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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7/05
    7월 4일, 홈에버 상암점 점거투쟁 5일째(4)
    네오키즈
  2. 2007/07/05
    7월 3일, 홈에버 상암점 점거투쟁 4일째.
    네오키즈
  3. 2007/07/04
    6월 23일, 홈에버 상암점 투쟁.(3)
    네오키즈

7월 4일, 홈에버 상암점 점거투쟁 5일째

전에도 말했듯, 시민들의 연대와 이해는 너무나 큰 힘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가슴아프기도 했다. 특히 조금 먼 동네에서 물건을 사기 위해 오셨다가 정보를 접하지 못해서 쇠사슬이 묶인 문을 보시고 몇마디 물어보시다가 뙤약볕에 돌아가셔야 하는 할머니분들 같은 경우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특히나 개인적으로는 친할머니를 황망하게 보내드린 기억이 있어 눈이 찡해왔다. 이를 악물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오시면 정말 잘해드릴께요.

그동안 수많은 동지들의 연대가 있었다. 금속노조는 물론이고 코스콤노조, 타워크레인노조, 공무원노조, 시민단체, 학생연대단체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가고 묻고 대답하면서 연대했다. 민노당 마포지구 동지들, '다함께' 동지들, 사회주의학생연대, 노학동 등등 많은 사람들이 같이 함께 심지어는 곱잠까지 자면서 힘을 보태주었다.

현재 용역들과의 신경전은 소강상태다. 원래가 용역어깨 인원들이 적기도 했거니와, 전에 여기서 몸싸움을 한 것이 KBS를 통해 방송된 것이 신경이 쓰였는지 어쨌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몇몇 보안들로부터 우리와 마찰을 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그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치고, 여기는 점점 살림살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처음엔 바닥에 까는 돗자리 정도였던 것이 바깥에는 부엌도 설치하고 개까지 데려오는 등 다채로운 모습들이 있었다. 밤에는 잠이 오지 않는 조합원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에 잠도 자지 못하는 조합원들도 있었지만 이제 다들 조심하고 배려하는 분위기다. 술은 금지되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는 첫날 이것을 어기고 말았다. 학생동지들과 이야기가 좀 길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마지막 병으로 하겠노라는 결심은 확실히 지키고 첫날을 보낸 후, 지금까지 현장에서 술은 절대로 마시고 있지 않다. (원래가 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 현재 두 가지 큰 걱정거리가 생겼다. 하나는 국가대표A매치가 5일, 기독교100주년 기념식이 6일에 있다는 사실이다. 당장 내일부터다.

고객들이 불편을 항의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름대로들 개인적인 의견은 분분했지만 전체적인 지침은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그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라 한다면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10만 명의 인원이 기독교 100주년 기념식에 온다. 이들이 모두 뉴스를 접하고 있다면 모를까, 이랜드를 좋은 기업이라고 생각할 공산이 크다. 최악의 경우에는 유혈사태까지 벌어질지도 모른다. 군중심리란 컨트롤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는, 아무래도 이랜드가 제일 바라는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 최대한, 그들의 이성이 절대로 우리를 나쁜 눈으로 보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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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일, 홈에버 상암점 점거투쟁 4일째.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어떤 일부터 말해야 할 지 나도 잘 모를 지경이고 정리가 안될 지경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 지점부터 말해야 할 듯 싶다. FTA집회를 나간 그 때부터.

그곳은 유독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그 와중에 인상좋아 보이는 경찰이 한 명 탔다. 상부상조하자고 했다. 나도 웃으면서 부드럽게 대했다. 마로니에 공원까지 왔을 때, 잔뜩 찌푸렸던 비가 내렸다.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고, 우리의 조합원 수도 많았거니와 거의 아주머님들이었기 때문에 통제에 신경을 쓰느라 계속 서 있으면서 구호를 외치고 투쟁을 외쳤다. 금속노조 파업의 전단지에 내 얼굴이 한가운데 크게 박혀있었다. 아주머님들이 다들 나를 가리키며 웃었고, 나도 웃었다. 그 전단들은 비에 젖어 밟혔다.

그렇게 종로5가에서 광화문까지 행진하자 아주머님들은 탈진할대로 탈진했다. 다음날의 상암점 점거를 위해 일찍 이탈하고자 위원장님이 와서 지침을 내려주고 있을 때였다. 몇몇 누님이 이상한 젊은 사람을 발견했다. 우리들의 틈에서 핸드폰과 MP3를 이용해 녹취와 사진찍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원장이 젊은 사람을 붙잡았고, 나는 그 사람이 그냥 시민인줄 알고 돌려보내려 했으나, 녹취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방을 빼앗는 걸 도왔다.
나중에 위원장님이 빼앗은 가방 속 지갑에서 가장 먼저 본 것은 경찰공무원증.

마포경찰서장의 밑에 있는 주병규라는 이름의 경찰이었다. 정보과 소속이라고도 한 듯 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멍하니 서있던 상부상조하자는 사람을 끌고 왔다.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했고, 몇몇 달려온 뉴코아 동지들에게 내가 소리를 질러 상황을 설명하자 순식간에 민주노총 조합원을 비롯한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둘러쌌다. 다른 폭력적인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더욱 사람들을 흥분하게 했다. 처음엔 롯데호텔 노조원이라고 속이고 우리와 같은 버스를 탔었다.

민주노총 조합원 간부처럼 보이는 분은 보호를 했고, 흥분한 우리들은 온갖 폭언을 쏟아부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모자랐다는 생각이었다. 겉으로는 상부상조하자고 웃으면서 실제로는 이딴 짓을 하고 있다니. 사실 확인 절차에 따라 경찰에 신고를 해서 그들을 인도하게 했다. 그 상황에는 112에 신고해서 바로 인도하게 되어있다는 이야기가 후에 들려왔다. 증인을 선다는 아주머님들을 책임지겠다고 하고, 흥분하신 조합원들에게 대오를 지어 버스로 이동하게 했다. 그날은 이래저래 고생이었다.

그리고 상암 점거 후 지금 4일째. 홈에버 상암점 2층은 현재 영업을 하고 있다. 사실 거기에 입점한 업주들과의 트러블은 우리가 바라지 않는 형태의 것이었지만, 그 사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일부 조합원들에 의해 업주 한 분의 항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그것은 싸움으로 번질 뻔 했지만, 흥분한 업주를 진정시킴과 동시에 즉시 항의를 받은 만큼의 안내문들을 갖다붙이고 간부급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보고하고 조합원들의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서 원만히 마무리지었다.

지금까지 투쟁을 전개한 느낌이라면, 확실히 강남뉴코아 때와는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물론 강남에서도 이해를 해주시는 분들은 많았다. 하지만 여기 상암점과 비교하면 택도 없을 지경이었다.

강남뉴코아 때가 생각이 난다. 뒤쪽 중앙 입구에서 고객과 뉴코아동지 간의 싸움이 일어났다. 결국 말이 곱지 못해 시작된 것이었지만, 한사코 그 두 명의 여자 고객은 들어가서 물건을 살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의 입에서 절대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나왔다.
"저러니까 비정규직에 짤리기나 하지."
그 싸움은 싸움을 말리던 위원장과 되려 흥분한 다른 고객의 싸움으로 번질뻔 했지만, 나는 위원장님을 말린 후 자리로 돌아와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죄송합니다, 고객여러분, 하지만 이것도 생각해 주십시오. 고객 여러분이 여기서 물건을 사는 돈으로 이익을 낸 이랜드는 폭력용역을 고용해서 저희를 패는 짓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고객여러분, 단 한 번만 이해해 주십시오."
기분이 무척 썼던 날이었다.
이후에 들었던 이야기로는 이전에 계산대에서 막 싸우는 그런 상황에서도 밥을 태연히 먹고 있는 인간들이 있었더랜다.

(또 한가지 에피소드. 어떤 두 아주머님 분이 나오시더니 이랜드 자본이 지멋대로 자신들의 아이들 통학로에 주차장을 건설하고 있다고 연대투쟁하시겠다고 하셨다. 아파트에서 나온 많지 않은 주민분들이 연대를 해주셨다. 몇몇 분들은 그런 의식의 근저가 맘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그 때는 차라리 고사리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었달까.)

상암점 점거 이후, 밤늦게까지 점거를 이행하면서 지도부에서 다른 의견이 나왔고, 그 의견을 각자의 조합원들에게 묻게 했다. 분회장 이하 간부급은 분주히 조합원들의 의견을 들으러 다녔다. 그 자리에서 바로 무기한 농성의 결의가 나왔다. 과거에 상암점은 문을 닫겠다고 하고 30분만에 다시 계산대를 열었던 거짓말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월드컵노조분회장님의 결의가 먼저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여기서 밤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조를 나누고 밤을 새면서, 다들 피곤한 기색에도 끊임없이 나와주시는 조합원들을 보며, 응원을 삼아 드링크제와 라면들을 보내주시는 시민분들이나 관련자분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가 우리들의 사이에서 박수를 치고 투쟁이라고 말하는 장면들이나, 우리가 왜 파업을 하고 있는지 열심히 설명을 들어주시고는
"할려면 이렇게 해야 돼."
"꼭 승리하세요."
한 마디씩 해주시고 가는 시민분들에 대해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 지 모를 정도로 너무 감사할 때들이 많았다.

(죄송....지금 노트북을 빌려쓰고 있는데 요청이 들어와서 여기까지만.....다음에 더 이어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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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3일, 홈에버 상암점 투쟁.


현재까지의 내가 겪어오는 상황.

이랜드의 협상거부, 정부의 이랜드일반노조 쟁의권 승인,
합법적 투쟁의 시작. 상암점 옆 공터에서의 전체투쟁 한 번, 일산뉴코아 계산대에 대한 두 번의 투쟁,
그리고 일산홈에버 점에서의 투쟁 한 번.
일산뉴코아 킴스클럽 계산대에서는 용역직원들이 계산프로그램에서
해고자의 명의도용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

이렇게까지 하면서도, 실질적으로 매장에 대한 타격이 없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불만이었다. 실시간 파업(일하다가 지침이 떨어지면 파업하는 형태의 투쟁)이 그다지 효과가 없다는 것은, 즉 회사측에서는 이래도 저래도 장사가 되니 별 상관없다는 식으로 일관하는 태도에 일침을 가하는 효과가 그다지 없었다는 것이다. 한 번 제대로 매장 문을 닫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램은 지도부에서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것이 이번 상암점 투쟁으로 시작된 것이다. 전략적으로는 상당히 효과적인 방법이기는 하나, 그만큼의 민폐를 끼치는 것에 대한 각오도 해야 될 일이었다.

나오기 이틀 전, 연수라는 명목 아래 퇴사처리가 된 과장에게서 밤에 전화가 왔다.
"내가 이런 말할 상황은 아니지만, 네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 네 파트는 무너진다."
그 전에 과장은 이렇게 말했었다.
"할려면 하고 안할려면 하지마라."

그 말의 의미가 나중에서야 새겨진 건 다른 사람들과 그 대화의 의미를 나누면서부터였다. 괜히 어설프게 일하지 말라는 이야기. 부장조차도 다들 노조에 들라는 말을 남긴채 회사를 나갔다. 그들이 간 연수란 건 말이 연수일 뿐 실제로는 일부터 시작해서 매니저급들에게는 온갖 불리함만 채워진 것이었다. 그런 연수를 파트타이머와 두 명의 정직원만 남겨놓고 떠나면서, 리빙팀은 매니져 팀들이 허공에 붕 뜬 격이 되어버렸다. 오픈을 하고 힘들게 유지하고 있던 팀웍은 하루 아침에 공중분해되었고, 수많은 일거리들은 단 두 명, 심하면 한 명의 오후조 파트타이머 인력 가지고는 검수장에서 그 좁은 창고로 가지고 올라올 수가 없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분노만 치밀었다. 과장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러나, 분노만으로 투쟁을 하려는 내 태도가 과연 도움이 되는 일인가, 그것 또한 줄기차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끝내, 그것을 잠시 잊기로 하고 다음날, 상암으로 향했다.

홈에버 상암점은 CGV를 비롯해서 경기장 1,2층에 걸친 매장의 길이가 꽤 되는 구조였다. 전경들의 배치가 이미 끝나있는 상태였고, 이들은 길가쪽에 선 채로 긴장하고 있었다.

일단 사람들과 함께 CGV쪽 입구를 통해서 올라가기로 했지만 그건 안일한 생각이었다. 이미 고객의 편의를 무시한 채 홈에버 영업진은 2층의 동선을 셔터를 닫아 막았다. 점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1층 입구들의 온 사방은 노조와 고객과 용역들이 벌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용역인력들은 1층의 모든 고객출입구를 막기 시작하고는 KBS의 카메라를 찍지 말라며 손으로 막았다. 매장에서 나오려는 고객의 아이가 끼어있는데도 불구하고 덩치큰 용역인력들은 문을 막은 채 움직일 줄을 모르는 때도 있었다. 고객들의 항의가 터져나왔고, 노조원들은 옆에서 때로는 고객들의 싸움을 거들거나 때로는 응원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다른 통로를 찾기 위해 상암점의 정문을 지나갔다. 정문 역시 용역인력들이 스크럼을 짜고 막고 있었고, 그 곳에서도 고객들과의 트러블이 발생하는 중이었다. 그러한 광경을 지나서 2층으로 통하는 통로를 발견하고는 그리로 이동했다. 화장실에서 노조티셔츠로 옷을 갈아입고 1층 계산대 쪽으로 향했다.

이미 진입에 성공한 수많은 노조원 동료들은 1층 계산대에 자리를 잡았다. 홈에버 노조와 뉴코아 노조는 고객의 최소한 동선을 확보한 채 (그것조차도 주말의 수많은 고객들로 인해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계산대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점점 노조원들의 인원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막지 않은 동선을 발견하고 진입에 성공한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었다. 지하 1층에서 지상 1층으로 올라오는 무빙워크도 폐쇄되었고, 그 밑에서는 노조원들이 용역인력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잠시후, 용역인력들은 출입구를 막는 것을 포기하고 계산대 건너편 쪽으로 도열했다. 다른 사람들을 대강 안내하며 나도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데 남매인 아이 둘이 우리 사이에 앉아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같이 데리고 온 아이인줄 알고 엄마아빠 어딨느냐며 재차 물었으나 소음으로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했다. 나는 다시 아이들과 대화하며 상황을 파악했다.
그 아이들은 홈에버 문화센터에 수업을 들으러 왔다가 용역인력들이 문을 막는 바람에 고립된 아이들이었다. 어디로 나가야 할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던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는 바깥으로 갈 수 있게 안내했다. 동생인 여자아이가 또박또박 말했다.
"경찰들이 막고 있어서 못나갔어요~"
나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해주자 계단을 뛰어오르며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나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계산대는 110명이 한꺼번에 노조에 가입한 그 힘으로 인해 텅텅 비어 있었다. 고객동선을 확보한 채로 도시락이 오기 전까지 구호들을 외쳤다. 나 역시 선전지 종이를 말아서 입에 대고 낼 수 있는 한 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매장이 길쭉하다보니 양쪽의 인솔자들 사이에 통일성이 없어 각자 구호를 외치는 형국이 되고 있었다. 심지어는 앞의 지도부들의 말조차 들리지를 않았다. 함성 대신 불어대는 호루라기 소리에 아이들이 귀를 막고 지나갔다.
텅텅 비어있는 계산대에 매니져급의 대체인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4개 사의 카드로 1000원 이하의 물건을 사게 되면 카드조회시간이 15분 이상 걸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실 이건 이전 상암점 투쟁때에도 있던 일이었다. 그떄는 노조원들의 방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고객들의 항의가 줄을 이었다) 노조원들이 물건을 사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몇몇 고객들은 노조원들에게 항의를 하기도 했고, 혹은 계산대에 항의를 하기도 했다.

도시락이 도착했고, 좁아터진 매장 앞 공간 바닥에서 모두들 도시락을 먹었다. 나는 부지런히 쓰레기들을 바깥의 쓰레기통 옆에 놔두었다. 그래야만 고객동선이 어느 정도 확보되기 때문이었다. 중간중간에도 고객들의 흐름이 막힐 경우 그것을 통하게 하기 위해 안내를 했다.

점심을 먹은 후 원기왕성해진 노조원들의 함성이 더 커졌다. 거기에 스피커와 앰프가 들어와서 통일성이 확보되자 농성은 더욱 활기를 띄었다. 그렇게 되고 있는 와중에 정문이 아닌 매장 오른쪽 끝의 고객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용역인력과 노조원 몇 명의 트러블이었던 듯 한데 다른 노조원들이 일어나서 과열되는 분위기를 위원장이 수습했다.
"몸싸움은 안됩니다. 절대로 때리면 안됩니다. 그냥 맞아주는 겁니다."
그럼에도 한 두어번은 그런 상황이 끊이지 않자 나는 그것을 말리기 위해 그 쪽으로 아예 이동을 했다. 그 끝은 연대하기 위해 온 학생들이 서있는 곳이었다. 그 때까지 우리는 계산대 앞의 동선을 막지 않고 있었다. 거기까지 오고나서야, 뉴코아 노조원 동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2층 계산대를 막으러 이동했었다. 바로 계산대 앞의 동선을 막고 뒤쪽으로 동선을 내주었다. 실질적인 실력행사-계산대 막기가 진행되었다.

갑자기 전개된 상황에 용역인력들은 당황하는 눈치였다. 기본으로 서있는 사람들 이외에는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나름대로의 작전을 짜는 듯 했다. 한 편 내가 있는 곳으로는 고객들이 자꾸 들어왔다. 다시 종이를 말아서 고객들에게 외쳤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현재 시위상황으로 1층2층 계산대가 이용 불가능하십니다! 들어가셔도 물건을 사실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고객입구 쪽에서는 학생들이 비정규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홈에버를 이용할 수 없다고 외치고 있었다. 역시 학생들은 좀 순진한 면이 있다. 아무리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농성하고 있습니다, 외쳐봐야 자기 일이 아니면 신경도 쓰지 않는다. 차라리 그들의 이익과 불이익에 관련된 안내만 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많은 고객들은 매장의 상황에 발걸음을 돌렸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고객들은 매장 안으로 들어와 물건을 사갔다. 그것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홈에버 계산대 대신 안쪽의 외주업체 계산대를 쓰고 있었다. 그 쪽으로도 지도부가 달려갔지만 그 곳에서의 계산까지 막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에 비해 의외로 많은 고객분들은 불평을 하지 않으셨다. 사실 속으로는 불평을 많이 하고 계셨던 것일 수도 있고. 그런 민폐를 끼치면서까지 농성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그래도 진행해야만 한다는 집념들이 교차했다. 계속 고객에게 안내를 하고 왜 이러느냐고 물으시는 고객분들께 사정을 설명도 드렸다. 중간중간 용역인력들과의 트러블도 발생했다. 그건 소규모였기에 오래 가지 않았다.

점점 진입을 해서 계산대 안 통로를 점거하고 농성하던 오후 4시 경 사고는 발생했다. 플래카드를 걸던 그 틈을 노린 용역인력들이 주로 학생들만 있던 쪽인 통로 하나로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비명소리에 돌아본 내 시야에 들어온 건 이미 계산대와 용역인력의 사이에 한 남학생이 끼어있고, 한 여학생이 그래도 계속 혼자서 밀어 붙여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욕지기를 내뱉으면서 그 통로에 들어서서는 바로 어깨로 밀어내기를 했다. 다행인건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 정도도 읽어보지 않았나 싶을 정도의 그들의 전술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합세했고, 좁은 통로에서의 밀어내기는 성공했다. 나는 멱살을 잡혀 계산대 안쪽 바닥으로 패대기 쳐지듯 했지만 힘을 덜 받은 까닭에 크게 다치지 않고 다시 위치를 지켰다. 천만다행으로 그 상황에서 다친 사람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소란은 위원장의 마무리로 끝났지만 수많은 노조원들은 더 독이 올랐다.

이해해 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교회에 헌금 130억. 주식배당 82억. 우리 같은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몰아내기 위해 용역인력들에게 주는 돈이 10일간 2-3천. (거기 있던 용역업체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아니다. 다만 업계 평균일 따름이다. 이건 아마도 더 늘어났으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임금협상때 그들이 내놓은 안은 0.6%. 기본급에서 0.6%면 정말 몇백몇십원이요, 그나마도 더 이야기하자고 한 걸 거부한 인간들이었다. 사람을 기계부품으로 아는 사고방식, 사람을 바보로 취급하는 그들의 방식이 뚜렷해지는 상황이었다.
이제, 처음에 가졌던 머리의 아픔이 싹 사라지고 있었다.

경찰의 진입과 용역인력의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거의 탈진할 지경에 있던 오후 6시. 그 때를 기점으로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현재 홈에버 사측과 협의하여 이 곳의 영업을 중지하고 경찰들이 사라지면 우리도 농성을 끝내겠다는 협상안이 받아들여졌다고 했다. 그리고 홈에버는 바로 영업중지 준비에 들어갔다. 우리는 우리의 승리를 자축하며 그곳을 나왔지만, 나는 사측의 말을 믿지는 않았다. 분명 그들은 다시 영업을 할 것이었고, 이미 나온 순간에도 그들은 다시 영업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큰 성과였다. 상암점의 주말평균 매출이 9억 정도. 하루 반나절의 피크타임을 점거하고 있었으니 손실액은 엄청났을 것이다.

모든 것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힘들었다. 어머니와 함께 9시 뉴스를 보았을 때, 내가 몸싸움을 하던 장면이 찍혀있었다. KBS측에서는 실제 직무급제 상황에 대한 것들보다는 고객들이 당한 불편과 사측의 불법파업 운운을 후반부에 두어 비중을 높였다. 짜증이 나려는 순간 어머니는 나를 보고 미친 거 아니냐고 하셨다.
내 입에서는 웃음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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