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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에 나오는 들판이 대추리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황새울이란다.
야후 꾸러기에 들어가서 이 노래를 틀어 놓고
대책위 사무실에서 바오로 형제님과 같이 따라 불렀다.
악보를 프린트해서 대추리 청년중창단에 넘겨주고
아저씨랑 노래를 또 불렀다.
마음이 맑아진다.
이 노래를 널리 알려주시길, 대추리를 기억해주기를...
노을
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연기
색동옷 갈아입은 가을 언덕에
빨갛게 노을이 타고 있어요
허수아비 팔 벌려 웃음짓고
초가 지붕 둥근 박 꿈꿀때
고개숙인 논밭의 열매
노랗게 익어만 가는
가을바람 머물다 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연기
색동옷 갈아입은 가을 언덕에
붉게 물들어 타는 저녁놀
화가 이동진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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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목판에 채색. |
몇 해를 입었는지 가늠할 수 없다. 다 헤어진 겨울점퍼에, 물감이 얼룩진 한복 바지와 뒤집어쓴 빵모자는 수차례 방문했어도 여전히 이동진 선생이 기자를 맞이하는 작업복이었다. 지독한 작업벌레라는 걸 이미 들어서 짐작은 했지만 잠자는 시간 외에는 일만 하는 이일까. 덥수룩한 수염에 큰 몸집은 산사람처럼 묵직하고 오랜 세월을 버텨 온 고독이 바위만 같았다. 그런 그가 동화를 쓴 품성을 갖고 있고 또 따뜻한 그림을 그린 감성의 소유자라는 건, 느릿느릿 손수 끓여준 모과차를 받아들면서 수긍이 갔다.
그림, 글, 글씨.
동요 ‘노을’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그 노랫말이 하도 좋아 꼼꼼하게 챙겨 익힌 덕에 요새도 조카애들에게 불러주곤 하는 시같은 동요다. 이 노랫말의 주인공이 화가 이동진 선생이라고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10년 전 교직생활을 하던 평택에서 넓은 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살아 온 길을 옮겨 적은 글은, 음악하던 후배의 손을 거쳐 동심을 실은 노래가 되었다. 그의 동요에 깃든 시심은 그림도 그대로 닮아 있어 어느 것을 보아도 정많던 시절의 둥근 달이나 초가지붕 정서다.
홍대앞 백어당(白語堂)이라는 당호가 붙은 그의 화실엔 예수의 얼굴이 가득했다. 손가락 끝을 호호 불던 2월 즈음 찾았던 화실에는 스케치를 마친 그림들이 넓은 화실 벽마다 걸려 있었다. 온기라곤 덜렁 난로 하나뿐인 콘크리트 건물이 영 스산하지만 않았던 이유였다.
어릴적 신앙에서 멀어졌다가 다시 예수를 만난 건 몇해 전이다. 그림으로 살아 돌아온 예수. 순교복자수도원에서 자고 온 어느 날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다 그린 작품을 보고 있는데 불현듯 어떤 영감이 떠올라 다시 그리면서, 예술가의 영감이란 하늘이 내려줌을 실감했다. 종교란 믿음을 떠나 인간의 양식이라고 이해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슬픈 예수나, 어린 예수나 둥근 선으로 처리되어 있어, 모가 나지 않으면서도 어딘지 동양적인 이미지가 기존의 예수상과는 다른 느낌이다. 그러고보니 색칠을 한 목판화의 색상도 그렇다. 천연염색의 천 조각들을 오려붙인 듯한 목판화는 탱화를 닮았고 또한 바람에 나부끼는 색종이꽃이었다. 그것뿐이 아니다. ‘이동진체’를 만들어낸 이답게 지인들을 위해 지었다는 당호들도 목판에 새겨져 벽마다 빼곡하다. 그의 예술세계에서 그림과 글씨가 통성명을 한 지 오래고, 글 또한 그림과 글씨가 낳은 자식처럼 가난하고 고독하게 걸어온 예술가의 길을 일러주고 있었다. <바보이야기:계몽사> <해모수와 투투의 아름다운 지구여행 전4권:이레출판사> <노랑나비 내 친구: 도서출판 산하> 등 여러 편의 동화를 발표한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글은 편지를 쓰면서 시작했다. 새나 벌레와 이야기를 하는 성프란시스코의 삶에 감동해 그렇게 살기를 바랐던 마음으로 시작했다는 글쓰기. 손으로 한 달에 300여 통의 편지를 쓴 적도 있다는 그는 한동안 우체국장이라는 별명을 끼고 살았다. 사랑이나 살아가는 일이 하나인 것처럼 그에게 글이나 글씨, 그림이 함께하는 이유도 그런 맥락이다.
“‘예술은 나비다’라고 정의합니다. 번데기가 나비가 되어 승천하는 과정은 예술가의 삶과 꼭 닮았습니다. 또 이것은 우리 정서와도 참 많이 비슷합니다. 응어리진 원한을 표현하는 절제와 함축의 예술이 우리 정서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나는 단순하게 표현하려고 합니다. 청자를 봐도 그렇고 우리 예술의 정수는 기교가 아니라 정신이라는 걸 알 수 있지요.”
이런 그의 철학은 목판화로 나타났다. 83년부터 시작했던 목판화는 나무에 직접 천연염색 작업을 했다. 그는 언젠가 유럽에 가서 본 고갱의 목판 작품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화가로서 동질감을 느꼈고 그 과정에서 우리 것을 계승하고 이어가야 할 것은 과거의 재현이 아니고 정신을 함양하고 새롭게 조명된 작품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도 새삼 확인했다.
아픈 예수, 그리고…
“왜 우리 민중미술이 잠깐 비추다가 사그러졌을까를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민중미술의 소재나 그림의 처참한 표현에 있다는 해석입니다. 그건 우리 식이 아닙니다. 우리의 정서는 직설적으로 상처를 표현하는 정서보다 곰삭음이거든요. 노랫가락, 춤사위에서도 볼 수 있잖아요. 20년대 중국의 노신(魯迅)이 사회 정치의식을 판화로 표현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코드를 거르지 않고 수용한 탓에 지금의 민중미술이 생명력을 잃었다고 봅니다.”
그의 그림이 과거의 정서에 붙들려 재현에 그치지 않고, 진부한 티를 벗으면서 한없이 따뜻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데는 그 나름의 민중의식 때문이다. 민중이란 이 사회로부터 뚝 떨어져 몇몇 의식운동하는 이들에게 저당잡힌 이물스런 존재가 아니라는 거다. 달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을 목판화에 희게 채색해 둥근 초가 지붕의 무리로 표현한 것은 이런 그를 말해주고 있다.
“변선환 목사의 말처럼 교회 밖에 구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차원에서 저는 기독교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고통을 스스로 찾아가는 예수, 고통이 없으면 기쁨이 없잖아요.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는 그런 차원에서 한 예수 최후의 진술이라고 봅니다.”
그가 그릴 예수에도 이런 정신이 서릴 것이라고 했다. 새가정에 십수년 그림을 그려왔던 그가 몇 해 전 신장병 어린이를 위한 전시회를 연 것도 이 어두운 현실에 따뜻한 참여를 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는 더욱 더 따뜻한 가슴과 글, 그림, 글씨를 선물로 받았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말은 ‘내일’이라고 믿고 있는, 육순을 바라보는 그. ‘내일’은 희망을 준다는 의미로 되새겨져 가슴에 품게 된단다.
“우리말에 오늘, 어제는 있지만 내일을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은 없습니다. 우리 민족이 사는 게 힘들어서 그랬을까, 말이 없는 것처럼 그 자체가 미지(未知)고 그래서 힘인 듯 하네요.”
“새 나물로 국을 끓일 때마다 선생님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봄나물국 한 그릇 화실에 들고 가면 온기가 돌겠구나하면서 먹는 국은 목에 자꾸만 걸렸습니다. 반찬을 나눌 수 있다는 건 사실 살아온 궤적, 몸에 걸치고 몸에 전 생활을 나누는 의식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과의 의식을 성공적으로 잘 치룬 것 같으네요. 제가 드린 반찬이 소중한 친구와 어린 시절 따뜻함을 상기시켰다니 저도 무지 행복하네요. 한 그루 서낭당 나무처럼 오래 서 계신 것 같은 느낌으로 선생님이 기억되고 있습니다.”
정혜영 기자 pcweaver@cnews.or.kr
*1984년 제2회 MBC창작 동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노을'의 작사가 이동진님은..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고, 대구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농부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홍익대학 미술학부를 졸업 했습니다.
우체국장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해서 아들에게 생일 때마다
짧은 동화를 하나씩 써서 선물하기도 했다는군요.
평택에서 교사 생활을 했고..
지금은 아이들에게 그림과 글을 가르치며,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고, 상명대학교와 공주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동진체'라는 글꼴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림책 '노랑나비내친구' '어느날밤' 을 만들었고...
동화집 '해모수와투투의아름다운지구여행' '바보이야기' '세계명작그림동화' '바보이야기'
'별을보는아이' '짤막한이야기' '사랑의물감으로온세상을그려요' 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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