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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된 해고자를 보면서

9시 뉴스를 귀로 흘려듣고 있는데 "8년 만에 근로사업장으로 돌아가게 된" 이란 아나운서 말에 고개를 들어보니 환하게 웃는 김석진 해고자의 얼굴이 화면을 메우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김석진 동지의 흥분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나는 "축하드린다"라는 애매한 표현 외에는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 어떤 말이라도 그에게는 상관없었을 것이다. 울산으로 내려오면 꼭 연락달라는 말에 그러겠노라고 하고 전화를 끊는 순간 통신에 올라온 두 따님의 사진-이마에 투쟁머리띠를 두른-과 그 귀여운 얼굴들이 스쳐지나갔다.

 

***

 

박은영의 <거리에서>를 우연히 들으며  '노동을 잃은 손이 허공에서 흔들리며 나와 함께 걷고있는' 풍경을 다소 낭만적인 인상으로 갖고 있었던 부끄럽고, 철 없던 새내기 시절이 있었다. 구로 오트론 투쟁에 결합하고 있을 때였건만 해고를 당해보지 않은 내가 그 참담함을 알 리 없었다.

 

그 이후로 가차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외로운 복직투쟁을 지켜보면서...어떻게 해고자 투쟁의 '원칙'과 '방도'가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자본과의 투쟁에서 최전선에 섰던 투사들의 헌신과 희생의 댓가가 왜 피폐하고 곤궁한 삶, 공장 안 대중과 절단 된 경험일 수 밖에 없는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벤처기업에서 해고된 한 여성노동자의 다리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파스, 마지막으로 전하문 앞에서 본 청산된 현대중공업 해고자들의 덩그란 콘테이너, 건강보험공단 앞 너른 해방광장 중앙에 대열정비하고 선 해고자들의 굳은 어깨, 경찰청 고용직 조합원들의 때 탄 상복...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이 해고자 투쟁의 상징이다. 일상적이고 노골적인 탄압을 마주하고서도 버티고 있는 것은 돌아갈 곳이 일하던 곳 밖에 없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해고자들이 싸움에서 지고 굴복하는 순간 민주노조 운동도 한발짝 뒷걸음친다는 것을 그들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는 해고자들에게 언제나 싸움에서 최선봉에 설 것을 요구했지만 투쟁이 끝나면 연대책임은 오간데 없었다. 현장 안 조합원들과 함께할 것을 강조하고 그렇지 않으면 해고자 투쟁은 말그대로 '복직'투쟁에 그칠뿐이라고 강조하지만, 현장과 연계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조합원들이 해고자 문제를 자신의 문제와 요구로 받아안을 수 있도록 교육하고 설득하고 작업은 부차화되었고 투쟁 속에서 단련된 해고자들이 운동의 소중한 자원이 될 수 있도록 참여시키고 조직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은 망각되었다.     

 

김석진 해고자는 현장 조합원들의 힘과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적 투쟁으로 승리했다. 이것을 김석진 해고자는 한편으로는 수치스러워했지만 그러할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한 현실조건이 존재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장과 결합이 여전히 해고자 투쟁의 '원칙'과 방향이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딪히는 현실적 어려움-자본의 회유와 노조의 회피, 대중들의 무관심, 생계적 열악함-은 모든 활동가들이 감당해야할 몫일 밖에 없다.  

 

"적들이 바라는 것은 “물 떠난 물고기”다. 그래서 이 물고기가 숨을 쉬지 못하고 하고 말라 비틀어 죽게 만드는 것이다. 대중들의 고통, 울분, 분노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고 고된 노동에서 벗어난 상태를 즐기게 하며 또는 잔인한 고통(조합원들과의 분리, 극심한 생활고)을 겪게 만들어 자연스럽게 투쟁전선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거나 조금씩 마모시켜 투쟁정신을 거세하는 것이다. 해고자들은 이런 악조건에서 벗어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모든 활동의 초점을 대중과의 밀착에 맞추는 것이다. 대중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대중의 환희를 자신의 환희로 삼고 아무리 고난한 시기에 처하더라도 대중과 함께 있으며 대중의 선두에 서고 있다는 것을 실천적 행동을 통해서 입증해야 한다. 모든 문제에서 그렇듯이, 해고자 투쟁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초는 대중과 밀착하고 대중의 다수를 획득하는 데에 있다.  해고자로서 활동해야 하는 시기는 고난의 시기다. 하지만 이 고난의 시기야말로 대중과의 밀착이 수천배나 더 강렬히 요청되는 것이다. “사람은 가장 고난한 때에 진실한 동료를 안다! ” 대중과의 결합을 통해, 그리고 선두에 선 투쟁을 통해 “가장 진실한 동료”로 자신을 입증한다면 대중들은 과감한 반격으로 응답할 것이다! 자본가의 해고를 투쟁의 불화살로 돌려줄 것이다! 그때 우리 해고자들은 이 불화살을 타고 현장에 승리자로 입성하면 된다!"

 

"...다수의 해고자들이 복직하거나 아니면 오랜 인내의 시절을 견디지 못하고 투쟁에서 멀어짐으로써 지금 해고자 투쟁은 과거에 비해 작은 힘만을 발휘하고 있다. 그럼에도 해고자 투쟁의 중요성은 지금도 분명하다. 해고자 투쟁은 우리 노동운동의 전통과 정신을 사수하면서 앞길을 열어나가는 가장 단호한 투쟁으로 항상 기록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을 명심해야 한다. “운동의 선두에서 가장 가혹하게 탄압당하고 있는 해고자들이 이 난관을 뚫고 더 멀리 전진하고 단호하게 투쟁한다면, 이것이 미칠 효과는 거대하다. 왜냐하면 그 어떤 탄압도 노동운동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점이 바로 이 해고자 투쟁을 통해 적과 우리 모두에게 가장 선명하게 증명되기 때문이다. 조합원대중이 전진하고 노동자의 투쟁 정신을 발전시키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민주노조에 충실한 투사로 성장하는 것은 오직 이와 같은 선진투사들의 헌신과 삶을 통한 증명을 통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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