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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9/27
    Anyone Of Us
    heesoo
  2. 2006/09/25
    낭비벽(2)
    heesoo
  3. 2006/09/20
    애정만세!
    heesoo
  4. 2006/09/16
    추진력
    heesoo
  5. 2006/09/11
    아카하타 먼슬리리뷰
    heesoo
  6. 2006/09/08
    ...(1)
    heesoo
  7. 2006/09/01
    프로복싱의 진화 혹은 멸종
    heesoo

Anyone Of Us

Anyone Of Us-Gareth Gates

 

I've been letting you down, down
(나는 당신을 실망시켰죠)
Girl I know I've been such a fool
(난 정말 바보였어요)
Giving in to temptation
When I should've played it cool
(좀더 잘 했어야 했을 때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어요)
The situation got out of hand
(이제 어쩔 수 없네요)
I hope you understand
(당신이 이해해 주길 바래요)


It can happen to..
Anyone of us, anyone you think of
(이런일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수 있죠)
Anyone can fall
(누구나 그럴수 있어요)
Anyone can hurt someone they love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아프게 할수 있어요)
Hearts will break
Cause I made a stupid mistake
(저의 바보 같은 실수에 가슴이 아파요)


It can happen to
Anyone of us, say you will forgive me
(이런일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죠, 용서해 주세요)
Anyone can fail
(누구나 실수할 수 있죠)
Say you will believe me
(나를 믿는다고 말해줘요)
I can't take my heart will break
Cause I made a stupid mistake
A stupid mistake
(바보 같은 실수로 제마음이 아픈걸 참을 수 없어요)

She was kind of exciting
(그녀는 좀 들떠있었죠)
A little crazy I should've known
(제가 알았어야 했는데)
She must have altered my senses
Cause I offered to walk her home
(내가 집에 데려다준다고 했을 때
그녀가 제 마음을 돌렸어야 했어요)
The situation got out of hand
(이제 어쩔 수 없네요)
I hope you understand
(당신이 이해해 주길 바래요)


A stupid mistake
(바보 같은 실수)
she means nothing to me
(nothing to me)
(그녀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I swear every word is true
(맹세코 모든 말이 사실이예요)
don't wanna lose you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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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벽

재능이 있다는 말은 대체로 그가 어떠한 일에 쏟아부은 노력과 시간,

즉 투입량보다 그것에 따른 성과-산출량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 

일이 제대로 안되는 것은 내가 그만큼 쏟아붓지 않고있기 때문.

 

사색은 두뇌를 단련시킨다고 했지만 사실은 헛된 낭비의 시간.

 

 

월출산에 가고 싶다.

억새밭에 머리를 내다버리고 몸만 올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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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만세!

마술처럼 신비스런 것은 필연이 아니고 우연이다.
사랑이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자면
처음 순간부터 우연들이 사랑 위에 내려앉아 있어야 한다.
마치 성자 프란스 폰 아시시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새들처럼.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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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진력

 '그는 항상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고민만을 가져갔다'

그것이 로베스피에르의 마라와의 차이점이고 마라가 문제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능력에서 훨씬 뛰어났지만 현실적인 추진력이 로베스피에르에게서 나온 이유라고 했다.


지난 행동들에 대한 반추라... 어떻게 하면 본질 논쟁으로 빠져들지 않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작업을 해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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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하타 먼슬리리뷰

 

세계의 진보매체 1. 아카하타(赤旗), 붉은 깃발

 

첫 번째 순서로는 최근 독도 문제로 우리와 사이가 삐그덕 거리고 있는 이웃 일본의 대표적 좌파 일간지 ‘아카하타(赤旗)‘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조중동이라는 별칭이 있듯, 일본에도 이른바 3대 일간지가 있는데 아사히, 요미우리, 산케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산케이는 뭐 조선일보의 자매 신문(--;;)으로 불리는 신문이고 미디어재벌이자 프로야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모회사인 요미우리 또한 머 오십보 백보입니다. 그나마 아사히가 자유주의적인 신문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아이구 아카하타 이야기 한다 해놓고 딴 신문들 이야기를 잠깐 했네요. 하여튼 이른바 일본의 삼대일간지에도 못미치고 니혼게이자이 같은 거대 신문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아카하타는 만만찮은 규모와 영향력을 자랑하는 신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아카하타는 일본 공산당의 기관지로 창간됐습니다만 편집권은 완전히 독립되어 움직이는 매체입니다. 한 때는 아카하타 구독료로 일본 공산당이 먹고 산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인기있는 신문이었구요. 최고 전성기라고 할 수있는 1980년에는 유료 정기구독자 수가 355만에 달했을 정도라고 하는 군요. 최근에는 많이 쪼그라 들어 200만도 안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만...


아카하타는 일본공산당이 창당한지 6년이 지난 1928년에 창간됐습니다. 아카하타가 왜 아카하타가 되었는지 잠깐 유래에 대해 말씀드릴께요. 일본에서는 1898년 사회주의 연구회라는 조직이 결성되었습니다. 이 연구회는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해산됐지만 후일 사회민주당으로 전화했습니다. 1906년 창당된 일본사회당은 같은 해 동경시 정부가 전기요금을 인상한 것에 대항해 대대적 민중운동을 전개하다가 경찰기동대와 대규모 충돌을 벌였고 이듬해인 1907년 대규모의 총파업을 진행해, 결국 일본군이 출동해 이들을 진압하기에 이르렀죠.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 정부는 다시 사회당을 해산시키고 당원들을 대규모로 구속시켰습니다. 이 때 구속된 사회당원들이 출소하면서 붉은 깃발(적기, 일본어로 아카하타죠)를 들고 행진하는 것을 다시 경찰이 공격해 또 당원들이 구속된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이 이른바 그 유명한 아카하타(赤旗)사건이고 그 이름은 일본 공산당의 기관지 명인 붉은 깃발, 즉 아카하타(赤旗)로 남은 것입니다. 헥헥..아휴 설명하느라 힘들다..물 한 잔만 마시구 계속 할께요.


이런 역사 속에서 “아카하타는 여러분들 자신의 기관지다”라는 감동적인 창간사와 함께 1928년 7월 15일 제 1호가 발간됐습니다.


일본이 우리를 식민지배 했던 탓이 크겠지만 아카하타와 우리나라는 관계가 깊습니다. 특히 식민지배 당시에 아카하타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몸소 실현한 매체였죠.


아실랑가 모르겠지만 일본의 쉰들러로 불리는 후세 다쓰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엠비씨 PD 수첩에서도 다뤄진 이 인물에 대해 우리 정부는 지난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기로 결정했죠. 여담입니다만 일본 사회주의자에 대해서는 작년에 건국훈장이 추서됐는데 우리 사회주의자에 대해서는 이 보다 더 늦은 올해 훈장이 추서된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죠.


하여튼 후세는1902년 메이지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그 이듬해부터 일찌감치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1년에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발표해 경찰의 조사를 받기도 했구요. 2·8독립선언 사건으로 검거된 최팔용·백관수 등 조선 유학생의 변론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조선 독립운동 지원에 나섭니다.


그는 아카하타 창간호에서 “한일합방은 어떠한 미사여구로 치장하더라도 실제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면서 ‘조선민중의 해방운동에 특단의 주의와 노력을 바칠’ 뜻을 공개적으로 표명했습니다. 이후에도 비슷한 활동을 쭉 펼쳐 어려움을 겪었구요.


1931년 3월 7일 아카하타는 “조선, 대만 등 식민지의 독립”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합니다. 한달 후인 4월 일본 공산당 정치국 테제 초안에는 그 문구가 그대로 슬로건으로 채택되고 일본공산당은 ‘민족부’를 설치하기에 이릅니다. 민족부는 조선과 대만 내의 공산주의세력과의 연락유지, 일본내에 거주하는 조선, 대만인의 조직화가 주된 목적이다는군요.


자 그럼 1931년 8월 30일자 아카하타 의 한 부분을 들여다 볼까요?


“일본 내에 있는 조선인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것은 일본 프롤레타리아의 중대한 임무다.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의 투쟁은 일본프롤레타리아가 해야 할 책임이다. 우리는 공장에서 직장에서 조선인 일본인 노동자의 공동투쟁을 조직했고 또 조직하고 있다. 그러나, 결코 충분치 못하다. 조선인노동자에 가해지는 비인간적 학대에 대해, 노예적 대우에 대해 그리고 조선인노동자 및 혁명적 인텔리겐챠에 가해지는 야만적 취급과 고문 등에 대해 강력한 반대투쟁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일본 프롤레타리아의 치욕이다. 조선인노동자 대중을 공산주의측에 획득할 것, 反일본 제국주의의 강한 힘으로 조직할 것-이것이 일본 프롤레타리아 및 조선공산주의자의 임무이다."


이건 뭐 단어 몇 개만 바꾸면 현재 우리나라 어딘가에서 나온 문건이라고 해도 속을 정도군요^^


일본제국주의가 강고해지면서 아카하타는 엄청난 탄압을 겪고 폐간되기도 하죠. 2차대전 종전 이후에도 못말리는 반공주의자인 맥아더 군정정부로부터 엄청난 탄압을 겪고 정간, 편집진 구속을 밥먹듯이 당합니다. 전공투 시절의 아카하타는 말할 필요도 없겠죠.


재밌는 가쉽 거리 하나 알려드릴께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좋아하시는 분들 많을텐데요. 미야자키 하야오의 데뷔가 바로 아카하타의 청소년판인 ‘소년소녀신문’을 통해 이뤄졌답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사회주의자인 하야오 감독은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정치 하고 경제가 아니라 정치경제학이요)을 전공했다는군요. 대학시절 그는 ‘소년소녀신문’에 ‘사막의 백성’이라는 만화를 연재하면서 애니메이션과의 행복한 만남을 시작했답니다. 물론 저는 ‘사막의 백성’을 본적은 없습니다만--;; 주 내용은 맑시즘과 공상과학이 결부된 것이었다는구요.(상상들 해보세요. 어떤 내용일지)


자 이것으로 뉴스메이커 13호가 드리는 ‘세계의 진보매체’ 1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어때요? 재밌으셨나요? 아니면 너무 길어서 혹은 딱딱해서 재미가 없으셨나요? 소개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여러분의 리플, 트랙백을 먹고 산답니다. 제가 굶어죽지 않도록 일용할 양식 많이 보내주셈!


---- 새 민중언론 준비 블로그에서 펌 


세계의 진보매체 2. Monthly Review | 읽을거리 2005/04/04 21:02 

http://blog.naver.com/plsong/11554949

안녕하세요. 뉴스메이커 13호입니다. 세계의 진보매체 그 두 번째 순서로 여러분들을 다시 찾아 뵙게 됐습니다.(BGM은 두구두구두구둥-작은 북 트레몰로) 지난 24일 첫 번째 순서로 소개해드린  ‘아카하타’는 재밌게들 보셨나요? 그럭저럭 제 주위에서는 반응들이 좋았던 것 같은데 여러분들께서 겨우 리플 6개, 트랙백 하나라는 양식 밖에 안주셔서, 여러분의 사랑 아니 리플과 트랙벅을 먹고 자라는 저 뉴스메이커 13호는 굶어 죽을뻔하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ㅠㅠ



에휴 잡설이 길었네--;; 하여튼 두 번째 순서로 어떤 매체를 소개해드릴까 고민하다가 어젯밤을 꼬박 세웠습니다. 베네주엘라 볼리바르 혁명의 주력군 역할을 했던 매체를 소개해달라는 주문들도 있었고 세계의 진보매체를 소개하면서 어떻게 ‘로동신문’을 빼놓을 수 있냐는 딴지 아닌 딴지도 있었습니다. 결국 도처에서 암약하고 있는 뉴스메이커들의 의견과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두루두루 들어 제 마음대로 결정했습니다 ㅋㅋ



첫 번째 순서로는 좀 대중적 일간지인 아카하타를 소개해드렸으니 이번에는 전혀 다른 성격의 매체를 소개해드리는게 어떨까 싶네요. 오늘 소개드릴 매체는 해리 매그도프와 존 벨라미 포스터가 공동 발행인을 맡고 있는 미국의 월간지 Monthly Review(이하 먼쓸리 리뷰)되겠습니다.



모름지기 좌파를 자임하는 사람들은 영웅적 개인을 기리기 보다는 계급의 힘을 믿는 편이고, 또 그러려고 의식적으로 노력들도 하는 듯 합니다만 1818년 맑스가 태어난 이후 계급 운동이라는 은하수 속에는 수많은 붉은 별들이 빛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앗 그렇다고 제가 ‘한 별 을 우러러 봅니다’라는 노래를 즐겨 부른다던가 하는건 절대 아닙니다--;; 의심하지 마세요)



그런 점에서 볼때 먼쓸리 리뷰를 소개하기 위해서는 폴 스위지라는 붉은 별 하나를 빼먹고 넘어갈 수 없을 것 같군요. 지난 해 10월 자끄 데리다가 사망했을때 미디어참세상을 보니 Peyo라는 기자가 오비츄어리를 썼더군요. 전 그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잠깐 인용해 볼께요. “에드워드 사이드, 피에르 부르디외, 폴 스위지 그리고 자끄 데리다의 죽음과 함께 이제 20세기는 역사의 장으로 넘어가고 있다”



전 Peyo가 쓰는 기사가 못마땅할 때가 많은 편이지만 윗 문장 하나 만큼은 잘 뽑았다 싶더라구요^^ 여튼, Peyo가 말했듯이 1910년에 태어나 2004년에 영면한 폴 스위지는 20세기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한 사람이고 오늘 소개드리는 먼쓸리 리뷰를 창간한 사람입니다.



먼쓸리 리뷰는 1949년 폴 스위지에 의해 창간됐습니다. 사실 창간 당시나 지금이나 먼쓸리 리뷰의 발행부수는 만부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간지와 월간지의 차이라고 한다손 치더라도 첫 번째 순서에 소개드린 아카하타가 지금도 이백만부 가까이 발행하고 있는 것하고는 천양지차지요. 그러나 이 잡지의 권위, 영향력은 일만이라는 발행부수와는 무관합니다.



서른 두 살의 나이에 자본주의 발달이론-맑스주의 정치경제학 원리 라는 이 시대의 클래식을 혼자 써서 발간한 스위지는(흑 스위지는 서른두살에 이런 책을 썼는데 nesmaker13호는 지금 뭐하고있는지 ㅠㅠ 만 서른 두 살 되려면 아직 좀 남았다는 걸 상기하며 자위하겠습니다)



물론 스위지 혼자 먼쓸리 리뷰를 만든 것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땀과 헌신이 함께 했지만 먼쓸리 리뷰의 창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리오 휴버만입니다.



요즘은 이 책 잘 안 읽는 모양이지만 리오 휴버만의 미국사 우리, 인민들(we, the people)은 정말 유명한 책이죠. 이차대전 중에는 (미국)전국해운노조의 대외협력, 교육국장직을 맡기도 했던 연구자이자 활동가였던 리오 휴버만은 1968년 사망할때까지 스위지와 함께 공동 발행인으로 먼쓸리 리뷰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1949년 매커시즘이 슬슬 몰아쳐오기 시작할 즈음에 세상에 나온 먼쓸리 리뷰 창간호에는 기념비적인 아티클이 실려있습니다.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쓴 ‘왜 사회주의인가 (Why Socialism?)이라는 글이 바로 그것이죠. 여담이지만 올해가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한지 딱 백년이 되는 해라 여기저기서 아인슈타인 열풍이 불고 있는데 사회주의자 아인슈타인에 대해서 다시 주목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새 민중언론에서 한 번 다뤄볼까요?



일단 이 기념비적 아티클의 몇 부분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몇가지 번역본이 있지만 진보넷 블로거 marishin님의 신뢰할 만한 번역본에서 인용하겠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경제나 사회 문제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를 표해도 되는 걸까?”라고 묻고 바로 답합니다. “나는 몇가지 이유로 그렇다고 믿는다” 이 부분은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겠죠? 제가 글을 쓰고 있는 이 밤, 철야하며 라인을 타고 있는 노동자들도, 응급실에서 당직을 서고 있는 의사들도, 전동휠체어를 타고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했던 장애인차별철폐투쟁단들도,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세상의 절반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여성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여성활동가들도 우리, 인민 모두는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를 당당히 표할 수 있을겝니다. 아인슈타인이 그랬던 것 처럼.



아인슈타인은 과학적 지식의 관점과 윤리적 관점에서 사회주의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표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어 아인슈타인은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무정부 상태가 악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그나마 우직했던 1949년의 자본주의사회를 ‘경제적 무정부상태’라니...만일 아인슈타인이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약탈적금융경제를 본다면 허허 과연 뭐라 말할지 궁금하군요.



자 좀 더 들여다 보죠. “이런 악을 제거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교육체계를 동반한 이른바 사회주의 경제를 확립하는 것이다. -중략-사회주의의 목표와 문제를 분명히 하는 것은 지금 이행의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아인슈타인의 아티클은 아주 멋진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첫 번째 순서에서 소개해드렸던 아카하타의 창간하의 한구절 “아카하타는 여러분들 자신의 기관지이다”에 맞먹을 만합니다.



“왜 사회주의인가”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자유롭고 허심탄회한 토론이 강력한 금기사항 아래 억압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기 때문에, 이 잡지(먼쓸리 리뷰)의 창간은 공공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문제에 대한 자유롭고 허심탄회한 토론이 강력한 금기사항 아래 억압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기 때문에, 이 잡지(먼쓸리 리뷰)의 창간은 공공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라고 나는 생각한다” 라는 문장을 다시 읽으니 가슴이 뭉클하면서 newsmaker13호의 어깨가 갑자기 무거워 옵니다. 우리가 만드는 새 민중언론도 ‘공공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을 넘어 정말 ‘공공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입니다.



이렇게 창간된 먼쓸리 리뷰는 아카하타가 그랬던 것 처럼 파시즘적 정권에 탄압 받았습니다. 공동 발행인 리오 휴버만은 1952년 매카시와 FBI의 에드가 후버가 함께 이끈 미국의회의 ‘비미국적 활동에 관한 하원 청문회’에 소환되 사상검증의 치욕을 당했습니다. 폴 스위지는 1953년 뉴햄프셔 검찰에 소환되 투옥당할 뻔 하기도 했구요.


그러나 이 들은 자신들의 활동과 발언, 잡지 출간에 대한 추궁에 답변을 전면적으로 거부했습니다. 당시 먼쓸리 리뷰가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고 하니, 겉표지가 보이지 않도록 포장해 발송하고 기고자들도 실명을 사용하지 못했을 정도랍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고통을 겪고 있지 않는 것은 세상이 좋아져서라기 보다는 우리가 ‘저들’에게 위협이 되지 못해서 일까요?



이후 리오 휴버만 외에 폴 바란, 해리 매그도프등이 스위지와 함께 먼쓸리 리뷰를 발행하고 편집했습니다. 이 중에 해리 매그도프는 91세의 나이에도 현재 존 벨라미 포스터와 함께 이 잡지의 발행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빼놓을 수 없는 인물 하나가 또 있으니 그는 바로 해리 브레이브만이죠. ‘노동과 독점자본’의 저자 말입니다. 철강 노동자로 일하며 노조조직책을 맡기도 했었던 해리 브레이브만은 먼쓸리 리뷰 프레스를 책임지며 로자 룩셈부르크, 부하린, 콜쉬등의 사회주의 고전 뿐 아니라 혁명 쿠바에 관한 책들, 사미르 아민의 책들을 발굴해 출간했습니다.



1999년 5월 크리스토퍼 펠프스는 자신들의 50년 역사를 자축하는 글을 이렇게 끝맺었더군요. “자본주의와 제국의 불평등과 불안정이 여전히 깊이 있는 사회 재건설의 절박한 필요성을 야기하기 때문에, 먼쓸리 리뷰가 지난 50년 동안 그랬던 것과 똑같이 다가오는 새 천년에도 전세계 해방투쟁과 연대하는 미국 맑스주의의 깃대로 계속 봉사할 것이라고 기대할 충분하고도 넘치는 이유가 있다”

이 글에서 펠프스는 유료 정기구독 부수가 “작년에는(1998년) 1991년 이후 최고 수준인 5795부에 달했다”고 자랑하면서--;; “이런 변화를 상징하기라도 하듯, 잡지는 1998년 표지와 판형, 글꼴을 모두 키움으로써 역사상 첫 편집개편을 시도했다”라과 말하기도 했습니다.(허걱...49년 만에 첫 편집 개편이라니 ㅠㅠ) 여튼 먼쓸리 리뷰는 요즘도 여전합니다. 94살 먹은 해리 매그도프는 존 벨라미 포스터와 함께 “먼쓸리 리뷰는 1980년대 레이건 시대 이래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우익들의 계속되는 공격에 직면해 사회안정망위기의 본질을 지적하며 지속적으로 대응해왔다”로 자신있게 시작되는 권두언을 이 달에도 내놓았더군요.



먼쓸리 리뷰는 2000년에는 네그리와 하트가 지은 ‘제국’을 두고 특집판을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발리바르, 아리기, 지젝, 캘리니코스의 현란한 논쟁들이 이 특집판을 장식했더랬죠.



아이고 한 시간 동안 꼼짝 않고 포스팅을 하려니 newsmaker13호의 좀이 막 쑤시는군요. 슬슬 마무리 짓겠습니다. 오늘 역시 가쉽 아닌 가쉽을 하나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아까 해리 브레이브만 이야기를 하면서 먼쓸리 리뷰 프레스를 잠깐 언급했는데요. 먼쓸리 리뷰 출판부, 즉 먼쓸리 리뷰 프레스는 어쩌면 먼쓸리 리뷰 자체보다 더 유명할지도 모릅니다. (돈을 더 버는 것은 확실합니다^^)



아까 몇몇 저작들을 언급했지만 좀 더 자세히 소개해드릴께요. 고전들 외에도 체 게바라의 저서 ‘쿠바 혁명전쟁 회고록’, 만델의 ‘맑스주의 경제학 이론’ 알뛰세의 ‘레닌과 철학’ 사미르 아민의 ‘세계 수준의 자본축적’ E P 톰슨의 ‘이론의 빈곤’ 등(아이고 많기도 하다)등이 모두 먼쓸리 리뷰 프레스를 통해 출간됐습니다. 해리 브레이브만의 ‘노동과 독점자본’ 역시 마찬가지구요.



그런데 먼쓸리 리뷰 프레스가 우리에게 더 긴밀하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아리랑’을 출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정래의 아리랑은 아니구요--;; 김산의 아리랑, 님 웨일즈가 쓴 바로 그 책, 우리나라에선 1984년인가 동녘 출판사에서 나온 바로 그 ‘아리랑’ 말입니다. 사실 ‘아리랑’을 초간 한 곳은 먼쓸리 리뷰 프레스가 아니지만 50년이 넘게 꾸준하게 발간하고 있는 곳은 바로 먼쓸리 리뷰 프레스입니다. 일본의 나름대로 진보적인 출판사 이와나미 서점 에서는 먼쓸리 리뷰 프레스 판 아리랑을 번역해 참회의 필독서로 ‘세계의 명작 100선’에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아 참, 역시 진보넷 블로거이신 홍실이 님께서 얼마전 보스턴에서 스위지 1주기 추모 모임에 다녀오신 소식을 전해주시기도 했습니다.  홍실이 님이 전해주신 스위지 1주기 추모 모임의 한 장면을 들여다 볼까요? “고인이 93세에 돌아가셨다 하니 그 친구, 동지들이라는 양반들이 다 머리가 하얗게 샌 할머니 할배들.... 한 할배 나와서 말씀하시길 ‘내가 그를 를 처음 만난 건 1943년...어쩌구....’  이크... 거의 내가 제일 젊은이가 아니었나 싶다..... 미국 젊은이들은 다 어디 갔는고....  지난번 하워드 진 강연 때도 젊은이들은 안 뵈고 나이 지긋한 양반들만 줄줄이 앉아 있었는데....”



에휴 미국 꼴이 요새 요 모양 요 꼬라지인 갑네요. 스위지도 저 세상으로 가고 이제 미국에는 할배 둘만(하워드 진, 놈  촘스키 -이들도 먼쓸리 리뷰의 단골 필진들이죠) 남아 있나 싶어 가슴이 짠합니다.



아 참, 홍실이님은 곧 새 민중언론의 해외통신원으로 맹활약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계시니 많이들 기대하세요^^ 절찬 개봉박두입니다요.



휴~ 이것으로 ‘세계의 민중언론’ 2회- 먼쓸리 리뷰 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꼬부랑 글씨로 된 사람 이름들 많이 나와서 헷갈리지는 않으셨나요? 혹 “야 neswmaker13호 너는 니 글에 언급한 사람들 책들은 다 읽고 야부리 푸는 거냐?”고 질문하신다면 전 당당하게 대답하겠습니다. 그것도 영어로 말이죠. “No Comment!" ㅋㅋㅋ



자꾸 말씀드려서 지겨우시겠지만 저는 여러분의 리플, 트랙백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고 있습니다. 제발 일용을 넘어 이용, 삼용 할 수 있도록 뜨거운 관심 기다릴께요.



---- 새 민중언론 준비 블로그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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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umors have many ears

many mouths

and many eyes so...

it has no responsibilities and no conscience.

 

 

I'm starting to wo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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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복싱의 진화 혹은 멸종

“링 위에 오르면 심장이 뛴다. 이 기분을 돈으로 따질 수 있을 것 같은가?”

 운동을 복싱처럼 할 수 있을까?

 

 

프로복싱의 진화 혹은 멸종

[스포츠2.0 2006-09-01 17:31]
동양태평양복싱연맹(OPBF) 슈퍼라이트급 챔피언 김정범. 아직 세계챔피언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사진 한상무)

“세계챔피언이요.” 1986년 한국갤럽이 전국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장래의 꿈을 조사했을 때 대부분의 사내아이들은 서슴지 않고 ‘세계챔피언’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보다 구체적으로 닮고 싶은 사람을 물었을 때는 아이들의 입에서 ‘박종팔’ ‘유명우’ ‘장정구’ 등의 이름이 흘러 나왔다.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답변이었다. 그렇게 대답하는 사내아이들에게 주변 사람들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뿌듯한 표정을 짓기까지 했다.

아이들과 거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청소년들도 꽤 많았다. 그들 중에 김종성(38,회사원)씨도 있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지만 가족의 미래에 관해서는 대학교 4학년생만큼이나 고민이 많았던 김씨는 세계챔피언이 돼 병석에 누운 아버지와 좌판에서 생선을 팔던 어머니께 큰 집을 선물하고 싶었다. “당시 프로복싱은 지금의 로또와 같았다. 한 방에 인생역전이 가능했으니까.” 김씨의 말대로 당시 프로복싱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이 부를 쌓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름길이었다. 이 지름길에 들어서고자 많은 청년들이 복싱에 입문했고 복싱체육관은 그들이 토해내는 열기로 뜨거웠다. 결과도 좋았다.

1966년 김기수가 니노 벤베누티(이탈리아)를 15회 판정으로 이기며 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에 오른 이후 한국은 유제두, 홍수환, 김태식, 박찬희 등 수많은 세계챔피언을 배출했다. 비단 세계챔피언만이 아니었다. 동양챔피언은 세계챔피언보다 훨씬 더 많았다.

1986년 세계복싱평의회(WBC)산하 동양태평양복싱연맹(OPBF)챔피언은 모두 15명. 그 가운데 한국인챔피언이 무려 10명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일본, 태국, 필리핀에서는 웬만한 세계챔피언에 비해 더 후한 대접을 받곤 했다. 슈퍼웰터급 동양챔피언 백인철같은 선수는 WBA밴텀급 챔피언 박찬영 보다 더 많은 인기를 끌면서 상당한 액수의 파이트머니를 받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은 아시아복싱의 맹주였으며 세계복싱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강호였다. 다른 나라 복서들에게 존경을 요구하고 두려움을 주던 존재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6년.

 

복싱을 모르는 세대

“세계챔피언? 이탈리아요.” 김씨의 큰 아들 재연(11)은 세계챔피언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탈리아’라고 대답했다. 아이는 ‘현재 세계챔피언이 누군지 아느냐’는 기자의 질문을 ‘이번 월드컵 우승국이 어딘지 아느냐’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에게 세계챔피언이라는 단어는 복싱이 아니라 축구에 쓰여야 제격이었다. 게다가 복싱이 어떤 스포츠인지 조차도 모르는 눈치였다.

“요즘 아이들은 복싱이 뭔지도 몰라요. 20년 전과는 천지차이죠.” 김씨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정작 20년 전과 비교해 천지차이로 바뀐 건 복싱을 모르는 아이들만이 아니다. 바로 복싱 자체가 천지차이로 변했다.

한때 세계챔피언을 동시에 5명까지 보유했던 한국프로복싱은 단 한명의 세계챔피언도 보유하지 못한 무관의 제왕이 된 지 오래다. 김씨가 가족들의 미래를 책임져 줄 유일한 희망으로 믿었던 복싱은 이제 어느 누구에게도 희망의 지름길로 작용하지 않는다. 복싱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미국에서도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다.

“챔피언 한명 없으니 당연한 일이죠.” 복싱마니아라고 자처하는 김씨가 아쉬운 듯 길게 한숨을 쉬었다. 김씨의 진단은 옳았다. 가뜩이나 인기 없는 복싱에 챔피언 한명 없으니 그 인기가 회복될 리 만무하다. 그러나 김씨가 모르는 게 있었다. 아직 한국에는 챔피언이 있다는 사실을. 비록 세계챔피언은 아니지만 벌써 3차 방어전까지 치른 동양챔피언이 있었던 것이다. 동양태평양복싱연맹(OPBF) 슈퍼라이트급 챔피언 김정범(류명우 범진체육관)이 그 주인공이다.

 

유일한 동양챔피언, 김정범

8월 20일 김정범을 만나기 위해 서울 구로구에 있는 ‘류명우 범진체육관’을 찾았다. 그러나 체육관을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양챔피언을 보유하고 있는 체육관 정도라면, 게다가 22년째 같은 건물에 있다면 인근 주민들 사이에선 그 위치가 꽤 알려졌을 법도 한데 어느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체육관으로 몇번이나 전화를 건 후에야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체육관은 얼핏 보기에도 지은 지 30년은 더 돼 보이는 4층 건물의 3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계단에 설치된 전등은 숨이 끊길 듯 작은 빛만을 토해 내고 있어 조심스레 발을 내딛지 않으면 복도를 가득 적시고 있는 물 때문에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조심스럽게 4층까지 올라가 체육관 문을 열었지만 요란한 줄넘기 소리와 거친 숨소리를 예상했던 기대와 달리 안은 매우 조용했다. 게다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청소기가 그 모든 소리와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때 두 사내가 다가왔다. 한 사내는 40대 후반의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이었고 그 옆에 있는 선글라스로 눈을 가린 사내는 20대 중반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김정범을 찾아온 사람들인가?” 기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중년의 사내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그가 류명우 범진체육관의 관장 김정표(48)씨였다. 김관장은 옆에 있는 청년의 어깨를 툭 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선수가 김정범이다.” 김관장의 소개를 받은 청년이 예의를 갖추려는 듯 선글라스를 벗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는 눈두덩이 상처에 꿰맨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경기 끝난 지 얼마 안돼서….” 김정범은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김정범은 8월 13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동양타이틀 3차 방어전에서 도전자 야마모토 다이고로(29)를 7회 1분49초에 TKO로 이겼다. 고작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니 멍이 남아 있을 만도 했다.

“정범이는 일본킬러다.” 김관장이 전적표에 빨간색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범이는 2004년에 당시 챔피언이었던 사다케 마사가즈(일본)를 오사카에서 2회 KO로 이기면서 동양챔피언이 됐다. 그 후로 일본 시즈오카에서 가시와기를 상대로 1차 방어에 성공했고 이번 3차 방어전에서 다시 일본에서 일본선수를 때려눕혔다. 역대 챔피언들을 봐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김관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복싱은 실력도 중요하지만 홈어드벤티지가 승부를 크게 좌우하는 스포츠다. 복싱인들은 ‘안방에서 경기하면 잽만으로도 이길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원정경기는 그 반대다. 1975년 유제두와 와지마 고이치전 이후 일본 원정경기는 39전 13승1무25패를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서 보듯 완벽한 열세다. 하지만 김정범에게 이같은 기록은 낡은 표어와 같은 것일 뿐이었다.

“이걸 보라. 거기다 지금까지 모두 KO로 이겼다.” 김관장이 다시 한번 전적표에 동그라미를 쳤다. 김정범의 통산전적은 29전 25승 1무 3패. 25승 가운데 KO승이 21차례다. 사다케를 KO로 꺾고 챔피언 벨트를 따낸 뒤 3차 방어전까지 모두 KO승을 거뒀다. 역대 동양챔피언과 비교해 볼 때 최상의 기록이다. 이상호 MBC 복싱 해설가는 “김정범은 화려한 테크닉과 가공할 펀치력도 돋보이지만 프로복서로서 쇼맨십도 갖춘 선수다. 상품성이 충분한 선수”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상품성이 좋은 동양챔피언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과거 동양챔피언이라면 웬만한 사람들 사이에선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던가. 어째서 복싱인들 조차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것일까?

“이유야 간단하다. TV에 나온 적이 거의 없으니까.” 김관장은 여기서부터 한국프로복싱의 암담한 현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무명의 동양챔피언

과거 프로복싱 중계는 스포츠 종목 가운데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효자 프로그램이었다. 광고도 많이 붙었다. 세계타이틀전뿐만 아니라 동양타이틀전만 열려도 방송국들은 중계권을 따내기 위해 치열한 로비를 벌이곤 했다. “프로복싱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던 1970~80년대에도 타이틀전만으로 흥행에 성공한 적은 거의 없었다. 정작 수익을 안겨준 건 방송이었다. 당시 중계권료가 1억 원에 이를 정도였다.” 한보영 MBC-ESPN 해설위원의 회고다.

프로복싱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이른바 ‘김현치 시절(트레이너였던 김현치가 프로모터로 나서 활동하던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방송사들도 타이틀전을 중계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지만 경기를 유치하려는 지방간 경쟁도 치열했다. 각 지방에서는 서로 타이틀전을 끌어오기 위해 로비를 벌였고 경기를 주관하는 프로모터들은 지역안배까지 고려해야 했다. 타이틀전만 열리면 스폰서는 쉽게 붙었다.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방송국에 돈을 줘야 하는 시대다” 한위원의 설명이다. 방송국에 돈을 줘야 한다니? 시청률이 나오지 않는 복싱을 누가 방송해 주겠는가. 세상은 변했다. 세계챔피언이 많은 태국에서조차 방송국에 돈을 주고 방송을 부탁하는 실정이다.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복싱에서 공격하다 지치면 1분 안에 회복한다. 그러나 맞다 지치면 10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김정범의 훈련은 실전보다 치열하다.(사진 한상무)

사실 지상파 방송사에서 프로복싱을 중계하지 않은 건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세계타이틀전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프로복싱경기는 스포츠 케이블방송을 통해 중계되든지 아니면 그마저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 됐다. 세계타이틀전 역시 공중파 방송사로서는 달가운 프로그램이 아니다. “2000년 들어 세계타이틀전의 시청률은 거의 바닥이다. 이를 방송하느니 차라리 주말연속극을 재방송하는 게 시청률 면에서 낫다.” 한 지상파 방송편성자는 예전의 프로복싱 열기는 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상파 방송사에서 실제로 세계타이틀 매치를 심야에 녹화방송 하려고 한 적이 있다. 열렬 복싱팬들의 항의가 빗발쳐 계획을 철회했지만 국내 유일의 세계 챔피언이었던 지인진(34,대원체육관)이 지난 1월 29일 일본 후쿠오카에서 도전자 고시모토 다게시와(일본)에게 타이틀을 빼앗긴 이후 자연스럽게 프로복싱 중계를 하지 않게 됐다.

세계타이틀전도 중계를 마다하는 상황에 동양타이틀전을 중계하겠다는 방송사가 있을 리 없다. 따라서 한국 유일의 동양챔피언 김정범을 복싱팬들 조차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방송중계의 문제는 팬들이 김종범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방송 중계가 되지 않는 마당에 어느 지역에서 타이틀전을 유치하겠다고 나서고 누가 스폰서가 돼주겠다고 손을 들겠는가. 이런 상황에 어디서 대전료를 만들 수 있겠나. 그러니까 국내선수들이 질 각오를 하고 해외로 나가 타이틀전을 벌이는 것이다.” 이위원은 덧붙여 “지인진이 일본에서 경기에 이기고도 판정패한 것은 다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스파링 파트너가 없다

김정범은 1979년생이다. 1996년에 프로에 데뷔했으니 올해로 복싱경력 11년 째다. 과거의 잣대로 평가한다면 김정범은 백전노장이다. 대개의 선배 복서들은 15전 안에 동양챔피언에 오르고 20전 안에 세계챔피언이 됐다. 2004년 26전 만에 동양챔피언에 오른 김정범은 선배 챔피언들에 비해 늦어도 한참 늦은 경우다. 게다가 현재 WBC 세계랭킹 14위라 언제 세계타이틀전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인 상황이다.

가장 다급한 사람은 김관장이다. “나이도 있으니까 2년 안에 세계타이틀에 도전시키려고 노력 중이다.” 그러나 시급한 문제는 세계타이틀전이 아니다. 세계타이틀에 도전하려면 그 만큼 많은 스파링을 벌이며 훈련에 매진해야 하는데 그게 여의치 않다.

“선수가 없다. 정범이의 경우 스파링 파트너를 구하지 못해 국군체육부대에 들어가 번번이 신세를 지고 있다. 거기 가서도 2~3명씩 묶어서 스파링을 해야 한다. 4회전 이상 뛰어 본 선수가 없기 때문이다. 3분 3회전씩 3명의 선수를 상대로 스파링을 하는 것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과거 같으면 체육관 안에서 스파링파트너 조달이 가능했고 다양한 선수들을 상대로 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군체육부대가 유일하다. 아마추어복서들이 있는 대학은 스파링파트너로 응해 주지 않는다. 그나마 국내 최고의 복싱체육관으로 불리는 ‘유명우 범진체육관’에서조차 실제 선수로 뛰는 복서는 5명에 불과하다.

이 중 복싱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하려는 고등학생을 제외하고 김관장의 말대로 4회전 이상을 뛴 선수를 꼽으라면 김정범을 제외하고 2명뿐이다. 하지만 이들도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아 김정범이 유일한 프로복서다. 국군체육부대가 아니었으면 김정범의 유일한 스파링 파트너는 거울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 프로 복서가 있는 체육관은 전국에서 5개 가량이다. 그런데 그 체육관에서도 선수가 없다고 걱정이다.” 김관장의 한숨이 짙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한국프로복싱은 6월부터 8월까지 3개월 동안 단 한 경기도 치르지 못한 채 개점휴업 중이다. 12회전 경기는 고사하고 4회전 경기도 전무한 실정이다.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게 한국프로복싱의 현실이다. 초보선수들은 4회전부터 착실히 경험을 쌓고 올라와야 한다. 그러나 경기가 없으니 좋은 선수들이 나올 리 없다.”

그러나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취재 전 조사해 본 결과 김관장의 말과는 달리 현재 복싱계는 부흥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울 강남에 있는 어느 복싱체육관은 밀려드는 수강생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실제 1986년 3,543명이던 아마추어 등록선수가 한때 1,824명으로 떨어졌다가 최근 들어 2,500명대로 증가한 것을 봐도 복싱의 침체와는 동떨어져 보인다. 한국권투위원회(KBC) 등록선수 가운데 10회 이상 경기를 할 수 있는 A급 선수가 2005년 26명으로 줄었다가 올해 다시 31명으로 증가한 것도 김관장의 말과는 다르다. 지나친 우려가 아닌가?

“현재 복싱은 헝그리스포츠에서 생활스포츠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김관장의 평가다.

 

생활스포츠로 변신중인 복싱

서울시 성북구에 있는 ‘변정일 복싱클럽(관장 변정일)’은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복싱체육관이다. 300평의 체육관 규모도 입이 벌어질 정도지만 회원수가 400명이 넘는다. 체계적인 훈련법과 세계챔피언 출신의 관장이 운영한다는 소문 때문에 요즘에도 신입회원이 끊이지 않는다.

‘변정일 복싱클럽’의 박진환 코치에 따르면 유사 체육관이 하루에도 두 세개씩 증가하고 있다고. 그러나 이 복싱클럽은 엄밀한 의미에서 과거의 복싱체육관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피트니스클럽에 가깝다.

“회원수 400여명 가운데 여자회원이 40%에 이른다. 운동 목적도 다이어트와 건강 증진에 쏠려 있다. 남자회원들도 마찬가지다. 프로복서는 한 사람도 없다.”

출산 후 살을 빼기 위해 6개월 전부터 운동을 시작했다는 김관(26,주부)씨는 “8㎏정도 다이어트를 했다”며 “진짜 복서들처럼 원투스트레이트 뻗으면서 신나게 땀을 흘리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이는 ‘유명우 범진체육관’도 다르지 않다. 김관장은 하루에 30~40명 가량의 관원들이 나오지만 복싱을 단순 취미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절대다수라고 밝혔다.

박코치는 “1990년대 후반부터 불기 시작한 복싱다이어트 열풍은 앞으로도 지속 될 것으로 보인다”며 “대신 프로복싱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전망했다.

 

살아있는 스포츠 ‘복싱’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김정범은 자신이 처한 외부환경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희망에 부푼 표정을 지었다. 동양챔피언에 오르며 자비로 만든 50만 원짜리 챔피언벨트를 만지작거리며 세계챔피언의 꿈만을 이야기했다.

한국권투위원회 부회장을 겸하고 있는 한위원은 “구태를 벗지 못하고 파벌 싸움으로 일관하던 한국권투위원회도 새로운 회장단이 구성되면서 점차 변해가고 있다. 한국프로복싱이 사양길에 접어든 것은 확실하지만 모든 구성원들이 노력한다면 예전의 영광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성과 야성을 겸비한 유일한 스포츠인 복싱의 명맥은 어어갈 수 있을 것이다”라며 “장래성이 있는 선수들을 집중 육성하고 이들을 슈퍼스타로 만들어야 한다. 김종범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김종범에게 물었다. 일년에 한,두번 벌어지는 동양타이틀전으로 손에 쥐는 돈은 2천만 원에 불과한데 어째서 복싱을 고집하느냐고. 먹고 싶은 것 억누르고 가고 싶은 곳 참으면서 하루 종일 복싱에 전념해도 미래가 불투명한데 무엇 때문에 글러브를 손에서 놓지 않느냐고. 과거의 헝그리스포츠 복싱이 21세기에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남들처럼 차라리 인기도 좋고 대우도 좋은 ‘K-1’이나 ‘프라이드FC’와 같은 이종격투기로 진출하지 그러느냐고.

김정범은 링 위에 오르기 전 붕대로 손을 감으며 이렇게 말했다.

“일년에 한,두번 정도 하는 이종격투기 뛰어 봤자 얼마 벌지 못한다. 그러나 프로복싱은 아직 죽지 않았다. 세계챔피언만 돼도 몇 십억 원을 벌 수 있다.”

고작 그것 때문인가? 김정범은 잠시 침묵하다 링 위에 오르며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링 위에 오르면 심장이 뛴다. 이 기분을 돈으로 따질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마도 김정범의 심장이 왼쪽에서 뛰는 한 그가 링 아래로 내려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그처럼.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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