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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_대안교육과대안운동

'대안'이 무엇일까?
 초청포럼 중구난방: 대안교육과 대안운동

이정현

‘대안’이 무엇일까?
- 대안교육과 대안운동: 이치열 선생 초청 중구난방


이정현



의왕에서 중등과정 6년제 ‘대안학교'인 <배움터 길>을 운영하시는 이치열 선생님은 ‘탈주냐 전복이냐’에서부터 대안교육 얘기를 풀어나가려는 거 같았다. 학교바깥 대안학교운동은 '탈주 쪽 가닥이다...' 라고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그 흐름은 끝까지 이어졌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 머리 속에는 ‘대안’이라는 것에 대한 어떤 동경 같은 것이 있다. 하지만 전에는 이런 ‘대안’ 짜를 붙인 움직임들에 대하여 나는 약간 심드렁한 편이었다. 특히 ‘대안학교’는 뭔가 그럴 형편이 되어야만 애들을 진학시킬 수 있는, 약간 못마땅한 느낌으로 쳐다보고 있었기도 하거니와, 얼마 전에는 중등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아무튼 ‘부적응’ 학생들만 따로 모아서 가르치는 학교의 파트타임 교사로 일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는 바람에 그것도 ‘대안학교'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알았을 정도로 관심이 없던 터였는데, 이번 토론을 통해서 그 속내들과 고민들을 다소나마 알고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1.
1990년대에 한국사회의 트랜드에 배경을 이루는 두 가지를 이치열 선생은 ‘현실 사회주의 붕괴’와 ‘서태지의 등장’으로 꼽았다. 이 두 가지 배경 속에서 ‘대안교육’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산청의 간디학교로부터 본격화되어 빠른 속도로 ‘대안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해서 현재 전국에는 70여개의 대안학교가 있다고 한다. 인가된 학교와 비인가 학교가 약 절반의 비중이란다.
대안학교에 대해 일반의 인식은 대개 두 가지로 퍼져 있는데, 하나는 "비정상적인 아이들을 위한 교육"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중산층 이상의 ‘그들만의 리그’ "라는 비판이다.
대안교육/대안학교에 대한 문제의식은 근대의 학교교육과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에 연루되어 있었다. 200년 전에 피히테가 ‘독일국민에게 고함’에서 구국강병 인재육성을 위한 체계적 교육이 필요함을 설파한 데서 학교교육의 보편화를 가져온 진보적 측면... ‘적과 흑’ 같은 데서 보여지는 중세의 전형적 특권층 교육을 탈피하고 평민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추려내고,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근대교육의 보편화가 자본주의 시스템 구축과 함께 탄력을 받아 숙련된 노동력 양성과 자본주의 체제 순응형 인간형 육성의 유용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측면에 대한 문제인식이 ‘대안교육'에 대한 이를테면 철학적 바탕이 되는 셈이다. 개성보다는 획일성, 비판보다는 순종..... 들에 대한 반정립이랄까...
 
2.
한국 사회에서 교육현실은 2006년초 OECD통계연보에 따르면, 공교육은 23위, 사교육은 1위이다.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 경쟁사회이고 학벌사회"라는 데 토를 달 사람들은 누구일까? 여하튼 이런 맥락에서 사회를 볼 때, 요즘엔 ‘10대 결정론’이라는 게 있단다. 10대에 준비해서 어느 대학에 가느냐가 인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10대 결정론'은 한국사회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교육 신화 중 하나란다.
1980년대까지는 ‘계층상층의 기회로서의 교육’이라는 교육의 위상이 그래도 유지되었지만, 요즘은 그런 생각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요새는 부모의 자본력과 문화자본에 의해 계급계층이 결정되고 대물림되며, 교육 자체가 그런 계급의 대물림 기제이자 계급재생산의 도구라는 얘기다.
서울에 있는 어느 중학교 선생님 얘기가 소개되었다. 흔치 않은 미담 정도 됨직한 얘기지만 이제는 미담 축에도 끼지 못할 세태가 담긴 사례다. 얘긴 즉, 때가 되면 어떤 학부모가 돈봉투를 싸들고 오셔서 내밀며 하시는 얘기... "가정형편 어려운데 공부는 잘하는 애한테 장학금으로 주라"는 분이 계셨다 한다. 그걸 보면서 그 선생님은, "인제는 가난하면서도 공부 잘하는 애들은 이미 없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는...
인제는 더이상 '개천에서 난 용'은 없는 게 현실이란다.

아무튼 ‘대안’을 모색하는 움직임들이 교육계에서 일어났는데, 1989년에 창립한 전교조운동이 그 하나다. 교육현실에 대해, 공교육 틀 속에서부터 바꾸려는 운동. 그리고 다른 운동도 있었다. 바로 대안학교운동. 왜 애들을 학교라는 제도권 기관에 반드시 보내야만 하는가? 왜 국가공인 교사들에게만 교육을 맡겨야만 되는가. 그래서 학교 바깥에서 새로운 대안교육을 모색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전자가 전복이요, 후자가 탈주라고 하시나 보다....
양쪽이 서로를 배척하는 건 아니지만, 서로 집중점을 달리 잡은 것일 터.... 하나의 흐름은 공교육 개혁운동. 물론 사립학교까지 포함해서 국가공인이라는 면에서 볼 때는 그게 다 공교육일테고, 그 안에서 운동한다는 점에서 전복적 가치가 우선하겠다.
그리고 그와는 달리, 그런 공교육 체계나 틀 바깥으로 ‘탈주’하여, ‘대안교육'을 새로 만들어내려는 운동으로서 대안학교운동은 탈주적 가치를 우선한다고 봄직하다. 이치열 선생은 그 둘이 아무튼 같은 뿌리라고 널찍이 아우른다.
대안교육(운동)의 세계사적 측면은 68혁명으로, 당연시했던 학교 교육에 파열구를 내면서 자본주의 시스템에 반기를 드는 맥락이란다. 섬머힐이니 발도로프니 몬테소리니 알바니스쿨이니,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그런 학교들을 위시해서 수천개씩 생겨나기도 했다는데, 출발은 노동자 자녀교육을 위한 것이었다는 소개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는 자본의 지원도 있어 2,500개 정도의 대안학교가 생겼다는데, 반자본 맥락을 유지하려는 곳에 미쳤다고 자본이 지원을 하였을까....? 자본의 지원이 없어지면서 많은 '대안학교'들이 소멸해갔다니, 시스템 전복이건 탈주건 자본의 품안에 있을 때 자식이지 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걸 넘어서 대안교육/대안학교 운동을 펼쳐 나갈 수 있을까....? 아마 실험은 계속되고 있고, 이치열선생도 그 실험대에 서 있다.
또 하나 드는 생각은, ‘교육’이 갖는 통념과 관계된다. 교육으로 인간을 또는 인간의 생각을 제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환상 내지는 착각. 대안학교/대안교육은 거기서 자유로운가....?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내고있는 인간형에 대한 ‘대안적 인간형'을 결국엔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학교에서는 보통 학생 수십명에 선생 하나... 식이지만, 대안학교에서는 학생 하나에 선생이 11명이 필요하단다. 획일에 반대하고 다양한 생각들이 넘쳐날 수 있게 하는 최대한의 교육여건을 마련하겠다며 차리는 대안학교라서 그렇다는 거다.
그럼, 자연 엄청난 학교운영비가 들어갈 텐데, ‘중산층의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판이 헛소리가 될 수 없는 처지다. 학생들이 내는 월사금도 비쌀 뿐 아니라 그걸로도 충당이 안돼 후원금을 조직해야 한다니까, 이게 취지가 아무리 좋아도 돈에 발목을 걸고 들어가는 사업인거라..... 주객이 야금야금 전도되기도 하고 한꺼번에 홀라당 뒤집어지기도 할 법하지 않은가....
하긴 요즘 입시교육의 현실을 보면, 학원비랑 과외비랑 뭐 학교 월사금으로는 초등부터 중등까지 애시당초 택도 없으므로, 대안학교 월사금이 ‘비싸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어불성설이기도 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미 교육수혜의 불평등 구조는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된 최근 수년 동안보다 훨씬 더 오래되고 심각하게 구조화되어 있어서 사교육비 과대화를 일반화시키는 것 또한 어렵다.

이치열 선생이 강조하는 ‘대안학교’는 그 취지와 지향점이 자본주의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와 같은 교육불평등구조를 해소하고 지양하는 데 있는 만큼 고민도 또한 많아 보인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월사금을 받지 않을 예정이고, 대안학교라면 이미 그렇게 운영되는 곳도 더러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대안학교 운동의 취지가 아무리 곱다한들 그것이 ‘자선사업’이 아닌 이상 학교운영 재정은 빤한 것이다. 결국 ‘그들만의 리그'가 되는것이 지금은 현실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중세특권층 교육을 탈피해서 보통교육을 역설했다는 피히테를 경유한 자본주의 형 인간양성 교육을 넘어서 대안교육을 창출한다는 대안학교는 중세 교육현실과 시대가 다르다는 것 외에 어떤 변별점이 있다는 것인가.
 
4.
1980년대 말, 전교조운동이 부상하면서 대안학교에 대한 논란도 함께 일어나게 되었다. 제도적 틀을 변혁하는 차원과 제도 바깥에서의 대안을 모색하는 차원이 같이 만나게 된 것이 80년대 말부터였고 90년대에는 거기에 포스트적 흐름들이 떠오르면서, 평화, 인권, 자율 등등을 기치로 한 세력화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대안교육운동 내에서도 오로지 학교 바깥에서 생태, 평화를 축으로 하는 운동이 있는가 하면 학교중심은 문제긴 하지만 그렇다고 학교를 백안시할 수는 없다는 문제인식도 있어서 이 두 관점이 대립되어 있다는 소개다. 현재 대안교육운동의 주류는 전자= 학교 바깥에서의 생태, 평화 운동 쪽이라 한다.
대안교육과 대안학교 운동을 둘러싸고도 수없는 고민들과 새로운 실험들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학교교육 내에 있는 전교조운동, 공교육운동과 대안교육운동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운동, 학교교육 바깥에서 생태와 평화를 축으로 하는 운동.... 이렇게 펼쳐지고 있는 중이란다.

대안교육체 현황은,
 
1) 인가: 초등은 없음. 교육부에서 인가를 절대 안내준단다. 이유는 ‘국민의무불이행’과 ‘초등교육이 좋아져서 대안필요 없음’이고, 중등은 교육관료들도 문제인식을 하고 있어서, ‘특성화 학교’로 인가를 내주고 있다. 특성화학교는 입시에 초점을 두고 있고 공교육에 대한 사회구조적인 문제의식이 아니라 공교육을 개선하는 형태라 ‘대안학교’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게 이치열 선생의 생각이다.
 
2) 비인가: 전제는 대학입시로부터는 자유롭고, ‘인간교육’을 기치로 한단다. 아이들을 실험대상화 하는 것이 조심스러우나 ‘교육적 실험’이라고 덧붙인다.
하여튼 (1) 농촌에 기숙학교 방식의 전원학교, (2) 도시형 학교 가 있는데, 초등학교는 이런 도시형 대안학교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반은 ‘공동육아운동’이다. ‘공동육아’를 바탕으로 보육협동조합운동이 일고 있고, 그 아이들이 진학을 하기도 하지만 대안학교로 가기도 한다.
그 흐름이 만만챦아 대안학교운동이 일어나는 가운데서 학교교육체계에는 ‘정원 외 관리’라는 게 생겼다고 한다. 대안학교 진학생과 조기유학생들이 늘어나니까, 이들에 대하여 제도학교에 학적을 두게 하여 학생들을 관리하는 교육부의 정책제도란다.
 
3) 홈스쿨: 라다크(티벳) 지역의 여성 미래학자 말마따나, 교육에서 ‘오래된 미래’는 홈스쿨링이란다. 생활 속에서의 가정교육.... 가정은 참 많은 숙제들이 들어있는 공간이다.... 전통적으로 여자/마누라들의 공간이면서도 그들이 주인이 아닌 공간.... 동시에 이제는 그런 ‘전통’이 무너지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또한 그 ‘무너짐’을 예방하고 가부장제를 이어나가기 위해 사회적으로 더 많은 강제를 부여해주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부의 ‘진보적 교육 학자’ 중에서 학교불용론을 주장하기도 하면서 홈스쿨링을 내세운다는데, 예로 이반일리치가 거론된다. 가톨릭 신부이자 교육학자라는데, ‘학교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단다. "교육은 얽매이고 순치하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라는데.... 결국 ‘가정’이 문제가 되고, 가족과 가부장제 질서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인류사상의 난제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5.
세간의 ‘대안교육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이치열 선생은 앞서 얘기했던 ‘학교교육부적응학생 대상’이라는 것과 ‘중산층의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판, 그리고 ‘작은 학교’에서 과연 아이들의 사회성과 인간성이 제대로 길러지겠느냐는, 세 가지 비판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폈다.
 
1) 학교제도교육 부정응 아동과 청소년 대상이라는 비판은, 현실이기도 했지만, ‘교육적 부적응’이라는 딱지가 의미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고민한다. 문제는 결국 교육현실이 갖고 있는 구조적 모순의 발현체다.... 앞으로도 제도교육이 이를 수용하지 못하면 여전히 대안교육에서 이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라는 논지.
 
2) ‘중산층의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판, 이것은 사실이다. 비인가 학교의 경우, 국가로부터의 지원은 한푼도 없다.... 본인이 운영하고 있는 배움터 길 역시 그러해서, 기본운영비용에서부터 일체를 자립해야 하는.... 재원 중 가장 큰 비중은 학부모의 기증, 후원회, 재정사업.... 자본력 없는 부모의 자식들이 공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대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는데, 이런 지향이 이후 대안교육의 성패를 가늠하는 변곡점이라고 풀어놓는다...
 
3) ‘작은 학교’에서 과연 아이들이 제대로 사회성과 인간성을 체득할 수 있겠는가 하는 비판에 대해서는, 관계성/사회성이 수량적인 게 아니라 질적인 것이라는 것을 일축한다. 기존 지배질서에의 ‘적응’을 사회성이라고 하는 게 맞는 거냐...라는 얘기다. 학교부적응이라느니, 사회부적응이라느니.... 역시 누가 어디에서 쓰느냐에 따라 논법이 겨누는 곳이 달라지는 법....

6.
 국가권력과 대안학교의 긴장은 팽팽하단다. 국가로부터의 재정자립 문제가 있고, 학력을 인정하네마네 하는 문제가 가장 큰 문제로 걸려 있다. 내 생각엔 자본으로부터의 재정자립 문제도 자연 거기에 들어있고, 그것은 결국 사회와 가족관계까지 작동하고 있는 착취관계로까지 문제설정이 나갈 필요가 커 보인다.
이치열 선생은 ‘대안’의 스펙트럼은 대단히 넓다고 강조한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양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 대안운동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향하는 대안운동에서 자본이 가장 굳건하게 터하고 있는 게 있다. 가부장제. 그게 빠진 대안이라면 절반의 또는 절반도 안되는 대안운동, 그래서 이 세상 절반의 사람들, 여성들에게는 대안도 아닌 운동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멋져 보이는 얘기가 소개되었다: 프레이리의 "검증되지 않은 가능성" -- 그걸 향해 대안학교운동을 펼쳐나간다는 것이다. 교육은 심층과 무의식까지 미치는 거고, 교육운동은 분명히 지배이데올로기와의 투쟁이라 한다... 지배이데올로기와의 투쟁.... 그렇다면 자본의 지배, 그리고 성별 지배관계까지 확대되어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결국 ‘교육 철학’이 되겠다..... 또한 사회를 어떻게 보는지, 계급은 또 어떻게 보는지, 계급재생산과 대물림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 등등의 문제인식과 함께 또는 더욱 더 중요하게 가부장제에 대한 문제인식과 ‘대안’이 모색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넓은 의미로 볼 때 ‘대안교육'은 "학교교육 밖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교육"이라는 이치열 선생이다. 대안교육운동은 "대안적 측면을 스스로 소멸시켜가는 운동"이라고도 강조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엄격한 가부장제 지배이데올로기를 깨지 않고는 어렵다"는 선생의 문제인식이 소중해 보인다. 가부장제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해 대안교육운동이 장차 어떤 방향을 취할지가 무척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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