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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切]이라 하고 싶다

부모가 없는 외로움을 고[孤]라고 한다고 한다.
자식이 없는 외로움을 독[獨]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외로움은 뭘까... 애[哀]일까?
한[恨]이라는 것은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이라는구나.
풀지못한 숙제로 인한 고통 슬픔, 외로움이, 그것이 한 이구나.

 

너무 외롭다. 독특하게도 정치적으로.
정치적으로 혼자라는 느낌. 경험해 보지 못한 외로운 슬픔.
게다가 홀로이지만 버텨야 하는 상황.
연인과 이별하고 외롭게 삶을 살아야 했던 지독히도 힘들었던 것보다,
목구멍에서 위장으로 떨어지던 독주의 쓰렸던 한방울보다
그 것과는 또 차원이 다르네.

 

정치적 외로움
정고, 정독, 애정...
이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절 [切]이라 하고 싶다.
칼로 베는 듯이 아프고 그렇게 베이어 또 혼자가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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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칭) 진보전략회의 준비모임 세움(발족) 행사

가칭)진보전략회의 준비모임 세움(발족) 행사


- 시간 : 11월 7일(화), 오후 5시부터 7시30분까지

- 장소 : 손기정 문화체육센터

버    스 : 261, 263, 604 (손기정공원 또는 (구)양정고등학교)하차

마을버스 : 16번 (손기정공원 또는 (구)양정고등학교)하차

지 하 철 : 1호선 서울역 하차 2번출구 (서부역쪽에서 만리동고개방향 도보 10분)

              2호선 충정로역 하차 5번 출구 (도보 10분)

 

 

<진행>

준비모임 세움행사 (30분)

* 사회

- 경과보고

- 포럼 창립준비사업계획 검토

- 준비팀/집행팀 구성 : 전략기획팀 / 정세분석팀 / 조직선전팀


집담회 (2시간)

- 제목 : “집담회 - 우리 앞에 놓인 길”

- 취지 : 진보전략회의의 취지문 작성을 위한 사회운동의 과제 점검

             전보전략회의의 운영 및 활동방향 마련을 위한 문제의식 확인

- 발제

: 사회운동의 과제와 방향 (10분)

: 문화정치의 관점에서 본 사회운동 (10분)

- 토론주제 

: 각 운동 영역의 현황과 문제점
: 포럼 활동의 의의와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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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e and sebastian - Sukie In The Graveyard

Sukie In The Graveyard

 

Sukie was the kid, she liked to hangout in the graveyard
She did brass rubbings, she learned you never had to press hard
When she finished hanging out she was all alone
She decided that she better check in at home
There was an awful row between her mum and dad
They said she hadn’t done this, she hadn’t done that
If she wanted to remain inside the family home
She’d have to tow the line, she’d have to give it a go
It didn’t suit Sukie
So she took her things and left

Sukie was the kid, she liked to hang out at the art school
She didn’t enrol, but she wiped the floor with all the arseholes
She took a bijou flat with the fraternity cat
She hid inside the attic of the sculpture building
She had a slut slave and his name was Dave
She said ‘Be my photo bitch and I’ll make you rich’
He didn’t believe her but the boy revered her
He got her meals and he got her a bed
He watched behind the screen and she started to undress
He never got far
Just lookin’ and playing guitar

Autumn hanging down all the trees are draped like chandeliers
Sukie saw the beauty but she wasn’t wet behind the ears
She had an A1 body and a face to match
She didn’t have money, she didn’t have cash
With the winter coming on, and the attic cold
She had to press her nose on the refectory wall
They served steamed puddings she went without
She had to pose for life for all the scholars of art
She didn’t feel funny, she didn’t feel bad
Peeling away everything she had
She had the grace of an eel, sleek and stark
As the shadows played tricks on the girl in the dark

Sukie was the kid, she liked to hangout in the gravey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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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 드 파리 -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의 사랑 이야기

미쳤다는 게 맞았다.

내 주제에 공연 한 번 보는데 5만원이 넘는 거금을 쓰겠다는 결심 자체가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도 보고싶었다. 작년에 보았던 책, 연극, 영화, 공연 중에서 최고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빅토르위고의 원작인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를 꼽을 것이다. 작년에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가 국내 초연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는 너무 보고 싶어서 열병처럼 앓았다. 왜 그랬을까? 사실 잘 모른다. 다만 오래 전에 빅토르위고의 작품이었던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보고 난 이후 빅토르위고의 다른 작품이 초연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랍고 반가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공연 전에 미리 공개된 그 뮤지컬의 음악을 함께 듣고선 나는 열에 달뜬 사람처럼 흥분되기 시작했다.


빵을 훔친 장발쟝이 감옥을 탈출하여 출세했다는 이야기야 너무도 잘 아는 이야기이지만, 사실 레미제라블은 장발쟝과 코제트의 로망, 적어도 영화 레옹과 같은 스토리는 아니다. 마치 그림 형제들이 반사회적이고 저항적인 온갖 우화들을 미화시켜 오늘날의 전래 동화집을 만든 것처럼 우리에게 알려진 ‘장발쟝’은 그렇게 각색된 작품이다. 하지만 원작 레미제라블은 대단히 혁명적인 소설이며 뮤지컬 역시 혁명적이다. 비록 레미제라블이 1848년 2월 혁명 상황을 직접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프랑스 대혁명이후 샤를 10세의 몰락까지, 파리꼬뮨의 형성 전까지의 상황을 다룬 노동자들의 저항과 투쟁, 빈자들의 인간애를 다룬 매우 웅장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지만, 먹지는 못해도 탱자 역시 입이 쓸 정도로 매우 신 과일이다. 파리에서 초연되었던 이 작품은 영국을 거쳐 미국까지 왔다. 내가 본 작품은 한국에서 초연된 브로드웨이팀의 공연이었다. 들은 바로는 파리 공연작은 매우 사실적이어서 단두대에 국왕의 목을 다는 장면까지 나온다고 했지만, 바다를 건너 미국에서는 삭제와 자진 검열로 매우 순화된 작품이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진정성은 순치시킬 수 없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노동자들이 봉기하여 "너는 듣고 있는가 성난 민중의 노래..“라는 자막이 선명했던, 파리꼬뮨의 전사들이 부르다 죽어간 '민중의 노래(Do you hear the people song)'를 부르며 노동자들의 주검위에서 붉은 깃발을 치켜드는 것으로 막을 맺는다. 


그렇게, 레미제라블은 내게 너무도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그런데, 노틀담의 꼽추로 알려져 있는 빅토르위고의 또 다른 작품 ‘노트르담 드 파리’의 (브로드웨이 날나리들이 아닌) 프랑스 오리지널팀이 한국 초연을 한다고 한다.


그가 남긴 작품의 성격과는 달리 근대 저작권 형성의 창시자라는 이름표가 붙은 작가 빅토르위고. 여러 작품을 남겼지만 ‘노트르담 드 파리’ 역시 위대한 작품의 하나이다.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 볼 때, 집시여인 에스메랄다를 놓고 노트르담 대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 성당 주교 프롤로, 근위대장 페뷔스 사이의 애정과 인간적 갈등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제는 놀랍게도 중세의 몰락을 다루고 있었다.(어렸을 때, 우화집으로도 봤고 좀 컸을 때는 영화로도 봤던 노틀담의 꼽추...의 원작이 정말 이런 작품이었는 지는 뮤지컬을 보고 처음 알게 되었다.)


중세 하면 떠 오르는 두 가지 상징이 있다. 첫 째가 교회이고 두 번째가 기사(고급장교)일 것이다(중세 초기에는 기사이지만 후반기로 갈 수록 봉건영주에 귀속되어 고급장교로 된다). 이 작품은 이 두 상징의 몰락과 타락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성당 주교 프롤로는 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세속의 정염에 휩쌓이게 된다. 에스메랄다를 여인으로서 동경하게 되고 콰지모도를 시켜 에스메랄다를 납치하게 만들고 그녀를 결국 죽음으로 내몬다. 또한 근위대장 페뷔스는 사랑하는 여인을 배신하고 에스메랄다를 쫓게 되나, 자신의 명예와 미래를 위해 다시 에스메랄다를 마녀로 몰며 그녀를 배신하게 된다. 기사(장교)에게 이제 명예와 신의는 땅에 떨어진 빵조각 만도 못한 것이 되었다. 이처럼 중세의 정신적 이념을 표상하는 성당 주교의 타락과 기사도 정신으로 무장되었던 중세봉건 시대의 기사 근위대장 페뷔스의 배신과 이기심은 곧 중세의 몰락을 표현하고 있다.


이를 확인하듯이 이 작품의 2부 시작은 다음과 같은 독백으로 시작한다.


“피렌체에서는 지구가 둥글거라 하네 지구상에 또다른 대륙이 있을거라 하네

탐험선이 이미 항해를 떠났네 인도제국으로 열린 길을 찾아서

루터가 신약을 다시 쓰겠네 우리는 분열시대의 새벽에 서 있네

구텐베르그라는 자가 세상을 바꿔 놓았네

뉘른베르그 인쇄소에서는 쉴새없이 인쇄물이 쏟아지네“


또 하나, 이 작품을 현대적으로 해석할 경우 우리는 더욱 경이로운 결론에 다다른다. 작품의 주인공이랄 수 있는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의 신분은 어떻게 될까? 콰지모도는 노예신분이지만 성당의 종지기로 일하고 있고 성직자인 프롤로에 귀속되어 있다.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어떻게 보면 그냥 노동자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가 행한 하인노동의 형태와 노동의 주변적인 특성을 볼 때, 콰지모도는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에스메랄다는?


에스메랄다는 집시여인이다. 그런데 당시 집시라는 집단은 어떤 집단이었까? 그들에게는 조국이 없었고 때문에 어디 한곳에 정착할 이유도 없었다. 즉, 그들은 국경을 넘나드는 이주노동자였다. 에스메랄다와 그 집단이 파리로 온 까닭은 일을 하기 위해서이고,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숨어 든 것도 권력집단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 찾아 들었다 (우리 이주노동자들이 명동성당에서 농성했던 상황과 똑 같다. 이들 역시 권력의 탄압에 맞서 노트르담 대성당을 점거하고 투쟁에 돌입하게 된다)

 

프롤로의 죄를 뒤집어 쓰고, 마녀사냥을 당했지만 콰지모도를 위해 죽음을 택하는 에스메랄다. 그리고 에스메랄다를 구출하기 위해 불법체류자로 감옥에 갖힌 집시일행을  구출하는 콰지모도. 그리고 성당에서의 최후의 투쟁... 이들의 사랑은 비린내 나는 중세에 맞서 치열한 투쟁으로 진하게 번져 나간다.

 

결국 이 작품은 중세의 몰락과 비정규직 노동자와 이주노동자의 사랑, 연대, 열정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며, 중세의 몰락에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이주노동자간의 연대와 저항이 동력이 되고 있음을 표현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음악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음악에 대해 별로 아는 것도 없고 프랑스어로 된 노랫말들이 어떤 뜻인지도 몰랐지만 들어서 좋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메인 테마 곡인 ‘대성당의 시대’, 프랑스에서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 ‘벨르(참 아름답구나)’, ‘달아’ 등 수십곡의 창작곡들이 애잔한 가슴을 짓누르면서 우리의 귀를 속삭이고 있다.

 

또한 노랫말이 어떤 내용인지를 알게 되었을 때, 프롤로와 페뷔스와 같은 지배계급들의 비열하고도 기만적인 변명, 계급과 신분의 굴레 속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콰지모도의 외침, 억압에 맞선 에스메랄다와 이주노동자들의 저항의 목소리들을 우리는 다시 듣게 된다.


그리고 함께 공연을 보았을 때, 이 노래들은 무용수들의 몸 짓으로 하나 됨을 보게 된다.


이 뮤지컬이 다시 18일부터 공연을 시작한다...

사실 한 번 더, 너무 보고 싶다.

 

 

 

 

대성당의 시대

 

 

Belle(참 아름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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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가장 특별했던 시월의 마지막 밤

오늘, 시월의 마지막 밤이다.

글쎄... 오늘 같은 날은 누구든 뭔가 낭만적인 기억 한 두가지 정도는 가슴에 담고 있을 법한 그런 날이다. 나도 그런 기억이 있다. 하지만 서른 몇 번이나 넘게 경험했던 시월의 마지막 날 중에서 가장 특별한 기억은 안개낀 분위기에 로맨틱한 대화를 나누던 그런 것은 아니다.


2001년 10월 31일. 이제는 고인이 되신 김진균 선생님께서 선생님이 계시는 과천으로 오라고 부르셨다. 그 때 나는 사회진보연대라는 단체에서 일하고 있었고 선생님은 그 단체 대표를 맡고 계셨다. 나와, 함께 상근을 하고 있었던 다른 활동가와 빨리 과천으로 오라 하셨다.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대낮부터 활동가들을 오라가라 하실 분이 아니라서 어떤 일 때문인지 무척 궁금했다. 정확이 말하면 불안했다. 당시 편안하게 선생님을 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더 불안했다. 선생님께서 대장암 판정을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았고 모두가 그 소식에 슬퍼하고 안타까와 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을 뵌다는 건 반갑기도 하지만 그만큼 무거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선생님이 좋지 않은 일로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성폭력으로 제소된 동국대 교수가 교육당국으로부터 해임을 당했는데, 그 사람의 복직서명에 선생님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과천에 도착해서 선생님을 뵙자 다짜고짜 뭐 맛있는거 먹으러 가자시며 우리를 끌고 고기집부터 들리셨다. 선생님은 매번 그러셨다. 활동가들을 볼 때마다 삼겹살에 소주한잔 씩은 꼭 사주셨다. 돈이 없고 바쁘기도 해서 이래저래 잘 먹지도 못했던 활동가들이 못내 마음에 걸리셨던지 정말로 볼 때마다 고기를 사주셨다. 또 그 맛에 우리들은 선생님 오실 때를 은근히 기다리기도 했으니...


그런데, 그 대장암이란 것이 십년이상 삼겹살에 소주를 먹으면 대장암 걸릴 확률이 절반 가까이 된다고 한다. 결국 선생님 대장암 걸리게 한 공범이 되었으니, 그 고기가 잘 넘어 갈 리가 있는가. 하지만 선생님은 별로 게의치 않으셨고 잘 먹고 많이 먹으라고만 하셨다. 


고기집을 나오니 어스름히 저녁이 되었다. 동네를 잠시 걷고서는 이 번에는 술을 한잔 사겠다하여(선생님은 병 중이라 술을 안하셨지만) 우리는 술집으로 갔다. 그런데 왜 우리를 부르신 건지 계속 궁금할 따름이었다.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여러 가지 일상 잡사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선생님께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옛날 이야기 꺼내 놓듯이 옛날 사건들과 관련된 이야기, 책에 대한 이야기, 공부하시던 이야기 등등... 좋은 이야기, 즐거운 대화였지만 대체 왜 부른지 알 수가 없었다. 가만히 의중을 헤아려보려고 해도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런 분위기를 심리적으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 몇몇을 더 불렀다. 사람들이 많아지면 뭔가 하시려던 말씀을 하지 않을까 싶어서.


솔직히 듣고 싶은 말이 하나 있었다. 동국대 성폭력 교수의 복직서명을 철회하겠다는 그 말씀을 너무 듣고 싶었다. 혹시 그 이야기 하시려고 부른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김진균 선생이 복직서명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많은 활동가들이 반발하였고 내부에서도 그 문제를 논의하고 선생님과 이야기를 같이 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활동가 몇몇이 선생님과 논의하기로 하였고 그 책임을 맡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모두 네차례 토론에 임해 주셨다. 생각해보라, 대장암 판정을 받고 요양 중인 사람이 몇 시간씩 토론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찌보면 사람으로서 못할 일이다. 한 두 시간이 지나자 선생님 얼굴은 새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 때마다 활동가들의 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논의를 그만두어도 된다고 하셨는데도 선생님께서는 다음에 다시 만나자며 몇 번을 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중에는 우리가 더 보지 못해서 나머지 이야기는 필담으로 나누기로 하고 만나서 논의하는 것은 그만 두었다.


하지만 선생님도 당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성폭력 사건과 교육당국의 교수직 해임건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다른 선생님들의 우려도 많았고 누구누구가 가서 설득해 보자는 이야기, 어느 분이 가서 만나셨다는 이야기... 빨리 이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여러분들이 애쓰시고 계셨지만 여전히 선생님은 복직서명을 철회하려 하지 않으셨다. 그런 일들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던 시월에, 그것도 마지막 날에 갑자기 보자하셨으니...


저녁 때 몇 분이 더 오셨고 마침 서울대 민교협 선생님들이 관악산 등산을 갔다가 뒤풀이 하는 중에 만나게 되어 판이 무척 커졌다. 아예 바깥 정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노래도 부르며 시월이 가는 소리 가을을 보내는 아쉬움을 그렇게들 털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 보냈다. 처음에 보자했던 둘에게는 차나 한잔 더 하자시며 사모님도 오시라고 하여 찻집에서 넷이 도란도란 차를 마시며 시월의 마지막 밤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두 분이 만나게 된 이야기, 살아오셨던 이야기를 조금 들었다. 그러나 이 시간도 잠시. 막차가 끊기기 전에는 가야하고 그 날 선생님이 너무 무리를 한 듯해서 들어가봐야 할 시간이 다 되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도대체 우리를 왜 부른지 도통 알 수가 없었고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너무 궁금한나머지 결국 우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선생님, 오늘 왜 보자하신 거예요?”

“글쎄, 시월의 마지막 밤을 너희들과 보내고 싶어서...”


그리고 이틀후 선생님께서는 복직서명을 철회하셨다...

 

그 얼굴 다시 뵈니, 오늘 밤 또 이상하게 눈물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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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의 <마흔아홉 통의 편지>를 읽고

당신, 혁명을 꿈꾸시오? 요즘 부쩍 이런 질문을 자주 받았다. 며칠 전에도 어떤 활동가가 진지하게 물어왔다. 그럴 때면 그냥 웃거나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질문을 피해 나갔다.
꿈을 꾼다는 점에서는 맞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어떤 혁명인지 나는 잘 모른다. 총파업과 봉기, 정치권력의 접수, 자본주의 질서의 전복... 수학 공식처럼 잘 짜여진 혁명론을 '학습'하면서 꿈을 키워 가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졌고, 수많은 문명의 가치들이 새롭게 떠올랐다.

 

짧은 경험이지만,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혁명을 위해 더 복잡한 공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혁명을 이제는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 속시원하게 답할 수가 없다. 그러다 보면 과연 무엇이 혁명인지 알 수도 없게 된다.

 

세상이 복잡해지다보니 여러 가지 웃지 못할 일들이 많다. 대통령이 신자유주의 개혁을 위해 손 발 다 걷어 부치면서도 시민혁명이라고 외치고 있다. 안타까운 건 이렇게 개혁이 혁명으로 둔갑한 세상을 살면서도 가슴이 먹먹한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사람들은 소수다.



그리고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의 소설이다. 작가 후기에서도 밝혔듯이 '손석춘의 독자는 소수지만 혁명을 꿈꾸는 사람'이라는 조세희 선생의 평가가 딱이다. 그런데 바벨탑이 무너진 자리에서 손석춘은 도대체 어떻게 혁명을 하자고 우리에게 역설하고 있는가?

 

이 소설은 <아름다운 집>, <유령의 사랑>에 이은 손석춘 연작 3부작의 마지막 편이다. 손석춘은 3부작을 통해 분단공간에서 고뇌하는 사회주의자, 유령이 된 맑스 그리고 빨치산과 그 후예들을 차례로 불러낸다. 혁명이란 무엇이고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진지한 고민을 던진 작가는 죽은 맑스를 부활시켜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고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냥 거기까지였으면 혁명을 꿈꿨던 이들의 후일담 소설이라 했겠지.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시 물어왔다. 그것도 아주 격정적인 방식으로.

 

<마흔아홉 통의 편지>는 주인공 홍련화가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소설의 대강은 이렇다. 스웨덴으로 입양된 주인공이 생모를 찾기 위해 한국을 찾던 중 어머니가 빨치산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홍련화의 뿌리 찾기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호랑이었던 이현상과 주변 인물들에게로까지 가게 된다. 해방공간에서 사회주의를 이루려 했던 투사들의 열정과 불굴의 의지. 그러나 패전의 책임, 숙청과 배신 그리고 죽음. 살아 남은 투사들의 고뇌와 방황, 사랑 속에서 남한의 현대사의 희비극이 사회주의자의 눈으로 조망된다.

 

눈치챘겠지만 49통의 편지는 49재와 같은 의미로 빨치산 투사들의 복락을 비는 글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제문이 아니라 질문이다. 련화가 편지를 보내는 '당신'은 이 소설의 독자들이고, '세상을 바꾸려는 깨끗한 열정이 당신 안에 타오르고 있지요'라며 다시 물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손석춘은 3부작을 통해 왜 혁명을 해야하는지 그 이유를 구성해 내고 있다. 해방과 분단의 모순을 넘어서, 맑스의 사랑과 꿈을 통해 해방의 미래를 살려내고, 빨치산 투사들이 역경을 헤치고 투쟁하며 산화해 간 바로 그 자리 그 길에서 혁명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현상의 심장이 멎은 이 지점에서 여러분이 다시 길을 찾기 바랍니다. 월북했던 이현상이 왜 다시 남쪽으로 왔는지, 그가 남쪽에서 정녕 걷고자 한 길은 무엇이었는지,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무엇을 할 것인지, 성찰해보시기 바랍니다. 이현상의 심장이 멎은 여기 이곳에서 말입니다."

 

......

 

9월 18일은 이현상 동지의 기일이라고 한다. 이번에는 추석 연휴하고 겹쳐 버렸는데...아무래도 매년 이날에 지리산에 가는 모임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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봤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스포일러 없습니당~)

 

봤다.
batblue님이 오래전부터 추천하였고
주말이나 일요일이면 저녁을 같이하거나 영화를 봤던 애인같은 친구, 황군
주말 저녁, 황군이 문득 영화나 보러가자고 해서 둘이 같이 보게 되었는데..

 

우선 영화 <<은하수..안내서>>는 책 제목이다. 그런데 책의 영문 제목이 걸작이다.
dont't panic
한글로 '쫄지 마세요' 란다.
한마디로 어떤 일을 당해도, 무슨 일이 생겨도 혹은, 종말이 오더라도 '쫄지 마세요'라는 것이다.

자신감을 가지란 말인데, 그 자신감 엄청 지나쳐서 맨인블랙 류의 행성 공기놀이 정도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초우주적이며 초역사적인 영화라 할 수 있다.

사전정보가 별로 없었던 영화라서 이 영화가 어떤 배경으로 어떻게 제작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 영화에서 가장 압권인 캐릭터는 로봇 마빈이다.

 

'우울증에 걸린 로봇'
그것이 마빈의 주요 특징인데,

생각해 보라, 로봇이란 항상 인간의 말을 잘 듣거나 아니면 최근엔

인간의 의지에 거슬러서 행동하거나 하는 조금 극단적인캐릭터인데,  

우울증에 걸려 있는 로봇이라는 캐릭터

생각만해도 독특하지 않은가?^^

 

영화를 보고난 후 황군 왈,
마빈은 꼭 자기 스스로를 보는 것 같았다고...^^
아닌게 아니라 요즘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 치고 마빈 같지 않은 사람이 드물긴 하다. 우울증에 걸린 로봇...생각만해도 좌파! 같더라~

 

이 영화가 씨네21이나 필름2.0 등에서는 미국에서 흥행에 성공한 허리우드 영화가 국내에 개봉하지 못해서 예술영화라는 두껍을 쓰고 1개의 개봉관(필림포럼, 구허리우드극장)에서만 개봉하게 되었다고 국내 영화문화의 쾌거로 이야기되는가 보던데,

글을 읽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그런 평가를 받기에는 조금 억울할 것도 같다. 여러 효과나 비주얼도 그렇고 구성이나 대본도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보기에는 무리없이 좋더라고...창의력이 부족한 나에게는 좀 도움이 된 영화가 분명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역시 허리우드식 영화였다.

오스틴파워와 같은 알 수 없는 개그들로 가득 찬 대사와 분위기들(아마 오스틴파워의 경험이 상영관들이 저어하게 된 원인이 된 것도 같다)뿐만 아니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마빈의 목소리 배우가 오스틴파워의 박사와 똑 같은 사람 같더라니... 대충 어떤 느낌의 영화인지는 이 정도면 충분히 공감이 가질 않을까?^^

 

하지만 오스틴파워와는 달리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별로 안들었는데,
그것은 진보블로거이신 batblue님 스러운 개그(=batlish gag)와 농담으로 가득 찬 영화라는 점,
마빈이라는 캐릭터의 독창성 때문에 숨넘어갈 정도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는 점,
유치한 웃음도 있지만 상상력을 자극하는 엄청난 구성 때문이다.

 

영화에도 좋은 영화 나쁜 영화가 있는지 모르겠다. 올바른 영화와 행복한 영화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나야 항상 행복한 영화보다는 올바른 영화를 (의식적으로)선호했지만 이 영화...
올바른 영화는 아니겠지만 그럭저럭 행복한 영화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있으면 시간을 내어서 한번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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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흘렀더구나

이 글은 '도키님의 2005년 8월 24일'과

              '버섯돌이님의 '1995년 8월 24일을 생각해 보면'에 엮인 글입니다.  

 

 

애 둘이나 있는 부모가 되었고,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중요한 직책들을 맡고 있었고
민주노동당의 고위간부가 된 사람도, 많이 배워서 더 배울게 없는 사람들도 생겼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더니...
눈가에 주름 하나, 허리에 군살 한점, 귀밑머리에 잔설이 조금씩 더 잡히어 가도
하지만 언제 봐도 즐겁고 반가운 내 친구들, 동지들...

 

그게 벌써 10년이 되었구나 생각하고 반갑고 그리운 동지들과 가슴에 서리서리 맺은 회포는 풀었지만, 오늘이 별로 달갑지 만은 않더이다.

 

그 때처럼 그렇게 어리석게 당하지 말자는 반성을 하면서도 혹시 오늘 세상의 흐름에 대해서 둔감해 하지는 않는지, 과거를 그리워하며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후회를 하면서도 10년 전에 비해 단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한 것 같은 현실이 자꾸만 뒤통수를 잡아끌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이라 잠깐 시간이 나서 집안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집과 목욕탕 공사를 하신다고 하여 시간을 내서 오전 내내 도배하고 집안 청소하고 점심 먹고 잠깐 쉬고 있었는데...
웬 아저씨들 몇 명이 집안으로 몰려 왔다.

'오늘 공사 거 하게 하시나 봐. 인부들까지 다 부르시고..'
이렇게 생각하곤 웃옷을 벗고 있어서 옷을 입으러 내방에 들어 왔는데,
그 중 두 명이 따라 들어왔다. 그러면서 짧게 외쳤다.

"너희는 모두 잡혔다. 너도 따라와!"

 

순간 고개를 훽 돌리면서 쳐다봤는데, 뭔가 수첩을 꺼내 보이는 것이었다. 수첩은 2단으로 접힌 수첩이었는데 손바닥 윗 부분에 받쳐든 면만 보였는데, 그것은 운전면허증!
아마 손바닥에 아랫부분의 든 다른 면에 경찰증이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 아무튼 내 눈에는 면허증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하니 상황이 좀 코믹했다. 속으로 이 놈들 사기꾼들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으니까...)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하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마음으로 내 방 유리창과 방충망 구조를 다시 살펴보고 이대로 달아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면서 천천히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는 형사 두 명에 둘러싸여 아버지께서 뭔가를 심각하게 읽고 계셨는데,
옆에 가서 보니까 긴급구속영장이었다.

 

'이거 정말이군'. 이미 형사들이 출구는 가로막고 있었고 저항해 봤자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보위수칙들이 어지럽게 머리 속에 떠돌면서, 빨리 연락해야 한다는 생각, 가방 안에 수첩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

 

"수색영장을 안 갖고 왔는데, 어차피 니방 수색할텐데 너만 동의해 주면 지금 할 수 있다."

 

"안됩니다. 영장 갖고 와서 다시 하시죠...그리고 어머니께 죄송한데 인사만 여쭙고 가게 해 주세요..."

 

"그래"

 

엄마...를 부여잡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당황하고 황망한 엄마의 모습. 이미 핏기마저 가신 엄마의 어깨를 부여잡고 조용하게 죄송하다고 몇 마디 나누면서 곁눈질과 들리지 않는 소리로 '친구들한테 빨리 연락하고 내 가방 치워 주세요'

 

그리곤 곧장 수갑차고 얼굴에 검은 붕대 메고 그렇게 어딘지도 모른 데로 끌려갔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곳은 홍제동 대공분실.

 

.........

 

그렇게 그 일이 있은 지 꼬박 10년이 흘렀다.

2015년에는 세상은 또 어떻게 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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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자...

이 글은 탈주선님의 다시 제자리로

           지후님의 익숙해지지 않는 이별들에 트랙백을 건 글입니다.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은 이정표도 길도 없는 황량한 황무지.
추운 밤공기의 외로움을 감쳐줄 집도 절도 없는 빈털털이
애써 뒤돌아 가려는 이들을 붙들지는 않아.
그래서는 안되는 거야..."

 

오랜만에 황군께서 시상을 발동해서 글을 남기긴 했지만...


그런데,
뭐가 안되는 걸까?
여기가 황량한 황무지라서?
아니면 죽도록 고생해 봐야 빈털털이 밖엔 안돼서?

 

사실 황군 생각만 하면 틀린 얘기가 아니라서 ^^;; 가슴이 더 찌릿찌릿 하지만...
이번엔 좀 경우가 다르다고 생각해.

아직 할 말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남아 있잖아?

 

그걸 블로그에 다 남길 순 없겠지.
대신 노래나 한 곡 띄워야 겠다...

 

 

 

   

♪ 함께가자 우리 이 길을 (출처:피엘송닷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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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영화제 - 플레이 테니스

썩은 돼지님의 [늦었지만 정동진 영화제 넘 좋았다] 에 관련된 글.
* 나도 늦었지만 정동진 영화제 넘 좋아서...

 

영화제라는 데에 별로 가보진 않았지만 정동진영화제처럼 마음 편한 축제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없을 것 같다. 마치 좋은 영화보고 서로 나누고 놀고 즐기는 독립영화인들의 잔치 같았다.

 

정동진 영화제 초청 작품들은 훌륭했다. 공무원노조 동해시 지부의 이야기를 다룬 최은정 감독의 다큐가 가장 좋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애니메이션들이었다. 강한 인상을 남긴 양성평등. 여성 픽토그램이 비상구, 엘리베이터, 신호등의 남자만 있는 픽토그램에 자신도 함께 들어간다는 2분짜리 영상이다. 짧은 상영시간에도 일상의 성차별 문제를 다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외에도 여러 작품들이 많았지만 가장 신선했던 것은 '플레이 테니스'라는 작품이었다.

 



 

 

"실사 사람이 그린 그림(2D 캐릭터)이 사람이 나간 틈을 타서 컴퓨터 안 3D 캐릭터와 테니스를 치기 위해 궁리를 하다가 결국 스캐너를 통해 컴퓨터 모니터 안으로 들어가 서로 테니스를 치고 논다. 그러나 그들은 곧 판정시비로 서로 다투게 되는데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장난감 경찰인형이 판정을 내려준다. 모니터 안의 둘은 테니스 심판으로 경찰인형을 불러들이려고 고민을 하다 캠코더로 경찰인형을 모니터 안으로 불러들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방을 비웠던 실사사람이 들어오면서 들킬 위험을 맞게 되는데 셋이서 힘을 합해서 슬기롭게 위기를 벗어난다."(작품 소개 중에서)

 

이 작품에는 사람(실사) 이외에 3개의 캐릭터들 즉, 종이그림, 컴퓨터안 캐릭터, 경찰인형이 등장한다. 이 애니메이션이 재미있었던 것은 이 캐릭터들이 각각 차원을 표현한다는 점 그것도 단순히 점, 선, 면, 부피의 차원만이 아니라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의 차이까지도 표현한다는데 있었다.

 

종이그림은 대표적으로 2차원의 공간을 나타내고 그 한계 또한 그대로 갖고 있다. 컴퓨터안의 캐릭터와 경찰인형은 3차원을 나타냈는데 이 둘은 결정적으로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의 차이를 표현하였다.

 

공간을 이동하는 수단(한계를 극복하는 방식)도 각각 다른데 스캐너는 2차원을 가상공간으로 이동시키는 수단으로 등장하고, 캠코더는 3차원의 사물을 컴퓨터 안으로 이동시킨다.

 

다른 면에서 보면 이 작품은 현실과 가상공간의 긴장을 표현하고 있다. 모니터 안의 세상과 모니터 밖의 세상. 뭔가를 감시하는 실사 사람과 컴퓨터 그래픽으로 표현된 3개의 캐릭터들이 갖는 긴장은 결국 현실과 디지털 공간의 긴장을 표현한다. 하지만 작가도 자평 했듯이 그런 긴장들이 '디지털의 흐름 속에 융화되어 가는 모습'으로 결론 짓고 있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역시 영화란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보는 가에 따라서 그 느낌이 한층 다른 것 같다. 그래서 영화 평도 제각각 이겠지만 한 여름밤 모깃불 날리는 별빛아래 종종 밤기차 지나가는 것을 배경으로 느끼면서 보는 영화란 더 남다르지 않을까 싶다.

 

정동진독립영화제, 매년한다고 하니 내년에도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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