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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미 /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부분발췌..
성적자기결정권의 사회경제적 조건
자기결정권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을 비판할 수 있는 현재 가장 설득력 있는 논리이며, 성적자기결정권 침해의 문제로 성폭력을 문제화할 수 있다. 그러나 성적자기결정권이라는 개념이 '내 몸의 주인은 나'라는 캠페인 차원의 선언을 넘어서 현실의 공간에서 "자신의 몸을 자원, 투자, '처벌', '학대'의 대상으로 삼을 권리"로도 주장되기도 하면서 논쟁적 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개인의 몸은 그 몸을 '소유한' 개인의 판단에 따라 자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에 대한 권리가 곧 성적자기결정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여성의 자기결정이 여성의 정신에 의해 투명하게 구성되거나 약자인 여성의 결정이기에 그 자체로 올바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성적자기결정권의 개념은 여전히 모호하다. 특히 성적자기결정권이 법의 테두리 속에서 법의 언어로 정의될 때는 더욱 모호해진다. 성적 실천의 경계를 법으로 정의하고 규제하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위험성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적자기결정권에 대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의 견해가 힘을 가질 수 있다.
여성의 성적 권리에 수반되는 위험이 남성과 여성의 이성애적 관계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라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견해가 타당하다면,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위한 투쟁은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문제를 환기시킨다. 여성의 성적 욕망에 대한 권리가 위험으로 변질되는 사회적 조건을 문제 삼고 그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이 다시금 페미니즘의 중요한 과제가 된다.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은 단순히 법적으로 주장될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실현할 사회적 조건을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가라는 실천적 문제가 된다. 이것이 유물론적 페미니즘이 주는 혜안이다."
“감정을 들여다본 적이 있나요” | |||
지혜가 되는 감정, 색안경이 되는 감정 | |||
삶은 감정 경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강렬한 감정이 몰아칠 때도 있고, 미처 인식하지 못한 사이 떠오르고 사라지는 감정들도 있습니다. 우린 매 순간 생각과 감정과 감각에 둘러싸여 지냅니다. 단지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요. 다만 우리가 특히 주목하게 된 어떤 감정은 하나의 의미가 되어 우리 기억에 남습니다. 의미 있는 우리 감정 중에는 희락이 있는가 하면 비애가 있지요. 물론 이런 고상한 감정만 있는 것도 아니지요. 분노와 불안, 두려움, 죄책감, 수치심처럼 숨기고 싶은 감정들도 있습니다. 열정과 의욕, 반대로 무기력과 같은 에너지 형태로 다가오는 감정들도 있습니다. 어찌됐건, 이름 지을 수 있는 무수한 감정들은 다 그 만한 이유를 가지고 시작되고 무언가에 영향을 받아 나타납니다. 이렇게 매일의 동반자라 할 수 있는 감정을 혹시 지극히 들여다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우린 감정을 늘 느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통 감정이라 하면 익숙합니다. 그런데 감정을 제대로 느끼는가는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감정을 느끼고 인식할 때도 있지만, 느껴지기는 하는데도 무슨 감정인지 잘 모를 때가 있고, 감정이 있는데도 인식조차 못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감정이 어디서 연유하고 무엇을 느끼는지도 모른 채 감정을 없애려 하는데 더 능합니다. 우리에게 인식되지 못하고 이렇게 흩어져버린 감정들은 통증과 긴장으로 몸에 남아 우리를 괴롭힐 때도 있고, 언제든 불쑥 튀어올라 마음을 어지럽히기도 합니다. 감정을 제대로 느끼는 방법
감정이 느껴지면 대체로 우리는 억누르거나, 피하거나, 아니라고 부인하거나, 무분별하게 폭발시킬 줄은 알지만, 가만히 쭉 감정을 느끼는 데는 익숙지 않지요. 안내자를 잃은 마음은 길을 잃고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지요. 감정이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지, 이면에 숨겨진 우리의 욕구가 무엇인지 알아차리려면 감정을 제대로 느껴야 합니다. 제대로 느낀다 함은 마음을 막거나 판단하지 말고 그저 쭉 느끼라는 겁니다. 감정은 몸의 감각을 동반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데리고 나타납니다. 이 감각과 생각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은 채 감정을 허용해주는 것이 ‘쭉 느끼는’ 방법입니다. 고요한 태풍의 눈에 서서 소용돌이를 바라본다고 할까요. 판단하지 않고 그저 끄덕끄덕하면서 ‘그렇구나’ 하면서 모든 감각을 느끼고 생각을 지켜보는 경험은 아주 소중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새 소용돌이는 가라앉고 지혜로운 눈이 하나 생깁니다. 그 눈은 내 진실한 모습을 보고 있고, 세상의 진실된 모습을 봅니다.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한 그대로 진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스스로의 감정에 끄덕끄덕해주기란 몹시도 힘든 일입니다. 감정을 중시 여기지 않는 환경에서 자라는 경우 이러한 어려움은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리네한이라는 심리학자는 ‘정서를 무시하는 환경’이 심리적 역량 발달을 저해한다고 말합니다. 심리적 역량이란 스트레스가 닥칠 때 이에 압도되지 않은 채 감정을 잘 조절하고 지혜롭게 상황을 해결해가는 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소년이 울고 있으면 ‘남자답지 못하니 뚝 그치라’고 다그칠 때가 많지요. 애정을 얻고자 하는 남아에게 ‘마마보이’라는 굴레를 씌우기도 합니다. 폭력을 경험한 소녀에게 ‘창피한 일’이라고 망각을 지시하는 일도 너무 흔합니다. 이는 감정이 용납되지 않는 ‘정서무시환경’의 모습입니다. 다양한 감정과 욕구를 무시당한 채 억눌리기만 하는 십대 아이들이 퉁명스럽고 때로는 과격한 모습으로 변하는 것도 ‘정서무시환경’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감정 자체를 탓하게 하고 ‘감정이란 붙들어 매야 할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면, 사람은 점차 자기 감정을 들여다 보지 않게 됩니다. 그럼 어느 새 감정은 보이지 않는 색안경이 되어 우리 본연의 지혜로운 눈을 가리웁니다. 감정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정서를 무시하는 사회에 억눌린 사람들 삶을 파괴한 고통을 인정받지 못할 때에도 감정은 색안경이 됩니다. 1970-1980년대 정권 정당화를 위해서 무고한 사람을 간첩이라 몰고 고문을 자행하며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사건들이 무수했습니다. 지금 30년이 다 되도록 이 분통함을 해소할 길이 없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이웃은 물론 친지들 마저 무죄를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고 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아무리 ‘아니야’하고 말해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던 사무친 경험은 이제 원통함과 분노가 되어 있었습니다. 인정받지 못한 분노는 유령처럼 떠돌면서 가족에게 표출되기도 했지요. 어떤 분은 가족이 아주 사소한 일로 자기 말에 반대하기만 해도 솟구치는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어 폭력적인 사람으로 변하고 만다고 했습니다. 사회가 개인의 정당한 분노를 배척한 결과입니다. 분노는 이분의 건강한 욕구입니다. 결백을 증명 받고 삶이 침해 당했다고 인정받고자 하는 소망은 삶의 의지이자 당연한 바람입니다. 그러나 이를 존중하지 않고 배척하는 환경에서 분노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가족을 향해 어긋납니다. 이분에게는 ‘건강하지 못하다’는 또 다른 오명이 씌워집니다. 사회가 총체적으로 ‘정서무시환경’이 되는 셈입니다. 정서를 무시하는 사회에서 힘을 되찾는 열쇠는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쥐어져 있다고 봅니다. 누구든 상처를 씻고자 한다면 공감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또 공감은 시도하는 자에게도 더 폭넓은 세상을 선사합니다. 코훗이라는 심리학자는 한 개인의 진실한 내면과 만나기 위해서는 공감이 필수적이라고 말했죠. 공감 받은 자는 더 진솔하게 마음을 열 수 있고, 공감하는 자는 경험의 폭이 확장됩니다. 서로 진솔해질 수 있다면 단절된 거리는 그만큼 줄어듭니다. 그러니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기꺼이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합니다. 이해가 충분히 되었다면 우리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터입니다. 공감은 감정이입이나 투사와는 다르다 그런데 마음 이야기에서는 매번 공감하라는 결론을 내리지만 한번도 어떻게 공감하는가를 이야기해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공감이란 과연 뭘까요. 공감은 매우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힘을 필요로 합니다. 그저 단지 같이 느낀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최대한 온전히 이해하고 인정하고자 노력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잘 듣고, 잘 질문하는 것도 필요하지요. 원래 사람에게는 상대방의 감정 경험을 마치 내 것처럼 느끼는 능력이 있습니다. 실제로 타인의 감정 표현을 볼 때와, 실제로 내가 감정을 느낄 때에는 공통된 신경기전이 작동한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다쳐서 아파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 있다면, 실제로 우리가 직접 다쳤을 때 통증을 느끼는 뇌 부위가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내가 직접 통증을 느낄 때나 타인의 통증을 보고 있을 때에 같은 뇌의 네트워크가 작동된다는 말이지요. 어찌 보면 공감이란 생물학적으로 부여된 능력이자 인간으로서의 의무라 할 수 있을 란지요. 그렇지만 감각을 같이 느낀다 해서 공감이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자기만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타인이 되어보고 경험을 떠올려볼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는 단지 시작점에 불과합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공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와 타인을 혼동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공감은 감정이입이나 동감과는 다릅니다. 타인의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입각해서 위로를 전달하려 할 수 있겠으나, 실은 내가 가진 내 감정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두 사람이 있을 때 어떤 감정이 전해져 온다면, 이 감정을 해석할 때 그것이 내 생각에 국한된 문제는 아닌지 잘 변별해야 합니다. 감정에 대한 나의 해석일 뿐인데도 상대가 그럴 것이라고 단정하는 경우를 심리학에서는 ‘투사’라고 합니다. 서로의 경계를 잘 유지하면서 공감해주기 삶을 파괴당한 경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정당한 욕구로 분노를 주로 경험하는 분들도 있지만,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주로 경험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가족에게 미안함을 느끼면서 원래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것도 이분의 건강한 의지이고, 그러한 와중에 관계에서 미안함을 경험한다는 것은 또 엄청난 능력입니다. 그런데 만약, 분노가 보다 타당하다고 생각하면서 미안함을 주로 느끼는 분에게 ‘당신에게는 분명 분노가 있다. 미안함은 잘못된 감정이다’고 한다면 이는 자기 안의 분노를 투사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미안함은 약한 감정이라는 선입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투사는 오히려 이 분의 건강한 의지를 꺾고 자기의 강인함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투사는 자기와 타인을 구분 짓지 못한 결과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공감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대부분의 관계에서 우리는 두 사람 사이의 경계를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고 무엇은 상대에게서 오는 것인지 잘 구별할 줄 압니다. 그런데 경계가 섞여 버리면, 내 문제가 곧 상대의 문제가 되어 우리는 상대를 진실되게 바라보지 못하고 내 감정에 휩싸여 상대를 오해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래서 공감을 잘 하려면 자 나신을 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무엇이 내 마음인지 잘 변별할 수 있어야 나도 색안경을 걷어내고 세상과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을 잘 알려면 나에게도 공감이 필요하지요. 공감 받아야 내 진솔한 마음을 들여다 볼 힘이 생기니까요. 공감하는 자의 사려 깊은 한 마디는 상대방 마음 안에 메아리가 됩니다. 그래서 앞으로 그 사람이 다시 힘겨워질 때 마다 마음 속에 울려 큰 힘이 됩니다. 그 힘으로 사람은 상처를 버팁니다. 컨버그라는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상실을 겪을 때, 마음 안에 자리 잡힌 긍정적 인간관계 상에 의지하면서 자기 힘을 회복해간다고 합니다. 이것이 곧 건강한 애도라고 했습니다. 상실을 애도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공감하는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긍정적인 인간관계 상마저 파괴당했다면 새로운 동반자가 더욱 절실할 것입니다. 공감은 마음의 힘을 강화해주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원천입니다. 그래서 마음 이야기는 늘 공감을 결론으로 끝맺곤 했습니다. |
사랑은 왜 이렇게 아픈 것일까 |
상처가 맞물리는 ‘사랑의 화학반응’ 예방할 수 있어 |
사랑은 참 힘든 일입니다. 연애 말입니다. 하지만 사랑만큼의 매혹이 또 없는지라 우리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사랑에 뛰어듭니다. 주체할 수 없이 빠져들기도 하지요.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기다리거나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의 유통기한에 관한 뇌 연구결과를 궁금해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사랑했던 사실을 망각한 채 사랑을 의심합니다. 사랑, 사랑, 누가 말했던가요. 설탕과 크림을 잔뜩 부은 인스턴트 커피 맛이 곧 사랑이라 믿는 것은 허황이겠지요. 어쩌면 직접 심혈을 기울여 뽑은 달고 씁쓸하면서도 시큼한 커피 맛이 연애의 맛에 더 가깝겠지요. 이 오묘한 맛은 사람을 사로잡기 충분한지라, 어떤 심리학자는 ‘사랑중독’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사랑이란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쩌면 우리는 사랑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중독되어 있을 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릭슨이라는 심리학자는 인간성장의 여덟 단계를 설명하면서 20대와 30대는 친밀감을 추구하고 의미 있는 관계를 찾는 과제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물론 연애에만 국한된 친밀감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사람 만나기를 두려워하든, 사람이 싫어 마음을 꽁꽁 걸어 잠갔던 간에, 사람들의 아주 깊은 내면에는 관계에 관한 갖가지 갈등과 욕구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과 만나고 헤어지기까지의 긴 인생 동안 의미 있는 누군가가 되고 싶으며, 의미 있는 누군가를 필요로 합니다. 연애도 그 과정 중 하나이겠지요. 연애를 하려 한다면 관계를 맺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연애도 관계인데, 관계 중에서도 아주 섬세한 관계로 꼽히지요. 연애할 때 오고 가는 사랑이란 아주 매력적이고 화려한 감정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 사랑에 요구되는 역량을 기르려는 연습을 하기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매력에 치중합니다. 또한 솔직한 모습이 탄로났다고 여겨질 때에는 도망가거나 감추려 하면서 되려 사랑을 잃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을 잃으면 마음이 얼마나 아픕니까. 괴로움의 대상은 과연 무엇인가: 멜랑과 콜리의 이야기 심리학에서는 관계를 얘기할 때, 어린 시절에 관계에 대한 안정적인 표상이 자리 잡혔는가를 묻습니다. 관계표상이란 무얼까요? 과거에 중요한 사람들과 경험했던 관계의 기억이 하나의 상으로서 마음 안에 자리잡은 것입니다. 이것은 관계와 관련된 기능을 합니다. 관계표상은 관계 안에서 유발되는 다양한 감정의 기원이 됩니다. 우리는 이 관계표상에 근거하여 관계가 어떨 것이라고 예상하며, 만약 관계 안에서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역시 관계표상에 입각하여 상황을 해석하고 대처하게 됩니다. 서로 바빠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연인이 있습니다. 멜랑은 콜리와 드디어 만날 날을 약속하면서 전화를 하는데, 이놈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일이 늦게 끝날 것 같아”라고 말합니다. 멜랑은 갑자기 끝없는 절망감에 휩싸입니다. 콜리가 자기를 보고 싶지 않아서 약속을 미룬다고 생각하고, 만나지 못한 사이 사랑이 식어버린 것은 아닌가 걱정합니다. 멜랑에게는 관계에서 버려지는데 대한 불안감이 심했기 때문에, 사소한 미적거림이라도 거절처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멜랑은 자기는 늘 거절당하고 버려지고 사랑 받을 만한 구석이 없다고 느끼고 있었으며, 그의 관계표상 안에서 상대방은 차갑고, 거부적이며, 그에게 싫증을 느끼는 누군가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식었다고 믿고, 이미 콜리에게는 다른 멋진 누군가가 생겼을지 모른다는 상상에 이르면서, 관계는 이제 끝났다는 확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렇게 관계표상이 불안정하면 관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힘들어집니다. 콜리는 콜리라는 개인 그 자체가 아닌, 멜랑이 가진 관계표상의 반영물이 됩니다. 과거에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던 양육자나 매몰차게 떠나간 옛 연인은 가슴 시린 대상표상으로 남아 훗날 사랑하는 역량에 영향을 미칩니다. 멜랑은 집이 어려워 부모님이 밤낮으로 일을 해야 했습니다. 멜랑은 어린 시절 학예발표회 때 끝내 오지 않았던 부모님을 애타게 기다리던 기억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멜랑은 집에서는 어린 동생을 돌보아야 했으며, 밤늦게 부모님이 돌아오면 혹여 피곤하시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아이로서 당연한 욕구마저 숨겨야 했습니다. “늦을 것 같다”는 콜리의 말에, 멜랑은 부모님이 온다 해놓고는 오지 않았던 발표회가 떠올랐던 겁니다. 멜랑은 콜리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그럼 만나지 말자”고 전합니다. 멜랑은 아마도 이렇게 버림받는 느낌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 욕구를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항상 차가운 사람으로 돌변하면서 상황을 피하고자 했을 겁니다. 마치 콜리가 곧 떠나버리기라도 하듯이, 멜랑은 선수를 쳐 자기가 먼저 떠났다는 식으로 대꾸하면서 버림받는 두려움을 방지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콜리는 일이 늦게 끝나 멜랑을 일찍 볼 수 없다는 마음에 애가 탔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만나지 말자’는 멜랑의 차가운 태도에 화가 솟구칩니다. 콜리의 어머니는 아프고 우울했었고, 엄마를 원하는 콜리에게 늘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타이르곤 했습니다. 콜리는 필요했던 자리에 엄마가 없었던 사실에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엄마가 갑자기 죽어버릴 까봐 두려웠습니다. 멜랑의 차가운 목소리를 듣자마자, 콜리는 엄마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가 돌아옴을 느낍니다. 콜리는 자기의 애타는 마음을 몰라주는 멜랑에게 화가 나 “그럼 관두자”고 말하곤 전화를 끊습니다. 불안과 왜곡, 반복되는 연애관계의 패턴 관계는 왜곡되고 과격해지며,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여 불안정해집니다. 이 관계 안에서 연인은 온전한 상대로 존재하지 않고, 다만 나의 관계표상으로서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만약 사랑 때문에 괴롭다면, 괴로움의 대상이 무엇인지 곰곰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괴로움을 유발하는 사람이 우리가 사랑하는 상대방인지, 혹은 나의 대상표상인지 말입니다. 멜랑과 콜리의 상황은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곧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는 손을 쓸 도리가 없습니다. 멜랑은 집안형편이 어려웠고, 콜리의 어머니는 아팠습니다. 그 대신 우리의 가슴 아픈 기억을 알아차리고, 그것 때문에 힘들었던 나 자신을 위로해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에 대처했던 우리의 습관을 바꿈으로써 훗날로 고통이 번지지 않게 막을 수 있습니다. 영이라는 심리학자는 우리 각자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고통을 반복하는 삶의 패턴을 살아가게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각자 나름대로의 대처법을 만들었는데, 도리어 그 대처법이 고통을 영속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 먼저 차갑게 돌아섰던 멜랑의 대처법처럼 말입니다. 멜랑은 늘 관계에서 먼저 돌아섰기 때문에 멜랑이 그토록 바라던 오래된 따뜻한 관계는 지켜나가기 힘들지 모릅니다. 또 콜리는 자기 엄마 같은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려 늘 엄마 같은 사람을 만났고, 엄마처럼 차가운 사람에게 상처를 입어 화를 낸 채 관계를 끝맺곤 했습니다. 이렇게 연애관계에서 패턴이 반복되고 서로 상처와 고통이 맞물리는 사람끼리 만나게 되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사랑의 화학반응’이라고 말하지요. 상처를 방어하기보다 진실한 욕구를 표현하는 노력 영은 심리치료를 통해서 자기 과거를 탐색하고 애도하며, 건강하지 못했던 대처법을 인식하고 건강한 대처법을 익히면서 고통스러운 화학반응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멜랑은 아무도 오지 않았던 발표회 기억을 슬퍼하고, 자기 욕구를 내색하지 못한 채 늘 어른스럽게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을 애도합니다. 그리고 차갑게 돌아서기 보다는 “네가 너무나 보고 싶으니 늦게라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콜리는 엄마가 언제 떠날지 몰라 두려워 화도 못 냈던 어린 시절을 위로 받습니다. 그래서 “일이 늦게 끝나 너를 먼저 보지 못해 너무나 아쉽다”고 말합니다. 그럼 멜랑은 있지도 않은 콜리의 새로운 상대를 상상하며 질투하고 괴로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실은 질투하는 그 대상도 멜랑 자신이 꿈꾸고 소망하는 자기 모습, 즉 버림받지 않을 정도로 멋진 누군가라는 상상의 대상이겠지요. 콜리는 자기가 화를 냈기 때문에 결국 멜랑이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어린 시절을 위로해줄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이 없겠지요. 사람은 두려움이 생기면 자기를 방어하려고 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표현하기보다는 무섭게 화내는 모습을 내보이게 됩니다. 바르데츠키라는 심리학자는 화란 곧 나약하고 상처받은 자기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상처를 방어하려고 갑옷을 두르기보다는 내 안의 진실한 욕구를 가려내고 이를 건강하게 표현하는 게 훨씬 좋은 결과를 선사합니다. 마음을 들여다 보면 어떤 욕구는 상처를 방어하고 분노를 표출하고자 하는 욕구이고, 어떤 욕구는 사랑과 따뜻함을 소망하는 진실된 욕구입니다. 진실된 욕구를 가려내어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처를 방어하고자 하는 욕구를 표출하게 되면 상대방에게도 상처가 되니까요. 하지만 진실된 욕구 표현에는 상대의 상처도 어루만지는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사랑은 힘겨울 수밖에 없나 봅니다. 성숙한 마음을 요구하는 일이고요. 하지만 사랑은 하면 할수록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과 오래도록 사랑해도 좋지만, 만약 헤어졌다면 그 다음에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게 분명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내가 더 탄탄해졌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사랑으로 아팠음에도 다시 사랑하려 하는 나 자신에게 격려를 전해주십시오. 사랑하는 괴로움에 시달리던 저에게 누군가가 따뜻하게 전한 말을 나누고 싶습니다. 연애하는 두 사람은 험난한 계곡 위로 걸쳐진 다리의 양쪽기둥과 같은 존재라고 그러시더군요. 만약 한쪽 기둥이 출렁거릴 때 다른 쪽 기둥마저 덩달아 출렁댄다면 다리는 겉잡을 수 없이 위험해집니다. 하지만 한쪽이 출렁댈 때 다른 쪽 기둥이 탄탄하게 버텨준다면 출렁임은 곧 멈추겠지요.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에 흔들리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곁에서 탄탄하게 상대를 지켜주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
2008/12/01 [10:42] ⓒ www.ildaro.com |
이혼하는 부모가 고려해야 할 것 | |||
부모의 갈등으로 후유증 겪는 아이들을 위하여 | |||
혼인으로 구성된 가족이 배우자 사이의 갈등으로 헤어질 수 있습니다. 이 때 가족구성원으로서 아이들도 충분히 배려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모두 쉽게 동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배우자와의 이별이 당사자들에게 워낙 큰 스트레스이다 보니, 아이들에게 관심을 쏟기란 쉽지 않습니다. 부모의 갈등이나 헤어짐으로 상처와 혼란에 휩싸인 아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부부 사이에 갈등이 있다거나 서로 헤어지게 된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항상 문제가 일어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아이 때문에’ 부부갈등을 덮어두고 사는 것은 부모 당사자들의 심리적 건강에 해로울 테니까 이도 좋은 해결책이 아닌 듯싶습니다. 또 많은 경우 우리는 특정 양육자가 부재하다는 데서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 합니다. 엄마 없는 아이 혹은 아빠 없는 아이, 혹은 이혼한 집 아이라서 말썽을 예상합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이별의 슬픔을 곪게 하는 원인인 점은 알아채지 못한 채 말이지요. 이별 사건의 후유증은 헤어지는 고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분명히 이별이 더 나은 선택이었을 때, 수많은 다른 이별에서 그러하듯이 마음 다치지 않게 잘 이별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면 아이들은 괜한 편견으로 상처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정직한 모습을 보이는 일이 중요해 부모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진실하게 대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아이들의 혼란스러움을 보살펴줄 수 있는가를 짚어본다면 아이와 함께 고비를 넘겨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양육자의 입장에서 현명하게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면, 아이의 고통도 덜하고 한편으로는 아이의 혼란스러움으로 인해 부모의 고통이 가중되는 상황도 예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부모는 아이에게 별거와 이혼이 무엇인지, 그리고 부모의 솔직한 심정이 무엇인지 숨기게 됩니다. 대개 어린아이일수록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설명을 빠뜨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 부모 자신이 좌절감이나 수치심에 빠지고 주변의 비난이 거세지면, 가족이 헤어진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금기시되기도 합니다. 덮어둔 경우에 아이는 갖가지 고민에 빠집니다. 나 때문인가 죄책감에 휩싸일 수도 있고, 분노를 품으면서 우울해 질 우려도 있습니다. 아이가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는 수준에서 부모가 정직한 모습을 보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쉬운 말로 얘기해줬을 때 아이는 놀라운 이해력과 공감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부모가 놀랄 정도로요. 첫 번째로 별거를 설명해주고, 시간이 지난 뒤에 이혼을 설명합니다. 별거 혹은 이혼의 뜻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별거를 시작하면서부터 별거가 무엇인지, 또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이혼이 결정되면 이혼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한번으로 그치지 말고, 아이가 확실히 이해할 때까지 반복적으로 말해줍니다. 아이가 언제든 궁금한 점은 질문할 수 있도록 부모가 마음을 열어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시시콜콜한 아이의 걱정을 모두 정리해주십시오. 학원은 누가 데려다 주냐고 묻는 아이에게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혼내기보다는, 학원은 누가 데려다 줄거니 걱정 말라고 하는 게 더 좋겠지요. 이때 가장 중요하게, 부모가 헤어진 상황에서 아이가 전혀 책임이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전달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대체로 자기 탓을 하게 됩니다. 만약 헤어지기 전에 아이 학교성적으로 부모가 싸우는 모습을 보였다면, 혹시 아이가 동생과 싸우고 난 뒤에 그랬다면, 아이는 자신이 모자라고 못된 아이라서 부모가 헤어지게 되었고, 부모가 자기를 버릴 거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부모는 이를 점검하고, 아이를 안심시켜주는 일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아이가 이런 짐을 안고 크게 된다면, 감정을 표현하거나 인간관계 안에서 이별을 다루는 방식에 서툴러질 수 있습니다. 상대 배우자를 비난할 때 아이가 느끼는 압박감
어린아이일수록, 부모를 각기 독립적인 사람으로 간주하지 못하고 부모 말에 쉽게 좌우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어른들 문제는 아이가 판단할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복잡하고 압도적인 것들인지라, 아이는 부모의 비난과 편가르기에 휘말리면서 자율적인 생각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특히 아이는 부모에게서 버림받을까 두려워 최대한 혼란을 숨기고 특정 부모 편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때조차 특정 부모를 보호하거나 의리를 지켜야 한답시고 괜한 책임감을 지려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은 자기 고통과 욕구를 숨긴 채 타인에게 헌신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자라기 쉽습니다. (완전 나잖아..) 아이의 정체성이나 사회성 발달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만약 엄마가 아빠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한다면 남아는 건강한 남성역할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남자인 자신을 비난할 위험도 있습니다. 만약 아빠가 엄마를 비난한다면 여아는 엄마와 닮은 자기 속성을 부정하면서 자신을 깎아 내릴지 모르고, 훗날에 사람과 만나고 헤어질 때 드는 감정을 감당하지 못해 힘들어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부부관계가 성인이 된 아이에게 슬프게 기억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위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상대 배우자를 아이양육자로서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를 위한 상대 배우자의 마음은 최대한 아이에게 전달해주고, 아이가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다면 내가 좋은 부모라는 자신감도 커질 수 있습니다. 상실감 극복할 수 있도록, 아이만의 심리적 공간 허용해야 그러나 이해는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아이는 통제감을 잃은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부모의 이별이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입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 드는 무력감이란 보통이 아니겠지요. 그래서 임상심리학자들은 일상의 다른 영역에서 아이의 통제감을 회복시켜주라 말합니다. 이를테면 위험하지 않는 한 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헤어짐이라는 상실감을 서서히 극복할 수 있는 시간을 줍니다. 마치 아기에게 ‘젖떼는 시기’가 필요하듯이, 매일 보던 엄마나 아빠를 못 보게 되었을 때 겪는 상실감을 대체할 수 있는 여유를 주십시오. 헤어진 엄마의 물건을 가지도록 허락한다든지, 아빠를 상징하는 물건을 지니고 다닐 수 있도록 해준다든지 말입니다. 아이가 애착하는 물건을 절대로 훼손해서는 안됩니다. 언제든 양 부모와 접촉할 권리를 당연히 주어야 하고, 아이의 심리적 공간도 그대로 허용해야 합니다. 가능하지 않을 경우에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무력하게 부모를 빼앗겼다거나 부모에게서 버림받았다고 느끼면 깊이 분노가 자라날 수 있습니다. 화가 나서 하지 않던 말썽을 저지르기도 하고 갑자기 애기가 되어서 칭얼대거나 때로는 배변을 못 가리는 경우도 생기지요. 이 분노 표현과 실수 중에서 혼낼 것과 감싸줄 것을 현명하게 가리는 어려운 일을 부모가 해주면 좋겠습니다. 말썽은 표면일 뿐이고 이면에 놓인 다른 이유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화는 실은 아이 스스로도 잘 모르는 우울이나 상실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빠가 보고 싶어서 슬픈 아이는 엄마에게 못되게 구는 방식으로 슬픔을 표현하게 됩니다. 엄마가 그 속마음의 슬픔을 감싸주면서 아빠가 보고 싶은 마음을 인식하게 해주고, 이를 화나 말썽으로 표출하기보다는 말로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준다면 최선이겠습니다. 재혼하는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재혼 당사자들은 서로에게 익숙하겠지만 아이들은 응당 낯설게 느낍니다. 신중한 설명과 허용, 그리고 아이들에게 심리적 여유를 누릴 권리를 인정해 주는 것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헤어진 당사자로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닐 터이지만, 가파른 길 오르는 중에 아이 손을 단단히 잡아주세요. 내가 내 아이를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면 아마도 더 기운이 날 겁니다. 한편으로는 사랑을 잃었지만 다른 사랑을 찾으시길 바라며, 아이와의 사랑도 오래도록 든든히 지켜가시기를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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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c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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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기사에서 지적하고 있는 첫째, 둘째 의혹도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부가 정보
점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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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권들이 나서서 제 2의 유서대필 사건을 만들려고 하는군요가관입니다. 아주
가해자 당사자들과 민주노총 관계자들 그리고 배경으로 지적되는 가부장적 문화 남성주의적 문화 이런것들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세우는것은 아무도 뭐라고 안합니다만 무슨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성폭행을 저질렀다느니 공안당국이나 쓸법한 소설 출판은 멈추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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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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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삼씨. 왜 남의 블로그에 와서 행팬지 모르겠네. 이해력이 그렇게 딸리니까 계속 이런 문제가 끊이질 않는 겁니다. 성폭력이라는 게 단순히 순간의 성욕때문에 생기는 일인 줄 아십니까? 물론 그런 또라이도 널려있겠지만, 그 때 당시 상황 속에서의 수많은 권력관계가 작동해서 발생하는 거라구요. 문제제기를 하면 조중동이 좋아할 거라고 하는 거나 공안당국이 쓸법한 소설이라고 하는 거나 뭐가 다르죠? 여성주의자들의 입을 막기 위해 쓰이고 있는 저 케케묵은 논리 이제 집어치우시죠. 전혀 구체적이지도 않고 정치적이지도 않고 어느 누구도 설득시킬 수 없는 논리는 혼자 벽보고나 떠드시라구요. 할일없이 남의 블로그와서 비겁한 답글 달지 마시고.부가 정보
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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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댓글을 다네요..내맴님 포스팅 한거보고 완전 제 맘이랑(혹은 제 친구들과 한 얘기와) 똑같아서 깜짝 놀랐어요..그리고 일다 기사 보고..저도 '정치적 스킨십'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거든요. 추정이든 아니든 권력관계/가부장적인 조직문화 속에서 충분히 있을법한 일이라는게 중요한거니까요..
암튼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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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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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 I know you..부가 정보
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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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럴수가..내가 바보인건가..윽..ㅠ_ㅠ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