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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11
    PIFF-루마니아 영화 두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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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8/10/05
    PIFF- 외로운 사람들이 나오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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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8/10/03
    PIFF(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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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8/08/31
    김동원 다큐영화 <한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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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FF-루마니아 영화 두 편

올해 영화제에서는 말레이시아 영화 <판촉>에서 시작하여 프랑스 영화 <착한소녀>까지 열 몇 편을 보았다. 10월 3일부터 4일 하루 빼고 6일간 오후 또는 저녁마다 영화관을 찾은 것이다. 얼마 전까지는 주로 아시아 영화들을 보고 "월드시네마"로 묶인 영화들은 보지 않았으나 이제는 그 영화들도 본다.  

 

이번에 본 것 중에는 영화제에서 따로 코너를 만든 루마니아 영화도 두 편 들어 있다. 그 중 하나는 <기묘한 피크닉>. 
감독은 사람 사이의 하찮은 관계로 이어지는 비루한 삶을 조롱하는가 하면, 연민의 시선으로 보았다가, 아직 남아있는 정치적인 공포를 드러냈다가, 농담도 걸었다가,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데 그래도 그렇지, 시종일관 카메라를 들고 찍은 영화는 끊임없이 흔들려서 보는 사람의 눈을 매우 피곤하게 한다. 계속 그러다 보면 객석에 가만 앉아 구경하는 사람이 멱살까지는 아니더라도 머리카락이라도 잡혀서 흔들림을 당하는 느낌 같은 걸 받는데, 감독은 끊임 없이 흔들리는 사람들(굳이 루마니아 사람들만의 것은 아닐 테다)  일상의 모습을 "굳이 들여다 보고 또 굳이 보여줘야 하는" 자신의 일이 어떨 땐 짜증스럽고 그걸 관객들도 알아주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썩 매력적인 영화.
물론 매력의 90%는 조금 과장해서 창녀 역을 맡은 여배우로부터 온 것이다.



 

다른 한편 <플라워 브리지>는 루마니아가 아니라 그 이웃나라 몰도바공화국에 사는 어떤 농부네 집을 찍은 다큐였다. 영화는 엄마를 전화로만 만날 수 있는 세 아이와 농부(아이들은 다른 나라에 일하러 간 엄마를 몇 년째 볼 수 없다)가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들이 너무 예쁘고 착해서 픽션인가 싶을 때면 그 아버지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농사 걱정 등을 이야기한다. 몇 개월동안 이런 식으로 만든 다큐를 교육방송 페스티벌 같은 데에서 몇 번 본 것도 같다.
이 영화를 보고 기분이 좋았었는데 그 이유는? 몰도바공화국의 따뜻한 시골풍경? 삶이란 대부분의 곳에서 언제나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안도감?
엄마가 빨리 돌아와 함께 살기를.

그러고 보니 엄마를 떠나 아빠와 살아가는 아이는 파키스탄 영화 <접경지방의 람찬드>에서도 보았다. 인도와의 국경분쟁 와중에서 5년간 그 아이를 키운 것은 어처구니 없게도 감옥이었다. 아버지가 함께 있었지만 그 아이는 깊은 내상을 가진 닳을대로 닳아버린 청년으로 자랄 수 밖에 없다. 홀로 남은 엄마의 삶이 외롭고 고달프기는 말할 나위도 없고. 
결국 흙으로 된 아주 작은 초가집들이 모인, 궁핍하지만 인정많은  고향 마을로 돌아온 청년의 삶이 거기서 다시 계속되기는 아마 어려울 것이다.  그는 아마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고 평생을 감옥 속에서처럼 살 것이고 악몽 속에서 살 것이다. 세련된 영화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파키스탄 사람들, 분쟁지역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새삼 읽을 수 있는 영화.
비록 이미 신전도 다 허물어져 어둡지만, 누구를 탓하지도 못하고 작은 향을 피워 올리는 그들에게 저녁 노을같은 신의 손길이 가득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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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FF- 외로운 사람들이 나오는 영화

개막일로부터 치면 나흘째이고 극장에서 영화를 틀기 시작한지는 사흘째,

일요일 오전 극장 앞은 그저께보다 훨씬 한산하다.  거리에는 단체로 건너 온 일본인들이 계속 보이고, 외국 군함들이 부산항에 많이 들어왔다더니 과연 검은 피부를 가진 외국 해군들도 여럿 보였다.

 

금요일에 보았던 우즈벡 영화 "유르타"에는 초원에서 양을 키우며 사는 남자가 나온다. 그는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데 그가 만든 울타리 속에 젊은 아들까지 가두기는 어려운 법이다. 아들이 떠나버린 상실의 자리에 벙어리 처녀가 찾아오고 온갖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이미 서로의 외로움을 넉넉히 헤아리고 있다. 소비에트의 온갖 화려하고 공허한 말들이 쌓은 담을 말 못하는 이와의 소통으로 허무는 것이다. 두 외로운 이가 함께 하는 집은 돌아온 탕자를 품어 갱생시키기에도 모자람이 없다.

 

일요일 오후 "델타"에서도 강하구 마을을 찾아와 집을 짓는 남자와 그곳에서 살아온 여자가 서로의 정처없음을 한 눈에 알아본다. 지상에서 마음 둘 데 없이 떠돌기만 했던 그들이 집을 짓는 곳은 강물 위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들은 그 집에서 살지 못한다. 타지에서 굴러들어온 남자를 마을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친 젊은이들은 남자한테 여자를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그녀를 남자에게 "넘겨줘야한다면"  적어도 공동으로 나눠야한다고, 즉 그녀를 창녀로 만들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마을사람의 시기와 질투는 그들을 영원히 갈라놓아버린다.

 

성, 피임, 낙태 등에 대해 상담해주는 기관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상담 사례들을 다큐처럼 꾸며서 만든 프랑스 영화의 제목은 "신의 사무실"이었다. 상담해주는 이들도 거의 여성이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모두 여성들이다.  보기 대단히 민망할 정도로 남성들은 그야말로 쏙 빠지고 섹스, 피임, 임신, 낙태, 출산의 두려움, 육아 책임, 불안한 미래 등이 모두 여성들의 몫이다.

새삼, 여성들이야말로 진정 외로운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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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FF

다시 영화제가 시작되었다.

지난 몇 해동안 집 근처에 있는 해운대 부근 영화관에서만 영화를 보다가(한 편 보고 집에 와서 점심 먹고 다시 걸어서 영화보러 갈 정도로 집과 영화제 상영관이 가깝다) 이번에는 옛날 "시내"인 남포동 쪽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그 지역이 쇠락해버렸다는 소문을 자꾸 듣게 되니 그 옛날 거리를 걸어보고도 싶었던 것이다. 오늘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구두방 골목에는 구두 가게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번화하던 백화점들도 모두 사라져버렸는가 하면 낯익은 가게들도 문을 닫거나 게임장 따위로 업종을 바꾼 경우가 허다하였다.

 

오늘은 참 오랫만에 대영극장에서  말레이시아, 우즈베키스탄, 이탈리아 영화 한 편씩을 보고 왔다. 두 편을 보고 나니 고단하여 마지막에 본 이탈리아 정치를 담은 영화는 제대로 정신차리고 볼 수가 없었다.
금년에도 영화보러 오는 사람들은 20대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극장이나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다른 지방 말들이 많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도 꽤 많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들 덕분에 지금까지 표가 잘 팔리고 영화제 기간동안 몇 곳이 북적대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영화제를 찾는 사람들의 층이 대단히 얇고 이 행사가 부산시민들과 겉돈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되었다. 
비록 여기서 썩 낯익은 영화들을 많이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영화제가 십여년 연륜을 쌓았으면 그만큼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여러 연령대 부산시민들이 기다렸다가 표를 예매해서 찾아오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매년 영화제에는 이,삼백편 영화들이 상영되지만 볼 수 있는 것은 겨우 열댓편이 고작이다.
마치 인생의 숱한 길들이, 인연이 닿을뻔했던 허다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머지 영화들은 볼 기회가 없다. 아마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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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 다큐영화 <한사람>

해운대 시네마테크에서는 목요일 밤이면 독립영화를 보여준다. 무료로 볼 수 있지만 아주 드물게만 가게 된다. (2008. 8. 28. 약 50분)
 
<한사람>에서 "한 사람"은 미국인이었으나 몇 십년을 한국에서 살다가 2000년에 한국에서 죽은 가톨릭 신부를 말한다. 영화는 여러 시위 현장에서 보이던 그의 모습도 보여주는데, 감독이 그 "한 사람"을 통해 굳이 한국 현대사의 한 시대를 말하려한 것 같지는 않다.  
 
다큐 영화라지만 감독은 생전에 그와 인터뷰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김동원이 앞서 만든 <송환>과 같응 현장감은 없다. 대신 감독은 그 신부가 죽고 나서 자료를 모으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였다. 이 사람 저 사람 여럿이 나와 기억을 말하는 영화는, 도리없이 어수선할 수밖에 없다. 대체로 영화는 죽은 이의 초상을 완성해 가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말하는 여러 조각의 기억들을 툭툭 던지기만 한다. 다른 방법이 또 무엇이 있기나 하곘는가. 누구든 그 사람의 한 부분만을 만날 수 밖에 없었으므로.
그 기억들을 맞춰가면 죽은 이의 부끄럽고 외로운 등줄기를 조금씩 따뜻하게 덥혀줄 수나 있을지.
우리가 죽은 이에 대해 "한 사람"이 살다 갔다고 말할 때의 그 무게가 실려 올지.
어쩌면 감독은 가까운 사람에 대한 우리 기억이 파편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 기억들을 모아 놓은 영화도 이처럼 산만하고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런 것을 보여줌으로써 영화 제목으로 삼은 "한 사람", 즉 모든 개인 개인의 존재가 얼마나 커다랗고 온전한 하나의 세계인가를 말하려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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