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인권조례 1년", 한국인에게 윤리의 문제는 윤리와 다른, 혹은 무관한 어떤 문제를 유발한다. 한국인에게 윤리적 행위는 내적 본질을 실현하는 것도 아니요 내적 의지를 실천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윤리를 '인간'이라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자기 규제의 법칙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우리의 경험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타율성의 이념을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시키지 않은 일을 굳이 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올바르다 하더라도 무의미한 결과를 낳거나 삐딱한 근성의 발산으로 비쳐지지 않던가?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논란은 그것이 전혀 윤리적 문제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반동적이다. 잘 하면 상을 주고 잘 못하면 벌을 준다. 행위의 근거가 내적 동기가 아니라 외적 강제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윤리를 설명할 수 있을까? 타율성의 기반은 인권이 아니라 물권이다.   

 

윤리가 자율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칸트적인 의미를 굳이 들이 밀지 않더라도 내적 의지와 무관하게 발생한 많은 문제들은 법리적인 문제로 이어진다. 길을 가다 우발적으로 타인과 부딪혀 시비가 붙어 그를 밀쳤는데, 재수없이 그 사람이 넘어지면서 돌부리에 걸려 사망할 경우를 보자. 이 사건은 한 사람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한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했음에도 이 사건은 살인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한 인간의 행위가 그 내적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 것인지 의지와 무관하게(혹은 무의식적 행위를 포함하여) 일종의 비자발적인 행위(이런 행위가 우발적인 행위에 해당한다)의 결과인지는 법리 공방에서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근대적인 인간관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며 인간의 행위는 이성적 행위이거나 비이성적 행위이거나 둘 중 하나다. 근대 이성의 힘이란 이성으로부터 광기를 분리하고자 하는 정언명령 그 자체였다고 할까.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언명은 인간이 윤리적 존재이며, 도덕법칙의 지배를 받는 존재라는 말이다. 도덕법칙의 지배를 당연히 받아들일 수 있기에 인간은 이성적 존재다. 그래서 이런 식의 동의반복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 기초>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한다. "만약 모든 이성적 존재에 자유를 부여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없다면, 어떤 근거에서라도 우리 인간의 의지에 자유를 부여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언명하는 순간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되었는가? 그것은 알 수 없다. 그것은 칸트의 바람과 무관하다. 이성은 감정의 순결한 표현에 불과하다. 감정은 작용에 대한 반응의 표현이다. 자극이 클수록 반응도 크다. 그런데 반응이 반드시 행위라는 반작용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반응의 무능력. 반응할 수 없는 존재의 무기력이 감정이다. 그러므로 감정은 작용에 따른 반작용이면서 동시에 작용에 대한 반응의 지체다. 우리가 슬픈 이유는 이 지체가 이성의 힘으로 전환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환될 수 없다. 이성이란 감정의 순결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행위하는 것이고 행위는 의지의 실현이다. 의지는 미래를 현실화시키는 인간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의지가 없는 인간은 미래가 없다. 미래가 없는 인간은 오늘을 반복하고 내일도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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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6 23:12 2013/01/26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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