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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그림 그리기와 만 두 살 되어가는 손녀의 첫 채색 작품

나는 나의 그림이 상업적으로 이용 될 것이 싫어서 그림을 시도하다 곧 접었었다. 아무래도 일단은 어느 개인의 소유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예쁜 손녀와 귀여운 손자를 갖게 되었고 그들에게도 보일 겸 붓을 다시 들었다. 맨 위의 그림은 손녀가 몇일 간 꾸준히 휙 긋기 또는 반복적 휘두르기 선으로 조금씩 더 진한 색채를 만든 것이다.  위의 부분은 나의 무릎을 딛고 서서 그릴 수 있었다.

밑의 그림은 오일로 그린 불에 타는 물위의 자동차라고 하여 보았다. 24 와 18인치이며 대부분을 사진으로 공개한다. 이 그림은 나의 청주 사범 병설 중학교 2-3학년 담임선생 겸 미술 선생인 키가 크신 정진국(기억이 확실하지 않아 가명) 선생님에게 감사하는 뜻에서 올린다. 나는 그림을 배운 기억은 없지만 내가 깡패들과 늘 싸움을 하다가 몸을 다쳐서 6개월 휴학하고 있을 때 나에게 고등학교에 진학하도록 특별 지도를 하여 주셨다.

아래 사진의 상업적으로 이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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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음악들을 접으면서...

지난 8개월간 나의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 노래 부르는 것은 후배들이나 어떤 사회의 요구가 있을 때까지 접기로 하였습니다. 작곡이나 다른 예술 창작을 하여 발표하게 되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간 나의 글의 주제 넘는 부분에 대하여 용서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내가 특별히 고마워 하지 못한 나의 다른 모든 친지들에게도 행복하심을 바랍니다. 아래 첨부된 그림들은 나의 창문에 시각적 보안상으로 만들어 붙인 무늬(디자인) 들입니다. 제작은 20년 전의 것 들입니다.

저의 이 메일 주소는 ikshin@sbcglobal.net 입니다. 통일 조국을 열도록 안녕들 하세요.

Copyright(c)Ik Kil 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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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봉선화와 예술

예술은 힘과 아름다움 또는 진리 그리고 조화를 바탕으로 하며 소리와 빛, 형상의 활동무대에서의 역할 또는 이들의 매개체 자체를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흥은 보통 예술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지만 유흥 자체가 예술성을 띤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예술이 상업적 유흥이나 권위 게임에 너무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음악이란 나에겐 스스로 선택되어지는 음 또는 음으로 표현되는 마음 감이다.  예술이 유흥에 상습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17세 미만에게 강제적으로 투여 되는 종교와 같이 마약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유흥이나 상업을 목적으로 작가나 성인의 의도와 다르게 꾸며지는 것은 그만큼 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감상은 유흥보다 귀하다. 감상은 신나는 것 이상의 것을 목표로 한다.

나의 음악들은 상업이나 유흥에 이용되는 것을 금합니다. 봉선화를 낮은 음으로 불렀습니다.

이 음악은 집 없이 4년간 서울서 떠돌이 생활을 할 때 친구가 되어준 김철기, 김정자씨,

김학정씨, 연대 영어강사 였던 김태성씨에게 드린다.

음악은 http://blog.daum.net/habia 에 가셔서 들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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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고등학교 시절의 슬픔과 유행가

나는 육이오 직후에 청주로 이사한 후에 슬픈 7년을 보냈다. 버스 정류소에 밤 늦게 까지 집으로 데리고 갈 여인숙 손님을 기다리든 일. 50미터 떨어진 이웃의 펌프 물을  매일 같이 길어 오든일, 구공탄이 나오기 전에 네 군데의 방을 앵겨(벼 껍데기)로 매일 저녁 뎁히든 일, 저녁 일이 끝나면 어머니의 팔 주물러 드리는 일, 이가 나쁘신 어머니에게 사과를 숫갈로 글거 즙을 만들어 드리든 일, 이웃집들이 모아 놓는 뜸물을 걷어 오든 일, 십리 떨어 진 곳에 자전거로 닭 사료를 돌 자갈 길로 나라 오든일, 숙제하려고 하면 이미 몸은 피곤하여 책상에 꼬꾸라져 잠을 자는 둥 마는 둥하든 시절, 나는 슬프게 부르는 노래 소리가 싫었다. 내가 너무나 슬픈데 어찌 그런 노래를 좋아 할 수가 있었겠는가. 나는 지치고 슬픈 몸을 이끌고 뒷 동산에 올라 오페라의 아리아나 세레나데를 목이 터져라 부르곤 했다.

유행가들은 나에겐 딴따라(흥 돋구기) 혹은 넉두리(우는 소리) 같이 들렸다..

생전 처음으로 유행가를 불러 보았다. 대충 기억나는 동백아가씨를 편곡하여 불렀다.

음악은 http://blog.daum.net/habia 에 가셔서 들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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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

나는 네가 없으면 다르게 존재 하지 않는다.

너는 학문 제일 주의였다.

너는 어릴 때 어머니를 돌보지 않았다.

너는 명문 서울 고등학교와 서울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너는 뻐기고 살기를 좋아하였다.

너는 내가 40년 만에 너의 잘 사는 집에서 점심 한끼 먹는 것 조차 거절하였다.

너는 전화 받는 것 조차 귀찮아 하였다.

너는 너의 새끼들 밖에 모른다.  너는 너의 짝짓기 밖에  모른다.

너는 힘있는 놈에게 아부하는 것 밖에 모른다.

내가 제국주의와 싸움하는 동안 너는 그놈들에게 붙어 먹고 남 놀리는 것 밖에 모르지.

너는 잘 난체하는 것 만큼 잘 못 다시 태어나는 구나. 한나라 한 배속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아 주오.

위의 시와 첨부되는 노래 I cant stop loving you는 나의 작은 형과 나의 남동생에게 준다.

음악은 http://blog.daum.net/habia 에 가셔서 들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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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어 말 소리

나는 우리 말을 주로 하면서 40여년을 미국에서 살았다. 은퇴 전 10여년은 컴퓨터 일을 하였고 복잡한 전문영어를 하면서 일한 적이 없다. 주말에는 주로 우리의 청년운동을 하였고 우리 말만 즐겨하였다. 요지음 우리나라의 젊은이와 어린이도 영어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부족한 영어지만 영어로 나의 말 소리를 조금 녹음하였다. 어린 아이일 수록 억양이 다양하고 음악적이다. 나도 조금 그런 편이다. 

나는 미국 오기전 2년 동안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였다. 회화를 터키 장교와 처음으로 2시간 정도 하였는데 표현에 별 지장이 없었다. 그는 나의 문장체적 영어 실력에 놀랐다. 헤어지면서 회화하기는 처음이라고 하자 나만큼 그도 놀랐다. 지금 나는 문장체적 영어를 잘 못하게 되었다. 다시 영어 책들을 읽어 볼까한다. 영어 말을 어릴 때 부터 익힐 필요는 없다고 본다. 명랑하게 그리고 독립성 있게 기르면 억양이 좋게 어느 말이든지 잘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말 소리는 http://blog.daum.net/habia 에 가셔서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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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의미

나는 신학을 조금하여 보았다. 예수라는 과목을 시카고의 유명한 장로교신학교에서 들어볼 때를 기억한다. 죽을 것을 미리 결정한 내용은 그가 부활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고 신도들은 몰랐다는 것이 비교가 되었다. 빈 돌무덤을 드려 보는 이들을 생각하여 보았다. 내가 예수의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지금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 어쩌면 꼭 같은가?

그 몸이 살아져 없어져야 만 그를 믿는 것이다.  즉 그의 마적인 힘을 믿는 것이다. 그는 헛 수고를 한 셈이다.

나는 부활의 의미는 마적인 힘과 다르게  아픈 영혼이 혼으로 발전되어 다른 형태와 삶으로의 전환으로 본다. 이것은 사람이 죽든 말든 관계가 없는 것이다.

힘든 삶의 영혼이 고난을 이긴 후에 느끼는 기분과 같은 것이다. 지금 우리 북조국은 집요했든 제국주의자들의 압력과 억제된 생활로부터 소생하는 부활을 느끼고 있다.

아래 사진은 손자 손녀가 뒤 뜰에서  숨겨진 달걀들을 찾아 들고 있는 모습과 손자의 색칠한 계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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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물

나는 70이 가까워 오는 남자임에도 아직 가끔 눈물을 흘린다. 최근에 약간 수정하여 한 옥타브를 번갈아 올려 부른 노래, 나의 즉흥시 다시만나’의 처음 녹음한 것을 아기 놀이터 구석에 홀로 앉아 다시 들어 보면서 흐느껴 울었다. 나는 젊었을 때 유행가를 싫어하였다. 너무 감정적인 표현이 싫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감정적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은가? 이상하다. 작사 하면서 부르느라 박자가 틀리고  아기 수레를 밀면서 걷느라 숨이 차서 그랬을까? 나의 말하는 목소리는 베이스임으로 낮게 말하는 느낌으로 불러서일까? 작게 부르려 노력하여서 일까?

 

과거가 억울하여서 일까? 아니면 아직도 꿈이 있어서 일까? 아마 주변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 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은 아닌지..

오늘 조용한 공원에서 부른 Love Me Tender를 어제 공원에서 두번째 만난 집 없는 천사에게 바친다. 그 여인은 나를 보고 빙긋이 웃어 주었다.  그는 백 여명의 다른 천사들과 함께 공원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음악은 http://blog.hani.co.kr/habia 이나 http://blog.daum.net/habia 에 가셔서 들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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쌘프란시스코의 이른 봄 꽃과 나의 풍만했던 까만 머리

나의집 뒷 뜰에 핀 캘리포니아에만 있는 나무(Pink winter currant/Ribes sanguineum종류)의 꽃사진과 최근 공원에서 찍은 사진 및 나의 46년전 당시 22세에 찍은 사진을 올립니다. 나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들 합니다. 서양사람 같이 생겼다고 아이들이 놀리기도 했지요.

내가 이곳에 유학온 후에 노란 머리의 여성들의 관심을 끈 것은 나의 까만 머리였읍니다. 너도 나도 나의 머리를 만져봐도 되냐고 묻고 그래도 좋다고 하면 정말 만져보고 지나갔읍니다. 

나는 미국 시민이지만 여러분들의 미주 동포입니다. 요지음 자기나라의 해외 동포의 법적지위와 인종 또는 나이차별(까만머리)과의 관계가 왜 함께 어울려 두두러져야 하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인종주의적 발언이 법에 저촉이 안되더라도 이것은 더 큰 초자연법에 어긋나는 행위임으로 여기에 특검 정호영씨를 고발합니다. 어느 사회 또는 누가 김경준씨를 그렇게 만들었는가도 물어 보아야 하겠읍니다. 지구상에 85 퍼센트 이상이 까만 머리이고 대부분 '외국'에 사는 그들의 윤리 도덕과 남한의 문제가 왜 연결이 되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남한의 사대주의 적 인종주의가 자신의 머리색 마저 잊어 버린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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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의 가극 아이다 1막 중의 쎌레스타 아이다를 아버지들에게 드림

나의 아버지는 조상 신숭겸씨를 늘 자랑하셨다. 임금을 대신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 좌의정이었다고 하셨다.  나의 노래는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에게 드리며 할아버지들이나 할머니들 사이에 들어 있을 수도 있었든 단군님의 피에게 드린다.

조상의 기념비를 부수는 망난이들을 가진 기독교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 온 민족을 원자탄으로 멸살하려든 미국놈 동상은 옳다고 까지 하니 기가 막힌다. 성경에 동전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고 하였다하여 예수를 마치 자본주의자로 오산하지만 그는 아주 빨간 사람이었다. 평등하게 나누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사진은 최근 나의 형이 그린 아버지의 초상화이다.

노래는 http://blog.daum.net/habia 또는 http://blog.hani.co.kr/habia 에 가셔서 들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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