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빈집 여행기

지난해 빈집을 만났을 때 사실 나는 빈집, 그 집 자체에 매력을 느끼기 보다는 그 주변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동가식 서가숙하는 생활 가운데 나는 거점이 필요했다. 방랑에 가까운 여행을 일삼던 지라 서울역과 고속터미널을 자주 이용해야 했는데, 혈연관계의 가족과 살고 있는 먼집보다 남산의 게스트하우스 빈집은 가깝고 싸고 재밌고 부담 없으니 아주 유용한 공간 아닌가. 더구나 때는 바야흐로 몸살 앓듯 마음 앓는 지병이 다시 돋기 시작하는 봄. 어디든 아름답게 생명을 피워올리는 대자연의 힘은 서울이라는 도시마저도 구석구석 보물을 숨기기 마련이고, 나는 언제나 그런 보물찾기에 이끌려 이곳을 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빈집에 히치하이킹하고 빈집 주변을 여행하기 시작한지 벌써 1주년이 다 되어 간다니. 다시 올 봄산책을 예감하며 지난해 봄, 종투를 막 시작했던 시점의 일기를 다시 꺼내본다.  이번 봄은 더 잘 지내봐야지 마음먹게 되는 것이니, 아래의 일기가 이번엔 어떻게 변주될까 궁금하다.

 

 

머리의 선택은 어렵지만 발길의 선택은 쉽지

땅바닥은 젖어 있었다. 아니 땅을 포장하고 있는 아스팔트 도로가. 그리고 숲이 되지 못한 앞뒤간격 좌우로 나란히인 가로수가. 빈집을 나와 집을 갈 생각이었다. 집 나온 지 며칠이었더라, 문득 돌아갈 집을 생각하며, 아 여기서 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날이 갔구나, 는 반복되는 머릿속 대사다. 버스 정류장이 차라리 멀다면, 정류장을 향해 한참 걷다가 다시 흙냄새 나무냄새의 유혹이 목을 넘어 머리끝에 매달려 잡어당기더라도 나는 머리를 끊고 버스를 탔을 것이다. 하지만 빈집 앞 육교와 버스 정류장은 너무도 가뿐하게 내 발길의 선택을 기다린다. 하늘은 아직 무겁게 내려와 있고 가방도 무겁지만 육교를 건넌다. 건너 작은 언덕 반굽이만 오르면 바로 닿는 숲, 쭉 뻗은 3호 터널만 지나면 바로 당면하는 도심. 두 곳 모두 수많은 내 집과 우리들의 집들을 품고 있으므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머리에겐 늘 어려운 선택이지만, 발길에겐 너무 쉬운 선택이다.

지금은 비온뒤 아침이고, 어제 오후엔 마이크 울렁증을 파도타기 삼아 밴드다락 공연을 했고, 공연에 뒤이어 발바리 잔차질에 함께하며 수년 만에 숨이 턱에 차도록 몇 시간 동안 자전거를 탔고, 돌아와 물을 못찾아 맥주를 마셨던 밤을 지났으니, 자고 일어난 아침 목이 마른 건 당연했다. 집에 가려 했으나 이런 이유들로 내 발길은 흙냄새와 나무냄새 섞인 물냄새에 이끌려 남산을 향했다.

 

 

빈집 뒷산, 남산의 봄봄

숲 입구 가로수로 앞뒤간격 나란히-를 하고 있는 저 벚나무들은 지난밤과 새벽사이 어느 강을 건너온 모양이다. 검은 몸통을 한 나무들은 저렇게 지난밤 치마 걷어 올리고 바지 걷어 올리고 다녀온 흔적이 숨길 수 없이 몸에 드러난다. 그 가운데 산책로 입구에 저 나무는 수양매화다. 지난 꽃사월에 밤샘 연습하러 모인 밴드다락 친구들과 오밤중에 악기 들고 나섰을 때, 머리 길게 늘어뜨리고 매화보다 조금 더 진한 진분홍에 조금 더 진한 향기도 늘어뜨리고 있던 고운 언니 같던 나무. 벚나무 가로수들마저 흰 꽃구름 머리에 이고 가로등보다 환하고 낮보다 환했지. 지금은 꽃 다 지고 누가 저 꽃시절을 알아봐줄까 싶어 다시 한 번 눈맞춤한다.  

무릎께 잔뜩 튀밥 같은 꽃을 달고 국수나무가 스친다. 아침을 안먹어 그런가. 빈집 친구들이 동네에 오시는 뻥아저씨 마술의 힘을 빌어 만든 현미 뻥튀기처럼 먹고 싶게 생겼다. 칠부 차림이라 드러난 종아리에 그림을 그릴랑 말랑이다. 땅에서 물의 힘으로 한껏 자란 찔레 새순에 손이 간다.  겉줄기를 벗겨내고 아삭쫑쫑 베어 무니 비온 뒤라 물 많고 더 시원하다. 아, 이 맛을 친구들에게도 뵈어줘야 하는데. 찔레꽃 하얀 꽃은 맛도 좋지- 노래가 가르쳐준 대로 먹어보는 꽃잎은 엄마젖처럼 달다.

‘동해물가’에서 왜 남산 위에 저 소나무라 했는지 여기와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지구온난화도 유행이라고 더 빨리 더 더워진 우리나라 그것도 서울에서 이런 아름다운 소나무숲을 볼 수 있다는 건 꽤 행운이리라. 불과 10년 좀 전에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온대림이라고 배웠지만, 남한은 이제 난대림으로 바꿔 가르쳐야 하지않을까. 진작에 도퇘됐을 남산 솔숲에 남방한계선을 지연시켜보려 솔잎혹파리약을 뿌리는 것만 아니면 소나무에게 허락맡고 솔잎 몇가닥 빌려와 송편도 찌고 속살 몇점을 빌려와 옛날에 구황식품으로 먹었다던 소나무죽도 재미로 빈집 친구들과 해먹어보고 싶은데, 걱정마. 그건 상상 속에 그저 생각만 해보는 거니까. 얼마남지 않은 남산 소나무숲의 수명을 짐작하며 비온 뒤 내뿜는 소나무의 하얀 숨냄새 숲냄새를 맡으며 그들의 발밑을 쫄쫄쫄 흘러내려왔을 약수를 한잔 한다. 빈집에 약수가 떨어졌던데, 몇병 담아다 주고 갈까?

 

 

집보다 집터

조용히 약수터에 앉아 있으니 까치보다 화려한 깃을 한 어치가 한발치 떨어진 곳에 날아 앉는다. 한참 지켜보니 병아리만한 박새도 병아리눈물만큼 목축이러 다녀가고, 수다쟁이 직박구리도 다른 새들을 쫓아내고 내려 앉는다. 수도꼭지도 정수기도 없는 새들에게 약수터는 사람에게보다  중요한 서식처이리라.

새도 그렇지만 내게도 집보다는 집터가 중요하다. 집에 산다는 것은 그 집 안에서만이 아니라 그 집을 중심으로 주변 환경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산다는 게 적절한 표현 아닐까. 생명체에게는 집에 살 권리 못지않게 주변을 누릴 권리가 있다. 새집이라고 우체통마냥 집만 덜렁 달아주고 새는 찾아오지 않아 미분양사태가 벌어지곤 하는 새집지어주기 행사처럼 어리석은 사람살이다. 그를 살아있게 서식처 환경을 마련해야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집보다 집 주변에 관심이 더 많다. 그 주변에 무엇을 누리며 살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주변과 그 집이 잘 소통하며 사는가에 있다. 주변 환경의 문화적 역사적 자연적인 부름들에 얼마나 대답하며 말을 걸며 사는가. 그 주변 이웃은 굳이 사람일 필요는 없다. 유기동물일 수도 있고 한그루 가로수 나무일 수도, 골목길 담벼락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빈집은 내가 아는 곳들 가운데 가장 열심히 주변과 소통하는 곳이다. 남산 약수를 떠와서 오직 누룩과 쌀로만 발효시키는 빈집표 막걸리라든가, 근처 공원에서 따온 꽃으로 화전도 부쳐 먹고 술도 담는 방식은 철저하게 로컬푸드다. 빈집 앞에서 안겨들어온 려니나 갈곳이 요원해져 장투개가 된 복돌이, 또다른 인연으로 들어온 차세대 고양이 동글이와 멍니 같은 동물들과의 동거도 적극적인 소통의 방식이 아니겠는가. 동네에 버려져 나와있던 쇼파며 서랍장 같은 노획물도 로컬푸드 못지않은 생존형 소통방식이자 즐거움이다. 해방촌 오거리 다닥다닥 붙은 언덕배기 집들 사이 무슨 시장이 있을까 싶은 골목길에 버섯처럼 피어있는 해방촌 쪽시장에서 옴작옴작 장을 보면서도 느낄 수 있다. 촛불집회에 함께하며 노래하고 외쳐주고 하는 일도 그렇고. 그때마다 나는 이 공간 거점들을 공유하며 소통하며 진화하는 걸 느낀다.

  

 

유기체 공간에서

공간이 숨을 쉰다. 후우- 하고 한숨을 쉰다. 늘 그런 식이었다. 집에서의 역할들은 늘 똑같고 쳇바퀴 돌 듯 공간에서의 시스템에 대안을 찾아 바꾸려는 의지도 없는 고정된 공간. 그건 가족공동체가 살고 있는 집이든, 회사공동체가 살고 있는 사무실이든, 서로를 살리며 숨쉬고 있다면 살림을 잘 살고 있는 것이고, 서로 고정된 채 멈춰있고 한숨만 겨우 쉬고 있다면 뭔가 살림이 안 되는 것이리라.

집이라는 공간은 아무래도 유기체 같다. 죽은 공간에 있으면 숨이 쉬어지질 않는다. 하지만 종종 숨이 편히 쉬어지는 공간들을 만나곤 한다. 그런 공간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 같아서 종종 공간 자체가 활동하고 진화하고 생식하는 것 같다. 공간을 가꿔간다는 것. 화분에 식물을 키우듯이. 공간에 활기를 불어넣을 일들을 벌여낸다.

살아있는 유기체같은 남산 빈집에서 친구들과 주변과 시대와 소통하며 이 빈집이라는 거점 공간을 가꿔가는 재미에 빠져 오늘도 내 도끼날은 녹이 슬었을 것이다. 고양이 버스가 올 때까지 내 발길은 여기 이 정거장에서 토토로 같은 친구들과 즐거이 놀며 기다리는 수 밖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