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결혼반지의 무게 [제 838 호/2008-11-17]

학창시절 화학을 배운 사람들은 “칼카나마알아철니주납구수은백금”으로 이어지는 이온화 경향을 기억할 것이다. 이 암호 같은 글귀는 각기 칼륨(K), 칼슘(Ca), 나트륨(Na), 마그네슘(Mg), 알루미늄(Al), 아연(Zn), 철(Fe), 니켈(Ni), 주석(Sn), 납(Pb), 구리(Cu), 수은(Hg), 은(Ag), 백금(Pt), 금(Au)을 의미하는데, 앞쪽에 위치한 금속일수록 이온화 경향이 크기 때문에 쉽게 산화된다.

그런데 이 중에서 금(gold)은 이온화 경향에서 가장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곧 금이 쉽게 산화되지 않고 용액에도 잘 녹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때문에 금은 예로부터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대표적인 귀금속으로 인류역사에서 항상 귀한 대접을 받았다.

세계 각국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금의 용도는 무엇일까? 아마도 결혼반지 아닐까? 우리나라에서는 결혼반지로 다이아몬드 반지를 많이 선호하지만 서구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는 결혼이 아닌 약혼반지로 통용된다. 서구인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별다른 장식이 없는 심플한 금반지를 결혼 선물로 교환한다. 다이아몬드 반지가 결혼이 아닌 약혼반지로 통용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다이아몬드 반지는 르네상스 초기에 베네치아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당시 유럽 최고의 무역국가였던 베네치아에는 뛰어난 보석 세공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베네치아에서도 물론 다이아몬드 반지는 고가에 살 수 있는 귀중품이었다. 그래서 유럽의 귀족과 부자들은 베네치아에서 만들어진 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를 약혼식 때 신부에게 줌으로써 신부의 몸값을 지불한 셈으로 쳤다고 한다. 알고 보면 다이아몬드 반지에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유래가 숨어 있는 셈이다. 다이아몬드 반지가 탄생한 해양도시 베네치아에서는 베네치아와 바다의 상징적인 결혼식이 매년 열리는데, 이때 베네치아 시장이 바다에 던지는 결혼반지 역시 다이아몬드 반지가 아닌 금반지라고 한다.

아무튼 결혼식장에서 신랑 신부의 손가락에 끼워지는 금반지는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의 맹세를 대변한다. 이는 금이라는 금속이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사랑이 영속할 것이라는 믿음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흔히 알고 있는 지식과는 달리, 금은 다이아몬드보다 더 강한 셈이다. 다이아몬드는 불 속에 넣으면 연소되어 이산화탄소로 변한다. 그러나 금은 비록 불에 녹아 형태는 변하지만 그 물리적, 화학적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도 금은 다이아몬드보다 결혼에 더 어울리는 귀금속인 듯싶다. 그렇다면 금은 과연 영속적일까?

오스트리아 빈 공대의 연구원인 게오르그 슈타인하우저 박사는 결혼을 하면서 1년간 자신의 금반지가 얼마나 닳을지를 알아보겠다는 다소 엉뚱한 결심을 했다. 슈타인하우저 박사는 결혼 후 매주 목요일마다 자신의 금반지를 초음파 세척기를 사용하여 깨끗이 세척한 후에 정밀한 저울을 사용하여 질량을 측정했다. 그가 끼고 있는 5.58387 그램짜리 18캐럿 금반지는 매주 약 0.12mg씩 닳고 있었다. 결혼한 지 1년 후에 슈타인하우저 박사의 금반지는 6.15mg 줄어들었다. 대략 0.11% 정도 줄어든 셈이니, 결혼 50주년인 금혼식 무렵에는 결혼식 때 주고받은 금반지의 1/20 이상이 닳아 없어진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계산은 물론 결혼 후 계속 금반지를 빼지 않고 끼고 있다는 가정하에서다. 아무튼 이 비율로 계속 닳는다면 금반지도 900년 후에는 완전히 닳아 없어질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렇게나 오래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부부는 지구 상에 없을 테니, 이 정도면 금이 변하지 않는 귀금속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신랑 신부가 조금 더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일한다고 하면 이야기가 약간 달라진다. 힘든 노동을 지속적으로 하는 경우에는 금반지의 닳는 속도가 더 빨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래 해변에서 놀다 온 후에 박사의 금반지는 0.23mg, 정원 일을 한 후에는 0.22mg이 닳았다. 스키를 타고 온 후에는 0.20mg, 록 콘서트장에서 열심히 박수를 친 주에는 0.17mg이 닳았다고 한다. 이에 비해 독감에 걸려 침대에 누워 있었던 주에는 반지가 거의 닳지 않았다고 하니, 결혼반지를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는 일을 하지 않거나, 아니면 자주 앓아누워야 하는 것일까?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인구 170만인 빈에 약 30만 커플이 있고, 이 중 약 60%가 18캐럿 금반지를 끼고 다닌다면 1년에 2.2kg이 닳고 금액으로는 약 6만 달러가 없어지는 셈이다. 비슷한 공식을 우리나라에 적용하면 매년 61kg의 금반지가 닳아 없어지고 약 1,640,000 달러가 사라진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재미난 연구결과는 학술지인 골드 불루틴(Gold Bulletin)에 발표되었고, 미국화학회 소식지에도 요약 소개되었다. 슈타인하우저 박사는 지금은 6개월에 한 번씩 결혼반지의 무게를 재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를 자신의 결혼생활 내내 지속할 생각이고,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마감하는 마지막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산화되지 않는 성질, 즉 잘 부식되지 않는 성질 때문에 고대 이후 금은 장신구 외에 화폐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유명한 투탕카멘의 데스마스크처럼 왕이 죽은 후, 부장품을 만드는데도 금이 사용되었다. 또한 CD 등의 데이터 저장 층에 금을 사용하면 저장의 신뢰도를 증진시켜 준다.

잘 부식되지 않는 성질 외에도 금은 전기와 열을 잘 전달하는 성질이 있어서 전자부품에서 빠질 수 없는 재료다. 매년 수백 톤의 금이 TV, 휴대전화, 컴퓨터, 반도체 등의 제작에 쓰인다. IT 강국 코리아는 금의 희생(?)을 통해 이룩된 셈이다.

금은 얇게 실이나 막 형태로 가공하기 쉬운 특성을 가지는데, 이를 이용하여 유리창을 아주 얇은 금박으로 코팅하면 빛은 투과되지만 열은 반사하는 성질을 갖는다. 그래서 항공기 조종석의 창을 얇은 금으로 코팅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불투명한 금박을 우주선의 취약부분에 코팅하면 우주공간에 존재하는 산소 라티칼이나 강렬한 방사선으로부터 우주선을 보호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다양한 쓰임새가 있는 금이 가장 많이 보관되어 있는 곳은 반도체나 우주선, 여인의 손가락이 아니다. 전 세계의 금 중 상당량은 가공되지 않고 금괴 형태로 은행의 금고에 쌓여 있다. 또, 금 자신은 잘 부식되지 않는 ‘깨끗한’ 금속이지만 금을 채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파괴가 너무 커서 채금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더러운 산업’으로 손꼽힌다. 특히 아프리카의 빈곤국가들이 채금산업으로 인해 대규모의 하천 오염과 열대우림 파괴라는 피해를 입고 있으며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고단한 채굴작업에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은 금이라는 귀금속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글 : 이식 박사(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책임연구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