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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정세 분석을 위하여

미합중국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반대로 시작된 지금의 정국이 어디로 발전할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다. 촛불집회와 시위만으로 보면 상황이 더 진전될 기미는 별로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노조와 같은 조직적 세력들의 참여 측면, 조선 따위의 극우신문 광고주 압박 운동과 한국방송 지키기 운동 따위로 쟁점이 계속 확대되는 점 등은 최근 2주 사이 변화된 모습이다. 촛불집회에 온갖 깃발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주목할 변화라면 변화다. (지난번 글에서 운동단체들이 깃발과 조끼를 벗고 집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쓴 것이 오류가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부분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지적이지만, 깃발의 의미 차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깃발을 내리라는 것은 어떤 권위에 의존하거나 권위를 드러내려는 의도를 버리자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국면에서 이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것은 정세를 제대로 분석하는 일이다. 정세 분석하자고 하면, 행동 능력 없는 좌파들이 그럴듯한 말만 늘어놓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세 분석이 없이는, 앞으로 무엇을 할지 결정할 수 없다. 정세 분석은 전술과 전략을 세우는 데 아주 중요한 것이다.

‘촛불 집회, 시위 정국’이 길어지면서, 이런 저런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어떤 이가 정리한 것을 보니, 이명박 이후를 논의할 ‘진보진영 협의체’를 만들자는 주장, ‘제헌’이 필요하다는 주장, ‘제헌’에 앞서 주민소환제를 실시하자는 주장 따위가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노조가 총파업을 벌임으로써 전선을 한층 확대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모두 나름대로 의미있는 주장들일 수도 있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과연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제대로 정세를 분석하고 하는 소리인가 하는 의구심이다. 객관적인 정세 분석이 없는 당위적인 주장은 심각한 해악을 끼친다.

위에 거론한 주장들은 공통적으로 지금의 시위 대중이 ‘진보적’ 또는 ‘급진적’이라고 보는 듯 하다. 이명박 퇴진을 전제로 한 이후 체제 논의로 옮겨가도, 제헌 목소리를 높여도, 노조가 총파업을 벌여도, 시위 대중이 강하게 호응할 것이라고 전제하지 않으면 현실성이 없는 주장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정말 그렇다면 문제가 전혀 없겠지만, 아니라면 정세에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정세를 너무 앞서가는 주장은 현실에 유효한 도움을 주지 못하고 기껏 자기만족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제대로 된 정세 분석이 필요한데, 그 이전에 짚고 넘어갈 일들이 있다.

1. 대중은 진보적인가?

나는 촛불집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온갖 목소리를 쏟아내는 장면이 착시 현상을 일으키기 쉽다고 본다. 그들이 굉장히 급진적이고 진보적이라는 착각 말이다. 대중은 현재 단지 미합중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에만 공명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보험 민영화, 물 산업 민영화 따위의 민영화(사유화) 반대 목소리에도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게다가 극우신문들의 해악을 깨닫고 공영방송의 중요성까지 인식하기 시작했으니, 놀라움을 넘어 감탄과 희망에 빠져 바라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몇달 전까지는 보수화로 치닫던 사람들이 어떻게 갑자기 진보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가? 대통령 선거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는 논외로 하더라도, 얼마전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승리를 그저 ‘낮은 투표율’ 탓으로 돌리고 말 수는 없다. 한국 사회가 보수화하고 있다는 것은 그저 표면만 본 착각에 불과했단 말인가? 이런 질문에 설득력 있게 답하지 못한다면, 현재 대중이 진보적이라는 생각은 기각되어야 마땅하다.

그럼 지금의 이 모습이 진보적, 급진적인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현재의 모습은 첫째 모든 권위의 거부이다. 이 거부는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고 적어도 2000년 이후 한국 사회를 가장 확실하게 특징짓는 현상인 ‘불신’이 계속 쌓이다가, ‘기존 정치 일반의 무능’, 특히 ‘나의 생존과 안전에 대한 위협’에조차 반응하지 못하는 ‘정치의 총체적인 무능’에 대한 폭발적인 분노로 터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한국의 시민들은 ‘지배층의 부도덕’(땅투기, 병역 기피, 학력 위조, 거짓말)부터 ‘경제 침체’로 대표되는 ‘무능력’에 이르기까지 가지가지로 질리다 못해, 이제 그들의 부도덕과 무능 때문에 ‘생명의 안전’까지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쇠고기 이외의 문제들 가운데 건강보험 민영화 문제가 가장 먼저 부각되고 대중의 큰 호응을 얻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긴밀하게 얽히는 문제다. 물 문제, 전기 문제도 이와 비슷하게 생존과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피부에 와닿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대중의 급진성은 딱 여기까지다.

2. 대중은 국가에 무엇을 요구하는가?

대중의 급진성을 따지려면, 그들이 국가를 어떻게 보는지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60년동안 한반도 남쪽에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파들에게 국가는 곧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정부였고, 좌파들에게 국가는 ‘폭력적인 억압 기구’일 뿐이었다. 이렇게 국가가 없으니, 시민도 없었다. 우파나 좌파나 모두 ‘민족’에 집착한 것은 이 때문이다. 국가와 국가를 구성하는 시민을 민족이 대체했고, 그래서 이 ‘민족’은 보수적이고 진보적인(또는 저항적인) 두가지 성격을 동시에 지녔다.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이 땅에도 ‘국가’ 개념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는데, 그건 ‘시민’의 발견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한국’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됐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 대신 ‘대한민국’이라는 호칭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내세울만한 나라다. 정보통신 강국, 세계 10권에 육박하는 경제 대국이다. 게다가 이런 경제력은 월드컵 축구 4강, 박세리를 중심으로 한 골프 강국,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박태환과 김연아로 대표되는 수영과 피겨스케이팅의 성과까지 가져다줬다. 가짜로 귀결되고 말았지만 황우석도 있었고, 할리우드와 겨루겠다는 심형래도 빼놓을 수 없다.

반면에 정치 현실은 이런 자부심에 전혀 걸맞지 않았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걸맞은 정치를 보여주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외교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다. 효순-미선 사건에 뒤늦게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해 거리로 나온 것도 바로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걸맞지 않은 ‘굴욕적 대미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반미라기보다, 이제 우리도 ‘미국’에 좀더 당당해지고 싶다는 의지의 표시다.

그런데 이런 대중의 요구와 기존의 국가관은 어울리지 않는다. ‘자랑스런 대한민국’은 ‘무능한 정부’로 대표될 수 없고, ‘폭력적 억압 기구’의 틀 안에 가둬둘 수도 없는 개념이다. 이런 불일치가 해소되지 않고 지속되는 가운데 ‘국민의 생명’을 아랑곳하지 않는 ‘굴욕적 쇠고기 협상’이 터져나왔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은 ‘국가’를 다시 구성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경제 강국은 ‘삼성’으로 대표되는 기업이 이뤄냈고, 세계에 내세울 스포츠 강국은 ‘박태환’과 ‘김연아’가 이뤄냈다면, 정치(또는 민주주의)와 외교는 누가 맡을 것인가? ‘우리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구호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날로 커져가고 있는 ‘기존 권위에 대한 거부’도 ‘국가의 재구성’을 부추기고 있다. 그동안 꾸준히 자라오던 ‘시민’이 불려나올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인들은 진정 근대적 의미에서의 ‘국민국가’와 ‘시민’에 눈을 뜨고 있다. 그리고 이 ‘국가’는 ‘모든 권위에 대한 거부’ 끝에 발견한 ‘해법’이다. 그 자연스런 귀결은 이 ‘국가’가 우선 광우병 쇠고기를 저지해야 하며 이어서 ‘시민’의 건강을 지켜줄 건강보험을 제공해야 하고, 물과 전기를 안정되게 공급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지속적인 경제 성장’도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계속 유지될 수 있다.

이런 결론은 다시 첫번째 질문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대중은 진보적인가? 대중은 새로운 ‘국가의 구성’을 요구하는 한에서 ‘진보적’이지만, 그 진보는 ‘국가’로 귀결되는 한에서 아주 반동적이고 권위적이며 보수적이다. 결국 이제 좌파 또는 진보 세력은 ‘탈계급적 국가주의’ 아니 ‘비계급적 국가주의’(사실 언제 한국의 사회 인식 일반이 계급적인 적이나 있나?)를 직시해야 할 때가 온 듯 하다.




트랙백(2)   덧글(11) | 잡글 | 2008년 06월 16일 13:23 | 글 주소 | 추천
'광우병 반란', 어떻게 이끌 것인가?

지금의 시위 국면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아무래도 시민의 자발성과 지도부의 지도 문제다. 이 논란은 '다함께'가 행진을 앞장서서 이끄는 데 대한 반감, 심지어는 '다함께'가 시위대를 동대문까지 이끌어 가서는 어이없게도 갑자기 해산시키려 했던 일에서 촉발됐다. 하지만 이 문제는 지금의 시위가 어디로 향해 갈 것인가라는 중차대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정세적으로 굉장히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다.

1. 사실들의 정리

1) 시위대는 아주 자발적으로 구호를 결정하고 행진을 벌이고 있다.

2) 사실상 지도부는 존재하지 않으며 '대책회의'와 이 대책회의에 속한 '다함께' 따위의 집단이 이들을 이끌어보려고 하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3) 별다른 힘이 없는 대책회의와 다함께를 빼고 어떤 단체도 조직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있다.

4) 그래서 이 시위 양상이 어디로 갈지, 어떻게 발전할지 아무도 모른다.

한마디로, 어디로 갈지, 궁극적인 목표치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시민들이 분노해서 계속 나오고 있으며 이런 흐름을 이끌거나 지도할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대중을 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직시해야 할 사실은 '지도'를 운운할 상황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런 것은 이 시위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이 시위는 모든 권위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다. 여기에는 이른바 기존의 '운동권' 거부도 포함된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대전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지도' 운운하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교과서적 원론을 운운하는 일은 골방에서는 유효할지 몰라도, 2008년 5월 한국의 심장부에서 벌어지는 이 무정부적인 분노의 폭발을 논할 때는 한낱 관념의 유희에 불과하다. (사실 '다함께'의 행태는 이와 또 다르다. 그들은 '관념의 유희'나 '관성'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이것이 그들의 생존 방식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2. 시민 자발성의 의의와 한계

이번 시위만큼 시민들의 자발성이 두드러진 사례도 별로 없는 듯 하다. 물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온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사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없이 가능한 대규모 시위와 항쟁은 없다.

그럼에도 이번 시위의 자발성이 중요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고, 전에 쓴 글에서도 계속 강조했지만, 이 시위의 핵심은 “기존 세력 모두에 대한 거부 선언”이다. 국민의 밥상이 위협받는 데도 아무 반응이 없는 정치권에 대한 거부, 거짓을 일삼고 제 살 길만 찾는 기득권층에 대한 거부, 이들을 감싸는 데만 급급한 언론에 대한 거부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 한가지는 노동조합과 운동 단체에 대한 거부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노조나 운동 단체로서는 억울할지 모르지만, 자신들이 대중으로부터 지지받지 못한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 이유가 보수언론의 거짓 공세에 물든 탓인지, 비정규직을 외면하는 등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 탓인지, 그건 지금 당장은 시급하게 따질 문제가 아니다.)

시위의 본질이 이렇게 때문에 거리의 시민들은 당연히 지도를 거부한다. '다함께'는 이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나섰다가, 29일을 기점으로 일단 후퇴한 듯 하다. 다른 운동단체들은 이 본질을 어렴풋이라도 느끼고 관망하는 듯 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무리 봐도 '개입의 지점'이 보이지 않는 것이리라. 재빠르게 개입의 지점을 파악하고 움직일 수준만 됐어도, 이 땅의 운동단체들이 무기력하고 경직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역시 현대자동차 노조만한 곳은 없다. 욕도 많이 먹지만 그들은 29일부터 조직적으로 집회에 결합했다고 한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개입의 지점'에 대해 감을 잡았다는 소리다.)

시민들의 자발성은, 이 권위에 대한 거부 때문에 더없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 땅의 모든 권위와 기득권층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 이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그들이 만약 야당이 동참할 분위기를 만들었다면 이번 싸움은 벌써 끝났을 것이다. 시위는 야당 정치인들의 공허한 발언 속에 사그라들고 정국은 곧 '여-야 영수회담' 따위의 더러운 정치 타협 국면으로 바뀌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위대 상당수는 허탈감 속에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역전의 용사들'만 끝까지 남아 '타협과 개량'을 거부하는 '메아리 없는 구호'를 외치다가 경찰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당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귀결되는 걸 한두번 본 게 아니다.

하지만 이번 시위는 이렇게 되지 않았고, '당분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당분간'에 있다. 이 양상이 얼마나 더 지속될지, 과연 어떻게 귀결될지, 너무나 불안한다. 어떤 식으로든 '지도'의 필요성이 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는 '전략'을 제시할 세력이 필요하다. 전술은 고민할 것도 아니다. 이미 대중이 확고한 전술을 만들어내 실천하고 있다. '비폭력'으로 무조건 계속 모인다는 전술 말이다. '비폭력'이 만능은 아니지만, 대중은 비폭력만이 이 국면을 이어갈 확실한 전술임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 다음 문제는 누구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3. 어떻게 이끌 것인가?

이 문제를 고민하기 전에 먼저 고민할 것은, 어떻게 시위에 조직적으로 결합할 것인가다. 상당수의 조직들이 이 시위에 조직적으로 결합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무슨 목소리를 낼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들은 그저 '광우병'에만 집착하고 있고, 미국산 쇠고기 문제의 본질적인 문제인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거나 오히려 지지하는 듯 하다. 한마디로, 운동권이 보기에 지금 시위의 요구는 너무나 부르주아적이다. 변혁적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 그건 운동단체들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느냐를 보여주는 것이다. 교육 문제, 건강보험 민영화, 물 사유화 따위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논외로 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변혁적인 상황은 없다. 모든 권위에 대한 거부만큼 더 변혁적인 움직임이 있는가?

운동단체들은 지금이라도 조직적으로 시위에 결합해야 한다. 다만 깃발은 내리고 단체 조끼는 벗고 나가라. 깃발 들고 조끼 입은 사람들은 모든 권위를 총체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당신들이 싸워온 노력과 활동을 부정하자는 소리가 아니다. 당신들이 원하는 게, 투쟁 경력을 대중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인가? 세상을 바꾸자고 싸웠지, 싸운 경력을 인정받자고 싸웠나? 당신들은 운동 경력 내세워 금뱃지 달고 기껏 민주화운동 보상금에 연연하는 '386'들을 그토록 경멸하지 않았던가?

두려워 할 것은 없다. 지금 할 일은, 모든 권위에 대한 총체적 거부에 동참하는 것이다. 여기에 동참함으로써 대중들의 신뢰를 얻고, 운동단체들이 또 하나의 권력, 또 하나의 권위가 아님을 증명해보여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씩, 하나씩, 민주적으로 설득하고 호소해야 한다. 그렇게 대중의 동의와 승인을 받아야 '지도'가 가능하다. '지도'는 '지도받을' 대상이 인정하지 않는 한 가능하지 않다. 똑똑한 척 한다고, 책 좀 읽었다고, 시위 좀 했다고, 지도부의 권위를 인정해줄 사람은 이제 한국 땅에 단 한명도 없다.

나는 운동단체들을 걱정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이 결정적인 국면을 또 다시 그냥 보낸다면, 이 땅의 희망은 사라진다.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을 찾아주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겸손한 자세로 나서야 한다.




트랙백(2)   덧글(30) | 잡글 | 2008년 05월 30일 22:03 | 글 주소 |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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