자본주의를 끝내는 투쟁을 진행해야 한다고 외쳐야 한다. 전쟁은 자본주의가 끝나지 않는 이상 계속 반복될 것이라는 것, 노동자계급만이 자본주의가 끝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학교 안에서, 그리고 집회 장소에서 꾸준하게 알려나가야 한다.

  이와 더불어 현재 노동자계급이 어떤 투쟁을 진행하고 있는 지를 알리고, 이 투쟁들을 반전운동과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진행하는 투쟁은 반전운동과 다른 맥락이 아니며,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반전시위에 단순한 시민으로 참여한 이들에게 노동자들이 벌이고 있는 투쟁을 알리고 이 투쟁들에 관심을 갖고 연대할 것을 호소하고, 그러한 연대가 반전운동과 어떠한 관계를 갖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택시, 보건, 궤도연대 등 굵직한 투쟁들이 마무리되었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산별노조이거나 산별의 형식을 취한 세 사업장 모두 조합원들의 요구를 묵살한 채 투쟁을 정리하였다. 노동조합이라는 신분마저 보장을 받지 못한 채, 공안탄압을 받고 있는 건설노조는 간부들의 구속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투쟁을 진행 중이다. 작년 3월 이후 전국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금속 대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조합은 아직까지도 회사로부터 노동조합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에도 정부는 고용허가제 실시를 강행하려 하며, 대대적인 단속으로 이주노동자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한다. 이 투쟁들에 결합하는 속에서 전쟁의 계급적 성격을 명확하게 폭로하고, 반전운동이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는지 선동하자.


1) 여기서 논한 주장들을 이분법적으로 갈라놓았지만, 사실은 이들 주장보다 훨씬 다양한 주장이 있었음을 밝혀둔다.


2) 참전한 대부분의 미군 병사들은 노동계급 출신의 젊은이들이며 대개 대학이나 직업 훈련을 받기 위한 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입대하였다. 더구나 위험한 작전에 주로 투입되어 희생된 미군 병사들은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참전한 라틴계 미국인들이었는데, 이는 911이후 부시행정부가 외국인 비시민권자가 군대에 지원할 경우 시민권을 즉시 발급하는 절차를 도입한 것에 기인한다. 남한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예전 베트남전 때의 파병지원 심리와 마찬가지로, 이라크로 가면 조금이라도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심리로 가는 것이다. 이런 심리는 자본가계급 출신의 젊은이보다는 노동자계급 출신의 젊은이들에게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파병 뿐 만이 아니라, 테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도 자본가계급의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노동자계급 출신의 무고한 젊은이들이다. 예를 들어 김선일씨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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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년 11월 24일)파업토론회

노동자들은 왜 파업을 하는가?


녹테잎(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Intro


 올 한해 노동자들의 투쟁이 굵직하지는 않았지만 꽤나 많이 발생했다. 공무원 노동자들의 투쟁이나 LG칼텍스 노조의 투쟁, 궤도연대의 투쟁,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주노동자들의 투쟁.. 올 한해 벌어졌던 투쟁들은 자본가들의 공세에 밀려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부와 자본의 귀족노동자 이데올로기라던지 그 원인을 분석해보면 다양하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들이 투쟁하려 했다는 것이고, 그들이 투쟁하면서 파업을 했다는 것이다. 파업은 “하던 일을 중단하다”는 뜻의 하다형 자동사이다(Naver 국어사전 참고.) 왜 노동자들은 하던 일을 중단하는가?- 혹은 중단할 수밖에 없는가?-


왜 파업을 하는가?


  노동자는 자신이 어떠한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즉 자신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을 얻기 위해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노동을 한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자신의 이득을 높이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임금을 깎아야만 한다. 혹 노동자들의 저항에 임금을 삭감할 수 없으면 노동 강도를 높이거나 노동자들을 해고 한다. 아무런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임금과 해고의 문제, 노동 강도의 문제는 생존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탐욕스런 자본가들에게 저항할 수밖에 없고, 여기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가는 한줌도 되지 않지만 매우 강한 존재다. 노동자들을 해고 할 수 있고, 작업속도를 늘릴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는 그러한 힘이 없다. 자본가를 해고할 수도 없고, 저항하기 전에는 작업속도를 늦출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의 이윤을 멈추기 위한 최후의 수단-파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투쟁에 돌입하면서부터 파업을 하는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작업속도를 늦춘다던지 준법투쟁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투쟁한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으로도 자본가들이 말을 들지 않을 때-대부분의 경우에 그/녀들은 자신의 이윤이 위협받지 않으면 말을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최후의 수단으로서 파업을 진행한다.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다. 수배 연행 구속 등의 위협에 시달려야 하고, -말도 안 되는- 무노동 무임금의 원리에 따라 경제적 고통마저 수반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파업을 결의하고 진행하는 것은 그것 이외에 방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파업이라는 것은 생산을 멈추는 행위이다. 생산을 멈추는 것은 노동자 한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혼자서 생산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자본가들의 이윤을 멈추는 일이 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을 진행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한 공장에서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생활한다. 이는 다른 계층과는 차별화 된 모습이다. 그들의 공동생산은 그들로 하여금 노예와 같은 처지에서 일을 할 때부터 단결을 배우게 한다. 농민집회에서와 노동자들의 집회에서의 분위기 차이는 이를 여력히 증명한다. 농민집회에서는 사회자의 멘트를 듣거나 자리에 착석한 채 집회에 집중하는 움직임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한 대오 안에서 대오를 흩트리지 않은 채 집회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이러한 집회에서의 모습은 노동자들이 투쟁을 하면서 단결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투쟁하기 전부터 이미 공동생산을 통해 단체 행동을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은 단결할 경우에만 자본가와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실제 노동을 하면서 ‘단결’에 대해서 체득하는 것이다.


파업은 “전쟁의 학교”


『···자본주의 사회의 바로 그 본성에서 일어나는 파업은 노동계급의 바로 그 사회체제에 대한 투쟁의 시작을 의미한다.”』1)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면서 처음으로 자본가와 비슷한 위치에 서게 된다. 87년도의 노동자 대투쟁을 상기해보면 확실해 질 것이다. 노동자들이 요구했던 요구사항 중에는 “두발 자유”, “아침체조를 하지 말 것”등등이 있었다. 그렇다. 투쟁하지 않았던 노동자들은 일만 하는 하나의 노예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이 투쟁함으로서 자본가에게 ‘우리는 너희를 위한 생산을 중단 하겠다’라고 외침으로서 자본은 그들에게 부당한 통제와 관리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럼으로써 노동자들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게 된다. 투쟁하기 전에는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작업량을 늘려도 뭐라 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요구하고, 라인별, 위치별로 자신의 처지에 대해 토론하고, 그것을 바꾸기 위한 논의를 하게 된다. 한줌도 안 되는 자본가들의 이해를 위해 가치를 생산해내는 하나의 기계로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인간으로서 다시금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이다.

  처음의 노동자들의 투쟁은 자사의 고용주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스스로에 대해 발견하게 되면 될수록 자신의 적이 고용주만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인간임을 선언한 노동자들에게 손배가압류와 수배령을 때리는 경찰· 사법권력, 자신들의 너무나도 당연한 요구에 대해 ‘이기주의’라고 호도하는 언론과 정부. 그들을 보면서 노동자들은 진정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 만인을 위한 법률이 과연 어떤 만인을 위한-한줌도 안 되는 자본가-법률인지를 명확히 알게 되고, 이에 맞서서 투쟁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파업하기 전에는 자기 혼자 공장 내에서 일하는 것을 신경 쓰기만 바빴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서 자신의 옆 공장, 주변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상황을 알게 되고, 노동자들의 처지는 비슷비슷하다는 것. 전체 노동자가 단결해서 서로의 사안에 연대하여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적은 자신의 고용주뿐만 아니라 전체 자본가 계급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서 너무나 당연하지만 너무나 공허해보이기도 하는 노동자는 하나다는 구호는 그들의 투쟁 속에서 진리이자, 진실로서 확인이 된다.

  그것만 배우겠는가? 자신의 투쟁에 연대해 오는 단체. 자신의 투쟁에 대해서 입장을 내오는 단체에 대해서 노동자들은 누가 우리의 편이고, 누가 아닌지를 명확히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이고 있음을, 노동자계급의 세상의 주인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파업을 통해서 명확해진 사실이 이전에는 어두운 장막 속에 갇혀 있었다는 것. 드러난 이상 투쟁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위의 내용에서 명확해 지는 것은 다음과 같다. 자사의 문제를 넘어 전체 노동자계급의 문제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하는 파업. 자본가를 넘어 정권에 대해서 칼날을 들이댈 수 있게 하는 파업에 대해서 자사의 고용주뿐만이 아니라 정권 역시 억압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귀족노동자니 집단이기주의니 치졸하기 그지 없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그들의 투쟁을 막으려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노동자들은 이것에 굴종하려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를 통해 한줌도 안되는 자본가와 정부가 결국 한 몸이고 비슷한 족속들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될 뿐이다.

  이러한 파업을 통해 노동자계급이 배우게 되는 것은 자신이 세상의 주체이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주체라는 것. 그리고 한줌도 안 되는 자본과 정권은 한패이고, 자신들의 적이라는 것을 명확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파업에 대해서 옛 러시아의 성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 이것이 파업을 전쟁의 학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파업은 전체인민, 노동하는 모든 사람들을 정부 관리들의 멍에와 자본의 멍에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노동자들이 그들의 적에 대해 전투하는 것을 배우는 학교이다”2)


보충수업


  누가 누구의 편이고, 누가 적인지가 명확해지는 상황에서 한 가지 이야기해야 할 부분이 더 남아있다. 노동계급이 전체 자본가와 싸워야 하고 정권과도 싸워야 하는 것이라면, 파업이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파업을 통해서 노동자들에게 학교가 되기는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그들의 계급의식을 성장시키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주체인 노동자계급이 농민의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는 파업을 통해서 배우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겠는가? 보충수업. 노동자계급의 눈으로 전체 세상을 볼 수 있는 보충수업과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 전체 노동계급이 단결하고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의식을 획득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하나의 소중한 학교임은 틀림이 없다. 다만, 그/녀들이 다시는 노예로 살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즉 그/녀들이 다시는 파업을 하지 않게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파업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변혁적인-노동계급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입장을 가질 수 있도록 그들에게 선전· 선동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파업이 “전쟁의 학교”이지 전쟁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 파업은 단지 투쟁 수단의 하나이며, 단지 노동계급운동의 한 측면이라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부르주아 사회는 ‘파업’을 어떻게 말하는가?


영현(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들어가며


  앞선 발제에서 우리는 노동자계급에게 파업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며,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이 노동자계급의 정당한 무기일 수밖에 없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부르주아 사회는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그리고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어떻게 투쟁(?)하는가? 남한 사회만 하더라도 4000만 국민 중 1400만명이 노동자일 정도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데도 불구하고, 왜 노동자들의 파업은 전 국민적(?) 공감을 받지 못하는가? 그것은 숫자로는 한 줌도 안되는 자본가들이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공격 무기는 노동자계급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력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부르주아 사회가 어떻게 파업을 말하는지, 조금 더 어렵게 말하면 어떻게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공격과 통제를 하고 있는가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지난 12년, 우리는 무엇을 배웠나요?


  대학에 들어오기 전, 우리는 12년 간 초-중-고등학교의 국민교육과정을 밟아왔다. 그리고 배워왔다. 교과서에 담긴 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립적이고도 가장 참된 진실만을 골라 담았으니 달달 외우란 말이야..!! 과연 그러할까? 우리가 배워왔던 공식 교육제도와 커리큘럼은 자본과 노동자 사이에서 중립적인 위치에 있을까? 도대체 교과서는 노사관계와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요즘은 교과서도 많이 개혁(!)되어서 공정하게 쓰여져있지 않을까? 직접 7차 교육과정의 중.고등학교 사회과 교과서 속을 들여다보자.3) 물론 국민공통 기본교과 과목인 사회 교과서의 노동 관련 부분은, 독립된 영역으로 구분하여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경우는 없으며, 다른 주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예로 제시되거나 간단히 몇 단락 정도 언급되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말이다. 잠깐, 교과서에는 불경스러운 노동자라는 말 대신 ‘근로자’라고 하고 있는 건 다 아시겠죠?


-선생님, 파업이 뭔지나 좀 가르쳐 주세요!

단원명

Ⅶ. 정치 생활과 국가/ 1. 현대 정치의 과제/ 1) 다원화된 사회, 다원화된 이익

내용

 

탐구 활동 - 시민의 힘으로 금융 산업 파업 해결

 

다음은 2000년 7월에 전국 금융 산업 노조가 파업을 선언한 전후의 은행별 저축성 예금의 동향을 나타낸 것이다.

관련 그래프 : 비파업 선언 은행의 예금과 파업 선언 은행의 예금 대조

                  - 은행별 저축성 예금 동향(00신문, 2000.7.12) -

 

시민의 힘으로 은행 파업을 해결할 수 있는지 토론해 보자.

- 파업을 선언했던 I은행, J은행이 곧 파업 불참을 선언한 배경을 살펴보자.

                                                      <고등학교, 법문사, 사회교과서, p.125>

이 교과서에서는 파업의 당위성 여부는 논하지 않고 금융 산업노조의 파업에 대하여 시민의 힘으로 은행의 파업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노동자의 단체행동을 암묵적으로 부인함은 물론, 시민과 노동자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묘사함을 넘어, 오히려 시민들이 노동자들의 파업 여파를 적극 해결해야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노동자=이익집단, 과격행동은 절대 금물!!

단원명

Ⅶ. 정치 생활과 국가/ 2. 사회적 쟁점의 정치적 해결 과정

내용

 

1) 정치와 사회적 쟁점

(...) 물론 사회 구성원들은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에 따라 서로 협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추구하는 권력이나 부, 명예 등과 같은 사회적 자원들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갈등과 대립이 발생하게 되며 자신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서로 경쟁하기도 한다. 특히, 이러한 사회 구성원들 간의 갈등과 대립 중에서 문제에 대한 의견이 여러 가지로 나뉘어져 있고, 문제 해결의 결과가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사회적 쟁점이라고 한다 (...)

그림 :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쟁점들

      주 5일 근무제를 요구하는 근로자와 이를 외면하는 사용자

      근로자 - 근로자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동 시간을 단축하라!

      사용자 - 경제 상황도 안 좋은 데 주 5일 근무제는 안 될 말이야!

2) 정치적 해결의 과정

(...) 이익 조정에 있어서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조정 절차의 민주성이 필수적이다. 모든 이해 당사자들이 고르게 참여하여, 양보와 타협의 자세로 대화와 토론을 통해 의견의 차이를 좁혀 나갈 때 원만한 합의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과격한 집단 행동이나 실력 행사로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려 한다면, 문제 해결이 어려워짐은 물론 심각한 사회 무질서까지 초래하게 된다. 한편, 개인과 집단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회 전체의 이익을 침해하여 갈등을 빚기도 한다. 이런 경우, 특정 집단의 이익이 사회 전체의 이익보다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되며 갈등 해결의 결과가 공익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고등학교, (주)천재교육, 사회 교과서, pp.202-205>


이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익집단 중의 하나가 노동자? 그리고 그러한 이익집단 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주적 절차가 대화와 타협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와 팔 것이라고는 노동력 밖에 없는 노동자가 사회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있는가? 더불어 교과서는 파업과 같은 과격한 집단행동과 실력행사가 사회 불안정 요소임을 강조하고 있다.


-정리해고 문제 해결, 경제계의 우려?!


 

단원명

Ⅶ. 정치 생활과 국가/ 3. 민주 정치 발전과 시민 문화

내용

 

사례 탐구2 - 정치 원리에 따른 갈등 해소

 

정리 해고 문제를 놓고 노동계와 사용자의 대리전으로 치달았던 H 자동차 사태가 정치권과 정부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해결되었다. 3개월에 걸쳐 6차례의 파업과 4번의 조업 중단이라는 극한 대립이 겨우 풀린 것이다. 노사 양측은 합의문에 서명하고 기념 촬영을 하는 등 화합의 모습을 보였지만, 해결 방법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높았다

 

갈등 해결 과정에서의 법과 정치의 기능

 미국의 여론 조사에 의하면 미국 사람의 59%가 M사가 독점 금지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정부의 회사 분할 방침에 대하여는 48%가 반대하였고, 28%만 찬성하였다고 한다 (...) 그러나 법은 이러한 뜨거운 여론과는 달리 냉정하다. 이러한 사례는 기업의 활동도 법이 지배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H 자동차를 둘러싼 정리 해고 문제의 해결은 정치권의 개입으로 조정되었다. 정부나 여권에서는 노사 간의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여 신노사 문화 창조의 모델이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계에서는 사태 해결 방식을 염려하고 있으며, 이러한 경제계의 우려가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이번 사태의 해결 과정은 노조가 정리 해고를 저지할 수 있다는 선례가 될 수 있으며, 앞으로 기업의 구조 조정과 외국 자본의 유치에 상당한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사회적 갈등의 해결을 법적으로 하면 일시적으로 효율성을 잃을 수도 있으나 갈등 해결의 원칙이 확립되어 사회적 안정성을 얻을 수 있다. 반면에, 갈등 해결을 정치적으로 하면 구체적 타당성을 얻어 융통성 있게 해결할 수는 있으나 원칙이 무너져 사회적 불안이 생길 수 있다.

  <고등학교, 법문사, 사회교과서, pp.234-235>

이 교과서에서는 노사분규를 해결하는 제 3자로 중립적인 정부를 설정하고 있고, 친절하게도 경제계의 우려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왜 정리해고를 반대하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 줄의 설명조차 보이지 않는다.


-기타 등등

이 외에도 천재교육 교과서의 경우 ‘일상생활에서의 정치’라는 주제 아래 사회 갈등의 여러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다른 사례들의 경우 해당 주제에 대하여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예를 선정하였으나, 노동과 관련해서는 ‘노동조합의 집행부 사람들이 주도권을 둘러싸고 싸움을 하였다’라는 유달리(!)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예문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사소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노동자나 노동조합에 대한 이러한 예들이 하나의 이미지로 쌓여 졸업할 때쯤이면 누구나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대해 부정적이도록 만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사회과 교과서를 보더라도, 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얼마나 열악한가를 말하는 대신, 교과서는 아이들에게 노동자들의 파업은 사회 전체에 손실을 주는 이익행위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밟은 학생들이라면, 노동자와 파업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은 전혀 가질 수가 없다. 그것은 이 사회에서 교육이 어떠한 위치를 가지는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전담하며,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며 살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것이 그 목적이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의 철의 동맹군!!


시 하나를 인용해보았다. 아마도 이번 단락에서 이야기할 내용을 함축적으로 나타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평소에는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경쟁하던 부르주아들도,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파업했을 때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 목소리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왜곡하고 탄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단사에서 파업을 경험하는 노동자들은 그 공장의 사장, 즉 자본가 개인을 대상으로 분노하고 투쟁을 하게 된다. 하지면 싸움이 커질수록 또 계속될수록 자본가들은 개개인이 아니라, 더 많은 그들의 동맹군을 불러들여 노동자들의 파업을 탄압한다. 그리하여 싸움은 사장 한 명이 아니라, 전체 자본가 계급을 대상으로 커지게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자본가들의 철의 동맹군, 바로 언론이다. 물론 부르주아 언론들은 제아무리 개혁적이라 자칭하더라도, 평상시에는 노동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되면 아니 예고만 되어도 대대적으로 악선전을 해댄다. 구체적으로 이번 민주노총 하반기 총파업에 대한 부르주아 언론의 기사를 한 번 보자. 제목만 봐도 무슨 내용인지 훤히 다 보인다. 주된 내용은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는 민주노총에 대한 비난이다. 특히 공무원 노동자들을 철밥통으로 명시하고, 민주노총을 대기업 노조 중심이라 ‘배부른 파업’임을 강조하고 있다. 서민의 삶과 대기업 노동자들을 대비시키며, 노동귀족 이데올로기를 더욱 더 공고하게 유포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반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제 우리 노동자들의 삶이 위기가 아닌 적이 있었던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정리해고의 칼바람, 그 때문에 일할 수 있을 때 죽어라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경제위기’는 자본가 그들만의 경제위기 타령일뿐이다. 그리고 언론 스스로가 밝혔듯이 자본가와 노동자 모든 이해 당사자를 만족시킬 대안은 없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공동의 이해를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고 투쟁을 하는 것이다.

  매일경제는 그렇다치고, 자칭 진보 신문인 한겨레 신문은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 최근에 있었던 공무원 투쟁에 관한 한겨레 신문의 사설이다. 한겨레 사설의 주된 내용은 공무원들이 노동자로서 노동3권을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기도 하지만, 국가의 공복이기 때문에  단체 행동권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덧붙여 현재와 같은 경제 불안 속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것에 대해서 우려를 하는 것은 자본의 이해를 노골적으로 대변한다고 하는 매일경제와 다를 바가 없다. 근본적으로 부르주아 언론은 제 아무리 비판적이라 할지라도 이 부르주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한,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적대적일 뿐이다.

               

  이렇게 든든한 동맹군을 업은 자본은 노골적으로 노동자들의 파업을 왜곡한다. 앞서 본 시에서처럼 개별 자본은 서로 살아남기 위해 죽을 듯이 경쟁하지만, 노동자들의 단결 앞에서는 누구보다도 강고한 연대를 보여준다. 대표적인 것이 자본가 단체이다. 경총이나 전경련 같은 상급 단체들은 자본가 계급 전체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분투한다.

 조선일보에 기고한 경총 회장의 글을 인용해본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조합원 투표에 의해 가결되자, 경총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더불어 ‘임금 동결 선언 등 기득권 정규직들의 양보를 통해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라’고 충고까지 덧붙이고 있다. 과연 이 사회에서 누가 기득권인가? 다시 한 번 되물을 수밖에 없다. 자본가들은 이렇게 정규직/비정규직이 대립하는 것인양,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킨다.

덧붙여 ‘비정규직 관련법 개정은 법 제도 개선사항이기 때문에 파업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업은 법 제도를 만드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란다.

 음, 그렇다면 법 제정은 기업과는 관련이 없는 것인가? 과연 그럴까? 우선 큰 틀에서 국가라는 것을 보면, 파업이 일어나면 노동자들을 곤봉으로 구타하고 방패로 찍어누르는 공권력은 차치하고서라도 정부는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와 같은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기구이다. 그렇다면 조금은 더 중립적으로 보이는 법은 어떠한가? 앞서서 경총 회장은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기업의 이익, 즉 자본가의 이익과는 관련이 없다 말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그러하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았듯이 현대의 법률체계에 의하면 자본-노동의 관계는 쌍방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맺은 상호계약관계이다. 그리고 이것이 보장되는 한 이 법률은 공정하며 중립적인 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류상의 문제이다. 서로 다른 계급적 지위에 의해 한 쪽에 부여된 권력과, 상대적으로 다른 한 쪽에 박탈된 권력과 그에 따른 압박과 착취를 법은 은폐하고 있다.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은 철저하게 자본가 계급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때려잡고 있다. 손배가압류라던가 집시법 개악, 이번에 제출된 비정규직 법 개악안만 보더라도 우리는 너무나 그 사실을 쉽게 알 수가 있다.

 

국민들, 파업 나빠요!!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부르주아 사회는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아주 철저하게 이데올로기적 통제와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 그리고 부르주아들의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무기와 동맹군들에 의해 이 사회의 헤게모니는 압도적으로 자본가들에게 가 있다. 즉, 사실 전 국민의 4/1이 노동자이며 그 부양가족을 헤아려본다면 어마어마한 숫자인데도 불구하고,데도 국민들의 절대다수는 부르주아 사회가 말하는 바들을 그대로 믿고 있다.  굳이 이 기사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 있는 친구들을 보면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그리고 그 기본단위인 노동조합에 대해 얼마나 왜곡된 인식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영원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빼앗긴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부르주아 사회가 유포하는 거짓된 사실들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오는 26일, 우리는 민주노총 총파업이라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다시금 앞두고 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을 다음 발제에서 함께 찾아보자.

 


해결책 : 노동자는 계급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곤약(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지금까지 파업이 노동자에게 있어 어떤 의미가 되는지에 대해서와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 그리고 주되게는 노동자의 유일한 무기인 파업에 대한 자본과 정권의 이데올로기 공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지금 노동계급의 운동은 어떠한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학생사회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귀족노동자?? 있긴 한거야??


  저번 열린 토론회 때도 귀족노동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풀어낸 것 같다. 귀족노동자들.. 그들은 다른 하청 노동자들, 이주노동자들, 여성노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받으면서 일한다. 이건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본의 폭력적 수탈로 인해 일을 뼈빠지게 하면서, 임금은 쥐꼬리도 못받기 때문이다. 그럼 소위 귀족노동자들은 일한 것보다 많이 받아가나?


  예시를 들어보자. 필자의 고향이 영남지방인 관계로 우리 사촌들은 거의가 현대에서 일하고 있다. 현대해상, 현대강관,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업종도 다양하다. 필자가 가족모임에서는 아직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급이 아니기에 그냥 듣고만 있는 상황이지만 사태 파악은 빠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조선일보를 열심히 구독하시는 울 고모부 : $^야. 요즘 신문보니깐. 너희들 영 이상하던데~ 느그 노조애들은 연봉이 6천은 더 넘어가는데도 돈 더 달라꼬 난리라메? 나라경제가 이 모양 이 꼴인데 왜 계속 그라노?

  현대중공업 다니는 울 이종사촌형 $^ : 이모부. 그거 순 거짓말 아닙니꺼. 글마들 말대로 연봉 6천 정도 받을라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압니꺼? 진짜 말그대로 24시간 기계처럼 일해야 됩니더. 365일중에 360일을 잔업, 특근, 야근까지 다 뛰어야제 그래 안 받습니꺼. 그래 일하믄 완전 사람 죽습니더. 그거 가지고 우리 돈 많이 받아간다꼬 하면 얼마나 복창터지는 줄 압니꺼?


  그렇다. 그들은 기계가 아닌데, 그들의 계산속에는 노동자가 쉬지 않고 일하는 기계라고 생각하면서 연봉을 계산하는 것이다. 이런 일가지고 그들을 귀족노동자라고 부른다. 귀족은 귀족인데 24시간 기계처럼 일하는 귀족봤는가? 과연 태어나자마자 수십억의 재산을 보유하는 사람이 귀족인지 24시간 기계처럼 일해다 죽어나가는 사람이 귀족인지는 너무 명확하지 않은가?


  사실 이런 경우는 있다. 상대적으로 노조 조직율이 높은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본의 노동자 분할정책으로 말미암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방패막이이고, 우리는 저들과는 다르다는 인식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같이 긴밀히 연대하지 못하고, 단지 생색내기 수준으로 비정규직노동자의 요구를 협상테이블에 들고 갔다가 슬그머니 치우기도 하고, 이상한 합의 사항을 도출하기도 한다. 이상한 합의 사항들 가운데는 ‘사회공헌기금’이란 것이 있는데, 이는 임금협상때 노조쪽으로 유리한 언론형성을 위해서 제시한 것이다. 노조와 자본쪽이 공동으로 기금을 조성하여 비정규직을 먹여살리자는 것이 그 주요 취지이다. 그런데 이런 것이 과연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일단, 사회공헌기금이라는 것은 비정규직노동자를 같은 노동자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단지 보호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사회적 합의주의라는 허울된 명목으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자발적 투쟁의식을 통제해 버리고, 투쟁의 발현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비정규직이 투쟁을 하려고 할때, 자본가들은 이렇게 이야기 할 것이다. ‘너희한테 돌아가는 기금도 있는데, 너희는 왜 투쟁하려고 하는것이냐!! 확 짤라버린다!!’ 사회공헌기금이라는 것 자체가 비정규직을 일단 인정하고 들어가는 정책이기에 정규직도 더 이상 비정규직에게 연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할 만큼 했다.’라고 하면 끝이다. 정규직노조는 진정으로 자신들이 연대할 세력인 비정규노동자가 아닌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휘말려서 자본가들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합의주의의 올가미에 걸린 것이다.


  일각에서 이러한 정규직노조들이 파업하는 것을 가지고, ‘배부른 놈들이 파업한다. 저거 다 짤라버려!!’라고 이야기한다. 그들의 논리중 하나는 이런 경제상황에서 빠르게 경기 회복을 이룩해야 하는데, 강성노조 때문에 경기회복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정규직이 더욱 확산되는 것이란다. 과연 이 말이 옳은 말인가? 우리는 단연코 이러한 논리가 헛소리라고 규정하는 바이다. 경기가 침체하는 것은 강성노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인 호황과 불황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안고 살아가는 근원적 본질인 것이다. 이를 노동자의 투쟁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본의 무차별적 엉터리 공세일 뿐이다. 체제의 변혁을 통하지 않고서 아무리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려고 한다고 해도, 이는 결국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말고는 이루어내는 것이 없을 것이다.


‘노동자는 하나다.’ 허튼 소리가 아닌, 실천에서 풀어내기!!


  지배자가 피지배자들을 통치할 때 쓰는 방법 중 가장 효율적인 것이 분할정책이다. 피지배계급을 여러 사항으로 나누고, 그들이 쉽게 단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정규직노동자/비정규직노동자, 여성노동자/남성노동자, 이주노동자/한국노동자 등등 자본의 분할 정책은 우리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공세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그룹을 공격하는 것을 자신에 대한 공격이 아닌 줄 안다. 하지만 이것은 옳은 상황판단이 아니다. 노동자는 하나로 이어지고, 같은 계급이기에 같은 운명이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노동자를 정부가 양산한다고 해서 정규직 노동자가 맘 편히 있을 때가 아니다. 비정규직이 늘면 늘수록, 자본은 임금이 한참이나 싸고 짜르기도 편한 비정규직을 쓴다. 그럼에 따라서 정규직은 자신의 처지를 항상적으로 낮추어야 하고, 자본의 눈치를 보며 설설 기어야 할 것이다. 각개 격파 당하는 노동자들은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처지를 알아서 낮추며, 취업하러 다녀야 할 것이다. 분할정책이후 각개격파가 자본가들이 잘 쓰는 방법이다.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은 공문구가 아니다. 역사에서 철저히 검증된 진리이다. 87년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기에 민주노조가 일어설 수 있었고, 90년 현대중공업의 골리앗 투쟁이 있었기에 노동자들의 투쟁이 들불처럼 일어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잘 조직된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열심히 투쟁하였기에 다른 노동자들도 그 힘을 이어받아 투쟁할 수 있었다. 노동자의 이름으로, 단결된 모습을 보였기에 자본가들은 그 힘에 눌려 조그마한 개량이라도 내주었던 것이다.


  지금의 모습은 어떤가? 단지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내가려고 하지는 않는가? 자본가들의 관대한 처우를 바라면서 단지 기도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옆에서 탄압받는 노동자를 보면서 ‘우리는 그렇지 않아’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지는 않은가? 같이 연대해야 할 노동자들을 보지 않고, 자본가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리고 단사의 문제에만 급급하여 큰 틀의 노동자 문제는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이제는 단사를 뛰어넘어야 한다. 계급의 운동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단지 ‘우리는 이런 상황이 아니야’라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자본과 노동자와의 대결에서 한부분의 공격은 전체를 향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상황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해 투쟁할 것을 강요한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


  이 시점에서 우리 청년학생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단지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들만의 투쟁이라면서 마음속으로 지지만하면서 가슴 졸여야만 하는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변혁의 심장 노동자계급의 철의 동맹군 학생대오도 할 일이 많다. 우선 간단한 일. 학내에서 열심히 선전한다. 특히 그때 그때의 사안으로 노동자 투쟁에 함께 할 것을,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를 깨뜨려주는 것으로도 학생들은 대단한 선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시기에 어느 적절한 정세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가이다. 단지 ‘노동자는 하나다.’, ‘비정규직 철폐하라.’ 는 식의 구호는 소귀에 경읽기 밖엔 되지 못한다. 공무원노조의 투쟁이 지난번에 펼쳐졌었다. 그런때는 ‘공무원도 노동자다. 노동3권 보장하라.’는 식의 이야기를 가지고 풀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당시에는 공무원노조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자본과 정권이 언론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하여 대대적으로 유포했다. 이런 이야기에 찌들어 있는 학생들에게 하나하나 자세히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간략히 논리적인 선전물을 제작하여 붙이는 것이다. 아무리 평소에 대자보를 안 읽는 학생이어도, 그렇게 이슈화되는 쟁점에 대해서 자보가 붙는다면 한번씩 보고 지나가게 마련이다. 그들이 그 당시에는 바로바로 설득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의문점을 던져주는 것. 그들의 생각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도 굉장한 방법이다. 특히 매년 초기에는 그런 작업이 굉장히 유용하다. 왜냐하면 새내기들은 모든 자보를 다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보 백날 붙여봐야 지속적으로 고민을 풀어내가지 못한다면 허망하게 끝난다. 우리의 옆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같이 차근차근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일상적으로 이야기하며 실천하자. 그리고 노동자계급중심의 정치를 알려나가자. 이것이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선전방법이다. 물론 노동자투쟁에 긴밀히 연대하는 것은 필수이고^^


1) V.I.Lenin, 파업에 관하여


 

2) 같은 책


 

3) 송태수,[사회과 교과서 노동교육 내용분석(제 7차 교육과정)]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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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년7월 15일) 교과서 속의 민주주의

 

<<교과서 속의 민주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비판-


   ‘민주주의’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지. ‘모두에게 좋은 거다’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터인데 당장에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참으로 막연해진다. 교과서에 제시된 민주주의의 의미를 참고하여 우선 이렇게 이해해두자.

 

“결론적으로, 민주주의라는 말은 국가 의사의 결정을 국민의 합의에 두는 특정한 정치 형태라는 의미와, 자유, 평등과 같은 기본 이념을 민주적 방식으로 실현시킨다는 의미, 그리고 국민의 정신적 자세, 생활 태도, 행동 양식 등을 민주적으로 수행하는 생활양식이라는 의미를 담게 된 것이다.” (정치 교과서)

 

 그렇다면 오늘날의 남한 사회는 민주주의 국가인가?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 국가의 표본으로서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한 ‘시민 사회’를 떠올린다.

 

 “서구 사회에서는 신분 사회와 절대주의적 전제 군주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17, 18세기에 이르러 시민 혁명을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고대 민주 정치의 이상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재현되었다. 특히, 대혁명으로 알려진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 이념을 내걸고, 국민 주권의 기치 아래 공동 사회를 새로이 구축하는 원동력으로서 민주주의를 추구하였다.” (정치 교과서)

 

 그런데 프랑스 혁명을 위와 같이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 그렇다. 글에는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주체가 빠져있다. 프랑스 혁명의 주체는 누구였나? 바로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17,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산업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하였고,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생산을 확대시킬 필요가 있었던 그들에게 당시 국가를 지배하고 있던 봉건 귀족들은 큰 걸림돌이었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라고 불려오고 있는 부르주아지에 고유한 생산 방식은 봉건 질서의 지방적이고 신분적인 특권들 및 인신적 상호 속박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부르주아 계급이 무엇보다도 원한 것은 당시 국가 체제에 의해 제약 받지 않으면서 마음대로 경쟁하고 무역할 수 있는 ‘경제적 자유’였다.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의 본질은 부르주아지 계급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바탕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대개 프랑스 혁명을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난 혁명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얼 하고 있었나? 그들 역시 혁명을 위해 싸웠다. 혁명의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봉건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 사이의 대립과 마찬가지로, 이 두 신분 모두와 프롤레타리아 계급 사이의 대립 또한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관계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간의 갈등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부르주아 계급이 그들의 경제적 이해를 위한 투쟁을 마치 보편적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으로 탈바꿈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계급 또한 이 투쟁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신분적 특권을 배제하고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취급하며, 권리에 있어서도 평등하다는 이념을 내세운다. 이러한 평등의 이념은 “인간은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한다. 사회적 차별은 공동 이익을 근거로 해서만 있을 수 있다.”는 프랑스 인권 선언의 규정에 잘 명시되어 있다.” (정치 교과서)


 혁명의 성과를 만인의 것으로 돌리기 위해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이 주장한 ‘(경제적) 자유’와 ‘(신분적) 평등’의 범위를 확대시켜야만 했다. 그들은 정치의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영역에 자유와 평등을 선언하였다. 단, ‘경제적 평등’만을 제외하고.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줄여서 말하지만, 사실 오늘날 민주주의의 형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실재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참여에 의한 정치가 가능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을 위한, 법적으로 국민의 참정권은 주어져있지만 사실상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이러한 민주주의의 형태 또한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지향하고 있는 국가 발전의 이상은 모든 국민이 강한 공동체 의식을 지니며, 개인이나 사회 집단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다원주의적 정치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다. 아울러 지속적인 경제 발전 속에서 국민들이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복지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윤리 교과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유 민주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윤리 교과서에서는 자유 민주주의가 표방하는 자유의 개념을 “국민 각자가 보람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자신의 욕구에 따라 그 삶의 조건들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평등을 “기회 균등의 의미”로서 “법적, 정치적 평등이며, 이는 경제적 평등이나 결과의 평등으로 확대되지 않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교과서에서는 계급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현대사회가 계급사회라는 것을 명시한다면 민주주의가 갖는 의미는 분명해진다. 계급사회에서 부의 집중과 집적은 일반적으로 -로또에 당첨되지 않는 한- 생산수단을 소유한 부르주아 계급, 즉 자본가 계급에게만 가능하다.** 따라서 삶의 조건들이나 선택의 기회는 우리가 지배 계급의 자식으로 태어나지 않는 한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평등’하지 못하다. 현대사회는 또한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의해 지배계급의 이해관계가 보장되는 한, 오늘날 자유와 평등의 이념은 태어날 때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도 우리가 머리 속으로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게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과거 노예제 사회나 봉건제 사회와 비교할 때, 지배관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훨씬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와 평등은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일반적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는 머리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실현되며, 그러한 이념들은 현실의 철저한 반영물에 불과하다.


 “원시 상태를 제외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는 것, 서로 투쟁하는 이 사회 계급은 언제나 그때그때의 생산 관계들 및 교환 관계들, 한마디로 경제적 관계들의 산물이라는 것 ; 따라서 사회의 그때그때의 경제적 구조는, 역사 시기마다의 법적, 정치적 제도들과 종교적, 철학적 등등의 표상 방식들로 이루어지는 전체 상부 구조를 종국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실재적 기초를 형성한다는 것.”***


 계속 말했지만,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 또한 인용문에 나타난 사회의 경제적 관계들과 무관하지 않다. 한 사회가 표방하는 이념들을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교과서가 교묘하게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본질을 감추고 있음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 속의 민주주의>>

-일반사회 교과서를 중심으로-



  어느덧 수능을 본 지 2년이 지났다. 오랜만에 일반사회 교과서를 보니 그 당시 공부했던 것이 새록새록 기억나기 시작한...................콜록콜록

  사실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기억나는 것은 윤리와 일반사회 시험을 볼 때 객관식에서 답이 되는 것은, “제일 그럴싸한 보기”와 “제일 긴 보기” 였다는 것 뿐이다. 여기서 교과서에서의 가장 큰 문제를 집어 볼 수 있다. 바로 굉장히 “그럴싸하다”는 것이다.

  음... 일반사회 교과서를 중심으로 기억을 되살려 그럴싸한 맥락들을 집어보자~!(나는 물론 되살릴 기억이 없다..)

  우선 일반사회 대단원 중 두 번째 민주 시민의 역할에 나와 있는 부분들을 보자..


“현대 민주 시민 사회는 시민들의 자유 의사에 의해 운영된다”(p.20)

”시민이 주체가 되는 민주 시민 사회에서는 시민 각자의 현명한 판단이 사회 전체의 질을 결정한다.“(p.21)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란, 국민의 천부 인권과 행복을 존중하고 이를 법으로 보장하는 국가이다. 기본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법적인 제도와 절차를 마련하고, 국가가 앞서서 지켜 나가는 것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질서이다.“(p.190)


  위에서 언급한 말만 보면 우리는 “무릉도원”에 살고 있는 것이 틀림 없다. 우리의 자유 의사가 사회 전체의 질을 결정하고, 법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니 이 어찌 완벽한 사회인가?

  그러나 당신의 실제 삶은 그러한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볼 부분이 있다. 하나는 “우리”라고 뭉뚱그려 표현할 수 있는가? 표현할 수 없다면 왜 그런가? 그리고 국가는 중립적인 존재인가?

  우리는 여기서 맑스의 유명한 선언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맑스가 한 말이 그냥 멋져서 아직까지 읽히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멋있기도 하다.) 잉여생산이 생겨나면서부터 계급과 소유를 둘러싼 투쟁들이 벌어질 수 밖에 없고, 사회의 경제적 조건들이 바뀌어 가면서 각기 다른 모습의 계급들이 투쟁해 온 것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것이 맑스의 말에 담겨있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두가지 계급이 대립하게 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프롤레타리아는 무산자로서 자신의 노동을 팔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이고, 부르주아는 유산계급으로서 자신이 노동하지 않고 살아가는-매우 유복하게- 존재이다.

  위에서 굉장히 재미없는 이야기(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이야기)를 한 것은 다름아니다. 이러한 모습이 사회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사회는 계급간의 대립이 반영되는 공간이다. 물론 계급간에 대립하는 모습의 투영이 전부는 아니다.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계급의 헤게모니가 사회 전반을 장악하기 때문이다.

  이제 대충 하고 싶은 말이 나왔다. 즉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사회 전반을 장악한다. 그리고 이 주도권이란 소유라는 하나의 “힘”을 가지고 있는 유산계급이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잡고 있다.(이에 관해서는 밑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라고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계급사회에서 모든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능한 것은 이것이다. 부르주아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거나,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을 대변하거나.

  전 세계적으로 발생했던 부르주아와 중세 영주와의 투쟁은 혁명으로 봉건제 사회는 종식됐고, 이로 인해 부르주아의 승리 즉 자본주의의 막이 올랐다.(불행히도 조선에서는 그러한 흐름이 폭발적으로 나타나지는 못했다.) 프랑스 대혁명이라 불리는 부르주아 혁명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외쳐졌던 구호는 어떤 것이었는가? “자연에 근거한 평등”,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이었다. 이러한 권리, 부르주아 혁명 이후 국가에 대해서 엥겔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이성의 왕국이 부르주아지의 이상화된 왕국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영원한 정의는 부르주아적 사법으로 실현되었다는 것 ;영원한 정의는 부르주아적 사법으로 실현되었다는 것 ; 평등법률 앞에서의 부르주아적 평등으로 귀착되었다는 것; 가장 본질적인 인권의 하나로 선포된 것은-부르주아적 소유권이었다는 것...”*


  즉 현대국가에서 이야기 하는 자유는 부르주아가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는 자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고, 평등 역시 부르주아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법률 앞에서의 평등-부르주아만이 실질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자세하고 파고들면 굉장히 길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절대 모르거나 귀찮아서 안하는 것은 아니다ㅡㅡ;;.) 발제할 부분은 일반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주의에 관한 비판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 그 중에서도 계급사회 내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갈등을 교과서에는 어떻게 감추려하는지(민주주의의 이름을 이용해서)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써 놓은 걸 보니 이미 충분히 길게 써놓았군...;;;)

  일반사회 교과서에는 민주시민의 생활 원칙으로 ‘대화와 토론’, ‘양보와 타협’, ‘다수결과 소수 의견 존중’을 이야기 한다.(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시민”이라는 개념도 참 재미있다. 대학 와서 알게 된 민주 시민은 집회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전경에 맞서 ‘지나가다 분노한’ 시민‘인양’ 싸우는 사람들 이었다..;)

  ‘대화와 토론’과 ‘양보와 타협’은 하나의 맥락 속에 있는 논리이다. 사회의 갈등을 서로 대화를 통해 조금씩 양보해서 타협을 보자는 것인데, 갈등의 본질을 생각해 보면 굉장히 공허한 이야기임이 드러난다. 또 이는 계급간의 갈등과 모순을 대화와 타협으로 은폐시키려는 -요즘들어 노동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사회적 합의’라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즉 임금노동과, 자본이라는 구조적인 모순에서 시작되는 갈등은 대화와 토론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본질적인 모순이며, 그것은 절대 타협이나 양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모순관계를 보지 않고, 단지 대화와 타협을 이야기 하는 것은 모순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닌 노동자․민중을 자신의 이데올로기 밑에 포섭하려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드러난다. 등록금투쟁을 생각해 보자. 학교와 학생들이 처음으로 교섭을 할 수 있었던 때가 언제였는가? 비상학생총회 당일 교양관으로 기습 항의 방문을 들어가서 부총장을 압박했었을 때 비로소 그들은 교섭을 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그 전부터 요구해 왔던 교섭에 대해서는 들은 척도 안하다가 학우들이 학교를 실제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교섭을 시작해 왔다. 그러면서 본관점거에 대해서 학교가 폈던 말은 “학우들이 대화하려 하지 않고, 폭력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는 것이 아니었는가? 우리보고 어쩌라구~! 압박을 받지 않는 한 그들은 협상하려 하지 않는다. !

  “다수결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다수결이 ‘전원 일치에 가깝기 때문에’ 제일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이야기 한다.(물론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서 그들과 대화하고 타협해야 한다고 (기만적으로)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많은 이가 찬성하는 것이 과연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 될 수 있을까? 이는 우리의 현실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열악한 자신의 처지를 개선시키기 위해 투쟁을 하고, 철거민들이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농민들이 FTA에 반대하는 집회를 갖지만 이 모든 것들은 왜곡되고 이기주의에서 나온 행위들로 보도되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인식한다.(이는 가장 진보적인 담론이 많이 오가는 대학에서도 존재한다.) 그리고 파병문제에 있어서도 그것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한 전쟁이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파병에 찬성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현재 계급간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부르주아는 모든 것을 통제 한다. 자신이 소유한 물질적인 힘으로 의식 역시 강요할 수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조선일보 KBS등의 모든 매스컴 역시 돈 없이는 굴러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많은 대중들은 접하는 매체는 부르주아들의 그 것일 수밖에 없고,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국가에서 인증한 교과서 역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이는 국가가 하나의 중립적인 존재가 아닌 부르주아 계급을 보호하고, 그들을 위한 정책을 집행하는 공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날 때부터 보고 듣는 것, 심지어 학교에서 배우는 것 역시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이데올로기 역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의식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현실에서 투쟁하지만 전쟁에 대해서는 자신의 이해관계와 직결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고 파병에 찬성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수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수결이라는 것은 다수를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합리화 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학습 정리(시험에 꼭 나온다고 해서 외웠었던 기억이...)에 다음과 같이 정리해 놓는다.


“사회적 집단 갈등은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이지만, 그러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회를 개선하려는 움직임도 있게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대립되는 집단 간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여 사회 안정과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p.103)


  교과서 스스로가 갈등은 근본적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합리적으로 조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조건을 바꾸지 않으면 어떠한 본질도 변하지 않는 무산계급을 자본의 ‘세련된’ 합의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포섭하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이는 위에서도 강조해서 이야기 했다.) 그리고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 왜 없는가? 생산력은 급속도로 발전해 왔다. 이제 지역간의 갈등은 지역간의 교류를 통해 없어질 수 있다.(물론 자본주의에서는 어려운 이야기이다.) 여성과 남성의 차별에 있어서도, 사적인 소유관계를 철폐하면 차별적인 분업이 아닌 자연적인 분업만이 남게 될 것이다. 즉 사적소유와 계급을 철폐하면 자연히 계급간의 대립이 없어지게 되고 따라서 계급간의 갈등은 존재하지 않게 되지 않겠는가?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뭐 했다고...;;;) 우리가 고등학교에서 배웠던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계급모순이 엄연히 존재하는 자본주의에서 모두의 이해를 대변하는 민주주의는 불가능 하다. 결국 어느 계급의 민주주의인지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봤던 대화와 타협 등의 이야기, 그리고 실질적으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대부분의 경우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입각해서 보자면, 교과서의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계급을 변호하는 민주주의’이다.


*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프리드리히 엥겔스, p.455


** 왜 그런지는 굳이 쓰지 않겠음.


***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프리드리히 엥겔스, p.453


**** 맑스에 의한 유물론적 관점.


***** 공산당 선언,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저작선집 1권,박종철 출판사)


*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 프리드리히 엥겔스(저작 선집 5권, 박종철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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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년 9월 7일) 농민문제 진정한 해결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발제1 .  남한 농업의 현황과 이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


- 최바울 (노학연 고대모임 회원)


  이 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현 시기 남한 농업의 현황에 대하여 사실 관계적인 측면에서 기술할 생각이다. 이것은 주로 윤수종의 〈한국 농업의 미래와 농민운동의 새로운 방향〉이라는 글에 의거할 것이다. 한편 글에는 직접 인용하지 않았지만, 하반기 농업 개방과 관련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몇 가지 신문 기사를 이용했음을 밝혀 둔다.

  다음으로 글의 후반부에서는 오늘날 남한 농업이 처해져 있는 현실을 맑스주의 경제학의 관점에서 분석해 내려 한다. 이것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저작 가운데 하나인, 맑스의 『자본』을 직접적으로 인용하는 가운데 전개될 것이다.


  Ⅰ. 남한 농업의 현황


  최근 농민들의 격렬한 투쟁이 아니었다면, 우리들이 농촌에 대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인상은 여전히 목가적인 풍경이었을 것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얼룩백이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렇지 않다면, 배추를 갈아엎는 농민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느끼는 안타까움. (수많은 창업 실패에 대해서도 우리가 이렇게 안타까워 해 본 적이 있었을까?)

  이러한 정서는 남한 사회에서 일반적인데, 그 까닭은 남한 사회가 농업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격렬한 역사적 변혁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본의 시초 축적 시기의 극심한 노동 착취 속에서, 대다수의 민중들은 비록 빈궁할 지라도 ‘인간’일 수 있었던 농촌 사회를 그리워하곤 했다. (실제로도 여전히 대다수의 귀향지는 농촌이다.) 언론 보도를 보라. 민주노총이 화염병을 던지면 잡아먹으려고 난리를 치지만, 농민들의 격렬한 시위에는 언제나 동정의 눈빛을 보내곤 한다. 우리 역시 이러한 사회적 풍토 아래서 성장하였다. 그리고 남한 사회에 만연한 이 사회적 정서는, 우리가 농업 문제를 과학적 시각으로 엄정하게 고찰해 내는 데 방해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하자. 윤수종의 글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지점은, 농민들 간의 계급분화가 가속화 되고 있다는 점이다.1)


   “농촌 사회 관계는 특히 농민들 간의 계층분화를 들 수 있다. 지난 10년간의 변화를 보면, 전형적인 양극 분해의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앞선 시기에 주로 중농으로 표준화되던 양상이 크게 바뀐 것이다. 어쨌든 양극으로의 분화는 기계화에 따라 차지형 상층농이 등장하는 등 기계를 통한 대규모화가 가능해지면서 정치규모가 큰 상층이 등장하였다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경지 규모에 매이지 않는 시설농가, 축산농가 등이 증가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90년대 들어 지원제도의 강화와 더불어 지원을 받은 농민들이 기계화와 시설화를 통해서 경제력을 집중하여 새로운 상농층으로 도약하고 그 반대쪽에는 다수의 침전층이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농업 생산 방식에 있어서의 변화로 현상하고 있다.


  “농업 생산 조건의 변화와 더불어 농업 생산 주체도 변화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농업 생산 조직들이 등장하고 있다. 위탁 영농회사와 영농조합법인, 다양한 생산실험(예를 들어 생명농업) 공동체들이 그것이다. … 일관 기계화가 가능한 기계 체계를 갖추고 회사형태를 갖춘 위탁 영농회사는 벼농사의 수위탁 작업이 활성화되는 가운데 벼농사의 핵심적 작업집단으로서 부각되었다. … 다수의 영농조합이 소수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일부에서는 다수의 구성원을 지닌 영농조합이 생겨나고 있는데, 이것은 영농조합 내의 분화 현상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출자규모로 볼 때에도 대다수의 영농조합은 소규모 투자를 하고 있는 데 반해 일부 대규모 투자를 하는 영농조합도 나타나고 있다.”


  농민층의 계급 분화, 그리고 그것과 변증법적 원인·결과로 맞물려 있는 생산 방식의 변화에 조응하여, 정부 역시 농정 정책의 초점을 상층농에 대한 지원으로 맞춰 나가고 있다. 1950년, 공산주의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시행했던 소농 육성 정책은, 오늘날 농업 생산력의 증대로 인한 계급 분화에 직면하면서 ‘농업 자본가’ 지원 정책으로 변모된 것이다. 농민 전체가 아닌 ‘경쟁력 있는 농민’에 대한 중점적 지원, 그로써 ‘경쟁력 없는 농민’에 대한 자연 도태가 정부의 농정 정책인 것이다. 솔직하다는 점에서만큼은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노무현이 다음과 같이 말한 대로이다.


   “(앞으로) 경쟁력 있는 농업만 살아남는다는 점을 확실히 하고 가자. 여러 지원정책 중에서 경쟁력 없는 농업에 지원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해야 한다. 농촌 인구를 줄일 수밖에 없었는데 (YS·DJ 정부가) 지키겠다고 잘못 공약한 것이다. 앞으로 시장기제에 의해 농업인구가 줄어든다는 점, 탈농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각오하고 가야 한다. 신뢰가 따르지 않으면 정책은 실패한다.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얘기하자.”

-  미제의 앞잡이 제프리 존스 회장과의 대담에서


  한 마디로 ‘살 놈은 살리고, 죽을 놈은 죽인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노무현의 이러한 말을 WTO 체제에 의해서 강제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위에서 인용한 통계자료는 85년부터 95년까지의 자료이다. 농민 간의 계급 분화가 이루어지고 농촌 사회에서 계급 모순이 증대한 것은, 이른바 ‘세계화’가 매스컴을 온통 떠들썩하게 채웠던 것보다도 이전이다.

  따라서 최근에 불거지고 있는 농업개방 문제는 결코 새로운 모순이 ‘도입’되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기존의 모순을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확대·재편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오로지 ‘자본주의’라는 네 글자와만 관련이 있다. 물론 WTO 체제는 농촌 사회의 계급 모순을 가속화시킬 것임은 틀림없다. 노무현이 더 이상 YS·DJ와 같이 농촌을 살리겠다고 거짓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핵심적인 본질은, 농촌 사회에서도 점차 소자본이 대자본에 의해 구축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소자본과 대자본의 투쟁은 이전 시기에도 있어 왔으며, 다만 오늘날의 전면적인 농업 개방에 의하여 그것이 전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어 수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장담하건대, 전면적인 쌀 개방은 결코 농촌을 황폐화 시키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독점 자본이 농업 생산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것으로 귀착될 것이다. ‘식량 무기’로 인한 ‘국가 안보의 위협’이 실질적인 것으로 된다면, 남한의 부르주아들 역시 자신의 애국자적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그들의 애국심의 본질은 남한 사회에서 노동력의 안정적인 공급이긴 하지만…, 그래도 애국심은 애국심이다). 그들은 ‘식량 주권의 수호’를 ‘농업 자본의 이윤율 제고’와 동떨어진 것으로 사고하고 있지 않다. ‘농업 자본의 이윤율 제고’를 위해 400만 농민이 200만으로 줄어야 한다고, 조국과 민족의 미래를 위해 발전된 농업 생산력을 200만 명의 목숨과 바꾸겠노라고 공공연히 선언하고 있지만 말이다.


  Ⅱ. 소자본과 대자본의 투쟁을 맑스주의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위에서 밝힌 대로, 이에 대하여 맑스의 불후의 명저 『자본』(김수행 역, 비봉출판사)을 살펴보도록 하자. 참고한 부분은 『1권 : 자본의 생산과정』 중 「7편 : 자본의 축적과정」과 「8편 : 이른바 시초축적」, 그리고 『2권 : 자본의 유통과정』 중 「1편 : 자본의 변태들과 그 순환」이다. 불행하게도(!) 시간의 부족으로 발제문이 완결되지 못했다. 굵은 글씨를 중심으로 짧게 구두로 발제하겠다.


  [1] 소자본과 대자본 사이의 투쟁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자본주의의 생산 법칙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가가 인격화한 자본인 한, 그의 활동동기는 사용가치의 획득과 향락이 아니라 교환가치의 획득과 증식이다. 그는 가치증식을 열광적으로 추구하며 그리하여 무자비하게 인류에게 생산을 위한 생산을 강제한다. 이리하여 자본가는 사회의 생산력의 발전과, 또 [각 개인의 완전하고도 자유로운 발전을 그 기본원칙으로 삼는] 더 높은 사회형태의 유일한 현실적 토대로 될 수 있는 물질적 생산조건의 창조에 박차를 가한다. 자본의 인격화로서만 자본가는 존경을 받는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절대적 치부욕을 수전노와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수전노의 경우에는 개인의 열광으로 나타나는 것이 자본가의 경우에는 사회적 메커니즘 ― 여기서 자본가는 하나의 나사에 지나지 않는다 ― 의 작용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한 사업에 투하되는 자본액을 끊임없이 증대시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며, 그리고 경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내재적 법칙을 외적인 강제법칙으로 각 개별 자본가에게 강요한다. 경쟁은 그로 하여금 자기의 자본을 유지하기 위해 그것을 끊임없이 확대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데, 그는 누진적 축적에 의해서만 자기의 자본을 확대할 수 있다. … 축적은 사회적 부의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고, 착취당하는 인간의 수를 확대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본가의 직접적·간접적 지배를 확대하는 것이다. …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며 예언자이다!” (1권, 807쪽)


  [2] 자본의 축적이 무한경쟁 속에서 자본이 살아남기 위한 것이라면, 축적을 위해 필요로 되는 것은 무엇인가? 특히 개별 상품 생산자들로 사회가 분업화 되는 것은 자본 축적의 전제이다. 즉, 남한의 소농 육성책은 필연적으로 계급의 양극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자본축적의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사회적 노동의 생산성 수준이다. 노동생산성의 상승에 따라 일정한 가치[따라서 또한 일정한 크기의 잉여가치]가 체화되어 있는 생산물의 양이 증가한다. 잉여가치율이 불변이라면[또는 떨어지는 경우조차도 노동생산성이 상승하는 것보다 완만하게 떨어지는 한], 잉여생산물의 양은 증가한다.” (1권, 824쪽)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의 발전은 대규모의 협업을 전제하며, 이 전제 아래서만 노동의 분할 및 결합이 조직될 수 있고, 생산수단은 대규모 집적에 의해 절약될 수 있으며, 이미 물질적 성질로 보아 공동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노동수단[예컨대 기계체계 등]이 나올 수 있고, 방대한 자연력이 생산에 이용될 수 있게 되며, 생산과정이 과학의 기술공학적 응용으로 전환될 수 있다. 지배적인 제도가 상품생산이라면, 즉 생산수단이 개인의 소유이어서 수공업자가 고립해서 자립적으로 상품을 생산하든가, 또는 그에게 자립적 생산을 위한 수단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서 판매한다고 하면, [위에서 말한 전제인] 대규모의 협업은 개별 자본의 증대에 의해서만, 또는 사회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이 자본가의 사적 소유로 전환되는 정도에 따라서만 실현된다. 상품생산의 토대 위에서는 대규모 생산은 자본주의적 형태로서만 발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별 상품생산자들의 수중에 일정한 자본이 축적되는 것이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전제가 된다.” (1권, 852쪽)


 [3] 자본의 축적에서 필요로 되는 것은 노동 생산성의 끊임없는 발전이다. 또한 이것은 ‘규모의 경제’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축적이 이루어지는 모습은 다음과 같다.


  “모든 개별 자본은 크든 작든 생산수단의 집적이며, 그에 대응해 크거나 작은 노동자집단을 지휘한다. 모든 축적은 새로운 축적의 수단으로 된다. 자본으로 기능하는 부의 양이 증대함에 따라, 축적은 개별 자본가들의 수중으로 부의 집적을 증대시키며, 그리하여 대규모 생산의 토대와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토대를 확대시킨다. … 집적은 축적으로부터 직접 나오거나 또는 오히려 축적 그 자체와 동일한 것…. 축적은 한편으로는 생산수단의 집적과 노동에 대한 지휘의 집적의 증가로 나타나며, 다른 한편으로는 다수의 개별 자본가들 상호간의 배척으로 나타난다.

  수많은 개별 자본으로 사회적 총자본의 분열 또는 그 단편들의 상호배척은 그들 사이의 흡수에 의해 상쇄된다. 자본들의 흡수는 생산수단과 노동지휘의 단순한 집적[축적과 동일한 의미의 집적]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형성된 자본의 집적이며, 그 개별적 독립성의 파괴이며, 자본가에 의한 자본가의 수탈이며, 다수의 소자본을 소수의 대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 흡수과정이 집적과정과 다른 점은, 흡수과정은 이미 존재하며 기능하고 있는 자본들의 분배의 변화만을 전제하며, 따라서 그 작용범위는 사회적 부의 절대적 증대 또는 축적의 절대적 한계에 의해 제한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곳에서 어떤 한 사람의 수중에 자본이 대량으로 증대하는 것은 다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축적 및 집적과 구별되는 진정한 집중이다.” (1권, 853쪽)


  [4] 위의 내용과 같이, 집중이란 대자본이 소자본을 격파하고 흡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위에서 밝힌 대로 대자본이 노동 생산성을 훨씬 빠르게 증대시킴으로써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행기와 콤바인으로 농사짓는 캘리포니아 쌀을 기껏해야 경운기로 경작하는 남한의 쌀이 당해낼 수 없듯이 말이다.


  “이 자본집중의 법칙 또는 자본이 자본을 흡수하는 법칙”에 대해서는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경쟁전은 상품값을 싸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상품값이 싸지는 것은, 기타 조건이 같다면, 노동생산성에 의존하며, 노동생산성은 생산규모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대자본은 소자본을 격파한다. 또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발전에 따라 정상적인 조건 하에서 사업을 경영하는 데 필요한 개별자본의 최소금액이 증대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비교적 작은 자본은 대공업이 산발적으로나 불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는 그러한 생산분야로 몰려든다. 여기의 경쟁은 적대적인 자본들의 수에 정비례하고 그 크기에 반비례해 격렬해진다. 경쟁은 언제나 다수의 소자본가의 멸망으로 끝나는데, 그들의 자본은 부분적으로는 승리자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부분적으로는 사라진다.” (1권, 854쪽)


 “어디에서나 기업체들의 규모확장은 많은 사람들의 집단노동을 더 포괄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되며, 또 그들의 물질적 추진력을 더 광범하게 발전시키기 위한 출발점으로 된다. 즉, 관습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는 고립적인 생산과정을 사회적으로 결합되고 과학적으로 설계되는 생산과정으로 점차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출발점으로 된다.” (1권, 856쪽. 엥겔스의 주석.)


  [5]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는 다음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다.


  “임금노동에 의한 생산이 일반적으로 되자마자 상품생산은 생산의 일반적 형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 상품생산은 사회적 분업을 끊임없이 증진시키는데, 특정의 자본가가 생산하는 상품은 끊임없이 전문화하고, 보완적인 생산과정들은 독립적인 것으로 끊임없이 분할된다. … 상품생산의 물적 조건들은 점점 더 큰 범위로 여타의 상품생산자의 생산물로서[상품으로서] 개별 자본가와 직면하고 있다. 거기에 발맞추어 자본가는 점점 더 화폐자본가로 등장하게 되며, 그의 자본이 화폐자본으로 기능하는 규모는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반면에,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본조건[임금노동자 계급의 존재]을 만들어내는 동일한 사정이 모든 상품생산을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으로 이행시키는 것을 촉진한다.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의 발달은 모든 이전의 생산형태[주로 생산자의 직접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생산물의 과잉분만을 상품으로 전환시킨다]를 파괴하고 해체시키는 작용을 한다.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은 처음에는 외관상으로는 생산방식 그 자체를 공격하지 않은 채 생산물의 판매를 주관심사로 삼는다. … 그러나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은 정착되자마자 생산자 자신의 노동에 의거하고 있거나 생산물의 과잉분만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것에 의거하고 있는 상품생산의 모든 형태를 파괴한다. 그것은 처음에는 상품생산을 일반화하고, 그 다음에는 모든 상품생산을 점차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으로 전환시킨다.” (2권, 43쪽)


    “그런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경향은 모든 생산을 가능한 한 상품생산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며, 이것을 달성하는 주된 무기는 모든 생산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유통과정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발달한 상품생산 자체가 바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인 것이다. 산업자본의 침입은 어디에서나 이 전환을 촉진하며 그와 함께 모든 직접적 생산자의 임금 노동자로의 전환도 촉진한다.” (2권, 128쪽)


 [6] 자본주의의 이러한 전개 법칙은, 결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서 발생한 특수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생 시기에서부터 관철된 법칙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에서 소생산자의 이해를 대변하고자 하는 것은, 공상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반동적인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임금 노동자 계급에 의해 전복됨으로써, 인류 역사의 ‘부정의 부정’을 완료해야 한다.


   “자본의 시초축적, 즉 자본의 역사적 발생은 결국 무엇으로 귀착되는가? 그것이 노예 및 농노를 직접적으로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키는 것[즉 단순한 형태변화]이 아닌 이상, 그것은 오직 직접적 생산자의 수탈[즉 자기 자신의 노동에 입각한 사적 소유의 해체]을 의미할 따름이다.

  …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의 사적 소유는 소경영의 토대이며, 소경영은 사회적 생산의 발전과 노동자 자신의 자유로운 개성의 발전에 필요한 조건이다. …

  이 생산방식은 토지의 분할과 기타 생산수단의 분산을 전제한다. 이 생산방식은 생산수단의 집중을 배제하기 때문에, 각 생산과정 안의 협업과 분업, 자연력에 대한 사회적 통제와 규제, 사회적 생산력의 자유로운 발전도 배제한다. 이 생산방식은 생산 및 사회가 자연발생적인 좁은 범위 안에서 운동할 때에만 적합하다. 이 생산방식을 영구화하려는 것은, 페쾨르가 옳게 지적하고 있듯이, ‘만인(萬人)의 범인화(凡人化)를 명령’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정한 발전수준에 도달하면 이 생산방식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물질적 수단을 만들어 낸다. 이 순간부터 사회의 가슴속에서는 이 생산방식을 질곡으로 느끼는 새로운 세력과 새로운 정열이 태동하기 시작한다. 이 생산방식은 철폐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철폐된다. 그것의 철폐, 즉 개인적이며 분산적인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집중된 생산수단으로 전환되는 것, 따라서 다수인의 영세한 소유가 소수인의 거대한 소유로 전환되는 것, 그리고 광범한 국민대중으로부터 토지와 생활수단과 노동도구를 수탈하는 것. 이러한 처참하고 가혹한 국민대중의 수탈이 자본의 전사를 이룬다. … 자신의 노동으로 획득한 사적 소유, 말하자면 개개의 독립적 노동자와 그의 노동조건과의 융합에 입각한 사적 소유는, 타인노동[그러나 형식상으로는 자유로운 노동]의 착취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의해 축출된다.

  이 변환이 낡은 사회를 깊이와 넓이에서 충분히 분해시키자마자, 또 노동자가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되고 그들의 노동조건이 자본으로 전환되자마자, 그리고 또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자기 발로 서게 되자마자, 노동이 더욱더 사회화 되는 것, 토지와 기타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이용되는 생산수단[즉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더욱더 전환되는 것, 따라서 또 사적 소유자를 더욱더 수탈하는 것 - 이러한 것들은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제 수탈의 대상은 자영의 노동자가 아니라 [다수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이다.

  이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의 내재적 법칙의 작용을 통해, 즉 자본의 집중을 통해 수행된다. 항상 한 자본가가 많은 자본가를 파멸시킨다. 이러한 집중[즉 소수 자본가에 의한 다수 자본가의 수탈]과 병행해 기타의 발전도 더욱더 대규모로 일어난다. 예컨대 노동과정의 협업적 형태의 성장, 과학의 의식적 기술적 적용, 토지의 계획적 이용, 노동수단이 공동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전환되는 것, 모든 생산수단이 결합된 사회화된 노동의 생산수단으로 사용됨으로써 절약되는 것, 각국의 국민들이 세계시장의 그물에 얽히게 되는 것, 따라서 또 자본주의 체제의 국제적 성격의 증대 등등이 더욱더 대규모로 일어난다. 이 전환과정의 모든 이익을 가로채고 독점하는 대자본가의 수는 끊임없이 줄어들지만, 빈곤·억압·예속·타락·착취의 정도는 더욱더 증대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수가 계속 증가하며 또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메커니즘 그 자체에 의해 훈련되고 통일되며 조직되는 계급인] 노동자 계급의 반항도 또한 증대한다. 자본의 독점은 [이 독점과 더불어 또 이 독점 밑에서 번창해 온] 그 생산방식의 속박으로 된다. 생산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화는 마침내 그 자본주의적 외피와 양립할 수 없는 점에 도달한다. 자본주의적 외피는 파열된다.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조종이 울린다. 수탈자가 수탈당한다.”  (1권, 1047쪽)


  첫 번째 발제는 여기서 마무리하는 바이다. 남한의 농업 생산이 점차 자본주의화 되어 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과정에서 소자본의 몰락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라는 것이 본 발제의 결론이다. 물론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듯이, ‘소자본의 몰락’ 과정은 너무나 폭력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제 이 문제에 대응해 나가기 위한 방법을 다음의 발제에서 이야기 해 보도록 하자.



발제 2.  노동계급적 관점에서 본 농민 문제


-녹테잎


  반세계화 투쟁이 불붙듯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나 쌀 개방과 관련한 농민들의 투쟁은 교육개방, 스크린 쿼터와 함께 주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작년 이경해 열사 분신 일주년을 맞는 농민대회가 9월 10일로 예정되어 있고, 이 투쟁에 많은 농민들이나 농민문제에 관심이 많은 학우들이 참여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투쟁에 매스컴과 정부 역시 주목할 것이라 생각이 든다.

  학생들은 올 여름 농활을 갔다 오면서 많은 농민들을 만났을 것이고,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많이 경험하고 왔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들이 현 상황에 대해서는 농활을 다녀온 분들이 더 잘 알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와 함께 많은 고민을 하고 오셨으리라 생각된다. 농민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입장을 표명해야 하는 것일까? 전국농민회 총연맹에서 이야기 하는 “우리쌀 지키기 식량주권 수호”를 외쳐야 하는가? 과연 농민 문제에 대한 올바른 접근방법은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필자는 이에 대해 노동계급의 입장을 중심으로 농업문제, 농민문제가 현 생산양식에서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고, 농민문제에 관심이 많은 학우들이 어떻게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할지에 대한 원칙적인 입장을 이야기 해보려 한다.

  노동 계급이라니까 싫어하는 학우들도 있을 듯싶다. “또 노동자야? 지겹지도 않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농민이 일을 하니까 노동자라는 건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사회를 계급적으로 바라본 맑스의 입장이다. 맑스를 이야기 하려는 이유는 맑스가 했던 현 체제에 대한 분석이 아직까지도 변하지 않았고, 그가 제시한 길이 아직도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는데 있어서 맑스의 중요한 핵심은 현 시기가 계급 사회라는 지점이다. ‘이제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의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현 자본주의 시기에서 노동자들이 수가 많고, 그들이 자본가랑 사이가 않좋다는 것들이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가 봉건시대와는 다르게 ‘임노동과 자본’, 즉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못한 채 자신의 노동을 팔아 생활하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생산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생산된 물건을 소유하는 자본가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생산관계의 모순이 전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등이 자본주의가 계급투쟁의 시대임을 증명한다. 자본주의의 구성이나 현 시기에 있어서 계급모순이 유효한가 등의 이야기는 지면 관계상 하지 않겠다.

  맑스는 변혁의 주체를 노동자 계급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그들이 변혁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 그들의 조건이 자본주의를 변혁할 수 있는 조건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농민은 계급이라 규정할 수 있는가? 농민은 어떤 존재인가? 우선 농민이라 뭉뚱그려 표현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농민들 중에는 다른 농민들을 고용해서 농사를 짓는 대토지 소유자인 농민도 있을 것이고, 조그만 땅을 지니고(혹은 그것을 임차해서 사용하거나) 그것으로 먹고사는 농민(소농)도 있다. 아마 마지막에 언급한 ‘소농’이 농민의 대부분을 차지 할 것이다. 대부분 농민의 특징은 자신이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가 구성되는 주요한 부분이 임노동과 자본 즉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의 등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농민은 계급으로 분리될 수 있는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을 맑스가 말한 계급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농민이 자본주의의 모순과 동떨어져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모든 민중이 그렇듯 농민도 자본주의 사회가 진행되면서 고통을 받는다. 물론 모든 농민이 그런 것은 아니다. 농민 내에 잘 잘 사는 농민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농민이 있다는 것은 농활을 갔다 와 본 학우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즉 땅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남의 땅을 빌려 근근이 먹고 사는 소농들도 있고, 소농들에 비해 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중농/대농도 있다. 그리고 땅을 많이 소유해서 기업적 농업을 하는 대토지 농민도 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이들의 실질적인 이해관계는 다르게 된다. 우선 대토지를 가지고 있는 농민들은 자본주의가 진행되면서 더욱 집적경영을 하게 되고, 그들의 이해관계는 자본가의 이해와 다르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서 경쟁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는 소농은 자신의 삶의 근거지를 잃게 된다. 아예 토지를 잃은 사람들은 농업노동자가 되거나 빈농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농민들은 산업예비군으로서 자신의 노동을 팔아 살아가는 노동자가 된다. 중농/대농 역시 대토지 소유 농민들과의 경쟁에서 소농으로 전락할 것이다. 여기서 제출하고자 하는 점은 원칙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특히 소농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정리 했다.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소농이란,····이 소농은 소수공업자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이지만, 자신의 노동수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와 구별된다 ; 요컨대 소농은 과거의 생산방식의 잔재이다.


“요컨대 우리의 소농은 과거의 생산 방식의 모든 유물과 마찬가지로 걷잡을 수 없이 몰락해가고 있다. 그들은 미래의 프롤레타리아이다.”


  이렇게 이해관계가 다른 농민들 중에서 노동계급의 이해를 지지 할 수 있는 조건에 있는 농민은 누구일까? 바로 소농이나 빈농일 것이다. 대토지를 소유한 농민들의 이해는 자본가들의 이해와 거의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하게 이야기 하면 부농, 대토지를 소유한 농민은 농업 자본가이고 이들의 이해는 노동자 계급과 일치 할 수 없다.

  이러한 경향에서 볼 때 소농은 노동자 계급과 함께 변혁을 해 나갈 수 있는 하나의 동맹군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생산수단을 보유하고 있는 소농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산수단을 버리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농을 변혁의 동맹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의 현시기적 이해를 수호하는 구호를 함께 외치면서 그들과 함께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엥겔스는 단 시간 내에 그들을 획득하기 위해 사탕발림의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들의 현 시기 요구사안에 그쳐 활동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 우리는 농민을 해방시키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사형 집행을 유예해주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그들의 지금 외치는 요구 중 핵심은 “쌀 개방 반대” 일 것이다. 이 요구 자체만 살펴보자. 우리가 그들의 이해를 보호해 주는 것이 실질적인 대안이 될 수 있겠는가? 만약 농민들의 투쟁이 승리해 수입개방이 완전히 철회된다면 농민들은 번영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몇몇 대토지 농민들은 번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남한 내에서 농민들은 빈농과 부농(농민 노동자와 농민 자본가)로 나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결국 지금의 소농들은 농업자본가가 발달 할수록 그들과의 경쟁에서 밀려 산업예비군으로 전락할 것이다. 결국 그러한 미봉책으로는 어떠한 모순도 이겨내지 못한다. 진정으로 이 세상을 변혁하고 모순을 극복하려 한다면 그들의 지금 이해에 맞추는 요구사항이 아니라 그들이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는 것을 이야기 해야 할 것이다.

  소농에게 있어서 유일한 대안은 과학적으로 농사를 짓는 집단적 대규모생산을 조직하고, 계획적인 생산을 하는 것일 뿐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에도 대규모, 계획적인 생산이 더 효율적이고 더 많은 상품을 재배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엥겔스는 협동조합적 생산을 제시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농장을 협동 조합적 경영으로 통합할 것을 권고하는 것 이외에는 이러한 멸망에 대하여 어떠한 것도 행할 수 없는데, 이 협동 조합적 경영에서는 임금 노동에 대한 착취가 점차로 제거될 것이며, 이 협동 조합적 경영은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의무를 갖는 전국적인 대규모 협동조합의 여러 부문들로 점차 전화되어 갈 것이다”

  물론 이러한 대안이 비현실적일 수 있다. 그러나 농민에 대한 분석과 냉철한 현실인식에서 출발한다면 이것만이 농민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대안이다.

  여태까지 맑스주의에서 농민을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가. 그들이 변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농민 역시 자본주의에서 소수의 부농과 대다수의 빈농으로 나뉘어 질 수밖에 없고, 빈농과 소농은 산업예비군으로 농업노동자가 되던지, 공업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다. 부농 즉 농업자본가들의 이해는 빈농과 소농의 이해와는 상이 할 수밖에 없고, 오히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집적된 생산을 통해 이윤을 더 얻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연대하고 선동해야할 대상은 소농, 빈농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대안은 그들이 가진 토지에 대한 소유욕을 버리고 협동조합적 생산을 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발제 3.  농민 문제에 대한 올바른 실천적 방향은 무엇인가


- 양갱



1. ‘민족농업사수하자!!’에 대해서


 ‘민족농업 사수하자!!’라는 슬로건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솔직히 이러한 슬로건이 대다수다. 전농이라는 단체의 성격과 현재 남한 운동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세력의 성격, 그리고 농업이라는 토지와 연결된 문제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이 안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슬로건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나는 이 슬로건이 그다지 올바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족모순을 앞세워서 자본주의 근간을 이루는 계급모순을 은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농업개방의 문제도 자본주의의 항상적 세계화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근본적 투쟁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은 모순의 근거를 자본주의가 아닌 민족간의 지배, 피지배관계로 돌려버린다. 결국 근원을 회피하는 투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자국의 자본가를 옹호하는 이론까지 나오게 됨으로써 철저히 계급모순을 지워버린다.


 민족이라는 관점은 자본주의를 설명하지 못한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식민지가 존재하던 시기에는 민족해방이라는 운동이 제국주의 모순 타파와 맞물리면서 계급운동과 함께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의 시기에서 민족해방운동은 자칫 우경화의 가능성이 높고, 그러한 부분으로 흘러들어간 부분이 많기 때문에 경계해야한다. 지금에 있어서 민족주의란, 자민족중심의 관점 말고는 도출해내는 것이 없다. 이는 체제변혁에서 필수인 노동자국제주의 관점을 흐리게 하고, 민중들의 우경화를 도울 뿐이다. 미국은 무조건 못된 놈이고, 한국은 피해자라는 망상은 떨쳐야 한다. 착취하는 자는 자본가이고, 억압받는 자는 노동자민중들이다.


 그리고 민족주의의 다른 오류는 ‘일국에서의 농업을 보호하자’라는 요구를 함으로써 체제변혁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자본주의란 것은 지난 봉건적 잔재를 쓸어버리고 생산력을 증대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평가된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 민중의 삶이 피폐하게 되었지만 지난 체제보다 상대적인 긍정성이 포함된다는 얘기이다. 민족주의적 슬로건은 그것을 무시하고 있다. 그저 농민의 이해를 바탕으로 무조건적으로 그들에게 맞추어가고 있을 뿐이다. 솔직히 값싼 농산물이 들어왔을 경우 농민을 제외한 사람들은 반대할 이유가 없다. 이마트와 같은 대형할인점이 동네에 들어섰을 경우 구멍가게 주인들이 결사반대를 하더라도 우리와는 상관없다는 것과 똑같은 논리이다. 생산력의 발달에 의한 진보를 막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진보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산업재편의 무정부성은 이러한 과정을 폭력적으로 진행하게 한다. 우리는 이러한 지점에서 농민의 이해를 바탕으로 운동을 펼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위기에 몰아넣을 수  밖에 없는 현 체제-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대로 말해야 한다. 그것이 자본의 무정부적 세계화에 따른 피해를 없애는 방법이다.



2. ‘쌀 개방을 막고 식량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민중에게로’에 대해서


 이 슬로건이 민족주의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 슬로건을 외치는 사람들은, 지금의 농민의 상황이 신자유주의적 모순에 있다고 보고, 억압받는 민중들에게 이를 거부하고 타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식량주권’2)의 개념은 신자유주의가 초국적자본의 이익만을 향상시켰다고 말하면서, 빈국과 민중의 권리를 지켜내자는 것이다. 이 슬로건에서 말하는 민중의 식량주권에서 우리는 농민의 소유욕을 인정하고, 그것을 초국적 자본으로부터 지켜내자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이 WTO를 격파하고 민중에 대한 억압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 구호의 모호성은 농민, 민중, 국가를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극명히 보여준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윤을 극대화해야 하는 부르주아의 집행기구인 국가를 저항의 주체로 올려놓았다는 점은 그들이 자본주의 모순 철폐에 관심이 있는지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그리고 농민과 민중의 소유욕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이해를 지켜 내려는 모습은 마치 WTO의 위기가 자본주의 모순인 항상적 세계화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정책의 모순으로 생겨난다는 것처럼 보여주고 있다. WTO를 책동하는 자본주의 구조 반대의 투쟁이 아니라, WTO정책 반대로 내걸어버리는 정치의 후퇴인 것이다.


 그들의 정치는 민중에 기반을 둔다고 말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구조 속에서 모든 민중들은 예와 달리 억압받고 있고, 여기에 기반한 운동을 펼쳐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자본주의 시대의 특징이다. 자본주의가 태동하면서부터 농민들은 끊임없이 임노동자로 전락하거나, 자신의 땅을 빼앗기게 되었다. 여성들은 가사노동,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게 되었고, 장애인들은 자본의 이윤추구 과정에서 언제나 배제되어 있는 집단이었다. 신자유주의만의 특징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노동자계급 중심의 운동에서 타파될 수 있는 것이다.


 민중은 단일한 이해를 가지지 못한다. 그들의 계층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받는 민중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계급은 상황에 따라서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농민, 여성, 장애인 등등등 무수한 민중들이 자본주의 시대에서 억압받는 것은 옳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들의 이해가 단일하게 자본주의 철폐라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노동자가 아니고서는 그들의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거부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들의 운동은 자신 계층의 이해를 반영한 자본주의 체제안의 운동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민중들이 저항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민중들은 단일한 이해를 가지지 못한다고 하여도, 항상적으로 억압의 과정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들은 저항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의 올곧음을 지켜야 한다. 농민들은 농민의 소유에 기반한 정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철폐해야한다는, 즉 자본주의를 철폐한다는 운동을 승인하고 그 운동에 복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때 비로소 농민은 저항의 일주체로서 체제 변혁 운동을 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여성, 장애인, 빈민 등등 모든 민중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3. 실천적 방안은 무엇인가?


 지금의 상황에서 농민들의 정치에 꽁무니 쫓아가기 식으로 부합하는 것은 사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의 방향성을 실추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농민의 정치에서 목적의식적으로 결합하여 농민의 정치가 아닌 노동자의 정치로서 세상을 함께 바꾸어 나가자고 말해야 한다. 앞에서도 계속해서 말했듯이 우리의 정치는 프롤레타리아의 정치가 되어 그것을 알려나가고, 현 체제를 무너뜨리는 운동을 해야 한다. 이번 주 토요일 두 곳에서 집회가 열린다. 농민대회와 학습지교사들의 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농민대회의 상황은 이경해씨 자결 1년 되는 날로서 운동하는 단위들이 모여서 WTO개방반대를 외치는 것으로 될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실천적으로 결합하여 프롤레타리아의 정치를 펼치는 것도 분명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활동의 집중의 면에서 우리는 후자의 집회에 참여할 것을 제안한다. 학습지 노동자들은 현재 떨어질 곳조차 없는 비정규직 특수고용노동자들이며, 이러한 노동탄압에 맞서 투쟁을 결의하고 있다. 현재와 같이 비정규직의 투쟁이 노동탄압에 의해 공격당하고, 이주노동자 투쟁 또한 절벽의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개방반대의 활동가들이 모여서 압력을 주는 집회보다는, 노동자대중이 직접 나서서 참여하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대중운동이 더욱 유의미하고 효율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은 엄혹한 현실이다. 노동자계급의 중심성은 무수한 노동탄압과 개량주의의 유혹 속에서 풍전등화의 운명이다. 우리는 노동자계급 중심의 수호를 위해 더욱 강고한 연대와 활동을 펼칠 것을 촉구한다.



참고자료: 소부르주아 운동에 대한 맑스와 레닌의 관점


  1. 맑스


 [1] 맑스는 유명한 『공산당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에 대립하고 있는 계급들 중에서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참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다른 계급들은 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쇠퇴하고 몰락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대공업의 가장 고유한 산물이다. 중간 신분들, 즉 소공업가, 소상인, 수공업자 및 농민, 이들 모두는 중간 신분으로서의 자기의 존립을 몰락으로부터 지켜 내기 위하여 부르주아지와 투쟁한다. 따라서 그들은 혁명적이지 않고 보수적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반동적이다.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려고 한다. 그들이 혁명적인라면 그들이 그들에게 임박한 프롤레타리아트로의 이행을 목도하는 한에서인데, [이때] 그들은 그들의 현재의 이익이 아니라 그들의 미래의 이익을 옹호하며, 그리하여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 서기 위하여 그들 자신의 입장을 포기한다.” (칼 맑스, 「공산주의당 선언」, 『저작 선집』1권, 410쪽)


  [2] 당장의 현실에서는 노동자건 농민이건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배 계급의 사상들은 어떠한 시대에도 지배적인 사상들”인 것이다. 그런데도, 왜 하필 노동자 계급만이 혁명적인 계급으로 될 수 있는가? 이것은 맑스주의가 확고하게 유물론의 토대에 서 있기 때문이다. 모든 계급은 자신들의 계급적 처지를 자각함으로써 정치적 실천에 나서게 된다. “의식은 결코 의식된 존재 이외의 어떤 것일 수 없으며, 인간들의 존재는 그들의 현실적 생활 과정”이다.3) 자본주의의 혁명적 철폐를 자신의 계급적 이해로 가지는 계급은 오로지 노동자 계급밖에는 없다. 또한 자본주의의 발전은 노동자 계급에게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전복시킬 수 있는 물질적인 힘을 쥐어준다.


  “대공업은 서로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한 장소에 집결시킨다. 경쟁이 이해 관계에 따라 그들을 갈라 놓는다. 그러나 임금의 유지라는, 고용주에 대항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동의 이해가 그들을 저항, 곧 단결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사상으로 결집시킨다. …

  경제적 조건들은 먼저 그 나라의 대중을 노동자들로 바꾸어 놓았다. 자본의 지배는 이 대중에게 하나의 공동의 지위, 공동의 이해를 만들어 주었다. 이리하여 이 대중은 자본에 대해서는 이미 하나의 계급이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직 그렇지 않다. 우리가 단지 그 몇몇 국면들만을 지적했던 투쟁 속에서 이 대중은 결합하고 자신을 대자적 계급으로 구성한다. 대중이 옹호하는 이해는 계급의 이해가 된다. 그런데 계급 대 계급의 투쟁은 정치 투쟁이다.” (칼 맑스, 「철학의 빈곤」, 『저작 선집』1권, 294쪽)


  [3] 반면 소부르주아의 경우에는 끊임없이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 동요할 수밖에 없다. 그들 계급의 본질 자체가 소‘자본가’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몰락할 수밖에 없지만, 한편으로는 소유욕을 포기할 수 없는 그들, 즉 “소부르주아는 살아 있는 모순”이다.


  “프루동 씨가 더더욱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성에 조응하여 사회적 관계들을 생산하는 바로 그 인간들이 또한 이념들, 범주들, 즉 바로 그러한 사회적 관계들의 추상적, 이념적 표현을 생산해 낸다는 것입니다. … 프루동 씨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소부르주아지의 철학자, 경제학자입니다. 소부르주아는 발전된 사회에서는 자기 자신의 지위로 말미암아 부득이하게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자가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학자가 됩니다. 즉 소부르주아는 대부르주아지의 화려함에 현혹되고 인민의 고통에 공감합니다. 소부르주아는 부르주아인 동시에 인민입니다. 그는 중용과는 구별된다고 자부하는 진정한 평형을 발견했다고, 편파적이지 않다고 내심 우쭐댑니다. 이와 같은 소부르주아는 모순을 신격화합니다. 왜냐하면 모순이 그의 존재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은 실행에 옮겨진 사회적 모순에 지나지 않습니다.” (「맑스가 빠리의 파벨 바실리예비치 안넨코프에게」, 『저작 선집』1권, 588쪽)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사회 전체를 변혁할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사회 상태가 변화되어 현존 사회가 가능한 한 자기들이 견딜 만하고 살기 편하게 되는 것을 갈망한다. … 노동자들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들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임금 노동자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지만 다만 이들 노동자들이 더 많은 임금을 받고 한층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기를 이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들은 희망한다. … 요컨대, 그들은 많건 적건 은폐된 자선으로 노동자들을 매수하려 하고, 노동자들의 처지를 일시적으로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그들의 혁명적 힘을 파괴하려 한다.” (맑스/엥겔스, 「1850년 3월의 호소」, 『저작 선집』2권, 118쪽)


  [4] 그렇다면 맑스는 소부르주아 계급의 운동에 대해서 무조건 배척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는 “(노동자 계급에) 대하여 다른 모든 계급들은 하나의 반동적 대중일 뿐이다”라고 주장한 라쌀레를 격렬히 비판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몰락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소부르주아 계급을 노동자 계급이 획득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여전히 봉건제와의 투쟁이 완료되지 않았던 맑스의 시대에서, 노동자 계급은 민주주의 투쟁에서 소부르주아 계급과 연대함으로써 그것을 현실화 할 수 있었다. 물론 맑스는 이 과정에서 노동자 계급의 독자성을 견결히 지킬 것을 요구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 비해 혁명적인 것은 대공업의 기반 위에서 성장한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이 부르주아지가 영구화 하려고 시도하는 자본주의적 성격을 생산에서 벗겨 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덧붙어 있다: “중간 신분들은 … 자신들에게 임박한 프롤레타리아트로의 이행을 목도하여 … 혁명적으로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중간 신분들이 “부르주아지와 함께”, 더구나 봉건 영주들과 함께, 노동자 계급에 대하여 “하나의 반동적 대중을 이룰 뿐”이라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다. (맑스, 「고타 강령 초안 비판」, 『저작 선집』4권, 379쪽)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당파에 대한 혁명적 노동자 당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 혁명적 노동자 당은 자신이 전복하고자 하는 분파에 대항할 때에는 이들 민주주의 당파와 공동 보조를 취한다 ; 이들 민주주의 당파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 발걸음을 멈추고자 할 경우에는 언제나 이들 민주주의 당파에 반대한다.” (맑스/엥겔스, 「1850년 3월의 호소」, 『저작 선집』2권, 118쪽)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서나, 현존의 사회 정치 상태를 반대하는 모든 혁명 운동을 지지한다. 이 모든 운동들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그것이 더 발전한 형태를 띠고 있든 덜 발전한 형태를 띠고 있든 소유 문제를 운동의 기본 문제로 내세운다.”  (칼 맑스, 「공산주의당 선언」, 『저작 선집』1권, 443쪽)



  2. 레닌


  노동자 계급을 변혁의 주체로 정립해 낸 맑스주의의 핵심적 사상은 레닌에 의해 계승되며 또한 현실화 된다. 짜르 전제 하의 후진 농업국이었던 러시아의 상황은 노동자 계급이 농민들을 획득해야 함을 절박한 실천적 과제로 제기하고 있었다.


  [1] 먼저 레닌의 당 강령 논의 자료를 통해, 그가 맑스주의의 정수를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이해하고 있음을 확인해 보자.


   “모든 소생산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특수한 계급을 이루며, 비록 그들이 수천가지 끈과 매개적 단계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연결되어 있을지라도 역시 특수한 계급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먼저 우리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을 배타적으로 추출하고, 오직 그런 다음에 프롤레타리아트가 모두를 해방시킬 것이고 모두에게 호소하며 모두를 초청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국제 사회 민주주의는 피착취 근로대중들의 해방운동의 선두에 선다…’ 결코 아니다. 국제 사회민주주의는 오직 노동계급만의 오직 노동계급 운동만의 선두에 서며, 만일 이 계급에 다른 분자들이 참여한다면, 이들은 다만 분자들이지 계급은 아니다. 또한 그들은 오직 ‘그들 자신의 입장을 포기할’ 때에만 완전하게 절대적으로 이쪽 편이 된다.”

  “프롤레타리아트 이외의 ‘피착취 근로대중들(주로 소생산자)’의 다른 부분은 부르주아지에 대한 투쟁에서 오직 부분적으로 혁명적이다.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에 가담하기 위하여’ 그들이 ‘스스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 설’(『공산당 선언』)때 그들은 혁명적이다.”

  “‘독재’의 개념이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외부의 지지에 대한 적극적인 인정과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일 우리가 정말 적극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들의 혁명,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성취할 때에 소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지할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독재’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압도적인 다수가 완전히 우리를 지지하게 되어 독재가 없어도 잘되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연성을 인정하는 것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진실로 혁명적인 계급이라는 『공산당 선언』의 테제와 가장 긴밀하고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다.” (레닌, 「RSDLP 강령의 준비자료」, 『레닌 저작집』2-1, 전진출판사)


  [2] 이러한 관점 아래 레닌은 러시아의 공업 도시에서 형성되고 있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을 주목한다. 대공업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형성된 그들이야말로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철폐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다.


  “강령은 먼저 대공장들의 급속한 발전을 다룬다. 왜냐하면 이것이 모든 낡은 생활조건, 특히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현대 러시아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

  … 지금 강령이 기술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낡은 생활방식의 변화이다. 강령은 대공장들이 소수공업자와 농민들을 파산시켜 그들을 임노동자로 전환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소규모생산은 모든 곳에서 대규모생산으로 대체되고 있으며, 이러한 대규모생산에서 노동자대중들은 단지 자본가의 고용인일 뿐이다. …

  … 변화는 소규모생산이 대규모생산으로 대체됨에 따라 생산이 많이 개량된다는 사실에 있다. … 공동노동은 개인노동보다 훨씬 더 효과적(생산적)이며, 훨씬 더 쉽고 빨리 상품을 생산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개량은 오직 자본가들에게만 향유된다. …

  대자본에 직면한 지금, 조직은 노동자들에 필연적이다. … 1) 일년 내내 규칙적인 작업을 요구하는 기계제 생산을 도입한 대공장은 노동자와 토지 및 그 자신의 농장 사이의 연결을 완전히 단절하여, 그를 절대적인 프롤레타리아트로 만든다. … 2) 게다가, 수십만 노동자들의 공동노동은 그 자체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필요사항을 공동으로 토론하고, 공동행동을 취하는데 익숙하게 한다. … 3) 마지막으로, 노동자들은 이 공장에서 저 공장으로 옮겨 다니면서 다른 공장의 조건과 관행을 비교하는데 익숙하게 되어, 모든 공장에서 착취의 동일한 성격을 확인하고 자본가와 충돌했던 다른 노동자들의 경험을 획득하고, 노동자들의 연대감을 고양할 수 있게 된다.  …

  … 노동자들은 이제 각각의 고립된 공장의 개별적 소유자와 부딪히는 대신에, 전체 자본가계급과 그들을 지지하는 정부와 부딪히게 된다. 전체 자본가계급은 전체 노동자계급에 대항하는 투쟁을 수행한다. … 따라서 전체 노동계급의 공동행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고립적인 반란에서 전체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성장한다. 고용주에 대항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계급투쟁으로 전화한다. … 또 마찬가지로 노동자들 역시 노동계급 전체의 단결, 공동행동을 필요로 하며, 그 목적을 위해 국가기구에 대한 영향력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 지금 대공장이 최고로 발전시킨 것은 현대사회의 근저에 있는 임노동의 착취이다. 모든 산업의 모든 자본가들이 사용하여, 러시아 노동계급 인구의 전체대중이 고통받게 하는 모든 착취방법들은 공장에서 집중·강화되며, 정규적 지배를 정당화하며 노동자들의 노동과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확산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자본가가 노동자의 피땀을 짜내는 전체적인 과정과 체계를 만들어낸다. …

  이 모든 예들을 통해서 공장은 노동자의 착취를 강화하고, 이런 착취를 보편화하며, 그것을 전체적 “체계”로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노동자는 억압자가 어느 하나의 자본가가 아니라 전체 자본가계급이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착취체계는 모든 공장에서 똑같기 때문이다. … 노동자들이 자신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노동착취를 지향하는 사회체제 전체를 다루어야 한다. … 따라서 고용주에 대항한 공장노동자들의 투쟁은 불가피하게 전체 자본가계급에 대한 투쟁, 자본의 노동착취에 기초한 전체 사회질서에 대한 투쟁으로 전화한다. 그것이 바로 노동자들의 투쟁이 사회적 중요성을 획득하고, 타인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모든 계급에 대항하는 모든 근로인민의 투쟁으로 전화되는 이유이다.” (레닌, 「사회민주주의당의 강령 초안과 해설」, 『레닌 저작집』1, 전진출판사)


  [3]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반드시 다수 농민 대중을 획득해야지만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이고 치밀한 계획 속에 당면 활동의 집중점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활동의 역량을 대공장에서의 투쟁에 우선적으로 투여해야 한다. 그로써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 강고해진다면 기회주의적으로 동요할 수밖에 없는 소부르주아 계급은 노동자의 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활동은 일차적으로 또 주요하게 공장, 도시 노동자들을 지향한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는 자신의 힘을 분산시켜서는 안 된다. 사회민주주의적 사상을 가장 잘 받아들이고, 지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장 잘 발달되어 있고, 또 나라의 정치적 중심지에서 그 숫자나 집중도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신의 활동을 집중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공장과 도시노동자들 사이에 강고한 혁명조직을 창출하는 것이 사회민주주의가 직면해 있는 첫 번째의 가장 긴급한 임무이며, 오늘날 우리 자신이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힘을 공장 노동자들에게로 집중할 필요성을 인정하며 우리의 힘을 분산시키는 것을 반대하고 있지만,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와 노동계급의 다른 계층을 무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신의 힘을 수공업자나 농촌 노동자들에게 쏟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을 무시할 의도는 전혀 없다. … 따라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편협해서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근로 주민 대중을 방치하려 한다고 비난하는 자들은 지극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선진 부분 가운데에서의 선동은(운동을 확장하는 것과 같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 전체를 일깨우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도시의 노동자들 가운데로 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의 사상을 불어 넣는다면, 이는 이 사상을 더 작고 더 여러 갈래로 흩어진 수로를 따라 쉬지않고 흐르게 할 것이다.”

  “절대주의에 대항하는 투사로서 정치적 저항에서의 다른 모든 사회계급과 그룹들에 대한 노동계급의 태도는 유명한 『공산당 선언』에 명시된 사회민주주의의 근본원칙에 의해 아주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다. … 사회민주주의자는 공동의 적을 보다 빨리 파멸시키기 위해 이같은 지지를 보내지만, 이 일시적 동맹자들로부터는 그들 자신을 위한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아무 것도 양보하지 않는다. … 사회민주주의자는 노동자들과 여러 저항세력과의 이런 혹은 저런 공동행동을 지적하면서도, 언제나 노동자들을 다른 세력과 구별하고 이 연대가 일시적이고 조건적임을 항상 강조하며,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들의 오늘의 동맹자가 내일 그들 자신의 적일지도 모른다는 계급적 독자성을 항상 강조할 것이다. … 절대주의를 향한 모든 다른 계급들, 세력들 그리고 주민층의 적대감은 무조건적이지 않다. …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적 제도를 위한 전위투사일 수 있다.” (레닌,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의 임무」, 『레닌 저작집』1, 전진출판사)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권력 장악을 주요한 목적으로 하는 독립적인 노동자 정당을 결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다른 계급들과 정당들을 “하나의 반동적 대중”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와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사회·정치적 생활에 참여해야 하며, 반동적인 계급들과 정당들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계급들과 정당들을 지지해야 하고, 현존 체제에 대항하는 모든 혁명적 운동을 지지해야 하며, 모든 억압받는 민족과 인종, 모든 박해받는 종교, 권리를 박탈당한 성(性) 등의 이익을 옹호해야 한다.”(레닌,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의 항의」, 『레닌 저작집』1, 전진출판사)



  ▶ 시간의 문제로 인하여 주로 맑스와 레닌의 글을 발췌 인용하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상세한 논평을 진행하지 못한 점, 그리고 그것을 오늘날의 상황에 구체적으로 적용하지 못한 점은 우리 역시 대단히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글이 일정한 의미를 갖는다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 운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나 위의 글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것 ; 그리고 맑스 레닌의 관점이 과연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한가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고민할 수 있으리라는 것 ; 운동이 주관적 의지로써가 아니라 오로지 엄밀하게 고찰된 과학적 인식을 통해서만 실천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결국 혁명주의적 이론과 기회주의적 이론을 분별 정립하는 것으로밖에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 ; 그러한 판단을 가져가는 과정에서 위의 글이 분명한 자극이 될 수 있으리라는 것.

  아울러 노동해방학생연대의 입장을 밝히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맑스와 레닌의 정치 이론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토대 위에 확고하게 서 있다고 확신하며, 그것의 정당성은 러시아 혁명을 비롯한 수차례의 역사적 경험에서 되풀이되어 입증되었다고 판단한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 맑스와 레닌의 이론을 속류화 하며 왜곡하는 갖가지 기회주의적 사상 ― 민족주의, 관념론, 엘리트적 무정부주의 등등 ― 에 가차 없이 투쟁해 나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덧붙이도록 하겠다. 언제부터인가 운동 진영에서는 건강한 논쟁의 기풍이 사라지고 흑색선전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비방이 난무하게 되었다. 그 중에 하나는, 우리가 맑스와 레닌의 제자임을 분명하게 공인한다는 것으로 인해 ‘교조주의자’로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단, 그렇게 말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맑스주의를 ‘교조주의’적으로 이해할 만큼의 이론적 역량도 갖추고 있지 못함을 확인해 둔다. 그렇다면 맹목적인 써클주의적 활동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대의를 위해 자신의 정치를 엄밀히 정립해 나가는 과정이 우선이라는 점을 동지적으로 충고하고 싶다. 다음으로,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우리는 맑스 레닌의 정치 이론을 옹호하고 있으며 이것에 대하여 논리적 근거를 갖춘 비판이 제기된다면 언제라도 성심성의껏 비판에 답변할 용의가 있음을 밝혀 둔다. 그리고 논쟁의 과정은, 정치적 타당성은 물론이며 논쟁에 임하는 태도까지도 대중이 판단할 수 있도록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할 것이다.


1) 이에 앞서 윤수종은, 호당 농가 소득이 도시 근로자 소득의 75% 수준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개의 경우 ‘평균소득’이라는 개념은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예를 들어, 1조 7천억원의 재산을 가진 이건희와 통장 잔고 0원을 자랑하는 나의 ‘평균 소득’은 8천 5백억원이지 않은가. 특히 농촌 사회에서는 농업 인구가 대개 고령화 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더더욱 도시와의 평균 소득 비교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물론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농촌은 도시에 비해 문화적·사회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2) “식량주권이란 곧 초국적 자본과 농산물 수출국들의 식량독점과 침탈에 맞서 농민과 민중, 각 나라가 자신들의 농업과 식량정책을 규정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생산, 토지, 종자, 물 등을 생산주체인 농민들이 조절 통제할 수 있는 권리, 나아가 안전한 식량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자국민에게 안정적으로 식량을 제공하기 위해 생산과 공급을 통제할 수 있는 각 나라의 권리를 포함하는 '민중의 식량주권'을 의미한다.” -파병철회! 노무현 퇴진! 전학투위 선봉대 자료집 中


3) 요즘 들어 이러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ABC를 멋대로 왜곡하면서, 자신들의 관념론으로의 이탈을 합리화하고자 하는 치들이 있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이러한 관점은 ‘경제 결정론’이며 이것은 ‘맑스를 왜곡하여 이해한’ 엥겔스에게서부터 시작된 경향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왜곡인가를 엥겔스 스스로로 하여금 반박하게끔 하자.

   “유물론적 역사 파악에 따르면, 역사에서 종국적인 결정적 계기는 현실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입니다. 맑스도 나도 결코 이 이상의 것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명제를 경제적 계기가 유일한 결정적 계기라고 왜곡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명제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추상적이고 허무 맹랑한 공문구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경제적 처지는 토대입니다. 그러나 상부 구조의 다양한 계기들 - 계급 투쟁의 정치적 형태와 계급 투쟁의 결과들 - 전투가 끝난 후 승리한 계급이 확립한 헌법 등등 - 법 형태, 그리고 또 이 모든 현실적 투쟁이 거기에 참가한 사람들의 머리에 반영된 것으로서의 정치적, 법률적, 철학적 이론, 종교적 견해와 이 견해의 교의 체계로의 가일층의 발전 등도 역사적 투쟁의 진행 과정에 영향을 주며 많은 경우에 주로 이 투쟁의 형태를 결정합니다. 이 모든 계기들은 상호 작용을 하며, 이 상호 작용 속에서 결국 경제적 운동은 무한히 많은 우연들(즉, 그 내적 상호 연관이 너무 멀거나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상호 연관이 없다고 간주하고 지나쳐 버릴 가능성이 있는 사물들과 사건들)을 통해서 필연적인 것으로서 자신을 관철해 갑니다.” (「엥겔스가 쾨니히스베르크의 요제프 블로흐에게」, 『저작 선집』6권, 5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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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년 10월 5일)슈퍼스타 이수호- 사회적 합의주의

 

  발제 1. 사회적 합의주의란 무엇이며 그것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 최바울(노학연 고대모임 회원)



 0. 어떻게 싸워야 할까 - 강경파와 온건파?


 ① 투쟁이 계속되면 선거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빨리 투쟁을 정리하고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을 당선시켜 열사의 뜻을 계승하자.

  ② 박일수 열사의 죽음을 대공장에서 비정규직 투쟁의 돌파구로 만들어내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공동투쟁으로 열사의 뜻을 계승하자.


 ① 고용허가제는 이주 노동자들을 현대판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고용허가제를 완전 철폐해야 한다. 그리고 이주 노동자들의 싸움에 남한의 노동자들 역시 연대해야 한다.

  ② 고용허가제가 문제가 많지만 당장 그것을 없앨 수는 없다. 고용허가제의 안 좋은 점들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이주 노동자들을 돕는 길이다. 그것은 열린우리당의 개혁적 의원들과의 정책 협의로 가능하다.


  1. ‘온건파’ ― 사회적 합의주의의 역사


  남한의 노동운동은 87년 6월 항쟁 이후, 7-9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시작된다. (이 시기 통계를 살펴보면 120만의 노동자들이 노동악법을 무시하고 3255건의 불법 파업을 벌였으며, 1400개가 넘는 신규 노조를 건설하였다.) 물론 전태일 열사의 뜻을 이은 청계피복노조를 포함하여 여러 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진정으로 대중적인 규모로서 노동자 계급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이 때부터이다. ‘민주노조’로 이름 붙여진, 실제로는 회사 측과 완전히 한통속인 어용노조를 깨뜨리고 노동자들 스스로가 자주적으로 건설해 낸 노동조합 운동은 남한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것이 되어왔다.

  남한 노동자 계급의 폭발적인 힘에 직면하여 운동 진영 내에서의 정치적 논쟁 역시 활발하게 벌어진다. 궁극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위한 길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벌어졌던 열띤 논쟁은 두 가지 큰 흐름에 의해 크게 굴절된다. 하나는 91년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붕괴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92-93년 경에 접어들면서 남한 자본주의의 성장으로 인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안착으로 민주노조 운동이 예전과 같은 전투성을 상실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운동 주체들은 이제 이전과 같은 식의 ‘빡센 투쟁’ 노선을 폐기하고 합법 정당을 통해 체제의 틀 안에서 안정적으로 활동해 나가겠노라고 자신들의 전향을 선포했다.

  이러한 정치적 경향이 곧바로 노동조합 운동에 강하게 착색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95년 민주노총의 건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민주노총은 이전 시기 민주노조 운동의 중심이었던 중소기업 노동조합 중심의 전노협뿐만 아니라 대기업 노조와 사무전문직 노조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건설된다. 그리고 바로 이 민주노총의 1기 지도부의 위원장이 오늘날 이름 높은 권영길 씨이다. 이들 지도부는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노총”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사회개혁투쟁”을 중심으로 시민단체들과 연대, 경영 참가와 정책 참가를 중요시하면서 노사관계개혁위원회, 노사정위원회 등 노사정 3자 기구에 적극 참여하는 노선을 취했다. (바로 이러한 노선을 옹호하는 세력들이 바로 “국민파”이다.) 그들에 따르면, 이전처럼 빡세게 투쟁만 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별로 없으니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으며 살자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노동자들의 이익을 실질적으로 증진시키는 길이라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투쟁보다는 상층에서의 대화와 타협을 더 선호했던 이들은 과연 자신들의 말대로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실질적으로 증진시켰는가? 우리는 96-97의 노동법개악 투쟁의 경험과 97-98년 노사정 합의를 통해서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96년 말, 당시 김영삼 정권은 노조의 정치활동을 허용하고 복수노조 금지와 제3자 개입금지를 폐지하는 대신에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등을 도입하는 노동법 개정을 여당 단독으로 날치기로 처리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이제 더 이상 민주노조 운동을 군부 독재 식으로 찍어누를 수는 없다는 것을 정부도 인식했다는 것, 그렇다면 합법성을 인정해주지만 그것을 철저하게 제도권 내로 포섭하면서 노동 대중에 대한 착취도를 강화해 보자는 속셈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맞선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하지만 “국민과 함께하는” 지도부는 아래로부터의 폭발적인 대중 투쟁을 끌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파업 투쟁을 관료적으로 통제해 나가기에 급급했다. 왜냐하면, 오직 그러했을 때만이 그들이 부르짖는 정부와의 대화와 타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정부와의 물밑 협상에 끝까지 목을 맨 그들은 결국 파업 투쟁의 열기가 꺾일 줄 모르던 1월 26일 정부의 민주노총 합법화 약속을 대가로 총파업을 수요파업으로 전환해버린다. 결국 이후 여야합의로 개정된 노동법은 애초 정부의 의도가 그대로 반영된 것에 다름 아니었다. 민주노총의 국민파 지도부는 정부의 충실한 들러리로 기능했을 뿐이다.

  97-98년의 IMF 위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황이 닥쳐오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개시한다. 그들의 탈출구는 노동자들의 대량 해고와 대규모의 임금 삭감에 달려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역시 민주노총의 배석범 위원장 직무대행 지도부는 노사정위원회에 참가하여 정리해고제 시행과 근로자파견제 법제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노사정 합의문에 조인한다. 이때부터 비정규직 노동자가 급속도로 산출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800만에 달하게 되었음을 떠올려보라! 이들 국민파 관료들은 자신들이 자본과의 대등한 협상 파트너로 인정되는 것 따위와 수많은 노동자 대중의 절박한 생존권을 맞바꿨던 것이다!


  2. 사회적 합의주의의 오늘 - 민노당의 의회 진출과 ‘새로운’ 노사정위


  국민파 관료들, 사회적 합의주의론자들이 말하는 대화와 타협이 결코 노동자 계급의 이해와 관련이 없는 것임은 이들 관료들에 대항한 노동자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97-98 노사정 합의 이후 열린 임시대의원대회장은 쇠파이프로 무장한 현장의 조합원들에게 점거당할 정도였다. 결국 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위원회 합의안은 기립투표를 통해서 압도적 다수에 의해 부결된다. 물론 이후 결의된 총파업이 기회주의적인 지도부에 의해 흐지부지되면서 이미 떠난 배를 뒤돌릴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러한 상황은 더 이상 국민파 관료들이 노골적으로 대화와 타협을 말하기 힘든 상황을 만들어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끈질겼다. 그들은 이 모든 실패의 원인이 국회에 노동자들을 대변할 정치 세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강변하기 시작했다. 96-97 총파업이 실패한 까닭도 자신들의 투쟁회피주의, 관료주의 때문이 아니라 “자본 우위의 사회적 세력관계를 반전”시키고 “구체적인 법개정 성과를 획득하는데 필요한 정치력과 교섭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런 논리 아래 이미 97년 대선 시기 “국민승리 21”이라는, 도대체가 노동자 계급의 해방이라는 사상과는 손톱만큼의 관련도 없는 정체불명의 운동을 펼친 바 있었다. (다 떠나서 이들의 선거 슬로건은 “일어나라 코리아”였다!) 98년 노사정위 합의안 부결과 지도부 총사퇴, 총파업 철회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민주노총은 국민승리 21을 토대로 하여 정치세력화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한다. “민주노총은 국민승리 21을 확대재편하여 노동자중심의 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적극 지원연대한다”는 정치방침을 채택했던 것이다. 이것의 결과물이 오늘날의 민주노동당이다. 사실상 민주노동당의 화려한 등장은 노동자 계급의 비타협적 투쟁이 관료적으로 왜곡되고 통제된 이후에야 가능했던 것이다.


  사회적 합의주의론자들의 원대한 구상은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과 더불어 현재 이수호 위원장의 집권 이후 가속화된 산업별노조 건설 흐름으로 완전한 틀을 갖추게 된다. 그들에게 산별노조는 대정부 교섭력을 높이기 위한 좋은 압박 수단에 불과하다. ‘노동자를 위한 법을 만들어 내는 정치투쟁은 민주노동당, 임금을 올려받고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경제투쟁은 몸집을 불린 산별노조’라는 양날개 공식이 성립된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노동조합 차원에서 노사정위원회에 재참여 하는 것뿐이다.

  눈여겨 볼 지점은, 노사정위원회에 대한 조합원 대중의 부정적 인식이 광범위하다는 것을 사회적 합의주의론자들 역시 명백하게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내실있는 준비 이후에 수행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들에 따르면 노사정위원회는 논의 의제를 대폭 확대하고, 노사정 협의의 틀을 산업별, 지역별로 다양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이 개편될 노사정위에 참가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토론을 넘어 중층적인 교섭구조 속에서 어떻게 우리의 정책적 역량을 강화하고 조직력을 강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노사정위원회의 참가를 향한 자신의 구상과 그것의 정치적 본질 ― 자본에게 완전히 굴종하는 것 ― 을 은폐하려 하고 있다.

  자본과 정권의 입장에서야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참가 흐름은 쌍수를 들고 반길 일이다. 노무현 정권이 자본을 위해 야심만만하게 준비한 카드인 ‘노사관계로드맵’이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합의’의 외양을 쓰고 관철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그들의 입장에서야 손뼉을 치면서 좋아할 일 아닌가! 마치 남는 게 더 많기 때문에 뒷돈을 써서 자리를 청탁하듯이, 민주노총의 관료 몇 명의 사회적 지위를 강화해줌으로써 자본의 몸집을 불릴 수 있다면 이것만큼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출범 첫 해부터 배달호 열사 투쟁, 화물연대 투쟁, 철도 투쟁들에 데어버린 노무현 정권은 어서어서 노동운동을 체제 내로 포섭하길 원한다. 민주노총의 주문대로 정부는 노사정위를 “명실상부한 사회적 대화의 총괄기구로 개편”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다.

  하반기 들어 가속화 되던 노사정위 참가 흐름은 현재 민주노총의 숨고르기로 다소 연기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노사정위의 참가는 이미 시기 선택의 문제로밖에 되지 않고 있다. 민주노동당부터 시작해서 업종, 지역별로 얽힌 교섭 구조 속에서 노사정위 참가를 위한 주객관적 조건은 이미 충분히 무르익고 있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노동자들의 반발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통제해 나가느냐 하는 점에 있을 뿐이며, 이것이 노사정위 참가가 유보된 유일한 까닭이다.


  3. 사회적 합의주의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하는가?


  언뜻 보기에는 노사정위 참가를 비롯하여 정부/자본과 대화와 타협을 벌이자는 것이 뭐 그리 잘못된 이야기인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교섭 없이 투쟁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옳다. 하지만 개별 사업장에서의 교섭은 투쟁을 보조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면, 노사정위 참가의 문제는 국가의 영역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체제 내화시키려는 자본의 의도에 완전히 굴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즉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과 정권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점에 있다. 과연 노동과 자본은 한 배를 탄 운명인 것인가? 노동자가 잘 되려면 기업이 잘 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국가는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분쟁을 중립적으로 중재해주는 공간인 것인가? 이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사회적 합의주의 흐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장한다.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공동의 이해라는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는 자본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과, 이 과정에서 국가권력은 오로지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조직된 폭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고 있다.

  ‘온건파’, ‘국민파’, ‘사회적 합의주의론자’들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공동의 이해가 존재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으며, 그로써 그들의 주관적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본가 계급의 충실한 보조자로 기능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정권과 자본의 본질뿐만 아니라 사회적 합의주의의 본질 역시 똑똑히 알고 노동자 계급의 관점으로 산악같이 일떠서 투쟁해야 할 것이다.


보론.‘평화적으로! 점진적으로!’를 외치는 이들은 결국 누구의 편인가


- 돌멩이(노학연 고대모임 회원)


  1. 선한 의도, 그러나 예견된 실패


  체제를 변혁하는 투쟁을 해야한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회가 모순이 많고 바꿔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혁명을 얘기하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이고 폭력적이다. 사회주의는 이미 망했다. 주도적인 위치에 올라 사회 전체를 점진적으로 바꾸는 게 훨씬 현실적이다.'


  여기에 깔려있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사민주의와 맞닿아 있다. ‘사회적 합의’와 동의의 절차를 통해 '평화적으로' 정권을 획득해서 점진적으로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겠다는 프로젝트.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사회주의적 이상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선한 의도는 역사상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본주의 안에서 외쳐지는 자유, 평등, 합의, 평화, 공생은 자본주의 사회의 추악한 실상을 가리기 위한 가면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사민주의는 그 가면을 더욱 공고하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보통 이러한 견해를 개량주의 또는 수정주의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왜?


  2. 실제로 권력을 가진 자는?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의 길이 실패한 예로서 우리는 종종 1970년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얘기한다. 당시 사회주의자였던 아옌데는 선거에서 '민주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세계의 많은 좌파들은 이것이 '사회주의로 가는 칠레식 길'이라며 흥분했다. 그러나 변화는 쉽지 않았다. 이제 자본가들이 공장 문을 닫고 파업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지원을 중단하고 부채 상환을 요구했다. 공장주의 사보타지로 생산이 중단되고 물가가 오르자 노동자들 역시 이에 맞서 결집했다. 그러나 아옌데 정부는 노동자들의 편을 들지 않고 중재자를 자처했다. 자본가에게 유리한 개각단행과 정책마련으로 지배계급(여전히!)을 달래려 했으나 이는 문제를 전혀 해결해주지 못했다. 결과는 3년 후의 군부 쿠데타였고, 아옌데를 지원하며 실질적인 조직적 힘을 비축하지 못한 좌파는 전멸하고 말았다.

  칠레뿐만이 아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자본은 엄청나게 불어났고 그러한 물적 토대를 이용, 사회주의 소련에 대당하기 위한 사민주의가 성행할 수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노동당, 공산당 등이 수차례 집권에 성공했으나 그들의 정책은 결코 사회주의적 이상을 구현하지 못했다. 길었던 전후 호황기가 끝나고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도래하고부터 이러한 이상은 환상일 수밖에 없음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에게 뼈아픈 교훈을 던져준다. 자본주의 사회의 실제적인 권력은 대통령이나 다수 의석을 확보한 정당에게 있지 않다. 당연히 '국민'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순진한 사민주의자들이 법 개정과 정책 마련으로 점진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을 때, 금융, 산업, 상업 자본가들은 즉각적이고도 확실한 사보타지를 통해 전 사회를 뒤흔들어 버릴 수 있다. 이들은 생산을 중단하고 자본을 해외로 빼돌릴 수 있고 다른 자본들과 연합해 경제적인 압박을 가할 수 있으며 언론을 통한 흑색 선전으로 사회주의 정권을 위기로 몰아갈 수도 있다. 자본의 지배력을 손상시키고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실질적인 정책이 상정되면 자본은 즉각 이러한 조처들로 정부를 위협하고, 결국 이러한 정책은 철회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사민주의의 역사였다.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모순으로부터 진정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사회의 실제적 권력을 장악해야 함이 너무도 명확해지지 않는가.


  3. 국가와 법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를 통한 변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가장 큰 오류 중의 하나는 국가에 대한 관점이다. 이들은 국가를 중립적인 기구로 생각한다. 국가는 단지 틀로서 기능할 뿐이고 이 틀에 다른 내용물이 들어가면 그 기구의 성격은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속편한 환상에 불과하다. 국가기구는 관료제적 위계질서로 구조화되어 있고, 검, 경찰, 군대, 사법부, 행정부 등에서 수뇌부를 차지한 이들은 국가기구 안에서 실질적인 명령권을 가지고 있다. 정권을 획득한 것이 사민주의자들이라 할지라도 국가기구의 수뇌부가 자본과 실질적인 커넥션을 유지한다면 수많은 개혁정책들은 바위를 치는 계란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기구를 실제로 작동시키는 힘은 경제력이다. 이것은 공권력이 실제로 행사되는 곳이 어디인가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공권력은 사회 안정과 질서 유지를 위해 기능한다고 한다. 그러나 공권력이 출동하는 곳은 대부분 노동자와 농민의 집회 장소이거나 노동자들의 파업이 벌어지는 공장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보장하는 안정과 질서는 누구의 것인가? 계급사회에서 '전국민'의 안정과 질서란 공문구에 불과하다. 자본가들은 국민의 극소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이들의 이해와 요구가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민주의적 이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법을 신봉한다. 이들은 법의 개정, 제정을 통해 자본주의로 인한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법은 자본주의 계급지배의 근본적 관계를 결코 변화시킬 수가 없다. 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거대한 뿌리에 조금도 상처를 입히지 않는 곁가지들일 뿐이다.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것은 자본과 임금노동의 메커니즘인데 "노동계급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속박에 복종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법률이 아니다. 생산수단의 결핍으로 인한 빈곤이 노동계급에게 자본주의의 속박에 복종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의 틀 안에 있는 한 세상의 그 어떠한 법률도 노동계급에게 생산수단을 제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생산자, 곧 노동계급의 소유에서 생산수단을 박탈해간 것은 경제적 발전이지 법률이 아니기 때문이다."1) 즉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법률적 형식을 띠지 않기 때문에 법을 바꾼다고 이 관계를 바꾸지 못한다는 말이다.


  또 하나,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조차 법의 실제적인 내용은 노동자계급의 힘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1970년 전태일 열사가 분신할 때도 근로기준법은 존재했으나 그것이 실제로 노동자의 기본권 보장을 담보하게 된 것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였다. 한편 노동자 계급의 결집된 힘이 미약한 2004년 현재, 파견법 및 비정규직법 개악안이 버젓이 노동자들을 내려다보며 섬뜩하게 웃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다수 의석 확보와 정책적 대안 마련에만 온 힘을 기울이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방관하는 민주노동당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4. 의회 민주주의 - 빛 좋은 개살구


  마지막으로 자본주의 하에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실속이 없는지, 아니 누구의 실속을 채워주는지를 확인하자.


  2004년 6월, 베네수엘라에서는 '국민소환'으로 좌초위기에 처했던 우고 차베스가 국민투표로 재신임에 성공했다. 사람들은 그가 소환됐을 때, 자신이 쏜 화살이 자기에게로 되돌아온 격이라고들 했다. 국민소환제를 도입한 것이 바로 차베스 자신이기 때문이다. 반대파들은 국내외 자본의 지원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을 모았고 이 제도를 이용해 차베스를 소환했다.


  뭔가가 떠오르지 않는가. 얼마전 대통령 탄핵으로 한국사회가 떠들썩했을 때 국민소환, 국민발의를 주장했던 이들이 있었다.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차베스의 사례를 통해 너무나도 잘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질서 하에서 힘 없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가 그 자체로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음을,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이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민주주의의 내용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노동자가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팔고 있는 공장에서는 민주주의를 찾아볼 수 없다. 아니 자본가들의 민주주의가 있을 뿐이다. 노동자들이 착취를 끝장내기 위해 파업을 하고 노동자 위원회를 만들고 생산을 통제하는 것, 사수대를 조직해 자본가와 공권력은 공장 내에 얼씬도 못하게 하는 것, 이것은 노동자의 민주주의이다.


  5. 나가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계급투쟁이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노동자의 임금과 자본가의 이윤이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급투쟁은 일종의 전쟁이다. 전쟁에서 민주적 절차를 따지고 평화적으로 대결할 것을 외친다면 상대방은 이들을 비웃을 것이다. 사민주의 혹은 개량주의자들이,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탄압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의 대화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이용가치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열심히 싸우려는 사람들에게 ‘평화적으로! 점진적으로!’를 선동해주고, 동시에 국가의 계급적 본질을 은폐해주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그렇기에 이들은 단지 어리석은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도와는 상관없이 혁명을 방해하고 저지하는 데 복무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남는 것은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중립이란 허상에 불과하다. 침묵을 지키는 것은 결국 강자의 편에 서는 것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발제 3. What is to be done?

               -승리를 위한 안타 한방을 날려보자!


- 페나(노학연 고대모임 회원)


  다시 살아나는 악몽

 앞선 발제에서 우리는 사회적 합의주의, 다시 말해 자본가와 노동자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손을 맞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이었는지 또 노동자계급에게 해악이 되어왔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기만의 역사가 다시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려 하고 있다. 이수호위원장을 위시로 한 민주노총 관료들은 노동자대중에게 “이번엔 삼진아웃”을 장담하며, 노사정위 등판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하여 5월 31일, 청와대에서는 노사정(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과 자본가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만나서 사회적 대화와 합의를 약속하였다. 물론 지난 9월 31일 민주노총 2차 중앙운영위원회에서 노사정 교섭 재개 여부를 내년으로 미루어, 당장 하반기에 노사정 교섭틀이 가시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앙위원회에 참가했던 민주노총관료들의 발언만 참고하더라도 그들의 속내를 알 수가 있다.


"사회적 교섭은 사회적 합의주의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속화되고 LG칼텍스, 코오롱 등 우리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들에 대한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과제가 있다. 우리가 먼저 사회쟁점화하고 성과있는 투쟁을 만들기 위해 사회적 교섭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없는 것보다 훨씬 낫게 대응할 수 있다. 예를들어 하반기 운수산업에서도 철도관련 요구를 관철시켜 나가는 수단은 결국 책임있는 정부 당사자와의 교섭이다. 다른 대안이 없다."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


"1기 노사정위에서 엄청난 피해를 본 것에 대한 이견은 없다. 그러나 당시 우리에게 정치적 힘이 있었다면 그렇게 당하지 않았을 거란 평가에도 이견은 없다. 4.15총선에서 우리의 정치환경은 변했고 우리는 사회적 교섭구조를 통해서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전술이 많다"

-김형근 서비스연맹 위원장


   다시 싸움을

 이와 같이 민주노총 관료들은 민주노동당이라는 든든한 지지기반을 업고, 투쟁 일변도의 과거 방식에서 새 시대(?)에 걸맞는 대화와 타협이라는 ‘합의주의’를 계획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주의에 맞선 흐름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지난 8월 21일 결성된 ‘노사정담합 ․ 사회적 합의주의분쇄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이하 전노투)’가 바로 그것이다. 전노투에는 전국의 전투적인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20여개가 넘는 정치/현장 조직 그리고 언론단체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정권과 자본이 계속해서 들이대고 있는 노동탄압의 칼날에 맞서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만들어 기만적인 사회적 합의를 분쇄하겠다는 기조로 전노투를 결성하였다. 전노투가 다양한 단체와 조직들이 총망라되어 있는 단체인만큼 내부적으로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상이한 정치적 인식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이들의 결성과 행동이 얼마나 실질적인 투쟁을 만들어 낼 수 확신을 할 수 없을 만큼 역량이 부족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이 어떠한가? 노동탄압은 거세져가는 데 반해 아래로부터의 대중적인 노동자들의 투쟁이 희미하기만 하다. 또, 자본의 분절전략에 의해 점점 더 노동자들 사이의 골이 깊어져만 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시금 노동자들의 계급적 단결과 잃어버리고 있는 민주노조의 정신을 되살리고자 결성된 전노투는 분명 의미가 있으며, 또한 하반기 우리가 주목해야할 큰 흐름 중의 하나이다.


  비정규직 보호=비정규직 확대양산?

 정권과 민주노총 관료들이 싸바싸바 움직임을 벌이고 있는 사이에, 하반기가 되자마자 노동부에서는 비정규직 관련 입법안을 내놓았다. 그동안 자칭 ‘개혁’정부는 점점 늘어가는 비정규직에 대한 ‘보호 정책’을 내놓겠다고 떠들어왔다. 그럼 그 보호 입법이 대관절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비정규직의 확대양산이다. 비정규직 보호=비정규직 확대양산? 초등학생들도 =이 양쪽이 같을 때에만 쓰이는 부호라는 것도 다 알텐데, 책상에 앉아서 정책을 짜내는 양반들은 역시 기본도 안되어 있다. 어찌되었든 정부가 내놓은 입법안에 따르면, 종래에 특정 직종에서만 제한되어 있던 파견 근로가 이제는 특정 직종을 제외하고는 확대된다. 애초에 정부가 비정규직 ‘철폐’가 아닌 ‘보호’를 하겠다는 데에는 자본의 탈을 쓴 자신의 입맛에 맞도록,이제는 합법적으로(!) 재편하겠다는 심산이 담겨져 있었다. 어차피 불법파견은 점점 늘어가니 이제는 법으로 그것을 보장해주는 대신, (노동자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을 보호해준다는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을 한 것이다.


  파견법 개악 저지 투쟁으로!

 정부가 비정규직 보호입법을 발표한지 채 일주일이 되지 않은 지난 9월 16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열린 우리당 당사를 점거했다. 국민의 뜻을 하늘 같이 받들겠다던 열린우리당 측은 그동안 전 노동자의 70%에 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를 ‘어차피 너희는 우리 안 찍을 것’이라며 묵살해왔다. 점거 농성에서 전국비정규직노조대표자연대회의(준)(이하 비정규직연대회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전국의 비정규직 노동자 대표들은 파견법 개악 철회와 비정규직 권리보장입법안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이와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선도적인 투쟁을 통해 지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는 총파업이 결의되었고, 다음 날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은 정부안에 문제가 있음을 시인하였다.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 정부의 파견법 개악안은 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안지 못하고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단결된 투쟁이 있을 때에만 저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비정규직 연대회의는 오늘도 전국에서 노동탄압에 신음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한 데로 모아 단결하고, 계급적인 연대의식으로 투쟁할 중요한 구심이 될 것이다.


  승리를 위한 안타 한 방을 날려보자!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도 암울한 현재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2004년 하반기, 자본의 노동자에 대한 공격은 더욱 거세질 것이며 노동유연화와 비정규직확대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그 속에서도 자본과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끊임없이 우리와 손을 잡지 않겠냐고 또다시 ‘화해와 타협’의 손을 내밀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당할 수 없지 않은가? 미약하나마 꿈틀대고 있는 노동자들의 투쟁 흐름들을 우리는 부여잡고 나아가야만 한다. 앞서 이야기했던 전노투와 비정규직연대회의는 그 중요한 두 흐름이 될 것이며, 우리 학생들도 노동자들과 함께 파견법 개악저지와 비정규직 철폐, 사회적 합의주의 분쇄를 위해 목적의식적인 연대를 해 나가야 할 것이다. 노동자들을 갈라놓고, 이기주의라 매도하는 정부와 자본에 맞서는 길은 강고하고 단결된 투쟁 뿐이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 우리의 행동들이 당장의 승리를 보장하지 못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투쟁으로 승리를 위한 안타 한 방을 날려보자! 그 첫걸음으로 10월 10일 비정규직 노동자대회에 함께 할 것을 제안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견법 개악 저지와 노동유연화 분쇄투쟁에 함께 싸우자!


1) 로자 룩셈부르크, 「개량이냐 혁명이냐」, 『룩셈부르크주의』, 풀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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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년 10월 26일)학생회와 학생운동 골치아프시죠?

 

발제 1. 어느 전직 학생회장의 회고

발제 : (주)지구학생회컨설턴트 대표 우주


  이 글은 가상의 전직 학생회장의 회고입니다. 가상이지만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이 회고록이 말하고 있는 학생회의 현실은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본 것들이란 점입니다.


 2002년 3월. 입학.


  나도 이제 대학생. 대학에는 학생회란 것이 있다는 것을 난 익히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내가 대학에 와서 정말 하고 싶었던 것, 바로 학생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대충 들어서 알고 있다. 나는 반학생회가 배정되자마자 집행부 중에 하나인 사회부에 들어갔다.

  많은 집회를 다니게 되었고 선배, 동기들과의 토론이 계속되었다. 아, 새로운 세상!

  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발전노조의 투쟁을 지지하는 사람은 동기 60명 중에 사회부 3명뿐인 것만 같다. 학생운동 안하면 왕따 되던 시절은 80년대의 이야기였던 것인가!! 나는 상황파악을 잘못하고 있는 건가? 학생회는 다 투쟁하려고 만들어진 건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투쟁하는 사람들은 우리 학생회에 딱 4명이고 겨우겨우 집행부 하나 운영하고 있다. 그것도 학우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아닌 전폭적인 무관심 속에서!! 윽....!! 이제 난 고민에 빠졌다. 선배들이야 취직하기에 바쁘니까 그렇다 쳐도, 왜 동기들마저도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지 않는 걸까?    


  오늘의 결론: 더 이상 내가 꿈꿔왔던 80년대의 ‘투쟁에올인학생회’는 현실에 없다. 지금 학생회는 학생들의 분노를 모아내는 곳이 아니라, 학생들의 대학생활을 뒷받침해주는 곳으로 전락해 있다. 오히려 대부분의 학생들은 저 자본가의 앞잡이 노무현을 지지하고 있다!


 2002년 말. 그리고 2003년 말.   


  그래, 그럼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투쟁을 지지하도록 ‘대중운동’을 해보자!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총학생회 선거. 나는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학우들에게 알리고 싶다.

그래서 난 나의 생각과 가장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은 사람들과 함께 선거운동을 하려고 한다.

  …

  선거운동을 마쳤다. 이번 선거에는 다양한 정치를 가진 사람들이 선거에 출마했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해야한다고 하는 사람들, 사회당을 지지하자는 사람들, NGO가 대안이라고 하는 사람들, ‘비운동권’이라고 하면서 기존의 학생운동에 대한 온갖 왜곡과 반동적인 정책을 들고 나온 사람들까지. 그리고 선거를 나가지 않더라도 ‘유권자모임’, ‘여학생위원회’등에서 공약을 평가하는 등 각자의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학생들이 지향하고 있는 정치가 다름을 볼 수 있고 내 생각과 가장 비슷한 사람이 누구인지 가늠해볼 수 있는 때일 것 같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각 선본들은 자신들의 정치를 부각시켜 얘기하기 보다는 복지공약을 부각시켰고, 이는 유권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각 선본의 정치는 모른 채 투표를 하게 된 것이다. 그 사건 중에 하나가 바로 총학생회장의 한총련 의장 출마 사건이다. 총학생회 선거 시기에는 한총련출신 후보라는 것을 숨겼던 것이다. 학우들은 그 선본이 한총련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이번에 당선된 선본은 ‘신자유주의분쇄’를 말하는 선본이었다. 음, 이런 선본이 당선될 정도면 고대생의 대부분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 근데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들은 오히려 이 세상을 긍정하고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조건들을 충실히 갖춰나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대선에서는 노무현 찍고. 허허 이게 무슨 모순이람. 만약에 노사모가 학내에서 단체를 만들고 열심히 활동한다면 당선되기는 수월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기에 다른 선본들이 당선되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돌아보면 공약에 있어서도 정치활동 공약과 복지공약이 서로 모순되는 경우도 있었다. 반자본주의를 외치는 선본이 출석체크와 참살이길 할인 등의 기능을 모은 카드를 공약으로 들고 나온 것이었다. 전형적인 노동자 통제 수단과 불경기 수요확대를 이끌어 내기 위한 수단의 결합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선본원 내에서도 비일비재하다. 자기 선본의 정치에 동의하고서 선거운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아는 선배라서 시작한 경우가 정말 많았다. 2003년 선거에서는 사실 어느 두 선본의 정책이 거의 똑같았기 때문에 문제가 더 심하게 드러났다. 양쪽의 정치의 차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경쟁적인 선거운동을 거치자 감정적으로 서로를 대하게 되었고, 이는 올해에 서로에 대해서 이유 없는 적개심만 남았다는 것이다. 

 

  나는 선거운동은 안하게 됐다. 왜냐하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선거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열사들의 투쟁을 학내에서 알려나가기로 했다. 사실, 학생운동 하는 사람들은 열사들의 투쟁을 학교 내에서 열심히 알려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선거를 나갔다고 이 얘기를 못할 거 없으며, 선거를 안 나갔다고 못할 거 없다. 어떻게든 자기 현실에 맞춰서 열심히 하면 된다. 그런데 오히려 선거 시기에 이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음...무엇이 ‘대중운동’이지?


  오늘의 교훈:

1. 선거운동은 정치활동이다. 한번 경험 삼아 해볼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의생각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내가 이 시기에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해보자!

2. 선거운동은 솔직해야 한다. 내가 한총련이면 한총련, 열린우리당이면 열린우리당, 그렇게 껄끄럽다면 단체이름을 말하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정치를 솔직하게 얘기해야한다. 그리고 동의를 구해내야 한다. 복지공약으로 동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정치로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선거운동을 하는 목적이다.

 2003년. 드디어 학생회장.


  학생회장 임기가 시작되었다. 자, 새롭게 각오를 다지며 시작해보자!

  요즘 내가 느끼는 건 아직도 학생들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학생회는 학생들의 조합이잖아. 그런데 학생들의 조합에 학생들이 없다!? 적어도 총회를 하면 누구나 와야 하고, 선거를 하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하는 것 아니가? 그런데 학생총회에 학생이 없고, 학생회선거에 학생이 없다!

  더 신기한건, 이러다가도 고연전만 되면 벌떼같이 모여든단 말이다! 심지어는 고연전 축구 전반전 끝나고 총회를 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기발하다.) 아아, 그런데 난 고연전에 반대하는데 학생회장이라 발 빼지도 못한다. 아..차라리 동아리에 있는 내 친구가 이런 준비도 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주변에 훨씬 많다. 난 왜 학생회를 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난 교육투쟁을 하면 사람들이 모두 관심을 가져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물론, 교육투쟁은 하루에도 백 명이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알려나갔으니 그나마 관심이 높았다. 하지만 ‘학생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까 관심이 더 높을 거야.’라고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오히려, 자발적이고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진 사안은 탄핵과 전쟁, 귀족노동자였다.

  하하하하. 자자! 이때다! 우리가 기다리던 절호의 췌안쓰! 이제 우리들이 탄핵은 부르주아 정치인들 간에 이루어지는 권력다툼인 것을 알려나가고, 파병하는 것은 오직 자본가의 이윤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귀족노동자는 없고 오직 귀족 자본가만 있다는 것을 알려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모두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똥물들이라는 점도 말해야 한다! 바쁘다 바뻐!

  아아. 그런데 학생회장으로서 할 수 있는 게 딱 3가지였다. 대자보 붙이기, 커뮤니티에 글올리기, 술자리에서 내 생각 말하기. 사실 학생회장 아니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 들이었다ㅠㅠ 내가 학생회장을 왜 한거야!! 하긴 학생회장이라고 하니 좀 더 잘 들어주기는 한다.

  음, 그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나의 정치를 말해나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야! 그래그래 수요일마다 토론회를 열자. 지금 시작은 4명이지만 내년에 새내기도 받으면  점점 발전할거야. 그래, 이렇게 나의 생각을 알려나가자! 그렇게 발전하면 학회도 몇 개 더 생길 것이고, 그러면 앞으로 학생회장으로서의 역할은 이러한 학회들의 톱니바퀴를 맞춰주는 역할이 되겠네.


  오늘의 교훈: 학생들과 학생회가 맺고 있는 운명의 고리는 이미 끊어진지 오래다. 각자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각각의 이해(利害)또한 전혀 같지 않다.

우리가 학생회 활동을 하는 것은 고연전을 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정치를 확산시키기 위해서인 것이다! 



보론 1-1. 과반학생회, 그리고 단대 학생회/총학생회


발제 : 고난


 위기? 위기!


  흔히 학생회, 또는 학생운동의 위기라고 말한다. 물론 과반 학생회에도 이 말은 적용된다. 매년 과반 학생회는 건설되지만, 학생회 사업을 만들고 이끌어나갈 주체들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 학생회 활동을 통한 인자 재생산은 너무나 힘들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들을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만드는 것에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반 학생회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단대 학생회/총학생회와 차이점을 보인다. (이는 단순히, 과반 ‘학생회’에서만 희망을 발견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각 과반의 상황에 따라, 활동가들은 학회나 소모임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를 말할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과반 학생회의 틀거리가 남아있는 고대 상황에서, 과반학생회와 단대 학생회/총학생회와의 질적인 차이를 확인함으로써 그것의 유의미성을 찾아보도록 하겠다.


 모여라! 모여라! 과반 동산으로.


  과 학생회와 단대/총학을 비교해봤을 때 가장 명확한 차이점은 바로 구성원들 간의 친밀성이다. 물론 학부제가 시행됨으로써 그 긴밀성은 많이 약해졌고, 많은 과반 학생회가 무너지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많은 과반에서는 학생회를 꾸리고 그것을 통해 대중 사업을 벌이고 있다. 대부분 학생들은 대학생활을 과반(혹은 과방)에 기반해 시작하며, 과내의 학회나 소모임이나 동아리에 가입하며 ‘재미있는’ 나날을 보낸다. 이를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가 FM(개인적으로 필자는 옳지 못한 방식이라 생각하지만)이다. 대다수의 신입생은 자신이 무슨 과반이며, 앞으로 이 과반 구성원인 선배, 동기들과 잘 지내보겠다고 소리지르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사업들을 벌이는 과반학생회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과반학생회가 공동체적 속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얼마 후면 치러질 과반별 학생회장 선거에서 대다수 선본은 ‘과반 문화의 복원’ 이나, ‘새로운 관계맺음을 위해’ 등을 모토로 내세우며 공동체로의 유대감을 견결하게 하는 데 힘을 쏟을 것이다. 신입생, 동기들과 함께 선본을 뛰면서, 활동가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치에 대해 풀어나가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공동체적 유대감과 신뢰감을 기반으로 했을 때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흩어지는 걸까?


  반면, 단대/총학 선거의 경우 그들에게는 뭉쳐져 있는 공동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흩어져 있는 학생 대중이 존재할 뿐이다. 총학에 비해 단대의 경우 그것이 덜 하긴 하지만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힘든 단위가 단대부터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애초에 단일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선본을 꾸리며 그것을 토대로 활동을 해나간다. 이러한 활동을 벌여나가는 데 있어, 같은 공동체에 기반하고 있는 사람들로서의 인간관계를 통하거나, ‘공동체’를 어떻게 운영해 나갈까라는 생각보다는 자신들의 정치를 어떻게 대중들에게 알려 나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거에서 자신들의 정치를 명확히 학생들에게 알려내고, 그것에 동의하면 자신들을 뽑을 것을 설득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각 선본들은 자신의 정치를 선명하게 드러내기보다는 ‘학생들의 복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라는 내용으로 표를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학생들은 당황하고, 그들이 선본을 꾸렸던 정치적 의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오로지 수권만을 목적하는 부정직한 태도일 수 있으며, 말 그대로 학생대중을 수동화/대상화 하는 것일 수 있다.


 그래. 그래 그게 좋겠다.!


  우리는 위의 두 가지 사항을 살펴보면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공동체적 속성이 강한 과반 학생회를 이끌어가는 데에 가담하는 학생들의 층은 다양하다. 아무런 정치적 고민도 없이 생활의 걱정도 없이 마치 고등학교 때 반장, 부반장을 하듯 조합적인 사업에만 매달리는 이도 있을 것이고, 현실 사회의 문제점을 학생 사회에 투영해 상이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학생들에게 알려 나가는 노력을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조합 사업만을 위한 틀로서 학생회를 사고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자신의 정치를 학생회를 잡기 위해 숨기는 일 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어떤 학생회의 경우에라도 마찬가지이다. 덧붙이자면, 같은 공간에서 함께 숨쉬고 얘기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과반 학생회의 경우와 그렇지 못한 단대/총학은 자신의 정치를 풀어내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발제 2. 학생회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발제 : 녹테잎


 1. 들어가며


  여기 계신 학우 여러분 중에는 지금 학생회를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학생운동’이라는 것도 고민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글을 쓴다는 것이 굉장히 부담스럽습니다. 혹 여러분이 학생회를 건설하고 기획하는데 있어 제 글이 참고자료로 쓰일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학생회를 준비하기 위한 저의 고민이 미숙하고 별로 깊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여기 계신 학우여러분들과 저의 고민을 나누고 함께 논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학생회에 대한 단상이나 그것의 역사적 변화에 대해서는 다들 이전 발제를 통해 확인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시기에 있어 학생회가 80-90년대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국적으로 봤을 때 학생회라는 것이 이정도로 남아있는 것도 고대 외에는 드문 것이 사실이고, 그 중에서도 90년대와 같은 모습으로 학생회가 구성되고 진행되는 곳도 많지 않습니다. (사실 학생회의 전통이 많이 남아있는 과반의 학우들과 이야기를 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대에 일반적인 과반 -학생회란 틀이 아직 남아있긴 하지만 매년 집행부 할 사람 남기는 것도 겨우겨우 하는- 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려 합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 지금의 대부분의(고대의) 학생회는 집행부 몇몇을 남기기도 힘들게 그럭저럭 돌아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래서 과반에서 정치적인 사업을 만들기조차 힘들다고 느끼실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 대해 너무 안타깝다고만 생각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학생사회라는 것은 전반적으로 그 전체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고, 지금에 학생회도 그러한 사회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집회가 매일같이 있었고, 노동자들의 파업과 강고한 투쟁이 자본의 구조조정 공세에 맞서 많이 일어나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 투쟁에서 패배하였고, 그 후로는 대중적인 노동자들의 투쟁은 많이 줄었고, 실제 집회도 많이 줄었으니까요. 좋습니다. 80년대를 생각해 봅시다. 사실 학생회라는 공간은 반독재 민주화를 위한 대중투쟁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로는 어느 정도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그러한 전선이 해체되었습니다. 이것이 학생운동이 쇠퇴하는 중요한 계기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이후에 대학 내 구조조정에 일환으로 들어온 학부제가 과공동체라는 최소한의 문화까지도 위태위태하게 만들었습니다. 즉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학생회=학생운동’라는 공식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학생회 공동체마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2.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처음에 길게 이야기를 했던 이유는 학생회라는 것이 사회의 영향을 받으며 여러 과정을 통해 쇠퇴했고 사실 학생사회는 전체사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제가 말할 내용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있는 현실에서 시작하자”고. 현실과 학생회의 연관을 보지 않고 학생회를 이야기 하는 시도는 공상적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거기에 개입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옳은 자세이겠지요.

  그리고 하나 더 고려해야 할 것은 우리의 정치. 즉 자신이 운동이란 것을 하는 활동가로서 과에서 자신의 정치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학생회라는 것 자체를 물신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재미있게 모여서 놀기 위한 공간이라면 다른 공간도 만들 수 있고, 활동가로서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기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도 굳이 학생회일 필요가 없겠지요. 학회나 동아리 등 여러 방법을 통해서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지 지금 고대의 상황에서는 아직도 과학생회가 틀이라 하더라도 존재하고, 새로운 학회를 만드는 것보다, 있는 과 학생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고민을 푸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지요. 물론 과반 문화가 완전히 없어진 곳에서는 과를 복원하는 것보다 다른 공간을 통해 활동을 만나고 많은 학우들을 만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학생회는 우리의 정치적 입장을 이야기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공간입니다.


 3. 과반활동을 준비하는 자세


  과반활동을 하는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할까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한 가지는 과 활동에 헌신적으로 임하려는 자세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녹아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배치하려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사람의 활동가로서 자신이 활동하는 공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위적인 부분일수도 있겠지만 두 번째 임무를 소화하기 위해서도 헌신적으로 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우선적으로 활동가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책임감과 믿음을 주는 모습이 필요하고 실제 자신의 이야기를 풀기에도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가 있기 때문이지요.

  한 가지 예를 들어보죠. 새터를 준비한다고 합시다. 여/남에 대한 성폭력문제에 대해서 문제제기 하고 그것을 만들기 위한 실천을 벌이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초기 새터 기획단에서부터 적극적으로 함께하면서 기획회의에서 이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새터를 가서 “반성폭력자치내규가 필요하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오히려 반감을 살 수도 있겠죠. (쟤는 평소에는 암 것도 안하다 왜 저래? 운동권은 다 저래? 등등의 수 없는 비판들...)

  그리고 첫 번째 임무에서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학생회에서 열의를 가지고 활동을 한다는 것은 집행부(혹은 과장)를 결의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학생회는 일종의 조합이기 때문에 친목이나 과학생회 싸이클에 따라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사업 역시 존재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고연전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런데 고연전을 하고 싶어 하는 학우들은 굉장히 많죠.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할까요? 그 학우들을 일일이 만나면서 고연전에 대한 비판 등을 통해 과내에 고연전 반대 흐름을 키우고 고연전을 가지 않아야 할까요? 물론 역량이 되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좋겠죠. 하지만 그런 역량이 되지 않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죠. 이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그래도 가기 싫다고 해서 안가면 학우들에게 무지하게 반감을 사겠죠?^^; 그렇다면 과 집부 혹은 과장으로서는 고연전을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서 만들 수 있는 실천들(지하철에서 응원을 하지 말라는 내용을 유인물로 돌리거나 하는 등)을 최대한으로 하면서 고연전을 학우들과 함께 가서 여러 실무를 해야 하겠지요. 하기 싫다 하여 다른 이에게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고연전이 싫은 이유는 무진장 힘든 응원과, 지하철에서 일어나는 정신 나가 보이는 행동들- 응원이나 FM등등- 인데, 다른 이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이러한 것들에 대해 문제제기 조차 하지 못하겠지요. 혹 들어가기 싫은 회의가 있다 해도, 과에서 필요한 회의라고 하면 들어가야 할 경우도 있겠구요. 정치적 입장을 가진 활동가와 조합에서 활동하는 집부원의 역할에서는 서로 상치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에 대해서 그것을 마냥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역량에 따라 할 수 있는 실천을 최대한으로 하면서 그것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활동가로서의 정치적 입장을 관철시키고 그러한 사업을 배치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지금의 사회를 자본주의사회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이 사회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꺼떡하면 사람들이 생활고에 못이겨 죽고, 매일같이 짤리는 노동자들이 있고, 국적이 다르단 이유로 테러리스트로 까지 몰리는 이주노동자들이 있고...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이 잘못된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이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고, 또 실질적으로 바꿔낼 수 있는 조건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투쟁해야 하겠지요. 저는 이 세상을 구성하는 중심적인 사람들이 노동자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들이 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저는 지금 학생입니다. 그러면 제가 학생으로서 해야 하는 의무는 학생운동이겠지요? 그리고 제가 해야 하는 학생운동은 학우들과 고민을 나누면서 학우들이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도록 하는 것이고요. 이러한 제 입장을 알려나가고, 논의하는 일을 과내에서도 지속적으로 해야 하겠지요. 그 방법은 무지하게 다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공간이 지속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의 학생회는 몇몇 결의 높은 사람들이 붙잡고 있지 않으면, 굉장히 빠른 시간에 무너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한 해 한해 근근이 사업만 꾸리는 것도 힘들지요. 그렇기 때문에 학생회에서 자신이 지속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공간과, 사업의 틀을 만들어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과에서는 한 달에 한번 정기토론회를 열도록 한다. 우리 집행부에서는 매년 몇 월 달에 투쟁하는 노동자나 사회인사 들을 초청해서 간담회를 진행 한다 등등... 꽤나 중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봐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관성이란 것은 참 무섭습니다. 요즘 4·18에 참여하는 사람은 몇 안 되지만 매년 진행되고 왠지 당연히 뛰어야 할 것 같잖아요? 이런 식으로 이 맘 때쯤 되면 뭐 하겠구나 하는 식의 사업의 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정착되면 그 공간을 통해 자신의 정치를 이야기 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워지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2-3년 동안의 철저하고 현실적인 계획을 가지고 진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핵심적인 것은 그 틀 내에서 헌신적인 참여와 기획을 통해 자신의 정치를 이야기 하고 그것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겠지요. 학생회 전체적으로 사업을 배치하는 것도 좋지만 좀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부서별로 사업을 배치시키는 것이 관성이 되기에는 좋을 것입니다.(예를 들면 학술부에서는 매달 한 번씩 주제를 가지고 토론회를 열고 내부논의를 통해 신문을 발간하는 등의 것은 (식상하지만) 매우 좋은 방법이겠지요.) 물론 구체적인 방법은 창발적이고 다양하게 나올 수 있겠지요. 한 가지 명심할 것은 너무 무리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할 수 있는 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행부가 두 명 있는 과에서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토론회를 하고 매주 그에 관한 신문을 낼꺼야’라고 기획한다면 훌륭한 활동정신이기는 하지만 실행되기 힘들겠죠.


 4. 정리하며


  길게 썼던 제 글을 정리해야 될 것 같군요. 핵심적인 것만 정리하자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기획하자.’, ‘조합 활동가로서 헌신적으로 참여하자’, ‘지속적으로 갈 수 있는 사업을 만들자’ 뭐 이정도 되겠죠?

  다들 상황이 안 좋다 하여도 낙관적으로 생각하면서 현실에 입각한 학생회 활동들 열심히 펼쳐 내봅시다!!!


보론 2-1. 학생회에 대한 다양한 담론들에 대해


발제 : 김성렬


 0.들어가며


  학생회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를까? 학우들의 복지를 위한 공간? 아니면 새터, 대동제 주점, 고연전 참가 등 매 달 있는 달력사업을 학우들과 함께 하는 공간? 이런 생각들이 하나로 모이는 지점이 바로 현재 학생회에 대한 학우들의 인식틀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대중자치조합’이다. 대중자치조합이라면 말 자체가 무슨 의미인지 확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자. 학우들의 생각은 개개인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학생회라는 틀은 기본적으로 단일한 ‘정치’를 바탕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생각을 가진 학우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학생회에 대해 ‘대중자치조합’이라는 것은 다양한 생각을 가진 학우들 즉 대중들이 모여 학생회 행사를 함께 만들고 진행하는 조합적 틀을 의미한다. 이런 학생회에 대해 많은 사람들 혹은 단체들은 시각을 달리하기도 한다. 이제부터 학생회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다양한 담론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학생회가 노동조합인가?


  학생회에 대해 노동조합이라고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그렇다면 ’학생이 노동자와 똑같다고 말하는 건가?’하는 의문이 금방 들기 마련이다. 이렇게 학생을 노동자와 동일하게 바라보는 단체에서는 학생을 ‘사회적 노동자’라고 부르고자 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가 열심히 일하더라도 일한 만큼 임금을 받지 못하는 모순에 처하듯이 학생 역시 이 체제에서 학생으로 살아가기에 고통 받고 있기 때문에 큰 틀에서 사회적으로 보면 노동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리라면 자본주의 체제인 남한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다 ‘노동자’가 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를 변혁의 길로 이끌 수 있는 계급은 어느 계급인가에 대한 명확한 분석은 어느 새 희석된 채 모두가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또한 학생이 사회적 노동자라고 주장하면서 수업에 대해 ‘수업노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학생 대중의 이해가 다름을 사고하지 못한 것이다. 학생들 중에서 수업에 대해 미래의 사회진출에 있어 자신의 노동력 가치를 높이기 위해 높은 학점을 받으려고 결코 강제적이지 않은 ‘능동적’으로 열심히 듣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생을 단일한 이해를 가진 대중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체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다양한 조류에 맞물려 있는 것이 바로 학원사회이며, 따라서 학생들의 정치적 의식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학생을 사회적 노동자로 바라보는 경향에서는 학생회와 노동조합은 별반 차이가 없게 된다. 그래서 노동조합에서 임금인상 등 경제적 요구를 주장하는 경제투쟁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에 기반한 여러 사안에 대해 싸우는 정치투쟁으로의 상승이라는 논리가 학생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즉 등록금인상 및 학내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교육투쟁(경제투쟁)을 바탕으로 하여 반전투쟁이라든지 노동자투쟁에 연대(정치투쟁)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앞서 언급했듯 아직 직접적인 생산관계에 위치하지 않은 학생을 무리하게 ‘사회적 노동자’라고 설정하는 그 자체에 이미 오류가 있으며, 따라서 학생대중의 이해는 단일하다는 전제 아래 노동조합처럼 학생회를 중심으로 운동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것 역시 오류임을 쉽게 알 수 있다.


 2.‘조직’의 형식은 문제가 안 된다! 오직 운동만이!


  학생회에 대해 대중자치조합으로 바라보고 여러 자치단위와 더불어 하나의 의미있는 정치적 공간이라고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시각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으며 오히려 바르게 분석하고 있다는 판단이 든다. 하지만 문제는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이 왜 위기에 빠졌는지, 학생회에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지에 대한 입장 차이이다. 우선 이렇게 주장하는 단체에서는 “학생회가 학우들로부터 보편성을 상실하거나 붕괴해가고 있는 것은 위기의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다. 다시 말해 학생운동의 위기로 인해 학생회가 학우들로부터 보편성을 상실한 것이지 학생회가 학우들로부터 보편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학생운동의 위기가 온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현재 학생운동의 위기는 어디까지나 융합의 위기일 따름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지점은 바로 학생운동의 위기의 원인이 무엇인가이다. 과연 변화된 학생대중과의 융합의 위기인가? 그렇다면 다시 학생대중이 왜 변화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80년대의 서슬 퍼런 군사파시즘의 광풍이 불던 시기에는 파시즘에 맞서 민주주의(사실상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학원을 중심으로 사회 곳곳에서 벌어졌었다. 따라서 학생대중들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단일한 행동을 할 수 있었고, 그 때 학생회란 학생대중들을 하나로 묶는 효율적인 틀이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와서 어느 정도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안착화되고 강화되자, 더 이상 학원사회에서 단일한 정치적 행동을 벌일 수 있는 기제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전체 사회의 정치적 조류에 따라 학생대중의 정치적 이해는 더욱더 선명하게 분화되어 갔다. 따라서 기존 학생운동의 방식이 학생회 중심이었다면 변화된 지금의 상황에서는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단체에서는 학생운동의 위기를 학생대중과의 융합의 위기로 보는데, 이는 학원사회를 전체 사회에 맞물려 존재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학생대중의 이해를 바탕을 둔 운동이 학생운동이라고 보는 것과 같다. 학생대중의 이해는 단일하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은 옳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학생회에 대한 개입에 있어서 ‘조직’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운동’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운동이란 것이 정치적 방향성에 따른 일련의 실천 활동임을 고려해 볼 때, 대중자치조합으로서의 학생회에 대한 개입은 더욱더 조직적인 판단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럴 때에만 학생회 활동을 통해 조직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이 단체에서 바라보는 학생회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은 크게 문제될 것은 없으나, 그러한 입장이 도출되는 과정은 상이한 입장 차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모두가 행복한 학생평의회?


  위에서 언급한 두 단체에서는 기본적으로 학생회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최근 학생회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 하며 ‘모두가 행복한 학생평의회’를 일각에서 주장하기도 했다. 학생평의회라는 말 자체가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학생평의회란 말 그대로 ‘총학생회-단대학생회-꽈학생회’로 이어지는 기존 학원사회 구조가 아닌 모두가 참여할 수 있고, 모두가 자신의 이해를 반영할 수 있는 ‘자율과 공존’이 어우러지는 공간을 말한다. 이러한 모습을 가진 학생평의회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학생회에 대해 불필요하다는 불만을 가진 지금의 상황에 바람직한 것으로 비춰질 수도 이다.

  그러나 학생평의회를 주장하는 단체에서는 학원사회를 전체 사회와 유리된 하나의 이상적인 ‘꼬뮌’으로 바라본다는 것에 우선 문제가 있다. 학원사회가 하나의 꼬뮌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시야를 전체 사회로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학원사회 그 자체로 확 좁게 만들며, 이 공간 자체가 절대시 되는 경향을 갖기 때문이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두 단체에 비해 이 단체에서는 학생대중의 이해가 단일하지 않다는 것에 대해 인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한 대중운동이란 학생대중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며 학생대중들의 이해에 따라 활동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으로 결국 학원사회를 꼬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전제가 크게 작용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학생회를 해체하고 학생평의회를 만들자는 주장은 그 동안 학생회라는 틀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하긴 했지만 전체 사회와 맞물린 학원사회를 간과함으로써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라고 할 수 있다.


 4.나가며


  학생회에 대한 입장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입장 하나 하나가 다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세 입장이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학생대중이 단일한 이해를 가졌다고 바라보건 그렇지 않건 간에 학원사회에 안에서 학생대중의 이해를 바탕으로 운동을 만들어 가려는 것이다. 과연 학생운동이 학생대중의 보편적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이에 대해 학생들의 정치적 의식/이해 자체가 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입장은 옳지 않다는 앞에서 수차례 언급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방향의 학생운동이 진정 전체운동과 맞물리는 운동이 될 것인가? 이런 입장 아래 학생회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라는 고민을 우리는 새롭게 가질 수 있다. 이제 고민의 해결방안에 대한 과제가 우리에게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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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년 9월 21일)국가보안법토론회

발제 1.  희대의 악법, 국가보안법!


  김대중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에서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땅에 당당히 발을 디디고 저렇게 활짝 웃으며 사진까지 찍었으니 국가보안법 제 6조, 제 8조에 의거하여 징역이다!


제 6조(잠입, 탈출)

(1)국가의 존위,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 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부터 잠입하거나 그 지역으로 탈출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제 8조(회합, 통신 등)

(1)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 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연락을 한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아니 반국가단체에 잠입한 녀석이 우두머리 괴수의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마치 올림픽 금메달이라도 딴 듯이 기뻐하고 있다니... 그런데 이 당시 KBS, MBC를 비롯한 방송사들은 물론 주요 일간지에서도 1면에 이 장면을 보도하였다. 그리고 네이버, 엠파스를 검색해도 이 사진은 수십 개씩 나온다. 이들도 모조리 국가보안법 제 7조에 의거하여 징역이다. 그러고 보니 김대중 대통령은 또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였다. 손을 맞잡고 높이 치켜 올리는 것이야 말로 상대방에 대한 렬렬한 호의 아니겠는가! 

제 7조 (찬양, 고무 등)

(1)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 고무, 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 선동한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자, 이 사진 한 장을 통해서 우리는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바보 같은 법인지 알 수 있었다. 토론회에 참여하신 여러분, 그런데 여러분들 또한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였다.


제 10조 (불고지)

제 3조, 제 4조, 제 5조 제 1항, 제 3항(제 1항의 미수범에 하한다.)제 4항의 되를 범한자라는 정을 알면서 수사기관 또는 정보기관에 고지하지 아니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다만, 본범과 친족관계가 있을 때에는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한다.



  ‘자유민주주의’마저도 보장해주지 않는 국가보안법.


 「저의 입국 이후로부터 시작된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을 지켜보면서 이 법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자기 최면제의 기능을 하고 있는지 저는 직접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법에 의해서 지켜질 수 있다는 <자유민주주의>가 바로 이 법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훼손당하고 있다는  모순조차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뜻에서 자기 최면제입니다.」

-<송두율 교수 항소심 최후 진술서>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는 마지막 안전장치인 국보법을 폐지하는 것은 저의 모든 것을 걸고 막아내겠습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국가보안법의 역사를 돌아보면 이 법이 계속해서 전제로 붙여대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마저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상․양심의 자유, 학문․예술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등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마저도 전혀 보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을 통해서 이 법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 지 알아보았지만, 실상 국가보안법이 가져온  희생은 상당히 심각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메이데이에 참여하면서 만든 자료집을 소지하였다는 죄, 교보문고에서도 판매중인 ‘신좌파의 상상력’이라는 책을 소지하였다는 죄. 일가친척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혐의를 신고하지 않았다는 죄. 심지어는 ‘○○나이트 앞에서 김정일을 찾아주세요.’라는 명함을 돌린 죄. 국가보안법에 자유와 민주는 없다. 그렇다면 국가보안법은 누구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가?

  국가보안법의 모법은 일제의 치안유지법이다.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나려는 저항을 무마하려는 법이었다는 것은 안 봐도 뻔하다. 국가보안법은 이런 모법을 따라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면서 132개 정당과 사회단체를 해산시키고, 군인 8-9천명을 처벌하였다. 해방공간에서 국민의 절대다수가 좌익계열을 지지하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정권을 노동자민중의 저항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 좌익세력을 청소했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하려다가 거센 저항에 부딪혀 이루지 못한 채, 5.16 군사쿠데타를 맞았다. 그 이후에도 국가보안법이 쓰인 곳은 동일하다. 박정희 정권은 더 나아가서 반공법을 제정하고 국가보안법에 대한 처벌을 사형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계속되는 군사정권이건 문민정부건 간에 노동조합 하나 건설하는 것도 국가보안법을 적용시켜 처벌하였다. 국가를 보안하기 위해서.  

  개정과 개정을 거듭하고, 폐지를 하네 마네 말은 많았지만, 그리고 지금도 많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이 법이 노동자민중의 저항으로부터 자본주의를 지켜내기기 위한 법이라는 사실이다. 노동조합을 건설하면 국가를 전복시키려고 한다고 잡아넣고, 노동자계급의 사상이나 문학을 담은 책, 예술작품을 판매하거나 전시하였을 때에는 불온사상을 전파한다고 잡아넣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려고 할 때에도 잡아넣었다. 그것은 70년대에 다시 남한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되살아났을 때에도, 80년에 광주민중항쟁이 불같이 타올랐을 때에도, 87년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노동해방’을 외치던 때에도, 그리고 지금 현재에도 그러하다. 이는 국가보안법 철폐를 외쳤던 김대중, 노무현과 같은 ‘자유주의자’들도 대통령이 되자 국가보안법을 오히려 정권유지를 위해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박근혜 같은 파쇼세력이나 노무현 같은 자유주의세력이 아무리 박 터지게 싸워도 자본주의를 유지하려는 그 본색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발제 2. 악법 어기기. 투쟁 이기기


  때는 2004년 9월. 안정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구가해 나가며, 이런저런 부르주아 지배 분파들 간의 싸움이 끊이지 않는 자본주의 국가 한국. 그곳엔 56년 간 절대 공격이나 침입이 불가능한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현대판 ‘소도’가 존재해 왔다. 국가보안법(이하 국보법)이 바로 그것. 이 영역을 파쇼적으로 40여년간 지켜왔던 당파와 새롭게 권력을 장악, 스스로를 ‘민주주의적 개혁파’으로 지칭하는 자유주의 당파가 국보법의 개폐를 놓고서 한판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다. 발단은 노무현 대통령이 한 tv 프로그램 대담에서 국보법의 폐지를 말한 것었다. 자유부르주아지인 열우당이 당 정책을 아예 국보법 폐지로 선회했고, 한나라당은 개정을 부르짖고 있다.

 

  우선 첫 번째로, 부르주아 분파들 사이에 존재하는 입장 차이는 무엇으로 기인한 것인지 알아보고, 노무현 정권은 국보법 폐지로부터 무엇을 얻어내고자 했는지 알아보자.

  하나, “보이니? 파쇼와 자유주의의 차이”

  다들 알다시피 한나라당은 대한민국 건국 직후부터 98년 전까지 집권 여당이었다. 그들은 앞 발제에서 나온 바와 같이 행복 추구권과 같은 기본권조차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를 쟁취하려는 민중의 봉기에 대해, 무자비하게 군화발과 탱크로 짓밟았다. 또한, 그들은 건국 직후 ‘빨갱이들이 설쳐 국가를 혼란스럽게 하고, 선량한 국민들을 오염시키고, 북한 괴뢰군이 남침을 한 사실’, 기득권을 빼앗겨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웠던 위기와 공포의 순간을 뼈져리게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국가보안법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붙들어 매주는 것이며, 이를 폐지하면 국가 안보가 흔들린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보법을 폐지함으로써, 자신들에게 닥쳐올 위협을 눈뜨고 지켜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탄핵 사태 이후, 급격하게 지지 기반을 상실했던, 한나라당으로선 자신들의 보수적 색채를 더 강화시켜 다시금 확고한 지지층을 만들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원로’ 들과 ‘박사모’등 보수세력이 모여, 국가위기사태를 선언하고 집회를 열고,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 ‘빨갱이’ ‘좌익’ 세력인 노무현을 규탄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 이는 정치사적으로 나름대로 깨끗한 열우당의 우위를 드러내주며, 파쇼적 분파와 자유주의 분파와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자유주의 분파가 온건히 민중들의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자유로운 정치 활동을 꾀하기 위해 국보법폐지를 외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자유주의 분파는 왜 국보법 폐지를 말하는 것인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볼까나?

  둘, 눈 가리고 “어흥”하기.

  부르주아 인권의 잣대로 봐도 파쇼적일 수밖에 없는 국보법을 폐지함으로써, 한나라당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좀더 민주주의적이고 좀 더 국민을 생각하는 당으로서의 이미지 확보를 위한 것이다. 노무현 정권과 열우당은 故김선일씨의 죽음 이후로, 파병 반대 여론이 거세지는 가운데 국익 운운하며 추가 파병을 강행, 그들의 가면 속 진실을 엿본 이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이는 열우당의 지탱 세력을 흐트려 놓아, 그들이 대중을 다시 획득하기 위한 가시적인 것으로 ‘국보법폐지’만큼 좋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는 그들도 파쇼세력과 마찬가지로 노동자계급을 착취한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단순히 대중의 민주주의와 개혁에 대한 열망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

  북한의 시장개방 흐름도 현 정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최근 중국이 단순 대북 지원 정책을 넘어서, 특권층이 많이 살고 있는 인구 220만의 평양시에 전략적 투자를 하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저임금 노동력, 특권층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소비시장, 동북아 경제 거점 중심지 허브를 구상하고 있는 한국 부르주아지로서는 이 뉴스는 매우 위협적이다. 따라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 자본에 ‘한민족’의 소비시장을 눈뜨고 송두리째 빼앗길 수는 없는 노릇일 터, 국가보안법이라는 무지막지한 법을 폐지하는 입장으로 향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논의로, dj 정부 시절부터 가져온 평화적 민족적 통일 정책인 ‘햇볕 정책’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대중들에게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분파 전체가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골고루 얻을 수 있는 절묘한 찬스를 만든 것이다.


  두 번째, 2004년에 집권 여당에 의해 국보법 폐지가 현실적으로 어떻게 가능하게 된 것인지를 살펴보자. 우리는 이를 통해서, 자유주의 분파의 계급적 본질과 그 한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남한 자본주의의 큰 성장은 지배 세력에 있어서 파쇼에서 자유주의 분파로의 이행을 가져왔다. 자유로운 시장 경제 체제가 확장되는 데 있어서, 폭력적이고 위압적인 파쇼 분파는 방해가 될 뿐이었다. 하지만, 군부정권 시절에 경제가 오히려 발전하지 않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후진국 자본가들은 어느 정도 자본을 불려놓기 위해서 정권과 결탁하는데, 이를 통해 남한의 경제가 성장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듯 어느 정도 자본이 성장하게 되면, 정경유착은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정권의 지나친 기업 규제 등이 자유로운 경쟁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또한, 파쇼적인 정책은 노동계급의 투쟁을 더욱 급진화한다. 실제로, 국보법에 대한 개폐논의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87년 노동자 대투쟁같은 것을 상기해보자. 폭압적인 정책이 노동자들의 분노와 단결된 투쟁을 잘 이끌어낸다는 사실을 부르주아들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들에게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체제를 보장해주는 것이 결국 자신들에게 이롭다는 점 역시 말이다. 이렇듯 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해 자유민주주의는 나름대로 안정적으로 굴러가고 있으며, 열우당이 이 점을 깊이 신뢰하기 때문에 국보법 폐지 당론을 확정한 것이다.1) 한마디로 말해, 국보법 폐지는 현 상황에 아무런 폐해를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남한 자본가들은 56년간 차근차근 노동계급을 착취하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착실히 심어놓음으로써, 선심 쓰듯 국보법 폐지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총자본의 이득을 위한 공문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더군다나, 이들이 실제로, 국보법 폐지 후에 바꿀 형법 개정안을 보면  제87조(내란)와 제102조(준적국)에 각각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지휘통솔 체계를 갖춘 단체’라는 표현으로 북한을 적대적 국가로 간접 지칭하는 내용 추가, 제90조(예비·음모·선동·선전)에 ‘선전·선동’과 ‘금품수수’에 대한 처벌조항을 신설했으며, 국보법 대체법안인 파괴활동 금지법안은 제2조(정의)에서 ‘적대적 국가 또는 단체’를 ‘대한민국의 존립 및 안전을 침해하는 활동을 하는 국가 또는 국가에 준하는 단체’로 표현해 마찬가지로 북한을 간접 지칭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국가기밀 침해죄(제4조) △민주기본질서 파괴죄(제5조) △목적수행죄(제6조) △금품수수(제7조) 등을 처벌 대상으로 삼았다. 불고지죄가 폐지되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국가보안법과 전혀 성격이 다르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입법에 대한 한계는 위와 같은 것을 통해서 지적할 수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경우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 에 대해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 모든 이들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게,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것에 대한  환상 말이다. 하지만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이 만든 잉여가치를 착취함으로써 유지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 때의 민주주의라는 것은 계급의 착취와 피착취 관계를 은폐하고, 체제와 계급 대립의 완충 장치일 따름이다. 중립적인 의미로, 또는 민중을 위한 체제로 이해되는 민주주의는 오히려, 부르주아지를 이해를 더욱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투쟁을 결코 방기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체제, 그것으로 유지되는 자유민주주의를 굴러가게 하는 노동자 계급에게 민주주의적 제도라는 것은 그들을 해방시킬 충실한 무기이자,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행동할 수 있는 더 많은 권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더 많은 민주주의를 외치는 데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자유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입법 체제에 대한 한계는 명확하므로, 민주주의 제도를 통한 권리 획득은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전초전에 불과하다는 것을 선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이 폐지되더라도, 형법 조항이나, 파괴활동금지법이라는 또 다른 악법이 존재하게 될 것이므로, 다음과 같은 노래가사를 기억하자. ‘악법은 어겨서 깨뜨리리라. 불법으로 투쟁하리라.’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의 기만적인 유혹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해야 한다.

  “창으로 선물을 받으리라, 창 끝에는 창 끝으로.”2)

 

 

 

발제 3. 제도개선투쟁에 대한 노동계급의 태도는 무엇인가

 


  1. 민주주의투쟁에 대한 노동계급의 원칙적인 입장에 대해


  부르주아 정치권에서 국가보안법 개/폐를 둘러싼 논란이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현재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 등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성명서 발표, 일인시위 등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사회적인 논란 속에서 노동계급이 가져야할 원칙적인 태도일 것이다. 노동계급의 역량에 따라 부르주아의 법과 제도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동계급의 힘이 부르주아에게 위협이 될 정도가 되면 부르주아의 수많은 법과 제도들은 단지 형식에 불과했음을 지난 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현 상황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시민단체 중심의 투쟁에 대해 진정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기 위해서는 실천적인 부분까지 포함한 원칙적인 입장이 필요한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은 민주주의적 제 권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민주주의투쟁’이기에 이러한 민주주의투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가에 대해서는 역사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아직 봉건제적 질서가 강하게 남아있던 19세기 중반 프로이센에서는 구체제의 유산인 반동적 귀족세력이 실질적으로 군대 등 사회전반을 아우르는 지배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부르주아들에게 있어 정치적 지배권력을 쟁취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당면과제였지만 노동계급의 그 혁명적 힘의 분출을 두려워하여 소극적인 자세로 머물고 있었다. 이는 프로이센의 공장제 공업의 발전이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덜 발전한 사회/경제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엥겔스는 무엇을 주장했을까? 엥겔스는 봉건적 질서가 남아있는 경우보다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에 있어 더욱더 유리한 공간이기 때문에 부르주아들이 요구하는 자유에 관한 다양한 법과 제도들이 노동계급의 무기가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1). 그렇다고 하여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제는 부르주아의 문제이니 노동계급은 봉건적 질서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로의 변화를 지켜만 보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엥겔스는 분명히도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 있어 부르주아들이 반동적인 봉건귀족과 싸우는 과정에서 이를 끝까지 추진하겠는가의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노동계급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부르주아들의 꽁무니를 따라갈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당파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2) 이는 1905년 러시아의 당면 혁명의 과제인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정에 있어 레닌의 주장과 전적으로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다.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레닌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 있어 노동계급의 태도에 대해 정치적 자유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서야 함을 주장하였다.3) 그러면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분명 ‘민중의 혁명’이라고 언급하며, 이 속에서도 ‘민중’ 그 자체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들’로 구분해야 하며, 계급적 독자성에 대해 단호하게 주장하기도 했다.4) 그러면서 레닌은 명확한 실천 방향은 러시아의 상황에서 ‘사회주의를 앞당기는 데 있어서 완전한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적 공화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적 독재 이외에는 다른 길이 현재 존재하지도 않으며 존재 할 수 도 없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며 노동계급과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독재를 제시하였다. 이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정에서 혁명의 주체는 부르주아들이니 노동계급은 이에 전적으로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기회주의적 조류와 확실한 선을 긋는 동시에 실제 투쟁에 있어 물리력을 담보하기 위한 무장봉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엥겔스와 레닌의 주장을 살펴보았을 때,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서 노동계급은 독자적인 당파성을 확고히 쥐고 가면서, 보다 자유로운 공간에서 계급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풍부한 토양을 만들어가는 데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상황을 그대로 남한에 적용시키기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얼마 전 탄핵사태를 경험했듯이 부르주아민주주의는 이미 안착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혁의 과제 역시 그 당시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엥겔스와 레닌의 주장은 상황은 다를지라도 그 주장에 담긴 보편적인 입장은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주의투쟁에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2.구체적인 우리의 실천방안은 무엇인가


  그럼 이제부터 우리가 진정 고민해야 할 지점은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입장을 실천적으로 어떻게 벌여낼 것인가이다. 앞서 노동계급의 역량에 따라 부르주아의 법과 제도들은 달라질 수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현재의 노동계급의 역량부터 살펴보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요즘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어느 회사 노조에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간다고 하는 소식을 알리는 빈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한번 파업이라도 벌어지면 국민경제를 위기에 빠뜨린다면서 노골적으로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펴고 있다. 그래서 지하철노조에서 파업을 할 때는 사회적 명분(?)을 얻기 위해 ‘청년실업해소’라는 슬로건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는 그만큼 노동계급의 힘이 집약되어 조직적으로 나타는 것이 아니라 산발적으로 임금인상을 매개로 한 파업투쟁만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정치적 주체로서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이 분명 노동계급의 투쟁에 있어 ‘친북-좌익-용공’으로 몰아붙이면서 탄압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누구보다 먼저 국가보안법 폐지의 운동적 흐름을 만들어 가야할 노동계급은 뒷전에 있고. 시민단체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노동계급의 역량에 대한 현 주소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은 과연 국가보안법을 완전히 폐지시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우리는 해 봐야 한다. 부르주아 정치권에서 말하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논란은 어디까지나 ‘형법대체입법/파괴활동금지법’ 등 법률적 장치를 마련한다고 하여 사실상 제 2의 국가보안법을 준비한 상태에서 개혁성을 가지고 말싸움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단체에서 벌이는 투쟁은 단순히 상징적인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완전한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 그렇지는 못하다. 대부분은 시민단체에서는 ‘인권’ 운운하며, 국가보안법의 인권침해를 부각시키며 사회적 여론을 환기하는 것을 주된 활동으로 가져가고 있어서 국가보안법이 가지고 있는 그 본질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폭로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노동계급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르주아의 법과 제도를 개선시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체제 자체를 뒤흔들 수 있는 계급은 노동계급뿐이며, 노동계급이 투쟁에서 나서지 않는다면 부르주아의 법과 제도는 개악되면 개악되었지 ‘개선’조차 따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개/폐에 대한 논란에 있어서도 진정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즉자적인 실천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된 늦지만 가장 빠른 길을 우리는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노동계급의 현재 역량이 부족하고 국가보안법 완전철폐에 대한 입장을 가자고 투쟁을 전면적으로 벌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냥 주저앉고 말아야 하는가? 노동계급의 역량이 더욱 강화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이는 큰 틀에서는 옳은 말이지만 우리 주변에서도 작은 실천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기도 하다. 노동계급의 역량은 부족한 상태이지만 얼마 전 파견법 개악으로 인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해 더욱더 투쟁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며, 이주노동자들은 아직도 강고하게 명동성당에서 농성단을 꾸리고 있다. 이렇게 투쟁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에게 대해 학생으로서 힘차게 연대하며 국가보안법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투쟁을 평가하며 국가보안법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하고자 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힘들 수도 있겠지만 분명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노동자들과 토론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행동일 것이다. 또한 학교에서 학우들과 국가보안법 개/폐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진정한 해결을 위해서는 어떠한 입장이 필요한 가를 논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해 보면 우리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참으로 많을 것이다. 그 속에서 확고히 지녀야 할 원칙적인 입장은 유지하며 다양하게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1)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의 말 “남한 민주주의와 체제의 안정감을 깊이 신뢰하기 때문”




2) 박종철 출판사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6권  <프로이센의 군사문제와 독일의 노동자 당> 61p





1)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하고 그것을 헌법과 법률에 표현한다는 것은,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무기를 쥐여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부르주아지는, 태어날 때부터 구별되는 과거의 신분들에 대립하여 인권을, 쭌프트 제도에 대립하여 상업과 영업의 자유를, 관료적 후견에 대립하여 자유와 자치를 자신들의 깃발에 써넣어야 한다. 따라서 그 당연한 귀결로서 그들은 보통 직접 선거권,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집회의 자유, 소수 주민 계급에 대한 일체의 예외법의 폐지 등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게 요구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부르주아지에게 부르주아지이기를 중지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지만, 물론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원칙을 철저히 관철시키라고 요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언론의 자유, 집회의 권리와 결사의 권리로써 보통 선거권을 획득하고, 이 보통 직접 선거권으로써, 그리고 아울러 위에 적은 선동 수단들로써 그 밖의 모든 것을 획득한다.” (‘프로이센의 군사문제와 독일 노동자의 당’ [저작선집2] p.58~59)






2)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들에 대한 공포 때문에 반동파의 앞치마 밑으로 숨어들고 노동자들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자신의 적대 분자의 힘에 호소하는 최악의 경우가 벌어지더라도 - 그러한 경우가 벌어지더라도 노동자 당에 남아 있는 방도는, 부르주아적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 및 결사의 권리에 대한 선동과 같은 부르주아지가 저버린 선동을 부르주아의 뜻에 상관없이 추진해 나가는 길 밖에 없다. 이러한 자유들이 없이는 노동자 당 자신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가 없다. 노동자 당이 이러한 투쟁을 벌이는 것은 자신들 본래의 생존 요소, 자신들이 숨을 쉬는 데 필요한 공기를 획득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모든 경우들에 있어 노동자 당이 부르주아지의 단순한 꼬리로서가 아니라 그들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독자적인 당파로서 행동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노동자 당은, 노동자들의 계급 이해는 자본가들의 그것과 정면으로 대립한다는 것과 노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있다는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르주아지에게 상기시킬 것이다. 노동자 당은 부르주아지의 당 조직에 맞서 자신의 조직을 확고히 유지하는 한편 계속 단련시킬 것이며, 하나의 권력이 다른 권력과 교섭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만 부르주아지의 당 조직과 교섭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노동자 당은 당당한 지위를 확보하고 개별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계급 이해에 눈뜨게 할 것이며, 혁명적 폭풍 - 그리고 이 폭풍은 상업 공황이나 춘분․추분시 폭풍우와 마찬가지로 규칙적인 회귀를 하게끔 되어 있다 - 이 불어올 때에는 행동태세를 완비해 놓은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프로이센의 군사문제와 독일 노동자의 당’ [저작선집2] p.60~61)






3) 러시아 민주주의혁명은 그 사회적, 경제적 본질에 있어서 부르주아혁명이다. 그러나 이 올바른 맑스의 명제를 반복하여 얘기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 명제는 올바르게 이해되어야 하며 정치적 슬로건에 적절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현재의 생산관계, 즉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기초로 한 모든 정치적 자유는 부르주아적 자유이다. 자유에 대한 요구란 주로 부르주아지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대변자들은 이러한 요구를 제일 먼저 내세운다. 부르주아지의 추종자들은 자기들이 획득한 자유를 어느 곳에서나 주인처럼 행사하면서 자유를 온건하고 소심한 부르주아지의 것으로 변형시켜서, 평화적 시기에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대단히 교묘하게 억압하고 격동의 시기에는 이들을 잔인하게 억압하는데 이 자유를 이용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이 부정되거나 또는 비난받아야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은 오로지 나로드니크 폭동주의자들, 무정부주의자들, 경제주의자들뿐이다. 이러한 인텔리적이며 속물적인 교의가 프롤레타리아트이 의지에 반하여 그들을 기만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잠시일 뿐이다. 정치적 자유가 부르주아지로 하여금 힘을 배가시키고 조직을 꾸리는 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할지라도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며 그것도 다른 어떤 세력보다도 강렬하게 요구한다는 것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은 계급투쟁을 회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범위, 계급투쟁의 의식, 조직, 결연함을 확대시키는 데 있다. 정치투쟁사업을 경시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사회민주주의자를 민중의 보호자라는 지위에서 노동조합의 비서로 전락시키는 사람이다. 민주주의적 부르주아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업을 경시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사회민주주의자를 민중혁명의 지도자의 지위에서 자유노동조합의 지도자로 전락시키는 사람이다.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녹진. p.122~123)






4) 그렇다. 민중의 혁명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중’이라는 말이 부르주아적이며 민주주의적으로 남용되는 것에 대해 싸워왔고 지금도 대단히 훌륭하게 싸우고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이 단어가 민중 내부의 계급적 적대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사회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서는 완전히 계급적 독자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단호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민중’을 ‘계급들’로 구분하는 것은 진보적 계급이 그 자체 내에 머물거나, 좁은 한계 내에 그 자신을 한정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세계의 경제적 지배자가 후퇴하지 않을가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 행동을 마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중간계급들의 미지근함, 동요, 주저함 등과 인연이 없는 진보적 계급은 모든 힘을 다해 열정적으로 전 민중의 대의를 위해서 전민중의 선두에 서서 싸우도록 하기 위해 ‘민중’을 ‘계급들’로 구분하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녹진.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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