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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경제-이념'에 해당되는 글 27건

  1. 2010/10/22 이글턴의 윤리적 실패
  2. 2008/03/26 식민주의론에서 마르크스 내쫓기
  3. 2005/11/21 독일 노동운동 살아남을까? (1)
  4. 2005/07/19 사회주의 여성주의란 무엇인가? (8)
  5. 2004/07/19 먼슬리 리뷰 50년으로 본 미국 좌파 역사
  6. 2004/07/19 “마이크로소프트에 재갈을 물리자”
  7. 2004/07/19 기업감시의 촘스키 교수 인터뷰: 마이크로소프트 독점논쟁의 본질
  8. 2004/07/19 분열하는 노동자의 살길은?
  9. 2004/07/19 캐나다의 커지는 빈부 격차
  10. 2004/07/19 러시아 경제가 망가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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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턴의 윤리적 실패

요즘 테리 이글턴의 책들이 잇따라 국내에 번역되고, 얼마전에는 그가 직접 와서 강연회도 열었다. 이 덕분에 이글턴에 대한 관심이 다시 한번 일었다. 이런 때에 마침 이글턴을 비판하는 글을 하나 봤다. 글쓴이는 롤런드 보어(Roland Boer)라고 이 블로그에 한번 등장한 적 있는 신학자다. (식민주의론에서 마르크스 내쫓기 참고.)

 

아래 번역문은 그가 아메리카의 정통 좌파 잡지 <먼슬리 리뷰>가 만드는 웹진 ‘엠알진’을 통해 발표한 이글턴 비판 글이다. 비록 정규 <먼슬리 리뷰>는 아니지만 이쪽 계열 사람들이 다른 이도 아닌 이글턴 비판 글을 실어줬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이를 계기로 보어에게 ‘신진 정통 좌파 학자’라는 딱지를 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보어의 비판이 적절하냐 여부를 떠나서, 최근 이글턴의 사상적 바탕을 간략하게 요약한 글이라는 측면에서 한번 읽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번 번역은 꽤나 오래 쉬었던 번역 작업 재개를 위한 ‘준비 운동’쯤의 의미가 있다.)

 

테리 이글턴의 윤리적 실패

롤런드 보어

 

테리 이글턴이 얼마전 한쪽으로 치우친 책 <낯선 이들과 섞여 겪는 곤란함>을(1) 내놓음으로써, 좌파들이 윤리에 대해 의견을 내는 급물살 같은 흐름에 합류했다. 그가 요즘 다시 가톨릭 좌파세력의 비상근 신학이론가 구실을 하고 있기에 기대하게 되는 것에 충분히 부합할 만큼 그의 주장은 직설적이다. 기독교 신학과 사회주의가 인간의 타락 그리고 지축을 흔드는 갱생에 대해 훨씬 더 심오한 감각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결국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의 요점 아닌가? 이 이야기는 전혀 사심없이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고 이해해야 하는 의무, 자신과 같은 처지의 남자와 여자들에 대한 의무가 무엇인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게 한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주장을 그한테서 기대하는가? 2000년 이후 내놓은 대부분의 책에서(2) 이글턴은 거의 변함없는 주장,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통적인 가톨릭 신학 형태를 변형해 제시했다. 그것은 ## 세상을 창조할 필요가 없음에도 사랑 때문에 창조한 (그래서 존재하기 위해 창조에 의존할 필요라곤 없는) 신의 고유한 본성, ## 본래부터 사악하며 겉보기엔 극복되지 않을 것 같은 힘들(자본주의, 이기심, 파괴, 유혈 참사, 잔인함 그리고 사람들이 지닌 것)에 대해 형이상학적으로 대처함에 있어서 나타나는 단순하고 본래적인 미덕의 힘, ## 이기심을 버리고 거저 주는 과정이란 성격을 띤 윤리와 사랑의 핵심적 구실, ## 용서, 특히 정치적 용서의 필요성 ## 진정한 희망, 특히 아나윔(가난하고 억압받으며 짓밟히는 이들)을 통해서 얻는 희망이자 그들을 위한 희망이 어떤 구실을 하는지 등 5가지다. 그런데 ‘아나윔’은 이글턴이 아는 유일한 히브리어 단어인 듯 하며, 그의 초창기 신학 저작에 묻어 뒀다가 다시 들고 나온 단어인데, 미리 예상할 수 있을 만큼 규칙적으로 최근 그의 저작 곳곳에 등장한다.(3) 이 모든 주제를 통틀어서, 윤리는 그의 신학의 핵심 특징으로 규칙적인 소리를 낸다. 그의 저작을 하나씩 차례로 넘길 때마다, 그가 이 간략한 신학을 마치 의식을 치르듯 거듭 변호하는 걸 보게 된다. 종종 토마스 아퀴나스와 이글턴의 정신적 지도자 허버트 매케이브를 거론하면서 말이다.(4)

 

말년의 이글턴은 다리 셋달린 발판에 정착했다. 마르크스주의, 라캉의 정신분석 그리고 신학이 각각 그에게 인간 타락의 깊이와 그 타락을 극복할 가능성에 대해 거의 똑같은 이야기를 제시해주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분석이 타락 상태를 훌륭하게 묘사하게 해준다면,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약간 숨이 찰 정도로 나란히 붙어다니면서) 사뭇 최선의 해법을 제시한다. 이런 삼각측량법은 <낯선 이들과 섞여 겪는 곤란함>에서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제계를 기준점으로 선택한 이유를 해명해준다. 처음엔 윤리에 관한 꽤나 통상적인 주장을 꾸미는 겉치레로 보였으나, 결국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이 드러났다는 이야기다. 이 책의 뒷부분에 이르면, 이 기준점은 확실히 매끈해 보이지 않는다. 이글턴이 이것을 구부리고 잡아늘리고 하면서 훨씬 더 윤리적인 주장에 끼워맞추려 애쓰는 데서 이 매끄럽지 못함이 드러난다. 셰익스피어를 상징계에 가져다 맞추고 키르케고르의 미학, 윤리, 종교를 각각 상상계, 상징계, 실제계에 꿰맞추고, 남는 것들은 마지막에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칸트까지 한꺼번에 뭉쳐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세가지 범주를 활용하는 데는 함정이 있다. 특히 이글턴처럼 활용하면 더 그렇다. 점진적 발전 형식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글턴은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제계를 변증법적으로 읽는다고 지적하긴 했지만, 여전히 각각을 아이 성장의 각 단계들로 본다. 부르주아 성쇠의 비뚤어진 역사적 서사인 것이다. 아니면 마지막엔 말할 것 없이 기독교가 비책으로 등장하는 진보적인 서사 구조로 여긴다고 할 수도 있다. 그 결과는 명백하다. 상상계는 거울상 단계에 매여있는 미성숙한 형태이고 이 범주에 해당하는 윤리는 자기 자아에 집중하는 것이다. 상징계는 자아와 타자의 협상을 통해 한발짝 나아간 단계이지만 이 또한 실제계의 끔찍한 장소에는 못미친다. 실제계는 우리를 계속 나아가게 하지만 언제라도 우리의 세계를 파괴할 위험이 있는, 정신적 외상을 초래할만큼 충격적이며 딱히 표현할 길이 없는 알맹이이다. 이 지점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기독교의 죄악론에 도달하는데, 이는 신학적 해결책의 발판이며 동시에 착취당하고 소외된 인간 상황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깊은 비관이 제 자리를 찾는 계기다. 이글턴의 표현대로 하자면 라캉의 실제계는 “원죄의 정신분석적 변형”(5)이다. 그렇게 정신분석은 우리를 타락하고 죄많은 우리의 상황으로 이끌어 가며, 거기서 우리에겐 신학과 마르크스주의가 필요하다. 이제 문제는 이글턴이 폭넓은 분석을 제시하지 않은 채 마르크스주의가 유대·기독교 사상이라는 우물에서 한껏 물을 마신다고 기정사실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윤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정신적 외상을 가져올만큼 충격적이고 끔찍한 실제계를 고려할 때 윤리의 어떤 돌파구, 깊고 철저한 변환이 있는가? 라캉의 구조를 취해야 한다면 끝까지 가도록 하자. 예수의 죽음이라는 수난 서사가 그 짐승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해주는가? 전환의 서사, 궁극적인 정신분석적 치료를 제공하는가? “주여, 주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버림받음에 절망하는 부르짖음 속에서, 이 서사가 우리를 실제계를 거쳐 지나가도록 이끄는가? 우리는 마침내 상상계에서 나타나는 자기 문제에 대한 시름을 털어내고, 상징계에서 나타나는 사람 사이의 집착 또한 넘어서서, 최우선적인 윤리 욕구가 우리로 하여금 같은 처지의 남자, 여자와 사이좋은 관계를 맺도록 돕는 그 순간에 도달하는가?

 

간단히 답하면 아니다. 이글턴은 답을 주지 않는다는 얘기다. 우리가 찾게 되는 건 고작 사심없는 선함과 미덕을 기분 좋게 보는 것뿐이다. 예수는 착해지고 그에 대한 어떤 대가도 기대하지 않음으로써 죽음과 절망을 극복한다. 삽을 이웃에게 빌려주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식이다. 이글턴을 따르자면, 기독교 신학은 악의 깊이를 실제로 극복할 수 있는 단순하고 선입견 없는 미덕들 몇가지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글턴은 자신이 진정한 ‘형이상학’을 회복하려 한다는 걸 회피하지 않고 인정한다.) 친절함, 사랑, 정의, 겸손, 겸양, 온화함, 전망, 용기, 헌신, 사심없음, 인내심, 이 모두와 기타 등등이 아주 이원론적으로 나뉜 우주에서 악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거듭 거듭 불려나와 정렬한다. 그러나 역시 최고의 미덕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옷을 벗어 제치고 수도관을 연결해주려는 원기 왕성한 욕구가 아니라, 냉담하고 조건 없으며 비인격적인 데다가 특히 적과 낯선 사람에 대한 사랑 속에 제 기준점을 설정한 공적·정치적 사랑의 법칙으로 이글턴은 간주한다. 이글턴에게 이는 윤리학, 아무런 대가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낯선 사람들’을 돌보는 이기심없고 사심없는 의무감의 핵심을 이룬다. 우리도 이집트(애굽)에서 낯선 사람들(이방인)이었기에 우리 중에 있는 낯선 사람들한테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성경의 명령이 이글턴의 글에서 반향을 일으키며 이어지지만(7), 그가 가는 길은 영원한 전쟁 상태에 있는 사회에 뿌리를 박은, 레비나스의 피가 흐르는 육체와 분리된 윤리학과는 다르다. 결국 윤리학은 윤리적 행위로서 예수의 십자가에서 볼 수 있는, 기독교 가르침의 핵심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 윤리학이 결국 신경쓰는 것은 바로 그 타인이며, 그들은 우리가 사심없는 사랑, 악을 극복할 진부한 선함을 보여줘야 할 대상이다.

 

신경쇠약은 별개로 하고, 이글턴은 끝을 잘라낸 신학과 팔다리 자른 사회주의를 제시한다. 윤리학은 종교계 좌파, 더 정확히 말하자면 훨씬 더 영적인 좌파의 삶의 규칙에 지나지 않는 게 된다.(8) 결국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자는 규칙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공교롭게도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공통으로 제기하는 이런 지침을 따르면, 구원의 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글턴은 19세기에 흔히 공유하던 진부한, 아니 진정으로 열심히 몰두하던 주장에 빠지고 만다. 사회의 도덕 규칙은 오직 기독교 신학에 뿌리를 둘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성직자에 반대하는 항위 시위대와 세속적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사회 운동 무리가 점점 불어나는 걸 걱정스럽게 지켜보면서, 교회와 정치 지도자들은 기독교가 무너지면 사회 통합의 도덕도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의 사랑과 죽음과 부활에 바탕을 둔 좀더 급진적인 윤리학을 선포하는 한에서 이글턴은 이와 거의 똑같은 주장을 편다.(이는 우연의 일치겠지만 보수적인 무슬림들도 공유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공허한 소비주의가 영향력을 얻으면서 가치가 구석으로 밀려났다고 이글턴은 주장한다. 더는 강력한 형이상학적 틀이 존재하지 않고 윤리는 황야에서 떠도는, 목마르고 굶주리는 이들한테만 남는 문제가 됐다. 해법은 이제 기독교의 가르침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이글턴의 초기 가톨릭 좌파 시절을 전적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2000년 이후 이글턴의 글에서 노골적으로 나타난 신학적 어조는 점점 더 커졌으며, 그 결과 이제 이글턴은 예수의 육체적 부활(그렇지 않으면 메시지가 무의미해진다), 예수 부활의 힘과 신의 본성, 그리고 아주 최근까지 드러내지 않던 주제인, 희생 제물과 성체 성사의 사랑의 식사가 하나로 일치함을 공개적으로 거론한다. 이는, 타인을 위해 목숨을 내어줄 위대한 기회를 놓쳤을 때, 이 자기희생을 적절히 대체해주는 것이다. 게다가 이는 성체 성사의 가치를 논하곤 하던 옛날 이글턴이 토해내던 것이기도 하다. 빠진 게 있다면 딱 하나, 사제가 레닌식 전위가 될 수 있다는 낡은 주장뿐이다.(10) 캔터베리 대주교가 그의 글을 수긍하며 읽는 게 하나도 놀랍지 않다.

 

주석

(1) 테리 이글턴, Trouble with Strangers: A Study of Ethics (Oxford: Wiley-Blackwell, 2009).  (아마도 자신이 때때로 글을 읽는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나온 걸로 짐작되는) 많은 인용과 해설로 가득한 이 책은 프랜시스 허치슨,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 애덤 스미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키르케고르의 작품을 포함한 묘한 책이다.

 

(2) 이글턴, The Gatekeeper: A Memoir (London: Penguin, 2001); 이글턴, Figures of Dissent: Critical Essays on Fish, Spivak, Zizek and Others (London: Verso, 2003); 이글턴, Sweet Violence: The Idea of the Tragic (Oxford: Blackwells, 2003); 이글턴, After Theory (New York: Basic Books, 2003); 이글턴, Holy Terror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이글턴, "Lunging, Flailing, Mispunching," London Review of Books (2006); 이글턴, Jesus Christ: The Gospels (Revolutions) (London: Verso, 2007); 이글턴, 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9); 이글턴, Trouble with Strangers: A Study of Ethics; 이글턴과 내선 슈나이더(Nathan Schneider), "Religion for Radicals: An Interview with Terry Eagleton," MRZine 61, no. 4 (2009); 이글턴, On Evil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0). 위에 거론한 작품들에 다양한 형태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지만, 더는 주저하지 않고 이글턴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장 온전한 형태의 주장은, 이글턴, 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 5-32쪽에 나온다. 여기서 그는 (해방신학과의) 연결고리를 확인하면서도 “해방 신학… 딱지를 붙이길 꺼려” 한다.(32쪽) 더 자세한 논의는 롤런드 보어, Criticism of Heaven: On Marxism and Theology, Historical Materialism Book Series (Leiden: E. J. Brill, 2007), 275-333쪽을 보라.

 

(3) 이글턴, "The Roots of the Christian Crisis," in "Slant Manifesto": Catholics and the Left, ed. Adrian Cunningham, Terry Eagleton, Brian Wicker, Martin Redfern and Lawrence Bright OP (London: Sheed & Ward, 1966); 이글턴, The New Left Church (London: Sheed and Ward, 1966); 이글턴, "The Slant Symposium," Slant 3, no. 5 (1967): 8-9; 이글턴, "Why We Are Still in the Church," Slant 3, no. 2 (1967): 25-8; 이글턴, "Language, Reality and the Eucharist (1)," Slant 4, no. 3 (1968): 18-23; 이글턴, "Politics and the Sacred," Slant 4, no. 2 (1968): 18-23; 이글턴, "Language, Reality and the Eucharist (2)," Slant 4, no. 4 (1968): 26-31; 이글턴, "Priesthood and Leninism," Slant 5, no. 4 (1969): 12-17; 이글턴, The Body as Language: Outline of a 'New Left' Theology (London: Sheed and Ward, 1970).

 

(4) 이글턴, Trouble with Strangers: A Study of Ethics, p. vi; 이글턴, 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 pp. xi-xii; 이글턴, Holy Terror, p. vi.

 

(5) 이글턴, Figures of Dissent: Critical Essays on Fish, Spivak, Zizek and Others, p. 205.

 

(6) 같은 책, p. 120; 이글턴, Sweet Violence: The Idea of the Tragic, p. 74.

 

(7) 출애굽기 22장 21절, 23장 9절; 레위기 19장 34절; 신명기 10장 19절.

 

(8) 이글턴, Trouble with Strangers: A Study of Ethics, pp. 195-6, 272, 291-2, 323

 

(9) 이글턴, Trouble with Strangers, pp. 195-6, 272, 323. 이글턴, The New Left Church, pp. 69-84; 이글턴, The Body as Language: Outline of a 'New Left' Theology, pp. 39-40; 이글턴, "Language, Reality and the Eucharist (1)"; 이글턴, "Language, Reality and the Eucharist (2)."을 비교해보라.

 

(10) 이글턴, The Body as Language: Outline of a 'New Left' Theology, pp. 75-93.

 

롤런드 보어는 오스트레일리아 뉴캐슬대학 신학과 연구교수로 있다. 그의 블로그는 stalinsmoustache.wordpress.com이다. 롤런드 보어, "An intrinsic Eagleton" (Journal for Cultural and Religious Theory 9.2, Summer 2008)도 보라. (내려받기: www.jcrt.org/archives/09.2/boer.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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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일러두기) 그의 책 하나가 <성서와 대안좌파>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번역되어 나왔다. 이 책은 저자명을 ‘로랜드 보어’로 표기하는데, 나는 전에 ‘롤랜드 보어’로 표기한 적 있다. 하지만 ‘롤런드’가 원 발음에 가깝고 국립국어원의 외래어표기법에도 ‘롤런드’로 되어 있어 표기를 바꿨다.

 

원문: mrzine.monthlyreview.org/2010/boer220910.html

번역: 신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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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 끝난 중복 댓글 두개 삭제 완료. (보어의 블로그 댓글을 통해, 번역에 대해 본인의 사후 허락을 받다.)

이 번역에 대해 쓴 롤런드 보어의 블로그 포스트 -- 이렇게 원 저자와 연결되는 건 번역자로선 참 즐거운 일이다.

2010/10/22 17:21 2010/10/2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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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론에서 마르크스 내쫓기

우연히 식민주의이후론(탈식민주의론)의 이념적 배경을 재미있고 논쟁적이면서도 간략하게 요약한 글을 읽게 됐다. 이른바 포스트 이론들이 마르크스, 마르크스주의의 흔적을 어떻게 지워버렸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분석이어서 소개한다. 난삽하고 골치 아픈 내용들을 그냥 건너 뛰어서, 요약 정리만 하고 싶은 이들에게 딱 어울린다. (인도 출신의 학자로 유명세를 얻은 가야트리 스피박과 호미 바바를 은근히 비꼬는 부분에서는 웃음을 참기 어렵다. 스피박의 '길고 어려운' [그라마톨로지] 서문, 바바의 라캉 오독 따위를 언급하는 대목, 바바는 기껏 부르주아 작가일 뿐이라는 평가 따위가 그렇다.)

 

필자는 마르크스 이론으로 성경 분석을 시도하는 학자인 롤런드 보어(Roland Boer)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모나시 대학(Monash University)의 종교 및 신학 연구소(Centre for Studies in Religion and Theology)에 재직하고 있는 학자다. 출처는 2005년에 나온 책 [식민주의이후론(탈식민주의론)적 성경 비판: 학제적 교차점들]에 실린 보어의 글 '마르크스, 식민주의이후론(탈식민주의론), 그리고 성경'이다. (Boer, Roland. 2005. Marx, Postcolonialism, and the Bible. Stephen D. Moore and Fernando F. Segovia (eds). Postcolonial Biblical Criticism: Interdisciplinary intersections. London and New York: T&T Clark International, pp. 166-183.)

 

여기 소개하는 부분은 167쪽에서 168쪽 앞까지와 168쪽 일부, 169쪽 하반부부터 170쪽 앞부분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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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쪽에서 168쪽까지)

 

여러가지 측면에서 명백한 것을 말하자면, 마르크스 그리고 이어서 레닌은 자신들이 식민주의, 제국주의라고 여러가지 이름으로 지칭한 것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누구보다 먼저 제기했다. 마르크스가 이 길을 추적했다면 (자본주의가 살아 남으려면 유럽이라는 한계를 넘어 확장하고, 지금도 경제적 성공의 척도인 '성장'을 지속하고 계속 새로운 식민지를 점령해야만 했다는 지적.) 레닌은 자기가 살던 시점까지만 볼 때 가장 진전된 자본주의 최고 단계로서 제국주의 또는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를 특히 집중 추적했다. 레닌의 관점에서 보면, 두번의 '세계 전쟁'은 모두 전세계 지배권을 다투는 유럽 제국주의 세력들의 분쟁, 전 지구에 걸쳐서 좀더 많은 땅을 점령하려는 경쟁이 절정에 이른 투쟁이었다. 레닌 이후, 식민주의를 포함한 제국주의적 팽창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고 비판하는 작업은 마르크스주의 전통 안에서 이뤄졌다. 무어-길버트의 분류법을 따르자면, 식민주의 이후에 대한 초창기 비판을 이끈 핵심 인물들, 곧 프란츠 파농, W.E.B. 뒤 부아, C.L.R. 제임스 같은 인물들은 모두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식민주의 분석 외에, 그들의 작업에는 두가지 다른 중대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작가 자신들의 위치에서 문학과 기타 문화적 생산물들을 연구하는 작업과 정치에 뚜렷하게 개입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제임스는 크리켓이 식민주의 문화의 힘이자 동시에 반식민주의 문화의 힘으로 작용하는 데 대단히 관심이 많았을 뿐 아니라, 서인도제도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To state what is in many respects the obvious: Marx and then Lenin first developed a critical approach to what they variously called colonialism and imperialism. If Marx traced the way (capitalism for its very survival had to expand, to 'grow' - still very much the benchmark of economic success - beyond the confines of Europe and conquer ever new colonial spaces), Lenin, especially in Imperialism, or imperial capitalism, as the most advanced stage of capitalism up until that point. From a Leninist perspective, both 'World Wars' were conflicts between the European imperial powers, vying for global dominance, the struggle coming to a head in the competition for the conquest of ever more territories throughout the globe. After Lenin, the systematic theorization and critique of capitalist expansion, including colonialism, took place in the Marxist tradition. Key figures of earlier postcolonial criticism, following Moore-Gilbert’s classification, such as Frantz Fanon, W.E.B. Du Bois, and C.L.R. James, were all Marxist critics of colonialism. Apart from the analysis of colonialism, there were two other vital parts of their work: the study of literature and other cultural products from their own locations and a distinct level of political involvement. For instance, James was not only intensely interested in the role of cricket as both a colonial and anti-colonial cultural force, but he was also a central figure in the process towards independence in the West Indies.

 

내가 너무나 간략하고 두서없이 요약했지만 이런 역사를 생각할 때, 도대체 어떻게 식민주의이후(탈식민주의) 이론의 마르크스주의적 차원이 실종되고 말았을까?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다양한 핵심 측면들을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로부터 체계적으로 떼어내고 이어서 그 이론의 정치적 잠재력을 부정한, 동시 다발적인 변형 과정을 통해서 이 작업이 이뤄졌다. 이 과정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사용한 것에서 시작한다.

Given this history, which I have sketched far too briefly and haphazardly, how is it that the Marxist dimension of postcolonial theory has been lost? Through a simultaneous process of transformation that systematically detached various key aspects of Marxist theory from Marxism itself and then negated their political potential. The process began with Edward Said's use of Antonio Gramsci’s notion of hegemony.

 

 

(168쪽에서 169쪽까지)

 

식민주의 시대에, 이런 헤게모니는 이념 작업 전반에 관여했다. 곧 인종 이론부터 시작해서 군사 행동, 제국주의 중심지의 우월성을 믿는 신념의 창출을 거쳐, 사이드의 유명한 '오리엔탈리즘'에까지 이르는 전반적인 작업에 관여한 것이다. 그러나 사이드는 권력에 관한 미셸 푸코의 작업, 특히 지정된 자리이자 당연히 예상되는 자리에 머물지 않는 권력 곧 분산되고 모세관처럼 퍼져 존재하는 권력 형태에 관한 작업에 헤게모니를 문제가 많은 방식으로 연결시켰다. 이 연결 고리 곧 분산된 권력과 위협받는 헤게모니의 관계는 볼 수 있지만, 푸코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장폴 사르트르의 제자이자 정치 활동가이긴 했지만 말이다. 헤게모니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다른 범주들 곧 계급, 계급 갈등, 정치경제학의 중요한 구실 같은 것들이 결여됐고, 이는 헤게모니 개념이 의미를 확보하는 개념적 맥락에서 떨어져나와 고아처럼 떠돌게 되는 것을 뜻했다. 이렇게 식민주의이후(탈식민주의) 이론에서 마르크스의 유산이 희석되는 첫번째 작업이 이뤄졌다.

In the period of colonialism, such hegemony involved wholesale ideological work, ranging from racial theory, through military action and the production of belief in the superiority of the imperial centre to Said's well-known 'orientalism' (Said 1978). But Said linked this in problematic fashion to Michel Foucault's work on power, specifically the dispersed, capillary forms of power that never reside in the named and expected seats of power. One can see the connection - dispersed power and a threatened hegemony - but Foucault was not a Marxist, despite being a student of Jean-Paul Sartre and a political activist. The absence of other categories crucial to hegemony - such as class, class conflict, and the central role of political economies - meant that the notion of hegemony was orphaned, drifting away from the conceptual context in which it made sense. Thus, the first step in watering down the Marxist heritage in postcolonial theory was made.

 

 

(169쪽에서 170쪽까지)

 

가야트리 스피박이 비록 마르크스주의가 자신의 이론적, 정치적 위치의 일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다름 아니라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1976) 번역 작업 그리고 특히 스피박이 쓴 길고 어려운 이 번역본 서문이야말로 식민주의이후(탈식민주의) 이론으로 형성되는 복합물에 해체(주의)를 주입하는 구실을 했다. 이에 뒤 이어 스피박의 [다른 세상에서](1988)이 등장하면서, 데리다식 해체론이 사이드를 거쳐서 들어온 그람시 및 푸코와 나란히, 새로운 접근법을 벼려내기 원하는 비평가들이 취할 수 있는 이론적 맥락의 하나로 더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해체와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여성주의를 결합시키려는 스피박의 시도를 잠깐 진지하게 따져보자면, 데리다식의 마르크스는 실로 이상한 마르크스다. 데리다의 책 [마르크스의 유령들](1994)이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듯이, 이 마르크스는 중도좌파에서 약간 왼쪽으로 기운 자유주의자와 더 흡사해 보인다.

Even though Gayatri Spivak claims Marxism as part of her own theoretical and political position, it was her translation of Derrida's Of Grammatology (1976) and especially the long and difficult introduction that she wrote, which brought decontruction into the mix of what was becoming postcolonial theory. The subsequent appearance of her In Other Worlds (1988) reinforced the prominence of Derridean deconstruction, along with Gramsci and Foucault via Said, as one of the theoretical strands available for critics wanting to forge a new approach. But a Derridean Marx - taking for a moment Spivak's effort to combine deconstruction, Marxism, and feminism seriously - is a strange Marx indeed, looking more like a slightly left-of-centre liberal, as Derrida's own Specters of Marx (1994) showed only too well.

 

마르크스를 식민주의이후(탈식민주의) 이론에서 추방하는 마지막 단계는 호미 바바의 작업, 특히 그의 책 [문화의 위치](1994)와 함께 왔다. 이 책은 라캉의 정신분석을 마르크스주의를 탈색시킨 바흐친과 함께 식민주의 관련 글들을 읽는 데, 곧 인도에서의 성경 읽기부터 이빨 빠진 프란츠 파농 읽기까지의 다양한 독해에 도입했다. 비록 바바가 많은 식민주의이후론(탈식민주의론)자들의 본보기가 됐지만, 바바의 돌고 돌리는, 특이한 양식과 라캉 오독이 라캉으로 하여금 제 자신을 배반하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한 것인지, 또는 바바가 (라캉과) 다른 길들을 다루고 있는 건지 결코 확신할 수 없다. 맨처음 바바에게 매혹됐던 급진주의 비평가들 가운데 적어도 한명 이상이 경악하면서 깨닫게 됐듯이, 바바는 확고한 부르주아 작가다. 그에겐 자유주의가 유일하게 선택 가능한 이념적 위치인 것이다. (이 시기 이후 그의 예술 및 문학 비평을 보라.) 그럼에도, 바바와 함께 라캉식 정신분석과 바흐친의 변증법적 독해 전략은 식민주의이후(탈식민주의) 이론의 모순적인 잡종물을 이루는 한 부분이 됐고, 이제 헤게모니 및 해체론과 함께 흉내내기, 잡종성, 경계 넘기 같은 용어들이 식민주의적 마주침의 글들을 재해석하는 열쇠들이 됐다.

The final step in the banishment of Marx from postcolonial theory came with Homi Bhabha's work, especially The Location of Culture (1994), which introduced Lacanian psychoanalysis along with a demarxified Bakhtin into the reading of colonial texts that range from the Bible in India to a de-fanged Frantz Fanon. Although he has become a model for so many postcolonial critics, one is never sure whether the looping and idiosyncratic style and the misreadings of Lacan all designed to turn Lacan against himself, or whether Bhabha is covering other tracks. As more than one radical critic first mesmerized by Bhabha has found out to her or his dismay, Bhabha is a solid bourgeois writer for whom liberalism is the only possible ideological position (witness his later art and literary criticism). Yet, with Bhabha, Lacanian psychoanalysis and Bakhtin's dialogic reading strategy became part of the contradictory hybrid of postcolonial theory, and now, along with hegemony and deconstruction, terms such as mimicry, hybridity, and border crossing become the keys to reinterpreting the texts of colonial encounters.

 

 

번역: 신기섭

2008/03/26 07:55 2008/03/26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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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노동운동 살아남을까?

우리의 노동운동 내부에는 강력한 산별노조 체제인 독일 노동운동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 듯 합니다. 독일 노동운동은, 상급 수준에서 정치적 협상을 통해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코포라티즘(사회적 교섭주의라고 번역하는 게 적합할 듯)의 전형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독일 노동운동과 한 짝을 이루는 사민당이 우경화하면서 노조의 힘도 많이 약해졌다고 합니다. 노조의 정치적 영향력이 특히 그렇습니다. 지난 2005년 9월18일 총선에서 사민당이 기민당-기사련에게 1등을 내어주고 대연정의 하위 협력자가 된 것도 노조와 무관한 일은 아닌가 봅니다.

 

아무튼 총선 전에 쓴 글이지만 '독일의 사회적 교섭주의 노동운동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Can Germany's Corporatist Labor Movement Survive?) 라는 제목의 글을 번역했습니다. 잉고 슈미트(Ingo Schmidt)라는 독일 노조 교육가이자 경제학을 가르치는 이가 아메리카에서 나오는 <먼슬리리뷰> 2005년 9월호에 쓴 글입니다. 독일 노조운동과 사민당, 독일의 사회적 교섭주의 문제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설명하고 있는 글입니다. 그래서 독일 노동운동의 배경과 전통, 한계를 요약해서 이해하는 데 좋은 글입니다. 독일 총선 전에 쓴 것이어서 총선 결과는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 한가지는, 독일의 사회적 교섭주의 곧 정부의 적극적인 중재 아래서 노, 사, 정이 협상을 통해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은 아주 특별한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배경에서 자라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지금 같은 방식을 시도한다는 게 얼마나 가망성 없는 일인지도 느끼게 됩니다.


 

독일의 사회적 교섭주의 노동운동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Can Germany's Corporatist Labor Movement Survive?)

잉고 슈미트(Ingo Schmidt) 먼슬리리뷰 2005년 9월호 (원문 www.monthlyreview.org/0905schmidt.htm)

 

잉고 슈미트는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프린스 조지에 있는 노던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독일의 지역 노동 잡지인 <괴트링어 베트리브젝스프레스>(Goettringer Betriebsexpress)의 공동 편집인이며 아탁-독일의 과학자문위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노동 교육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옮긴이 주: 사회적 교섭주의라고 번역한 건 Corporatism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형용사형인 Corporatist가 쓰인다.) 정치학자 정병기는 코포라티즘이 “국가기구의 적극적 중재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자본주의 질서 유지를 부정하지 않는 노, 사, 정 3자의 정치적 협상과 교환이 사회갈등 해결의 핵심적 수단으로 제도화되거나 적어도 장기적, 지속적으로 기능하는 사회, 정치적 운영 원리와 과정이다.”고 정의했다. 이 말은 이 땅에 처음 소개될 땐 '조합주의'로 번역됐는데, 노동조합주의 등과 혼동의 여지가 있다는 이유로 '사회적 합의주의'라고 표현되기도 했지만 이 또한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그래서 아예 코포라티즘이라고 쓰자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는 옳은 태도가 아니다. 요즘 우리 노동운동에서 자주 쓰이는 말 가운데 '사회적 교섭주의'라는 게 있다. 전투적 노동운동을 주장하는 이들은 강하게 비판하는 반면 이를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코포라티즘에 대한 옹호론과 비판론이 존재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실제 내용도 대체로 비슷하다. 그래서 코포라티즘을 사회적 교섭주의로 번역하는 게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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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년동안 독일은 중도-좌파 연정이 지배했다. 이 정부는 1998년 선거에서, 유권자 대다수가 긴축 재정, 실업급여 및 사회보장 삭감, 임금인상 제한이 번영과 완전 고용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약속하는 보수세력에 싫증을 느낀 덕분에 구성됐다. 그렇지만, 새 정부의 정책은 이전 정부의 정책이 마치 인간의 얼굴을 한 신자유주의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사회민주당(SPD)이 이끄는 새 정부는 2차 세계대전 뒤 복지국가가 확립된 이후 가장 심하게 노동과 사회복지 기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민당은 그동안 스스로를 복지국가 확장을 추구하는 중추 세력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그들의 반노동자 행태는 지지자들을 크게 실망시켰고 자신들의 반대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런 복지국가의 해체는 지지율과 당원 숫자의 급격한 감소를 초래했고 대규모 항의 물결을 촉발했다. 하지만 정부에 도전을 제기할만한 운동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거리의 시위가 아니라 지역 선거에서 당한 일련의 완패가 결국 연방정부로 하여금 총선을 요구하게 만들었다. 이는 역설적인 상황을 촉발했다. 한편으로 기독민주당(CDU)이 일반적으로 선거에서 승리할 것으로 예상된다.(이 글은 9월18일 독일 총선 전에 발표됐다. 총선에서는 기민당-기사련이 35.2% 득표로 승리했지만 34.3%를 얻은 사민당과 차이가 거의 없어 독자 연정 구성을 못했다. 결국 기민당과 사민당의 대연정이라는 뜻밖의 타협이 이뤄졌다. : 옮긴이) 다른 한편 기민당이, 무엇보다 사민당의 몰락을 촉발한 신자유주의적 정치를 지속할 것이라는 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표면적 모순에 대한 한가지 설명은, 유권자를 동원하는 데 있어서 두 당이 지닌 서로 다른 능력에서 찾을 수 있다. 기민당은 여전히 다양한 사회 계층에게서 지지를 끌어올 수 있는 반면, 사민당은 노동자와 실업자의 지지를 잃어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과 반대일텐데, 기민당은 상류층 일변도 정당이 아니다. 이 당도 나름대로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독일에서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가 완벽하게 형성된 적은 결코 없다. 사람들이 느끼는 국제 경쟁력 향상 필요성이 널리 수긍을 얻지만, 동시에 “복지국가 취향”도 강하다. 이런 모순된 공감대는 (서부)독일의 전후 역사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으며 여전히 정치 정세에 결정적이다. 노조가 이런 공감대의 형성과 변화에 핵심 구실을 했다. 이 공감대는 수출 지향적 성장과 노동-자본에 대한 사회적 교섭주의적 중재에 대한 공감대다.

 

사민당이 신자유주의로 돌아서는 사태에 직면했을 때, 노조 내부의 한 파벌은 사민당과 연대를 지속하는 쪽을 택했다. 이들은 이것이 보수주의자들에 맞서 복지국가의 존재 자체를 방어하는 유일한 길이 될 거라고 주장했다. 이런 태도에 반대한 소수 파벌은 한층 운동 지향적인 노동조합주의를 선택했다. 몇몇 노조운동가들은 새로운 당 건설을 착수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지난 5월 연방 총선이 발표된 이후 노조 지도자들은 사민당을 차악으로 묘사하면서 다시 지지로 돌아섰다. 과거 사민당 지지자들에게 호소하는 새로운 정치적 대안 형성 노력은 계속되고 있으며, 이는 노조의 승인을 받지 못하지만 묵인되고 있다. 독일 노조가 그동안 공식 노선에서 이탈하는 걸 억압해온 점을 고려하면, 이는 개방성 확대와 조합 민주주의를 향한 일보 진전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제로는 의회 정치에서 노조의 목소리 상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노조의 정치적 중요성 하락은 자본가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굳어져온 단체교섭의 원칙들에 도전하도록 부추겼다. 아주 최근까지도 노조는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했고 반면 고용주들은 이런 요구를 억제하려 했다. 이제 고용주들은 임금 삭감과 노동시간 연장을 요구함으로써 주도권을 쥐었다. 공장 폐쇄 위협에 직면한 노조들은 일정 기간동안 일자리를 보장받는 댓가로 노동조건과 임금 저하를 종종 받아들인다. 노조의 핵심에 대한 이런 맹공격에 비하면, 이따금씩 항의시위와 캠페인에 참여하는 것은 상당히 가망없는 일 같다.

 

이런 현재 상황은 두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첫째, 지난 30년동안 지속된 복지국가의 기본 제도가 속빈 강정이 되어가는 게 결국 복지국가 폐지로 이어질까? 그리고 두번째, 사민당과 노동운동이 직면한 현재 위기는 노동 정치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열게 될까? 나는 이 두가지 질문을 검토하면서 한가지 가설을 따져볼 것이다. 이 가설은, 전후 노동과 복지국가의 역사는 고도의 제도적 연속성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장기간의 경제성장 둔화가 사회적 기준의 약화와 복지국가의 사회적 기반 붕괴를 초래했다. 사회보험과 단체교섭 같은 제도가 복지국가에 대한 지금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제도들이 체제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복지국가가 가져온 일하는 이들 다수의 사회적 통합이, 과거에는 집단적으로 생산한 부 가운데 정당한 그들의 몫이라고 이해되던 것에서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배제되는 걸로 대체될 수도 있다. 복지국가는 노동자들의 사회적 수준을 높이는 동시에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체제에 통합했던 한 묶음의 제도에서, 체제 자체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새로운 중산층의 특권을 보호하는 장치로 바뀌어갈 수 있다. 나는 또 독일 노동운동의 주류에 깊숙이 박혀있는 일종의 제도 물신 숭배가 이런 변화에 맞서는 성공적인 투쟁 앞에 가로놓인 주요 걸림돌이라고 논할 것이다.

 

노동운동과 이 운동의 주류가 한 부분으로 통합되어 있는 사회적 교섭주의 복지국가를 이해하려면, 이들 근대적 현상에 포함되어 있는 중세 봉건적 유산을 고려해야 한다. 독일의 봉건주의는 다수의 지역 군주가 장악한 탈중심적 정치 권력, 지역 군주 위의 허약한 중앙 권력, 그리고 부유하고 강력한 수공업자 조합(길드)의 발전을 허용한 중세 도시들의 독자적인 경제적 자율성을 특징으로 했다. 이 분리는 사민당과 노동조합의 업무를 엄격하게 구별하는 노동운동의 경향 속에 반영되어 있다. 노동쪽의 정치적 관심은 봉건 국가를 민주 국가로 변혁시키는 것이었고, 사민당 창당 초기에 이는 보통 '인민의 국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봉건주의의 분열된 권력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민당은 인민 대중의 통일을 추구했는데, [이 과정에서] 때로는 민주 국가의 사회적 기반으로서의 계급 구별선을 무시하기도 했다. 이런 국가의 목표는 입법을 통해 일하는 이들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고용주와 단체교섭을 벌이는 데 집중하게 됐다. 또 정치 행동을 위해 노동자들을 동원하지 않으려 했는데, 특히 정치 파업에 더욱 그랬다. 노조가 원래 중세의 수공업자 조합에서 기인했기에, 노조는 스스로를 좁게 정의된 경제적 구실에 한정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비숙련 노동자 조직화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강력한 생산중심주의 이념을 발전시켰다.

 

사민당과 노조의 분리는 1차 세계대전 발발 초기에 아주 큰 논쟁거리가 됐다. 당시 독일의 제국주의적 공격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가 의회에 요청한 신용을 당이 승인했다. [이 때는] 동시에 노조 지도부가 자율적인 정치 행동에 개입할 채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중에 공산당을 창당한 당내 및 노조내 좌파들은 전쟁 초기 대중을 지지세력으로 확보하지도, 조직적 능력을 지니지도 못했다. 전쟁 이후 상황은 훨씬 나빠졌다. 바이마르공화국[1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혁명으로 제국이 붕괴한 뒤 사민당이 수립한 공화국이다. 1933년 나치 집권 때까지 유지됐다. :옮긴이]을 사민당은 자신들의 인민의 국가 전망을 구현한 것으로 봤고, 노동운동은 총파업 같은 대중 행동이 나치의 집권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때조차 공화국의 의회 지배 틀을 깨려 하지 않았다.

 

노조와 복지국가에 남은 봉건주의의 각인은, 요약하자면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의 뚜렷한 구별을 유발했다. 정치 투쟁은 의회 활동에 국한됐고 경제 투쟁은 노동계급 내 낮은 지위 계층을 상당 수준 방관자로 방치한 채 숙련 노동자 문제에만 주로 집중했던 것이다.

 

자본도 봉건주의에 의해 형성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봉건적 유산은 대학의 이론적 교육으로 보완되는 수공업적 조합의 산업 훈련 체계 도입에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이 둘은 자리잡힌 기술 발전 경로를 따르는 점증적 혁신을 선호한다. 오직 산업 자본주의의 시작과 더불어서 독일은 몇몇 급진적 혁신을 보게 되는데, 이는 화학산업과 자동차산업의 등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여기서조차, 두 산업이 여전히 독일 경제를 이끌어가는 업종이라는 사실은 급진적 혁신보다는 점증적 혁신이 우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제 3위 업종인 공작기계 산업은 중세의 수공예에서 직접적으로 발전해나왔고 그 결과 중소기업들이 지배하고 있다. 반면 화학과 자동차 산업은 대기업들이 지배한다. 이 두 산업의 초기에는 수평적 집중이 우위를 차지했으며 이는 아메리카 기업의 수직적 통합과 대비되는 것이다. 잠시동안 수평적 합병 우위의 상황이, 숙련노동의 사용을 포함해 오랫동안 형성된 노동 조직 형태의 지속을 가능하게 했다. 일관작업 방식의 생산이 폭넓게 도입된 이후에도 포드주의와 테일러주의 생산방식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노동의 저하가 다른 많은 나라보다 훨씬 제한적으로 나타났다. 집약적 자본과 상대적으로 숙련도가 높은 노동력의 결합은, 혼란스런 시장 규제와 시장의 호황-불황 순환을 노동과 자본의 어깨 위에 똑같이 부과되는 사회적 교섭주의적 규제로 대체한다는 생각이 자라나는 바탕이었다. 노조와 사민당 지도부는 이런 규제가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계급투쟁을 피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경제 위기와 계급투쟁이 비이성적인 자본가와 비숙련에다가 거칠고 퇴행적인 노동자들이 만들어내는 것으로 봤다.

 

과학적 통찰과 이성에 근거한 사회적 교섭주의적 규제라는 개념은 산업계와 은행이 금융자본으로 뭉친 뒤에도 여전히 강력했다. 신용 규제는 변덕스런 시장의 방해를 받지 않고 산업 생산을 통제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간주됐다. 이렇게 기업 차원의 경제 규제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암시하는 바는, 거시경제적 규제의 거부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은 급진적인 부류까지 포함해 노동운동 내부의 다수뿐 아니라 중산층과 지배계급의 다수도 공유하는 바다. 한편으로 과점 상태인 산업 부문 차원의 기업내 사회적 교섭주의와 다른 한편으로 반케인즈주의적 태도는 널리 공유되는 합의가 됐다. 그리고 이 합의는 2차 대전 이후 줄곳 그리고 바로 지금까지 서독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의 성격을 규정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생긴 독일식 경제 발전 모형은 경제적 번영, 정치적 안정, 사회적 타협을 우선하는, 계급의 경계를 넘어선 합의와 제도적 연속성뿐 아니라 강한 수출 지향성에 의해 모양을 갖췄다. 독일산 제품을 세계 시장에 파는 것이 제품 가치를 궁극적으로 확인하는 것이자 번영의 필요조건으로 여겨졌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합의는 외국 시장 정복의 중상주의 기획을 포함한다. 이런 경제 정책의 지배적인 목표는, 국제 경쟁력이 1980년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선거 문구가 되기 훨씬 전부터 독일 자본가 계급이 추구하는 것이었고 노동 운동 내부의 주류가 수용한 것이었다. 사실, 이는 제3제국의 패배 이후 자본주의적 세계로의 서독 재통합의 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초기부터 자본주의 발전의 한 부분이었으며, 파시스트 독재로부터 자본주의적일지언정 민주적인 공화국으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형태를 띤 이런 내부적 사회적 교섭주의는 세계 시장을 향한 중상주의 정책에 의해 보완됐던 것이다. 이 둘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이것이 지난 50년에 걸쳐 창출한 거시경제적 결과는 계속 변화했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전후 시기를 1950년대와 60년대의 성장 순환기, 1970년대의 이행기, 1980년대와 90년대의 재분배 순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2001년의 세계 경제 침체 이후 시작된 수축 경향을 띤 정체기로 나눌 수 있다. 자본주의 핵심을 이루는 다른나라들에서처럼, 첫번째 시기에 총생산은 전례가 없는 비율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명목상 수요는 더 빠르게 성장했다. 그래서 통화 팽창(인플레이션)이 가속화했다. 비록 점진적인 추세로 가속화했지만. 이 시기에 노동자들은 더 높은 실질 임금과 더 적은 노동시간을 획득했다. 전반적인 성장이 수출에 의해 유발됐지만, 이 때 단체 교섭의 주요 결과물인 실질 임금과 생산성 향상의 연계가 대중 소비를 촉진함으로써 과잉생산을 피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독일과 일본의 수출주도 성장은 세계적 범위에서 실질 임금 성장과 정부 지출이라는 기존 유형을 통해 균형을 맞출 수 없는 지경까지 과잉생산의 축적을 유발했다. 총수요 격차는 더 높은 실질 임금 성장 그리고/또는 증가하는 정부 지출로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좌파 케인즈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전략이 실제로는 구현될 기회가 없었다. 여기에는 4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기술적 발전이 날로 더 자본집약적이 됐다. 마르크스 용어로 표현하자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졌다. 그래서 이윤율 저하 압력이 가해졌다. 둘째, 최근에 생활수준 향상을 쟁취하는 법을 익히게 된 노동계급은 명목 임금인상을 위해 싸울 수 있게 됐고 그럴 용의도 있었다. 셋째, 소득 분배 투쟁 과정에서 더 가속화한 통화 팽창이 수출의 주요 위협요인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지배계급 대다수는 노동자들의 교섭 능력을 약화시킴으로써 통화 팽창을 억제하고 이윤을 높이는 제한적 경제 정책을 선택했다. 넷째, 심지어 노동운동 내부에서도 소수만이 좌파 케인즈주의로 가길 원했다. 통화 팽창 억제가 제한적 거시 경제 정책에 따라 고용이 저하되는 걸 뜻함에도, 운동의 주류는 감지된 통화 팽창 억제 필요성을 수용한 것이다.

 

통화 팽창에 반하는 쪽으로 돌아선 게 1980년대와 90년대의 재분배 순환기 도래를 이끌었다. 이 시기의 주요 특징은 두가지 결과를 초래한 임금 인상의 억제다. 첫번째 결과는 통화 팽창 완화 절차가 본격화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실질 임금 증가가 생산성 증가에 뒤졌다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이는 이윤율 상승을 이끌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중 소비의 성장 둔화와 실현된 이윤을 포함한 전체 성장의 둔화 탓에 이윤율 상승 속도도 떨어졌다. 축적이 이렇게 제한된 상황에선 노동시간 추가 단축조차 고용 저하를 막을 수 없었다. 실업 증가는 총 임금과 순수 임금의 격차 확대를 유발하기도 했는데, 이는 실업급여의 주요 재원이 임금 보수에서 공제된 충당금인 탓이다.

 

제한된 축적과 통화 팽창 완화의 두가지 과정은 세계 경제가 호황에서 불황으로 돌아선 2001년 독일 경제를 침체와 통화 수축의 벼랑으로 내몰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수출이 내수 촉진에 실패했다. 장기화한 긴축 재정, 억제된 임금 인상, 늘어나는 실업은 저축 여력이 없는 저임금 노동자들한테 지출을 더 줄이게 만들고 고임금 노동자들한텐 저축을 늘리게 만드는 상황을 불렀다. 이런 현상은 노동자들이 과거처럼 사회복지 지원에 의존할 수 없게 된 탓이다. 심지어 늘어나는 수출조차 경제 침체를 막지 못했다.

 

이런 조건에서 사회적 교섭주의는 사회적 통합을 일궈낼 능력이 더 줄게 될 것이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독일 복지국가의 두가지 기본 원칙을 고려하는 게 중요하다. 하나는 실업보험금과 은퇴노동자의 연금 같은 지불금이 대부분 총 임금에서 공제된 충당금으로 마련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의 수령액이 과거 받던 임금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전후 호황이 끝나고 이어서 대규모 실업이 나타나면서 초래된 복지국가의 재정 위기를 메우기 위해, 개인의 수령액이 지난 30년동안 조금씩 조금씩 줄었다. 종류를 가릴 것 없이 복지 지원금 수령 자격자는 늘어나는 반면 개인별 수령액은 줄면서, 국내총생산에서 복지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일정하게 유지됐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오직, 명목상 총 임금이 이 기간동안 늘어났고 이 덕분에 사회복지 세금의 재정적 기반도 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반적인 임금 보수가 정체되어 있거나 심지어 줄면서, 복지 지원금 대상자가 점점 늘어나는 문제뿐 아니라 이런 지원금을 뒷받침할 세입의 결여 문제까지 대두되고 있다. 이는, 복지 체제에 기여하는 동시에 노동자 당사자에게 혜택을 주는 의미를 지닌 정규직 상시 일자리를, 최소한의 사회보장 외 모든 것에서 배제되는 비정규직 일자리로 대체하는 고용주들의 추세 때문에 더 악화하고 있다. 그래서 경제 침체는 유례없는 복지국가의 재정 위기와 복지체제 없이는 삶을 꾸려갈 수 없는 이들에 대한 지원금 감소를 초래했다. 복지국가의 제도적 환경은 그대로지만 복지국가의 성격은 바뀌는 듯 하다. 서로 다른 수준일지언정 사회 보장을 책임지는 체제에서, 중산층과 노동계급 내 상층부의 특권이 빈곤 노동자들과 실업자 그리고 날로 늘어나는 연금 생활자들을 희생하는 댓가로 유지되는 체제로 말이다. 불행하게도 이런 희생자들의 숫자는 계속 늘고 있지만 이런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저항은 아주 약한 상태로 남아있다. 원인은 옛 형태의 복지국가의 사회적 기반을 약화시킨, 변화하는 계급 구성에서 찾아야 한다.

 

수출 지향 성장에 우선순위를 두는 게 널리 받아들여지는 독일 상황에서, 강력한 산업별 노동조합주의가 중요한 기능을 했다. 위에서 제시했듯 산별 노조주의가 더 높은 실질 임금과 복지국가의 재원 확보를 추구함으로써 구매력을 창출하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수공업자 조합에서 물려받은 산별 노조의 생산중심주의 이념이 새로운 기술에 대한 노동자들의 강력한 저항을 억제하고 그로써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수출 증가를 위한 몰이와 자본의 대항 권력으로서 노조의 자아상은 언제나 경쟁하지만 그럼에도 오래 지속되는 관계를 형성해왔다.

 

이런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서, 금속노조(IG Metall)는 많은 이유 때문에 중대한 영향력을 지녔고,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금속노조는 위에서 봤듯이 독일 경제를 이끄는 두 업종인 공작기계와 자동차 분야 노동자들로 조직된 노조다. 수출 산업에 가장 중요한 공급원인 철강생산 분야의 노동자도 포함된다. 게다가 이 업종들은 대기업부터 중소 규모 기업까지 모두 포괄한다. 이런 이질성은 세심하게 조율된 임금 등급에 반영되어 있다. 금속노조가 대표하는 서로 다른 업종과 직업은 노조에 특정한 지위를 부여했는데, 그건 독일 노동계급의 집단적 상상력을 아주 높은 단계로 형성하는 지위이자 다른 노조들이 뒤따르는 기준점을 세우면서 단체 교섭을 이끄는 지도자라는 지위다.

 

금속노조는 서비스노조(Verdi)에 대해서도 지도력을 발휘한다. 조합원 숫자가 금속노조보다 많은 서비스노조는 공공 부문, 운수, 무역과 금융 부문을 대상으로 한 노조다. 금속노조가 서비스노조보다 우위를 점하는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 서비스노조는 불과 몇년전에 작은 노조들이 합친 조직이며 그래서 수십년동안 금속노조가 발전시켜온 일관성이 없다. 둘째, 계급 경계를 넘어서 널리 공유되고 있는 지배적인 생산중심주의 이념은 서비스 노동자를 높은 비용을 초래하지만 수익은 적은, 어느 정도 비생산적인 노동자로 취급한다. 이런 시각에선, 기술적으로 앞선 기계와 숙련 노동자를 결합시키는 산업 생산과 비교하면 서비스 분야 고용은 열등하게 보인다. 널리 퍼져있고 그래서 정치적으로 상당히 영향력 있는 이런 관점은, 노동과 자본에 대한 신고전주의적 개념에 이념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신고전주의적 개념에서 노동과 자본은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결합되어야 하는 생산 요소들이며 한쪽이 다른쪽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과 무관하다. 이런 이념을 몸에 익힌 금속노조와 다른 노조들은 작업 현장 또는 공장 단위에서 노사분규가 발생하면 종종 중립적인 중재자 구실을 하려 한다.

 

대체로 독일 사회적 교섭주의에서 금속노조로 대표되는 노조의 위치는 상당히 모호하다. 한편으로, 노조는 한 업종에서 자본에 맞서 전체 노동계급을 조직하고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노조는 노동과 자본을 함께 묶는 생산중심주의적, 중상주의적 사회 합의를 넘어설 위험이 있는 노동자의 투쟁을 제어해왔다. 보통, 사회적 교섭주의적 통합과 노동자의 자율적 주장의 균형은 일종의 '통제된 행동주의'로 유지될 수 있었다. 노조가 자율성을 완전히 포기하고 국가 기구의 부분이 되는 일이나,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제할 수 없었던 일은 아주 드물다.

 

자본과 노동 관계의 사회적 교섭주의적 중용은 언제나 어떤 특정 방식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이유는, 비숙련 노동자가 집단적으로 부를 산출하는 데 오직 최소 한도만 기여한다고 간주됐다는 데 있다. 이는 서비스 노동자에게도 똑같이 씌워지는 불명예다. 이런 한계적 지위는 이 노동자들을 전체 임금 등급의 밑바닥으로 내몰았다. 하지만 전후 번영기 동안엔 이런 노동자들이 많지 않았고 바로 윗등급 임금을 받는 노동자와 격차도 적었다. 저임금을 받는 그들은 여전히 숙련노동자와 동일한 계급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졌다.

 

내부적으로는 얼마나 구별이 있건 하나의 노동계급이 존재한다는 가정은, 전후 호황의 종말이 경제 구조개편을 유발했을 때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사회적 교섭주의의 사회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두가지 분리가 지난 30년동안 점차로 나타났다. 첫째로, 단체 교섭의 합의에 따라 노동조건이 결정되는 노동자들과 저임금에다 자주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제 노동 또는 임시직 노동을 하는 불안정 노동자들의 분리가 있다. 두번째로, 총 임금과 순수 임금 간의 이른바 쐐기가 있다. 이 차이는 실업급여, 건강보험료, 연금 지급을 위한 분담금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면서 나타나 점차 확대됐다.

 

고용주들과 부르주아 언론들은 복지 체제의 수혜 대상인 노조 소속 노동자들을 상대로,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자발적 실업자로 추정되는 이들이 그들[일하는 노동자들]의 사회보장 세금으로 충당되는 복지체제를 이용해먹고 있다는 주장을 퍼뜨리는 데 대성공을 거뒀다. 대량 실업 사태와 일하는 이들의 사회보장 수준에 가해지는 압력에 분노하는 대신, 자본가 계급의 복지 예산 감축 운동을 수용하는 분위기가 확대되고 있다. 조만간 이런 복지 지원이 필요하게 될 많은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예산 감축이 이념적인 이유 때문에만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다.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한 임금 동결과 노동시간 연장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생각도 널리 퍼져있다. 단체교섭이 적용되고 해고당하면 수당을 제공하는 일자리 찾기를 아무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안전 노동을 받아들이는 게 새 일자리를 찾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보인다.

 

노동계급의 규모를 줄이는 게 경제 구조조정 과정에서 나타난 유일한 것이다. 변호사, 각종 자문, 언론인처럼 독점자본주의 초창기까지 그 뿌리가 거슬러 올라가되 전후 호황기에 큰 규모로 성장한 이른바 전문직들로 이뤄진 새로운 중산층은 그동안 자신들의 지위를 강화할 수 있었다. 부분적으론 이들 전문직이 경제 구조조정에 적극적인 세력이 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조조정 절차가 어렵지만 번영을 위해서 불가피한 과정처럼 보이게 하는 데 쓰이는 전문 기술을 제공하고 선전 활동을 창출했다.

 

이 중산층의 지위는 경제적 자본보다는 상징적 자본에 훨씬 더 의존하며 이 점이 그들을 부르주아지와 구별한다. 이런 이유로 중산층은, 특히 경제 침체기에 지위 상실을 두려워 한다. 이를 막기 위해서 그들은 복지국가를 포획하고 오래 역사을 지닌 노동계급의 기초 세력 가운데서 점점 많은 숫자를 이 시스템에서 배제하는 공세를 주도했다. 이념적으로 보면 이 공세는 '제3의 길'의 형태를 띠었다. 이 길은, 사람들을 활성화시키고 그럼으로써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체제를 갖춘 복지국가를 통해 오래된 재분배 구조를 극복할 것이라고들 했다. 실제론, 제3의 길 정책이 소득 분배와 사회보장, 공공 서비스 이용 기회를 양극화했을 뿐 아니라 사민당에 중대한 변화를 유발했다. 사민당의 유권자 기반은 사회적으론 노조 조합원보다 언제나 넓었지만 노조원들은 사민당의 핵심이었다. 이 사실은 노조와 사민당이 독일에서 노동 진영의 두 축으로 떠오른 이후 변함 없었다. 아주 최근에 들어서야, 사민당의 사회적 기반이 숙련 노동자들의 핵심에서 새로운 중산층으로 차츰 대체되고 있다. 정치적으론, 노동운동이 현재 두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첫째는, 그동안 잘 형성되어 있던 노조 대표성의 형식을 약화시킨 계급 구성의 변화다. 둘째는 이미 약화된 노조가 정치 영역에서 자신의 짝을 잃었다는 점이다.

 

대량 실업과 경제적 구조조정은 독일 사회적 교섭주의의 노동쪽 부분을 텅 비게 만들었다. 이는 사민당을 제3의 길 정당으로 변화하게 했으며 노조를 수세적인 태도로 몰아갔다. 필수 요소였던 단체 교섭과 복지국가를 포함한 사회적 교섭주의 전체가 전반적인 사회적 합의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사회적 교섭주의의 허물지는 기반은 노조 조직만 흔드는 게 아니라 전체 정치 체제까지 흔들고 있다. 국가 기구들 안에 그리고 심지어 보수적인 기민당과 강한 규제를 받고 있는 장인적 숙련 산업(craft industries) 같은 특정 부르주아지 분파 사이에서도, 족쇄풀린 시장과 권위주의적인 정부의 조합보다는 자본과 노동 관계의 사회적 교섭주의적 중재를 선호하는 흐름이 있다. 하지만 인식해야 할 중요한 모순 한가지가 있는데, 그건 사회적 교섭주의의 위기에서 등장했으며 이 위기 대처법을 형성하고 있는 모순이다. 복지국가와 조직 노동의 필요성에 대한 합의는 여전히 널리 퍼져있지만, 자본가 연합당과 같은 것들이 사회적 기준 약화를 계속 추구하고 있는 의회 체제 안에는 이 합의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결론을 많은 이들이 싫어하지만, 그들의 정책들은 또 다른 합의에 의존하고 있다. 지난 몇십년동안 작용하고 있는 이 또 다른 합의는 세계 시장의 시험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계급이 서로 다른 다수의 사람들은, 수출 증대를 위해 국제 경쟁력을 높이려면 임금을 낮추고 복지국가를 해체해야 한다는 감지된 필요성을 받아들인다.

 

이런 모순과 사회적 교섭주의 위기에 대한 노조의 대응은, 잘못된 쪽으로 이끌려간 정치적 계급 때문에 압력을 받고 있지만 이미 검증된 이 진정한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교섭주의의 제도적 뼈대 옹호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절대 다수의 노조운동가들이 공유하지만, 여기에 결부되어 있는 전략적 주장은 서로 다른 두가지 방향을 향하고 있다.

 

사회적 교섭주의 위기에 대한 보수적인 대응은, 단체 교섭이 사회적 보호가 아니라 자신들의 창조성에 대한 족쇄를 의미하는 세력인 고도 숙련 노동자의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제3의 길 방식의 수사학을 취하는 것이다. 이 생각은 노동계급 내 상위 계층이 품고 있는 환상 곧 단체 교섭보다는 개별 협상을 통해 더 많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 조건을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노선을 따르는 노조 정책은 기껏해야 저임금에 고된 노동을 하는 노동자에 대한 상위 계층 노동자들의 우월적 지위만 지킬 것이다. 전체 노동계급을 하나의 영역 안에 모두 조직하고 내부적 차이를 조율하는 과거의 시도를, 노동 귀족과 무산자들의 깊은 분열이 대체할지 모른다. 이런 변화는 노조가 사라질 거라고 암시하는 게 아니다. 노조가 최근 사민당이 겪은 것과 유사한 변화를 겪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당장 위기에 처한, 노조와 사민당의 오랜 협력관계는 두쪽이 모두 제3의 길을 가게 되면 재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노조 내부에서 이런 사태 진전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 사회복지 비용 삭감의 감지된 필요에 반해서, 경제 성장과 고용을 창출하고 복지국가에 대한 재정적 압박을 제거하기 위해 케인즈주의적 정책 도입이 제시된다. 이를 통해 사회적 기준을 유지하거나 심지어 개선하는 게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사민당이 이런 케인즈주의적 복지 전략에 등을 돌렸기에, 노조는 새로운 사회정의 운동과 같은 사회운동 세력과 연대해 활동 영역을 단체 교섭을 넘어 정치로 확장해야 한다고들 한다. 사회정의 운동과 연대를 원하는 세력이 제3의 길을 취하려 하는 이들을 압도한다면 중요한 일보 진전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몇가지 걸림돌을 극복해야 한다.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제3의 길 정치가 소수의 노조 지식인들에 의해 제기됐을 뿐 아니라 노조 조합원 내부에 사회적 기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계급의 상층부 사이엔 경쟁력을 높이고 노동계급의 하층부와 연결을 끊음으로써 자신들의 일자리를 지킬 여지를 보는 많은 노동자들이 있다. 생산성과 수입을 정규 교육과 연결짓는 생산중심주의 이념은 이런 관점을 옹호하고 그래서 진보적인 노조 정치의 주요한 걸림돌이다.

 

두번째 문제는 케인즈주의가 종종 경제적 번영에 기반을 둔 완전 고용의 길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태적 이유 때문에 바람직하지도 않고 가능성도 거의 없는 건, 다름 아닌 전후 번영과 같은 성장률을 회복하는 것이다. 저성장 또는 심지어 정체 상태 아래선, 임금과 사회적 비용을 줄일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삭감이 지속되어야 한다면, 이는 분명히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에게 분명히 유리하다. 번영기에 가능하던 것 곧 노동과 자본이 점점 커지는 파이를 함께 나누는 것은 성장률이 낮을 땐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소득의 '공정한 나눔'이라는 사회적 교섭주의적 개념은 대체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를 대체하는 건 고용주들이 오래전부터 요구하기 시작했던 것 곧 자신들의 적대 계급을 희생할지언정 고용주쪽의 몫 확대를 요구하는 것이다. 아주 역설적이게도 금속노조와 서비스노조의 지도부는, 마음에도 없으면서 말뿐인 친절로 거론되던 케인즈주의적 프로그램을 이 프로그램 실현의 경제적, 사회적 조건이 무너지기 시작한 뒤에야 채택했다. 경제 침체, 새로운 중산층과 불안전 노동자의 심각한 양극화가 확산된 상황에서, 사민당을 다시 케인즈주의로 돌아오게 설득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실패가 예고되어 있다.

 

최근 사민당이 총선 실시를 제기한 것은 제3의 길이 궁지에 몰렸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래서 노동운동이 당장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케인즈주의적 정책의 재창출을 시도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케인즈주의를 소진시킨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는 새로운 전략을 개발해야 하는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노조내 주류가 지금 이런 전략적 지향을 요구할 뿐 아니라, 위에서 언급했듯이 몇몇 노조운동가들은 사민당의 케인즈주의와 사회적 교섭주의 전통에 새로운 목소리를 부여하려는 새 정당 곧 '일자리와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 대안'(WASG) 건설에 착수했다.

 

이런 시도는 오직 서부 독일에서만 기반을 얻었다. 재정을 통한 자극과 재분배라는 개념은 이 조처가 전후에 확보했던 호소력과 유효성 대부분을 잃어버린 시기인 독일 통일 때까지도 동독엔 도달하지 않았다. 게다가 동독이 자본주의로 바뀌면서 나타난 산업 규모 축소는 적자재정이라는 개념의 평판을 훨씬 더 떨어뜨린 전례없는 빚더미를 촉발했다. 이런 비관론은 과거 동독 지배정당인 사회주의자통일당의 후계자이자 국가 사회주의 실패를 대표하는 정당인 민사당(PDS)이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민사당은 아직까지 새로운 사회주의 정치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지만, 번영의 이름을 내걸고 나타났으나 실업과 경제 침체를 유발한 자본주의에 대한 깊은 불만만큼은 여전히 분명히 드러낸다.

 

'일자리와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 대안'과 민사당의 지역적 한계를 인식한 두 정당 지도자들은 둘이 뭉침으로써만 연방 차원에서 진보적인 정책을 분명히 제기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결론냈다. 이 점은 순수하게 선거 차원에서 볼 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정당들은 총 투표의 5% 문턱을 넘어야 하는 탓에, 두 정당이 독자적으로 선거전을 펼치면 둘 다 실패하겠지만 연합해서 선거에 나서면 성공의 가능성이 가장 높다.

 

동부에선 국가 사회주의 역사라는 부담을, 서부에선 복지 자본주의의 역사라는 부담을 안게 되는 두 조직의 연합은 주요한 전진을 대표한다. 이는 주류 지배 언론의 신자유주의적 논평자들의 광적인 분노가 증명한다. 역사가 어두움을 드리우긴 하지만 이 좌파 연합의 전망은 신자유주의 정권에 대한 노동계급의 거부가 꾸준히 성장하느냐에 달려있다. 이 연합이 떠오른 바로 그 시기에, 여론조사는 독일인 다수가 자본주의적 유럽 헌법을 거부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 연합은 격렬한 논쟁 속에서 태어났고 신자유주의적 논평자들의 히스테리는 분파적 좌파의 독설적 비판과 조화를 이뤘다. 좌파의 비판은 완전히 근거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연합이 현재 자본주의의 경제 침체, 사회 양극화, 감지된 정치적 대안 부재에 실망한 많은 이들을 끌어들일 듯 하다는 사실은 변함없다.(두 당은 9월18일 총선에서 득표율 8.7%라는 큰 성공을 거뒀다. : 옮긴이) 이런 실망과 함께 나타난, 더 공평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소망은 결국 동독과 서독에서 겪었던 노동의 옛 실패에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번역: 신기섭

2005/11/21 16:59 2005/11/2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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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여성주의란 무엇인가?

사회주의 여성주의란 무엇인가?

(What Is Socialist Feminism?)

바버라 에린라이크 (Barbara Ehrenreich)

(저자 이름 표기는 본인에게 확인한 결과입니다. 자신의 발음을 "AIR-IN-RIKE"라고 한다는 답장을 받았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계열 유대인 남자와 결혼해서 갖게 된 성이며, 바버라의 본래 성은 Alexander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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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76년 잡지 윈에 처음 실렸으며 저자의 동의를 얻어 다시 싣는다. 이 글은 사회주의 여성주의 사상의 고전이다. 이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수십년동안 토론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지만, 우리가 보기에 이 글의 중요성은 변함없다. - 먼슬리 리뷰 편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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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수준에서, 아마도 너무나 분명하게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오랫동안 많은 걸 겪었다. 당신은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이다. 당신은 화난다. 일에 대해, 월급봉투에 대해, 남편(또는 전 남편)에 대해, 아이들의 학교, 집안일에 대해, 예쁜 것에 대해, 예쁘지 않은 것에 대해, 남들이 쳐다보는 것에 대해,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것에 대해 (그리고 어떤 쪽이든, 남들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에 대해) 등등. 당신이 이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맞아떨어지는 지를 생각하고, 무엇이 바뀌어야 할지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 모든 생각들을 축약된 형태에 담는 어떤 단어를 찾게 될 것이다. 그러면 거의 '사회주의 여성주의'를 제안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 상당수는 바로 이런 식으로 여성주의 사회주의에 도달했다. 우린 우리의 관심사 전체와 원칙 모두를 '사회주의적'이지도 '여성주의적'이지도 않은 듯한 방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할 단어/용어/문구를 찾았다. 내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여성주의'라는 말에 아주 만족하지는 않는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용어가 너무 길고(나는 하이픈으로 이어 표현되는 대중운동엔 별 기대를 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이 용어는 그것이 진짜 지칭하는 것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짧다. 이것이 지칭하는 건 결국 진정으로 사회주의 국제주의 반인종차별적, 반이성애적 여성주의다.

 

어떤 종류건 새로운 딱지를 취하는 것의 문제는, 이것이 즉각적인 분파주의 분위기를 만든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자연히 도전이 되고, 신비가 되고, 쟁점이 된다. '사회주의'와 '여성주의'는 분별있는 연설, 회의, 글 등의 주제가 되기에는 너무 넓고 포괄적이라는 걸 우리가 완벽하리만치 잘 알지만, '사회주의 여성주의'를 논하는 연설가들, 회의들, 글들이 있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라고 고백하는 이들을 포함해서 사람들은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뭐지?”라고 불안하게 자문한다. 이것이 세계사적 규모의 놀라운 종합, 곧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와 월스톤크래프트를 넘어서는 진화론적 도약이기를 (또는 어떤 순간에, 아마도 다음번 연설, 회의, 글에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기대감 같은 것이 있다. 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확인되기를, 소수의 불만있는 여성주의자들과 여성 사회주의자들이 집착한 변덕, 일시적인 기분전환으로 확인되기를 바라는 기대감 같은 것이 있다.

 

나는 사회주의 여성주의 주변에서 자라난 어떤 신비를 지나 나아가려 시도하고 싶다. 논리적인 출발 방법은 사회주의와 여성주의를 나눠서 각각 따져보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더 정확하게 말해 마르크스주의자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여성주의자는 또 어떻게 보는가? 우선 첫째로,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주의는 중요한 것을 공유한다. 세상을 보는 비판적인 방법이 그것이다. 둘 모두 대중적 신화와 '상식' 지혜를 뜯어내고 경험은 새로운 방식으로 보도록 강요한다. 둘 모두 세상을 이해하려 시도하는데, (전통적인 사회 과학이 하듯) 정적인 균형과 대칭 측면에서가 아니라 적대의 측면에서 이해하려 한다. 둘은 또 자신들이 해방시킨다는 거슬리는 동시에 불편한 결론에 도달한다. 마르크스주의자나 여성주의자의 전망을 지니면서 관찰자로 남아있을 수는 없다. 이 둘의 분석으로 발가벗겨진 현실을 이해하는 것은 곧 현실을 바꾸려는 행동에 돌입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역학에 대해 발언한다. 모든 사회 과학자는 자본주의 사회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혹한 체계적 불평등을 특징으로 한다는 걸 안다. 마르크스주의는 이 불평등이 경제 체제로서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과정들로부터 유발된다고 이해한다. 소수의 사람들(자본가 계급)이, 나머지 사람들이 살기 위해 의존하는 공장/에너지원/자원 등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 대다수(노동자 계급)는 자본가들이 설정한 조건 아래서 자본가들이 주는 임금을 받아야 할 전적인 필요성에서 일해야 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실제래 생산하는 것의 가치보다 적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하기 때문에, 이 두 계급의 관계는 불가피하게 화해할 수 없는 적대 관계다. 자본가 계급의 존재 근거는 노동계급에 대한 지속적인 착취에 있다. 이 계급 지배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결국 힘(force)이다. 자본가 계급은 경찰이나 감옥 등등의 국가로 표현되는 조직적 폭력 수단을 (직접 또는 간접) 통제한다. 국가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한 혁명적 투쟁을 벌임으로써만, 노동 계급은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을 해방시킨다.

 

여성주의는 또 하나의 익숙한 불평등에 대해 발언한다. 모든 인간 사회는 성별간의 일정한 불평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우리가 인간 사회를 역사적으로 훑어보고 여러 대륙의 인간 사회를 훑어보면, 공통적으로 몇가지 특징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가족 내부에서와 지역사회에서 여성의 남성 권위에 대한 예속, 여성을 자산의 형태로 대상화하는 것, 여성의 일을 아이 키우기, 성인 남성을 위한 개인적 서비스 제공, 특정한 (보통은 지위가 낮은) 생산 노동 형태에 한정함으로써 노동의 성별 구분 등이 그 특징이다.

 

이런 것들의 거의 보편적인 성향에 충격을 받은 여성주의자들은, 모든 인간 사회 존재의 근거가 되는 생물학적 '주어진 것들'에서 설명을 찾으려 해왔다. 남성은 평균적으로 여성보다 육체적으로 강하다. 특히 임신한 여성 또는 아이를 젖 먹여 키우는 여성과 비교할 때 그렇다. 게다가 남성은 여성을 임신시킬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성별 불평등이 취하는 형식들은, 그것이 문화에 따라 아무리 다를지언정, 결국 남성이 여성에 대해서 지니는 분명한 육체적 장점에 의지한다. 말하자면, 궁극적으로 폭력 또는 폭력의 위협에 의존하는 것이다.

 

남성 우위의 고대, 생물학적 뿌리 곧 남성 폭력은,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특정 문화에서 남녀의 성별 관계를 규제하는 법과 관습으로 인해 모호해진다. 그러나 여성주의적 분석을 따르면 이는 존재한다. 남성의 공격 가능성은 '나쁜'(반항적이고, 공격적인) 여성에 대한 지속적인 경고를 뜻하고, '착한' 여성들을 남성 우위에 공모하도록 유도한다. '착한'('예쁜', 순종적인) 태도의 대가는 무작위적인 남성 폭력에서 보호를 받는 것이고 어떤 경우는 경제적 안정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강제적인 착취에 의존하는 계급지배 체제를 드러내기 위해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다원론'에 관한 신화들을 폭로한다. 여성주의는 남성 지배를 힘의 지배로 드러내기 위해 '본능'과 낭만적 사랑에 대한 신화를 뚫고 지나간다. 이 두가지 분석 모두 우리에게 근본적인 불공평(부정)을 볼 것을 강요한다. 선택할 것은, 신화들이 주는 위안에 도달할 것인가, 아니면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지탱을 위해 신화를 필요하지 않는 사회 질서를 위해 일할 것인가다.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주의를 더해서 그 값을 '사회주의 여성주의'라고 부르는 게 가능하다. 사실, 사회주의자인 여성주의자들 대부분이 보통 보는 방식이 아마 이런 것이리라. 그러니까, 우리의 여성주의를 사회주의자 범위안으로 그리고 우리의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범위안으로 밀어넣는 일종의 잡종으로 말이다. 사물들을 이렇게 두는 데서 생기는 문제 하나는, “그럼, 그이는 진짜로는 뭐야?”라고 의문을 품거나 아니면 “주요 모순이 뭐야?”라고 묻게 만든다는 것이다. 억제하기 어렵고 정당한 것처럼 들리는 이런 질문들은 종종 우리를 멈춰서게 한다. “선택하라!” “이쪽 아니면 저쪽이 되라!” 그러나 우리는 사회주의 여성주의에 정치적 일관성이 있음을 안다. 우리는 잡종도 아니고 형세 관망자(기회주의자)도 아니다.

 

이 정치적 일관성을 얻으려면, 우리를 다른 부류의 여성주의자들과 구별되는 여성주의자로, 다른 부류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구별되는 마르크스주의자로 차별화해야 한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류의 여성주의,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류의 사회주의를 구획지어야 한다. (이 용어를 양해해 주시길) 이럴 때만, 사물들이 불편한 병치 이상의 어떤 것으로 '더해질' 것이다.

 

대부분의 급진 여성주의가들과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이에 관한 한 나의 이런 간단한 특징화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시각에서 볼 때, 급진 여성주의의 문제는 더 나아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급진 여성주의는 남성 지배의 보편성에 묶여 꼼짝하지 못하고 있다. 사물은 결코 진정으로 변하지 않았다, 모든 사회 체제는 가부장제다,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와 자본주의는 모두 단지 타고난 남성 공격성의 표현일 뿐이다 등등의 생각에 말이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관점에서 볼 때, 이런 태도의 문제는 남성 (그리고 진정으로 인간적이고 평등한 기반에서 그들과 화해할 가능성) 뿐 아니라 여성에 관한 많은 것들까지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급진 여성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중국 같은 사회주의 나라를 '가부장제 사회'로 얕보는 것은, 수백만의 여성들이 벌인 진정한 투쟁과 성과를 무시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여성 억압에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어떤 것이 있음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이 서로 다른 상황에서 다른 형식을 띠며 이 차이는 아주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여성 차별이 여아 살해로 표현되는 사회와 중앙위원회의 불균등한 대표 구성으로 나타나는 사회는 다르다. 그리고 이 차이는, 쟁취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모든 여성주의자들이 우려하는 게 마땅한 성 차별이라는 주제의 역사적 변주 가운데 하나가, 농경 사회에서 산업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면서 나타나는 한 묶음의 변화다. 이는 학문적 쟁점이 아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대체한 사회 체제는 사실 가부장적인 것이었다. 이 가부장적이라는 용어를 나는 본래 뜻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산이 가정 중심으로 이뤄지고 가장 나이 많은 남성이 지배하는 체제를 뜻한다. 사실, 산업 자본주의는 가부장제로부터 나와서 그것을 망치면서 앞질렀다. 생산은 공장으로 옮겨갔고 개인들은 '자유' 임금 근로자가 되기 위해 가정에서 뛰쳐나왔다. 자본주의가 생산과 가족 생활의 가부장적 조직을 붕괴시켰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자본주의가 남성 우위를 폐지시켰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겪고 있는 특정 성 억압 형태는 상당 부분 최근에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이긴 하다. 거대한 역사적 불연속성이 우리와 진짜 가부장제 사이에 놓여있다. 오늘날 여성인 우리가 겪는 경험을 이해하려고 하면, 자본주의를 하나의 체제로 고려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바로 이 지점까지 도달하기 위해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이외에 여러가지가 있다. 단지, 여성주의자들로서 우리는 가난한 노동계급 여성, 제3세계 여성 등 가장 억압받는 여성들에 가장 주목하며 그 때문에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그에 맞설 필요를 느끼게 된다고 말하고 말 수도 있었다. 단지 여성도 계급의 일원이라는 이유 때문에 계급 체제에 대해 발언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성주의자인 우리의 전망에 대한 어떤 또 다른 것을 명백히 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우리 삶에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서 성 차별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맥락 안에 위치짓지 않고는 이해할 길이 없다는 점이 바로 내가 명백히 하려는 그것이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대부분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관한 한 내가 간단한 요약한 것에 역시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다시, 더 나아가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나는 그들을 '기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유일하게 '진짜'이며 중요한 것들은 생산 과정 또는 전통적인 정치 영역과 관련되는 것들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경험과 사회적 존재의 다른 부분들 곧 교육, 성, 여가, 가족, 예술, 음악, 가정 일 등과 관련된 것들은 사회 변화의 중심 동력의 주변부일 뿐이다. '상부구조' 또는 '문화'의 부분인 것이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내가 '기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이들과는 아주 다른 진영에 있다. (여성주의자가 아닌 많고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본주의를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총체성으로 본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시장을 찾는 과정에서 사회적 존재의 모든 구석구석을 침투하도록 이끌린다고 이해한다. 특히 독점 자본주의 단계에서는, 소비 영역이 경제적 관점에서 생산 영역 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계급 투쟁을 임금과 노동시간 관련 쟁점에 한정된 것 또는 일터 관련 쟁점들에 한정된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계급 투쟁은 계급들의 이해가 충돌하는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며, 이런 영역에는 교육, 건강, 예술, 음악 등도 포함된다. 우리는 단지 생산 수단의 소유권뿐 아니라 사회적 존재의 총체를 변혁하는 게 목표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우리는 기계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출발해 여성주의에 도달했다. 우리가 독점 자본주의를 정치적, 경계적, 문화적 총체성으로 보기 때문에, 생산 또는 '정치'와 표면상 아무 관계가 없는 여성주의 쟁점들, 가족과 건강관리와 '사적' 생활에 관련된 쟁점들을 위한 공간을 우리의 마르크스주의 구조 안에서 확보한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라는 우리의 표지(브랜드)에는 '여성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맨먼저 여성들을 '상부구조' 또는 다른 어떤 영역에 구획지어 넣지 않기 때문이다. 기계적 성향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임금을 받지 않는 여성(주부)의 문제를 계속적으로 곰곰 생각한다. 진짜 노동계급의 일원인가? 말하자면, 진정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가? 물론 우리는 주부들이 노동계급의 일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이 진정 잉영 가치를 생산하다는 사실을 정교하게 증명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인민으로 이뤄진 계급이며 자본가가 지배하는 생산 영역과 상당히 떨어진 사회적 존재를 지닌 계급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계급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가장 주변부에 있는 듯한 여성들 곧 주부들이 사실은 계급의 심장부에 위치함을 알게 된다. 그들은 아이를 키우고, 가족을 결속시키고 공동체의 문화적, 사회적 관계망을 유지하는 일을 한다.

 

우리는 두가지의 관심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함께 흐르는 일종의 여성주의와 일종의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등장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그동안 그렇게 신비화됐는지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가 진정 내가 '기계적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른 것을 뜻하고 여성주의가 비역사적인 성격의 급진 여성주의를 뜻하는 것인 한에서, 사회주의 여성주의라는 이념은 거대한 신비 또는 역설이다. 이런 것들은 합쳐질 수 없는 것들이다.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러나 내가 규정하려고 시도했던 바대로 다른 종류의 사회주의와 다른 종류의 여성주의를 합친다면, 공통의 기반을 갖게 되며 그것이 오늘날 사회주의 여성주의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다. 이 공간은 꼭데기 잘린 여성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제약에서 자유롭고, 독점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총체성을 말하는 정치론을 개발할 수 있는 공간이다. 기존 여성주의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서는, 세계관에서 제약이 없으며 불완전하지 않은 어떤 것으로 깨고 나가야 했다. 우리의 경험 전체를 이해하고 이 이해의 총체성을 반영하는 정치론을 만들어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주의 여성주의'라는 새로운 이름을 취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사회주의 여성주의 이론을 하나의 '공간' 또는 공통의 바탕로 남겨두고 싶지 않다. 이 '바탕'에서 사물들이자라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성, 계급, 자본주의, 남성 지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의 종합에 몇년전보다 더 가까이 있다. 여기선 이런 사고의 노선을 아주 간략하게만 제시하겠다.

 

1. 계급과 성 지배는 궁극적으로 힘에 의존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여성주의적 이해는 옳다. 그리고 이는 여전히 성 차별적/자본주의적 사회에 대한 가장 타격이 큰 비판이다. 그러나 이 '궁극적으로'라는 것에는 많은 게 있다. 매일 매일 생활이라는 의미에서는, 많은 사람들은 폭력의 위협에 억제당하지 않는 가운데 그리고 종종 심지어는 물질적 박탈의 위협이 없는 가운데 성과 계급의 지배에 순응한다.

 

2. 그렇다면 사물들이 계속 유지되게 하는 게 힘의 직접적인 사용이 아니라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 계급의 경우, 이미 아메리카의 노동계급이 전투적인 계급의식을 잃은 이유에 대해 많이 논의됐다. 분명 민족적 분리, 특히 흑백의 분리가 해답의 핵심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노동계급이 나뉜 데 더해서 사회적으로 원자화하기도 했음을 주장하려 한다. 노동계급의 이웃관계는 파괴됐으며 이제 부패했음이 인정된다. 생활은 날로 사적이 되어가고 내향적이 됐다. 한 때 노동계급이 지녔던 숙련기술은 자본계급에게 강탈당했다. 그리고 자본가가 통제하는 '대중 문화'은 거의 모든 고유 노동계급 문화와 관습을 시나브로 몰아냈다. 계급으로서의 집단성과 자립 대신 상호 고립과 자본가 계급에 대한 집단적 의존이 존재한다.

 

3. 여성들의 예속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적인 방식으로 이 계급 원자화 과정의 열쇠였다. 다른 식으로 표현한다면, 노동계급의 삶을 원자화하고 자본가 계급에 대한 문화적/물질적 종속을 촉진한 힘들은, 여성들의 예속을 영구화하는 데 복무한 바로 그 힘들이다. 점점 더 사적인 가족적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집단에서 가장 고립된 이들이 바로 여성이다.(심지어 집밖에서 일할 때도 그렇다.) 많은 핵심 사례들에서 다름 아니라 여성의 숙련기술이 (생산 기술, 치유, 태아 받아내기 등등) 상품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금지되거나 불신당해왔다.사생활에 대한 광범한 자본주의적 침투에 대해 완전히 수동적이고 무비판적이고 의존적인 (곧 '여성적인') 태도가 되도록 부추김당한 이들이 누구보다 여성이다. 역사적으로, 노동계급 생활에 대한 후기 자본주의적 침투는 제압/'여성화'의 주된 목표로 여성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여성이 노동계급의 문화-담지자이기 때문이다.

 

4. 당연히 여성들의 투쟁과 전통적으로 계급투쟁으로 인식된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상호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이 이어진다. 여성들의 모든 투쟁이 본질적으로 반자본주의적 공세인 것은 아니지만 (특히 특정 여성집단의 권력과 부를 신장시키는 것만 추구하는 이들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여성들 사이에서 집단성과 집단적 확신을 형성하는 모든 투쟁은 계급의식 형성에 아주 중요하다. 거꾸로, 모든 계급투쟁이 본질적으로 반자본주의적 공세인 것은 아니지만 (특히 산업사회 이전의 가부장적 가치에 집착하는 이들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사회적, 문화적 자율성을 형성하려고 하는 모든 투쟁은 불가피하게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과 연결된다.

 

아주 거칠게 요약한 이것이, 사회주의 여성주의적 분석이 취하는 한가지 방향이다. 사회주의자와 여성주의자의 투쟁이 무너져내려 같은 것이 되게 할 종합이 등장하기를 누구도 기대하지 않고 있다. 위에서 제시한 간략한 요약들은 그 나름의 '궁극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인종적 억압처럼) 순수히 여성주의적인 전망으로는 기괴한 왜곡 없인 설명하거나 다룰 수 없는 자본주의 지배의 중요한 측면들이 있다. (가정내 남성 폭력처럼) 상당한 확대 해석과 왜곡 없인 사회주의 사상으로는 거의 간파할 수 없는 성 억압의 중요한 측면들이 있다. 그러므로, 계속 사회주의자들이자 여성주의자들일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서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라는 자신확신에 찬 정체성을 우리가 지니기 시작하는 종합이 충분히 있다.

 
2005/07/19 22:40 2005/07/19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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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슬리 리뷰 50년으로 본 미국 좌파 역사

크리스토퍼 펠프스(Christopher Phelps)

먼슬리 리뷰 1999년 5월호

원 제목 = 서설 (Introduction: a socialist magazine in the American century; 'Monthly Review')

 

미국의 유명한 진보잡지 먼슬리 리뷰가 1949년 5월,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명문 `왜 사회주의인가?'를 담아 처음 나올 그 때의 정신을 그대로 지킨 채 50년 이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50년을 유지한 것만으로도 기적같은 일이지만, 한번도 곁길로 빠지지 않고 자기자리를 지킨 것은 기념비적인 일입니다. 50년 기념호는 이 글 곧 크리스토퍼 펠프스가 쓴 50년사와 3명의 편집인 곧 폴 스위지, 해리 매그도프, 엘런 메익신스 우드의 인터뷰만으로 구성됐습니다. 원고지 300장에 해당하는 긴 글입니다.



서설: `미국의 세기'의 사회주의 잡지; `먼슬리 리뷰'

(Introduction: a socialist magazine in the American century; 'Monthly Review')

 

크리스토퍼 펠프스 (Phelps, Christopher)

<먼슬리 리뷰> 1999년 5월1일


 

인생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50살이 되는 것은 통계적으로 말할 때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미국 좌파의 잡지에게 50년은 진정으로 영원한 것이다. 단지 이 나이에 이르는 것만으로도 멋진 성과다.

 

이제 저물어 가는 이 한 세기동안 수많은 유망한 급진적인 출판물을 파괴해온 언제나 어렴풋하게 등장하는 위협을 생각해 보라. 정부의 괴롭힘과 탄압으로 1차 대전 중에 `인터내셔널 소셜리스트 리뷰(the International Socialist Review)'와 `민중(the Masses)'이 무너졌다. 재정지원이 없어지면서 1917년 `세븐 아츠(Seven Arts)'가 사라졌고 1937년에는 `마르크시스트 쿼터리(the Marxist Quarterly)'가 없어졌다. 편집자 한 명이 숨지자 `모던 쿼터리(the Modern Quarterly)'는 1940년 마지막을 고했고 편집자의 변덕은 1980년 `마르크시스트 퍼스펙티브스(Marxist Perspectives)'를 없애버렸다. 70년 사이로 이 나라 최고의 급진적인 신문이 전망을 잃고 독자가 줄면서 무너졌다. 1922년에 `어필 투 리즌(the Appeal to Reason)'이, 1992년에는 `가디언(the Guardian)'이 각각 말이다. 지원 세력 또는 당이 나뉘거나 합쳐지면서 다른 많은 출판물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가 잊지 않게, 완전한 낙담과 사기저하와 방향상실과 각성(미몽에서 깨어남)이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좌파 정기간행물들이 죽어 기록보관소에서 누렇게 변색하고 있다. 이것은 한 때는 대단했던 포부를 지녔지만 꿈이 바람에 흩어지는 것을 지켜본 작가와 독자들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 됐다.

 

반면에 어떤 것들의 운명은 죽음만도 못하다. 버티는 것은 활력이 아니라 무기력을 나타낼 수도 있다. 매년 꼬박꼬박 나올지라도 똑같은 기계적인 공식을 반복한다면, 잉크는 채 마르지 않았더라도 생각은 케케묵은 것일 뿐이다. 삶은 다른 방식으로 한 기획을 메마르게 할 수 있다. 가장 흔한 방식은 목적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정기간행물이 세상을 얻되 영혼을 읽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성서의 표현에 빗댄 것=옮긴이) 종종 성숙은 한때는 당연히 무시했던 현상유지와 청중, 영향력을 갈망하도록 한다. 합리는 혁명을 포기하도록 요구하는 듯하고, 양식은 타협을 요구하는 듯하다. 또 품위는 유행을 더 눈여겨보게 한다. 이런 것이 `파티슨 리뷰'(Partisan Review)처럼 눈부신 마르크스주의 잡지를 중도 자유주의로 이끌고 끝내는 신보수주의에 도달하도록 했다.

 

먼슬리 리뷰의 기적은 모든 측면에서 살아있다는 그 사실이다. 이 잡지는 초기의 원동력을 잃지 않고 사회주의자의 약속을 지키면서 성년에 접어들었다. 계속 깨어있고 세상에 개입하면서 말이다. 이 비결은 과연 무엇인가?

 

1.

 

역사 유물론을 투박한 유물론과 혼동할 위험을 무릅쓰고 돈 문제부터 시작해보자. 누구도 먼슬리 리뷰에서 돈벌이를 기대하지 않았고 실제로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잡지를 꿈꾸는 것과 실제로 만들어 내는 것은 다르다. 실제로 한 출판물을, 급진적인 출판물도 마찬가지지만, 전국 규모로 만들어내기 위한 필수 조건은 그렇게 할 적절한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다. 인쇄기, 건물 임대, 전화, 전기, 난방, 발송, 그리고 직원 모두에 돈이 든다. 가끔씩은 작가에게도 돈을 지불해야 한다.

 

이성적인 마르크스 역사이론이라면 모두 기회가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은 다행이다. 먼슬리 리뷰는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치만 낮았다면 결코 생기지 못했을 것이지 때문이다. 먼슬리 리뷰에게 그 코는 F. O. 매티슨(Matthiessen) 교수의 예상하지 못한 재산 상속이었다.

 

하버드 대학시절 동료 폴 스위지(Paul Sweezy)를 포함한 그의 친구들은 잘 알듯이, 매티(Matty)는 미국문학 분야에서 뛰어난 학자다. 1941년 `미국의 르네상스'(American Renaissance)를 썼고 미국학을 확립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기독교인이며 마르크스주의는 거부했지만 이 이론을 바탕으로 통찰력을 자유롭게 발휘한 사회주의자다. 매티와 폴은 1935년 하버드대학에서 교수노조를 만들 때 함께 일했다.

 

1948년 늦가을 두 사람이 지지한 헨리 월리스(Henry Wallace)의 대통령 선거운동이 깨진 뒤에, 매티는 스위지가 하버드에 사표를 내고 몇 년째 살던 뉴햄프셔의 가족 농장으로 찾아갔다. 집 주변을 함께 산책한 뒤에 두 사람은 불가에 앉아 술을 마셨다. 매티는 우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캘리포니아에서 교통사고로 숨진 뒤 생각하지도 않던 상당액의 신탁자금을 상속하게 됐다고 말했다. 매티는 하버드대학 정교수인데다가 잘 나가는 작가이며 부양가족도 없었다. 그래서 돈이 필요 없었다. 폴은 자신이 리오 후버만(Leo Huberman)과 계속 이야기하던 그 잡지를 시작하고 싶었을까? 이 횡재 곧 3년 동안 매년 5천달러씩 모두 1만5천달러, 지금 돈으로는 7만5천달러에 해당하는 이 돈이 먼슬리 리뷰가 창간될 수 있도록 했다.(1)

 

 

2.

 

다른 말로 하면 돈은, 훌륭한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추측할 수 있겠지만, 사회 관계의 표명이었다. 이 돈은 여러분에게 거슬리는 잉여가치의 착취가 아닌 것이다. - 이 선물은 축적과정에서 몇 단계는 벗어난 것이었다. - 이 돈은 또 함께 활동하는 이들의 관계 곧 일종의 사회 관계다. - 이 관계는 먼슬리 리뷰가 그 때 이후 빚지지 않게 했다.

 

친구들 가운데 처음은 편집인들인 리오와 폴이었다. 둘은 배경이 다르다. 앞사람은 뉴욕 좌파가 배경이고, 뒷사람은 뉴잉글랜드의 고학력이 배경이다. 앞은 중하 계급 가정에서 태어났고 뒷사람은 상대적으로 특권층에 해당한다. 하나는 유태교인이고 다른 이는 개신교다. 그래도 둘은 대공황이 깊어갈 때 마르크스주의자가 됐다. 나치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은 직후다. 둘은 모두 런던경제학교(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공부했다. 또 둘 다 편집인인 동시에 집필자였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개입하기 직전, 둘이 만나 친구가 됐다. 전쟁동안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은 다시 가까워졌으며 새로운 종류의 사회주의자 잡지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스위지 보다 7살이 많은 리오 후버만(1903-1968)의 경력은 두 사람이 먼슬리 리뷰에 불어넣은 지적 경험과 정치적 경험의 깊이를 보여준다. 뉴저지에서 태어나 자란 후비(Huby)는 1926년 뉴욕대학을 나왔고 1933-1934년 영국에서 공부했으며 1937년 뉴욕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우리, 인민들(We, the People)'(1932)의 저자이다. 이 책은 그가 29살 때 출판된 대중적인 미국 역사책이다. `사람의 세속적인 재화(Man's Worldly Goods)'(1936)는 50만권 이상 팔린 일반 경제사 책이다. `노동 스파이의 부정한 거래(The Labor Spy Racket)'(1937)와 `위대한 버스 파업(The Great Bus Strike)'(1941)도 있다. 그는 몇 자리를 역임했다. 콜롬비아대학 사범대에 설치된 실험적 학과인 뉴칼리지의 사회과학과장을 1938-1939년 지냈고 1940-1941년에는 자유주의 신문 `피엠(PM)'의 노동 담당 편집자였으며, 1941-1942년에는 `유에스 위크(U.S. Week)'의 칼럼니스트였으며, 1942-1945년에는 전국해운노조의 대외관계 및 교육국장이었다. 또 1945-1946년에는 레이널 앤드 히치콕(Reynal and Hitchcock) 출판사의 실험적 팜플렛 담당 편집자를 맡았다. 발기인이며 대중활동가이며 정치평론가인 후버만은 그의 상당한 에너지를 먼슬리 리뷰에 쏟았다. 1968년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숨질 때까지.(2)

 

 

발행인 난에는 후버만과 스위지의 이름만 나왔지만, 이 잡지 초기에 상당히 중요한 인물들이 몇 명 더 있다. 하나는 오토 네이선(Otto Nathan)(1893-1987)이다. 그는 독일 이민이며 바이마르공화국의 고문이었으며 뉴욕대학의 경제학자이며 후비의 가까운 친구다. 세 번째 창간 편집인인 네이선은 표지에 이름이 공개적으로 나가는 것을 주저했다. 1949년 기명 기사를 몇 건 썼는데도 말이다. 첫해가 지나고 네이선은 둘과 다른 길을 갔지만, 짧은 재임기간동안 그가 이룬 업적은 또렷한 것이었다. 그 중의 하나는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글을 창간호에 실은 것이다. 이름 자체가 천재의 동의어나 다름없는 이 물리학자는 먼슬리 리뷰의 설립을, 사회주의에 대한 "자유롭고 거리낌없는 논의"가 "강력한 금기"에 짓밟힌 시기의 "중요한 대중에 대한 서비스"라고 평했다.(3)

 

 

초창기 15년 동안 훨씬 더 중요한 인물은 폴 바론(Paul A. Baran)(1910-1964)이다. 바론을 초창기 독자 대부분은 처음에 몰랐다. 히스토리커스(Historicus)라는 가명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이는 1939년부터 스위지와 다정한 친구 사이었다. 이 때는 모스크바, 베를린, 프랑크푸르트에서 공부한 뒤 유럽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때다. 1956년부터 실명으로 먼슬리 리뷰에 글을 썼으며 `성장의 정치경제학(The Political Economy of Growth)'(1957)의 저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책은 세계경제의 제국주의적 구조의 산물인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엄청난 차이를 설명한 것이다.

 

1960년대 초, "먼슬리 리뷰 학파"라는 말이 흔하게 거론되던 때, 물론 이 말을 듣는 이들로서는 언제나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바론의 이름은 거의 언제나 후버만, 스위지와 함께 거론됐다. `비즈니스 위크'는 1963년 "말뿐인 사회주의자가 아닌 트리오가 전혀 새로운 사회주의를 퍼뜨리고 있다. 이 사회주의는 철저하고 완고하며 과감해서 저개발국의 많은 좌파들이 본질적이라고 생각하는 과거의 사회주의와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이다."라고 썼다. 1948년 스탠포드에 들어가 1951년까지 있던 바론은 미국 대학의 경제학과에서 가르치는 이 가운데는 아마도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임을 밝힌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학과 동료들은 그를 싸늘하게 대했으며 이 대학 졸업생들의 압력에 겁먹은 학교 행정 당국은 그의 월급을 동결했다. 불면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린 그는 1965년 심장마비로 숨졌다. 그가 스위지와 함께 거의 마무리지은 책 `독점자본(Monopoly Capital)'(1966)은 다음 10년 동안 신세대 급진경제학자에게 이론적 참고점을 규정하는 것이 됐다고 할 수 있다.(4)

 

3.

 

이들 사상가를 하나로 묶는 것이며 먼슬리 리뷰 초기부터 생기를 불어넣은 핵심 과제는 바론이 "이성의 빛으로 자본주의 질서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라고 부른 것이다.(5)

 

 

창간 첫 호부터 먼슬리 리뷰는 당시 지배적이던 생각 곧 관리를 잘 하면 자본주의는 무한하게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도전했다. 먼슬리 리뷰는 계급 착취와, 사회적 필요보다는 개인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 조직에 반대했다. 편집자들과 기고자들은 가난함과 부와 수입의 불평등, 인종탄압, 제국주의, 낭비는 자본주의 사회가 물려받은 주변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내재적인 것이며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을 유지했다. 당시 지배적이던 자유주의적 가정에 반대해서, 먼슬리 리뷰는 사회적 불합리와 부정은 자본주의 국가와 자본주의적 소유관계 틀 안에서라면 좀더 나은 정책을 편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견지했다. 지식인의 임무는 할 수 있는 한 철저하게 현재의 질서를 비신비화하는 것이다. 바론의 말로 표현하면 "지속적이고 체계적이며 포괄적으로 이성을 통해 현실과 대면"하는 실천인 것이다.(6)

 

먼슬리 리뷰를 이끄는 빛이 거물 경제학자들이기는 했지만, 또 이 잡지가, 특히 70년대에, 정치경제학 분야에서 아주 뛰어나다고 알려졌지만, 이 잡지가 스스로의 사회이론을 펴면서 자본주의를 좁은 경제학 용어로만 묘사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강조할 값어치가 있다. 이 점은 바론과 스위지의 걸작인 독점자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에서 두 사람은 선진 공업국의 자본이 한줌의 거대 기업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성숙한 자본주의 경제를 "독점 자본주의"라고 묘사했다. 이들이 책을 쓸 당시는 비록 장기간의 전후 호황기였으며 주류 분석가들에게 수많은 환상을 심어준 시기였지만, 스위지와 바론은 스태그플레이션(경기는 침체하면서 물가는 오르는 현상 = 옮긴이)으로 향하는 강력한 체계적 추세를 밝혀냈다. 두 사람의 평가가 가장 독창적인 부분은 2차 대전 이후 스태그플레이션 경향을 상쇄하는 요소를 밝혀낸 것이다. 이 요소에는 자동차가 자극한 고속도로와 교외지역의 대규모 성장과 거대한 냉전시대 군비 지출, 광고와 판매 부문의 낭비적인 급증이 포함된다. 이 평가는 스위지가 나중에 표현했듯이 "용어의 일상적인 의미로 볼 때 경제학... 이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7)

 

핵심은 먼슬리 리뷰의 경제학 접근법이 당황하는 기색 없게도 역사적이고 비판적이며 정치적이라는 것만이 아니다. 스위지가 초기 근대 유럽에 관한 역사적 논쟁을 유발하고 바론은 정신분석학을 섭렵함으로써, 먼슬리 리뷰 그룹이 지성계의 관심에서 멀리 벗어난다는 것은 더군다나 핵심이 아니다. 또 이 잡지가 자연과학에서 인류학까지 넘나들고, 사설이 퀴즈쇼 추문 같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을 다루는 등 주제를 제한하지 않는다는 점이 아님은 물론이다. 중요한 점은 먼슬리 리뷰가 전체 자본주의 질서에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 경제적, 문화적, 이념적, 정치적, 사회적 질서 전체 말이다.

 

이런 태도는 깊은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다. 말하자면, 지식인의 책임은 권력(요즘 유행하는 적절하지만 고상하지 못한 용어를 쓴다면 `정책 벌레(wonk: 공부벌레식 표현 = 옮긴이)')의 상담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평가의 독립성을 철저하게 유지하고 바론이 "명확함, 용기, 인내, 사회의 이성적이고 사회주의적인 경향의 자발성을 믿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비록 저들이 좌파 지식인들을 라이트 밀스(C. Wright Mills)가 말한 "미국의 축하행사"의 밖으로 몰아낸다고 하더라도, 먼슬리 리뷰가 영향력이라는 신기루를 선택하는 대신 사실주의를 포기하지 않은 원천은 바로 사회주의자의 포부였다. "약간만 우리의 계획을 완화하자고 우리 스스로를 놀리지 말자"고 후버만은 썼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파멸의 길이다. 우리의 목소리를 드디어 사람들이 듣게 되더라도 우리의 주장이 왜곡되거나 더 이상 귀기울일 가치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우리가 무엇을 지지하는지 정직하고 분명하게 말하자."(8)

 

4.

 

하지만 재정적 수단, 재능과 경험, 값진 특성이 있는 조리 있는 전망, 이것만으로 먼슬리 리뷰의 편집인들이 첫 호 사설에서 주목했듯이 사회주의가 "더러운 말 이상이 거의 아닌" 시절 먼슬리 리뷰의 성공을 설명할 수 없다. 역사는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며, 이 잡지의 초기는 20세기 전체를 통틀어 미국의 사회주의자들에게 가장 나쁜 시절과 우연히 맞아떨어졌다. 매카시즘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1950년대에는 사회주의 잡지를 구독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먼슬리 리뷰는 평범한 포장지에 싸서 우편으로 배달됐다. 연합세력이 - 트루먼의 충성서약과 비-미국적 활동에 대한 하원위원회, 에드거 후버(J. Edgar Hoover)와 로전버그 사형집행, 급진적인 책을 쓰레기와 함께 밖에 내던지는 사람들로 이뤄진 - 공식적으로 비난하고 조사하고 죄를 뒤집어씌우는 분위기에서 먼슬리 리뷰는 살아남은 것만도 행운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 이상이며, 역설을 간과하면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모험적 시도 대부분은 열광 속에 시작됐다. 그것도 많은 이들이 급진화해서 충분한 독자층이 형성되어 있던 시기에 말이다. 또 수많은 거리 행진이 벌어지면서 혁명적 변환이 보통 때보다 훨씬 쉬워 보이던 때에 말이다. 먼슬리 리뷰는 1949년, 좌파가 곤두박질치듯 위축되고 수많이 위협받으며 빠르게 해체되던 때에 창간됐다. 그 결과 먼슬리 리뷰의 독자는 처음 450명에서 1950년 2500명으로, 1954년 6000명으로 늘어났다.

 

그 결과라고? 그렇다. 이것이 역설이다. 혼란스럽고 분열되고 위촉된 채 포위된 좌파의 좋은 부분이 설 수 있는 것은, 정확하게 말해서 침착하고 이성적인 분석, 단순하며 직설적인 언어, 다양한 부분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자신을 열어놓는 것, 타협 없는 독립성이 필요한 때다. 이것을 먼슬리 리뷰가 빠르게 본보였다. 먼슬리 리뷰의 독립된 마르크스주의는 전국을 휩쓴 바람을 거슬려 갔다. 그러나 이것은 완벽하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새로운 표현수단과 새로운 동아리를 찾는 멍든 미국의 좌파들에게 말이다. 이들은 실망과 조직적 실패의 역사까지 안고 있다.

 

5.

 

처음에 먼슬리 리뷰는 좌파들을 정확한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깃대였다. 이 잡지는, 대중전선(the Popular Front)이라는 정치적 경험을 함께 나누며 살았으며 어려운 때에 마르크스주의자의 실천과 이론의 다양한 면을 고요히 숙고하면서도 자신들의 사회주의 신념을 계속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찾는 이들의 관심과 정치적 신념을 반영했다. 이 독립된 사회주의 무리는 독자, 지지자, 글쓴이의 고갱이를 제공했다. 물론 이들은 이 잡지 성공의 전제조건이었다.

 

직접적인 배경은, 단지 6개월 전에 불행한 결론을 맺은 헨리 윌리스의 1948년 대통령 선거유세였다. 프랭클린 델러노 루즈벨트 밑에서 부통령을 지난 뒤 월리스는 1944년 상무장관으로 지명됐다. 루즈벨트가 숨진 뒤에 해리 트루먼 정부에서도 그는 그 자리에 계속 있다가, 갈수록 심해지는 워싱턴의 반공 대외정책을 비판함으로써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1948년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 것은 노동과 좌파와 새로운 진보당(Progressive Party) 자유주의자들의 뉴딜 제휴를 되살리는 시도를 뜻했다.

 

그는 별로 급진적이지도 않았고 특별히 예리한 정치 사상가도 아니지만, 인권 문제에 관해서 단호히 트루먼의 왼쪽으로 갔고 냉전을 확대하는 것에 반대했다. 초기에 대중의 지지는 상대적으로 실질적이었는데, 이는 노동계의 전투적인 좌파와 뉴딜 지지자가 확장한 것이었다. 이런 이들은 루즈벨트의 개혁을 지지하며 그 개혁을 확대하고 싶어하는 부류다. 대신 대통령선거 유세는 "진보주의"의 분열을 특징지었다. 트루먼은 월리스의 국내 관련 공약을 빼앗아가면서도 훨씬 더 분명하게 냉전시대 전사가 됐다. 이는 20세기 중반 주류 자유주의가 주도한 빨갱이 딱지 붙이기를 감싸안는 것의 전형이다. 결국 월리스는 몇몇이 예상한 5백만 내지 1천만표가 아니라 단 100만표를 얻었다.

 

먼슬리 리뷰를 창간한 무리는 월리스가 무소속 단독 후보로 나선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민주당 진영의 통탄할 표류는 이들에게 양당체제의 대안을 찾는 노력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만을 확인시켜줬다. 후버만은 심지어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독자정당을 세울 것"을 요구했다.(9) 편집자들은, 진짜 문제는 파시즘에 대항한 대중전선을 공산주의에 맞서는 강화된 십자군이 대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십자군은 종종 자유주의자들이 고안하고 실행하는 것이었다. 대공황기와 2차 대전 기간 좌파-자유주의 연합은 냉전 분위기 속에 깨어졌다.

 

월리스의 참패는 먼슬리 리뷰의 설립자들에게 두겹으로 비극적이었는데, 그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진정한 정치적 대안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위지와 후버만은 진보당의 전국 강령위원회에서 함께 일했다. 그들은 월리스가 진짜 급진적 공약을 멀리하는 실수를 범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트루먼이 자신의 국내 정책을 전용하게 놔뒀으며 진보당 지지자들이 사회 체제의 변화 필요성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이끌지 못했다. 월리스는 단순히 3번째 후보, 좀더 나은 후보였다.(10)

 

좌파에서는 많은 이가 먼슬리 리뷰의 편집인들과 같은 생각을 했다. 그들이 변화를 기대한 것은 1930년대 위대한 운동 덕분에 불붙었으며 2차 대전 이후 파시스트 권력의 종말과 미국 국내의 위대한 파업 물결과 함께 다시 불붙었다. 대부분의 급진주의자들은 반동이 그렇게 강하고 빠르게 나타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저항을 중단했으나, 많은 이들은 그 망령을 포기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실업자들의 거리 행진, 노동자들의 점거농성 파업, 인종차별 반대 캠페인, 파시즘과 전쟁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집회에 대한 그들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많은 것은 1948년 선거에 대해 비슷한 실망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었다. 1948년에 창간된 내셔널 가디언(The National Guardian)은 이런 환경을 언론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었으며, 이런 분위기는 먼슬리 리뷰에서 더 지적이며 분석적으로 가지쳤다.

 

6.

 

이런 종류의 의견 곧 사회주의적이지만 독립적이고 정당 때문에 제한 받지 않는 의견이 있다는 것은 10년 전이었다면 생각하기 어려웠다. 이는, 1930년대와 1940년대 말의 차이가 단지 뉴딜 연합의 붕괴가 아니라 공산당이 좌파에 끼치는 영향이 약해진 점이라는 사실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상당히 실질적이던 공산당은 1949년에도 여전히 의미 있었다. 특히 한 때 거대했던 사민당의 찌꺼기와 비교하면 더 그렇다. 그러나 자체 오류와 이에 대한 심한 공격 때문에, 공산당은 당원의 출혈을 겪었다. 소수파는 점점 더 다루기 힘든 존재가 됐다. 먼슬리 리뷰 초기에는 독자가 다양했지만, 많은 먼슬리 리뷰의 독자와 이 잡지에 글쓰는 이들은 공산당이 앞장선 인민전선의 베테랑들이었다. 또 그들은 가끔 이 역사를 자랑스럽게 되돌아본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적, 지적으로 독립된 좌파의 시대가 왔다는 후버만과 스위지의 견해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물론 동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11)

 

후버만과 스위지가 보기에, 공산당은 사회주의에 대한 충분한 교육을 실시하지 않았고, 사회주의자의 정세인식을 너무 자주 잃어버렸고, 자신의 주장을 완전하고도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는 잘못된 버릇이 있었다. 이들의 관점은, 간단히 말하면 언론인 I. F. 스톤(Stone)이 먼슬리 리뷰에 표현한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스톤은 먼슬리 리뷰에 "공산주의자들을 거의 언제나 우스꽝스런 구경거리로 만드는 바보처럼 보이기, 백치 같은 행동, 분열, 이교도 사냥"에 대한 싫증을 표현했다.(12)

 

그러나 스톤은 이런 말을 하면서 공산당을 진보정당에서 일소할 것을 제의하는 이들에게는 반대했다. 이것은 먼슬리 리뷰가 자연스럽게 도출하는 주장 곧 빨갱이 탄압 반대와 맥이 같은 것이다. 먼슬리 리뷰는 공산주의 활동을 불법화하려는 정부에 반대했으며, 개별 공산주의자에 대한 편견적인 판결에 저항했으며, 정치적 관계 하나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에게 정치적 연대나 교육기관 설립을 금지하는 것에 맞서 싸웠다. 그 예로, 먼슬리 리뷰의 지면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열려 있었다.(13)

 

이것은 적어도 단순한 정치적 태도가 아니라 새로운 좌파 문화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였다. 이 잡지 초기 포럼의 첫머리 사설 "좌파의 협동"에서, 편집인들은 빨갱이 사냥과 어떤 좌파세력을 비판의 대상에서 빼주는 것 모두를 거부했다. 협동을 통일과 구별한 뒤 이들은 미국 좌파의 "자본주의 으뜸의 요새를 포위하는 역사적 임무"는 누구에게나 겸손할 것을 요구한다고 썼다. 이 겸손이란 "사실을 바로 보고 비판을 받아들이며, 실수를 인정하고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려는 최소한의 의지"다.(14)

 

7.

 

협동은 단순히 먼슬리 리뷰의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이 잡지의 초기 집단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은 교우와 상호관련성의 비상한 정신을 말한다.(15)

 

공동체적 감수성을 누가 만들었나? 두 편집인과 함께, 우리는 두 명의 여성 이야기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초기부터 편집진에 참여했고 생이 끝날 때까지 먼슬리 리뷰에 남으려 했다. 그들은 거트루드 헬러 후버만(Gertrude Heller Huberman)(1902-1965)와 시빌 헌팅턴 메이(Sybil Huntington May)(1893-1978)다.

 

거트는 12명의 남매 가운데 막내였는데, 부모와 함께 3살에 러시아에서 이민 왔으며, 경리와 구독자 관리 담당이었다. 1925년 리오와 결혼했으며 이 일을 맡기 전에는 학교 선생님이었고 산업민주주의동맹(the League for Industrial Democracy)의 부기 담당이었으며, 노동진보본부(the Works Progress Administration)의 롱아일랜드 보육학교 교육부 관리자였다. 처음 3년 동안 이 잡지는, 그린위치 빌리지의 배로 거리에 있는 두 사람(후버 부부)의 3층 아파트와 마사 포도원에 있는 그들의 여름 별장에서 발행됐다. 이 때문에 여름별장 차고가 임시 사무실이 되기도 했다. 매달 거트는 잡지가 가득 든 가방을 우체국에 끌고 갔다.(16)

 

배서 단과대학을 졸업한 시빌 메이는 리오가 그린위치 빌리지의 도농실험학교에서 잠시 가르칠 때 리오를 처음 만났다. 당시 메이는 그 학교에 오랫동안 있었다. 다른 이들보다 나이가 많은 시빌은 먼슬리 리뷰가 창설되자 교사 일을 그만두고 사무기록 관리자와 통신 담당 겸 실수라고는 없는 교열자로 일했다. 그이는 거의 30년 동안 이 잡지를 실수가 사실상 없는 잡지로 지켰다.(17)

 

다른 말로 하면, 초기 편집진 곧 리오, 폴, 거트, 시빌은 절친한 친구 사이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같은 성향의 집단이 모였다. 콜롬비아대학과 하버드대학의 급진적인 대학원생들과 모임이 구성됐고 오스카 레인지(Oskar Lange), 마이클 캘리키(Michael Kalecki), 맥스 워너(Max Werner), 세드릭 벨프리지(Cedric Belfrage), 제임스 에론슨(James Aronson), 배로스 던햄(Barrows Dunham) 같은 좌파의 지성인, 거물들과 모임이 구성됐다.(18)

 

"편집자의 노트" 칼럼이 표지 안쪽 면과 맨 뒤 안쪽 면에 고정적으로 실렸는데, 편집국에서는 이를 "재치 있는 말" 약어로 NFTE라고 불렀다. 이 칼럼은 이 연합체에 초점을 맞추고 그를 확장하기 위해 터놓고 쓰는 형식을 띄었다. 편집인들과 친구들의 최근 소식이, 독자들에게 정기구독을 권하고 독자의 친구들에게도 권하라는 내용과 각 지역 도서관들에게 먼슬리 리뷰의 팜플렛과 책을 구입하라고 권하는 내용의 강한 권고와 함께 실렸다. 재치 있는 말들은 몇 년 동안 다른 좌파집단의 행사와 출판물에 대한 이 잡지의 일치운동적 연대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 집단은 캐시 부딘의 친구들부터 젊은 사회주의자들까지 다양했다.

 

1950~1951년 사이 겨울에 이 잡지 지지기반은 먼슬리 리뷰 동인 설립과 함께 더 틀을 갖췄다. 동인은 기부자, 자원봉사자, 시빌 메이가 오랫동안 조율한 정치 동맹으로 구성됐다. 이 집단의 첫 우두머리는 헨리 프래트 페이차일드(Henry Pratt Fairchild)(1880~1956)가 맡았다. 그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뉴욕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쳤으며 `수백만을 위한 경제학(Economics for the Millions)'(1940) 등을 썼다. 기금 회계 담당 앨레인 오스틴(Aleine Austin)은 1940년대 정치의 시대 출신 젊은이 집단을 대표했다. 앤디오크 단과대학을 졸업하고 테네시주의 하이랜더스쿨을 다닌 오스틴은 전쟁기간 전국해운노조에서 후버만을 도왔으며 1947년 콜럼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또 대중역사서인 `노동 이야기(The Labor Story)'(1949)를 썼으며, 그 후에 박사학위를 받고 몇몇 기관에서 미국역사를 가르쳤다.(19)

 

먼슬리 리뷰 동인은 꼭 필요한 자금원일 뿐 아니라 친목 모임의 구심점이었다. 한 강좌가 1951년 3월 시작됐는데, 이 때는 조슈아 쿠니츠(Joshua Kunitz)가 "사회주의자 문화의 이해를 향하여"를 거론한 때다. 1958년 가장 인기 있는 토론은 "지금 세계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주제로 영국 사회주의자 G. D. H. 콜(Cole)이 강연한 것이다. 이 토론은 사회주의자 C. 라이트 밀스가 사회를 맡았고 1100명이 참석했다. 1961년 3월에는 유명한 영국 경제학자 조언 로빈슨(Joan Robinson)이 "반미주의"에 대해 연설했다.

 

이런 것이 먼슬리 리뷰를 처음부터 지탱해온 노력과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 가운데는 젊은이와 나이든 이가 섞여 있고 익히 아는 사람과 놀랄만한 사람이 함께 있다. 이것은 그야말로 말 그대로 집단적인 기획이었으며, 그 정신은 공동 편집작업에 반영되어 있다. 이 공동 편집작업은 이 잡지를 특징짓는 것이다.(언제나 공동 편집됐다) 또 이 정신은 다른 방식 곧 아직도 잡지 사무실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열리는 갈색봉지(미국에선 간단한 점심거리를 갈색 종이봉지에 담아 다니는 것이 흔함 = 옮긴이) 점심에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이 사무실에서 편집진은 지구 구석구석에서 이날 뉴욕을 우연히 방문한 어떤 손님이라도 맞는다.

 

이 모두를 설명하는 다른 방법도 있다. 스위지, 후버만, 바론 - 1968년 이후 해리 매그도프(Harry Magdoff)도 똑같은 비중이며, 오늘날은 엘런 메익신스 우드(Ellen Meiksins Wood)도 같은데 - 이 세 사람은 먼슬리 리뷰에서 결정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잡지의 생각과 임무와 범위를 정교하게 하는 것을 책임졌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각종 사업이 제대로 되도록 해준 가족이 없었다면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가족은 친구들, 편집진, 위원회 구성원, 기부자, 기고자, 지지자, 독자, 정기구독자들이다.

 

시간이 가면서 초기 소집단에 새로운 사람들이 참여했고 새롭게 이어나갔다. 일부는 스쳐 지나갔고 일부는 계속 남았다. 이들의 경험 전체 곧 친교, 갈등, 재능, 불운, 반감, 욕구 등은 다음과 같은 기억 속에서만 엿볼 수 있다. 1962년 대학 여름 방학 기간에 나는 최저 임금을 받고 사소한 일을 하는 조건으로 먼슬리 리뷰에 들어갔다. 내 기억으로 주로 한 일은 책을 우편으로 보내고 송장을 보내는 것 등이었는데, 나는 그러면서 사무실의 분위기에서 묻어나는 마르크스주의의 지혜에 함빡 젖었다. (리오의 아랫입술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담배에서 뿜어 나오는 연기에도 흠뻑 젖었을 것이다.) 가끔 폴 스위지가 사무실에 나타나면 나는 욕망으로 말을 잊었다. 폴이 과연 젊은 인턴 사원의 머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기미라도 느꼈을까 싶다. 물론 나 또한 들어내지 않았지만.(20)

 

편집진에 마지막으로 합류한 이들 가운데 보비 오티즈(Bobbye Ortiz)(1918~1990)와 쥬디 루번(Judy Ruben)(1931~1997)이 있다. 오티즈는 아칸사스의 중류 유대인 가정 출신이며, 1933년 버나드에 다니기 위해 집을 떠났다. 여기서 이 여성은 반전, 반파시즘 집단에 참여했고 시카고대학으로 옮길 때까지 이 활동을 계속했다. 시카고에서는 철강노동자들의 조직화 운동을 지원했다. 1939년부터 1950년대까지 이 여성은 멕시코와 영국에 살았으며 미국으로 돌아와 1957년부터 후버만의 보좌역으로 일했다. 1968년부터 1983년까지 준편집인으로 있으면서 이 잡지를 남미 및 사회주의적 페미니스트 조류와 연결하는 일을 도왔다. 루번은 먼슬리 리뷰와 가깝고 그래서 리오, 시빌과 친구 사이인 좌파 가정에서 자라서 1974년에 합류했다. 그이는 자신의 임무 범위를 넘어 더 넓은 밖의 세계에서 이 기관의 대사가 됐다.(21)

 

간단히 말하면, 먼슬리 리뷰는 밑에서부터 일어난 중요한 활동의 산물인 것이다. 이 활동의 상당 부분은 여성들이 맡았지만, 이 사실은 이 전체 기획을 설명하는 역사적 접근, 언론적 접근에서 무시됐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자원자부터 준편집인까지 많은 이들은 중요한 일을 맡음으로써 이 잡지의 역사에 기여했다. 그들이 한 일은 계속 울려대는 전화 받기, 원고 읽기, 광고와 판촉활동에 참여하기, 편지에 답장을 쓰기, 잡지 편집하기, 위원회에 참석하기 등이다.(22)

 

8.

 

편집진의 단결과 도덕적 헌신이 얼마나 컸든 간에, 1949년은 미국에서 독립계 사회주의 잡지를 창간하기 어려운 때였다. 이 잡지의 정치관 - "사회주의적이며 마르크스주의적이며 공산주의가 아니지만, 공산주의자를 포함해 누구와도 목표와 방법에 합의하면 협력할 용의가 있는" - 그것은 빨갱이 위협이 온 나라의 상상력 속에 퍼져있을 때에 이 잡지를 예외적인 것으로 만들었다.(23)

 

1949년의 몇 가지 일을 고려해 보라. 워싱턴대학 평의원들은 1월에 공산주의 배경이 있다고 의심받는 3명의 교수를 해고하는 데 표를 던졌다. (이 때 스위지는 교수위원회에서 마르크스주의 전문가 자격으로 증언했다.) 캘리포니아대학에서는 6월에 평의원들이 대학 교수들에게 충성서약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스미스법 재판이 1월부터 10월까지 열렸고, 거기서 11명의 공산당 지도자가 정부의 폭력적 전복을 "가르치고 옹호하기로" 공모했다는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전직 외무부(국무부) 관리인 앨저 히스(Alger Hiss)가 전 공산당원 위태커 챔버스(Whittaker Chambers)에게 비밀 문서를 넘겨줬다는 혐의로 소송에 휘말린 과정에서 위증 혐의로 법정에 서자 여론은 집단 광기 수준에 이르렀다. 픽스킬을 벗어나 뉴욕시의 허드슨강 위쪽에서 1949년 9월 폴 로버슨(Paul Robeson)의 음악회에 참석했다가 나오던 사람들이 "유태인 새끼" "더러운 껌둥이" "모스크바 흠모자"를 외치면 1마일이나 늘어선 폭도들에게 맞아 피를 흘렸다. 많은 먼슬리 리뷰 기고자들이 자기를 "한 대학의 사회과학 전공 교수"식으로 표현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49년 9월호에는 모든 기고자들이 익명으로 쓰기를 원했다.

 

억압은 1949년 여름 매카시주의의 모양을 완전히 드러냈다. 이 때는 중국과 소련을 휩쓴 혁명이 핵폭탄을 터뜨린 때다. 1950년 웨스트버지니아의 윌링에서 한 연설에서 조세프 매카시(Joseph McCarthy) 상원의원은 중국을 "잃은" 원인은 루즈벨트와 트루먼 정부에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한 때문이라고 비난하려고 애썼다. 이교도 사냥이 이어졌다. 이는 깊어지는 냉전, 미국 제국을 확장하려는 시도, 노동과 뉴딜로 얻은 이익을 과거 수준으로 다시 떨어뜨리려는 산업계의 욕망, 전통적인 두 당의 대결구도 덕분에 더욱 기승을 부렸다.(24)

 

반공 정서 확대 시도와 그것의 실제적인 효과는 사회의 모든 구석에서 미국 좌파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급진적인 반대의견을 "전복"의 기미로 더럽힘으로써, 노조, 정부, 출판계, 영화, 텔레비전, 교육에서 힘을 제거하자는 것이다. 모든 급진주의자들은 생존 자체를 두려워하도록 내밀렸다. 빨갱이 탄압의 포괄적인 성격과 그것의 상징적인 의식은 공산당에 참여한 적도 없는 먼슬리 리뷰의 편집인들에게 찾아든 공격에서 잘 나타난다.

 

1953년 리오 후버만은 매카시의 정부 운영에 관한 상원 조사 소위원회에 소환됐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책에 대해 조사 받았다. 조사 대상 책의 상당 부분은 외무부가 도서관 비치를 위해 구입했다. 다른 많은 증인들이 하듯이,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기 않을 헌법의 권리에 호소하는 대신 그는 공산당원인 적이 전혀 없다는 말 이외에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았다. 이는 헌법의 언론의 자유 부분에 기초한 행위였다. 그의 태도는 `브리티시 뉴 스테이츠먼 앤드 네이션(the British New Statesman and Nation)'에게 칭찬을 받았다.

 

이런 일은 아주 드문 것이다. 만약 전례가 있다면 말이다. 헌법 제5 수정조항을 내세우는 증인들에게 상원의원들은 모독 발언이라고 위협했다. 의원들은 자신들의 법적인 권한을 넘어섬으로써 헌법 제1 수정조항을 훼손한다는 공격에 전혀 대비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점에 후버만의 힘과 중요성이 있다. 정부 소속이든 대학이나 사기업 고용인이든, 솔직하게 말했다고 해서 자신의 고용이 위협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단자, 특히 마르크스주의자의 언론 자유를 공개적으로 내세우려면 용기가 필요하지만 후버만은 누군가 시작해야 할 일이라고 느꼈다.(25)

 

스위지가 심문자들에게 나간 때는 1954년, 진보당에 관여한 것과 뉴햄프셔대학에서 강사 일을 한 것에 대해 뉴햄프셔 검찰총장에게 소환된 뒤다. 스위지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은 정부의 심문 대상이 안된다는 점을 들어 답변을 거부했다. 그는 카운티 차원에서 패소해 구속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법 절차에 따라 항소가 진행됨으로써 3년의 보석 결정으로 석방됐다. 1957년 미국 대법원은 기술적인 이유로 유죄판결을 뒤집었다. 이는 매카시 시대의 최악 상황을 개선하는 연이은 판결의 하나다.(26)

 

9.

 

매카시 시대의 의도하지 않은 유산 하나가 먼슬리 리뷰 출판부의 탄생이다. 출판부는 I. F. 스톤이 한국전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를 내줄 출판사를 찾지 못한 것에서 시작됐다. 유머와 신랄한 비판을 섞어 쓴 이 글은 한국전이, 당시도 진행되고 있었는데, 아무런 선동 없이 북한이 남침한 단순한 전쟁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으로는 침묵을 통해 충동했으며, 군사적으로는 수세적인 편제로 침략을 불러들이고, 마지막으로 국경에서 사소한 자극을 함으로써 시작됐다"고 내비쳤다. 또 이 전쟁의 정확한 근원에 대한 진실은 "친 공산주의자와 반공산주의자간의 논쟁의 어두움 속에 감춰져 있다"고 내비쳤다.(27)

 

스톤은 1933년부터 1939년까지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에서 일했으며 1940년에서 1946년까지는 `더 네이션'의 워싱턴특파원이었다. 또 1942년부터 1952년까지는 `피엠'(PM), `더 스타(The Star)', `데일리 컴패스(the Daily Compass)' 등 뉴욕 지역 일간지에 글을 썼다. 풍부한 경험과 능력과 기존 독자가 있는 언론인이 자신의 책을 출판할 수 없었다는 것은 문화계에서 냉전이 영하로 떨어졌음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스위지와 후버만은 이 책이 햇빛을 봐야한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한국전의 감춰진 역사(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1952)는 먼슬리 리뷰 출판부가 낸 첫 번째 책이 됐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또 다른 아시아의 전쟁으로 양심이 형성됐으며 냉전시대 정설의 지혜를 덜 받아들일 학생들과 학자들이 다시 찾아왔을 때, 스톤의 것 같은 책들은 비판적 학문의 숨은 고전으로 명성을 얻었다. 스톤의 책은 이 책을 낸 출판사에도 틀을 형성해줬다. 먼슬리 리뷰 출판부는 초기 15년 동안 스위지와 후버만의 밑바탕이 되는 작품 외에도 주류 출판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미국 외교정책 비판서들을 출판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책에는 하비 오코너(Harvey O'Connor)의 `석유제국(The Empire of Oil)'(1955), 폴 바론의 `성장의 정치경제학(The Political Economy of Growth)'(1957), 윌리엄 애플먼 윌리엄스(William Appleman Williams)의 `미국, 쿠바, 카스트로(The United States, Cuba, and Castro)'(1963) 등이 포함된다.

 

추방된 책들이 주 출판물이었다는 점이 먼슬리 리뷰 출판부가 출판의 관점에서 볼 때 "패배자"였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윌리엄 힌턴(William Hinton)이 쓴 `판션(Fanshen)'을 보자. 힌턴은 1947년부터 1953년까지 중국에서 살았는데, 처음에는 국제연합 관계자로 일했다. 1949년 혁명 이후 그는 농촌의 토지 개혁을 목격하고 1천쪽 이상을 메모했다. 그가 매카시주의가 극에 달했을 때 귀국하자, 그의 메모를 세관이 즉각 압수했다. 오랜 법정 싸움 끝에 힌턴은 1958년 메모를 되찾았고 곧바로 필라델피아에서 트럭 수리공으로 일하면서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책을 1964년 초 모두 썼지만 3년 동안 보스턴과 뉴욕의 무역 출판사들에게 보여주고 퇴짜를 맞았다. 몇 사람은 솔직하게 책이 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해줬다. 그가 이 글을 먼슬리 리뷰 출판부에 넘겨준 뒤, 양장본은 품절 됐다. (그렇게 되자) 빈티지(Vintage)가 페이퍼백의 출판권을 힌튼과 먼슬리 리뷰에게 저작권료를 절반씩 주는 조건으로 샀다. 빈티지는 20만권이나 팔았고 이 책은 아직도 캘리포니아대학 출판부에서 나오고 있다.(28)

 

1960년대 중반까지 먼슬리 리뷰 출판부는 완전한 관리자인 후버만이 감독했다. 하지만 규모가 커지고 리오가 건강이 나빠지면서 그와 스위지는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섰다. 1967년 자신들이 찾던 사람을 드디어 발견했다. 해리 브레이버먼(Harry Braverman)(1920-1976)이다. 그전 7년 동안 그는 뉴욕의 그로브 프레스에서 편집인, 부사장, 총관리자를 거치며 성장했다. 브룩클린에서 나서 성장한 그는 조선 및 철강업에서 노동자로 일한 경력이 있다. 그는 그 때 노조조직책이었고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다. 1940년대와 1950년대 사회주의노동자당(the Socialist Workers Party)의 당원으로 트로츠키주의자였던 그는 버트 코크런(Bert Cochran)이 이끄는 노조운동가로 주로 구성된 소모임에 참여했다. 이 모임이 1953년 사회주의노동자당과 갈라선 이후 그는 이 모임이 해체된 1960년까지 기관지 `미국 사회주의자'를 편집했다. (먼슬리 리뷰와 `미국 사회주의자(the American Socialist)'는 1958년 7/8월호 "미국의 노동 현실(American Labor Today)"을 공동으로 낸 적도 있다.) 노동계급과 사회주의 경험의 깊이 덕분에 브레이버먼은 자신의 역작 `노동과 독점자본(Labor and Monopoly Capital)'(1974)을 쓸 수 있었다. 이 책은 관리자들의 통제와 노동현장에서 기술이 자리잡을 여지를 없애기를 훌륭하게 비판했는데 먼슬리 리뷰 출판부 전체 기간 내내 잘 나가는 책이 됐다.(29)

 

브레이버먼은 10년 동안 먼슬리 리뷰 출판부를 이끌면서 창조적인 특징을 찍었다.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니콜라이 부카린(Nikolai Bukharin), 칼 코쉬(Karl Korsch) 같은 이들의 마르크스주의 고전을 번역해 출판하고 영향력 있는 영어판 "소총"을 출판하면서 전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급진적 책 출판사가 된 것이다. 이런 소총에는 앤드리 군더 프랭크(Andre Gunder Frank)의 `자본주의와 라틴아메리카의 저개발(Capitalism and Underdevelopment in Latin America)'(1967), 체 게바라(Che Guevara)의 `쿠바혁명전 회고록(Reminiscences of the Cuban Revolutionary War)'(1968), 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의 `마르크스 경제이론(Marxist Economic Theory)'(2권 짜리, 1970), 크와메 느크루마(Kwame Nkrumah)의 `양심주의(Consciencism)'(1970), 다니엘 게랭(Daniel Guerin)의 `아나키즘(Anarchism)'(1971), 루이 알튀세(Louis Althusser)의 `레닌과 철학(Lenin and Philosophy)'(1971), 에임 세이세르(Aime Cesaire)의 `제국주의론(Discourse on Colonialism)'(1972),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Galeano)의 `라틴아메리카의 열린 혈관(Open Veins of Latin America)'(1973), 애밀커 카브럴(Amilcar Cabral)의 `근원으로 돌아감(Return to the Source)'(1973), 사미르 아민((Samir Amin))의 `세계적 규모의 축적(Accumulation on a World Scale)'(1974), 레이너 라이터(Rayna Reiter)가 엮은 `여성 인류학을 향한 시선집(the anthology Toward an Anthropology of Women)'(1975), 샤를 베텔랭(Charles Bettelheim)의 `소련의 계급투쟁(Class Struggles in the USSR)'(2권 짜리, 1976) 등이 포함된다.

 

브레이버먼의 `미국 사회주의자' 시절 동지이며 그로브 프레스와 랜덤 하우스에서 일한 줄스 겔러(Jules Geller)(1913-1990)가 1976년 출판부 관리자 자리를 이어받아 1983년까지 일했다. 겔러 시절에 출판부는 중요한 책들을 내놨는데, 할 드레이퍼(Hal Draper)의 `칼 마르크스의 혁명이론(Karl Marx's Theory of Revolution)'(4권 짜리, 1976-1990), E. P. 톰슨(Thompson)의 `이론의 빈곤(The Poverty of Theory)'(1978), 다니엘 싱어(Daniel Singer)의 `그다니스크로 가는 길(Road to Gdansk)'(1981) 등이 그런 것들이다.

 

겔러를 이은 이는 수전 로스(Susan Lowes)다. 그는 1995년까지 일은 했다. 로스는 브레이버먼과 함께 그로브 프레스에서 먼슬리 리뷰 출판부로 왔으며 겔러 밑에서 실무 편집자로 일했다. 그 때 몇가지 좋은 연재물을 내놨다. 새 여성주의 총서, 모퉁이돌 총서 등이다. 그이가 책임자로 있던 시기, 먼슬리 리뷰 출판부는 명성이 높은 책들을 계속 내놨는데, 앤 스니트나우(Ann Snitnow), 크리스틴 스탠슬(Christine Stansell), 쉐런 톰슨(Sharon Thompson)이 얽은 `욕망의 힘 전집(the collection Powers of Desire)'(1983), 엘리자베스 유언(Elizabeth Ewen)의 `달러의 땅에 이민 온 여성들(Immigrant Women in the Land of Dollars)'(1985), 코널 웨스트(Cornel West)의 `마르크스 사상의 윤리적 차원(The Ethical Dimensions of Marxist Thought)'(1991), 존 벨라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의 `허약한 행성(The Vulnerable Planet)'(1994), `부드러운 분노의 그림자: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과 부사령관 마르코스의 편지와 성명(Shadows of Tender Fury: The Letters and Communiques of Subcomandante Marcos and the Zapatista Army of National Liberation)'(1995) 등이 그런 것들이다.

 

오늘날, 먼슬리 리뷰 출판부는 상근 총 책임자가 없고, 자율적인 부서들과 편집진 공동 편집위원회가 결합해 관리하고 있다. 출판부는 지금도 먼슬리 리뷰 편집인들의 중요한 저작과 다른 능력 있는 작가들의 글을 주로 출판하고 있다. 능력 있는 작가 가운데 올해 출판물 목록에서 4명만 꼽는다면 엘런 메익신스 우드, 다니엘 싱어, 폴 불(Paul Buhle), 아돌프 리드(Adolph Reed)가 있다.

 

10.

 

출판부의 성장은 이 기관의 좀더 일반적인 사실들을 반영하고 있다. 먼슬리 리뷰는 트루먼-아이젠하워 시대를 뒤로 하고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분위기 속에서 번영했다. 심한 침체기, 상대적인 자본주의의 안정과 성장기, 정치적 침묵기, 자유주의 이념의 공감대가 지배한 10년의 시기를 견딘 뒤 먼슬리 리뷰는 옛 좌파의 붕괴와 새 좌파의 출현 사이를 잇는 연결고리를 제공했다.(30)

 

먼슬리 리뷰가 좀더 옛 좌파적인지 새 좌파적인지를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둘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말이다. 아마도 이는 이 명칭이 어느 정도는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먼슬리 리뷰가 새 좌파에 공감하며 처음부터 새 좌파의 핵심 신조를 똑같이 갖고 있었으며, 1960년대의 운동과 사건들과 상호 작용하면서 오랜 시간동안 그 것을 더 확고히 함으로써 서로 겹쳐지는 좌파 몇 세대를 융합하는 장소를 제공한 옛 좌파 잡지라고 하는 것이 공정할 듯하다.

 

명백하게도 편집인, 독자, 기고가들은 옛 좌파 출신이다. 1950년대 먼슬리 리뷰 지면에 등장한 이들은 케리 맥윌리엄스(Carey McWilliams), 앤 브래든(Anne Braden), 애그니스 스메들리(Agnes Smedley), 애나 루이 스트롱(Anna Louise Strong), 에드거 스노우(Edgar Snow), 스탠리 무어(Stanley Moore), 조셉 스태러빈(Joseph Starobin) 등이며 가끔은 장 폴 사르트르같은 외국의 권위자들도 등장했다. 절충적인 독립계 급진주의자 스코트 니링(Scott Nearing)의 칼럼 "세계의 사건"이 1953년부터 1972년까지 실렸고 옛 좌파적 배경이 있는 기고가들 곧 어네트 루빈슈타인(Annette Rubinstein)과 칼 마르자니(Carl Marzani) 같은 이들도 1990년대까지 글을 계속 썼다. 물론 먼슬리 리뷰의 편집자들은 사회주의에 회의적이며 마르크스주의를 경제적 조잡함과 연결시키는 새 좌파 부류와는 다르다.(31)

 

반면 잡지에 몇 가지 새 좌파적 특성도 있다. 1956년 먼슬리 리뷰 편집자들은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하고 후루시초프가 스탈린의 범죄에 대해 폭로하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1955-1956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코트에 즉각 반응했고 후속 시민권 운동에 고무됐다. 또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W. E. B. 뒤 브와(Du Bois), 설리 그래험(Shirley Graham), 올리버 크롬웰 콕스(Oliver Cromwell Cox), 제임스(James)와 그레이스 리 보그스(Grace Lee Boggs), 콘래드 린(Conrad Lynn), 러레인 핸스베리(Lorraine Hansberry)의 글을 출판했다. 물론 1960년 말콤엑스도 인터뷰했다. 정당의 조정에서 벗어난다는 잡지의 신조는 새 좌파의 문화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또 빨갱이 사냥에 반대하고 좌파 누구든 지원한다는 신조는 전체를 끌어안는다는 신념 및 "반 반공주의" 신조와 맥이 같은 것이었다. 뒤의 두 신조는 냉전시대 자유주의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 초기 새 좌파가 내세운 것이다.

 

그래서 새 좌파의 괜찮은 부문에서 이 잡지를 필독 잡지로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실로, 이 잡지가 과거 좌파 경험의 자연스런 발전인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초기 새 좌파의 핵심 인물 몇 명이 이 잡지에 글을 쓰게 된 과정은 놀라운 것이다. 스토턴 린드(Staughton Lynd), 윌리엄 애플먼 윌리엄스가 먼슬리 리뷰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을 1952년이다. 사람들이 그랬을 거라고 기대한 1962년부터가 아니라 훨씬 이전인 것이다. C. 라이트 밀스는 1958년 먼슬리 리뷰에 심리학에 대해 글을 썼다. 그 뒤 2년 동안 이 잡지 편집인들은 레이몬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와 랄프 밀리밴드(Ralph Miliband)의 글을 실음으로써, 당시까지는 두 사람식 영국 사회주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미국 독서계에 둘을 소개했다. "그는 언제나 약간 떨어져 있었고, 어떤 부분에도 거의 `속하지' 않았다." E. P. 톰슨이 레이몬드 윌리엄스가 숨졌을 때 쓴 글이다. "그는 60년대 말 나에게 미국의 먼슬리 리뷰가 가장 가깝게 느껴진다고 말했다."(32)

 

다른 말로 하면, 아주 초기부터 먼슬리 리뷰는 국내외 새 좌파와 연결될 수 있었다. 니나 세라노(Nina Serrano)가 회상하듯, 이 잡지는 1950년대 말에 이미 위스콘신주 매디슨에서 불어오는 변화의 한 부분이었다.

 

공동 편집인인 경제학자 폴 스위지는, 물론 좌파 대학생들에게 다가가기는 했지만, 대학 밖에서 말하게 됐는데도 영향력이 심대했다. 우리 대부분은 그를 만나고 헤어질 때 먼슬리 리뷰의 구독자가 되어 있었다. 그 뒤 몇년 동안 이 잡지의 글들은 자주 생동감 넘치는 토론의 중심에 있었다. (스위지의 동료 편집인은 리오 후버만이었는데, 그의 책 `사람의 세속적인 재화'는 내가 10대 때 감동을 줬다. 1960년대 그가 숨지기 몇년 전에 만났을 때 나는 참으로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을 만났다고 확신했다.)(33)

 

이 잡지와 젊은 급진주의자들이 만나는 지점은 대외정책이었다. 새 좌파처럼 먼슬리 리뷰는 냉전에 반대하고 뜨거운 논쟁을 벌이면서 스스로를 갖춰갔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베트남 이야기를 듣기 훨씬 전에, 또 베트남전쟁이 완전히 미국의 전쟁이 되기 전에, 편집인들은 동남아 분쟁의 방향을 정확하게 내다봤다. "우리는 반공주의가 식민주의, 다른 나라에 대한 간섭, 침략 등을 포함한 행동을 정당화한다는 태도를 취할 것인가? 이 길에는 - 이에 대해 확실히 하자 - 마침내 온 나라를 완전한 재앙으로 이끌어 가는 전쟁이 있다."(34) 마찬가지로 1960년 7/8월 특별호 "쿠바: 혁명 해부(Cuba: Anatomy of a Revolution)"에서 - 나중에 책으로도 나왔다 - 후버만과 스위지가 1959년 혁명 뒤 몇번 방문해서 이 섬나라의 변화상을 아주 빨리, 적시에 묘사했다. 쿠바가 전통적인 공산주의와 미 제국을 동시에 벗어나는 길을 대표할 여지에 흥미를 느끼는 많은 젊은 급진주의자들은 이 특별호를 필수적인 읽을거리로 여겼다.

 

새 10년이 모습을 드러내자, 다른 새 좌파의 이름들이 등장했다. 제임스 와인슈타인(James Weinstein)(1963), 토드 지틀린(Todd Gitlin)(1964), 칼 오길스비(Carl Ogelsby)(1966) 말이다. 나중에 우파로 돌아선 로널드 러도쉬(Ronald Radosh)와 데이비드 호로위츠(David Horowitz) 등의 글도 등장했고, 지금도 여전히 좌파의 길을 지키고 있는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의 글도 나타났다. 대중을 대상으로 지식인들이 만드는 혁명적인 사회주의 잡지로서, 먼슬리 리뷰는 새 좌파 학생들에게 호소력을 얻었다. 이런 이들은 고학력이지만, 나름의 지적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데는 보통 실패한 이들이다. 이에 대응해 먼슬리 리뷰는 자신들의 분석을 발표할 진지한 매체를 찾는 새 좌파 작가들도 끌어들였다. 실로, 새 좌파는 즉각적으로 스위지와 바론의 `독점자본'(1966)을 받아들였고, 조앤 바컨(Joanne Barkan)은 이에 대해 "표준 문서, 학습 모임에서 `모두' 읽고 토론하며 급진적인 친구들에게 권하는 책 가운데 하나"라고 썼다.(35)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노동 계급에 대한 이 잡지의 태도는 새 좌파의 태도처럼 복합적이었다. 이 주제를 먼슬리 리뷰에서 이끄는 작가들은 - 후버만, 스위지, 브레이버먼 -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전후 미국 노동계급의 보수주의와 타협했다. 물론 점차 노동계급이 급진화할 가능성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몇몇 중요한 경우 이 잡지의 작가들은 노조가 체제에 흡수됐다고 여기고, 혁명적 변화의 원천을 다른 곳에서 찾았다. 예를 들어 이미 많이 논의된 1963년 특별호에서, 제임스 보그스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조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막을 당겼다"며 "이 노조는 너무 오래 유지하면서 유용성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또 노조가 "러시아의 노조가 러시아 정부를 위해 하는 기능과 똑같은 기능을 오늘날 수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전갈은 - 계급투쟁이 노조 밖에서 노조에 반해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 - 설득력 있는 혁명적 흑인 생산직 노동자가 제시함으로써 더욱 힘있는 것이었다.(36)

 

11.

 

미국 좌파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사회주의와 혁명으로 돌아선 것은 모순적이었다. 자본주의 밑에서 해방이 불가능하다는 이성적 인식을, 무자비한 모험주의와 분파적인 동료 죽이기 경향과 결합한 것이다. 기민함과 병적임은 당시 제대로 분리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다. 외국의 반식민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시선을 돌린 흑인 해방투쟁에 의해 부분적으로 촉진됐고 1968년의 전세계적 분출의 힘을 얻은 새로운 수준의 급진화는 먼슬리 리뷰의 성장을 더욱 촉진했다고. 많은 이들이 1968년에서 1973년 사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로 돌아섰는데, 마르크스주의가 세계적 사건을 이해하는 틀을 제공하고 저항할 수 없는 정치적 행동 지침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또 새 좌파의 조직적 붕괴는 견고한 소수 활동가들에게 좀더 진지한 마르크스적 분석과 사회주의 정치학을 찾도록 자극했다. 이 두 현상 덕분에 먼슬리 리뷰의 유료 구독 부수는 1970년 9072부로 늘었고 1977년에는 1만1500으로 꼭대기점에 이르렀다.

 

이 잡지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호소력을 높인 것은 부분적으로 대중의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에 뿌리가 있다. 이는 더 젊은 독자들에게 좀더 세련된 제국주의 분석을 찾도록 자극했다. 미국이 왜 동남아시아에서 전쟁을 벌이는지 대답을 찾는 학생들의 욕구가 바로 해리 매그도프가 자신의 책 `제국주의 시대'(1969)에 쓴 것을 바탕으로 먼슬리 리뷰에 한 묶음의 글을 쓰도록 자극했다. 외국개입을 특정한 나라와 관련한 물질적 이해를 엄밀하게 계산한 결과로 거칠게 해석하는 것에 반대함은 물론 미국 외교정책의 경제적 바탕을 무시하는 주류에 반대하면서 매그도프는 제국주의가 (여러 대안 가운데서) 선택한 정책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본질의 한 부분이며, 전세계에 대한 투자 방안을 계속 유지하려는 욕구를 필연적으로 유발하는 국제적 틀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했다.(37)

 

후버만이 숨진 뒤 매그도프가 스위지와 공동 편집인이 되자, 잡지의 경제 문제 관심과 이전에 이미 인상적인 수준이던 제국주의 분석과 제3세계 문제에 대한 헌신이 더욱 강화됐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앤드리 군더 프랭크, 사미르 아민, 기타 먼슬리 리뷰와 관계하는 이들은 종속이론을 더 확대했는데, 이 이론은 폴 바론이 처음 주창했다. 그는 이를 주창하면서 제3세계가 개발이 덜 된 것은 그들이 자본주의 전 단계이거나 근대 이전 단계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곧 근대 제국주의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북쪽의 놀라운 풍요와 남쪽의 빈곤은 무관하지 않다. 제3세계는 자본주의 체제의 필수적인 주변부이기 때문에 뒤진 것이지, 이들이 마술적인 "도약"에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뒤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 혁명적인 제국 이탈만 제3세계를 저개발에서 해방할 수 있다고도 했다. 이런 견해 덕분에 먼슬리 리뷰는 전세계에서 독자를 끌어들였고 명성을 얻었다. 많은 먼슬리 리뷰 독자는 앨런 영과 유사한 경험이 있다. 그는 스탠포드대학에서 바론에게 배웠으며 "남미의 좌파 그룹 어디에든지" 바론의 이름만 제시하면 "즉각적인 칭찬과 존경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38)

 

미국의 새 좌파들이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의 무장 투쟁을 더 인식할수록 먼슬리 리뷰가 민족해방투쟁과 혁명 전략의 원천으로 인식됐다. 영향력이 큰 문서 하나로 "혁명 내부의 혁명?(Revolution in the Revolution?)"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리지스 데브레이(Regis Debray)가 책 한권 분량으로 쓴 게릴라 전술 설명인데 1967년 여름 특집호에 처음 등장했으며 다음해 여름 특집호는 그에 대한 대단히 비판적인 반응들로 채워졌다. 잡지 편집인들의 라틴아메리카 정치 발전에 대한 평가 가운데 특히 날카로운 것은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의 당선 이후 칠레에 대한 논문이었다. - 아옌데의 취임식에는 스위지와 오티즈가 참석했다. 편집인들은, 1973년 쿠데타가 아옌데를 포함한 칠레의 좌파 전체에 대한 비극적 학살을 부르기 전에 칠레 정부에 군대에 대항할 민간 무장세력을 형성하도록 많은 이들과 함께 촉구했다.(39)

 

12.

 

20세기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 던진 최대 딜레마는 소련 같은 나라의 등장일 것이다. 이런 나라는 대규모 혁명적 분출 이후 형성됐으며 계급구조, 이념, 사회조직에서 자본주의와 전혀 다르지만 노동계급 민주주의는 없었다. 먼슬리 리뷰는 이런 규정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나?

 

한 측면에서, 편집인들의 사회주의 개념규정은 50년 동안 변함없이 유지됐다. 이들에게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부정이며 소유관계의 철저한 변화이며, 생산의 조직적 법칙으로 작용하는 사적 이윤의 폐지다. 여기, 저기서 개혁을 추구하면서도 먼슬리 리뷰는 단호히 사민주의 개혁론의 왼쪽에 있었고 자본주의 기구, 제국주의와 정치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자멸적 타협이라며 반대했다.

 

먼슬리 리뷰의 사회주의 정의가 포괄적으로는 이런 식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히 성숙했다. 창간 사설 "우리가 서있는 곳"에서 편집자들은 공공이 경제를 조망할 위치를 차지하는 것과 포괄적 계획의 존재를 사회주의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어느 나라든 비판하는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소련에서 1차 5개년 계획을 수립됨으로써 사회주의가 구현됐다고 믿었다. 그래서 "해가 지나면서 힘을 얻고 열기를 더하며 실제로 작동하는 사회주의 체제"라고 자신 있게 썼다.(40)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며 편집인들은 공적 소유와 계획이 사회주의의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변화의 원인 하나는 1956년부터 나타난 소련에 대한 더 비판적인 태도다. 탱크가 헝가리로 밀려들어간 뒤 편집인들은 "소련이 세계 사회주의 운동에서 도덕적 지도력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고 썼다. 먼슬리 리뷰는 이를 혁명의 확대 사례로 본 미국 외무부와 공산주의자에 정확히 반대로 평가했다. 1960년대 중반에 편집인들은 소련이 탈정치화했으며 그래서 비혁명적인 사회라고 주장할 채비를 했다. 또 소련이 "한편의 정치적 관료와 경제 관리자로 구성된 지배층과 반대편의 대중 사이가 크게 벌어진" 심하게 계급이 분리된 나라라고 주장할 채비를 했다.(41)

 

이런 관료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에 대한 명백한 비판은 편집인들을 먼슬리 리뷰 창간호에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다음과 같은 도전에 다시 직면하게 했다.

 

... 계획 경제는 아직 사회주의가 아니다. 이런 계획경제를 개인의 완벽한 노예화가 뒤따를 수 있다. 사회주의의 성취는 극히 어려운 사회-정치적 문제 몇 가지에 대한 해답을 요구한다. 정치, 경제 권력의 원대한 중앙집중화의 관점에서 관료주의가 전능하고 오만해지는 것을 막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하며, 그것으로 관료주의의 힘에 대항하는 민주적 대항세력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나?(42)

 

아인슈타인처럼 편집인들은, 특히 이 문제를 가장 광범하게 다룬 스위지는, 스위지가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자 샤를 베텔랭과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언급한 "실제 생산자가 자신들의 생산활동의 조건과 결과를 지배하는 사회"를 사회주의가 필요로 한다고 결론 맺게 됐다.(43)

 

이런 이해에 입각할 때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 체계는 과도기적이었다. 자본주의를 넘어섰지만 아직 사회주의는 아닌 것이다. 실제로 많은 것이 자본주의 쪽으로 되돌아왔다. 대표적인 것이 시장을 조절자로 보고 다시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나라 특히 쿠바와 중국이 좀더 진보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편집인들은 생각했다. 중국의 문화혁명을 편집인들은 혁명을 겪은 사회에서 떠오르는 특권 계급의 위험에 대한 모범적 대응으로 여겼다. 그들은 체 게바라를 따라서 도덕적 또는 집단적 자극을 강제와 개인적 욕심의 대안으로 보고 옹호했다.(44)

 

바로 이런 감성이 1970년대를 위한 전략으로 여겨진 유럽공산주의에 대한 편집자들의 비판을 자극했다. 서방의 이론 속에 자리잡고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와 덩의 중국 같은 나라의 전략으로 자리잡은 시장 사회주의에 반대하고, 1989년에서 1992년까지 소비에트 진영의 붕괴가 사회주의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주장에 저항한 것도 바로 이 감성 때문이다. 이런 감성은 또 후버만과 스위지에게 각각 다른 방식으로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반대하게 했다. 후버만은 이를 가리켜 "도덕적, 정치적, 이념적" 재난이라고 선언했다. 1982년 스위지는 폴란드의 노동자 운동 연대노조(솔리타르노스크) 탄압에 항의했다. 이 사건은 두고 "소련 진영의 공산 정권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근대 노동계급 운동의 목표로 늘 설정하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완고한 계급구조의 구현인 동시에 그 구조의 지킴이"라는 점을 "의심의 그림자를 벗기면서" 증명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1989년 이 잡지 창간호의 사설 "우리가 서있는 곳"을 되돌아보면서, 스위지와 매그도프는 당시의 제안 대부분을 지지한 뒤 이런 명백한 규정을 덧붙였다. "사회주의의 잠재성을 키우고 개발하며 실현하려면 민주주의라는 말의 본래적인 의미 바로 그대로 민주적이어야 한다."(45)

 

이 잡지의 사회주의 평가 변천은 독자들이 이 잡지를 높이 평가하게 하는 특징 상당수를 반영한다. 특히 경험에 맞춰 변화할 수 있는 능력과 자본주의 폐지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헌신을 반영한다. 많은 독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양한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이 잡지의 장기적인 태도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먼슬리 리뷰가 공산주의 세계의 이 부분 또는 저 부분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기울어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다른 이들은 공산주의 국가와 그 나라의 정책에 대한 먼슬리 리뷰의 가장 조심스런 비판조차 정당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편집인들의 평가가 독립적이며 성실하다는 점을 의심하는 이는 드물었다.(46)

 

13.

 

무엇이 먼슬리 리뷰가 다양한 좌파와 더 넓은 집단에서 존경을 받을 수 있게 했나? 적어도 5가지 성격이 떠오른다.

 

첫째, 평이하고 어리석지 않은 마르크스주의다. 처음부터 먼슬리 리뷰의 논조는 중용을 지키고 신중하며 종교적 성향이라기 보다는 합리적인 것이었다. 다른 것과 구별되는 이 잡지의 지식 생산 방식 - 대학이나 정당에 의존하지 않고 자원봉사자들의 지원을 받는 기관 - 은 지면이 전문용어, 교조, 위선적인 말투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유지되는 데 도움을 줬다. 정보를 제공하지만 현학적이지 않으며 사상이 세련됐지만 양식은 단순하고 신중한 명료함에 충실하면서 이 잡지는 투명함과 성실함을 추구하려 애썼다. 후버만이 1950년에 썼듯이, "정보를 밑바탕으로 하는 선동은 지속력이 있는 사회주의 개종자를 만들지만, 훈계를 바탕으로 한 선동은 그렇지 못하다."(47) 편집인들의 합리적인 성향은 마르크스주의에 적대적이지는 않지만 마르크스주의 밖에서 작업하는 급진적 사상가들과 마르크스주의 안의 다양한 관점에 개방적인 데서 그대로 나타난다. 먼슬리 리뷰의 편집인들은, 훨씬 더 훌륭하게도, 자신들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할 용의가 있었으며, 자신들의 기대와 다른 세상에 대한 설명을 위해 종종 자신들의 관점을 수정할 용의도 있었다. 이들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한 이들조차 이들이 결코 허황되고 교조적인 동기를 고수하지 않았음은 인정할 것이다.

 

둘째로, 모범적인 용기다. 먼슬리 리뷰의 편집인들은 20세기 후반 내내 미국 내 반대세력의 첫 번째에 섰다. 이것에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특성이라는 힘이 필요하며, 역사적으로 공감을 유지한 정부나 운동에조차 비판적이 되는 용기가 필요하다. 전통 사회의 무자비한 비난에 맞서 50년 동안 사회주의적 원칙을 지키는 용기가 필요하다. 먼슬리 리뷰는 매카시 시대부터 레이건 시대, 소련 붕괴, "역사의 종말" 때까지 자신의 길을 지켰다. 이 잡지는 꾸준히 그리고 또 두려움 없이 배고프고 소외된 이, 자본주의와 인종주의, 기타 다른 형태의 억압에 반대하는 인류 대부분의 이익을 옹호해왔다.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재능 있고 업적을 쌓은 이 잡지의 편집인 모두는 더 쉽고 더 존경받으며 더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랜 시간동안 계속되는 상당한 압력과 변덕스런 유행, 또 시간이 지나면서 종종 생기는 자기만족에 맞서면서 고집스럽게 헌신했다.

 

셋째로, 정치경제학의 기민한 실천을 꼽을 수 있다. 먼슬리 리뷰는 허버트 긴티스(Herbert Gintis)가 썼듯이 "관심 있는 독자가 미국 토착의 마르크스 경제학을 향할 수 있는" 장으로는 1960년대 중반 이전에 사실상 유일했다. 요즘도 가끔은 똑같은 것 같다. 하지만 먼슬리 리뷰의 경제 관련 글의 가치는 드물다는 데 있다기 보다는 구별되는 데 있다. 스위지, 바론, 매그도프의 훈련과 전문적 지식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정말 가공할 만 하다. 그들의 글이 중요한 것은 단지 20세기 경제에 대한 독특한 명제를 전달하는 데 있지 않다. 먼슬리 리뷰의 경제 관련 글은 단순히 그 종합적인 감각에서도 훌륭한 모범을 세웠다. 이런 감각은 경제 전문가들이 쉽게 빠지는 모형 만들기, 전문성, 수학적 추상화를 피하는 것이다. 물론 "합리적 선택" 이론과 자유시장이라는 교조 같은 바보스런 개념을 피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편집자들은 현실에 개입하고 통계를 잘 다루며, 경제적 주장들을 날카롭게 평가하고, 경제 현상을 사회 정치 문화의 역사적 관점에 연결시킴으로써 강단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이론에 빠져 표류하는 것을 피했다.(48)

 

넷째로, 현재를 장기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이다. 순간적인 사건에 대한 평가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저작에서는 극히 어려운 도전이며 아마도 가장 어려운 것일 수도 있는데, 먼슬리 리뷰의 편집인들은 이 일에 아주 능숙했다. 그들은 이론적 변덕과 중심 응시를 피하고 역사의 장기적 관점을 키웠다. 이 잡지 목록은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진행형 평가나 다름없는 것으로 이뤄져 있다. 또 많은 경우는 영구적인 가치에 대한 설명으로 이뤄져 있다. 정책 결정자들이 경제 안정화 수단으로 군사지출 대신 사회복지 지출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 창간호의 스위지 글을 고려해 보라. 그는, 군사 지출이 지배계급에게 건전한 이익을 주며 자본의 관점에서 볼 때 소득을 재분배하고 노동자의 사회적 자신감을 확대하는 문제점이 전혀 없다는 점 때문에 그들에게는 완벽하게 합리적이라는 점을 간파해서 지적했다. 50년이 지난 뒤에, 이 지적은 유용한 냉전시대 국가론일 뿐 아니라 소련이라는 핑계가 사라진 뒤에도 군사지출이 너무나 높은 이유를 생생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49)

 

다섯째, 증명된 국제주의다. "우리가 서있는 곳"이 미국 사회주의자의 첫 번째 책임을 미국 안에서 사회주의가 번창하게 하는 데 초점을 두는 것이라고 쓰기는 했지만, 먼슬리 리뷰는 금방 전세계를 다루게 됐다. 이는 외국의 혁명적 발전에 대한 관심과 미국이 지휘하는 전후 자본주의 체제의 범위가 전세계적이라는 깨달음 때문에 촉진됐다. `타임' `라이프' `포춘'의 창립자인 헨리 루스(Henry Luce)가 1941년에 지적했듯이, 20세기는 "미국의 세기"가 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먼슬리 리뷰는 단지 미국의 군사, 경제, 정치적 외국 지배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용어로 말하면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와 중동의 개발에도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이 잡지는 인디아에서 과테말라까지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체 게바라, 카를로스 푸엔테스(Carlos Fuentes),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이 잡지를 위해 쓴 글을 출판했으며, 혁명론자들이 4개 언어판을 제작하기도 했다. 4개 언어는 스페인어(1963-1970, 1977), 이탈리아어(1968-1987), 그리스어(1973-1975, 1983, 1987-1988), 독일어(1974-1975)다. 어떤 잡지도 미국의 급진주의자들에게 외국의 투쟁과 발전에 대해 알리는 기능을 이 잡지처럼 하지 못했다. 또 어떤 미국 좌파의 정기간행물도 이 잡지처럼 국제적인 명성을 얻지 못했다. 외국의 혁명가들이 먼슬리 리뷰를 종종 자신들의 잡지로 여길 정도의 인지도와 존경을 말이다.(50)

 

14.

 

이런 특징과 업적에도, 역사적인 50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는 없을 것이다. 더 오래 지속된 마르크스주의 출판물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런 것들로는 1936년에 창간된 학술 계간지 `과학과 사회'가 있다. 다른 급진적 정기간행물들을 죽인 위험요인 곧 재정 문제, 정부의 탄압, 편집자가 숨지는 일, 운동의 쇠퇴가 모두 먼슬리 리뷰를 포위했었다. 각 단계마다, 이 잡지는 크고 작은 문제에 맞서 생존을 위해 싸웠다. 또 자연스런 독자 감소 때문에 주기적으로 독자를 확충해야 했다. 주 독자층은 자주 휘청거리는 미국의 좌파였다. 매 호가 언제나 제 때에 나오지는 못했는데, 여건이 가장 좋을 때도 그랬다. 현금이 부족할 때는 종종 긴급 호소를 해야했다. 틀림없이, 먼슬리 리뷰가 지금 직면한 핵심 문제는 창간 때 직면했던 바로 그 문제 곧 생존이다.

 

여전히, 먼슬리 리뷰는 단지 급진적인 정기간행물이 아니다. 사회주의자들을 위한 노아의 방주 같은 것이다. 폴 한쌍, 해리 한쌍, 후버만 한쌍과 배 한척 말이다. 이는 급진적 사회 변화에 대한 희망을 사실상 멸절시킨 이념의 물결 속에 사회주의자들이 휩쓸리지 않고 살아남게 해줬다. 먼슬리 리뷰 이야기는 이 잡지가 유지된 기간동안 미국 좌파 전체의 역사에 다름없다는 느낌이 있다. 잡지 지면에서 미국 좌파의 큰 약점 여러 가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내 파시즘의 위협에 대한 과장, 노조를 잘못됐다고 단정한 것, 먼 나라에 대한 잘못된 희망, 과장된 혁명적 판단 말이다. 좌파의 장점도 찾을 수 있다. 인종주의와 성 억압에 대한 반대, 타협 없는 국제주의, 계급 연대, 용기와 성실함, 유연성과 지성, 가장 착취당하는 이들의 이익에 대한 헌신, 완고하고 빈틈없는 분석, 평등적이고 민주적인 열망 말이다.

 

본사 위치 등 많은 것이 50년 동안 바뀌었다. 역설적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먼슬리 리뷰는 자본의 휘황찬 기념물인 월스트리트, 매디슨 애비뉴, 뉴욕 미드타운에서 멀리 가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자주 옮겨다녔다. 처음에 배로 거리 66번지 후버만의 아파트를(1949-1951) 떠나서 웨스트 10번가 218번지에 자리잡았고(1951-1961), 6번 애비뉴 33번지에서 `더 네이션'과 사무실을 함께 썼다.(1961-1966) 냉혹한 맨해튼에 자리잡은 곳은 웨스트 14번가 116번지 북쪽(1966-1974), 웨스트 14번가 62번지(1974-1982), 웨스트 23번가 155번지(1982-1987) 등이다. 마지막에 머문 곳이 지금의 웨스트 27번가 122번지 건물의 10층 넓은 사무실이다. 사무실을 옮겨 다닌 것은 언제나 먼슬리 리뷰의 특징이었던 지칠 줄 모르는 개입의 은유로 볼 수도 있겠다. 이 특징은 먼슬리 리뷰가 결코 안식하지 않고 계속 살아남게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 30년 동안 매그도프와 스위지의 수많은 경제 관련 글을 보자. 두 사람은 수많은 글과 책을 위해 함께 일했는데, 이 작업은 1970년대 초에 2차 대전 이후 경제호황이 막을 내린 뒤 선진 경제에 다시 찾아든 저 성장의 유형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특히 혁신적인 것은 그들이 "재정 폭발"이라고 부른 것 곧 부채와 신용, 금융 및 재정 시장이 월스트리트에서 제3 세계까지 엄청나게 확장한 것에 대한 설명이다. 두 편집인은 이런 개발을 생산 정체의 부산물 곧 자본이 출구를 찾으면서 생긴 것으로 봤다. 또 이들은 이 과정을 어느 정도는 정체에 대항하는 것이 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가 점점 더 투기적이 되면서 불안정을 더욱 생산하는 과정으로 봤다. 이들이 이런 문제를 전통적인 경제 지혜와 달리 자본 축적 과정 자체 내부 문제로 자리 매겼기 때문에, 이들은 자본주의 규칙을 제거함으로써만 바로잡을 수 있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개혁은 부적당하다는 견해를 유지했다.

 

레이건, 부시, 클린턴으로 이어지는 시대는 편집인들의 기본적인 경제 전망 몇 가지를 확인해주는 시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는 좌파에게는 패배와 후퇴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불리함에도 먼슬리 리뷰는 참신한 생각으로 새로운 도전에 맞섰다. 예를 들면 1984년에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과 미국내의 신앙에 기초한 근본주의(급진주의)의 성장에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은 특집호 `종교와 좌파'로 대응한 것이다. 이 잡지는 산디니스타 혁명과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와 제시 잭슨의 선거유세, 세계개발의 점증하는 위기에 실질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또 몇몇 중요한 글들을 최초로 출판했는데, 여기에는 언론인 크리스토퍼 히천스(Christopher Hitchens), 반전 운동가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 과학자들인 리차드 루원틴(Richard Lewontin)과 리차드 레빈스(Richard Levins), 노동운동가 빌 플레처(Bill Fletcher)와 제인 슬로터(Jane Slaughter), 역사학자 에릭 포너(Eric Foner), 로빈 켈리(Robin D. G. Kelley), 메릴린 영(Marilyn B. Young), 사회비평가 코널 웨스트(Cornel West)와 매닝 매러블(Manning Marable), 경제학자 더그 헨우드(Doug Henwood) 등의 글이 있다.

 

최근에 먼슬리 리뷰는 온건하지만 뚜렷한 부활을 맞았다. 잡지의 판매 부수가 1996년 4853부로 바닥에 달했는데, 이는 20년 동안 지속된 좌파의 후퇴와 동유럽 공산 정권의 붕괴, 중도 정치와 신자유주의 경제의 명백한 승리가 축적된 결과다. 그러나 몇몇 주도적인 행동이 이 경향을 뒤집었다. 이 행동은 (1996년) 여름호부터 재정비해 자본주의와 정보시대, 전세계 노동과 환경, 농업의 새로운 약동 같은 지금 시대의 중요한 주제를 연간 기획으로 집중 탐구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먼슬리 리뷰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 잡지의 장기 전망과 일치하는 관점을 갖고 있으면서 기존 편집인들이 함께 건설적으로 작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는 젊은 세대를 확보하려는 오랜 탐색 끝에, 스위지와 매그도프가 마르크스주의 학자이며 `계급에서 후퇴'(1986)를 쓴 엘런 메익신즈 우드를 1997년 공동 편집인에 합류하도록 요청함으로써, 먼슬리 리뷰는 새로운 편집인을 얻었다. 유료 정기구독 부수는 최근 몇 년 동안 계속 늘어, 지난해에는 1991년 이후 최고 수준인 5795부에 달했다. 이런 변화를 상징하기라도 하듯, 잡지는 1998년 표지와 판형, 글꼴을 모두 키움으로써 역사상 첫 편집개편을 시도했다.

 

새로운 독자, 새로운 판형, 새로운 활력, 새 편집인, 이런 변화는 오직 원칙의 연속을 강조하는 데 다소간 기여한다. 이 잡지의 창간 때 정치관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은 물론이고, 현실에 더 적합해질 수 없을 정도로 옳다. 어떤 점에서는, 스탈린주의가 불신을 받고 사민주의가 실천에서는 자본주의와 구별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좌파의 좌파로 남아있는 우리 모두는, 지금 독립된 사회주의자들이다. 전세계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개울물이 약해지고 있는 동안, 이들은, 심지어 조직적 표현에서조차, 20세기 중반의 좌파들보다 연대의 방식에서 훨씬 복합적이고 다원적이며 평등적인 장점이 있다. 미국 좌파 행동가와 사상가 대부분은 전통과 전망이 이해심 있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다른 이들과 상호작용 해야함을 인정한다. 이런 가치를 촉진하는 것이 바로 먼슬리 리뷰의 애초 목적이기 때문에, 또 자본주의와 제국의 불평등과 불안정이 여전히 깊이 있는 사회 재건설의 절박한 필요성을 야기하기 때문에, 먼슬리 리뷰가 지난 50년 동안 그랬던 것과 똑같이 다가오는 새 천년에도 전세계 해방투쟁과 연대하는 미국 마르크스주의의 깃대로 계속 봉사할 것이라고 기대할 충분하고도 넘치는 이유가 있다.

 


<주석> [1] Francis Otto Matthiessen (1902-1950), afflicted by a profound sense of isolation and hopelessness as a gay man and a radical in the context of deepening Cold War anti-radicalism, committed suicide in 1950. His life and work were commemorated in Monthly Review 2 (October 1950), the first of such extra-thick special issues; see also the superb appraisal by Leo Marx, "Double Consciousness and the Cultural Politics of F. O. Matthiessen," Monthly Review 34 (February 1983): 34-55. The executors of his estate honored the original pledge at the slightly reduced level of $ 4,000 in each of the remaining two years. The story of Matthiessen's crucial role was recounted by Paul Sweezy in his address at MR's thirtieth birthday celebration, May 1979, tape recording, Oral History of the American Left, Tamiment Institute, New York University.
프란시스 오토 매티슨(1902-1950)은, 냉전시대의 깊어지는 반급진주의 흐름 속에서 동성애 남성이며 급진주의자로서 깊어지는 고독과 절망에 괴로워하다가 1950년 자살했다. 그의 삶과 작품은 먼슬리 리뷰의 첫 번째 증보 특집판인 먼슬리 리뷰 2권(1950년 10월호)에 그려졌다. 리오 마르크스의 뛰어난 평가 "F. O. 매티슨의 이중 의식과 문화정치학" 먼슬리 리뷰 34권(1983년 2월호) 34-55쪽도 보라. 그의 재산 집행자들은 유산을 2년 동안 4천달러에 약간 미달하는 액수씩 나눠 받았다. 매티슨의 중요한 구실에 대해서는 폴 스위지가 먼슬리 리뷰 30주년 기념식 연설 때 자세히 이야기했으며, 이 연설 녹음은 뉴욕대학 태미먼트 연구소가 "이야기로 푼 미국 좌파의 역사"로 제작했다.
[2] Leo Huberman: October 17, 1903 - November 9, 1968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68) and the Leo Huberman Papers, Special Collections, University of Oregon Library, Eugene, Oregon.
리오 후버만: 1903년 10월17일부터 1968년 11월9일까지, (뉴욕: 먼슬리 리뷰 출판부, 1968)와 리오 후버만 논문집, 스페셜 컬렉션스, 오리건 도서관, 유진, 오리건.
[3] Albert Einstein, "Why Socialism?" Monthly Review 1 (May 1949): 9-15; "Dr. Otto Nathan, An Economist," New York Times, 30 January 1987; Paul Sweezy, interview by Aleine Austin, 19 January 1982, Oral History of the American Left.
알버트 아인슈타인, "왜 사회주의인가?" 먼슬리 리뷰 1권(1949년 5월호) 9-15쪽; "경제학자, 오토 네이선 박사" 뉴욕타임스, 1987년 1월30일치; 폴 스위지, 앨레인 오스틴 인터뷰, 1982년 1월19일, 이야기로 푼 미국 좌파 역사.
[4] "Viewing U.S. Economy with a Marxist Glass," Business Week 13 April 1963. Baran's life and work were commemorated in a special issue: Monthly Review 16 (March 1965).
"미국 경제를 마르크스주의 안경으로 보기", 비즈니스 위크 1963년 4월13일치, 바론의 삶과 작품은 먼슬리 리뷰 16권(1965년 6월호)에서 특집으로 다뤘음.
[5] Paul A. Baran, "On the Nature of Marxism," Monthly Review 7 (November 1958): 263.
폴 A. 바론, "마르크스주의 본성에 대해", 먼슬리 리뷰 7권(1958년 11월호): 263쪽.
[6] Paul A. Baran, "On the Nature of Marxism," 259.
폴 A. 바론, "마르크스주의 본성에 대해", 259쪽.
[7] Paul M. Sweezy, "Paul Alexander Baran," The New Palgrave: Marxian Economics, ed. John Eatwell, Murray Milgan, and Peter Newman (New York: Norton, 1990): 52; Paul A. Baran and Paul M. Sweezy, Monopoly Capital: An Essay on the American Economic and Social Order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66).
폴 M. 스위지, "폴 알렉산더 바론", 더 뉴 팔그레이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존 이트웰, 머리 밀건, 피터 뉴먼 공동편집 (뉴욕: 노턴, 1990): 52쪽; 폴 A. 바론과 폴 M. 스위지, 독점자본: 미국 경제와 사회 질서에 대한 한 논문 (뉴욕: 먼슬리 리뷰 출판부, 1966).
[8] Paul A. Baran, "Better Smaller But Better," Monthly Review 2 (July 1950): 82-86; Leo Huberman, "The Debs Way," Monthly Review 7 (January 1956): 346-352.
폴 A. 바론, "작지만 더 좋은 것보다 더 좋은", 먼슬리 리뷰 2권(1950년 7월호): 82-86쪽; 리오 후버만, "뎁스의 방식"; 먼슬리 리뷰 7권(1956년 1월호): 346-352쪽.
[9] Leo Huberman, "Capitalism and American Labor," Monthly Review 1 (May 1949): 24.
리오 후버만, "자본주의와 미국의 노동", 먼슬리 리뷰 1권(1949년 5월호): 24쪽.
[10] Actually, fourth: South Carolina Governor Strom Thurmond led a white supremacist breakaway, the States' Rights Democratic Party, which won four Southern states. Wallace had an almost identical popular vote (2 percent) but did not win in any state. The Progressive Party was disbanded after its dismal showing in 1952, when Wallace declined to run. Monthly Review carried much debate about the Progressive Party, including a piece by Wallace himself: "Needed: Cooperation Between the US and the USSR in a Strong U.N.," Monthly Review 2 (May 1950): 7-10.
실제로는 4등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스트롬 서먼드가 백인지상주의 일탈조직인 `미국의 권리 민주당'을 이끌면서 남부지역 4개 주에서 승리했다. 월리스는 어디서나 거의 똑같은 표(2%)를 얻었지만 한 주에서도 승리하지 못했다. 진보당은 월리스가 1952년 다시 출마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비참한 결과를 얻은 뒤 해산됐다. 먼슬리 리뷰는 진보당에 대한 상당한 논쟁을 이끌었다. 월리스가 직접 쓴 "필요함: 강한 국제연합을 위한 미국과 소련의 협력", 먼슬리 리뷰 2권(1950년 5월호): 7-10쪽.
[11] To take a panoramic view of the whole of the left, "independent socialist" was a term of choice in quite distinct radical spheres during the early Cold War. For example, the Independent Socialist League (1949-1958) was moving beyond Trotskyism at the same time when many from Popular Front backgrounds were beginning to develop doubts about Stalinism. The ISL and MR would have viewed one another as political opponents, which makes it all the more fascinating that each adopted the self-description "independent socialist" in the same year, 1949. (Hal Draper, editor of the ISL paper Labor Action for its duration, wrote five significant books on Marx published by Monthly Review Press in the 1970s and 1980s, although that reflected political cooperation more than convergence.) See Christopher Phelps, "Independent Socialist Clubs/International Socialists," 348-51, and "Draper, Hal," 197, in Mari Jo Buhle, Paul Buhle, and Dan Georgakas, eds., The Encyclopedia of the American Left, 2d e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좌파 전체의 전경을 제시하기 위해, "독립 사회주의자"라는 용어를 냉전 초기 명백하게 분리되는 급진 진영 범위에서 특별히 골랐다. 예를 들어, 독립 사회주의자 동맹(1949-1958)은 인민전선을 배경으로 하는 많은 이들이 스탈린주의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 바로 그 때 트로츠키주의 너머로 이동했다. 동맹과 먼슬리 리뷰는 아마 서로를 정치적 적수로 봤을 것이다. 그래서 두 쪽 모두 1949년 스스로를 "독립 사회주의자"로 표현하고 싶은 유혹을 더 느꼈다. (동맹의 기관지 `노동 행동'의 편집인 할 드레이퍼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먼슬리 리뷰 출판부에서 마르크스에 관한 책 5권을 냈다. 이는 수렴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협력을 반영하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펠프스, "독립 사회주의자 클럽/국제 사회주의자", 348-351쪽과, 마리 조 불, 폴 불, 댄 조거커스가 공동 편집한 미국 좌파 백과사전 2판(옥스퍼드: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 1998)의 "드레이퍼, 할" 항목, 197쪽도 보라.
[12] I. F. Stone, "Problems of the Progressive Party," Monthly Review 1 (April 1950): 381. Esther Rowland and Aleine Austin mention the Communist leadership's praise of the 1941 imprisonment of Trotskyist leaders under the Smith Act, its enforcement of the categorical wartime no-strike pledge, and the 1948 coup in Czechoslovakia as factors contributing to independent Marxist unease and disillusionment with the Communist Party; interview, 7 December 1980, Oral History of the American Left [Rowland is identified in the finding aid by her maiden name, Edelman].
I. F. 스톤, "진보당의 문제점", 먼슬리 리뷰 1권(1950년 4월호): 381쪽. 에스터 롤런드와 앨레인 오스틴은 1941년 스미스법에 따라 트로츠키주의 지도자를 구속한 것에 대한 공산당 지도부의 칭찬과 그들의 무조건적인 전쟁시대 파업금지 서약의 이행,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쿠데타가 공산당내 독립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불편하게 하고 환멸하게 한 요소로 작용한 점을 거론한다. 인터뷰, 1980년 12월7일, 이야기로 푼 미국 좌파의 역사. [롤런드는 도움을 찾는 과정에서 자신의 결혼 전 성 에들먼으로 표시된다.]
[13] The Communist Party, however, attacked Monthly Review in several articles, the first of which declared Sweezy and Huberman "un-Marxist and anti-Marxist." Alexander Bittelman, "Where is the 'Monthly Review' Going?" Political Affairs 30 (May 1951): 34-53; "The Ideological Struggle on the American Left," editorial, Political Affairs 42 (August 1963): 1-18; and Hyman Lumer, "Monopoly Capital: The Baran-Sweezy Model," Political Affairs 46 (February 1967): 11-25. See also Leo Huberman and Paul Sweezy, "Reply to Mr. Bittelman," and Paul Sweezy, "Certain Aspects of American Capitalism," Monthly Review 3 (November 1951): 212-227. For indication of the editors' views about the left in 1949, see Paul Sweezy, interview by Aleine Austin, 19 January 1982, Oral History of the American Left.
하지만 공산당은 몇몇 글에서 먼슬리 리뷰를 공격했다. 그 첫번째 글에서는 스위지와 후버만을 "비마르크스주의자이며 반마르크스주의자"라고 선언했다. 알렉산더 비틀먼, "먼슬리 리뷰는 어디로 가고 있나?" 정치 사건들 30권(1951년 5월호): 34-53쪽; "미국 좌파 내부 이념 투쟁", 사설, 정치 사건들 42권(1963년 8월호): 1-18쪽; 하이먼 루머, "독점자본: 바론-스위지 모형", 정치 사건들 46권(1967년 2월호): 11-25쪽; 리오 후버만과 폴 스위지, "비틀먼씨에게 답함"과 폴 스위지, "미국 자본주의의 특정 측면들", 먼슬리 리뷰 3권(1951년 11월호): 212-227쪽도 보라. 1949년 좌파에 대한 편집인의 견해를 알기 위해서는, 폴 스위지, 앨레인 오스틴과 인터뷰, 1982년 1월 19일, 이야기로 푼 미국 좌파의 역사를 보라.
[14] Paul Sweezy and Leo Huberman, "Cooperation on the Left," Monthly Review 1 (March 1950): 336, 338.
폴 스위지와 리오 후버만, "좌파의 협동", 먼슬리 리뷰 1권(1950년 3월호): 336, 338쪽.
[15] Perhaps this rare camaraderie was as much necessity as intention; the tragedies of Matthiessen and Baran illustrate the intense need for political and moral community in the repressive domestic environment of the Cold War. On MR's esprit de corps, see Aleine Austin, interview, 19 January 1982, Oral History of the American Left; Harry and Beadie Magdoff, interview by author, tape recording, New York, 20 September 1998.
아마 이 드문 동료의식은 의도만큼이나 꼭 필요한 것이었다. 매티슨과 바론의 비극은 냉전시대 억압적인 국내 환경에서 정치적 도덕적 공동체가 강하게 필요함을 예시한다. 먼슬리 리뷰의 단결심에 대해서는 앨레인 오스틴, 인터뷰, 1982년 1월19일, 이야기로 푼 미국 좌파 역사; 해리와 베디 매그도프, 저자와 인터뷰, 녹음, 뉴욕, 1998년 9월20일을 보라.
[16] Gertrude Heller Huberman: September 1, 1902 - September 16, 1965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65); Beadie Magdoff, interview by author, New York, 6 January 1999.
거트루드 헬러 후버만: 1902년 9월1일부터 1965년 9월16일까지, 1965 (뉴욕: 먼슬리 리뷰 출판부, 1965); 베디 매그도프, 저자와 인터뷰, 뉴욕, 1999년 1월6일.
[17] Sybil Huntington May: May 7, 1893 - October 3, 1978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78).
시빌 헌팅톤 메이: 1893년 5월7일부터 1978년 10월3일까지 (뉴욕: 먼슬리 리뷰 출판부, 1978).
[18] Paul Sweezy, interview by Aleine Austin, 19 January 1982, and Esther Rowland [identified as Edelman in finding aid], interview by Aleine Austin, 7 December 1980, Oral History of the American Left.
폴 스위지, 앨레인 오스틴과 인터뷰, 1982년 1월19일과 에스터 롤런드 [도움을 찾는 과정에서 애들먼으로 표시됨], 앨레인 오스틴과 인터뷰, 1980년 12월7일, 이야기로 푼 미국 좌파 역사.
[19] Leo Huberman and Paul M. Sweezy, "Henry Pratt Fairchild, 1880-1956," Monthly Review 7 (November 1956): 242-243; Aleine Austin, interview, 19 August 1982, Oral History of the American Left.
리오 후버만과 폴 M. 스위지, "헨리 프래트 페어차일드, 1880-1956", 먼슬리 리뷰 7권(1956년 11월호): 242-243쪽; 앨레인 오스틴, 인터뷰, 1982년 9월19일, 이야기로 푼 미국 좌파 역사.
[20] Laura (Gelles) Joseph, letter to author, 4 June 1998.
로라 (젤스) 조세프, 저자에 보낸 편지, 1998년 6월4일.
[21] Bobbye Ortiz, interview by Aleine Austin, 28 June 1983, Oral History of the American Left; Bobbye Ortiz, "Remembering 25 Years," in Monthly Review: Our First Forty Years - A Celebration & A Challenge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89); Al Ruben, telephone conversation with author, 16 January 1999.
보비 오티즈, 앨레인 오스틴과 인터뷰, 1983년 6월28일, 이야기로 푼 미국 좌파 역사, "25년 동안을 기억하며" 먼슬리 리뷰: 우리의 첫 40년 - 축하와 도전 (뉴욕: 먼슬리 리뷰 출판부, 1989); 앨 루번, 전화를 통한 저자와 대화, 1999년 1월16일.
[22] Many among the relatively unsung staff and leading Associates wrote occasionally for Monthly Review, and their writings provide interesting insight into their thinking. See, for example, Sybil Huntington May, "The Tonic of Revolution," Monthly Review 15 (June 1963): 80-86; Aleine Austin, "Behind the Montgomery Bus Boycott," Monthly Review 8 (September 1956): 163-167; Henry Pratt Fairchild, "Why I Believe in Socialism," Monthly Review 1 (November 1949); and Bobbye Ortiz, "On the Nuclear Family," Monthly Review 22 (May 1970): 50-56.
찬양 받지 못한 편집진과 주도적인 동료 가운데 많은 이가 종종 먼슬리 리뷰에 글을 썼다. 그리고 그들의 글은 자신들의 생각에 대한 흥미 있는 직관을 제공했다. 예를 들어 시빌 헌팅턴 메이, "혁명의 강장제", 먼슬리 리뷰 15권(1963년 6월호): 80-86쪽; 앨레인 오스틴, "몽고메리 버스 보이코트를 넘어", 먼슬리 리뷰 8권(1956년 9월호): 163-167쪽; 헨리 프래트 페어차일드, "내가 왜 사회주의를 믿나", 먼슬리 리뷰 1권(1949년 11월호); 보비 오티즈, "핵가족에 대해", 먼슬리 리뷰 22권(1970년 5월호): 50-56쪽.
[23] Leo Huberman and Paul Sweezy, "A Challenge to the Book Burners," Monthly Review 5 (August 1953): 159.
리오 후버만과 폴 스위지, "분서갱유에 대한 도전" 먼슬리 리뷰 5권(1953년 8월호): 159쪽.
[24] The editors of Monthly Review interpreted McCarthyism as a reactionary, brutal, and vulgar American variation upon fascism, with an anxious popular following but a real base among the nouveaux riches, such as Texas oil millionaires jealous of the Eastern aristocracy of wealth and established corporate monopolies. The editors initially thought it an open question whether the reactionary McCarthy wing of capital or the Eisenhower riding class would win out within the Republican Party. See "The Roots and Prospects of McCarthyism," Monthly Review 5 (January 1954): 417-434; "The Crisis of McCarthyism," Monthly Review 6 (January 1955): 305-311.
먼슬리 리뷰의 편집인들은 매카시즘을 파시즘의 반동적이고 잔인하며 천박한 미국식 변형으로 해석했다. 또 이를 불안한 대중이 뒤따르기는 하지만 진짜 바탕은, 동부지방의 재산 및 조직화한 기업 독점세력의 귀족정치를 갈망하는 텍사스 석유 재벌 같은 신흥 졸부들이라고 봤다. 편집인들은 처음에 공화당에서 승리할 세력이 자본의 반동적인 매카시 세력이냐 아니면 아이젠하워를 등에 엎은 계급이냐는 알 수 없는 문제라고 봤다. "메카시즘의 뿌리와 전망", 먼슬리 리뷰 5권(1954년 1월호): 417-434; "매카시즘의 위기", 먼슬리 리뷰 6권(1955년 1월): 305-311쪽.
[25] "A Different Kind of Witness," New Statesman and Nation, 25 July 1953, 91.
"다른 종류의 목격", 뉴 스테이츠먼 앤드 네이션, 1953년 7월25일, 91쪽.
[26] Sweezy v New Hampshire was the only Supreme Court decision of the 1950s to mention academic freedom, ironic given that Sweezy had not been employed by a university since leaving Harvard to enter military service in 1941. Ellen Schrecker, No Ivory Tower: McCarthyism and the Universitie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380.
스위지 대 뉴햄프셔 사건은 1950년대 학문의 자유를 언급한 유일한 대법원 판결인데, 스위지는 1941년 군에 들어가면서 하버드대학을 떠난 이후 대학에 고용된 적이 없다고 비꼬듯 언급했다. 엘런 슈레커, 상아탑 부재: 매카시즘과 대학 (뉴욕: 옥스퍼드대학 출판부, 1986): 380쪽.
[27] I. F. Stone,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52), 44.
I. F. 스톤, 한국전의 감춰진 역사 (뉴욕: 먼슬리 리뷰 출판부, 1952), 44쪽.
[28] William Hinton, telephone interview with author, 6 January 1999.
윌리엄 힌턴, 저자와 전화 인터뷰, 1999년 1월6일.
[29] John Bellamy Foster, "Introduction to the New Edition," Labor and Monopoly Capital, by Harry Braverman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98): ix-xxiv.
존 벨라미 포스터, "개정판 서문", 해리 브레이버먼 지음 노동과 독점자본(뉴욕: 먼슬리 리뷰 출판부, 1998): ix-xxiv.
[30] For one early recognition of this, see Peter Clecak, "Introduction," Monthly Review: Volume 1, 1949-1950 (New York: Greenwood, 1968).
이에 대한 초기 인식을 보려면, 피터 클레캐크, "서론", 먼슬리 리뷰: 1권, 1949-1950 (뉴욕: 그린우드, 1968)을 보라.
[31] Todd Gitlin, The Sixties (Toronto: Bantam, 1987), 125, recounts Richard Flacks's memory of a chance conversation with Huberman soon after the 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s 1962 Port Huron convention, in which Huberman reportedly was scornful of SDS for not being sufficiently socialist. In return, the new left sometimes stigmatized the magazine's economic coverage. Staughton Lynd, referring to the 1950s, for example, wrote, "Year after year one read Monthly Review editorials predicting imminent economic collapse and essays in Dissent which once again explained the quiescence of industrial workers." But that spoke more to a new left image of the old left than to the actual record. A more accurate assessment was made by Lewis Coser: "But as distinct from a number of other Marxist publications, Monthly Review did not indulge in periodic speculations about an impending crisis of the capitalist economy." Lynd, "The Prospects of the New Left," in Failure of a Dream? Essays in the History of American Socialism, ed. John H. M. Laslett and Seymour Martin Lipset (Garden City, New York: Anchor, 1974), 714; Coser, "USA: Marxists at Bay," in Revisionism: Essays on the History of Marxist Ideas, ed. Leopold Labedz (New York: Praeger, 1962), 354.
토드 지틀린, 60년대 (토론토: 밴텀, 1987), 125쪽은 1962년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회의 포트 후론 총회 직후 후버만과 대화를 나눈 리차드 플랙스의 기억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 대화에서 후버만은 학생회가 충분히 사회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멸했다. 이에 대응해 새 좌파는 종종 이 잡지의 경제 관련 글들을 비난했다. 예를 들어 스토턴 린드는 1950년대를 거론하면서 "해를 거듭하면서도 계속 먼슬리 리뷰의 사설은 임박한 경제 붕괴를 예상했고 반대파들이 쓴 논문들은 생산직 노동자의 침묵을 계속 설명했다"고 썼다. 그러나 이런 것은 옛 좌파의 새 좌파적 이미지에 대한 것이지 실제 기록은 아니다. 더 엄밀한 평가는 루이스 코서가 했다. "그러나 다른 마르크스주의 출판물들과 달리, 먼슬리 리뷰는 자본주의 경제의 임박한 위기를 주기적으로 추측하는 데 빠지지 않았다." 린드, "새 좌파의 전망", 꿈의 실패? 미국 사회주의 역사에 관한 논문, 존 H. M. 래스리트, 시모어 마틴 립시트 공동편집 (가든 시티, 뉴욕: 앵커, 1974), 714쪽; 코서, "미국: 궁지에 몰린 마르크스주의자들", 수정주의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사상사에 대한 논문들, 레오폴드 라베즈 편 (뉴욕: 프레저, 1962), 354쪽.
[32] E. P. Thompson, "Lost Dispatches from the Border Country," The Nation, 5 March 1988, 310.
E. P. 톰슨, "경계의 땅에서 온 잃어버린 소식", 더 네이션, 1988년 3월5일, 310쪽.
[33] Nina Serrano, "A Madison Bohemian," in History and the New Left: Madison, Wisconsin, 1950-1970, ed. Paul Buhle (Philadelphia: Temple University Press, 1990), 75.
니나 세라노, "매디슨의 보헤미안", 역사와 새 좌파에 대해: 매디슨, 위스콘신, 1950-1970, 폴 불 편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 출판부, 1990), 75쪽.
[34] Leo Huberman and Paul Sweezy, "What Every American Should Know About Indo-China," Monthly Review 6 (June 1954): 70-71. The editors' major writings on the subject were collected in Paul M. Sweezy, Leo Huberman, and Harry Magdoff, Vietnam: The Endless War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70).
리오 후버만과 폴 스위지, "모든 미국인이 인도차이나에 대해 알아야 할 것", 먼슬리 리뷰 6권(1951년 6월호): 70-71쪽. 편집인들의 이 주제에 대한 주요 저작은 폴 M. 스위지, 리오 후버만, 해리 매그도프, 베트남: 끝없는 전쟁 (뉴욕: 먼슬리 리뷰 출판부, 1970)에 묶여있다.
[35] Joanne Barkan, "A Blast from the Past," Dissent 44 (spring 1997): 95.
조앤 바컨, "과거의 광풍", 디센트 44권(1997년 봄호): 95쪽.
[36] Presciently, Boggs anticipated that "outsiders," the chronically unemployed in urban centers, would prove an explosive group. But his sweeping judgments against trade unions, even against radical rank-and-file caucuses within unions ("merely taking over the union today would gain them very little"), were disarming to a new left already predisposed to dismiss the labor movement. James Boggs, "The American Revolution: Pages from a Negro Worker's Notebook," Monthly Review 15 (July-August 1963): 27-28, 32, 56. On this subject, see also Paul Sweezy, "Marx and the Proletariat," Monthly Review 19 (December 1967): 25-43.
선견지명이 있게도 보그스는 "국외자들" 곧 도심의 장기 실업자들이 폭발력이 있는 집단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의 노조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적 평가, 심지어 조합 안의 평조합원 회의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단지 노조를 장악하는 것만으로는 얻을 것이 별로 없다")는 이미 노동운동을 배제하는 쪽으로 기울어있는 새 좌파에게 무장해제하고 항복하는 것이었다. 제임스 보그스, "미국 혁명: 깜둥이 노동자의 공책 몇장", 먼슬리 리뷰 15권(1963년 7-8월호): 27-28, 32, 56쪽. 이 주제에 대해서는 폴 스위지, "마르크스와 프롤레타리아", 먼슬리 리뷰 19건(1967년 12월호): 25-43쪽을 보라.

[37] Harry Magdoff, The Age of Imperialism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69).

해리 매그도프, 제국주의 시대(뉴욕: 먼슬리 리뷰 출판부, 1969).

[38] Allen Young, Gays Under the Cuban Revolution (San Francisco: Grey Fox, 1981), 66.

앨런 영, 쿠바혁명 치하의 남성 동성애자들 (샌프란시스코: 그레이 폭스, 1981), 66쪽.

[39] These editorials are collected in Paul Sweezy and Harry Magdoff, eds., Revolution and Counter-Revolution in Chile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74).

이 사설들은 폴 스위지, 해리 매그도프 공동편집, 칠레의 혁명과 반혁명(뉴욕: 먼슬리 리뷰 출판부, 1974)에 묶여있다.
[40] Paul Sweezy and Leo Huberman, "Where We Stand," Monthly Review 1 (May 1949): 1-2; Paul Sweezy and Leo Huberman, "The Communist Manifesto After 100 Years," Monthly Review 1 (August 1949): 113.
폴 스위지와 리오 후버만, "우리가 서있는 곳", 먼슬리 리뷰 1권(1949년 5월호): 1-2쪽; 폴 스위지와 리오 후버만, "100년 이후 공산당 선언", 먼슬리 리뷰 1권(1949년 8월호): 113쪽.
[41] Paul Sweezy and Leo Huberman, "Assessing the Damage," Monthly Review 8 (October 1956): 259; Paul Sweezy and Leo Huberman, "Lessons of Soviet Experience," Monthly Review 19 (November 1967): 11.
폴 스위지와 리오 후버만, "손실 평가하기", 먼슬리 리뷰 8권(1956년 10월호): 259쪽; 폴 스위지와 리오 후버만, "소비에트 경험의 교훈", 먼슬리 리뷰 19권(1967년 11월호): 11쪽.
[42] Albert Einstein, "Why Socialism?," 14-15.
알버트 아인슈타인, "왜 사회주의인가?", 14-15쪽.
[43] Paul M. Sweezy, "Reply," Monthly Review 22 (December 1970): 16.
폴 스위지, "답변", 먼슬리 리뷰 22권(1970년 12월호): 16쪽.
[44] See especially Paul M. Sweezy and Leo Huberman, "The Cultural Revolution in China," Monthly Review 18 (January 1967): 1-17. Sweezy's writings on post-revolutionary societies include On the Transition to Socialism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71), with Charles Bettelheim; Post-Revolutionary Society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80); and " Cuba: A Left U.S. View," Monthly Review 42 (September 1990): 17-21.
특히 폴 스위지와 리오 후버만, "중국 문화혁명", 먼슬리 리뷰 18권(1967년 1월호): 1-17쪽을 보라. 스위지의 혁명 이후 사회에 대한 글들은 사회주의로 이행에 대해(뉴욕: 먼슬리 리뷰 출판부, 1971)와 샤를 베텔랭과 함께 쓴 혁명이후 사회 (뉴욕: 먼슬리 리뷰 출판부, 1980), "미국 좌파의 시각", 먼슬리 리뷰 42권(1990년 9월호): 17-21쪽 등이다.
[45] Leo Huberman, "A Disaster," Monthly Review 20 (October 1968): 1; Paul Sweezy, "The Suppression of the Polish Workers Movement," Monthly Review 34 (January 1983): 30; "Notes from the Editors," Monthly Review 40 (January 1989), inside back cover.
리오 후버만, "재앙", 먼슬리 리뷰 20권(1968년 10월호): 1쪽; 폴 스위지, "폴란드 노동자운동 탄압", 먼슬리 리뷰 34권(1983년 1월호): 30쪽; "편집자의 노트", 먼슬리 리뷰 40권(1989년 1월호), 겉표지 안쪽 면.
[46] A famous criticism was Irving Howe's much-reproduced "New Styles in 'Leftism,'" Dissent 12 (summer 1965): 295-323, which labeled Monthly Review "the authoritarian left." The editors never replied, but for a useful response to Howe, see Hai Draper, "In Defense of the 'New Radicals,'" New Politics 4 (summer 1965): 5-28.
유명한 비판은 자주 인용된 어빙 하우의 "좌파주의의 새 양식", 디센트 12권(1965년 여름호): 295-323쪽이다. 여기서 그는 먼슬리 리뷰에 "권위주의 좌파"라는 딱지를 붙였다. 편집인들은 이에 답하지 않았지만, 이에 대한 유효한 대응으로는 하이 드레이퍼, "`새로운 급진주의자들'을 위한 변호" 뉴 폴리틱스 4권(1965년 여름호): 5-28쪽을 보라.
[47] Leo Huberman, "Notes on Left Propaganda," Monthly Review 2 (September 1950): 155-160; see also his "How to Spread the Word," Monthly Review 19 (December 1967): 44-51.
리오 후버만, "좌파 선전에 대한 노트", 먼슬리 리뷰 2권 (1950년 9월호): 155-160쪽; 그의 "어떻게 말을 퍼뜨릴까", 먼슬리 리뷰 19권(1967년 12월호): 44-51쪽도 보라.
[48] Herbert Gintis, "The Reemergence of Marxian Economics in America," The Left Academy, ed. Bertell Ollman and Edward Vernoff (New York: McGraw-Hill, 1982), 53. On Monthly Review's influence upon economics, see Lawrence Lifschultz, "Could Karl Marx Teach Economics in America?" Ramparts, April 1974, 27-30, 52-5; and Russell Jacoby, The Last Intellectuals (New York: Basic, 1987), 176-180.
허버트 긴티스, "마르크스 경제학의 미국내 재등장", 더 레프트 아카데미, 버텔 올만과 에드워드 버노프 공동편집 (뉴욕: 맥그로힐, 1982), 53쪽. 경제학에 대한 먼슬리 리뷰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로렌스 리프슐츠, "칼 마르크스가 미국에서 경제학을 가르칠 수 있을까?", 램파츠, 1974년 4월호, 27-30, 52-55쪽; 러셀 저코비, 마지막 지성인들 (뉴욕: 베이식스, 1987), 176-180쪽을 보라.
[49] Paul Sweezy, "Recent Developments in American Capitalism," Monthly Review 1 (May 1949): 16-21.
폴 스위지, "미국 자본주의의 최근 발전", 먼슬리 리뷰 1권 (1949년 5월호): 16-21쪽.
[50] In my process of formulating the above five points, I found useful Michael Tanzer's remarks at the magazine's thirtieth anniversary celebration in 1979, tape recording, Oral History of the American Left, although he put matters differently.
위의 5가지 요소를 정식화하는 과정에서 나는 마이클 탠저가 1979년 이 잡지의 창간 30주년 때 한 말이 비록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다루기는 했지만 유용함을 발견했다. 녹음 테이프, 이야기로 푼 미국 좌파 역사.

크리스토퍼 펠프스는 먼슬리 리뷰 출판부의 편집책임자이며 `젊은 시드니 후크: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코넬대학 출판부, 1997)의 저자이다. 그는 1991년부터 먼슬리 리뷰에 글을 썼다.
Christopher Phelps is editorial director at Monthly Review Press and author of Young Sidney Hook: Marxist and Pragmatist (Cornell University Press, 1997). He has written for Monthly Review since 1991.

 

 

원문: www.monthlyreview.org/599phelp.htm

번역: 신기섭

2004/07/19 18:31 2004/07/19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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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소프트에 재갈을 물리자”

랄프 네이더, 제임스 러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7년 11월호

원 제목 = 마이크로소프트를 어떻게 할까?

 

미국의 유명한 소비자운동가 랄프 네이더와 경제학자 제임스 러브가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 폐해를 지적합니다. 촘스키의 인터뷰 글과 더불어 마이크로소프트 사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활동을 중단한 카피레프트모임(사이트는 열려있습니다.)이 번역해주신 겁니다.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What to do about Microsoft?", Le Monde Diplomatique, November 1997.)

 

랄프 네이더 & 제임스 러브 (Ralph Nader and James Love)

 
* 랄프 네이더는 미국의 소비자운동가이다. 제임스 러브는 워싱턴의 Center for Study of Responsive Law's Consumer Project on Technology (http://www.cptech.org)에서 일하고 있는 경제학자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서비스 회사이다. 이는 그 규모때문이 아니다--총수익으로 보면 더 큰 회사들도 많다.<1> 그것이 그 생산물의 결과인 것도 아니다--더 혁신적인 회사들이 충분히 많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오늘날 개인용 컴퓨터를 운영하는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 대한 소프트웨어 파운데이션들을 장악하고 있다는 단지 그 사실 때문에, 그리고 이러한 장악력을 대중 시장 소프트웨어 어플리케이션, 정보 서비스, 전자 상거래 및 출판 벤쳐사업들에 정신없는 공격을 가하는데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가장 중요한 정보 서비스 회사인 것이다. 그 창건자 빌 게이츠<2>의 성공 신화(success story)가 이 회사의 아찔한 속도의 성장 이유를 흐려버려서는 안된다.

 

오늘날, 전문가들은 마이크로소프트가 개인용 컴퓨터를 운용하는 데 사용되는 운영체계 소프트웨어(OS) 시장의 90% 가까이를 장악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더욱이 마이크로소프트는 워드프로세서, 스프레드쉬트, 프레젠테이션 그래픽 프로그램 및 관계형 데이터베이스들--소비자들에게 끼워파는 '한 묶음 (suite)'의 사무용 프로그램 구성요소들--과 같은 대중적 응용프로그램에서도 마찬가지로 90%에 이르는 시장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가 시장에서 혁신자(innovator)였던 적은 거의 없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피시(PC)의 최초 운영체계인 MS-DOS를 다른 회사로부터 구입했다.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인 윈도우(Windows)는 애플 매킨토시에 기반한 것이며, 그것은 애플 자체가 Xerox가 개발한 초기 컴퓨터에서 모방한 것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스프레드쉬트인 엑셀(Excel)은 Lotus123의 모방이며, 이 역시 다시 VisiCalc의 모방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는 다른 몇가지 대중적 워드프로세서들이 나온 이후에 시장에 나왔다. 마이크로소프트의 파워포인트는 Harvard Graphics나 Freelance 같은 프로그램들을 모방했으며, 마이크로소프트는 인수를 이용하여 그 자체를 관계 데이터베이스 시장에 매입해 버렸다. 여기에서 마이크로소프트는 후발 진입자였던 것이다.

 

이 춤판에 늦게 들어오기는 했어도, 마이크로소프트가 빈손으로 외로이 있는 적은 드물었다.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가 이들 각 시장들을 너무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는 탓에, 이를 축출하고자 새로운 프로그램에 돈을 대겠다고 생각이라도 해 보는 벤쳐 자본가들조차 거의 없는 실정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성공했을뿐만 아니라, PC 어플리케이션 시장에서는 무적인 듯이 보인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성공은 부분적으로는 그 경영자가 처음 출시 때는 종종 그다지 좋지 못한 상품들을 향상시키기 위해 막대한 자원을 기꺼이 쏟아아부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마케팅에서 그 상품들을 능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약탈적, 또는 반(反)경쟁적 관행이라 불리곤 하는 것에 손을 대기도 했다. 예를 들어 라이벌 회사의 상품을 잠식하기 위해 독점적 운영체계를 계속 시장조작하기, 운영체계의 현재 및 미래 기능성에 관한 정보를 선별적으로 퍼트리기, 핵심 상품들에 취약한 상품들을 묶어팔기, 라이벌 상품에 대한 소비자 구매의욕을 떨어뜨리기 위해 존재하지않는 상품에 대하여 미리 알리기(때때로 'vaporware'라고 묘사되는 것), 다른 회사로부터 주요 스탭을 갑자기 빼오기 등. 전문화된 미디어를 타겟으로하는 광고의 파괴력<3>이나 라이벌의 수입을 빼앗기 위한 약탈적 가격책정은 말할 나위도 없다.

 

마이크로소프트의 힘과 가차없는 반경쟁적 행동에 대한 그 명성은 대부분의 라이벌들의 사기를 꺾었다. 공공 이해와는 무관한 데스크탑 어플리케이션의 전 영역에서 최고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많은 수의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회사들을 패배시키고 난후, 이제 마이크로소프트는 그 관심을 인터넷--마이크로소프트가 뒤늦게 진입한 또 하나의 영역--으로 돌렸다. 빌 게이츠의 제국은 컴퓨터 사용자들을 인터넷과 연결해주는 인터페이스와 운영체계를 '소유'하고자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마이크로소프트 인터넷 익스플로러(MSIE)의 개발에 막대한 달러를 쏟아부었고, 이를 무료 상품(지금은 마이크로소프트의 기본 운영체계[Windows95를 말함]에 포함시켜)으로 배포하고 있다. 이는 인터넷 브라우저 시장에서 마이크로소프트와 여전히 경쟁하려 하고있는 유일한 회사인 넷스케이프와의 경쟁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만약 마이크로소프트가 이 시장에서 넷스케이프 및 여타의 회사들을 축출하게 된다면, 인터넷에 기반한 출판, 정보 서비스 및 전자상거래에 핵심적인 미래의 표준을 통제하는 독점권을 좌우하게 될 것이며, 마이크로소프트는 인터넷을 더욱 폐쇄적이고 독점적인--마이크로소프트가 소유하는--체계로 변형시키는 노력을 계속하리라 예상된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는 Sun이 발명한 컴퓨터 언어인 자바(Java)에 부여되는 표준을 둘러싸고 Sun Microsystems와 격전에 돌입해 있다. Sun은 마이크로소프트의 핵심사업에 중심적인 이슈들에 관하여 아직도 마이크로소프트에 기꺼이 공개적으로 도전하고자 하는 몇 안되는 회사 중 하나이다. 오늘날 프로그래머들은 상이한 유형의 컴퓨터나 소프트웨어 운영체계에 따라 각기 다른 프로그램을 짜야하는, 비용과 어려움의 문제를 겪고 있다. 종종 프로그래머들은 마이크로소프트 운영체계를 사용하는 개인용 컴퓨터의 90%에서 작동하는 프로그램만을 짜도록 결정하게 된다. Sun은 자바를 한번 짜면 어디서나 작동하는 체계로서 고안했다. 자바로 짜여진 프로그램은 하드웨어든 소프트웨어든 상관없이 어느 컴퓨터에서나 작동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빌 게이츠의 독점 권력을 잠식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인터넷 출판을 위해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온 공개 표준을 타락시킨(corrupt) 것과 똑같은 '끌어안으면서 늘이기' 전략을 통해서 자바를 무력화하려 시도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자신의 자바 버전에 마이크로소프트 운영체계에서만 작동하는 특질들을 추가한다. 만약 충분히 많은 수의 프로그래머들이 이러한 특질들을 이용한다면, 그들의 자바 프로그램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소프트웨어를 가동시키는 프로그램에서만 작동할 것이다. 하이테크 투자 조언자인 Dan Nachbar는 이를 두고 아나콘다처럼 끌어안고 늘이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은 공공의 이해 속에 이루어지는가? 몇몇은 마이크로소프트는 찬사를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마이크로소프트는 비싸지 않은 소프트웨어를 제공했고 소비자들이 문서와 데이터를 공유하고 교환하기 쉽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싼 가격의 소비자 소프트웨어들이 Borland 및 여타 소프트웨어 회사들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인터넷은 공개적이고 경쟁적으로 디자인된 시스템 위에서 데이터의 공유를 엄청나게 향상시켰다는 사실을 상기해야만 한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가 압도적 지배력을 획득하는 모든 영역에서 혁신(innovation)은 극적으로 하락해왔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머리터지게 경쟁하는 소프트웨어를 위한 벤쳐 자본은 고갈되었고, 미래에 마이크로소프트의 타겟이 될 수 있는 상품에 대한 벤쳐 자본 역시 고갈되어가고 있다. 이제 곧 이 회사는 새로운 혁신의 마당으로서 인터넷이 번성한 기반인 공개적 체계를 폐쇄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올라서게 될 것이다. 만약 마이크로소프트가 인터넷을 위한 유저 인터페이스를 독점한다면, 내용과 서비스의 선택을 편벽되게 할 수 있을 것이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여러 산업부문과 파트너가 될 새로운 기회를 만들게 되겠지만, 인터넷 산업은 덜 경쟁적이게 되고 결국 소비자에게 해를 끼칠 것이다. 경제적 고려를 제쳐 두더라도, 우리는 권력의 과도한 집중에 의해 사회가 피해를 입게 되리라 생각한다.

 

사회는 이러한 새로운 디지털 시대 독점에 대응하기 위한 힘이 전혀 없는게 아니다. 소비자들, 소프트웨어 개발자들 및 정부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 권력을 제한하고 경쟁을 증진시킬 구체적인 행동들을 취할 수 있다. 정부의 행동은 적절할 것임에 틀림없다. 유럽연합과 미국의 반(反)트러스트 당국은 마이크로소프트가 현재의 데스크탑 컴퓨터의 운영체계 독점을 인터넷 서비스를 위한 브라우저 마당에까지 확대하지 못하도록 지금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다. 덧붙여서, 정부의 조달담당 부서는 컴퓨터 예산의 일부를 비-마이크로소프트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시스템을 위해 할당함으로써 경쟁을 증진시켜야만 한다. 운영체계를 그 어플리케이션과 분리시키도록 강제돼야 하며, 반 트러스트 당국은 운영체계와 함께 어플리케이션을 건설하는 것과 관련한 마이크로소프트의 결정들을 검토하고 제한해야 하며, 약탈적 관행들을 감시해야 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인터넷 멀티미디어와 전자 상거래의 표준을 결정하는데 너무 과도한 권력을 초래하게 될 인수 합병이 금지되어야 한다. 미국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일부 관행들을 제재하도록 법원에 요청했다. 이제 유럽인들이 그 관행들에 대한 스스로의 검토를 행할 차례가 되었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미래가 현재 기로에 처해있는 것이다.

 


<1> 1996년의 마이크로소프트 매출액(113억$)은 미쓰비시(7,520억$)의 일부에 불과했다. <2> 1975년에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립한 빌게이츠(41살)는 아직도 그 주식의 22.3%를 소유하고 있다. 이 지분(1996년 12월 현재 시세로 360억$에 해당하는)으로 그는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 되었다. <3> Serge Halimi, "Une presse libre", Le Monde Diplomatique, September 1995.
번역: 카피레프트모임
2004/07/19 18:17 2004/07/19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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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감시의 촘스키 교수 인터뷰: 마이크로소프트 독점논쟁의 본질

기업감시 1998년 5월

 

"완전한 독점은 없다. 독점 문제는 우리가 집중할 핵심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공공의 자산인 인터넷을 기업의 이득을 위해 빼앗아 가려는 것이다. 이는 마이크로소프트만 시도하는 음모가 결코 아니다. 모든 기업의 속성이다." 진보단체 `기업감시'가 노엄 촘스키 교수와 인터뷰한 것입니다. 주제는 소프트웨어 업계의 거대기업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 문제입니다. 위에 인용한 지적을 통해 촘스키 교수는 사태의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촘스키 교수의 이런 지적은 우리나라의 공기업 팔아넘기기 (이름하여 민영화)에 대한 시각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촘스키 교수의 또 하나 중요한 지적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거저 주면서 얻으려는 것은 인터넷 이용자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이끌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곳은 각종 오락정보나 홈쇼핑 따위의 돈벌이 정보 사이트입니다.



기업감시의 노엄 촘스키 교수 인터뷰
`기업감시'의 애나 쿠에이와 조슈아 카리너는 보스턴 집에 있는 노엄 촘스키 교수를 전화로 붙잡고 마이크로소프트와 빌 게이츠에 대해 물어봤다. 다음은 대화내용 전문이다.

 

기업감시: 우리의 첫번째 질문은 법무부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근 싸움을 교수께서 얼마나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이것을 중요한 전환으로 보시는지? 입니다.

 

촘스키: 약간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과장을 하면 안됩니다. 본질적으로 공공의 자산이고 생산물인 인터넷, 통신 따위를 장악하고 있는 기업이 3곳 있다고, 한 기업이 장악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작은 차이는 있죠. 문제는 마이크로소프트같은 기생충들을 공공 체계에 접근하지 못하게 할 것인가, 또는 이들에게 어떤 권리를 부여할 것인가입니다.

 

감시: 역사적 맥락에 대해 약간 이야기해주시죠. 마이크로소프트가 계속 힘을 강화하면서 생기는 것과 이 회사가 사회에서 차지하는 구실이 어떤 맥락에서 미국 기업의 힘, 기업의 진화 역사와 연결되나요?

 

촘스키: 다음은 간단한 역사입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러가면 18세기부터 기업들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기업은 공공 기관이었죠. 기본적으로 연합체였습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이 강에 다리를 놓자고 말합니다. 그러면 딱 이 일만 할 수 있는 주 정부의 허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기업은 개인이 갖는 권리를 가질 수 없습니다. 헌법 제정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기업의 모형은 자치체였습니다. 19세기를 거치면서 이 모형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헌법체계가 처음부터 사람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오히려, 메디슨이 "재산의 권리"라고 부른 것에 사람의 권리가 맞추어졌습니다. 물론 재산은 아무런 권리도 없죠. 내 펜이 무슨 권리가 있습니까. 아마도 내가 펜에 대한 권리가 있죠. 그래서 이 말은 재산에 대한 사람의 권리를 코드화한 표현인 것입니다. 헌법체계는 재산에 대한 사람의 권리를 독점적 권리로 인정한다는 원칙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재산이 있기 때문에 특권 또한 있다는 것입니다. 메디슨이 헌법 논쟁 중에 말한 것처럼, 정부의 목적은 "다수에 대항하는 부유한 소수를 보호하는 것"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헌법체계가 확립된 경과입니다. 20세기로 넘어오며 미국이 급진적인 법률 행동주의를 겪은 뒤, 법원은 기업의 개념을 결정적으로 바꿨습니다. 법원은 재산 소유자의 특권 뿐 아니라 법사학자들이 "집단적 법 실체"라고 하는 것까지 부여하는 식으로 정의를 바꾼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업들은 20세기 초에 와서야 사람 곧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 엄청난 힘을 갖는 사람의 권리를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기업은 이제 더 이상 주 정부의 허가권에 묶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것은 아주 큰 변화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사적인 전제정치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런 전제정치는 게다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이들은 제1 수정 조항의 권리 곧 조사와 압류를 면제받는 권리로 보호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2차 대전 후에 업계는 정부와 협조해야 한다는 것과, 비용과 위험을 사회화하기 위해 보조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게 됐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이것을 실현하느냐일 뿐이었죠. 퍼뜩 떠오른 방법이 (에너지부, 원자력위원회, 항공우주국을 포함한) "국방부 체계"입니다. 이런 공적 보조 체계는 그 이후 미국 경제의 활동적인 부문의 핵심이 됐습니다. (생물공학 기술이나 의학 등은 다른 공공 자원에 의존하지만 이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체계는 바로 마이크로소프트로 이어집니다. 그러면 마이크로소프트가 어떻게 그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는가? 빌 게이츠는 이에 대해서 아주 솔직합니다. 그는 다른 이들의 생각을 "감싸안고 확장해서" 이룩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이것은 컴퓨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컴퓨터는 공공 자금으로 공공이 주창해 개발한 것입니다. 50년대 이것이 처음 개발된 것은 100% 공적인 비용을 통해서 였습니다. 인터넷도 똑같습니다. 생각, 주창자,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모두 30여년동안 공공 분야에서 앞장서고 돈을 대서 창출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막 빌 게이츠같은 자들에게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감시: 독점이건 몇몇 큰 기업이건 이들이 사람의 의사 표시와 의사 소통같은 기본적인 것을 지배하도록 허용할 때 생기는 사회적, 문화적 충격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촘스키: 이것은 전제정치의 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기업화의 핵심입니다. 기업화는 공중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도록 하고, 공공 영역을 제한하고, 여론을 조종하고, 세상을 어떻게 돌아가도록 할 것인가 (여기에는 생산, 교역, 분배, 사상, 사회 정책, 외교 정책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를 결정하는 기본 권한을 공중이 아니라 고도로 집중된 개인적 힘에 부여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설명할 수 없는 전제정치죠. 이렇게 하는 데는 여러가지 모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른바 정보 체계라고 하는 의사소통 체계를 몇몇의 사적인 전제자의 네트워크에 넘기는 것입니다. 미국의 언론을 예를 들어 봅시다. 압도적으로 기업 언론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공공 언론이라는 것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은 독자, 시청자들을 다른 사업을 하는 광고주들에게 팔아 넘기는 대기업들일 뿐입니다. 이들은 의사소통 체계를 구성하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생각하는 것은 그리 복잡한 일이 아닙니다. 이 체계에는 사람들의 관심을 공적인 영역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는 다양한 모형 곧 오락 산업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새로운 것들이 나타납니다.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극적인 예가 있습니다. 다자간 투자협정(MAI)(국제연대행동네트워크 정보 참조)입니다. 이 협정은 이번 달에 서명될 예정인데, 아마 그렇게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 협정을 위한 협상이 지난 3년동안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거대 기업들의 실력 행사입니다. 곧 "투자자" -- 이는 상점에서 일하는 이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제너럴 일렉트릭 (미국을 대표하는 거대 전자, 통신장비 업체: 번역자)이나 메릴린치(미국의 거대 금융기업: 번역자)같은 기업들의 이사회를 뜻하는 것 -- 에게 예외적인 권리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비밀로 지켜졌는데, 왜냐하면 관계자들 곧 업계 전체는 공중이 이것을 싫어하리라는 점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나라들을 일정한 틀안에 가두게 되는 중요한 결정에 대해 3년동안이나 침묵하는 것은 대단한 재주입니다. 이러니 공공이 참여하는 정책 결정이 불가능할 수밖에요. 이제 이것이 (알려졌으니) 좋다 나쁘다 논쟁을 하고 내가 바라는 것은 이런 형태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게 됐습니다. 그러나 여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의심의 여지도 없습니다. 게다가 언론들이 처음부터 이 점 (반대할 것: 번역자)을 잘 알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는 점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감시: 마이크로소프트같은 회사가 이 협정으로 무엇을 얻을까요?

 

촘스키: 자본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고 싶은 아무 곳에나 투자하는 거죠. 그들이 하는 일에 아무런 제약도 없을 것입니다. 나라나 지방 누구도, 예를 들어 내가 살고 일하는 이곳 메사추세츠주 캠브리지 지방 정부는 어떤 조건도 부과할 수 없게 됩니다. 소비자 보호건, 환경 조건이건, 투자 문제건, 소수나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예외 조건이건,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범위가 어디까지 갈지는 이것을 강화하려는 경향에 달려있습니다. 이것은 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헌법에도, 그렇다고 사적인 전제정권에게 인격을 부여한 헌법 수정조항에도 이런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힘이지 말이 아닙니다. 다자간 투자협정이 현실적으로 어떤 뜻을 갖게 될지는 힘의 관계에 따라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격렬하게 반대하면, 어쩌면 폭동같은 것을 일으키면 저지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부과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바로 조건이 될 것입니다. 이 협정의 핵심은 톱니바퀴 효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현재 존재하는 법 규제는 허용한다. 하지만 이 규제는 앞으로 제거되어야 한다. 규제가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가 국제 사회에서나 국내에서 지금 갖고 있는 권리를 침해하는 새로운 법은 만들 수 없다. 그래서 오래 가면 톱니바퀴 효과가 나타납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같은 사적인 전제정권이나 이들의 연합체에게 세계를 조금씩 조금씩 넘겨주게 되는 것입니다.

 

감시: 경제학자 브라이언 아서는 기술은 빠르게 바뀌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누구도 오랫동안 독점을 유지할 수 없고 그래서 기술 산업의 독점력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봐온 다른 독점력과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촘스키: 독점력은 누구도 가져본 것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아주 드물게 독점력을 행사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에너지 산업같은 아주 중앙집중적인 세력 체계를 생각해봅시다. 엄밀히 말해 독점은 없었습니다. 쉘과 엑슨이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이 체계는 시장 관리가 철저한 분야입니다. 정부가 엄청난 힘을 발휘해 소규모의 사적인 전제정권들의 이익을 위해 개입했습니다. 진짜 독점을 찾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미국전신전화는 한 때 독점이었는데, 예를 들어 트랜지스터같은 것을 발명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독점 덕분에 값을 아주 높게 매길 수 있었지만, 이런 일은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감시: 독점문제 전반이 우려할만한 문제라고 보십니까?

 

촘스키: 소수 독점(과점)이 있습니다. 서로 얽혀있는 중앙집중적인 세력 체계들이 몇몇 있는 거죠. 한 세력이 어떤 분야를 장악하려고 하면 다른 세력들이 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있듯이.

 

감시: 그러면 빌게이츠가 말년의 존 록펠러가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촘스키: 록펠러는 독점 기업가가 아니었습니다. 표준정유(스텐다드 오일)는 전체 산업을 좌우하지 않았습니다. 시도는 했죠. 그러나 다른 세력이 그런 힘을 주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감시: 현실적으로는 게이츠와 록펠러에 유사점이 있죠?

 

촘스키: 봉건체제를 생각해봅시다. 왕이 있고 왕자가 있고 주교가 있고 영주가 있죠. 이들은 힘이 완전히 한곳에 집중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완전한 전제권력자를 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각자 봉토가 있고 이것을 중앙집중식 권력체계 안에서 유지하길 원했던 겁니다. 단지 일반인이, 이른바 하층민이 이것을 나눠가지지 못하도록 하면 그만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독점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 물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 그러나 결코 문제의 핵심은 아닙니다. 순수한 독점이 유지될 가능성은 진정 없습니다. 지금 거론되고 있는 기술이 공공이 주도권을 지고 비용도 직접 부담해 개발한 기술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터넷처럼 30여년동안 공공이 개발해놓고 이제 사적인 세력에게 넘겨주는 것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장 자본주의입니다.

 

감시: 공공 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이 인터넷을 어떻게 바꿀가요?

 

촘스키: 인터넷을 국방부가 관장하는 한, 그것은 무료였습니다. 사람들은 정보를 나누기 위해 인터넷을 거저 쓸 수 있었죠. 정부 기구에 속하는 미국국립과학재단이 관장하던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94년까지만 해도, 빌게이츠같은 사람들은 인터넷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이는 인터넷 관련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에서 돈을 벌 방법을 못찾았기 때문이죠. 그 뒤 인터넷이 사기업으로 넘어가자, 자신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 수없이 떠들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의 상당 부분을 공공 영역에서 빼앗아, 인트라넷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트라넷은 방화벽으로 보호막을 치고 내부 기업활동용으로만 쓰는 것입니다. 이들은 접속을 조절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이크로소프트가 많은 노력을 들여 애쓰는 부분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인터넷 이용자들을 끌어들이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홈 마케팅 서비스 (홈쇼핑을 뜻하는 듯)나 오락 따위 입니다. 만약 이용자가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이 뭔지 분명히 알고 충분한 정보와 정열이 있다면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것을 가능한 한 어렵게 만듭니다. 완전히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만약 당신이 마이크로소프트 이사회의 한명이라면 분명히 이런 일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일어나면 안됩니다. 공공 기관이 공공의 조절·관리를 받는 공공재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이것 (공공재로 유지하는 것: 번역자)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의회에서 말단 지방조직, 노조, 시민단체까지 각 단계별로 이런 일에 반대하기 위해 일상적인 방식으로 많은 활동을 펴기 때문입니다.

 

감시: 공공이 조절, 관리하면 어떻게 될까요?

 

촘스키: 더 많은 이들이 접속할 수 있다는 점을 빼면 과거와 똑같은 모습일 것입니다. 물론 제약도 없을 거구요. 사람들은 거저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공공재일 때는 가능했던 일입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구조만큼은 제대로 된 것이었죠. 이것이 바로 마이크로소프트와 다른 기업들이 파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감시: 15년전의 인터넷을 염두에 두고 계시군요.

 

촘스키: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다름아닌 인터넷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언론은 20세기 대부분 기간 동안 기업의 힘 밑에 있습니다. 특히 요즘 들어 더욱 심해지고 있죠. 그러나 언제나 이런 것은 아니었고, 이래야 할 것도 아닙니다. 다른 예를 찾기 위해 옛날로 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최근의 예로 지난 50년대를 보면, 전혀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800개 노동신문이 매주 2천만~3천만명에게 배포됐습니다. 더 과거로 돌아가 20세기 초를 보면, 지역 사회와 노동에 기반한 언론과 기타 언론이 기업 언론과 대등한 상태였습니다. 최근의 양상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는 법정 행동주의와 기타 사적인 압력에 밀려 정부가 힘의 집중을 허용한 탓이며, 이 흐름은 뒤바꿀 수 있고 극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감시: 마이크로소프트와 관련해 우리가 현재 검토하고 있는 기술의 집중 문제를 다뤄보죠. 또 이것을 최근의 국방 산업, 언론, 보험과 은행 산업의 합병과 비교해보죠. 특히 세계화의 맥락에서요. 우리는 세계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를 맞고 있는 것인가요? 아니면 언제나 그랬던 것의 연속일 뿐인가요?

 

촘스키: 총체적으로 보면 현재의 세계화는 세상을 1세기 전으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영국이 지배하고 금 본위제가 확고하던 20세기 초의 교역량과 금융 흐름 등을 당시 경제 규모와 비교해보면, 우리는 두번의 세계대전에 따른 후퇴 이후 다시 그 때로 돌아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차이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금융 거래의 속도가 최근 25년동안 이른바 통신 혁명에 따라 크게 빨라졌습니다. 통신 혁명은 대부분 정부 부문에서 이뤄진 것입니다. 설계, 개발, 유지가 모두 공공의 비용으로 해결됐는데, 사적인 이익을 위해 (민간에) 넘겨졌습니다. 정부는 전후 국제경제 체제 곧 70년대의 브레튼우즈 체제 또한 무너뜨렸습니다. 이것은 미국과 영국이 앞장선 가운데 리차드 닉슨이 한 것입니다. 자본 흐름을 규제하는 체계가 사라졌고, 정부가 주도한 통신 혁명과 함께 이는 투기적 자본 흐름의 폭발을 이끌었습니다. 지금 돌아다니는 투기 자본은 하루에 1조 달러를 훨씬 넘으며 대부분이 생산 활동과 무관합니다. 지난 70년대의 경우 국제 자본 흐름의 90%는 무역이나 투자처럼 실제 경제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몇%만 실제 경제 활동과 관련된 것이고 대부분은 금융 조작, 환 투기 등 경제를 파괴하는 것들입니다. 100년전에도 이렇지 않았고 40년전에도 이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변화가 있기는 있습니다. 그 효과는 당장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지난 25년동안이 유독 경제 성장과 생산성 향상이 느리고, 복합 불황이 생긴 것의 한 원인입니다. 미국같은 부자 나라의 인구 가운데 2/3의 임금과 소득이 준 것도 이 때문입니다. 대신 인구의 극히 일부는 엄청난 이득을 얻었습니다. 특히 제3 세계에서는 이런 현상이 더 심합니다. 어제 (4월12일) 뉴욕타임스의 "지난주 리뷰"를 보면, 미국이 번영하고 행복하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 기사가 이야기하는 미국인은 분명 소득이 늘지 않거나 줄고 있는 전체의 2/3나 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로 주식을 갖고 있는 이들 이야기입니다. 그래요, 이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성공적입니다. 다만 문제는 전체 가구의 1%가 주식의 절반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산으로 봐도 똑같습니다. 또 나머지 대부분은 국민의 10%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가 말하는 미국이 이것이라면 분명, 미국은 행복하고 번영하고 있죠. 이들이 바로 뉴욕타임스가 옹호하는 동시에 독자로 삼는 일부 엘리트 계층입니다.

 

감시: 우리는 많은 사람이 많은 사람과 동시에 벌이는 통신의 가능성에 흥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인 소프트웨어가 문화적 가치를 전달하고 언어와 지각에 충격을 준다는 점에서 흥미를 느낍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같은 기업들이 개발한 기술이 어떤 충격을 주게될지도 역시 관심 사항입니다.

 

촘스키: 이것에 대한 진정한 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누가 참여하고 누가 활동하고 누가 방향에 영향을 주느냐 따위에 따라 달라집니다. 디즈니사가 영향을 미치고 조절한다면 그들의 이해가 반영되겠죠. 공공이 주도권을 쥔다면 공공의 이해를 반영할 것이고요.

 

감시: 그래서 다시 문제는 이것을 되찾아오는 것으로 돌아가는군요.

 

촘스키: 바로 그렇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가 허용될 것인가하는 질문의 문제입니다. 또 허용된다면 어느 범위까지냐의 문제죠. 사업 세계와 이들이 지배하는 정부가 민주주의를 제한하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그들을 위협하지요. 언제나 그랬습니다. 그들이 말하듯이 `공공의 생각을 조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홍보업무 산업이 그렇게 크게 성장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감시: 민주주의를 개척하고 확장하며 기업에게서 공공의 공간을 다시 빼앗아 오려면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해야할까요?

 

촘스키: 글쎄요. 처음 해야하는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정보가 없다면 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자간 투자협정이 있는지 모르면 어떻게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비밀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한다면 세계화를 반대할 수 없는 거죠. 시장 경제의 성공을 이야기하는 제목만 읽지말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앨런 그린스펀도 읽어야 합니다. 특히 그가 내부에서 말할 때, 그가 경제의 건전성은 이른바 "노동자의 불안"이라는 우리가 이룩한 놀라운 성과에 달렸다는 점을 직시하라고 말할 때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가 쓴 용어입니다. 노동자의 불안은 내일 당신이 직업을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경제에 엄청난 혜택입니다. 임금이 계속 내려갈 테니까요. 굉장하죠. 이익은 늘어나고 임금은 줄고. 이것을 사람들이 모르면 그들에 대항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죠. 그래서 처음 해야할 일은 우리 자신을 위해, 국민들을 위해 교환 체계, 상호작용 체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기업감시나, 퍼블릭 시티즌 등 공공에 정보를 제공하고 그들의 이해를 돕는 단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맞서 싸울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의회에 압력을 넣거나 시위를 하거나 대항 기관을 만들어서 할 수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독점 방지처럼 작은 문제에 집중하지말고, 더 깊은 문제에 목표를 둬야할 것입니다. 왜 사적인 전제권력이 권리를 갖게 됐나 하는 문제같은.

 

감시: 인터넷에서 피어나고 있는 대항 언론의 가능성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촘스키: 이것은 행동의 문제지 사색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40년전에 우리가 최소한의 의료보장체계를 확보했을 가능성이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얻기 위해 투쟁해야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사업의 세계와 마이크로소프트는 아주 계급 의식이 강합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격렬한 계급 투쟁에 개입하는 통속적인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 물론 그들은 언제나 그럴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이 있느냐입니다. 더 깊은 문제는 그들의 참여를 허용할 것인가입니다. 나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번역: 신기섭

2004/07/19 18:04 2004/07/1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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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하는 노동자의 살길은?

카탸 투오미넨(Katja Tuominen) <무로스> 1997년 5월호 원 제목 = 우리는 모두 노동자다 (We're all workers) "실업률 20%, 남은 사람은 격무에 지치고 쫓겨난 사람은 일거리 있는 이들이 괜히 밉고, 정부는 유럽연합의 재정기준을 맞춘다며 쥐어짜기를 계속한다." 지난 97년 핀란드의 이런 상황은 98년 이후 우리가 느끼는 것과 너무나 비슷한 것 같군요. 이런 극심한 실업 대란 속에 실업자와 직업 있는 노동자간의 분열과 반목을 극복하고 단결 투쟁하자는 내용으로, `핀란드 소셜리스트 리그'라는 단체가 내는 `전환점'이라는 뜻의 잡지에 실린 것입니다.



계급사회 - 독립기념일에 살펴본 핀란드 노동자의 처지 "우리는 모두 노동자다, 진정 눈으로 바라본다면..."

카탸 투오미넨 (Katja Tuominen) (The Turning Point; 전환점) 97년 5월호


핀란드 노동자의 상황이 어떤가? 주변 사람들이 일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한 노동자를 기쁘게 하는가 아니면 쓰라리게 하는가? 실업자들은 오래전에 이미 주류 신문들에게서 사회보장을 악용하는 거대 세력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거짓 뉴스를 퍼뜨리고 대중을 분열시키는 것은 자본 세력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인심이 야박해지는 것같다. "내 먹을 것도 구하기 힘든 판인데..."는 식이다. 노동자들 사이의 이런 태도는 물론 지배계급들에게 유용한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증오를 부추겨 이들이 사악한 고용정책 뒤에 숨은 진짜 이유를 보지 못하게 한다. 분할-지배 기법이 새로운 부흥기를 맞고 있으며 어느 때보다 인기를 얻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난장판의 핵심은 무엇인가?

 

가난한 사람이 죄인인가?
우파 정책의 틀은 명확하다. 서비스를 사유화하고 빈민들의 무릎을 꿇기며 핀란드에는 더 많은 무기를! 사람들은 일자리를 빼앗긴다. 일자리 감축과 한축을 이루며, 경쟁의 심화와 엄청난 정부 부채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핀란드 경제는 유럽연합 경제통화연합 기준에 따라야 하며, 그래서 사회보장은 약화될 것이 분명하다. 일자리를 좀더 오래 지킬 수 있는 이들은 어떤가? 격무로 계속 피로가 누적돼 날카로워진 이들은 또 어떤가? 노동자들의 입에서 한탄이 점점 더 자주 흘러나오고 있다. 어떤 이들은, 남들은 실업자가 돼 연금에 의지해 사는데 자신은 인원감축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야하니, 잘못 대접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류 언론들은 사회보장에 의지하는 이들을 비난하며 특히 실업자에게 심하게 군다. 이들은 핀란드에 사회보장을 악용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업자, 학생, 가정을 둔 어머니들은 죄인이 아니다.

 

진짜 범죄자들
시대 정신은 바로 지속할 수 없는 유럽연합의 고용정책이다. 진짜 범죄가 숨어있는 곳을 찾아내야 한다. 유럽연합의 권력구조는 모든 면에서 서민에 적대적이다. 전체 유럽연합의 목표는 모든 회원국에 한 점으로 모아지는 정책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는 중앙집중식 자본을 위해 임금과 사회보장혜택을 깎는 것을 뜻한다. 유럽연합은 공식 실업률을 먼저 떨어뜨려서 사람들이 저임금의 일자리라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방법을 고안했다. 유럽의회는 벌써 아주 우파적인 고용정책안을 만들어놨다. 예를 들면 고용계약의 강제적용 규정은 위험에 처해있다.

 

이해할 수 없는 자본주의
자본주의 발전을 조절할 수 없게 된 것은 재화와 용역의 상대적인 과잉생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생산 비용을 낮추고 (예컨데 임금을 깎고) 잉여이익을 얻는다. 부가가치의 대부분을 얻는 자본가들 사이에도 경쟁이 있다. 경쟁이 심해지고 착취는 늘어난다 (예를 들어 사회비용을 줄이고 노동자를 해고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본가들이 시장에 계속 더 많이 밀어내는 재화를 살 능력이 없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노동력을 줄인다. 대기업들이 수백만의 이익을 챙기는데도 이런 식의 일을 계속한다! 실로 문제는 인건비 부족이 아니라 해고하고 임금을 깎아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는 시도에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탐욕이 늘어나면 노동력을 가장 값이 싼 구석에서 찾으려고 한다. 하루가 끝나갈 때쯤(아침에 고용한 이와 일이 끝나가는 저녁에 고용한 이에게 모두 최저임금을 지급한다는 성경의 일화에 빗댄 말인듯: 번역자) 자본가들의 구미를 가장 당기는 것은 어린이노동과 아시아의 저임금이다. 자본주의에선 피할 수 없는 경기침체가 생긴다. 노동자들에게 댓가를 요구하는 경기침체가 생긴다. 임금은 더 떨어지고 기본 사회보장은 지역 공공서비스의 사유화에 따라 더 줄어들고 끝내 모든 비난을 뒤짚어 쓴다. 사회 분위기는 굳어진다. 돈있는 이들은 힘도 있기 때문에 누가 유죄인지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자본 무리들은 그들의 거짓말을 신문을 통해 효과적으로 퍼뜨릴 수 있다.

 

계급사회는 병든 사회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두 똑같은 문제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아직 일자리가 있는 이는 실업자들을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그의 일자리는 역사가 될 것이고 그는 실업자가 된다. 비난받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닭모이쪼는 식의 위계질서를 만들어낸다. 돈과 힘이 있는 이들은 잘 살고 다른 이들은 기껏해야 허우적거릴 뿐이다. 계급사회의 본성은 성공하는 이와 실패하는 이의 차이가 크다는 점이다. 병든 사회의 본성은 다른 이를 불행하게 만들어야만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운동을 통해서만 이 고리를 끊을 수 있다.

 


*) 핀란드어를 영어로 번역한 이가 단 주석: 제목 (우리는 모두 노동자다:We're all workers)은 핀란드 대중가요 "우리는 모두 영웅이다"(We're all heroes)에서 따온 것이다. 핀란드 인구는 500만명이 약간 넘는다. 실업자는 40만명 곧 전체 노동력의 17%다. 하지만 많은 이들 특히 젊은이들은 인위적으로 만든 직업훈련이나 교육을 받고 있으며 많은 이들은 배우자나 가족이 번 것으로 먹고 산다. 그래서 더 현실에 가까운 수치는 50만명 또는 20%가 될 것이다. 사회민주당이 이끄는 정부는 임기초에 실업자를 임기중에는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지금(97년 5월) 사민당은 이 시한을 99년으로 미뤘다.(98년 11월 현재 핀란드 정부발표 공식 실업률은 10.6%, 15~24살의 실업률은 17.3%: 번역자) 하지만 물론 전체 과제는 달성하기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정부는 동시에 핀란드를 유럽통화연합 기준에 맞추는 일에 헌신하고 있으며 거대 자본의 이해에 비위를 맞추는 데도 힘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 번역자 주: 핀란드 소셜리스트 리그는 지난해 10월25일 `핀란드 공산주의 청년'에서 이름을 바꾼 단체다. 이들은 쿠바, 소련, 중국 등 스스로 공산주의라고 내세우거나 내세웠던 나라들이 사실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판단한다. 이들은 자본주의는 개량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자본주의의 개량을 목표로 하는 사민당이나 좌파연합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선언하고 있다.


번역: 신기섭
2004/07/19 17:57 2004/07/19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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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커지는 빈부 격차

아르민 얄니지언(Armine Yalnizian)

‘진보적 경제학 포럼’ 1998년 12월

원 제목 = 커지는 격차: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끼친다 (The Growing Gap: It Affects Us All)

 

캐나다의 사회정의 센터(옛 제수이트 센터)의 아르민 얄니지언의 캐나다 빈부격차 연구분석입니다. 캐나다는 북유럽 복지국가에 못지 않은 복지국가로 꼽힙니다. 하지만 이 나라도 신자유주의의 확대는 빈부격차를 계속 확대시키고 있답니다. 1973년부터 1996년까지 분석한 결과입니다.

 

 


커지는 격차: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끼친다

아르민 얄니지언

/사회정의센터 (Armine Yalnizian, Centre for Social Justice)

 

 

지난해 사회정의센터, 옛 제수이트센터(Jesuit Centre),는 "기업지배의 얼굴을 드러내기"라는 이름의 포스터를 만들었다. 이 포스터는 캐나다의 100대 기업의 사장이 얼마나 벌었고 이 기업의 자산과 이익이 얼마인지, 그리고 이 기업들이 몇명의 직원을 새로 고용했거나 해고했는지를 보여줬다. 이것은 신경에 타격을 주는 것이다. 새로운 문화가 어떻게 아주 소수의 값어치를 과도하게 높이고 대다수는 무시하거나 값을 떨어뜨리는 지 생생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올해, 애트킨슨 재단(Atkinson Foundation)이 사회정의센터에 자금을 지원해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격차가 얼마나 커졌는지 연구하게 했다. 다음의 분석은 1973~1996년 사이 18살 미만의 자녀를 둔 캐나다 가정의 1년 수입의 변화 추세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생활비 벌기

인플레이션 효과를 제거한 뒤 볼 때 평균 가계수입은 1951년에서 1976년까지 2배 이상 늘었다. 1980년대는 가계수입이 정체했고 1990년대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평균 수입이 대부분 가정에서 감소하는 추세다. 사회계약은 끝났다.

 

캐나다 가정은 시장주도로 이뤄진 수입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두가지 생존전략을 택했는데, 하나는 더 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이 집밖에서 더 많이 일하는 것이다. 두가지 전략은 이제 모두 한계에 이르고 있다. 추가로 더 일을 하려고 노력해도 더 많은 가정이 뒤로 쳐지고 있다. 이 나라가 생산하는 부는 늘어나는 데도 말이다.

 

시장 수입(임노동 수입, 월급, 자영업 수입, 투자수익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정의되는 것)을 보면 부자와 가난한 이의 격차는 캐나다 사회에서 커지고 있다. 1973년 상위 10%의 평균 수입은 밑바닥 10%의 21배였다.(1996년 달러 기준으로 할 때 각각 10만7천달러, 5200달러: 캐나다달러인 것으로 추정=옮긴이) 이 비율은 각 경기순환 주기 마다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그러나 지난 20년동안 실업의 점차적인 증가, 임시직 노동의 증가, (35살 미만) 젊은이의 실질 임금 저하가 나타났다. 시장 산출의 지속적인 불균형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분명해졌다. 이는 잘사는 가정의 소득 증가 보다는 분배의 밑바닥에 있는 가정의 고용기회 부족에 더 큰 원인이 있다. 사실 상위 10%의 1년 소득은 두번의 심각한 경기침체에도 약간 감소하는 변화만 보였지만, 밑바닥에 있는 이들의 부는 오랜 시간동안 훨씬 크게 변동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상위층과 하위층의 시장 수입 비율이 1990년대에 더 확대됐다는 것을 뜻한다. 1996년 - 이번 10년의 경기순환 주기의 꼭대기에 가깝고 그래서 아마도 불균형을 줄이는 "좋은" 시기 -에 상위 10%는 밑바닥 10%보다 314배 더 벌었다. (1년 평균 수입이 500달러에 미달하는 이들과 비교해 평균 13만7천달러)

 

중산층은 어디로 갔나?

불균형이 커지는 것은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보다 더 부유해지고 있다는 측면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사회 계층이 어떻게 퍼져있는가 하는 중요한 또 다른 질문이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난한 이가 늘었나 줄었나? 중산층이 늘었나 줄었나?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1973년 시장 수입 10분위(수입을 10등급으로 나누는 것=옮긴이)의 각 층의 위쪽 경계를 1996년 달러 가치로 환산했다. 만약 시장에서 얻은 수입의 분배가 과거와 똑같다면, 그 때보다 늘어난 현재의 인구를 10%씩 나눠 각 계층에 맞추면 그대로 들어맞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발견한 것은 당시 가장 가난한 10%의 수입(1년에 1만4천달러 이하)에 해당하는 현재의 인구가 전체 국민의 16.7%라는 것이다. 비슷하게 "엘리트"(1년에 8만500달러 이상 버는 가정)의 규모는 인구의 10%에서 18.1%로 늘었다. 1996년 전체 가구의 27.5%만이 1973년 중산층에 해당하는 수입을 확보하고 있다. 1973년 중간 40%의 수입은 1996년 달러를 기준으로 할 때 3만1666~5만5992달러다.

 

왜 중산층의 규모가 문제가 되는가? 어떤 소득계층에서건 사회가 더욱 밀집해있으면 물질적 경험의 공통점이 더 많다는 주장이 있다. 이것은 사회통합을 높이고, 함께 사회를 이룩하려는 욕구를 이끄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분배의 "말단"이 늘어나면 정확하게 반대의 결과 곧 공통점의 결여가 나타날 수 있다. 특히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더 많이 주고 가난한 이들에게서는 약탈적으로 빼앗는 시대에는 더 그렇다.

 

시장을 넘어

시장이 국민들의 경제적 안정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힘으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캐나다에서는 정부의 개입이 캐나다 가정의 불균형과 이들간 차이의 변동폭을 극적으로 줄이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그러나 U.I나 사회보조같은 소득이전 조처가 축소되던 때의 효과는 축적됐다가 경기순환 주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 맞춰 나타난다.

 

소득지원 프로그램과 세금체계를 모두 고려해보면, 소득 상위 10% 가정의 가처분 소득은 밑바닥 10% 가정의 6.5배다. 두번의 경제 침체를 겪었지만 이 관계는 지난 20년동안 눈에 띨 정도로 고정적이었다. 사실 경제 침체와 지원 프로그램의 대상을 더 좁힌 점, 두가지가 결합하면서 1993년에 부자와 가난한 이의 격차가 가장 적었다. 이 때는 상위 10%가 가정으로 가져가는 수입이 최하위층의 수입의 6배였다. 1996년 이 수치는 7.2배로 커졌다. 이는 우리가 검토한 지난 23년 언제도 나타나지 않은 수치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이 얼마나 버는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당신이 얼마를 쓰느냐와도 관련된 것이다. 우리의 남쪽 이웃(가난한 나라들을 지칭하는 듯=옮긴이)들이 잘 보여주듯, 역사적인 저실업률도 근본적으로 공평한 기회를 얻지 못하는 극빈층의 증가 추세를 뒤바꾸지 못했다. 우리가 당연히 자부하는 `사회 임금'조차 공격받고 있다. 교육과 건강, 주거, 도서관, 레크리에이션 센터, 공공교통, 깨끗한 환경을 사회가 제공하는 범위가 점차로 줄어드는 추세이며, 부채 관리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이런 서비스에 대한 "소비자"들의 부담도 더 커지고 있다.

 

시장 생산과, 성장의 격차를 줄이는 데 개입하려는 정부의 의지에 파도가 몰아닥치고 있는 것같다.

 

"대안이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는 여기 없다

세계 경제의 심한 경쟁환경속에서 선택의 여지는 없나? 거의 그렇지 않다. 역사적 증거와 국제적 분석은 형평성이 경제성장의 전제조건일 개연성을 더욱 강화시킨다. 소득의 더 공정한 분배를 이룩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정부는 시장이 움직이는 방식을 규제하거나 시장의 실패를 처리함으로써 또는 두가지를 다 함으로써 적극적인 구실을 할 수 있다. 이런 노력은 단지 중앙 정부, 주 정부 또는 지자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기업, 산업계, 이웃들, 이해집단이나 특정 계파가 가진자와 없는자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할 일의 예는 얼마든지 있다.

 

이런 "해결책"은 다음의 4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1) 사람들이 조합을 만들거나 자신들의 권리를 확보하기 쉽도록 보수체계를 바꾸고, 공정한 임금을 위한 캠페인을 포함한 집단적 교섭을 확대하거나 중앙집중화하고, 강력한 임금기준을 만들고 시행하며, 경영진에 대한 과도한 보상을 규제하거나 한도를 설정하는 문화적, 규제적 기준과 회계 및 법적 규범을 만드는 것.

 

2) 공공 부문, 자원봉사 부문의 일자리와 지역 경제개발을 통한 일자리를 창출하고, 세금정책과 임금보조 또는 연구개발지원을 통해 새로 사람을 고용할 때 드는 비용을 감소시켜주고, 노동시간을 재분배하는 것.

 

3) 소득지원, 세금관련 혜택, 가족수당 또는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현금과 (또는) 현물을 주는 기타 조처를 통해 고용 수입이 없거나 적은 이들을 지원하는 것, 그리고

 

4) 사람에게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제공하는 것. 지역사회 차원에서 제공하건 공공차원에서 제공하건간에 이런 해결책은 교육, 건강관리, 아동보호, 주택이나 보호처, 음식과 영양 관련 프로그램에 대한 접근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의 도전은 대안을 따라잡는 것이 아니다. 개인을 위해서건 사회을 위해서건 더 나은 삶을 만들려는 대안적 접근방안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의 도전은, 대안은 없다고 외치는 마비의 문화가 자연스러운 만큼 이런 제안들도 자연스럽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원문: www.web.net/~pef/armine1.html

번역: 신기섭

2004/07/19 17:53 2004/07/1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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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경제가 망가진 이유

보리스 카갈리츠키(Boris Kagarlitsky)

원 제목 = 미국이여, 우리가 문제를 스스로 풀게 놔두라

 

러시아의 좌파 지식인 보리스 카갈리츠키가 미국과 국제통화기금의 엉터리 같은 개입이 러시아를 위기로 몰아갔고 민영화를 마구잡이로 실시해 러시아가 제3 세계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지적합니다. 민영화를 하지 않은 벨로루쉬와 러시아를 비교해 민영화의 문제를 보여줍니다. 1998년 9월20일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프레드 하이아트의 칼럼에 대해 반박한 글인데, 신문이 실어주지 않았답니다. 이정훈님께서 번역하셨습니다.

 


미국이여, 우리가 문제를 스스로 풀게 놔두라.

(America, Please Leave Us Alone To Solve Our Problems)

 

보리스 카갈리츠키/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비교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프레드 하이아트의 "누가 러시아를 잃었는나?"에 대한 카갈리츠키의 반박문. 신문은 싣기를 거부했다.]

 


 

나는 프레드 하이아트(Fred Hiatt)의 "누가 러시아를 잃었는가"(워싱턴 포스트 98년 9월20일치)를 읽고 당혹스러웠다. 하이아트씨는 국제통화기금과 G7의 대러시아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실수를 인정하는 것과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별개의 문제"라고 했다. 만약 한 정책을 그 결과로 판단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뭘 근거로 판단할 것인가 의심스럽다.

 

하이아트씨에 따르면, "개혁" 이전의 러시아는 우주항공과 핵분야에서 선진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외 모든 것은 거의 제3세계 수준과 동일했다. 즉 대부분 공장은 투입한 원자재보다도 가치가 못한 상품을 생산하고, 많은 도시는 영원히 국가의 수용소로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되는 외떨어지고 얼어붙은 곳에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실제로 러시아가 제3세계 국가였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소비에트 산업은 확실히 비효율적이고 기술적인 근대화가 시급했었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가지고도 러시아는 생산품을 수출할 수 있었다. "개혁론자"들이 집권한 직후부터 러시아는 원자재 수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나라가 됐다. 사유화 이후 산업 수출이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 경쟁력 또는 국내 시장의 경쟁력 또한 쇠퇴하였다. 러시아 경제는 기술적으로 훨씬 더 후퇴하였고 과학연구 집단은 혼란에 빠졌다. 지금 어떤 것이라도 수출할 여력이 남아있는 러시아 회사는 사유화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하이아트씨는 1991년 이전 러시아인의 교육수준이 매우 높았다는 것을 모르거나 모른 척한다. 그것은 우리의 주요 재산이며 근대 기술을 흡수해 성장할 수 있는 기회였다. 지금 러시아는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미국에 전문가를 "수출하고" 있다. 미국에서 "수입한" 사람들은 거만한 IMF 관료들이었다. 이들은 러시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며, 나중에 밝혀졌듯이 자금시장의 실제 운용에 관해서도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그들은 "야만인"인 러시아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려고 들었다.

 

러시아 인구의 교육수준은 10년전보다도 낮고 나라를 다시 세울 기회 역시 마찬가지다.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무너졌고, 평균 수명은 쇠퇴했으며, 유아 사망률은 증가했다. 우리는 수용소에 갖힌 이들을 학살한 스탈린을 비난한다. "자유화"된 경제체제 아래 기아에 허덕이는 이들은 어떤가? "개혁" 과정에서 보건체계가 무너져 죽은 수십만명은 또 어떤가? 적어도 공산주의자들은 후루스쵸프(Khruschev)와 고르바쵸프 정권아래 그들의 죄를 인정한다. 국제통화기금은 절대 그들이 야기한 파괴를 인정하지 않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제 국제통화기금 고문들이 정책을 강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들을 보자. 그들 중 하나는 중국이고 또 하나는 벨로루쉬이다. 중국은 지난 20년동안 세계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한 나라의 하나이다. 벨로루쉬는 1997년에 10%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1997년은 러시아의 성장률이 0%로 1989년이래 가장 좋은 해였다.) 벨로루쉬 산업은 과거 러시아와 똑같았지만 외화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석유나 가스는 없다. 벨로루쉬는 산업을 사유화하는 대신 재조정하여 근대화시켰다. 지금 그들은 과거 소련이 산업생산품을 수출했던 바로 그 시장에 수출하고 있다. 러시아는 이 시장들을 잃었다. 벨로루쉬는 러시아에도 수출하고 있으며 서양 제품들과 성공적으로 경쟁하고 있다.

 

물론 벨로루쉬는 경찰국가이지 민주국가는 아니다. 하지만 하나의 문제가 있다: 그것의 정치체제가 러시아와 똑같다는 것이다. 유일한 차이점은 경찰과 관료가 덜 부패했다는 것이다. "벨로루쉬 마피아"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부패가 "개혁"의 실패 원인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은 그것이 빠른 사유화 과정에서 폭발적으로 늘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소련체제에 물론 많은 부패가 있었지만 "자유화"과정에서 배가되었다.

 

러시아에 실제 일어난 것은 단순하다. 수많은 문제가 있었고 소련체제는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러나 "개혁론자들"은 실제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시켰다. 그리고 이른바 개혁론자와 서구의 친구들은 절대로 러시아를 재건하거나 산업 실적을 향상시키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들은 민주주의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지 소련을 약탈하는 기회로 소련체제의 위기를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개혁"은 완전한 성공이었다. "새로운 러시아인"인만 자신들의 모국을 약탈한 것이 이나라 미국 기업들도 그랬다. 그런 "우호관계"로 인해 10년후에 좀더 많은 러시아인들이 점점 반미주의자가 되더라도 놀라지마라. (반미주의는 "냉전시기"에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제발 우리를 그냥 놔둬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수 있도록 간섭하지 말라. 그리고 폭력배 지원을 중지하라. 그러면 조만간 우리는 이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나라를 재건설할수 있을 것이다.

 


번역: 이정훈
2004/07/19 17:49 2004/07/19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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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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