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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속의 민주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비판-
‘민주주의’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지. ‘모두에게 좋은 거다’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터인데 당장에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참으로 막연해진다. 교과서에 제시된 민주주의의 의미를 참고하여 우선 이렇게 이해해두자.
“결론적으로, 민주주의라는 말은 국가 의사의 결정을 국민의 합의에 두는 특정한 정치 형태라는 의미와, 자유, 평등과 같은 기본 이념을 민주적 방식으로 실현시킨다는 의미, 그리고 국민의 정신적 자세, 생활 태도, 행동 양식 등을 민주적으로 수행하는 생활양식이라는 의미를 담게 된 것이다.” (정치 교과서)
그렇다면 오늘날의 남한 사회는 민주주의 국가인가?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 국가의 표본으로서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한 ‘시민 사회’를 떠올린다.
“서구 사회에서는 신분 사회와 절대주의적 전제 군주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17, 18세기에 이르러 시민 혁명을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고대 민주 정치의 이상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재현되었다. 특히, 대혁명으로 알려진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 이념을 내걸고, 국민 주권의 기치 아래 공동 사회를 새로이 구축하는 원동력으로서 민주주의를 추구하였다.” (정치 교과서)
그런데 프랑스 혁명을 위와 같이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 그렇다. 글에는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주체가 빠져있다. 프랑스 혁명의 주체는 누구였나? 바로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17,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산업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하였고,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생산을 확대시킬 필요가 있었던 그들에게 당시 국가를 지배하고 있던 봉건 귀족들은 큰 걸림돌이었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라고 불려오고 있는 부르주아지에 고유한 생산 방식은 봉건 질서의 지방적이고 신분적인 특권들 및 인신적 상호 속박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부르주아 계급이 무엇보다도 원한 것은 당시 국가 체제에 의해 제약 받지 않으면서 마음대로 경쟁하고 무역할 수 있는 ‘경제적 자유’였다.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의 본질은 부르주아지 계급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바탕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대개 프랑스 혁명을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난 혁명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얼 하고 있었나? 그들 역시 혁명을 위해 싸웠다. 혁명의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봉건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 사이의 대립과 마찬가지로, 이 두 신분 모두와 프롤레타리아 계급 사이의 대립 또한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관계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간의 갈등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부르주아 계급이 그들의 경제적 이해를 위한 투쟁을 마치 보편적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으로 탈바꿈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계급 또한 이 투쟁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신분적 특권을 배제하고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취급하며, 권리에 있어서도 평등하다는 이념을 내세운다. 이러한 평등의 이념은 “인간은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한다. 사회적 차별은 공동 이익을 근거로 해서만 있을 수 있다.”는 프랑스 인권 선언의 규정에 잘 명시되어 있다.” (정치 교과서)
혁명의 성과를 만인의 것으로 돌리기 위해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이 주장한 ‘(경제적) 자유’와 ‘(신분적) 평등’의 범위를 확대시켜야만 했다. 그들은 정치의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영역에 자유와 평등을 선언하였다. 단, ‘경제적 평등’만을 제외하고.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줄여서 말하지만, 사실 오늘날 민주주의의 형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실재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참여에 의한 정치가 가능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을 위한, 법적으로 국민의 참정권은 주어져있지만 사실상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이러한 민주주의의 형태 또한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지향하고 있는 국가 발전의 이상은 모든 국민이 강한 공동체 의식을 지니며, 개인이나 사회 집단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다원주의적 정치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다. 아울러 지속적인 경제 발전 속에서 국민들이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복지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윤리 교과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유 민주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윤리 교과서에서는 자유 민주주의가 표방하는 자유의 개념을 “국민 각자가 보람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자신의 욕구에 따라 그 삶의 조건들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평등을 “기회 균등의 의미”로서 “법적, 정치적 평등이며, 이는 경제적 평등이나 결과의 평등으로 확대되지 않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교과서에서는 계급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현대사회가 계급사회라는 것을 명시한다면 민주주의가 갖는 의미는 분명해진다. 계급사회에서 부의 집중과 집적은 일반적으로 -로또에 당첨되지 않는 한- 생산수단을 소유한 부르주아 계급, 즉 자본가 계급에게만 가능하다.** 따라서 삶의 조건들이나 선택의 기회는 우리가 지배 계급의 자식으로 태어나지 않는 한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평등’하지 못하다. 현대사회는 또한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의해 지배계급의 이해관계가 보장되는 한, 오늘날 자유와 평등의 이념은 태어날 때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도 우리가 머리 속으로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게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과거 노예제 사회나 봉건제 사회와 비교할 때, 지배관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훨씬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와 평등은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일반적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는 머리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실현되며, 그러한 이념들은 현실의 철저한 반영물에 불과하다.
“원시 상태를 제외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는 것, 서로 투쟁하는 이 사회 계급은 언제나 그때그때의 생산 관계들 및 교환 관계들, 한마디로 경제적 관계들의 산물이라는 것 ; 따라서 사회의 그때그때의 경제적 구조는, 역사 시기마다의 법적, 정치적 제도들과 종교적, 철학적 등등의 표상 방식들로 이루어지는 전체 상부 구조를 종국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실재적 기초를 형성한다는 것.”***
계속 말했지만,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 또한 인용문에 나타난 사회의 경제적 관계들과 무관하지 않다. 한 사회가 표방하는 이념들을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교과서가 교묘하게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본질을 감추고 있음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 속의 민주주의>>
-일반사회 교과서를 중심으로-
어느덧 수능을 본 지 2년이 지났다. 오랜만에 일반사회 교과서를 보니 그 당시 공부했던 것이 새록새록 기억나기 시작한...................콜록콜록
사실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기억나는 것은 윤리와 일반사회 시험을 볼 때 객관식에서 답이 되는 것은, “제일 그럴싸한 보기”와 “제일 긴 보기” 였다는 것 뿐이다. 여기서 교과서에서의 가장 큰 문제를 집어 볼 수 있다. 바로 굉장히 “그럴싸하다”는 것이다.
음... 일반사회 교과서를 중심으로 기억을 되살려 그럴싸한 맥락들을 집어보자~!(나는 물론 되살릴 기억이 없다..)
우선 일반사회 대단원 중 두 번째 민주 시민의 역할에 나와 있는 부분들을 보자..
“현대 민주 시민 사회는 시민들의 자유 의사에 의해 운영된다”(p.20)
”시민이 주체가 되는 민주 시민 사회에서는 시민 각자의 현명한 판단이 사회 전체의 질을 결정한다.“(p.21)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란, 국민의 천부 인권과 행복을 존중하고 이를 법으로 보장하는 국가이다. 기본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법적인 제도와 절차를 마련하고, 국가가 앞서서 지켜 나가는 것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질서이다.“(p.190)
위에서 언급한 말만 보면 우리는 “무릉도원”에 살고 있는 것이 틀림 없다. 우리의 자유 의사가 사회 전체의 질을 결정하고, 법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니 이 어찌 완벽한 사회인가?
그러나 당신의 실제 삶은 그러한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볼 부분이 있다. 하나는 “우리”라고 뭉뚱그려 표현할 수 있는가? 표현할 수 없다면 왜 그런가? 그리고 국가는 중립적인 존재인가?
우리는 여기서 맑스의 유명한 선언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맑스가 한 말이 그냥 멋져서 아직까지 읽히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멋있기도 하다.) 잉여생산이 생겨나면서부터 계급과 소유를 둘러싼 투쟁들이 벌어질 수 밖에 없고, 사회의 경제적 조건들이 바뀌어 가면서 각기 다른 모습의 계급들이 투쟁해 온 것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것이 맑스의 말에 담겨있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두가지 계급이 대립하게 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프롤레타리아는 무산자로서 자신의 노동을 팔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이고, 부르주아는 유산계급으로서 자신이 노동하지 않고 살아가는-매우 유복하게- 존재이다.
위에서 굉장히 재미없는 이야기(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이야기)를 한 것은 다름아니다. 이러한 모습이 사회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사회는 계급간의 대립이 반영되는 공간이다. 물론 계급간에 대립하는 모습의 투영이 전부는 아니다.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계급의 헤게모니가 사회 전반을 장악하기 때문이다.
이제 대충 하고 싶은 말이 나왔다. 즉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사회 전반을 장악한다. 그리고 이 주도권이란 소유라는 하나의 “힘”을 가지고 있는 유산계급이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잡고 있다.(이에 관해서는 밑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라고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계급사회에서 모든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능한 것은 이것이다. 부르주아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거나,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을 대변하거나.
전 세계적으로 발생했던 부르주아와 중세 영주와의 투쟁은 혁명으로 봉건제 사회는 종식됐고, 이로 인해 부르주아의 승리 즉 자본주의의 막이 올랐다.(불행히도 조선에서는 그러한 흐름이 폭발적으로 나타나지는 못했다.) 프랑스 대혁명이라 불리는 부르주아 혁명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외쳐졌던 구호는 어떤 것이었는가? “자연에 근거한 평등”,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이었다. 이러한 권리, 부르주아 혁명 이후 국가에 대해서 엥겔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이성의 왕국이 부르주아지의 이상화된 왕국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영원한 정의는 부르주아적 사법으로 실현되었다는 것 ;영원한 정의는 부르주아적 사법으로 실현되었다는 것 ; 평등은 법률 앞에서의 부르주아적 평등으로 귀착되었다는 것; 가장 본질적인 인권의 하나로 선포된 것은-부르주아적 소유권이었다는 것...”*
즉 현대국가에서 이야기 하는 자유는 부르주아가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는 자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고, 평등 역시 부르주아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법률 앞에서의 평등-부르주아만이 실질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자세하고 파고들면 굉장히 길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절대 모르거나 귀찮아서 안하는 것은 아니다ㅡㅡ;;.) 발제할 부분은 일반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주의에 관한 비판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 그 중에서도 계급사회 내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갈등을 교과서에는 어떻게 감추려하는지(민주주의의 이름을 이용해서)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써 놓은 걸 보니 이미 충분히 길게 써놓았군...;;;)
일반사회 교과서에는 민주시민의 생활 원칙으로 ‘대화와 토론’, ‘양보와 타협’, ‘다수결과 소수 의견 존중’을 이야기 한다.(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시민”이라는 개념도 참 재미있다. 대학 와서 알게 된 민주 시민은 집회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전경에 맞서 ‘지나가다 분노한’ 시민‘인양’ 싸우는 사람들 이었다..;)
‘대화와 토론’과 ‘양보와 타협’은 하나의 맥락 속에 있는 논리이다. 사회의 갈등을 서로 대화를 통해 조금씩 양보해서 타협을 보자는 것인데, 갈등의 본질을 생각해 보면 굉장히 공허한 이야기임이 드러난다. 또 이는 계급간의 갈등과 모순을 대화와 타협으로 은폐시키려는 -요즘들어 노동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사회적 합의’라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즉 임금노동과, 자본이라는 구조적인 모순에서 시작되는 갈등은 대화와 토론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본질적인 모순이며, 그것은 절대 타협이나 양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모순관계를 보지 않고, 단지 대화와 타협을 이야기 하는 것은 모순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닌 노동자․민중을 자신의 이데올로기 밑에 포섭하려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드러난다. 등록금투쟁을 생각해 보자. 학교와 학생들이 처음으로 교섭을 할 수 있었던 때가 언제였는가? 비상학생총회 당일 교양관으로 기습 항의 방문을 들어가서 부총장을 압박했었을 때 비로소 그들은 교섭을 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그 전부터 요구해 왔던 교섭에 대해서는 들은 척도 안하다가 학우들이 학교를 실제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교섭을 시작해 왔다. 그러면서 본관점거에 대해서 학교가 폈던 말은 “학우들이 대화하려 하지 않고, 폭력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는 것이 아니었는가? 우리보고 어쩌라구~! 압박을 받지 않는 한 그들은 협상하려 하지 않는다. !
“다수결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다수결이 ‘전원 일치에 가깝기 때문에’ 제일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이야기 한다.(물론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서 그들과 대화하고 타협해야 한다고 (기만적으로)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많은 이가 찬성하는 것이 과연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 될 수 있을까? 이는 우리의 현실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열악한 자신의 처지를 개선시키기 위해 투쟁을 하고, 철거민들이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농민들이 FTA에 반대하는 집회를 갖지만 이 모든 것들은 왜곡되고 이기주의에서 나온 행위들로 보도되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인식한다.(이는 가장 진보적인 담론이 많이 오가는 대학에서도 존재한다.) 그리고 파병문제에 있어서도 그것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한 전쟁이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파병에 찬성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현재 계급간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부르주아는 모든 것을 통제 한다. 자신이 소유한 물질적인 힘으로 의식 역시 강요할 수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조선일보 KBS등의 모든 매스컴 역시 돈 없이는 굴러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많은 대중들은 접하는 매체는 부르주아들의 그 것일 수밖에 없고,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국가에서 인증한 교과서 역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이는 국가가 하나의 중립적인 존재가 아닌 부르주아 계급을 보호하고, 그들을 위한 정책을 집행하는 공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날 때부터 보고 듣는 것, 심지어 학교에서 배우는 것 역시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이데올로기 역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의식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현실에서 투쟁하지만 전쟁에 대해서는 자신의 이해관계와 직결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고 파병에 찬성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수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수결이라는 것은 다수를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합리화 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학습 정리(시험에 꼭 나온다고 해서 외웠었던 기억이...)에 다음과 같이 정리해 놓는다.
“사회적 집단 갈등은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이지만, 그러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회를 개선하려는 움직임도 있게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대립되는 집단 간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여 사회 안정과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p.103)
교과서 스스로가 갈등은 근본적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합리적으로 조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조건을 바꾸지 않으면 어떠한 본질도 변하지 않는 무산계급을 자본의 ‘세련된’ 합의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포섭하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이는 위에서도 강조해서 이야기 했다.) 그리고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 왜 없는가? 생산력은 급속도로 발전해 왔다. 이제 지역간의 갈등은 지역간의 교류를 통해 없어질 수 있다.(물론 자본주의에서는 어려운 이야기이다.) 여성과 남성의 차별에 있어서도, 사적인 소유관계를 철폐하면 차별적인 분업이 아닌 자연적인 분업만이 남게 될 것이다. 즉 사적소유와 계급을 철폐하면 자연히 계급간의 대립이 없어지게 되고 따라서 계급간의 갈등은 존재하지 않게 되지 않겠는가?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뭐 했다고...;;;) 우리가 고등학교에서 배웠던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계급모순이 엄연히 존재하는 자본주의에서 모두의 이해를 대변하는 민주주의는 불가능 하다. 결국 어느 계급의 민주주의인지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봤던 대화와 타협 등의 이야기, 그리고 실질적으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대부분의 경우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입각해서 보자면, 교과서의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계급을 변호하는 민주주의’이다.
*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프리드리히 엥겔스, p.455
** 왜 그런지는 굳이 쓰지 않겠음.
***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프리드리히 엥겔스, p.453
**** 맑스에 의한 유물론적 관점.
***** 공산당 선언,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저작선집 1권,박종철 출판사)
*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 프리드리히 엥겔스(저작 선집 5권, 박종철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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