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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정치-사회'에 해당되는 글 36건

  1. 2006/09/13 아옌데의 마지막 말 (8)
  2. 2006/01/30 발칸분쟁 이해를 위하여 (9)
  3. 2005/10/04 유럽헌법은 헌법의 자격이 없다
  4. 2005/09/22 희망없는 일본 사회
  5. 2005/09/19 외국 학자가 본 '남한 정치 투쟁 상황' (2)
  6. 2005/07/10 발리바르와 네그리 (3)
  7. 2004/12/14 데리다의 꿈-어느 땐가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8. 2004/11/19 실제와 가상의 치아파스: 마술적 사실주의와 좌파
  9. 2004/11/09 사물을 긴 전망에서 파악하기: 1968년과 현재의 미국 (2)
  10. 2004/07/15 미국 경찰의 폭력에 맞서는 이들

앞으로 뒤로

아옌데의 마지막 말

1973년 9월11일은 민주적인 절차로 당선된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아메리카합중국의 지원을 받는 군부의 쿠데타로 밀려나 숨진 날입니다. 그가 이날 아침 마지막으로 한 라디오 연설문을 옮겨다 놓습니다.

 

마지막 말

살바도르 아옌데(1908-1973)

 

확실히 이번이 제가 여러분들께 연설하는 마지막 기회일 겁니다. 공군이 마가야네스 라디오의 안테나들을 폭격했습니다. 제 말들은 쓰라림이 아니라 실망을 담고 있습니다. 아마 자신들의 맹세를 배반한 이들에게는 도덕적 처벌이 있을 겁니다. 칠레의 군인들, 이름뿐인 총사령관들, 스스로를 해군 사령관이라고 칭한 메리노 장군, 그리고 바로 어제 정부에 대한 충성을 서약했고 스스로를 (준군사 경찰) 카라비네로스의 총장으로 임명한 비열한 장군 멘도사씨. 이런 상황에서 저에게 남은 건 오직 노동자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사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역사적 변천 과정에 처해서 저는 일생동안 인민들에게 충성한 대가를 치를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제가 수많은 칠레인들의 양심에 뿌린 씨앗이 영원히 시들어버리지는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무력이 있고 우리를 지배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사회의 진행은 범죄로도, 무력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고, 인민들이 역사를 만듭니다.

 

내 조국의 노동자들이여, 여러분이 언제나 보여줬던 충실함 그리고 헌법과 법률을 존중하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것만 했으며 정의에 대한 위대한 갈망의 해석자에 불과한 이에게 주셨던 신임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이 결정적인 순간, 제가 여러분께 연설할 수 있는 이 마지막 순간, 저는 여러분이 교훈을 잘 활용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외국 자본, 제국주의가, 반동세력과 함께, 군부로 하여금 자신들의 전통을 깨뜨리게 만드는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사실에서 말입니다. 이 전통은 슈나이더 장군이 가르친 것이고 아라야 사령관이 재확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사람은, 오늘날 자신들의 이익과 특권을 계속 지키려고 외국의 도움으로 권력을 다시 정복하려 하는 바로 그 사회 세력들의 희생자들이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이 땅의 품위 있는 여성, 우리를 믿는 농부, 아이들에 대한 우리의 염려를 아는 어머니, 바로 당신에게 말합니다. 저는 칠레의 전문직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사회의 이점을 옹호하는 직능 결사체들, 최고급 결사체들이 지지하는 반란에 맞서 계속 애써온 애국적 전문직들에게 말합니다.

 

저는 젊은이들, 노래 부르고 우리에게 자신들의 기쁨과 투쟁 정신을 보여준 그들에게 말합니다. 저는 칠레의 남성, 노동자, 농부, 지식인, 이미 이 나라에 파시즘이 나타나 여러 시간 지속되고 있는 탓에 학대당하게 될 그들에게 말합니다. 행동할 의무가 있는 이들의 침묵 속에서 테러 공격, 다리 폭파, 철로 절단, 기름과 가스 수송관 파괴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심이 굳습니다. 역사가 그들을 심판할 겁니다.

 

확실히, 마가야네스 라디오는 침묵할 것이고, 제 목소리를 전하는 차분한 금속 기계는 더 이상 여러분에게 도달하지 못할 겁니다. 이건 대단치 않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도 계속 듣게 될 겁니다. 저는 언제나 여러분 곁에 있을 겁니다. 적어도 제 기억이, 조국에 충성한 위엄 있는 사람의 기억이 될 겁니다.

 

인민들은 스스로 방어해야 합니다만, 제 스스로를 희생해서는 안됩니다. 인민은 자신이 파괴되도록, 총알 세례를 받도록 놔둬서도 안됩니다만, 인민이 굴욕을 당할 수도 없습니다.

 

내 조국의 노동자들이여,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을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반역이 지배하려고 하는 이 어둡고 모진 순간을 극복할 것입니다. 머지않아 위대한 길이 다시 열리고 이 길로 자유인들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걸어갈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제 마지막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제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이것이 적어도 중죄, 비겁, 반역을 처벌할 도덕적 교훈이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칠레 산티아고 1973년 9월11일.

스페인어 원문 및 영문 보기 번역: 신기섭

2006/09/13 16:48 2006/09/13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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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분쟁 이해를 위하여

이 글은 개인적으로 몇년동안의 과제였던 발칸분쟁에 대한 기초 정리를 위한 것이자, 곧 번역할 어떤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유고슬라비아는 역사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토만 제국의 경계지역이며, 혼란과 경쟁, 증오가 존재한 땅이다. 티토가 유고 연방으로 이들을 묶어 통치할 동안 다양한 민족들이 평화롭게 공존했으나, 티토 이후 다시 분열해 1992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분리 독립했다. 그리고 코소보 지역을 포함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신유고연방을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유고에는 두번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벌어졌다. 첫번째는 1992년 4월부터 1995년 10월까지 계속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쟁이고, 두번째는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좁은 의미에서는 99년 3월부터 6월까지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세르비아 공습을 의미하는 코소보 전쟁이다.

 

이 두번의 전쟁은 워낙 많은 변수들이 얽히고설키는 양상을 띠었기 때문에 간단히 정리하기 힘들다. 먼저 분쟁에 거의 개입하지 않은 슬로베니아와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를 뺀 나머지 국가 또는 지역 곧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코소보의 인종과 종교를 파악하는 것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세르비아는 그리스정교를 믿는 슬라브계 세르비아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크로아티아는 가톨릭교도들이 많으며 전통적으로 스스로를 유럽에 속한다고 여긴다. (실제로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같은 발칸반도 지역이더라도 자기들의 땅 동쪽에 있는 지역을 모두 동양(오리엔트)으로 취급해왔다. 자신들의 땅을 서양의 동쪽 끝이라고 여긴 것이다. 특히 세르비아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며, 이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쟁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될만한 사항이다.

 

진짜 복잡한 지역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코소보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중간에 위치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이슬람교도가 지배적인 가운데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계가 섞여 사는 다문화 지역이다. 코소보 또한 유고 남부에 위치한 작은 나라 알바니아 출신의 이슬람교도들과 세르비아인들이 섞여 사는 자치지역이다. 코소보는 알바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보스니아 전쟁과 코소보 전쟁을 이해하려면, 이런 복잡한 문화 속 다양한 세력들의 충돌을 고려해야 한다. 이 두번의 전쟁이 사악한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촉발됐다고 단순하게 정리하는 것이야말로, 아메리카와 유럽의 지배세력이 바라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이런 단순한 '악마 만들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보스니아 전쟁을 가장 잘 상징하는 말은 아마도 인종청소다. 특정한 민족이 자신들만의 나라를 만들려고, 함께 살던 다른 민족을 몰아내는 걸 의미하는 인종청소는 1990년 크로아티아에서 시작됐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형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있던 세르비아계가 촉발했고 이에 자극받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크로아티아에서도 같은 형태의 인종청소가 나타났다고 한다. 아무튼 인종청소는 누구 하나를 탓할 것 없이, 한동안 발칸반도를 휩쓸던 폭력 형태다. 다만 이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자가 몇명인지는 그 누구도 정확한 정보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두번째 벌어진 코소보 전쟁은, 1996년부터 99년까지와 99년 3-6월의 성격이 판이하다. 96년부터 이 지역에서는 알바니아계 사람들이 주도한 코소보 독립 시도와 이를 저지하려는 세르비아인들의 충돌이 이어졌다. 알바니아계 이슬람교도들은 이를 민족해방 투쟁이라고 규정하나, 세르비아인들은 테러 행위로 본다. 이 와중에 서구 세력들은 알바니아계를 지지했다. 다만 코소보의 독립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서구 세력은 세르비아의 야만행위를 중단시킨다는 명분으로 99년 3월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격을 개시했다.

 

나토의 공습은 두가지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나토의 이름으로 치러진 첫번째 전쟁이라는 점과 서유럽 국가들이 유엔의 승인이 없는 침략행위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는 나토의 의미, 서유럽 집단방위체제의 성격, 유럽연합의 대외정책 등과 관련해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수전 왓킨스가 쓴 대륙의 떨림 (한글 번역본)의 '마스트리히트와 사라예보' 부분을 참고할만 하다.

 

나토 공습과 관련해 중요한 두번째 의미는 이른바 '인도주의적 전쟁' 개념의 파장이다. 이에 대해서는 타리크 알리가 묶어서 낸 책 <<전쟁이 끝난 후>>(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옮김, 이후, 2000; 원 제목은 Masters of the Universe)에 자세하게 언급된다. 참고로 이 책에 '인도주의적 전쟁: 범죄를 처벌에 꿰맞추기'(Humanitarian War: Making The Crime Fit The Punishment; 이 글은 한글 번역본에는 실리지 않았다. 영어 원문은 여기)'를 쓴 다이애나 존스톤은 다른 글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보스니아 전쟁은 아마도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개념이 어떤 잘못이 있는지를 예시하는 사례로 보는 게 바람직하다.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이념은, 강대국들로 하여금(오늘날의 세력 관계에서는 아메리카를 의미한다)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서 단호하게 행동하도록 설득할 수 있다는 걸 암시한다. 이는 환상이다. 게다가 고공 폭격에 바탕을 둔 아메리카의 개입 방식은 그 성질상 '인도주의적' 작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인도주의적 개입' 요청의 기대감은, 아메리카의 군사력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를 기대하는 세력간의 분쟁을 악화시킬 위험이 있다.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보스니아의 이슬람계 지도자로서 보스니아 대통령을 역임했다: 옮긴이]가 아메리카의 개입을 끌어낼 수 있다고 믿게 되지 않았다면, 그는 절충안을 도출하려고 했을 것이다. 보스니아 분쟁이 쓸데없이 길어지지 않았다면, 1995년 세르비아의 스레브레니차 점령[스레브레니차 사태는 세르비아의 이슬람교도 학살을 뜻하는데, 서구 언론들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버금가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과장됐다는 주장도 끊임없이 나온다: 옮긴이]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유고 분쟁은 서구 좌파들이 크게 나뉘는 결정적인 계기라는 의미도 지닌다. 좌파에 해당하는 세력들조차 대부분 이 전쟁에 찬성했고, 전쟁에 반대한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매체로는 프랑스의 진보적 월간 신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영국의 좌파 학술지 <뉴레프트 리뷰> 등을 꼽을 수 있다. 인물로는, 타리크 알리와 로빈 블랙번 같은 <뉴레프트 리뷰>쪽 인사들, 이들과는 이념이 다른 좌파 학자 알렉스 캘리니코스, 프랑스의 로베르 레데케르(<현대> 편집위원), 레지 드브레(미테랑 대통령 자문위원) 등이 있다. 독일인 가운데는 좌파 정치인 오스카 라퐁텐이 대표적이다. 아메리카에서도 이 전쟁에 반대한 인물은 손에 꼽는데, 놈 촘스키와 지오반니 아리기(뉴욕주립대 사회학과 교수), 좌파 잡지 <먼슬리 리뷰>쪽 사람들 정도이고, 캐나다 학계에선 경제학자 미셸 초수도프스키와 정치학자 엘런 메익신스 우드가 있다.

 

이런 정도로 일단 정리하면, 발칸반도 사태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비판적으로 접근할 기초는 다진 게 아닌가 싶다.

 

덧붙여서, 발칸분쟁에 대한 서구의 개입을 비판한 이들을 주류 언론이 어떻게 취급하는지 알려면, 영국의 일간 신문 <가디언>의 촘스키에 대한 중상모략에 관한 짤막한 글 촘스키의 수난을 참고하면 된다. (그런데 뒤늦게 본 이 글의 댓글들, 경악할 정도의 정치적 해석이다.)

2006/01/30 22:33 2006/01/30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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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헌법은 헌법의 자격이 없다

이른바 유럽헌법에 대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국민투표가 지난 5월29일과 6월1일 각각 부결된 걸 전후해서 수많은 전망과 주장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발리바르와 네그리 이 글을 보시면 일부 관련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글들은 많고 말들도 많지만 무엇이 진정한 쟁점인지를 보여주는 건 별로 없습니다. 이른바 헌법 논의와 유럽연합 변천의 맥락에서 이 문제를 다룬 글이 있습니다. 영국 학술지 <뉴 레프트 리뷰> 2005년 5-6월호에 수전 왓킨스(Susan Watkins)가 쓴 '대륙의 떨림'(Continental Tremors)입니다. 이 학술지는 보통 editorial(사설)이라는 게 없는데, 이 글은 5-6월호 사설입니다.

 

글을 요약하자면 한마디로 유럽헌법이라는 이름은 적합하지 않다는 겁니다. 이건 일반적인 헌법이 아니라 유럽연합 작동에 관해 그동안 합의된 세세한 규정들을 모두 모아서, 유럽 시민들로부터 사후 추인을 받으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또 이 유럽연합 구성 조약(이른바 헌법)이 통과되면 유럽이 아메리카 초강대국에 대한 민주적인 견제 세력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헛소리일 뿐이라고 왓킨스는 주장합니다. 하버마스나 네그리 같은 이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겁니다.

 

나머지는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유럽연합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가난한 사람들과 젊은이들이 구성 조약을 거부했는지 궁금한 이들에게 비교적 명쾌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원고지 120장 분량의 글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결국 유럽연합 지배의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측면을 목표로 했던 반대 투표는, 다시 한번 좌파 대표성의 위기를 그대로 보여줬다. 네덜란드 노동당과 프랑스 사회당 지도자들은 유권자 대다수에 단호하게 맞섬으로써 정치 영역을 주변 세력에게 남겨줬다. 그로써, 신자유주의 기획에 맞서는 전반적인 대안 프로그램의 건설이 여전히 얼마나 멀리 있는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2005년 여름에 친 번갯불은, 이 프로그램의 부재를 조명하는 가운데 그것이 존재할지 모르는 미래의 지평선을 잠깐동안 깜박하고 드러내 보였다.

 


대륙의 떨림(Continental Tremors)
수전 왓킨스(Susan Watkins)

뉴 레프트 리뷰 2005년 5-6월호 (원문 newleftreview.org/?view=2559)

 

유럽 관련 조약들은 그전에도 거부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 계절에 예정에 없이 나타난 유럽연합 내부 과정에 대한 대중의 불만 분출은 전례가 없는 것이다.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 국민 투표에서 유럽연합 구성 조약(왓킨스는 이것이 헌법이 아니라고 주장하기에 이렇게 번역한다 : 옮긴이)이 거부된 것은, 아일랜드가 2001년 니스 조약(유럽연합 확대에 따른 위원회 구성 및 의결 방법 개정안을 담고 있다 : 옮긴이)을 부결시킨 때나 덴마크가 2002년 유로 도입을 부결시켰을 때 보였던 냉담함과 불만의 혼합과는 상당히 성격이 다르다. 네덜란드와 프랑스 선거의 투표율은 꽤 높았다. 각각 63%와 70%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두 나라가 마찬가지인데, 비공식 좌파의 상대적인 주변부 세력이 조약에 반대하는 논쟁을 부추기는 데 중심 구실을 했다. 투표 결과가 분명한 계급적 성격을 보인 것도 똑같다. 저임금 노동자, 노동당(네덜란드의 PvdA) 또는 사회당 지지자 다수가 당 지도부에 반대해 반대표를 던졌다. 젊은이들은 확고하게 반대했다.

 

유럽연합 내부의 사태 진전이 하나의 논리를 따르는 일은 좀체 없다. 경쟁 관계의 국가 이익, 정치적 운명, 서로 틀린 경제들, 외부 세력 사이의 다각적인 상호 작용이 특히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의 법칙으로 기울게 만든다. 25개 회원국으로 구성되는 장래 유럽연합의 기능과 회원국 추가 확대에 대한 이번 여름의 제동이 가져올 결과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그럼에도, 이번 투표 결과에 대한 유럽연합 지도자들의 첫 반응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이 반응이란 국민투표를 축소하고 대신 홍보를 확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유럽 모델을 어떻게 팔아먹을 것인가는 여전히 문제다. 2차 대전 이후 사회민주주의와 기독민주주의 시대에 창설된 유럽연합은 자유주의 헤게모니 시대에 돌연변이해서 다른 종류의 기구로 확장됐다. 2005년 국민투표는, 유럽연합에 대한 지표가 되는 다른 어떤 조사보다 더 훌륭하게 대륙의 새로운 정치적 풍경을 폭로했다. 이번 투표는 널리 언급됐듯이 유권자와 지배집단의 간격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질서 너머의 정치학을 그려내는 문제들도 드러냈다.

 

찬성 진영

첫눈에 이미, 공식적인 구성 조약 옹호론은 매력적인 듯했고 충분히 그럴 듯했다. 그리고 정치 지배 기구와 언론 기구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 조약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유럽연합을 더 민주적이고 더 효율적인 동시에 합리적이며 더 투명하게 만들 것이라고들 주장했다.(1) 이는 유럽의회에 권한을 부여하고 중요한 결정에 대한 개별 국가의 거부권 사용을 제한하며, 공통의 외교 및 방위 정책의 기초를 다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 결과는 아메리카의 제국주의적 야심에 중재 위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더 강한 유럽이라는 것이다. (영국 현대사 연구자) 티모시 가튼 애시는 프랑스 투표 전날 <르몽드> 독자들에게 이 조약이 없으면 초강대국 아메리카가 다시 '독자 행동을 할 유혹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주1: <엘파이스>(스페인 신문) <코리에레 델라 세라>(이탈리아) <가디언>(영국) <인디펜던트>(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영국)뿐 아니라 <르몽드>(프랑스) <리베라시옹>(프랑스) (네덜란드) <폴크스크란트>(네덜란드)를 통해 이런 주장들이 제기됐다. (아메리카의)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말할 것도 없다. <이코노미스트>(영국의 경제 주간지)는 스스로의 명성에 걸맞게 변함없이 조약에 대해 극-자유주의적 비관론을 견지했다.

 

프랑스에서 찬성 운동은 2005년 2월28일 상, 하원 의원들이 조약 비준을 위해 특별히 베르사유에 모여 만장일치의 화려한 모습을 연출하면서 시작됐다. 완전 무장한 언론들이 운동을 주도했다. 세르지 알리미는 <프랑스 앵테르>(France Inter) 라디오 방송에서 단 하나의 의견 차이도 없이 “스테판 파올리가 베르나르 게타에게 마이크를 넘기고, 그는 또 피에르 르 마르크에게, 르 마르크는 또 장-마르크 실베스트르에게 넘긴' 모습을 묘사했다.(2) 페리 앤더슨이 달콤한 연합(union sucrée)(3)이라고 이름붙인 것을 전형적으로 동원해서, 공화국 대통령과 집권당인 대중운동연합(UMP) 및 사회당 지도부, <피가로>와 (주간) <렉스프레스>로부터 <르몽드>와 <리베라시옹>, (월간) <르누벨옵세르바퇴르>에 이르는 언론의 논설위원들, 뉴스진행자들과 토론프로그램 진행자들이 조약에 찬성하는 기라성같은 명사들, 영화배우들, 유명 축구선수들과 함께 텔레비전 스튜디오에 총집합했다. 스페인 총리, 폴란드 대통령, 독일 총리는 시라크 대통령을 지지하기 위해 날아왔다. 중립적이라고 보통 믿는 정부의 유권자 안내 우편물은 노골적인 조약 옹호 선전물이었다. 교육부가 각급 학교에 보낸 소책자도 마찬가지였다. 케스 데파르뉴 뮤추얼펀드의 회장은 '유럽 덕분에' 투자자들에게 수익률을 올려 주게 될 거라고 선언했다.

주2: 세르지 알리미(Serge Halimi), 'Médias en tenue de campagne européenne'(유럽 캠페인의 제복을 입은 언론), Le Monde diplomatique, 2005년 5월
주3: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 'Union Sucrée', London Review of Books, 2004년 9월23일

 

이 모든 작업에도 반대 유권자가 여론조사에서 상승하기 시작하자, 어조가 더 위협적으로 바뀌어갔다. 조약에 반대하는 이들은 외국인 혐오자, 인종차별주의자, 반 터키 세력, 반 폴란드 세력, 반 유럽 세력이 됐다. 자유주의 언론의 지면들은 아메리카 초강대국에 대한 '유럽적 대안'을 건설하기 위해 찬성 투표를 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대서양 양쪽의 목소리들로 가득찼다. (시인) 볼프 비어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 (영화감독) 알렉산더 클루게, (작가) 귄터 글라스 등 (11명의 독일 지식인)이 서명한 '우리의 프랑스 친구들에게'라는 호소문이 <르몽드>에 실렸다. 이 글은 반대는 프랑스를 '치명적인 고립'으로 몰아가되, 중부 유럽국가들에게 그리고 아메리카와 관계에 '재앙적인 결과'를 안길 것이라고 논했다. 찬성 투표는 도덕적 의무였다. “우리는 우리의 무분별한 전쟁과 범죄적 독재의 희생자 수백만명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4) 이런 히스테리 상태가 고조됐음에도, 조약은 5월29일 55% 대 45%로 부결됐다.

주4: 'A nos amis français'(우리의 프랑스 친구들에게), Le Monde, 2005년 5월2일

 

네덜란드에선 헤게모니의 구조가 더 소박한 형식을 취했다. 언론, 정당 지도자들, 교회들, 노조 지도자들, 사용자 단체들, 심지어 여행 클럽까지 찬성 투표를 촉구했다. 처음 국민투표를 주장했던 의회는 구성 조약을 찬성 85%로 승인했다. 패배의 분위기가 나타나자 다시 한번 공식적인 수사법은 점점 더 종말론적인 어조를 띠었다. 발케넨데 총리는 아우슈비츠의 유령을 불러냈고 경제부 장관은 '빛이 꺼져가는 것'을 이야기했고 법무부 장관은 발칸반도화와 전쟁을 이야기했다. 6월1일의 국민투표는 62% 대 38%로 부결됐다.

 

조약 읽기

두 나라에서 처음 반대 투표를 집결시킨 핵심 요소는 조약 그 자체였다. 네덜란드의 반대 운동은 사회당(5)의 투사 4만명이 활기를 불어넣었다. 사회당의 '날아가는 토마토' 포스터는 관료주의와 자유시장 정책을 동시에 공격했다. 네덜란드에서 조약에 대해 '잘 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85%는 조약에 반대한다고 사회당은 지적했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프랑스 금융거래과세운동연합(ATTAC) 운동가) 베르나르 카상이 묘사한 것을 보면, 프랑스에서 논쟁은 집중적인 교육 캠페인에 의해 뜨거워졌는데, 이 캠페인은 애초 조약에 찬성하던 다수의 태도를 바꿨다. 기존 체제가 전한 말 곧 아메리카에 대한 대안을 더 잘 제시할 수 있는 더 민주적이고 효율적이며 투명한 유럽이라는 주장은 조약 문구 그 자체와 심하게 모순됐다.

주5: 네덜란드의 사회당은 1972년 창당했는데, 뿌리는 마오주의와 네덜란드 공산주의 운동이다. 이 당은 1991년 좌파 사민주의로 색깔을 바꿨으며 의회 밖에서 노동계급 쟁점을 둘러싼 운동을 조직한다. 또 자체 의료보험 서비스와 '환경 경보 팀'을 운영하고 있다. www.international.sp.nl 을 보라. Servaas Storm and Ro Naastepad, 'The Dutch Distress'(네덜란드의 고뇌), 뉴 레프트 리뷰 20호, 2003년 3-4월, 147쪽.

 

왜냐하면 이 조약은 1957년 만들어진 유럽연합의 독특하게 불투명하고 비민주적인 구조를 사실상 전혀 바꾸지 않은 채 유지한다. 입법 발의권을 독점한 초국가적인 집행위원회는 여전히 회원국 정부의 외교적 거래에 의해 임명된다. 유럽의 유권자들은 유럽연합 집행 기구 구성을 결정할 어떤 권한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날로 권한이 강화되는 정부 수반 모임인 유럽이사회(European Council), 통상 관련 소송을 주로 담당하는 유럽사법재판소, 중앙은행, 정부간 각료회의가 이런 신봉건적 기구 지형의 다른 특징들을 이루고 있다.(6) 유럽의회는 입법을 저지하거나 발의할 의미있는 권한이 박탈당한 채 대체로 자문기구적 성격을 계속 유지하게 되어 있다. 비록 이제 법 개정안을 제안할 수는 있지만, 집행위원회는 자신들이 적당하다고 판단하면 이를 취하거나 무시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더 민주적인' 요소였다.) '합리화'가 지칭하는 건, 각료회의에서 여러나라의 가중 투표권에 대해 이뤄진 거래다. 특히 2000년 합의가 도출된 것을 말하는데, 내용은 프랑스의 비중을 줄이는 대신 독일의 비중을 높이고, 스페인과 폴란드의 비중도 약간 줄인 것이다. 자비에르 솔라나의 업무가 고위 대표에서 외교관들의 지원을 받는 외무장관으로 바뀐 것, 전직 총리 한명을 임기 6개월의 각료회의 의장 서리 대신 임기 30개월의 의장으로 임명하는 것을 빼면, 구성 조약에는 새로운 게 거의 없다.

주6: 알랭 쉬피오(Alain Supiot)는 집행위원회를 '새로운 기술관료 성직자, 단일시장 법 박사들'로 묘사했다. 또 이사회는 '유럽 인민의 보통 선거권을 통한 양적 대표라기보다는 (회원국 비중에 따른) 질적 대표권을 부여받은, 앙시앙레짐(구 체제)의 삼부회 구실을 한다'고 기술했다. Alain Supiot, 'Anatomie d'un refus'(거부의 해부학), 곧 나올 <세카이>. 구성 조약은 “우리, 인민”이 아니라 “벨기에 국왕 폐하, 체코공화국 대통령 각하, 덴마크 여왕 폐하' 등 25개국 국가 수반의 이름으로 공표됐다.

 

이는, 위르겐 하버마스가 한때 희망한 '토대 설립의 정치적 행위'가 아니었다.(7) 이는 또 서로 다른 정책들의 토론 틀이 되고 그 정책 결정의 근거가 되는 법적인 체제라는 의미에서 헌법이 아니다. 도리어 정책들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할지를 상품과 용역의 자유 무역의 미세한 작동에까지 상세하게 기술해 선포되는 조약이다. 집행위원회, 유럽재판소, 중앙은행은 이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끝까지 밀고나갈 책임을 부여받았다. 아메리카에 반대할 수 있는 독자적인 외교 정책과 방위 정책의 기초를 놓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이 조약은 모든 안보 문제를 북대서양조약기구 지도부에 종속시켰고 외교 문제에 대한 개별 국가의 거부권을 유지했다. 영국 또는 라트비아가 아메리카에 반하는 어떤 전략도 좌절시킬 수 있는 것이다.

주7: Jürgen Habermas, 'Why Europe Needs a Constitution'(왜 유럽은 헌법이 필요한가), 뉴 레프트 리뷰 11호, 2001년 9-10월, 6쪽.

 

사실 이 조약은 유럽이 연방이건 아니건 민주적인 헌법을 결코 갖지 못하게 보증했다. 도리어 이는 냉전시대 이후 유럽이 마스트리히트 조약, 암스테르담 조약, 니스 조약을 거치면서 진화해온 것 전체를 새롭게 성문화했다. 그 내용은 통화동맹을 향한 노력, 자유시장 의제를 밀어붙이기 위한 유럽연합 법률의 사용, 유고슬라비아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공통 외교 정책'의 현실적인 규정, 소련 진영의 붕괴 이후 동진 정책 및 워싱턴과 유럽의 관계 재건이다. 사실상 찬성 투표는 이 조약이 헌법화하려고 하는 이 모든 발전 과정을 소급 승인하는 것이다.

 

12개 회원국

유럽연합 기획의 합법화를 위한 새로운 처방은 설득력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존재하는 것을 감당하기 위해 낡은 처방을 확장할 수도 없었다. 1980년대 말기 유럽공동체는 독특한 혼합물이었다. 유럽의 북미자유무역협정 격인 1986년의 단일유럽의정서(Single European Act)는 12개 회원국의 시장을 상품, 자본, 노동, 용역의 족쇄없는 이동을 위해 개방함으로써 낡은 관세동맹을 자유무역 지역으로 탈바꿈시킴을 선포했다. 유럽 통화 체제의 회계 규율은 국민경제들이 공공분야 축소와 국유 재산의 사유화로 향하도록 내몰았다. 그런데 이념적으로 보면, 자크 들로르의 집행위원회가 평화적인 연합이라는 유사 칸트적 목적론, 기술관료적 지식, 기민-사민 전통의 사회적 연대를 결합시킴으로써 번영과 안보와 진보라는 막연하지만 고귀한 전망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경제적, 정치적 연합은 민주적이며 그래서 유럽의회에 진정한 입법권한을 부여하게 될 것이라고들 확신했다. 1980년대에 이 이념적 처방은, 강력한 공산당과 혁명 전통을 지닌 나라들인 그리스와 스페인, 포르투갈의 국가주의 독재를 서구 안보 연합 안에 안전하게 정착하는 자유주의 자본주의 민주국가로 재편하는 유럽공동체의 작업에 있어서 아주 성공적인 것으로 확인됐다.

 

1989년부터 유럽의 지정학이 유동적으로 바뀌었다. 쟁점은 통일 독일의 등장이었다. 세계 3위 경제 대국인 독일은 1억5000만명의 인구가 사는 중부 유럽을 지배하고, 이론적으론 그 자신의 조건을 내걸고 모스크바와 협상할 수 있다는 점이 쟁점이 된 것이다. 두번째로 소련의 탱크가 우랄산맥쪽으로 돌아감으로써 더 이상 유럽내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존재 논거가 분명치 않게 됐다. 마지막으로, 경제 상호 원조 회의(코메콘)와 바르샤바 조약의 붕괴가 서구에 경제 원조와 안전보장을 요청하는 한 묶음의 국가들을 남겼다. 중부 유럽, 중동, 중앙아시아, 한반도 등 냉전 국경지대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형식의 질서를 부과하는 문제에 직면한 아메리카로선, 유럽에서 최우선 과제가 독일을 서방 연합세력에 더 강하게 묶어둠으로써 본과 모스크바의 어떤 화해 가능성도 봉쇄하는 것이었다. 또 독자적인 유럽 안보 정책을 향한 어떤 시도도 없도록 보장하는 것이었다. 유럽공동체가 지중해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했듯이 중부 유럽 경제들을 개방 자본주의 시장들로 재조직하게 (그리고 이 작업에 자금을 지원하게) 만드는 것도 아메리카의 최우선 과제에 해당했다. 동유럽에서 정치 및 경제 개혁을 촉진하는 것은 유럽공동체의 '자연스러운 소명'이라고 (전 아메리카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유럽 지도자들에게 말했다.(8) 아메리카는 중부 유럽 국가들의 유럽공동체 가입 주장을 지지함으로써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은 채 스스로를 그들의 주요 동맹국으로 자리매김했다. 게다가, 유럽공동체를 동쪽으로 확장하는 건 허약한 연방적 구조를 무리하게 확대하고 도시 벽 안으로 새로운 목마 무리를 들여놓음으로써 정치적 통합을 배제하고 그로써 유럽공동체가 독자적인 지정학적 세력으로 떠오르는 것도 방해할 것이다.

주8: '새로운 유럽, 새로운 국가주의', , 1990년 1월15일, 197쪽.

 

헬무트 콜 독일 총리는 독일통일에 대한 다른 세력들의 즉각적인 외교적 승인을 위해서라면 값비싼 대가도 치를 용의가 있었다. (서독 화폐 : 옮긴이) 도이치마르크의 포기는 별것 아니었다. 통일된 독일은 공통의 선을 위한 통화 연합과 정치 연합의 강철같은 선에 묶일 용의가 있고 그래서 독일의 힘은 '모두에게 이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1989년 12월 들로르의 중앙은행 이사회는 유럽통화동맹(EMU)을 위한 계획과 일정표를 제시했는데, 이는 그 후 2년동안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기초를 형성하기 위해 수정될 예정이었다. 이 논리는 벗어날 수 없는 듯했다. 통화 연합은 일종의 정치 연합을 수반해야 했고 이를 통해 책임의 정도를 높일 수 있었다. 집행위원회는 외교 정책과 내부 문제에 대한 심화된 청사진을 준비했고, 이 청사진은 유럽연합이 될 기구의 '기둥'이었다.

 

마스트리히트와 사라예보

그러나 1989년 이후의 정치 연합은 통일된 독일이 인구 규모와 경제적 무게로 유럽 국가들의 민주적 연합체를 지배할 위험을 해결해야 했다. 프랑스 권력집단은 이 과제를 내켜하지 않았다. 영국이 더 긴밀한 연합체에 반대하는 상황에서 이는 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향한 그 어떤 진정한 과정도 안건에서 빠지는 걸 뜻했다. 이와 함께 입헌 민주제의 기회 또한 안건이 안되는 걸 의미했다.

 

'공통의 외교 정책'을 향한 유럽의 첫걸음은, 워싱턴의 새로운 세계 질서의 전선들이 전 지구에 깔려가던 바로 그 때에 비슷하게 편협한 전망을 드러냈다. 1991년 1월 영국과 프랑스는, 아메리카의 화력의 효과가 중동 걸프지역에서 전시되던 때에 사막의 폭풍 작전 뒤를 충실하게 따라 행진했다. 1989년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세계은행의 지시에 따라 연방정부가 실시한 충격 요법이 50만명 이상의 잉여 인력을 남겼고, 이는 그 이후 연방내 공화국들에서 실시된 선거에서 민족주의자들에게 승리를 안겼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발칸반도에서 가톨릭계 종속국을 확보하려고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분리독립을 부추겼다. 다민족 공화국 내부의 소수 민족이 분리에 반대할 것이 분명했는 데도 말이다. 1991년 8월 크로아티아와 유고인민군 사이에 격렬한 교전이 벌어지고 크로아티아와 크라이나(Krajina)의 세르비아계 사이에서도 충돌이 빚어지자, 콜과 (외무장관) 겐셔는 소수 민족의 권리를 보호할 포괄적인 정치적 해결을 촉구하는 대신 크로아티아에 대한 유럽공동체의 즉각적인 승인을 요구했다. 1991년 12월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앞선 밤샘 교섭 동안, 콜은 (영국 총리) 메이저에게 유럽통화동맹 참여와 사회헌장 제정 의무를 피할 권리를 제시함으로써 크로아티아 독립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비슷하게,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독립적으로 3만5천에서 5만명으로 유럽군을 창설하자는 프랑스의 계속된 제안도 잠정적으로 독일의 지지를 얻었다.(9)

주9: Susan Woodward, (발칸의 비극: 냉전 이후 혼돈과 해체), Washington, DC, 1995, 184 및 464쪽.

 

아메리카는 독자적인 유럽군이라는 개념을 분쇄하기 위해 재빨리 움직였고, 1992년 12월에 이런 형태의 군대는 실제에 있어서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지휘 아래 놓일 거라는 합의를 프랑스와 독일로부터 끌어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의 붕괴를 향한 첫발을 재촉한 유럽공동체의 행위는, 클린턴 행정부가 보스니아 독립 인정을 위해 외교 활동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는 길을 열고 말았다. 이 부분은 콜과 겐셔조차 주저하던 것이다.(10) 크로아티아의 독립 전쟁은 20만명의 난민, 35만명의 이주민, 2만명의 사망자를 남겼다. 1992년에서 1994년 사이,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전쟁은 거의 200만명의 난민을 만들어냈고, 보수적인 추산으로도 7만명의 사망자를 유발했다.(11) 이념적으로 이는 유럽공동체가 스스로 주장한 임무인 구대륙에서의 전쟁 종식 임무의 종말이었다. 전략적으론, 유혈의 결과가 유럽 지도력의 무기력을 드러냈다. 사라예보 포위는, 프랑스와 영국, 독일, 이탈리아 자유주의자들이 아메리카의 개입을 눈물로 호소하는 걸 보게 했다. 그들은 이제, 오직 북대서양조약기구의 화력의 위협이 투사들에게 분별을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메리카 국무장관) 올브라이트는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제트기로 뒷받침하면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군대를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에 맞서 단결시켰다. 독일의 기본법(헌법)은 독일 공군 조종사들이 (아메리카의 지휘 아래) 비행금지 구역을 지키는 걸 허용하기 위해 개정됐다. 1993년 4월 파리와 본은 소련의 위협이 사라졌음에도 유럽의 외교 및 안보 정책이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계속 종속될 것임을 표시했다.

주10: 국무장관 로렌스 이글버거를 따르자면, 워싱턴은 독일이 '아메리카를 앞질러 나갈 것'을 우려했다.
주11: Woodward, (발칸의 비극), 464, 283, 1쪽.

 

유러머니

유럽통화동맹은 그래서 정치적 연합이 배제되고 외교 정책은 워싱턴의 거부권 아래 종속된 채 진행됐다. 다툼이 있었지만 이 분야에선 공통의 이해를 반영하는 프로그램 중심으로 뭉치는 게 상대적으로 더 쉽다는 걸 유럽 지배자들은 깨달았다. (영국 경제학자) 윈 고들리는 마스트리히트 계획 아래 포기된 경제 관리 유형들을 유창하게 기술했다. 포기된 것들은 공적인 식량지급, 세금 부담, 세출 배정, 그리고 적자의 한도와 충당의 적정 수준을 결정하고 이자율, 환율, 인플레이션, 성장, 고용, 소득과 부의 분배를 결정하는 데 개별 정부가 발휘할 수 있는 구실이다.

마스트리히트 계획에는 독자적인 중앙은행의 설립과 운용방식(modus operandi)의 청사진은 포함되었지만, 놀랍게도 빠진 것이 있다. 그건 유럽공동체가 쓰는 용어로 표현된 중앙 정부의 대체물에 대한 청사진이다. 그런데 ... 이런 기구가 없으면 유럽통화동맹은 개별 국가의 유효한 행동을 막으면서 그를 대신할 것을 마련하지 않게 된다.(12)
주12: 윈 고들리(Wynne Godley), 'The Hole in the Treaty'(조약의 구멍), in Perry Anderson and Peter Gowan, eds, , London, 1997, 174-175쪽. 고들리는 이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주권 상실에 직면해 유럽통화동맹이라는 기차에서 다 함께 내리고 싶어하는... 이들의 태도에 공감한다. 공동체의 예산보다 월등하게 큰 예산을 가진 어떤 연방 기구의 사법권 아래 통합을 시도하는 이들에게도 공감한다. 내가 전적으로 당혹스러운 건, (새로운 중앙은행은커녕) 새로운 정치적 기구를 창설하지 않은 채 경제 연합과 통화 연합을 목표로 삼는 이들의 태도다.”

 

사실상, 유럽의 권력집단은 정치적 연합이 아니라 암묵적인 정책 연합을 선택했다. 단일 통화 체제의 엄격한 예산 상한제와 환율 상한제, 마스트리히트 '수렴 기준'과 안정화협약은 평가절하의 선택권과 적자 충당 여지를 배제시켰다. 그래서 유로권의 이질적인 12개 국가 경제는 노동의 양보를 쥐어짜는 것을 빼고는 다른 경기순환적 조정 장치가 없는 상황에 처했다. 궁극적으로, 유로권에서 가장 경제 규모가 큰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는 저임금,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 시장화한 용역이라는 앵글로색슨식 주주 경제적 의제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심지어 경기 침체기에도 유럽중앙은행의 금리는 '인플레이션 억제' 수준에 묶여있었다. 이런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논리라고는 불굴의 회복력을 갖춘 라인강 모델을 분쇄하는 것뿐인 듯하다. 독일의 내수는 침체 상태였고 실업률은 높고 성장률은 낮았다. 2002년 1월 새로운 통화의 도입 그 자체가 더 깊은 침체를 동반했다.

 

이것이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국민투표에서 스스로 모습을 분명히 드러낸 '신자유주의적 조약'을 둘러싼 날카로운 계급적 분열의 맥락이다. 네덜란드에서 노동당 지지자의 58%가 당 지도부의 방침에 반대표를 던졌다. 학력으로 보면 '저학력'의 71%와 '중간 학력'의 64%가 반대표를 찍어, 52%였던 '고학력'과 대조를 이뤘다. 1990년대 빔 코크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 시절과 2002년 이후 발케넨데 정부 아래서, 네덜란드는 부동산 거품, 가구 자산의 주식화, 산업과 공공부문 일자리의 저임 서비스 부문에 의한 대체 측면에서 볼 때 영국보다 더 앵글로색슨적이 됐다.(13) 그 결과는 승자와 패배자의 양극화 심화와 사회적 긴장 고조였다. 부유층 지역인 헴스테데(Heemstede)와 블로에멘달(Bloemendaal)에서는 유럽연합 조약에 대한 투표 결과가 전체 결과와 정반대로 나왔다. 찬성률이 각각 57%와 61%를 기록한 것이다.

주13: Storm and Naastepad, 'The Dutch Distress'(네덜란드의 고뇌), 뉴 레프트 리뷰 20호.

 

프랑스에선 사회당 지지자의 56%가 반대표를 던졌는데, 육체 노동자의 경우 반대가 79%였고, 실업자는 71%였다. 마르세유의 가장 가난한 지역과 노르파 드 칼레의 탄광지역에서 반대표가 각각 78%와 84%에 달했다. 한달 수입이 1500유로(187만원) 이하 가구의 반대 비율은 66%였다. 반대 투표자의 다수인 52%는 반대의 주된 이유로 “현재 프랑스의 경제와 사회 상황에 대한 불만”을 들었다.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 반대는 35%였다.)(14) '프랑스 사회 모델'이라는 개념은 오해를 부를 수 있다. (사회당 출신 총리) 조스팽과 그 아래서 재무장관을 지낸 스트로스칸과 파비위스는 큰 덩치의 공공 자산을 사유화했고 고소득층의 재산세율과 기업에 대한 할증세를 크게 낮추고 공공 지출을 줄였다.(15) (우파 출신 총리) 라파랭은 이 과정을 이어갔다. 법률적 노동세력 보호장치들이 더 많지만 노조 가입률은 영국보다 훨씬 낮다. 또 외국인 직접 투자와 노동 생산성은 눈에 띄게 높다. 무엇보다, 유럽연합 경제정책의 반노동 기획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높은 실업률은 저소득층과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타격을 입혔다. 대조적으로, 프랑스 중상류층은 신자유주의로부터 아주 큰 이득을 봤다. 자산 가치가 치솟은 파리 중심 지역에선 찬성률이 66%에 달했다. 월 소득이 4500유로(561만원) 이상인 이들의 찬성률은 74%였다. (자본의 거리인 파리 서쪽) 뉠리(Neuilly)에서 찬성률은 82.5%에 달했다.

주14: 'Le Sondage sorti des urnes'(투표함 표본조사), www.ipsos.fr
주15: Sebastian Budgen, 'The French Fiasco'(프랑스의 큰 실수), 뉴 레프트 리뷰 17호, 2002년 9-10월.

 

2003년의 유럽

구성 조약의 존재 이유는 유럽연합 확장이다. 애초 이것이 아메리카의 정책이었다면, 초기부터 독일과 영국이 지지했다. 1993년 집행위원회는 가입 조건을, 작동하고 있는 시장 경제, 안정적인 사회 제도, 유럽연합 규정을 지킬 능력으로 설정함으로써 빗장을 낮췄다. 1990년대 내내 어느 나라를 승인할 것인가를 두로 정부간 다툼이 벌어지면서, 9만7천쪽의 유럽연합 법률 공통 지식에 이행규정이 더해졌다. 확장된 유럽연합에 맞춰 조약들을 어떻게 개정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 없이, 핵심 국가들은 1997년 암스테르담에서 '강화된 협력' 선택사항을 밀어붙였다. 이로써 다양한 속도의 통합이 허용됐다. 유럽연합 확장 이후 투표 절차에 대한 결정은 2000년 니스 정부간 회의로 미뤄졌다.

 

니스 회의 준비 과정에서 주요 3국은 자신들의 방침을 입안했다. 2000년 2월 훔볼트대학 연설에서 (독일 외무장관) 피셔는 유럽 국민국가들의 민주적 연합체, '실질적 입법권한'을 지닌 유럽 차원의 의회, 각국 의회에서 선출된 이들로 구성되는 제2의 의회, 집행 권한을 지닌 연방 정부와 대통령 그리고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 시라크는 그해 6월 의회 연설에서 이에 응수했다. 그는 연방 정부에 반대하고 다수결에 기초한 의사결정 구조를 지닌 강력한 국민국가 연합을 제시했다. 그는 새로운 헌법 제정 요구를 지지했다. (자크 상테가 이끄는 집행위원회 전원이 1999년 비리 혐의로 어쩔 수 없이 사퇴한 이후 브뤼셀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시도였던) 유럽연합 근본 권리 헌장을 성안했던 기구와 비슷한 형태의 대표자회의가 초안을 만들게 되어 있었다. 대등한 상징적 연단을 모색하던 블레어는 바르샤바 증권거래소에서 자신의 개입을 알렸다. 영국의 관점에서는, 헌법을 둘러싼 논쟁이 꼭 실제 헌법 제정으로 마무리될 필요가 없었다. 조약들의 조약이면 족했다. 가장 중요하게는, 거부권한이 있는 유럽이사회가 유럽연합의 정치적 방향을 유지해야 한다. 2000년 12월 니스 정부간 회의는 25개 회원국으로 구성되는 유럽연합의 투표권 비중 배분에 합의했다. 또 2004년을 '유럽 헌법을 설정하는' 최종 조약 시한으로 정했다. 이 때엔 발트해 연안 3국, 폴란드, 헝가리, 체코공화국,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몰타, 사이프러스가 유럽연합에 합류하게 되어 있었다.

 

작은 국가들 총리들의 야심이 추진시킨 유럽의 미래를 위한 회의가 2002년 2월 브뤼셀의 유럽연합 의회 건물에서 소집됐다. 그러나 걸프지역과 발칸반도의 전쟁이 마스트리히트 협상의 배경을 장식했듯이, 이번에 지스카르 데스탱과 그의 동료들의 심사숙고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폭격과 점령에 막혀 소진됐다. '젊은이와 시민 사회'가 회의에서 발언하는 동안, 게르니카(전쟁의 잔인함을 그린 피카소의 그림 : 옮긴이)가 내걸렸고 대량살상무기 신화가 제조됐고 함대가 지중해에 집결했다.(16) 런던에서 100만명 이상이, 마드리드에선 200만명이, 로마에선 300만명이 아마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행진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의 아스나르,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포르투갈의 바로소, 영국의 블레어, 덴마크의 라스무센, 헝가리의 메드제시, 폴란드의 밀러, 체코공화국의 하벨은 <월스트리트 저널>에 발표한 공동 선언에서 이라크 침공 지지를 선포했다.

주16: 리토트(Retort, 아메리카 샌프란시스코의 운동 집단 : 옮긴이)의 'Afflicted Powers'(시달린 권력들), London, 2005가 당시 가장 뛰어난 선동 문건의 하나다.

 

이 사건으로 해서 위르겐 하버마스와 자크 데리다가 '핵심 유럽'에 대한 공동 호소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17) “얼마나 많은 주거 지역과 병원과, 집들과 시장들을?”이라는 말로, 전쟁 기계의 '도덕적으로 불쾌한' 준비와 냉정하게 계획된 죽음과 파괴의 '문명화한 야만'을 환기시키면서 두 철학자는 “이 전쟁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공통 외교 정책의 실패를 의식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아메리카의 침공의 정당성에 대한 전세계적 논쟁은 '앵글로-아메리칸 국가', 중부 및 동부 유럽국가, 그리고 '늙은 유럽' 사이의 단층선을 더 예리하게 만들었다고 두 사람은 느꼈다. 유럽연합이 나뉘지 않으려면, 인도주의적인 핵심 국가들이 암스테르담에서 합의된 '강화된 협력'의 장치를 통해 다시 한번 국제법의 규범에 근거한 유럽 외교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나아가는 유럽연합의 기관차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주17: Jürgen Habermas and Jacques Derrida, 'February 15, or, What Binds Europeans Together: Plea for a Common Foreign Policy, Beginning in Core Europe'(2월 15일 또는 유럽을 하나로 묶는 것: 핵심 유럽에서 시작하는 공통 외교 정책을 위한 탄원), in Levy et al, eds, , London, 2005.

 

물론 이미 핵심 국가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내보였다. 그들이 주도해 결정한 확장은 유럽연합내 권력의 균형을 영구히 변경시켰다. 국제연합 안보리 결의안 1441호가 결의되기 한달 전인 2002년 10월 새로운 나라들의 가입이 정식으로 합의된 바 있다. 안보리 회의에서 (프랑스 외무장관) 드빌팽의 낭랑한 항변에 뒤이은 행동은, 두번째 결의안은 어쨌든 필요없다는 워싱턴 주재 프랑스 대사의 재확인과 시라크의 아메리카 폭격기의 프랑스 영공 통과 허용이었다.(18) 투생 루베르튀르가 프랑스로부터 아이티 독립선언을 한 지 200년 되는 그 다음해 봄, 시라크와 드빌팽은 포르토프랭스(Port-au-Prince)를 합동으로 침공함으로써 부시 및 파웰과의 타협을 확실히 했다. 브뤼셀 회의가 유럽의 첫번째 목표로 평화 증진을 공표하는 동안 슈뢰더는 아메리카의 고문실이 완비된 북대서양조약기구 점령 아프가니스탄에 두번째로 많은 군대를 주둔시킨 나라가 되려 준비하고 있었다.

주18: 북부 이라크에 대한 육상 공격을 위해 영토를 사용하게 해달라는 아메리카 국방부의 요구에 대한 터키 의회의 거부 결의가 침공 과정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블레어와 시라크

유럽 미래를 위한 회의에서 런던은 다시 한번 초안 작성 책임을 맡았다. 전 외무장관인 존 커는 회의 사무국을 지휘해 구성 조약의 후속 개정판들을 썼다.(19) 놀라울 것도 없지만, 영국 언론들은 2003년 12월에 최종 산물이 거의 바뀐 게 없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유럽이사회 규칙은 지지를 받았고, 세금과 사회 보장 정책, 외교 정책에 대한 거부권은 유지됐다. 또 '강화된 협력'은 방위와 관련된 영역에 적용될 수 없었으며, 심지어 노동자의 파업권은, 헌장에 간직되어 있었음에도 오직 “개별 국가 법률에 따라서” 부여됐다.

주19: Peter Norman, (뜻밖의 헌법) 2nd ed., Brussels 2005, 32-33쪽. 새처(대처)의 부하 아서 콕필드는 단일유럽의정서를 성안했고, 리언 브리튼은 1993년 코펜하겐의 유럽연합 가입 기준을 성안했다.

 

반면, 유럽연합 회원자격 취득의 세부 사항은 다른 곳에서 합의됐다. 새로운 회원국은 이류 자격이 부여되고, 공통 농업 정책에 따른 직접 보조금은 서방국가의 25%만 적용받으며, 노동 이동성은 제한되고, 구조개편 기금 지원금은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아일랜드의 절반 이하로 결정됐다. 가중 투표권한에 대한 협상은, 스페인 바르셀로나 아토차 역 폭탄 테러와 아스나르의 이 사건 악용이 2004년 3월 총선에서 사파테로의 사회당 정부를 출범시키게 되기까지 여전히 정체되어 있었다. 여덟 용병(huits mercénaires) 가운데 두나라인 스페인과 폴란드가 니스에서 확보한 투표권한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사파테로의 첫번째 행동은 스페인의 투표권한 감축을 제안한 것이다.

 

바로 이 때,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들에게 휘둘린 블레어는 구성 조약을 (2005년 영국 총선 이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선언했고 시라크는 2002년에 공표했던 자신의 국민투표 실시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프랑스가 유럽연합 문제에 관해 실시했던 마지막 국민투표를 가까스로 통과한 바 있다. 그러나 그때는 지배층이 분열되어 있었다. 세갱이 이끄는 드골주의 우파가 조약에 강하게 반대한 것이다. 이제는 브뤼셀에서 돌아온 영-불 관계의 연료인 지스카르를 중심으로 지배층이 뭉친 듯 보였다. 초기 여론조사는 우호적이었다. 시라크의 계산은 충분히 안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투표에 부쳐진 지 10년이나 지났다. 그 사이 마스트리히트가 대표하는 모든 것 또는 이 조약의 이름으로 그 이후 정부들이 이 나라에 부과한 모든 것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꾸준히 깊어져, 사회당 지도부의 순응주의자들조차 하나로 뭉칠 수 없는 지점에 다달았다.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당내 자신의 경쟁자들을 쓰러뜨릴 걸 기대한 파비위스가 당 노선을 무시하기로 선택하자, 고상한 의견의 합의 여론이 깨졌다. 나머지는, 놀라운 규모와 창의성을 보여준 금융거래과세운동연합(아탁)과 이 연합의 협력 집단이 세력을 집결해 처리했다.

 

성문 안의 야만인들

프랑스와 네덜란드 투표 결과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다시 한번 놀랍게도 똑같았다. <리베라시옹>을 따르자면, 반대 투표는 병적인 것이 아니라면 비합리적인 것이었고 '고통, 두려움, 고뇌, 격분'이 촉발한 것이었다. <르몽드>는 투표가 '심한 퇴화'를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뉴욕타임스>에게 이는 '정체성 위기'였다. <가디언>에게는 프랑스가 “깊게 나뉘고, 불안하며, 두렵고, 의심에 차고... 괴롭고 불행했다.” 티모시 가튼 애시의 눈에 이는 “공포의 거부, 이민에 대한 공포. 변화에 대한 공포”였다. 조약에 반대한 다수가 사회당 지지자, 넓은 의미에서 중도좌파인 게 명백했음에도, 그들은 '민족주의, 외국인 혐오, 독단론'에 휘몰렸고(르몽드), '상상할 수 없는 외국인 혐오'(리베라시옹)에 휘몰렸다. 이는 '프랑스인을 위한 프랑스'였다.(가디언) 동시에 그들은 '유치하고' '퇴행적'이었다. <가디언>의 한 칼럼니스트를 따르자면 “이는 피터팬의 정치였다.”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상관 관계를 인정했을 것이다”고 (프랑스 철학교수) 알랭 바디우는 내비쳤다. “찬성(oui)는 계몽된 여론(언론인을 포함한 온갖 종류의 전문가)의 선택이었고, 반대(non)는 무지한 이들의 선택이었다. 국민투표를 하기로 한 시라크의 결정에 대한 비판들도 똑같은 논지를 취했다. 유럽처럼 중요한 문제는 무지한 대중에게 맡겨서는 안됐다.” 이런 맥락에서 반대 투표자는, 좌파든 우파든 상관없이 '야만인'으로 낙인찍히는 게 불가피했다.(20)

주20: Alain Badiou, 2005년 5월18일, 출간되지 않은 채 나도는 원고.

 

영어를 쓰는 평론가들이 보기에, 시라크와 프랑스 정치 지도력은 비난받아 마땅했다. 경제 개혁이 예정에 못미쳤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어찌 되었건 베를루스코니가 훨씬 꾸물거렸으니까. 요점은, 그들이 유권자들에게 대안은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신자유주의자들에게 그들은 희망의 조짐이었다. 프랑스 중도 좌파는 위기에 빠졌다. 단지 사회당 지도부의 대부분이 대부분의 유권자들에게 버림받은 것만이 아니다. 6월4일 프랑수아 올랑드와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이 파비위스와 그의 동료들을 당 집행위원회에서 축출함으로써 당내 분열을 심화시켰다. (집권당인) 중도 우파 대중운동연합(UMP)의 위기도 사회당만큼이나 중대하다. 그러나 워싱턴이 선호하는 후보인 니콜라스 사르코지가 권력 누수 현상을 보이는 시라크와 드빌팽의 정부에서 벗어날 수 있고 슈뢰더가 자신의 개혁 공과 때문에 독일에서 기민당에 의해 축출된다면, 2007년까지 유럽의 지도력을 파리와 런던, 베를린의 훨씬 믿을 수 있는 친아메리카 3인방으로 재정리할 수 있다. 그 결과 대서양 양쪽의 관계가 훨씬 부드러운 시기가 나타날 것이다.

 

(독일 기민당의) 메르켈이나 사르코지 정부가 얼마나 믿을만 한 것으로 드러날까? 2005년 5월 북부 라인-베스트팔리아에서 사민당의 패배는, 기민당으로 여론이 기운 것 못지않게 슈뢰더의 기업 세금감면과 실업자 복지 축소에 실망한 사민당 지지 유권자의 기권 때문이었다. 메르켈은 이념적으로 슈뢰더보다 더 대서양을 중시하지만, 그녀의 당 진영은 라인강 모델의 중심을 차지하는 중견 독일 기업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르코지가 2007년 당선된다면, 지난 20년동안 규제를 완화하고 사유화를 추진하는 정부들을 첫 임기 말에 내?음으로써 책임을 물은 프랑스 유권자 문제에 여전히 직면할 것이다. 2005년 5월, 카페와 거리와 모임 장소에서 자신들을 위한 정치 교육을 확보한 새로운 프랑스 젊은이 세대를 목격했다. 도시에서 야만인들을 내모는 건 아마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렇게 논평했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진짜 두려움은”

반대 그 자체가 새로운 유럽 정치 권력집단 안에서 유발됐다는 두려움이다. 인민들이 더이상 그들의 '탈-정치' 전망에 쉽사리 설득되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에게 그렇듯이, 반대는 희망의 전언이자 표현이다. 이 희망은 정치가 여전히 살아있고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대에는 긍적적인 선택이 있었다. 선택 그 자체의 선택, 우리에게 오직 자신들의 전문가의 지식을 승인하거나 아니면 '비합리적인' 미성숙을 드러내는 것을 유일한 선택지로 제시하는 새로운 권력집단의 협박을 거부하는 선택이었다.(21)
주21: Žižek, 'The constitution is dead. Long live proper politics'(헌법은 죽었다. 진정한 정치 만세), <가디언>, 2005년 6월4일.

 

주춤거리는 헤게모니

'유럽 헌법'의 서거로부터 어떤 결론들이 도출되어야 하는가? 먼저, 유럽연합, 또는 그것의 핵심이 여전히 아메리카에 비해 더 인도주의적이고 사민주의적인 대안을 제공하는 독립된 권력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환상은 매장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건 이제 냉전 종식에 비유할만한 지각 변동적 변화를 요구할 것이다. 유럽 권력집단은 세계대전 이후 시기의 사회민주주의적 유산을 약탈할 유럽연합의 사법 및 행정 권력을 유사 새처주의적인(대처주의적인) 단일유럽의정서에서 도출해 배치했다. 공공 부문을 시장화하고 노동력을 유연화하고 국민 경제를 전지구적 금융 자본에 개방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유럽'은 사회적으로 텅빈 배가 되었다.

 

이의 필요적 귀결은 워싱턴이 지시하는 용어에 따라 아메리카의 전세계적 지도력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1989년 이후 유럽연합이 거쳐온 길은 대체로 앵글로-아메리칸 처방을 따르는 것이었다. 자유화와 (유럽연합) 확장은 브뤼셀에서 아메리카 기업들이 펼치는 로비에는 꼼꼼하게 귀기울이되 자신들의 시민의 소망을 무시하는 데 있어선 무자비한, 엉금엉금 기며 흐느적거리는 존재를 만들어냈다. 지난 15년동안 등장한 '다양한 속도'의 유럽연합 곧 유로통화권 12개 나라와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 19개 나라, 2004년 가입이 수용된 나라들의 차별적 지위가 합쳐진 연합은 유럽 통합 실패의 척도다. 이는 게다가 워싱턴이 고를 수 있는 연합 매개체의 선택 폭을 다양하게 제공한다. 현재 유럽연합 주요 3국 곧 영국, 프랑스, 독일은 자신들이 열심히 보호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핵 무기에 비교하면 아이들 놀이에 불과한 핵 프로그램을 단념시키기 위해 이란을 상대로 우격다짐을 시도하고 있다.

 

무역 전쟁에선, 유럽연합이 아마도 아메리카의 점보 제트기 또는 중국의 티셔츠를 둘러싼 치고 받기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지정학적 권력 측면에선, 냉전 이후 시대는 유럽이 아메리카의 헤게모니 체제 내부의 종속적인 지위에 묶여 있음을 봐왔다. 이것의 기능 하나는, 발칸반도와 카프카스(코카서스) 지역, 동유럽과 소아시아에서 청소와 정권창출 서비스의 확산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종종 아메리카의 군사적 약탈 또는 자신들의 약탈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서 벌어졌다. 전형적으로 이런 작업은, 핵심 부처에 요직의 자문관을 심어넣고 선거로 뽑힌 지방정부 또는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정부를 외부 자금 지원을 받는 비정부기구로 대체하기 위해서 대의제 구조를 무시한 채 진행됐다. 지난 세기는, 노동 세력을 규율하고 권력집단을 지도하고 시장을 아메리카와 유럽 자본에 개방하는 사회 공학의 '자연스러운 소명'의 활용이 유럽연합의 넓은 주변 지역 너머로, (블레어의 자문인) 로버트 쿠퍼가 쓴 찬사를 인용하자면 '주변의 제국주의' 너머로 확장되는 걸 목격했다.(22) 이 과정에서, 궁극적인 유럽연합 회원 자격에 대한 희망이 터키 노동자들로 하여금 연금 수령 연령의 상향 조정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고 폴란드 노동자들로 하여금 연금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데 핵심적인 구실을 했다.

주22: Robert Cooper, 'The Next Empire'(다음번 제국), , 2001년 10월.

 

핵심 지역에서 나타나는 유럽연합 헤게모니의 주춤거림이 유럽연합의 자유시장 관리-훈련 팀 기능 약화를 예언하는 것일 수 있을까? 이 작업을 맡은 고위 실행자 한명은, 베오그라드에서 유럽연합 투표결과를 받아들이는 축하 분위기와 세르비아인들이 더 이상 “유럽의 모든 요구를 아무 생각없이 수용할” 이유가 없다고 느끼는 정서를 위기감 속에 지적했다.(23) 딱 어울리게도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유럽연합 구성 조약을 거부하던 바로 그 주에, 점령된 이라크를 위해서 구성 조약과 유사한 문서의 초안을 작성하는 데 참여하기 위해 유럽연합의 한 무리가 바그다드에 도착하는 걸 목격했다. 이라크인들이 자신들의 헌장과 군사적 후원자를 브뤼셀의 사람들이 먼저 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보낼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주23: Carl Bildt, 'Europe must keep its "soft power"'(유럽은 자신의 '부드러운 권력'을 지켜야 한다), , 2005년 6월1일.

 

대중들의 유럽 조약 거부는 브뤼셀이 유도한 전반적인 정치적 마취의 효과가 이제 실패할 가능성을 제기한다. 사회적 규율 세력으로서 유럽연합은 오래전부터 시장화와 재구조화와 전쟁에 허비해온 들로르 시절의 이념적 자본에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다. 사회적 진보의 목적론은 사라졌다. 대안이 없는데 어떻게 더 나은 미래가 있을 수 있는가? 대중 매체와 소비주의 그리고 무관심이 간격을 잇는 걸로 간주되었다. “다름 아니라 바로 유럽연합이 당신들에게 이동전화와 값싼 항공료를 선사했다”고 사르코지는 지난 5월 젊은 프랑스 청중들에게 말했다. 그들의 반대표는 1990년대 이탈리아 뇌물 파동인 탄젠토폴리 사태 와중에 물러나는 정치인들에게 던져진 작은 동전들을 상기시킨다. 반역의 크기를 과장해서는 안된다. 영국, 폴란드, 아일랜드, 덴마크에서 유권자들은 국민투표 취소를 온순하게 수용했다. 하지만 유럽 유권자들과 신자유주의적 권력집단 사이의 간격은 이보다 더 넓게 벌어진 적이 없다. 블레어는 2005년 5월 영국 유권자들로부터 단지 21%의 지지를 받았다. 결국 유럽연합 지배의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측면을 목표로 했던 반대 투표는, 다시 한번 좌파 대표성의 위기를 그대로 보여줬다. 네덜란드 노동당과 프랑스 사회당 지도자들은 유권자 대다수에 단호하게 맞섬으로써 정치 영역을 주변 세력에게 남겨줬다. 그로써, 신자유주의 기획에 맞서는 전반적인 대안 프로그램의 건설이 여전히 얼마나 멀리 있는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2005년 여름에 친 번갯불은, 이 프로그램의 부재를 조명하는 가운데 그것이 존재할지 모르는 미래의 지평선을 잠깐동안 깜박하고 드러내 보였다.

 

번역: 신기섭
2005/10/04 17:52 2005/10/04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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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없는 일본 사회

삶이 절망적이기는 일본도 마찬가지인가보다. 조직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위해 아르바이트만 한다는 이른바 '프리터'가 사실은 하루 8시간, 주 5일을 일한다고 한다. 말이 좋아 프리터지, 단순 저임 시간제 노동자다. 체인형 게임센터나 식당의 관리자는 하루에 기껏 3-5시간 정도밖에 잠잘 시간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이런 일은 프리터말고는 아무도 하기 힘든 일이 됐다고 한다.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라 희망을 잃어버린 일본인들, 인간 관계가 단절된 일본인들, 그들도 우리와 별로 다를 게 없이 고통속에 신음하고 있나보다.

 

노숙자(홈리스)는 '호프리스', 희망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나니, 정말 그렇다고 절감합니다. 그들은 “내가 지금 조금 노력하면 나중에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볼 수 없는 겁니다. 누군가 “병원에 가서 몸을 회복한 뒤에 다시 한번 시도해보면 어떤가요?”라고 하면 이런 답이 돌아옵니다. “병원가면 뭐해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데요? 몸이 조금 더 나아져도 밖에 나가면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지도 않을거에요. 그러니 번잡스럽게 병원에 입원하러 왜 갑니까?”...

'삶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는 보통 종교로 귀결되곤 합니다. 그러나 내 느낌은, 문제가 단순히 경제 문제가 아니라 더 깊은 뿌리가 있다는 겁니다...

호프리스의 절반은 홈리스(노숙자)가 됩니다. 나머지 절반은 일본을 탈출해 해외 여행을 합니다. 수입면에서는 하늘과 땅 차이지만, 사실 그들이 그렇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연결하는 선이 있어야 합니다...

'버블 초과 고용 세대'의 의사소통 능력이 극도로 줄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학력 저하를 걱정하는 듯 한데, 저는 어른들이 놀랍게 한 데 뭉쳐서, 아이들만 지옥으로 빠져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관계가 약화하는 건 가정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요즘은 퇴직 연금을 받으면서 거리에 사는 나이든 노숙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퇴직 연금을 받으려면 등록된 주소가 있어야 합니다. 등록된 주소에 더는 살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하느냐고 묻거나 어떻게 하면 병원에서 치료를 받거나 외래 처치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런 경우처럼 경제 환경이 전부가 아닙니다. 인간 관계가 큰 요소입니다. 어느 날은, “아이가 쓸 방이 필요해져서 이젠 내 공간이라곤 남은 게 없어요”라고 하는 사람을 본 적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 문제에 대해 거론하기 전에 지적할 것은, 요즘은 고교 졸업생 5명 가운데 1명만이 정규직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지역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맥도널드에서 손님에게 인사할 때 어느 각도로 고개를 숙여야 하는지 제 아무리 잘 습득해봐야, 할 수 있는 건 기껏 켄터키나 롯데리아로 옮겨가는 겁니다. 요즘 요리에 관한 만화책이나 텔레비전 드라마가 그렇게 인기있는 이유는, 솜씨가 느는 게 가시적으로 보이고 그 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현상의 뒷면은, 자신이 사회에 유용하다는 걸 분명히 느끼고 알 수 있는 직업이 아주 드물다는 겁니다. 요리사나 카리스마 넘치는 미용사 같은 것들을 빼면 말입니다...

 

 

-- '희망이 없는 일본 사회에 내일이 있는가?', 가네코 마사루와 가네코 마사오미의 대담, <세카이> 710호, 2003년 2월호에서 인용.

2005/09/22 22:36 2005/09/22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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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학자가 본 '남한 정치 투쟁 상황'

아메리카 좌파 경제학자인 마틴 하트-랜즈버그가 지난 8월15일 먼슬리리뷰에서 운영하는 사이트 엠아르진(MR Zine)에 한국의 경제 상황에 대한 비교적 길지 않은 글을 썼는데, 이 글의 후속편으로 '남한: 정치 투쟁 상황'이라는 글을 얼마전에 다시 엠아르진을 통해 공개했습니다.

 

이 글은 우리로서는 지극히 평이한 수준의 글입니다. 하지만 외국 학자의 우리 상황 이해가 어느 수준인지 판단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번쯤 읽어볼만 할 겁니다. 또 혹시라도 우리가 보지 못하는 측면이 담겨 있을 지도 모릅니다. 길지 않기에 번역해봤습니다.

 

동북아시아에 대한 글을 주로 쓰는 하트-랜즈버그는 우리에게 비교적 알려진 인물입니다. 3권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기 때문입니다. 한국 100년의 역사를 아메리카의 개입과 관련지어서 정리한 책인 <이제는 미국이 대답하라> (당대, 2000) 폴 버캣과 함께 쓴 논문을 모아놓은 <일본경제 들여다보기> (미토, 2005), 역시 버캣과 함께 쓴 것으로 중국의 경제체제가 사실상 자본주의라고 비판한 책인 <중국과 사회주의> (한울, 2005)가 국내에 출판된 책들입니다. 하트-랜즈버그는 얼마전에는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남한: 정치 투쟁 상황
(South Korea: The State of Political Struggle)
마틴 하트-랜즈버그(Martin Hart-Landsberg)

먼슬리리뷰진 2005년 9월5일 (원문 mrzine.monthlyreview.org/hartlandsberg150905.html)

 

외환 위기 이후 남한 경제의 경로는 일하는 이들에게는 재앙이었다. 그리고 남한 노동운동과 좌파운동은 진행중인 신자유주의적 구조 개편을 격퇴하기 위한 아주 힘든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들 운동이 직면한 도전 몇가지를 논할 것이다. 이는 전세계 노동자와 활동가들도 점점 더 이와 비슷한 도전에 직면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의 투쟁에 대해 알고, 그로부터 교훈을 끌어내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집단적 지혜를 연마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점은 특히 남한의 경우가 더 그런데, 지당한 것이지만 남한 운동은 용기와 전투성으로 아주 유명하기 때문이다.

 

투쟁의 지형(Terrain of Struggle)

남한의 외환 위기 이후(1997-98년) 경제 구조 개편은 외국인 투자 및 수출에 대한 의존도를 아주 높였다. 남한 재벌들이 경제 위기로 약화된 정도인 데 반해, 중소기업은 최대 시련을 겪었다. 예를 들어 많은 재벌들은 외국 기업들과 연합을 형성했고 이는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게 해줬다. 남한 국내외 경제 지도자들이 최우선 순위로 삼은 것 한가지가 노동 운동 약화이다. 그들은 “노동시장 개혁”이 없다면 투자와 생산을 중국으로 옮겨가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경고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친 노동계 인사로 여겨졌음에도, 이런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예를 들면, 정부는 기업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고용하는 걸 더 자유롭게 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은 경제 위기 이전의 42%에서 현재 54%로 급격하게 늘었다. 그들의 임금은 정규직의 53%에 불과하다. 아주 실제적인 자본 이탈 위협과 함께 이런 조처들은 거대 제조업체들이 노동 비용을 줄이고 이윤을 높일 수 있게 해줬다. 하지만 기업의 이윤이 새로운 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성장률은 낮은 수준에 머물고 이는 정부로 하여금 기업에 더 양보하도록 부추기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미 저임금과 불평등 및 빈곤 확대, 불안 심화로 고통받고 있는 노동자들은 어두운 미래를 직면하고 있다.

 

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KCTU)

한국의 주도적인 노조 총연맹인 민주노총은 (더 보수적인 노총이 하나 더 있다) 노동자의 이익을 지키려 애쓰고 있다. 민주노총은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을 촉구했다. 비정규직 노동자 사용 확대를 위한 새로운 법률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고, 날로 늘어나는 이주 노동자의 노조설립 권리와 그들에 대한 보호를 지지하며, 공공부문 노조의 완전한 권한 쟁취를 위해서 싸웠다. 최근에는 노동부 관련 모든 자문 위원회에서 탈퇴했다. 불행하게도 이런 노력은 제한적인 성공만을 거뒀다. 그리고 최근 노조 가입률이 11%까지 떨어지면서 정치적 비중도 줄고 있다. 노조 활동가들이 다음 단계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와중에 그들이 직면한 주요 쟁점이 두가지 있다. 민주노총 내부 조직 문제와 정치적 지향 문제다.

 

구조적 쟁점들:

노조 조합원들은 노동자들의 더 넓은 관심사로부터 날로 고립되고 있다. 이렇게 되는 주된 이유는 남한 노조가 기업별 노조라는 점이다. 그리고 노조조직률은 기업의 규모와 연관되어 있다. 노동자 1000명 이상의 거대 사업장들은 노조가 있는 전체 기업의 2.7%를 차지하는 반면, 이들 기업 노동자들이 전체 노조 조합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61.2%에 달한다. 그래서 민주노총 조합원 대다수는 거대 제조업체 정규직 노동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부분의 노동자들에 비해 더 많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조건을 향유한다.

 

상대적으로 특권적인 지위에 있지만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점점 더 적대적이 되어가는 노동 환경에 직면해 있다. 대기업들은 공격적으로 인력을 줄이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하청을 통해 인력 감축을 달성하고 있다. 임금과 각종 혜택의 감축도 요구하고 있다. 민주노총 소속 노조들은 이런 행위에 저항하려 시도할 뿐 아니라 노동현장 내 권한 강화도 꾀하고 있다. 예를 들면 현대자동차 노조는 투자 결정에 참여할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최근 이 노조는 성과급 분배에 발언권을 요구하면서 압박 수단으로 경고 파업을 선언했다. 기아차 노조는 이사회 참여와 인사위원회 노사 동수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중요한 투쟁들이긴 해도, 이들 노조가 개입하고 있는 쟁점들은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생존에 관련된 쟁점들과는 거리가 아주 먼 것들이다.

 

기업별 노조체제는 중소기업 노조 조직률을 높이려는 민주노총의 노력도 저해한다.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활발한 조직화 활동 또는 노조 활동을 유지할 인적, 재정적 자원이 없다. 민주노총 자체도 이들을 도울 여력이 없다. 노총은 자원이 제한되어 있고 대기업 노조들은 자신들 소속 조합원의 이익과 직결되지 않는 활동을 위해 노조기금을 공유하기를 꺼린다.

 

이런 상황이 민주노총 내부에서 조직 개편의 필요성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을 촉발했다. 많은 활동가들은 민주노총을 강화해 노총 차원의 노동교육 프로그램과 함께 조직화 활동을 후원하고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또 이 단계에 적합한 체제로서 산별 노조 구성을 요구한다. 다른 활동가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 구조가 가장 민주적이고 노동자들의 필요와 이익에 가장 잘 반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논쟁은 어떻게 하면 노동계급 대표성과 활동을 가장 효율적으로 보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포함한 노조 형식과 목표에 대한 중대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정치적 쟁점들:

다른 쟁점 하나는 반자본주의 운동 형성에 대한 민주노총의 자세다. 민주노총은 신자유주의 비판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남한 경제의 급진적 구조 개편 운동을 전개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많은 면에서 이 점은 1990년대 초 노동 활동가들이 좌파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노조의 권한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두기로 한 결정의 결과다. 이 결정은, 좌파에 대한 정부의 무자비한 공격과 소련의 붕괴, 북한과 미국의 핵 문제를 둘러싼 긴장 고조라는 상황에 대응해서 내려졌다. 1995년 마침내 민주노총이 출범했다.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은 3년 뒤인 1998년이지만 말이다. 경제가 확대되는 동안엔, 민주노총이 조합원들의 생활조건과 노동조건 개선 압력을 넣을 수 있었고 이는 꽤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경제 위기 이후 정부와 기업에서 노조가 경제 회생에 위협이 된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조합원 문제에만 집중한 정책이 역효과를 낳았다.

 

많은 노동 활동가와 정치 활동가들은 민주노총이 노동자들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려 했으면 폭넓은 좌파 정치세력과 관계를 복원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이 좌파 정당의 창출을 지원하길 원한 것이다. 다른 이들은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의 주장은, 이런 시도는 시기상조이고 자원과 활동을 노동운동에서 다른쪽으로 돌림으로써 민주노총 자체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하튼, 상당수의 활동가들은 민중승리21을 구성해 1997년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내고 이듬해 지방선거에 여러 후보를 출마시킴으로써 일을 추진해 나갔다. 이에 대한 민주노총 지도부의 지원은 제한적이었고 득표도 많지 않았다. 2000년 민주노총의 더 큰 지원을 받는 가운데 더 많은 활동가 집단이 민주노동당을 창당했다. 2004년 4월 총선에서 10석을 확보함으로써 민주노동당은 상당한 승리를 얻었다. 이 승리는 또 다른 문제들을 제기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적절한 관계는 무엇이며,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의 정책 일반, 특히 노동 정책에 대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끼치려고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민주노동당(DLP)

민주노동당은 자신들의 목표를 “민중이 완전히 참여하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진보적인 정치적 힘”을 갖추고 확장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공약은 “사회주의의 원칙과 이상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가운데 “국가 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걸 추구한다고 선언한다.

 

선거에서 이 당이 거둔 성공의 상당 부분은 유권자가 후보와 정당에 각각 투표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얼마전 선거제도를 개혁한 덕분이다. 국회의 경우, 299석 가운데 243석은 지역구에서 직접 투표로 결정되고 46석은 정당명부제에 의한 투표 결과로 배정한다. 민주노동당은 정당명부제 투표에서 13% 이상을 득표함으로써 8석을 확보했고 지역구에서는 2석을 얻었다. 두 주요 정당의 득표 차이가 적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은 의석수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한다. 여론조사를 보면, 민주노동당이 2004년 총선 이후 15-20%의 지지율을 확보하면서 인기가 올라가고 있다.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이제 국회내 논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다. 새로 확보한 의회 내 대표권이 중요하긴 해도 활동가들은 여전히 민주노동당이 새로 확보한 영향력을 가장 잘 활용하는 문제를 놓고 씨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이들은, 민주노동당이 입법 발의와 개혁 관련 협상에 개입하는 걸 피하고 대중 운동의 목소리가 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다른 이들은, 민주노동당이 진보적인 의제를 촉진할 수 있을 때는 노무현 대통령의 자유주의 성향 집권당과 함께 일해야 한다고 믿는다. 예컨대 민주노동당은 무상 교육과 보편적 의료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정부의 경제 정책을 한목소리로 비판하지만, 상당수는 노 대통령의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대북한 정책 결정을 지지한다.

 

민주노동당의 미래와 관련된 쟁점들:

민주노동당은 선거를 중요하게 보고 선거에서 힘을 강화하려고 시도해야 하나, 아니면 선거를 국회내 교두보를 유지하면서 정치 관련 논쟁을 날카롭게 하는 도구로 활용해야 하나? 현재 이 당은 당비를 납부하는 회원이 6만명이다. 구성으로 보면 45%는 산업 노동자들이고 35%는 사무직 노동자들이며 20%는 학생과 (소규모 농민 대표자들을 포함한) 기타 세력이다. 당은 내년까지 당원을 10만명 이상으로 확대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노동자들을 당원으로 확보하는 데 민주노총에 의존해야 하는가, 아니면 독자적인 접근 통로를 구축해야 하나? 특정 사회 계층에서 당원을 확충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나?

 

국회내 지위 덕분에 민주노동당은 정책 연구소를 지원할 국고 보조를 받고 있다. 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는 현재 전임 연구원 6명을 두고 있다. 연구소의 책임은 당이 “한국 사회의 진보에 기여할 사회, 정치, 경제 대안 모델을 제시하는” 걸 돕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사회 질서로 이행하는 걸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와 관련된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현재 이 연구소는 (브라질에서 시행된 것과 같은) 주민참여 예산제도와 (아메리카에서 찾을 수 있는 것같은) 생활임금 조례 같은 대안적 사회 실험을 조사하고 있다. 이런 조사활동이 건설적인 정치 공약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반면 변화에 대한 개량주의적 시각을 강화할 위험도 있다.

 

위에서 주목한 과제와 문제들에 대한 단순한 답은 없다. 사실 이것들이 서로 얽혀있는 문제들이라는 특성은, 이 문제에 답하려 시도할 때는 전반적인 전략적 관점의 안내를 받아야 하되 이 전략적 관점은 대중적 투쟁에 계속 중요하게 참여하는 걸 통해서 형성하고 바꿔가야 한다는 걸 상기시킨다. 기대하건대, 한국의 경험이 우리 모두에게 유용한 지침을 제시하면 좋겠다.

 

마틴 하트-랜즈버그는 오레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루이스 앤드 클라크 칼리지 경제학과 교수다. 그의 저서로는 (개발을 향한 질주 -남한내 경제 변화와 정치 투쟁) (한국어판: 이제는 미국이 대답하라, 도서출판 당대, 2000)가 있다. 공저로는 (폴 버킷과 함께 쓴) (한국어판: 중국과 사회주의, 한울, 2005)가 있다. (이밖에 하트-랜즈버그가 폴 버킷과 함께 쓴 논문 세편을 번역한 <일본경제 들여다보기> (미토, 2005)도 국내에 번역되어 나왔다.)

번역: 신기섭
2005/09/19 19:47 2005/09/19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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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바르와 네그리

세계화가 유발한 여러가지 문제들 곧 개별 국가의 주권 문제, 시민권 문제(이주민, 여성 등 소수자의 배제 문제) 등에 대해 요즘 가장 심오한 논의를 제기하는 인물이 프랑스 파리 10대학(낭테르) 명예교수인 에티엔 발리바르다. (너무 심오해서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렵다. 게다가 프랑스어를 쓰기 때문에 번역본들도 별로 없고 번역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것들이 상당수다^^) 아무튼 그의 시각은, 우리에게도 여러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있다. 가깝게는 이 땅 이주노동자들의 권리 문제부터 독도 등 영토 문제에 대한 이 땅 사람들의 시각 문제, 남북 통일 시대 두 나라 시민들의 시민권 문제 등등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에 대해 발리바르는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할 것같다.

 

세계화 시대 국가의 문제, 운동의 문제에 대해 이에 못지않게 많은 주장을 쏟아내는 사람이 이탈리아의 운동가 안토니오 네그리다. 그 또한 이 문제에 대해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물이다. '다중'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인물이다. (발리바르는 대중의 역량이 건설적인 만큼 파괴적이라고 생각하고 다중이라는 개념이 진보적이고 해방적인 반체제운동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기준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에 다중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아무튼 두 인물이 유럽헌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아주 흥미있다. 2005년 5월말 프랑스의 유럽헌법 찬반 국민투표를 앞두고 발리바르는 '그래,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대'라는 글을 발표했다.

 

'유럽 연합 시민권(citoyennet? de l’Union)'의 정의는 기존 국가의 시민권을 유럽 수준으로 연장하는 것, 즉 2차 시민권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며, 또한 거기에는 거대한 초국적(supranationale) 관료제의 출현을 상쇄하는 데 적합한 탈집중화된 참여 메커니즘이 부재하다... 우리는 시민 없는 시민 공동체, 마찬가지로 국가 없는 국가 건설을 갖게 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책임 있는 정치적 태도는 법적으로 헌법을 신임하기보다는, 헌법안 거부가 가져올 수 있는 비판적 혹은 심지어 극적인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그 헌법의 환상을 거부하는 것에 있을 수 있다.
 
양창렬씨가 번역한 이 글 전문은 여기에 있다.

 

반면 네그리의 태도는 “찬성, 이 지긋지긋한 국민-국가를 사라지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유럽 헌법은 세계화된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인 제국에 맞서는 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유럽은 경제적 (자본주의적, 보수적, 반동적) 일방주의라는 단일한 사유에 맞서는 방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유럽은 또한 아메리카의 일방주의, 그것의 제국적 지배, 석유를 지배하기 위해 행해진 이라크에 대한 십자군 원정에 맞서는 대항-권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메리카는 그것을 잘 이해했고, 50년대 이후, 유럽의 구성에 맞서 미친듯이 싸워왔죠. 그네들은 유럽의 구성이 그네들의 권력을 확장하는 데 있어 일종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양창렬씨가 번역한 인터뷰 전문은 여기에 있다.

 

또 한가지 1년 전에 어떤 토론회에서 두 사람이 유럽헌법에 대해 발언한 글이 있다. 이 글은 번역되지 않은 것 같아서 번역해봤다. 발리바르의 마지막 말이 압권이다. (당신은 완전히 슈미트주의자(슈미트는 나치에 참여한 우파 독일 정치학자)가 되었군요...)

 

*----*

 

에티엔 발리바르와 안토니오 네그리, 유럽헌법에 관해서. 2004년 6월. (원 번역자: 아리안나 보베(Arianna Bove). 행사장에서 녹음기 없이 곧바로 번역했기 때문에 간단한 기록 형식이 됐다.)

 

에티엔 발리바르

유럽 정치 전문가라기보다는 한 시민 자격으로 말하겠다. 왜냐하면 유럽은 가장 매력적이고 신비스런 철학적 대상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관련성에서 글을 쓴다. 시민권의 구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국가(Politeia) 곧 형식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물질적인 동시에 사법적으로도 중요하며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갈등으로 점철된 국가로서 헌법에 대해 말하듯이 말이다. 이 시민권은, 국가 중심적인 것도 주권적인 것도 아닌 기존의 시민권이다. 또 유럽연합'의'(of) 시민권이 아니라 유럽연합 '안의'(in) 시민권이다. 이는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에서 한가지 아포리아(막다른 골목)의 이름을 지칭하는 것이다. 시민권은 또 어떤 과정, 모호한 과정의 이름인 동시에, 영원한 위기와 불가능의 이름이기도 하다. 문제는 유럽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주권을 창출하는가 아니면 파괴하는가? 하는 것이다.

 

위기 국면:
이 위기 국면은 결정적인 국면인 동시에 유럽연합이라는 기획의 혁신 여지가 있는 열린 국면이다. 이 재생을 작동시킬 의지와 (마키아벨리의 용어로) 비르투(능력)는 어디 있는가? 이 능력이 조명되기 위해선 재앙이 필요하다. 나는 진보와 방해(진보 억제)의 실제적인 역설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이 가운데 진보 억제는 스페인의 행동 등으로 확인됐다. 지금 당장으로선, 스페인 선거 결과와 정상 복귀 약속과 함께 이런 어려움들이 마무리 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자, 블레어의 국민투표 결정이 나왔다. 유럽헌법 제정 기획은, 형식적이고 자유주의적일지언정, 대영제국의 힘에 관한 몇몇 국가적 기획 및 대영제국 전통에 반하는 것이다. 이는 권력 투쟁의 우발적인 결과는 아니다. 헌법 제정 기획 내부 모순의 징후들이다. 폐쇄된 정치적 공간 안에 한정하는 것의 불가능성...

 

네가지 아포리아(막다른 골목)가 있다:
1) 허약한 초국가의 본성, 이는 오늘날의 유럽이며 잃어버린 유럽 인민들이다.
2) 국경 문제
3) 개별국가 시민권에 우선하지만 새로운 권리들의 승인이 결여된 유럽연합 시민권
4) 권위가 결여된 포스모폴리탄적(세계보편적) 시민권의 억제

 

1) 국가없는 허약한 국가주의는, 주권(또는 보조금)을 포함하는 동시에 제한하는 관료제, 연방 국가, 중앙집중적이면서도 혼란스러운 초국가적 기구와 다름없다. 주권의 기능의 한 측면은 초국가적 차원으로 옮겨가지만 그와 동시에 예컨대 과세처럼, 분열될 여지가 있게 된다. 과세권한은 개별 국가들에 귀속된다. 통화 연합이 있지만, 실제적인 측면은 중앙과 주변부를 중립화(상쇄)하는 성격이 있다. 유럽연합의 독립성 승인에 대한 거부가 존재한다. 타협은 일반성과 특수성을 인정하는 게 될텐데, 특수성은 정치적 계급을 보존할 필요성에 의해 표현된다. 이 새로운 역사적 타협을 구체화하는 게 관료제다. 관료제는 중심부들을 우회할 수도, 그렇다고 다층적인 정부 체계를 우회할 수도 없다. 또 회원 국가들에게 강력한 공공 정책 노선을 강제할 수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연방주의 판본에서 위기에 처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합법성(정당성)과 인민의 관계 말이다. 유럽연합 인민이 누구인가를 묻지 않고는 합법성의 결여를 문제삼는 걸 피할 수 없다. 그건(유럽연합 인민) 유럽 평화운동인가? 이는 충분하지 않다. (니체와 함께) 비스마르크의 견해 곧 국가가 곧 인민이라는 견해를 만나게 되면 여전히 딜레마(궁지)에 직면한다. 해법은 국가통제적 우상을 창출해서 사회 갈등을 억압하는 것이리라. 그람시는 이를 수동적인 혁명이라고 했다. 이는 능동적인 혁명이 아니다. 다시 말해 다중의 운동의 정당이 아니다.(그람시가 말하는 정당은 구체적인 정치 결사체에만 한정하는 게 아니다.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한 운동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 옮긴이) 왜냐하면 유럽의 우리는 대중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또 정부들은 대중이 개입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공포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는, 주권이 공공 대중으로 녹아들어가는 것으로 이어진다. 또 주권의 역사에서, price(prince 곧 군주를 잘못 쓴 것인듯: 옮긴이)로부터 인민으로의 주권 이양 이후 두번째의 치명적인 도약 곧 인민(people)에서 인민들(peoples)로의 주권 이양을 개시하게 된다.

 

2) 유럽연합 정체성. 이것이 배타적이든 포괄적이든 상관없이, 규정이 불가능하다.(터키 문제를 보라.) 대중 선동적 쟁점들이 날뛰고 있다. 그리고 터키 통합이 쉬운 일이라고 주장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케인스가 유럽연합 경계의 자의적인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1923년에 그는 비록 영국인이지만 유럽인으로서 (이에 대해) 글을 썼다. 영국의 대서양 중심주의는 해소될 수 없지만, 이것이 그렇다고 영국을 유럽에서 배제하고 터키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이프러스의 그리스계 사람들은 유럽연합의 권고에도 통일을 거부했다. 터키가 유럽연합에 가입한다면 더 이상 터키인들에게 시민권을 인정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내부자와 외부자의 질적인 차이라는 허구를 유지할 수 없다. 해결되지 않은 난제인 유고슬라비아가 이를 보여줬다. 갈등의 외부 정치화와 내부 비정치화. 긍정적인 측면은 유럽연합이 잘못된 세계화 노선에서 중재자 구실을 할 실제적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 신화일 것이다. 이는, 유럽이 시민권의 진보에서 한발 앞서 나가는 주인공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3) 새로운 권리가 없는 새로운 시민권이라는 악순환. 퇴보로서의 진보와 유산계급의 복수. 프랑스 정치인들의 구호는 이제 '사회적인(사회주의적인: 옮긴이) 유럽'이다. 그런데 왜 그전엔 그냥 있다가 이제 와서 주장하는가? 영국인들은 사회헌장에 저항하지만, 사회헌장도 제한적일 뿐이다. 기존의 개별국가의 헌법보다 더 민주적이지 않는 한 헌법의 정당성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연대의 강화와 개별화의 약화 사이의 선택권을 다루고 있다. 머뭇거림은, 모든 시민의 기본 권리와 공정한 기회, 평등을 헌법화하는 데 대한 거부에서 비롯된다. 악순환은 대항권력의 형식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사실에서도 비롯된다. 이 아포리아(막다른 골목)의 긍정적인 측면은, 정치적 자발성의 성장과 국가간 의사소통의 필요성일 것이다.

 

4) 전세계적 시민권 문제에 대한 유럽연합의 수동적인 태도. 코스모폴리타니즘(세계주의)/국제주의를 논할 수 있는가? 아메리카에 반대해서 대안적인 프로그램의 바탕이 될 근거를 제공할 시급성. 이는 이중의 운동 곧 구성적인(constitutive) 권력과 선거권적(constituent) 권력의 예측할 수 없는 융합을 요구한다. 구성적인 권력은 운동들의 운동에 있고, 전세계적인 여성주의에도 있다. 이 여성주의는 국가적 부족주의를 위기에 몰아넣었고 억압하려 하지 않으면서 억압받기도 원치 않는 이들의 (마키아벨리의 용어로) 소수 권력(minor power)에 부합한다. 언제나 반정치적인 잔재가 있게 마련이다. 오늘날, 이는 군국주의와 인도주의의 조합이다. 이 조합이 정치 공간을 먹어들어가고 있다. 이 틀에서, 유럽의 필요성과 결여가 가장 절실하게 느껴진다. 중재자가 될 여지가 있는 다른 세력들도 있다. 그러나 유럽연합은 중동과 관련해 전략적 위치에 있다. 우리는 문턱에 있는 것 같이 느낀다. 절망감이 있다. 현대 정치는 그 어디로도 우릴 이끌어 갈 수 있다. 심지어는 파시즘 또는 정치무관심(qualunquismo)을 유발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책임감에 대한 강한 인식도 있다.

 

안토니오 네그리

아메리카 일방주의의 위기. 부시의 브뤼메르 18일은 실패했다. 이 실패의 인식이 강조될 것이다. 부시는 유럽을 원치 않았고 아메리카도 마찬가지다. 1950년대 이후 아메리카는 그 어떤 유럽 헌법 제정 시도도 방해했다. 이는 아메리카의 일방주의 속에서 강화됐다. 주된 계기는 1972-73년이었다. 이 때는 유럽과 키신저가 에너지와 중동 석유라는 유럽의 약점을 공략하는 석유 위기를 만든 때다. 마이클 무어는 이 문제를 해석하는 데서 편향적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유럽은 전쟁을 찬성하는 나라들과 반대하는 나라들도 양분됐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유럽주의자들이다. 사파테로(스페인 총리)는 아메리카와 단절하고 유럽연합에서 논쟁을 촉발했다. 그는 유럽에 대한 회의주의와도 단절했다. 강조된 점은 유럽의 비판적인 대중이다. 그러나 오늘날 유럽은 무엇인가? 영국 또는 프랑스-독일 헤게모니 쟁탈전의 장소가 아니다. 우리가 아메리카와 단절한다면, 정치적인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시민권 형태를 선택하는 건 우리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선택할 것은, 유럽을 원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이다. 이런 바탕에서 유럽 시민권이 형성될 것이다. 친 아메리카, 반 러시아 세력들이 결집했고, 이는 몇몇 나라에서 위기를 유발했다.(폴란드를 보라) 우리는 먼저 유럽을 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해야 한다. 유럽은 평화의 땅인가? 큰 문제는 일방주의가 전세계적 지배구조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이다. 이는 다중심적 기구를 가능하게 만든다. 이는 러시아, 중국, 라틴아메리카 등 대륙 세력의 확산을 드러낸다. 오늘날 우리는 강력한 여러 중심들로 이뤄진 세계를 접하고 있다. 평화는 여러 중심 세계의 확산에 있다. 우리가 이 게임에 참가하기를 원한다면 현재 모습 그대로의 유럽을 우선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대륙 세력들이 스스로를 형성해가도록 조심스럽게 지원해야 한다. 유럽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정치를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메리카 일방주의라는 현 조건이 새로운 유럽헌법의 출발점이다.

 

두번째로 유럽은 추한 야수다. 제국주의 질서가 폴리비우스(Polibius)가 묘사한 것과 비슷하다면, 제국의 군주제 실패가 소수 독재 정치를 승자로 만든다. 기업들이 승자지, 다중이 승자가 아니다. 우리는 또 다른 연합을 찾을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유럽연합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가 아니라, 이 귀족정치 헌법 곧 다국적 기업들의 헌법에 찬성하느냐 여부다. 정치적 조건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수용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처지다. 이는 다중이 진행 과정에서 배제된 마그나 카르타와 같은 것이다. 평화는 투쟁하는 다중이 아니라 기업들의 협박에 의해 결정된다. 어떻게 우리가 주도권을 되찾을 것인가? 운동들의 장점은 전세계적이라는 점이다. 지금 상황에서 정당들이 운동들을 개시할 능력을 지니게 될까? 정당들은 운동들을 대리제 구조 속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서도 중재할 수 있는가? (원 번역자 주: 파우스토 베르티노티가 3번째 발언자였다. 이 지적들은 그와 그가 소속한 당인 리폰다지오네 코뮤니스타에 대한 것이다.) 기구들과 고전적인 대의제가 다중의 표현 능력을 빼앗는다. 우리의 문제는 새로운 주제의 정치적 대의제를 주장하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지배구조와 운동의 새로운 관계를 보라. 이것의 반영을 유럽에서 어떻게 도입할 수 있을까? 좌파는 대의제일 뿐이지만 더 이상은 지속될 수 없다. 오늘날 유럽연합의 허약한 구조가 많은 실험의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험도 많이 따르지만. 이 공간은 로비로 채울 수 있는 만큼 운동으로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허약함을 바탕 삼아, 평화와 주어진 상황의 전복 사례와 계기를 표현할 수 있다. 현재 유럽연합 헌법이 권력을 강화시키는가, 아니면 약화시키는가? 두가지 모두다. 이 모호성은 두가지 차원에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내부적으로는 다국적기업의 권력에 대해, 외부적으로는 평화 추구에 모호함이 작용할 것이다. 유럽연합의 위와 아래로부터 동시에 추구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질문: 발리바르가 네그리에게: 당신은 완전히 슈미트주의자(슈미트는 나치에 참여한 우파 독일 정치학자: 옮긴이)가 되었군요...

 

 

Etienne Balibar and Antonio Negri on the constitution of Europe. Rome, June 2004 *

 

Etienne Balibar

 

Rather than as an expert on EU politics I speak as a citizen because the EU is one of the most fascinating and mysterious philosophical objects. I write in this conjunction. As speak of constitution as a Politeia, not only formally but also juridically important, as well as materially - with its equilibrium and ridden with conflict - in the Aristotelian sense of constitution of citizenship. It is about a pre-existing citizenship that is not State-centred nor sovereign. It is not a citizenship 'of' the European Union, but one 'in' the EU. This designates the name of an aporia, in the positive and negative sense. It is the name of the process and indefinite progress but also the name of a permanent crisis and an impossibility. The question is: what ae we doing in Europe? Building r destroying sovereignty?

 

Conjuncture: The conjuncture is a critical one and open to innovation of the EU project. Where is the will and virtue(Machiavelli) to operate this renewal? In order for this virtue to come to light we need a catastrophe. I wrote on the actual paradox of progress and blockage, the latter identified by the actions of Spain etc. Right now we could say that these difficulties are over, with the Spanish elections and the promise ot go back to normal. But as we start thinking the problems are over, there comes Blair's decision on the Referendum. This constitutional project, however formal and liberal, is against some national projects of power of Great Britain and its tradition. These are not contingent effects of power struggles. They are symptoms of the contradiction internal to the constitutional project. The impossibility of circumscribing in a closed political space...

 

There are four aporias: 1) The nature of the weak superstate, that is todays' Europe and the missing European people. 2) The problem of borders 3) EU citizenship as superior to national ones but lacking recognition of new rights 4) The blockage of cosmopolitan citizenships that lack authority

 

1) Weak Statalism without a State = bureaucratism, federal state, centralised and dislocated, supernational institutions that contain whilst limiting their sovereignty (subsidiaries). One aspect of the function of sovereignty is transferred to the super national level whilst being subject to being divided for instance on taxation. The power to tax belongs to States. Whilst there is a monetary union, the practical side is that of neutralising centre and periphery. There is a denial of the affirmation of EU independence. Reconciling will to generality ad particularity, the latter being expressed by th eneed to preserve the political class. The embodiment of this new historic compromise is the bureaucracy. The latter cannot circumvent the centres nor the multilevelled systems of government, nor can it impose a strong line on public policy to the member states. This is what is at stake in the new version of federalism: the relation between legitimacy and people. We cannot avoid questioning the lack of the former wthout asking who the European people is. Is it the European peace movement? This is insufficient and we are still faced with the dilemma, when we come across the Bismarkian position (with Nietzsche): the state is the people. This solution would create a statist idol and repress social conflict, what Gramsci called a passive revolution. That is not an active revolution, i.e. a party of the movement of the multitude, because in Europe we fear the masses, governments are terorised by the idea that the masses might participaate. This leads to the melting of sovereignty down into the public, and inaugurates the second deadly jump in the history of sovereignty since the passage from price to people: the shift from people to peoples.

 

2) EU identity. whether this is exclusive or inclusive is impossible to define (see the issue of Turkey). There is a demagogic issue at play and nobody claims that the integration of Turkey would be easy. Keynes helps us to understand te arbitrary character of the EU borders in this case. In 1923 he wrote as a European even though he was English. The Atlantism of the UK is irreducible but this does not mean that we should expel the Uk and include Turkey in Europe. Greek cypriots refuse the unification of the island despite the EU monitoring that they should be included. If Turkey entered the EU we could no longer refuse citizenship to Turkish people. We cannot keep up the fiction of a qualitative difference between outsider and inside. Jugoslavia, the unresolved question, demonstrated this. External politicisation and internal depoliticisation of conflict. The positive side is the virtual capacity for the EU to have a role as mediator in the fault lines of globalisation. It might be a myth. This is impossible unless the EU becomes the protagonist of a step forward in the progress of citizenship.

 

3) The vicious circle of new citizenship without new rights. Progress as regress and revenge of the proprietor class. The motto of French politicians is now Social Europe, but why now if not yesterday? The Brits resist against the Social charter but the latter is limited. There won't be legitimation for a constitution unless it is more democratic than existing national ones. We deal wth an option between more solidarity and less individuation. The halt comes from the veto imposed on the constitutionalisation of basic rights, equal opportunity and the equality of all citizens. The vicious circle is also due to the fact that forms of counterpower are in crisis. The positive side of this aporia may be the growth of political spontaneity and the need of transnational communication.

 

4) A passive EU position on the question of global citizenship. Can we talk of cosmopolitanism/internationalism? The urgency to imlement a founding ground to oppose to the US an alternative programme. It needs a double moveemnt, an aleatory convergence of constitutive and constituent power. The former lies in the movement of movements and also in global feminism, which has put into crisis national tribalism and corrisponds to the minor power (Macchiavelli) of those who don't want to oppress nor wish to be oppressed. There is always an antipolitical residue. Today this is a combination of militarism and humanitarianism. This combination is eating into the political space. In this frame the need and lack of Europe is mostly felt. There are other possible mediators, but the EU has a strategic place in relation to the Middle East. We feel like at a threshold. There is a feeling of desperation. Contemporary politics can lead anywhere, even to fascim or qualunquismo. But there is also a strong sense of political responsibility.

 

Antonio Negri

Crisis of American unilateralism.

 

Bush's 18th Brumaire has failed. The awareness of this failure is to be underlined. Bush never wanted Europe nor did America. Since the 50's America has sabotaged any attempt at a European constitution. This is exhalted in US unilateralism. The main moment was 1972-1973. It was the year of Eurpe and Kissinger created the oil crisis, pushing on the weak point of Europe: energy and Middle Eastern petroil. Michael Moore is partial in his interpretation of the porblem. From this view, Europe must be thought of as divided into two: the pro and the anti-war nations. They were Europeanists. Zapatero breaks with America and opens the debate on the EU. He breaks with Euroscepticism. The point insisted upon is the European critical mass. But what is Europe today? No place for UK or Franco-German hegemony. If we break with the US we must take the political risks. It is not up to us to choose which EU citizenship we like. We must choose whether or not we want Europe. On that basis EU citizenship will be formed. philo-american and anti-russians were put together in a cohesion that created critical moments in these countries (see Poland). We must first decide whether or not we want Europe. Is it a terrain of peace? The big problem is that unilateralism opens the question of global governance. It makes it possible to have a policentric dispositif. It reveals the proliferation of continental powers: Russia , China and Latin America. Today we are faced with a strongly policentred world. Peace lies within this proliferation. We must firstly accept Europe as it is if we want to play this game and must be careful to help this continental power to constitute itself. To not be in Europe equates to not doing politics. The condition of US unilateralism is the point of departure of the new EU constitution.

 

Secondly, Europe is an ugly beast. If the imperial order is similar to what Polibius describes then the failure of the monarchy of Empire makes the oligarchy the winner. Corporations have won, not the multitude. We will find another alliance. Our problem is not the EU yes or no, but this aristocratic constitution, a constitution of multinational corporations. We cannot accept it nor avoid it because the political conditions are these. It is like a Magna Charta: the multitudes are excluded from this process. Peace is determined not by the multitude in struggle, but by the corporations' blackmail. How do we take back the initiative? The advantage of the movements is that they are global. Will parties be capable of opening up to the movements in this situation? Can they mediate without drawing the movements into the mechanism of representation? [Tr. note: Fausto Bertinotti was the third speaker at the event - these points were directed to him and his party Rifondazione Comunista - no apology for absence of notes and transcript on my part]. Institutions and classical representation expropriates the multitude's capacity for expression. Our problem is to pose the new theme of a political representation. See Latin America and the relation between new governance and the movements? How can we launch in Europe such reflection? The Left is just a representation but can no longer be. I think that today the weak structure of the EU leaves us a lot of room for experimentation, with all the risks, because this space can be filled by the movement as much as by lobbies, but it is on this weakness that we could express the peace and instances, moments of subversion of the given situation. Does the present EU constitution reinforce or weaken power? Both. This ambiguity must be played at two levels: interally on the power of multinationals, externally on a push for peace. I agree on the top plus bottom push needed by the EU.

 

Questions: Balibar to Negri: You have become completely Schmittian...

 

*Translation and transcription by Arianna Bove - This text is in note form because it was translated directly at the meeting with no recording device.

 

원문 출처 http://www.generation-online.org/p/fpbalibar3.htm

2005/07/10 02:50 2005/07/10 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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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꿈-어느 땐가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프랑스의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2004년 10월9일 숨을 거뒀다. 말년에 그는 지옥으로 향하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 '광야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기꺼이 앙숙인 하버마스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2004년 5월엔 프랑스의 진보적인 월간 매체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창간 50년 기념식에서 유언과도 같은 연설을 남겼다. 그의 마지막 말은 "비록 오랜 시간과 고통이 따르겠지만, 어느 땐가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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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 과거의 계몽과 앞으로 올 계몽(Enlightenment past and to come)

-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4년 11월호

 

2004년 10월9일 숨진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작업은 최근 벌어진 일들과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다. 지난 5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창간 50년 기념식에 우리가 그를 초청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행사는 그의 마지막 공식 행사였다. 그가 이날 행사에서 한 연설을 요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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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50돌을 맞아 그 무엇보다 국제적인 범위에서, 반 세계화의 깃발 아래 모인 사회 운동 세력들이 참고하는 핵심 매체가 됐다는 게 너무나 기쁘다. 물론 이 사건이, 냉전시대의 승리자들 (아이엠에프[국제통화기금], 오이시디[경제협력개발기구], 더블유티오[세계무역기구] 같은 사악한 약어들로 대표되는 것들)을 제거할 거대한 혁명이 눈앞에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반 세계화 운동 세력과 전세계 일반 대중들의 지속적인 압력이 이들 기구를 약화시키고 개혁을 강제하게 되어 있다. 실제로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와 똑같은 강도의 압력이 2차 세계대전의 승리자들 곧 유엔(국제연합)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같은 기구에도 개혁을 강제할 것이다.

 

1954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창간호 사설에서 위베르 뵈브-메리는 전통적이고 애국주의적이며 심지어 국수주의적인 느낌을 줄 수 있는 말을 썼다. 그는 "국제 관계의 평화적인 진전에 힘쓴다"는 게 우리의 공통된 임무인 상황에서 "(여기에 봉사하는) 신문의 고향은 너무나 당연히 파리여야 하며 언어는 프랑스어일 수밖에 없다"고 썼다.

 

그 이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진정으로 국제적인 출판물이 됐다. 18개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됐고 전세계에서 참고하는 잡지로 평가됐다. 그러나 여전히 이 잡지는 파리에 터를 잡고 있다. 나에게, 이 점은 뿌리깊은 유럽인 성향(Europeanness)을 보여준다. 다른 나라 또는 다른 대륙에서 이 잡지만큼 자유롭고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잡지가 성공할 수 있을지 나로서는 상상이 안된다. 이는, 우리 유럽인들이 독특한 정치적 의식과 의무감을 갖는다는 걸 암시한다. 물론 이 말이, 이 잡지와 이 잡지가 지지하는 반세계화 운동이 유럽 중심적이거나 프랑스 중심적인 전망에 얽매여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 보다는 도리어, 이 잡지는 반세계화 운동에서 유럽의 구실을 상기시키는 임무를 맡아야 한다.

 

아메리카의 헤게모니와 중국의 떠오르는 힘, 그리고 아랍/이슬람의 신권 정치 사이에 낀 유럽은 독특한 책임을 지고 있다. 나는 스스로를 유럽 중심적인 지식인으로 생각하기 힘들다. 지난 40년동안 나는 이와 정반대에 해당된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믿는다. 한치의 유럽 국수주의도 없이, 그리고 우리가 지금 파악하는 모습으로서의 유럽연합에 대한 한치의 신뢰도 없이, 오늘날 유럽이 의미를 갖는 그 지점을 위해 우리가 싸워야 한다는 걸 말이다. 여기에는 계몽의 전통이 포함된다. 또 과거의 전체주의적인 범죄행위, 대량학살, 식민주의적 범죄행위에 대한 인식과 이 사실에 대한 겸허한 인정도 포함된다. 유럽의 전통은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며, 세계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걸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우리는 유럽이라는 존재가 단지 단일 시장으로 축소되도록 그냥 둬서는 안된다. 단일 통화, 신국가주의적 집단 또는 군사 세력을 뜻하는 것이 되도록 그냥 둬서도 안된다. 하지만, 마지막 지점에 가면 나는 유럽이 공통의 방위력과 외교정책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동조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이런 힘은 유엔의 개혁을 뒷받침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유엔이 기술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 불량배 국가인 아메리카와 타협하지 않고, 아메리카의 일방적 편의주의에 휘둘리지 않는 가운데 자신들의 결의를 실행할 수 있는 유럽에 기반을 둔 기구가 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창간 50돌 기념호인 지난 5월호에 이그나시오 라모네(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주필: 옮긴이)가 쓴 사설 '저항'을 인용하고 싶다. 나는 이 글이 지지하는 것, 반대하는 것 하나 하나에 모두 동의한다. 그러나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게 한가지 있다. 시장에 덜 지배되는 유럽을 지지한다는 대목이다. 나로서는 이 말이, 단지 다른 초강국과 경쟁하는 데 만족하고 마는 유럽을 뜻하는 것도 아니요, 다른 초강국들이 원하는 걸 하도록 그냥 두고 보는 유럽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그리는 유럽은 유럽을 반세계화의 요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헌법과 정치적 태도를 지닌 곳이요, 자신의 추진력과 대안 정신이 전세계로, 예를 들면 이라크 또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으로도 뻗어나가는 근원지가 되는 곳이다.

 

과거 계몽 정신의 자랑스런 후손이자 새로 다가올 계몽의 전령으로서의 유럽은, 세계에 대해 자신의 정치가 단순한 이분법적 반대 이상의 어떤 더욱 세련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하리라. 이런 모습의 유럽에서는, 반유대주의의 혐의를 받지 않으면서도 이스라엘의 정책, 특히 아리엘 샤론이 주도하고 조지 부시가 지지하는 정책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런 모습의 유럽에서는, 팔레스타인이 자신들의 권리와 땅과 국가를 위해 벌이는 정당한 투쟁을 지지하는 게, 자살 폭탄 공격을 지지하는 걸 뜻하지 않을 수 있다. 또 이 지지는, 시온의 장로들의 의례라고 할 형편없는 거짓말에 힘을 실어주는 (슬프게도 실제로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반유대 선전선동에 동의하는 걸 뜻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모습의 유럽에서는, 반유대주의가 부상하는 것과 이슬람 혐오증이 떠오르는 걸 동시에 우려하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샤론과 그의 정책들이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부각되는 데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이 현상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가 유럽에 사는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불러모으는 구실로 이 현상을 이용해먹고 있다고 믿는 우리의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한다.

 

이런 모습의 유럽에서는, 사담 후세인과 그의 정권에 동조한다는 비난을 받지 않으면서 부시, 체니, 럼스펠드, 월포이츠의 정책을 비판하는 게 가능하다. 또 이런 모습의 유럽에서는, 용감하게 목청을 높이는 아메리카인, 이스라엘인,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연합한다는 것 때문에, 반아메리카주의자라고, 반이스라엘주의자라고, 반팔레스타인주의자라고, 이슬람 혐오주의자라고 비난받지 않을 것이다.

 

이 것이 내 꿈이다. 내가 이런 꿈을 꿀 수 있게 도와주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한다. 내 꿈은, 라모네가 말한 것처럼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걸 꿈꾸는 데 국한하는 것이 아니다. 내 꿈은 다른 세상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데 필요한 것들을 이룰 힘을 불러모으는 것이다. 이 꿈은 전세계 수십억의 여성, 남성과 내가 공유하는 꿈이다. 비록 오랜 시간과 고통이 따르겠지만, 어느땐가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영어 번역본: http://mondediplo.com/2004/11/06derrida

번역: 신기섭

2004/12/14 00:13 2004/12/14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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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와 가상의 치아파스: 마술적 사실주의와 좌파

주디스 애들러 헬먼 (Judith Adler Hellman) 소셜리스트 레지스터 2000년호 원 제목 = Real and Virtual Chiapas: Magic Realism and the Left 오래전에 번역했던 글인데, 2004년 11월에 출판된 책 <게릴라의 전설을 넘어>(생각의 나무)에 포함시키기 위해 애초 번역본을 상당 부분 수정해서 새로 공개합니다.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민중투쟁의 상징으로 꼽히는 멕시코 무장 농민군 사파티스타는 인터넷을 잘 이용하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또 전세계의 상당한 진보세력이 인터넷으로 표현된 사파티스타에 크게 공감하고 연대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요크대 교수(정치사회학)인 저자는 인터넷속의 사파티스타와 그들의 본거지인 치아파스를, 현실속의 사파티스타, 그리고 현실속의 치아파스와 꼼꼼히 따져봅니다. 현지를 방문해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자료를 뒤진 결과 이 여성 교수의 결론은 우리가 컴퓨터 화면에서 본 치아파스는 현실과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단순화한 가상의 모습을 전세계 진보진영이 붙잡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분석한 뛰어난 업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헬먼은 인터넷을 통한 혁명 자체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한글로 원고지 150여장 분량의 논문입니다.



실제와 가상의 치아파스: 마술적 사실주의와 좌파

(Real and Virtual Chiapas: Magic Realism and the Left)(역1)

주디스 애들러 헬먼(By Judith Adler Hellman) <소셜리스트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 2000년호에서.
알림 1. 이 번역 글은 2004년 11월에 출판된 책 <게릴라의 전설을 넘어>(생각의 나무)에 포함시키기 위해 애초 번역본을 상당 부분 수정했습니다. 책으로 출판된 만큼 저작권 문제를 고려해서 다른 인터넷 사이트로 퍼가는 건 삼가주시고 개인적으로만 이용해주십시오. (2004년 11월19일 고침) 알림 2. 본문의 주석 번호를 누르면 끝의 주석으로 가고, 해당 주석의 번호를 누르면 다시 돌아옵니다. 번호만 있는 주석은 원 저자가 붙이 주석이고 번호 앞에 '역'이라고 표시된 건, 옮긴이가 붙인 주석입니다. 알림 3. 인쇄를 하시려면 인쇄용을 이용하십시오.

 

1994년 1월1일 봉기 전까지 치아파스는 주변부에서도 주변부에 있었다. 이 땅이 스페인에서 독립했을 때에는 아즈텍과 마야 제국 두쪽 모두의 경계지역에 있었다. 또 명목상 독립됐으나 비참하리만치 가난한 중앙 아메리카의 평범한 시골 곧 과테말라의 최북단 지방이 될지, 아니면 멕시코의 최남단 주로 편입돼 사실상 내부 식민지가 될지도 불분명했다.

 

인구가 300만명 약간 넘는 치아파스는 지금 '세계의 배꼽'이 되었다. 잉카 사람들이 자신들의 서울을 쿠즈코(Cuzco)라고 불렀듯이 말이다. 이 땅은 너무나 역동적인 동시에 눈길을 끌어당기는 사건들의 땅이 되었다. 그래서 5만명의 이탈리아 시위대를 로마의 포폴로광장으로 뛰어나오게 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치아파스 연대단체 네트워크가 전세계를 띠처럼 둥글게 둘러싸고, 수십개의 인터넷 사이트가 알토스 데 치아파스(Altos de Chiapas)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추적하는 데 헌신하며, 5천명의 외국인이 이 땅이 펼쳐 보이는 드라마에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참여하려 이 고지대에 쫙 퍼졌다. 그리고 1998년 4월에는 45개 미국 단체 대표들이 연대네트워크를 결성하기 위해 워싱턴시에 모였다.(1) 요컨대,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EZLN)과 연대하는 것을 정치적, 사회적 헌신의 핵심으로 삼는 열정적인 활동가들이 전세계에 널려 있다. 그들은 부사령관 마르코스(Marcos)와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도전을 선언한 것으로 평가한다. 또 그들은 사파티스타를 전자 통신을 이용한 정치의 혁명적인 방법을 개척한 대표주자로 본다.

 

치아파스의 드라마가 그렇게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이유는 뭘까? 그렇게 많은 멕시코 국외의 진보 인사들이 관심의 초점을 치아파스에 두게 만드는 매력은 뭘까? 초기에 마르코스의 통렬한 관찰, 자기반성적인 지혜, 날카로운 지각은 외국인들을 마법에 걸고 놀라게 했으며 수백만명의 멕시코인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때에 따라 영웅적이고, 분석적이고, 반역적이고, 재미있고, 엄숙한 마르코스의 풍모 뒤에는 사건을 아주 멀리서 볼 때 느끼는 매력이라는 요소가 자리잡고 있다. 피에를루이지 술로(Pierluigi Sullo), 니노 리시(Nino Lisi), 마르첼로 빌리(Marcello Vigli)가 이탈리아 일간지 <일 마니페스토>(Il Manifesto)의 지면을 통해 지적하고 논쟁했듯이, 치아파스와 관련한 이탈리아에서의 거대한 대중 동원, 대규모 탄원서 서명, 아크테알(Acteal)에서 벌어진 학살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 참가는 "좌파에게 뭔가 중요한 것을 뜻한다."(2)

 

그러나 이것이 정확하게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유럽과 캐나다와 미국 좌파 일부의 치아파스에 대한 강박 관념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들의 맹렬한 애착을 무엇으로 설명할까? 치아파스에서 멀리 떨어진 이들이 느끼는 매력은, 마르코스의 발언이 쉽게 번역될 수 있고 모든 사건을 설명하도록 쉽사리 재구성될 수 있고 게다가 모든 개인적 및 집단적 요구에 관한 말로 재구성하기 쉽다는 점에 있나? 마이클 로위(Michael Lowy)는 "이것은 마술, 신화, 유토피아, 시, 낭만주의, 열정, 거친 희망, '신비주의', 믿음이 실린 운동이다. 이는 또한 오만과 유머와 풍자, 스스로에 대한 풍자로 가득하다."고 열정적으로 썼다. 이는 비참하리만치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의 투쟁이 전혀 다른 환경에 있는 이들에게 주는 매력의 상당 부분을 열거한 것이다. 그가 스스로 지적했듯이, "'매력에 다시 사로잡힘'(re-enchantment)을 되살려내는 이 능력이 사파타주의(Zapatism)로 하여금 치아파스 산맥 넘어 멀리 있는 사람들을 황홀하게 하는 이유의 한가지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3)

 

외부인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이 엄밀히 말해 환멸한 이들의 '매력에 다시 사로잡힘' 추구 때문이 아니라면, 자신이 속한 사회의 혁명적 변화 전망이 없는 데 낙심해 제3 세계의 혁명 대의를 받아들인 사르트르와 드 보부아르가 가진 것과 비슷한 충동일까? 국내의 투쟁에 참여하고 힘을 쏟는 대신 외부 사람들의 투쟁에 개입하는 것의 현대판인가?

 

의심의 여지없이 외부인이 남부 멕시코에서 벌어지는 일에 느끼는 매력의 상당 부분은 이 사건이 명백하게 극단적이라는 데 있다. 이 사건은 권력자와 권력 없는 이들, 순수한 이와 불순한 이들, 정직한 이와 타락한 이들의 직접 대결로 보인다. 흔히 모호함(더 심하면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으로 가득찬 세계에 제기된 이런 이미지들의 세련된 단순함을 생각하면, 혼란스럽게 만드는 세부 사실에 직면하는 걸 뺀 무엇이든 할 용의가 있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널려 있다는 건 놀라울 게 없다. 간단히 말하면, 많은 외국인들 사이에 현재 치아파스에서 활동하는 세력들의 지독한 복잡함을 인식하는 데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상황을 단번에 너무나 폭발적으로 만들고 단호한 의지를 갖는 데 강한 걸림돌이 되는 많은 복잡함을 따져볼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사건의 단순화를 부르는 환원주의를 드러내보일 것이다. 그리고 군대와 준군사조직의 폭력과 인권 탄압을 전세계에 중계함으로써 셀 수 없이 많은 목숨을 구한 측면도 있지만, 치아파스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그 무대의 배우들에 대한 현저히 '평면적인' 그림을 보여주는 측면도 있는 전자 통신의 양면적인 기능을 분석할 것이다. 컴퓨터 화면에 즉각 나타나는 이 평면적인 그림은(4) '진짜'(real) 치아파스를 극히 일면적으로만 닮은 '가상'(virtual) 치아파스를 구성한다. 진짜 치아파스는 그 지역 사람들은 물론 외국 활동가들, 인권 운동가들, 사파티스타인민해방군 동조자들, 심지어 우연히 찾아간 방문객조차 이곳 남멕시코 땅에 발을 딛기만 하면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가상 치아파스에 과도하게 매달리는 행위가 안고 있는 정치적 위험을 강조할 것이다. 국제 반신자유주의 세력의 일부라는 소속감을 강화시키는 이미지, 상징, 표어 묶음을 수천마일 떨어져 있는 이들이 붙잡고 있다고 무슨 해악이 있겠는가? 이렇게 물을 수 있으리라. 확실히 하건대, 이런 열정의 상당 부분은 해롭지 않다. 또 많은 해외 사파티스타 지지단체들이 자국내에서 투쟁을 벌임으로써 치아파스에서 벌어지는 노력을 지원할 필요성도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진짜 치아파스에서 벌어지는 투쟁이 지닌 호소력과 근본적으로 다른 매력을 가상의 치아파스가 좌절한 좌파들에게 제시한다는 점도 보일 것이다. 진짜 치아파스에 살고 있는 진짜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은, 가상의 치아파스를 가장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정치적 성숙함을, 그리고 모호함에 대한 더욱 강한 인내를 요구한다. 이는 현재 좌파 정치학의 심각한 문제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문제는, 치아파스에 대한 뜨거운 연대가 성립하려면 명백하게 탄압받는 동질적인 인디오 집단이 필요한 것 같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인디오들은 하나같이 선하고 순수하며, 다면적이지 않으며, 복잡한 개성이라고는 없고, 서로 다른 다양한 이해 관계를 지닌 성숙한 사람들이어서는 안되는 것 같다. 단순화하려는 충동은 이해할만 하지만, 나는 컴퓨터 화면에 표시되는 치아파스와 땅 위의 실제 상황을 구별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제시할 것이다.

 

동의하는 지점들 (Points of Agreement)

물론 몇가지 측면은 논란의 여지가 거의 또는 아예 없다. 예를 들어, 사파티스타 봉기의 배경에 대한 믿을 만한 설명들은, 국민 대다수가 가난한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이 사는 천연자원이 특히 풍부한 땅이라는 역설과 비극적 불균형을 당연히 강조한다.(5) 이 멕시코의 내부 식민지에서 적당한 피난처도, 적합한 음식도, 마실 물도, 전기도 없는 사람들이 목재, 옥수수, 콩, 가스, 기름, 수력발전을 멕시코 다른 지역에 '수출하고 있다.'

 

치아파스 봉기의 원인에 대한 진지한 분석에서 또 다른 공통점은, 멕시코시티의 중앙 정부가 수세기 동안 소홀히 다루던 이 지역에서 최근 몇십년 사이에 많은 정부 지원 사업이 시작되면서 나타난 급격한 경제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루이스 에체베리아(Luis Echeverría) 대통령(1970-1976)의 인민주의적 프로그램은 치아파스에서 정부의 입김을 크게 강화시켰고 공화국의 변두리였던 이 곳의 공공예산 지출이 10배나 늘게 했다. 아주 짧은 기간에 실시된 야심찬 사업으로 치아파스의 정치경제적, 사회적 구조가 뒤바뀌었다. 이 사업은 도로와 댐 건설, 석유 사업, 상업용 커피 경작, 축산과 낙농업에 투자하는 동시에, 멕시코 다른 지역과 치아파스주 내부 다른 지역의 땅 없는 농민들을 라칸돈(Lacandon) 밀림으로 이주시키는 '식민화' 계획이다. 이런 정부 정책은 마침 중남미 전쟁 및 그 전쟁으로 생긴 대규모 난민 때문에 남부 멕시코 전체의 고용구조가 바뀌던 바로 그 때 치아파스 주민들을 세계 경제 구조 속에 몰아 넣었다.

 

당연히, 이 변화는 여러 원주민 부족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끼쳤다. 일부는 더욱 가난해졌고, 다른 부족은 생계용이 아닌 (상업용) 농업, 교통, 건설, 기름, 목축, 낙농업 분야에서 새로운 수입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경제, 사회적 변화가 유발한 불안정은 곧이은 석유 호황의 붕괴로 더 커졌다. 그런데 석유 호황은 (치아파스) 중심부 고원지대의 많은 원주민들을 멕시코만 해안지역의 임금 노동으로 끌어들인 요인으로 작용했다.(6) 80년대 내내, 석유 호황과 불황이 유발한 사회적 긴장은 연이은 정치, 경제적 충격으로 더욱 깊어졌다. 1982년 외채 위기가 들이닥치고, 이어 커피값이 폭락했으며, 마지막으로 카를로스 살리나스(Carlos Salinas) (1988~1994)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이어진 것이다. 이 정책은 치아파스 주민들에게는 주로 옥수수 및 기초 농산물 생산자에 대한 가격 지원의 폐지와 헌법 27조 수정이라는 형태로 영향을 끼쳤다. 헌법 27조 수정은 멕시코 농촌의 사회적 평화를 유지하는 핵심이던 땅 분배 프로그램을 북미자유무역지대 참여에 따른 양허 차원에서 중단하는 내용이다.(역2)

 

그래서 치아파스 무력 충돌의 간접 원인과 직접 원인을 이해하기 위한 분석 틀은 이런 연속적인 변화에 중심을 두게 된다. 가장 유용한 분석들은, 자본주의적 관계의 급속한 침투와 정부의 과도한 개입과 뒤이은 개입 철회를 원주민에 대한 인종적 탄압이라는 배경에 비춰 판단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 인종적 탄압은 스페인 정복 때 시작되어 현재까지도 대부분의 측면에서 줄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다. 또 이런 분석들은, 역사적으로 치아파스 지주들의 과두정치가 인종차별적 담론 주도와 주도(州都)인 툭스틀라 구티에레스(Tuxtla Gutiérrez)에 있는 제도혁명당(PRI) 지구당 장악이라는 두가지 통제 수단을 경제, 사회, 정치적 지배의 강화에 이용한 것도 강조한다. 이런 조건에서 중앙 정부의 개입은 치아파스 과두정치의 주도권에 도전했지만, 통제력의 밑바탕을 허무는 데까지 가지는 않았다. 반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경제적 변화가 만들어낸 사회 격변은 원주민과 메스티소(백인과 인디오 혼혈) 농민의 전투성과 자각을 재촉했다. 사건에 대한 거의 모든 설명이, 1994년 사파티스타 봉기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이 의식의 각성이다.

 

투쟁성은 두가지 형태를 통해 표현됐다. 첫째 형태는 사무엘 루이스(Samuel Ruíz) 주교가 이끄는 가톨릭 교구의 현지 활동에서 자라났다.(7) 가톨릭 활동은 1960년대에 전도사들을 훈련시켜 고지대에 파견한 뒤, 성경을 원주민어로 번역하고 그들의 말로 설교하며, 자신들의 억압에 대해 발언하도록 유도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됐다.(8) 이 풀뿌리 활동은 1974년에 첫번째 원주민의회를 성사시켰는데, 원주민의회에는 300여 지역사회에서 1250명의 인디언 대표들이 모였다. 이 의회를 처음엔 멕시코 정부가 후원했다. 하지만 사무엘 루이스 주교와 전도사들은 의회를 장악해 원주민들의 목소리를 내는 통로로 활용했다. 해방신학의 새로운 개념을 전하면서, 지역사회가 스스로 대표를 뽑고 자신들의 문제를 자신들의 말로 개념화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콜리어(Collier)가 지적했듯이, 의회는 "밑으로부터의 조직화 모델을 제시했고 독자적인 농민 단체들이 이 모델에 의지하게 됐다." 의회는 또 사파티스타의 논의보다 정확하게 20년 앞서 치아파스 원주민들이 불만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9)

 

두번째 유형의 전투성은 종종 급진적인 전국 조직과 연계된 농민 조합의 형태를 띠었다. 1968년 10월 철저한 탄압에 직면했던 도시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중심이 돼 새로운 좌파세력을 구성했다. 이 조직은, 장기적 관점에서 대중적인 농민운동과 도시빈민운동을 조직하는 고된 작업이 멕시코시티를 장악한 정치 지배층의 주도권에 도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학생운동 출신자들의 신념을 반영한다. 첫번째 원주민의회가 민족적, 언어적 경계를 넘어 연대하고 자신들의 불만을 파악해 명백히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뚜렷이 보여준 직후, 이런 조직 형태가 치아파스에 나타나기 시작했다.(10)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이런 조직적 시도의 역사는 놀랄 것 없이 연대와 분열의 역사이다. 마오주의자, 공산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독자적인 농민운동가, 가톨릭 선교사와 전도사, 복음주의 개신교도간의 협력 이야기이면서 경쟁 이야기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대항 농민조직 지원을 통해 조직 파괴를 꾀한 멕시코 정부에 맞서는 가운데 이뤄졌다.(11) 사파티스타운동은 명백히 이런 조직들의 활동이 자연적으로 성장, 발전한 것이다. 이 사실은, 선구자들이 원주민 지도자를 세우고 밑에서부터 조직을 구성하도록 이끄는 걸 기본 원칙으로 견지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사파티스타는, 과거 수많은 조직들이 결국 선택한 체제 타협에 대한 반기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파티스타 운동의 기원을 종교적 조직화 시도와 세속적 조직화 시도, 이 두가지에서 찾는 데는 대부분 동의한다. 사파타주의의 성격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들이(12) 한가지 명백하게 공감하는 게 또 있다. 그 공감대란, 지지 기반 형성 방식의 차별성에 대한 것이다. 사파티스타는 10년 이상 동안 치아파스 고지대의 다양한 종족들로부터 넓고 강력한 지지 기반을 확보했다. 일단 혁명적 운동을 일으킨 뒤 주변에서 추종자들을 끌어들이려 하는 전통적인 게릴라 거점 방식과 달리, 사파티스타는 활동 영역 전체에 걸쳐 수천여 마을의 강력한 지지를 끌어낸 것이다. 이런 지지를 구축하기 위해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 조직운동가들은 오랜 전통의 멕시코 민족주의 원칙에 의지했다. 또 "수십년 동안 집권당의 전유물이었던 멕시코 혁명사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13) 전통 깊은 급진적 주제를 제시함으로써, 이들은 치아파스의 가장 억압당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멕시코 전체의 박해받는 사람들을 겨냥한 담론을 개척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5년 전세계의 활동가와 지지자들을 소집함으로써, 사파티스타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국제적 대중의 비판을 의식적으로 선언하고 대변했다.(14)

 

멕시코 정부로부터 모순적인 대응들을 유발한 것 또한 이 봉기를 규정하는 특징이라는 게 명백하다. 치아파스의 경제, 정치 엘리트들은 정부로부터 이 운동을 깰 확실한 대응책을 끌어내려고 힘을 합쳐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살리나스나 그의 후계자 에르네스토 세디요(Ernesto Zedillo)는 화해정책을 택하지도, 그렇다고 억압정책을 선택하지도 못했다. 또 협상을 하지도, 군사행동을 취하지도 못했다. 대신 상황에 따라 그 때 그 때 가능한 대응책을 추구했다. 일관된 정책이 없다는 것은,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전례 없는 환경과 관련이 있다. 멕시코 정부로서는 이 사건을 국내 문제 또는 지역 문제로 규정하길 원했지만, 기술 덕분에 전세계 사람들이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고 국제적 여론을 형성하며, 사건을 평가할 수 있었다. 전자 통신의 혁명과 마르코스의 예외적이리만치 효과적인 의사소통 기술은 국제적 연대를 만들어 냈으며, 이 연대는 운동의 지속과 운동가 각 개인의 생명 유지에 기여했다.(15)

 

복잡함(The complexities)

그래서 반란을 촉발하고 멕시코 정부의 심히 모순된 대응을 부른 정치, 경제, 사회적 조건 또는 사파티스타가 직접 분쟁지역을 넘어 다른 멕시코인과 세계의 동조자들을 자신들의 더 넓은 운동에 결합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조건에 대한 분석에서는 차이가 거의 없다. 하지만 국제적 지지 세력을 동원한 부분으로 넘어가면, 흔히 알려진 치아파스 상황은 복잡한 현실을 아주 단순화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 그림이 의도적으로 왜곡된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사람들을 잘못된 쪽으로 유도한다. 치아파스의 투쟁에 동조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계속 펼쳐지는 사건을 이해하고 분석하기 힘든 처지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아래 제시하겠지만, 심지어 때에 따라서는 의미 있는 방식으로 투쟁을 지원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든다.

 

치아파스의 복잡한 상황 가운데 정치적으로 중요하지만 외부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빠졌거나 무시된 것으론 어떤 것들이 있을까?

 

땅 보유(Land tenure)

치아파스의 원주민과 빈농들의 복지를 염려하는 이들 대부분은 이 지역 땅의 56%가 개인 소유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자주 반복되는 이 통계는 오해를 유발하는데, 왜냐하면 개인 소유 땅이 몇몇 대지주들에게 집중된 것 같은 느낌을 주면서 인용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정하면, 대농장을 징발해 땅을 요구하는 농민들에게 줄 정치적 의지만 있으면 토지개혁법에 따른 임대용 '집단 농지(에히도, ejido)'(역3)로 개인 소유 땅을 활용할 수 있다고 추론하게 된다.(16)

 

불행하게도, 이 농민운동적 희망 사항은 동 치아파스 곧 사파티스타의 근거지인 로스 알토스(Los Altos)와 라칸돈 셀바(Lacandon Selva)의 분쟁지역에서 실현될 수 없다. 이 지역에는 '분배할 수 있는' 땅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17) 동 치아파스에는 기존 대토지 소유자(latifundios)와 신 대토지 소유자(neolatifundios)가 지난 30년 동안 거의 사라졌다.(18) 일정한 땅은 초기 토지개혁 및 분배 과정에서 나뉘어져서 집단 농지 임대 형태로 분배됐다. 또 1980년대에 연방정부는 159개 농민 정착지에 분배하기 위해 사유지 8만 헥타르를 사들였다. 그래서 1950년대 이후 수력발전소 건설에 따른 서 치아파스 주민의 동 치아파스 이주,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다른 14개 주와 연방 직할 지역에서 온 땅 없는 농민들의 정착, (국제 환경운동 단체와 라칸돈 마야(역4) 보호운동가들의 압력에 따른) 생태보전지 지정 등으로 해서, 이 지역 땅 상당 부분은 조각조각 나뉘어서 분배됐다. 그래서 이 지역 대지주들은 땅 강제수용에 저항하느니 자신들의 땅 일부를 주변 농민들에게 팔아넘기는 게 낫다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됐다.(19)

 

치아파스 전역에 걸쳐 토지 자원에 비해 사람이 월등히 많은 데서 비롯된 압력으로, 전체 토지의 56%라는 압도적인 비율의 개인 소유 땅은 사실 5헥타르 이하의 소규모 농장들이다. 이 지역의 집단 농지 할당 최소 규모는 20헥타르이다.(20)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외부인으로선 땅 없는 농민들과 지주가 맞서는 농촌 계급투쟁 양상의 전통적인 농민 싸움이 벌어지는 땅으로 보기 십상인 치아파스에서, 땅을 둘러싼 '싸움'이 실제로 심했다. 그러나 문제는, 슬프게도 이 싸움이 보통은 '가난한 이들간의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이 결과, 충분치 못한 땅뙈기를 넓히려 애쓰는 국유지 임차 농민들 또는 땅을 물려받을 수 없는 국유지 이용자의 자녀들은 주변의 소지주들과 분쟁을 벌이고 있다. 소지주들은 그들대로 불쌍하리만치 작고 질도 떨어지는 생계용 땅을 지키려 맞서고 있다.

 

종교(Religion)

대부분의 인터넷 이용자들이 익숙한 가상의 치아파스에는 종교적 행위자들이 중요한 구실을 한다. 우리가 컴퓨터 화면에서 만나는 종교적 행위자들은 사무엘 루이스 주교, 그의 교구, 산바르톨로메 인권센터(San Bartolomé Centre for Human Rights)의 가톨릭 인권 운동가들이다. 아마 미국에 근거지를 둔 평화를 위한 목자들(Pastors for Peace)로 대표되는 몇몇 개신교도들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오늘날 치아파스에서 펼쳐지는 사건에서 종교가 중심적인 기능을 하고는 있지만, 실제 현실의 그림은 화면에 나타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가슴과 정신, 무엇보다 영혼을 사로잡기 위한 가톨릭과 다른 종교의 경쟁은 지난 50년 동안 치아파스에서 벌어진 모든 일의 핵심 원동력이었다. 사무엘 주교가 전통적인 보수주의자에서 사회 문제에 개입하는 활동가로 변신한 것은, 1960년대말에 농민들 사이에서 복음주의적 개신교가 퍼지는 것을 제지하기 위해선 가톨릭교회가 밑바닥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21) 라틴아메리카 전 지역, 특히 중앙 아메리카에서 그렇듯이, 가난한 이들의 관심과 애정과 지지를 끌어 내기 위한 가톨릭과 개신교 선교사간의 치열한 경쟁이 치아파스에도 있다. 그런데 전도사들의 용기와 진실된 노력, 사무엘 주교의 지도력과 헌신이 있었음에도, 오늘날 치아파스 인구의 51%만이 가톨릭교도다. 이는 멕시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낮은 수치다.(22)

 

치아파스의 억압받는 이들이 정치적 선택의 자유는 결코 얻어본 적 없지만 종교적 선택의 자유는 점점 더 크게 느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에서 보수까지 수많은 종류의 개신교가 개종자들을 끌어들였다. 개신교 교회에서는 장로교가 가장 세력이 크면서도 가장 오래 됐고, 그 뒤를 오순절교(하느님의 총회, 카리스마틱스, 엘림, 유니서),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이 따르고 있다. 또 비록 숫자는 적지만, 침례교, 루터교, 나자레스교회, 예수교회 또는 예수의 추종자들, 하느님의 교회, 세상의 빛, 평화의 왕자, 진정한 그리스도교회, 중앙아메리카교회 등도 있다.(23) 가장 최근에는 이슬람교와 모르몬교 선교사들이 개종자들을 모으고 있으며, 가톨릭이 우세한 지역에서 쫓겨난 개신교도의 새 정착 지역에서는 곧 이슬람이 숫자면에서 주요한 종교집단이 될 것이다.(24) 그래서 치아파스의 종교 지도는 역사적으로 뿌리깊은 분파와 신흥 분파의 조각을 이어붙여 놓은 형상이다. 게다가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하는 것은, 이런 종교적 성향이 정치적 정체성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여당인 제도혁명당(PRI) 또는 중도우파의 야당인 민주혁명당(PRD, Democratic Revolutionary Party)과 일치하거나 상반되는 것이다.

 

그래서 치아파스에 대한 가상공간의 설명에서는 마르코스 이외의 인물 가운데서 사무엘 주교가 주인공으로 나타나고,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에서는 그를 아주 높게 평가하지만, 현장에서 사무엘 주교는 주요 종교 행위자의 하나일 뿐이다. 다른 행위자들을 간과한다면, 인종 정치학을 가로지르는 저강도 종교 분쟁이라고들 평가하는 사태를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정치적 행위자들(The Political Actors)

종교적 행위자들이 컴퓨터 화면에서 흔히 본 그림보다 훨씬 많고 다양한 것으로 드러난 것처럼, 치아파스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의 정치적 행위자들도 훨씬 더 복잡하다. 가상의 치아파스가 선한 쪽과 악한 쪽의 분명한 범주로 나뉘지만, 훨씬 더 복잡한 이 땅의 현실은 더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심지어는 정의하거나 분류하기도 힘든 몇몇 그룹까지 등장한다.

 

가상 치아파스에서 나쁜 놈들은 세디요 정권, 에르네스토 세디요 대통령 본인, 내무장관 프란시스코 라바스티다(Francisco Labastida), 내부장관의 공식 협상대표 에밀리오 라바사(Emilio Rabasa) (그는 치아파스의 명문 출신이다), 제도혁명당 (아마도 이른바 '공룡'과 '개혁주의자'로 다시 분리됨.), 멕시코 정부, 멕시코군, 여기에 미국의 반군진압부대 또는 적어도 반군진압세력으로 은밀하게 행동하는 미국 마약단속국이다. 좋은 편은 사파티스타, 원주민, 일반적으로 농민이라고 불리는 좀더 폭넓은 범주, 여기에 비정부기구 지원자들, 사무엘 주교와 그의 교구다.

 

물론 실제로는 더 많은 행위자들이 있고 쟁점이 되는 이해관계도 더 많다. 더 완벽한 상황 분석을 하려면 치아파스 주 정부의 이해 관계를 멕시코 정부의 이익과 구별해야 하고, 국가 차원의 전략적 에너지 문제를 치아파스 지역의 경제 및 정치 권력들과 구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치아파스의 제도혁명당과 민주혁명당 지구당도 각각 중앙당과 상당히 관심이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원주민들의 인종적 차이 외에도 (이 점은 초칠(Tzotzil), 첼탈(Tzeltal), 촐(Chol), 토홀라발(Tojolabal)의 다인종 혼재 현상이 사파티스타 집단의 중요한 특징이 됐기 때문에 사건의 인터넷 판에도 반영됐다), 우리는 땅 임차기간의 중요한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이 차이는 위에서 거론한 국유지 임차 경작자, 소지주, 땅 없는 이들간의 분쟁 과정에서 빈농 내부의 이해 차이를 유발한다. 게다가 이따금 외부의 주목을 받는 게 고작이지만 핵심 집단이 하나 있는데, 스스로를 "내어쫓긴 이들의 군대"(army of the displaced)라고 부르는 이들이다. 이들은 고지대에서 빠져 나와 해변의 타파출라(Tapachula)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흩어진 피난민으로 사파티스타를 지지하지 않는 원주민이다. 이들은 분쟁지역에서 탈출한 치아파스 사람들인데, 대부분은 1993년말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의 동참 요구를 받았을 때 무기를 들지 않는 쪽을 선택한 이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지역사회에서 쫓겨났거나 십자 포화에 갇힐 것을 걱정해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제는 1만명을 훨씬 넘는 이 내어쫓긴 이들은, 멕시코 군대 또는 멕시코 정부가 원주민들로 구성한 준군사조직의 폭력에 희생될 때면 인터넷 통신에서 중심사가 된다. 그러나 이들 난민의 상당수가 사파타주의를 거부한다는 사실은 인터넷의 설명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인터넷은 비정부기구를 언제나 '시민 사회'라고 표현한다. 또 실로 많은 전자적 의사소통이 어떤 지점에서는 비정부기구에 의해 걸러진다. 하지만 시민사회라는 용어는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750개 이상의 멕시코 국내 또는 국제 비정부기구들의 다양성과 차이를 담기에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25) 대개 비정부기구들은 우리의 컴퓨터 화면에 서로 차이가 없는 진보적인 외국인과 멕시코인 무리로만 나타난다. 치아파스 분쟁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다소간 협력하며 억압받는 이들을 지지하며 이 외딴 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진실을 전하는 이들로만 표현된다. 사건의 인터넷판이 치아파스에서 활동하는 국내외 비정부기구에 대해 대체로 비판적이지 않지만, 실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같은 태도를 나타내는 건 아니다. 컴퓨터 화면에서만 치아파스에 관여하는 이들이 실제로 비정부기구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멕시코로 간 이들을 비판하기를 꺼리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치아파스에서 일하는 비정부기구 활동가들이나 기타 활동가들은 그리 과묵하지 않다.

 

1998년에 내가 다양한 비정부기구 활동가들을 인터뷰한 것으로 보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서로 좋아하지도 신뢰하지도 존경하지도 않음이 나타난다. 그 결과 이들은 함께 일하지도 않는다. 멕시코 비정부기구 소속의 많은 이들은 정부의 '합리화' 과정에서 축소된 정부기구에서 일하던 이들이다. 게다가 몇몇은 비정부기구 활동을 하면서도 과거 정부에서 일할 때 가난한 이들과 어떤 관계였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그래서 다른 비정부기구 활동가들로부터 노골적으로 비난을 받는다. 깊은 철학적 차이는 물론이고 한정된 국제 기부금을 받기 위한 경쟁과 줄다리기가, 비정부기구 활동가들 내부 관계 및 다른 기구 활동가와의 관계를 악화시킨다. 예를 들어, 사무엘 주교와 그의 교구는(외부의 진보적인 이들, 특히 진보적인 가톨릭교도들 사이에서 이들의 용기는 폭넓게 존경받고 있는데) 치아파스에서 여성 문제를 위해 일하는 비정부기구 여성들로부턴 아주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많은 여성 활동가들은 사무엘 주교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용기 있는 정치적 태도의 아이러니한 유사점을 지적한다. 이 태도가 아이러니한 것은, 두 지도자의 피임과 낙태, 여성의 권리에 대한 보수적인 사회관과 대비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몇몇 비정부기구 활동가들은 사무엘 주교의 교구와 치아파스의 가장 중요한 국내 인권단체인 프라이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센트레(Fray Bartolomé de las Casas Centre)를 통해 자신들의 일을 '여과하라는' 압력을 받는 것에 분개했다. 이 인권단체는 사무엘 주교가 세우긴 했으나 비종교적 자치 기구로 운영되어 왔는데, 1994년 봉기 이후에는 다시 사무엘 주교의 교구가 장악했다. 마르코스 부사령관과 사무엘 주교의 관계는 물론이고 사파티스타와 교회의 관계도 기복이 있다. 적어도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1970년대부터 현지에서 활동하던 농민 권리 옹호 단체들이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에 열정적으로 동조하지 않는 듯하자, 마르코스는 그들을 '제3의 길 주의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오랫동안 농민 지도자로 있던 이는 나와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마르코스는 언제나 '시민사회'를 들먹이는데, 그가 우리는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는, 농민들이 요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정부 (기관들)과 관계를 맺은 걸 타협이라고 하면서 우리를 제쳐버렸다. 그는 여기 있는 사람들 머리 너머로 멕시코의 다른 지역과 해외의 시민사회에 호소한다. 마치 치아파스에서 멀리 떨어진 이들은 타협한 적이 없기라도 한 듯 말이다!"

 

간단히 말하면, 치아파스 문제, 더 넓게는 멕시코 문제를 해결할 세력이라고 많은 치아파스 연대 활동가들이 기대하는 '시민 사회'는 사파티스타 웹사이트와 이메일 리스트를 통해 유통되는 것보다 훨씬 이념적으로 다양하고 서로 충돌하는 공간임이 드러나고 있다. 활동가들의 배열과 얽힌 이해관계 전체를 가까이에서 점검하면, 급진주의, 개혁주의, 보수주의 종교 단체 및 세속 단체가 오늘날 치아파스에서 추구하는 수많은 의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놀랄 일도 아니지만.

 

토착성(Indigenismo)

원주민의 정체성을 신장하고 이들의 자치를 추구하는 것이 인터넷 통신에서는 아주 명백한 목표 같아 보인다. 하지만, 멕시코에 원주민이 650만명이나 있고(26) '원주민 문제'가 멕시코가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중심 문제였다는 점에서, 자치 사회를 구성하라는 국제 사회의 거의 일치된 요구가 연상시키는 것보다 이 문제는 훨씬 논란이 큰 것임이 밝혀지고 있다.

 

자치에 대한 국제 사회의 열광적 지지를 따져보기 전에, 이런 환경에서 멕시코 혁명(1910~1917)(역5) 과정에서 등장한 개념과 이 개념이 만들어낸 공공 정책에 대해 약간이라도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할 것이다. 최소한 우리는 멕시코 민족주의의 역사적 정체성을 원주민의 과거와 함께 인식할 필요가 있다.(27) 혁명의 여파로, 이 땅의 원주민 뿌리에 대한 이해 및 관심이 되살아나고 스페인에 맞선 봉기를 이끈 목테수마(Móctezuma)의 조카 쿠아우테목(Cuauhtémoc)이라는 인물이 재조명되고, 혁명 이후 지식 사회의 원주민 역사 찬양(새 혁명 정부가 발간한 교과서 또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다비드 시키에로스(David Siquieros),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e Clemente Orozco) 같은 멕시코 벽화가의 작업에 나타나는 찬양)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근대 멕시코 원주민들의 미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책 논란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다.(28)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논의는 원주민 사회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인디언 문제' 정책 수립에 대한 자의식이 거의 없는 메스티소 또는 백인 곧 '원주민 옹호론자들'간에 벌어졌다. 놀랄 것도 없이 진보적인 멕시코 지식인들과 정책결정자들은 언제나 이 문제를 놓고 심하게 대립했다. 문화적 생태주의자들, 인종차별 폐지주의자들, 마르크스주의 원주민 옹호론자들이(이들은 인디오와 메스티소의 관계에서 민족 문제를 계급 문제와 대등한 것으로 이해했다.) 혼합주의적 토착주의자들과 정책 형성 주도권을 놓고 대결했다. 혼합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쥐었으며, 이들은 지역 개발 사업과 학교, 의료시설, 도로 건설 사업을 통해 소외당하던 원주민들이 나라의 경제, 정치, 사회적 영역에 동참하도록 유도했다. 이와 동시에, 그들의 전망을 실현시키려면 원주민 언어 사전 발간과 수공예 촉진 같은 일을 통해 원주민 문화를 '보존'하는 게 필요했다.

 

하지만 원주민들을 멕시코라는 국가와 시장에 통합시키려는 바로 이 시도는, 제도혁명당에 의한 공작, 인디언 아닌 이들에 의한 총체적 착취, 원주민의 국가에 대한 의존 심화의 길을 열어줬다. 이런 상황에서 통합주의적 정책의 부작용이 드러나는 가운데 1970년대 치아파스 고지대에서 종교 활동을 펼친 전도사들의 주 목표는 자치능력 계발이었다. "민족적 차이를 지워버리는 대신 초월하는 데' 맞춰진 구조를 규범삼아 다양한 원주민의 다민족 지역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로스 알토스 지역 전도사들의 핵심적인 목표였다. 닐 하비(Neil Harvey)가 서술한 것처럼 "지역사회 밀착은 타고난 전통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투쟁성과 종교적 신념에 밑바탕을 둔 것이었다. 민족 정체성은 정치적 단결의 기초로 재창조됐다."(29)

 

자치라는 개념이야말로 사파티스타가 제안하고 1996년 2월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과 멕시코 정부 대표간에 체결된 산 안드레스(San Andrés) 협정에 포함된 원주민 자치를 떠받치는 것이다. 이 협정은 "자치라는 맥락에서 원주민의 자결권을 인식하고 원주민의 참여와 정치적 대표성의 신장, 사법제도에 대한 접근의 보장, 원주민의 문화 교육 경제 활동을 촉진할 것"을 제기한다.(30)

 

세디요 정권이 이 협정에 서명하고도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은 합의를 깼다. 또 산 안드레스 협정 이행 요구가 온 땅의 사파티스타 지지자들의 규합 지점이 됐다. 이는 또 멕시코 전역의 원주민들을 선동하는 주제가 됐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설명을 읽어보면, 전세계 진보진영의 의견이 모두 바로 이 모델 뒤에 굳게 버티고 있는 것 같다. 또는,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San Cristobal de las Casas) 교구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총대리인 파드레 곤살로 이루아르테(Padre Gonzalo Iruarte)가 1998년 5월 인터뷰에서 나에게 말했듯이, "원주민들의 자치 능력을 존중하지 않는 뿌리깊은 온정주의자들이나 이 합의에 담긴 원칙에 반대하는 쪽에 설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구상에 대한 비판이 있다. 멕시코의 '원주민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뿌리깊은 의견 불일치가 이 문제에 대한 각 진영의 태도를 특징 짓는다. 내가 고지대 원주민 사회에 관여하는 치아파스의 정치 활동가와 인류학자들을 인터뷰했을 때 두드러진 것이 자치에 대한 열정이 없다는 점이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자치에 대한 다른 전망 제시를 수용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워낙 강한 탓에 치아파스에 자리잡은 이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열정적으로 제시했으나,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아예 꺼려했다는 사실이다. 한사람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자치라는 개념은 가공의 것이다. 왜냐하면 지방 토호세력(31), 계급, 종교, 정치적 연합체와 불화를 일으키는 세력들, 모든 부패하고 폭력적인 사람들은 원주민 사회의 외부세력이며 지역사회가 자치력을 확보하면 이들을 따돌릴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원주민 사회 밖에 있지 않다. 이들은 이미 지역 사회 내부에 깊게 뿌리박고 있으며, 자치 정부는 힘 없는 이에 대한 권력자들의 지배, 가난한 이에 대한 부자의 지배,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를 강화하고 둘 사이의 분리를 강화할 것이다."

 

다른 이는 이렇게 말했다.

 

"웬일인지 이 제안은 국제적으로 큰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자치는 답이 아니다. 나는 '캐나다 모형'에 대해 많이 들었는데, 이런 말들은 보통 이 모형을 멕시코에 적용하면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지역사회를 외부와 단절하고 치아파스의 거대한 자연자원을 자기들끼리 착취할 것처럼 들린다! 유일한 문제는 로스 알토스의 원주민들이 석유나 가스, 목재, 수력발전을 깔고 앉아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자연 자원은 다른 지역에 있다. 고지대와 셀바의 자원은 비참할 정도로 빈약하다. 내 생각에 필요한 것은 자치가 아니라 진지한 재분배 정책이다. 자치는 가난해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비참함 속에 더 갇히는 것을 뜻할 뿐일 수도 있다. 우리가 요구해야 하는 것은 가장 가난하고 가장 손해보는 지역이 더 많은 몫을 얻는 것이다. 멕시코 정부가 산 안드레스 협약 가운데 받아들일 의지가 있는 유일한 것이 자치 제안이라는 점은 별로 놀랍지 않다. 원주민이 자신들 속에 갇혀 있다면 정부는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32)

 

또 다른 인터뷰 상대는 더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이 논의에 참여하는 북미인들은 특히 자치에 열광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은 종종 전혀 다른 현실에나 어울리는 자신들의 개념을 끌어들인다. 초칠 사람들이 카지노를 지을 것이고 잘사는 멕시코인들이 날아와 수백만 페소를 노름판에 던지고 갈 거라고 생각하는가? 이 나라가, 주류 사회가 죄책감 때문에 수십억 달러를 새로운 지역 자본 건설을 위해 지원하고 1인당 수만달러꼴로 자치 원주민 정부를 지원하는 캐나다 같다고 상상하는가?"

 

진짜 문제는 외국인이 이 문제를 논해도 되느냐도, 그렇다고 외국의 원주민 투쟁 경험이 멕시코와 관련이 있느냐도 아니다. 문제는 치아파스의 원주민이 자치로 더 살기 좋아지느냐다. 아니면 그들이 오늘날보다 더 나빠지지 않느냐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인디오라는 필수적인 개념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참여해야 하는 그런 식의 토론이 아니다.

 

여기서 이야기되는 개념은, 1998년 5월 자칭 인권 감시자라는 134명의 이탈리아인들이 '소모스 토모스 인디오스 델 문도'(somos todos indios del mundo) 곧 '우리 모두 세상의 인디언들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형광 녹색 조끼를 입고 치아파스에 왔을 때, 그들이 표현한 인디오라는 본질주의적 개념과 같은 것이다. 원주민에 대해 국제 사회가 느끼는 매력을 검토하면서 앨리슨 브리스크(Alison Brysk)는 이렇게 썼다.

 

"타자로서의 인디언이라는 이미지를 라틴아메리카의 정책입안자들과 국제 여론이 다르게 봤다. 같은 동포들에게 인디언의 모습은 위협적이고 인간 이하이거나 단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북미와 유럽인들에게 그 모습은 매혹적이고 이국적이고 낭만적이다."(33)

 

치아파스 원주민에 대해 낭만적이고 본질적인 개념을 지닌 이들은, 인디오들을 획일적인 한 무리로 봄에 따라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자치 공동체가 형성될 가능성을 고려하는 데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인들이 소수자에 대한 편협함과 소수자 배제의 오랜 역사에 익숙하더라도, 심지어 유럽의 인종 청소에 익숙하더라도, 그들이 '다시 매력을 느끼게 된' 인디오 이미지 속에는 치아파스 원주민 사회에 폭력과 편협함이 존재할 가능성을 인정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사실 치아파스의 지도상에는, 종교나 정치적 이유로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에서 쫓겨난 원주민들의 정착지가 곳곳에 흩어져있다. 주목할 것은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일부 논의가 이 문제에 대해 너무 과소 평가한 점이다. 존 글레드힐(John Gledhill)은 자신의 글에서 "체질적인 개인주의와 원주민의 공동체주의 사이의 해소되지 않는 긴장"을 걱정했다.(34) 그러나 대부분의 치아파스 연대 네트워크 구성원들에게 자치 사회의 소수자 권리 문제는 결코 쟁점이 되지 않는다.

 

인터넷을 이용한 혁명?(Revolution by Internet?)

치아파스의 투쟁과 전자적 의사소통의 관계는 두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하나는, 앞부분에서 논했듯이 치아파스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정보가 단순화하고 평면화하고 심지어 가끔씩은 인터넷을 통해 재전송되는 과정에서 왜곡돼 전달되는 문제이다. 물론 이 문제는 월드 와이드 웹에서 사람들이 사물에 대해 익히는 방식에 관한 질문과 관련된다. 정보원이 무엇인가? 다른 질문은 우리가 전자적으로 받은 정보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것이다. 인터넷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정치 활동을 하는가?' 편안한 안방을 벗어나지 않고 빗속에 서있거나 행진하지도 않으면서 우리가 운동에 '참여' 할 수 있을 때 이는 뭘 뜻하는가?

 

정보원(Sources)

다양한 네트워크를 통해 번역되고 요약되고 전달되는 것을 세심히 검토해보면, 거의 대부분이 멕시코시티에서 발행되는 좌파 일간지 <라 호르나다>(La Jornada)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라 호르나다>는 처음부터 사파티스타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으며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은 여러 측면에서 이 신문에 의지한다. 사파티스타가 인터넷에 직접 연결해 셀바에서 노트북 컴퓨터로 자신들의 소식을 전한다고 대중들이 알고 있지만, 사실은 <라 호르나다>가 그들의 소식을 중계해준다. 린 스티븐(Lynn Stephen)은 이 사실을 이렇게 썼다.

 

"실제로는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이 전자우편이나 인터넷에 직접 연결하지 않는다. 인터넷 사이트 'EZLN.ORG' 관리자 저스틴 폴슨(Justin Paulson)에 따르면 처음에 라 호르나다를 포함한 몇몇 신문에 팩시밀리로 소식이 전달되며 신문들은 이를 지면에 싣는다. 많은 인터넷 사이트들이 그 다음에 라 호르나다의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이를 받아간다.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의 성명이 인터넷에 빠르게 올라오기 때문에 마치 해방군이 직접 인터넷에 올린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내가 사파티스타 지역사회를 방문했을 때 치아파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들에게 알려준 적도 종종 있다. 심지어는 40킬로미터 밖에 안 떨어진 곳 소식조차도 말이다."(35)

 

사파티스타가 자신들의 소식을 세상에 알릴 때만 <라 호르나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치아파스에서 인터뷰한 많은 사람들에 따르면, 이 신문은 사파티스타에게 치아파스 경계 또는 멕시코 경계 밖의 사람들이 더 잘 이해하도록 메시지를 다듬는 걸 돕는 핵심 자문역을 수행한다. 게다가 라 호르나다는 사파티스타와 특별한 관계가 있어서, 어떤 이들은 이 특별한 관계가 이 신문의 보도에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1998년 4월에 만난 치아파스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농담조로 <라 호르나다>를 '치아파스 가제트(관보)' 또는 '오코싱고 타임스'라고 부른다. 이 신문이 어떤 지역 소식보다 치아파스와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에 대한 소식을 많이 싣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수도 멕시코시티 소식보다 많을 지경이다. 물론 여기 살면서 두개의 '지역 신문'을 본다는 점에서 편리하다. 그런데 나는 <라 호르나다>의 기사 가운데 상당 부분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들이 기사를 조작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이 아주 편파적으로 보도한다는 거다. 사파티스타 동조자 2명이 협곡에서 주검으로 발견되면 이 사실은 언제나 신문에 난다. 하지만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 지지자가 아닌 농민 두명이 주검으로 발견됐다고 치면, 이 신문은 가끔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는다."

 

편집 방향에서 볼 때 이 신문은 몇몇 요소에서 좌파에 가깝고 다른 부분에서는 좌파에 비판적이다. 이 신문이 좌파보다 사파티스타를 더 선호하기 때문에 종종 좌파의 대안적 전망을 도외시하는 일이 생긴다. 예를 들면, 라 호르나다의 의견난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이들은, 자신들의 글이 선거와 관련해 사파티스타보다는 민주혁명당에 더 공감하는 내용일 경우 신문에 실리지 않는 일을 당해 당황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은 구체적으로, 선거는 사기이며 반동적인 이해에 이롭기 때문에 우선 순위를 두지 말아야 한다는 사파티스타의 주장보다 치아파스 지역에서 선거 참여를 촉구하는 민주혁명당의 주장에 더 공감하는 경우이다.

 

1994년 선거 참관인으로 참여했던 나는, 치아파스 선거에서 문제는 선거 부정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마지막 사람일 것이다.(36) 치아파스의 지배계층이 역사적으로 선거를 자신들의 정당성 없는 정치권력 장악을 강화하는 데 이용해왔기에,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이 1994년 선거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지지자들의 선거 참여를 독려하지 않은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선거 참여냐 의회 밖 활동이냐의 문제가 좌파의 아주 오래된 논쟁거리이기는 하지만, 이 문제를 논하는 것 자체는 여전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1996년 사파티스타는 선거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고, 그 때 민주혁명당은 분쟁지역 주민들이 선거에 참여한다면 툭스틀라 구티에레스 지역 의회를 장악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1998년 5월 나는 민주혁명당 치아파스 지부 지도자인 힐베르토 고메스 마사(Gilberto Gómez Maza)를 인터뷰했는데,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민주혁명당은 주 전체 지자체 111곳 모두에서 조직을 갖추고 있다. 우리가 얻은 의석에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이 장악한 지역의 사람들이 투표했다면 얻었을 의석을 합쳐 계산하면 야당인 국민행동당(PAN) 의원과 공동으로 의회 다수를 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농촌지역 학교 선생님들의 아들인 고메스 마사는 국립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치아파스 고지대 원주민들을 위해 일하는 몇십년만의 첫번째이자 유일한 소아과 의사가 됐다. 로스 알토스에서 가난과 무시를 목격하고는 정치활동에 뛰어들어 멕시코노동자당과 에베르토 카스티요(Heberto Castillo)의 추종자가 됐고 이어 카스티요가 1988년 대통령선거에서 쿠아우테목 카르데나스(Cuauhtémoc Cárdenas)를 지지하기로 하자 민주혁명당에 들어갔다. 그는 "우리가 싸우는 것은 권력 관계를 바꾸기 위해서"라며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의 반 선거적 태도만 아니었다면 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한참 진전할 수 있었을 거다"라고 주장했다.

 

고메스 마사와 대화하면서 나는 치아파스의 미래를 걱정하는 외국 활동가들은 적어도 이런 주장을 검토하고 논쟁을 벌이고 싶어할 거라고 느꼈다. 그러나 외국의 치아파스 연대 모임들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 적당한지를 대부분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충실히 논의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선거참여를 지지하는 이들은 보통 자신들의 주장을 지면을 통해 드러내지 않으며(37) 그렇게 하더라도 세상에 이 소식을 전하는 <라 호르나다>가 싣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라 호르나다>의 편파성은, 만약 멕시코 외부의 치아파스 연대 모임들이 비교 분석할 다른 정보원을 갖고 있다면 문제가 안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네트워크를 통해 오고 가는 번역물이나 요약물을 세심히 살펴보면, 전자적으로 전달되는 대부분이 <라 호르나다>에서 나온 것들이다. 확실히 이것은 <라 호르나다>의 한계는 아니다. 이 신문은 민주혁명당과 노조, 다른 좌파의 투쟁을 폭넓게 보도한다. 문제는 인터넷을 통해 유통하기 위해 선택되는 정보의 한계다.

 

놀라운 것은, '부르주아 언론'의 보도를 의심하고 다른 좌파가 만들어내는 분파적 전망에 대해서는 적당한 조정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보는 것은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이 정보도 특정한 정치적 전망의 렌즈로 거르기는 마찬가지인 데 말이다. 1996년부터 97년까지 캐나다에서 치아파스 연대 활동가 10여명을 인터뷰하면서, 나는 인터넷 사이트 관리자가 누구인지 (이름을 빼고), 그들의 정치관이 뭔지, 또 왜 사람들이 몇몇의 소수가 관리, 감독하는 몇개의 사이트에 의존하면서 불편을 느끼지 않는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처럼, 나는 텍사스대학의 해리 클리버(Harry Cleaver) 같은 사람들을 존경하며 그에게 감사한다. 그들은 첫 봉기가 일어난 때부터 지금까지 치아파스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해주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우리가 접하는 치아파스와 멕시코의 시민사회 전반에 대한 글은 해리 클리버 또는 우리가 그들의 정치적 전망을 전혀 모르는 다른 몇몇 사람들이 고르고 전달한 것이라는 인식이 너무 약하다는 점이다. 그들의 정치적 전망 가운데 우리가 아는 것은 인터넷의 힘과 인터넷이 '사이버공간의 시민사회'를(38) 건설할 잠재력에 대한 열정적인 신념뿐이다.

 

불공평한 접근 문제(The problem of unequal access)

이는 우리가 진보적인 세계의 견해에 공평하게 접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만들어 낸다. 권력과 의사소통에 대한 전통의 지혜는 통신수단에 대한 접근권이 매우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이 보통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진보적인 주장이 부자와 권력이 조정하는 보수, 주류 언론에 등장하지 않는 맥락에서다. 이런 문제를 논할 때 인터넷은 동등한 구조를 갖고 있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부자와 권력자들과 대응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길을 여는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기회로 평가된다. 인터넷이라는 수단을 통해 다른 진보적인 활동가들과 연결 통로를 만들고 가상공간 속에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게 된다고들 한다. 클리버 등등은, 인터넷이 정부의 검열을 피해갈 가능성을 열고, 전자적 장벽을 잘라내고 정보를 기업과 정부의 지배에서 해방한다고 주장한다.(39)

 

이것이 전자 통신의 성과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멕시코 내 진보 단체들이 여론에 접근할 전자적 수단 확보에서 공평한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주장도 있다. 사파티스타가 언론에 능숙한 의사소통 천재라는 당연한 평가를 받고 있지만 다른 좌파 운동이나, 푸에블라(Puebla)와 게레로(Guerrero)와 오악사카(Oaxaca)에서 활동하는 인민해방군(EPR)(역6) 같은 다른 무장혁명세력은 자신들의 웹 관리자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마르코스 같은 돋보이는 대변인이 없어서만이 아니다. 그 결과 그들의 전망은 우리 앞에 컴퓨터 화면을 통해 등장하지 못하며 그들의 활동은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

 

좌파에서 가장 중요한 당인 민주혁명당에 대해 멕시코의 언론 전문가 한명은 "멕시코의 전통 좌파는 기술을 혐오하며, 전자적 통신수단을 어떻게 활용할지 아이디어도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이유가 뭐든지, 민주혁명당은 인터넷을 활용하는 데 아주 느리며, 그 결과로 이 당이 전자적 자료에 등장하면 그것은 주로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에서 나오는 자료에 뭔가 부족한 당이라는 맥락으로 등장할 때다. 인터넷에 이렇게 편파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전세계의 동조자들 가운데 두 쪽의 성명에 바탕해서 각각의 상대적 장점, 다양한 전략과 전술의 적합성을 따질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대리 참여(Vicarious Participation)

전자적 통신 수단을 정치적으로 활용해 동료 활동가들과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에 대한 흥분과 만족의 강도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변치 않고 있다. 글을 올리고 그에 답하는 글을 올리고, 탄원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고 항의성명에 동의하고 (시위 등의) 대중적 집결 경험을 나누는 것 모두가 전세계 진보세력에게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을 만들어 줬다. 특히 사파티스타 지지자들 사이에서 더 그렇다. 실로 전자 통신수단이 조성한 정치적 업적에 대한 인식은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 연대 활동가들 사이에서 가장 민감하다.

 

하지만 이 연결됐다는 느낌의 상당 부분은 허황된 것인데, 연대행동 차원에서 이뤄지는 전자적 의사소통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정치 참여가 단추를 눌러 이름을 목록에 올리는 것으로 이뤄진다면 이런 행동이 꼭 사람들을 단결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탄원 지지자는 다른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게 되고, 아마도 신문광고료를 기부할 수도 있다. 서명을 거부하는 것조차 탄원집회 옆을 지나가는 사람과 잠깐이라도 논란을 벌일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제는 정치적 견해를 거부하는 것조차 삭제 단추를 누르는 것만으로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극도로 낮은 개입도 상당한 정치적 효과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렇게 손쉬운 방법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권력자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한자리에 수천, 수백, 수십명의 활동가가 모여 같은 주장을 펴는 것과 비교해 약하기는 하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인터넷을 쓰는 우리는 토론 모임에 들어가고 대화방에 들어가 '동지'를 만날 수 있다. 과거에 우리가 정치적 모임에서 일할 때는 꼭 했던 서로의 차이 확인도 필요 없이 말이다. 더 이상 서로 꼭 만나야하는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주장을 설득할 필요도 없다. 토론 주제에 싫증이 나면 그냥 접속을 끊고 나오면 된다.(40) 이런 정치 참여로 발생하는 익명성, 모임에서 즉각 빠져 나올 수 있는 가능성, 연대를 표시할 때 노력이 거의 필요없다는 점은 인터넷 활동의 매력인 동시에 한계다. 전자적 전투성은, 집을 나서기 위해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된 컴퓨터 의자에서 일어나는 노력조차 없이 운동에 참여하고, 우리가 기억하는 세상의 탄압받는 사람들과 통신할 수 있는 수단을 준다! 치아파스 주변의 연대활동조직에서 널리 존경받는 린 스티븐은 전자적 통신의 또 다른 한계를 지적하면서 이것이 실로 "풀뿌리 활동의 걸림돌"이 아니냐고 묻는다.

 

"매일 수천명의 미국인들이 치아파스에서 최신 소식을 받고 다른 이들과 대화방에서 만나면서 뭔가 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들은 상황파악을 하고 있다. 그러나 통신에서 이끌어낸 것 같은 행동은 중요한 정치적 압력을 형성하는 전술과는 거리가 멀다. 통신에 연결됐다는 느낌은 높은 수준의 지속적인 정치적 압력 같은 것이 생기게 하지 못하는 일이 잦다. 이런 지속적인 압력은 미국 의회에 장기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인데 말이다... 교회 지하실에 모여 지역 의원을 찾아가 전달할 자료를 만드는 것은, 상원의원에게 치아파스의 군국화에 미국이 참여하는 것과 관련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전자우편 첨부파일을 보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41)

 

스티븐은 인터넷을 통해 협력하는 활동 가운데 어떤 종류는 실제로 "풀뿌리 조직활동을 제한"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인터넷에서 시민 불복종 운동을 벌이고 팩시밀리를 보내고 전자우편으로 사파티스타 투표에 참여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얼굴을 마주 대하고 풀뿌리 조직화를 하는 것의 대체물은 아니다. 치아파스에 강력한 기반을 갖추고 있는 멕시코 내 모든 단체가 참여하는 광범한 전국적 집회를 개최하는 데 4년 이상이 걸렸다는 것은, 인터넷의 정보 과잉이 전국적 네트워크 형성의 시급함을 약화시켰음을 내비친다.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이것은 장기적인 계획 수립으로 이어지지 않는다."(42)

 

전자적 정치운동의 가장 열성적인 제안자인 해리 클레버조차 인터넷에 의지하는 것의 한계 몇가지를 인정한다.

"(인터넷의 힘)의 한계는 인터넷 범위의 한계 (모든 사람이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지 않음을 우리가 주지하듯이), 연결 방식 이 두가지에 있다. 인터넷에는 많은 종류의 투쟁에 대한 정보가 널려 있는데, 이 각각의 투쟁은 사파티스타와는 물론이고 서로간에도 연결되지 않은 상태다.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연결 수단이 있다는 것은, 실제로 연결될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보와 연결수단이 보완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데 효과를 발휘한다는 보장도 없다. 인터넷에 널려 있는 사회투쟁에 대한 모든 정보원에 접근할 수 있는 정치 활동가조차도 주기적으로 그 정보의 양에 압도당한다. 인터넷이 확대되면서 또 인터넷을 투쟁에 이용하려는 집단이 늘어나면서, 이 문제는 빠르게 늘어날 것이다..."(43)

 

결론(Conclusions)

치아파스 연대 활동가들이 지속적으로 정보를 얻고 자신들의 정치적 행동의 안내를 받기 위해 인터넷에 의존하게 된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점검했다. 이 새로운 기술은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용감하지만 아주 취약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국제적 노력을 상당히 쉽게 만들어 준다. 인터넷 행동주의는, 벌어지는 사건에 영향력을 강화하도록 사람들을 연결하기보다는 거의 존재하지도 않는 연결됐다는 느낌과 정치적 효과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낸다. 인터넷을 통해 전달되고 다시 중계되는 사건의 모습은, 연대 활동가들한테 정보의 양에 압도당한다는 느낌을 남긴다. 이와 동시에 그 정보는 종종 너무나 편파적이어서 잘못해석하게 한다. 치아파스에 대해 돌아다니는 너무나 단순화한 사건의 모습은 억압받는 사람쪽에 비중을 더 두는 결정을 상대적으로 쉽게 하게 만든다. 그러나 거기서 어떻게 진전할 것인지, 또는 무엇을 할 것인지의 문제는 아주 어렵다.

 

전세계 상당한 숫자의 사람은 치아파스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여할 준비가 되어 있다. 문제는 그들이 치아파스의 복잡함을 이해하고 치아파스가 멕시코에 속해 있는 방식을 이해하고 또 멕시코가 국제 질서 속에 자리잡고 있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더 시간을 투여할 것이냐 여부다. '신자유주의의 돌진'과 '신자유주의에 대항한 대중적 투쟁'을 전세계 운동 세력들을 묶는 조직화의 개념으로 활용하려는 의지는 아주 강하다. 그러나 이런 환원주의적 접근은 과거의 환원주의적 모형들이 그랬던 것과 똑같은 좌절과 실패를 불러오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치아파스에서 펼쳐지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약탈'로 축소될 수 없으며, '원주민 정체성 문제'로 축소될 수는 더욱 없다. 우리는 이렇게 주장하는 접근법을 조심해야 한다.

 

인권을 존중하라는 아주 근본적인 호소는 상황의 특수성을 깊이 이해하지 않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원대한 기획이라면 진지한 분석이 필요하다. 치아파스에 대한 특정 이념 몇가지만을 계속 전달하고 반복함으로써 생기는 인식 및 준비 부족은 그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라는 점은, 1998년 5월에 134명의 이탈리아 연대 활동가 가운데 108명이 추방당한 이후 발생한 반발에서 잘 나타난다. 이탈리아인들의 "우리는 모두 원주민이다"는 식의 접근법의 모순은 포위된 사파티스타 여성들에 대한 우려와 지지를 표현하기 위해 그들이 타니페를라스(Taniperlas)에서 행진했을 때 금방 명백해졌다. 이탈리아인들이 나타나자 인디오들이 그들을 공격하고 난폭하게 밀어붙인 것이다. 그들은 원주민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는 인디오들이었는데, 제도혁명당 지지자들이며 "우리는 모두 원주민이다"는 말이 제시하는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에서 한참 먼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인디오인 것도 분명하다.(44)

 

혁명 이후의 멕시코 민족주의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이탈리아인들은 덫에 걸렸다. 결국 이 사건은 외세의 침략을 잘 아는 나라에 대한 '외세의 침략'으로 그려졌으며, 세디요 정권이 민족주의적 방식을 써먹고 외국인 혐오를 강화할 수 있게 했다. 이 정권은 치아파스 주민들에 대한 국제적 우려와 관심에 오직 이런 식으로만 대응했다.(45) 이 불행한 결과는 멕시코와 치아파스에 대한 아주 편파적이고 표피적인 이해에 바탕한 연대활동 곧 가상공간의 치아파스만 아는 연대활동이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단언컨대, 사건에 대한 심하게 단순화하고 평면적인 설명을 유포하는 것은 방어할 수단이 없는 이들을 향한 전쟁 와중에 차이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어떤 이들은 주장할 것이다. 인터넷에서 차이에 대한 공개 토론이 벌어지면 멕시코 정부가 외국 진보세력의 압력을 물리치는 데 이를 악용할 것이라고 우려할 만한 측면은 있다. 과거 세대의 좌파 가운데 많은 이들이 소련 또는 중국 밖으로 차이를 노출시키면 악용될 수 있다고 걱정한 것과 똑같이 말이다. 연대활동가들이 좌파 세력간 또는 원주민사회 내부 또는 치아파스의 비정부기구간 분열과 분쟁을 거론하지 않으면, 멕시코 정부가 이를 모를 것이고 분노와 분열을 악용해 상황을 장악하고 운동을 해체하려 하지는 않을 거라고 정말 믿는 한 좌파의 오랜 문제점은 더 심해지기만 할 것이다.

 

이 주장을 평가할 때 우리는 세디요 정부의 대중 동원 및 반란 진압 전술의 핵심 고안자가 아돌포 오리베 베를링게르(Adolfo Orive Berlinguer)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1970년대에 오리베는 고지대에서 대중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고 전도사들의 의식화 활동과 마오주의자들의 조직화 노력을 조율하는 데 있어서 개인으로서는 아마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파리에서 샤를 베틀랭(Charles Bettleheim)과 함께 공부한 오리베는 멕시코로 돌아와 대중정치 성향의 지도자가 됐고, 이어 마오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전선의 지도자가 됐다. 이 운동에는 마르코스도 참여했다. 오리베는 사무엘 주교의 직접적인 요청에 따라 치아파스에 와서는 농민 중심의 운동을 조직했는데, 이 운동은 마오주의자, 급진적인 교사, 해방신학자, 노동운동가가 뭉친 것이었다.(46)

 

1980년대말에 오리베는 카를로스 살리나스를 위해 일했는데, 분쟁지역의 물리적 지형과 정치적 지형을 상세히 아는 점 때문이었다. 또 1994년에는 세디요가 치아파스의 민중봉기 대응을 이끄는 데 그를 기용했다. 오리베가 역사적인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간에 모든 분열을 알고 있기에, 치아파스의 수많은 활동가들의 전망 차이를 우리끼리 솔직하고 공개적으로 논하지 않으면 이런 불일치가 정권에게는 비밀로 유지될 거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국제 연대는 목숨을 걸고 정의를 요구하는 수천명의 생존에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지원은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외부인이 할 때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치아파스를 수사로 여기는 이들이나 심한 단순화로 실제 상황을 아주 어렴풋이 닮았을 뿐인 가상의 사건과 인물에 그냥 만족하는 이들이 지원에 나설 때 효과적인 것이 아니다. 치아파스에 대한 국제적 우려 표명은 의문의 여지없이 사파티스타와 그 지지자들에 대한 공격을 억제하고 제한하는 일을 했으며 물론 많은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효과적인 인권 운동에는 무엇보다 옳고 믿을 만한 정보가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매력 회복'을 덜 생각하고 대신 남부 멕시코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을 더 생각하려 할 것이다. 비록 그 껄끄러운 현실의 일부는 매혹적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위기에 빠진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데 외국인이 할 수 있는 중요한 구실을 위태롭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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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고메스 타글레(Silvia Gómez Tagle), 스티브 헬먼(Steve Hellman), 피터 아이브스(Peter Ives), 콜린 레이스(Colin Leys), 리오 파니치(Leo Panitch), 스콧 로빈슨(Scott Robinson), 에미코 살디바르(Emiko Saldivar), 시드 태로(Sid Tarrow), 찰스 틸리(Charles Tilly)의 조언에 감사한다. 더글러스 찰머스(Douglas Chalmers), 루인 골드링(Luin Goldring), 론 헬먼(Ron Hellman), 켄 사프(Ken Sharpe)에게는 이 생각을 세미나에서 펼칠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한다. 또 스티브 헬먼과 피터 아이브스의 지속적인 격려와 자료 제공에 감사한다. 이 연구에 재정적인 지원을 해준 캐나다 사회과학 및 인문학 연구 협의회에도 감사한다.

 

주석

1... See Lynn Stephen, "In the Wake of the Zapatistas: U.S. Solidarity Work Focused on Militarization, Human Rights, and Democratization in Chiapas," Paper presented at a Conference titled, "Lessons from Mexico-U.S. Bi-National Civil Society Coalitions," 9-11 July 1998, University of California, Santa Cruz.

린 스티븐, "사파티스타를 쫓아: 치아파스의 군사화, 인권, 민주화에 집중한 미국의 연대 활동", "멕시코와 미국 두나라간 시민사회 연합의 교훈" 회의에 제출된 논문 1998년 7월 9-11일, 캘리포니아대학, 샌타 크루즈.

 

2... Il Manifesto, 28 March 1998 . The debates appeared in this issue and in Il Manifesto, 10 February 1998, and 1 March 1998.

일 마니페스토, 1998년 3월28일. 논쟁은 이 지면과 1998년 2월10일치, 1998년 3월1일치에 실렸다.

 

3... Michael Lowy, "Sources and Resources of Zapatism," Monthly Review,, Vol.49, No.10, March 1998, p. 1-2.

마이클 로위, "사파타주의의 원전과 자료", 먼슬리 리뷰, 1998년 3월 49권 10호, 1-2쪽.

 

4... Throughout this article, I am using the term "internet" to refer to the most commonly-accessible sites that people interested in Chiapas would be most likely to find while surfing the world wide web. For example, using "Chiapas" as a keyword on various search engines provided in the most common web browsers (e.g. Excite, Infoseek, Lycos, or Yahoo), I found that a semi-systematic survey of the materials available tends to produce the same sites - and links - over and over. Therefore, the material to which I refer throughout this analysis, would be found on the following sites, or by following the links provided in them.

이 글에서는 "인터넷"을 치아파스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월드 와이드 웹을 돌아다니는 동안 가장 찾을 가능성이 높은 사이트들을 지칭하는 데 쓸 것이다. 예를 들어, 흔한 검색 사이트에서 (익사이트, 인포시크, 라이코스, 야후 등) "치아파스"라는 검색어를 넣고 찾으니, 똑같은 사이트나 링크를 보여줬다. 그래서 내가 이 분석에서 근거로 삼은 자료들은 다음의 사이트에 나타나거나 이들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링크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Accion Zapatista (http://www.eco.utexas.edu/faculty/Cleaver/zapsincyber.html#Accion Zapatista) AMDH Bulletin (http://www.lanic.utexas.edu/la/region/news/arc/amdh/1995/0000.html) Chiapas 95 (http://www.eco.utexas.edu/faculty/Cleaver/chiapas95.html) Chiapas 1997 (http://mac.theramp.net/Domcentral/justice/chiapas.htm) Chiapas Index (http://www.ifconews.org/chorgndx.html) Chiapas Menu (http://www.indians.org/chiapas/) FZLN (http://www.eco.utexas.edu/faculty/Cleaver/zapsincyber.html#Frente) Mexico Solidarity Network (http://www.mexicosolidarity.org/index.html) SIPAZ Servicio Internacional para la Paz(International Service for Peace) (http://www.nonviolence.org/sipaz/sipazf.htm) IYA BASTA! (http://www.ezln.org/) Zapatistas in Cybertspace (http://www.eco.utexas.edu/faculty/Cleaver/zapsincyber.html)

 

5... Thomas Benjamin, A Rich Land, A Poor People: Politics and Society in Modern Chiapas, (Albuquerque: University of New Mexico Press, 1996); and George A. Collier with Elizabeth Lowery Quarantiello, Basta! Land and the Zapatista Rebellion in Chiapas, (Oakland, CA: Food First, 1994), pp. 16-7; Neil Harvey, Rebellion in Chiapas: Rural Reforms, Campesino Radicalism and the Limits to Salinismo, (La Jolla, CA: Center for U.S.-Mexican Studies, UCSD, 1994); and Adolfo Gilly, Chiapas: la razón ardiente, (México, D.F.: Ediciones ERA, 1997).

토머스 벤저민, 부유한 땅, 가난한 사람들: 근대 치아파스의 정치학과 사회, (알부케르케, 뉴멕시코대학 출판부, 1996); 조지 A. 콜리어 및 엘리자베스 로웨리 콰란티에요, 바스타! 치아파스의 땅과 사파티스타 반역, (오클랜드, CA: 푸드 퍼스트, 1994), 16-17쪽; 닐 하비, 치아파스의 반역: 농촌 개혁, 농민 급진주의와 살리나스주의의 한계, (라 호야, CA: 미국-멕시코 연구센터, UCSD, 1994); 아돌포 히이, 치아파스: 열정적 이성, (멕시코, D.F.: ERA판, 1997).

 

6... Harvey, pp.10-14; John Womack Jr. Rebellion in Chiapas: An Historical Reader, (New York: The New Press, 1999), pp. 20-9; John M. Whitmeyer and Rosemary L Hopcroft, "Community, Capitalism and Rebellion in Chiapas, Sociological Perspectives, Vol 39, No. 4, pp. 517-38, p. 528-33); and Richard Stahler-Sholk, Neoliberalism and Democratic Transition: Looking for Autonomy in the Jungles of Chiapas, paper presented at the Annual Meetings of the Midwest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 Chicago, 23-25 April 1998, p. 1.

하비, 10-14쪽; 존 워맥 주니어, 치아파스의 반역: 역사적 독자, (뉴욕: 뉴프레스, 1999), 20-29쪽; 존 위트메이어 및 로즈머리 L. 호프크로프트, "치아파스의 공동체, 자본주의, 반역, 사회학적 전망, 39권 4호, 517-538쪽, 528-533쪽); 리차드 스톨러숄크, 신자유주의와 민주적 이행: 치아파스 정글에서 자치권을 찾아서, 중서부 정치과학학회 연례회의에 제출된 논문, 시카고, 1998년 4월23-25일 1쪽.

 

7... Womack, pp. 29-43; Carlos Fazio, Samuel Ruíz: El Caminante, (México, D.F.: Espasa Calpe Mexicana, 1994), pp. 101-113. Xochitl Leyva Solano, "The New Zapatista Movement: Political Levels, Actors and Political Discourse in Contemporary Mexico," in Valentina Napolitano and Xochitl Leyva Solano, eds, Encuentros Antropológicos: Power, Identity and Mobility in Mexican Society, (London: Institute of Latin American Studies, 1998), pp.41-2.

워맥, 29-43쪽; 카르롤스 파시오, 사무엘 루이스: 나그네, (멕시코, D.F.: 에스파사 칼페 메히카나, 1994), 101-113쪽. 쇼치틀 레이바 솔라노, "새로운 사파티스타 운동: 현재 멕시코의 정치적 수준, 활동가들, 정치 논의", 발렌티나 나폴리타노 및 쇼치틀 레이바 솔라노 편 인류학적 접촉: 멕시코 사회의 권력, 정체성, 유동성 중에서, (런던: 라틴아메리카 연구소, 1998), 41-42쪽.

 

8... Collier, p. 62-3; Womack, pp 39.

콜리어, 62-63쪽; 워맥, 39쪽.

 

9... Collier (p. 63) juxtaposes the demands presented in Chol, Tojobal, Tzeltal and Tzotzil to the 1974 Congress with the EZLN's Thirty-Four Point Agenda for negotiation proposed in 1994 and shows that they are almost identical. Ibid., pp. 64-5.

콜리어는 (63쪽) 1974년 촐, 토홀라발, 첼탈, 촐칠에서 의회에 제기한 요구를 1994년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이 협상을 위해 제시한 34항의 의제와 대비시켜 둘이 거의 똑같음을 보여준다. 같은 책, 64-65쪽.

 

10... Neil Harvey, The Chiapas Rebellion: The Struggle for Land and Democracy,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1998), pp. 86-88.

닐 하비, 치아파스의 반역: 땅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더햄, NC: 듀크대학 출판부, 1998), 86-88쪽.

 

11... La Botz, pp. 26-38 provides an especially clear and useful summary of this extraordinary period of organizational activity. A particularly useful aspect is his explanation for the great enthusiasm for maoism among radical Mexican leftists.

라 보츠, 26-38쪽은 조직적 활동의 이 특별한 시기를 아주 선명하고 유용하게 요약해 제시한다. 특히 유용한 측면은 급진적인 멕시코 좌파 사이의 마오주의 열광에 대한 설명이다.

 

12... See the debate around the "postmodern" nature of the movement, especially Roger Burbach, "Roots of the Postmodern Rebellion in Chiapas," New Left Review, 205, , 1994, pp. 113-24; and Daniel Nugent's critique of Burbach, "Northern Intellectuals and the EZLN," Monthly Review, Vol. 47, No. 3, July-August 1995, pp. 124-38. Also see Sergio Zermeño, "State Society, and Dependent Neoliberalism in Mexico: the Case of the Chiapas Uprising," in William C. Smith and Patricio Korzeniewicz, eds., Politics, Social Change and Economic Restructuring in Latin America, (Miami: University of Miami, North-South Center Press, 1997) pp. 123-49; Whitmeyer and Hopcroft, Lowy, and Susan Street, " La palabra verdadera del zapatismo chiapaneco," Chiapas, Vol 2, 1996, pp. 75-94.

운동의 "포스트모던"적 본성을 둘러싼 논의를 보라. 특히 로저 버바크, "치아파스의 포스트모던적 반역의 뿌리", <뉴레프트 리뷰>, 205호, 1994, 113-124쪽; 다니엘 누전트의 버바크 비판, "북반구의 지식인들과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 <먼슬리 리뷰>, 47권 3호, 1995년 7-8월, 124-138쪽. 세르히오 세르메뇨, "국가 사회, 멕시코의 의존적인 신자유주의: 치아파스 봉기 사례", 윌리엄 스미스 및 패트리시오 코르제니위츠 편, 라틴아메리카의 정치학, 사회 변화, 경제 재편 중에서, (마이애미: 마이애미대학, 남북센터출판부, 1997) 123-149쪽; 위트메이어 및 호프크로프트 및 로위 및 수산 스트리트, "치아파스 사파티스타의 진짜 발언", 치아파스, 제 2권, 1996, 75-94쪽도 보라.

 

13... Lynn Stephen, "Mexico's New Zapatismo: A Culturally and Historically Embedded Critique of Neoliberalism," Paper presented at the Annual Meetings of the American Anthropological Association, Philadelphia, 2-6 December 1998, p. 3.

린 스티븐, "멕시코의 새 사파타주의: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뿌리깊이 박힌 신자유주의 비판", 미국 인류학회 연례회의에 제출된 논문, 필라델피아, 1998년 12월 2-6일, 3쪽.

 

14... See EZLN, Crónicas intergalácticas: Primer encuentro intercontinental por la humanidad y contra el neoliberalismo, (Chiapas: Planeta Tierra, 1996).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 은하계사이의 연대기: 인류애와 반 신자유주의에 의한 첫번째 대륙간 접촉, (치아파스: 플라네타 티에라, 1996)을 보라.

 

15... See Harry Cleaver, "The Zapatistas and the Electronic Fabric of Struggle," in John Holloway, ed., The Chiapas Uprising and the Future of Revolution in the Twenty-First Century, html version from Chiapas95 webpage, 1996; María Elena Martínez Torres, "The Internet: post-modern struggle by the dispossessed of modernity," Paper prepared for the 1997 Annual Meeting of the Latin American Studies Association, Guadalajara, 17-19 April 1997; and Manuel Castells's section titled "Mexico's Zapatistas: the First Informational Guerrilla Movement" in his book, The Power of Identity, (Oxford: Blackwell, 1997), pp. 80-1.

해리 클레버, "사파티스타와 투쟁의 전자적 구조", 존 홀로웨이 편, 치아파스 봉기와 21세기 혁명의 미래, 치아파스95 웹페이지의 인터넷판 중에서, 1996; 마리아 엘레나 마르티네스 토레스, "인터넷: 근대성을 빼앗긴 이들의 포스트모던 투쟁", 라틴아메리카학회 1997년 연례 회의를 위해 준비된 논문, 과달라하라, 1997년 4월17-19일; 마누엘 카스텔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첫번째 정보 게릴라 운동"이란 제목의 장, 그의 책 정체성의 힘 중에서, (옥스포드: 블랙웰, 1997), 80-81쪽.

 

16... Under the provisions of the agrarian law in place until 1993, this land would have been distributed to landless petitioners in the form of "ejido parcels" that they would be free to cultivate and pass along to one of their offspring, but that would not be available to rent, sell or mortgage.

1993년 이후 시행된 농지개혁법 조항에 따라, 이 땅은 땅 없는 청원자에게 '집단 농지' 형태로 분배되었어야 했다. 받은 이들은 경작을 하거나 자식에게 줄 수는 있는데 남에게 빌려주거나 팔거나 저당잡힐 수는 없다.

 

17... Until the reform of Article 27 of the Constitution in 1993, a landholding was only afectable or available for expropriation and distribution to petitioning peasants when it exceeded a maximum size established in accordance with the type of agricultural production pursued on that parcel.

1993년 헌법 27조항의 개정이 이뤄지기까지는 경작물 종류에 따른 기준치를 넘을 경우만 땅을 수용해서 탄원하는 농민에게 분배해줄 수 있었다.

 

18... That is, illegally large landholdings created out of the concentration of holdings that fall within the legal maximum. Typically, a neolatifundio is comprised of a number of holdings that have been put into various family members' names, although in the commercial export agricultural zones of Mexico it has also been common for individuals to pay trusted prestenombres, or namelenders, to act as the owner of record for a "neighboring farm" that is, in fact worked as part of a single large estate. Salinas's alteration of Article 27 of the Constitution made this kind of subterfuge unnecessary, to the great delight and relief of large landowners everywhere in Mexico. See Judith Adler Hellman, Mexican Lives, (New York: The New Press, 1994), pp .139-41.

그러니까, 불법적으로 대규모 땅을 소유한 경우는 법정 최대치의 땅을 여러 군데에서 확보한 경우다. 신 대토지 소유자는 전형적으로 여러 곳의 땅을 가족 이름으로 분산하는 방식으로 넓은 땅을 확보한다. 물론 수출용 경작 지대에서도 실제로는 일정한 대가를 치르고 '이웃 농장'의 주인들을 서류상 땅 주인으로 해놓는 방식으로 법을 피해 넓은 땅을 확보하는 것이 흔하다. 살리나스의 헌법 27조 수정은 이런 식의 장치조차 필요없게 해줬다. 대규모 땅 소유자들로서는 신나는 조처인 것이다. 주디스 애들러 헬먼, 멕시코인의 삶, (뉴욕: 뉴프레스, 1994), 139-141쪽을 보라.

 

19... Collier, p. 48-50.

콜리어, 48-50쪽.

 

20... The minimum size of an ejido parcel differs from place to place in Mexico according to the quality, fertility and access to water of the land that is distributed. On the sub-division of land parcels into ever smaller holdings under pressure of population growth, see María del Carmen García A. and Daniel Villafuerte Solís, "Economía y sociedad en Chiapas," in María Tarrío and Luciano Concheiro, eds., La sociedad frente al mercado, (México, D.F.: Ediciones La Jornada, 1998), p. 352.

할당되는 집단 농지의 최소치는 지역에 따라 다른데, 분배된 땅의 질, 비옥도, 물 공급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 인구가 늘면서 땅을 더 쪼개 나눠줄 수밖에 없던 것에 대해서는, 마리아 델 카르멘 가르시아 A. 및 다니엘 비야푸에르테 솔리스, "치아파스의 경제와 사회", 마리아 타리오 및 루치아노 콘체이로 공동편, 시장에 직면한 사회 중에서, (멕시코, D.F.: 라 호르나다 출판부, 1998), 352쪽을 보라.

 

21... Collier writes, "Before 1974, the Catholic Church had already begun extensive grass roots evangelizing in eastern Chiapas, in part to ward off the advance of Protestantism." p. 62. Also see Womack, pp.36-43 on this Catholic response to the spread of Protestant conversions.

콜리어는 이렇게 썼다. "1974년 이전에 가톨릭교회가 이미 동부 치아파스를 복음화하기 위한 강력한 풀뿌리 운동을 시작했다. 이는 부분적으론 개신교의 진출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개신교로 개종이 확산되는 것에 대한 가톨릭의 대응에 대해서는 워맥, 36-43쪽을 보라.

 

22... INEGI, Censos Generales de Población y Vivienda, 1990, cited in García A. and Villafuerte Solís, p 364.

국립 통계, 지리, 정보학 연구소, 인구와 주거에 대한 총조사(센서스), 1990, 가르시아 A. 및 비야푸에르테 솔리스, 364쪽에서 재인용.

 

23... Ibid., p. 365.

같은 책, 365쪽.

 

24... In interviews conducted in May 1998, the explanation offered to me for the increase in Mormon and Islamic conversions was the appeal to men of religions that -- as interpreted in the Chiapanecan contest -- not only tolerate, but sanctify polygamous relationships. Now, instead of having an official wife, married in Church plus a second mujer, and her children "on the side" in the classic casa chica, men can have all their wives and children living with them under one roof.

1998년 5월에 실시한 인터뷰에서 모르몬교와 이슬람교 개종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 내가 들은 설명은, 일부다처제를 단지 용인할 뿐 아니라 신성화하는 교리가 종교적인 남성들에게 먹혀 들어 갔다는 것이다. 이제 개종 덕분에, 교회에서 결혼한 공식 부인 외에 두번째 여인과 아이들을 전통적인 작은 집에 따로 두는 대신, 남성들은 한 지붕 아래 여러 부인과 아이들을 두고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5... María del Carmen García A., "Las organizaciones no gubernamentales en Chiapas: algunas reflexiones en torno a su actuaci?n política," in Centro de Estudios Superiores de México y Centroamérica, Anuario 1997, (Tuxtla Gutiérrez: Universidad de Ciencias y Artes de Chiapas, 1998), p. 50.

마리아 델 카르멘 가르시아 A, "치아파스의 비정부기구: 정치적 활동에 대한 어떤 반영"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고급 훈련 센터, 1997년 연감 중에서, (툭스틀라 구티에레스: 치아파스 과학 및 예술대학, 1998), 50쪽.

 

26... The National Institute of Statistics, Geography and Informatics, INEGI reports only 6.5 million because the standard they use is that a person must speak an indigenous language to be counted as an indigenous person. Meanwhile, the National Indigenous Institute, INI, which has good reasons to avoid undercounting indigenous people, estimates 10 million. See INEGI, XI Censo general de población y vivienda, México, D.F.: INEGI, 1992.

국립 통계, 지리, 정보학 연구소(INEGI)는 그 숫자가 650만명뿐이라고 보고했는데, 그들이 원주민 언어를 쓰는 사람만 원주민으로 분류하는 기준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반면 원주민 숫자를 줄일 이유가 없는 국립 원주민연구소(INI)는 원주민 숫자를 1000만명으로 추산한다. 국립 통계, 지리, 정보학 연구소, 11차 인구와 주거 총조사, 멕시코, D.F: 국립 통계, 지리, 정보학 연구소, 1992를 보라.

 

27... Cynthia Hewitt de Alcántara, Anthropological Perspectives on Mexico, (London: Routledge, 1984), p. 53.

신시아 에위트 데 알칸타라, 멕시코의 인류학적 전망, (런던: 루틀리지, 1984), 53쪽.

 

28... Guillermo Bonfil Batalla, México Profundo: Reclaiming a Civilization,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6); and Luis Villoro, Los grandes momentos del indigenismo en México, tercera edición, (México, D.F.: Fondo de Cultura Económica, 1996).

기예르모 본필 바타야, 멕시코 깊은 곳: 문화를 개척하기, (오스틴: 텍사스대학 출판부); 루이스 비요로, 멕시코 원주민의식의 위대한 순간, 3판, (멕시코: 경제사회재단, 1996)

 

29... Neil Harvey, "La autonomia indigena y ciudadanía étnica en Chiapas," paper presented at the XX Meetings of the Latin American Studies Association, Guadalajara, Mexico, 17-19 April, 1997, p. 10.

닐 하비, "치아파스의 토착민 자치와 인종적 시민권", 라틴아메리카연구학회 20차 회의에 제출된 논문, 과달라하라, 멕시코, 1997년 4월 17-19일, 10쪽.

 

30... Ibid., p. 18. Héctor Díaz-Polanco, La rebelión zapatista y la autonomía, (México, D.F.: Siglo Veíntiuno Editores, 1997); Luis Hernández, "Ciudadanos iguales, ciudadanos diferentes: la nueva lucha india," Este País, febrero, pp. 38-39; Marco Rascón, "Autonomía para la integración," La Jornada, 16 febrero, 1998, pp. xiii-xvi; Gilberto López y Rivas, "Los significados de San Andrés," La Jornada, 16 febrero, 1998, p. xii; Carmen Lloréns Fabregat and Rosa Albina Garavito Elías, "Esencia de los acuerdos de San Andres," Coyuntura 84, enero-febrero, 1998, pp. 33-40.

같은 책, 18쪽. 엑토르 디아스폴랑코, 사파티스타 반역과 자치, (멕시코 D.F: 시글로 베인티우노 에디토레스[21세기출판사], 1997); 루이스 에르난데스, "평등한 시민, 다른 시민: 새로운 인디언 투쟁" 에스테 파이스, 2월, 38-39쪽; 마르코 라스콘, "통합을 위한 자치" 라 호르나다, 1998년 2월16일, 13-16면; 힐베르토 로페스 및 리바스, "산 안드레스 협정의 의미,"; 라 호르나다, 1998년 2월16일, 12면; 카르멘 요렌스 파브레가트 및 로사 알비나 가라비토 엘리아스, "산 안드레스 합의의 핵심", 코이운투라 84, 1-2월, 1998, 33-40쪽.

 

31... The rule of strong men or caciques.

강한 남성 또는 두목(토후)의 법칙.

 

32... This quote is drawn from an interview with Juan Pedro Viqueira, one of the few analysts who spoke for attribution. He later elaborated these views in "Los peligros del Chiapas imaginario," Letras Libres, enero 1999, pp. 20-8; 96-7.

이 인용은 인터뷰에 응한 몇 안되는 분석가 가운데 하나인 후안 페드로 비케이라(Juan Pedro Viqueira)의 인터뷰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나중에 이런 관점을 "치아파스의 가상의 위험", 레트라스 리브레스(자유 학문), 1999년 1월호, 20-28쪽; 96-97쪽에서 가다듬어 제시했다.

 

33... Alison Brysk, "Turning Weakness into Strength: The Internationalization of Indian Rights," Latin American Perspectives, Issue 89, spring 1996, Vol. 23, No 2., p. 46.

앨리슨 브리스크, "허약함에서 힘으로 전환하기: 인디언 권리의 국제화", 라틴아메리칸 퍼스펙티브스, 89호, 1996년 봄, 26권 2호, 46쪽.

 

34... John Gledhill, "Liberalism, Socio-Economic Rights and the Politics of Identity: From Moral Economy to Indigenous Rights," in Richard Wilson, ed., Human Rights, Culture, and Context: Anthropological Perspectives, (London: Pluto Press, 1997), summarized in Xochitl Leyva Solano, p. 50.

존 글레드힐, "자유주의, 사회경제적 권리와 정체성의 정치학: 도덕 경제에서 원주민 권리까지" 리차드 윌슨 편, 인권, 문화, 배경: 인류학적 전망에서, (런던: 플루토 프레스, 1997), 쇼치틀 레이바 솔라노, 50쪽에서 인용.

 

35... Lynn Stephen, "Mexico's New Zapatismo," p. 6-7.

린 스티븐, "멕시코의 신 사파타주의", 6-7쪽.

 

36... Judith Adler Hellman, "The Mexican Elections: Rush to Judgement, " Globe & Mail, Toronto, 2 September 1994, p. 8; On the 1994 elections, see Silvia Gómez Tagle and Ma. Eugenia Valdéz Vega "Chiapas," in Gómez Tagle, ed., 1994: Elecciones en los estados, (México, D.F.: La Jornada Editores, 1997), pp. 179-209.

주디스 애들러 헬먼, "멕시코 선거: 평가를 위한 질주", 글로브 앤드 메일, 토론토, 1994년 9월2일, 8쪽. 1994년 선거에 대해서는, 실비아 고메스 타글레 및 마 에우헤니아 발데스 베가 "치아파스", 고메스 타글레 편, 1994: 국가의 선택, (Mexico, D.F.: 라 호르나다 출판부, 1997), 179-209쪽을 보라.

 

37... It is ironic that on the subject of elections in Guerrero State, La Jornada's position is quite different and the view that the electoral road might be usefully pursued at the same time as armed struggle has gained the approval not only of the Popular Revolutionary Army, that is, the guerrillas themselves, but also of La Jornada. See Blanche Petrich's interview with Arnaldo Bartra, "En Guerrero, armas y urnas no se excluyen," Sunday 13 February 1999, p. 8.

게레로주 선거 문제에 대해서는 <라 호르나다>의 태도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무장투쟁과 선거 참여 전술을 동시에 구사하는 게 유용할 수 있다는 견해를, 대중혁명군 곧 그 지역 게릴라들과 이 신문이 한 목소리로 지지했다. 블랑체 페트리치의 아르날도 바르트라 인터뷰 "게레로에서는 무기와 투표함이 모두 배제되지 않았다," 1999년 2월13일 일요판, 8면.

 

38... See Cleaver, and Martínez Torres.

클레버, 마르티네스 토레스를 보라.

 

39... Ibid. Also see Castells, pp. 72-83.

같은 책. 카스텔스, 72-83쪽도 보라.

 

40... A similar point was made by Benjamin Barber with regard to democratic participation in U.S. politics in "Internet: A Place for Commerce or a Place for Us?," a presentation to the Columbia University Seminar on the Political Economy of War and Peace, 28 January, 1999.

유사한 관점을 벤저민 바버가 "인터넷: 상업의 장소 또는 우리의 땅?"에서 미국 정치의 민주적 참여와 관련해 제기했다, 1999년 1월28일 컬럼비아대학의 전쟁과 평화의 정치경제학 세미나에서 제시함.

 

41... Stephen, "In the Wake of the Zapatistas," pp. 14-15.

스티븐, "사파티스타를 쫓아서", 14-15쪽.

 

42... Ibid., p. 13.

같은 책, 13쪽.

 

43... Cleaver, p. 19.

클레버, 19쪽.

 

44... In the detailed coverage given to the event in the pages of the Italian daily, Il Manifesto, indigenous people who support the PRI and oppose the Zapatistas are always referred to as priistas, that is, "PRI supporters," and even as "squadracce priiste." This second term is best translated as "organized squads of thugs" and is usually used in Italy to refer, literally, to fascist gangs. See Giani Proiettis, "L'esercito minaccia," Il Manifesto, 7 May 1998.

이탈리아 일간지 <일 마니페스토>가 자세히 보도한 바에 따르면, 제도혁명당을 지지하고 사파티스타에 반대하는 원주민은 언제나 '제도혁명당 지지자'로, 심지어 '스카드라체 프리스테(squadracce priiste)'로 표현된다. 두번째 표현은 '조직적 악당 무리'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데, 이탈리아에서는 문자 그대로 보면 파시스트 무리를 부를 때 보통 쓴다. 지아니 프로이에티스, "군대가 위협하다", 일 마니페스토, 1998년 5월7일을 보라.

 

45... Almost a year later I found Mexican human rights specialists divided on the question of the utitlity of an approach that appears to challenge Mexican soveignty at the same time that it tests the constitutionality of restrictions on foreigners' activities in Mexicon and the rights of free association of Mexicans.

거의 1년 뒤에 나는 멕시코 인권운동 활동가들이 멕시코 주권에 도전하는 것 같은 접근법을 이용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는 것을 봤다. 이 접근법은 멕시코에서 외국인의 활동에 제한을 가하는 것의 합헌성 여부와 멕시코의 결사의 자유 문제에 도전하는 것이다.

 

46... La Botz, pp. 32-34. Of Orive, Womack, pp. 221, writes, "The one constant in the movement had been the preeminence of its primary intellect and 'ideological director,' arguably the most remarkable organizer of his generation, Adolfo Orive."

라 보츠, 32-34쪽. 오리베에 대해서는, 워맥, 221쪽. 여기서 워맥은 "이 운동에서 한가지 변함없는 것은, 무엇보다 지식인이며 '이념적 지도자'인 데다가 같은 세대 최고의 조직자라고 내세울만한 인물 곧 아돌포 오리베의 출중함이었다."고 썼다.

 

<역주>

역1... 이 글은 캐나다에서 나오는 <소셜리스트 레지스터> 2000년호에 'Real and Virtual Chiapas: Magic Realism and the Left'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것이다. 지면 사정상 주석 가운데 절반 이상을 생략했다. 원문은 인터넷(www.yorku.ca/socreg/hellman.txt)에 공개되어 있다. 이 글이 나오자, 사파티스타를 인터넷을 통해 알리는 데 앞장서온 미국 텍사스대학 경제학과 해리 클리버 교수가 헬먼의 주장 각각을 세밀히 분석하고 비판하는 장문의 반론을 제기했다. (www.eco.utexas.edu/faculty/Cleaver/anti-hellman.html) 클리버 교수는 헬먼의 주장이 전혀 새로울 것이 없으며, 구체적으로 사파티스타를 지원하기 위해 전세계 좌파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글을 둘러싼 논쟁은 이후에도 계속돼 <소셜리스트 레지스터> 2001년호에는 사파티스타 지원 사이트인 www.ezln.org의 웹마스터인 저스틴 폴슨의 'Peasant Struggles and International Solidarity: the case of Chiapas'(www.yorku.ca/socreg/paulson01.html)과 헬먼의 짤막한 답변(www.yorku.ca/socreg/hellman01.html)이 실렸다. 폴슨은, 사파티스타운동이 전세계적으로 호응을 얻는 것은 주장의 단순화를 통해 서구 좌파의 낭만적 정서에 호소해서가 아니라 전통적인 좌파의 계급 대립보다 폭넓은 '신자유주의에 맞선 존엄성 투쟁'이 호소력을 갖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헬먼은, 자신의 글은 멀리 떨어져서 사파티스타를 지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명확히 파악한 뒤 사파티스타의 투쟁과 우리 자신의 투쟁을 연계시키는 방안을 고민하자는 것이라고 답했다.

 

역2... 멕시코 헌법은 혁명의 와중인 1917년 제정됐으며 상당히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가운데 토지 관련 조항인 27조는, 모든 토지와 지하자원은 국가의 자산이며, 국가가 개인에게 소유권을 양도할 수 있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는 토지를 몰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멕시코는 34년까지 전자본주의적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1차 농지 개혁을 한 데 이어 1934년-40년에는 상업농장의 토지를 집단농장에 분배함으로써 농민들에게 땅을 재분배했다. 이에 따라 1956-69년 사적인 상업농장은 전체 농토의 55%를 차지해, 규모면에서는 집단농장과 균형을 유지했다. 헌법 27조 수정은 명목으로라도 유지되던 토지개혁 정신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3... 에히도(ejido)는 과거부터 멕시코 지역에 존재하던 공동체의 집단 농지다. 땅을 대지주로부터 몰수해 농민들에게 재분배하는 방식의 이 농지는, 스페인 침공 직전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가 1917년 헌법 제정을 통해 되살아났다. 땅은 정부 소유이며 농사에 필요한 자금은 특수 국영은행이 빌려줬는데, 실제 운용 과정을 보면 악덕 지주가 은행으로 바뀌었을뿐 제국주의 시대 소작과 다름없다는 지적도 있다.

 

역4... 라칸돈 마야는, 17-18세기 스페인 침공을 피해 멕시코 남동부 치아파스로 이주해 지금까지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를 유지하고 있는 원주민들이다. 이들은 정글 지역에 뿔뿔이 나뉘어 살면서 외부 문화와 접촉을 피했다. 1950년대 이후 개발의 여파로 고유한 문화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역5... 멕시코혁명은 30년 이상 장기집권을 한 포르피리오 디아스 대통령이 1910년 여섯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시작됐다. 엘리트 지식인 출신인 프란시스코 마데로가 디아스의 재선에 반대하면서 무력투쟁을 호소했고, 에밀리아노 사파타와 판초 비야가 이에 호응함으로써 디아스가 실권했다. 마데로가 대통령이 된 뒤 사파타는 마데로를 비판하면서 '토지없는 농민의 지도자'로서 2단계 혁명을 추진한다. 마데로가 암살된 뒤 실권을 쥔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는 사파타 등의 힘에 밀려 상당히 진보적인 '1917년 헌법'을 제정했다. 사파타는 1919년 암살됐지만, 지금까지도 멕시코 혁명의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다.

 

역6... 인민해방군은 사파티스타가 봉기한 지 2년 뒤인 1996년 6월 치아파스 바로 위쪽 지역인 게레로주의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봉기한 반정부 게릴라 조직이다. 이 조직은 마르크스주의 혁명을 시도하는 세력 또는 단순 무장 폭도로 외부에 인식되고 있다. 사파티스타와 달리 무장 투쟁을 주요 전술로 삼아, 멕시코 정부군과 적지않은 충돌을 일으켰으나 최근에는 충돌이 많이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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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신기섭

2004/11/19 22:06 2004/11/19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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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긴 전망에서 파악하기: 1968년과 현재의 미국

아메리카합중국 대통령 선거 이후 이 나라를 어떻게 볼 것인가와 관련해서 흥미를 끄는 글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아메리카의 젊은 좌파세력들이 운영하는 블로그인 레프트 후크(Left Hook)에 올라온 글입니다. 필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1968년 상황과 현재 상황을 대비한 것이 흥미를 끕니다. 길지 않으니 금방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사물을 긴 전망에서 파악하기: 1968년과 현재(Putting Things in Perspective: 1968 and Now)

- 조너 버치(Jonah Birch, 컬럼비아대학)

 

오늘날 사람들에게 부시에 대해서 말할 때 좌파들이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비교가 1968년 리처드 닉슨의 대통령 당선이라고 생각한다. 그 해 선거는 사회 양극화가 심해지고 베트남전쟁에 대한 분노가 커지는 상황에서 치러졌다.

 

1968년 봄, 구정 공세는 미국의 베트남 점령이 현지에서 얼마나 인기를 얻지 못하고 허약한 것인지 보여줬다. 물론 닉슨은 우파 공화당원이었으며, 1950년대에는 부도덕한 반공주의자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선거운동은 아주 반동적인 공약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그의 공약은, (비록 전쟁을 끝낼 ‘비밀계획’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베트남 전쟁을 지지하고, 법원의 인종차별 철폐 명령에 반대하며, “법과 질서”에 초점을 두고, ‘흑인의 힘(블랙 파워)’과 여성 권리 운동에 반대하는 현상 유지를 강하게 옹호하는 내용이었다.

 

그의 경쟁상대인 허버트 험프리는 “자유주의적” 민주당원이고 린든 존슨의 부통령이었다. 험프리도 베트남 전쟁을 지지했다. 막판 선거유세 때는 군대를 철수하고 싶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는 닉슨만큼이나 미국 지배계급에게서 혜택을 받은, 그야말로 기존권력에 속한 인물이었다. 어떤 면에서도 “운동”의 후보가 아님이 명백했다. 전쟁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그는 반전 운동 세력 상당수의 지지를 받았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벌이고 있는 학살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예비선거 때 민주당으로 되돌아갔는데, 그건 (2004년 예비선거에서 민주당내 좌파 주자였던) 데니스 쿠시니치와 (기성 정치에 도전한) 하워드 딘을 섞어놓은 것같은 유진 맥카시 후보 때문이었다. 쿠시니치와 딘처럼 맥카시가 후보 지명전에서 험프리에게 졌을 때 그는 자신의 지지자 모두를 전쟁을 찬성하는 민주당원들에게 넘겨줬다. 결국 닉슨은 험프리를 100만표 이내의 근소한 차이로 눌렸는데, 이는 미국 역사상 몇 안되는 적은 표 차이다.

 

물론 많은 좌파들은 참담해했다. 그들은, 선거 결과가 미국 대중들의 의식이 다시 우경화했음을 보여줬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건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전쟁을 지지하는 두 후보간에 벌어진 1968년 선거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벌이고 있는 일에 대한 국민투표가 아니었다.

 

사실, 닉슨의 당선 직후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대중적 급진화를 겪게 된다. 1969년에는 300만명의 사람이 스스로를 혁명가라고 칭했다. 전쟁 반대는 계속 확산되어 갔으며 특히 노동계급과 빈민층에서 두드러졌다. 베트남인들의 지속적인 저항과 베트남에 파병된 군인들의 반란은, 결국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면서 반전 운동의 확산을 재촉했다.

 

게다가 닉슨 개인의 정치성향은 비록 심히 반동적이었지만, 사회운동의 힘이 그에게 일련의 양보를 강제했다. 닉슨 아래서, 연방정부의 사회사업 예산이 실질적으로 늘었고, 소수자 권익을 위한 적극 행동 프로그램이 최초로 만들어졌으며, 낙태가 합법화했다. 또 (4년동안이었지만) 사형이 위헌이라고 선언됐다.

 

좌파는 이제 아주 분명한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조지 부시가 지지하는 모든 걸, 그리고 그가 하려는 모든 걸 반대한다. 그러나 부시의 재선은 1968년 닉슨의 당선처럼 게임이 끝난 걸 뜻하지 않는다. 또 이 나라의 국민들이 그저 우파이며 그것이 모두라는 의미도 아니다. 좌파는 존 케리와 민주당이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을 해야 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태에 대한 진정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많은 여론조사는, 이 나람 사람들이 특히 자신들의 삶과 미래가 허약하게 노출되어 있으며 불안정하다고 느낀다는 걸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해답을 찾고 있으며 비난할 상대를 찾고 있다. 그들이 전해 듣는 유일한 해법이 반동적인 것이라면 그들은 그 방향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좌파가 이라크 전쟁에 대한 점증하는 분노에 대해, 정체된 임금과 실업에 대해, 감당할 수 없는 의료보험과 인종 차별에 대해 말을 꺼낼 수 있다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진보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운동을 창출할 수 있다. 이 기획에는 우군들이 있으며, 가장 중요한 우군은 이라크의 저항과 현지에 파병된 군대 내부에서 커지고 있는 반감이다. 미국의 지배계급은 지금 심각한 모순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을 수 없다. 부시의 재선이 우리를 죽이게 되는 유일한 경우는, 우리가 의기소침해서 운동을 포기할 때뿐이다.

 
영어원문 읽기 번역: 신기섭
2004/11/09 15:14 2004/11/09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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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찰의 폭력에 맞서는 이들

케빈 마이클즈(Kevin Michaels)

<뉴스와 편지> 1999년 7월

원 제목 = 경찰의 잔학행위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거세진다

 

미국에서 경찰의 폭력적 진압에 맞서서 정당한 권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움직임이 조직화하면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 등 인권 문제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와 개선 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를 낳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의회가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대 원칙을 깨는 법률안을 통과시켜 문제가 되고 있다는 내용은 주목할만한 부분입니다. 이 법률안은 공공장소 등에 십계명을 게시하는 것이 적법한지 여부의 판단권을 각 주정부에 부여하는 것입니다. 연세대 컴퓨터공학과 박사과정에 계시는 양대헌님이 자발적으로 번역해주셨습니다.


 

 

시카고에서 유월의 첫주는 이상하리만치 더웠고 그동안 발생한 두가지 끔찍한 사건은 앞으로 올 길고 무더운 여름을 예고했다. 두 명의 젊은 흑인 시카고인이 경찰에 의해 치명적인 총상을 입었는데, 당시 상황이 너무 의심스러워서 고압적인 단속에 이미 질리도록 익숙해진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단계의 반응을 유발했다.

 

이런 살인과, 경찰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 사건과, 젊은이와 소수민에게 가해지는 매일 매일 수도 없이 발생하는 모욕적인 사건들에 저항하기 위한 조직화된 표현에 대해, 살인이 주는 충격은 시카고를 전국적인 운동을 고찰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으로 만들었다. 또 그 잠재력을 넓고도 깊게 했다. 코소보의 전투 경찰에 의해 저질러진 인종 국수주의적(쇼비니스트) 폭력 사건의 여파에 대한 극적인 기사들이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는 지금, 이런 조사는 더욱 큰 중요성을 띠게 된다.

 

6월 4일, 시카고 경찰은 차 한대를 길가에 대게 했고, 거기에는 라타냐 해거티(LaTanya Haggerty, 26살)가 타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든 채 차에서 나오려고 했고, 핸드폰을 떨어뜨린 직후 총격을 받았다. 경찰은 추격을 멈추라는 경찰 운행계의 지시가 있었음에도, 그 차가 이중 주차(위반이 됨: 역자주)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추격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Riverside)의 티샤 밀러(Tyisha Miller)와 로스앤젤레스의 노숙 여성 마가레트 미첼(Margaret Mitchell)의 총격에 의한 죽음에 이은 해거티의 죽음은 흑인 남성뿐 아니라 흑인 여성들도 경찰 살인의 희생이 될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해거티 살인 사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6월 5일 새벽에 로버트 러스(Robert Russ, 22살)가 짧은 추격 끝에 사살되었다. 러스는 경찰이 단속을 위해 차를 세우는 작업을 목격할 증인들이 있을 만한 한 쪽 길로 운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흑인 사회, 그리고 경찰의 직권 남용에 적대적인 사람들로부터 즉각 쏟아져 나온 놀라움과 분노의 감정은, 역사적으로도 인종차별주의자이며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되는 기관인 시카고 경찰청의 돌처럼 차가운 침묵만이 맞을 뿐이었다.

 

매 사건마다 흑인 경찰관이 관여하였다는 점은, 흑인 경찰들이 지닌 흑인 사회 환경에 대한 통찰이나 감수성이 경찰청의 권위주의에 의해 제한된다는 것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 문제에 대해 시카고 경찰서장 테리 힐러드(Terry Hillard)가 제시한 유일한 해결책은 교통 단속 녹화를 위해 순찰차에 비디오 카메라를 설치하는 것이다. 매우 야만스러워서 몇년 동안 고문이 자백을 강요하는 당연한 방법이었던 경찰 내 인종차별주의와 만연한 부패 문제를 해결하는 아이디어는 아직 제시되지 않고 있다. 전 시카고 경찰 지휘자인 존 버지(Jon Burge)한테 고문을 당한 사람 열 명이 일리노이의 사형수 감방에 수감되어 있다.

 

이 두 사람의 죽음은 범죄 사법 체계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경찰의 직권 남용과 왜곡에 대항하는, 그렇지 않아도 이미 매우 활성화 되어있는, 지역 기반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경찰과 인종차별적인 법원에 의해 고통받은 사람의 가족들로 구성된, 적어도 세개의 조직이 시카고에 있다. 그들은 시청의 시장 집무실 앞에서 정기적으로 항의를 할 뿐 아니라 자주 회의를 연다.

 

이 기관들의 회원은 6월 17일 시카고 경찰 중역회의에 대한 불만을 알리기 위해 경찰 본부로 행진한 500명의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다. 이 중요한 행진을 위해 운집했을 때, 많은 UPS(미국의 배달 수송 업체: 역자 주) 트럭들이 경적을 울려 시위에 대한 지지 표시를 보이며 지나갔다. 한 흑인 여성은 경찰에 살해된 젊은이 사진을 가져왔다. 그녀는 <뉴스 앤드 레터스>(NEWS & LETTERS)한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사진에 있는 사람과 관계 없어요, 하지만 내 이웃에 가해진 잔학 행위를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겁니다. 너무도 많이요. 이젠 멈춰야 합니다."

 

이런 지역 운동은 시카고의 이질적인 사람들을 한 데 모았다. 흑인, 라틴 계열, 백인 어머니들, 성직자, 공공주택 거주자들, 젊은이들 모두 이 운동에 적극적이다.

 

전국적인 움직임 (NATIONWIDE MOVEMENT)

경찰의 잔학 행위에 반대하며 시카고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점차 늘고 있으며, 이제는 전국적인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최근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의 티샤 밀러와 뉴욕시의 애머두 디앨로(Amadou Diallo) 살인 사건은 다양한, 대규모 운동을 촉발했다. 뉴욕에서는 이 활동이 흑인 사회 주도로 시작되었는데, 루돌프 길리아니(Rudolph Guiliani)의 권위주의 행정에 반대하는 많은 계층을 끌어들였다.

 

게이와 레즈비언, 백인 고등학생들, 중국계 이주민들, 예술가 그리고 노점 상인들이 매일 시위와 시민불복종을 위해 경찰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많은 항의자들이 뉴욕 사건과 정부가 지원한 코소보의 알바니아계에 대한 국수주의적 폭력의 상관 관계를 표시한 팻말을 가져왔다.

 

4월 15일 적어도 만명 이상이 참가한, 뉴욕 연방정부 건물을 향한 대규모 행진은 이런 조직적 반대 운동 확산의 정점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행진 직후 애브너 루이머(Abner Louima)에 대한 잔학행위 재판의 주 가해자인 저스틴 볼프(Justin Volpe) 경관이 죄의식 어린 변명을 했다. 또 경찰기구의 취약 부분에 대한 이런 상징적인 피하기는, 기존 사회, 정치적인 경계 안에서 뉴욕의 잔학행위에 대한 대책을 찾으려는 사람들을 해체하는 데 성공했다 (그 해결책이 연방정부의 중재든 또는 문제의 경관을 해고하는 것이든 간에). 애머두 디앨로 살인범들에 대한 재판이 아직 우리 앞에 있는 이 때, 뉴욕의 조직적 운동이, 로스앤젤레스의 자발적인 저항이 90년대 초에 이뤄냈던 것을 90년대 말에 다시 이룰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만이 남아있다.

 

테네시주 멤피스의 이스트 해이븐(East Haven) 지역에서 벌어진 졸업 파티를 중단시키려는 경관에 의해 젊은 흑인이 구타당한 사건처럼, 이보다 덜 알려진 사건들도 사람들을 모아냈다. 경찰이 사건 목격자들을 입다물게 하려고 위협하며 가한 괴롭힘에 주민들이 항의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의 여성 수감자들을 지원하고, 무미아 아부자말(Mumia Abu-Jamal) 같은 정치범과 연대하며, 인종차별적 사형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움직임과 함께, 경찰의 잔학 행위에 반대하는 세력은 상당한 진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가적인 퇴보의 배경 (NATIONAL BACKDROP OF RETROGRESSION)

경찰이 무시무시한 힘을 변덕스럽게 사용하는 것은, 새로운 반대 움직임에 직면하고 있는 퇴보의 배경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입소자들이 법률 도서관, 레크리에이션 시설, 의료 시설의 혜택을 그전보다 점점 덜 받게 하는 감옥 체계의 변화가 또 다른 배경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 계급 사람들이 관선 변호 체계의 물리적인 제한 때문에 심각한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사법 시스템도 또 다른 요소이다.

 

다른 요소로는 중형이 선고된 이들에게 선거권을 빼앗으려는 전체주의적인 발상의 정책이 있다. 이런 시도의 결과로, 흑인 140만명이 임시 또는 영구적으로 선거권을 박탈당했다. 앨라바마와 플로리다는, 흑인 남성 거주자 세명 중 거의 한 명이 영구히 피선거권을 박탈당한 상태다(<이코노미스트> 1999년 4월3일).

 

콜럼바인 (Columbine)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놀랍도록 폭력적인 사건(한국에도 잘 알려진 미국 고등학교 총격사건: 역자 주)은 지배 계층에게 1994년 중간 선거 이후로 계속 상승세였던 복고적인 의제를 한층 심화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 학살의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경향에 대해서도 약간도 인정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쓰면서, 하원은 6월 17일 유죄 판결을 받은 청소년에게 벌칙을 강화하고 청소년을 어른처럼 기소할 권리를 검사에게 부여하는 청소년 정의 법률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의 다른 개정안도 통과되었는데, 그것은 많은 탄핵 전문가들이 소송 절차 때 호소했던 바로 그 헌법의 정교 분리 규정을 뻔뻔스럽게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개정안은 각각의 주가 학교를 포함한 공공 시설에 십계명을 전시하는 것이 적법한지 여부를 결정하도록 규정한다.

 

이 개정안은 앨라바마의 공화당원 로버트 애더홀트(Robert Aderholt)가 후원했는데, `성서 지대'(Bible Belt) 사람들과 얽히고설킨 고소 사건으로 유명한 북부 교외 보수주의자들 사이의 연대를 보여주는 예이다. 헨리 하이드(Henry Hyde)와 하원의 새로운 대변인 데니스 해스터트(Dennis Hastert) 모두 북부 일리노이 교외 출신이다.

 

하이드와 해스터트는 일리노이 상원의원 피터 피츠제럴드(Peter Fitzgerald)와 함께, 경찰과 검찰의 유명한 직권남용 사건 때문에 사법 시스템 전반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이 주 출신의 우파 대표격이다. 잘못된 유죄 판결을 받아 사형이 선고 되었다가 가까스로 구출된 앤서니 포터(Anthony Porter)나 롤런도 크루즈(Rolondo Cruz) 같은 이름들은 이런 인물들을 만들고 유지하는 체제에 대한 고발장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경찰의 잔학행위 끝내기 (ENDING POLICE BRUTALITY)

6월 17일 시카고 경찰 본부 앞 행진은 서로 협력하는 많은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지나치게 심한 경찰의 잔학상과 사법적 잘못에 대한 참된 도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스테이트 거리까지 함께 행진했던 여성, 젊은이, 흑인, 라틴계 사람들은 최근 몇 년간 자본주의 미국의 경찰과 법정에 대한 항의를 더욱 강화하는, 더 많은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다.

 

만약 이 나라를 관통하는 운동이, 뉴욕에서 직면한 도전 곧 기득권 세력이 한발짝 물러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어떻게 더 진전해 나갈 것인가 하는 도전, 또는 이와는 전혀 다르게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가 직면한 도전 곧 체제가 살인 경관의 기소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도전에까지 이른다면, 정말로 지속적인 반대 운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우기, 만약 시카고 행진을 지지해준 UPS 운전사들처럼 인종 차별주의와 경찰의 잔학 행위에 반대하는 노동 운동의 소집단들이 이런 성장하는 운동과 융화할 수 있다면, 지배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잠재력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그런 발전을 고대하는 모든 이는 직면한 걸림돌을 통찰해야 할 뿐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운동들에 대해서도 적극적이어야 한다. 그런 움직임은 경찰의 잔학행위를 내 집에서 그리고 내집 밖에서 없애버리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로 판명될 것이다.

 

 

원문: www.newsandletters.org/7.99_lead.htm

번역: 양대헌

2004/07/15 18:09 2004/07/15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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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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