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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2/25
    Ecological Debt and Property Rights on Carbon Sinks and Reservoi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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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2/18
    Ecological Roots: Which Go Deepest?(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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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02/06
    Marx's Ecological Value Analy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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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logical Debt and Property Rights on Carbon Sinks and Reservoirs

탄소흡수원 및 저장소에 관련된 생태부채와 재산권*

 

후안 마르티네즈-알리에르

 

환경정의라는 용어는 미국에서, 그리고 유색인종이나 저소득층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이 더 심하게 오염되는 데 저항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세계 각지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환경정의는 환경적 인종차별주의에 저항하는 투쟁인 것이다. 이산화탄소의 불균형적 방출은 국제적 차원의 환경부정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주1) "온실 정치학"을 논의할 때 사용되는 또 다른 용어 하나는 환경안보(Environmental Security)로 군사적인 의미가 아니라 식량안보와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환경안보는 (물 같은) 자연자원과 환경서비스 접근권을 부유하고 권력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모두에게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반구는 이 개념을 이용해 북반구가 온실가스를 불균형적으로 배출해왔고 현재도 배출하고 있다고 논의한다. 북반구의 온실가스배출은 환경정의 문제와 충돌하며 환경관련 책임문제룰 불러일으키고 있다. 또한 북반구의 온실가스배출은 남반구의 환경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일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세계 각지마다 매우 상이하다.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 농축 증가를 막기 위해서는 현재의 배출량을 절반으로 감소시켜야 한다. 누가 줄일 것인가? 누가 탄소흡수원과 저장소 역할을 맡을 것인가? 부유한 국가들은 배출을 효과적으로 감소시키지 못한다(1997년의 교토의정서의 애매한 약속은 이제 폐기되었다). 부유한 국가들은 필요한 감축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돈을 절약하게 된다. 감축을 이행하려면 경제활동에서 화석연료 이용량의 감소시키거나 에너지 기술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회피된 비용이 바로 "탄소부채"이다.주2) 
탄소흡수원인 (대양, 새로운 식물, 토양 등)과 임시 저장소인 대기가 제공하는 환경서비스 사례를 살펴보자.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축은 280ppm에서 360ppm까지 증가했다. ("주도권 경쟁" 중인) 유럽연합은 1997년 12월 교토에서 "안전하게" 550ppm까지만 증가하는 궤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적은 감축이라도 필요한 시점이라고 언급했다. (550ppm이라는 수치는 지구의 기온을 섭씨 2도 가량 상승시킬 가능성에 관련된 수치이며 어느 정도 범위까지 영향을 미칠지, 지역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서는 훨씬 더 불확실한 상태이다.) 즉, 이 "안전한" 한계선이라는 것조차도 매우 논쟁적인 문제인 것이다.주3)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호흡을 줄여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를 감소시킨다는 것은 비실용적인 일이다. 우리 모두는 어느정도 비슷한 양의 칼로리를 매일 섭취한다(물론 굶어죽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이다). 대신 지구 온난화를 분석하는 사람들은 일상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와 사치스러운 이산화탄소 배출을 구분한다. 이런 구분은 인간 생태학의 한가지 특징적인 측면, 즉 신체 외부적 에너지 사용에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차이에 기인한 것이며 이 차이는 기술적 문제에 결부되어 있다. 신체 외부적 에너지 사용에서 드러나는 막대한 차이는 생물학적인 원인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와 기술에 의존하는 것이다.
미국의 일인당 연간 탄소배출량은 6톤 정도이며 유럽은 그 절반, 인도는 0.4톤을 배출한다. 일인당 연산 탄소배출량의 지구 평균은 1톤을 조금 넘는 수준으로 (지구 전체로 보면 연간 6천메가톤에 이르는 양이다). 인구증가와 경제성장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증가분을 감안할 때 이 수치는 우리가 대기에 농축되는 이산화탄소량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기를 바란다면 이미 과도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교토에서 그리고 이후에도 유럽연합은 부유한 국가들에게 (1990년 수준 대비) 적은 양이나마 감축을 제안했지만 미국은 이 제안조차도 수용하지 않았다(이유 중에는 미국 내의 인구증가 문제도 포함된다).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가 언급하는 것처럼 어떠한 경우에도 대기 중에 더 이상의 이산화탄소가 농축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감축해야 할 양은 현재 배출량의 절반 수준으로 년간 3천메가톤에 이른다. 비록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량이 많으면 각 대양, 새로운 식물, 토양의 탄소흡수력이 증가하기는 하겠지만 (농축증가시 조금 더 흡수된다는 의미에서) 대기를 탄소저장소로 사용하는 일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이러한 활동이 기후변화를 야기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논의되지 않는다.
게다가 영구적인 흡수원(대양, 토양, 새로운 식물) 또한 대가 없이 선착순으로 제공된다는 원칙 하에 운영되는 실정이다(소수의 "공동대응(joint implementation)" 실험을 제외하고).
탄소배출감소에 대해 집중적인 논의를 하기 전에 먼저 (오존층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현재 금지된) 클로로플루오로카본(chlorofluorocarbon; CFC)이나 (최소한 쓰레기 매립에서 발생하는 부분에 있어) 연소를 통해 저렴하게 재활용될 수 있기 때문에 온실가스로서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을 상당히 감소시킬 수 있는 메탄 같은 다른 온실가스의  감축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 탄소배출감소나 추가적인 탄소흡수창출을 위해 고안된 공동대응(Joint Implementation)의 경험적 사례(나 청정개발기제(Clean Development Mechanism))를 활용할 경우 탄소 일톤의 가격은 불과 몇 달러에 불과한 것으로 측정되었다.
때로는 온실가스감소의 음의 한계비용도 발생한다. 경제성 제고 및 배출량 감소가 결합된 사례로 "양자 이득(win-win)"을 얻을 수 있다. 일례로 발전소에 석탄대신 천연가스를 사용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양자 패배(lose-lose)"의 상황도 벌어진다. "공동대응"이나 "청정개발기제" 실험의 전형적인 사례로, 75만 헥타르에 유칼립투스와 소나무를 심어 네덜란드의 650MW 발전소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려고 계획된 에콰도르의 FACE 프로젝트의 경우이다. 네덜란드는 에콰도르의 소나무 플랜테이션 조성을 위한 자금을 지원하고, 흡수되는 이산화탄소는 네덜란드 계정에서 감소된 것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네덜란드에서의 이산화탄소배출을 줄이지 않고 다른 장소의 이산화탄소 흡수를 증가시키는 일은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FACE의 첫의장은 전 환경부 장관이었던 에드 네이펠스(Ed Nijpels)였다. FACE는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숲(Foreast Absorption of Carbondioxide Emissions)"의 약자이다. FACE가 안데스 지역의 생태(일례로 널리 배포된 1995년 연감에서는 에콰도르에서 고도 2800m가 넘는 지역에서 농업이 불가능하며 가축사육도 득이 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를 무시한 것이 실수였다. 1999년 말 소나무 재배시 뿌려주는 파라모(paramo)의[옮긴이 주-안데스산맥지역에서 고도 3000m 이상의 수목한계선을 넘어서는 곳에는 약간의 관목이 산재하는 초지를 이루는데 이러한 경관을 파라모(Paramo)라고 하며, 양이나 산양의 목장으로 이용된다] 비옥한 유기토로 인해 흡수되는 양보다 더 많은 탄소가 대기 중으로 배출된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고 네덜란드의 생태부채는 더 늘어나게 되었다. 이 사례로 볼 때 FACE 프로젝트는 고산지역의 농업과 가축사육 농민의 얕잡아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태도는 유럽중심-인종차별주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FACE 프로젝트의 실패는 알려져야 하는 사례이다.
오늘날 부유한 국가들이 약속한 배출감소량은 적은 양이고 결국 흡수원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공동대응프로젝트에서 거래되는 탄소 일톤의 가격은 낮아질 것이다. 가격하락의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프로젝트 자체로 인해 해당 지역에 발생할 수 있는 부정적 외부비용이 가격에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에너지 공급과 남반구의 산업 프로젝트가 수요에 비해서 더 커질 경우 (특히 위협받는 일차림의 보전 또한 수용되어 추가 흡수원이 생긴다거나 석탄 대신 천연가스를 사용하는 등의 탄소배출을 감소시키는 기술의 변화가 발생할 경우) 가격은 낮아질 것이다.
그러나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 추가농축을 막기 위해 부유한 국가들이 연간 탄소 3000메가톤을 줄이기로 동의해야 한다면 이산화탄소 경감 비용은 막대하게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탄소흡수원을 소유한 국가가 가난하다면 추가 경감을 위해 지역에서 지불해야 할 가격은 여전히 낮을 것이다. 그러면 남반구 정부나 북반구 금융기관에 중재자들이 활동을 시작할 것이다. 반면 감축이 없다면 흡수원 및 저장소는 영속적이고 불균형적으로 이용될 것이고 이를 부유한 국가들의 소유물로 사실상 인정하는 것이다("힘"이 "권리"에 우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생태부채는 연간 6백억 달러에 달하며 (톤당 20달러의 비용을 들여 감축한다고 할 때 3천메가톤에 이른다). 바로 이것이 회피비용을 보여주는 수치이다.
탄소부채는 필요한 감축을 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대충 계산해도 막대한 금액을 부유한 국가들이 자신들을 위해 보유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탄소감축의 적정평균비용이 탄소 1톤당 20달러가 넘는다고 쉽사리 논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비교 사례로 1999년 라틴 아메리카의 누적 대외부채는 7천억 달러였다. 대충 계산해보아도 (오직 탄소배출만 1톤당 20달러로 계산해서) 지난 12년간 북반구에서 축적한 탄소부채를 상쇄할 수 있는 금액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생태부채에는 ("생물침해" 등의 불평등한 생태적 교환 때문에 발생하는) 탄소 외의 다른 품목도 포함된다. 여기서 탄소성분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탄소 배출구와 저장소에 대한 비용이 지불되지 않은 채 불균형적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부채이기 때문이다.
"온실" 정치학에 대한 이런 종류의 시각은 "주도권 경쟁"이라기보다는 "책임소재를 가리는 게임"이며 지금까지 남반구 국가들은 여기에 참여하기를 주저해왔다. 석유수출국[옮긴이 주-coungtries는 countries의 오기로 보임]들은 온실효과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다른 남반구 국가들은 북반구 국가의 정부들에 반감을 사기를 원하지 않는다. 생태부채를 주장하는 대신 기술이전을 위한 약간의 돈을 요청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AOSIS(소도서국연합; Alliance of Small Island States) 탄소부채 개념을 촉구함과 동시에 위협받는 환경안보를 표현하는 데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반구에서 생태부채를 주장하는 것은 국제정치의제의 중요한 주제로 자리잡아야 할 것이며 북반구가 반드시 "생태적 정산"을 수행하도록 만드는 데 강력한 촉진제가 되어야 한다.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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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an Martínez-Alier, "Ecological Debt and Property Rights on Carbon Sinks and Reservoirs", Capitalism Nature Socialism vol. 13  No. 1, March 2002.


원문

http://blog.naver.com/post/postView.jsp?blogId=ecopeace&logNo=10467761&categoryNo=14&viewdate=&cpage2=1&cpage=1

PDF포맷입니다.



원주

 

1) Anil Agarwal and Sunita Narain, Global Warming: A Case of Environmental Colonialism(Delhi: Centre for Science and Environment, 1991).
2) Jyoti K. Parikh, "Joint Implementation and the North and South Cooperation for Climate Change," International Environmental Affairs, 7, 1, 1995.
3) C. Azar and Rhode, "Targets for Stabilzation of Atmospheric CO2," Science, 276, 1997, pp. 18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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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logical Roots: Which Go Deepest?

생태적 연원: 어디까지인가?*

 

헬레나 세만**

 

서평

존 벨라미 포스터, [맑스의 생태학: 유물론과 자연]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2000), 300pp.

 

존 벨라미 포스터의 이 새로운 책을 보자마자 리처드 르원틴은 Richard Lewontin "맑스에 관한 더 이상의 위대하고 두껍고 무거운 책은 사절일세!"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맑스주의에 관한 두꺼운 책을 썼음에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르원틴은 신간 광고에 "이 책을 읽기 시작하게 되면 내려놓을 수가 없다"고 쓰기에 이르렀고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나 역시 그러하다.
이 책은 명쾌하고 주제에 충실하며 학술적이고 실질적인 책이다. 지성사를 조망하고 먼슬리 리뷰 Monthly Review 독자들에게 친숙한 책들을 제시하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고 해석한다. 이 분야에 대한 지식이 많은 독자에게나 처음으로 접하는 독자에게나 이 책은 탁월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존 벨라미 포스터는 자신을 포함해서 다양한 인물들의 사상의 진화도표 그린다. 그는 맑스가 종종 반-생태 사상가로 오인받았다고 설명한다. 그는 언제나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맑스의 사상의 생태적 측면이 얼마나 핵심적인 것인가를 깨닫게 된 것은 몇년이 지난 후였다.
기본적으로 포스터는 맑스주의 내부의 두가지 흐름 사이에 존재하는 논쟁의 논점을 바꾸어왔다. 자연과학의 영역 전체를 실증주의에 넘겨주기를 거부하는 엥겔스의 전통과 결부된 고전적 맑스주의 전통은 인간 사회와 자연 세계 모두를 포괄하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구축하고자 한다. 실증주의에 반대하는 신칸트주의적, 신헤겔주의적 neo-Kantian and neo-Hegelian 논증에 결부되었고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Frankfurt School 대다수의 신좌파들이 받아들인 또 다른 전통은 자연의 변증법이라는 생각과 맑스주의와 자연과학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논리를 편다. 맑스의 원전을 재독하는 것에서 먼슬리 리뷰의 유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레빈스, 르원틴, 굴드 Levins, Lewontin, and Gould 같은 과학자들과 결부된 신좌파의 또 다른 흐름에 이르기까지 영향력 있는 많은 인물들을 두루 소개한 후 물리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 양자를 포괄하는 종합적인 유물론을 논의한다.
"서구 맑스주의" 전통은 인본주의자 맑스와 실증주의자 엥겔스 사이의 기본적인 불화를 감지했고 이후 좌파의 역사에서 맑스를 둘러싼 모든 것에 존경을 보내고 엥겔스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잘못된 것으로 파악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문헌과 맥락들을 정밀하게 검토함으로써 맑스와 엥겔스 사이에 존재하는 이론적 거리에 대한 주장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엥겔스의 매우 진보적이면서 지적인 철학적 유산을 입증하기 위해서 몇몇 저작을 살피는 것이 유용하다. 엥겔스의 저작에서 뽑은 자연세계와 인간 사회의 관계에 대한 인용문은 우리 시대의 생태적 의식에도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히 신선한 내용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이 마치 자연 외부에 존재하기라도

               하는 듯, 타국의 원주민을 정복하듯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살과 피와 뇌를 가진 존재로 자연에 속하며 그 한가운데에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자연을 지배하는 것은 모두 모든

              존재 중 자연법칙을 알아내고 이를 올바르게 적용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포스터가 들려주는 이야기 중 특히 재미있는 것은 1920년대의 소련의 생태학이 지구상에서 가장 앞서나갔다는 논쟁적인 그의 주장이다. 그 이유를 그는 서구모델은 환원주의적이고 단선적이며 기술적이었던 반면 소련의 사고방식은 보다 역동적이고 변증법적 복합성을 띠었으며 총체적이고 공진화적이었다는 데에서 찾는다. 그는 버나드스키의 Vernadsky 생물권 분석과 바빌로프의 Vavilov 유전적 다양성 연구 및 레닌과 Lenin 루나차르스키의 Lunacharsky 환경보호정책을 예로 들고 있다. 하지만 대화는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비난받고 생태학자들이 숙청당한 스탈린 집권과 1차 5개년 계획 이후에 모든 일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부하린도 Bukharin 이 때 숙청당했다. 소련의 과학철학에 대해 연구해왔기 때문에 부하린의 철학책들에 대해 알려진 것들을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벨라미의 책을 통해서 부하린의 새로운 기록들이 발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판받는 시련기, 루반카의 Lubyanka 테러 속에서도 부하린이 4권 분량의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자전적 소설([이 모든 일의 시작] How it All Begin), 시집([세계의 변환] The Transformation of the World), 사회주의에 관한 논문([사회주의와 사회주의 문화] Socialism and Its Culture), 광범위한 철학저작([철학의 아라베스크] Philosophical Arabesques). 이 기록은 고르바쵸프의 개방정책기에 glasnost years under Gorbachev 발견되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과 [철학의 아라베스크]는 1990년대에 러시아에서 출판되었다. 영어로는 [이 모든 일의 시작]이 1998년에, [철학의 아라베스크]는 출간예정이다. 이전부터 알려져있던 부하린의 다른 저작들을 초월하여 부하린을 진정한 심층생태학자로 해석하는 것을 보면 포스터는 분명히 먼슬리 리뷰 출판사로부터 [철학의 아라베스크]의 영어초역본을 받아 읽어보았을 것이다.
먼슬리 리뷰 출판사의 또다른 공로는 코드웰의 Caudwell [죽어가는 문화에 대한 연구와 추가 연구]를 Studies and Further Studies in a Dying Culture 꽤 오랫동안 출판했다는 점이다. 포스터가 읊조리는 맑스주의의 역사에서 이 간명하고 탁월하며 놀라운 존재의 구절들은 내 귀에 음악으로 들려온다. 코드웰은 통합적인 통찰력, 상호적으로 결정되는 관계가 아니라 유기체나 환경 어느 한 쪽을 강조하는 특정한 이원론을 꿰뚫는 능력을 통해 거대한 인식론적 단절을 변증법적으로 연결할 수 있었다. 포스터에 따르면 코드웰은 다른 사상가들은 파악하지 못한 생태적 세계관의 본질을 파악했다고 한다.
[맑스의 생태학]이라는 제목은 이 책에 딱 맞는 제목은 아니다. 왜냐하면 맑스 이전과 이후 사상가들에 대한 탐구의 범위가 너무도 광범위한데다가 논지는 너무도 현대적이기 때문이다. 포스터의 "문헌탐구이야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매우들은 데모크리투스와 에피쿠로스에서부터 포이에르바흐, 맬더스와 다윈을 거쳐 엥겔스, 부하린, 버날, 홀데인, 코드웰 Democritus and Epicurus through Feuerbach, Malthus, and Darwin to Engels, Bukharin, Bernal, Haldane, Caudwell 외 다수에 이른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은 실제로는 유물론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물론의 역사는 현대의 생태운동이 지니는 반유물론적 경향에 대한 반론을 품도록 만든다.
유물론적 자연 및 역사 개념에서 생태학이 중심적이라는 주장과 유물론적 자연 및 역사 개념이 생태학에 있어 중심적이라는 주장이 이 책의 핵심이다. 반목하는 해석의 역사 전체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분석을 제공하는 것이다.
포스터는 자연과 인간 존재에 대한 유물론적 접근의 역사 전체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현재의 녹색사상이 생태적 저하의 전 과정에 대한 책임을 17세기에 등장한 과학혁명이나 낭만주의적, 유기론적, 생기론적 포스트모더니즘과 반대될 수 있는 인간중심주의적이고 착취적인 기제를 체화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자연지배"라는 베이컨의 사상에 돌리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이원론적 접근은 현대 생태운동 대부분을 근대성과 과학의 단순 거부하고 맑스주의의 계몽주의적 측면을 희화화하며 비합리적인 근시안을 가지도록 만든다.
일단 생태적 측면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실재론적 인식론과 유물론적 존재론에 근거하여 재이해된다면 자연과 사회의 합리적 신진대사를 방해하는 장애물은 근대성, 과학, 유물론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만일 누구라도 맑스주의 전통 내의 생태적 측면의 위치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책을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혹은 또 다른 관점으로 현재의 생태적 관심사에 대한 대안적인 철학적 기초를 파악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다양한 연원에 대해 접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연원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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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lena Sheehan, Ecological Roots: Which Go Deepest?, Monthly Review vol.52, no. 5, October 2000

원문http://www.monthlyreview.org/1000shee.htm

BOOK REVIEW
Foster, John Bellamy, Marx's Ecology: Materialism and Nature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2000), 300pp., $18, paperback

** 헬레나 세만(Helena Sheehan)은 아일랜드에 있는 더블린시립대학 신문방송학과(School of Communications at Dublin City University)에서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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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x's Ecological Value Analysis

맑스의 생태학적 가치분석*

존 벨라미 포스터**

 

서평
폴 버켓, [맑스와 자연: 좌파적·녹색주의적 시각] (New York: St. Martin's Press, 1999), 312 pp.

 

 

최근 십년간 맑스에 대한 모든 비판을 관통하는 주제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프로메테우스주의"일 것이다. 아이스킬로스의 Aeschylus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에 Prometheus Bound 보낸 맑스의 찬사와 그리스 신화의 혁명적인 인물인 프로메테우스에게 맑스가 느낀 매력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졌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의 작업 중심에 "프로메테우스 모티프"가 자리하고 있다거나 이것이 그의 분석 전체에 있어 근본적으로 취약한 점이라는 비난이 현재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레셰크 코와코프스키의 Leszek Kolakowski [맑스주의의 주요 흐름] Main Currents of Marxism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초판이 1968년 폴란드에서 발행되었고 1978년 영국에 등장했다. 코와코프스키가 볼 때

 

              맑스의 프로메테우스주의의 전형적인 특성은 (경제의 대척점인) 인간 존재의

              자연적 조건에 대한 관심부족이다. 세계에 대한 맑스의 이상에는 육체적 인간의

              존재는 부재이다. 인간은 순수하게 사회적인 존재로 정의된다; 인간존재의

              물리적인 한계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맑스주의는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다는

              사실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즉, 건강하거나 병들고 남자이거나 여자이며

              젊거나 나이들었거나; 유전적으로 동등하지 못하다거나; 그리고 이 모든 환경이

              계급구분과 무관하게 사회발전에 영향을 미치며 세계를 완전하게 하려는

              인간의 계획에 결부된다는 사실에 무관심한 것이다...맑스는 인간이 신체적

              조건과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제약받는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맬더스에

              대한 논박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인구란 지구의 공간과 자연자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이유로 절대적 과잉인구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인구학은

              독립적인 세력이 아니고 사회구조를 구성하는 한 요인이므로 그에 걸맞는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신체와 육체적 사망, 성과 공격성, 지리학과 인간의

              번성 같은 것들을 맑스는 순수하게 사회적인 실재로 변모시킴으로써 그의

              유토피아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들을 가장 소홀히 취급했다.주1)

 

이 성토의 본질상 맑스가 프로메테우스주의자라는 코와코프스키의 비난을 맑스와 생태학에 대해 논평하는 이들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이 비난은 즉시 앤서니 기든스의 Anthony Giddens [사적 유물론의 현대적 비판]에서 A Contemporary Critique of Historical Materialism(1981) 반복된다. 기든스는 이 책에서 "계급체계로 표현되는 인간의 착취적인 사회적 관계의 전환에 대한 맑스의 관심이 자연의 착취로 확장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으로 생각되는 맑스의 "프로메테우스적 태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그 이후로 테드 벤튼, 라이너 그룬트만, 존 클락, 마이클 뢰비 Ted Benton, Reiner Grundmann, John Clark, and Michael Löwy  같은 다양한 좌파생태주의사상가들이 맑스의 프로메테우스주의적 자연에 대한 무관심을 각자의 표현으로 덧붙임으로써 이 비판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주2)
(코와코프스키가 루크레티우스, 브루노, 괴테의 Lucretius, Bruno, and Goethe 방식으로 맑스를 보다 확고히 얽어매고자 했던--맑스가 그리스 신화로부터 모티프를 차용한 것으로 강제로 떠넘김으로써 성립된) 이 비판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그 자체로 분석되지 못하는) 신화적 상징을 진정한 비판인 양 효과적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주3) 맑스가 자연의 한계를 고려에 넣지 못했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다. 심지어 코와코프스키가 가장 강력한 논거라고 생각했을 맑스의 맬더스 비판에서도 이 근거없음이 드러난다. 맑스와 엥겔스는 인구학적 요인이나 지구에서 인류가 확장하는 데 절대적인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과잉인구"라는 용어를 무색하게 만든 사람은 맑스가 아니라 맬더스였다--왜냐하면 맬더스의 인구와 식량공급에 대한 엄격한 평형모델에서 과잉인구는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의 논리가 전체로서의 지구의 수용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과잉인구에 대한 것이 아니고 식량공급에 대한 인구압이 애초부터 인간의 조건에 고유한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주4)
맑스가 생, 사,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단순 무시했다는 주장에 입각해서 생각한다면 3권으로 이루어진 [자본] Capital 중 한 권에 들어있는 노동일에 대한 투쟁에 관한 맑스의 처방 중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의 건강에 대한 절대적인 착취나 "자살에 대한 푸세의 의견"에 "Peuchet on Suicide" 나타난 부모자식 간에 그리고 배우자 간에 벌어지는 학대, 낙태, 여성착취에 대한 맑스의 언급 중 (생, 사의 문제는 언급하지 않고) 세부적인 논의에 대해서만 고려하면 된다.주5)
중요한 것은 맑스가 단선적인 프로메테우스주의의 희생물로 전락했다고 비판하는 코와코프스키의 주장이 가장 많이 언급되는 곳은 생태학 영역이지만 그 영역에서 우리가 가장 결정적인 반증을 찾아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폴 버켓의 권위 있는 책 [맑스와 자연: 적녹의 입장]은 Marx and Nature: A Red and Green Perspective 두드러진다. 이 책은 맑스가 프로메테우스주의자라는 잘못된 평가가 가장 확고한 기초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영역에--그의 성숙한 정치경제학 비판--초점을 맞추고 있다.
[맑스와 자연]은 3부로 나누어진다. "자연과 사적유물론"이라는 제하의 1부는 맑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노동과 생산의 자연적 기초를 다루고 있다. "자연과 자본주의"라는 제하의 2부는 맑스의 생태적 가치분석을 체계적으로 평가한다. "자연과 공산주의"라는 제하의 3부에서는 이 분석에 근거해서 맑스에 대한 "프로메테우스적 해석"에 대한 진전된 비판을 제시함과 동시에 맑스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상의 생태적인 측면도 드러낸다.
버켓은 맑스에게 자연은--노동이나 노동력과 함께--부를 창출하는 원천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정립하면서 이 책의 1부를 시작한다. 진정한 부는 사용가치를 구성하는데 사용가치는 자연의 도움으로만 생산되는 것이다. 상품의 구성요소로 변모되는 모든 물적 사용가치는 자연자원에 근거하고 있고 또한 자연자원 없이는 생산 자체가 불가능하다. 물론 자연의 "보편적 신진대사"는 생산영역을 초월하는 것이다. 인위적 생산은 원칙적으로 노동력의 조직에 의존하지만 노동력 자체는 그 본성상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은 오직 자연이 (생기있는 자연력으로서 또는 전환된 에너지로서) 물질의 형태를 변화시킴으로써 작용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만 작용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면에서 맑스는 단순한 프로메테우스주의자라는) 몇몇 비판가들의 주장처럼 맑스가 자연적 조건과 한계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맑스는 그러한 자연적 조건을 통해 인위적 생산(human production)에 대한 분석을 구축했으며 심지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인위적 생산에 대한 자연초월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고 버켓은 주장한다.
그러나 맑스가 인위적 생산의 자연적 기초와 인위적 생산이 자연적 조건에 의존함을 주장했지만, 인위적 생산은 사회적으로 매개된 생산이며 공진화적 맥락 속에서 발생한다고 매번 지적함으로써 버켓이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주의적" 접근이라 부른 것을 피해간다. 그러므로 인위적 생산 일부는 (오직 일부만) 그 자연적 기반을 초월한다; 그리고 이는 물론 우리가 주로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사회적, 자연적 조건의 소외이다. 맑스는 "생기있고 활동적인 인류와, 인간의 자연과의 신진대사적 교환 및 그 결과 나타나는 설명이 필요하거나 역사적 과정의 결과인 자연의 전유라는 자연적·비유기적 조건의 통합(unity)이 아니라 이러한 인간존재의 비유기적 조건과 활동적인 존재 사이의 분리 즉, 임노동과 자본의 관계 속에만 온전히 자리잡고 있는 분리"주6)라고 기록하고 있다. 버켓의 주장대로 맑스가 일면적 "자연주의자"이거나 일면적 "사회구성주의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일반 개념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처방은 철저하게 자연과 (자연의 일부로 남아있는) 인간사회 간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에 관계된다. 인간의 자유와 자기창조는 실재이지만 특정 둘레, 자연조건과 자연법칙의 도전이라는 테두리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이러한 실재관은 맑스의 자본주의 사회 비판을 지배했을 뿐더러 미래의 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에 대한 맑스의 이해를 설명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버켓은 주장한다.
이 모든 통찰에도 불구하고 버켓의 책 1부는 난해하다. 이는 여기서 다루어지는 쟁점에 관한 논의가 워낙 복잡할 뿐 아니라 추상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여기서 버켓은 (맑스의 방법을 따라) 생산을 그 역사적인 형태와 분리시켜, 그리고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맑스의 비판과도 분리시켜 일반적인 수준에서 다룬다. 그러므로 자연과 자본주의에 대한 내용과 맑스의 생태적 가치분석에 대한 내용을 2부에서 다루게 된다. 버켓 자신만의 새로운 맑스 해석이 들어있는 2부는 이 책의 핵심이다--공산주의에 대한 맑스의 이상에 대한 논의가 담긴 3부가 2부를 통해 도출되는 것이다. 2부에서 버켓의 책은 읽기가 조금 수월해지는데 맑스의 가치분석 및 사회관계로서의 자본 비판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는 역사적으로 보다 특수한 것들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2부는 토지와 노동자의 분리와 같이 노동자들을 생산의 자연적 조건으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자본주의를 (특히 산업자본주의)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시초축적(primitive accumulation)은 그러므로 노동의 소외 및 자연의 소외 증가를 의미한다--맑스가 1844년 일찌기 깨달은 것처럼 버켓은 맑스의 정치생태학에 대한 비판에서 핵심 쟁점이 되어 왔던 내용, 즉 자연은 자연을 생산하기 위해 투입된 노동일이 전혀 없기 때문에 자본은 자연을 가치가 결여된 존재로 취급한다는 사실 같은 자본주의 하에서 자연의 "무상 전유"의 문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다룬다. 수많은 사상가들이 맑스와 노동가치이론을 자연의 내재적 가치나 자연의 저하에 따른 실질적인 사회적 비용을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맑스의 생태적 가치분석은 이 점에서 다른 모든 것들을 능가하는 데, 자본은 체계 속에서 자연이 생산한 것을 "자연이 준 공짜 선물"로 이해해왔음과 동시에 자본이 자연의 사용가치를 다루는 방식을 통해 자연이 부의 창출에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며 또한 궁극적인 부의 원천임을 드러내고 있음을 맑스의 분석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왕이면 독점적 임차에 근거한 화폐가치로서의 자연의 가치를 부정하는) 자본주의는 체계적으로 부에 대한 자연의 기여를 평가절하하고 생태적 문제를 점점 키우는 것이다.
버켓의 접근이 지니는 힘은 맑스가 고전경제학의 노동가치이론의 옹호자였을 뿐 아니라 반대자이기도 했다는 점을--이 때 맑스가 자본주의 하에서 어떤 다른 가치법칙을 정식화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자본의 자치법칙 자체를 극복하는 방안을 추구했다는 의미에서--인식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분석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주요 모순 자체를 드러내기 때문으로 인식함으로써 맑스는 가치법칙이 작용하게 하는 협소한 기준을 정확히 지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버켓은 맑스에 대한 자신의 주해를 통해 자본주의의 생태위기가 두가지 형식을 취한다고 설명한다: "(1) 자본축적의 위기, 자본의 물적 필요와 원료생산의 자연조건 사이의 불균형에 기인; (2) 인간-사회발전의 질적인 면에 찾아오는 보다 일반적인 위기, 도시와 시골이라는 자본주의적 산업분할에서 기인하는 물질과 생명력의 순환 방해에서 기인"(107). 두가지 위기 중 첫 번째 위기는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상품의 흐름을 증가시키고 그 결과 물질과 에너지 처리량도 증가시키는 자본의 경향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다. 이 때 노동력은 경제성을 보다 강화시킨 방식으로 투입된다. "생산성 증대는 추상노동의 각 시간이 이제 보다 많은 양의 사용가치와 물적 필요조건을 처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110). 이 경향은 생산과정에 투입하기 위해 필요한 물질과 에너지의 사용가능성에 일시적인 문제를 발생시켜 자본주의 내에 보존문제를 일으키지만, 이 체계의 운동법칙은 보존에 대한 진정한 생태적 접근을 반대한다.
보다 핵심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맑스를 분석함에 있어 에 더 중요한 것은 산업자본주의 하에서 도시와 시골의 분리가 가져오는 생태적 모순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이해)로부터 도출되는 생태적 비판이다. 맑스는 토양영양순환의 파괴--토양파괴와 도시의 오염에서 분명히 드러나는--에 기인하는 인간사회와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의 불균형에 대한 분석을 제시했다. 버켓은 맑스가 생태문제를 농업(시골)에만 관련해 다루며 산업(도시)에 관련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는 사람들에 논박하기 위해 생태위기에 대한 맑스의 변증법적 이해를 강조한다.주7) 이러한 원인으로부터 환경위기가 도출된다는 맑스의 인식은 "환경적 측면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비판은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에 반복되는 주제"라는 버켓의 주장에 근거를 제공해준다(126).
"자연과 공산주의"에 관한 3부에서 버켓은 자신이 맑스의 생태 분석의 "프로메테우스주의적 해석"이라 부른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논박한다. 버켓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역사와 자연과 인간의 관계의 문제를 단순한 생산성과 풍요를 통해--즉, 양화를 통해 해결한다고 해석한다고 한다. 예를들면 알렉 노브는 Alec Nove 자본주의가 맑스의 관점에 나타난 풍요의 세계를 예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산의 문제는 '해결되어' 왔고" 미래에 나타날 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는 "부족한 자원의 분배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생태적으로 민감한 사회주의는 맑스에게서 등장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 노브의 주장이다.주8) 그러나 맑스가 생산의 양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능력을 부정했을 뿐 아니라 (예를들면 그는 자본주의는 농업생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질적 문제도--인간노동 뿐 아니라 자연의 소외에 근거한 사회 즉,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의 불균형--크게 강조했다는 사실은 기억해둘만한 가치가 있다(164). 물론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은 인간 공동체의 소외와 자연과 인간의 관계의 소외라는 이중적인 소외와--협소한 착취적 형태를 통한 생산과 부의 창출의 발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버켓은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맑스 사상의 생태적 측면(과 여기서 맑스의 생태적 가치분석이라고 언급되는 내용에 특별히) 초점을 맞춤으로써 버켓은--광범위한 자연에 대한 몇 안되는 정당한 분석 중 하나인--공산주의에 대한 맑스의 이상에 대한 진정하며 심도깊은 해석의 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맑스의 이상에 대한 과거의 해석들은 일반적으로 순수한 양적 문제에 과도하게 경도되었다. 그러나 버켓은 그와 같은 변환이 필연적으로 연계되는 사회적, 생태적 신진대사 전체에 질적 혁명에 대해 묘사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여러 사상가들이 사회주의혁명을 임박한 것으로 보았던 맑스가 그러한 변환을 야기하고/동인이 되는 생태적 모순에는 직접적인 강조점을 상대적으로 적게 두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의해 오도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므로 환경에 대한 고려는 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를 구성하는 데 필수가 아니라고 가정된다(129; 199). 그러나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혁명과는 별도인 사회주의 구성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할 때 맑스는 항상 생태적 요소에 관심을 가졌고 인간 자유 및 공동체의 필요와 지속가능성의 원리를 조화시키도록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규제할 필요성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므로 맑스에세 공산주의의 구성은 버켓의 말대로--사적 재산의 통치 하에서 가정되는 왜곡된 형태와 전혀 별개인--"자연의 진정한 사회화를 위한 투쟁"이었다(214).
맑스는 [정치경제학비판요강]에서 Grundrisse 자연(혹은 토양)은 본래 "생산의 직접적인 원천"으로 자신을 드러낸다고 논의한다. 자본주의는 이 본래적 통일을 파괴하여 자연과 생산에 필요한 매개자로 (비록 소외된 형태이지만)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이 가진 풍요로운 가능성을 자유롭게 발전시키고 자연과의 그 본질적 통일성을 높은 수준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생산의 사회화가 필수적이다: "진정한 사회 공동체"의 발전이 필요하다. 버켓의 맺음말을 보자.

 

                만일 사람들이 자연적 존재로서 발전하고자 한다면 사람들은 반드시

                사회적 존재로 더 발전해야만 하며 생산의 자연적 조건의 명백한 사회화를

                성취해야만 한다. 우리는 자연적 필요를 극복할 수 없다--우리는 자연을

                정복할 수 없다; 그러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이고 무매개적인

                자연으로 도피함으로써 인위적 생산의 의식적, 사회적, 누적적 특징을

                무시해서도 안된다. 인위적 생산의 발전은 그 자체로의 자연에 의해 더이상

                선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 조직의 통제자가 되어야만 한다(257).

 

버켓이 볼 때 맑스의 생태적 가치분석의 중요성은 하나의 모순의 두 차원인 자연의 소외, 인위적 생산의 소외라는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사회 자체의 혁명적 변환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을 밝혀낸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자연과 사회의 변증법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 맑스의 저작에 대한 어떤 분석도 단견적이고 불완전한 것이다--맑스주의라기보다는 부르주아 문명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치경제적 헤게모니의 이상으로 특징되는 기계적 프로메테우스주의일 뿐이다.        [추선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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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hn Bellamy Foster, "Marx's Ecological Value Analysis", Monthly Review vol. 50, no. 2, September 2000.

원문 http://www.monthlyreview.org/900jbf.htm

BOOK REVIEW
Paul Burkett, Marx and Nature: A Red and Green Perspective (New York: St. Martin's Press, 1999), 312 pp., $45, hardcover

***  존 벨라미 포스터는(John Bellamy Foster) Monthly Review Press에서 출판된 책 [맑스의 생태학: 유물론과 자연] 및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국역-김현구 옮김, 현실문화연구, 2001]의 Marx's Ecology: Materialism and Nature and The Vulnerable Planet 저자이다.



원주

 

1) Leszek Kolakowski, Main Currents of Marx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78), pp. 412-414.

2) Anthony Giddens, A Contemporary Critique of Historical Materialism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1), pp. 59-60[국역-최병두 옮김, [사적 유물론의 현대적 비판], 나남출판, 1991]; Ted Benton, “Marxism and Natural Limits,” New Left Review, no. 178 (November-December 1989, p. 82[국역-추선영 옮김, "맑스주의와 자연의 한계-생태주의적 비판과 재구성", 읽을꺼리 6호, 2000]; Reiner Grundmann, Marxism and Ecolog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p. 52[국역-박만준, 박준건 옮김, [마르크스주의와 생태학], 동녘, 1995]; Michael Löwy, “For a Critical Marxism,” Against the Current, vol. 12, no. 5 (November-December 1997), pp. 33-34.

3) 로마제국 시대에 그리고 맑스가 이해한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기술에 대한 강조라기보다는 계몽주의 및 종교비판과 보다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즉, 일반적인 혁명의식의 발전과 관련된 것이다). Walt Sheasby, “Anti-Prometheus, Post-Marx: The Real and the Myth in Green Theory,” Organization & Environment, vol. 12, no. 1 (March 1999), pp. 5-44 를 참고하라.

4) John Bellamy Foster, “Malthus' Essay on Population at Age 200,” Monthly Review, vol. 50, no. 7 (December 1998), pp. 1-18 and Marx's Ecology: Materialism and Nature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2000), chapter 3을 참고하라.

5) Karl Marx, Capital, vol. 1 (New York: Vintage, 1976), pp. 389-411[국역-김수행 옮김, [자본론]I-III, 비봉출판사, 1989], and “Peuchet on Suicide,” in Eric A. Plaut and Kevin Anderson, eds., Marx on Suicide (Evanston, IL: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9), pp. 45, 53-54, 57-58. See also the excellent introductory essay by Kevin Anderson.

6) Karl Marx, Grundrisse (New York: Vintage, 1973), p. 489[국역-김호균 옮김, [정치경제학비판요강], 백의, 2000].

7) John Bellamy Foster, “Marx's Theory of Metabolic Rift: Classical Foundations for Environmental Sociology,”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vol. 105, no. 2 (September 1999), pp. 366-405, and Marx's Ecology, chapter 5를 참고하라.

8) Alec Nove, “Socialism,” in John Eatwell, Murray Milgate, and Peter Newman, eds., The New Palgrave Dictionary of Economics, vol. 4 (New York: Stockton, 1987), p. 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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