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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은 왜 파업을 하는가?
녹테잎(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Intro
올 한해 노동자들의 투쟁이 굵직하지는 않았지만 꽤나 많이 발생했다. 공무원 노동자들의 투쟁이나 LG칼텍스 노조의 투쟁, 궤도연대의 투쟁,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주노동자들의 투쟁.. 올 한해 벌어졌던 투쟁들은 자본가들의 공세에 밀려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부와 자본의 귀족노동자 이데올로기라던지 그 원인을 분석해보면 다양하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들이 투쟁하려 했다는 것이고, 그들이 투쟁하면서 파업을 했다는 것이다. 파업은 “하던 일을 중단하다”는 뜻의 하다형 자동사이다(Naver 국어사전 참고.) 왜 노동자들은 하던 일을 중단하는가?- 혹은 중단할 수밖에 없는가?-
왜 파업을 하는가?
노동자는 자신이 어떠한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즉 자신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을 얻기 위해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노동을 한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자신의 이득을 높이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임금을 깎아야만 한다. 혹 노동자들의 저항에 임금을 삭감할 수 없으면 노동 강도를 높이거나 노동자들을 해고 한다. 아무런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임금과 해고의 문제, 노동 강도의 문제는 생존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탐욕스런 자본가들에게 저항할 수밖에 없고, 여기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가는 한줌도 되지 않지만 매우 강한 존재다. 노동자들을 해고 할 수 있고, 작업속도를 늘릴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는 그러한 힘이 없다. 자본가를 해고할 수도 없고, 저항하기 전에는 작업속도를 늦출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의 이윤을 멈추기 위한 최후의 수단-파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투쟁에 돌입하면서부터 파업을 하는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작업속도를 늦춘다던지 준법투쟁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투쟁한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으로도 자본가들이 말을 들지 않을 때-대부분의 경우에 그/녀들은 자신의 이윤이 위협받지 않으면 말을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최후의 수단으로서 파업을 진행한다.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다. 수배 연행 구속 등의 위협에 시달려야 하고, -말도 안 되는- 무노동 무임금의 원리에 따라 경제적 고통마저 수반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파업을 결의하고 진행하는 것은 그것 이외에 방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파업이라는 것은 생산을 멈추는 행위이다. 생산을 멈추는 것은 노동자 한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혼자서 생산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자본가들의 이윤을 멈추는 일이 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을 진행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한 공장에서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생활한다. 이는 다른 계층과는 차별화 된 모습이다. 그들의 공동생산은 그들로 하여금 노예와 같은 처지에서 일을 할 때부터 단결을 배우게 한다. 농민집회에서와 노동자들의 집회에서의 분위기 차이는 이를 여력히 증명한다. 농민집회에서는 사회자의 멘트를 듣거나 자리에 착석한 채 집회에 집중하는 움직임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한 대오 안에서 대오를 흩트리지 않은 채 집회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이러한 집회에서의 모습은 노동자들이 투쟁을 하면서 단결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투쟁하기 전부터 이미 공동생산을 통해 단체 행동을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은 단결할 경우에만 자본가와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실제 노동을 하면서 ‘단결’에 대해서 체득하는 것이다.
파업은 “전쟁의 학교”
『···자본주의 사회의 바로 그 본성에서 일어나는 파업은 노동계급의 바로 그 사회체제에 대한 투쟁의 시작을 의미한다.”』1)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면서 처음으로 자본가와 비슷한 위치에 서게 된다. 87년도의 노동자 대투쟁을 상기해보면 확실해 질 것이다. 노동자들이 요구했던 요구사항 중에는 “두발 자유”, “아침체조를 하지 말 것”등등이 있었다. 그렇다. 투쟁하지 않았던 노동자들은 일만 하는 하나의 노예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이 투쟁함으로서 자본가에게 ‘우리는 너희를 위한 생산을 중단 하겠다’라고 외침으로서 자본은 그들에게 부당한 통제와 관리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럼으로써 노동자들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게 된다. 투쟁하기 전에는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작업량을 늘려도 뭐라 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요구하고, 라인별, 위치별로 자신의 처지에 대해 토론하고, 그것을 바꾸기 위한 논의를 하게 된다. 한줌도 안 되는 자본가들의 이해를 위해 가치를 생산해내는 하나의 기계로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인간으로서 다시금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이다.
처음의 노동자들의 투쟁은 자사의 고용주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스스로에 대해 발견하게 되면 될수록 자신의 적이 고용주만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인간임을 선언한 노동자들에게 손배가압류와 수배령을 때리는 경찰· 사법권력, 자신들의 너무나도 당연한 요구에 대해 ‘이기주의’라고 호도하는 언론과 정부. 그들을 보면서 노동자들은 진정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 만인을 위한 법률이 과연 어떤 만인을 위한-한줌도 안 되는 자본가-법률인지를 명확히 알게 되고, 이에 맞서서 투쟁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파업하기 전에는 자기 혼자 공장 내에서 일하는 것을 신경 쓰기만 바빴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서 자신의 옆 공장, 주변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상황을 알게 되고, 노동자들의 처지는 비슷비슷하다는 것. 전체 노동자가 단결해서 서로의 사안에 연대하여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적은 자신의 고용주뿐만 아니라 전체 자본가 계급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서 너무나 당연하지만 너무나 공허해보이기도 하는 노동자는 하나다는 구호는 그들의 투쟁 속에서 진리이자, 진실로서 확인이 된다.
그것만 배우겠는가? 자신의 투쟁에 연대해 오는 단체. 자신의 투쟁에 대해서 입장을 내오는 단체에 대해서 노동자들은 누가 우리의 편이고, 누가 아닌지를 명확히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이고 있음을, 노동자계급의 세상의 주인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파업을 통해서 명확해진 사실이 이전에는 어두운 장막 속에 갇혀 있었다는 것. 드러난 이상 투쟁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위의 내용에서 명확해 지는 것은 다음과 같다. 자사의 문제를 넘어 전체 노동자계급의 문제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하는 파업. 자본가를 넘어 정권에 대해서 칼날을 들이댈 수 있게 하는 파업에 대해서 자사의 고용주뿐만이 아니라 정권 역시 억압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귀족노동자니 집단이기주의니 치졸하기 그지 없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그들의 투쟁을 막으려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노동자들은 이것에 굴종하려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를 통해 한줌도 안되는 자본가와 정부가 결국 한 몸이고 비슷한 족속들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될 뿐이다.
이러한 파업을 통해 노동자계급이 배우게 되는 것은 자신이 세상의 주체이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주체라는 것. 그리고 한줌도 안 되는 자본과 정권은 한패이고, 자신들의 적이라는 것을 명확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파업에 대해서 옛 러시아의 성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 이것이 파업을 전쟁의 학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파업은 전체인민, 노동하는 모든 사람들을 정부 관리들의 멍에와 자본의 멍에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노동자들이 그들의 적에 대해 전투하는 것을 배우는 학교이다”2)
보충수업
누가 누구의 편이고, 누가 적인지가 명확해지는 상황에서 한 가지 이야기해야 할 부분이 더 남아있다. 노동계급이 전체 자본가와 싸워야 하고 정권과도 싸워야 하는 것이라면, 파업이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파업을 통해서 노동자들에게 학교가 되기는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그들의 계급의식을 성장시키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주체인 노동자계급이 농민의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는 파업을 통해서 배우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겠는가? 보충수업. 노동자계급의 눈으로 전체 세상을 볼 수 있는 보충수업과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 전체 노동계급이 단결하고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의식을 획득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하나의 소중한 학교임은 틀림이 없다. 다만, 그/녀들이 다시는 노예로 살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즉 그/녀들이 다시는 파업을 하지 않게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파업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변혁적인-노동계급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입장을 가질 수 있도록 그들에게 선전· 선동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파업이 “전쟁의 학교”이지 전쟁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 파업은 단지 투쟁 수단의 하나이며, 단지 노동계급운동의 한 측면이라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부르주아 사회는 ‘파업’을 어떻게 말하는가?
영현(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들어가며
앞선 발제에서 우리는 노동자계급에게 파업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며,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이 노동자계급의 정당한 무기일 수밖에 없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부르주아 사회는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그리고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어떻게 투쟁(?)하는가? 남한 사회만 하더라도 4000만 국민 중 1400만명이 노동자일 정도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데도 불구하고, 왜 노동자들의 파업은 전 국민적(?) 공감을 받지 못하는가? 그것은 숫자로는 한 줌도 안되는 자본가들이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공격 무기는 노동자계급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력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부르주아 사회가 어떻게 파업을 말하는지, 조금 더 어렵게 말하면 어떻게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공격과 통제를 하고 있는가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지난 12년, 우리는 무엇을 배웠나요?
대학에 들어오기 전, 우리는 12년 간 초-중-고등학교의 국민교육과정을 밟아왔다. 그리고 배워왔다. 교과서에 담긴 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립적이고도 가장 참된 진실만을 골라 담았으니 달달 외우란 말이야..!! 과연 그러할까? 우리가 배워왔던 공식 교육제도와 커리큘럼은 자본과 노동자 사이에서 중립적인 위치에 있을까? 도대체 교과서는 노사관계와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요즘은 교과서도 많이 개혁(!)되어서 공정하게 쓰여져있지 않을까? 직접 7차 교육과정의 중.고등학교 사회과 교과서 속을 들여다보자.3) 물론 국민공통 기본교과 과목인 사회 교과서의 노동 관련 부분은, 독립된 영역으로 구분하여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경우는 없으며, 다른 주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예로 제시되거나 간단히 몇 단락 정도 언급되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말이다. 잠깐, 교과서에는 불경스러운 노동자라는 말 대신 ‘근로자’라고 하고 있는 건 다 아시겠죠?
-선생님, 파업이 뭔지나 좀 가르쳐 주세요!
단원명 |
Ⅶ. 정치 생활과 국가/ 1. 현대 정치의 과제/ 1) 다원화된 사회, 다원화된 이익 |
내용 |
탐구 활동 - 시민의 힘으로 금융 산업 파업 해결
다음은 2000년 7월에 전국 금융 산업 노조가 파업을 선언한 전후의 은행별 저축성 예금의 동향을 나타낸 것이다. 관련 그래프 : 비파업 선언 은행의 예금과 파업 선언 은행의 예금 대조 - 은행별 저축성 예금 동향(00신문, 2000.7.12) -
시민의 힘으로 은행 파업을 해결할 수 있는지 토론해 보자. - 파업을 선언했던 I은행, J은행이 곧 파업 불참을 선언한 배경을 살펴보자. |
이 교과서에서는 파업의 당위성 여부는 논하지 않고 금융 산업노조의 파업에 대하여 시민의 힘으로 은행의 파업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노동자의 단체행동을 암묵적으로 부인함은 물론, 시민과 노동자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묘사함을 넘어, 오히려 시민들이 노동자들의 파업 여파를 적극 해결해야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노동자=이익집단, 과격행동은 절대 금물!!
단원명 |
Ⅶ. 정치 생활과 국가/ 2. 사회적 쟁점의 정치적 해결 과정 |
내용 |
1) 정치와 사회적 쟁점 (...) 물론 사회 구성원들은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에 따라 서로 협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추구하는 권력이나 부, 명예 등과 같은 사회적 자원들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갈등과 대립이 발생하게 되며 자신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서로 경쟁하기도 한다. 특히, 이러한 사회 구성원들 간의 갈등과 대립 중에서 문제에 대한 의견이 여러 가지로 나뉘어져 있고, 문제 해결의 결과가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사회적 쟁점이라고 한다 (...) 그림 :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쟁점들 주 5일 근무제를 요구하는 근로자와 이를 외면하는 사용자 근로자 - 근로자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동 시간을 단축하라! 사용자 - 경제 상황도 안 좋은 데 주 5일 근무제는 안 될 말이야! 2) 정치적 해결의 과정 (...) 이익 조정에 있어서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조정 절차의 민주성이 필수적이다. 모든 이해 당사자들이 고르게 참여하여, 양보와 타협의 자세로 대화와 토론을 통해 의견의 차이를 좁혀 나갈 때 원만한 합의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과격한 집단 행동이나 실력 행사로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려 한다면, 문제 해결이 어려워짐은 물론 심각한 사회 무질서까지 초래하게 된다. 한편, 개인과 집단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회 전체의 이익을 침해하여 갈등을 빚기도 한다. 이런 경우, 특정 집단의 이익이 사회 전체의 이익보다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되며 갈등 해결의 결과가 공익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
<고등학교, (주)천재교육, 사회 교과서, pp.202-205>
이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익집단 중의 하나가 노동자? 그리고 그러한 이익집단 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주적 절차가 대화와 타협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와 팔 것이라고는 노동력 밖에 없는 노동자가 사회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있는가? 더불어 교과서는 파업과 같은 과격한 집단행동과 실력행사가 사회 불안정 요소임을 강조하고 있다.
-정리해고 문제 해결, 경제계의 우려?!
단원명 |
Ⅶ. 정치 생활과 국가/ 3. 민주 정치 발전과 시민 문화 |
내용 |
사례 탐구2 - 정치 원리에 따른 갈등 해소
정리 해고 문제를 놓고 노동계와 사용자의 대리전으로 치달았던 H 자동차 사태가 정치권과 정부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해결되었다. 3개월에 걸쳐 6차례의 파업과 4번의 조업 중단이라는 극한 대립이 겨우 풀린 것이다. 노사 양측은 합의문에 서명하고 기념 촬영을 하는 등 화합의 모습을 보였지만, 해결 방법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높았다
갈등 해결 과정에서의 법과 정치의 기능 미국의 여론 조사에 의하면 미국 사람의 59%가 M사가 독점 금지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정부의 회사 분할 방침에 대하여는 48%가 반대하였고, 28%만 찬성하였다고 한다 (...) 그러나 법은 이러한 뜨거운 여론과는 달리 냉정하다. 이러한 사례는 기업의 활동도 법이 지배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H 자동차를 둘러싼 정리 해고 문제의 해결은 정치권의 개입으로 조정되었다. 정부나 여권에서는 노사 간의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여 신노사 문화 창조의 모델이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계에서는 사태 해결 방식을 염려하고 있으며, 이러한 경제계의 우려가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이번 사태의 해결 과정은 노조가 정리 해고를 저지할 수 있다는 선례가 될 수 있으며, 앞으로 기업의 구조 조정과 외국 자본의 유치에 상당한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사회적 갈등의 해결을 법적으로 하면 일시적으로 효율성을 잃을 수도 있으나 갈등 해결의 원칙이 확립되어 사회적 안정성을 얻을 수 있다. 반면에, 갈등 해결을 정치적으로 하면 구체적 타당성을 얻어 융통성 있게 해결할 수는 있으나 원칙이 무너져 사회적 불안이 생길 수 있다. |
이 교과서에서는 노사분규를 해결하는 제 3자로 중립적인 정부를 설정하고 있고, 친절하게도 경제계의 우려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왜 정리해고를 반대하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 줄의 설명조차 보이지 않는다.
-기타 등등
이 외에도 천재교육 교과서의 경우 ‘일상생활에서의 정치’라는 주제 아래 사회 갈등의 여러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다른 사례들의 경우 해당 주제에 대하여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예를 선정하였으나, 노동과 관련해서는 ‘노동조합의 집행부 사람들이 주도권을 둘러싸고 싸움을 하였다’라는 유달리(!)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예문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사소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노동자나 노동조합에 대한 이러한 예들이 하나의 이미지로 쌓여 졸업할 때쯤이면 누구나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대해 부정적이도록 만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사회과 교과서를 보더라도, 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얼마나 열악한가를 말하는 대신, 교과서는 아이들에게 노동자들의 파업은 사회 전체에 손실을 주는 이익행위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밟은 학생들이라면, 노동자와 파업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은 전혀 가질 수가 없다. 그것은 이 사회에서 교육이 어떠한 위치를 가지는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전담하며,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며 살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것이 그 목적이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의 철의 동맹군!!
시 하나를 인용해보았다. 아마도 이번 단락에서 이야기할 내용을 함축적으로 나타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평소에는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경쟁하던 부르주아들도,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파업했을 때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 목소리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왜곡하고 탄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단사에서 파업을 경험하는 노동자들은 그 공장의 사장, 즉 자본가 개인을 대상으로 분노하고 투쟁을 하게 된다. 하지면 싸움이 커질수록 또 계속될수록 자본가들은 개개인이 아니라, 더 많은 그들의 동맹군을 불러들여 노동자들의 파업을 탄압한다. 그리하여 싸움은 사장 한 명이 아니라, 전체 자본가 계급을 대상으로 커지게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자본가들의 철의 동맹군, 바로 언론이다. 물론 부르주아 언론들은 제아무리 개혁적이라 자칭하더라도, 평상시에는 노동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되면 아니 예고만 되어도 대대적으로 악선전을 해댄다. 구체적으로 이번 민주노총 하반기 총파업에 대한 부르주아 언론의 기사를 한 번 보자. 제목만 봐도 무슨 내용인지 훤히 다 보인다. 주된 내용은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는 민주노총에 대한 비난이다. 특히 공무원 노동자들을 철밥통으로 명시하고, 민주노총을 대기업 노조 중심이라 ‘배부른 파업’임을 강조하고 있다. 서민의 삶과 대기업 노동자들을 대비시키며, 노동귀족 이데올로기를 더욱 더 공고하게 유포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반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제 우리 노동자들의 삶이 위기가 아닌 적이 있었던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정리해고의 칼바람, 그 때문에 일할 수 있을 때 죽어라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경제위기’는 자본가 그들만의 경제위기 타령일뿐이다. 그리고 언론 스스로가 밝혔듯이 자본가와 노동자 모든 이해 당사자를 만족시킬 대안은 없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공동의 이해를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고 투쟁을 하는 것이다.
매일경제는 그렇다치고, 자칭 진보 신문인 한겨레 신문은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 최근에 있었던 공무원 투쟁에 관한 한겨레 신문의 사설이다. 한겨레 사설의 주된 내용은 공무원들이 노동자로서 노동3권을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기도 하지만, 국가의 공복이기 때문에 단체 행동권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덧붙여 현재와 같은 경제 불안 속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것에 대해서 우려를 하는 것은 자본의 이해를 노골적으로 대변한다고 하는 매일경제와 다를 바가 없다. 근본적으로 부르주아 언론은 제 아무리 비판적이라 할지라도 이 부르주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한,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적대적일 뿐이다.
이렇게 든든한 동맹군을 업은 자본은 노골적으로 노동자들의 파업을 왜곡한다. 앞서 본 시에서처럼 개별 자본은 서로 살아남기 위해 죽을 듯이 경쟁하지만, 노동자들의 단결 앞에서는 누구보다도 강고한 연대를 보여준다. 대표적인 것이 자본가 단체이다. 경총이나 전경련 같은 상급 단체들은 자본가 계급 전체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분투한다.
조선일보에 기고한 경총 회장의 글을 인용해본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조합원 투표에 의해 가결되자, 경총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더불어 ‘임금 동결 선언 등 기득권 정규직들의 양보를 통해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라’고 충고까지 덧붙이고 있다. 과연 이 사회에서 누가 기득권인가? 다시 한 번 되물을 수밖에 없다. 자본가들은 이렇게 정규직/비정규직이 대립하는 것인양,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킨다.
덧붙여 ‘비정규직 관련법 개정은 법 제도 개선사항이기 때문에 파업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업은 법 제도를 만드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란다.
음, 그렇다면 법 제정은 기업과는 관련이 없는 것인가? 과연 그럴까? 우선 큰 틀에서 국가라는 것을 보면, 파업이 일어나면 노동자들을 곤봉으로 구타하고 방패로 찍어누르는 공권력은 차치하고서라도 정부는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와 같은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기구이다. 그렇다면 조금은 더 중립적으로 보이는 법은 어떠한가? 앞서서 경총 회장은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기업의 이익, 즉 자본가의 이익과는 관련이 없다 말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그러하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았듯이 현대의 법률체계에 의하면 자본-노동의 관계는 쌍방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맺은 상호계약관계이다. 그리고 이것이 보장되는 한 이 법률은 공정하며 중립적인 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류상의 문제이다. 서로 다른 계급적 지위에 의해 한 쪽에 부여된 권력과, 상대적으로 다른 한 쪽에 박탈된 권력과 그에 따른 압박과 착취를 법은 은폐하고 있다.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은 철저하게 자본가 계급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때려잡고 있다. 손배가압류라던가 집시법 개악, 이번에 제출된 비정규직 법 개악안만 보더라도 우리는 너무나 그 사실을 쉽게 알 수가 있다.
국민들, 파업 나빠요!!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부르주아 사회는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아주 철저하게 이데올로기적 통제와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 그리고 부르주아들의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무기와 동맹군들에 의해 이 사회의 헤게모니는 압도적으로 자본가들에게 가 있다. 즉, 사실 전 국민의 4/1이 노동자이며 그 부양가족을 헤아려본다면 어마어마한 숫자인데도 불구하고,데도 국민들의 절대다수는 부르주아 사회가 말하는 바들을 그대로 믿고 있다. 굳이 이 기사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 있는 친구들을 보면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그리고 그 기본단위인 노동조합에 대해 얼마나 왜곡된 인식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영원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빼앗긴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부르주아 사회가 유포하는 거짓된 사실들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오는 26일, 우리는 민주노총 총파업이라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다시금 앞두고 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을 다음 발제에서 함께 찾아보자.
해결책 : 노동자는 계급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곤약(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지금까지 파업이 노동자에게 있어 어떤 의미가 되는지에 대해서와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 그리고 주되게는 노동자의 유일한 무기인 파업에 대한 자본과 정권의 이데올로기 공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지금 노동계급의 운동은 어떠한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학생사회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귀족노동자?? 있긴 한거야??
저번 열린 토론회 때도 귀족노동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풀어낸 것 같다. 귀족노동자들.. 그들은 다른 하청 노동자들, 이주노동자들, 여성노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받으면서 일한다. 이건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본의 폭력적 수탈로 인해 일을 뼈빠지게 하면서, 임금은 쥐꼬리도 못받기 때문이다. 그럼 소위 귀족노동자들은 일한 것보다 많이 받아가나?
예시를 들어보자. 필자의 고향이 영남지방인 관계로 우리 사촌들은 거의가 현대에서 일하고 있다. 현대해상, 현대강관,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업종도 다양하다. 필자가 가족모임에서는 아직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급이 아니기에 그냥 듣고만 있는 상황이지만 사태 파악은 빠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조선일보를 열심히 구독하시는 울 고모부 : $^야. 요즘 신문보니깐. 너희들 영 이상하던데~ 느그 노조애들은 연봉이 6천은 더 넘어가는데도 돈 더 달라꼬 난리라메? 나라경제가 이 모양 이 꼴인데 왜 계속 그라노?
현대중공업 다니는 울 이종사촌형 $^ : 이모부. 그거 순 거짓말 아닙니꺼. 글마들 말대로 연봉 6천 정도 받을라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압니꺼? 진짜 말그대로 24시간 기계처럼 일해야 됩니더. 365일중에 360일을 잔업, 특근, 야근까지 다 뛰어야제 그래 안 받습니꺼. 그래 일하믄 완전 사람 죽습니더. 그거 가지고 우리 돈 많이 받아간다꼬 하면 얼마나 복창터지는 줄 압니꺼?
그렇다. 그들은 기계가 아닌데, 그들의 계산속에는 노동자가 쉬지 않고 일하는 기계라고 생각하면서 연봉을 계산하는 것이다. 이런 일가지고 그들을 귀족노동자라고 부른다. 귀족은 귀족인데 24시간 기계처럼 일하는 귀족봤는가? 과연 태어나자마자 수십억의 재산을 보유하는 사람이 귀족인지 24시간 기계처럼 일해다 죽어나가는 사람이 귀족인지는 너무 명확하지 않은가?
사실 이런 경우는 있다. 상대적으로 노조 조직율이 높은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본의 노동자 분할정책으로 말미암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방패막이이고, 우리는 저들과는 다르다는 인식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같이 긴밀히 연대하지 못하고, 단지 생색내기 수준으로 비정규직노동자의 요구를 협상테이블에 들고 갔다가 슬그머니 치우기도 하고, 이상한 합의 사항을 도출하기도 한다. 이상한 합의 사항들 가운데는 ‘사회공헌기금’이란 것이 있는데, 이는 임금협상때 노조쪽으로 유리한 언론형성을 위해서 제시한 것이다. 노조와 자본쪽이 공동으로 기금을 조성하여 비정규직을 먹여살리자는 것이 그 주요 취지이다. 그런데 이런 것이 과연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일단, 사회공헌기금이라는 것은 비정규직노동자를 같은 노동자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단지 보호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사회적 합의주의라는 허울된 명목으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자발적 투쟁의식을 통제해 버리고, 투쟁의 발현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비정규직이 투쟁을 하려고 할때, 자본가들은 이렇게 이야기 할 것이다. ‘너희한테 돌아가는 기금도 있는데, 너희는 왜 투쟁하려고 하는것이냐!! 확 짤라버린다!!’ 사회공헌기금이라는 것 자체가 비정규직을 일단 인정하고 들어가는 정책이기에 정규직도 더 이상 비정규직에게 연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할 만큼 했다.’라고 하면 끝이다. 정규직노조는 진정으로 자신들이 연대할 세력인 비정규노동자가 아닌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휘말려서 자본가들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합의주의의 올가미에 걸린 것이다.
일각에서 이러한 정규직노조들이 파업하는 것을 가지고, ‘배부른 놈들이 파업한다. 저거 다 짤라버려!!’라고 이야기한다. 그들의 논리중 하나는 이런 경제상황에서 빠르게 경기 회복을 이룩해야 하는데, 강성노조 때문에 경기회복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정규직이 더욱 확산되는 것이란다. 과연 이 말이 옳은 말인가? 우리는 단연코 이러한 논리가 헛소리라고 규정하는 바이다. 경기가 침체하는 것은 강성노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인 호황과 불황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안고 살아가는 근원적 본질인 것이다. 이를 노동자의 투쟁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본의 무차별적 엉터리 공세일 뿐이다. 체제의 변혁을 통하지 않고서 아무리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려고 한다고 해도, 이는 결국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말고는 이루어내는 것이 없을 것이다.
‘노동자는 하나다.’ 허튼 소리가 아닌, 실천에서 풀어내기!!
지배자가 피지배자들을 통치할 때 쓰는 방법 중 가장 효율적인 것이 분할정책이다. 피지배계급을 여러 사항으로 나누고, 그들이 쉽게 단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정규직노동자/비정규직노동자, 여성노동자/남성노동자, 이주노동자/한국노동자 등등 자본의 분할 정책은 우리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공세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그룹을 공격하는 것을 자신에 대한 공격이 아닌 줄 안다. 하지만 이것은 옳은 상황판단이 아니다. 노동자는 하나로 이어지고, 같은 계급이기에 같은 운명이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노동자를 정부가 양산한다고 해서 정규직 노동자가 맘 편히 있을 때가 아니다. 비정규직이 늘면 늘수록, 자본은 임금이 한참이나 싸고 짜르기도 편한 비정규직을 쓴다. 그럼에 따라서 정규직은 자신의 처지를 항상적으로 낮추어야 하고, 자본의 눈치를 보며 설설 기어야 할 것이다. 각개 격파 당하는 노동자들은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처지를 알아서 낮추며, 취업하러 다녀야 할 것이다. 분할정책이후 각개격파가 자본가들이 잘 쓰는 방법이다.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은 공문구가 아니다. 역사에서 철저히 검증된 진리이다. 87년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기에 민주노조가 일어설 수 있었고, 90년 현대중공업의 골리앗 투쟁이 있었기에 노동자들의 투쟁이 들불처럼 일어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잘 조직된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열심히 투쟁하였기에 다른 노동자들도 그 힘을 이어받아 투쟁할 수 있었다. 노동자의 이름으로, 단결된 모습을 보였기에 자본가들은 그 힘에 눌려 조그마한 개량이라도 내주었던 것이다.
지금의 모습은 어떤가? 단지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내가려고 하지는 않는가? 자본가들의 관대한 처우를 바라면서 단지 기도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옆에서 탄압받는 노동자를 보면서 ‘우리는 그렇지 않아’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지는 않은가? 같이 연대해야 할 노동자들을 보지 않고, 자본가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리고 단사의 문제에만 급급하여 큰 틀의 노동자 문제는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이제는 단사를 뛰어넘어야 한다. 계급의 운동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단지 ‘우리는 이런 상황이 아니야’라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자본과 노동자와의 대결에서 한부분의 공격은 전체를 향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상황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해 투쟁할 것을 강요한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
이 시점에서 우리 청년학생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단지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들만의 투쟁이라면서 마음속으로 지지만하면서 가슴 졸여야만 하는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변혁의 심장 노동자계급의 철의 동맹군 학생대오도 할 일이 많다. 우선 간단한 일. 학내에서 열심히 선전한다. 특히 그때 그때의 사안으로 노동자 투쟁에 함께 할 것을,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를 깨뜨려주는 것으로도 학생들은 대단한 선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시기에 어느 적절한 정세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가이다. 단지 ‘노동자는 하나다.’, ‘비정규직 철폐하라.’ 는 식의 구호는 소귀에 경읽기 밖엔 되지 못한다. 공무원노조의 투쟁이 지난번에 펼쳐졌었다. 그런때는 ‘공무원도 노동자다. 노동3권 보장하라.’는 식의 이야기를 가지고 풀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당시에는 공무원노조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자본과 정권이 언론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하여 대대적으로 유포했다. 이런 이야기에 찌들어 있는 학생들에게 하나하나 자세히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간략히 논리적인 선전물을 제작하여 붙이는 것이다. 아무리 평소에 대자보를 안 읽는 학생이어도, 그렇게 이슈화되는 쟁점에 대해서 자보가 붙는다면 한번씩 보고 지나가게 마련이다. 그들이 그 당시에는 바로바로 설득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의문점을 던져주는 것. 그들의 생각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도 굉장한 방법이다. 특히 매년 초기에는 그런 작업이 굉장히 유용하다. 왜냐하면 새내기들은 모든 자보를 다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보 백날 붙여봐야 지속적으로 고민을 풀어내가지 못한다면 허망하게 끝난다. 우리의 옆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같이 차근차근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일상적으로 이야기하며 실천하자. 그리고 노동자계급중심의 정치를 알려나가자. 이것이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선전방법이다. 물론 노동자투쟁에 긴밀히 연대하는 것은 필수이고^^
1) V.I.Lenin, 파업에 관하여
2) 같은 책
3) 송태수,[사회과 교과서 노동교육 내용분석(제 7차 교육과정)]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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