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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7/31
    페트라르카의 칸소네 Italia mia 중
    heesoo
  2. 2005/07/27
    각성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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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07/22
    복직된 해고자를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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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07/22
    사회주의 여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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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5/07/20
    "Violin M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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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5/07/18
    우울한 거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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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5/07/16
    남미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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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5/07/16
    네루다 탄생 1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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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5/07/16
    NERU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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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7/16
    은혜라는 말 속에 숨겨진 무책임성
    heesoo

페트라르카의 칸소네 Italia mia 중

"분노보다는 재능으로

무기를 들것이며, 그리하여 전투는 짧게 끝날 것이다.

......."

 

반디앤루니스 행사코너에서 우연히 집어든 군주론, 우연히 펼쳐진 페이지에서.

전하의 가문이 아니라 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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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의 노래

각성의 노래

- 노래공장

찢겨진 깃발 아래서 생각하라
단결투쟁 승리의 약속 지키고 있는가
적들이 몰아칠수록 침착하라
더이상 물러설수도 없는 우리가 아닌가
적들은 세월이 갈 수록 폭풍으로 몰아치는데
우리는 자욱한 안개 속에 사분 오열 흩어질 순 없다
동지여 이제 조그만 자리 투쟁으로 날려버리고 
뜨거운 사랑으로 일치단결 하나로

동지여 노동 해방 투쟁의 전선에서
기필코 넘어야 할 또하나의 벽이 있다
우리 내부에 도사린 동지에 대한 불신 분열의 싹
아집과 관념의 몽상
동지여 과학 속에 철저한  반성과 각성을 딛고
뜨거운 사랑으로 노동해방 전선으로 일치 단결하라

적들은 세월이 갈 수록 온누리에 몰아치는데
우리는 관념의 의문 속에 동상이몽 갈라질 순 없다
*파업에 당찬 머리를 모아 빈틈없는 전투 속에서
노동해방 전선으로 일치단결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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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된 해고자를 보면서

9시 뉴스를 귀로 흘려듣고 있는데 "8년 만에 근로사업장으로 돌아가게 된" 이란 아나운서 말에 고개를 들어보니 환하게 웃는 김석진 해고자의 얼굴이 화면을 메우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김석진 동지의 흥분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나는 "축하드린다"라는 애매한 표현 외에는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 어떤 말이라도 그에게는 상관없었을 것이다. 울산으로 내려오면 꼭 연락달라는 말에 그러겠노라고 하고 전화를 끊는 순간 통신에 올라온 두 따님의 사진-이마에 투쟁머리띠를 두른-과 그 귀여운 얼굴들이 스쳐지나갔다.

 

***

 

박은영의 <거리에서>를 우연히 들으며  '노동을 잃은 손이 허공에서 흔들리며 나와 함께 걷고있는' 풍경을 다소 낭만적인 인상으로 갖고 있었던 부끄럽고, 철 없던 새내기 시절이 있었다. 구로 오트론 투쟁에 결합하고 있을 때였건만 해고를 당해보지 않은 내가 그 참담함을 알 리 없었다.

 

그 이후로 가차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외로운 복직투쟁을 지켜보면서...어떻게 해고자 투쟁의 '원칙'과 '방도'가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자본과의 투쟁에서 최전선에 섰던 투사들의 헌신과 희생의 댓가가 왜 피폐하고 곤궁한 삶, 공장 안 대중과 절단 된 경험일 수 밖에 없는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벤처기업에서 해고된 한 여성노동자의 다리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파스, 마지막으로 전하문 앞에서 본 청산된 현대중공업 해고자들의 덩그란 콘테이너, 건강보험공단 앞 너른 해방광장 중앙에 대열정비하고 선 해고자들의 굳은 어깨, 경찰청 고용직 조합원들의 때 탄 상복...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이 해고자 투쟁의 상징이다. 일상적이고 노골적인 탄압을 마주하고서도 버티고 있는 것은 돌아갈 곳이 일하던 곳 밖에 없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해고자들이 싸움에서 지고 굴복하는 순간 민주노조 운동도 한발짝 뒷걸음친다는 것을 그들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는 해고자들에게 언제나 싸움에서 최선봉에 설 것을 요구했지만 투쟁이 끝나면 연대책임은 오간데 없었다. 현장 안 조합원들과 함께할 것을 강조하고 그렇지 않으면 해고자 투쟁은 말그대로 '복직'투쟁에 그칠뿐이라고 강조하지만, 현장과 연계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조합원들이 해고자 문제를 자신의 문제와 요구로 받아안을 수 있도록 교육하고 설득하고 작업은 부차화되었고 투쟁 속에서 단련된 해고자들이 운동의 소중한 자원이 될 수 있도록 참여시키고 조직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은 망각되었다.     

 

김석진 해고자는 현장 조합원들의 힘과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적 투쟁으로 승리했다. 이것을 김석진 해고자는 한편으로는 수치스러워했지만 그러할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한 현실조건이 존재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장과 결합이 여전히 해고자 투쟁의 '원칙'과 방향이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딪히는 현실적 어려움-자본의 회유와 노조의 회피, 대중들의 무관심, 생계적 열악함-은 모든 활동가들이 감당해야할 몫일 밖에 없다.  

 

"적들이 바라는 것은 “물 떠난 물고기”다. 그래서 이 물고기가 숨을 쉬지 못하고 하고 말라 비틀어 죽게 만드는 것이다. 대중들의 고통, 울분, 분노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고 고된 노동에서 벗어난 상태를 즐기게 하며 또는 잔인한 고통(조합원들과의 분리, 극심한 생활고)을 겪게 만들어 자연스럽게 투쟁전선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거나 조금씩 마모시켜 투쟁정신을 거세하는 것이다. 해고자들은 이런 악조건에서 벗어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모든 활동의 초점을 대중과의 밀착에 맞추는 것이다. 대중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대중의 환희를 자신의 환희로 삼고 아무리 고난한 시기에 처하더라도 대중과 함께 있으며 대중의 선두에 서고 있다는 것을 실천적 행동을 통해서 입증해야 한다. 모든 문제에서 그렇듯이, 해고자 투쟁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초는 대중과 밀착하고 대중의 다수를 획득하는 데에 있다.  해고자로서 활동해야 하는 시기는 고난의 시기다. 하지만 이 고난의 시기야말로 대중과의 밀착이 수천배나 더 강렬히 요청되는 것이다. “사람은 가장 고난한 때에 진실한 동료를 안다! ” 대중과의 결합을 통해, 그리고 선두에 선 투쟁을 통해 “가장 진실한 동료”로 자신을 입증한다면 대중들은 과감한 반격으로 응답할 것이다! 자본가의 해고를 투쟁의 불화살로 돌려줄 것이다! 그때 우리 해고자들은 이 불화살을 타고 현장에 승리자로 입성하면 된다!"

 

"...다수의 해고자들이 복직하거나 아니면 오랜 인내의 시절을 견디지 못하고 투쟁에서 멀어짐으로써 지금 해고자 투쟁은 과거에 비해 작은 힘만을 발휘하고 있다. 그럼에도 해고자 투쟁의 중요성은 지금도 분명하다. 해고자 투쟁은 우리 노동운동의 전통과 정신을 사수하면서 앞길을 열어나가는 가장 단호한 투쟁으로 항상 기록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을 명심해야 한다. “운동의 선두에서 가장 가혹하게 탄압당하고 있는 해고자들이 이 난관을 뚫고 더 멀리 전진하고 단호하게 투쟁한다면, 이것이 미칠 효과는 거대하다. 왜냐하면 그 어떤 탄압도 노동운동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점이 바로 이 해고자 투쟁을 통해 적과 우리 모두에게 가장 선명하게 증명되기 때문이다. 조합원대중이 전진하고 노동자의 투쟁 정신을 발전시키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민주노조에 충실한 투사로 성장하는 것은 오직 이와 같은 선진투사들의 헌신과 삶을 통한 증명을 통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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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여성운동

사회주의 여성주의란 무엇인가? (What Is Socialist Feminism?)
바버라 에런리치 (Barbara Ehrenreich)

이 글은 1976년 잡지 윈에 처음 실렸으며 저자의 동의를 얻어 다시 싣는다. 이 글은 사회주의 여성주의 사상의 고전이다. 이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수십년동안 토론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지만, 우리가 보기에 이 글의 중요성은 변함없다. - 먼슬리 리뷰 편집진


어떤 수준에서, 아마도 너무나 분명하게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오랫동안 많은 걸 겪었다. 당신은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이다. 당신은 화난다. 일에 대해, 월급봉투에 대해, 남편(또는 전 남편)에 대해, 아이들의 학교, 집안일에 대해, 예쁜 것에 대해, 예쁘지 않은 것에 대해, 남들이 쳐다보는 것에 대해,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것에 대해 (그리고 어떤 쪽이든, 남들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에 대해) 등등. 당신이 이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맞아떨어지는 지를 생각하고, 무엇이 바뀌어야 할지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 모든 생각들을 축약된 형태에 담는 어떤 단어를 찾게 될 것이다. 그러면 거의 '사회주의 여성주의'를 제안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 상당수는 바로 이런 식으로 여성주의 사회주의에 도달했다. 우린 우리의 관심사 전체와 원칙 모두를 '사회주의적'이지도 '여성주의적'이지도 않은 듯한 방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할 단어/용어/문구를 찾았다. 내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여성주의'라는 말에 아주 만족하지는 않는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용어가 너무 길고(나는 하이픈으로 이어 표현되는 대중운동엔 별 기대를 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이 용어는 그것이 진짜 지칭하는 것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짧다. 이것이 지칭하는 건 결국 진정으로 사회주의 국제주의 반인종차별적, 반이성애적 여성주의다.

어떤 종류건 새로운 딱지를 취하는 것의 문제는, 이것이 즉각적인 분파주의 분위기를 만든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자연히 도전이 되고, 신비가 되고, 쟁점이 된다. '사회주의'와 '여성주의'는 분별있는 연설, 회의, 글 등의 주제가 되기에는 너무 넓고 포괄적이라는 걸 우리가 완벽하리만치 잘 알지만, '사회주의 여성주의'를 논하는 연설가들, 회의들, 글들이 있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라고 고백하는 이들을 포함해서 사람들은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뭐지?”라고 불안하게 자문한다. 이것이 세계사적 규모의 놀라운 종합, 곧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와 월스톤크래프트를 넘어서는 진화론적 도약이기를 (또는 어떤 순간에, 아마도 다음번 연설, 회의, 글에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기대감 같은 것이 있다. 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확인되기를, 소수의 불만있는 여성주의자들과 여성 사회주의자들이 집착한 변덕, 일시적인 기분전환으로 확인되기를 바라는 기대감 같은 것이 있다.

나는 사회주의 여성주의 주변에서 자라난 어떤 신비를 지나 나아가려 시도하고 싶다. 논리적인 출발 방법은 사회주의와 여성주의를 나눠서 각각 따져보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더 정확하게 말해 마르크스주의자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여성주의자는 또 어떻게 보는가? 우선 첫째로,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주의는 중요한 것을 공유한다. 세상을 보는 비판적인 방법이 그것이다. 둘 모두 대중적 신화와 '상식' 지혜를 뜯어내고 경험은 새로운 방식으로 보도록 강요한다. 둘 모두 세상을 이해하려 시도하는데, (전통적인 사회 과학이 하듯) 정적인 균형과 대칭 측면에서가 아니라 적대의 측면에서 이해하려 한다. 둘은 또 자신들이 해방시킨다는 거슬리는 동시에 불편한 결론에 도달한다. 마르크스주의자나 여성주의자의 전망을 지니면서 관찰자로 남아있을 수는 없다. 이 둘의 분석으로 발가벗겨진 현실을 이해하는 것은 곧 현실을 바꾸려는 행동에 돌입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역학에 대해 발언한다. 모든 사회 과학자는 자본주의 사회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혹한 체계적 불평등을 특징으로 한다는 걸 안다. 마르크스주의는 이 불평등이 경제 체제로서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과정들로부터 유발된다고 이해한다. 소수의 사람들(자본가 계급)이, 나머지 사람들이 살기 위해 의존하는 공장/에너지원/자원 등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 대다수(노동자 계급)는 자본가들이 설정한 조건 아래서 자본가들이 주는 임금을 받아야 할 전적인 필요성에서 일해야 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실제래 생산하는 것의 가치보다 적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하기 때문에, 이 두 계급의 관계는 불가피하게 화해할 수 없는 적대 관계다. 자본가 계급의 존재 근거는 노동계급에 대한 지속적인 착취에 있다. 이 계급 지배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결국 힘(force)이다. 자본가 계급은 경찰이나 감옥 등등의 국가로 표현되는 조직적 폭력 수단을 (직접 또는 간접) 통제한다. 국가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한 혁명적 투쟁을 벌임으로써만, 노동 계급은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을 해방시킨다.

여성주의는 또 하나의 익숙한 불평등에 대해 발언한다. 모든 인간 사회는 성별간의 일정한 불평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우리가 인간 사회를 역사적으로 훑어보고 여러 대륙의 인간 사회를 훑어보면, 공통적으로 몇가지 특징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가족 내부에서와 지역사회에서 여성의 남성 권위에 대한 예속, 여성을 자산의 형태로 대상화하는 것, 여성의 일을 아이 키우기, 성인 남성을 위한 개인적 서비스 제공, 특정한 (보통은 지위가 낮은) 생산 노동 형태에 한정함으로써 노동의 성별 구분 등이 그 특징이다.

이런 것들의 거의 보편적인 성향에 충격을 받은 여성주의자들은, 모든 인간 사회 존재의 근거가 되는 생물학적 '주어진 것들'에서 설명을 찾으려 해왔다. 남성은 평균적으로 여성보다 육체적으로 강하다. 특히 임신한 여성 또는 아이를 젖 먹여 키우는 여성과 비교할 때 그렇다. 게다가 남성은 여성을 임신시킬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성별 불평등이 취하는 형식들은, 그것이 문화에 따라 아무리 다를지언정, 결국 남성이 여성에 대해서 지니는 분명한 육체적 장점에 의지한다. 말하자면, 궁극적으로 폭력 또는 폭력의 위협에 의존하는 것이다.

남성 우위의 고대, 생물학적 뿌리 곧 남성 폭력은,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특정 문화에서 남녀의 성별 관계를 규제하는 법과 관습으로 인해 모호해진다. 그러나 여성주의적 분석을 따르면 이는 존재한다. 남성의 공격 가능성은 '나쁜'(반항적이고, 공격적인) 여성에 대한 지속적인 경고를 뜻하고, '착한' 여성들을 남성 우위에 공모하도록 유도한다. '착한'('예쁜', 순종적인) 태도의 대가는 무작위적인 남성 폭력에서 보호를 받는 것이고 어떤 경우는 경제적 안정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강제적인 착취에 의존하는 계급지배 체제를 드러내기 위해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다원론'에 관한 신화들을 폭로한다. 여성주의는 남성 지배를 힘의 지배로 드러내기 위해 '본능'과 낭만적 사랑에 대한 신화를 뚫고 지나간다. 이 두가지 분석 모두 우리에게 근본적인 불공평(부정)을 볼 것을 강요한다. 선택할 것은, 신화들이 주는 위안에 도달할 것인가, 아니면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지탱을 위해 신화를 필요하지 않는 사회 질서를 위해 일할 것인가다.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주의를 더해서 그 값을 '사회주의 여성주의'라고 부르는 게 가능하다. 사실, 사회주의자인 여성주의자들 대부분이 보통 보는 방식이 아마 이런 것이리라. 그러니까, 우리의 여성주의를 사회주의자 범위안으로 그리고 우리의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범위안으로 밀어넣는 일종의 잡종으로 말이다. 사물들을 이렇게 두는 데서 생기는 문제 하나는, “그럼, 그이는 진짜로는 뭐야?”라고 의문을 품거나 아니면 “주요 모순이 뭐야?”라고 묻게 만든다는 것이다. 억제하기 어렵고 정당한 것처럼 들리는 이런 질문들은 종종 우리를 멈춰서게 한다. “선택하라!” “이쪽 아니면 저쪽이 되라!” 그러나 우리는 사회주의 여성주의에 정치적 일관성이 있음을 안다. 우리는 잡종도 아니고 형세 관망자(기회주의자)도 아니다.

이 정치적 일관성을 얻으려면, 우리를 다른 부류의 여성주의자들과 구별되는 여성주의자로, 다른 부류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구별되는 마르크스주의자로 차별화해야 한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류의 여성주의,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류의 사회주의를 구획지어야 한다. (이 용어를 양해해 주시길) 이럴 때만, 사물들이 불편한 병치 이상의 어떤 것으로 '더해질' 것이다.

대부분의 급진 여성주의가들과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이에 관한 한 나의 이런 간단한 특징화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시각에서 볼 때, 급진 여성주의의 문제는 더 나아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급진 여성주의는 남성 지배의 보편성에 묶여 꼼짝하지 못하고 있다. 사물은 결코 진정으로 변하지 않았다, 모든 사회 체제는 가부장제다,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와 자본주의는 모두 단지 타고난 남성 공격성의 표현일 뿐이다 등등의 생각에 말이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관점에서 볼 때, 이런 태도의 문제는 남성 (그리고 진정으로 인간적이고 평등한 기반에서 그들과 화해할 가능성) 뿐 아니라 여성에 관한 많은 것들까지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급진 여성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중국 같은 사회주의 나라를 '가부장제 사회'로 얕보는 것은, 수백만의 여성들이 벌인 진정한 투쟁과 성과를 무시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여성 억압에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어떤 것이 있음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이 서로 다른 상황에서 다른 형식을 띠며 이 차이는 아주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여성 차별이 여아 살해로 표현되는 사회와 중앙위원회의 불균등한 대표 구성으로 나타나는 사회는 다르다. 그리고 이 차이는, 쟁취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모든 여성주의자들이 우려하는 게 마땅한 성 차별이라는 주제의 역사적 변주 가운데 하나가, 농경 사회에서 산업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면서 나타나는 한 묶음의 변화다. 이는 학문적 쟁점이 아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대체한 사회 체제는 사실 가부장적인 것이었다. 이 가부장적이라는 용어를 나는 본래 뜻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산이 가정 중심으로 이뤄지고 가장 나이 많은 남성이 지배하는 체제를 뜻한다. 사실, 산업 자본주의는 가부장제로부터 나와서 그것을 망치면서 앞질렀다. 생산은 공장으로 옮겨갔고 개인들은 '자유' 임금 근로자가 되기 위해 가정에서 뛰쳐나왔다. 자본주의가 생산과 가족 생활의 가부장적 조직을 붕괴시켰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자본주의가 남성 우위를 폐지시켰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겪고 있는 특정 성 억압 형태는 상당 부분 최근에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이긴 하다. 거대한 역사적 불연속성이 우리와 진짜 가부장제 사이에 놓여있다. 오늘날 여성인 우리가 겪는 경험을 이해하려고 하면, 자본주의를 하나의 체제로 고려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바로 이 지점까지 도달하기 위해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이외에 여러가지가 있다. 단지, 여성주의자들로서 우리는 가난한 노동계급 여성, 제3세계 여성 등 가장 억압받는 여성들에 가장 주목하며 그 때문에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그에 맞설 필요를 느끼게 된다고 말하고 말 수도 있었다. 단지 여성도 계급의 일원이라는 이유 때문에 계급 체제에 대해 발언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성주의자인 우리의 전망에 대한 어떤 또 다른 것을 명백히 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우리 삶에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서 성 차별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맥락 안에 위치짓지 않고는 이해할 길이 없다는 점이 바로 내가 명백히 하려는 그것이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대부분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관한 한 내가 간단한 요약한 것에 역시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다시, 더 나아가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나는 그들을 '기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유일하게 '진짜'이며 중요한 것들은 생산 과정 또는 전통적인 정치 영역과 관련되는 것들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경험과 사회적 존재의 다른 부분들 곧 교육, 성, 여가, 가족, 예술, 음악, 가정 일 등과 관련된 것들은 사회 변화의 중심 동력의 주변부일 뿐이다. '상부구조' 또는 '문화'의 부분인 것이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내가 '기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이들과는 아주 다른 진영에 있다. (여성주의자가 아닌 많고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본주의를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총체성으로 본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시장을 찾는 과정에서 사회적 존재의 모든 구석구석을 침투하도록 이끌린다고 이해한다. 특히 독점 자본주의 단계에서는, 소비 영역이 경제적 관점에서 생산 영역 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계급 투쟁을 임금과 노동시간 관련 쟁점에 한정된 것 또는 일터 관련 쟁점들에 한정된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계급 투쟁은 계급들의 이해가 충돌하는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며, 이런 영역에는 교육, 건강, 예술, 음악 등도 포함된다. 우리는 단지 생산 수단의 소유권뿐 아니라 사회적 존재의 총체를 변혁하는 게 목표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우리는 기계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출발해 여성주의에 도달했다. 우리가 독점 자본주의를 정치적, 경계적, 문화적 총체성으로 보기 때문에, 생산 또는 '정치'와 표면상 아무 관계가 없는 여성주의 쟁점들, 가족과 건강관리와 '사적' 생활에 관련된 쟁점들을 위한 공간을 우리의 마르크스주의 구조 안에서 확보한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라는 우리의 표지(브랜드)에는 '여성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맨먼저 여성들을 '상부구조' 또는 다른 어떤 영역에 구획지어 넣지 않기 때문이다. 기계적 성향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임금을 받지 않는 여성(주부)의 문제를 계속적으로 곰곰 생각한다. 진짜 노동계급의 일원인가? 말하자면, 진정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가? 물론 우리는 주부들이 노동계급의 일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이 진정 잉영 가치를 생산하다는 사실을 정교하게 증명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인민으로 이뤄진 계급이며 자본가가 지배하는 생산 영역과 상당히 떨어진 사회적 존재를 지닌 계급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계급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가장 주변부에 있는 듯한 여성들 곧 주부들이 사실은 계급의 심장부에 위치함을 알게 된다. 그들은 아이를 키우고, 가족을 결속시키고 공동체의 문화적, 사회적 관계망을 유지하는 일을 한다.

우리는 두가지의 관심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함께 흐르는 일종의 여성주의와 일종의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등장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그동안 그렇게 신비화됐는지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가 진정 내가 '기계적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른 것을 뜻하고 여성주의가 비역사적인 성격의 급진 여성주의를 뜻하는 것인 한에서, 사회주의 여성주의라는 이념은 거대한 신비 또는 역설이다. 이런 것들은 합쳐질 수 없는 것들이다.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러나 내가 규정하려고 시도했던 바대로 다른 종류의 사회주의와 다른 종류의 여성주의를 합친다면, 공통의 기반을 갖게 되며 그것이 오늘날 사회주의 여성주의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다. 이 공간은 꼭데기 잘린 여성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제약에서 자유롭고, 독점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총체성을 말하는 정치론을 개발할 수 있는 공간이다. 기존 여성주의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서는, 세계관에서 제약이 없으며 불완전하지 않은 어떤 것으로 깨고 나가야 했다. 우리의 경험 전체를 이해하고 이 이해의 총체성을 반영하는 정치론을 만들어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주의 여성주의'라는 새로운 이름을 취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사회주의 여성주의 이론을 하나의 '공간' 또는 공통의 바탕로 남겨두고 싶지 않다. 이 '바탕'에서 사물들이자라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성, 계급, 자본주의, 남성 지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의 종합에 몇년전보다 더 가까이 있다. 여기선 이런 사고의 노선을 아주 간략하게만 제시하겠다.

1. 계급과 성 지배는 궁극적으로 힘에 의존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여성주의적 이해는 옳다. 그리고 이는 여전히 성 차별적/자본주의적 사회에 대한 가장 타격이 큰 비판이다. 그러나 이 '궁극적으로'라는 것에는 많은 게 있다. 매일 매일 생활이라는 의미에서는, 많은 사람들은 폭력의 위협에 억제당하지 않는 가운데 그리고 종종 심지어는 물질적 박탈의 위협이 없는 가운데 성과 계급의 지배에 순응한다.

2. 그렇다면 사물들이 계속 유지되게 하는 게 힘의 직접적인 사용이 아니라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 계급의 경우, 이미 아메리카의 노동계급이 전투적인 계급의식을 잃은 이유에 대해 많이 논의됐다. 분명 민족적 분리, 특히 흑백의 분리가 해답의 핵심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노동계급이 나뉜 데 더해서 사회적으로 원자화하기도 했음을 주장하려 한다. 노동계급의 이웃관계는 파괴됐으며 이제 부패했음이 인정된다. 생활은 날로 사적이 되어가고 내향적이 됐다. 한 때 노동계급이 지녔던 숙련기술은 자본계급에게 강탈당했다. 그리고 자본가가 통제하는 '대중 문화'은 거의 모든 고유 노동계급 문화와 관습을 시나브로 몰아냈다. 계급으로서의 집단성과 자립 대신 상호 고립과 자본가 계급에 대한 집단적 의존이 존재한다.

3. 여성들의 예속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적인 방식으로 이 계급 원자화 과정의 열쇠였다. 다른 식으로 표현한다면, 노동계급의 삶을 원자화하고 자본가 계급에 대한 문화적/물질적 종속을 촉진한 힘들은, 여성들의 예속을 영구화하는 데 복무한 바로 그 힘들이다. 점점 더 사적인 가족적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집단에서 가장 고립된 이들이 바로 여성이다.(심지어 집밖에서 일할 때도 그렇다.) 많은 핵심 사례들에서 다름 아니라 여성의 숙련기술이 (생산 기술, 치유, 태아 받아내기 등등) 상품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금지되거나 불신당해왔다.사생활에 대한 광범한 자본주의적 침투에 대해 완전히 수동적이고 무비판적이고 의존적인 (곧 '여성적인') 태도가 되도록 부추김당한 이들이 누구보다 여성이다. 역사적으로, 노동계급 생활에 대한 후기 자본주의적 침투는 제압/'여성화'의 주된 목표로 여성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여성이 노동계급의 문화-담지자이기 때문이다.

4. 당연히 여성들의 투쟁과 전통적으로 계급투쟁으로 인식된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상호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이 이어진다. 여성들의 모든 투쟁이 본질적으로 반자본주의적 공세인 것은 아니지만 (특히 특정 여성집단의 권력과 부를 신장시키는 것만 추구하는 이들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여성들 사이에서 집단성과 집단적 확신을 형성하는 모든 투쟁은 계급의식 형성에 아주 중요하다. 거꾸로, 모든 계급투쟁이 본질적으로 반자본주의적 공세인 것은 아니지만 (특히 산업사회 이전의 가부장적 가치에 집착하는 이들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사회적, 문화적 자율성을 형성하려고 하는 모든 투쟁은 불가피하게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과 연결된다.

아주 거칠게 요약한 이것이, 사회주의 여성주의적 분석이 취하는 한가지 방향이다. 사회주의자와 여성주의자의 투쟁이 무너져내려 같은 것이 되게 할 종합이 등장하기를 누구도 기대하지 않고 있다. 위에서 제시한 간략한 요약들은 그 나름의 '궁극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인종적 억압처럼) 순수히 여성주의적인 전망으로는 기괴한 왜곡 없인 설명하거나 다룰 수 없는 자본주의 지배의 중요한 측면들이 있다. (가정내 남성 폭력처럼) 상당한 확대 해석과 왜곡 없인 사회주의 사상으로는 거의 간파할 수 없는 성 억압의 중요한 측면들이 있다. 그러므로, 계속 사회주의자들이자 여성주의자들일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서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라는 자신확신에 찬 정체성을 우리가 지니기 시작하는 종합이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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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Violin Muse&quot;

우울한 거리


 

.....마치 사무직원 같이 앉아있다. 울고싶다.

 

20세기 초 제네바에서 유인물 수송을 맡은 코스타야를 보고 레닌은 그것이 진정한 노동이었다고 되풀이해서 말햇다. 나태한 자판 두드리기와 입놀림이 아니라 진정한 노동으로 기여하며 지칠줄 모르는 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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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향기

내가 사는 곳의 반대편, 남미는 당연히 낯설다. 언제부턴가 체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가 거리에서 팔리고 라틴 아메리카 노래에 대해 음반사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작년 겨울, 울산으로 내려가는 차안에서 잠결에 한 동지 입에서 흘러나오는 <칠레전투>의 스토리와 남미의 정치적 상황을 들어 넘겼다. 선배 집에서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를 보다가 중간에 잠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의 시를 읽을 때 별로 염두하지 않았지만 네루다는 칠레시인이다. 오늘 아침에는 우연히 빅토르 하라의 구슬픈 노랫가락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종로의 한 서점에서 이책저책 뒤적이다 발견한 <소외>...

 

 남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독특한 성향에 대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정리한다.

 '고독'solitude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사랑과 열정에 관한 추상적이고도 강렬한 언어로 이루어진, 또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그렇다. 시인은 일차적으로 '시'의 관점에서 평가받는 것이 맞다. "때때로 그녀도 나를 사랑했다"라니...)

그리고 루이스 세풀베다. 그의 정치적 성향때문에 요즘 방한한 세풀베다에 대해 한국의 진보진영에서 관심도 많고 또 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도 많다. 윤리 미학의 시인, 열린 좌파, 그린피스의 활동가...

 

예전과 달리 요즘에는 단편모음이 좋다. 빠르고 강한 인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심어주는, 여운이 짙게 남지 않고 생각들이 헝클어지게 내버려두지 않고 바로 다른 주제와 이야기로 건너뛰어 관심을 이동시키는 그런 ....

 

 

            루이스 세풀베다/ 열린책들/ 2000

    

     <<목차>>

소외된 이야기들
검은 머리 여인과 금발 여인
로셀라, 가장 아름다운 여인
사랑과 죽음
스탈린그라드의 백장미
타노
카바토리
비달이란 사나이
라우펜부르크의 세관원
아타카마 장미
페르난도
두아르테 집안의 쌍둥이
미스터 심파
연인
가스피터
메리 크리스마스!
아구아루나 밀림의 밤
잃어버린 섬
피츠카랄도의 흔적을 찾아서
시인이여, 살롬!
엘베 강의 해적
콤파
침묵의 목소리
갈베스 선생님, 건배!
추추와 발보아에 대한 기억
순록의 나라
지중해의 고래
살가리
루카스라는 사람

천사의 방문을 받은 파파 헤밍웨이
후안파
아스투리아스
페데리코 아무개
콜로아네

 

 

 잊히고 소외된 것들에 대한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서른다섯 편의 이야기. 아마존의 환경 파괴, 유대인 수용소, 세르비아 민족주의, 소시민의 일상 등 다양한 장소와 시대를 배경으로 여러 가지 사회 불의에 맞선 인간의 삶과 그 존재의 존엄성을 말하는 이 단편 모음집은 현대 사회에서 소외되어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 아릿한 감동을 던져 준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연애 소설 읽는 노인』(1989)으로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아마존 밀림이라는 거대한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인간을 그렸고, 같은 해에 발표한 『지구 끝의 사람들』에서는 고래를 보호하는 환경 운동가들의 이야기를 했다.이외에도 동화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1996), 자전적 여행 소설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1995), 『귀향』(1994), 『감상적 킬러의 고백』(1996), 『악어』(1997), 중?단편 소설집 『외면』(1997)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작가는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자들을 위한 대변인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대체적으로 사회·정치적 메시지가 강하게 깔려 있고, 소외된 자들과 고통받고 억압받는 자들이 주로 등장한다.
 이번에 나온 두 작품 역시 역사에 길이 남을 요란한 영웅보다는 제도권 밖에서 진한 인간미를 풍기는 일상생활 속의 영웅들을 그려 내고 있다.
 세풀베다가 2000년에 발표한 단편집 『소외』는, 잊힌 것들에 대한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또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각별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서른다섯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역사에 기록될 만한 화려함 뒤에 숨겨진 묵묵한 진실이 담긴 소시민의 일상, 유대인 수용소, 아마존의 환경 파괴, 비이성적인 세르비아 민족주의 등 다양한 장소와 시대를 배경으로 여러 가지 사회 불의에 맞선 인간의 삶과 그 존재의 존엄성을 다루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며 그의 문학관을 전반적으로 충실하게 반영하는 이 단편집은, 현대 사회에서 소외되어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정치, 사회, 환경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한다.
『핫 라인』은 세풀베다가 2002년에 발표한 소설로, 누아르 영화 기법과 추리 소설 기법으로 칠레에서 일상화된 사회악을 고발한 작품이다. 언뜻 들으면 제목이 선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이 작품은, 현대인의 비뚤어지고 왜곡된 성 문화를 질책하면서도 가볍게만 흐르지 않고 그를 통해 칠레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를 짚고 넘어간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언급했듯이 <과거의 잘못은 잊어서도 안 되고, 용서해서도 안 된다>며 칠레 역사가 안고 있는 비리와 폭력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이 작품은 2002년에 상영된, 정치적 탄압으로 사라진 실종자들과 가족들의 아픔을 다룬 영화 「어디에도 없다」에 이어 작가가 두 번째로 감독을 맡아 곧 영화로 만들어질 계획이다.

 지금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해 온 세풀베다의 작품들은, 칠레가 안고 있는 과거 청산 작업 문제와 환경·생태 문제, 인류애라는 무거운 사회·정치적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무엇보다 <공식적인 역사 이면에 숨겨진 진짜 주인공들의 진정한 역사는 작가가 써야 한다>는, 작가의 사회적 기능을 간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두 맥을 같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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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 탄생 100주년

민중과 자연을 향한 위대한 사랑 노래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고대신문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발발한 1973년의 칠레. 가택수색의 긴박한 상황이 연출된 가운데 그 집의 주인이었던 한 사람은 병사들에게 조용히 말한다. “이 집에서 당신들에게 위험한 것은 하나밖에 없네.” “그게 뭡니까?" 순간 손을 권총으로 가져가는 장교에게 들려온 대답. “시(詩)라네.”

 

이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다. 서정의 시인, 사랑의 시인, 민중의 시인, 혁명의 시인. 모두 그를 일컫는 표현이다. 개인적 사랑의 묘사에서부터 혁명의 불꽃을 제시하기까지 네루다 시의 진폭이 큰 것은 그것이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의 고백처럼 시란 영혼을 뒤흔들던 무언가를 그만의 방식대로 표현해낸 전부였다.

 

현실주의자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요, 오직 현실주의적이기만 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라고 했던 네루다. 전자와 후자의 전쟁에서 둘은 번갈아 승리하지만 결코 시 자체는 지지 않는다던 한 시인의 외침은 탄생 100주년을 맞은 지금도 세상을 울리고 있다.
 
시(詩)의 제왕들은 죽어서까지도 고된 삶을 살아가는가 보다. 끝자리 숫자가 아라비아 숫자 5로 끝나는 당해 년도 기념일마다 가혹하리만치 휴식을 방해받아야 하니 말이다. 그들이 운명을 달리한 연도가 인디언 신화 속에서 생명력을 의미하는, 이 미신의 숫자 오각형의 모서리에 닿을 때마다 우리는 그들을 곳곳에서 경건한 분위기 속에 기억하곤 하는 것이다.

 

파블로 네루다는 1904년 7월 12일 라틴아메리카의 빠랄(Parral)에서 태어났다. 묘하게도 칠레의 주목할만한 시인들이 많이 태어난 이 피폐한 촌락에서 네루다는 온 생을 통틀어서 정녕 다함이 없는 시적 에너지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물론 말이 없고 엄격할 대로 엄격하기만 할뿐, 시적 재능과는 무관한 아버지의 이 좁은 성(城)은 그의 어린 시절에 뼈아픈 추억으로 남아있다.

    
네루다에 대한 관심은 비단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다 준 연시집 <스무 개의 사랑 노래와 절망 속의 작은 읊조림>에서 연유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구사하는 언어의 시적 힘이 오직 풍요롭고도 다채롭게 확장하는 서정시적 에로스에서 기원한다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시에 관한 한 그의 정력적인 호기심이 특별히 극복해야 했던 한계는 주제의 측면에서나 기교적인 측면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의 시세계는 처음부터 끝이 예비돼 있지 않았다고나 할까. 네루다에게 그리스 신화 속의 마이더스 왕에 관한 이야기가 더는 신화 속의 이야기만은 아닐 터, 그가 손을 대는 찰나, 만물은 시로 화(化)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네루다의 시는 어찌 보면 거의 본능에 가깝게 그러나 시적 긴장감을 늦추는 법 없이 요람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인생에 대한 물음을 대담하게 밀어붙인다. 그에게 삶의 진실은 아스라한 현기증을 유발한다. 착오가 없을 수도 없지만 이에 여념하지 않고 배우는 자의 겸손한 자세를 잃어 본적이 없는 그였다. 네루다에게 창조를 향한 전진은 절망과 좌절의 희생을 감내하고도 남을 만큼 절실한 것이었다. 


그의 시가 원숙미를 더해가던 시기에, 그의 시적 주제는 미학적 에테르의 천체와 농후한 정치적 성향으로 가장한 지상의 공동묘지 사이를 큰 폭으로 진동한다. 한편, 그 스스로는 내면으로부터 울려오는 한 고독한 동성애자의 광포한 자기부정의 절규에 귀기울여야만 했으며, 동시에 극단적인 냉전시대의 상황에서 정치선전에 희생되었다는 자괴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가장 단순한 사물의 세계를 가벼운 마음으로 추구하곤 한다.

 

그가 처음으로 출판한 작품집 <지상에 체류하는 동안>이 이끌던 잿빛 성공의 그늘이 가셔가던 무렵 그를 훈계하던 것은 시적 미학의 정점에서 축포처럼 터져 오르는 자기소멸과도, 불모의 모래사장에서 순간 반짝이는 순수시의 촉촉함과도 거리가 멀다. 게다가 그는 그의 앞길을 확장하고자하는 욕망에 눈이 멀어서 그의 시세계를 안내하는 친절한 혹은 불필요하게 말이 많은 교사를 자청한 적도 없다. 설령 그의 목소리가 일관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동일한 시가 경우에 따라서는 만화경의 세계 마냥 다채롭게 읽힌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 한데, 대체로 고전적인 작품들이 가진 보편성과 영속성은 이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에 빚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반 백년동안 네루다는 칠레 시단의 거인이었으며 넓게는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지간에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군림하던 시의 독재자였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본심은 분명히 아니었다. 네루다는 이미 일찍부터 어떠한 문학적 조류와도 거리를 유지했으며 자신의 초상을 담은 시적 유파를 만들기 위한 초석을 다져본 적도 없다. 한결같이 이러한 독재자의 언어 속에서는 “정상의 왕좌에 앉지 않으면 멍텅구리지!”라는 따분한 모토는 찾아볼 길이 없다. 오직 획일적인 작품세계만을 고집하는 현대의 시인들이 네루다 곁에서 그의 진언을 경청하기를 원한다면 상당한 인내심을 필요로 하리라. 또한 우리는 네루다에게 진정으로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왕관을 둘러싼 쟁탈전으로 인해 많은 칠레의 새로운 시인들이 등장할 수 있었고, 그들 중 몇몇은 세계의 시단에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네루다는 큰 시인이었다. 그러나,…….
네루다학(學)에서 이 틈새를 비집고 끼어드는 이 ‘그러나’라는 개념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이 개념의 공간은 오늘날 점점 더 팽창해 가고 있다. 그래서 네루다에 관한 글들을 모두 짜깁기하면 별 어려움 없이 지구의 적도를 한바퀴 빙 두를 수 있다고 어느 네루다 연구가는 서슴치 않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의 적들 중 일부는 같이 시를 쓰던 동료들이었다. 그들의 공격에 대해 네루다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극단적인 조치에 대해서도 역시 일관된 자세를 잃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그의 적들과는 비교조차 안될 정도로 월등히 많은 친구들을 가졌었다. 프레테리꼬 가르시아 로르까, 죠르주 아마도, 루이 아라공, 파블로 피카소, 아나 지게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그리고 살바도르 알렌데가 그들이다.

 

늦어도 1936년 이후부터는 정치적 앙가쥬망이 그의 삶과 작품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활력소였다. 스페인 정부를 위해서 또 전체주의에 맞서기 위해 네루다는 입당을 결정한다. 물론 그의 이 탁월한 선택은 논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창작의 한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1945년 그는 공식적으로 칠레 공산당에 입당한다. 차이는 있겠지만 그는 여기서 죽는 그 순간까지 참을성 있게 충성을 다하여 일했고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 후회한 적도 없다. 스페인 내전의 비극이, 또 아우슈비츠에 대한 불온한 기억이 아물지 않던, 게다가 그 이후 지속되던 납빛의 냉전시대 상황에서 그의 행보는 당시 여러 지성인의 태도와는 남다른 것이었다.

 

한낱 ‘지상에서 소외된 자’에 대한 불타는 그의 연대감은 이들의 삶에 대한 폭넓은 동감과 감동에서 비롯한 것이지 단지 특정한 실존적 사회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임시방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네루다가 불순한 의도로 몇몇 당을 위한 찬양곡을 작곡했음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이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괴롭게 몸부림친다. “물론 나는 잘 알고 있다. 혁명과 혁명가도 종종 오류와 부조리에 봉착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인간에 대한 불문율은 우파에게서처럼 좌파에게도 동일한 효력을 발휘한다. 그 누구도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물론 그의 이 고백을 다음과 같이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즉, 인류의 연대의식과 인간적 기품에 바탕을 둔 정의의 하얀 깃발이, 그러나 커다란 과오로 구멍 뚫린 이 깃발을 개종자가 열심히 참회기도를 하는 와중에 착용하는 흰옷과 맞바꾸겠다는 말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네루다에 대한 공격은 그저 품위 있는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내심 그에 대한 사무친 적대감을 버릴 수 없던 동료들이나 비평가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그의 그 정의에 불타는 시학도 스스로를 1949년의 탈출과 망명을 부추기던 시대의 횡포로부터 보호할 수는 없었다. 구태의연한 민주주의 정치질서를 유지하고자 당시 이탈리아와 프랑스 정부는 국가의 안보를 명목으로 네루다의 그 위험한 시들을 싸잡아 맹비난한다. FBI가 작업한 그에 대한 세부신상기록카드는 어떤 종류의 단행본 출판물보다도 훨신 두껍고 치밀하다. 좋은 친구들 가운데 치명적인 적들이 은폐돼 있다는 사실은 저 악명 높은 ‘쿠바인의 편지’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나중에 네루다는 라틴아메리카 혁명의 단두대에 세워져 공개적으로 심판 받는 오욕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시낭독 순회여행 중 미국 펜클럽의 초청과 페루정부의 표창 수여는 그가 평생을 두고 용서할 수 없었던 그에 대한 철저한 조롱이었다.


투병 중이던 네루다는 1973년 9월 피노체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서도 열흘을 더 살아 있어야 했다. 마지막 혼미한 정신착란의 순간에 그는 반복해서 외쳤다고 전해진다. “당신들은 모두 죽어요. 모두가 모두가 죽는다니까요.” 얼마 뒤 산티아고에 있던 그의 아름다운 집 ‘라 카스코나(La Chasocona)’ 는 용맹스런 칠레의 군인들에 의해서 깨끗이 파괴된다. 그리고 그날 이 집에서 시작된 장례행렬은 중무장한 군대의 삼엄한 경계 속에 묘지로 향했다. 그의 장례에는 수백의 군중이 운집했다. 이들 중 스웨덴 대사와 멕시코 대사만이 외부세계의 유일한 대표자였다. 장례행렬은 조금은 떨렸지만 그러나 침착하게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 이것은 이 독재정권에 대한 첫 번째 공식적인 시위였다. 피노체트 장군은 이 시인의 죽음을 위해 3일간을 국가차원의 애도일로 지정한다. 그리고 그는 네루다를 7년 동안 칠레에서 파문시킨다. 

 

1950년 칠레에서 <거대한 노래>가 불법인쇄 되었다. 내 아버지는 그 원본 복사본을 갖고 있다는 데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이 복사본에는 “깜빠네로 네루다(스페인어: 친구 네루다)”라는 네루다의 파란색 자필서명이 화려하게 장식되기도 한다. 이 책은 내 인생의 첫 번째 독본(讀本)이다. 내 어머니는 이 책과 함께 내게 읽기를 가르쳤다. 지나치게 과장된 주장이 되려나, 만약에 내 전생애를 걸쳐 이 독서의 시간이 언제나 함께 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주옥과도 같은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러한 유년시절로부터 24년 후, 피노체트 장군의 비밀경찰이 나의 아버지를 추적하고 있었다. 항상 그렇듯이 그들은 내 집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고, 우리가 기르던 암캐의 작은 오두막과 그 너무나도 비정치적인 암캐까지 빠지지 않고 수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내 아버지를 찾지 못하자, 마치 분을 삭이기 위한 듯이 우리의 작은 가족도서관에서 소위 반동적이라고 하는 도서들을 질질 끌어냈다. 그 가운데서 내 첫 번째 독본을 발견하고는 마음 한구석에 서서히 저며오던 슬픔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가슴 아팠던 순간도 오늘 100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내 첫 번째 스승에 대한 기억의 한 부분임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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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RUDA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네루다(Pablo Neruda)

본명은 Neftali Ricardo Reyes Basoalto. 1904. 7. 12 칠레 파랄~1973. 9. 23 산티아고. 칠레의 시인·외교관·마르크스주의자.

1971년 노벨 문학상, 1953년 레닌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철도노동자인 아버지 호세 델 카르멘 레예스와 어머니 로사 바소알토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죽었으며, 2년 뒤 가족은 남부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 테무코에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재혼했으며, 네루다는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사랑하였다. 뒤에 그는 그 당시를 회고하여 "조국의 개척지인 '머나먼 서부'에서 나는 삶과 대지, 시, 비 속에서 태어났다"고 썼다.

그는 1910년 테무코 남자국민학교에 들어가 1920년 중등과정을 마쳤다. 10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일부는 나중에 학생잡지에 실렸으며 처음에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가명을 썼다. 1920년부터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며, 1946년에는 법적으로 이름을 바꿨다. 12세 때 칠레의 저명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을 만나 위대한 고전작가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은 그가 진로를 선택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전투적 무정부주의자가 되어,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한 탁월한 이론가 장 그라브의 저서를 번역했다.

1921년 테무코를 떠나 수도인 산티아고로 갔다. 현실적인 목표는 사범대학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는 것이었지만, 공부보다는 시를 쓰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방 출신의 이 낭만적인 학생은 어깨에 시인의 망토(아버지가 쓰던 철도노동자 망토)를 두르고 챙 넓은 솜브레로 모자를 쓴 차림으로 칠레 수도의 문학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그해 10월 〈제가(祭歌) La cancion de la fiesta〉라는 시로 칠레 학생연맹이 주최한 백일장에서 1등상을 탔으며, 이 연맹이 펴내는 잡지 〈클라리다드 Claridad〉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23년 갖고 있던 가구와 아버지에게 받은 시계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처녀시집 〈황혼의 노래 Crepusculario〉를 출판했다. 이듬해에는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업자를 만나 〈 스무 편의 사랑시와 한 편의 절망노래 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on deseperada〉(1924)를 냈는데, 이것은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읽혔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성공을 거두었고, 그뒤로도 꾸준히 인기를 얻었다. 네루다는 그토록 고통스럽게 쓴 이 시들이 새 시대의 연인들에게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기적에 의해서, 이 고통스럽게 씌어진 책은 수많은 사람들을 행복에 이르는 길로 안내했다"고 말했다.

이미 20세에 2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던 네루다는 칠레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불문학 공부를 그만두고 시에만 몰두해 〈조물주의 시도 Tentativa del hombre infinito〉, 토마스 라고와 함께 쓴 〈반지 Anillos〉ㆍ〈고무줄새총에 미친 사람 El hondero entusiasta〉을 발표했다.

네루다는 1927년 버마 랑군 주재 명예영사로 임명받아 그뒤 5년 동안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다. 랑군에서 콜롬보·실론·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자바·싱가포르로 옮겨다녔으며, 자바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마리아 하게나르와 첫 결혼을 했다. 캘커타에서 열린 '범힌두인 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행들을 회고하는 책들은 감동적이지만 때로는 가슴아픈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당시 그의 생활은 외로웠으며, 버마 처녀 조시 블리스와의 연애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대지에 살다 Residencia en la tierra〉를 쓴 것은 남아시아에서 지낸 이 무렵이었다. 193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사로 발령받았으며, 그곳에서 당시 그 도시를 방문중이던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친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바르셀로나로, 그뒤에는 마드리드로 전출되어 그곳에서 델리아 델 카릴과 재혼했다.

칠레의 문단에 충격을 주었던 것처럼, 유럽 문학계에도 그의 시는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빠른 속도로 알려졌다. 스페인 시인들은 스페인의 대표적 지성인들이 서명한 〈파블로 네루다에게 바침 Homenaje a Pablo Neruda〉을 출간하여 그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시인으로서 발전을 거듭하던 이 시기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짐으로써 중단되었다. 친구 가르시아 로르카의 처형과 미겔 에르난데스의 투옥을 비롯한 '거리의 유혈사태'는 이 칠레 시인의 정치적 태도를 성숙시켰다. 뒷날 "세계는 변했고 나의 시도 변했다. 시구 위에 떨어지는 피 한 방울은 그 속에서 숨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 가슴 속의 스페인 Espana en el corazon〉은 내전중 공화군 전선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으나 칠레 정부는 곧 그를 멕시코로 보냈다. 이곳에서 왕성한 창작기에 접어들었으며, 이때 쓴 시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특히 독일군의 맹공격에 맞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려는 영웅적 활약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이당시 멕시코의 벽화도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1943년 태평양 연안의 모든 나라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배를 타고 칠레로 돌아왔다. 1945년 상원의원으로 뽑혔고 3년 동안 조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문학에 바쳤던 것만큼이나 많은 열정을 바쳤다. 그러나 칠레에 우익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치활동은 끝나게 되었다. 공산주의자인 네루다는 다른 좌익 인사들과 함께 몸을 숨겨야만 했다. 숨어 살던 이 시기는 작품을 쓰기에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시기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쓴 가장 위대한 서사시 가운데 하나인 〈모든 이를 위한 노래 Canto general〉가 탄생했다. 그는 1948년 2월 칠레를 떠나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 남부를 가로질러 4월에 파리에서 열린 평화지지자회의에 참가했다. 또 1949년에는 알렉산드르 푸슈킨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그뒤 유럽의 다른 지역을 돌아보고 다시 멕시코를 방문했다. 1952년 좌익작가와 정치인에 대한 검거령이 철회되자 칠레로 돌아왔으며 칠레 출신의 마틸데 우루티아와 3번째로 결혼했다.

그는 계속 태평양 연안의 이슬라네그라에서 살았지만, 1960년 쿠바, 1966년 미국 방문을 비롯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의 시는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 산티아고의 산크리스토발 언덕 기슭에 '라차스코나'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발파라이소에도 '라세바스티아나'라는 집을 지었다. 이 집들은 그가 여행하면서 모은 배의 선수상(船首像)과 그밖의 갖가지 기념물을 진열한 심미적 분위기로 이름난 명소가 되었다.

본질적으로 네루다의 시는 인간이면 누구나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끊임없는 변화를 대변한다. 젊은 시절에는 서정적이고 관능적인 작품인 〈황혼의 노래〉와 〈스무 편의 사랑시와 한 편의 절망노래〉를 썼으며 뒤이어 좀더 영적인 작품 〈조물주의 시도〉·〈고무줄새총에 미친 사람〉을 쓰게 되었다. 외부세계와 이러한 세계가 주는 창조적 자극에서 내적 자아의 영역으로 침잠하게 되면서 독보적이고 신비로운 작품 〈대지에 살다〉가 탄생되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전통적인 시형식에서 벗어나 '네루디스모'(nerudismo)라는 매우 개성적인 시적 기법을 창조해냈다. 그가 스페인 내전 기간에 쓴 시들은 더 사실성이 강하고 외부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더 많이 깨닫게 되었음을 나타내준다. 이러한 현실지향적이며 고발조의 시에 이어 장엄한 서사시 〈모든 이를 위한 노래〉가 나왔다. 그러나 이 웅장한 문체는 곧 사라지고 좀더 단순한 주제를 다룬 사회비평시가 등장하게 된다.

그의 주제와 기교의 다양함은 나이를 먹어도 여전했다. 〈100편의 사랑 노래 Cien sonetos de amor〉에서는 사랑이, 〈Estravagario〉에서는 해학이 다시 주제로 다루어졌으며, 〈이슬라 네그라의 회고록 Memorial de Isla Negra〉은 향수 어린 자서전이다. 네루다는 "나는 장대한 연작시를 계속해서 써나갈 계획이다. 왜냐하면 이 시는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의 말로써만 끝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했으며, 실제로 그 마지막 순간은 1973년 9월에 왔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네루다의 시세계

 네루다는 초기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에서 관능적 표현의 서정시를 주로 써서 당시 전통적이던 완곡한 애정 표현에 도전했다. 다음 단계에는 시집 '지상에서 살기'(1935)까지를 통해 초현실주의 기법의 시들을 썼으며, 스페인 내전(1936)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현실 참여의 시들을 썼다. 그는 문학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술과 문학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수 불가결한 그 무엇이 되어야만 한다. 시는 개인적 삶의 솔직한 기록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모든 인류를 향한 발언이어야 한다. 시의 목적은 고백이 아니라 설득에 있는 것이다."(출처 : 김윤식·김종철 저 문학교과서)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네루다의 다른 시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제일 슬픈 구절을.

예컨대 이렇게 쓴다. "밤은 산산이 부서지고

푸른 별들은 멀리서 떨고 있다"

밤바람은 공중에서 선회하며 노래한다.

오늘밤 나는 제일 슬픈 구절을 쓸 수 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때때로 그녀도 나를 사랑했다.

이런 밤이면 나는 그녀를 품에 안고 있었다.

끝없는 하늘 아래서 나는 연거푸 그녀와 키스했다.

그녀는 나를 사랑했고, 때때로 나도 그녀를 사랑했다.

누가 그녀의 그 크고 조용한 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밤 나는 제일 슬픈 구절을 쓸 수 있다.

나한테 이제 그녀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에 잠겨.

 

광대한 밤을 듣거니, 그녀 없어 더욱 광막하구나.

그리고 詩가 영혼에 떨어진다 목장에 내리는 이슬처럼.

내 사랑이 그녀를 붙들어놓지 못한 게 뭐 어떠랴.

밤은 산산이 부서지고 그녀는 내 옆에 없다.

그게 전부다. 멀리서 누가 노래하고 있다. 멀리서.

내 영혼은 그녀를 잃은 게 못마땅하다.

내 눈길은 마치 그녀한테 가려는 듯이 그녀를 찾는다.

내 가슴은 그녀를 찾고, 그녀는 내 곁에 없다.

같은 밤이 같은 나무를 희게 물들인다.

그때를 지나온 우리는 이제 똑같지가 않다.

나는 이제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그건 그렇지만, 허나 나는 얼마

나 그녀를 사랑했던가.

내 목소리는 그녀의 귀에 가서 닿을 바람을 찾기도 했다.

다른 사람 거. 그녀는 다른 사람 것이 되겠지. 지난날의 키스처럼.

 

그 목소리. 그 빛나는 몸. 그 무한한 두 눈.

나는 이제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그건 그렇지만, 허나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사랑은 그다지도 짧고, 잊음은 그렇게도 길다.

이런 밤이면 나는 그녀를 품에 안았으므로

내 영혼은 그녀를 잃어버린 게 못마땅하다.

비록 이게 그녀가 나한테 주는 마지막 고통일지라도

그리고 그게 그녀를 위해 쓰는 내 마지막 시일지라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여자, 대지, 민중에의 사랑  ( 김경범/ 세종대 겸임교수/서문학 )

 중남미 시인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네루다에게는 사랑의 시인, 민중의 시인, 그리고 가끔씩은 자연의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고 비평가들은 그의 시세계를 둘이나 셋으로 혹은 다섯으로 나누며 불연속적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훌륭한 시들이 그렇듯이 그의 시는 무엇보다도 언어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언어의 대지 위에 아주 다양한 무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의 첫 작품은 아니지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준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의 첫 번 째 사랑의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여자의 육체, 하얀 구릉, 눈부신 허벅지,/ 몸을 내맡기는 그대의 자태는 세상을 닮았구나./ 내 우악스런 농부의 몸뚱이가 그대를 파헤쳐/ 땅 속 깊은 곳에서 아이 하나 튀어나오게 한다…”여자의 육체 - 대지라는 다소 전통적인 도식이 보이지만 3천5백쪽에 달하는 그의 시 전집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여자는 관념적이 아니라 감각적이고 시인은 ‘봄이 벗나무와 하는 행위’에 목말라한다. 그러나 짧은 사랑은 절망과 고통스런 망각이 되고 시인은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왔다’고 선언하며 절망의 노래를 끝맺는다. 그러나 이 시집이 실연의 상처를 노래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수동적이면서 능동적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대지로 이어지고 대지는 시라는 생명을 잉태한다. ‘잘록한 허리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 된 아메리카 대륙 그리고 ‘바짝 마른’ 그의 조국의 바다, 바람, 비, 나무는 생명과 죽음 사이를 배회하며 빛나는 언어로 재생산된다.

 이때 가끔씩 삶에 대한 염증을 내비치기도 한다. 다음은 『지상의 거처』에 수록된 「산책」의 한 부분이다.

“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무감각하게, 양복점이나 영화관에 들어갈 때가 있다./ 이발소의 냄새는 나를 소리쳐 울게 한다. 난 오직 돌이나 양털의 휴식을 원할 뿐/ 다만 건물도 정원도, 상품도, 안경도, 승강기도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발에, 내 손톱이, 내 머리칼이, 내 그림자가 꼴보기 싫을 때가 있다./ 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그러나 대지의 생명력은 스페인 내란(1936-39년)이라는 계기를 통해 인간에 대한 애정을 회복시킨다. 내란 중에 반파시스트 진영에서 열정적으로 활동을 하던 그는 내란이 끝나자 아메리카 대륙의 민중에게로 눈을 돌린다. 그 시적 승화가 『총가요집』 이며 특히 『마추피추의 산정』 연작시들은 대지 위에서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절규하고 있다.

“나와 함께 올라 다시 태어나라 형제여./ 네 고통이 뿌려진 그 깊은 곳에서 내게 손을 다오./ 이 생명의 잔에 땅에 묻힌 그대들의 오랜 고통을 가져오라./ 그리고 밑바닥부터 얘기해 다오, 이 긴긴 밤이 다하도록/ 내가 닻을 내리고 그대들과 함께 있으니 내게 모두 말해다오, 한땀 한땀,/ 한구절 한구절, 차근차근. 품고 있던 칼을 갈아 내 가슴에 내 손에 쥐어다오./ 나의 핏줄과 나의 입으로 달려오라./ 나의 말과 피로 말하라.”

민중에 대한 희망, 열정, 사랑은 계속 된다. 다만 거대한 자연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의 사물을 통해 여과될 뿐이다. 즉 그는 몸을 낮추고 민중의 언어와 삶 속으로 들어간다. 고양된 감정은 양말, 수박, 소금, 질산염, 밤, 책, 새, 나뭇잎, 양파, 과일, 엉겅퀴 속으로 투영되어 차분해지지만 의식은 여전히 투철해진다. 그리고 삶을 돌아보면서 죽음의 징조와 함께 사랑도 다시 시 속에 나타난다.

빠블로 네루다는 1904년에 태어나 1973년에 죽은 칠레의 시인이다. 노벨상(1971년)을 받은 적도 있고 민중의 대변자로 상원의원이 되었다가 나중에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적도 있다. 칠레 민주화를 위한 자신의 무기는 오직 시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술꾼에게 모욕당한 인어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을 향해, 죽음을 향해 헤엄쳐’가지 않았다. 그는 ‘시’ 와 함께 ‘사람’도 같이 남아 있어야 할 시인이다. 그의 시는 그의 몸 구석구석에서 솟아났기 때문이다.(출처 : http://210.217.248.140/woodway/poem/neruda/neruda-poem.htm)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규보의 '시벽(詩癖)'

나이 이미 칠십을 넘었고
지위 또한 정승에 올랐네.

이제는 시 짓는 일 벗을 만하건만

어찌해서 그만두지 못하는가.

아침에 귀뚜라미처럼 읊조리고

저녁엔 올빼미인양 노래하네.

어찌할 수 없는 시마(詩魔)란 놈

아침저녁으로 몰래 따라다니며

한번 붙으면 잠시도 놓아 주지 않아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네.

날이면 날마다 심간(心肝)을 깎아 내

몇 편의 시를 쥐어짜내니

기름기와 진액은 다 빠지고

살도 또한 남아 있지 않다오.

뼈만 남아 괴롭게 읊조리니

이 모양 참으로 우습건만

깜짝 놀랄 만한 시를 지어서

천 년 뒤에 남길 것도 없다네.

손바닥 부비며 혼자 크게 웃다가

웃음 그치고는 다시 읊조려 본다.

살고 죽는 것이 여기에 달려으니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려워라.

 

- 시벽(詩癖 : 시를 짓지 않고는 못 배기는 병)

작자는 이규보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빠블로 네루다 연보 - 시, 사랑, 혁명

(정리 : 권  미  선)

1904년 7월 12일 칠레의 빠랄(Parral)에서 출생. 아버지는 철도 노동자. 성명은 호세 델 까르멘 레예스 모랄레스(Jos  del Carmen Reyes Morales). 어머니 성명은 로사 네프딸리 바소알또(Rosa Neftal  Basoalto). 네루다의 본명은 네프딸리 리까르도 레예스 바소알또(Neftal  Ricardo Reyes Basoalto). 8월 어머니 사망.

 1906년 아버지는 떼무꼬(Temuco. 칠레 남부의 작은 도시)로 이사. 재혼. 몇 년 후 네루다를 데려감. 네루다는 1921년까지 떼무꼬에서 생활.

 1910년 떼무꼬 남학교(Liceo de Hombres) 입학. 1920년 중등과정 수료. 조숙한 네루다는 10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함.

 1917년 7월 일간지 《아침》(La Ma ana)에 「열중과 끈기」(Entusiasmo y perseverancia) 를 발표함으로써 시인으로 첫 발을 내디딤.

 1918년 떼무꼬의 잡지에도 시를 발표.

 1919년 잡지 《질주와 비상》(Corre-Vuela)에 시 13편을 발표. 아버지는 시인이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므로 여러 가지 가명을 사용함. 마울레(Maule) 백일장에서 3등으로 입상.

 1920년 당시 떼무꼬 여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던 가브리엘라 미스뜨랄(Gabriela Mistral. 중남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여류 시인)을 알게 됨. 가브리엘라는 외롭고 수줍음 많은 청년 네루다에게 시인의 길을 가도록 북돋아 주었음. 당시 가브리엘라는 31살이고 네루다는 16살이었으나 두 사람은 시에 대한 열정으로 지속적인 우정을 나눔. 10월 빠블로 네루다(Pablo Neruda)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로 결정함. 19세기 체코 시인 얀 네루다(Jan Neruda)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이런 필명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음. 떼무꼬 백일장에서 1등으로 입상.

 1921년 불어 선생님이 되려고 수도 산티아고로 유학. 사법학교에 입학. 외롭고 배고픈 학생시절을 겪으면서 보헤미안적인 삶을 영위. 10월 시 「축제의 노래」(La canci n de la fiesta)로 칠레 학생연맹 콩쿠르에서 1등상 수상.

 1922년 문학단체 브레미야(Vremia)에서 처음으로 자작시를 낭송. 우루과이 몬떼비데오에서 발간되는 잡지 《시대》(Los Tiempos)에 시가 게재됨.

 1923년 8월 첫 시집 『황혼』(Crepusculario) 출판. 사츠카(Sachka)라는 필명으로 학생연맹 기관지 《끌라리닷》(Claridad)에 문학평론 등을 기고.

 1924년 6월 자신의 연애 경험을 살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 n desesperada)출판. 섬세한 감성, 독창적인 이미지와 은유가 돋보이는 이 시집으로 네루다는 문명(文名)과 대중의 사랑을 한꺼번에 얻음. 지금도 가장 널리 읽히는 시집. 사범학교를 중퇴하고 시 창작에 전념. 시집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계가 어려워 아나톨 프랑스 시선집을 번역하는 등 여기저기에 글을 기고. 산티아고 일간지에 『스무 편의 사랑의 시...』 창작과정을 기술한 글을 발표. 네루다는 1974년 사후 출판된 『회고록』(Confieso que he vivido)에서 "청년 시절의 불타는 정열을 담고 있으며 [...] 흥건한 애상마져도 삶의 기쁨 속에 녹아있으므로 애착이 가는 시집이다"고 함.

 1925년 문학지 《까바요 데 바스또스》(Caballo de Bastos)를 주관. 시집 『무한한 인간의 시도』(Tentativa del hombre infinito) 발표. 이 시집의 인쇄일은 1925년이고 출판일은 1926년.

 1926년 또마스 라고(Tom s Lago)와 공저한 산문집 『반지』(Anillos) 출판. 단편소설 형식의 문집, 『삶과 희망』(El habitante y su esperanza) 출판.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불어판에서 중역.

 1927년 여전히 수입은 적고 생계는 어려움. 6월 14일 미얀마 양군 주재 명예 영사로 임명. 부에노스아이레스, 리스본, 마드리드, 파리, 마르세이유를 경유하여 랑군에 도착. 월급이 없는 명예직이었으므로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림. 조시에 블리스(Josie Bliss)를 만나 동거함.

 1928년 스리랑카 콜롬보 주재 영사. 조시에가 찾아왔으나 영원히 헤어짐. 이 시기 네루다는 빈곤, 식민잔재, 정치적 탄압으로 질곡받는 동남아 민중들의 고난한 삶이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삶과 같아서 동질감을 느낌. 네루다의 유명한 여성 편력이 고독과 가난의 산물이라면 반독재, 반제국주의 등 좌파적 성향은 이러한 현실 세계의 체험에서 유래함.

 1929년 인도 캘커타에서 개최된 범힌두교 회의에 참석. 네루와 면담.    

 1930년 자카르타(당시 네델란드령 서인도제도의 수도)주재 영사. 이곳에서 마리아 안또니에따(Mar a Antonieta Hagenaar Vogelzanz)와 사랑에 빠져 12월 결혼. 이 여자는 네델란드 출신으로 스페인어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음.

 1931년 싱가포르 주재 영사.

 1932년 두 달간의 여행 끝에 귀국.

 1933년 그동안 발표했던 시를 모아 1월에는 『열심히 돌을 던지는 사람』(El hondero entusiasta)을 출판하고 4월에는 또 하나의 명시집 『지상의 거처 (1925-1931)』(Residencia en la tierra)를 발간. 초현실주의의 영향은 받은 이 시집은 전통적인 리듬과 시형식을 거부하고 문장 구조마져 파괴한 실험적인 작품. 네루다는 이러한 형식을 통해 무질서, 부패, 소외, 불안을 표현하려고 함. 8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영사로 부임. 그 때 남아메리카를 여행하던 스페인 시인이자 극작가 페데리꼬 가르시아 로르까(Federico Garc a Lorca)와 친분을 맺음. 이후 가르시아 로르까는 네루다의 시를 소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

 1934년 5월 스페인 바르셀로나 영사로 임명. 10월 마드리드에서 딸 말바 마리나(Malva Marina) 출생. 12월 6일 가르시아 로르까의 주선으로 마드리드 대학에서 시 낭송회개최.

 1935년 2월 마드리드 주재 영사로 부임. 라파엘 알베르띠(Rafael Alberti), 미겔 에르난데스(Miguel Hern ndez) 같은 스페인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공산당에 가입. 4월 『스페인 시인들이 빠블로 네루다에게 바치는 시집』이 출판됨. 네루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스페인 바로크 시인 께베도(Quvedo)의 시집 『죽음의 소네트』(Sonetos de la muerte)와 비야메디아나(Villamediana) 백작의 시집이 호화 양장판으로 출판됨. 9월 『지상의 거처』(1925-1935)를 두 권으로 발간.

 1936년 7월 18일 스페인 내전 발발. 네루다는 공개적으로 공화파를 지지함. 수많은 시인, 작가, 문인들 또한 공화파를 위해 투쟁. 8월 프랑코(Franco) 장군 지지파는 그라나다에서 가르시아 로르까를 암살함. 폭격으로 마드리드 영사관 폐쇄. 네루다는 파리로 건너가서 낸시 큐나드(Nancy Cunard)와 함께 잡지 《세계의 시인들은 스페인 민중을 지지한다》(Los poetas del mundo defienden al pueblo espa ol) 발간. 마리아 안또니에따와 결별. 아르헨티나 출신의 델리아 델 까릴(Delia del Carril)을 만나 결혼.

 1937년 4월 세사르 바예호(C sar Vallejo)와 함께 〈대스페인 원조 중남미 단체〉(Grupo Hispanoamericano a Ayuda a Espa a) 설립. 10월 칠레로 귀국하여 〈문화 창달을 위한 칠레 지식인동맹〉창설. 11월 시집 『가슴 속의 스페인』(Espa a en el coraz n) 발표.

 1938년 〈스페인 공화국 지지 작가회의〉가 스페인 현지에서 개최됨. 아버지와 양어머니 별세. 8월 잡지 《칠레의 여명》(Aurora de Chile) 주간. 10월 칠레 인민전선(Frente Popular) 후보 뻬드로 아기레 세르다(Pedro Aguirre Cerda)가 대통령에 피선되자 모임을 개최하고 행사시를 낭송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지원. 바르셀로나 전선에서 마누에르 알똘라기레(Manuer Altolaguirre)가 『가슴 속의 스페인』을 발간. 공화파 군인들은 이 시집을 읽고 가슴이 에이고 목이 메었다고 함.

 1939년 파리에 본부를 둔 스페인 망명단체 특별 영사로 임명. 연말에는 스페인 망명자들과 함께 위니펙(Winnipeg) 호에 승선, 칠레를 향해 출발.

 1940년 1월 2일 칠레 도착. 스페인 비평가  아마도 알론소(Amado Alonso)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빠블로 네루다의 시와 문체』(Poes a y estilo de Pablo Neruda) 출판. 이 에세이는 빠블로 네루다 연구의 고전. 8월 16일 멕시코 시티 주재 총영사로 부임. 환영 리셉션장에서 옥따비오 빠스(Octavio Paz)의 하얀 와이셔츠 깃을 붙들고 토를 달았던 일화는 유명함. 네루다는 이즈음 다음 세대를 이끌 시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중남미 대륙에 촉망받는 시인이 한 사람 있는데 안타깝게도 옥따비오 빠스"라고 대답. 빠스의 재능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하지만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게 유감이라는 뜻이다.

 1941년 멕시코 국립대학(UNAM)에서 『시몬 볼리바르에게 바치는 헌시』(Un canto para Bol bar) 출판. 이 작품은 훗날 『지상의 거처 3권』에 수록됨. 과테말라를 여행하면서 미겔 앙헬 아스뚜리아스를 사귐. 10월 멕시코 시티 근처의 꾸에르나바까에서 나치 추종자들에게 피습.

 1942년 4월 쿠바 여행. 시 「스탈린그라드 찬가」(Canto de amor a Stalingrado)를 포스터로 제작하여 멕시코 전역에 부착. 네델란드에 살던 딸 말바 마리나 사망.

 1943년 『칠레 총가요집』(Canto general de Chile)을 비매품으로 출판. 콜롬비아, 페루, 칠레에서 시선집이 출판. 2월 미국 뉴욕에서 개최된 집단 시 낭송회 아메리카의 목소리(La voz de las Am ricas)에 참석. 멕시코, 파나마, 콜롬비아, 페루를 거쳐 칠레로 귀국. 가는 곳마다 정부와 독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음. 페루의 꾸스꼬에 들러 마추피추(Macchu-Picchu) 유적을 둘러보고 깊이 감동함.

 1944년 산티아고 시문학상 수상. 뉴욕에서 비매품으로 시선집 발간.

 1945년 타라삐까(Tarapac ) 지역구 공화당 상원에 당선. 칠레 국가문학상 수상. 7월 8일 공산당 가입. 사웅파울루, 부에노스아이레스, 몬테비데오에서 시 낭송회와 강연회 개최. 9월 『마추피추 산정』(Alturas de Macchu-Picchu) 집필. 나중에 『총가요집』에 수록됨. 가브리엘라 미스뜨랄 노벨문학상 수상.

 1946년 1월 18일 멕시코 정부는 훈장(Orden Aguila Azteca)을 수여함. 칠레 대통령 선거전에서 가브리엘 곤살레스 비델라(Gabriel Gonz lez Videla) 후보진영의 홍보책임자로 임명됨. 체코슬로바키아, 네델란드, 미국, 브라질에서 시집이 번역, 출판됨. 12월 28일 법원은 빠블로 네루다로 개명을 선고함.   

 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로사다 출판사에서 『지상의 거처 3권』(Tercera residencia) 출판(이후 로사다 출판사는 네루다 시집을 도맡아 발간). 이 시집은 『분노와 아픔』Las furias y las penas, 『가슴 속의 스페인』를 비롯하여 여러 작품을 수록. 네루다의 정치적 성향이 잘 드러난 시집. 10월 4일부터 검열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발간되는 일간지 《엘나시오날》(El Nacional) 에 '만인에게 보내는 호소문'(Carta  ntima para millones de hombres)을 게재. 이 글에서 네루다는 좌파와 협약을 준수하지 않는 비델라 대통령을 비난함으로써 정치적 시련을 겪게됨.

 1948년 1월 6일 상원 연설. 이 연설문을 『나는 고발한다』(Yo acuso)라는 제목으로 출판. 2월 3일 대법원은 상원의원직 박탈. 2월 5일 체포영장 발급. 국내에 은신하면서 『총가요집』을 저술하고 대정부투쟁을 함. 런던에서 발행되는 잡지 《아담》(Adam)은 네루다 특집호를 발행.

 1949년 2월 24일 한밤중에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탈출. 배낭 속에는 『총가요집』 원고가 들어 있었음. 4월 25일 파리에서 개최된 제1차 세계 평화 당원 대회에 참석. 6월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하여 푸쉬킨 탄생 15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 7월 폴란드와 헝가리 방문. 8월 폴 엘뤼아르와 함께 멕시코를 방문했다가 병석에 누워 1연말까지 체류. 마띨데 우루띠아(Matilde Urrutia)와 재회. 독일, 중국, 체코, 덴마크, 미국, 소련, 쿠바, 과테말라, 멕시코, 콜롬비아, 아르헨티나에서 시집 출판.

 1950년 멕시코에서 『총가요집』(Canto general) 출판. 라틴아메리카의 자연과 역사, 스페인 식민지배로부터 해방과 자유와 사회정의를 위한 민중의 투쟁을 그린 대 서사시로 네루다의 대표작. 멕시코 벽화가 다비드 시께이로스와 디에고 리베라가 삽화를 그림. 칠레에서도 지하 출판됨. 과테말라를 방문, 정부와 의회의 지원 아래 시낭송회와 강연회를 개최. 이어 프라하와 파리 방문. 10월 파리에서 프랑스 판 『총가요집』 출판을 승인. 로마를 거쳐 뉴델리를 방문하여 네루를 만남. 힌두어와 뱅갈어 등으로 시집 출판. 11월 마띨데 울띠이와 함께 바르사바에서 개최된 제2차 세계 평화 동지대회에 참석. 11월 22일 「깨어나라 나뭇꾼아」(Que despierte el le ador)로 국제평화상 수상. 이 때 피카소도 이 상을 수상했음. 멕시코에서 『총가요집』 보급판 출판. 미국, 소련, 중국, 시리아, 팔레스타인,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인도, 스웨덴에서 시집 출판.

 1951년 이탈리아 전역을 순회하면서 로마, 밀라노, 제노바 등지에서 낭송회와 강연회 개최. 살바토레 콰지모도(Salvattore Quasimodo) 등을 주축으로 네루다 시세계에 대한 좌담회가 열림. 5월 모스크바 방문.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몽골을 거쳐 북경에 도착. 불가리아, 헝가리, 아일랜드, 베트남. 터키, 일본, 한국에서 시집 출판. 이디쉬어, 히브리어, 아랍어, 우즈베크어, 우크라이나어, 아르메니아어 등으로도 출판.

 1952년 이탈리아에 거주. 『포도와 바람』(Las uvas y el viento) 집필 시작. 『대장의 노래』(Los versos del Capit n)를 익명, 비매품으로 출판. 이 시집은 마띨데 우르띠아에게 바침. 8월 체포영장이 취소됨. 8월 13일 귀국. 국민들은 대대적인 환영행사로 대시인을 맞이함. 부와 명예를 얻은 네루다는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 영화 〈일포스티노〉의 원작 소설 『빠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의 무대)에 별장을 건축. 12월 국제평화상 심사위원 자격으로 모스크바 방문.

 1953년 소련에서 귀국한 후 4월에는 산티아고에서 라틴아메리카 대륙 문화회의(Congreso Continental de la Cultura)를 개최. 디에고 리베라, 니콜라스 기옌, 조르쥬 아마두 등 쟁쟁한 인사들이 참석함. 산티아고에서 시선집 『모든 사랑』(Todo el amor)와 『정치시』(Poes a Pol tica) 출판.

 1954년 1월 칠레 대학교에서 5회에 걸친 강연회 개최. 7월 『일상적인 송가』(Odas elementales)와 『포도와 바람』 출판. 7월 12일 탄생 50주년 기념행사가 대규모로 열리고 전세계의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참여하여 축하함. 칠레대학교에 장서를 기증. 칠레대학교는 네루다 재단을 후원하기로 약속함. 페르낭 레게의 삽화가 든 프랑스판 『총가요집』 출판.

 1955년 델리아 델 까릴(Delia del Carril)과 이혼. 마띨데 우르띠아를 데리고 산띠아고에 새로 성주한 집(저택명 La Chascona)으로 이사. 년 3회 발행되는《칠레 소식》지 창간. 강연문등을 수록한 산문집 『여행』(Viajes) 출판.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 여행. 이탈리아, 프랑스, 브라질, 우루과이를 거쳐 아르헨티나 꼬르도바 지방에서 잠시 체류.

 1956년 1월 『신 일상적인 송가』(Nuevas odas elementales) 출판. 2월 귀국. 9월 『인쇄술에 바치는 송가』(Oda a la tipograf a) 출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위대한 대양』(El gran oc ano) 출판.

 1957년 1월 『전집』 발간. 4월 1일 아르헨티나로 여행. 4월 11일 아르헨티나 당국은 시인을 체포하여 하루 반나절 동안 감금. 칠레 영사의 항의로 석방. 네루다는 시낭송회를 포기하고 아르헨티나를 출국. 랑군 등 동양을 방문. 칠레 작가협회 회장에 피선. 12월 『송가 3집』(Tercer libro de las odas) 출판.

 1958년 칠레 대통령 선거전에 참여. 8월 『에스뜨라바가리오』(Estravagario) 출판. 이 책에서 전 해 동양을 방문했던 인상이 투영됨.

 1959년 5개월에 걸쳐 베네수엘라 여행. 카라카스 주재 쿠바 대사관에서 피델 까스뜨로(Fidel Castro)를 만남. 11월 송가집 『항해 그리고 귀환』(Navegaciones y regresos) 출판. 12월 마띨데에게 바치는 시집 『사랑의 소네트 100편』(Cien sonetos de amor)를 비매품으로 출판.

 1960년 4월 12일 유럽으로 향하는 선상에서 『무훈 찬가』(Canci n de gesta) 탈고. 소련과 동구권을 거쳐 파리에서 한동안 체류. 피카소는 프랑스어판 시집에 동판화를 그려줌. 이탈리아에서 쿠바행 배에 승선. 아바나에서 쿠바 혁명을 축하하는 시집 『무훈 찬가』 1만 2천부 인쇄.

 1961년 2월 귀국. 7월 『칠레의 돌』(Las piedras de Chile) 출판. 10월 『행사시』(Cantos ceremoniales) 출판. 예일대학교 로망스어 연구소 비상근 회원으로 임명됨. 『스무 편의 사랑의 노래...』 백만부 재판. 미국에서 『네루다 시선집』(Selected Poems of Pablo Neruda) 출판.

 1962년 3월 칠레대학교 문과대학 교수로 임명. 니까노르 빠라가 환영 연설을 함. 이 연설은 『네루다와 빠라의 연설문』(Discursos de Pablo Neruda y Nicanor Parra)으로 출판됨. 4월 출국하여 소련, 불가리아, 이탈리아, 프랑스를 여행. 9월 『충만한 힘』(Plenos poderes) 출판. 여행에서 돌아온 네루다는 발빠라이소(Valpara so) 소재의 저택으로 직행.

 1963년 이탈리아에서 『요약』(Sumario) 출판. 이 책은 나중에 『이슬라 네그라의 추억』에 포함됨. 스웨덴 한림원 회원 룬트크비스트(Arthur Lundkvist) 는 「네루다」라는 긴 논문을 발표. 노벨문학상이 가까워졌음을 예고.

 1964년 칠레 국립도서관 주최로 탄생 60주년 기념행사가 열림. 7월 『이슬라 네그라의 추억』(Memorial de Isla Negra) 5권 발간. 9월 세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 번역 출판. 네루다는 칠레 전역을 다니며 대통령 선거전에 열중함.

 1965년 2월 유럽 여행. 6월 옥스포드대학교는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 파리를 거쳐 헝가리로 여행. 헝가리에서 아스뚜리아스(Miguel Angel Asturias)와 공동으로 『헝가리에서 식사하며』(Comiendo en Hungr a) 집필. 유고슬라비아 블레드에서 열린 펜클럽 회의에 참석. 레닌상 심사위원 자격으로 소련방문, 스페인 시인 라파엘 알베르띠(Rafael Alberti) 수상. 12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쳐 귀국.

 1966년 6월 펜클럽 특별 초청인사 자격으로 미국 방문. 뉴욕, 워싱턴, 버클리에서 시낭송회 개최. 멕시코와 페루에서도 시낭송회 개최. 페루 문인협회의 추천을 받은 페루 정부는 훈장(Sol del Per )을 수여. 10월 외국에서 식을 올린 마띨데 우르띠아와 결혼이 합법화됨.

 1967년 유럽 여행. 이탈리아에서 비아레죠(Viareggio) 국제문학상 수상. 극형식의 칸타타 『호아낀 무리에따의 치열한 생애』(Fulgor y muerte de Joaquin Murieta) 출판. 이 작품은 이 해 산티아고에서 초연됨.

 1968년 『한낮의 손』(Las manos del d a)출판. 2월 우루과이 방문 강연회 개최. 4월 프랑스 정부는 퀴리(Joliot-Curie) 훈장 수여. 미국 문학예술 아카데미 명예회원으로 임명됨.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대학에서 낭송회 개최. 귀국. 잡지 《에르시야》(Ercilla)에 칼럼 기고.

 1969년 부다페스트와 바르셀로나에서 『헝가리에서 식사하며』 동시 출판. 5개국어로 번역됨. 『세상의 끝』(Fin de mundo) 출판. 5월 칠레 어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임명. 킬레 카톨릭대학은 명예박사학위 수여. 칠레 상원은 훈장(은메달) 수여. 7월 3일 칠레 공산당 대통령 예비후보로 지명됨.

 1970년 민중연합 단일 후보로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박사를 추천하고 대통령 후보 사퇴. 유럽 여행. 소르본느 대학에서 강연회 개최. 『불타는 칼』(La espada encendida)과 『해양 지진』(Maremoto) 그리고 『하늘의 돌』(Las piedras del cielo) 출판.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아예데 대통령은 파리 주재 칠레 대사로 임명. 아옌데 정권은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집권한 공산 정부.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지성인들은 1960년 쿠바 혁명과 더불어 아옌데 정권의 등장에서 서구의 제국주의적 지배와 간섭으로부터 라틴아메리카가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적극적으로 지원함. 한편, 남미의 도미노 현상을 우려한 미국은 경제봉쇄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아옌데 정권의 붕괴를 시도함.

 1971년 1월 7일 빠스꾸아 섬(Isla de Pascua) 여행. 칠레 텔레비젼방송국은 도큐멘터리로 촬영. 1월 21일 칠레 상원 프랑스 대사직 승인. 3월 파리로 부임. 10월 21일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 12월 13일 노벨문학상 수상. 네루다는 수상 연설에서 1949년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를 탈출할 때 도와주었던 사람들을 추억하고 기림. 그러나 스톡홀름에서 병이 깊어져 침대에 누운채 귀국.

 1972년 소련 방문. 『무익한 지도』(Geograf a infructuosa) 출판. 10월 유네스코 집행위원으로 선임. 암으로 투병하던 네루다는 두 차례에 걸친 수술을 받고 귀국. 국립경기장에서 대규모 환영행사가 열림.

 1973년 네루다는 이슬라 네그라에서 투병생활. 아예데 대통령이 이슬라 네그라를 방문하려고 준비하던 2월 5일 파리 대사직 사임. 2월 『닉슨 암살 선동과 칠레 혁명 만세』(Incitaci n al nixonicidio y alabanza de la revoluci n chilena) 출판. 9월 11일 피노체트 장군은 미국을 등에 업고 군부 쿠데타를 일으킴. 대통령 관저(일명 모네다 궁)에서 저항하던 아옌데 대통령은 치열한 공방전 끝에 피살됨. 이날 산띠아고는 맑은 날이었으나 어느 라디오 방송은 "산띠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멘트로 쿠데타 사실을 간접적으로 타전했다고 함. 네루다, 9월 23일 산따 마리아 병원에서 영면.

 1974년 『회고록』(Confieso que he vivido)이 사후 출판됨. 『노란 심장』(Coraz n amarrillo), 『질문』(Libros de las preguntas), 『비가』(Eglogas), 『간추린 결점』(Defectos escogidas) 출판. 『스무 편의 사랑의 시...』의 모델이 되었던 알베르띠나 로사 아소까르(Abertina Rosa Az car)와 네루다 사이에 오간 편지가 『빠블로 네루다의 연애편지』(Cartas de amor de Pablo Neruda)라는 제목으로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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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라는 말 속에 숨겨진 무책임성

 

 오늘 저는 교회에서 한 모임을 가졌는데 사람들의 말 속에서 '은혜'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단어를 계속해서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어찌나 저에게 언어폭력으로 다가오던지요. 사람들은 자신의 지난 일들을 회상하면서 자신이 잘못한 것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지 못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이렇게 인도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연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성스러운 언어로 자신들의 무책임성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에서 소위 개혁주의 적인 '은혜'는, 카톨릭의 비인간적 폭력성과 비성경적 구원론에 맞서 싸우며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자세(ad fontes)'라기 보다 차라리 자신의 오류와 불성실함을 합리화시키는 소위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합리화', '자기 방어'기제의 전형 같습니다. 한국교회 대부분의 성도들은 은혜와 심리적 방어기제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위를 은혜라고 간증하며 자신의 무책임함과 불성실함을 반성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본회퍼가 당시 개신교를 향해 비판했던 '값싼 은혜'의 모습이 이런 것이  아닐는지요.

 "값싼은혜는 하나님의 산 말씀의 부정이며 하나님 말씀이 사람 되셨다는 것에 대한 부정이다. 값싼은혜는 죄의 의인(義認)이요 죄인의 의인이 아니라 했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본회퍼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는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지 그것을 은혜라는 거룩한 말로 포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철저히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해주시는 은혜를 사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은혜가 아닙니까?

 요즘들어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호이징가는 '중세의 가을'에서 중세 시대를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종교적 개념들과 형식들로 포화 상태가 되어 질릴 대로 질려버린 삶 속에서 결정적으로 결핍된 것은 종교적 긴장감이다."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마치 중세시대를 보는 것 같습니다. 호이징가의 말처럼 종교적 개념들과 형식들로 가득찼지만 종교적 긴장감은 없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분들의 순교자적 자세를 본받자고 입술로는 부르짖지만 그분들의 종교적 개념들과 형식들만 억지로 가지고 왔지 그분들이 추구했던 신앙의 본질인 '순교자적 제자도'는 철저하게 지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삶에 긴장감 없이 종교적인 껍데기로만 사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변해야 합니다. 더이상 값싼 은혜보다 귀중한 은혜를 종교적 개념들과 형식을 추구하기 보다 신앙의 본질을 찾아가는 구도자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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