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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일지10]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매향리에서 안산까지.

 

 

갈 길이 복잡했다. 70킬로를 가야 했기 때문이다.
먼저 걷고, 다시 차를 한시간 가량 탄 이후, 방조제를 한참을 걸었다.
방조제의 길이는 11.5킬로 정도?

옆에선 길을 닦느라 흙에 물을 뿌리고, 다듬고, 콘크리트를 붇고 야단이었다.
온 국토가 그렇게 개발의 논리 속에서 몸살을 앓고 있다.

오늘은 곰샘, 전미경샘과 딸 지형이가 참여해 주었다!!!
곰샘은 "내가 올 때마다 힘들어"라고 하셨다. 
분명 만만치 않은 일정이다.

그렇게 안산으로 오니,
온통 공장으로 가득했다.

시골길에선 축지법을 구사한다느니 등등 신화의 주인공으로 회자되던 영진상,
공장으로 가득찬 서울 도심에서 조금 힘겨운 듯도 보였다.
우리도 힘들었다.

사각형으로 구획된 도로에 번호로 구별된 공장들.
한참을 가도 그 흔한 슈퍼도 없고, 사람도 거의 구경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온갖 공장에서 나는 매캐한 연기들...

한참을 가다 보니, 나뭇잎들이 모두 병들어 있었다.
벚꽃 나무였는데 마치 열매가 달린 것처럼 잎

한가운데가 불쑥 나와 늘어져 있다.

모든 잎들이 그러니 모든 잎들에 벌레가 앉은 것처럼 보였다.
암에 걸린 나뭇잎.

 

우리가 어떤 곳으로 가고 있고,

또 우리 나라가 어떤 곳에서 사람들을 노동시키고 있는가를 점차 알게 되었다.

안산역에 도착한 건 다섯시.

거기서 우린 또 다른 놀라운 풍경을 만난다.

온갖 나라의 언어로 쓰여있는 간판,

갖가지 표정과 피부색의 사람들,

가지각색의 옷차림.

90개국이 넘는 나라의 노동자들이 살고 있다는 안산의 원곡동.

거긴 이미 국경없는 마을이었다.

 

이주노조 위원장 직무 대행 샤킬씨 등을 만난 우리는 함께

내일 3시 반 안산역에서 있을 이주노동자 집회 참여를 호소하는 선전전을 했다.

누르 푸아르 씨가 죽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중국인이 살인적인 단속추방으로 추락. 의식불명 상태라 한다.

몇가지 언어로 쓰여진 선전물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공기도, 냄새도 수런거리는, 그 이질적인 공간에서.


선전물을 주면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는 죽은 이주노동자를 위해 지지를 보여준다.

 

하루 종일 행진한 뒤 행하는 선전전은
7시 30분까지 이어져서, 무척 힘들긴 했지만,
남은 것들이 아쉬울 뿐이었다.

추장네 집에서 엄청  많은 음식이 당도했다.
불고기, 호박무침 두가지, 콩자반, 우거지국, 또 뭐더라...
간만에 보는 유나는 넘 이뻤다.
영주언니도 반가웠다.

그 뒤 이주노동자들과의 간담회.
샤킬씨가 이주노동자들의 노조 설립이나 싸움의 역사를 들려 주셨고,
현재 그들의 요구와 어려운 상황을 말씀하셨다.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죽고 있고,
그래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정부는 불법이란 말로, 불법적 폭력을 저지른다.


"노동허가제 쟁취"
"노동비자 쟁취"
"단속추방 반대"
이것이 그들의 요구다.

다 알고 있던 슬픔인데도, 바로 옆에서 힘주어 그러나 겸손하게 말하는 샤킬씨.
너무나 슬프고, 또 너무나 강하다.
이주노동자를 자신들과 구별시키는 한국인들과 달리.
이주노동자들은 비정규직 투쟁, 동성애 등 성적 소수자 문제에
까지 연대해서 투쟁 중이었다.
그들은 말한다. "노동자는 하나다"
어떤 말보다 강한 언어.

전에 이주노동자 집회에서 "투쟁"이란 말이 모든 말을 대신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 강렬함이 너무 커서 였다.


투쟁~ 인간답게 살고 싶다!
투쟁~ 우리에게 노동비자를 달라!
투쟁~ 나는 슬프다.
투쟁~ 나는 강하다.


어제 들은 그들의 말이 그랬다.

마지막으로 샤킬씨는 정말 강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졌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이주노동자들과 연대할 것인지를 물었다.
우리 모두 함께 할 일이 만들어지길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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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 김강, 소수적 저항을 배우다

매향리에서 안산까지 오늘의 갈 길은 멀었다. 70여 Km를 처음에는 걷다가, 중간에 한 시간 정도 차를 탄 이후 시화방조제로부터 안산까지 다시 걸어 우리의 행진은 드디어 안산에 다다랐다. 지금껏 우리가 걸어왔던 곳과는 사뭇 다른, 도시의 풍경이 펼쳐진다. 사각형으로 구획된 도로에 번호로 구별된 공장들, 매캐한 연기들, 살아 있지만 병든 나무의 모습들... 마치 열매가 달린 것처럼 잎 한가운데가 불쑥 나와 늘어져 있는 끔찍한 모습을 우리는 마주해야 했다. 축지법 수준으로 걸어 다니던 우리의 영진상도 공장으로 가득찬 이 도시의 풍경 속에서는 신통력을 발휘하지 못하는지 많이 힘들어 보였다.


이 도시를 굴리는 건 8할이 이주노동자들이다. 온갖 나라의 언어로 쓰여 있는 간판, 갖가지 표정과 피부색의 사람들, 가지각색의 옷차림들로 안산의 원곡동은 그곳에 이주노동자들이 있음을, 그들이 노동하며 또 투쟁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이주노조 위원장 직무 대행 샤킬 씨 등을 만나서 그들과 함께 여러 가지 언어로 쓰여진 선전물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내일 3시 반 안산역에서 있을 이주노동자 집회 참여를 호소하는 선전전을 진행했다. 누르 푸아르 씨가 단속추방에 쫓기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다른 중국인 한 분이 살인적인 단속추방으로 인해 추락, 의식불명 상태라고 한다. 도대체 언제가 되어야 이 잔인한 탄압이 끝나는 것일까?

선전전은 7시 30분까지 이어졌고, 우리는 이주노동조합 분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88올림픽이 끝난 후 한국은 동남아시아의 많은 민중들에게 마치 새로운 황금광산인 것처럼 소개되었고,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이 땅을 밟았다. 새로운 삶의 모습을 꿈꾸면서. 그러나 그들이 살아가야 했던 현실은 끊임없는 착취와 단속, 추방, 그리고 심지어는 사회적 살인이었다.

산업 연수생 제도에서 고용 허가제로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결정하는 제도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사업장을 이동할 수 없으며, 노동권 행사의 길은 막혀 있다. 자본과 국가는 그들의 노동력만을 필요로 할 뿐이다. 생각하고, 저항하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의 그들의 권리는 거부당하고 있다. 그들은 때로는 범죄자로, 때로는 어렵고 불쌍한 '외국인 근로자'들로 이름 붙여지고, 재현된다.

최근 그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단속이라고 한다. 단속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다치고 죽으며, 임금을 받지 못한 채 쫓겨난다고 한다. 지금까지 무려 17명이 단속 때문에 죽게 되었으며, 심지어 단속이 아님에도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단속 때문에 숨어 지내면서 지병치료를 받지 못하여 죽은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저항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권리를 외쳐야만 했다. 종교단체나 인권단체, 센터들이 그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스스로 노동조합을 만들고,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삶을 바꾸어 나가고 있다. 얼마 전 그들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점거농성을 한 적이 있다. 아누와르 위원장이 구속되었을 때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었지만 그들의 진정을 인권위가 받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국가는 이런 식으로 인권마저도 국경을 나누고 이주노동자들을 배제한다. 그러나 그들은 국경을 넘어 투쟁하고 있다.

"노동허가제 쟁취", "노동비자 쟁취", "단속추방 반대"... 그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요구를 말한다. 자본과 권력이 그들의 삶을 억압하고, 사회가 그들을 불쌍한 사람으로 이름 붙이려 할 때 그들은 그들의 권리가 그들 자신에게 있음을, 그들의 능력만큼이 그들의 권리임을 주장하며 그렇게 살아있다.


이주노동자들은 또한 그들의 정체성에 입각한 그들의 문제만을 가지고 싸우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을 배제하고 차별하고, 그들만의 공간으로 몰아넣을 때, 그들은 이라크 전쟁반대, 비정규직 투쟁, 동성애 등 성적 소수자 문제에까지 연대해서 투쟁 중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차별과 배제를 통해 척도의 바깥에 있기에 다수자들과는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으며 만들 수 있는 소수자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존재와 행동으로 우리에게 호소한다. 그들이 우리가 그들에게 부여한 '외국인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뛰어넘고 있으니 우리도 한국인이라는 다수자의 정체성을 벗어버리라고 말이다.

이제 내일이면 우리는 서울로 들어간다. 우리가 길에서 보고 들었던 모든 것들, 우리가 만난 소수자들의 외침을 싣고 우리는 서울에서도 걸어갈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온 몸으로 "여기에 다른 삶이 있다"고 외쳤던 것처럼 우리도 외칠 것이다. 자본주의 속에 온 삶을 밀어넣고 사는 서울의 도시민들에게 또 다른 삶의 길이 있음을, 바로 이곳에서 우리가 그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음을 외칠 것이다. 새만금에 생명을! 대추리에 평화를! 한미 FTA 반대한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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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비참한 피해자에서 새로운 전사로-외국인 노동자

더듬거리며 어눌하게 말한다. 얻어맞는다. 프레스에 손가락이 잘린다. 임금을 받지 못한다. 도처에서 덮쳐대는 폭력. 쫓기는 삶. 벌써 10년 전쯤의 일이다. 텔레비전의 시사 프로그램에서 이주 노동자를 처음 보았을 때, 비통함에 숨이 막혀 채널을 돌리고 말았었다.

비통함에 숨 막혀 채널을 돌리고 말았던 10년 전, 지금은?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이 한국에 이주해오기 시작한 건 그 때보다도 무려 10년 전부터라고 한다. 그리고 2006년, 우리는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그들과 종종 스친다. 불편한 이질감 혹은 절대적인 무관심으로.

지난 4월 30일. 우연히 이주노동자 누르 푸아르씨를 추모하는 집회에 갔다. 그는 갑자기 들이닥친 단속 추방에 쫓기다가 죽었다. 1999년에 산업 연수생 제도를 통해서, 2004년에는 고용 허가제를 통해서 한국에 들어왔다 하니 대한민국의 이주 노동 정책을 두루 경험한 셈이다. 그 끝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집회에서 내가 만난 건 텔레비전이 보여주던 비참하고 불쌍한 약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거기엔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차분히 웅변하는 연설가가, 압도적인 슬픔의 순간에조차 유머를 잃지 않는 건강한 라커들이 있었다. 침묵조차 힘이 셌다.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이 한국에 가면 돈 벌 수 있다고 이주를 권장한 건 88올림픽 이후부터라고 한다. 고향에서 대학을 마쳤거나 교사이기도 했던 그들은 환율의 마법에 이끌려온 먼 나라에서 그 나라의 국민들이 기피하는 단순 제조업과 3D업종에 종사한다. 자본과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을 필요로 했다.

현대판 노예제도 싸워서 깨는 수밖에

그러나 91년, 최초로 수립된 산업 연수생 제도는 ‘현대판 노예제도’였단다. 기술이나 문화, 언어 교육을 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장시간 노동에 저임금을 강요당했을 뿐, 노동자로서의 어떤 권리도 보장받을 수 없었다. 그들은 연수생이었지 노동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2003년 도입된 고용 허가제는 노동3권을 보장하는 척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업장 이동을 할 수 없었다. 노동권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끔찍한 사업장을 도망치면 그들은 ‘불법 체류자’가 되고 만다.

   
 
불법적 인간. 자본은 그들의 노동력만을 필요로 한다. 정부가 그들의 존재를 불법으로 규정하면, 자본은 불법적 존재를 주워 먹는다. 임금이 체불되어도 하소연할 곳 없고, 몸을 다쳐도 보상은커녕 치료조차 요구할 수 없는 존재들.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임금을 떼먹고, 여차하면 신고해서 강제 출국 시키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일까! 자본과 국가의 절묘한 공모 관계. 하지만 놀랍게도 이주 노동자들은, 명목적인 노동 3권을 보장 받느니 차라리 합법적 인간이길 거부했다. 저들이 만든 제도 바깥으로 나가기.

이주노동자들 '제도 바깥으로 나가기'

   
 
불법적인 존재는 없다. 존재의 능력을, 생명을, 권리를 차압하고 사지절단 하는 권력과 법이 있을 뿐이다. 단속 추방 중지! 노동 비자 쟁취! 자유로운 출입국 허용! 이주노동자는 전 지구적 자본이 불러낸 노동력이었지만, 그들은 자본과 국가에 권리를 구걸하지 않는다.

자본은 모든 존재를 오직 불구로만 요청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주 노동자들은 스스로 권리를 만들고 있다.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서 일할 권리,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 자신의 삶을 구성할 권리를.

오늘 우리는 안산의 원곡동에 갔다. 거기에 90개가 넘는 나라의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국경 없는 마을이 있다. 영어가 아닌 다양한 외국어들로 쓰인 간판, 갖가지 피부색, 가지각색의 차림새, 그 웅성거리는 에너지에 가슴이 뛰었다.

내일의 집회를 알리는 유인물이 서너 가지의 언어로 만들어져 뿌려졌다. 시민단체가 그들을 보호해야할 대상으로 상정하고, 노동 단체가 최소한의 포즈로만 대응하는 동안 이주 노동자들은 이미 이라크 파병과 비정규직 문제, 동성애 인권문제에까지 결합하고 발언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 '웅성임의 에너지'는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물론 해결해야할 문제는 끔찍하게 많다. 거리에 나가는 것조차 무서운 현실, 태어나긴 했지만 학교에 가지 못하는 많은 아이들, 한국인의 국가주의가 그리는 분할선과 인종차별, 끝없는 구별 짓기. 그러나 이 무서운 배제와 차별을 가로지를 수 있는 건 통합이 아니다. 무수한 이질성의 상생이다.

모든 이질성들이 와글거리며 솟아오르는 원곡동 거리의 한 가운데서, 문득 예전에 보았던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떠올랐다. 자본만이 자유로운 미래의 코스모폴리탄에서 모반을 꿈꾸는 건 인간이 아닌 사이보그였다. 자본은 새로운 노동력을 공급받기 위해 사이보그를 제작했지만, 어느새 그들을 추격하고 뒤쫓아 다닐 수밖에 없다는 역설.

한편 영화의 주인공-인간은 자신이 사이보그인지 인간인지 헷갈려 괴로워한다. 그러나 그 순간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주 노동자들이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외칠 때, 그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뛰어 넘고 있으며, 우리에게도 한국인이길 뛰어넘으라고 요구한다.

우린 외국인을 넘어서고 당신들은 한국인을 넘어서라 

우리가 길에서 만난 모든 소수자들의 싸움 또한 그러했다. 그 외침들은 한국인으로 표현된 것도, 심지어 인간으로 발화된 것도 아니다. 단지 모든 만물은 들끓어 오르는 하나라고 외칠 뿐.

   
 
우리는 오늘 이질적 도시 안산에서 이주 노동자로써 말했다. 그들의 짧고 강한 언어를 빌려 외쳤다. 자본과 국가는 자꾸만 우리를 호명하고, 우리의 권리를 한정하려 하지만 이름을 잊은 새로운 전사들, 만남을 통해서만 새로운 이름을 얻기 원하는 전사들은 외친다. “스탑! 크랙다운! (Stop! Crackdown!) 더 이상 죽이지 말라! 불법적 인간은 없다!” 우리는 모든 이름과 권리를 가로질러 새로운 권리를 창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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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접대용 멘트'는 없다, 채찍 같은 말들

‘걷는다’라는 자동사 앞에서 나는 숙연해진다. 그것은 달린다 나 질주한다 와는 달리 오직 인간의 신체에만 부여된 속도의 동사이다. ‘걷는다’에 부여된 시간은 자연의 혹은 자연스러움의 시간이다.

걷기와 자연의 속도

걷다가 지치면 발걸음은 무겁고 느려지지만 신이나면 가볍고 경쾌해진다. 걷다가 만나는 우연한 풍경들(그 풍경들은 하나하나 개별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풀이고 나무이고 사람이고 건물이고 기계이고 동물이다)도 걷기의 다른 속도를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걷는다는 것은 나의 신체와 나를 둘러싼 세계가 하나의 리듬으로 운동의 호흡을 만들어내는 행위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균질적으로 구획하는 기계의 속도와는 다르다. 걷는다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오랫동안 내 안에 숨어 있던 기계의 속도, 문명의 속도를 털어내고 조금 더 빠르게 혹은 조금 더 천천히 자연의 속도와 가까워진다.

그리고 혼자가 아닌 ‘함께’ 걷는다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점점 개별적인 나의 속도에서 벗어나 집합적인 신체의 속도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행진 10일째.

   
 
대추리에서 나와 매향리로 향한다. 옆에 있던 누군가가 농담처럼 던진 말. “대추리엔 정태춘, 매향리엔 안치환...그들 때문에 투쟁하는 마을이 된 건가, 아니면 마을의 정기가 그들을 민중가수로 키운 건가” 두 마을은 아무래도 닮아 있다.

대추리엔 정태춘, 매향리엔 안치환 “두 마을은 닮아 있다”

이곳에서 일어난 미군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은 한국 사회에서 미국 혹은 미군이 갖는 성격과 위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미국은 안하무인이었고, 한국정부는 비굴했다. 참다못한 주민들이 들고 일어섰다. 매향리는 이겼고, 대추리는 지금 이기기 위해 싸우고 있다.

매향리 주민대책위 사무실(이 장소는 곧 후세들에게 투쟁의 역사를 가르칠 생생한 교육적 공간으로 바뀔 것이다) 측벽에 결려있는 ‘경축, 54년 만에 미국국제사격훈련장폐쇄’라는 현수막을 보자 다시 대추리 들판에 가로질러 쳐진 철조망이 눈앞에 겹쳐졌다.

   
 
매향리 주민들은 50년 넘게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미군의 포성을 참아왔고, 20여년 넘게 마을에서 미군을 몰아내기 위해 싸워왔다. 그리고 이겼다. 미군사격장 폐쇄를 위한 주민대책위원장을 맡았던 전만규님의 말을 빌자면, 미국과 싸워서 이긴 곳은 전 세계를 통틀어서 단 두 곳뿐이다. 베트남과 매향리. 대추리 투쟁이 승리한다면, 그 장소는 곧 세 군데가 될 것이다.

투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책위 사무실에서 우리는 또 현장의 투사들과 만났다. 전만규님과 매향리 어촌계장님, 그리고 강성찬님을 비롯한 화성호 살리기 시민연대 회원들. 그들은 모두 백전노장이다.

새만금과 비슷한 화성호 이야기

“배우러 왔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칼날 같은 말들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접대용 멘트’라고는 한마디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직설적이고도 투명한 말의 채찍이 방안의 공기를 긴장시킨다.

화성호 이야기는 새만금과 비슷하다. 멀쩡한 바다를 메워서 어민들의 생존권의 위협하고 갯벌에서 살던 생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간척사업에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화성호 살리기 운동은, 이미 간척이 진행되어 방조제가 설치되고 지역의 생활이 파괴된 상황 속에서 구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이 운동의 성패가 이후로 진행될 새만금 운동의 분위기를 바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향리에서도 간척사업은 중요한 문제였다. 마을 사람들 절반 이상이 어업에 종사했기 때문이다. 방조제가 생기면서 당장 먹고 살 일이 막연해졌다. 그들의 유일한 생활근거인 바다가 막혀버렸으므로.

막은 바다는 2012년에나 농지로 만들어서 나눠준단다. 알량하지만 보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장 먹고 살다보니 이리저리 흩어졌다. 몇 대에 걸쳐서 바다와 더불어 살아온 어부들이 하루아침에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유민이 되었다.

“희망이 없어.”
“법이라는 건 누구한테나 공평해야하는 거잖어. 그런데, 그게 아니야. 우리가 싸우다보니까 알겠더라고. 법이라는 게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는 얼마나 불공평하고 가혹한지.”

“희망이 없어. 그 따위 정치나 하고 지랄들이여”

“바다를 못나가니 어째. 어디 가서 날품이나 팔든가 하는 거지. 정부가 어민들을 모두 거지로 만들어. 국민이라고 생각을 안 하는 거지.”
“아니, 정책을 만들라고 국회로도 보내고, 세금도 내고 하는 것인데 왜 정책은 안 내놓고 정치나 하고 지랄들이여”

사격장 투쟁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매향리 사람들(어디 매향리 뿐이랴. ‘없이 사는’ 사람들은 모두)은 언제나 국가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법의 보호를 받는 ‘국민’은 ‘가진 자들’일 뿐이라는 걸 그들은 싸움의 과정 속에서 몸으로 깨달았다.

‘까짓 거, 해준 것도 없는 국가? 나 국민 안한다.’ 매향리 주민들은 사격장 투쟁 때 이미 한 번 주민등록증을 반납함으로써 ‘국민으로부터의 탈퇴’를 선언한 바 있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를 “어민들은 본래 거지근성이 있어서…”라고 낮추며 ‘국민 안 하겠다’는 태도를 보일 때, 그것은 대단히 근본적이고 비타협적인 투쟁의 의지에 다름 아닌 것이다.

“나, 이 나라 국민 안 한다”

어쩌면, 애초부터 그들에게 ‘국민’은 부자연스러운 칭호였는지도 모른다. 부락을 이루고 대대로 고기를 잡든 농사를 짓든 자연스럽게 그저 살아갈 뿐인 사람들 앞에 국익, 개발, 사업, 보상 등의 말은 전혀 현실적이지도 구체적이지도 않았다.

대체, 누구를 위한 개발이고 사업이란 말인가. 혹은 누구의 행복을 위한 일이란 말인가. 흔히, 국가관료들과 정치인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도표나 수치로는 그것을 말할 수 없다. 삶은 언제나 지극히 개별적이고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상들의 무덤을 뒤에 두고 물댄 논 위로 낡은 전신주가 달린다. 더 이상 포성이 들리지 않는 마을에서 또 하루를 시작하며 나는 안심한다. 짧고 경쾌한 새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 매향리의 아침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하지만 매향리의 평화로움은 목가적인 풍경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매향리의 평화는, 사격장을 폐쇄한 자리에 해양리조트를 만들려는 자본과 권력의 음모, ‘누군가’를 위한 사업을 ‘모두’를 위한 사업인 양 사기 치는 간척사업에 혈안이 되어 있는 자들의 음모와 싸우지 않는 한, 싸워서 다시 그들의 권리를 돌려받지 않는 한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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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땅이 목숨인 사람들과 땅이 돈인 사람들

1. ‘주식회사 대한민국’

오늘은 부안의 새만금을 떠나 ‘걸으면서 질문하기’ 시작한 지 9일째가 되는 5월 18일이다. 광주민중항쟁 16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는 충남 아산을 출발해 평택 대추리에 도착했다.

아산시청에 집결한 30명가량의 대원들은 “생명 권리 쟁취 투쟁”이라는 구호와 함께 대추리를 향했다. 선거철이다 보니 거리에서는 유세차량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출마자들의 캐치프레이즈는 천편일률이었다.

   
 
“주식회사 아산!” 아산이라는 지역은 이제 하나의 기업이 된다. 물질적 풍요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찬 지역 주민들의 뜻을 정확히 대변한 캐치프레이즈일까? 아닐 것이다. 인간들의 욕망이 어찌 이렇게 천편일률적으로 삭막할 수 있으랴. 한 주민은 이런 말을 했다. “아산과 천안이 통합돼 광역시가 될 것”이라고. “광역시가 된다고 과연 행복할까요?” 하는 나의 질문에 그분은 “그래도 도시가 커져야 먹고 살 게 많아지지 않겠냐”고 한다.

선거는 시민의 뜻을 민주적으로 대변하는 민주주의의 아름다운 기제가 아니라 주민들의 다양한 욕망을 오로지 경제적 풍요로만 환원하고 고정하는 저열한 폭력의 장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선거 때만 되면 더 강해지는 대한민국, 더 부자가 되는 대한민국이라는 환상을 갖는다. 그렇지만 그 환상 아래 갈수록 심각해지는 고용불안, 저임금, 양극화 등에 대한 인식은 없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라는 세계 일류기업 안에는 노동착취와 1,000만에 가까운 비정규직 노동자, 인간적 권리를 박탈당한 이주노동자, 저임금으로 허덕이는 여성노동자들이 없는가보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을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라는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무능력하고 불필요한 인간으로 규정하며 당장 하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대한민국이 주식회사가 될 때 소수자들은 사회의 암적인 존재가 돼버린다. 인간에 대한 야만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2. “소수자에 대한 학살을 당장 중단하라”

평택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길을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런 일인지 이제 알겠다. 쉴 때마다 약상자를 찾는 대원들이 늘어갔다. 평택 입구에 들어설 때 가장 눈에 선명했던 것은 “미군철수 주장하는 빨갱이들 물러가라”는 현수막들이 곳곳에 늘어서 있던 광경이었다.

치열한 이념대결의 현장에 들어설 때 우리들은 조금씩 긴장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것이 지역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라는 추상적인 부(富)를 갉아먹는 것일 때 사람들은 무턱대고 ‘빨갱이’라는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그 ‘국가적 이익’이 자신한테 고스란히 돌아올 수 없으리라는, 국가경제의 성장이 소수 대자본과 그 직원들에게만 엄청난 풍요를 선사하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우리는 평택역에 도착해서 침묵시위를 준비했다. 마스크를 쓰고 대추리에 대한 폭력적 진압을 보여주는 사진을 들고 평택시청으로 향했다. “소수자에 대한 학살을 중단하라”는 대형현수막을 들고서. 시민의 삶을 보호해야 할 시청이 시민들에 대한 군·경의 참혹한 진압을 묵인한 사태에 대해 엄중히 항의하는 차원에서 시청으로 향한 것이다.

시청 앞에서 약 3분간의 침묵과 묵념의 시위를 벌인 우리들은 시청을 돌아 다시 평택역으로 향했다. 우리는 침묵했다. 그렇지만 그 침묵 속에는 평택시청에 대한, 나아가 국가에 대한 엄청난 분노와 항의가 담겨 있었다. 침묵이 가장 큰 울림임을 우리는 역설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대추리에 대한 진압은 ‘학살’이었다. 5․18의 기억을 갖고 있는 우리들은 농민들에 대한 군사작전, 체포, 폭력은 엄연한 ‘학살’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농민들은 이제 ‘소수자’다. 내 땅에 농사짓고 살고자 하는 소박한 소망조차 군대와 경찰에 의해 짓밟힐 때 그 농민들이 어찌 소수자가 아니랴. 우리는 대추리 농민에게서 소수자의 현재와 미래를 직시했고 예감했고 분노했다. 그러므로 “소수자에 대한 학살을 중단하라”

3. “김치 맛이 똑같은 동네”

대추리로 들어간 우리들은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무려 625일째 계속되는 집회였다. 2년 가까이 어떤 일이 지속되고 있을 때 우리들은 거기에 담긴 열망의 강도와 진정성을 느껴야 한다.

외부세력의 사주라면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촛불집회가 계속될 수 있겠는가. 한 80여 명 정도 되는 인원 중에 대다수는 늙으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이분들의 삶의 감각이 어디 남에게 속아서 집회를 할 성격의 것이란 말인가.

집회가 끝난 뒤 우리는 대추리에 농토를 가진 37세의 신대리 주민에게서 대추리의 상황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대추리 주민이 아니다. 그러나 땅은 대추리에도 있다. 일종의 ‘외부세력(?)’이다. 정말 농지를 ‘부동산’이라고 생각했다면 이 분이야말로 정부에 땅을 매각하고 떠날 수 있는 조건에 있었다.

그러나 농부들에게 땅은 ‘목숨’이라고 한다. 그래서 떠날 수 없단다. 대추리는 김장 맛이 똑같다고 한다. 같은 회사에서 사서 먹어서 그러나? 아니! 김장을 할 때 서로 도와서 하기 때문이란다. 아름다운 공동체다. 누가 그 고상한 의미를 가르쳐주지 않아도 대추리 농민들은 협력적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렇게 살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마을에 초상이 나도 찾아가지 않는 동네가 되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 간에, 형제지간에 지울 수 없는 적대의 균열이 생겼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공동체를 도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공동체를 파괴했는가?

   
 
군대와 경찰, 언론과 정부, 그리고 이 국가야말로 최대의 폭력세력이고 ‘외부세력’이 아닌가. 국가는 평화롭고 협력적이고 민주적인 아름다운 공동체 대추리를 파괴한 외부세력이다.

280만평의 땅 중에서 국가의 집행을 거부하고 아직 동네에 남아 있는 땅이 70만평 정도 된다고 한다. 37세의 신대리 주민은 지금부터 어떻게 싸워야 할지 막막하다고 한다. 불안하다고 한다.

식민지 시대에는 일본군 비행장을 짓기 위해, 해방 후에는 캠프 험프리라는 미군 기지를 짓기 위해, 2003년부터는 미군기지 확장을 위해 자신의 힘으로 직접 간척한 농토를 내주어야 하는 대추리 주민들. 모두 국가의 전쟁 때문에 힘없는 농민들은 계속 땅을 빼앗기고 있다. 국가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농민들은 소수자다.

대추리 농민과 함께 하는 싸움이야말로 평화를 위한 싸움이며, 억압받는 소수자들을 위한 싸움이며,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이다. 다수의 의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면 우리는 그런 민주주의야말로 가장 폭력적인 야만이라고 생각한다.

다수의 의견이든 군사독재자든 독재는 마찬가지다. 소수 의견의 존중과 다수 의견의 집행은 절대 양립할 수 없다. 소수는 늘 말살당하고 학살당한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서로 아름답게 합창을 이룰 수 있는 사회야말로 민주주의다.

파괴되어 잿더미가 된 대추분교에는 높다란 깃대 위에 하나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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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일지9] 대추리에서 매향리로!

 

대추리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에 대추 분교에 갔습니다.
다 망가진 학교건물 잔해위에 평화라는 깃발 옆에
만세는 연구실 깃발을 같이 세워봅니다.
모든것이 망가졌지만, 민중예술가 구본주 작가의
청동상은 망치로도 포크레인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여전히 대추분교를 지키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구본주 작가는 죽었지만 작가의 아내가, 그  청동상이 있어야
할 곳은 대추분교라면서 올해 3월 대추분교로 왔다고요.
마을 곳곳의 벽에는 그림과 시, 노래 악보가 그려져 있습니다.
 

 

대추리를 걸어나오는 동안,
우리가 볼 수 잇었던 것은
대추리 땅에 칭칭 감겨진 철조망과 농사못짓게 갈아엎은 땅,
그리고 전경들과 차 밖에 없었습니다.
(전경들 사진 찍는 것은 쉽지도 않았어요,)
여튼, 우리는 그 곳 전경들 사이에 깃발을 휘날리며
힘차게 걸어나왔습니다.
어제 평택 시청 공무원들이 벙쪘던 것만큼이나
전경들도 우리 대장정 팀을 보고 황당했을 겁니다-_-;
 

 

대추리에서 나와 매향리로 가는 길.
음... 엄청난 속도였습니다. 거의 날라갔습니다.

대추리에서 빠져나와 우리가 걷는 길 옆으로
미군기지 이전 280만평 땅의 일부가 보였습니다.
바다에는 뗏목 두대에 덤프 트럭을 싣고 공병들이 보였습니다.
덤프 트럭이 그냥 마을로 들어오면 주민들이 심하게 막을까봐
아예 바다에서 뗏목으로 덤프트럭을 나른다고 합니다. (이 사진은
제가 나중에 올려드릴께요.)

날으면서 걸으면서 뛰면서 노래부르면서 소리지르면서
그렇게 매향리로 갔습니다.
 

 

날다시피해서 6시 정도에 매향리로 도착했습니다.
용언니와 엉선생님이 맛있는 저녁을 준비해주셔서
먹었고,
그 이후 주민분들이 한분 두분 오셨습니다.
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장님도 오셨고, 배를 가지신 선주, 선장님도 계셨고 이전에 농민회 회장님도 오셨습니다.

매향리가 있는 화성은 생각보다 큰 땅이었습니다.
화성이 서울의 1.4배, 수원의 5.5배 면적이라는거 혹시 아시나요?
오신 분중에 화성호(화옹호) 문제로 운동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간척사업이 강의 하구를 막는 것이고, 그 모든 것이 인간에게
돌아올 것이라며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중요한 부분은 새만금이나 화성호 문제를 언급할 때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안된다고 하셨지요.
방조제 건설 뿐 아니라 내부의 오염원공사라든가 여러가지가 있는데 실제로는 그 후자가 훨씬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죠.
네덜란드가 오히려 간척지를 갯벌로 만드는걸 연구하듯 우리도 결국 그렇게 돌아갈 것이고, 지금 그것에 대비해야 한다고 하셨을 때, 아 정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어떻게 운동을 하고 어떻게 공부할지 등등 자신의 모든 과정과 앞으로 나갈 길을 스스로 개척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길 위에서 또 많이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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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일지8-1] 대추리 다녀왔어요! (롬)

흔들리는 차 안에서 비몽사몽간에 내다본 창밖에는 어스름 낀 마을에 온통 들어찬 경찰 차량들로 가득했다.
낮은 하늘에 떠 있는 헬기들과,
메스를 들이댄 수술부위처럼 마을 곳곳에 세워진 철조망들,
그리고 흡사 마네킹처럼 두 줄로 도열해 있는 전경들까지.
대한민국 땅에선 아직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지금 나는 어느새 전시 상황 속에 들어와 있었다.
차가 멈추고 문을 열자 갑자기 어지럼증이 일었는데,
그건 전에 와본 적 있다고 믿었던 공간이 기이하게 얼크러져 있을 때 느껴지는 이상하고 불쾌한 감각이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는 네 마리의 개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분명 전에 왔던 곳이다.
그러나 그곳임을 가장 확실하게 말해줄 지표가 사라지고 없었다.
얼마나 예뻤던 곳인데!
주위 사람들 하나하나 불러 모아 마치 내 것인 양 자랑하며 보여주고 하나씩 가리키며 설명해주고픈 곳이었는데,
이미 그곳은 사라지고 그 자리는 쓰레기더미만 몇 뭉치씩 남은 폐허가 되어버렸다.
 
알다시피 대추리는 곳곳에서 모인 예술가들이 꾸며놓은 예쁜 마을이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교실 창문 하나하나마다에 그려놓은 할머니할아버지 그림들에다 운동장에 서 있던 키 작은 구름다리,
그리고 동상들로 가득했던 대추분교는 평화의 마을 대추리의 상징이었다.
상징이 사라진 공간, 외부의 힘에 의해 상징을 잃어버린 공간은 애달프기만 했다.
나는 채 잠이 깨기도 전에 그 주변을 서성대며 전에 보았던 것을 찾아내려 했지만,
괜한 발걸음으로 애먼 동네 개들에게 겁을 주기만 했다.
 
담 너머에서 확성기 소리가 들려 그쪽으로 향하니 점점이 촛불들이 어둠 속에서 떠올라 있는 게 보였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동그랗게 등을 말고 앉아 그 품 안에 촛불을 안고 있었고,
저편으로는 내 허리춤 정도에 머리가 닿는 어린아이들 몇이 소리 지르며 뛰어놀고 있었다.
불 꺼진 집들 한복판에서 그래도 남아 있는 우리들을 보자니,
나는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말보다도 ― 그런 걸 떠올릴 만큼 당시 내 마음이 훈훈하지를 못했다 ―
잘 어우러져 살아가던 집들을 탈탈 털어 모두 빈집으로 만들어놓은 서울의 저 빌어먹을 인종들이 떠올라 이가 갈렸고,
지금도 우리 머리 위로 소리 내며 날아다니는 헬기들을 하나하나 쏘아 떨어뜨리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아 사지 끝이 떨렸다.
 
거대담론은 잘 알지도 못하고, 별로 관심도 없다.
다만 그런 큰 이야기들이 오가는 속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조망대에서는 보이지 않을 만큼 희미할지 몰라도 그 안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큰 충격이고 아픔인지에 대해서는 짐작할 수 있다.
짐작이 되는 딱 그만큼 나도 마음이 아프다.
주한미군이 주둔지를 옮겨 더욱 기민한 전쟁기계로 한반도 위에 군림한다는 것에 대해 느껴지는 긴박함이나 위협보다도
먼저 느껴지는 감각은, 그렇기에 슬픈 분노다.
 
전 생애에 걸쳐 오직 한 가지 일에 집중하고 사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도를 터득한단 말을 들었다.
그 도라는 게 이 산 저 산을 훅훅 날아다니는 그런 신묘함은 물론 아닐 테고, 아마도 그것은 동화(同化)가 갖는 힘일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의 굴레에서 벗어나 벼와 고추와 감자와 하나 되는 힘,
그것들이 내쉬는 호흡을 함께 느끼고 마을 전체에서 공명하는 힘이라든지 하는.
아마도 그래서, 농촌에서 씨 뿌리고 벼 거두며 일평생을 산 사람들을 우리들은 흔히 ‘순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모여서 순하게 살며 논농사 밭농사 짓는 사람들을, 그런데 왜 밖으로 내모는 것인지?
이젠 존재하기도 힘든 이런 공동체를 왜 가만 두지를 못하고 해체하려 하는지?
돈이면 다 된다는 심보에 보상금 툭 던져놓고는 왜 같은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눈총 겨누게 하는지?
 
마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대추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물론 대추리가 잘 살고 있을 때는 굳이 알리지 않아도 괜찮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젠 알리지 않고 묻어둘 수 없다.
알리는 것에 실패하는 순간, 대추리는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
학교가 교실 책상 하나 남지 않고 싸그리 사라져버렸듯 이 마을 전체도 그렇게 이름 없이 묻혀버리게 두고 싶지 않다.
 
예쁜 마을이라고 자랑하고 싶었던 그 마음을 접는 대신
이젠 그 마을을 되살리자는 말을 하기 위해 사람들을 대추리로 불러 모으고 싶다.
도시 속에서 없는 유토피아를 꿈꾸며 꾸벅꾸벅 졸 것이 아니라,
지금 사라져가는 이 작은 공간 하나를 우리가 또 다른 멋진 곳으로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평화’란 말도, ‘희망’이란 말도 사라지고 이젠 그 단어 자체가 희화화돼버린 시대지만,
이제 그것에 살점을 붙이고 몸을 만들어 눈으로 만지고 손가락으로 더듬을 수 있는 실체를 한 번 만들어보는 것이다.
 
이런 곳이 대한민국 땅에 있다는 것을 제발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예술가들이 벽마다에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새를 들고 있는 거대한 여자가 논 옆에 세워져 있고,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사람들이 저마다 붓을 들고 달려들어 그린 그림들로 가득 차 있는 그런 마을이 있다는 것.
칠십 팔십 먹은 노인들이 김장철이면 이집 저집으로 우르르 몰려들어 김장을 하는 바람에 마을 김치 맛이 모두 똑같은 마을,
칠십 팔십 먹은 노인들이 600일이 넘게 저녁마다 촛불 하나씩을 밝혀들고 마을 가운데에 모여 앉아 이곳이 지켜지기를 기원하는 마을,
낮에 군대가 나타나 마을 여기저기를 흩뜨려놓으면 그 밤에 다시 모든 마을주민들이 나와 그것을 복구해놓고
그러고는 또 새벽같이 일어나 당신네들 논을 한 바퀴 둘러보고 아침상을 차려 먹는 마을.       
 
내 일이 아니면 다 상관없다는 게 요즘 인심이라고들 하지만,
그러면서도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런 저런 억울한 사연을 보면 그 다음날 다 같이 욕을 하고 화를 내는 게 우리들이기도 하다.
한낱 가십거리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남 일 같지 않고,
남 일이더라도 왠지 내 일처럼 화가 나는 그런 일들이 살면서 꼭 몇 번씩 있지 않은지.
사람 마음이란 그런 면에서는 다 같은 게 아닐는지.
 
내가 몇 번 채 가보지도 않은 경기도의 저 작은 마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도 아마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대추리의 할머니들을 보면 꼭 저어기 강원도에서 아직도 농사를 짓고 계신 외할머니가 생각나고,
대추리의 예쁜 벽과 집들과 조각을 보면 훗날 나이 먹은 내가 살고 싶은 이상의 공간이 생각나고,
포크레인 한 방에 힘없이 무너진 구름다리와 학교 담을 떠올리면
바로 내 몸이 알지도 못하는 외부의 힘에 눌려 찢기고 밟히는 듯한 착각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막상 가면 할 게 없는데도 자꾸 대추리에 가고 싶고,
대추리에 가면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왠지 기분이 편해지고,
대추리에서 떨어져 있으면 내내 불안하고 온 신경이 그리로 쏠리는 것도 아마 다 그래서일 것이다.
 
한 번씩만 사람들이 그곳에 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번 가서 마을의 ‘새 든 녀’를 만나고 할머니들 만나고
사람을 봐도 짖지 않고 고개만 갸우뚱거리는 개들을 만난다면,
아무도 대추리의 존재에 대해 비난이나 회의의 말을 쉽게 던질 수 없을 것이다.
그곳에는 폭력집단이나 빨갱이가 아니라, 노인들이,
그리고 노인들이 친자식처럼 여기는 벼와 고추와 열무가,
그리고 그 노인들을 친가족처럼 생각하는 지킴이들이 함께 밥을 지어 먹으며 촛불을 밝히고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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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일지8] 우리의 침묵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대장정 5월 18일 일지

오늘은 아주 많은 분들이 대장정에 참여했다. 총인원은 30명이 넘는다. 아침·점심·저녁 계속 새롭게 도착한 사람들 모두들 반가운 얼굴들이다. 숙소였던 민노당 충남노동자 교육소에서 아침을 차려먹고는 집결 장소인 안산시청으로 향하였다. 낙오한 투쟁국장의 차를 기다리는 동안 - 곰숙왈 정정훈은 차를 타도 낙오를 하냐! ^^; 이은봉 훈장님과 너굴누나 곰숙님, 은봉형 형수님이 도착하였다.

잠시 후 현민의 구호와 함께 하루의 장정이 시작되었다. 오늘 걸을 구간은 27킬로미터로 비교적 짧은 구간. 발걸음도 가볍게 행진 누군 “이건 산보수준이라고 연발” 하기도 했다. 행진 도중 그린비 홍승호님이 중간에 합류하시고, 오전 휴식시간에는 엉샘의 차를 타고 정수형, 옥상, 명희, 이미경 선생님이 도착하였다. 역시나 가장 인기 있는 간식은 오이다! 사람들은 특히 냉장 보관된 오이를 마구마구 사랑한다!! (홍승호님은 그린비 사장님에게 오늘 “출근”을 안산으로 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물으셨다고 한다. 다시 생각해도 그린비는 훌륭한 출판사다.)

휴식시간 전후로 항상 간단 구호와 함께 대열을 정비하는데, 보통은 “새만금에 생명을, 대추리에 평화를, FTA에 반대한다, 투쟁”이다. 만약 누군가가 구호를 부탁하면 그냥 이렇게 하면 된다. 할 구호가 없다고 빼다가, “마누라도 함께 한다“라고 구호를 외쳤던 이은봉은, 순간적으로 대규모 폭력사태에 직면하였는데 주의하시라. 이런 게 다 선례고 교훈이다.

어제까지 지나온 영화 섬에 나온듯한 저수지가 보이는 아름다운 시골국도는 지나가고 평택으로 향하는 길은 고속도로와 같은 도시국도였다. 행진하기엔 매우 위험한 길이어 선두와 후미에서 교통을 정리하던 여일과 성국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

5시 경에 평택역에 도착해서. 시청에서 할 침묵시위를 준비하였다. 모두들 X표가 그려진 하얀마스크를 쓰고 도로를 행진하였다. 평택 시청앞에서 억압받는 대추리 시민들에 무관심한 시청을 비판하면서 우리는 침묵시위·퍼포먼스를 하였다. 시위 혹은 데모에 부정적인 평택시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 한시간 반 정도 시내를 걸어다녔다. 시민들이 뿜어내는 어펙트/정동(?)는 우리가 시골길을 걸으면서 만났던 시골 농부들의 그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솔직히 당혹스러웠다.

시청시위 후. 대추리로 향하는 버스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침묵 속에서 강행군을 했기에,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땐, 모두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 일정을 시작할 땐 27키로 정도로 비교적 쉬운 하루가 될거라 예상했으나, 평택 도착 후, 시위 일정 때문에 다시 한 10키로 정도가 추가되었다. 우리는 이상하게 곰숙님이 오느 날마다 험난한 백리길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장정에 뒤늦게나마 참여하시는 분들은 주의하시라.

잠시 후 간식을 먹으면서 대추리로 향하였고 우리는 7시 30분 정도에 625번째 대추리 목요 촛불시위에 참석하였다. 마침 민노동 경기도지사 출마자인 김용한 후보의 선거 유세가 있었다.

선거 유세가 유세이기 때문에 다 그런진 모르겠으나. “저는 슬픕니다. 대추초등학교의 학살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한나라당 열우당 노무현 미군놈들 다 나쁜 개새끼 들입니다. 저만이. 우리 민노당만이 서민들을 생각하면, 여러분들이 읽어버린 대추초등학교를, 과거의 대추리를 되돌려 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집권해야 합니다.” 라는 식의 단순·과장 레토릭에는 개인적으로 동감하기 힘들다.

연설을 들으면서 우리의 시위는 누굴 위한 것인가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어떠한진 모르겠지만, 난 무엇보다 날 위해서 시위를 하였다. 내가 만족하기 위해서. 내가 옳은 일이라 생각하기에. 내 공부를 삶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어떤 점에서 난 시청에서 모든 이들의 방조 혹은 무관심 속에서 시위를 하였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정치적 공수표가 아닌, 나의 윤리에 혹은 우리의 윤리에 충실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한편으론 만족을 하기도 한다.

우리의 집단행동, 우리의 결정과 실행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윤리적 공통감각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공통감각을 길을 걸으면서 타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새롭게 다시 형성하고·나누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만남은 서로간의 투쟁의 진지한 의견 교환이기도 하지만, 아주 단순한 터치이기도 하다.

촛불 집회 중. 대장정 티셔츠만 입은 지영이의 등이 추워 보인다고 한 할머니가 쓰다듬어 주셨다. 카메라에 담아 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장면은 지난 삼일간의 행진 속에 스쳐간 무수히 많은 기억 중 가장 선명한 “만남”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촛불 집회 중간에 주민들 앞에서 인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고추장이 간략하게 우리 대장정의 취지에 대해서 알리고. 지금까지 장정에 대해 보고를 하였다. 바다가 돌아 온줄 알고 기어 나온 새만금의 백합조개가 빗물에 때죽음을 다했다는 얘기를 했을 땐 많은 할머니들이 혀를 차면 안타까워하셨다. 어떤 이들은 새만금의 백합조개와 생명에 대해 얘기할 때, 여기는 사람이 죽어간다. 우리에게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며 충고를 한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모든 결정의 긴급성 앞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무시되고 소외되며 죽어나간다. “삶의 기반·생명의 권리”를 마구대하는 정권 앞에서 그들의 결정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잠시나마 중단이라도 시켰으면 좋겠다. 제발 이젠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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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월) 평화난장+촛불문화제에 함께 해 주세요!

 
 
 
 
함께 걷고 싶습니다 !!
 



지난 5월 11일부터 21일까지 연구 공간 수유+너머에서는 ‘걸으면서 질문하기’,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천릿길 도보행진을 하였습니다. 길 위에서 세상을 배우고 질문을 던지기 위해 나선 길이었습니다. 길 위에서 우리는 많은 것과 만났습니다. 그 중에는, 물길이 막혀 신음하는 새만금의 생명체들과 한미FTA 음모에 시름하고 분노하는 사람들과, 철조망으로 막혀버린 대추리의 아름다운 들판과, 노동자의 이름조차 얻지 못한 이주노동자들도 있었습니다. 모두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노동하고, 향유하고, 존재할 권리가 있는 자들, 지금은 비록 그것을 빼앗겼으나 자신들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싸우는 ‘소수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우리들이 길 위에서 만났던 소수자와 더불어, 우리 스스로가 소수자의 목소리가 되어, 비루한 세상의 권력과 싸우기 위해, 다시 길 위에 서겠습니다. 그리고 걷겠습니다. 저항하는 소수자들의 행진에 여러분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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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진시간: 5월 22일 월요일 오후1시부터 7시까지

2. 행진경로 및 거리: 연대 앞에서 동아일보 사옥 앞까지, 약 13km
  
* 자세한 행진 경로 별첨(홈페이지 : http://ftakiller.ba.ro)

3. 행진 컨셉
  1) 억압하는 권력과 저항하는 소수자의 이미지를 담은 캐릭터 인형 등 행진 대오에 결합.
  2) 관련 내용들(한미FTA, 평택 미군기지, 장애인, 이주노동자, 새만금 등등)을 담은
     선전물, 피켓, 구호 등을 이용, 우리의 목소리를 전한다.
  * 문화연대 시위버스와 함께 시내 주요 거점마다 짧은 선전전 병행.
  * 5시부터 6시까지 대학로 마로니에에서 “평화난장”

4. 행진 이후 7시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저항하는 소수자들의 촛불 문화제>

5. 함께하시는 분들
   문화연대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스크린쿼터철폐 영화인대책위
   아름다운마을공동체
   연구공간 수유+너머
   이주노동자노조(MTU)
   자율평론
   전교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 서울대책회의
   한미FTA저지 교수학술단공대위

   그리고 함께하고 싶은 분, 바로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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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일지7]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5월 17일 대장정 일정

인근 경찰서 정보과장님의 배웅을 받으며, 예산 <더불어살기 기념 운동본부>에서 아산으로 출발.

오늘 일정은 약 30키로. 긴 거리는 아니지만 고갯길이 많아 걷는데 애먹었습니다.

이우학교 학부모님과 이희경샘이 오셔서 점심부터 계속 함께 걷고, 저녁엔 풍성한 요리를 해주셨습니다. 어젯밤에 온 영종영종, 낮에 찬거리를 가지고 온 보혜언니(지금도 함께입니다)그리고 구두신고도 하루종일 묵묵히 걸은 이정훈 샘 정말 고생많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동안 외쳤던 구호를 간략 정리해보겠습니다.

구호는 길 위에서 매번 바뀌지만 5월 16일과 17일의 구호는 대략 이렇습니다.

기본 구호는 이거죠. 새만금에 생명을, 대추리에 평화를, 한미 FTA반대한다!
이어지는 구호들 중 기억나는 것은,
수입쌀이 밀려온다, 미친소가 몰려온다.  FTA반대한다!
참을만큼 참았다. 갈데까지 갔다. 삶의 권리 쟁취하자!
fta반대하고, 생명권을 쟁취하자!
생명권을 쟁취하자, 우리농촌 지켜내자!
음식이 정치다, 쌀을 지켜내자!
수입쌀이 싫다 미친소가 싫다 fta반대한다!
교육은 권리다, fta반대한다!
사랑니 뽑는데 100만원, fta반대한다! 등등

그 중 가장 대박은

미친소 먹기 싫다! fta반대한다! (이 구호는 현민의 강한 소원과 염원이 담겨 있는 구호입니다^^)

현민이는 내내 마이크 들고 구호 외치고도 전혀 지치지도 않으며 끝없이 구호를 만들어 내는 등 대장정 투혼을 발휘했습니다. 그렇게 걷고 소리 질러댔음에도 불구하고, 어젯밤 오신 진승현 한의사선생님께서는 많은 사람들 중 현민의 다리 상태를 떠억 보시고는, "정말 건강하시네요"라고 말해주셨답니다.(아, 현민아 넌 이제 잠꼬대만 치료하면 돼)

그렇게 걷고 뛰고 충남 민주노총 사무실에 도착, 저녁을 먹은 후
평화네트워크 정욱식 선생님의 정말 화려하고도 시원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강의의 내용은 WWW.piecekorea.co.kr 자료실에 있고, 가장 최근에 올라온 자료들도 많다고 합니다. 꼭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너무 길고도 세세해서 이 자리에 기록할 수 없네요. 누가 그 자료를 좀 퍼다 주시길 바랍니다.(사실 저도 아직 안읽었습니다)

강의는 대략, 평택에 있어서 인권. 평화. 민주주의라는 세 가지 문제 중 평화에 초점이 맞춰진 강의였습니다.  현재 우리 정부가 대추리를 용산 미군기지 이전으로 부각시키는 상황인데, 문제는 용산기지 이전은 평택 280만평 중 대략 210만평으로 2008년까지, 모든 사안이 확정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정부가 부각시키는 용산 미군기지 이전이 문제가 아니라 2008년 이후 이전되는 2사단입니다. 2사단은 현재 사용하는
부지를 언제 반환한다는 말도 없고, 때문에 그 이전 비용 등에 대해서 전혀 합의된 사항이 없으므로 우리가 껴안아야할 부담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라고 합니다. 지금처럼 정부가 구체적 상이나 전략 없이 2사단 이전이 추진된다면, 우리는 엄청난 덤탱이를 쓰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2사단은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을 위한, 미국만을 위한 방향으로 재편 될 것이 분명한 상황이고, 한국 서해안지역에는 벌써부터 이를 위한 MD벨트가 건설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서해안의 입지를 고려해 볼 때 중국견제와 세계를 향한 전략적 기지가 될 것임을 뻔하죠.

평택미군기지 이전은, 한국정부가 강하게 주장하는 자주국방의 논리와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두 가지 찰떡 궁합(?)이 제대로 버무려진 미국식의 미군기지 이전일 뿐입니다.

전략적 유연성은 병력과 장비의유연성과 임무의 유연성이라는 두 측면으로 나누어 질수 있습니다. 임무의 유연성을 따져본다면, 주한미군기지 이전을 통해 우리 한국정부는 자주국방이라는 취지를 밝히면서, 이제껏 북한 억제의 기능을 맡았던 미군의 역할을 한국정부에서 맡아보게 되었답니다. 그렇다면 주한미군은 이제 머하냐? 딴짓하겠지요. 그 딴짓은 세계의 모든 곳에 96시간이내 출동하며 테러와의 전쟁 등등에 주한 미군을 투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상호방위조약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일에 참견할 것 같으면 자기네 땅에서 자기네 군인이 하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영공 영해 영토 다 빌려주고 한국은 대체 미군에게 기지 이전 비용에서부터 몸대주기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있을까요. 결국 평택은 한국의 중국견제의 핵심기지가 되겠지요.

자주국방 좋습니다. 하지만 미군기지가 한국땅에서 철수하는 것은 한국에게 자주국방의 기회를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미국은 지금 언제든 북을 무력으로 와해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임계철선은 북한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미국이 북한에 폭격을 가하는 것을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네 군대가 바로 앞에 폭탄을 터트릴 수 없었던 미국은 때문에 기지를 평택으로 옮기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을 언제든 미국의 폭격대상에 그리고 한반도를 언제든 전쟁의 상황에 놓이게 하는 것이 과연 자주국방 인지...--;

또한 미군이 전략적유연성을 통해 딴 일!을 하게 될 때 맡게 되는 지역적 역할을 생각해본다면, 중국은, 자기네를 견제하는 한국이나 미국에 대한 억제책으로 중.러. 북 동맹을 확고히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당연히 한.미.일 동맹도 생기겠지요. 이것은 또다른 냉전체계가 재편되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동맹 가능성은 10퍼센트 정도일텐데. 이 가능성이 적다면 적다고 할 수 있겠지만 국가의 생사라고 생각한다면 이 10퍼센트 역시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중국은 “주한미군기지를 대중국발진기지로 사용한다면, 중국은 한국을 공격할 것이다...한미동맹이 양자간이 아니라 제 3국을 겨냥한다면 중국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2004년 뉴욕타임즈에서는 주한미군기지를 이전하면 미국은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이 유리하다라는 기사가 떴다고 합니다. 과연 평택의 문제가 평택만의 문제인지요. 언론과 정부에서 평택과 외부세력을 나누는데 외부세력을 과연 누굴 말하는건지. 정부는 이것이 평택만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끝까지 모르는 척 우기고 있습니다. 제발 그만 우기세요.

과연 이런 상황에서 대안이 뭐냐라는 질문이 나오겠지요.
대답은 이렇습니다. 현실적인 대답이 되리라 생각하는데요.
일단 확정된 용산미군기지는 이전하십시오. 대신 2008년 이후 이전할 2사단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히 재협상 하십시오. 재협상 안하면 한국은 또 몸주고 돈주고 우리 국민들 힘만 빠집니다. 구체적인 전략과 상을 가지고 재협상 하세요!

그리고 우리의 문제가 남습니다.
정욱식선생님의 마지막 말이 강하게 머리에 박혔는데요.

미국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양과 질적으로 풍부해져야 한다고 합니다. 워싱턴에 한반도 사안을 공부(?)하는 그룹들이 있답니다. 이들은 한국내에서 도는 정보를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아마도 영문서비스가 잘 갖추어진 조.중.동신문 정도겠지요. 따라서 한국의 진보진영의 인프라 구축이 아주 시급합니다. 한국의 진보진영의 자기반성과 자기건설 노력이 아주 절실한겁니다.
또한 동북아의 비전을 제시할 나라는 한곳도 없다고 합니다.
동북아 공동의 지적 자산을 만들고 동북아자체 비전을 필요하며,
한국의 정체성과 미래의 비전을 격렬히 가져야 한다고요. (다들 절실히 동감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나서는, 이 지역에 계시는 분들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민주노총에서 오신 분이 한 분 계셨고, 교사들이 여섯 분 정도 오셨는데 대개 전교조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셨습니다. 이 중에는 연구실에서 강의를 들으시거나 세미나에 참여하셨던 분들이 많아서 낯익은 분들도 계셨습니다. 방 안에 빙 둘러 앉아서 한 사람 씩 자기소개를 하고 간단한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평택에서 열심히 싸우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강연을 듣고 보니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문제라 가슴이 답답해졌다”는 고등학교 교사 분께서는, 대장정과 그 이후에도 계속적인 실천들을 통해 그 답답함을 뚫어줄 무언가를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장정 선언문이 마음에 와 닿아서 여러 번 읽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읽으라고 권했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요즘은 에뿌키라 카페에 매일 들어가서 오늘은 누가 물집이 터졌나 유심히 살펴본다”는 또 다른 교사분은 조정환 선생님 강의도 듣고 노마디즘 세미나에도 참여했다고 하셨습니다. 대장정이 없었더라면 이만큼 FTA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장정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느낌들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는 분은 그 느낌들, 마음들을 느껴보고 싶어서 이 자리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분들이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을 맡고 계시다는 한 교사 분은, 사람인지 기계인지 모를 정도로 바쁜 시간 속에서도 아이들을 보면 행복하지만 한편으로 한국의 교육제도를 겪어내야 할 그 아이들이 너무 불쌍해서, 자신도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좋은 것일지 아닐 지 망설여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교죠 활동을 하시는 여러 교사 분들은 매일 방전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데에 동감하셨습니다. 교사는 표면적으로는 주 23시간에 방학까지 있고 구조조정 때에도 교사만 5천명 늘었다고 하니 편하고 좋은 직업처럼 보이지만,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고 실제로는 2만 명이 필요한데도 5천명 늘였다는 사실만 보도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 회의들, 시민 모임, 집회, 당 활동 등 참여해야 하는 행사들이 상당히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교사 분은 특히 교육개방에 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미 2002년, 2004년 3월부터 이미 개방은 되어있었으며, 제주도나 경제자유구역이 그 예입니다. FTA는 교사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로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있으며 게다가 문서도 비공개로 할 예정이니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장에서 싸우는 사람들은 모든 싸움에서 지쳐있다고 하셨습니다.
민주노총에 계시는 분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뻘의 조개나 천연기념물이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주목받는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죽어가도 주목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민주노총은 다들 낮에는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이고, 다 조직해서 활동을 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결국 돌아오는 건 ‘민주노총은 이기적이다. 소수화 된다. 집회 문화가 딱딱하다.’등의 이야기뿐이며,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는 진부하게 느껴지고 이기적인 움직임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밤새 현안 토론하고, 구속된 조합원에게 찾아갔다가 여러 회의들로 이어지는 그 분의 하루 일정을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싸우기 위해서는 ‘조직’되어 있어야 하며, 걷는 것이나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좀 더 구체적인 사안들에 대해 실천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쁜 하루였지요.
차지호 선생님과 진승현 선생님께 진단도 받고 치료도 받고 하면서 몸 좀 만들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여기는 현재 아산시청 민원실에서 미친듯이 글 올리고 있어요.
남들은 지금 걷고 있습니다. 어서 가봐야겠습니다.
서울 계신 분들은 일상을 튼튼히 지켜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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