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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내용 유출 있음.

  • 등록일
    2012/03/16 12:17
  • 수정일
    2012/03/16 12:19

-1.

저번에 샀던 박완규의 <마지막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파본이어서,

이번엔 파본을 안 고르려고 책을 뒤적이면서 골랐는데

이번 책도 파본이더라. 망할 ㄱ-

 

0.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작가는 천명관이라는 사람이고, 원래는 영화감독을 꿈꿨다더라.

 

1.

가장 부러웠던 점은 깔끔한 문장.

문체가 감상적이지 않고 건조한데,

그걸로 드러내는 이미지는 선명하다.

여를 들면 이렇다.

이글이글 시뻘건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화염이 넘실대는 가마 앞에서 석탄을 밀어넣는 사내들의,

힘줄이 툭툭 불거진 굵은 팔뚝엔 송골송골 땀방울이 솟아오르고

땀에 젖어 번질거리는 얼굴은

가마에서 뿜어져나오는 열기와 불빛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고래>, 13~14쪽)

평범한 어휘로도 직관적이고 생생한 이미지를 형성했다.

부럽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2.

ㅇㅈㅇ는 표현 기법을 나보다 세밀하게 살피던데,

가령 '그것은 OO의 법칙이었다.'는 말이 반복되는 점이나,

뒤에 있을 얘기를 미리 해주는 점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나는 칼자국한테만 유독 장황한 수식어가 붙는 게 떠올랐다.

희대의 사기꾼이자  악명 높은 밀수꾼에

그 도시에서 상대가 없는 칼잡이인 동시에

호가 난 난봉꾼이며 모든 부둣가 창녀들의 기둥서방에

염량 빠른 거간꾼

춘희, 금복, 점보는 이름이 있는데 나머지는 이름이 없는 점,

(文이라고 이름이 있는 캐릭터가 있긴 한데, 저건 아무래도 성 같아 6-_-`.`.`. )

그런 것도 특색이 아닐까 싶다.

 

3.

판타지 소설이 아니지만 이 작품에선 말이 안 되는 내용이 꽤 있다.

(칼자국은 양 손 합쳐서 손가락이 4개뿐인데도 최고의 칼잡이고,

사람이 먹고 먹고 또 먹고 해서 순식간에 몸무게가 1톤을 넘어간다거나,

죽은 지 4년 된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다거나,

갓 태어난 아기가 기어가는 바람에 태반이 쑥 빠져나온다거나,

돌도 안 지난 아기의 몸무게가 30kg를 넘어간다거나,

평대의 학자들이 무당의 공수를 놓고 학파로 나뉘어가며 논쟁을 한다거나,

여자였던 금복이 점점 남자로 바뀌어가는 등등...)

평소 나는 소설, 영화, 만화 가리지 않고 그런 점을 발견하면

거슬려서 몰입을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작품에선 그런 거부감을 한결 덜 느꼈다.

그러려니 하고 넘기게 되더라고.

어째서인지 딱 짚어 말할 순 없지만,

옛날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이라 그러려니 하고 넘긴 게 아닌가 싶다.

ㅇㅈㅇ는 뒤에 있을 얘기를 미리 해주는 기법도

그런 데 영향을 주었을 거라 했다.

독자가 실시간으로 서사를 보는 게 아니라,

서사가 완결된 뒤에 '이런 일이 있었다더라'하고 보게 되니까.

바꾸어 말하면, 이 작품은 진짜처럼 그럴싸하게 쓰였다기보다,

진짜인지 아닌지 따질 필요를 못 느끼게끔 쓰였다.

 

4.

ㅇㅈㅇ가 또 주목한 점은, '전형적으로 유능한 인물'이 안 나온다는 점.

'전형적으로 유능한 인물'은 자기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식견도 있으리라 기대되는 인물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그나마 文이 거기에 가까운 인물인 것 같지만,

시멘트로 지은 집은 1년도 못 가서 무너지고 말 거라는 완전히 틀린 예측을 하니

전형적이지 않다는 얘기를 했다.

오히려 벽돌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만드는 춘희가

'전형적으로 유능한 인물'에 가깝다고 보는 모양이더라.

그 말을 듣고 곰곰 생각해 보니,

춘희는 사회와 완벽하게 격리된

원시인에 가까운 캐릭터(음성 언어, 문자 언어도 못함)여서

ㅇㅈㅇ가 말한 '전형적으로 유능한' 점이 돋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금복이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경향이 강해서 뻘짓도 하지만,

(늪지대에 벽돌공장을 세우느라 재산을 다 꼴아박았는데,

짓고 보니 벽돌 장사를 할 거래처조차 없는 상태라거나 6-_-`.`.`. )

과감하고 재치 있는 면모와 억세게 따라주는 운빨이 종종 돋보여서

사업가로서 '전형적으로 유능한' 캐릭터 같다.

한편, ㅇㅈㅇ는 작품에서 대체로 주인공이 '전형적으로 유능한' 인물로 나오는 건,

작가의 욕구인지 독자의 욕구인지가 의문인 모양이다.

내 생각엔 (작가나 독자나 캐릭터에게 감정이입을 한다면)

허구 속에서조차 무력감을 느끼기는 싫을 것 같으니,

둘 다가 아닐까 싶다.

 

5.

그러나 금복이 남자로 변하는 시점부터는 재미가 없다.

이전까지는 허황된 부분이 있고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적당히 거리감을 유지한 채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나를 즐길 수 있었는데...

이후부터는 아예 이야기와 유리된 느낌이랄까.

흐릿하고 붕 뜬 상태에서, 그저 결말에 이르지 못했기에 계속된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그다지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춘희의 갓난아이가 죽어가는 장면에서 애가 탔고,

죽어버린 게 아쉬웠던 정도?

(지금 생각하면, 갓난아이가 살아나서 춘희가 애를 열심히 키우는 것보다

아이가 죽어버려서 벽돌에 올인(...)하게 된 게

훨씬 나은 전개 같긴 하다.)

그 밖에는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춘희가 홀로 벽돌을 굽는 장면을

3쪽에 걸쳐서(쪽마다 2~3문장만 쓰고) 쓴 게 인상적이었다.

그 세월 동안 정말로 벽돌만 구웠다는 느낌을 주더라고.

 

6.

또 하나 아쉬운 건 춘희의 죽음을 다룬 에필로그.

환상적이고 동화적으로 처리한 게 아쉽다.

(ㅇㅈㅇ는 "유치하다"고 말했다 6-_-`.`.`. )

이건 작품 내적인 문제라기보다는,

내가 환상적으로 처리되는 죽음을 식상하다고 생각해서다. 

이전까지 색다르던 분위기가 한 방에 허물어지는 것 같아서.

그래서 차라리 극단적이다 싶을 만큼 현실적인 죽음을 그렸다면 어땠을까 싶더라.

먹이를 찾을 기력이 없어서 늘어진 채 굶어죽어가는 거.

아니면 다른 산짐승한테 잡아먹힌다거나 (...)

 

7.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종합해서 얘기하면 좋은 작품으로 꼽아도 될 것 같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다는 걸 감안해도) 지인에게 추천할 수 있는 정도.

그리고, 새삼 부럽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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