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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와 가상의 치아파스: 마술적 사실주의와 좌파

주디스 애들러 헬먼 (Judith Adler Hellman) 소셜리스트 레지스터 2000년호 원 제목 = Real and Virtual Chiapas: Magic Realism and the Left 오래전에 번역했던 글인데, 2004년 11월에 출판된 책 <게릴라의 전설을 넘어>(생각의 나무)에 포함시키기 위해 애초 번역본을 상당 부분 수정해서 새로 공개합니다.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민중투쟁의 상징으로 꼽히는 멕시코 무장 농민군 사파티스타는 인터넷을 잘 이용하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또 전세계의 상당한 진보세력이 인터넷으로 표현된 사파티스타에 크게 공감하고 연대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요크대 교수(정치사회학)인 저자는 인터넷속의 사파티스타와 그들의 본거지인 치아파스를, 현실속의 사파티스타, 그리고 현실속의 치아파스와 꼼꼼히 따져봅니다. 현지를 방문해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자료를 뒤진 결과 이 여성 교수의 결론은 우리가 컴퓨터 화면에서 본 치아파스는 현실과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단순화한 가상의 모습을 전세계 진보진영이 붙잡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분석한 뛰어난 업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헬먼은 인터넷을 통한 혁명 자체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한글로 원고지 150여장 분량의 논문입니다.



실제와 가상의 치아파스: 마술적 사실주의와 좌파

(Real and Virtual Chiapas: Magic Realism and the Left)(역1)

주디스 애들러 헬먼(By Judith Adler Hellman) <소셜리스트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 2000년호에서.
알림 1. 이 번역 글은 2004년 11월에 출판된 책 <게릴라의 전설을 넘어>(생각의 나무)에 포함시키기 위해 애초 번역본을 상당 부분 수정했습니다. 책으로 출판된 만큼 저작권 문제를 고려해서 다른 인터넷 사이트로 퍼가는 건 삼가주시고 개인적으로만 이용해주십시오. (2004년 11월19일 고침) 알림 2. 본문의 주석 번호를 누르면 끝의 주석으로 가고, 해당 주석의 번호를 누르면 다시 돌아옵니다. 번호만 있는 주석은 원 저자가 붙이 주석이고 번호 앞에 '역'이라고 표시된 건, 옮긴이가 붙인 주석입니다. 알림 3. 인쇄를 하시려면 인쇄용을 이용하십시오.

 

1994년 1월1일 봉기 전까지 치아파스는 주변부에서도 주변부에 있었다. 이 땅이 스페인에서 독립했을 때에는 아즈텍과 마야 제국 두쪽 모두의 경계지역에 있었다. 또 명목상 독립됐으나 비참하리만치 가난한 중앙 아메리카의 평범한 시골 곧 과테말라의 최북단 지방이 될지, 아니면 멕시코의 최남단 주로 편입돼 사실상 내부 식민지가 될지도 불분명했다.

 

인구가 300만명 약간 넘는 치아파스는 지금 '세계의 배꼽'이 되었다. 잉카 사람들이 자신들의 서울을 쿠즈코(Cuzco)라고 불렀듯이 말이다. 이 땅은 너무나 역동적인 동시에 눈길을 끌어당기는 사건들의 땅이 되었다. 그래서 5만명의 이탈리아 시위대를 로마의 포폴로광장으로 뛰어나오게 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치아파스 연대단체 네트워크가 전세계를 띠처럼 둥글게 둘러싸고, 수십개의 인터넷 사이트가 알토스 데 치아파스(Altos de Chiapas)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추적하는 데 헌신하며, 5천명의 외국인이 이 땅이 펼쳐 보이는 드라마에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참여하려 이 고지대에 쫙 퍼졌다. 그리고 1998년 4월에는 45개 미국 단체 대표들이 연대네트워크를 결성하기 위해 워싱턴시에 모였다.(1) 요컨대,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EZLN)과 연대하는 것을 정치적, 사회적 헌신의 핵심으로 삼는 열정적인 활동가들이 전세계에 널려 있다. 그들은 부사령관 마르코스(Marcos)와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도전을 선언한 것으로 평가한다. 또 그들은 사파티스타를 전자 통신을 이용한 정치의 혁명적인 방법을 개척한 대표주자로 본다.

 

치아파스의 드라마가 그렇게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이유는 뭘까? 그렇게 많은 멕시코 국외의 진보 인사들이 관심의 초점을 치아파스에 두게 만드는 매력은 뭘까? 초기에 마르코스의 통렬한 관찰, 자기반성적인 지혜, 날카로운 지각은 외국인들을 마법에 걸고 놀라게 했으며 수백만명의 멕시코인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때에 따라 영웅적이고, 분석적이고, 반역적이고, 재미있고, 엄숙한 마르코스의 풍모 뒤에는 사건을 아주 멀리서 볼 때 느끼는 매력이라는 요소가 자리잡고 있다. 피에를루이지 술로(Pierluigi Sullo), 니노 리시(Nino Lisi), 마르첼로 빌리(Marcello Vigli)가 이탈리아 일간지 <일 마니페스토>(Il Manifesto)의 지면을 통해 지적하고 논쟁했듯이, 치아파스와 관련한 이탈리아에서의 거대한 대중 동원, 대규모 탄원서 서명, 아크테알(Acteal)에서 벌어진 학살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 참가는 "좌파에게 뭔가 중요한 것을 뜻한다."(2)

 

그러나 이것이 정확하게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유럽과 캐나다와 미국 좌파 일부의 치아파스에 대한 강박 관념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들의 맹렬한 애착을 무엇으로 설명할까? 치아파스에서 멀리 떨어진 이들이 느끼는 매력은, 마르코스의 발언이 쉽게 번역될 수 있고 모든 사건을 설명하도록 쉽사리 재구성될 수 있고 게다가 모든 개인적 및 집단적 요구에 관한 말로 재구성하기 쉽다는 점에 있나? 마이클 로위(Michael Lowy)는 "이것은 마술, 신화, 유토피아, 시, 낭만주의, 열정, 거친 희망, '신비주의', 믿음이 실린 운동이다. 이는 또한 오만과 유머와 풍자, 스스로에 대한 풍자로 가득하다."고 열정적으로 썼다. 이는 비참하리만치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의 투쟁이 전혀 다른 환경에 있는 이들에게 주는 매력의 상당 부분을 열거한 것이다. 그가 스스로 지적했듯이, "'매력에 다시 사로잡힘'(re-enchantment)을 되살려내는 이 능력이 사파타주의(Zapatism)로 하여금 치아파스 산맥 넘어 멀리 있는 사람들을 황홀하게 하는 이유의 한가지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3)

 

외부인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이 엄밀히 말해 환멸한 이들의 '매력에 다시 사로잡힘' 추구 때문이 아니라면, 자신이 속한 사회의 혁명적 변화 전망이 없는 데 낙심해 제3 세계의 혁명 대의를 받아들인 사르트르와 드 보부아르가 가진 것과 비슷한 충동일까? 국내의 투쟁에 참여하고 힘을 쏟는 대신 외부 사람들의 투쟁에 개입하는 것의 현대판인가?

 

의심의 여지없이 외부인이 남부 멕시코에서 벌어지는 일에 느끼는 매력의 상당 부분은 이 사건이 명백하게 극단적이라는 데 있다. 이 사건은 권력자와 권력 없는 이들, 순수한 이와 불순한 이들, 정직한 이와 타락한 이들의 직접 대결로 보인다. 흔히 모호함(더 심하면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으로 가득찬 세계에 제기된 이런 이미지들의 세련된 단순함을 생각하면, 혼란스럽게 만드는 세부 사실에 직면하는 걸 뺀 무엇이든 할 용의가 있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널려 있다는 건 놀라울 게 없다. 간단히 말하면, 많은 외국인들 사이에 현재 치아파스에서 활동하는 세력들의 지독한 복잡함을 인식하는 데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상황을 단번에 너무나 폭발적으로 만들고 단호한 의지를 갖는 데 강한 걸림돌이 되는 많은 복잡함을 따져볼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사건의 단순화를 부르는 환원주의를 드러내보일 것이다. 그리고 군대와 준군사조직의 폭력과 인권 탄압을 전세계에 중계함으로써 셀 수 없이 많은 목숨을 구한 측면도 있지만, 치아파스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그 무대의 배우들에 대한 현저히 '평면적인' 그림을 보여주는 측면도 있는 전자 통신의 양면적인 기능을 분석할 것이다. 컴퓨터 화면에 즉각 나타나는 이 평면적인 그림은(4) '진짜'(real) 치아파스를 극히 일면적으로만 닮은 '가상'(virtual) 치아파스를 구성한다. 진짜 치아파스는 그 지역 사람들은 물론 외국 활동가들, 인권 운동가들, 사파티스타인민해방군 동조자들, 심지어 우연히 찾아간 방문객조차 이곳 남멕시코 땅에 발을 딛기만 하면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가상 치아파스에 과도하게 매달리는 행위가 안고 있는 정치적 위험을 강조할 것이다. 국제 반신자유주의 세력의 일부라는 소속감을 강화시키는 이미지, 상징, 표어 묶음을 수천마일 떨어져 있는 이들이 붙잡고 있다고 무슨 해악이 있겠는가? 이렇게 물을 수 있으리라. 확실히 하건대, 이런 열정의 상당 부분은 해롭지 않다. 또 많은 해외 사파티스타 지지단체들이 자국내에서 투쟁을 벌임으로써 치아파스에서 벌어지는 노력을 지원할 필요성도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진짜 치아파스에서 벌어지는 투쟁이 지닌 호소력과 근본적으로 다른 매력을 가상의 치아파스가 좌절한 좌파들에게 제시한다는 점도 보일 것이다. 진짜 치아파스에 살고 있는 진짜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은, 가상의 치아파스를 가장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정치적 성숙함을, 그리고 모호함에 대한 더욱 강한 인내를 요구한다. 이는 현재 좌파 정치학의 심각한 문제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문제는, 치아파스에 대한 뜨거운 연대가 성립하려면 명백하게 탄압받는 동질적인 인디오 집단이 필요한 것 같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인디오들은 하나같이 선하고 순수하며, 다면적이지 않으며, 복잡한 개성이라고는 없고, 서로 다른 다양한 이해 관계를 지닌 성숙한 사람들이어서는 안되는 것 같다. 단순화하려는 충동은 이해할만 하지만, 나는 컴퓨터 화면에 표시되는 치아파스와 땅 위의 실제 상황을 구별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제시할 것이다.

 

동의하는 지점들 (Points of Agreement)

물론 몇가지 측면은 논란의 여지가 거의 또는 아예 없다. 예를 들어, 사파티스타 봉기의 배경에 대한 믿을 만한 설명들은, 국민 대다수가 가난한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이 사는 천연자원이 특히 풍부한 땅이라는 역설과 비극적 불균형을 당연히 강조한다.(5) 이 멕시코의 내부 식민지에서 적당한 피난처도, 적합한 음식도, 마실 물도, 전기도 없는 사람들이 목재, 옥수수, 콩, 가스, 기름, 수력발전을 멕시코 다른 지역에 '수출하고 있다.'

 

치아파스 봉기의 원인에 대한 진지한 분석에서 또 다른 공통점은, 멕시코시티의 중앙 정부가 수세기 동안 소홀히 다루던 이 지역에서 최근 몇십년 사이에 많은 정부 지원 사업이 시작되면서 나타난 급격한 경제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루이스 에체베리아(Luis Echeverría) 대통령(1970-1976)의 인민주의적 프로그램은 치아파스에서 정부의 입김을 크게 강화시켰고 공화국의 변두리였던 이 곳의 공공예산 지출이 10배나 늘게 했다. 아주 짧은 기간에 실시된 야심찬 사업으로 치아파스의 정치경제적, 사회적 구조가 뒤바뀌었다. 이 사업은 도로와 댐 건설, 석유 사업, 상업용 커피 경작, 축산과 낙농업에 투자하는 동시에, 멕시코 다른 지역과 치아파스주 내부 다른 지역의 땅 없는 농민들을 라칸돈(Lacandon) 밀림으로 이주시키는 '식민화' 계획이다. 이런 정부 정책은 마침 중남미 전쟁 및 그 전쟁으로 생긴 대규모 난민 때문에 남부 멕시코 전체의 고용구조가 바뀌던 바로 그 때 치아파스 주민들을 세계 경제 구조 속에 몰아 넣었다.

 

당연히, 이 변화는 여러 원주민 부족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끼쳤다. 일부는 더욱 가난해졌고, 다른 부족은 생계용이 아닌 (상업용) 농업, 교통, 건설, 기름, 목축, 낙농업 분야에서 새로운 수입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경제, 사회적 변화가 유발한 불안정은 곧이은 석유 호황의 붕괴로 더 커졌다. 그런데 석유 호황은 (치아파스) 중심부 고원지대의 많은 원주민들을 멕시코만 해안지역의 임금 노동으로 끌어들인 요인으로 작용했다.(6) 80년대 내내, 석유 호황과 불황이 유발한 사회적 긴장은 연이은 정치, 경제적 충격으로 더욱 깊어졌다. 1982년 외채 위기가 들이닥치고, 이어 커피값이 폭락했으며, 마지막으로 카를로스 살리나스(Carlos Salinas) (1988~1994)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이어진 것이다. 이 정책은 치아파스 주민들에게는 주로 옥수수 및 기초 농산물 생산자에 대한 가격 지원의 폐지와 헌법 27조 수정이라는 형태로 영향을 끼쳤다. 헌법 27조 수정은 멕시코 농촌의 사회적 평화를 유지하는 핵심이던 땅 분배 프로그램을 북미자유무역지대 참여에 따른 양허 차원에서 중단하는 내용이다.(역2)

 

그래서 치아파스 무력 충돌의 간접 원인과 직접 원인을 이해하기 위한 분석 틀은 이런 연속적인 변화에 중심을 두게 된다. 가장 유용한 분석들은, 자본주의적 관계의 급속한 침투와 정부의 과도한 개입과 뒤이은 개입 철회를 원주민에 대한 인종적 탄압이라는 배경에 비춰 판단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 인종적 탄압은 스페인 정복 때 시작되어 현재까지도 대부분의 측면에서 줄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다. 또 이런 분석들은, 역사적으로 치아파스 지주들의 과두정치가 인종차별적 담론 주도와 주도(州都)인 툭스틀라 구티에레스(Tuxtla Gutiérrez)에 있는 제도혁명당(PRI) 지구당 장악이라는 두가지 통제 수단을 경제, 사회, 정치적 지배의 강화에 이용한 것도 강조한다. 이런 조건에서 중앙 정부의 개입은 치아파스 과두정치의 주도권에 도전했지만, 통제력의 밑바탕을 허무는 데까지 가지는 않았다. 반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경제적 변화가 만들어낸 사회 격변은 원주민과 메스티소(백인과 인디오 혼혈) 농민의 전투성과 자각을 재촉했다. 사건에 대한 거의 모든 설명이, 1994년 사파티스타 봉기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이 의식의 각성이다.

 

투쟁성은 두가지 형태를 통해 표현됐다. 첫째 형태는 사무엘 루이스(Samuel Ruíz) 주교가 이끄는 가톨릭 교구의 현지 활동에서 자라났다.(7) 가톨릭 활동은 1960년대에 전도사들을 훈련시켜 고지대에 파견한 뒤, 성경을 원주민어로 번역하고 그들의 말로 설교하며, 자신들의 억압에 대해 발언하도록 유도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됐다.(8) 이 풀뿌리 활동은 1974년에 첫번째 원주민의회를 성사시켰는데, 원주민의회에는 300여 지역사회에서 1250명의 인디언 대표들이 모였다. 이 의회를 처음엔 멕시코 정부가 후원했다. 하지만 사무엘 루이스 주교와 전도사들은 의회를 장악해 원주민들의 목소리를 내는 통로로 활용했다. 해방신학의 새로운 개념을 전하면서, 지역사회가 스스로 대표를 뽑고 자신들의 문제를 자신들의 말로 개념화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콜리어(Collier)가 지적했듯이, 의회는 "밑으로부터의 조직화 모델을 제시했고 독자적인 농민 단체들이 이 모델에 의지하게 됐다." 의회는 또 사파티스타의 논의보다 정확하게 20년 앞서 치아파스 원주민들이 불만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9)

 

두번째 유형의 전투성은 종종 급진적인 전국 조직과 연계된 농민 조합의 형태를 띠었다. 1968년 10월 철저한 탄압에 직면했던 도시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중심이 돼 새로운 좌파세력을 구성했다. 이 조직은, 장기적 관점에서 대중적인 농민운동과 도시빈민운동을 조직하는 고된 작업이 멕시코시티를 장악한 정치 지배층의 주도권에 도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학생운동 출신자들의 신념을 반영한다. 첫번째 원주민의회가 민족적, 언어적 경계를 넘어 연대하고 자신들의 불만을 파악해 명백히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뚜렷이 보여준 직후, 이런 조직 형태가 치아파스에 나타나기 시작했다.(10)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이런 조직적 시도의 역사는 놀랄 것 없이 연대와 분열의 역사이다. 마오주의자, 공산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독자적인 농민운동가, 가톨릭 선교사와 전도사, 복음주의 개신교도간의 협력 이야기이면서 경쟁 이야기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대항 농민조직 지원을 통해 조직 파괴를 꾀한 멕시코 정부에 맞서는 가운데 이뤄졌다.(11) 사파티스타운동은 명백히 이런 조직들의 활동이 자연적으로 성장, 발전한 것이다. 이 사실은, 선구자들이 원주민 지도자를 세우고 밑에서부터 조직을 구성하도록 이끄는 걸 기본 원칙으로 견지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사파티스타는, 과거 수많은 조직들이 결국 선택한 체제 타협에 대한 반기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파티스타 운동의 기원을 종교적 조직화 시도와 세속적 조직화 시도, 이 두가지에서 찾는 데는 대부분 동의한다. 사파타주의의 성격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들이(12) 한가지 명백하게 공감하는 게 또 있다. 그 공감대란, 지지 기반 형성 방식의 차별성에 대한 것이다. 사파티스타는 10년 이상 동안 치아파스 고지대의 다양한 종족들로부터 넓고 강력한 지지 기반을 확보했다. 일단 혁명적 운동을 일으킨 뒤 주변에서 추종자들을 끌어들이려 하는 전통적인 게릴라 거점 방식과 달리, 사파티스타는 활동 영역 전체에 걸쳐 수천여 마을의 강력한 지지를 끌어낸 것이다. 이런 지지를 구축하기 위해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 조직운동가들은 오랜 전통의 멕시코 민족주의 원칙에 의지했다. 또 "수십년 동안 집권당의 전유물이었던 멕시코 혁명사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13) 전통 깊은 급진적 주제를 제시함으로써, 이들은 치아파스의 가장 억압당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멕시코 전체의 박해받는 사람들을 겨냥한 담론을 개척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5년 전세계의 활동가와 지지자들을 소집함으로써, 사파티스타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국제적 대중의 비판을 의식적으로 선언하고 대변했다.(14)

 

멕시코 정부로부터 모순적인 대응들을 유발한 것 또한 이 봉기를 규정하는 특징이라는 게 명백하다. 치아파스의 경제, 정치 엘리트들은 정부로부터 이 운동을 깰 확실한 대응책을 끌어내려고 힘을 합쳐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살리나스나 그의 후계자 에르네스토 세디요(Ernesto Zedillo)는 화해정책을 택하지도, 그렇다고 억압정책을 선택하지도 못했다. 또 협상을 하지도, 군사행동을 취하지도 못했다. 대신 상황에 따라 그 때 그 때 가능한 대응책을 추구했다. 일관된 정책이 없다는 것은,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전례 없는 환경과 관련이 있다. 멕시코 정부로서는 이 사건을 국내 문제 또는 지역 문제로 규정하길 원했지만, 기술 덕분에 전세계 사람들이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고 국제적 여론을 형성하며, 사건을 평가할 수 있었다. 전자 통신의 혁명과 마르코스의 예외적이리만치 효과적인 의사소통 기술은 국제적 연대를 만들어 냈으며, 이 연대는 운동의 지속과 운동가 각 개인의 생명 유지에 기여했다.(15)

 

복잡함(The complexities)

그래서 반란을 촉발하고 멕시코 정부의 심히 모순된 대응을 부른 정치, 경제, 사회적 조건 또는 사파티스타가 직접 분쟁지역을 넘어 다른 멕시코인과 세계의 동조자들을 자신들의 더 넓은 운동에 결합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조건에 대한 분석에서는 차이가 거의 없다. 하지만 국제적 지지 세력을 동원한 부분으로 넘어가면, 흔히 알려진 치아파스 상황은 복잡한 현실을 아주 단순화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 그림이 의도적으로 왜곡된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사람들을 잘못된 쪽으로 유도한다. 치아파스의 투쟁에 동조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계속 펼쳐지는 사건을 이해하고 분석하기 힘든 처지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아래 제시하겠지만, 심지어 때에 따라서는 의미 있는 방식으로 투쟁을 지원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든다.

 

치아파스의 복잡한 상황 가운데 정치적으로 중요하지만 외부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빠졌거나 무시된 것으론 어떤 것들이 있을까?

 

땅 보유(Land tenure)

치아파스의 원주민과 빈농들의 복지를 염려하는 이들 대부분은 이 지역 땅의 56%가 개인 소유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자주 반복되는 이 통계는 오해를 유발하는데, 왜냐하면 개인 소유 땅이 몇몇 대지주들에게 집중된 것 같은 느낌을 주면서 인용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정하면, 대농장을 징발해 땅을 요구하는 농민들에게 줄 정치적 의지만 있으면 토지개혁법에 따른 임대용 '집단 농지(에히도, ejido)'(역3)로 개인 소유 땅을 활용할 수 있다고 추론하게 된다.(16)

 

불행하게도, 이 농민운동적 희망 사항은 동 치아파스 곧 사파티스타의 근거지인 로스 알토스(Los Altos)와 라칸돈 셀바(Lacandon Selva)의 분쟁지역에서 실현될 수 없다. 이 지역에는 '분배할 수 있는' 땅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17) 동 치아파스에는 기존 대토지 소유자(latifundios)와 신 대토지 소유자(neolatifundios)가 지난 30년 동안 거의 사라졌다.(18) 일정한 땅은 초기 토지개혁 및 분배 과정에서 나뉘어져서 집단 농지 임대 형태로 분배됐다. 또 1980년대에 연방정부는 159개 농민 정착지에 분배하기 위해 사유지 8만 헥타르를 사들였다. 그래서 1950년대 이후 수력발전소 건설에 따른 서 치아파스 주민의 동 치아파스 이주,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다른 14개 주와 연방 직할 지역에서 온 땅 없는 농민들의 정착, (국제 환경운동 단체와 라칸돈 마야(역4) 보호운동가들의 압력에 따른) 생태보전지 지정 등으로 해서, 이 지역 땅 상당 부분은 조각조각 나뉘어서 분배됐다. 그래서 이 지역 대지주들은 땅 강제수용에 저항하느니 자신들의 땅 일부를 주변 농민들에게 팔아넘기는 게 낫다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됐다.(19)

 

치아파스 전역에 걸쳐 토지 자원에 비해 사람이 월등히 많은 데서 비롯된 압력으로, 전체 토지의 56%라는 압도적인 비율의 개인 소유 땅은 사실 5헥타르 이하의 소규모 농장들이다. 이 지역의 집단 농지 할당 최소 규모는 20헥타르이다.(20)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외부인으로선 땅 없는 농민들과 지주가 맞서는 농촌 계급투쟁 양상의 전통적인 농민 싸움이 벌어지는 땅으로 보기 십상인 치아파스에서, 땅을 둘러싼 '싸움'이 실제로 심했다. 그러나 문제는, 슬프게도 이 싸움이 보통은 '가난한 이들간의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이 결과, 충분치 못한 땅뙈기를 넓히려 애쓰는 국유지 임차 농민들 또는 땅을 물려받을 수 없는 국유지 이용자의 자녀들은 주변의 소지주들과 분쟁을 벌이고 있다. 소지주들은 그들대로 불쌍하리만치 작고 질도 떨어지는 생계용 땅을 지키려 맞서고 있다.

 

종교(Religion)

대부분의 인터넷 이용자들이 익숙한 가상의 치아파스에는 종교적 행위자들이 중요한 구실을 한다. 우리가 컴퓨터 화면에서 만나는 종교적 행위자들은 사무엘 루이스 주교, 그의 교구, 산바르톨로메 인권센터(San Bartolomé Centre for Human Rights)의 가톨릭 인권 운동가들이다. 아마 미국에 근거지를 둔 평화를 위한 목자들(Pastors for Peace)로 대표되는 몇몇 개신교도들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오늘날 치아파스에서 펼쳐지는 사건에서 종교가 중심적인 기능을 하고는 있지만, 실제 현실의 그림은 화면에 나타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가슴과 정신, 무엇보다 영혼을 사로잡기 위한 가톨릭과 다른 종교의 경쟁은 지난 50년 동안 치아파스에서 벌어진 모든 일의 핵심 원동력이었다. 사무엘 주교가 전통적인 보수주의자에서 사회 문제에 개입하는 활동가로 변신한 것은, 1960년대말에 농민들 사이에서 복음주의적 개신교가 퍼지는 것을 제지하기 위해선 가톨릭교회가 밑바닥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21) 라틴아메리카 전 지역, 특히 중앙 아메리카에서 그렇듯이, 가난한 이들의 관심과 애정과 지지를 끌어 내기 위한 가톨릭과 개신교 선교사간의 치열한 경쟁이 치아파스에도 있다. 그런데 전도사들의 용기와 진실된 노력, 사무엘 주교의 지도력과 헌신이 있었음에도, 오늘날 치아파스 인구의 51%만이 가톨릭교도다. 이는 멕시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낮은 수치다.(22)

 

치아파스의 억압받는 이들이 정치적 선택의 자유는 결코 얻어본 적 없지만 종교적 선택의 자유는 점점 더 크게 느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에서 보수까지 수많은 종류의 개신교가 개종자들을 끌어들였다. 개신교 교회에서는 장로교가 가장 세력이 크면서도 가장 오래 됐고, 그 뒤를 오순절교(하느님의 총회, 카리스마틱스, 엘림, 유니서),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이 따르고 있다. 또 비록 숫자는 적지만, 침례교, 루터교, 나자레스교회, 예수교회 또는 예수의 추종자들, 하느님의 교회, 세상의 빛, 평화의 왕자, 진정한 그리스도교회, 중앙아메리카교회 등도 있다.(23) 가장 최근에는 이슬람교와 모르몬교 선교사들이 개종자들을 모으고 있으며, 가톨릭이 우세한 지역에서 쫓겨난 개신교도의 새 정착 지역에서는 곧 이슬람이 숫자면에서 주요한 종교집단이 될 것이다.(24) 그래서 치아파스의 종교 지도는 역사적으로 뿌리깊은 분파와 신흥 분파의 조각을 이어붙여 놓은 형상이다. 게다가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하는 것은, 이런 종교적 성향이 정치적 정체성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여당인 제도혁명당(PRI) 또는 중도우파의 야당인 민주혁명당(PRD, Democratic Revolutionary Party)과 일치하거나 상반되는 것이다.

 

그래서 치아파스에 대한 가상공간의 설명에서는 마르코스 이외의 인물 가운데서 사무엘 주교가 주인공으로 나타나고,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에서는 그를 아주 높게 평가하지만, 현장에서 사무엘 주교는 주요 종교 행위자의 하나일 뿐이다. 다른 행위자들을 간과한다면, 인종 정치학을 가로지르는 저강도 종교 분쟁이라고들 평가하는 사태를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정치적 행위자들(The Political Actors)

종교적 행위자들이 컴퓨터 화면에서 흔히 본 그림보다 훨씬 많고 다양한 것으로 드러난 것처럼, 치아파스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의 정치적 행위자들도 훨씬 더 복잡하다. 가상의 치아파스가 선한 쪽과 악한 쪽의 분명한 범주로 나뉘지만, 훨씬 더 복잡한 이 땅의 현실은 더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심지어는 정의하거나 분류하기도 힘든 몇몇 그룹까지 등장한다.

 

가상 치아파스에서 나쁜 놈들은 세디요 정권, 에르네스토 세디요 대통령 본인, 내무장관 프란시스코 라바스티다(Francisco Labastida), 내부장관의 공식 협상대표 에밀리오 라바사(Emilio Rabasa) (그는 치아파스의 명문 출신이다), 제도혁명당 (아마도 이른바 '공룡'과 '개혁주의자'로 다시 분리됨.), 멕시코 정부, 멕시코군, 여기에 미국의 반군진압부대 또는 적어도 반군진압세력으로 은밀하게 행동하는 미국 마약단속국이다. 좋은 편은 사파티스타, 원주민, 일반적으로 농민이라고 불리는 좀더 폭넓은 범주, 여기에 비정부기구 지원자들, 사무엘 주교와 그의 교구다.

 

물론 실제로는 더 많은 행위자들이 있고 쟁점이 되는 이해관계도 더 많다. 더 완벽한 상황 분석을 하려면 치아파스 주 정부의 이해 관계를 멕시코 정부의 이익과 구별해야 하고, 국가 차원의 전략적 에너지 문제를 치아파스 지역의 경제 및 정치 권력들과 구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치아파스의 제도혁명당과 민주혁명당 지구당도 각각 중앙당과 상당히 관심이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원주민들의 인종적 차이 외에도 (이 점은 초칠(Tzotzil), 첼탈(Tzeltal), 촐(Chol), 토홀라발(Tojolabal)의 다인종 혼재 현상이 사파티스타 집단의 중요한 특징이 됐기 때문에 사건의 인터넷 판에도 반영됐다), 우리는 땅 임차기간의 중요한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이 차이는 위에서 거론한 국유지 임차 경작자, 소지주, 땅 없는 이들간의 분쟁 과정에서 빈농 내부의 이해 차이를 유발한다. 게다가 이따금 외부의 주목을 받는 게 고작이지만 핵심 집단이 하나 있는데, 스스로를 "내어쫓긴 이들의 군대"(army of the displaced)라고 부르는 이들이다. 이들은 고지대에서 빠져 나와 해변의 타파출라(Tapachula)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흩어진 피난민으로 사파티스타를 지지하지 않는 원주민이다. 이들은 분쟁지역에서 탈출한 치아파스 사람들인데, 대부분은 1993년말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의 동참 요구를 받았을 때 무기를 들지 않는 쪽을 선택한 이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지역사회에서 쫓겨났거나 십자 포화에 갇힐 것을 걱정해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제는 1만명을 훨씬 넘는 이 내어쫓긴 이들은, 멕시코 군대 또는 멕시코 정부가 원주민들로 구성한 준군사조직의 폭력에 희생될 때면 인터넷 통신에서 중심사가 된다. 그러나 이들 난민의 상당수가 사파타주의를 거부한다는 사실은 인터넷의 설명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인터넷은 비정부기구를 언제나 '시민 사회'라고 표현한다. 또 실로 많은 전자적 의사소통이 어떤 지점에서는 비정부기구에 의해 걸러진다. 하지만 시민사회라는 용어는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750개 이상의 멕시코 국내 또는 국제 비정부기구들의 다양성과 차이를 담기에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25) 대개 비정부기구들은 우리의 컴퓨터 화면에 서로 차이가 없는 진보적인 외국인과 멕시코인 무리로만 나타난다. 치아파스 분쟁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다소간 협력하며 억압받는 이들을 지지하며 이 외딴 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진실을 전하는 이들로만 표현된다. 사건의 인터넷판이 치아파스에서 활동하는 국내외 비정부기구에 대해 대체로 비판적이지 않지만, 실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같은 태도를 나타내는 건 아니다. 컴퓨터 화면에서만 치아파스에 관여하는 이들이 실제로 비정부기구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멕시코로 간 이들을 비판하기를 꺼리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치아파스에서 일하는 비정부기구 활동가들이나 기타 활동가들은 그리 과묵하지 않다.

 

1998년에 내가 다양한 비정부기구 활동가들을 인터뷰한 것으로 보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서로 좋아하지도 신뢰하지도 존경하지도 않음이 나타난다. 그 결과 이들은 함께 일하지도 않는다. 멕시코 비정부기구 소속의 많은 이들은 정부의 '합리화' 과정에서 축소된 정부기구에서 일하던 이들이다. 게다가 몇몇은 비정부기구 활동을 하면서도 과거 정부에서 일할 때 가난한 이들과 어떤 관계였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그래서 다른 비정부기구 활동가들로부터 노골적으로 비난을 받는다. 깊은 철학적 차이는 물론이고 한정된 국제 기부금을 받기 위한 경쟁과 줄다리기가, 비정부기구 활동가들 내부 관계 및 다른 기구 활동가와의 관계를 악화시킨다. 예를 들어, 사무엘 주교와 그의 교구는(외부의 진보적인 이들, 특히 진보적인 가톨릭교도들 사이에서 이들의 용기는 폭넓게 존경받고 있는데) 치아파스에서 여성 문제를 위해 일하는 비정부기구 여성들로부턴 아주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많은 여성 활동가들은 사무엘 주교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용기 있는 정치적 태도의 아이러니한 유사점을 지적한다. 이 태도가 아이러니한 것은, 두 지도자의 피임과 낙태, 여성의 권리에 대한 보수적인 사회관과 대비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몇몇 비정부기구 활동가들은 사무엘 주교의 교구와 치아파스의 가장 중요한 국내 인권단체인 프라이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센트레(Fray Bartolomé de las Casas Centre)를 통해 자신들의 일을 '여과하라는' 압력을 받는 것에 분개했다. 이 인권단체는 사무엘 주교가 세우긴 했으나 비종교적 자치 기구로 운영되어 왔는데, 1994년 봉기 이후에는 다시 사무엘 주교의 교구가 장악했다. 마르코스 부사령관과 사무엘 주교의 관계는 물론이고 사파티스타와 교회의 관계도 기복이 있다. 적어도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1970년대부터 현지에서 활동하던 농민 권리 옹호 단체들이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에 열정적으로 동조하지 않는 듯하자, 마르코스는 그들을 '제3의 길 주의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오랫동안 농민 지도자로 있던 이는 나와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마르코스는 언제나 '시민사회'를 들먹이는데, 그가 우리는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는, 농민들이 요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정부 (기관들)과 관계를 맺은 걸 타협이라고 하면서 우리를 제쳐버렸다. 그는 여기 있는 사람들 머리 너머로 멕시코의 다른 지역과 해외의 시민사회에 호소한다. 마치 치아파스에서 멀리 떨어진 이들은 타협한 적이 없기라도 한 듯 말이다!"

 

간단히 말하면, 치아파스 문제, 더 넓게는 멕시코 문제를 해결할 세력이라고 많은 치아파스 연대 활동가들이 기대하는 '시민 사회'는 사파티스타 웹사이트와 이메일 리스트를 통해 유통되는 것보다 훨씬 이념적으로 다양하고 서로 충돌하는 공간임이 드러나고 있다. 활동가들의 배열과 얽힌 이해관계 전체를 가까이에서 점검하면, 급진주의, 개혁주의, 보수주의 종교 단체 및 세속 단체가 오늘날 치아파스에서 추구하는 수많은 의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놀랄 일도 아니지만.

 

토착성(Indigenismo)

원주민의 정체성을 신장하고 이들의 자치를 추구하는 것이 인터넷 통신에서는 아주 명백한 목표 같아 보인다. 하지만, 멕시코에 원주민이 650만명이나 있고(26) '원주민 문제'가 멕시코가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중심 문제였다는 점에서, 자치 사회를 구성하라는 국제 사회의 거의 일치된 요구가 연상시키는 것보다 이 문제는 훨씬 논란이 큰 것임이 밝혀지고 있다.

 

자치에 대한 국제 사회의 열광적 지지를 따져보기 전에, 이런 환경에서 멕시코 혁명(1910~1917)(역5) 과정에서 등장한 개념과 이 개념이 만들어낸 공공 정책에 대해 약간이라도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할 것이다. 최소한 우리는 멕시코 민족주의의 역사적 정체성을 원주민의 과거와 함께 인식할 필요가 있다.(27) 혁명의 여파로, 이 땅의 원주민 뿌리에 대한 이해 및 관심이 되살아나고 스페인에 맞선 봉기를 이끈 목테수마(Móctezuma)의 조카 쿠아우테목(Cuauhtémoc)이라는 인물이 재조명되고, 혁명 이후 지식 사회의 원주민 역사 찬양(새 혁명 정부가 발간한 교과서 또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다비드 시키에로스(David Siquieros),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e Clemente Orozco) 같은 멕시코 벽화가의 작업에 나타나는 찬양)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근대 멕시코 원주민들의 미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책 논란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다.(28)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논의는 원주민 사회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인디언 문제' 정책 수립에 대한 자의식이 거의 없는 메스티소 또는 백인 곧 '원주민 옹호론자들'간에 벌어졌다. 놀랄 것도 없이 진보적인 멕시코 지식인들과 정책결정자들은 언제나 이 문제를 놓고 심하게 대립했다. 문화적 생태주의자들, 인종차별 폐지주의자들, 마르크스주의 원주민 옹호론자들이(이들은 인디오와 메스티소의 관계에서 민족 문제를 계급 문제와 대등한 것으로 이해했다.) 혼합주의적 토착주의자들과 정책 형성 주도권을 놓고 대결했다. 혼합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쥐었으며, 이들은 지역 개발 사업과 학교, 의료시설, 도로 건설 사업을 통해 소외당하던 원주민들이 나라의 경제, 정치, 사회적 영역에 동참하도록 유도했다. 이와 동시에, 그들의 전망을 실현시키려면 원주민 언어 사전 발간과 수공예 촉진 같은 일을 통해 원주민 문화를 '보존'하는 게 필요했다.

 

하지만 원주민들을 멕시코라는 국가와 시장에 통합시키려는 바로 이 시도는, 제도혁명당에 의한 공작, 인디언 아닌 이들에 의한 총체적 착취, 원주민의 국가에 대한 의존 심화의 길을 열어줬다. 이런 상황에서 통합주의적 정책의 부작용이 드러나는 가운데 1970년대 치아파스 고지대에서 종교 활동을 펼친 전도사들의 주 목표는 자치능력 계발이었다. "민족적 차이를 지워버리는 대신 초월하는 데' 맞춰진 구조를 규범삼아 다양한 원주민의 다민족 지역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로스 알토스 지역 전도사들의 핵심적인 목표였다. 닐 하비(Neil Harvey)가 서술한 것처럼 "지역사회 밀착은 타고난 전통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투쟁성과 종교적 신념에 밑바탕을 둔 것이었다. 민족 정체성은 정치적 단결의 기초로 재창조됐다."(29)

 

자치라는 개념이야말로 사파티스타가 제안하고 1996년 2월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과 멕시코 정부 대표간에 체결된 산 안드레스(San Andrés) 협정에 포함된 원주민 자치를 떠받치는 것이다. 이 협정은 "자치라는 맥락에서 원주민의 자결권을 인식하고 원주민의 참여와 정치적 대표성의 신장, 사법제도에 대한 접근의 보장, 원주민의 문화 교육 경제 활동을 촉진할 것"을 제기한다.(30)

 

세디요 정권이 이 협정에 서명하고도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은 합의를 깼다. 또 산 안드레스 협정 이행 요구가 온 땅의 사파티스타 지지자들의 규합 지점이 됐다. 이는 또 멕시코 전역의 원주민들을 선동하는 주제가 됐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설명을 읽어보면, 전세계 진보진영의 의견이 모두 바로 이 모델 뒤에 굳게 버티고 있는 것 같다. 또는,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San Cristobal de las Casas) 교구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총대리인 파드레 곤살로 이루아르테(Padre Gonzalo Iruarte)가 1998년 5월 인터뷰에서 나에게 말했듯이, "원주민들의 자치 능력을 존중하지 않는 뿌리깊은 온정주의자들이나 이 합의에 담긴 원칙에 반대하는 쪽에 설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구상에 대한 비판이 있다. 멕시코의 '원주민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뿌리깊은 의견 불일치가 이 문제에 대한 각 진영의 태도를 특징 짓는다. 내가 고지대 원주민 사회에 관여하는 치아파스의 정치 활동가와 인류학자들을 인터뷰했을 때 두드러진 것이 자치에 대한 열정이 없다는 점이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자치에 대한 다른 전망 제시를 수용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워낙 강한 탓에 치아파스에 자리잡은 이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열정적으로 제시했으나,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아예 꺼려했다는 사실이다. 한사람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자치라는 개념은 가공의 것이다. 왜냐하면 지방 토호세력(31), 계급, 종교, 정치적 연합체와 불화를 일으키는 세력들, 모든 부패하고 폭력적인 사람들은 원주민 사회의 외부세력이며 지역사회가 자치력을 확보하면 이들을 따돌릴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원주민 사회 밖에 있지 않다. 이들은 이미 지역 사회 내부에 깊게 뿌리박고 있으며, 자치 정부는 힘 없는 이에 대한 권력자들의 지배, 가난한 이에 대한 부자의 지배,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를 강화하고 둘 사이의 분리를 강화할 것이다."

 

다른 이는 이렇게 말했다.

 

"웬일인지 이 제안은 국제적으로 큰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자치는 답이 아니다. 나는 '캐나다 모형'에 대해 많이 들었는데, 이런 말들은 보통 이 모형을 멕시코에 적용하면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지역사회를 외부와 단절하고 치아파스의 거대한 자연자원을 자기들끼리 착취할 것처럼 들린다! 유일한 문제는 로스 알토스의 원주민들이 석유나 가스, 목재, 수력발전을 깔고 앉아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자연 자원은 다른 지역에 있다. 고지대와 셀바의 자원은 비참할 정도로 빈약하다. 내 생각에 필요한 것은 자치가 아니라 진지한 재분배 정책이다. 자치는 가난해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비참함 속에 더 갇히는 것을 뜻할 뿐일 수도 있다. 우리가 요구해야 하는 것은 가장 가난하고 가장 손해보는 지역이 더 많은 몫을 얻는 것이다. 멕시코 정부가 산 안드레스 협약 가운데 받아들일 의지가 있는 유일한 것이 자치 제안이라는 점은 별로 놀랍지 않다. 원주민이 자신들 속에 갇혀 있다면 정부는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32)

 

또 다른 인터뷰 상대는 더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이 논의에 참여하는 북미인들은 특히 자치에 열광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은 종종 전혀 다른 현실에나 어울리는 자신들의 개념을 끌어들인다. 초칠 사람들이 카지노를 지을 것이고 잘사는 멕시코인들이 날아와 수백만 페소를 노름판에 던지고 갈 거라고 생각하는가? 이 나라가, 주류 사회가 죄책감 때문에 수십억 달러를 새로운 지역 자본 건설을 위해 지원하고 1인당 수만달러꼴로 자치 원주민 정부를 지원하는 캐나다 같다고 상상하는가?"

 

진짜 문제는 외국인이 이 문제를 논해도 되느냐도, 그렇다고 외국의 원주민 투쟁 경험이 멕시코와 관련이 있느냐도 아니다. 문제는 치아파스의 원주민이 자치로 더 살기 좋아지느냐다. 아니면 그들이 오늘날보다 더 나빠지지 않느냐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인디오라는 필수적인 개념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참여해야 하는 그런 식의 토론이 아니다.

 

여기서 이야기되는 개념은, 1998년 5월 자칭 인권 감시자라는 134명의 이탈리아인들이 '소모스 토모스 인디오스 델 문도'(somos todos indios del mundo) 곧 '우리 모두 세상의 인디언들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형광 녹색 조끼를 입고 치아파스에 왔을 때, 그들이 표현한 인디오라는 본질주의적 개념과 같은 것이다. 원주민에 대해 국제 사회가 느끼는 매력을 검토하면서 앨리슨 브리스크(Alison Brysk)는 이렇게 썼다.

 

"타자로서의 인디언이라는 이미지를 라틴아메리카의 정책입안자들과 국제 여론이 다르게 봤다. 같은 동포들에게 인디언의 모습은 위협적이고 인간 이하이거나 단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북미와 유럽인들에게 그 모습은 매혹적이고 이국적이고 낭만적이다."(33)

 

치아파스 원주민에 대해 낭만적이고 본질적인 개념을 지닌 이들은, 인디오들을 획일적인 한 무리로 봄에 따라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자치 공동체가 형성될 가능성을 고려하는 데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인들이 소수자에 대한 편협함과 소수자 배제의 오랜 역사에 익숙하더라도, 심지어 유럽의 인종 청소에 익숙하더라도, 그들이 '다시 매력을 느끼게 된' 인디오 이미지 속에는 치아파스 원주민 사회에 폭력과 편협함이 존재할 가능성을 인정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사실 치아파스의 지도상에는, 종교나 정치적 이유로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에서 쫓겨난 원주민들의 정착지가 곳곳에 흩어져있다. 주목할 것은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일부 논의가 이 문제에 대해 너무 과소 평가한 점이다. 존 글레드힐(John Gledhill)은 자신의 글에서 "체질적인 개인주의와 원주민의 공동체주의 사이의 해소되지 않는 긴장"을 걱정했다.(34) 그러나 대부분의 치아파스 연대 네트워크 구성원들에게 자치 사회의 소수자 권리 문제는 결코 쟁점이 되지 않는다.

 

인터넷을 이용한 혁명?(Revolution by Internet?)

치아파스의 투쟁과 전자적 의사소통의 관계는 두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하나는, 앞부분에서 논했듯이 치아파스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정보가 단순화하고 평면화하고 심지어 가끔씩은 인터넷을 통해 재전송되는 과정에서 왜곡돼 전달되는 문제이다. 물론 이 문제는 월드 와이드 웹에서 사람들이 사물에 대해 익히는 방식에 관한 질문과 관련된다. 정보원이 무엇인가? 다른 질문은 우리가 전자적으로 받은 정보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것이다. 인터넷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정치 활동을 하는가?' 편안한 안방을 벗어나지 않고 빗속에 서있거나 행진하지도 않으면서 우리가 운동에 '참여' 할 수 있을 때 이는 뭘 뜻하는가?

 

정보원(Sources)

다양한 네트워크를 통해 번역되고 요약되고 전달되는 것을 세심히 검토해보면, 거의 대부분이 멕시코시티에서 발행되는 좌파 일간지 <라 호르나다>(La Jornada)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라 호르나다>는 처음부터 사파티스타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으며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은 여러 측면에서 이 신문에 의지한다. 사파티스타가 인터넷에 직접 연결해 셀바에서 노트북 컴퓨터로 자신들의 소식을 전한다고 대중들이 알고 있지만, 사실은 <라 호르나다>가 그들의 소식을 중계해준다. 린 스티븐(Lynn Stephen)은 이 사실을 이렇게 썼다.

 

"실제로는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이 전자우편이나 인터넷에 직접 연결하지 않는다. 인터넷 사이트 'EZLN.ORG' 관리자 저스틴 폴슨(Justin Paulson)에 따르면 처음에 라 호르나다를 포함한 몇몇 신문에 팩시밀리로 소식이 전달되며 신문들은 이를 지면에 싣는다. 많은 인터넷 사이트들이 그 다음에 라 호르나다의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이를 받아간다.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의 성명이 인터넷에 빠르게 올라오기 때문에 마치 해방군이 직접 인터넷에 올린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내가 사파티스타 지역사회를 방문했을 때 치아파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들에게 알려준 적도 종종 있다. 심지어는 40킬로미터 밖에 안 떨어진 곳 소식조차도 말이다."(35)

 

사파티스타가 자신들의 소식을 세상에 알릴 때만 <라 호르나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치아파스에서 인터뷰한 많은 사람들에 따르면, 이 신문은 사파티스타에게 치아파스 경계 또는 멕시코 경계 밖의 사람들이 더 잘 이해하도록 메시지를 다듬는 걸 돕는 핵심 자문역을 수행한다. 게다가 라 호르나다는 사파티스타와 특별한 관계가 있어서, 어떤 이들은 이 특별한 관계가 이 신문의 보도에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1998년 4월에 만난 치아파스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농담조로 <라 호르나다>를 '치아파스 가제트(관보)' 또는 '오코싱고 타임스'라고 부른다. 이 신문이 어떤 지역 소식보다 치아파스와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에 대한 소식을 많이 싣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수도 멕시코시티 소식보다 많을 지경이다. 물론 여기 살면서 두개의 '지역 신문'을 본다는 점에서 편리하다. 그런데 나는 <라 호르나다>의 기사 가운데 상당 부분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들이 기사를 조작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이 아주 편파적으로 보도한다는 거다. 사파티스타 동조자 2명이 협곡에서 주검으로 발견되면 이 사실은 언제나 신문에 난다. 하지만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 지지자가 아닌 농민 두명이 주검으로 발견됐다고 치면, 이 신문은 가끔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는다."

 

편집 방향에서 볼 때 이 신문은 몇몇 요소에서 좌파에 가깝고 다른 부분에서는 좌파에 비판적이다. 이 신문이 좌파보다 사파티스타를 더 선호하기 때문에 종종 좌파의 대안적 전망을 도외시하는 일이 생긴다. 예를 들면, 라 호르나다의 의견난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이들은, 자신들의 글이 선거와 관련해 사파티스타보다는 민주혁명당에 더 공감하는 내용일 경우 신문에 실리지 않는 일을 당해 당황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은 구체적으로, 선거는 사기이며 반동적인 이해에 이롭기 때문에 우선 순위를 두지 말아야 한다는 사파티스타의 주장보다 치아파스 지역에서 선거 참여를 촉구하는 민주혁명당의 주장에 더 공감하는 경우이다.

 

1994년 선거 참관인으로 참여했던 나는, 치아파스 선거에서 문제는 선거 부정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마지막 사람일 것이다.(36) 치아파스의 지배계층이 역사적으로 선거를 자신들의 정당성 없는 정치권력 장악을 강화하는 데 이용해왔기에,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이 1994년 선거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지지자들의 선거 참여를 독려하지 않은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선거 참여냐 의회 밖 활동이냐의 문제가 좌파의 아주 오래된 논쟁거리이기는 하지만, 이 문제를 논하는 것 자체는 여전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1996년 사파티스타는 선거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고, 그 때 민주혁명당은 분쟁지역 주민들이 선거에 참여한다면 툭스틀라 구티에레스 지역 의회를 장악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1998년 5월 나는 민주혁명당 치아파스 지부 지도자인 힐베르토 고메스 마사(Gilberto Gómez Maza)를 인터뷰했는데,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민주혁명당은 주 전체 지자체 111곳 모두에서 조직을 갖추고 있다. 우리가 얻은 의석에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이 장악한 지역의 사람들이 투표했다면 얻었을 의석을 합쳐 계산하면 야당인 국민행동당(PAN) 의원과 공동으로 의회 다수를 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농촌지역 학교 선생님들의 아들인 고메스 마사는 국립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치아파스 고지대 원주민들을 위해 일하는 몇십년만의 첫번째이자 유일한 소아과 의사가 됐다. 로스 알토스에서 가난과 무시를 목격하고는 정치활동에 뛰어들어 멕시코노동자당과 에베르토 카스티요(Heberto Castillo)의 추종자가 됐고 이어 카스티요가 1988년 대통령선거에서 쿠아우테목 카르데나스(Cuauhtémoc Cárdenas)를 지지하기로 하자 민주혁명당에 들어갔다. 그는 "우리가 싸우는 것은 권력 관계를 바꾸기 위해서"라며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의 반 선거적 태도만 아니었다면 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한참 진전할 수 있었을 거다"라고 주장했다.

 

고메스 마사와 대화하면서 나는 치아파스의 미래를 걱정하는 외국 활동가들은 적어도 이런 주장을 검토하고 논쟁을 벌이고 싶어할 거라고 느꼈다. 그러나 외국의 치아파스 연대 모임들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 적당한지를 대부분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충실히 논의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선거참여를 지지하는 이들은 보통 자신들의 주장을 지면을 통해 드러내지 않으며(37) 그렇게 하더라도 세상에 이 소식을 전하는 <라 호르나다>가 싣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라 호르나다>의 편파성은, 만약 멕시코 외부의 치아파스 연대 모임들이 비교 분석할 다른 정보원을 갖고 있다면 문제가 안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네트워크를 통해 오고 가는 번역물이나 요약물을 세심히 살펴보면, 전자적으로 전달되는 대부분이 <라 호르나다>에서 나온 것들이다. 확실히 이것은 <라 호르나다>의 한계는 아니다. 이 신문은 민주혁명당과 노조, 다른 좌파의 투쟁을 폭넓게 보도한다. 문제는 인터넷을 통해 유통하기 위해 선택되는 정보의 한계다.

 

놀라운 것은, '부르주아 언론'의 보도를 의심하고 다른 좌파가 만들어내는 분파적 전망에 대해서는 적당한 조정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보는 것은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이 정보도 특정한 정치적 전망의 렌즈로 거르기는 마찬가지인 데 말이다. 1996년부터 97년까지 캐나다에서 치아파스 연대 활동가 10여명을 인터뷰하면서, 나는 인터넷 사이트 관리자가 누구인지 (이름을 빼고), 그들의 정치관이 뭔지, 또 왜 사람들이 몇몇의 소수가 관리, 감독하는 몇개의 사이트에 의존하면서 불편을 느끼지 않는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처럼, 나는 텍사스대학의 해리 클리버(Harry Cleaver) 같은 사람들을 존경하며 그에게 감사한다. 그들은 첫 봉기가 일어난 때부터 지금까지 치아파스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해주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우리가 접하는 치아파스와 멕시코의 시민사회 전반에 대한 글은 해리 클리버 또는 우리가 그들의 정치적 전망을 전혀 모르는 다른 몇몇 사람들이 고르고 전달한 것이라는 인식이 너무 약하다는 점이다. 그들의 정치적 전망 가운데 우리가 아는 것은 인터넷의 힘과 인터넷이 '사이버공간의 시민사회'를(38) 건설할 잠재력에 대한 열정적인 신념뿐이다.

 

불공평한 접근 문제(The problem of unequal access)

이는 우리가 진보적인 세계의 견해에 공평하게 접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만들어 낸다. 권력과 의사소통에 대한 전통의 지혜는 통신수단에 대한 접근권이 매우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이 보통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진보적인 주장이 부자와 권력이 조정하는 보수, 주류 언론에 등장하지 않는 맥락에서다. 이런 문제를 논할 때 인터넷은 동등한 구조를 갖고 있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부자와 권력자들과 대응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길을 여는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기회로 평가된다. 인터넷이라는 수단을 통해 다른 진보적인 활동가들과 연결 통로를 만들고 가상공간 속에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게 된다고들 한다. 클리버 등등은, 인터넷이 정부의 검열을 피해갈 가능성을 열고, 전자적 장벽을 잘라내고 정보를 기업과 정부의 지배에서 해방한다고 주장한다.(39)

 

이것이 전자 통신의 성과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멕시코 내 진보 단체들이 여론에 접근할 전자적 수단 확보에서 공평한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주장도 있다. 사파티스타가 언론에 능숙한 의사소통 천재라는 당연한 평가를 받고 있지만 다른 좌파 운동이나, 푸에블라(Puebla)와 게레로(Guerrero)와 오악사카(Oaxaca)에서 활동하는 인민해방군(EPR)(역6) 같은 다른 무장혁명세력은 자신들의 웹 관리자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마르코스 같은 돋보이는 대변인이 없어서만이 아니다. 그 결과 그들의 전망은 우리 앞에 컴퓨터 화면을 통해 등장하지 못하며 그들의 활동은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

 

좌파에서 가장 중요한 당인 민주혁명당에 대해 멕시코의 언론 전문가 한명은 "멕시코의 전통 좌파는 기술을 혐오하며, 전자적 통신수단을 어떻게 활용할지 아이디어도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이유가 뭐든지, 민주혁명당은 인터넷을 활용하는 데 아주 느리며, 그 결과로 이 당이 전자적 자료에 등장하면 그것은 주로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에서 나오는 자료에 뭔가 부족한 당이라는 맥락으로 등장할 때다. 인터넷에 이렇게 편파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전세계의 동조자들 가운데 두 쪽의 성명에 바탕해서 각각의 상대적 장점, 다양한 전략과 전술의 적합성을 따질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대리 참여(Vicarious Participation)

전자적 통신 수단을 정치적으로 활용해 동료 활동가들과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에 대한 흥분과 만족의 강도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변치 않고 있다. 글을 올리고 그에 답하는 글을 올리고, 탄원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고 항의성명에 동의하고 (시위 등의) 대중적 집결 경험을 나누는 것 모두가 전세계 진보세력에게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을 만들어 줬다. 특히 사파티스타 지지자들 사이에서 더 그렇다. 실로 전자 통신수단이 조성한 정치적 업적에 대한 인식은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 연대 활동가들 사이에서 가장 민감하다.

 

하지만 이 연결됐다는 느낌의 상당 부분은 허황된 것인데, 연대행동 차원에서 이뤄지는 전자적 의사소통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정치 참여가 단추를 눌러 이름을 목록에 올리는 것으로 이뤄진다면 이런 행동이 꼭 사람들을 단결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탄원 지지자는 다른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게 되고, 아마도 신문광고료를 기부할 수도 있다. 서명을 거부하는 것조차 탄원집회 옆을 지나가는 사람과 잠깐이라도 논란을 벌일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제는 정치적 견해를 거부하는 것조차 삭제 단추를 누르는 것만으로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극도로 낮은 개입도 상당한 정치적 효과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렇게 손쉬운 방법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권력자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한자리에 수천, 수백, 수십명의 활동가가 모여 같은 주장을 펴는 것과 비교해 약하기는 하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인터넷을 쓰는 우리는 토론 모임에 들어가고 대화방에 들어가 '동지'를 만날 수 있다. 과거에 우리가 정치적 모임에서 일할 때는 꼭 했던 서로의 차이 확인도 필요 없이 말이다. 더 이상 서로 꼭 만나야하는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주장을 설득할 필요도 없다. 토론 주제에 싫증이 나면 그냥 접속을 끊고 나오면 된다.(40) 이런 정치 참여로 발생하는 익명성, 모임에서 즉각 빠져 나올 수 있는 가능성, 연대를 표시할 때 노력이 거의 필요없다는 점은 인터넷 활동의 매력인 동시에 한계다. 전자적 전투성은, 집을 나서기 위해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된 컴퓨터 의자에서 일어나는 노력조차 없이 운동에 참여하고, 우리가 기억하는 세상의 탄압받는 사람들과 통신할 수 있는 수단을 준다! 치아파스 주변의 연대활동조직에서 널리 존경받는 린 스티븐은 전자적 통신의 또 다른 한계를 지적하면서 이것이 실로 "풀뿌리 활동의 걸림돌"이 아니냐고 묻는다.

 

"매일 수천명의 미국인들이 치아파스에서 최신 소식을 받고 다른 이들과 대화방에서 만나면서 뭔가 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들은 상황파악을 하고 있다. 그러나 통신에서 이끌어낸 것 같은 행동은 중요한 정치적 압력을 형성하는 전술과는 거리가 멀다. 통신에 연결됐다는 느낌은 높은 수준의 지속적인 정치적 압력 같은 것이 생기게 하지 못하는 일이 잦다. 이런 지속적인 압력은 미국 의회에 장기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인데 말이다... 교회 지하실에 모여 지역 의원을 찾아가 전달할 자료를 만드는 것은, 상원의원에게 치아파스의 군국화에 미국이 참여하는 것과 관련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전자우편 첨부파일을 보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41)

 

스티븐은 인터넷을 통해 협력하는 활동 가운데 어떤 종류는 실제로 "풀뿌리 조직활동을 제한"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인터넷에서 시민 불복종 운동을 벌이고 팩시밀리를 보내고 전자우편으로 사파티스타 투표에 참여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얼굴을 마주 대하고 풀뿌리 조직화를 하는 것의 대체물은 아니다. 치아파스에 강력한 기반을 갖추고 있는 멕시코 내 모든 단체가 참여하는 광범한 전국적 집회를 개최하는 데 4년 이상이 걸렸다는 것은, 인터넷의 정보 과잉이 전국적 네트워크 형성의 시급함을 약화시켰음을 내비친다.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이것은 장기적인 계획 수립으로 이어지지 않는다."(42)

 

전자적 정치운동의 가장 열성적인 제안자인 해리 클레버조차 인터넷에 의지하는 것의 한계 몇가지를 인정한다.

"(인터넷의 힘)의 한계는 인터넷 범위의 한계 (모든 사람이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지 않음을 우리가 주지하듯이), 연결 방식 이 두가지에 있다. 인터넷에는 많은 종류의 투쟁에 대한 정보가 널려 있는데, 이 각각의 투쟁은 사파티스타와는 물론이고 서로간에도 연결되지 않은 상태다.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연결 수단이 있다는 것은, 실제로 연결될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보와 연결수단이 보완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데 효과를 발휘한다는 보장도 없다. 인터넷에 널려 있는 사회투쟁에 대한 모든 정보원에 접근할 수 있는 정치 활동가조차도 주기적으로 그 정보의 양에 압도당한다. 인터넷이 확대되면서 또 인터넷을 투쟁에 이용하려는 집단이 늘어나면서, 이 문제는 빠르게 늘어날 것이다..."(43)

 

결론(Conclusions)

치아파스 연대 활동가들이 지속적으로 정보를 얻고 자신들의 정치적 행동의 안내를 받기 위해 인터넷에 의존하게 된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점검했다. 이 새로운 기술은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용감하지만 아주 취약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국제적 노력을 상당히 쉽게 만들어 준다. 인터넷 행동주의는, 벌어지는 사건에 영향력을 강화하도록 사람들을 연결하기보다는 거의 존재하지도 않는 연결됐다는 느낌과 정치적 효과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낸다. 인터넷을 통해 전달되고 다시 중계되는 사건의 모습은, 연대 활동가들한테 정보의 양에 압도당한다는 느낌을 남긴다. 이와 동시에 그 정보는 종종 너무나 편파적이어서 잘못해석하게 한다. 치아파스에 대해 돌아다니는 너무나 단순화한 사건의 모습은 억압받는 사람쪽에 비중을 더 두는 결정을 상대적으로 쉽게 하게 만든다. 그러나 거기서 어떻게 진전할 것인지, 또는 무엇을 할 것인지의 문제는 아주 어렵다.

 

전세계 상당한 숫자의 사람은 치아파스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여할 준비가 되어 있다. 문제는 그들이 치아파스의 복잡함을 이해하고 치아파스가 멕시코에 속해 있는 방식을 이해하고 또 멕시코가 국제 질서 속에 자리잡고 있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더 시간을 투여할 것이냐 여부다. '신자유주의의 돌진'과 '신자유주의에 대항한 대중적 투쟁'을 전세계 운동 세력들을 묶는 조직화의 개념으로 활용하려는 의지는 아주 강하다. 그러나 이런 환원주의적 접근은 과거의 환원주의적 모형들이 그랬던 것과 똑같은 좌절과 실패를 불러오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치아파스에서 펼쳐지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약탈'로 축소될 수 없으며, '원주민 정체성 문제'로 축소될 수는 더욱 없다. 우리는 이렇게 주장하는 접근법을 조심해야 한다.

 

인권을 존중하라는 아주 근본적인 호소는 상황의 특수성을 깊이 이해하지 않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원대한 기획이라면 진지한 분석이 필요하다. 치아파스에 대한 특정 이념 몇가지만을 계속 전달하고 반복함으로써 생기는 인식 및 준비 부족은 그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라는 점은, 1998년 5월에 134명의 이탈리아 연대 활동가 가운데 108명이 추방당한 이후 발생한 반발에서 잘 나타난다. 이탈리아인들의 "우리는 모두 원주민이다"는 식의 접근법의 모순은 포위된 사파티스타 여성들에 대한 우려와 지지를 표현하기 위해 그들이 타니페를라스(Taniperlas)에서 행진했을 때 금방 명백해졌다. 이탈리아인들이 나타나자 인디오들이 그들을 공격하고 난폭하게 밀어붙인 것이다. 그들은 원주민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는 인디오들이었는데, 제도혁명당 지지자들이며 "우리는 모두 원주민이다"는 말이 제시하는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에서 한참 먼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인디오인 것도 분명하다.(44)

 

혁명 이후의 멕시코 민족주의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이탈리아인들은 덫에 걸렸다. 결국 이 사건은 외세의 침략을 잘 아는 나라에 대한 '외세의 침략'으로 그려졌으며, 세디요 정권이 민족주의적 방식을 써먹고 외국인 혐오를 강화할 수 있게 했다. 이 정권은 치아파스 주민들에 대한 국제적 우려와 관심에 오직 이런 식으로만 대응했다.(45) 이 불행한 결과는 멕시코와 치아파스에 대한 아주 편파적이고 표피적인 이해에 바탕한 연대활동 곧 가상공간의 치아파스만 아는 연대활동이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단언컨대, 사건에 대한 심하게 단순화하고 평면적인 설명을 유포하는 것은 방어할 수단이 없는 이들을 향한 전쟁 와중에 차이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어떤 이들은 주장할 것이다. 인터넷에서 차이에 대한 공개 토론이 벌어지면 멕시코 정부가 외국 진보세력의 압력을 물리치는 데 이를 악용할 것이라고 우려할 만한 측면은 있다. 과거 세대의 좌파 가운데 많은 이들이 소련 또는 중국 밖으로 차이를 노출시키면 악용될 수 있다고 걱정한 것과 똑같이 말이다. 연대활동가들이 좌파 세력간 또는 원주민사회 내부 또는 치아파스의 비정부기구간 분열과 분쟁을 거론하지 않으면, 멕시코 정부가 이를 모를 것이고 분노와 분열을 악용해 상황을 장악하고 운동을 해체하려 하지는 않을 거라고 정말 믿는 한 좌파의 오랜 문제점은 더 심해지기만 할 것이다.

 

이 주장을 평가할 때 우리는 세디요 정부의 대중 동원 및 반란 진압 전술의 핵심 고안자가 아돌포 오리베 베를링게르(Adolfo Orive Berlinguer)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1970년대에 오리베는 고지대에서 대중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고 전도사들의 의식화 활동과 마오주의자들의 조직화 노력을 조율하는 데 있어서 개인으로서는 아마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파리에서 샤를 베틀랭(Charles Bettleheim)과 함께 공부한 오리베는 멕시코로 돌아와 대중정치 성향의 지도자가 됐고, 이어 마오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전선의 지도자가 됐다. 이 운동에는 마르코스도 참여했다. 오리베는 사무엘 주교의 직접적인 요청에 따라 치아파스에 와서는 농민 중심의 운동을 조직했는데, 이 운동은 마오주의자, 급진적인 교사, 해방신학자, 노동운동가가 뭉친 것이었다.(46)

 

1980년대말에 오리베는 카를로스 살리나스를 위해 일했는데, 분쟁지역의 물리적 지형과 정치적 지형을 상세히 아는 점 때문이었다. 또 1994년에는 세디요가 치아파스의 민중봉기 대응을 이끄는 데 그를 기용했다. 오리베가 역사적인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간에 모든 분열을 알고 있기에, 치아파스의 수많은 활동가들의 전망 차이를 우리끼리 솔직하고 공개적으로 논하지 않으면 이런 불일치가 정권에게는 비밀로 유지될 거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국제 연대는 목숨을 걸고 정의를 요구하는 수천명의 생존에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지원은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외부인이 할 때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치아파스를 수사로 여기는 이들이나 심한 단순화로 실제 상황을 아주 어렴풋이 닮았을 뿐인 가상의 사건과 인물에 그냥 만족하는 이들이 지원에 나설 때 효과적인 것이 아니다. 치아파스에 대한 국제적 우려 표명은 의문의 여지없이 사파티스타와 그 지지자들에 대한 공격을 억제하고 제한하는 일을 했으며 물론 많은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효과적인 인권 운동에는 무엇보다 옳고 믿을 만한 정보가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매력 회복'을 덜 생각하고 대신 남부 멕시코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을 더 생각하려 할 것이다. 비록 그 껄끄러운 현실의 일부는 매혹적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위기에 빠진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데 외국인이 할 수 있는 중요한 구실을 위태롭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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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고메스 타글레(Silvia Gómez Tagle), 스티브 헬먼(Steve Hellman), 피터 아이브스(Peter Ives), 콜린 레이스(Colin Leys), 리오 파니치(Leo Panitch), 스콧 로빈슨(Scott Robinson), 에미코 살디바르(Emiko Saldivar), 시드 태로(Sid Tarrow), 찰스 틸리(Charles Tilly)의 조언에 감사한다. 더글러스 찰머스(Douglas Chalmers), 루인 골드링(Luin Goldring), 론 헬먼(Ron Hellman), 켄 사프(Ken Sharpe)에게는 이 생각을 세미나에서 펼칠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한다. 또 스티브 헬먼과 피터 아이브스의 지속적인 격려와 자료 제공에 감사한다. 이 연구에 재정적인 지원을 해준 캐나다 사회과학 및 인문학 연구 협의회에도 감사한다.

 

주석

1... See Lynn Stephen, "In the Wake of the Zapatistas: U.S. Solidarity Work Focused on Militarization, Human Rights, and Democratization in Chiapas," Paper presented at a Conference titled, "Lessons from Mexico-U.S. Bi-National Civil Society Coalitions," 9-11 July 1998, University of California, Santa Cruz.

린 스티븐, "사파티스타를 쫓아: 치아파스의 군사화, 인권, 민주화에 집중한 미국의 연대 활동", "멕시코와 미국 두나라간 시민사회 연합의 교훈" 회의에 제출된 논문 1998년 7월 9-11일, 캘리포니아대학, 샌타 크루즈.

 

2... Il Manifesto, 28 March 1998 . The debates appeared in this issue and in Il Manifesto, 10 February 1998, and 1 March 1998.

일 마니페스토, 1998년 3월28일. 논쟁은 이 지면과 1998년 2월10일치, 1998년 3월1일치에 실렸다.

 

3... Michael Lowy, "Sources and Resources of Zapatism," Monthly Review,, Vol.49, No.10, March 1998, p. 1-2.

마이클 로위, "사파타주의의 원전과 자료", 먼슬리 리뷰, 1998년 3월 49권 10호, 1-2쪽.

 

4... Throughout this article, I am using the term "internet" to refer to the most commonly-accessible sites that people interested in Chiapas would be most likely to find while surfing the world wide web. For example, using "Chiapas" as a keyword on various search engines provided in the most common web browsers (e.g. Excite, Infoseek, Lycos, or Yahoo), I found that a semi-systematic survey of the materials available tends to produce the same sites - and links - over and over. Therefore, the material to which I refer throughout this analysis, would be found on the following sites, or by following the links provided in them.

이 글에서는 "인터넷"을 치아파스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월드 와이드 웹을 돌아다니는 동안 가장 찾을 가능성이 높은 사이트들을 지칭하는 데 쓸 것이다. 예를 들어, 흔한 검색 사이트에서 (익사이트, 인포시크, 라이코스, 야후 등) "치아파스"라는 검색어를 넣고 찾으니, 똑같은 사이트나 링크를 보여줬다. 그래서 내가 이 분석에서 근거로 삼은 자료들은 다음의 사이트에 나타나거나 이들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링크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Accion Zapatista (http://www.eco.utexas.edu/faculty/Cleaver/zapsincyber.html#Accion Zapatista) AMDH Bulletin (http://www.lanic.utexas.edu/la/region/news/arc/amdh/1995/0000.html) Chiapas 95 (http://www.eco.utexas.edu/faculty/Cleaver/chiapas95.html) Chiapas 1997 (http://mac.theramp.net/Domcentral/justice/chiapas.htm) Chiapas Index (http://www.ifconews.org/chorgndx.html) Chiapas Menu (http://www.indians.org/chiapas/) FZLN (http://www.eco.utexas.edu/faculty/Cleaver/zapsincyber.html#Frente) Mexico Solidarity Network (http://www.mexicosolidarity.org/index.html) SIPAZ Servicio Internacional para la Paz(International Service for Peace) (http://www.nonviolence.org/sipaz/sipazf.htm) IYA BASTA! (http://www.ezln.org/) Zapatistas in Cybertspace (http://www.eco.utexas.edu/faculty/Cleaver/zapsincyber.html)

 

5... Thomas Benjamin, A Rich Land, A Poor People: Politics and Society in Modern Chiapas, (Albuquerque: University of New Mexico Press, 1996); and George A. Collier with Elizabeth Lowery Quarantiello, Basta! Land and the Zapatista Rebellion in Chiapas, (Oakland, CA: Food First, 1994), pp. 16-7; Neil Harvey, Rebellion in Chiapas: Rural Reforms, Campesino Radicalism and the Limits to Salinismo, (La Jolla, CA: Center for U.S.-Mexican Studies, UCSD, 1994); and Adolfo Gilly, Chiapas: la razón ardiente, (México, D.F.: Ediciones ERA, 1997).

토머스 벤저민, 부유한 땅, 가난한 사람들: 근대 치아파스의 정치학과 사회, (알부케르케, 뉴멕시코대학 출판부, 1996); 조지 A. 콜리어 및 엘리자베스 로웨리 콰란티에요, 바스타! 치아파스의 땅과 사파티스타 반역, (오클랜드, CA: 푸드 퍼스트, 1994), 16-17쪽; 닐 하비, 치아파스의 반역: 농촌 개혁, 농민 급진주의와 살리나스주의의 한계, (라 호야, CA: 미국-멕시코 연구센터, UCSD, 1994); 아돌포 히이, 치아파스: 열정적 이성, (멕시코, D.F.: ERA판, 1997).

 

6... Harvey, pp.10-14; John Womack Jr. Rebellion in Chiapas: An Historical Reader, (New York: The New Press, 1999), pp. 20-9; John M. Whitmeyer and Rosemary L Hopcroft, "Community, Capitalism and Rebellion in Chiapas, Sociological Perspectives, Vol 39, No. 4, pp. 517-38, p. 528-33); and Richard Stahler-Sholk, Neoliberalism and Democratic Transition: Looking for Autonomy in the Jungles of Chiapas, paper presented at the Annual Meetings of the Midwest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 Chicago, 23-25 April 1998, p. 1.

하비, 10-14쪽; 존 워맥 주니어, 치아파스의 반역: 역사적 독자, (뉴욕: 뉴프레스, 1999), 20-29쪽; 존 위트메이어 및 로즈머리 L. 호프크로프트, "치아파스의 공동체, 자본주의, 반역, 사회학적 전망, 39권 4호, 517-538쪽, 528-533쪽); 리차드 스톨러숄크, 신자유주의와 민주적 이행: 치아파스 정글에서 자치권을 찾아서, 중서부 정치과학학회 연례회의에 제출된 논문, 시카고, 1998년 4월23-25일 1쪽.

 

7... Womack, pp. 29-43; Carlos Fazio, Samuel Ruíz: El Caminante, (México, D.F.: Espasa Calpe Mexicana, 1994), pp. 101-113. Xochitl Leyva Solano, "The New Zapatista Movement: Political Levels, Actors and Political Discourse in Contemporary Mexico," in Valentina Napolitano and Xochitl Leyva Solano, eds, Encuentros Antropológicos: Power, Identity and Mobility in Mexican Society, (London: Institute of Latin American Studies, 1998), pp.41-2.

워맥, 29-43쪽; 카르롤스 파시오, 사무엘 루이스: 나그네, (멕시코, D.F.: 에스파사 칼페 메히카나, 1994), 101-113쪽. 쇼치틀 레이바 솔라노, "새로운 사파티스타 운동: 현재 멕시코의 정치적 수준, 활동가들, 정치 논의", 발렌티나 나폴리타노 및 쇼치틀 레이바 솔라노 편 인류학적 접촉: 멕시코 사회의 권력, 정체성, 유동성 중에서, (런던: 라틴아메리카 연구소, 1998), 41-42쪽.

 

8... Collier, p. 62-3; Womack, pp 39.

콜리어, 62-63쪽; 워맥, 39쪽.

 

9... Collier (p. 63) juxtaposes the demands presented in Chol, Tojobal, Tzeltal and Tzotzil to the 1974 Congress with the EZLN's Thirty-Four Point Agenda for negotiation proposed in 1994 and shows that they are almost identical. Ibid., pp. 64-5.

콜리어는 (63쪽) 1974년 촐, 토홀라발, 첼탈, 촐칠에서 의회에 제기한 요구를 1994년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이 협상을 위해 제시한 34항의 의제와 대비시켜 둘이 거의 똑같음을 보여준다. 같은 책, 64-65쪽.

 

10... Neil Harvey, The Chiapas Rebellion: The Struggle for Land and Democracy,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1998), pp. 86-88.

닐 하비, 치아파스의 반역: 땅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더햄, NC: 듀크대학 출판부, 1998), 86-88쪽.

 

11... La Botz, pp. 26-38 provides an especially clear and useful summary of this extraordinary period of organizational activity. A particularly useful aspect is his explanation for the great enthusiasm for maoism among radical Mexican leftists.

라 보츠, 26-38쪽은 조직적 활동의 이 특별한 시기를 아주 선명하고 유용하게 요약해 제시한다. 특히 유용한 측면은 급진적인 멕시코 좌파 사이의 마오주의 열광에 대한 설명이다.

 

12... See the debate around the "postmodern" nature of the movement, especially Roger Burbach, "Roots of the Postmodern Rebellion in Chiapas," New Left Review, 205, , 1994, pp. 113-24; and Daniel Nugent's critique of Burbach, "Northern Intellectuals and the EZLN," Monthly Review, Vol. 47, No. 3, July-August 1995, pp. 124-38. Also see Sergio Zermeño, "State Society, and Dependent Neoliberalism in Mexico: the Case of the Chiapas Uprising," in William C. Smith and Patricio Korzeniewicz, eds., Politics, Social Change and Economic Restructuring in Latin America, (Miami: University of Miami, North-South Center Press, 1997) pp. 123-49; Whitmeyer and Hopcroft, Lowy, and Susan Street, " La palabra verdadera del zapatismo chiapaneco," Chiapas, Vol 2, 1996, pp. 75-94.

운동의 "포스트모던"적 본성을 둘러싼 논의를 보라. 특히 로저 버바크, "치아파스의 포스트모던적 반역의 뿌리", <뉴레프트 리뷰>, 205호, 1994, 113-124쪽; 다니엘 누전트의 버바크 비판, "북반구의 지식인들과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 <먼슬리 리뷰>, 47권 3호, 1995년 7-8월, 124-138쪽. 세르히오 세르메뇨, "국가 사회, 멕시코의 의존적인 신자유주의: 치아파스 봉기 사례", 윌리엄 스미스 및 패트리시오 코르제니위츠 편, 라틴아메리카의 정치학, 사회 변화, 경제 재편 중에서, (마이애미: 마이애미대학, 남북센터출판부, 1997) 123-149쪽; 위트메이어 및 호프크로프트 및 로위 및 수산 스트리트, "치아파스 사파티스타의 진짜 발언", 치아파스, 제 2권, 1996, 75-94쪽도 보라.

 

13... Lynn Stephen, "Mexico's New Zapatismo: A Culturally and Historically Embedded Critique of Neoliberalism," Paper presented at the Annual Meetings of the American Anthropological Association, Philadelphia, 2-6 December 1998, p. 3.

린 스티븐, "멕시코의 새 사파타주의: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뿌리깊이 박힌 신자유주의 비판", 미국 인류학회 연례회의에 제출된 논문, 필라델피아, 1998년 12월 2-6일, 3쪽.

 

14... See EZLN, Crónicas intergalácticas: Primer encuentro intercontinental por la humanidad y contra el neoliberalismo, (Chiapas: Planeta Tierra, 1996).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 은하계사이의 연대기: 인류애와 반 신자유주의에 의한 첫번째 대륙간 접촉, (치아파스: 플라네타 티에라, 1996)을 보라.

 

15... See Harry Cleaver, "The Zapatistas and the Electronic Fabric of Struggle," in John Holloway, ed., The Chiapas Uprising and the Future of Revolution in the Twenty-First Century, html version from Chiapas95 webpage, 1996; María Elena Martínez Torres, "The Internet: post-modern struggle by the dispossessed of modernity," Paper prepared for the 1997 Annual Meeting of the Latin American Studies Association, Guadalajara, 17-19 April 1997; and Manuel Castells's section titled "Mexico's Zapatistas: the First Informational Guerrilla Movement" in his book, The Power of Identity, (Oxford: Blackwell, 1997), pp. 80-1.

해리 클레버, "사파티스타와 투쟁의 전자적 구조", 존 홀로웨이 편, 치아파스 봉기와 21세기 혁명의 미래, 치아파스95 웹페이지의 인터넷판 중에서, 1996; 마리아 엘레나 마르티네스 토레스, "인터넷: 근대성을 빼앗긴 이들의 포스트모던 투쟁", 라틴아메리카학회 1997년 연례 회의를 위해 준비된 논문, 과달라하라, 1997년 4월17-19일; 마누엘 카스텔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첫번째 정보 게릴라 운동"이란 제목의 장, 그의 책 정체성의 힘 중에서, (옥스포드: 블랙웰, 1997), 80-81쪽.

 

16... Under the provisions of the agrarian law in place until 1993, this land would have been distributed to landless petitioners in the form of "ejido parcels" that they would be free to cultivate and pass along to one of their offspring, but that would not be available to rent, sell or mortgage.

1993년 이후 시행된 농지개혁법 조항에 따라, 이 땅은 땅 없는 청원자에게 '집단 농지' 형태로 분배되었어야 했다. 받은 이들은 경작을 하거나 자식에게 줄 수는 있는데 남에게 빌려주거나 팔거나 저당잡힐 수는 없다.

 

17... Until the reform of Article 27 of the Constitution in 1993, a landholding was only afectable or available for expropriation and distribution to petitioning peasants when it exceeded a maximum size established in accordance with the type of agricultural production pursued on that parcel.

1993년 헌법 27조항의 개정이 이뤄지기까지는 경작물 종류에 따른 기준치를 넘을 경우만 땅을 수용해서 탄원하는 농민에게 분배해줄 수 있었다.

 

18... That is, illegally large landholdings created out of the concentration of holdings that fall within the legal maximum. Typically, a neolatifundio is comprised of a number of holdings that have been put into various family members' names, although in the commercial export agricultural zones of Mexico it has also been common for individuals to pay trusted prestenombres, or namelenders, to act as the owner of record for a "neighboring farm" that is, in fact worked as part of a single large estate. Salinas's alteration of Article 27 of the Constitution made this kind of subterfuge unnecessary, to the great delight and relief of large landowners everywhere in Mexico. See Judith Adler Hellman, Mexican Lives, (New York: The New Press, 1994), pp .139-41.

그러니까, 불법적으로 대규모 땅을 소유한 경우는 법정 최대치의 땅을 여러 군데에서 확보한 경우다. 신 대토지 소유자는 전형적으로 여러 곳의 땅을 가족 이름으로 분산하는 방식으로 넓은 땅을 확보한다. 물론 수출용 경작 지대에서도 실제로는 일정한 대가를 치르고 '이웃 농장'의 주인들을 서류상 땅 주인으로 해놓는 방식으로 법을 피해 넓은 땅을 확보하는 것이 흔하다. 살리나스의 헌법 27조 수정은 이런 식의 장치조차 필요없게 해줬다. 대규모 땅 소유자들로서는 신나는 조처인 것이다. 주디스 애들러 헬먼, 멕시코인의 삶, (뉴욕: 뉴프레스, 1994), 139-141쪽을 보라.

 

19... Collier, p. 48-50.

콜리어, 48-50쪽.

 

20... The minimum size of an ejido parcel differs from place to place in Mexico according to the quality, fertility and access to water of the land that is distributed. On the sub-division of land parcels into ever smaller holdings under pressure of population growth, see María del Carmen García A. and Daniel Villafuerte Solís, "Economía y sociedad en Chiapas," in María Tarrío and Luciano Concheiro, eds., La sociedad frente al mercado, (México, D.F.: Ediciones La Jornada, 1998), p. 352.

할당되는 집단 농지의 최소치는 지역에 따라 다른데, 분배된 땅의 질, 비옥도, 물 공급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 인구가 늘면서 땅을 더 쪼개 나눠줄 수밖에 없던 것에 대해서는, 마리아 델 카르멘 가르시아 A. 및 다니엘 비야푸에르테 솔리스, "치아파스의 경제와 사회", 마리아 타리오 및 루치아노 콘체이로 공동편, 시장에 직면한 사회 중에서, (멕시코, D.F.: 라 호르나다 출판부, 1998), 352쪽을 보라.

 

21... Collier writes, "Before 1974, the Catholic Church had already begun extensive grass roots evangelizing in eastern Chiapas, in part to ward off the advance of Protestantism." p. 62. Also see Womack, pp.36-43 on this Catholic response to the spread of Protestant conversions.

콜리어는 이렇게 썼다. "1974년 이전에 가톨릭교회가 이미 동부 치아파스를 복음화하기 위한 강력한 풀뿌리 운동을 시작했다. 이는 부분적으론 개신교의 진출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개신교로 개종이 확산되는 것에 대한 가톨릭의 대응에 대해서는 워맥, 36-43쪽을 보라.

 

22... INEGI, Censos Generales de Población y Vivienda, 1990, cited in García A. and Villafuerte Solís, p 364.

국립 통계, 지리, 정보학 연구소, 인구와 주거에 대한 총조사(센서스), 1990, 가르시아 A. 및 비야푸에르테 솔리스, 364쪽에서 재인용.

 

23... Ibid., p. 365.

같은 책, 365쪽.

 

24... In interviews conducted in May 1998, the explanation offered to me for the increase in Mormon and Islamic conversions was the appeal to men of religions that -- as interpreted in the Chiapanecan contest -- not only tolerate, but sanctify polygamous relationships. Now, instead of having an official wife, married in Church plus a second mujer, and her children "on the side" in the classic casa chica, men can have all their wives and children living with them under one roof.

1998년 5월에 실시한 인터뷰에서 모르몬교와 이슬람교 개종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 내가 들은 설명은, 일부다처제를 단지 용인할 뿐 아니라 신성화하는 교리가 종교적인 남성들에게 먹혀 들어 갔다는 것이다. 이제 개종 덕분에, 교회에서 결혼한 공식 부인 외에 두번째 여인과 아이들을 전통적인 작은 집에 따로 두는 대신, 남성들은 한 지붕 아래 여러 부인과 아이들을 두고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5... María del Carmen García A., "Las organizaciones no gubernamentales en Chiapas: algunas reflexiones en torno a su actuaci?n política," in Centro de Estudios Superiores de México y Centroamérica, Anuario 1997, (Tuxtla Gutiérrez: Universidad de Ciencias y Artes de Chiapas, 1998), p. 50.

마리아 델 카르멘 가르시아 A, "치아파스의 비정부기구: 정치적 활동에 대한 어떤 반영"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고급 훈련 센터, 1997년 연감 중에서, (툭스틀라 구티에레스: 치아파스 과학 및 예술대학, 1998), 50쪽.

 

26... The National Institute of Statistics, Geography and Informatics, INEGI reports only 6.5 million because the standard they use is that a person must speak an indigenous language to be counted as an indigenous person. Meanwhile, the National Indigenous Institute, INI, which has good reasons to avoid undercounting indigenous people, estimates 10 million. See INEGI, XI Censo general de población y vivienda, México, D.F.: INEGI, 1992.

국립 통계, 지리, 정보학 연구소(INEGI)는 그 숫자가 650만명뿐이라고 보고했는데, 그들이 원주민 언어를 쓰는 사람만 원주민으로 분류하는 기준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반면 원주민 숫자를 줄일 이유가 없는 국립 원주민연구소(INI)는 원주민 숫자를 1000만명으로 추산한다. 국립 통계, 지리, 정보학 연구소, 11차 인구와 주거 총조사, 멕시코, D.F: 국립 통계, 지리, 정보학 연구소, 1992를 보라.

 

27... Cynthia Hewitt de Alcántara, Anthropological Perspectives on Mexico, (London: Routledge, 1984), p. 53.

신시아 에위트 데 알칸타라, 멕시코의 인류학적 전망, (런던: 루틀리지, 1984), 53쪽.

 

28... Guillermo Bonfil Batalla, México Profundo: Reclaiming a Civilization,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6); and Luis Villoro, Los grandes momentos del indigenismo en México, tercera edición, (México, D.F.: Fondo de Cultura Económica, 1996).

기예르모 본필 바타야, 멕시코 깊은 곳: 문화를 개척하기, (오스틴: 텍사스대학 출판부); 루이스 비요로, 멕시코 원주민의식의 위대한 순간, 3판, (멕시코: 경제사회재단, 1996)

 

29... Neil Harvey, "La autonomia indigena y ciudadanía étnica en Chiapas," paper presented at the XX Meetings of the Latin American Studies Association, Guadalajara, Mexico, 17-19 April, 1997, p. 10.

닐 하비, "치아파스의 토착민 자치와 인종적 시민권", 라틴아메리카연구학회 20차 회의에 제출된 논문, 과달라하라, 멕시코, 1997년 4월 17-19일, 10쪽.

 

30... Ibid., p. 18. Héctor Díaz-Polanco, La rebelión zapatista y la autonomía, (México, D.F.: Siglo Veíntiuno Editores, 1997); Luis Hernández, "Ciudadanos iguales, ciudadanos diferentes: la nueva lucha india," Este País, febrero, pp. 38-39; Marco Rascón, "Autonomía para la integración," La Jornada, 16 febrero, 1998, pp. xiii-xvi; Gilberto López y Rivas, "Los significados de San Andrés," La Jornada, 16 febrero, 1998, p. xii; Carmen Lloréns Fabregat and Rosa Albina Garavito Elías, "Esencia de los acuerdos de San Andres," Coyuntura 84, enero-febrero, 1998, pp. 33-40.

같은 책, 18쪽. 엑토르 디아스폴랑코, 사파티스타 반역과 자치, (멕시코 D.F: 시글로 베인티우노 에디토레스[21세기출판사], 1997); 루이스 에르난데스, "평등한 시민, 다른 시민: 새로운 인디언 투쟁" 에스테 파이스, 2월, 38-39쪽; 마르코 라스콘, "통합을 위한 자치" 라 호르나다, 1998년 2월16일, 13-16면; 힐베르토 로페스 및 리바스, "산 안드레스 협정의 의미,"; 라 호르나다, 1998년 2월16일, 12면; 카르멘 요렌스 파브레가트 및 로사 알비나 가라비토 엘리아스, "산 안드레스 합의의 핵심", 코이운투라 84, 1-2월, 1998, 33-40쪽.

 

31... The rule of strong men or caciques.

강한 남성 또는 두목(토후)의 법칙.

 

32... This quote is drawn from an interview with Juan Pedro Viqueira, one of the few analysts who spoke for attribution. He later elaborated these views in "Los peligros del Chiapas imaginario," Letras Libres, enero 1999, pp. 20-8; 96-7.

이 인용은 인터뷰에 응한 몇 안되는 분석가 가운데 하나인 후안 페드로 비케이라(Juan Pedro Viqueira)의 인터뷰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나중에 이런 관점을 "치아파스의 가상의 위험", 레트라스 리브레스(자유 학문), 1999년 1월호, 20-28쪽; 96-97쪽에서 가다듬어 제시했다.

 

33... Alison Brysk, "Turning Weakness into Strength: The Internationalization of Indian Rights," Latin American Perspectives, Issue 89, spring 1996, Vol. 23, No 2., p. 46.

앨리슨 브리스크, "허약함에서 힘으로 전환하기: 인디언 권리의 국제화", 라틴아메리칸 퍼스펙티브스, 89호, 1996년 봄, 26권 2호, 46쪽.

 

34... John Gledhill, "Liberalism, Socio-Economic Rights and the Politics of Identity: From Moral Economy to Indigenous Rights," in Richard Wilson, ed., Human Rights, Culture, and Context: Anthropological Perspectives, (London: Pluto Press, 1997), summarized in Xochitl Leyva Solano, p. 50.

존 글레드힐, "자유주의, 사회경제적 권리와 정체성의 정치학: 도덕 경제에서 원주민 권리까지" 리차드 윌슨 편, 인권, 문화, 배경: 인류학적 전망에서, (런던: 플루토 프레스, 1997), 쇼치틀 레이바 솔라노, 50쪽에서 인용.

 

35... Lynn Stephen, "Mexico's New Zapatismo," p. 6-7.

린 스티븐, "멕시코의 신 사파타주의", 6-7쪽.

 

36... Judith Adler Hellman, "The Mexican Elections: Rush to Judgement, " Globe & Mail, Toronto, 2 September 1994, p. 8; On the 1994 elections, see Silvia Gómez Tagle and Ma. Eugenia Valdéz Vega "Chiapas," in Gómez Tagle, ed., 1994: Elecciones en los estados, (México, D.F.: La Jornada Editores, 1997), pp. 179-209.

주디스 애들러 헬먼, "멕시코 선거: 평가를 위한 질주", 글로브 앤드 메일, 토론토, 1994년 9월2일, 8쪽. 1994년 선거에 대해서는, 실비아 고메스 타글레 및 마 에우헤니아 발데스 베가 "치아파스", 고메스 타글레 편, 1994: 국가의 선택, (Mexico, D.F.: 라 호르나다 출판부, 1997), 179-209쪽을 보라.

 

37... It is ironic that on the subject of elections in Guerrero State, La Jornada's position is quite different and the view that the electoral road might be usefully pursued at the same time as armed struggle has gained the approval not only of the Popular Revolutionary Army, that is, the guerrillas themselves, but also of La Jornada. See Blanche Petrich's interview with Arnaldo Bartra, "En Guerrero, armas y urnas no se excluyen," Sunday 13 February 1999, p. 8.

게레로주 선거 문제에 대해서는 <라 호르나다>의 태도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무장투쟁과 선거 참여 전술을 동시에 구사하는 게 유용할 수 있다는 견해를, 대중혁명군 곧 그 지역 게릴라들과 이 신문이 한 목소리로 지지했다. 블랑체 페트리치의 아르날도 바르트라 인터뷰 "게레로에서는 무기와 투표함이 모두 배제되지 않았다," 1999년 2월13일 일요판, 8면.

 

38... See Cleaver, and Martínez Torres.

클레버, 마르티네스 토레스를 보라.

 

39... Ibid. Also see Castells, pp. 72-83.

같은 책. 카스텔스, 72-83쪽도 보라.

 

40... A similar point was made by Benjamin Barber with regard to democratic participation in U.S. politics in "Internet: A Place for Commerce or a Place for Us?," a presentation to the Columbia University Seminar on the Political Economy of War and Peace, 28 January, 1999.

유사한 관점을 벤저민 바버가 "인터넷: 상업의 장소 또는 우리의 땅?"에서 미국 정치의 민주적 참여와 관련해 제기했다, 1999년 1월28일 컬럼비아대학의 전쟁과 평화의 정치경제학 세미나에서 제시함.

 

41... Stephen, "In the Wake of the Zapatistas," pp. 14-15.

스티븐, "사파티스타를 쫓아서", 14-15쪽.

 

42... Ibid., p. 13.

같은 책, 13쪽.

 

43... Cleaver, p. 19.

클레버, 19쪽.

 

44... In the detailed coverage given to the event in the pages of the Italian daily, Il Manifesto, indigenous people who support the PRI and oppose the Zapatistas are always referred to as priistas, that is, "PRI supporters," and even as "squadracce priiste." This second term is best translated as "organized squads of thugs" and is usually used in Italy to refer, literally, to fascist gangs. See Giani Proiettis, "L'esercito minaccia," Il Manifesto, 7 May 1998.

이탈리아 일간지 <일 마니페스토>가 자세히 보도한 바에 따르면, 제도혁명당을 지지하고 사파티스타에 반대하는 원주민은 언제나 '제도혁명당 지지자'로, 심지어 '스카드라체 프리스테(squadracce priiste)'로 표현된다. 두번째 표현은 '조직적 악당 무리'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데, 이탈리아에서는 문자 그대로 보면 파시스트 무리를 부를 때 보통 쓴다. 지아니 프로이에티스, "군대가 위협하다", 일 마니페스토, 1998년 5월7일을 보라.

 

45... Almost a year later I found Mexican human rights specialists divided on the question of the utitlity of an approach that appears to challenge Mexican soveignty at the same time that it tests the constitutionality of restrictions on foreigners' activities in Mexicon and the rights of free association of Mexicans.

거의 1년 뒤에 나는 멕시코 인권운동 활동가들이 멕시코 주권에 도전하는 것 같은 접근법을 이용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는 것을 봤다. 이 접근법은 멕시코에서 외국인의 활동에 제한을 가하는 것의 합헌성 여부와 멕시코의 결사의 자유 문제에 도전하는 것이다.

 

46... La Botz, pp. 32-34. Of Orive, Womack, pp. 221, writes, "The one constant in the movement had been the preeminence of its primary intellect and 'ideological director,' arguably the most remarkable organizer of his generation, Adolfo Orive."

라 보츠, 32-34쪽. 오리베에 대해서는, 워맥, 221쪽. 여기서 워맥은 "이 운동에서 한가지 변함없는 것은, 무엇보다 지식인이며 '이념적 지도자'인 데다가 같은 세대 최고의 조직자라고 내세울만한 인물 곧 아돌포 오리베의 출중함이었다."고 썼다.

 

<역주>

역1... 이 글은 캐나다에서 나오는 <소셜리스트 레지스터> 2000년호에 'Real and Virtual Chiapas: Magic Realism and the Left'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것이다. 지면 사정상 주석 가운데 절반 이상을 생략했다. 원문은 인터넷(www.yorku.ca/socreg/hellman.txt)에 공개되어 있다. 이 글이 나오자, 사파티스타를 인터넷을 통해 알리는 데 앞장서온 미국 텍사스대학 경제학과 해리 클리버 교수가 헬먼의 주장 각각을 세밀히 분석하고 비판하는 장문의 반론을 제기했다. (www.eco.utexas.edu/faculty/Cleaver/anti-hellman.html) 클리버 교수는 헬먼의 주장이 전혀 새로울 것이 없으며, 구체적으로 사파티스타를 지원하기 위해 전세계 좌파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글을 둘러싼 논쟁은 이후에도 계속돼 <소셜리스트 레지스터> 2001년호에는 사파티스타 지원 사이트인 www.ezln.org의 웹마스터인 저스틴 폴슨의 'Peasant Struggles and International Solidarity: the case of Chiapas'(www.yorku.ca/socreg/paulson01.html)과 헬먼의 짤막한 답변(www.yorku.ca/socreg/hellman01.html)이 실렸다. 폴슨은, 사파티스타운동이 전세계적으로 호응을 얻는 것은 주장의 단순화를 통해 서구 좌파의 낭만적 정서에 호소해서가 아니라 전통적인 좌파의 계급 대립보다 폭넓은 '신자유주의에 맞선 존엄성 투쟁'이 호소력을 갖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헬먼은, 자신의 글은 멀리 떨어져서 사파티스타를 지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명확히 파악한 뒤 사파티스타의 투쟁과 우리 자신의 투쟁을 연계시키는 방안을 고민하자는 것이라고 답했다.

 

역2... 멕시코 헌법은 혁명의 와중인 1917년 제정됐으며 상당히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가운데 토지 관련 조항인 27조는, 모든 토지와 지하자원은 국가의 자산이며, 국가가 개인에게 소유권을 양도할 수 있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는 토지를 몰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멕시코는 34년까지 전자본주의적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1차 농지 개혁을 한 데 이어 1934년-40년에는 상업농장의 토지를 집단농장에 분배함으로써 농민들에게 땅을 재분배했다. 이에 따라 1956-69년 사적인 상업농장은 전체 농토의 55%를 차지해, 규모면에서는 집단농장과 균형을 유지했다. 헌법 27조 수정은 명목으로라도 유지되던 토지개혁 정신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3... 에히도(ejido)는 과거부터 멕시코 지역에 존재하던 공동체의 집단 농지다. 땅을 대지주로부터 몰수해 농민들에게 재분배하는 방식의 이 농지는, 스페인 침공 직전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가 1917년 헌법 제정을 통해 되살아났다. 땅은 정부 소유이며 농사에 필요한 자금은 특수 국영은행이 빌려줬는데, 실제 운용 과정을 보면 악덕 지주가 은행으로 바뀌었을뿐 제국주의 시대 소작과 다름없다는 지적도 있다.

 

역4... 라칸돈 마야는, 17-18세기 스페인 침공을 피해 멕시코 남동부 치아파스로 이주해 지금까지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를 유지하고 있는 원주민들이다. 이들은 정글 지역에 뿔뿔이 나뉘어 살면서 외부 문화와 접촉을 피했다. 1950년대 이후 개발의 여파로 고유한 문화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역5... 멕시코혁명은 30년 이상 장기집권을 한 포르피리오 디아스 대통령이 1910년 여섯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시작됐다. 엘리트 지식인 출신인 프란시스코 마데로가 디아스의 재선에 반대하면서 무력투쟁을 호소했고, 에밀리아노 사파타와 판초 비야가 이에 호응함으로써 디아스가 실권했다. 마데로가 대통령이 된 뒤 사파타는 마데로를 비판하면서 '토지없는 농민의 지도자'로서 2단계 혁명을 추진한다. 마데로가 암살된 뒤 실권을 쥔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는 사파타 등의 힘에 밀려 상당히 진보적인 '1917년 헌법'을 제정했다. 사파타는 1919년 암살됐지만, 지금까지도 멕시코 혁명의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다.

 

역6... 인민해방군은 사파티스타가 봉기한 지 2년 뒤인 1996년 6월 치아파스 바로 위쪽 지역인 게레로주의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봉기한 반정부 게릴라 조직이다. 이 조직은 마르크스주의 혁명을 시도하는 세력 또는 단순 무장 폭도로 외부에 인식되고 있다. 사파티스타와 달리 무장 투쟁을 주요 전술로 삼아, 멕시코 정부군과 적지않은 충돌을 일으켰으나 최근에는 충돌이 많이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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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신기섭

2004/11/19 22:06 2004/11/19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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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사파티스타 관련.. 먼 댓글 보내온 곳 2004/11/21 08:26

    이에 대한 고찰을 해 본 적 있음. 동감. 그 때 보았던 자료 같기두 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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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