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11/05

이 나라 법! (하종강의 노동과 꿈에서 "산하"글 펌)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라는 질문을 종종 하고 듣게 된다.
나는 이 말에서 두 가지를 읽는다.
하나는 귀신도 관(官)을 무서워했듯, 우리 조상들 이하 우리는 무법천지보다는 촘촘하고도 세밀한 법의 다스림에 더 익숙했다는 것 하나, 그리고 그 법이란 사람을 납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골탕 먹이고 짜내고 뒤통수 때리는 데에 더 수완을 발휘해 왔다는 것. 오죽하면 말도 나오지 않을 만큼 어이가 없는 상황에서 '법'을 갖다 대겠는가.

 "짐이 국가다."라기보다는 "법이 짐이다."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 그 법이 아둔한 혼군이 되었을 때, 또는 사악한 폭군이 되었을 때 죽어나는 것은 결국 백성들일 수 밖에 없고 법은 호랑이보다도 무서울 수 밖에 없다.
 
하물며 나랏님 말끝마다 묻어나는 것이 공정한 사회요, 경찰서 현관마다 붙어 있는 것이 준법의 질서인 나라다.
법을 배우지 않고는 출세의 대열에 끼는 것이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우며, 몇 회 졸업생 아무개 사법고시 패스했다면 모교 담장이 축 합격 플래카드로 가려지는 땅이다.
이런 곳에서 어찌 법이 감히 어두울 수 있으며 설마 간교할 수 있으랴. 행여나 그렇다면 그 위에서 살아가는 별 볼 일 없는 이들은 죽었다고 복창하는 것 외에는 수가 없을 것이다.
두 팔을 벌리고 물기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를 되뇌는 것 말고는 외나무다릿길도 없을 것이다.

 5월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4부(이창형 부장판사)는 장례식장 주변에서 피켓을 들고 행진을 한 혐의로 기소된 사회단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회원 김모씨 등 4명에게 1심과 마찬가지로 벌금 70만원을, 이모 씨 등 2명에게 벌금 50만원을 각각 선고했다.
재판부는 "김씨 등이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일렬로 장례식장 앞에서 병원 정문까지 함께 걸어간 것은 여러 사람이 같은 목적을 갖고 일반인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는 장소에서 행진해 불특정 다수의 의견에 영향을 주는 행위이므로 집시법이 정한 시위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재판부에 따르면 “집시법상 신고의무가 면제되는 것은 학문, 예술, 체육, 종교, 의식, 친목, 오락, 관혼상제, 국경행사에 관한 `집회'이지 `시위'가 아니"라고 한다.
 
멀쩡히 한 회사를 다니던 젊은이들 수십 명이 백혈병으로 떼죽음을 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는데, 회사 측은 전혀 책임이 없다고 우기는 판에, "다른 사람들은 멀쩡한데 왜 그 사람들만 그러냐?"는 어이없는 질문만 무성한 터에, 꽃에 비유하기도 아까운 나이에 죽어간 사람의 장례식에서 울부짖으며 누구를 욕한 것도 아니고, 그 관짝을 끌고 이태원의 회장네에 쳐들어간 것도 아니고, '장례식장에서 병원 정문'까지 아무 소리 않고 걸어가기만 했는데 '신고 의무'를 다하지 않았으니 유죄라는 것이다.

그래도 법은 법이다.
법이 그렇다면 그렇다고 치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억울하고 아파도 그 법의 서슬은 나 뿐 아니라 모두에게 공통으로 푸르리라는 믿음이라도 있어야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법이지만 감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날 한 나라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야윌 대로 야위고 허할 대로 허한 법에 대한 신뢰의 허리를 꺾는다.
 
19일 새벽. 회사의 직장 폐쇄에 항의하던 유성기업 노조원들에게 회사측 용역이 몰던 차가 돌진했다.
술 취해서 횡단보도를 건너던 사람을 친 게 아니다.
아차 주의를 놓쳐 갑자기 튀어나온 누군가를 들이받은 게 아니다.
회사가 부른 용역이 대포차를 가지고 노조원들의 대열을 덮쳤다. 다친 사람만 13명이다.
이건 한 곳에 몰려 있는 사람들에게 차량이 돌진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고의적이고 의도적으로 뼈와 살로 이뤄진, 그리고 목청 돋워 뭔가를 외치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쇳덩이를 맹렬하게 갖다 부딪친 사실을 액면 그대로 전달할 뿐이다.
명동 길거리를 막고 물어 보자. 요즘 외국인도 많던데 상관없이 물어 보자. 이 상황이 '교통 사고'인가. 외국인이라면 그 나라에서는 이걸 교통사고라고 치는가.
 
 사측은 용역 한 명을 자수시켰다.
대치 중에 차량을 돌진시켜 사람을 깔아뭉갠 혐의에 경찰은 놀랍게도 '교통사고 특례법'을 적용하여 '뺑소니'로 처리한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문제의 용역의 죄는 정상적인 주행 중에 전방 주시 태만으로 13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차로 치고는 피해 보상과 피해자 구완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그냥 집에 가 버린 것 뿐이다.
이게 법인가. 이걸 우리는 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 법이 다스린다는 미명으로 우리는 이 나라를 법치국가라 칭할 수 있는가.
 

 이렇게 해 놓고도 회사측은 '불법파업'을 이유로 빨리 공권력을 동원하라고 아우성이며, 전경련은 '현대자동차가 멈추고 있다."며 어서 밟아 달라고 안달을 하고 있다.
쌍용 자동차 진압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긴다는 경찰청장 휘하의 기동대는 이미 공장 밖에 진을 치고 있다.
그들은 합법인가. 정히 그렇다면, 헌법이 보장하고 노동법에 명기된 파업의 권리를 행사하는 노동자는 어떻게 불법인가. 현대자동차를 멈추게 하면 불법인가.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경제에 손실을 끼칠 수 없다는 법이라도 있는가.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는가.
 

 사람이면 다 사람이 아니고 사람 같아야 사람이듯이, 법도 법 같아야 법인 법이다.
이런 판국에 법을 가르치는 것은 강한 자에게는 오만을, 약한 자에게는 굴욕을 깨우치는 격일 뿐이다.
이런 형국에 그래도 법을 지켜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따르지 않으면 죽음 뿐이라는 폭군의 경고에 지나지 않는다.
다리가 돌아가고 얼굴이 터지고 귀가 찢어진 채 아스팔트에 내팽개쳐진 '산업역군'들이 묻는다. 파업 후 시간당 손실이 엄청나다는데, 그만큼 돈을 벌어 주던 유능한 일꾼들이 악을 쓰며 질문한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그에 대답할 의무가 있다. 대답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img src="http://www.hadream.com/zb40pl3/data/free/301675156.jpg">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누가 강풀의 26년 영화화를 막는가!

31년 전, 그러니까 1980년 5월에 몇 줄씩 검은 띠로 문장이 지워진 채 발행되곤 하던 신문이나 사회안전과 국가안전을 보장하겠다는 국보위의 노고를 치하하는 방송에서 광주의 소요는 고정간첩과 거기에 휘둘리는 폭도들의 소행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그리고 군이 성공적으로 간첩과 폭도를 소탕했다는 뉴스가 이어졌다.
우리는 그때 그곳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흉흉한 소문을 듣게 되었고, 광주의 소요를 성공적으로 진압해서 사회안전과 국가안보를 지킨 공을 내세워 그해 가을,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그해 5월,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도시에 흐른 피를 제물삼은 권력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히는 싸움이 길고도 험하게 이어진 것이. 처음에는 소문이었다.
간첩도, 폭도도 아니라더라, 일반 시민들이었다더라, 만삭의 임산부를 어찌 했다더라, 어린 학생도 무참히 당했다더라, 총만 쏜 것이 아니라더라, 대검으로 막 쑤셔댔다더라...

외국기자의 비디오에 의해 밝혀진 5월 광주의 진실

 그러다 은밀히 외국 기자가 촬영한 비디오가 돌았고, 사진전이 열렸다.
처음에는 지하공간에서, 나중에는 학교며 교회, 성당, 시민모임같이 사람들이 모이는 여러 곳에서. 무시무시한 진실이 ‘말’이나 글이 아니라 생생한 ‘영상’으로 눈앞에 되살아나면서 아무도 제3자가 될 수 없었다.
학교에서, 일터에서, 거리거리에서 진실을 본 자, 불의를 참을 수 없는 자들이 ‘물러가라’고 외치다 또 많은 이들이 피 흘리고, 목숨을 잃었다.
마침내는 전국 방방곡곡 모든 도시가 ‘광주’가 되고서야 결국 군사독재는 끝났다.

 군사독재가 끝났다고 해서 바로 ‘그해 5월, 광주’도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한 도시를 제물 삼아 권력을 잡았던 이에게 죄를 묻기보다 ‘화해와 용서’라는 이름으로 뭉개버린 정치놀음은 총탄과 대검날 못지않게 역사와 진실을 난도질했다. 
‘광주 비디오’와 ‘광주 사진’을 통해 영상의 힘을 알게 된 저들은 한사코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했고, 그래서 5·18이 영화나 드라마로 다루어지지 못하도록 했다.

 '오! 꿈의 나라' 상영 집요히 막은 권력의 '공륜'

 그러므로 정치권에서 5·18에 대한 최초의 장편 극영화 <오! 꿈의 나라>(1989년)가 16mm독립영화로 제작되었을 때, 사전 제작신고 및 사전 심의 규정을 어겼다며 불법으로 몰아 상영을 막고자 기를 쓴 것도 당연하다.
영화를 제작한 독립영화집단 장산곶매는 “16mm 영화가 제작신고나 사전심의 없이 공공장소에서 공연되어 왔는데도 유독 이 영화를 탄압하는 것은 광주민중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이기 때문에 이의 대중적 공개를 방해하려는 의도이며 영화인들은 이 탄압이 민족영화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을 전제로 한 것으로 인식하면서 결연한 투쟁으로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수호할 것을 다짐”했지만,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륜)의 규정을 빌어 벌어진 상영금지 공작은 집요했다.

<img src="http://www.mediatoday.co.kr/news/photo/201105/95309_82499_495.jpg">

    
영화 '오! 꿈의나라' 포스터

 
그 공륜은 1996년 헌법재판소로부터 헌법이 금지하는 사전검열기관이라는 판정을 받아 영상물등급위원회로 이름과 역할이 바뀌게 되었고,  <오! 꿈의 나라>는 ‘표현의 자유’ 를 위한 영화 운동의 선례로 남게 되었다.
<오! 꿈의 나라>의 각본은 <선택>의 홍기선 감독과 <알 포인트>의 공수창 감독이, 연출은  <접속>의 장윤현 감독,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이은 감독,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의 장동홍 감독이 공동으로 참여했다.

<img src="http://www.mediatoday.co.kr/news/photo/201105/95309_82500_496.jpg">   

영화 '부활의 노래'

 
이렇게 여전히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던 시기인 1990년, "한국영화에 닥쳐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영화진흥과 창작자유를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강하고 자주적인 영화를 만들어내는 일 자체는 계속 영화인의 책임으로 남습니다." 라는 인식을 가진 젊은 영화인들이 모여 독립 프로덕션 '새빛 영화제작소'를 만들고, 첫 영화로 만든 이정국 감독의 <부활의 노래>가 5·18에 대한 최초의 35mm 극영화이자 정식 제도권의 스크린에서 상영된 영화다.

그러나 여전히 심의라는 암초에 걸려 <부활의 노래>는 무려 28분13초가 싹둑 잘리고서야 극장에 걸렸고, 관객은 상처투성이로 만듦새가 온전하지 못한 상태의 영화를 보려하지 않았다.
3년이 지나서야 공륜 재심에서 무수정 통과되었지만 이미 대중의 관심은 식어버린 뒤였다.

<img src="http://www.mediatoday.co.kr/news/photo/201105/95309_82497_494.jpg">   


영화 '박하사탕'

 

'박하사탕'·'화려한 휴가' 대중적 성공 뒤의 아쉬움…'박제화' 아닌 현재진행형 그려야

이렇게 가위질을 일삼던 공륜이 퇴출된 해인 1996년, 영화가 비로소 검열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만들어진 장선우 감독의 <꽃잎>은 멀티플렉스 이전 시기에 서울 관객 21만을 불러들여 5·18에 대한 영화로는 처음으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1999년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47만, 그리고 2007년에 개봉된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는 무려 730만이라는 흥행 성적을 기록하면서 5·18은 영화 소재로서의 대중성을 키워 나갔다.

,img src="http://www.mediatoday.co.kr/news/photo/201105/95309_82501_496.jpg">

 
나는 <화려한 휴가>를 당시 중학생이었던 조카와 함께 보았다.
아직 만 15세가 안되었던 조카는 사회 시간에 배웠던 5·18을 꼭 영화로 보고 싶다며 보호자인 나와 함께 극장에 가서,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눈물을 흘리며 보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나서는 “마음 아프긴 하지만... 좀 아쉽고 뭔가 부족해.” 라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저런 일이 벌어졌었다는 걸 영화로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저런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여전히 잘 살고 있잖아.

혹시 <26년>이라는 만화 봤어?
난, 영화가 그 만화 정도는 얘기 하는 줄 알았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학교에서도 배웠는데, 저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이 멀쩡히 살고 있는데 대해서 영화같은 건 뭔가 말해줄 줄 알았지.”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오! 꿈의 나라>에서 <화려한 휴가>까지 5·18에 대한 영화들은 모두 ‘그해 5월, 광주’를 재현하는데, 그러니까 과거를 그려내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꽃잎>의 주인공은 뒤늦게 친구의 여동생을 찾아 떠나고, <박하사탕>은 아예 영화 자체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화려한 휴가>는 광주비디오와 사진으로 이미 보았던 딱 그때 그 장소를 소환해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동선을 따라 공간을 그려낸다.
아직 영화는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아직 5·18이 과거 속에서 박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때 그 시절을 겪지 않았던 세대가 더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img src="http://www.mediatoday.co.kr/news/photo/201105/95309_82502_497.jpg">

영화 '화려한 휴가'

 
석연치 않은 '당선작 없음'의 ‘5ㆍ18민중항쟁 극영화 시나리오 공모’

 그렇기에 ‘5ㆍ18 관련 소재를 영화화함으로써 대중적 파급효과가 큰 영화를 통해 5ㆍ  18 정신의 승화를 꾀하고, 세계적으로 보급하여 새로운 관심과 관점을 유도하고, 국내외 영화 팬들에게 5ㆍ18정신 내면화에 기여’하겠다는 취지로 2006년 5ㆍ18기념재단이 1억 원의 상금을 내걸고 ‘5ㆍ18민중항쟁 극영화 시나리오 공모’를 크게 벌였다가, 96편의 응모작 가운데 한 편도 당선작을 내지 못하는 일도 생겼던 것이리라.
당선작을 선정하지 못한 재단 측의 심사평은 대부분의 응모작이 5ㆍ18을 다큐 형식으로  재구성하거나, 현재를 시점으로 5ㆍ18 당시의 피해자나 가해자가 어떤 형태로든 5ㆍ18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작품들인데, 안타깝게도 이 두 성향의 작품들이 5ㆍ18민중항쟁이라는 소재의 중압감을 극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각 또한 미흡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시나리오 공모 자체가 없던 일이 된 것은 공모 자체의 진정성을 의심스럽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조카가 얘기했던 만화가 강풀의 <26년>의 영화화가 발표되었다.
<26년>은 인터넷을 통해 연재된 웹툰이었다. 5·18로부터 26년이 흐른 시점에서, 남겨진 이들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 왔으며, 무엇 때문에 여전히 고통 받고,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그러나 그것을 막는 것은 또 무언지를 그려낸 <26년>은 아니나 다를까, 곧 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 보도되었다.
워낙 원작 만화가 강풀이 <아파트>, <순정만화>, <바보>를 비롯해 최근 조용하지만 뚝심있는 흥행기록을 보인 <그대를 사랑합니다>까지 발표하는 만화마다 바로바로 영화판권이 팔려나가는 인기있는 작가이기도 했지만, 특히 <26년>은 연재 당시 일일 조회 수 200만 건, 매회 댓글 2천여 건 이상을 기록했던 화제작이었으니 영화화가 안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일이었다. 

    
<img src="http://www.mediatoday.co.kr/news/photo/201105/95309_82503_5711.jpg">


강풀의 '26년

 
화려한 라인업의 탄탄한 이야기 '26년'은 누가 엎었나

 <천하장사 마돈나>로 이름을 얻은 신예감독 이해영에, <미녀는 괴로워>로 당시 충무로의 캐스팅 일순위로 떠올랐던 김아중과 <주먹이 운다>를 비롯해 숱한 작품에서 개성 강한 연기를 보인 유승범이 캐스팅되었다는 기사를 보며 영화가 이렇게 차근차근 나아가는구나 생각했다.
원작 만화가 발표된 후 세월이 흘렀으니 그만큼의 시간을 보태 <29년>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는 영화에 대해 한동안 이런저런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샴푸 광고 모델인 김아중의 계약 조건이 긴 생머리를 유지한다는 것인데, 영화 설정 상 짧은 헤어스타일의 역할을 하려면 어찌해야 할까를 미리 걱정하는 기사까지 있었더랬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설명도 없이 <29년>은 프로젝트 자체가 취소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가 왜 취소되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5·18 당시 시민군의 아이들이 자라, 당시의 최고 권력자를 심판하려 한다는 내용의 영화가 정권이 바뀌면서 만들어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공륜은 없어졌지만, ‘절차로서의 검열’이 아니라 ‘총체적 시스템으로서의 검열’은 여전히 작동 중이라는 것을 <29년> 해프닝은 분명히 보여준다.
아쉽게도 당선작을 선정하지 못했지만 5ㆍ18민중항쟁이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로 탄생할 수 있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더니 슬그머니 발을 뺀 5ㆍ18기념재단도, <29년>이라는 영화 프로젝트를 아무런 해명없이 엎어버린 영화사도, 그런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 영화계도, 그리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도록 남의 집 불구경하듯 무심한 우리 사회도 모두 ‘검열’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총체적인 검열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한국 사회는 30년이 지나도록 ‘1980년 5월 광주’에 대해 여전히 빚지고 있는 것이며, 그 빚에 대해 어린 세대들에게 부끄러워해야 한다.
물려줄 것이 없어서 이런 빚까지 떠넘기는 것도 부끄럽지만, 그 빚에 역사가 이자까지 붙여 더 무거운 짐으로 불려나가고 있는 것을 모르쇠하는 것은 더 참담하다.
그들의 ‘화려한 휴가’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어버이날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이 씀

 

엄마,혹시 나 보여?
보여도 보지마.
엄마 못보고 산지가 30년이 넘었네.생각해보니까 내가 그 나이더라구. 엄마 가버린 나이.나 스무살 때.
그땐 왜 그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나몰라.쉰둘인데.쉰둘일뿐인데..그냥 엄마 많이 아프니까,아부지 뵈기싫어 죽겠는데 자꾸 집에와서 있으라하니까,
졸려 죽겠는데 새벽기도 가라 하니까,복수찬 데 돌미나리가 좋다고 한겨울에 그거 뜯어오라 그러니까,병원 갈 돈도 없는 집구석이니까,갈거면 빨랑 가라고 생각한적,
솔직히 많았어.그게 젤 걸리고.
엄마 임종 못본거 다행이라고 생각해.새끼들은 죄다 이기적이니까.
이왕 안볼거면 염하는것도 안봐야했는데 그지같은 외삼촌이 억지로 끌고가서 봐 버렸네.
복어처럼 땡땡해선 시퍼런 심줄이 미나리처럼 돋아났던 배가 시커멓게 푹 꺼졌더라구.
난 그게 다 아부지때문이라고 생각했어.엄마뱃속으로 낳지도 않은 언니들 키우면서 쌓인 스트레스거나.
엄마속이 그렇게 썩어 문드러진 게 나때문이란 생각 끝까지 안하려 했지.
엄마.엄마두 그거 알았어?엄마를 자전거 뒤에 싣고 다니는 걸 내가 참 좋아한 거.평생 40kg이 안넘어 바람에 날릴까 한손으로 등을 받쳐야 했던 우리엄마.
그냥 그렇게 달려서 도망가고 싶었다.어디든.
그걸 할수없었던 나는 번번이 엇나가 홀로 탄 자전거를 하염없이 굴려 갈수없는 길까지 가곤했다.
열다섯살 때.꽤 멀리 갔었다.
안돌아가려 했으니까.
근데 엄마가 보고 싶더라.
내가 자전거 안태워주면 그 무거운 짐을 들고 혼자 시장에서 돌아올 엄마.
산을 내려와 긴 외출에서 돌아오던 그 노을 서럽던 저녁.
장날이었던가봐.오가는 사람이 제법 많았던 먼지나던 신작로.
집언저리쯤에서 눈으로 엄마를 찾는데 엄마보다 먼저본 게 저만치에서 툭하고 떨어지던 주황색 나이롱 바가지였어.흩어지던 콩나물.콩나물위에 떨어지던 눈물.
부산와서 첫월급.그 눈물나는 돈을받아 엄마 쉐타사고 법랑냄비사니까 없더라.
그걸로 내가 지은 죄 갚았다고 생각했어.다.
엄마 유품정리하는데 그딴 게 구석구석에서 나오대.
쉐타는 반다지에서,냄비는 선반위에서 박스채로,중학교때 신문배달해서 사준 털신은 농안에서..
왜 그딴 걸 하나도 안쓰고 죽었냐
이누무 이상한 엄마야.
정신 놓았다가도 진수,진수 부르며 눈을 뜨려 기를쓰던 진수도 갔다.
진수는 니가 좀 거둬줘라.
나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내가 그 새낄 어떻게 거두냐.
엄마찾아 갔으니까 엄마가 거둬.
첫징역 살때 큰언니가 면회를 왔더라.
외포리에서 그 먼길을 오면서 멀미를 으찌 했는지 입술까지 하얘.
제대로 말도 못하고 허리펴고 서있지도 못하고 면회시간이 끝났는데 가면서 그러대.
"그르니 엄마가 일찍 죽길 을마나 다행이냐"..그런 말은 박혀.잘 빠지지도 않고.
그러고보니 살면서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던 날보다 엄마가 없어서 참 다행이다 싶은 날이 더 많았네.
근데두 엄마.보고싶을 때가 있어.한번만,잠깐만이라도,안되면 먼발치에서라도 봤으면 좋겠다 싶은 날이 있어..

-어버이날,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고공농성 120일을 훌쩍 넘기고 있는, 부산 민주노총 지도위원이자 27년 해고자, 한진 조합원, 김진숙 님이 쓴 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전주버스파업 중간보고[참세상 펌]

버스파업 35일간의 사투, 고공단식농성
[인터뷰] 호남고속 김현철, 전북고속 남상훈 쟁대위위원장
문주현 기자 2011.05.04 17:47

[편집자주] 35일간의 망루단식농성을 마치고 전북고속, 신성여객, 호남고속 쟁의대책위원장이 땅을 밟았다.
목숨을 건 망루단식투쟁이기에 회복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을 만날 수 있었던 곳은 병원이 아니라 버스투쟁본부 총회가 있던 민주노총 전북본부에서였다.
아직 전북고속 투쟁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편히 자기 몸을 챙길 여유를 이들은 갖고자 하지 않았다.


버스파업투쟁이 반환점을 돌았다.
시내버스는 현장에서 단체교섭을 쟁취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타결되지 않은 전북고속은 다부진 결의를 모아 투쟁을 이어갈 것이다. 망루단식농성으로 어쩌면 지쳐 있을 호남고속과 전북고속 쟁의대책위원장에게 지금까지의 노력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보았다.

<img src="http://www.newscham.net/data/news/photo/5/52117/g1.jpg">
 
▲  고공농성단식 당시 망루에서. 남상훈 전북고속 지회장(좌), 김현철 호남고속 지회장(가운데), 이성범 신성여객 지회장(우) [출처: 전북고속지회]


삶과 죽음의 경계위에서 단식을 하다


Q. 몸은 좀 어떤가
김현철 호남고속 쟁의대책위원장(호남) 몸은 안 좋은 상황이다.
지금까지 겪지 못했던 단식이 불가피하게 길어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35일간 단식을 해보았다. 의지와 관계없이 마음은 괜찮은데, 몸이 자꾸 휘청거리고, 똑바로 걸으려 해도 한쪽으로 치우친다.


Q. 망루에서 외롭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을 텐데 어떻게 이겨냈나
남상훈 전북고속 쟁의대책위원장(전북) 오직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렇지만 민주노조를 세우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를 생각하면 고통스러웠다.


호남 망루단식이 파업전술 중 하나지만 삶과 죽음이 직접 연관된 곳이었기에 두렵기도 했지만 삶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그래도 고공농성이었다.
농성장이 바람에 많이 흔들리고, 비가 오면 빗물이 새고, 번개가 치면 감전의 위험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숙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했다.
아니 수면에 앞서 두려움이 앞섰다. 붕괴는 안 될까, 감전은 안 될까. 그래서 세 사람 모두 두 시간 이상 잠을 못 잤다.
그럴 때마다 책도 보고 향후 투쟁에 대해서 논의도 하고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면서 이겨냈다.


Q. 망루단식농성이 길어지면서 내려올 것을 권유했던 일들도 있었는데
전북 지난 1월에도 1주일간 민주당사에서 단식한 적이 있다.
거기서도 정치인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치인들과 사업주는 사인할 때까지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정동영의원이 올라와서 무슨 말을 해도 따라갈 수 없었다.
내려오자고 할 때도 밑에 가서 사인하고 올라오라고 했다. 끝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전북고속지회, 다시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Q. 조합원들을 위에서 지켜볼 때 어땠나
호남 망루에서 파업이 합법 판정을 받았을 때, 많이 안도했다.
그리고 사측과 합의서를 쓰고 내려왔을 때, 많은 감정이 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분노의 아픔하고. 이제 파업을 정리할 수 있다는 안도감, 타결되지 않은 전북고속에 대한 애정이 어린 미안함, 투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결연함. 이런 느낌들이 한꺼번에 스쳐 갔다.


전북 전북고속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려왔기에 오직 조합원들을 다시 어떻게 단결시켜 끌고 갈까 고민을 했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갈 때 많은 동지의 박수를 받았지만, 속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래서 병원에만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전북고속 동지들만 따로 모여서 총회를 했다.
거기서 동지들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을 보고 감동하였다. 그 자리에서 말했다.
우리 정말 다시 한 번 시작하자고. 동지들이 이 뜻을 받아들여 줘서 고맙고 감사하다.

<img src="http://www.newscham.net/data/news/photo/5/52117/g2.jpg">
 
[출처: 참소리 자료사진]


Q. 왜 민주노조인가
전북 40년 전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혹독한 노동을 시키지 말라고 요구하면 분신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도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노총은 노동시간을 줄이고 급료를 개선하고 노동조건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자기들 주머니만 생각했다.
한국노총 간부라는 사람들이 자기들은 70만 원을 올리고 우리는 0.88% 올렸다.
이 사실은 주주총회에서 사측이 자랑스럽게 보고한 내용이다.
그리고 노동조합 간부를 전부 간선제로 뽑고, 대의원도 지명제로 뽑는다.
수습기간은 3개월에서 약 11개월로 늘었다.
그리고 통상임금을 없애기 위해 시급을 올렸는데, 시급도 줄이려고 14시간 노동으로 계산하던 것을 2시간 깎았다.
일을 똑같이 하는데 총시급량은 줄었다. 독재보다 더한 상황이 바로 지금 버스노동자들의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입 다물고 있는 것은 인간도 아니다.


호남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체계여야 한다.
그런데 버스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은 이런 다양성이 무시된 체계였다.
그러다 보니 고인 물은 썩는다고 부패의 온상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노동조건을 개선해나가야 할 시기이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노조를 선택했다.
그러다 보니 탄압이 많았고, 탄압 탓에 전주시민에게 불편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다양성과 민주노조가 시민의 품으로 돌아간다면 더 좋은 서비스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버스서비스 향상이라는 것은 곧 운전기사를 믿고 버스를 탄다는 말이다.
보다 안전운행에 중점을 두고 시민들이 편하게 탈 수 있는 노선과 배차, 환승제도의 획기적 변화 등의 길에 노동자도 함께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보조금을 받고 있으니 값싸고 편리하게 탈 수 있도록 공영제도 현실화 돼야 하지 않나. 이러한 이야기들이 우리가 민주노조건설투쟁을 하면서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의 불편이 아마 유익함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도 노력하겠다.


“현장을 넘나드는 투쟁으로 승리 쟁취할 것”


Q. 앞으로의 각오를 밝혀 달라
전북 교육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지금 복귀하면 바로 회사의 가진 구박을 받으며 살 것이다. 여기 현장에 남아 싸우면 역시 우리 가정과 가정경제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각오하고 투쟁하는 것은 사는 길을 찾아야 했기에, 싸우는 길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내버스동지들이 우리 천막부터 옮겨주었다. 그들이 희망을 주었고 힘을 주었다. 다시 한 번 뜻을 모아서 열심히 해보려고 한다.


호남 현장투쟁이라기보다 이제 출발선이다. 실제 투쟁 완성이 아니고 앞으로 밀려오는 모든 산적한 숙제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전북고속 투쟁이 하루빨리 승리해야 우리가 처음에 약속했던 공동투쟁, 공동단체교섭이 완성된다. 그 길에 함께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동지들도 전북고속이 시내버스와 함께할 수 있도록 적극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따라서 앞으로 전북고속과 함께 현장을 넘나들면서 투쟁을 할 것이다. (기사제휴=참소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