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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겹살 집 딸 중에 채식하시는 분?

 
 
 
 채식주의는 이제 완전히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잡은 듯하다. 나는 뉴욕에 오기 전에도 채식주의에 대해 몇 번을 고민했었는데, 이곳에 오니 비자발적 채식을 강요당하게 된다. 이유는 인터넷도 쓰고, 또 무언가 쓸 수 있게 오래 뭉갤 수 있는 차도 팔고 밥도 파는 카페가 있는데, 여기가 이른바 채식 카페라 고기들은 걸 거의 팔지를 않기 때문이다. 오늘 먹은 건 Bien Buritto인데, 현미, 토마토, 아보카도, 기타 푸른 야채를 밀전병에 말아준 것이다. 물론 맛있게 먹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곳에서 음식을 먹을 때마다 무언가 복잡한 느낌이 든다. 지난 번에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 갔을 때 정말 배고파 죽을 것 같아 들어간 곳 역시 고기 안 파는 식당이었다. 여기는 또 밀가루를 안 써서 모든 팬 케이크나 샌드위치가 밀가루 안 넣고 만든 것들이다. (먹으면서도 도대체 밀가루가 아니면 뭘 넣었는지 모르겠다. 쌀가루인가? 옥수수?) 그때도 물론 커피에마저 두유를 타주는 이 곳에서 맛있게 식사하기는 했지만 무언가 마음이 불편했다.
 마음이 불편한 가장 큰 이유는 밥 먹는 사람이나 서빙하는 사람들이 모두 백인 혹은 가끔아시안이라면 대부분의 경우 음식 만들고, 설거지하는 사람들은 히스패닉 아니면 라티노이기 때문이다. 매번 채식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인종+계급적 구분의 한 가운데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다 두근두근하다. 내가 자주 가는 곳은 정말 사랑스럽고, 편안하고, 또 가격도 저렴한 편인 곳이지만 나는 여기서 단 한번도 식사하거나 차 마시는 라티노나 히스패닉을 본 적이 없다. 물론 내가 이른바 백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인종적 구분에 덜 익숙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다.
채식하는 흑인? 채식하는 라티노? 채식하는 히스패닉? 채식하는 접시닦이? 채식하는 노동자? 채식하는 이민자? 피자 먹는 곳에 가면 당연히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이 왜 채식 식당에는 없는 걸까? 그건 단순히 동네가 달라서 그런 걸까? 할렘이나 브루클린이나 퀸즈에 가면 채식 식당에서 여러 인종들이 다 같이 밥 먹고 있을까?
 마치 이럴 때면 채식은 부유한 사람들이나 배운 게 좀 있는 이른바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전유물 같아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지난 번에 아나키스트 모임에 갔을 때도 모두 채식 식단이었는데, 거기 써 있던 팻말은 “Meet is already involved!”라는 말이었다. “고기는 이미 연루되어 있다”라는 말은 정치적으로 매우 올바른 것 같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갈비집 딸이나 삼겹살 집 딸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 역시 음식점하는 집 딸인데, 내가 채식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 식구들을 배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저히 엄마한테 나 채식주의 할래라는 말은 못하겠다. 삼겹살 집 딸인데 채식하는 사람이 있으면 좀 경험을 이야기해주었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채식주의로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듣거나, 보거나, 읽기는 하지만 나는 여기서 오히려 채식주의 하지 않으며 사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한다. 채식주의는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삶의 바꾸는 방식을 가장 기본적인 방식인 먹는 것에서부터 무언가를 바꾸어 간다는 사실은 정말 근본적으로 혁명적이며 중요한 시도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채식주의 할 수 없는 삶에 대해 더 생각하고 싶다. 생활 방식, 그러니까 라이프 스타일은 정말로 계급적이다. 우유도 안 먹고, 두부에 집착하는 방식은 이곳에서는 새로운 소비주의의 방식이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공정 무역으로 팔리는 커피만 파는 것처럼 삶의 정치를 실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사실 너무 여러 종류의 채식주의자들이 있어서 (이른바 정치적 채식주의자와 건강주의자들이 모두 채식주의에 섞여 있으니까) 무언가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지만, 여러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종교적 의미에서 채식주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자기 계급의 실천 방식과 결코 분리 불가능하다.   
 우리 엄마가 가끔 하시는 말 중에 “사람은 그래도 남의 살을 뜯어 먹어야 힘이 나는 거야”라는 말이 있다. 서울서도 고기도 틈틈히 챙겨먹고 힘내라고 하시는 말씀인데, 나는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남의 살 뜯어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의 의미 역시 남의 살을 안 뜯어먹겠다는 결정만큼이나 중요하다. 고기는 이미 연루되어 있다면, 그렇다면 고기 먹는 사람들은? 남의 살 먹으며 힘내야 하는 사람들의 삶이 채식주의의 도덕성과 함께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더욱 불행한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겹살 집 딸도 실천할 수 있는 음식의 정치! 그냥 채식주의 말고 이런 걸 찾아보고 싶다. 공정한 돼지고기, 자유로운 닭고기, 억압없는 쇠고기 등등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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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아나키스트들, 대추리, 그리고 나.


미국의 아나키스트들 모임인 New York Metro Alliance of Anarchist의 회의에 놀러 갔다 왔다. 줄여서 자기들끼리 “나이마”라고 부르는 이 모임은 사실 미리 알고 있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 Bluestocking이라는 서점이 있는데, 거기서 포스터를 보았다. “혁명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자”라는 포스터였는데, 사실 나는 미국 내 반전 운동이나 그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서 수첩에 잘 적어 두었었다.
전철 안 타고 걸어가려고, 정말 얼굴이 깨질 듯이 추운데, 미친 듯이 걷고, 걷고 걸어서 로어 이스트 사이드의 커뮤니티 센터에 도착했다. (뉴욕의 가장 좋은 점은 역시나 그래도 걸으면 도착할 수 있다는 거다. 자전거를 탄 애들이 부러워서 자전거 값을 알아보았는데, 무지 후지게 생긴게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 내었다.)
내가 참가한 모임은 “나이마”의 여섯 번째 회의였는데, 주로 두 달에 한번 정도 모인다고 한다. 이 모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뉴욕 내의 아나키스트들이 서로 만나고, 소통하고, 사회에 아나키스트들의 존재를 알리는 것은 물론 아나키즘의 정신을 실천하고 퍼트리는 것. 여러 하위 그룹들이 모여서 각기 관심 있는 일을 하는데, 사파티스타와 연관된 일을 하는 그룹도 있고, 진보적이고 억압적이지 않은 보건 의료를 위해 모이는 그룹도 있고, 아나키즘 관련 책을 읽는 그룹도 있고 또 아나키한 LGBT 아젠다를 구성하기 위한 그룹도 있다. 각기 관심 있는 그룹에서 활동하고 가끔 이렇고 모여서 서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한 30명 정도의 사람들이 나중에는 불어나서 60명에 이르렀던 것 같다. 젊은 친구들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주로 백인이었지만 흑인, 아시안 그리고 시크교도 복장을 한 할아버지도 있었다. (미국에 온지 얼마 안된 나에게 한 집단의 인종적 분포는 사실 매우 민감하게 다가오는데, 여기 사는 사람들은 막상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이에 대해 더 생각해 보고 싶다. 또 백인 내의 차이들을 내가 잘 모른다는 점도 문제이기도 하다.)
다들 모여 앉아 서로 소개도 하고, 인사도 한 후 이른바 조별 모임을 하기로 했다. 주제는 지금 기억하기로는 1) 아나키즘 리더쉽을 어떻게 이룩할 것인가? 80/20이 여전히 유효한가? 2)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공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경찰의 체포, 파시스트나 다른 집단으로부터의 공격 등에 대해서 3) 좌파 막시스트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으며 어떻게 다른가? 4) 젠더, 인종, 환경과 같은 문제들과 아나키즘의 관계는 무엇인가? 의 주제였다. 마치 우리 초등학교 때 조별 모임 하듯이 둘러 앉으면, 저절로 조장하는 사람이 생기듯이 사람들이 모여서 이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몇몇 회의를 참여하면서 느낀 점은 나이가 만든, 적든 간에 이 도시의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이야기 하기를 참 좋아한다는 것이다. 흔히 한참을 뺀 후에야, 무게를 잔뜩 잡고 이야기하는 방식을 –나도 종종 그러기는 하지만- 사실 잘 찾아보기가 힘들다. 나이가 만든, 적든 손을 들고, 순서를 정하고, 뉴욕 사람들답게 빨리 이야기한다. 남이 이야기하는 동안에 손을 들고 재촉하는 사람들을 보면 사실 좀 순진해 보이기도 해서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토론의 내용은 사실 그닥 새롭지는 않았다. 나는 3)번 주제에 함께 있었는데, 곧잘 이야기하듯이 막시스트와 아나키스트는 함께 할 수 있다, 없다, 주제에 따라 연합해야 한다와 같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아무래도 이 조별 모임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모여 어쨌든 생각을 나누는데 목적이 있었고, 얼굴이라도 익히자는 게 기획 의도인 것 같았다. 작은 방에 사람들은 너무 많고, 또 다들 이야기하고 있어서 소리치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을 것만 같았다. 4)번 주제로 옮겨 갔을 때는 “나이마”가 스페인 사용자들을 충분히 배려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니까 통역을 두거나 하자라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조별 토론을 한 후에는 다같이 모여 서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시 한번 요약, 정리 발표 하고 –초등학교 때 발표 수업하듯이-, 또 원하는 주제가 있으면 모두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지금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대추리에 관해 이야기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 평택에 가본 적이 없다. 물론 평택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사실 이 문제를 내 생활 속에서 연관시키기가 어려웠다. 평택에 직접 가고, 살고, 거기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감동적이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뜨끈해지도 했지만 나는 사실 한국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찾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국에 와서 평택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니. 겉멋을 부리는 것만 같아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내 자신을 나도 잘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한번도 활동가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이른바 “활동”이라고 하는 것들에 연루되기는 했지만, 내가 세우고자 했던 원칙은 내 생활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범위 안에서, 내가 공부하는 것들 속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 경계에서 평택은 사실 하나의 커다란 원칙 같은 것이었지 내 생활의 사건은 아니었다.
내가 평택에 대해 처음 보는 미국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이유는 아마도 사람들이 반전에 이제는 지쳐 버렸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사파티스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좀 약이 올랐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손을 들었고, 뉴욕에 사는 아나키스트들이 나에게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사실 내 순서를 정해주었는데, 나는 금방 잊어서 내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른 후에야 내가 이야기할 차례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당황했고, 더욱이 영어로 50명 넘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해보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사람들에게 “대추리”라고 말하게 했다. 처음에는 몇몇 사람 밖에 따라 하지 않아서 다시 한번 다 같이 “대추리”라고 말하게 했다. 사람들이 다들 어색하게 내 말을 따라 했고, 나는 이 작은 마을이 주한 미군으로 인해 없어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사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평생을 한 마을에서 농사짓고 살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땅을 주한 미군에게 빼앗기게 되었다고,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특히나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이 이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한 것 같다. 혼자 우뚝 서서 이야기하며 생각한 것은 도대체 이 이야기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저 이 사실에 대해 알게 하는 것이 과연 필요한 일일까?’ 나는 내 스스로도 이 질문에 답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마지막으로 이것 역시 하나의 전쟁이라고 이야기했다. 모두들 반전 이야기에 이제 시들해진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저 밖에서는 미군과의 수많은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이를 잊지 말고 기억해달라고 말이다.
나는 이 결론에서 주한 미군이 문제인지, 한국 정부가 문제인지 내 스스로도 답을 내릴 수 없었지만 어쨌든 당시에 생각한 것은 이 사람들 역시 이에 대해서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느낌이었다. 내 짧은 이야기는 질문 없이 지나갔고, 그 후 또 여러 주제들이 오고 갔다. 봄에 열리는 포럼에 참가할지, 보스턴에서 하고 있는 이민자 노조 운동에 어떻게 동참할지 등등에 대해서 말이다. 회의가 끝나고 몇몇 사람들이 내게 와서 내 이야기가 흥미로웠다거나, 감동적이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는 사실 내 시원찮은 영어 실력 때문에 사람들이 얼마나 내 이야기를 알아들었는지 그닥 확신이 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너그럽고 예의 바른 사람들은 충분히 알아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는 낯선 곳에 와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에 대해 이전보다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 텔레비전이 없어서 일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어떤 가능성들을 확인하고 있는 듯하다. 데이빗 그래버가 한국에 왔을 때 얘기한 “스스로를 스스로가 조직하기 self organization”가 좀더 뚜렷한 형태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한번도 내 스스로 무슨 주의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슨 무슨 주의자나 무슨 무슨 활동가가 되지 않고도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의 아나키 친구들이 하듯이 좀 덜 안달복달하는 방식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다.
평택의 이야기는 사실 멀리 있다. 나는 이것을 멀리서 느낀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많은 사람들 역시 이 이야기를 멀게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적 거리감 속에서도 어떤 가능성들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멀리 있는 원칙들을 가깝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새로운 구심력을 구성할 가능성 말이다. 아직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실천들이 언제고 연합할 수 있는 그 어떤 공통점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커다란 자석에 철가루들이 끊임없이 진동하면서 붙어 있듯이, 우리의 서로 다른 움직임들이 어떤 커다란 힘을 구성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생겨난다. 우선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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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레즈비언되기!

 

 레즈비언 노인들을 돕기 위한 자선 파티가 47번가의 China Club에서 열렸다. 차이나 클럽은 90년대 잘 나가던 클럽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그런 모양이다. 3 30분에서 8 30분까지 계획된 이 파티는 미국의 노인 LGBT들을 위한 단체인 SAGE(Services and Advocacy for Gay, Lesbian, Bisexual and Transgender Elders)에서 주관한 것이다. 입장료는 회원은 20$, 비회원은 25$인데, 코트 체크 비용에 음료는 따로 지불해야 한다. 또 복권 당첨 행사도 하였는데, 엉겁결에 10개나 산 나는 하나도 당첨되지 못했다.

 할머니 레즈비언이라니. 예전에서 데미 무어 나오는 레즈비언 옴니버스 영화에서 할머니 레즈비언 관련된 단편 영화를 본 것 같기도 하지만 두 할머니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한 명이 죽어버리고, 한 명은 레즈비언 파트너라는 사실 때문에 졸지에 집에서 쫓겨난다는 그때 볼 때는 무지 슬퍼서 눈물이 막 나던 패배주의적인 영화였다- 도대체 현실 속에서 그 모양새가 안 떠올랐다. 만약 내가 늙는다면, 물론 늙겠지만, 그렇다면 나도 할머니 레즈비언이 되는 것일 텐데, 도대체 할머니 레즈비언이라니.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상상이 되지를 않았다. 이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꿈을 꾸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희망없음의 증거이기도 하다. 앞으로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처럼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빌리지 보이스에서 이 파티에 관한 뉴스를 본 순간 매우 흥미롭기도 했지만 동시에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성애자 20대 여성은 과연 할머니가 된 자기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일일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며느리를 구박하고, 손자 손녀를 거느리는 그런 할머니를 과연 상상할까? 나는 과연 어떤 할머니가 될 수 있을 것일까?

 폴카 풍의 음악에 할머니들이 네 줄로 나란히 서서 춤추고 있으면 어쩌는가 하는 나의 걱정과 다르게 스테이지는 80,90년대 히트 넘버의 비트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자원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은 할머니들이었지만 스테이즈는 할머니, 아주머니, 아저씨처럼 보이는 아주머니와 나를 포함해서 한 두서너 명의 젊은 아가씨들이 홀을 꽉 채우고 있었다. 모두들 신나게 춤추고 있었다. 가방을 맡기는 바람에 사진을 찍지 못했지만, 이건 정말 믿지 못할 광경이다. 나는 한국에서 단 한번도 40살이 넘은 레즈비언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백 여명에 가까운 아줌마, 할머니 레즈비언들이 정말 신나게 춤추고 있었다. 싱글인 사람들은 가슴에 빨간 스티커를 붙이고, 서로에게 춤을 청하고, 말 그대로 서로들 부비 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바지에 작업복 티셔츠를 입은 부두 노동자 스타일의 부치 할머니, 긴 머리에 꽃을 꼽고 나온 히피 풍 할머니, 턱시도에 스카프를 멋지게 늘어뜨린 백발의 부치 할머니, 셔츠 깃을 잔뜩 세운 아주머니, 탱크탑을 입고 말 그대로 가슴을 흔드는 중년의 부인, 탱고를 멋들어지게 추는 히스패닉 언니들까지. 정말! 믿지 못할 만큼! 놀라운! 순간!    

 나는 웃음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 사람들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하기도 하지만 역시나 생긴 데로 살아가게 마련이며 그것은 분명! 언제나! 즐거운 일이어야 한다. 홍대에서 주말마다 클럽을 꽉 채우는 한국의 젊은 레즈비언 언니들도 아마 여전히 미국의 할머니들처럼 여전히 춤출 것이다. 어디서 춤출 수 있을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우리들은 천천히 소멸해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의 즐거운 인생은 이어나갈 것이다. 내가 아주 조금밖에 경험하지 못한 한국의 20대 레즈비언 중심의 커뮤니티는 사실 언제나 30대 이후의 삶에 대한 의심을 저버리지 못했다. 혼자 사는 여자는 대출도 못 받는 한국 사회에서 남편이나 애들 없이 중년의 나날들을 상상한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어떤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는 것과 관계없이 우리 삶의 방식이 쉽사리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결혼한 레즈비언을 둘러싼 불륜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TG같은 사이트에 넘쳐 나지만, 해즈비언이 되기를 두려워하기 이전에, 나는 우리 종족이 쉽사리 멸종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기로 했다.

 물론 사는 게 쉽지가 않다. 지금 조명을 한껏 받으며 엉덩이를 흔드는 저 아저씨 부치는 너무나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안다. 미국 사회에서 아저씨 부치로 사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 말이다. 다양한 인종들로 넘쳐나는 이 도시만큼 까탈스럽고 못돼먹은 도시도 없을 뿐 더러, 더욱이 나이든 아저씨 부치에게 많은 백인, 흑인, 히스패닉 등등의 남자들이 예의를 갖추지 않을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람들은 살아가서 중년이 되고, 할머니가 된다. 레즈비언인 채로 말이다.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말이다, 모두가 남자와 결혼해 버리고 사라져 버리고 말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데는 당연히 서로의 도움이 필요하다. SAGE같은 단체들은 말 그대로 지역 사회를 조직하고, 혼자 늙어가는 레즈비언, 게이 노인들에게 일종의 부양 서비스를 제공한다.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바로 여기서부터 온다. 혼자서 살아간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동성애자가 혼자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 적들의 목적이라면, 우리는 혼자되지 않음으로써 이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 한국의 수많은 레즈비언 아줌마, 할머니들이 춤추지 못하는 것은 이들이 혼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늙어서 혼자 쓸쓸히 죽어 갈까 봐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에서 레즈비언들이 보통의 동네 아줌마들처럼 계도 조직하고, 보험도 들고, 관광도 다니면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이 바로 나의 상정된 불행한 미래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다른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에게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찾아내고, 모이고, 서로를 돕는 것. 나는 아직도 과연 어떻게 레즈비언 친구들을 만들 수 있을지 알지 못하지만, 아주 천천히 혼자 늙어가고 혼자 죽어가지 않을 방법을 찾아나갈 예정이다. 적어도 내 결혼식에 사람들로부터 부조는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장례식은 단단히 한 몫 챙기고야 말겠다. 그것이 지금 나의 소망이다.

 나의 춤 솜씨는 할머니들만도 못할 만큼 매우 형편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말이다. 춤은 계속되어야 한다.

 

*SAGE (Services and Advocacy for Gay, Lesbian and Transgender Elders)

 

 미국에서 동생애자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단체이며 뉴욕을 거점으로 한다. 50세 이상의 동성애자 노인들에게 필요한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친목 도모, 가계 보조, 의료 서비스, 음식 지원, 법적 조언 등의 도움을 제공한다.  가정 방문을 통한 돌봄 및 상담 서비스 역시 제공하고 있으며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나 불안과 관련된 상담도 한다. 특히나 동성애자로서 의료 서비스에서 차별을 당하거나 에이즈로 인한 지원이 필요한 경우 적극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동성애자 노인들이 노년기를 편안하고 존중 받으면 살 수 있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동성애자 노인들에 대한 국가적인 인식을 바꾸는 데에 노력하고 있다.

 

주소; 305 seventh Avenue, 16th floor, New York, NY 10001.

전화; 212-741-2247

팩스; 212-366-1947

웹사이트; www.sageusa.org, infor@sageus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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