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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봄

프라하는 봄이었다

                                       - 정운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

 국경을 넘어 밤새 달려온 기차가 프라하 중앙역에 이르렀다. 카프카의 게토, 스메타나의 조국 체크에 도착한 것이다. 미명의 적막에서 나를 깨운 것은 작가와 음악가가 아니라 예전 체코슬로바키아 시절의 한 정치인과 한 경제학자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들을 불러낸 호출 부호는 단연 혁명이고, 그들 모두 혁명의 보헤미안이었다. 보헤미아는 기원전 이곳을 정복하고 다스린 민족으로 지금은 이 지역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프라하는 봄이었다. 1968년에는 ‘프라하의 봄’이 있었다. 서구에서 타오른 68혁명의 봉화는 부패한 자본주의 문명을 성토했고, 중국 대륙을 휩쓴 문화혁명은 주자(走資)로의 탈선을 고발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경직된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과녁이었다. 카프카의 복권으로 개시된 60년대 해빙기에 작가 밀란 쿤데라, 영화감독 밀로시 포르만 등 문화계 지식인이 저항의 불씨를 지폈다. 불길은 공산당에서도 올랐는데, 47세로 제1서기에 오른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주역이었다. 그는 구체제를 개혁하고, 당과 사회의 민주화를 정력적으로 추진했다. 의회제도 확립, 정당 정치 부활, 법에 의한 재판, 사전 검열 폐지 등 그의 민주주의 상식 실험을 흔히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문제는 ‘야수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의 역공이었다. 이해 8월 소련 탱크를 앞세운 바르샤바 동맹군 50만명이 체코슬로바키아에 진주했다. 프라하의 성지 바츨라프-영어로는 윈체슬라스-광장은 점령군과 시위대의 격돌로 피를 뿌렸고, 외국군 장갑차와 대포가 공산당 중앙위원회 청사를 겨눈 가운데 둡체크를 비롯한 개혁 지도부는 모스크바로 압송된다. 뒤따른 고문․투옥․유배․숙청 등 ‘사회 정화’의 미친 바람 속에 프라하의 봄은 여지없이 뭉개졌다. 프랑스의 코스타-가브라스 감독은 당시의 고통과 좌절을 영화 ‘고백’으로 만들었는데 취조가-배후의 권력이-얼마나 간악하며 사람의 육체가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를 현실보다도 ‘리얼한’ 이브 몽탕의 연기로 모골이 송연하도록 그려냈다.

 이해 11월 소련은 소위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천명한다. 한 사회주의 국가의 행동으로 주변국 생존이 위험할 경우 이를 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위협으로 간주해 주권을 제한할-무력으로 개입할-권리가 있다는 희한한 주장이다.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를 ‘살해하고’ 급조한 명분이었다. 프라하 시위대의 구호대로 “레닌이 깨어나 브레즈네프가 미쳐버린” 것일까? 이듬해 공산당에서 제명된 둡체크는 잠시 터키 대사로 유배됐다가 슬로바키아 지방의 산림 감시원으로 목숨을 부지한다. 새 권부는 반혁명을 물리치고 ‘정상화’를 되찾았다면서, 봄을 빼앗은 대신 빵을 늘리는 ‘실질적 사회주의’ 건설을 약속했다.

 자유란 참 묘한 것이어서 한번 맛들이면 좀처럼 끊기 어렵다. 바츨라프 하벨을 위시한 민주화 인사들은 작품과 무대에서 줄곧 프라하의 봄을 풀무질했고, 스웨덴 한림원은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줌으로써 잊혀진 봄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과 연대를 부추겼다. 나치의 학생 학살 50주년 기념일을 맞아 대학이 휴업과 시위를 결정한 89년 11월 체코슬로바키아 민중은 공산당 체제에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에 극장들도 동조했는데 이것이 '벨벳 혁명'의 발단이었다. 혁명은 거리의 폭력이 아닌 극장의 우단 의자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벨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둡체크는 연방의회 의장으로 복귀했다. 봄에서 벨벳으로! 20년 방랑 끝의 멋진 복수였다.

 프라하를 보려거든 동구의 물이 빠지기 전에 보라고 했다. 그러나 홈쇼핑 채널의 비만 치료제 선전에서 역전 광장의 섹스숍까지 도처에 서구의 물이 찰랑거렸다. 개나리와 진달래만 피라는 봄은 아니니까…. 체크의 젖줄 블타바-몰다우-강을 가로지르는 카를루프 모스트-찰스 브리지-는 정재와 미연의 10년 사랑이 이뤄지는 커피 광고의 배경이 된다. 둡체크의 공관은 지금 한국 대사의 관저로 쓰인다. 혹시 최고 권력자의 상징이나 흔적이 있더냐는 질문에 L대사는 “전혀 없어요. 검소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경제학자 얘기는 뒷날로 미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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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발코니에 앉아...

나는 발코니에 앉아...
Ich sitze auf einem Balkon...



나는 소피아의 어느 발코니에 앉아 아내를 기다린다, 맞은 편에는 어느 죽은 자의 이름을 딴 공장의 네온사인. 사회주의 혁명 조국은, 그는 그 이름으로 죽임을 당했으나, 그에게 그의 이름을 되돌려 주었다. 그 공장은 화력발전소, 그것이 도시를 덥힌다. 트라이쵸 코스토프의 경우와 관련해 문장들이 떠오른다. 나는 다른 경우들도 알고 있다, 이름들은 교체 가능하다. 사회주의 혁명 조국이 제 자식을 잡아먹는다. 민중은 나와 사회주의 혁명이 잠자길 원치 않았으므로, 그것이 자본주의와 음탕한 짓거릴 한 이후로, 그것은 까다로운 입맛을 갖게 되었다. “그 때 우리는 그래도 알고 있었지 / 저질에 대한 증오가 또한 / 얼굴을 일그러뜨리게 만들고 / 부당함에 대한 분노 또한 / 목이 쉬게 만든다”. 낡아 버린 브레히트의 비장하게 긴장된 시구는 오늘 날 얼마나 억지처럼 들리는가. 아침나절 억지로 태반을 삼킬 때 나무에 대한 대화가 끊긴다. 테러의 기능으로서의 변증법, 계모의 철신발을 신고 화산 위에서의 춤. 목소리는 울부짖음이 되어 버렸고 얼굴 표정은 알 수가 없다, 등등. 네 시간 전부터 기다렸던 아내에 대해선 떠오르는 문장이 하나도 없다. 나에겐 사랑을 위한 언어가 없다. 능욕 당한 자의 언어는 폭력, 마치 도둑질이 빈곤한 자의 언어이고 살인이 죽은 자의 언어이듯. 나는 식민화된 존재, 회백색 광대분장 아래 (내 피부는) 검게. 나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쓸 빚이 있다, 새해 안부편지를. 나는 그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두 결혼 사이에서, 어느 새해 아침, 베를린의 어느 발코니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희망이자 실망이었던 그 국가를 떠난 지 3, 4, 5년 간.
3년 동안 나는 새해편지 쓰기를 시작하고 그만두길 계속했다. 그리고 또 다시 그만두고 싶다, 내 목소리를 거두어들이고, 나의 맨 얼굴을 (닫혀진) 울타리 뒤로, 문학의 면갑 뒤로, 드라마의 기계 속으로 되가져 가고 싶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내가 어디로 갈 것인지, 내가 누구인지 난 알고 싶지 않다, 밖에서는 현실이 일어난다. 편지가 쓰여지든, 쓰여지지 않든, 그것은 읽혀지지 않을 것이다, 수취인은 주소불명으로 이사를 가 버렸다 : 죽음 속으로. 아내가 오더라도, 난 내가 아내를 기다렸노라 말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가 버렸다 시계들이 / 내 심장을 친다 너는 / 언제 올 것인가”
다른 기다림의 시간을 기억하며, 베를린 소소폴 소피아에서, 다른 도시에서 내가 기다렸던 다른 여자들에 대한 생각, A에서 욕정으로 몸을 떨며, G에서는 자기연민에 울부짖으며 운율에 도달하지 못하는 너의 가슴. 드라마의 기계, 그것의 언어는 내게 가해졌던, 그리고 가해질, 그리고 내가 가할, 그리고 내게 속하지 않는 내 언어로 다시금 가할 수 있는 테러.
자기연민에 울부짖으며 “어제 / 난 나의 심장 너를 죽이기 / 시작했다 / 지금 난 / 너의 시체를 사랑한다 / 내가 죽으면 / 나의 먼지는 너를 향해 소리지르리”
(1977)

하이너 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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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쿠스

[스파르타쿠스] 인간해방, 노예들의 드라마!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혁명가1 - 스파르타쿠스]
 

로마 지배계급을 공포에 떨게 한 검투 노예들의 무장봉기… 그 정점에서 빛나는 스파르타쿠스의 전설

▣ 오귀환/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더러운 로마놈들아, 너희들은 인간의 모든 꿈과, 인간의 손에 의한 모든 노동과, 인간의 이마에 맺힌 모든 땀을 조롱하고 있다. …너희들은 살인을 위한 살인을 하고, 취미라곤 유혈의 검투를 관람하는 것뿐이다. …너희들의 화려한 그 생활은 전세계에서 강도질한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이젠 끝장이다. 전세계의 노예들에게 우리는 외칠 것이다. 일어나라! 쇠사슬을 풀어버려라!” (하워드 파스트, <스파르타쿠스>에서)

검투 노예 봉기, 70여명으로 시작하다

기원전 73년 여름,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정복하고 부와 영광으로 흥청대고 있을 때 검투 노예들이 카푸아에서 탈출해 무장 폭동을 일으킨다. 70여명으로 시작한 검투 노예의 이 봉기는 곧 수많은 노예들이 가세하면서 수만명 규모로 커진다. 그들은 중부에서 북부의 알프스까지 치고 올라가서 다시 남부의 땅끝 항구 레기움까지 전진하는 등 2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휩쓸었다. 자유와 해방을 외치는 그들의 분노 앞에 로마는 연전연패하면서 공포에 떨어야 했다. 고대 세계를 뒤흔든 이 검투 노예들의 투쟁은 그 지도자의 이름을 따 이렇게 기록됐다. ‘스파르타쿠스 노예전쟁’ (The Spartacus Slave War).

노예제를 운용했다는 점에서 인간은 영원히 죄악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을 일하는 가축처럼, 마음대로 죽이고 살릴 수 있는 동물처럼, 움직일 수 있는 소유물처럼, 사고팔 수 있는 동산의 재산처럼 간주하고 취급하던 죽음과 죄악의 시대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런 식으로 번영을 누린 나라들이 지금도 세상에서 큰소리를 치고 있다. 그게 현실이다. 본격적인 노예무역을 대대적으로 벌인 네덜란드와 영국, 아메리카 대륙에서 인간을 살육하고 노예로 만드는 데 혈안이 된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흑인 노예를 19세기 후반까지 활용했던 미국…. 이런 압제 앞에서 인간이 인간다움을 증명하기 위해 궐기하곤 했다. 그 시발점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로마의 지배계급을 겨냥해 무장봉기를 일으킨 노예들이다. 그 가장 빛나는 정점에 스파르타쿠스의 노예전쟁이 있다.


△ 영화 <스팔타쿠스>의 전투장면. 노예들은 위대하게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고 죽어간다. (사진/ Rex Features)

역사적으로 스파르타쿠스의 노예전쟁은 로마 시대에 벌어진 대규모 노예전쟁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자 세 번째의 것이다. 그에 앞서 두 노예전쟁은 시칠리아에서 일어났다. 첫 번째 시칠리아 노예전쟁은 기원전 135년에서 132년까지 계속됐고, 두 번째 노예전쟁은 기원전 104년부터 102년까지 이어졌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첫 번째 전쟁은 에우누스와 클레온이라는 이름의 시리아(또는 중동) 출신 노예들이, 두 번째 전쟁은 아테니온과 살비우스라는 시칠리아 출신 노예들이 지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로마에서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에 이르는 약 70년 동안 30여년 주기로 세 번씩이나 노예전쟁이 잇따라 벌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당시 광범한 농업노예제도가 정착하면서 무자비하고 가혹한 억압·수탈 체계를 노예들에게 종신토록 강제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노예들의 반발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이런 가혹한 체제와 달리 노예가 되는 사람들은 한때 자유롭게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다수였다. 새로운 정복지에서 전쟁포로로 잡히거나 로마 지배 지역에서 정치적 혼란이나 범법에 따라 갑자기 노예로 전락한 사람이 많았다. 자유를 아는 사람들이 마침내 떨쳐일어날 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셋째, 시칠리아 등 변경에 새로운 경작지가 조성되면서 반농·반목축 형태의 독특한 노예들이 크게 늘어났다. 환금작물을 집중적으로 재배하는 라티푼티움 지대에서는 농업노예를 엄격한 감시 아래 노역을 시키고 밤에는 쇠사슬을 채워 재우는 데 반해, 변경의 노예들은 상대적으로 이동도 자유롭고 상황에 따라선 가축을 보호하기 위해 가벼운 무장도 해야 했다. 기동성과 무장 가능성이 뛰어났던 셈이다. 시칠리아에서 두 차례 노예전쟁이 벌어진 것은 이런 배경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알프스 돌파’를 목표로 삼았으나…

스파르타쿠스에 대해선 <영웅전>으로 유명한 플루타크와 <로마내전사>를 쓴 그리스 출신의 아피안 등 역사학자들에 의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그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본다.


△ 19세기 지오바뇰리의 소설 <스파르타코>의 삽화에 나타난 스파르타쿠스. 영화와 달리 스파르타쿠스가 동료 크릭수스를 구하는 것으로 돼 있다.

로마 검투 노예의 중심지인 중부 카푸아의 한 검투 노예 양성소에서 주로 골인(Gauls·오늘날 프랑스 지역 사람들)과 트라키아인(그리스 북동부 변경지대 출신 사람들)으로 이뤄진 검투 노예 70여명이 탈주한다. 다른 검투 노예 양성소로 무기를 싣고 가던 마차 행렬을 털고 무장한 노예들은 산속에 거점을 마련한다. 그들의 지도자 세명 가운데에는 트라키아 목부 출신으로 강인한 정신력과 뛰어난 체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지적이고 고결한 성품을 지닌 스파르타쿠스도 있었다. 로마에서 행정관인 클로디우스가 병력 3천명과 함께 진압군으로 파견된다. 클로디우스는 노예들이 진을 친 험준한 산에서 내려오는 유일한 길목에 전진 기지를 세웠다. 스파르타쿠스는 산에 자생하는 식물의 넝쿨을 이어 튼튼한 밧줄 사다리를 만들어 병력을 비밀리에 내려보낸 다음 로마군을 기습해 대승을 거둔다. 이 승리를 계기로 주변에 있던 목축 노예들과 농업 노예들이 대거 노예군에 합류한다. 두 번째로 다시 행정관인 프블리우스 바리니우스가 진압군 사령관으로 파견된다. 스파르타쿠스는 바리니우스의 부관으로 2천 병력을 이끄는 푸리우스와 격돌해 그들을 물리치고 여세를 몰아 로마 진압군의 진지를 유린해버린다. 이 전투에서 바리니우스의 부관인 코시니우스를 죽이고 그의 말도 빼앗는 것을 계기로, 로마 전역에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이 퍼짐에 따라 로마인들은 공포에 떨기 시작한다.

이 단계에서 스파르타쿠스는 자신들이 로마에 대해 군사적으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알프스 돌파를 목표로 삼는다. 알프스를 넘어 각각 골과 트라키아, 게르마니아 등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다수의 추종자들에 의해 거부된다. 결국 스파르타쿠스는 알프스 돌파를 저지하려는 로마 키살핀 골 총독 카시우스의 1만 병력을 패퇴시켰는데도 알프스를 넘지 못한다. 노예군 진영에 가담한 엄청난 머릿수에 도취한 노예들은 스파르타쿠스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탈리아 전역으로 흩어져 약탈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 로마 검투경기를 묘사한 2세기 무렵의 모자이크. 리비아 트리폴리 고고학 박물관 소장.

로마 원로원은 이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노예들의 봉기를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집정관을 두명이나 파견한다. 그 가운데 한명인 겔리우스 프블리콜라는 스파르타쿠스 주력군에서 이탈한 게르만 노예군을 기습한다. 게르만군은 자신감에 가득 차 스파르타쿠스의 통제로부터 독립한 상태였다. 게르만군은 대패하고 노예군은 살육된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건재했다. 또 다른 집정관인 렌툴루스가 대규모 야전군으로 포위하자 스파르타쿠스는 반격에 나서 렌툴루스를 향해 돌진했다.

페텔리아 산속에서 최후를 맞다

치열한 전투 끝에 스파르타쿠스군은 로마군을 물리치고 막대한 병참 물자를 노획한다. 로마 원로원은 이 패전 소식에 분격해 두 집정관에게 작전을 중단하라고 명령하고, 크라수스를 노예전쟁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많은 로마의 귀족들이 전쟁 수칙에 따라 크라수스의 진압군에 가담한다. 크라수스는 일단 로마 방어에 주력하는 한편, 스파르타쿠스 후방에 있는 무미우스에게 2개 군단을 둥글게 배치해 스파르타쿠스를 지속적으로 포위하는 진형만을 유지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무미우스는 이 명령을 어기고 스파르타쿠스와의 전투에 돌입해 대패하고 만다. 많은 로마군들이 죽고, 전장에서 꽁지가 빠져라 하고 달아난다. 크라수스는 이 패전 뒤 오랫동안 전혀 시행하지 않았다는 고대 로마의 무시무시한 의식을 재현한다. 전장에서 맨 먼저 도망친 군인 500명을 10명씩 50개 그룹으로 나눈 뒤 징벌로써 각 그룹에서 한명씩 제비를 뽑아 죽이게 한 것이다. ‘데시마시용’(10분의 1씩 죽이는 것)이 벌어진 것이다. 이 참혹한 처벌을 모든 병사들이 똑똑히 지켜보게 만들었다.


△ 서기 1세기 무렵 로마 폼페이에 있던 검투 노예 양성소 막사. 마당은 훈련장이다.

이 무렵 스파르타쿠스는 남쪽을 향해 전진하면서 바다를 통해 해외로 탈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는 남쪽 땅끝 레기움까지 가서 배로 시칠리아로 건너가기 위해 해적들과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해적들은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바다로 달아나버린다. 그사이 크라수스의 로마군은 남쪽까지 쫓아내려와 노예군의 전진을 막기 위해 어마어마한 장벽 구축 작업에 돌입한다. 폭 4.5m, 깊이 4.5m 되는 도랑을 동쪽 바다 끝에서 서쪽 바다 끝까지 약 50km 거리에 걸쳐 판 뒤 다시 그 뒤에 높은 장벽을 견고하게 쌓은 것이다. 처음에 이 장벽을 대수롭게 보지 않던 스파르타쿠스는 보급물자가 바닥나면서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자신들이 바다와 장벽에 섬처럼 갇힌 채 겨울에 내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는 전면 공격에 나섰으나 병력의 3분의 1만 장벽을 돌파할 수 있었다. 결국 크라수스 군대의 공세에 맞서 노예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패배한다. 스파르타쿠스와 분리된 노예주력군은 모두 1만2300명이 살육당하는 패배를 겪는다. 크라수스는 전투 뒤 노예군 가운데 단 2명만이 등쪽에 치명상을 입고 죽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머지는 모두 도망치지 않고 정면에서 로마군에 맞서 싸우다 죽어간 것이다.

한편 동쪽 항구 브린디시움을 향해 가던 스파르타쿠스는 외국에 주둔하던 로마군이 이 항구를 통해 이미 상륙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양쪽에서 협공을 받게 된 그는 어쩔 수 없이 병력을 이끌고 크라수스의 주력군과 대혈전을 벌인다. 이 전투 뒤 스파르타쿠스는 페텔리아 산속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추격해온 로마군과 싸우다 숨진다.

스파르타쿠스는 죽었다. 그러나 인간해방을 위해 무장봉기한 그의 이름은 2천여년이 지난 지금도 인류에게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고대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


△ 마르크스. 그를 시작으로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는 모두 스파르타쿠스를 열렬하게 존경했다. (사진/ GAMMA)

1865년 칼 마르크스는 숙제를 하는 딸 제니로부터 ‘영웅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스파르타쿠스’와 ‘케플러’라고 대답한다. 스파르타쿠스를 마르크스가 주목한 것은 당시 벌어지고 있는 2가지 사건 때문이다. 하나는 외국의 간섭 아래 있던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를 해방시키려는 낭만적 애국주의자 주세페 가리발디의 투쟁에 대한 열광적 분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노예해방 문제를 놓고 벌어진 미국의 남북전쟁 소식이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쓴다.

“아피안의 <로마 내전사>를 그리스어 원문으로 읽었네. 매우 가치 있는 저술이야. …스파르타쿠스는 고대 역사를 통털어 가장 훌륭한 인물로 꼽힐 만하네. 위대한 장군(가리발디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이자 고결한 인물이며, 고대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야.”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의 유럽 사회주의 운동은 스파르타쿠스를 경제적 착취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편지에서 보인 스파르타쿠스에 관한 작은 힌트를 계급투쟁론으로 확대 발전시킨 것은 바로 레닌이다. 그는 이런 논지에 따라 로마 세계를 노예와 지배자 사이의 투쟁으로 특징지어지는 계급투쟁으로 정의한다. 레닌은 <국가>에 이렇게 쓴다.

“역사는 압제를 벗어던지려는 피압박 계급의 지속적인 시도로 채워져왔다. 노예제의 역사는 수십년 동안 지속된 노예해방 전쟁의 기록을 담고 있다. 현재 자본주의의 멍에에 대해 진정으로 투쟁하는 유일한 독일의 정당인 공산당이 ‘스파르타쿠스주의자’의 이름을 채용하고 있다. 독일 공산당은 가장 위대한 노예봉기(slave insurrections) 가운데 하나인 2천여년 전의 그 봉기에서 스파르타쿠스가 가장 걸출한 영웅 가운데 하나였기에 그 이름을 채용한 것이다. 전적으로 노예제에 기반한 채 오랜 세월 절대전능한 것만 같던 로마 제국은 스파르타쿠스의 지도하에 무장하고 단합해 거대한 군대로 변신한 노예들의 전국적인 봉기로 충격 상태에 빠지고 치명상을 입었다.”

그 뒤 소련 시대에 이르러 스탈린이 승인한 ‘단계이론’(stage theory)에 따라 로마의 노예 반란은 당대 계급 시스템의 지배를 전복시킨 러시아혁명이나 프랑스혁명과 같은 범주로 간주되기까지 한다. 역설적으로, 이런 국가 주도의 공산주의 이론작업에 따라 스파르타쿠스는 본래의 인간주의적 활력을 잃어버리는 손해를 본 측면도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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