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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ture, Woman, Labor, Capital: living the deepest contradictio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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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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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Social Medicine?

무엇이 사회적 의료인가?*


매튜 R. 앤더슨, 래니 스미스, 빅터 W. 지델

 

지난 20년동안 보건과 보건의료 분야에서 기업위주의 의제가 급속히 확산되어왔다. 미국에서는 의료서비스에 대한 보편접근체계로 이동하기보다는 진료서비스에의 접근성이나 질적 측면은 점점 보험산업에 주도권을 빼앗겨왔다. 환자들은 이제 "고객"이며 진료서비스는 "생산라인"이 되었다. 요즘은 미국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의 지원을 받는 연구보다 제약산업의 지원을 받는 연구가 더 많아졌다; 제약업계의 돈은 최고의 연구자들의 봉급을 지불하며 국가적 연구의제 설정에 간여하는 것이다. 진료하는 사람들과 환자들은 모두 (종종 교육으로 위장하고) 두배의 효과를 가지는 값비싼 약 판매의 촉진을 위한 정교한 광고공세에 시달린다. 보건의료분야에 "시장합리성"을 도입하는 일은 보건의료비용 억제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미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더 많은 일인당 의료비를 지출함에도 불구하고 27위를 기록한 신생아의 기대수명 같은 여러 보건 지표에서 나쁜 점수를 받고 있다.
그러나 기업적 의제가 도전받은 적은 없다. 그리고 비관주의나 패배주의에 빠지기 전에 우리는 의료분야의 진보적 행동주의의 길고도 풍부한 역사에 대해 고찰해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역사는 (최소한) 19세기 초반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데 당시에는 사회, 질병, 의약품 사이의 관계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이 연구--와 이 연구로부터 도출된 의료활동형태--는 "사회적 의료"로 알려지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적 의료"는 다양한 의미로 쓰이게 되는데 사회와 다양한 사회적 조건을 변화시키는 일에도 이 용어가 적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 속에는 특정한 일반적인 원칙들을 함축하고 있다:

 

               1. 사회적, 경제적 조건은 건강, 질병, 의료활동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2. 사람들의 건강은 사회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사안이다.
               3. 사회는 개인적, 사회적 수단을 통해 건강을 증진시킬 의무가 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19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이러한 개념들의 기원 및 라틴아메리카, 남아프리카, 미국에서 이 개념들이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 탐구할 것이다. 짧은 지면상 사회적 의료에 대한 폭넓은 검토가 이루어지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는 사회적 의료에 대한 역사적인 경험이 근대의 보건과 보건의료 내의 가장 까다로운 문제들 중 몇가지에 빛을 밝힐 방법을 제시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사회적, 경제적 조건이 건강과 질병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비록 사회와 보건 사이의 연계를 지적한 최초의 인물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은 독일 의사 루돌프 비르효를 Rudolf Virchow 사회적 의료의 창시자로 생각한다. 비르효는 19세기의 위대한 병리학자 중 하나이며 세포수준에서의 질병의 이해에 대한 많은 기여로 매우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또한 질병의 사회적 기원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1848년 베를린의 왕립 차리트 병원(Royal Charite Hospital)에서 의사로 근무하면서 그는 프로시아의 어퍼 실레지아 지역(Prussian province of Upper Silesia)에서 발병한 티푸스(typhus)를 조사했다. 비르효는 빈곤, 교육 및 민주주의 부족 같은 사회적 요인들이 전염병의 발전에 있어 핵심요소라고 규명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사회적 혼란기에 발생하는 "인공전염병"이라는 개념을 도출하게 된다:

 

               인공전염병...은 사회의 탓이며 잘못된 문화의 산물이거나 전체 계급에

               통용되지 않는 문화의 산물이다. 이 전염병들은 정치조직과 사회조직에

               의해 생산된 결함의 지표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계급에 주로 영향을 미친다.(G. Rosen, From Medical Police to Social

               Medicine [New York: Science History Publications, 1974]에서 재인용.)

 

에이즈의 성행에 대해 생각해보면 이러한 단어들은 예언적인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불평등과 혼란은 HIV 바이러스의 확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광범위한 사회적 맥락과 HIV보균자인 아이티 사람들의 개인사 사이의 연계는 폴 파머가 Paul Farmer 신랄하게 묘사한 바 있다. 에이즈와의 투쟁은 전염성 질병과의 싸움일 뿐 아니라 여성, 아동, 성노동자, 성적 소수자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기도 한 것이다.
에이즈에 대한 투쟁은 또한 세계의 극빈자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전달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진정 최고의 시대를 살아가지만 또한 최악의 시대를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에이즈의 원인병원체를 신속하게 규명할 수 있고 그에 효과적으로 듣는 치료제를 신속하게 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근대생물의학의 기적 중 하나일 것이다. 미국에서 에이즈는 이제 대체로 치료가 가능하지만 아직 완치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의료적 도움이 필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료서비스에 접근을 거부당하는 것은 만행이며--또한 근대 의료의 특징이기도 하다. 에이즈 치료제가 긴급히 필요한 6백만의 가난한 사람들 중 4십4만명만이 실제로 치료제를 구할 수 있었다. 왜 에이즈 환자들은 그들에게 그렇게도 절박하게 필요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것인가? 그 해답은 사실 약값의 문제는 아니다.  에이즈 치료를 위한 "칵테일 요법"(the "cocktail" of AIDS)은 년간 250달러 정도만 가지면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WTO를 통해 미국 정부는 빈국이 일반의약품을 생산하거나 구매할 능력을 제한하기 위해 오랫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지적재산권"을 가진 제약회사의 권리가 공중보건을 능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화된 의료(organized medicine)는 전통적으로 사회적 요인이 질병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천천히 수용해왔다. 19세기 말 병리학과 미소생물학에서 이루어진 놀랄만한 진전은 사회적 요인이 질병의 원인으로는 유관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생물학적, 사회적인 본성이 뒤얽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러시아 철학자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는 Georgi Plekhanov 그를 특징짓는 날카로운 방식으로 "소화의 법칙"을 이용하여 이와 같은 사실을 묘사했다:

 

                일단 위장이 특정량의 음식을 공급받으면 위장소화의 일반법칙에 따라

                작용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법칙들의 도움을 받아 왜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이 날마다 당신의 위로 들어가는 반면 내 위에는 방문객이 전혀 없는지의

                문제에 답변할 수 있는가? 이 법칙들이 왜 누구는 그렇게 많이 먹고 다른

                사람은 굶어죽는지를 설명해주는가? 다른 영역, 다른 종류의 법칙을 통해

                해법을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G. Plekhanov, The Development of

                the Monist View of History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47])

 

사회적 의료에 대한 초기의 열정 대부분은 계급간 사망률 차이가 두드러짐을 보여준 유럽 보건 통계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건강과 질병은 부나 빈곤과 상관관계를 가진다. 불운하게도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실이라는 점이며 보건에서의 불평등은 활발한 연구와 행동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다.

 

 

공중보건은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다.

 

빈곤한 사람보다 부유한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사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된다. 아마 그들은 더 나은 유전자나 더 나은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이 불균형이 사회개혁이나 혁명을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호지킨 림프종(Hodgkin's Lymphoma[옮긴이 주-림프조직의 원발성 악성종양])의 발견자로 알려진 토마스 호지킨과 Thomas Hodgkin 스페인 내전동안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일했으며 중국에서 혁명가들을 돕다가 죽은 캐나다 출신 외과의사 노먼 베쑨 Norman Bethune은 의사로서 활동가의 삶을 살아간 두가지 사례이다.
비르효는 또 다른 예이다. 질병이 사회적인 원인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라면 그가 볼 때는 건강하지 못함에 대한 책임은 정치체계에 있었다. 그는 1848년 3월 베를린 폭동 당시 바리케이드 친 현장에 있었으며 훗날 베를린시의 고문(Berlin city counselor)으로, 독일급진진보당(the German Progressive Radical Party)의 건설자로, 프러시아와 독일 의회(Prussian and German parliaments)의 의원으로 활발한 정치활동을 펼친다. 1848년 혁명기에 그는 자신이 펴낸 잡지를[옮긴이 주-Medicinische Reform; 의료 개혁] 통해 "의료는 사회과학이며 정치학은 대규모의 의료일 뿐(politics nothing but medicine on a grand scale)"이라고 선언했다.
20세기에 라틴아메리카는 가장 활동적인 사회적 의료 센터를 발전시켰다. 그 멤버 중 가장 저명한 사람 두명은--살바도르 아옌데와 체 게바라 Salvador Allende and Che Guevara--보통 그들의 정치경력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1930년대에 공중보건의였던 아옌데는 칠레보건장관으로 재직했다. 그는 칠레의 질병과 고통의 사회적 기원에 대해 분석한 자료를 출간했다: La Realidad Medico-Social Chile a. 그는 이 책에서 보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건의료의 개선 뿐 아니라 공중위생, 주거, 영양, 노동조건 개선도 필요하다고 논의했다. 비르효의 주장을 따라 아옌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 누더기를 걸히고 자비없는 착취에 시달리며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건강과 지식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칠레에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인민연합(Popular Unity) 정부의 정치프로그램으로 구체화된다. 아옌데는 1971년에서 1973년 미국이 조직학 쿠데타로 살해되기 전까지 인민연합 정부의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의 의사이며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혁명에 참여했고 결국 혁명정부의 경제장관이 된다. 정치는 대규모의 의료일 뿐이라는 비르효의 견해를 따른다:

 

                혁명의 과업은--아이들을 훈련시키고 돌보는 과업, 군대를 양성할 과업,

                결실을 거두지 않으면서도 매일 그 토지에 기대어 행복한 세월을 보낸

                구(舊)부재지주의 토지분배과업--쿠바에서 이루어져 온 사회적 의료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David Deutschmann, ed., Che Guevara:

                A Reader: Writings on Guerilla Strategy, Politics and Revolution

                [New York, Ocean Press, 1997]에서 재인용)

 

살바도르 아옌데와 마찬가지로 체 게바라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투쟁하다 산화했다.
이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의료는 번성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의료는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규명하는 연구에 있어 풍부한 자료들을 생산해냈다. 이들은 이론과 실천의 밀접한 관계를 의미하는 프락시스를 praxis 발전시킬 것을 강조했다. 임상의료진은 공동체조직, 노조, 정치운동과 연계를 맺어왔고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억압의 희생양이 되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의료는 또한 의학과 전염병학에서 내려오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질병을 고립된 상태나 하나의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고 정상과 병리 사이에 유동적이고 복합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개념인 "건강-질병 변증법(health-illness dialectic)"을 강조한다. 이 변증법은 질병의 독특한 유형을 만들고 질병을 설명하고 다루는 차별화된 의료 이데올로기를 생성하는 사회구조 내에 존재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의료는 1980년대 중앙아메리카의 반전운동과 연계되어 북아메리카에 영향을 미쳤고 이는 "의료해방(liberation medicine)" 방면에서 두드러졌다.
최근 몇몇 개괄적 소논문의 출간과 뉴멕시코대학에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의료를 다루는 웹싸이트 개설을 통해 부분적으로 개선되고 있기는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의료 운동은 대체로 영어사용자들이 접근하지 못했던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사회는 개인적, 사회적 수단을 통해 건강을 증진시킬 의무가 있다.

 

새로운--보다 민주적이고 덜 위계적인--보건의료 모델에 대한 열망은 라틴아메리카에서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정치가 대규모의 의료라면 또한 의료는 소규모의 정치임이 분명하다. 진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은 중요한 정치적 지류가 될 것이다. 사회적 의식을 지닌 의사들은 상이한 사회적 가치를 반영할 수 있는 진료방식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
이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남아프리카의 의사였던 시드니 카르크와 에밀리 카르크와 Sidney and Emily Kark 부분적으로 연관된 운동인 공동체 의료의 발전이다. 1940년 남아프리카의 정치가 특별히 좋았던 시절 카르크 부부는 (지금은 크와줄루/나탈인) 나탈의 폴레라에(Pholela in Natal(now in KwaZulu/Natal))서 의료단위 모델을 구축했다. 의료센터는 카르크 부부가 우선 "사회적 의료의 실천"으로 묘사했지만 훗날 "공동체 지향의 일차의료(community oriented primary care)"로 재명명된 활동의 기초를 시험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이 기획은 1946년 더반(Durban)에서 8개의 의료센터와 주요 교육프로그램을 갖춘 가족과 공동체 보건 연구소(Institute of Family and Community Health)로 확장되었다. 남아프리카의 정치풍토가 변하면서 1959년 연구소는 활동을 그치게 된다. 카르크 부부는 결국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이스라엘 사회적 의료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정착했다.
공동체 지향의 일차의료 모델은 사회적 의료 원칙에 근거한 혁신을 통합시켰다. 계획은 "공동체 진단"에서 시작한다. 전염병학적 작업에 근거해 폴레라의 세가지 공통적인 조건을 "나쁜 영양공급; 전염성 질병; 심리-사회적 문제"라고 규명했다. 이 세가지가 결합되어 "공동체 증후군"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은 아이들에게 우유나눠주기 프로그램, 공원에 나무심기 같은 비전통적 의료개입으로 이어졌다.
진료서비스는 (보통 공동체 출신인) 일차진료의사, 공동체 간호사, 보건교사로 구성된 팀에서 책임을 졌다. 이 팀은 그들이 친근하게 알고 지내는 이웃가정을 위해 진료했으며 이들을 개인이 아니라 가족인 "환자"로 받아들였다:

 

                   팀진료의 연속성은 가족과 그들의 의사 및 간호사 간에 개별적 관계를

                   이끌어냈다. 마을사람들이나 이웃을 진료했던 과거 가족주치의의 활동과

                   같은 종류의 활동이다.  (S. L. Kark and G. W. Steuart, A Practice of

                   Social Medicine [Edinburgh: E&S Livingstone Ltd., 1962])

 

전통적인 가족주치의와는 다르게 진료팀은 개별 환자들이 처한 보다 넓은 사회적 맥학의 함의를 고려할 수 있고 개별 환자들에게서 새로운 진단이 나올 경우 전염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려할 수 있다.
1960년대에 미국 고용창출국(U.S. Office of Economic Opportunity)은 미국 최초로 두 개의 공동체 의료센터 건립기금을 마련했다: 아라는 보스톤의 컬럼비아 포인트 반도(Boston’s Columbia Point peninsula)에 지어졌고 다른 하나는 미시시피의 마운드 베이유(Mound Bayou, Mississippi)에 건립되었다. 미시시피의 경우 잭 가이거가 Jack Geiger 설립한 것으로 남아프리카에서 카르크 부부와 함께 동료로서 일했던 인물이다. 의회는 결국 오늘날 미국 내의 "제3세계" 사람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공동체 의료센터를 위한 국가적 차원의 프로그램을 지원하게 되었다. 이 글의 저자 중 두명도(매트 앤더슨과 래니 스미스 Matt Anderson and Lanny Smith) 그와 같은 의료센터에서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공동체 의료운동의 여러 이상은 1978년 WHO가 주관한 일차의료에 관한 국제 컨퍼런스(International Conference on Primary Care)에서 출간한 "알마-아타 선언(Declaration of Alma-Ata)"에서 구체화되었다. 이 선언은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복리를 온전히 누리는 상태, 단순히 질병이나 결함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WHO의 건강에 대한 총체적 정의를 재확인했다. 사람들은 보건의료서비스 활동과 조직에 참여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일차의료는 보편적으로 이용가능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현존하는 건강상의 심대한 불평등"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경고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보건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선언은 2000년까지 "모두를 위한 보건"이라는 야심찬 목표를 제시했다. 슬프게도 신자유주의적 경제 의제가 진보적이고 장기적인 목표를 압도해버렸다. 오늘날 "모두를 위한 보건의료"는 (심각한 저기금 상태에 놓인) 에이즈, 결핵,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국제 기금 같은 다양한 질병 각각에 우선권을 주는 식으로 대체되어 버렸다. 그러나 알마-아타에서 표현된 이상은 이제는 민중의 보건의료 운동으로 조직된 전지구적인 기반의 국제 공동체 보건 운동을 활성화시키면서 지속되었다.

 

 

사회적 의료는 오늘날의 의료활동에 적절한가?

 

때때로 명백한 것을 언급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미국의 보건의료에 "시장 개혁"을 도입한지 20년이 지났지만 모든 미국인이 질 높은 보건의료서비스를 감당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황제에게는 옷이 없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HIV에 대한 처방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비용은 미국정부가 사담 후세인이나 그에게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기 위해 지출하는 비용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문제의 본질은 정치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일을 해야 하는가? 의료진은 자신들의 환자의 생명을 자세히 알고 있고 환자들의 문제의 정치적, 사회적 차원에 대해 이해하기에 적합한 유일한 사람이다. 비르효는 의사는 본원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옹호자라고 간명하게 언급했다. 그리고 물론 우리는 의사들이 이러한 도전을 감당하는 현대적인 사례를 많이 알고 있다. 이러한 사명은 1999년 국경없는 의사회나 1985년 핵전방지국제의학자기구(International Physicians for the Prevention of Nuclear War ; IPPNW)가 노벨상을 수상함으로써 인식되었다.
사회적 의료의 역사에 익숙한 사람들은 미국의 보건의료의 문제가 더 많은 의사, 더 많은 의약품, 더 질 높은 통제주도권, 더 많은 컴퓨터, 더 많은 감사, 더 빠른 퇴원 등 뭐든 더하기만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한다. 의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재성찰이 필요하다. 명백하게 사회적인 의료를 바라는 진보적인 의사들이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실레지아 지방에 발생한 전염병 티푸스에 대한 비르효의 처방전은 그 어느 것보다도 더 적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어떻게 어퍼 실레지아에서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진 것과 비슷한 조건을

                 장래에 예방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논리적 해답은 그러므로

                 매우 쉽고 간단하다: 그 딸들의 자유와 번영을 포함한 교육이다.

                 (G. A. Silver, “The Heroic Model in Medicine: Health Policy by Accolade,”

                  American Journal of Public Health 77, vol. 1 [1987] 82-88에서 재인용)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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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R. Anderson, Lanny Smith, and Victor W. Sidel, "What is Social Medicine?", Monthly Review vol. 56, no. 8, january 2005.

 

원문 http://www.monthlyreview.org/0105anderso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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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sing Red and Green

적녹 연합*

폴 버켓

 

서평
제임스 오코너, [자연적 원인: 생태 맑스주의에 관한 에세이](New York: Guilford, 1998), 350 pp

 

미국의 주요 맑스주의 사회과학자 중 하나인 제임스 오코너는 미국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을 다수 생산해왔다. 그의 [현대국가의 재정위기]는 Fiscal Crisis of the State(1973)[옮긴이 주: 국역-우명동 옮김, [현대국가의 재정위기], 이론과 실천, 1990.] 정부의 재정적자 문제의 구조적 근원이 무엇인지 드러내보였고 이후의 저작에서는 자본주의적 위기의 일반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축적위기]와 Accumulation Crisis(1984) [위기의 의미]에서 The Meaning of Crisis(1987) 그는 20세기 후반의 자본주의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심리학적 위기 경향에 대한 대안적인 시각들을 검토하고 종합했다. 혁신적인 "생태-맑스주의" 계간지인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를 Capitalism, Nature, Socialism 공동으로 발간하기 시작한 1988년 이후에는 자본주의의 위기와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관점을 확장해 자연조건의 문제에 보다 완벽한 결합을 시도했다. [자연적 원인]은 이 시기에 쓰여진 오코너의 주요 글을 모은 책으로 생태-맑스주의 이론과 실천에 상당한 기여를 한 그의 작업을 평가해볼 수 있는 탁월한 기회를 제공해준다.
오코너의 생태-맑스주의는 한편의 "환경적, 사회적 문제" 증가, 다른 한편의 "자본에 대한 과거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규제 방식"의 붕괴 사이에 존재하는 "20세기 말 세계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바로 그 기본 모순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자본은 항상 인간적, 사회적, 자연적 생산조건이 상품으로 생산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품들로 취급함으로써 이 조건들을 강탈하고 손상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서구의 케인즈주의적 복지-규제 체제가, 동구의 "현실 사회주의가" 그리고 남반구의 "반자립적 민족주의적 사회경제적 발전 및 규제모델"이 약화되고 몰락하면서--그리고 이윤추구적 생산, 무역, 금융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보다 적은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체제로 대체되면서--이러한 파괴적 경향은 이제 자유롭게 되었다. 노동자 투쟁과 공동체 투쟁은 구(舊)규제체제의 붕괴로 인해 촉발되었고 일부는 붕괴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은 대부분 "포퓰리즘적"이고 "지역주의적"인 것으로 남았으며 그러므로 점점 광범위해지는 자본이나 자연적, 사회적 부의 착취심화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코너의 목적은 보다 광범위하면서도 여전히 상당한 다양성을 보여주는 "급진 녹색주의와 녹색 급진 정치학"(radical green and green radical politics)의 발전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학은 생태적, 사회적,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을 결합시켜야만 하며 그럼으로써"전지구적인 자본/신자유주의 다양한 형태의 지역주의 모두"에 대한 실행가능한 대안을 현재 진행되는 "새로운 사회운동--특히 환경운동과 생태운동"에 제공하는 것이다. 이 생태-맑스주의적 기획에는 건전한 분석방법에 근거한 훌륭한 이론이 필요하다. 따라서 [자연적 원인] 1부에서 오코너는 자신만의 "방법론 탐색"에 대해 기록한다. 그는 전통적 유물론의 역사 개념이 "자연적이고 문화적인 '환경' 요소"를 보다 완전하게 "결합시킴으로써 강화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자연적, 사회적 생산조건을 명시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오코너는 "이론적으로 (다소) 건전하고 또한 급진환경정치학에 있어 실천적으로도 유용한 연구방법"을 만들어내기를 희망한다. 더불어 유물론으로서의 "맑스주의가 진정하게 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생태적이어야 한다". 놀랍게도 오코너는 생산조건에 대한 맑스주의의 역사적 흘대가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에 대한 편파적 그리고/또는 왜곡적인 해석에 기인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체계적으로 논구하지 않는다. 그대신 [자연적 원인]은 단지 맑스주의의 창시자들이 가진 생태적으로 그릇된 사고에 대해 모범적인 비난을 가할 뿐이다. 맑스와 엥겔스가 자연조건이나 생태적 주제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는 비난이나 대안적 해석을 옹호하거나 반대할 증거에 대한 실제적인 고려는 전혀 없다.주1) 오코너가 고전적 맑스주의의 유산이나 자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언급될 내용처럼 그의 자본주의적 환경위기 분석에 특정한 문제가 생기는 이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오코너의 방법론은 어떤 경우에도 명시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이다. 그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자연의 사용가치를 인간 노동을 통해 즉각적인 상품 및 서비스의 생산 조건인 유용성으로 환원시키는 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자연의 도구적 가치화는 일련의 기계론적이고 이원론적인 태도와 함께 나란히 자본주의가 어떤 것인지 추적가능하게 해준다. 자본주의는 자연을 총체적으로 기능하고 진화하는 체계라기보다는 개별 "사물"(효용)들의 집합으로 취급해왔다. 그 결과 "인간본성[을] 정신과 육체, 정신과 정서, 사고와 감정으로 분리한 것"처럼 "외부 자연과 인간 본성"을 분리시키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는동안 "인간존재의 사회적 본성[도] 또한 구분하고 분리시켰고" 사회는 단순한 개인들의 집합으로 규정된다. 오코너에게 사회에 대한 개인주의적 사고방식, 자연에 대한 도구적 사고방식은 동전의 양면이다: 둘은 모두 자본주의에 기본적인 임노동과 시장관계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투쟁을 위해서는 인간존재를 다루는 방식, 이윤을 위한 상품생산도구로서 취급되는 그들의 자연적, 사회적 조건을 문제삼아야만 한다. 오코너의 방법은 그러므로 매우 반경제주의적인데, 이는 간학문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자연과 사회를 "이용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지배적인 개념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사려깊은 투쟁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생태-맑스주의는 맑스주의 계급분석에서 제시된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관점보다 더 총체론적이고 공진화적인 관점을 얻고자 분투하는 것이다.
[자연적 원인]의 2부에서는 오코너의 생태-맑스주의적 방법론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생산조건을 저하시키거나 파괴하는 방식"에 적용된다. 그 분석은 "주로 위기이론의 이점에서" 발전된 것으로 자본주의의 환경적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려까지 확장된 것이다. 오코너가 볼 때 이러한 보다 일반적인 위기이론은 반드시 "사물의 사용가치 및 교환가치 모두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하며 "자본주의적 축적의 외부의 물적, 사회적 장벽 및 내부의 경제적 장벽"을 인식해야 한다.
자본주의에는 착취할 노동력을 재생산해낼 수 있는 물적, 사회적 조건--이윤을 추구하는 자본투자에 적합한 조건--이 필요하다. 또한 "삶의 방식이 자본에 의해 전복된 사람들"이 일으키는 폭동 정도는 통제가능한 변동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오코너에 따르면 "'지속가능한 자본주의는 가능한가?'에 간단히 대답하면 '아니다'이고 좀더 길게 답한다 해도 '아마 아닐 것이다'이다". 이 체계가 보여주는 막대한 환경적 약탈과 생태적 저하의 "증거"는 "자본주의가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에 힘을 실어준다". 또한 환경에 대한 주류환경주의자와 자본주의적 관점 사이에 "분리나 균열"이 증가하고 있다. "개혁주의적 녹색주의자들은 자본을 재구성해 자연의 지속가능성에 부합하게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반대로 집합적 자본은 근시안적인 경제적 동기(일례로 "소비자들과 대중에게 어떻게하면 그럴듯한 녹색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하면 "에너지와 원료를 절약할 수 있을까")로 환원시키는데 더해 "안정적인 이윤추구와 자본축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자연을 재구성[하려는]" 장기적인 관점도 가지고 있다. 이 두가지는 모두 "자기-확장하는 자본과 자기-제한하는 자연 사이의 모순을" 회피하는 태도이다. 왜냐하면 "정(+)의 이윤율은 전체 생산의 증가를 의미한다...자본주의가 지속가능하려면 확장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제한적이라는 자연적 조건의 성격과 모순되며 최소한 이러한 주어진 조건들의 질적인 측면과도 모순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지속가능하려면 생산조건이 "적시, 적소에 적정량과 적정수준에서 이용가능해야만" 한다. 오코너는 시장지향적인 환경 정책(소위 녹색세와 보조금, 오염거래권 등)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실제로든 공식적이든(de facto or de jure) 상관없이 "일반적으로는 생산조건의 자본화, 특수하게는 자연의 자본화는 자본의 비용을 증가시키고 유연성을 감소시키는 경향을 지닌다". 자연과 사회적 조건의 생산성에 대해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지는 제살깍는 효과는 "'생산성'을 복원하거나 증가시키고 그럼으로써 자본이 비용을 덜 들이도록 생산조건을 재구성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이 지출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 것이다". 이러한 기획은 "전반적인 생태계획, 도시계획, 사회계획에 간여하는...국가기관이나 기업형태의 계획기관"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자연적 조건과 사회적 조건을 저하시키는 자본주의는 반자본주의 투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자연적 원인] 3부에서는 그러므로 오코너의 "생태학 및 관련 운동내의 급진적 경향(에 대한 평가)의 탐색"한 내용을 열거한다. 그가 고려한 운동 중에는 남반구의 비정부기구(NGOs) 및 "가난한 자들의 환경주의" 그리고 북반구의 환경정의와 유독성폐기물운동이 있다. 오코너는 이 운동들이 생태적, 사회적 지속가능성의 문제를 전통적인 조직노동자의 "빵과 버터"의 문제와 엮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는지 탐색한다. 그러한 연합을 가능케 하는 기초는 사회적으로 유용하지만 비상품인 것들을 생산하는 노동이 포함된 "사회적 노동의 통일"의 기저에 놓여있다. 이러한 통일은 여러 "후기-맑스주의" 좌파들이 간과한 것으로 이들은 사회운동과 생태운동 내부에 존재하며 이들을 가로지르는 "차이와 특수성"에만 초점을 맞추어 이러한 운동을 "비계급적"인 운동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후기-맑스주의자들은 또한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의 문제 대부분이 봉급생활자나 잘사는 사람들보다는 가난한 자, 특히 억압받는 소수자의 입장에서 볼 때 더 큰 문제가 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적절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오코너는 "노동운동과 신사회운동의 협력은 가능할 뿐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북반구의 선진국과 저발전 남반구의 노동-공동체의 조건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풍요의 생태주의(ecologism)'와 '생존의 생태주의'...는 여러 방식으로 북반구와 남반구를 교차한다". 북반구의 투쟁이 (지속가능성, 환경정의, 노동적 관심사의 연합을 예고하듯) 자연을 인간생산과 재생산의 기본조건으로 점점 더 인정하고 있고, (비록 당장의 생존이라는 쟁점에 더 강한 지향을 보이긴 하지만) 남반구 내에서도 산업화와 잉여노동 같은 산업예비군의 확산이 질적 측면에서 교차하는 비슷한 관심사를 떠오르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적, 사회적 조건의 자본화에 대한 대중적이고 전지구적인 적-녹 대안의 잠재성은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특히 현존하는 전지구적 차원의 자본주의의 환경적 충격과 국가자본주의의 몰락으로 발생한 정치적 공백"에 대한 대안이다.
그러나 오코너의 적녹연합은 자본의 노동착취와 자연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자본의 파괴적인 이용 사이에 그 자신이 그려넣은 인위적인 선에 의해 방해받는다. 이 문제는 오코너가 자본주의가 현재 두가지 기본모순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는 논의를 진행하면서 분명해진다. 이 두가지 모순은 "오늘날 자본축적을 위한 일관된 틀을 제공해주는 새로운 형태의 규제로서 국가와 자본"이 "구별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일차모순은 노동과착취로 인한 과생산위기의 위험과 관련된다. "자본이 [과도하게] 노동에 대한 권력을 행사할" 때 임금기반 수요는 생산된 상품전체가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들며 자본이 이 상품에 담긴 잉여가치를 실현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 과축적 경향은 자본이 증가하는 "실현위기의 위험"에 대응하면서 생겨나는 "거대신용구조, 공격적 마케팅, 끊임없는 상품혁신, 경쟁심화"로 자신을 드러낸다. 자본주의의 이차모순은 자본과 생산조건 사이의 모순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오코너는 이차모순이 생산비용을 증가시켜 자본의 이윤율을 감소시킨다고 주장한다. 개별기업이 "자신의 물적, 사회적 생산조건을 점차 저하시키거나 유지하지 않는 전략으로 이윤율을 보호하거나 복원하려 할" 때 "다른 자본(궁극적으로는 자본 일반)의 비용을 증가시키는 의도하지 않는 결과를 낳게되고 그럼으로써 이윤의 생산을 저하시킨다". 이윤은 "사회운동이 자본에게" 자연적, 사회적 조건을 "보다 잘 유지하고 복원하라고 요구할" 때 보다 더 감소한다. 여기에는 "보건의료, 토양황폐화 저지, 자본비용을 증가시키거나 자본 유연성을 감소시키는 방식으로 도시 주민 보호" 등의 요구가 포함된다.
오코너의 "두가지 모순" 체계는 케인즈주의 수요측면정책이나 신자유주의 공급 또는 비용측면 정책 모두 자본축적의 모순을 극복할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정도까지는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문제는 오코너가 일차모순과 이차모순을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데 있다. 심지어 그는 "경제적 용어로 해석되든, 사회정치적 용어로 해석되든 상관없이 일차모순은...생산조건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일차모순이 "노동에 대한 자본의 사회적, 정치적 권력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생산조건과 분리된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가 맑스에게서 배운 바로는 노동에 대한 자본의 권력과 착취율의 증가는 (특히 노동력 자체의 가치를 감소시켜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키는 경우) 모두 자연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자본의 전유에 근거한 것인 동시에 이들 조건을 노동력 착취 수단으로, 그리고 시장에서 거래가능한 사용가치로 잉여노동을 객관화하는 수단으로 전화시키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오코너 자신이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이 상황은 직접생산자가 "자신의 토지 및 여타 생산수단으로부터...자유로운 상태의 본래적 축적과정(process of original accumulation)"을 가정한다. 노동력과 필요한 생산조건 사이의 사회적 분리는 그러므로 노동에 대한 자본의 권력, 생산에서의 자연과 노동을 착취적이고 파괴적으로 조합하는 자본, 과도축적 문제의 핵심이다. 오코너의 일차모순과 이차모순을 가르는 날카로운 선은 자본 축적에 대한 "내부적" 장벽과 "외부적" 장벽을 인위적으로 구분함으로써 노동력과 필요한 생산조선 사이의 사회적 분리를 부지불식간에 재생산하며 자신이 제기한 자본의 위기와 사회운동에 대한 적녹연합의 전망을 약화시킨다.
"이차모순"의 경우 자연적, 사회적 조건을 자본이 이용함에 있어 발생하는 "외부 비용"의 증가가 자본 일반의 이윤율 문제로 해석될 필요가 있는 지 분명하지 않다. 자본축적에 필요한 모든 것은 잉여가치를 추출할 수 있는 착취가능한 노동력과 물적 조건이며 시장에서 활용가능한 사용가치로의 객관화이다. 생산조건, 노동력, 생산된 사용가치의 질적 본질은 역사적으로 조건적인 것이다. 오염통제와 쓰레기 처리, (수감자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감옥, 경찰과 보안서비스는 개별 기업에서 볼 때는 사적 비용 그리고/또는 세금으로 보인다고 해도 모두 큰 이윤을 남기는 부문이다. 사실은 자본축적의 "외부 비용"이 개별 기업 뿐 아니라 자본 일반--이러한 기회를 조율하고 분배하는 "기업형태의 계획기관"이 있건 없건--의 잉여가치생산과 실현을 위해 이익이 되는 기회를 창조한다. 한편으로 자본은 과축적 문제에 생태적으로, 사회적으로 파괴적인 사용가치(플라스틱포장, 패스트푸드, 자동차, 살충제)를 양산하는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고 판매함으로써 대응한다. 다른한편 자본축적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의 "외부 비용"으로 인해 필요하거나 유용하게 된 상품이나 서비스의 형식을 취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동차/석유/부동산 복합체 전체가 하나의 예로 이들은 부정적 외부화를 발생시키는데 기여하는만큼 자본주의의 "부정적 외부화"를 이용한다; 동일한 내용이 의료산업이나 법률산업에도 적용될 수 있다. 1990년도에 연간 2천억에서 3천억달러의 매출을 올린(전지구의 대기산업 전체 매출액보다 많은 액수) 오염통제와 쓰레기 처리산업은 외부화-기반 활동의 신전에 가장 최근 등록한 일원일 뿐이다.주2)
그러한 파괴적 그리고/또는 외부화-기반 활동의 이윤은 자본주의의 "일차모순"을 해결하지 못한다. 물론, 사기업이 자연스럽게 가장 이윤이 남는 방식의 오염통제와 쓰레기처리 활동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가는 한 잠재적 잉여가치의 과축적 문제는 그에 상응하여 악화될 것이며--이러한 활동을 소수의 거대하고 상대적으로 높은 이윤을 남기는 기업이 점차로 독점하게 되면 더욱 악화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환경산업은 다른 독점자본부문과 다르지 않다. 환경산업이 그 자체로 과축적 문제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실재적이고 근본적인 자본주의의 모순은 노동자와 공동체가 직면한(vis-a-vis) 생산조건의 소외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코너의 두가지 모순은 모두 이러한 보다 기본적인 모순의 징후들(symptoms)에 불과하다.
오코너가 주장하는 두가지 모순의 저변에 존재하는 통일성을 일단 인식하고 나면 우리는 녹색 자본주의자들의 개혁주의적 전망의 한계를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된다. 환경산업은 과축적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을 뿐더러 자본주의의 환경위기를 해결할 능력도 없다. 오염통제, 쓰레기처리, 재활용은 이윤을 볼 수 있는 활동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본주의 성장의 경쟁적인 특징과 질적 수준에 상관 없이 자연적 조건이 가지는 제한적 성격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인정을 꺼린다.
이러한 사실처럼 환경산업 자체의 경쟁적 "성공"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생태적 지속불가능성의 성장에 의존하면서 그 성장에 기여한다. "환경유지"는 자체로 "성장산업"이라는 사실은 자본축적을 위해 필요한 조건과 지속가능한 인간발전과 사회발전의 과정을 위해 필요한 조건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드러내준다. 거칠게 말하면 자본은 원칙적으로 어떤 자연 조건에서도 축적을 지속할 수 있다. 아무리 저하되더라도 가능하며 인간이라는 종이 절멸하지 않는 한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자본축적의 환경적 위기와 자연적, 사회적 종인 인간의 발전을 위한 조건의 일반적인 저하라는 의미의 환경위기를 구분해 내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임을 깨닫게 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해도 두 번째 제시된 위기형태가 곧 앞의 내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발전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자본주의는 생태적으로, 사회적으로 불합리한 체계라는 말이다.
오코너는 생산조건에 미치는 자본의 파괴적 효과가 "이윤과 축적을 위협할 뿐 아니라 생활수단과 생활 자체로서의 사회적, 자연적 환경의 생존능력도 위협한다"고 기록한다. 또한 생태운동과 사회운동을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 생산조건이 사실상 존재해야 하는 가를 결정하는" 투쟁으로서 묘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조건을 자본의 노동착취에 "외부적"인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오코너가 주장하는 "두가지 모순"의 이분법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필요한 조건과 인간의 발전에 필요한 조건의 구분을 완화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이 경제주의를 피하고자 하는 오코너의 건전한 바램의 이율배반인(ironic)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완화의 효과가 노동 투쟁과 생태적 투쟁의 인위적 구분--생태적 투쟁은 여전히 기본적으로는 "비-계급"투쟁으로 규정된다--이라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내부적인 것과 외부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은 그러므로 차이와 특수성을 강조하는 "후기-맑스주의" 정치학에 대한 오코너의 비판을 약화시킨다.
반자본주의 생태적 전망이 자연조건이 자본축적에 "외부적"이라는 틀을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교환가치로서의 축적을 위해서 자본은 사회적 노동과 자연을 시장에서 활용가능한 사용가치에 결합시킨 형태를 채택해야만 한다. 그 결과 현재의 "자연" 조건은 대체로 자연을 자본주의적으로 전유한 결과적 산물이다. 그러므로 어떤 적-녹 운동이라도 반드시 노동과 자연에 대한 자본의 착취에서 발생한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에 그리고 착취에서 초래된 투쟁에 기반해야만 한다. 자연조건의 파괴 및 저해함과 동시에 사회적 노동을 자본주의적으로 발전시키는 일은 보다 보편적이며 덜 제한적인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끌어낼 잠재력을 창출해낸다. 이렇게 볼 때 현대생태사상가들은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주3)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오직 노동대중을 생산을 위한 필요조건으로부터 사회적으로 분리시키는 자본주의를 민주적 노동자공동체가 대체하여 이러한 조건들의 사회적 활용을 통제하는 체계로 전환화기 전까지만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엥겔스가 언급한 것처럼 "자연의 전통적 과정에 우리가 개입해 "규제"하는 것은...단순한 지식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현재까지 존재해왔던 생산양식에 있어서 완전한 혁명을 필요로하며 동시에 우리의 현존 사회질서 전체의 혁명을 필요로 한다".주4)
엥겔스의 관찰은 자리잡고 앉아 "혁명을 기다리자"는 처방은 아니다. 생산에 대한 대중 통제를 보다 높이려고 하는 모든 노동자들과 공동체의 투쟁은 단순한 자본축적의 도구로서 노동과 자연을 취급하는 데 명시적으로 저항한다. 이러한 투쟁이 생산조건의 탈소외를 향해 나갈 수 있으려면 오코너의 두가지 모순을 극복해야 하며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인간, 사회 자연의 공진화를 창조해야 한다. [자연적 원인]은 위에서 말한 여러 흠결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운동에 기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통찰력을 제공하는 풍요로운 자원이다.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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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ul Burkett, "Fusing Red and Green", Monthly Review, vol. 50, no. 9, February 1999.

  http://www.monthlyreview.org/299burk.htm
  BOOK REVIEW
  James O'Connor, Natural Causes: Essays in Ecological Marxism(New York: Guilford, 1998), 350 pp., $19.95, paper.



원주

 

1) John Bellamy Fodster, "Marx and the Environment," Monthly Review, vol. 47, no. 3, July/August 1995, pp. 108-123; Paul Burkett, "On Some Common Misconceptions About Nature and Marx's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Capitalism Nature Socialism, vol. 7, no. 3, Fall 1996, pp. 332-359.

 

2) 더 세부적인 내용을 찾아보려면 Joshua Karliner, "The Environment Industry: Profiting from Pollution," The Ecologist, vol. 24, no. 2, March/April 1994, pp. 59-63, and Claudia H. Deutsch, "Scrubbing the Air, Buffing the Cleaners: Belated E.P.A. War on Pollutants May Infuse Value into Companies," New York Times, October 17, 1997, pp. C1; also Martin Gellen, "The Making of a Pollution-Industrial Complex," in Eco-Catastrophe, Editors of Ramparts, ed. (New York: Harper & Row, 1970), pp. 73-83.

 

3) Howard L. Parsons, Marx and Engels on Ecology (Westport, CT: Greenwood Press, 1977), pp. 88-89; Victor Wallis, "Socialism, Ecology, and Democracy," in Socialism: Crisis and Renewal, C. Polychroniu, editor (Westport, CT: Praeger, 1993), pp. 147-148.

 

4) Frederick Engels, Dialectics of Nature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64), pp. 183-184. [국역: 황태호 옮김, [자연의 변증법], 전진,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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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ure, Woman, Labor, Capital: living the deepest contradiction

자연, 여성, 노동, 자본: 깊은 모순을 안고 살기*

 

아리엘 살레**(Ariel Salleh)

 

1. 여성의 저항: 체화된 유물론(An Embodied Materialism)

 

1960년대의 사회운동은 미국의 거대핵발전기업에 대한 여성의 법적인 도전부터 인도 북부지방에서 벌목을 막기 위해 나무를 껴안고 저항한 운동에 이르는 다양한 행동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행동은 생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여성의 일상적인 노동으로부터 도출된 이해에 물질적으로 근거한 새로운 정치를 알렸다. 다양한 행동의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행동들은 "여성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투쟁 및 생활환경을 보호하고자 하는 투쟁과 일정하게 연관된다는 공동의 인식을 반영했다. 합성어인 "에코-페미니즘"은--1970년대에 여러 대륙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이 양자의 정치적 관심사를 포괄했다. 1980년대 후반이 될 때까지 에코페미니즘은 초국적으로 구조화된 자본주의적 억압에 명시적으로 도전해왔다. 즉, 소위 선진사회가 탐욕스럽게 "발전되지 않은 타국"의 자원과 노동력에 의존하는 전지구적 경제에 도전한 것이다.
이장에서는 여성의 가사노동경험 속에서 생태정치적 비판을 위한 "근거들"과 실질적인 지속가능한 실천 "모델들"을 찾아봄으로써 에코페미니즘의 자본주의 진단을 제시한다. 2장에서는 자본주의 하에서 "자연"과 "여성"이 어떻게 저평가되며, 경제적 지구화가 양자에 대한 착취를 어떻게 심화시키는지 논의한다. 자연-여성-노동 연계에 관해서는 3장과 4장에서 보다 자세히 검토할 것인데 자본주의의 기본모순(a primary contradiction of capitalism)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할 것이다. 5장에서는 이러한 모순을 안고 살아가는 가운데 저항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역사적 동인에 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나의 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하에서 여성이 접하는 특유의 구조적 쟁점에 초점을 맞춘다. 경제 "성장"은 북반구의 일부 남성과 여성에게 물질적 이득을 가져다 준 것으로 보이지만 남반구에 거주하는 거의 모든 여성에게는 반대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성노동의 통합(annexation)은 컴퓨터, 노동력절감도구, 신재생산기술로 탄생한 산업화와 소비주의에 의해 강화된다. 그러는동안 "개발도상"국에서는 상품시장을 위해 농지를 몰수하는 기술관료적 "녹색혁명"이 일어났고, 이제는 기업에 의한 유전자 특허가 생존을 위한 여성노동의 수단을 빼앗고 있다.
자본축적과 초국적활동의 헤게모니 확장이 지속될수록 자연과 여성의 종속은 심화된다. 자본주의가 그러한 억압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말도 아니고 자본주의가 남성을 착취하지 않는다는 말도 아니다. 그보다는 현존이론에서 전반적으로 침묵하고 있는 무언가를 여성의 환경적 반응에 특유한 것이 무엇인가를 지적함으로써 가시화하려는 것이다. 여성과 "자연"의 관계, 여성과 "자본" 및 "노동"의 관계는 최소한 네가지 정도의 이유로 남성과는 다르게 구성되기 때문이다.
주1)
첫 번째 차이는 출산과 젖먹이는 일 같은 힘들면서도 예민한 노동의 상호작용을 통해 여성의 신체기관이 매개하는 경험과 관련된다. 두 번째 차이는 역사적으로 여성의 일로 배정된, 남성과 자연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는 돌봄과 유지라는 잔일 때문에 생긴다. 세 번째 차이는 농부, 직조공, 약초재배자, 옹기장이 등의 역할을 맡아 상품을 만들어내는 여성의 수작업과 관련된다. 네 번째 차이는 시, 그림, 철학, 모든 담화 등에서 나타나는 "여성"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상징적 표현의 창조와 관련된다. 이런식으로 노동을 배치함으로써 여성은 구조적으로, 종잡을 수 없게 생활지원적 활동에 관련되며 이러한 물적 토대를 바탕으로 성에 따른 고유한 지식(gender-specific knowleges)을 발전시킨다. 그 결과 여러 문화권의 여성들은 전지구적 위기에 대한 남성적 접근방식--녹색으로 포장된 기업, 생태윤리, 사회주의에는 없는 통찰을 문화에 관계없이 표현하기 시작했다.
에코페미니즘을 비판하는 몇몇 비판가들이 암시하는 것처럼 남성과 여성, 문화와 자연 같은 단순한 이분법을 전제하지 않는 견해는 실제로 주어진 이분법의 변증법적 해체에 의존한다. 변증법적 해체는 여성의 경제적 주변화 및 고통스러운 모순의 인식 및 자연-여성-노동 연계 속에 주어진 그들의 자리가 그들에게 부여하는 비주체성에 대한 인식에 기초한 정치적 참여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변의 목소리를 전략적으로 특권화하는 것은 초역사적 또는 "본질주의적" 주장에 의해 정당화되기보다는 경험적으로 정당화된다. 체화된 유물론으로 정식화된 에코페미니즘 정치학은 억압의 최소공분모를 획득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계급과 자본에 저항하는 사회운동 간의 대화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게 된다.주2)

2. 가치

 

              나의 어머니는 흑인여성은 백인남성의 노새이고 백인여성은 백인남성의 개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주3)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를 가부장적 관계의 근대적 형태로 받아들인다. 즉, 대다수의 여성이 자본이건 노동이건 남성들과는 매우 다른 사회적 현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소수의 여성만이 자신의 자산을 소유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여성은 "노동만" 소유할 뿐이다. 심지어 UN의 통계조차도 여성의 주변화라는 전지구적인 현상을 숨기지 못한다. 여성소유 자산은 전체 자산의 1% 미만이고 전세계 노동의 3분의 2에 대해 지불되는 임금은 전체의 5% 뿐이다.주4) 사실 약육강식의 체계에서 여성의 위치는 개념적으로는 "자연자원"과 "생산조건" 사이의 어디쯤인 것이다.주5) 어짜피 여성은 부르주아의 자유주의 정치제도에서 역사적으로 외부화되어 온 것처럼 경제에서도 "외부인"으로 취급되었다.주6)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국면에 대해 살펴보면 이러한 주장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셀마 제임스가 Selma James [지구 전체의 부엌] The Global Kitchen에서 지적한 고전적 언급을 살펴보자.

 

               1979년 미국성인여성의 51%, 중국과 프랑스의 48%만이 "[임]주1)노동자"였다.

               1975년 노동인구로 계산되는 라틴아메리카의 여성은 전체 여성 중 14%에

               불과했고 영국에서는 40%만이 임노동인구이다.주7)

 

뉴질랜드 사람인 매릴린 워링은 Marilyn Waring [무를 위한 계산] Counting for Nothing의 지침을 갱신했다.주8) 북반구에서 성장하는 서비스 부문과 남반구의 자유무역지대의 급증은 통계에 얼마간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여성착취의 기본적인 성격은 전지구화 및 전지구화에 동반해 일어난 작업공간 재구조화를 통해 여전히 변화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여성은 불안정하고 퇴직수당도 없으며 더 나은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시간제일자리, 계약직, 계절적 일자리를 얻었다. 모성은 사라지고 작업장기반 아동보호프로그램은 거의 없다. 이렇게 강화된 성별에 따른 노동분할은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데 너무나도 근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성혁명"(sexual revolution)이 일어난지 20년이 지나 적극적 고용이 정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국가에서 여성은 남성이 받는 임금의 3분의 2 수준의 임금을 받는 것이 전형적이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대부분의 여성노동이 국민총생산(GNP) 계산에서 거의 배제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선진"세계의 가정주부는 대부분 오스트레일리아의 주당 노동시간인 40시간의 거의 두배인 일주일에 70시간의 부불노동을 한다. 부양기술을 이용해 그녀는 요리, 바느질, 청소, 주거유지, 정원관리 등등의 활동을 통해 "사용가치"를 창출한다. 남반구의 비도시거주여성은 그들의 공동체를 위한 식량 대부분을 재배한다. 그 외에도 여성에게는 끝없는 무형의 노동이 의무로 부과된다: 아이돌보기, 노인모시기, 병약자 간호, 생활 속에서 남성에게 자아회복과 성적만족 제공, 그리고 그 결과인 아이낳기의 고역. 영국의 메리 멜러는 Mary Mellor 이 모든 것을 "생물학적 시간"에 놓인 것으로 묘사한다.주9) 더불어 많은 중간계급 여성들은 연속적인 많은 자원활동을 떠맡는다: 예를들면 학부모회(PTA)주2)나 국제 앰네스티 또는 주거개선캠페인 등이다. 이민여성이나 난민여성들은 농장이나 공장의 생산라인에서 하루종일 일한 뒤에도 가족이나 공동체의 재건이라는 새로운 부담을 흡수하기 위해 추가적인 에너지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을 지치게 하는 부불서비스는--"애정노동"-- 원칙적으로는 지불받을 수 있다: 매춘, 패스트푸드점 계산원, 세탁전문점이 예가 될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편의만을 위하는 방식으로 경제체계를 조직할 본질적인 필요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셀마 제임스의 말처럼

 

               집을 청소하는 여성은 "일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가정을 폭격하는

               남성군인은 일하는 것이다. 나아가...같은 여성의 노동이라도 남편에게

               고용된 경우에는 GNP에 산정되지도 않는다.주10)

 

자본주의적 경제편제에서 가부장주의는 노인을 모시는 여성의 가내노동이 연금이나 수당지원의 형태로 보상받는 경우조차도 이러한 지불이 국가의 "선물", 자선 또는 복지로 인식하지, "노동"과 자본 간의 계약처럼 자유시민 간에 거래되는 "경제적 교환"으로는 절대 인식하지 않는다. 경제기준지표를 이용하면 누구나 자본주의 경제에 기여하는 여성의 중요성을 쉽게 보여줄 수 있다. 제임스, 워링 및 핀란드의 에코페미스트인 히카 피에틸레 등 Hikka Pietila 여러 사람들은 가내노동을 표준직업분류에 넣고 지불임금으로 처리해서 모두 더한다면 가사노동이 GNP의 3분의 1내지 절반에 이른다는 것을 입증했다. 오스트레일리아 통계청은 가사노동이 GNP의 52∼62%에 달한다고 평가했다.주11) 그러나 만일 가내노동이 이런식으로 무시당하는 처지라면 "여성노동"을 "공식경제"에 자리잡게 만든다면--동반되는 대량의 소득재분배나 이로 발생하는 경제적 기회구조--여성 자신이 사회로부터 보다 높은 가치로 인정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성의 억압은 단순히 경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들은 의문을 갖는다. 어떤 경우라도 그러한 개혁을 주장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계와 그 축소판인 가부장적 가정이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는 제도임을 가정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여성의 노동은 남성의 모든 일처럼 축적가능하며 여성이 생산하는 "잉여"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작동에 매우 핵심적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최소한 여성들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논쟁이 적은 편이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자본주의적, 가부장적 체계의 상호작용을 고려하는 장기간의 [의견]교환이 사회주의적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진행되었지만주12) 여성의 종속을 둘러싼 정확한 학술적 정식화에 대한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민족성, 인종, 북-남의 축과 여성착취가 겹치는 현상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문제"를 거론함으로써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이제 전체 논쟁을 재편하고 있다.
자연-여성-노동 연계를 기본모순으로 도입함으로써 에코페미니즘은 착취적이고 성별에 근거한 노동분할을 확인함과 동시에 모든 억압에 대한 분석을 생태문제로까지 확대하게 된다.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기존 체계를 인정하면서 남성과의 평등만을 요구하지만 에코페미니스트는 성정의(gender justice)와 동일하게 지구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 사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이 양자가 근본적으로 상호연계된 것으로 이해한다. 일례로 노르웨이 출신의 베리트 아스는 Berit As 남성중심적(male-oriented) 경제에서의 경제성장은 여성의 삶에 새로운 짐을 부과할 뿐이라고 논한다.주13) 벌이를 하는 여성을 지탱해줄 돈은 무기, 임원을 위한 여섯자리 숫자의 임금, 투기의 종이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자본주의적 자부장제 하에서는 정부, 경영, 조합, 학교, 국제기구의 결정권을 남성들이 쥐고는 자신들에게 편리한 우선권을 형성한다. 기업의 위계질서에서 소수의 여성임원이 존재하지만 남성의 우선권이 도전받지 않는 한 그 효과는 미미한 것이다. 사람들은 여성이 일국정부를 위해 경제적 조언을 하거나 OECD가 촉진하는 GATT로 착취가 심화되므로 부주의한 일이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위험에 처한 것은 여성만이 아니다; 자연환경 역시 남성의 우선권으로 인해 외부화되고 파괴되고 있다. 구조적으로 얽혀있는 여성착취와 자연저하는 모든 "발전" 국면에서 나타난다. 에티오피아는 여성의 손에서 토지를 빼앗아 "토지에서 이익을 남기려는" 남성의 손에 넘겨준 이래 사막화와 기아로 고통받았다. 미국에서는 전자회사에 다니는 여성들의 피부, 폐, 신경체계가 독성오염물질에 노출되었고 치명적인 손상으로 고통받았다. 스리랑카는 트랙터를 수입함으로써 토양과 수질이 저하되었고 여성들은 전과 같은 임금으로 두배나 빠른 속도로 면화를 주워야만 했다.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의 기술적 문제로 인해 전 유럽의 어머니들은 방사능 노출로 인한 공동체의 건강회복을 비용으로 지불했다. 남성이 계획하고 남성중심적인 생명거래(skin-trade)인 섹스관광은 생태적 재난에 해당하는 남성주의를 상징하는 무기, 수력발전을 위한 댐, 석유 등에 대한 돌진으로 축적된 채무에 대한 남반구의 "외국환" 균형을 유지시켜준다. 살아있는 것들은 스스로 생산하지 않은 것에는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를 위한 희생물이다.주14)
 북반구와 남반구의 여성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공유하며, 소위 경제학자들의 "평등한 입장원칙(level playing field)"이 북반구와 남반구를 가로질러 확장될수록 그 공통점은 증가한다. 성차별 규칙은 이문화(異文化) 간에도 적용되는데 여성은 이를 "최대한의 책임과 최소한의 권리"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핵심 산업세력--특히 미국, 독일, 일본--으로부터의 기술이전은 지구상에 신식민지주의 시대를 여는 것이며 또한 "발전"은 여성노동의 포섭을 심화시킨다. 반다나 시바는 Vandana Shiva 이러한 추세를 "근대화" 프로젝트와 구조적 적응 프로그램을 통해 여성과 자연에 "경제적" 성장의 비용을 떠넘기려는 북반구 조언자들과 지역의 엘리트 남성 사이에 이루어진 명백한 계약의 결과로 묘사한다.주15) 마을의 소녀들은 실리콘 노예가 되었고 환금작물재배와 더불어 전통적 토지이용권이 소멸됨으로써 어머니들은 자신들의 생산수단에 대한 자율권과 경제적 통제권을 빼앗겼다.
인도에서는 문화적으로 지속가능한 여성-자연의 신진대사가 자연의 순환에 부적절한 일련의 환원주의적 "논리"를 적용한 수입된 과학기술로 인해 손상되었다. 시바는 다음과 같이 쓴다.

 

              숲과 강, 들과 숲, 동물과 작물은 분리되었다. 각각은 분리된 채 발전하였고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는 섬세한 균형은...파괴되었다. 극적인 파괴와 파멸이

              가시화된 것을 두고 "진보"라고 불렀다.주16)

 

수천년에 걸쳐 발전시켜온 원주민 여성의 전문성--종자, 나무뿌리의 물보유특성, 가축떼에서 숲으로의 비옥함 이전, 집에서 제조한 약, 피임법 등에 관한 지식--은 사라졌다. 자연은 파괴되고 인간의 필요는 충족되지 못했다. 사회와 문화는 분리되어 농촌남성은 임금의 약속을 믿고 도시의 불빛을 향해 가족을 떠나갔다. 그러는동안 매판계급남성과 그들의 세계은행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기술을 보유한 공학기술자, 회계사, 화학자 등의 필요"인력"의 연간궤적을 공표하는 일을 맡았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자연과 여성의 동일시가 남반구 여성과 마찬가지로 북반구의 여성노동을 정의하는 가에 대해 오랜 논쟁을 해왔다. 자본주의 가부장제 하에서 주부가 수행하는 과업의 복잡성을 생각해보자: 성적만족의 제공, 아이낳기 및 젖먹이 돌보기, 어린아이를 돌보고 신체적으로 보호하며 사회화시키기, 식량을 재배하고 요리하기, 주거유지, 청소, 세탁 및 옷수선, 최근 재활용이 추가된 쓰레기 치우기 등이 있다. 이러한 활동을 남성을 대리해 "자연을 매개하는" 노동이라 일컫는데 "여성의 평등"이 법적으로 인식되는 국가에서도 이 기능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관습은 정부, 자본, 노동 간의 잠재적인 "조화"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으로 개별 남성에게 자신의 "여성(the second sex)"을 보장해 주려는 것이다.

 

3. 모순

 

남성과 자연의 중간에 자리한 전통적인 여성의 위치는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이며 어떤 모순보다도 깊고 본질적인 모순일 수 있다. 인류학 용어로--남성중심의 이해관계로 모양새를 갖춘--여성의 신체는 우선 "공식적인 노동"의 물질적 기원인 출산의 노동을 하는 기관인 자궁을 가진 "자연자원"인 것처럼 취급된다. 어머니 자연이라는 유럽인들의 유서깊은 상상과 프라크리티(Pakriti)주3)라는 고대 인도의 개념은 확실히 은유 이상의 무엇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과학의 헤게모니 하에서 이러한 여성의 능력에 대한 예찬은 기술의 도움에 힘입은 남성의 생산성 예찬에 견주어 감소해버린다.
유럽신화 속에 나타난 부, 자연, 노동의 창조설화는 중세의 종교적 사고가 세속적인 자연관으로 바뀌면서 17세기에 이르면 상대적으로 근대적인 모습을 띤다. 토지는 부의 어머니로 노동은 부의 아버지로 인식된다.주17) 세계 전체는 신의 섭리에 해당하는 문제로 남성 일반에게 이용하도록 주어진 거대한 자원의 보고이다. 그러나 부란 남성노동의 산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 존 로크의 John Locke 말대로 모든 남성은 "자신의 신체소유"하기에 "그의 육체노동과 손노동이 그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신중한 의미로 자연이 "우리 모두의 공동의 어머니"라면 역으로 개인은 노동을 통해 자연의 열매를 자신의 것으로 전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열매는 그의 사적 권리가 된다".주18) 노동이 결부되는 것은 남성의 세계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성의 가사노동과 재생산노동을 사적 영역에서 제공된 개인적인 보호의 대가로 남성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의 신체는 토지를 임대하듯이 임대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자본에 의해 무료로 "자원화되어" 착취가능한 노동을 모든 새로운 세대에게 제공한다. 따라서 여성도 진정한 인간이기 때문에, 대상화된 재생산 모형으로서의 "여성"과 스스로의 권리를 가진 역사적 주체로서의 여성들 사이에는 반작용이 형성된다. 현재 이 갈등은 낙태 같은 재생산권리의 형태로 그리고 "가치-부가적" 세계에서 돈을 받는 대리모나 아이기르는 일에 대한 "산업적 계약" 가능성의 형태로 표현된다. "자연자원"으로서의 여성과 "불완전한 노동(not quite labor)"으로서의 여성 사이에 그려지는 선은 무한히 유연하다.
게다가 "자연자원"으로서 돌봄의 노동에 손과 두뇌를 이용하는 여성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하에서 인간의 생산성을 창조하는 데 필수적인 집(oikos)이나 주거라는 의미의 "생존조건"으로 포섭된다. 여성의 신체는 당연하게도 남성이 노동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상의 기반을 제공하도록 일하는 남성에 의해 이용된다. 남성이 그들의 임금수준보다는 아내의 상실로 인해 더 불편을 겪는다는 사실은 "생산조건"으로서의 아내의 성적, 심리적, 경제적 가치를 보여준다. 동시에 여성이 "불완전한 노동"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체로의 노동(labor as such)"과 모순을 일으키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임노동자로서 일할 때조차도 그렇다. 여성과 "공식노동" 사이에 존재하는 이 갈등은 공식노동이 남성적 노동조합운동의 지원을 받는 가운데 가정 내에서, 작업장에서 폭발한다.
여성은 두가지 형태의 구조적 폭력에 의해 이중으로 대상화된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이용당하고 버려질 준비가 된 존재이며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하에서의 자연처럼 여성들도 발언할 주체성을 가지지 못한다. 즉, 나오미 셰만이 Naomi Scheman 본대로 남성들은 자신들을 자기규정적 존재로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여성이 친숙한 사회세계를 결합시켜 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주19) 소위 노동분업에서 진정한 "대상"인 여성은 전통적으로 남성들 사이에서 교환되어왔는데 아버지에게서 남편으로, 포주에서 구매자에게로, 이 기업가에게서 저 기업가에게로 건네졌다. 이러한 여성 자원의 교환은 가장 이른 형태의 "상품"거래를 구성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이 낳은 아이들은 남성의 이름을 물려받고, 남성에 의해 전유된다. 나아가 여성이 가부장적 가족에서 자신들의 출산능력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기 시작했을 때에도 남성은 새로운 재생산 기술로 그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여성으로부터 다시 빼앗았다. 이 최전선에서의 가장 최근의 움직임은 기업의 DNA 특허권 문제이다. 생명 자체의 기본 구조물이 "재산권"으로 공식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유전되는 만성질환을 경감시키려는 목적으로 인간 재생산에 "유전적" 개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 및 식물 간에 유전적 조합을 포함하는 것이다.
여성 또한 가내의 보이지 않는 노동에서의 사용을 위해, 소작하는 농장에서의 교환을 위해, 또는 삯일이나 공장의 상품으로 "물건을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상품 역시 보통은 남성이--남편, 중간상인, 초국적 기업--가져가 버린다. 독일 에코페미니스트인 마리아 미즈는 Maria Mies 자신의 책 [가부장제와 축적]에서 Patriarchy and Accumulation 이와 같은 탈소유의 과정을 기록하고 자본주의 하에서의 여성-남성의 상호작용의 모든 국면에 만연한 것임을 밝힌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남성이 자본 및 노동자로서의 자신을 위해 일제히 대리인의 역할을 맡아 여성을 협박하여 고분고분하게 한다는 것이다.주20)
계급이나 인종차이에 따른 남성에 의한 남성억압 역시 기록된 바 있지만, 자연을 채취하고 여성의 복잡한 생산적 능력을 추출하는 일은 노동계급으로부터 가치를 도둑질해가던 시절 이전부터 이루어져왔다. 나아가 자연착취와 성착취는 임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남용하부에서 존속해왔으며 여성해방이라는 근대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과정은 전지구적 확장으로 인해 심화되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의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이론만을 너무 강조하는 경향을 보여주면서 상이한 형태의 사회적 착취를 뒷받침했다.주21)
에코페미니즘의 분석은 가부장적 가정과 공공노동을 통한 여성의 인클로저 및 사유화가--여성의 시간, 에너지, 힘의 포섭--자본에 의한 계급적 노동착취에 필적하며 동시에 노동착취를 가능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자연의 매개자"라는 여성의 위상은 자본가와 노동하는 남성--강자와 약자--사이에 발생하는 거래를 위한 선행조건을 구성한다. 경제에 관한 남성중심적 담론에서 자연의 물질적 기여가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물질적 기여 역시 대부분 언급되지 않는 채로 남겨진다. 여성의 노동은 "무상으로 주어진 것"이거나 집안단장의 장막 뒤로 숨겨진다. 출산노동이건 유지노동이건 여성이 "무상"으로 하는 일은 생산에 반대되는 "재생산"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생산은 자체로 일차적인 "역사적 활동"을 의미하는 데 비해 여기서 재생산하다 라는 단어는 이차적 혹은 하찮은 활동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재생산이 "일차적인 것"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가치"를 창조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때로 "도리(reason)"라 불리는 상징적인 책략을 통해 여성의 노동은 여성들이 창조하는 "잉여"에 의존하는 축적체계 속에서 착취당한다. 다음에 나오는 폴 엘뤼아르의 Paul Eluard 시는 순결하고 그럴싸한 가부장적 자연주의와 가부장적 자연주의의 모습과 그 여성결핍을 보여준다. 20세기 후반 "건전한 정의(Sound Justice)"란 반어로밖에는 이해되지 않는다.

 

                 이는 따스한 남성의 법칙이니
                 그들은 포도로 와인을 만들고
                 석탄으로 불을 지피고
                 키스를 통해 인간을 만든다
                 ...
                 낡고 새로운 법칙이여
                 항상 스스로를 완벽하게 만들어가니
                 아이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최상의 도리에 이르네.주22)

 

4. 여성/자연의 파괴

 

그러한 "도리"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에는 에코페미니즘의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존재론 분석이 유용하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주의는 일상적 담화만큼이나 철학에 깊이 스며있는 고전적 이원론의 "논리"에 매여있다. 이 유서깊은 [이원론] 쌍의 상징성은 성의 형태학(morphology)을 반복하며 여성의 인간성을 제거하며 여성과 "자연"에 대한 남성 상위를 유지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자본주의를 방어하는 광범위한 가정의 범위는 다음과 같다.

 

■ "역사"와 "자연"을 인위적으로 구분함
■ 남성은 적극적인 역사의 "주체"이고 여성은 수동적인 "대상"이라는 가정
■ 역사적 활동은 반드시 "진보적"이며 자연에 기반한 활동은 반드시 "퇴행적"이라는 가정
■ 남성성은 "생산"을 통해 역사적 질서에 연합되며 여성성은 "재-생산"을 통해 자연의 질서에 연합됨
■ 생산적 활동은 "가치롭고" 재생산은 "무가치함"주23)

 

시간은 모든 존재의 조건이기 때문에, 자연이 역사에 선행한다는 말은 분명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광범위한 편제에는 이 구성된 범주의 이해를 위한 근거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인식론적 용어로 자본주의적-가부장적 사고는 그저 희미한 대기 위를 부유할 뿐이다. "자연질서"는 역사를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 즉, 사회적으로 창조된 언어와 실천이라는 매체 안에 살아있는 주체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라는 왜곡된 힘을 통해 이 역사적 차원을 희석시켜 유지한다--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이런식으로 왜곡된 현실을 믿게 되는데 이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종교, 윤리학, 경제학, 심지어 사회생물학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본질주의적 이원론에 매여있다. 몇몇 좌파비판사상, 심지어 페미니즘에서도 일부 영향을 받아 주어진 가정쌍들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전통적인 본질주의적 사고범주를 조심스럽게 제거할 필요가 있지만 부정할 수 없는 기정사실은 신체기관의 차이 때문에 여성과 남성이 존재적으로 "자연"과 다른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말은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일정하게 자연에 보다 "근접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의 의식은 감각적인 신체와 물적조건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는 맑스의 가르침을 되새기게 한다. 시각기관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 특유의 의식을 발전시키는 것처럼 능력의 차이를 보이는 남성과 여성은 세계의 존재에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또 그 활동을 통한 경험의 결과 세계의 존재들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고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지식은 신체의 잠재력을 통해 구체화되는 종류의 지식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잠재력의 순수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노동을 포함한 신체활동은 언어와 언어에 배태된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에 의해 매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과 주거와의 민감한 상호교환은 "자연과 남성을 매개하라고" 강제적으로 할당받은 역할에 의해 이차적 의미로 구체화된다. 역사적으로 남성적 합리성의 논리에 사로잡힌 여성의 감성적 즐거움과 환경과의 창조적 상호관계는 인공적이고 의무적으로 자연과 연합하게 되면서 퇴행적인 것으로 폄하된다. 그와 같은 노동 속에서 여성은 축적과정에서 고통받는 자연과 같은 엔트로피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신체의 실체(substance)를 포기한다. 그들의 노동가치가 국가회계에 포함되지 않음에도 그들의 가치하락은 등록된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그래서 자본주의국가는 자원재활용과 독성물질에 오염된 토양의 회복 같은 환경적 노력과 마찬가지인 정화프로그램을--일례로 매맞는 여성의 도피처나 중독상담--과도하게 제공한다.
성별에 따라 광범위하게 구성되는 노동에서 남성이 담당하는 채굴이나 공학은 또한 환경과 직접적으로 거래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동은 상징격자에서 긍정적인 차원으로 대표되며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생산적이고 진보적인 남성적 정체성을 보증한다. 대조적으로 여성의 노동을--"재-생산"--대표하는 언어는 여성을 자연과 마찬가지로 강등시킨다.
이러한 가짜존재론(pseudoontology)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제도 전체를 통해 정당화된다: 교회와 국가, 시장과 노동조합, 기술과 과학. 결과적으로 여성이 "노동"이라는 남성적 특권을 공유하기 위해 현상유지상태에 도전할 때 여성들은 자연의 일부로서의 여성의 적절한 지위로 "원상복귀"시키려는 괴롭힘과 거친 대접 등의 이데올로기적 무기를 만나게 된다. 이러한 역동성은 필연적인데 자본주의 하에서 "공식노동"은 여성과 그 아래의 자연을 번갈아가며 착취를 심화시킬 때만이 진보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남성노동자 역시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조건"으로 혹사당하지만 그것이 여성착취의 특수성을 소홀히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에코페미니즘의 요구는 근본적인 모순인 자연-여성-노동 연계의 인식에 기반해 자본이 강등시킨 "생산조건"에 대한 비판을 전적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분석에서 여성이 학대받게 된 것은 복합적인 여성 노동이 역사적으로 특권을 가진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되어왔기 때문이다. 지오반나 리코베리는 Giovanna Ricoveri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오직 "차이"에 개방적인 존재만이

 

              다양한 정치적 요소를 단순 결합시킨 것이거나 문화의 표준화에 관련되지 않으며

              어떤 집단의 자유에도 제한을 가하지 않고 자유로운 실험적 경험을 보장하지만,

              일정하게 헤겔적 "지양"을 통해 녹색, 적색, 페미니즘, 등등의 강력한 요소를 

              담아내는,그러면서도 특정한 경향을 확립하지 않는 새로운 정치학의 창조에

              연계된 동맹--또는 동맹의 결성--의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주24)

 

그러나 성차별에 대한 정치학의 무지의 문제가 극복되지 않는다면 여성은 어떤 새로운 전체화에 대한 미성숙한 접근에 대항하는 지속적인 방패가 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지금 이 시점에 에코페미니즘의 목소리에 우선권을 주어야 하는 전략적인 이유의 일부이다.

 

5. 무정체성(nonidentity)과 변증법

 

여성들 사이에 의견일치가 이루어지자, 에코페미니즘은 구조주의적 의미에서 과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운동 이면에서 개별 행위자를 추동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감수성을 이용할 필요가 있는데, 깊이있는 유물론적 분석이 유용하다. 이 분석은 자연과 역사에 대한 가부장적 이분법을 극복하며, 심미적 활동으로서의 노동을 지지하며 또한 이를 넘어 신체적 에너지와 담론 사이에 내재하는 변증법까지 고려하는 체화된 유물론이다.
이는 신체적 상태가 지식 및 주체성을 형성하거나 형성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의미한다. 결국 개념을 전하는 것은 개인의 주체성인가 신체인가? 모순되는 의미에 의해 abrased되면서 이 주체성이란 활발한 영역이 되었다. 자신이 기호분석(semanalysis)주4)이라 칭한 방법으로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Julia Kristeva 특별한 불안상태를 스트레스 하에서 신체가 향하며, 신체의 관념들이 붕괴하고 재결합하는 곳에 위치시킨다. 이 불안모형--혹은 "코라(chora)주5)"--는 역사의식의 핵심이며 기표(signifer)와 기의(signified) 사이의 연결을 유지하는 정신집중(cathexes)의 다중화를 통해 계속 재생된다.주25)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은 모순적이고 생존불가능한 방식으로 생산관계 내/외부에 머무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들은 매일 그들을 "자연에 더 가깝게"하는 모순으로 인해 부서진다. 여성도 인간이지만 여전히 사회체계에 의해 단순한 재생산의 장소나 다른 "자연자원"과 마찬가지로 사용하고 교환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품 취급을 받는다. "부족한 노동"인 그들은 노동력으로서 금전적, 이데올로기적으로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주체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교의적 이원론을 내포한 남성적 담론을 따라하여 자신들의 사소한 역할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어떻게 여성이 이 이중의 결박을 벗고 자신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사회변화를 위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다른 곳에서 나는 위기와 무정체성의 순간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상황, 주어진 상황 뒤에 감추어진 정치적 잠재성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감지하게 된다고 논의해왔다. 이러한 "부정변증법"은 본질과 외양 사이의 구분에 의존하는 데 명확한 인식--직접적 사실--이 일시적 표현에 불과하며 내재적인 실체 또는 본질의 왜곡이 규명되지 않을 경우 이용된다.주26)
성적학대는 가정폭력, 경제적·문화적 주변화--이러한 사안들은 여성의 정체성을 파괴하기에 충분하다. 사랑을 설파하지만 실제로는 착취하는 세계 내의 모순적 의미로 인해 유효성이 상실됨으로써 여성적 대상/주체는 현존하는 사회적 관계와 여성들을 결합시켜주는 신체적 에너지를 잃어버린다. 역사적으로 그녀에게 각인된 "타자성"에서 자유롭게 되어 형성 중인 주체(subject-in-process)로 서게 되면, 여성은 총체성과의 대안적인 관계를 만들어가게 될 것이다. 크리스테바의 말로 부연하면: 유약한 의식의 평형이 모순의 다양한 이질성에 의해 파괴될 때 신체는 차이, 비중(heavy), 방랑, 분리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주체의 단일성이라는 의미의 절멸 및 변질의 순간, 원초적인 괴로움과 혼란의 순간은 생산적 단일성을 포기할 수 있고, 형성 중인 적극적 의미(active signification-in-process)로서의 주체를 재확인한다. 여성이 그러한 내재적 과정에서 다양하게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에코페미니즘의 인식론이 근거하는 개인적 변화의 종류이다.
언제나 환경적 충격의 최전선에서 손상된 자연처럼 여성의 탈/정주는 결국 자본주의적 가부장제가 당연시한 인식을 마치 현상학적인 레이저인 양 분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란에너지와 다중 의미를 지닌 자유로운 코라는 남성주의적 삭제를 다룰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 바로 이 무정체성으로부터 에코페미니즘은 정체상태의 전체화에 맞서기 위해 일면적 질서 안에 문제되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자연-여성-노동 연계를 과감하게 재구조화한다.주27) 몇몇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와 몇몇 사회주의자들은 여기서 보여지는 변증법적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아직 재건되지 못한 여성/자연 모순을 지적하며 에코페미니즘 사상을 "본질주의적"이라고 부른다. 놀라운 일도 아닌 것이 자본의 과학적 헤게모니는 기표가 경쟁하는 두 의미 사이에 놓여 있을 때의 긴장의 순간인 반어를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부르주아 사실주의의 힘은 "본질"이라는 용어 자체를 실증주의에 포섭시켜 부정하며 폭로적인 기능을 상실케하는 데 있다.
실증주의의 자기만족적 확실성과는 반대로 부정변증법은 힘과 역사적 의식 간에 역(逆)관계를 확신한다. 그러나 비판적 인식에 접근할 특권을 지닌 자주적인 자유주의적 지식인은 아니며 또한 여성과 자연을 한데 묶어 자본가 남성이나 노동자 남성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위치시키는 물질적 모순을 이해하는데 적합한 계급의식의 이론도 아니다. 에코페미니즘의 통찰은 보통 "인간"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이들이 떠맡고 있는 심원한 "결핍"에 의해 추동된다. 아도르노의 Adorno 말을 빌면 무정체성은 "지식을 움직이게 하는 육체의 불안"으로 변증법의 책무는 이 "바보들의 진리"가 스스로의 논리를 달성하도록 돕는 것이다.주28)

 

6. 정치학과 지속가능성

 

변증법적으로 사고함으로써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정치담론에 대안적인 존재론을 도입했다. 이 존재론은 여성과 자연을 부정하는 남성들이 만들어낸 두려움에 빠진 이원론을 무효화한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다음사항을 제안한다.

 

■ 자연과 역사는 물질적 통일체이다.
■ 자연, 여성, 남성은 주체인 동시에 수동적 객체이다.
■ 여성-자연의 신진대사는 역사적 진보의 열쇠를 쥐고 있다.
■ 돌봄이 지배하는 재생산 노동은 지속가능성을 위해 가치로운 모델이다.

 

고통받음이라는 정치적 개념과 동기를 한데 결합시킴으로써 여성이 경험하는 해체의 현상학의 결과는 물적 토대를 가진 "아래로부터의 인식론"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평등에 신경쓰는 에코페미니즘은 가장 의미심장한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성적" 에코페미니즘이 이와 동일한 존재론적 가정을 반영한다고 기록할 수도 있다. 남성이 자연 자체를 자신의 욕구에 따른 종속물로 보기 시작했을 때 이 여성적 목소리는 생태학에 보다 시의적절하다는 점에서 기여한다. 지배당하고 권한을 부여받은(dominated and empowered) 여성은 "다른" 살아있는 것들을 위한 사례를 모아 접합시키기에 매우 적합하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여성이 일정하게 "자연에 근접"하다는--여성을 그 위치에 묶어놓으려는 의도에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도 담긴 생각과 같은--단순한 본질주의적 방식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그보다는 일시적으로나마 여성이 탁월한 역사적 동인으로 위치하는 특권을 부여하는 복잡하고 사회적으로 정교화된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차이에 대한 인정을 논하는 것이다.
가장 시급하고 근본적인 정치적 과제는 자연 안의 배태에 대한 남성의 인식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적 태도를 허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자연은 더 이상 고착되지 않으며, 인간과 분리된 외부의 대상으로서 상품화되지 않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 구체화되면 확정된 정체성과 지위를 가진 민주주의적 과정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부르주아 권리"의 대상과 함께 시작되는 자본주의적 담론에 풍토병이 된다. 전통적으로 사회주의 역시 역사적 동인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라는 특징을 영속화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인간성", "계급", "여성", "자연" 같은 보편성, 본질성은 모순이 지배하는 가운데 이 살아있는 것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영속적인 추상일 뿐이다. 사회질서와의 격돌 속에서 영원히 자신을 형성하고 재구성하는 형성중인 의미로서의 종속이라는 에코페미니즘의 대안 개념은 부르주아 인식론의 한계를 무시하는 생명력 있고, 체화된 유물론에 근거한 것이다.
이론적으로 생략된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라는 관념에 대항해서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인식은 반사적으로 분산된다. 자본의 기본모순 주변을 배회하면서 여성활동가들은 (1) 정치적 목소리를 낼 여성의 권리를 구축하려는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적 과업과 (2) 그들의 욕구와 남성적인 자본주의적-가부장적 자연과의 관계를 흔들어 놓음으로써 동일한 유효성에 기초를 훼손하려는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의 과업 그리고 (3) 여성--그리고 미래에는 남성 또한--이 자연과 더불어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에코페미니즘의 과업 사이에서 갈짓자로 흔들리는 변증법적 과정을 경험해야만 한다.주29)
단기간의 이익에 따라 추동되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와는 다르게 자연-여성-노동 연계를 딛고 있는 여성의 삶은 보호와 돌봄의 맥락에 배태되어 있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초월하면서

 

                 만일 여성의 생생한 경험이...우리 문화에서 정당성을 인정받는다면 그 즉시

                 [급진적 남성이]주6) 추상적 윤리적 구성으로 정식화하려고 노력하는 대안적

                 의식을 위한 "살아있는" 사회적 기초를 제공할 것이다.주30)

 

자본과 그 모순 덕분에 지구의 다수를 이루는 보통 여성은 이미 재생산노동의 궤도 안에서 지속가능성의 모델을 만든다. 피에틸레가 묘사한 핀란드 주부들의 노동이나주31) 인도 여성농부들의 노동은 이를 실증한다. 여기에 적은 환경훼손과 비인간적인 화폐경제에 최소한도로 의존하면서 공동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실제적인 방식이 존재한다. 자연의 "선물"을 존중하는 이들 여성 노동은 독립성, 존엄, 위엄을 갖추고 있는데 지속가능한 모델을 바라는 사람들이 이로부터 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시바가 우리에게 환기시켜주고 있듯이

 

               문화적으로 인식되는 빈곤은 실제적인 물질적 빈곤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자신 스스로 부양하는 방식으로 기본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생존경제는

               박탈이라는 의미에서 볼 때 빈곤한 것이 아니다...영양학적 측면에서

               기장(millets)은 가공식품보다 월등하며 지방에서 나는 재료로 지어진 집은...

               지역의 기후에 보다 잘 적응한다.주32)

 

여성의 노동과는 다르게 시장경제는 일상적인 물질적 실체와 분리되어 있고 그 작동을 강제하는 것은 사람들의 욕구와는 무관하다; 그 외연적 "확장"궤도는 이미 우리가 미래에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을 파괴하고 있다. 전지구적 자본이 점점 정보의 흐름에 따른 초국적 기업에 의해 중심화될수록 국민국가는 영향력을 상실하고 노동하는 남성은 기업판매와 하청(subconstracting)주7) 같은 활동으로 인해 파편화된 노동력에서 주변화될 것이다. "선진" 산업사회에서 주부로서의 여성의 상황은 자신의 생산수단이나 자신의 출산능력을 더 이상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회귀할 것이다. 그들의 가내유지기능은 남성을 위해 "자연을 매개"하는 역할수행의 반복으로 이어지지만 이들 여성은 소비주의 속에서 기술과 자율성을 상실한다. 반면 소위 노동절감"생산품"의 제조는 회복불능으로 생명력있는 거주지를 파괴한다.
에코페미니스트는 "필요노동"이 기술을 통해 자연에게 부담이 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동시에 그들은 성장하지 않는 경제 속에서 노동조합운동과 "파트너관계"를 유지하는 전략도 거부한다. 마리아 미즈는 즐겁고 가치로운 일이라는 노동 개념을 요청한다.주33) 그리고 대다수의 에코페미니스트는 자기충족적이고 탈중심화된 생산관계를 기대하는데, 이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즐겁게 일하고 외부자연과 상호호혜적 관계를 수립하며, 성별에 따른 노동분할과 국제적 축적으로 인한 소외와 손상이 없는 관계이다. 에코페미니즘은 가치의 재가치화(transvaluation of values)에 관한 것으로, 특히 지금 이 순간 사랑하고 노동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다르게 듣는 것이다.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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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iel Salleh, "Nature, Woman, Labor, Capital: living the deepest contradiction", in Martin O'Connor ed., Is Capitalism Sustainable?: Political Economy and the Politics of Ecology, NY: Guilford Press, 1994., pp. 106-124.

** 아리엘 살레는 에코페미니즘 활동가이며 사회주의, 페미니즘, 생태학의 수렴과 모순에 대해 그녀가 쓴 책이 1995년 런던의 제드(Zed) 출판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그녀는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여성환경교육센터의 위원장이며 뉴욕대학의 환경보호교육프로그램의 비상임방문연구원이다.

[옮긴이주-1995년 출간될 예정이라던 책은 아마도 Ecofeminism As Politics : Nature, Marx and the Postmodern, Zed Books (December 15, 1997) 으로 추정된다]

 

파란색으로 표기된 주는 원주

녹색으로 표기된 주는 옮긴이 주 이다.



원주

1) 구체화되고 본질주의적인 구성물인 "자연", "여성", "노동"은 정치적 투쟁을 통해 도전받아 온 광범위한 구체성을 표현하면서 국제적으로 사용된다. 심지어는 보편화된 가부장적 용어인 "여성"과 그 경험적 형태인 "여성들" 역시 사회적 구성물이다. 몇몇 포스트모던 저자들은 "본질주의"를 피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라는 범주 자체조차도 의문시한다. "계급"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는 맑스주의자들과 "인종"에 관한 저술을 하는 유색인들도 같은 위험을 부담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범주에 의존하지 않고는 지배에 대한 구조적 분석은 불가능하다. 이 글은 계급, 인종, 연령 등등의 사회계층화를 통해 여성을 차별화하지 않는데 자연-여성-노동 연계는 이러한 개념의 경계선을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이는 이 연계가 기본모순을 구성한다는 논지의 한 이유가 된다.

2) 비판적으로 체화된 유물론에 입각한 접근법은 아리엘 살레의 "표현적 실천의 변증법에 관하여 On the Dialectics of Signifying Practice," Thesis Eleven, 5-6, 1982, pp. 72-84에 소개되어 있다. 산드라 하딩 Sandra Harding, [페미니즘 내의 과학문제] The Science Question in Feminism(Ithaca, N. Y.: Cornell University Press, 1986)를 통해 인식론에 대한 다른 견해를 비교해 보라. 
3) Nancy White, Patricia Hill Collins, Black Feminist Thought(Cambridge, Mass.: Unwin, 1990), p. 160.에서 재인용.
4) U.N.이 1980년 채택한 International Labor Organization(ILO) 통계. 본래 ILO가 산정한 임금 비율은 5%였다. 이후 U.N.의 보고서가 출판될 때 10%로 상향조정되었다.
5) 제임스 오코너가 James O'Connor 자신의 글 "Capitalism, Nature, Socialism: A Theoretical Introduction," CNS, 1(1), no. 1, Fall 1988[국역 이강원 옮김,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이론적 서설, [공간과 사회] 3호, 1993]에서 사용한 "생산조건"이라는 개념은 물리적 자원, 인간노동, 지역의 기간설비를 한데 묶어준다. 여기서 나는 이러한 범주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인 자연-여성-노동 연계에 대한 보다 차별화된 분석을 요한다고 주장한다.
6) 일례로 Carole Pateman, The Sexual Contract(Cambridge, U.K.: Polity Press, 1988).
7) Selma James, The Global Kitchen(London: Housewives in Dialogue Archive, 1985), p. 1.
8) Marilyn Waring, Counting for Nothing(Sydney, Australia: Allen and Unwin, 1988). [옮긴이주-각주의 위치가 이곳인지는 명확치 않다. 책에는 미주로 8번이 있지만 본문에는 8번이 표기되지 않고 7번과 9번만 표기되어 있다]
9) Mary Mellor, Breaking the Boundaries(London: Virago, 1992).
10) James, The Global Kitchen, op. cit., pp. 10-11.
11) James, The Global Kitchen, op. cit.; Waring, Counting for Nothing, op. cit.; Hilkka Pietila, "Woman as an Alternative Culture Here and Now," Development, 4, 1984; Australian Bureau of Statistics figures for 1990, National Women's Consultative Council Report, A Question of Balance(Canberra: Government Printer, 1992), Appendix F에서 재인용.
12) 일례로 Lydia Sargent, ed., Women and Revolution(Boston: Southend Press, 1981)을 보라.
13) Berit As, "A Five-Dimentional Model for Social Change," Women's Studies International Quarterly, 4, 1981.
14) Irene Dankelman and Joan Davidson eds., Women and Environment in the Third World(London: Earthscan, 1988); Lin Nelson, "Feminists Turn to Workplace, Environmental Health," Women and Global Corporations, 7, 1986; and Cynthia Enloe, Bananas, Bases and Beaches(London: Pandora, 1989).

15) Vandana Shiva, Staying Alive: Women, Development and Ecology(London: Zed, 1989).[국역 강수영 옮김, [살아남기: 여성, 생태학, 개발, 솔, 1998]
16) Ibid., p. 45.
17) 일례로 E. A. Johnson, Predecessors of Adam Smith: The Growth of British Economic Thought(New York: Prentice-Hall, 1937), pp. 139-140를 보라.
18) John Locke, "An Essay Concerning the True Original, Extent and End of Civil Government"(circa 1688), in Sir Ernest Barker, ed., THe Social Contract: Essays by Locke, Hume, Rousseau(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1), 특히 5부의 25-51절을 보라, pp. 16-30. 인용은 p. 17과 p. 18에서 각각 따왔으며 강조는 원문 그대로이다.
19) Naomi Scheman, "Individualism and the Objects of Psychology," in S. Harding and M. Hintikka, eds., Discovering Reality(Boston: Reidel, 1983), p. 234.
20) Maria Mies, Patriarchy and Accumulation on a World Scale(London: Zed, 1986).
21) 이러한 견지에서 "자기비판"의 필요성은 이탈리아의 사회주의자 발렌티노 팔라토와 지오반나 리코베리가 Valentino Parlato and Giovanna Ricoveri 최근의 논문 "The Second Contradiction in the Italian Experience," CNS, 4(4), no. 16, December 1993에서 이미 주장했던 것이다.
22) Paul Eliard, "Sound Justice" (1951), in Gilbert Bowen, ed. and trans., Paul Eluard: Selected Poems(London: Calder, 1987), p. 145.
23) Ariel Salleh,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pistemology," Thesis Eleven, 8, 1984.
24) Giovana Ricoveri, "Culture of the Left and Green Culture: The Challenge of the Environmental Revolution in Italy," CNS, 4(3), no. 15, September 1993, p. 119.
25) Julia Kristeva, Polylogue(Paris: Editions du Seuil, 1978). Cathexis는 정신분석학의 용어로 신경에너지의 투입을 의미한다.
26) Ariel Salleh, "On the Dialectics of Signifying Practice," op. cit. 부정적(비단언적) "본질"을 수반하는 "부정변증법"의 이러한 이용은 Theo Adorno, Negative Dialectics, E. Ashton, trans.(London: Routledge, 1973)과 Minima Moralia, E. Jephcott, trans.(London: New Left Books, 1969)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국역 홍승용 옮김, [부정변증법], 한길사, 1999; 최운규 옮김, [한줌의 도덕], 솔, 1995]
27) 보다 합리적인 흐름 속에서 콜린스 Collins 또한 적극적 인식론적 격려로서 흑인여성의 경험 내/외부에 대한 글을 썼다. "흑인여성의 삶은 우리 내에서 아프리칸-아메리칸 여성으로 스스로 규정한 자기이미지를 객관화된 타자와 분리하려는 모순과의 화해를 목적으로 하는 교섭의 연속이다."; Black Feminist Thought, op. cit., p. 94. 국제적인 활동그룹인 Development Alternatives with Women for a New Era 역시 마찬가지로 아래로부터의 시각에 기초한 페미니즘 입장의 인식론을 옹호한다. 이러한 접근에 대한 포스트모던의 비판은 곧 출판될 나의 책에 담겨있다(London: Zed).
28) Adorno, Negative Dialectics, op. cit., p. 203; Minima Moralia, op. cit., p. 73.
29) Ariel Salleh, "The Ecofeminism/Deep Ecology Debate: A Reply to Patriarchal Reason," Environmental Ethics, 14, 1992에 보다 세부적인 내용이 담겨있다.
30) Ariel Salleh, "Deeper than Deep Ecology," Environmental Ethics, 6, 1984, p. 340.
31) Pietila, "Women as an Alternative Culture," op. cit.
32) Shiva, Staying Alive, op. cit., p. 10.

33) Mies, Patriarchy and Accumulation, op. cit.

 

옮긴이 주

1) []는 저자

2) 원문에는 약자로만 되어 있는데 Parent Teacher Association의 약어가 아닐까 함. 한국에서는 학부모가 일일선생님을 하는게 예전에는 별로 없었다. 한국식으로 육성회로 하려했으나 요즘에는 육성회라는 말을 안쓰는 것 같아 학부모회로 해둠
3) 우주는 24가지의 원리 또는 요소로 되어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프라크리티(Prakriti), 즉 '창조성'이라 하였다. 이 프라크리티가 여성 에너지인데 반해 푸루샤(Purusha)는 남성 에너지이다. 푸루샤는 형태가 없고 색깔도 없으며 모든 속성을 초월해 있고 우주의 현현 과정에서 아무런 능동적 역할도 담당하지 않는다. 이 에너지는 아무런 분별도 없이 수동적으로 지켜보기만 할 따름이다. 
프라크리티는 형태와 색깔을 가지며 속성도 가진다. 그것은 분별하는 앎이며, 다수로 전개되려는 의지를 가진 유일자이다. 우주란 바로 이 프라크리티라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자식이다.

4) 일반적인 기호학에 정신분석을 도입한 방법
5) 가부장제는 이것 아니면 저것 식의 이분법적인 배제의 논리 위에서 움직인다. 그러나 기호계의 발화(혹은 시적인 발화)는 이것과 저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모순을 받아들인다. 크리스테바는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말한 ‘코라’개념에 기대어 기호계의 특별함을 설명한다. ‘티마이오스’에서 ‘코라’는 명명할 수 없는, 혼돈된 자궁과 같은 선험적 공간을 의미한다. 즉 크리스테바에 있어서, 코라는 욕망으로 경험되는, 어머니와 아이가 공유하던 육체의 공간이다. 코라는 시적 리듬의 흔적을 남겨놓기도 하지만, 언어적으로 발화되어질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다. 특히 ‘모성적인 코라’는 의미화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
6) []는 저자
7) subcontracting의 오기로 생각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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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글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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