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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왜냐면] ‘아시아 안보협력기구’는 나토 같은 ‘동맹체’가 아니다 / 고영대(한겨레)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640304.html#12131566441471&id%3Drecopick_widget%26if_height%3D199

 

지난 5월20~21일, 중국 상하이에서 제4차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회의’(CICA)가 열렸다. 시진핑 주석은 기조연설에서 “(이 회의를) 아시아의 대화협력 무대로 만들고, 이를 토대로 지역의 안보협력을 위한 새로운 기구를 건립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한겨레>는 23일치 기사에서 “시진핑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사한 아시아 지역의 안보협력기구로 만들자고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는 시진핑의 제안을 정반대로 이해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뒤 미소 양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바르샤바조약기구(WTO)라는 동맹체를 결성해 군사적 대결을 벌였다. 양쪽은 군축 협상을 벌였는데, 대화·협력 무대가 바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였다. 유럽안보협력회의(35개 회원국)는 양쪽 동맹체의 가맹국이 모두 참가한 다자안보협력 협의체로, ‘비엔나 협약’으로 대표되는 신뢰 구축 조처와 ‘유럽재래식무기(CFE) 조약’으로 대표되는 재래식 무기 감축 등 동맹 간의 직접 협상으로는 불가능했을 역사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유럽안보협력회의의 성과는 독일 통일과 냉전 해체의 밑거름이 됐다.

 

유럽안보협력회의는 탈냉전의 변화된 정세에 맞춰 유럽의 모든 국가를 회원국(55개국)으로 하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1995년)로 발전했다. 이는 여러 차원의 안보 협력과 위기 관리, 분쟁 예방 등의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산하 안보협력포럼(FSC)은 상호 신뢰 구축과 군비 감시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회의’는 유럽안보협력기구를 모델로 하여 아시아 지역 내 상호 신뢰 구축과 분쟁 예방을 임무로 1992년 출범한 아시아의 대표적인 안보협의체다. 현재 24개 회원국과 9개 옵서버국, 4개 국제기구를 산하에 두고 있다. 그러나 기능과 역할은 미미했다.

 

이에 시진핑은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회의’ 사무국의 기능을 강화하고 국방 관련 협의 조직을 구성하는 등 아시아의 새로운 안보협력기구를 만들자고 제안한 것이다. 명실상부한 아시아판 유럽안보협력기구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이는 나토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진출과, 미·일·오스트레일리아 삼각 (준)군사동맹 결성(2007년) 및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 결성 기도 등으로 아태 지역에서 군사적 대결이 날로 첨예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상호 긴장 완화와 신뢰를 구축해 나갈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즉 미·일 주도의 동맹체에 대항하기 위해 나토와 유사한 중국 주도의 새로운 아시아 동맹체를 건설하자는 뜻이 결코 아니다.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회의’에는 실제로 한국과 같은 미국의 동맹국들은 물론, 이란과 같은 미국의 적대국들,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과 같이 상호 적대적인 국가들 등이 함께 가입해 있다. 따라서 이 회의를 유럽안보협력기구와 같은 위상으로 발전시켜 공동협력 안보를 추구해 나간다면 아태 지역의 평화 증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고영대 평화통일연구소 상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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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40340.html?recopick=5#12129979685241&id%3Drecopick_widget%26if_height%3D199

 

“시민 평화의식이 동북아 안보불안 해소 지렛대”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창립 20돌을 맞아 지난 5월29일 서울시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진행된 좌담에서 고영대(왼쪽부터) 평통사 대표, 유영재 평통사 주한미군팀장,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현재 동북아시아의 불안정한 안보환경을 넘기 위해서는 평화군축 시민활동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싱크탱크 광장] 평통사 창립 20돌 기념 좌담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이하 평통사. 상임대표 문규현)이 내일로 창립 20돌을 맞는다. 고 홍근수 목사와 문규현 신부 등이 주축이 돼 1994년 6월4일 결성한 평통사는 ‘대중적 자주평화운동’을 표방한 남한 최초의 평화군축 시민단체다.

 

평통사는 그동안 줄곧 “주한미군 철수”, “한-미 동맹 폐기”, “침략적 한-미 연합전쟁연습 반대” 등을 주장해왔다. 이는 “반북 대결주의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금기를 어기는 것이며 성역을 침범하는 행위”(유영재 평통사 주한미군팀장)다. 평통사는 실천적으로도 “미선이·효순이 장갑차 압사 사건 대응 투쟁”, “매향리 미군 국제폭격장 폐쇄투쟁”, “F-15K 도입 반대 투쟁”,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 “제주해군기지 건설 저지 투쟁” 등을 이끌거나 주도적으로 참여해왔다.

 

공안당국의 탄압도 거셌다. 현재도 9명의 대표와 활동가들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검찰은 “‘키리졸브 한-미 군사훈련 반대’ 등 평통사 주장이 북한의 그것과 닮았다”며 평통사의 활동을 ‘이적행위’로 몰고 가려 했다. 하지만 지난 2월21일 오혜란 전 평통사 사무처장이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는 등 법원이 공안당국의 ‘종북몰이’에 제동을 걸고 나서기도 했다.

 

평통사는 이런 탄압 속에서도 창립 당시 400여명에 불과하던 회원이 현재 2500여명으로 늘었으며, 지역조직도 19개로 확대됐다고 밝힌다. 법원의 판결 이전에 시민들이 평통사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조직임을 인정한 것이다.

 

남한 사회에서 평화군축운동을 개척해온 평통사의 20년 활동과 현재의 동북아 정세, 그리고 시민 평화군축 활동의 앞날을 살펴보는 좌담을 마련했다. 고영대 평통사 공동대표와 유영재 팀장, 그리고 평통사 활동을 쭉 지켜보며 연대활동을 해온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참석했다. 좌담은 5월29일 오후 한겨레신문사에서 이루어졌다.

 

1994년 한반도 위기 당시 결성
남한 최초의 평화군축시민단체
주한미군 철수 등 성역없는 활동
회원수 400명서 2500명으로 늘어

 

세계 군축흐름 속 해외서 더 유명
방위비 분담금 문제 등 성과도 내
지금같은 대결정책 한계 부닥칠것
민주정권 들어서면 평화협정 가능

 

─지금도 평통사의 주장을 ‘성역 침범’으로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1994년 창립 때는 더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고영대(이하 고) “평통사의 전신은 1991년 창립됐다가 정부의 탄압으로 해체된 ‘반핵평화운동연합’이었다. 이후 1992년 1월20일 남북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같은 해 10월 미군 병사가 윤금이씨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미국에 대한 문제제기가 전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특히 1994년에는 미국이 김영삼 당시 대통령도 모르게 북한 영변을 폭격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등 실질적인 전쟁위기를 경험하기도 했다. 평통사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창립했다.”

 

 

“평통사 창립은 평화운동의 독자성 선언”

 

유영재(이하 유) “한반도의 평화가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평화에 대해 문제제기할 단체의 필요성이 높았다. 당시 운동 측면에서 보면 통일운동이 주류였다. 평화운동은 개량주의운동으로 치부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평통사의 창립은 통일운동과 마찬가지로, 평화운동도 독자적 영역이 있으며 양자를 함께 전개하겠다는 취지였다.”

 

─참여연대도 2003년 5월에 평화군축센터를 꾸려 평화운동의 틀을 갖췄다. 이때 평통사 활동이 좋은 참고가 됐을 것 같다.

 

이태호(이하 이) “미국에서 2001년 조지 부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평화군축 쪽 일이 많아졌다. 대표적으로 무기 도입과 관련한 내부고발이 크게 늘었다. 참여연대는 권력감시단체이지만, 남북관계나 무기·안보 문제와 관련해서도 권력에 대한 시민 감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때 평통사의 활동을 참고했다. 이후 평화군축센터와 평통사는 이라크 파병 반대, 미사일방어(MD) 참여 반대 운동 등에서 각종 단체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간사단체 구실을 했다.”

 

평통사 ‘자주’, 참여연대 ‘민주적 통제’ 강조

 

─그러나 평통사와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는 ‘평화 군축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차이도 있는 것 같다.

 

“그렇다. 예를 들면, 평통사는 평화군축운동의 지향을 ‘자주’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참여연대는 ‘민주적 통제’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선호한다.”

 

“민주적 통제라고 할 때 남한 권력에 대한 감시의 의미는 강해지지만,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을 것인가라는 부분이 약해진다. 평통사는 우리 당국자들한테 문제제기를 하기도 하지만, 미국에 직접 문제제기를 하는 측면이 강하다. 평통사가 말하는 ‘자주’란 한-미 관계에서 불평등한 부분은 청산하자는 것이다. 모든 미국 사람을 적대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방위비 분담금 문제 등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지우지돼온 부분들을 개선하자는 것이다. 미군은 나가야겠지만 미국 대사관까지 나가라는 것은 아니다.”

 

─지난 20년 동안의 평통사 활동에 대해 평가한다면?

 

“국내의 어떤 분들이 보면 과격하다 할 수 있지만, 해외에서는 한반도에서 꼭 필요한 얘기들이고 너무나 당연한 얘기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평통사는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사실 1990년대는 세계적으로 군축의 시대였다. 유럽은 군비를 절반 정도로 감축했고, 미국조차 군비를 30% 줄였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그런 문제의식을 제기한 곳이 거의 없었다. 평통사만이 독보적으로 활동했다. 평통사 활동은 강한 분단·안보 이데올로기 탓에 국내에서 저평가된 측면이 있다.

 

평통사의 특성은 ‘집요하다’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한번 물면 안 놓는다. 평통사가 우리나라의 방위비 분담금이나 국방예산 삭감 문제를 제일 먼저 제기했고, 지속적으로 주도해왔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너무 고지식하다, 융통성도 없다’는 얘기도 한다.”

 

“융통성이 없다는 얘기는 원칙의 문제에서 비타협적인 입장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얘기하면 투쟁을 치열하고 헌신적으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가령 2006년 한미 연합훈련 때는 충남 만리포에서 평통사 회원들이 온몸으로 탱크 앞에 나서며 상륙훈련을 저지하기도 했다. 분단과 전쟁을 겪은 상황에서 그런 금기와 성역을 피하지 않으니까 과격한 단체로 인식되는 것 같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자. 평통사를 비롯한 시민사회의 투쟁이 있었지만, 현재 한반도와 동북아 상황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그렇다. 20년 전인 1994년 전쟁위기는 제네바 기본합의로 완화되고, 북핵 문제 해결의 길로 나아갔다. 그런데 지난해인 2013년 전쟁위기는 남북관계나 북-미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과거 냉전시대를 능가하는 대결 양상을 보였다. 지금 현재 북한이 사실상 미국의 유일한 핵공격 대상 국가로 남아 있고,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전략인 ‘맞춤형 억제전략’을 한·미 양국이 공식 채택하고 있다. 위기 가능성이 훨씬 커졌다.”

 

“1990년대는 좀 불안정하지만 모든 것이 조화롭게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2001년에 집권한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패권적 행동을 강화하고, 우리 정부도 그에 순응하면서 대북 관계는 계속 악화되고 동북아 불안정도 높아졌다.

 

─그렇다면 동북아와 한반도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미국이나 한국의 보수·수구 세력이 정권을 잡더라도, 지금과 같은 대결정책을 계속해 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결이 지닌 자기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도 이명박 정부보다는 나은 대북정책을 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남한의 침체돼가는 경제가 활로를 찾기 위해서는 북과 연계해 유라시아로 진출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수정권이라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중장기적으로는 현재의 대결 정책을 바꿀 수밖에 없다.

 

핵 문제의 경우를 보자. 이때 북도 어떤 경우에도 핵을 유지하겠다는 생각은 아닐 것이다. 북의 핵-경제건설 병진노선은 미국의 적대적 대북정책을 폐기시키기 위한 디딤돌이라고 생각한다. 북도 그렇지 않으면 13개 경제개발구 등의 발전계획 실행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한-미-일 동맹전력, 냉전 상황 넘어서”

 

─그런 상황에서 평통사를 비롯한 시민평화군축운동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시민들의 평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굉장히 높아졌다는 데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을 묶어내는 것이 과제이다. 현재 한-미-일 동맹의 대결 전략과 전력은 냉전시대의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따라서 대결체제로 가는 동맹을 약화시키거나 해체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를 위해서는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 미사일 방어체제 구축, 한-일 군사정보공유 협정 체결 등을 최대한 저지해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정착 가능성, 북핵 문제 해결 가능성, 한-미 동맹의 덫으로부터 빠져나올 가능성 등을 대중들에게 제시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패권의 중심이 바뀔 때는 늘 전쟁이 있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동맹이 강화되는 것은 퇴행적인 것이다. 시민사회는 물론이고 보수정부 내에서도 ‘이대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만 따라갈 수는 없다’는 의견이 높아졌다. 또 세월호 사건에서 명확히 드러난 것은 우리나라가 ‘국민은 안전하지 않은 안보국가’라는 점이다. 국가안보에 해마다 34조를 투입하고 한·미·일 군사훈련의 주요한 내용도 탐색구조훈련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세월호 사건에서 무엇을 했느냐는 비판이 높다. 동맹에 치중하는 국가는 국민 안전을 뒷전에 놓는다. 전체적으로는 우리 사회를 평화·복지 국가로 만들어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기를 줄여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평통사 등의 시민평화군축 활동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어떤 정권이 집권하느냐도 중요하다. 이명박 정부는 한국 정부의 힘을, 비록 역방향에서지만 보여준다. 남한 정부가 북-미 관계 개선을 방해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역으로, 만일 2017년이나 2022년 대선에서 남한에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정권이 들어선다면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도 가능하리라는 점을 가르쳐준다. 평통사도 10년 뒤인 2024년에는 2만여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70여개의 지역조직을 꾸리면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중립화 통일, 동북아 평화안보체제의 전망을 열어갈 것이다.”

 

사회·정리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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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효순·미선사건, ‘자주’ 확장에 새 지평

 

지난 5월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회원들이 일본 아베 정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입장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싱크탱크 광장] 역사 바꾼 평통사의 활동들

1994년 이후 한국의 자주평화운동의 역사는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의 발자취와 대부분 겹친다. 평통사가 이들 투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결과다. 평통사는 반공이데올로기로 가득한 세상에서 ‘자주’의 권리 확장을 위해 애써왔다.

 

평통사가 스스로 가장 높게 평가하는 것은 2002년 효순·미선이 여중생 압살사건 대응 투쟁이다. 이 투쟁이 대중적 반미자주투쟁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2002년 6월13일 경기도 양주군에서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처참히 깔려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평통사는 다음날 <한겨레>에 난 1단짜리 기사를 보고는 즉각 현장으로 달려갔다. 한·미 당국은 은폐하기 바빴지만, 현장 목격자를 찾고 검안의사를 만나는 등 진상 파악에 노력했다. 평통사의 이런 노력은 촛불시위라는 새로운 시위문화로 이어져, 수십만의 시민이 미국 대사관을 에워싸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2000년 ‘매향리 미군 국제폭격장 폐쇄 투쟁’은 미국 정부와 미군을 상대로 일궈낸 최초의 승리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미군이 한국전쟁 기간인 1952년 주민들의 땅과 어장을 빼앗아 만든 매향리 폭격장에서 오폭 등으로 주민의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자, 평통사는 주민 및 학생 등과 함께 인간띠 잇기 등 투쟁을 벌여 사격장 폐쇄를 이끌어냈다.

 

2001년 하반기부터 진행한 F-15K 도입 반대 투쟁은 한국에 한참 성능이 떨어지는 전투기를 차세대 전투기라고 강변하며 팔아넘기려는 미국의 모습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성과를 냈다.

 

2003년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과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 저지 투쟁은 우리에게 ‘맹목적인 한-미 동맹만이 살길이냐’는 물음을 던진다. 이 두 기지는 미국의 패권적 군사전략에 따라 ‘중국 봉쇄’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통사는 이 투쟁을 통해 ‘미-중 양강 체제로 세계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남한이 미국의 패권적 요구만 추종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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