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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313건

  1. 2011/03/08 여성의 날 축하!
  2. 2010/12/16 글쓰기 기본도 모르는 학자들(?) (4)
  3. 2010/11/25 현대차 비정규직 농성장 이야기
  4. 2010/11/23 후원이 절실한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5. 2010/10/22 이글턴의 윤리적 실패
  6. 2010/10/15 핵심 비껴간 세습 비판 (11)
  7. 2010/10/08 권력세습 이야기를 피하기 어려울까 (4)
  8. 2010/10/03 내 딴에는 열심히 쓴 서평
  9. 2010/09/23 누가 무장단체를 만드는가 (11)
  10. 2010/09/06 포장이사(?) 마무리 (4)

앞으로 뒤로

새해 인사

지난 한해는 너무 속도에 집착하며 산 게 아닌가 싶습니다. 뭐든지 즉각적으로 받아들이고 반응하고 또 금방 잊고 마는 모습, 말은 많으나 알짜 정보가 없고 그나마 서로 앞뒤가 맞지 않으며 유행 따라 이리 쏠리고 저리 몰리는 행색, 이른바 사교망(SNS) 만능 시대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새해에는 이런 모습에서 벗어나서 조금 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나 자신을 돌아보며 살기로 다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좀더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걸로 새해 인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2012/01/02 09:45 2012/01/02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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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날 축하!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축하합니다. 여성들이 차별과 억압에 맞서 힘 있게 싸우시기를 기대하며 응원합니다. 여성들이 나서야 세상이 제대로 바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2011/03/08 09:53 2011/03/08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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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기본도 모르는 학자들(?)

우연히 어떤 블로그 글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글쓰기 기본도 모르면서 논문을 쓰는 이른바 학자들이 이 땅에 (수정: 글을 꼼꼼히 읽지 않아 한국 이야기로 간주했지만 실제로는 미합중국 이야기인 듯 합니다. 저 때문에 오해한 분들께 죄송) 꽤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자신에게 솔직하기 참고.)

 

학자가 아니더라도 ‘논술’(또는 논증적인) 글의 기본만큼은 상식처럼 익혀두자는 취지로 핵심 구절을 인용한다.

 

제발 서론/결론에서 "본문에서 이야기 한 범위와 대상만큼"만 늘어놨으면

 

 

설명을 덧붙이자면, 논증적인 글에서 서론의 핵심 기능은 “어떤 대상을 어떤 범위에서 다룰지”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다. 그러니 서론에서 다루겠다고 한 것은 모두 본론에서 다뤄야 한다. 결론의 핵심 기능은 본론에서 다룬 내용을 요약하고 본론에서 자신이 주장한 것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서론과 결론이 약간의 차이만 있는 ‘반복’이 되기 쉬운데, 이른바 ‘학문적 글’이라면 별로 이상한 게 아니다.

 

그리고 서론과 결론 가운데 더 중요한 건 서론이다. 중요한 걸 맨 마지막에 써야하기 때문에, 글쓰는 차례는 1)본론 2)결론 3)서론이 정상이다. 서론을 맨 마지막에 쓰면 본론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을 서론이나 결론에서 떠드는 ‘사기 행각’(과장이 아니다)을 피할 수 있다. 게다가 글쓰기도 훨씬 쉽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이른바 ‘인문 또는 사회과학’의 경우지만, 듣기로는 자연과학도 기본은 비슷하다고 한다.

2010/12/16 18:53 2010/12/16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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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비정규직 농성장 이야기

정규직화를 위해 흔들림 없이 싸우고 있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농성장에서 직접 전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아래 링크로 가시면 됩니다.

 

현대차 비정규직 점거농성장

2010/11/25 17:04 2010/11/25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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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이 절실한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현대차 울산공장을 점거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끼니를 거르고 있다고 합니다. 출입이 봉쇄되어서 배를 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밖에서 농성하는 노동자들도 어렵게 싸우고 있습니다. 해줄 게 별로 없어서 답답하지만 도울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아래 링크를 방문해보세요.

 

금속노조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

2010/11/23 15:01 2010/11/23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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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턴의 윤리적 실패

요즘 테리 이글턴의 책들이 잇따라 국내에 번역되고, 얼마전에는 그가 직접 와서 강연회도 열었다. 이 덕분에 이글턴에 대한 관심이 다시 한번 일었다. 이런 때에 마침 이글턴을 비판하는 글을 하나 봤다. 글쓴이는 롤런드 보어(Roland Boer)라고 이 블로그에 한번 등장한 적 있는 신학자다. (식민주의론에서 마르크스 내쫓기 참고.)

 

아래 번역문은 그가 아메리카의 정통 좌파 잡지 <먼슬리 리뷰>가 만드는 웹진 ‘엠알진’을 통해 발표한 이글턴 비판 글이다. 비록 정규 <먼슬리 리뷰>는 아니지만 이쪽 계열 사람들이 다른 이도 아닌 이글턴 비판 글을 실어줬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이를 계기로 보어에게 ‘신진 정통 좌파 학자’라는 딱지를 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보어의 비판이 적절하냐 여부를 떠나서, 최근 이글턴의 사상적 바탕을 간략하게 요약한 글이라는 측면에서 한번 읽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번 번역은 꽤나 오래 쉬었던 번역 작업 재개를 위한 ‘준비 운동’쯤의 의미가 있다.)

 

테리 이글턴의 윤리적 실패

롤런드 보어

 

테리 이글턴이 얼마전 한쪽으로 치우친 책 <낯선 이들과 섞여 겪는 곤란함>을(1) 내놓음으로써, 좌파들이 윤리에 대해 의견을 내는 급물살 같은 흐름에 합류했다. 그가 요즘 다시 가톨릭 좌파세력의 비상근 신학이론가 구실을 하고 있기에 기대하게 되는 것에 충분히 부합할 만큼 그의 주장은 직설적이다. 기독교 신학과 사회주의가 인간의 타락 그리고 지축을 흔드는 갱생에 대해 훨씬 더 심오한 감각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결국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의 요점 아닌가? 이 이야기는 전혀 사심없이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고 이해해야 하는 의무, 자신과 같은 처지의 남자와 여자들에 대한 의무가 무엇인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게 한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주장을 그한테서 기대하는가? 2000년 이후 내놓은 대부분의 책에서(2) 이글턴은 거의 변함없는 주장,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통적인 가톨릭 신학 형태를 변형해 제시했다. 그것은 ## 세상을 창조할 필요가 없음에도 사랑 때문에 창조한 (그래서 존재하기 위해 창조에 의존할 필요라곤 없는) 신의 고유한 본성, ## 본래부터 사악하며 겉보기엔 극복되지 않을 것 같은 힘들(자본주의, 이기심, 파괴, 유혈 참사, 잔인함 그리고 사람들이 지닌 것)에 대해 형이상학적으로 대처함에 있어서 나타나는 단순하고 본래적인 미덕의 힘, ## 이기심을 버리고 거저 주는 과정이란 성격을 띤 윤리와 사랑의 핵심적 구실, ## 용서, 특히 정치적 용서의 필요성 ## 진정한 희망, 특히 아나윔(가난하고 억압받으며 짓밟히는 이들)을 통해서 얻는 희망이자 그들을 위한 희망이 어떤 구실을 하는지 등 5가지다. 그런데 ‘아나윔’은 이글턴이 아는 유일한 히브리어 단어인 듯 하며, 그의 초창기 신학 저작에 묻어 뒀다가 다시 들고 나온 단어인데, 미리 예상할 수 있을 만큼 규칙적으로 최근 그의 저작 곳곳에 등장한다.(3) 이 모든 주제를 통틀어서, 윤리는 그의 신학의 핵심 특징으로 규칙적인 소리를 낸다. 그의 저작을 하나씩 차례로 넘길 때마다, 그가 이 간략한 신학을 마치 의식을 치르듯 거듭 변호하는 걸 보게 된다. 종종 토마스 아퀴나스와 이글턴의 정신적 지도자 허버트 매케이브를 거론하면서 말이다.(4)

 

말년의 이글턴은 다리 셋달린 발판에 정착했다. 마르크스주의, 라캉의 정신분석 그리고 신학이 각각 그에게 인간 타락의 깊이와 그 타락을 극복할 가능성에 대해 거의 똑같은 이야기를 제시해주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분석이 타락 상태를 훌륭하게 묘사하게 해준다면,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약간 숨이 찰 정도로 나란히 붙어다니면서) 사뭇 최선의 해법을 제시한다. 이런 삼각측량법은 <낯선 이들과 섞여 겪는 곤란함>에서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제계를 기준점으로 선택한 이유를 해명해준다. 처음엔 윤리에 관한 꽤나 통상적인 주장을 꾸미는 겉치레로 보였으나, 결국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이 드러났다는 이야기다. 이 책의 뒷부분에 이르면, 이 기준점은 확실히 매끈해 보이지 않는다. 이글턴이 이것을 구부리고 잡아늘리고 하면서 훨씬 더 윤리적인 주장에 끼워맞추려 애쓰는 데서 이 매끄럽지 못함이 드러난다. 셰익스피어를 상징계에 가져다 맞추고 키르케고르의 미학, 윤리, 종교를 각각 상상계, 상징계, 실제계에 꿰맞추고, 남는 것들은 마지막에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칸트까지 한꺼번에 뭉쳐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세가지 범주를 활용하는 데는 함정이 있다. 특히 이글턴처럼 활용하면 더 그렇다. 점진적 발전 형식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글턴은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제계를 변증법적으로 읽는다고 지적하긴 했지만, 여전히 각각을 아이 성장의 각 단계들로 본다. 부르주아 성쇠의 비뚤어진 역사적 서사인 것이다. 아니면 마지막엔 말할 것 없이 기독교가 비책으로 등장하는 진보적인 서사 구조로 여긴다고 할 수도 있다. 그 결과는 명백하다. 상상계는 거울상 단계에 매여있는 미성숙한 형태이고 이 범주에 해당하는 윤리는 자기 자아에 집중하는 것이다. 상징계는 자아와 타자의 협상을 통해 한발짝 나아간 단계이지만 이 또한 실제계의 끔찍한 장소에는 못미친다. 실제계는 우리를 계속 나아가게 하지만 언제라도 우리의 세계를 파괴할 위험이 있는, 정신적 외상을 초래할만큼 충격적이며 딱히 표현할 길이 없는 알맹이이다. 이 지점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기독교의 죄악론에 도달하는데, 이는 신학적 해결책의 발판이며 동시에 착취당하고 소외된 인간 상황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깊은 비관이 제 자리를 찾는 계기다. 이글턴의 표현대로 하자면 라캉의 실제계는 “원죄의 정신분석적 변형”(5)이다. 그렇게 정신분석은 우리를 타락하고 죄많은 우리의 상황으로 이끌어 가며, 거기서 우리에겐 신학과 마르크스주의가 필요하다. 이제 문제는 이글턴이 폭넓은 분석을 제시하지 않은 채 마르크스주의가 유대·기독교 사상이라는 우물에서 한껏 물을 마신다고 기정사실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윤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정신적 외상을 가져올만큼 충격적이고 끔찍한 실제계를 고려할 때 윤리의 어떤 돌파구, 깊고 철저한 변환이 있는가? 라캉의 구조를 취해야 한다면 끝까지 가도록 하자. 예수의 죽음이라는 수난 서사가 그 짐승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해주는가? 전환의 서사, 궁극적인 정신분석적 치료를 제공하는가? “주여, 주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버림받음에 절망하는 부르짖음 속에서, 이 서사가 우리를 실제계를 거쳐 지나가도록 이끄는가? 우리는 마침내 상상계에서 나타나는 자기 문제에 대한 시름을 털어내고, 상징계에서 나타나는 사람 사이의 집착 또한 넘어서서, 최우선적인 윤리 욕구가 우리로 하여금 같은 처지의 남자, 여자와 사이좋은 관계를 맺도록 돕는 그 순간에 도달하는가?

 

간단히 답하면 아니다. 이글턴은 답을 주지 않는다는 얘기다. 우리가 찾게 되는 건 고작 사심없는 선함과 미덕을 기분 좋게 보는 것뿐이다. 예수는 착해지고 그에 대한 어떤 대가도 기대하지 않음으로써 죽음과 절망을 극복한다. 삽을 이웃에게 빌려주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식이다. 이글턴을 따르자면, 기독교 신학은 악의 깊이를 실제로 극복할 수 있는 단순하고 선입견 없는 미덕들 몇가지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글턴은 자신이 진정한 ‘형이상학’을 회복하려 한다는 걸 회피하지 않고 인정한다.) 친절함, 사랑, 정의, 겸손, 겸양, 온화함, 전망, 용기, 헌신, 사심없음, 인내심, 이 모두와 기타 등등이 아주 이원론적으로 나뉜 우주에서 악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거듭 거듭 불려나와 정렬한다. 그러나 역시 최고의 미덕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옷을 벗어 제치고 수도관을 연결해주려는 원기 왕성한 욕구가 아니라, 냉담하고 조건 없으며 비인격적인 데다가 특히 적과 낯선 사람에 대한 사랑 속에 제 기준점을 설정한 공적·정치적 사랑의 법칙으로 이글턴은 간주한다. 이글턴에게 이는 윤리학, 아무런 대가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낯선 사람들’을 돌보는 이기심없고 사심없는 의무감의 핵심을 이룬다. 우리도 이집트(애굽)에서 낯선 사람들(이방인)이었기에 우리 중에 있는 낯선 사람들한테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성경의 명령이 이글턴의 글에서 반향을 일으키며 이어지지만(7), 그가 가는 길은 영원한 전쟁 상태에 있는 사회에 뿌리를 박은, 레비나스의 피가 흐르는 육체와 분리된 윤리학과는 다르다. 결국 윤리학은 윤리적 행위로서 예수의 십자가에서 볼 수 있는, 기독교 가르침의 핵심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 윤리학이 결국 신경쓰는 것은 바로 그 타인이며, 그들은 우리가 사심없는 사랑, 악을 극복할 진부한 선함을 보여줘야 할 대상이다.

 

신경쇠약은 별개로 하고, 이글턴은 끝을 잘라낸 신학과 팔다리 자른 사회주의를 제시한다. 윤리학은 종교계 좌파, 더 정확히 말하자면 훨씬 더 영적인 좌파의 삶의 규칙에 지나지 않는 게 된다.(8) 결국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자는 규칙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공교롭게도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공통으로 제기하는 이런 지침을 따르면, 구원의 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글턴은 19세기에 흔히 공유하던 진부한, 아니 진정으로 열심히 몰두하던 주장에 빠지고 만다. 사회의 도덕 규칙은 오직 기독교 신학에 뿌리를 둘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성직자에 반대하는 항위 시위대와 세속적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사회 운동 무리가 점점 불어나는 걸 걱정스럽게 지켜보면서, 교회와 정치 지도자들은 기독교가 무너지면 사회 통합의 도덕도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의 사랑과 죽음과 부활에 바탕을 둔 좀더 급진적인 윤리학을 선포하는 한에서 이글턴은 이와 거의 똑같은 주장을 편다.(이는 우연의 일치겠지만 보수적인 무슬림들도 공유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공허한 소비주의가 영향력을 얻으면서 가치가 구석으로 밀려났다고 이글턴은 주장한다. 더는 강력한 형이상학적 틀이 존재하지 않고 윤리는 황야에서 떠도는, 목마르고 굶주리는 이들한테만 남는 문제가 됐다. 해법은 이제 기독교의 가르침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이글턴의 초기 가톨릭 좌파 시절을 전적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2000년 이후 이글턴의 글에서 노골적으로 나타난 신학적 어조는 점점 더 커졌으며, 그 결과 이제 이글턴은 예수의 육체적 부활(그렇지 않으면 메시지가 무의미해진다), 예수 부활의 힘과 신의 본성, 그리고 아주 최근까지 드러내지 않던 주제인, 희생 제물과 성체 성사의 사랑의 식사가 하나로 일치함을 공개적으로 거론한다. 이는, 타인을 위해 목숨을 내어줄 위대한 기회를 놓쳤을 때, 이 자기희생을 적절히 대체해주는 것이다. 게다가 이는 성체 성사의 가치를 논하곤 하던 옛날 이글턴이 토해내던 것이기도 하다. 빠진 게 있다면 딱 하나, 사제가 레닌식 전위가 될 수 있다는 낡은 주장뿐이다.(10) 캔터베리 대주교가 그의 글을 수긍하며 읽는 게 하나도 놀랍지 않다.

 

주석

(1) 테리 이글턴, Trouble with Strangers: A Study of Ethics (Oxford: Wiley-Blackwell, 2009).  (아마도 자신이 때때로 글을 읽는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나온 걸로 짐작되는) 많은 인용과 해설로 가득한 이 책은 프랜시스 허치슨,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 애덤 스미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키르케고르의 작품을 포함한 묘한 책이다.

 

(2) 이글턴, The Gatekeeper: A Memoir (London: Penguin, 2001); 이글턴, Figures of Dissent: Critical Essays on Fish, Spivak, Zizek and Others (London: Verso, 2003); 이글턴, Sweet Violence: The Idea of the Tragic (Oxford: Blackwells, 2003); 이글턴, After Theory (New York: Basic Books, 2003); 이글턴, Holy Terror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이글턴, "Lunging, Flailing, Mispunching," London Review of Books (2006); 이글턴, Jesus Christ: The Gospels (Revolutions) (London: Verso, 2007); 이글턴, 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9); 이글턴, Trouble with Strangers: A Study of Ethics; 이글턴과 내선 슈나이더(Nathan Schneider), "Religion for Radicals: An Interview with Terry Eagleton," MRZine 61, no. 4 (2009); 이글턴, On Evil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0). 위에 거론한 작품들에 다양한 형태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지만, 더는 주저하지 않고 이글턴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장 온전한 형태의 주장은, 이글턴, 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 5-32쪽에 나온다. 여기서 그는 (해방신학과의) 연결고리를 확인하면서도 “해방 신학… 딱지를 붙이길 꺼려” 한다.(32쪽) 더 자세한 논의는 롤런드 보어, Criticism of Heaven: On Marxism and Theology, Historical Materialism Book Series (Leiden: E. J. Brill, 2007), 275-333쪽을 보라.

 

(3) 이글턴, "The Roots of the Christian Crisis," in "Slant Manifesto": Catholics and the Left, ed. Adrian Cunningham, Terry Eagleton, Brian Wicker, Martin Redfern and Lawrence Bright OP (London: Sheed & Ward, 1966); 이글턴, The New Left Church (London: Sheed and Ward, 1966); 이글턴, "The Slant Symposium," Slant 3, no. 5 (1967): 8-9; 이글턴, "Why We Are Still in the Church," Slant 3, no. 2 (1967): 25-8; 이글턴, "Language, Reality and the Eucharist (1)," Slant 4, no. 3 (1968): 18-23; 이글턴, "Politics and the Sacred," Slant 4, no. 2 (1968): 18-23; 이글턴, "Language, Reality and the Eucharist (2)," Slant 4, no. 4 (1968): 26-31; 이글턴, "Priesthood and Leninism," Slant 5, no. 4 (1969): 12-17; 이글턴, The Body as Language: Outline of a 'New Left' Theology (London: Sheed and Ward, 1970).

 

(4) 이글턴, Trouble with Strangers: A Study of Ethics, p. vi; 이글턴, 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 pp. xi-xii; 이글턴, Holy Terror, p. vi.

 

(5) 이글턴, Figures of Dissent: Critical Essays on Fish, Spivak, Zizek and Others, p. 205.

 

(6) 같은 책, p. 120; 이글턴, Sweet Violence: The Idea of the Tragic, p. 74.

 

(7) 출애굽기 22장 21절, 23장 9절; 레위기 19장 34절; 신명기 10장 19절.

 

(8) 이글턴, Trouble with Strangers: A Study of Ethics, pp. 195-6, 272, 291-2, 323

 

(9) 이글턴, Trouble with Strangers, pp. 195-6, 272, 323. 이글턴, The New Left Church, pp. 69-84; 이글턴, The Body as Language: Outline of a 'New Left' Theology, pp. 39-40; 이글턴, "Language, Reality and the Eucharist (1)"; 이글턴, "Language, Reality and the Eucharist (2)."을 비교해보라.

 

(10) 이글턴, The Body as Language: Outline of a 'New Left' Theology, pp. 75-93.

 

롤런드 보어는 오스트레일리아 뉴캐슬대학 신학과 연구교수로 있다. 그의 블로그는 stalinsmoustache.wordpress.com이다. 롤런드 보어, "An intrinsic Eagleton" (Journal for Cultural and Religious Theory 9.2, Summer 2008)도 보라. (내려받기: www.jcrt.org/archives/09.2/boer.pdf)

 

*-----*

옮긴이의 일러두기) 그의 책 하나가 <성서와 대안좌파>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번역되어 나왔다. 이 책은 저자명을 ‘로랜드 보어’로 표기하는데, 나는 전에 ‘롤랜드 보어’로 표기한 적 있다. 하지만 ‘롤런드’가 원 발음에 가깝고 국립국어원의 외래어표기법에도 ‘롤런드’로 되어 있어 표기를 바꿨다.

 

원문: mrzine.monthlyreview.org/2010/boer220910.html

번역: 신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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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 끝난 중복 댓글 두개 삭제 완료. (보어의 블로그 댓글을 통해, 번역에 대해 본인의 사후 허락을 받다.)

이 번역에 대해 쓴 롤런드 보어의 블로그 포스트 -- 이렇게 원 저자와 연결되는 건 번역자로선 참 즐거운 일이다.

2010/10/22 17:21 2010/10/2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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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비껴간 세습 비판

북한의 3대 세습을 둘러싼 논란으로 남한의 이른바 “진보” 세력이 또다시 본 실력을 폭로하고 있다. 스스로 제 정체를 폭로하는 건, 환상을 깨고 현실을 직시할 기회를 주니 꼭 나쁜 일은 아니다. 아무튼 글 좀 쓴다는 사람은 거의 빠짐없이 한마디씩 하고 있다. (북한 문제는 아예 거론을 회피하는 나 또한 이렇게 쓰고 있으니 오죽하겠는가)

 

1. 내가 주목하거나 읽은 글들

 

발표된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1) 좌파 학자 손호철(남한 진보여,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라)

2) 논란을 촉발한 경향신문 사설(민노당은 3대 세습을 인정하겠다는 것인가)

3) 경향신문 이대근(북한 3대 세습비판이 내정간섭? 오리엔탈리즘?)

4) 민주노동당 대표 이정희(진보임을 인정받기 위해 한 마디만 해 보라고?)

5) 언론인 홍세화(진보의 경박성에 관해)

6) 언론운동가 유영주(분에 넘치는 민주노동당 비판 경향 사설)

7) 언론인 정일용(자기 잣대로 북을 재단 말라)

 

또 하나 어떤 역사학자가 세습이 절대악이 아니라고 주장한 글이 있는데, 이 학자는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싶지 않다.

 

제목만 봐도 내용은 대강 알 수 있다. 서로 의견들이 충돌하고 있는데, 공통점도 하나 있다. “권력 세습은 나쁘다”는 데는 모두 동의하는 것 같다. 세습이 절대악이 아니라고 부르짖는 어떤 역사학자를 빼면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전제를 문제삼으려고 한다. 급진적인 접근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전제로 삼는 것의 정당성을 따지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렇게 하다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때도 있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은, 나는 자주파니 주사파니 하는 사람들한테 지독히 비판적인 사람이다. 그러니 자주파나 주사파가 이 글을 읽더라도 나를 우호세력으로 생각하지 말라. 그건 큰 착각이다.)

 

이 글은 “권력 세습은 나쁜가?”라고 묻되, 정확하게는 “권력 세습은 누구에게 나쁘고 왜 나쁜가?”라고 묻고 그 답을 찾아보려는 글이다.

 

2. 권력 세습은 나쁜가?

 

이 문장은 모호하다. ‘나쁘다’는 건 주체가 명백하게 있을 때만 성립하는 ‘가치 판단’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밑도 끝도 없이 “저 산은 나쁘다”는 문장을 들으면 웃음이 나온다. “산이 나쁘고 말 게 뭐 있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일 아침 한시간쯤 산을 넘어 일터에 가는 장애인이 이 말을 했다면 뜻이 분명하다. 분명 저 산은 장애인한테는 나쁜 존재다. (보편적 가치판단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다만 흔히 보편적이라고 하는 것도 “인간”의 관점에서지, “동물” 또는 “자연”의 관점에서도 그렇다는 근거는 없다. 가치 판단에 있어서는 판단의 주체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권력 세습은 나쁜가?”라는 질문은 “권력 세습은 누구에게 나쁜가?”라고 바뀌어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왜 나쁜가?”라는 질문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3. “북한 권력 세습은 누구에게 나쁜가?”

 

남한 사람 또는 미국 사람에게 나쁠까? 일단 별로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지만, 이모저모 좀더 따져보면 나쁠 수도 있다. 인류 전체한테 나쁜가? 이건 거의 무관한 문제라고 봐도 그만이다. 아무튼 이는 모두 곁가지고 결국 문제의 핵심은 북한 사람이다.

 

1) 북한 권력 세습은 북한 사람에게 나쁜가?

주체를 조금 더 나눠야 답이 나올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 정치 문제이니 지배권력과 민중으로 나눠보자.

 

1-1) 지배권력에게 나쁜가? 권력 세습이 지배권력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면 나쁠 건 없다. 지배권력 일부, 그러니까 권력을 노리고 있었는데 김정일 위원장의 아들이 아니어서 기회를 잃은 사람에겐 분명 나쁘겠다. 하지만 이건 사소한 문제다. 김일성 주석의 권위가 아직 유효하다고 볼 수 있기에 이 권위를 동원한 세습이 지배권력 전체를 강화하는 데 득이 될 것이 거의 분명하다. 그러므로 지배권력에겐 권력 세습이 크게 나쁠 건 없다. (지배권력 내부 문제는 그야말로 그들만의 문제다.)

 

1-2) 북한 민중에게 권력 세습은 나쁜가?

두가지 측면으로 나눠 따지면 답이 조금 더 쉬울 것 같다. (1) 정치적 권리 측면 (2) 경제·사회 등 기타 권리 측면.

 

(1) 정치적 권리:

북한 민중의 권력 선택권이 박탈된다는 점에서는 나쁘다. 그런데 선택권 박탈의 근본 원인은 세습 결정이 아니라 북한 정치 체제의 비민주성이다. 세습 결정은 비민주적 체제이기에 가능했을 뿐이다.

(1-1) 선택지가 전제되지 않으면 선택권 박탈이 “나쁜 것”이라는 판단은 별 의미가 없다. 최고지도자로 선택할 후보들이 여럿 있지 않으면 선택권이 없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기권을 선택할 여지만 남게 된다.

(1-2) 비민주성의 상징으로서 권력 세습은 북한 민중의 선택권을 박탈했다는 점에선 분명 나쁘지만, 현실에 있어선 대단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북한엔 ‘현 지배세력’ 이외의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선택지가 없는 건 북한 체제의 비민주성 때문이고. 결국 북한 민중이 선택권을 박탈당한 건, 권력 세습 결정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없기 때문이다.(물론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북한의 공식 이념인 “인민민주주의”)

(1의 결론) “권력 세습이 북한 민중의 선택권을 박탈하기에 나쁘다”고 하는 건 부정확할 뿐 아니라 위험한 주장이다. 이는 선택권 박탈의 진짜 원인 곧 체제의 비민주성을 감출 위험이 크다. 자칫하다간 북한 지배세력이 모여 앉아 형식상 투표로 지도자를 뽑으면 충분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2) 경제·사회 등 기타 권리:

기타 권리를 “행복의 증진 권리”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고 보면 질문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북한의 권력 세습은 북한 민중의 행복 증진을 가로막기 때문에 나쁜가?” 권력 세습이 행복 증진을 가로막는지 여부는 지금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김정은 대장”이 순조롭게 권력을 승계한 뒤 “계몽·혁신의 군주”가 될지 아버지나 할아버지보다 못한 “폭군”이 될지, 당장은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1-2의 결론) 북한의 권력 세습으로 상징되는 정치·국가 체제 문제는, 민중의 정치 권리를 증진시키는 동시에 민중의 행복을 돕는 최선의 방안이 무엇이냐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다만 그래도 남는 것은 “현실적으로 지배권력이 흔들리지 않고 순조롭게 권력 승계가 이뤄지는 게 민중의 행복에 이롭다면 당장은 민중의 정치 권리 박탈을 용인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이다. 이 문제에 답은 여러가지 요인에 대한 검토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람마다 모두 다를 수 있다.)

 

이 글의 맨 앞에서 거론한 글들 가운데에 이런 내 주장과 거의 같은 주장을 펴는 이가 있었다. 언론운동가 유영주다. 그는 “분에 넘치는 민주노동당 비판 경향 사설”이라는 글의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북이 특정 국가, 특정 체제여서 문제라면 그것은 오직 북 인민의 삶이 행복한가 그렇지 않는가로 접근해 논평할 일이지, 세습 여부를 판단의 절대치로 삼을 게 아니다. … 지금 북 인민의 삶이 행복한가 여부로 접근하면 세습은 사소한 문제로 평가될 수도 있다.” (유영주의 주장을 고려할 때 글의 제목은 조금 과하다. 편집자의 입김이 들어간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4. 북한 민주화의 주체는 누구인가?

 

또 하나 거론할 글이 있다. 손호철 교수의 글 “남한 진보여,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라”다. 나로선 이 글의 전체적인 논지를 이미 반박한 셈이지만, 마지막 부분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는 글의 마지막에서 “'진보적인 북한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면서 “진보적인 북한 민주화운동은 일차적으로 이의 진정한 주체인 북한 민중 스스로가 민주적 역량을 육성하고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고민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주장은 대체로 동의한다. 다만 ‘진보적인 북한민주화운동’이 뉴라이트류의 운동처럼 내정 간섭적인 형태가 되지 않으려면, 북한 민중 가운데 민주화 세력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전제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 민중 스스로가 민주적 역량을 육성하고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행위는 자칫 “반 정부 세력을 외세가 인위적으로 만듦으로써” 권력에 타격을 주려는 “제국주의적 공작 활동”과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결국 필요한 것은 “북한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북한 민주화 지원운동”이며, 이는 북한 민중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지원을 요청할 때나 본격화할 수 있는 일이다.

 

덧붙임) 북한 권력 세습이 대다수 남한 사람들에게 우습고 한심해 보이는 게 분명하다. 남한 여론이 북한을 무지몽매한 나라라고 생각하게 되면, 남북 관계 개선에 나쁘게 작용할 위험이 있다. 이 위험을 지적하는 심정은 십분 이해한다. 그렇다고 이른바 남한 “진보” 세력이 “세습 비판”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서 이 문제점을 완화시킬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남한내 “진보세력간 세습 비판 논란”은 “남한 내부용”에 불과하다.

 

덧붙임2) 글을 쓴 지 한참만에 처음 댓글을 접하면서 느낀 건데, 내 의도가 분명히 전달되지 않을 수 있겠다 싶다. 그래서 추가적인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마디 요약문을 덧붙인다. “문제는 권력세습이 아니라 북한 정권의 비민주성, 독재다.

2010/10/15 20:11 2010/10/15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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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세습 이야기를 피하기 어려울까

북한의 권력 세습을 놓고 말들이 많다. 특히 경향신문과 민주노동당이 갈등을 빚는 지경까지 왔다. 경향신문 절독 이야기까지 나온다. (뻥구라닷컴의 이 글 참고-글 자체도 재미있다) 사실 개인적으로 피하고 싶은 이야기다. 이른바 ‘좌파적인’ 시각이 조금은 순진한 데다가, 별로 근본적(본래적 의미의 래디컬)이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는 오해만 사기 십상이어서 조심스럽다. 그러던 중 나보다 훨씬 용기 있는 사람의 글을 발견했다. (북한의 이른바 “권력 세습”에 대한 메모) 부분적으로는 내 생각과 비슷한 점이 있어서 소개한다. (내 이야기는 과연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견적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서...)

2010/10/08 18:42 2010/10/08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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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딴에는 열심히 쓴 서평

청탁 때문에 이른바 ‘경제/경영’(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실상은 ‘자기계발/(자기)경영’) 서적 한권을 읽고 서평을 썼다. 나는 자기계발서라는 게 하등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사서 읽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기계발서가 꾸준히 팔리는 현상에 대한 관심과 비판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내 딴에는 열심히 썼다.

 

인간사를 ‘원인-결과’ 분석만으로 풀어낸다고? (프레시안북스 기고 서평)

2010/10/03 13:57 2010/10/03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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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무장단체를 만드는가

1. 올해는 블로그에 글을 번역해서 올리는 데 힘을 쏟겠다고 결심했는데 진척이 없다. 꽤 오래 손을 놨더니 진득하게 번역에 매달리는 게 엄두가 안나는 상태다. 그래도 다시 한번 올해 중에 보드리아르 관련 글 하나는 꼭 번역하기로 다짐.

 

2. 최근 독일 학자 클라우스 슐리히테의 책 <누가 무장단체를 만드는가>(이유경 옮김, 현암사, 2010)를 읽었다. 이런 책이다. “박사과정 일곱 명과 감독관이자 기록을 담당한 연구자와 공동 토론하는 형식으로 연구했다. 박사과정 학생들은 모두 2001~2007년에 최소한 6개월 동안 현장 리서치를 수행했다. 나는 이 기간에 세르비아에서 현장 리서치를 수행했다. 그러나 내가 이미 리서치한 우간다, 말리, 세네갈, 라이베리아 자료도 이 연구에 이용했다.”(40쪽) 연구 대상 무장단체가 자그마치 80개다.

 

그래서 큰 기대를 품고 읽었는데, 사례 소개는 별로 많지 않다. 우리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에리트리아인민해방전선(Eritrean People’s Liberation Front, EPLF)에 대해 조금 알게 된 게 가장 큰 소득이다. 20세기 후반부에 활동한 무장단체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조직이란 평가를 받는다는 집단이다. 이 조직이 (무장)운동단체에서 정부기구로 질적 변화를 이루는 과정은 현재 우리의 관점에서도 연구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다. 무장 부분만 빼면 조직과 전술, 전략 등은 보편적인 고민거리일테니까. 예를 들어 “운동조직에서 지방자치정부로”라는 관점에서 연구해 볼 수 있겠다는 이야기. 다만 이게 실제로 가능한 이야긴지는 모르겠다. 앞으로 이 단체에 관련된 자료를 찾아서 읽어봐야 판단이 가능할 것 같다. 아무튼 꽤 인상적인 활동을 통해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데까지 간 성공 사례인 건 분명하다.

 

책의 핵심 주장은 현대의 무장활동은 18, 19세기 서양의 국민국가 건설 과정의 폭력 동원과 질적 차이가 없는 정치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폭력이 난무하는 제3세계를 “실패한 국가”로 낙인찍는 담론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 이데올로기가 부적절한 건 말할 것도 없고. 다만 이 국가 건설 시도가 서구적 근대국가로 귀결될지는 불확실하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저자의 이론적 배경은 베버부터 부르디외까지를 연결시키려고 하는 정치사회학이다. (영어로 쓴 책을 번역한 것 같은데, 번역의 질은 책 내용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만큼 무난하다. 몇몇 용어 번역이 의아스럽기는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2010/09/23 10:10 2010/09/23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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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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