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슐르 르귄의 소설 몇 권에 대해 여기저기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 블로그를 최종이라 생각하고 여기 정리하기로 했다. 르귄의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뭐니뭐니 해도 <빼앗긴 자들>이다. 국가의 문제가 여전히 우리를 껄끄럽게 만들고 있는 요즘 국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선거만이 우리의 유일한 선택이라는 주장들을 서스럼없이 지껄이고 있다. 레닌은 국가를 "정치적 지배계급의 경제적 지배도구"라는 말로 요약한다. 맑스는 [자본]에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사물들 간의 관계로 현상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자본의 축적이 인간소외를 더욱 강화한다는 말이다. 선거는 결국 개인들의 정치적 선택과 행위를 과두지배 체제의 대리인들에게 위임하는 것이고 개인들의 권리를 포기하도록 종용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투표는 소외된 인간의 자기부정일 뿐이다. 개인들의 정치적 선택과 행위를 투표로 한정하려는 자들의 유일한 소망은 과두지배체제의 지속이다. 개인의 사적인 부가 사회적인 권력으로 등장하는 현실에서 국가란 여전히 과두지배의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빼앗긴 자들>(The Dispossessed)은 우리에게 우리의 가능한 미래에 대한 성찰을 제공해준다. 어느 먼 우주에, 지구에서 11광년 떨어진 서로에게 달(moon)인 ‘아나레스(Anarres)'와 ‘우라스(Urras)'라는 이름을 가진 두 행성이 있다. 우라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같은 자본주의 체제인 반면, 아나레스에는 개인의 자유와 개인들 간의 진정한 연대가 사회적 삶을 형성하는 곳이다. 우라스의 노동자들은 서로에게 행운을 빌 때 이렇게 인사말을 건넨다고 한다. “아나레스에서 다시 태어나길!” 

우라스의 아나키스트들은 “권력의 종언을 위해” 싸웠지만, 혁명은 실패했다. 우라스의 세계정부가 아나키스트들에게 달로 이주할 것을 제안함으로써 혁명투쟁은 막을 내린다. 우라스의 지배자들은 정부의 전복보다는 그들의 달을 혁명가들에게 내어줌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이 고도의 문명,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 높은 생산성과 빠른 수송력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정된경제와 고도로 산업화된 기술의 산물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착한 아네레스는 낙원이 아니었다. 건조하고 춥고 바람부는 곳이었으며, 생물은 물고기와 더 이상 진화하지 못한 꽃이 없는 식물이 전부였다. 아나레스는 황량한 먼지 사막일 뿐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삶을 선택하여 아나레스에 정착한 수백만의 영혼들은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아나키스트들의 공동체. 그 곳에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상호협력이라는 원칙 외에는 어떤 법률도 없다. 자유로운 연대라는 원칙 외에는 어떤 정부도 없다. 그곳에는 주식시장이나 광고, 비밀경찰도 없고, 성직자도 없으며, 무기제조업자도 없는 곳이지만, 동시에 다른 많은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소유하는 자들이 아니라 나누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이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흥미롭게 읽히는 것은 인간의 존재와 삶의 문제를 관념이 아니라 삶의 실제적인 토대인 사회 구조에서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이 실천적인 의미를 가지는 소설이다. 아나레스의 언어에는 소유격이 없다. 그래서 이건 내 것이고 저것은 너의 것이라는 표현 대신, “난 이것을 쓰고 넌 저 것을 쓴다”는 식이다. 아무도 자신의 집을 소유하지 않으며 아무도 누군가에게 어떤 일을 강요하지 않는다. 개인은 직업에 따라 공동생활을 하며 반려가 생기면 두 사람이 생활할 수 있는 이인실을 신청하면 된다. 아이들은 강제는 아니지만 일정한 나이가 되면 마을의 교육관에서 공동생활을 한다. 아나레스에는 일과 놀이가 같은 단어다. 그래서 아이들도 수업이 끝나면 어른과 같은 일을 하며,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은 비도덕적인 행위로 인식된다. 뭐니 뭐니 해도 아나레스의 매력은 성(性)이나 종교를 빗댄 욕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옥에나 꺼져라!“는 식의 욕이 없다. 아이들은 사춘기가 되면 자유로이 성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그것이 동성애든 이성애든. 단지 절제의 미덕만이 요구될 뿐이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현재 상태가 전혀 나아지지 않을 거라면 우리가 살아가야할 이유가 있을까? 아나레스에 정착한 아나키스트들이 부닥친 가장 큰 문제가 중앙집권화였다는 것은 개인과 전체, 나아가 개인과 개인의 연대가 단지 머릿속의 관념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나레스라가 이상적인 상상의 공동체가 아니라 현실적 삶의 공동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변화와 변화를 갈망하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미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많은 SF 소설이나 영화가 미래 사회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존재 조건에 대한 반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소설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수백년, 혹은 수천년이 지난 미래에도 여전히 자본가가 지배하는 사회를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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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벡은 윤리적인 동기를 신중하게 배제했다. 그는 집주인의 아이들을 선동하려고 간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들에게 더스트(Dust)에서의 생활이 어떤지, 애비네이의 모습이 어떤지, 사람들은 무슨 옷을 입고, 새 옷을 원할 때는 어떻게 하는지, 아이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이야기했다. 이 마지막 부분은 그의 의도와 달리 선동이 되어버렸다. 이니와 아에비는 농사일이나 목수일, 하수 처리, 인쇄, 연관 공사, 도로보수, 희곡쓰기 등 기타 성인 공동체의 직업을 모두 포함하는 커리큘럼을 묘사할 때, 그리고 누구도 어떤 일에 대해서 벌을 받지 않는다는 말에 매료되었다.
“때론 잠시 동안 혼자 떨어져 있게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 오이에가 마치 오래 전부터 참아왔다가 터져 나온 질문처럼 불쑥 물었다. “뭘로 사람들이 명령을 지키게 합니까? 서로 배앗지도 않고 살해하지도 않는 이유가 뭡니까?”
“빼앗길 만한 물건을 소유한 사람은 없어요. 원하는 물건이 있으면 창고에서 가져가면 됩니다. 폭력에 대해서라면, 글쎄 모르겠군요, 오이에. 당신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살해하려고할까요? 만일 당신이 그러고 싶다고 느낀다면 법이 당신을 막을 수 있을까요? 강제는 명령을 수행하는 가장 최소한의 유효 수단이오.”
“좋아요, 하지만 더러운 일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시키지요?”
“무슨 더러운 일 말이에요?” 오이에의 아내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쓰레기를 모은다든가 땅 파기 같은,” 오이에가 말하자 쉐벡이 덧붙였다.
“수은 광산 일이라든가 말이죠.”
그리고 거진 <똥 치우기>라는 말을 할 뻔하다가 외설적인 말들에 대해 이오의 터부를 생각해 내고 목구멍으로 삼켰다. 그는 우라스에 머물기 시작한 초반에 우라스 인들은 잉여물의 산 속에 살면서도 똥에 대해서는 절대 말하는 법이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글쎄요, 우린 모두 다 그런 일을 해요. 하지만 아무도 그리 오래 할 필요는 없지요. 좋아하지 않는 한에는. 데카드[지구 단위로 일주일]마다 하루씩, 공동체 관리 위원회나 블록 위원회나 누구든 필요하다면 그런 일에 합류할 수 있냐고 요청할 수 있고, 그들은 순번 리스트를 만듭니다. 그러면 달갑잖은 근무나, 수은 광산 일과 제재소 일 같은 위험한 일은 보통 반년 정도 하면 되고.”
“하지만 그러면 모든 인원이 그 일을 갓 배운 사람들로 구성될 텐데요.”
“그렇지요. 효율적이지는 않지만, 달리 어떻게 하겠소? 누구에게도 몇 년 안에 불구가 되거나 죽을 수도 있는 일을 하라고 말할 순 없어요. 왜 그래야 합니까?”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건가요?”
“그건 명령이 아니오, 오이에. 다이브랩이라고 하는 노동분배 사무실에 가서, 나는 이런 저런 일을 원하는데 무슨 일이 있냐고 말하지요. 그러면 그들은 어디에 일자리가 있는지 말해주는 겁니다.”
“하지만 그러면 도대체 사람들이 왜 그런 더러운 일을 하지요? 왜 심지어 열흘마다 하루씩 하는 일을 받아들인단 말입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함께 일을 하니까요......,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지요. 알다시피 아나레스에서의 생활은 여기처럼 풍요롭지 않아요. 작은 공동체에는 오락거리가 별로 없고, 해야 할 일은 많지요.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기계 직기 앞에서 일한다면 열흘마다 밖에 나가서 다른 그룹의 사람들과 함께 파이프를 잇거나 땅을 갈거나 하는 일이 즐거움이 되는 거요. .... 게다가 그런 일은 도전해볼 만한 일이지요. 여기에서는 일에 대한 보상이 돈에 대한 필요라든가 이익에 대한 욕심 같은 재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돈이 없는 곳에서야말로 진정한 동기가 더 분명해지는 건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일을 하고 싶어 하고 잘하고 싶어 해요. 사람들은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하면서 자부심을 느끼기 때문에 그런 일을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우리는 자기중심적으로 군다고 말하지만 ....., 여기선 뭐라고 하나요? 과시한다고 하나요? 더 약한 사람들에게 말이오. 어이, 이봐, 꼬맹이들아, 내가 얼마나 강한지 봐라, 알겠냐? 어떤 사람은 그가 잘하는 일을 하는 걸 좋아합니다. ...... 하지만 정말이지 그건 목적과 수단의 문제예요. 결국 일을 하는 건 일 자체를 위해서인 거요. 그게 삶의 기쁨을 지속시켜주니까. 개인적 의식은 그걸 알아요. 그리고 또한 사회적 의식도, 이웃의 견해도. 아나레스에는 다른 보상이나 다른 법률은 없소. 자신의 즐거움과 동료들의 존경뿐이지요. 그게 다예요. 그런 상황에서는 이웃들의 견해가 아주 강력한 힘이 된다는 걸 알거요.”
“아무도 그걸 문제 삼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그런 일은 그다지 없어요.” 쉐벡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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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6 14:41 2011/12/2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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