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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말 3초

2말 3초는 항상 정신 없이 보냈던 것 같다.

학생 시절은 새터 준비에 새내기 모집 준비에 등등..

지금은 그냥  정신 없다..

배나온 아저씨는 어딜 갔기에 이렇게 여러 사람 속을 태우는지..

전화라도 좀 하지..

이렇게 하다가 어디가서 무슨 활동을 할 수 있을 런지 걱정이다..

걱정하는 거나 알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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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글) 사회적 교섭과 조카

저는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으로 있는 김 진숙이라는 사람입니다.

다들 그러셨겠지만 저역시 지난 설,고향으로 가는 길이 편편치만은 않았습니다. 인천에 있는 조카는 집에 어려운 사정이 생겼는데 맏이로서 아무것도 할수 없다는 무력감때문인지,휴가가 하루밖에 없다는 둥,차가 많이 막힐거라는 둥 핑계를 대면서 안가려고 하기에,그래도 명절인데 안가면 엄마가 얼마나 섭섭해 하시겠냐,너 안가면 나도 안갈란다, 어르고 달래서 겨우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인천 주안역에서 만나서 차를 타자마자 조카가 묻습니다.

"이모,그게 모야?"
"이거?김셋트.니네 엄마 줄려구"

저는 제 손에 들고 있는 커다란 꾸러미를 궁금해 하는 줄 알고,한진동지들이 마련해준 선물셋트를 자랑스럽게 치켜보였습니다.

"아~니.저번에 내 친구가 테레비 보구 말해주든데 민노총이 막 싸웠대매.한쪽에선 뭘 하자그러구 한쪽에선 하지말자 그러구 신나두 뿌리구 그랬대매.그게 모냐구"

망할년.하구 많은 말 다 놔두고 오랜만에 만나서 가장 아픈데 부터 찌르다니..
저는 심사가 있는대로 꼬여서는, "야.너는 민노총이 아니라 민주노총이라구 멫뻔을 말해야 알아듣냐?민주노총!" 엉뚱한 트집을 잡습니다.

"암튼.그게 모냐구?모때매 그랬는데?"
"사회적 교섭"
"엉?그게 몬데?"

사회적 교섭이 뭔지도 모르는 제 조카는 비정규직 노동잡니다. "그러니까 니가 용역이야?"라고 물으면 그렇다고 했다가,"야 그런 건 파견이야" 그러면 또 그런가부다 하는,한마디로 지가 뭔지도 모르는 한심한 까대기 입니다. 커다란 마트에서 일하는데 얘는 그 마트의 직원이 아닙니다. 라면파트에서 온종일 라면에 치여서 살면서도 얘는 그 라면회사 직원도 아닙니다. 그 마트에서 일하고 밥먹고 똥싸면서 하루 열시간이 넘게 일하는데,사실은 사장이 누군지도 모르고 회사가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파견업체가 얘가 속한 회사입니다.

그 마트에서는 얘한테 일 시킬거 다 시키고,물건 진열이 조금만 더뎌도 땍땍거리고,늦게 밥 먹으러 간탓에 1분만 늦게 와도 주임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지키고 서 있으면서도,얘가 사소한 요구라도 할라치면 니네 회사에 가서 말하라는 아주 편리하기 짝이 없는 구조입니다. 월급 명세표도 없는 월급 80만원을 받으면서,언제부턴가 돈이 줄어들어서 나오길래 명세표를 볼 수 없냐 했더니 니네 사장한테 달라하더라는 쫑코 이후 이 아이는 아무것도 요구하지도 묻지도 않는답니다. 나중에 다른 친구들한테 들어보니 법이 바뀌어서 생리도 월차도 없어져서 그렇게 됐다 하더랍니다.

이 아이 아침 7시 30분 부터 저녁 10시 까지 일합니다. 추석때도 일하느라 추석 다음날 잠깐 집에 다녀왔고,이번 설에 9일을 쉬는 회사도 있다고 언론에선 떠듭디다만,얘는 그나마 1년이 넘은 짬밥 덕택에 설날 하루가 휴가 였습니다.
주 5일제를 누리는 세상에서,이 아이는 토요일 일요일이 더 바쁩니다. 지 동생이 장가를 가서 얘한테도 첫조카가 생겼는데,어깨가 아파서 조카 한번 안아주지도 못했습니다. 설날도 밥만 먹고는 온종일 퍼 자다가 내일 출근땜에 부시시하게 부은채로 밤에 갔습니다. 조카를 안지도 못하는 어깨로 박스를 들어 나르는 일을 하러...

온종일 박스 들어나르는 게 일이라 손가락이 퉁그러지고 어깨가 아파 팔을 들지도 못하면서도 산재 신청도 못하는 제 조카는 병신 입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노조도 못 만드는 제 조카는 쪼다 입니다. 촌에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몇년간 다니던 직장이 망하고,서른 몇살의 여자를 받아주는 데가 있다는게 감지덕지 고마워서,말한마디 변변히 못하고 사는 제 조카는 천치입니다.

그래도 이 아이 저한테는 참 애틋한 아이입니다. 쌍둥이인 이 아이 태어났을 때.지금도 그렇지만 집이 참 많이 어려웠습니다. 이 아이 엄마인 우리 큰언니가 벌어 먹고 살았는데,쌍둥이 둘을 매달고는 길에서 장사를 못하니까 둘중 큰아이인 이 아이는 우리집에서 컸습니다.우리 엄마가 아픈 날이 많아서,아예 일어나시지도 못하는 날은 이 아이를 제가 업고 학교를 가는 날도 있었습니다.
중학교때.애기를 매는 띠도 없을때라 기저귀로 이 아이를 업고나면 왜 그렇게 흘러내리는지 궁뎅이에 아이를 치렁치렁 매달고 학교를 간 적이 몇번 있었는데,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다른 애들 다 등교한 학교에 맨 나중에 들어가서 정문옆 철봉틀에, 업고 간 기저귀로 이 아이 묶어놓고 교실로 뛰어 들어갔었습니다.
수업시간에도 저는 창문밖 철봉틀만 내다봤었지요.

쉬는 시간에도 다른 애들 눈 때문에 나가지도 못하고,수업시간에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 달려가보면,그래도 아는 얼굴 왔다고 입안에 모래를 가득 담고 벌쭉 벌쭉 웃던 아이입니다. 똥을 도대체 몇번이나 쌌던건지 온몸에 똥으로 매대기를 쳐놓고도 울지도 않던 그런 아이입니다. 이 아이가 커서 중학교에 다닐 때.수배중인 이모 잡는다고 경찰이(정복도 아니고 신분증 제시도 안했다니 아마도 짭새였겠죠)이 아이가 다니는 학교까지 와서 이것저것 묻고 따라다닐 때도,우리 이모는 나쁜 짓 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는 그런 아이입니다.

그런 사실을 20년이 지난 작년에야 얘기를 했던..그런 아이입니다. 짜장면 한 그릇 못사준 이모한테 옷도 사주고 신발도 사주고 명절 때는 노자하라고 용돈도 주고 그런 아이입니다. 그런 아이가...저 때문에 비정규직이 됐습니다. 98년 노사정위원회가 만들어질 때 제가 온몸으로 반대를 안해서 이 이이가 비정규직이 됐습니다. 노사정위에서 파견법이 합의될 때 제가 온몸을 던져서라도 막아내지를 못해서 이 아이가...

솔직히 잘 몰랐습니다. 우리 조합원들은 노조가 있고,단결된 힘으로 단협에서 막아내면 솔직히 되지 않을까 그런 이기적인 생각도 있었습니다. 제 조카는 전노투도 아니고 좌파도 아닙니다. 다만 민주노총이 어떤 합의를 하면,자기는 알지도 못하는 그 내용에 따라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일 뿐입니다.

계약이 해지되면서 50이 넘은 나이에 길거리로 쫒겨난 부산대 청소 아지매 경비 아저씨들,하이닉스 매그나칩 동지들,현자 비정규직 동지들,대자 비정규직 동지들,기아자동차 사무계약직 동지들... 그분들을 만나면 죄스러움에...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냥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그분들을 만나면 자꾸 울게 됩니다.

저는 제가 민주노총이라는 게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운동한답시고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면서도,긍지와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늙은 아버지까지 안기부에 경찰에 시달리게 만들었으면서도,그까짓 상처쯤이야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걸로 다 덮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살았는데...점점 안좋아지는 세상.지 잘난 맛에 살았던 그 잘나빠진 이모가 조카를 파견노동자로 만들어버린...아...저는 20년 동안 뭘 한걸까요. 제가 20년 동안 한건 뭐였을까요.

일요일도 없고,재고조사하는 날은 밤도 없는 제 조카앞에서 저는 이모가 열심히 싸워서 민주노총 사업장은 대부분 주40시간 이 됐다고 자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상여금도 없고 체력단련비도 없고 효도수당도 없고 하다못해 월차도 없는 제 조카의 천만원도 안되는 연봉앞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은 열심히 싸워서 그들의 성과금이 너의 1년 연봉을 넘는다는 자랑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민주노총의 투쟁이건 산하노조의 투쟁이건 비난이 난무할 때,조중동만 탓하기엔 참 옹색해져 버렸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역마다 거리마다 넘쳐나는 노숙자, 하루 서른여섯명이 목숨을 끊는 자살행렬의 시작이었던 98년 노사정위 합의. 그에 대한 처절하고 뼈저린 참회없이는 민주노총의 어떤 정당하고 명분있는 투쟁도 고립무원일 뿐입니다.

사회적 교섭이,갈등의 당사자들이 모여서 대화로 문제를 풀자는 거라고 제딴에는 열심히 설명해주고 나니,조카가 묻습디다.

"대화가 돼? 대화루 해두 되는데 근데 이모.그 아저씬 왜 크레인까지 올라가서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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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설이 지났으니 나이 먹는게 싫어 신정이 지나고도 작년나이를 말하던 사람들은 이제 에누리 없이 한살이 더 늘어나게 생겼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굳이 나이를 줄여 말하진 않았지만 턱걸이 30이 되고나니 좀 그렇다.

설연휴내내 잠만잤다. 먹고자고 먹고자고 하니 2키로그램정도 체중이 는것같다.

집에 갔더니 여전히 큰조카는 나를 싫어하고 이제막 한 돓도 안지난 둘째조카는 아직 날 안 싫어하는 것같다.

큰조카가 놀이방에서 운동화를 한짝 잃어버렸다는 소릴 듣고 내가 신고다니는 신발보다 비싼 신발을 사다주었지만 그때뿐이다. 여전히 나를 피한다.

손만 잡아도 소릴지르며 할아버지에게로 달려간다.

큰조카 소영이가 제수씨 뱃속에 있을 무렵 아기를 지워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던 사람중에 하나인것을 소영이는 아나보다.

정말 그때는 아기를 지워야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고 남동생은 아직 군대도 안갔다오고 직업도 없었고 했던 시절이었다. 뭐 그렇다고 지금은 나아진 것도 없지만 날이다.

이렇게 저렇게 시간이 지나 아기가 태어났고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 안에 두달을 보내고 세상에 선보였을 때 나는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도 소영에게 미안하다. 하마터먼 큰 죄악을 저지를 뻔 했다.

이제 다섯살이 되어 놀이방도 다니고 말도 다 할줄안다.

나를 싫어하지만 나는 좋다.

그때 정말 잘못되었더라면 나는 평생을 후회할뻔 했다.

두번째 아기가 작년 가을에 태아났다.

아들이다......

장가도 안간 놈이 두아이에게 큰아버지라는 소리를 듣고있으니 내신세가 처량하다.

 

설연휴 아버지에게 말씀을 들었다.

담배 끊어야 사람된다고 하시는 말씀은 지당하신 말씀이나 정작 당신도 못끊고 계신다.

물론 나를 포함한 자식땜에 속끓어서 못끊고 계시기는 하지만 날이다.

아버지가 이제 60줄에 들어서셨다.

내년에 환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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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배기

어제 저녁부터 꽈배기처럼 비비 꼬인다.

오늘은 극에 달했다.

괜히 호아줌마한테 어거지 썼다.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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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값이 오른 것을 실감하다.

담배값이 오른지 며칠이 지났지만 오른 것을 실감하는 것을 바로 지금이 처음인 것 같다.

집에 왔는데 담배도 없고 돈도 없다. 주머니 여기저기 뒤져보아도 1천 몇백원이다.

전같으면 디스 한갑은 살 수있는 돈인데 지금은 아니어서 못산다.

그레서 금단현상을 이기며 참고 있는 중이다. 사실은 재떨이에 휴지처럼 구겨져 있는 꽁초를 노려보고 있는 중이다. 참자!!!

 

담배를 태우기 시작한지 벌써 17살부터 횟수로 13년이다.

하루에 두갑 피웠다고 보면 17*365*2=?????   적어도 8000갑정도 피웠다고 보면 된다.

88로 시작하여 디스로 바꾼지 5년됬으니 가격을 평균 1000원만 잡아도 8백만원이다.

그 돈 모았으면 자그마한 셋방이라도 한칸 얻어 살텐데 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담배 없었으면 무슨 낙으로 살았을까 하는 노친네 같은 생각도 든다.

끊기 어려울 듯 싶다.

아직 고민이 남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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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에 다녀오다.

오후 6시에 조합원 교육이 있어 5시경 대전에서 640 버스를 타니 30분만에 옥천에 도착하였다. 교육장소인 원광리라는 동네에 있는 옥돌가든에 가기 위해 걸어갈까 하다가 택시를 탔다.

가다보니 택시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비가 무려 7000원...대전에서 옥천오는 버스비는 1500원인데...

옥돌가든에 도착하니 조합원들이 하나둘 도착하고 자리를 잡고하니 30분이 흘렀다.

타이밍을 놓쳤다.

고기 굽기전에 교육을 마치려 했건만 고기불은 이미 붙여진 상태에서 조합가입원서 받고 하다보니 시장바닥이다.

결국 한시간 짜리 교육내용을 20분만에 마치고 나니 진땀이 흐른다.

평균연령이 50대 중반이고 하다보니 54세인 조합원이 고기자르고 김치 썰고 다한다.

조합원들은 마치 내가 노동조합에 대해 전문가인 양 이것 저것 술마시며 물어보고 답변하느라 술을 먹는지 물을 먹는 지 정신이 없고 옆에 조합원이 건배하자고 해서 얼껼에 콜라를 들고 건배를 한다.

어쨌든 교육을 마치고 1월 16일 창립총회에 23명 전원참가하는 결의를 하고 헤어졌다.

 

옥천에 가기 전 대전터미널에서 사무국장을 만났다.

작년(?)에 보고 첨본다. 사표내고 왔단다.

그만두고 뭐할 건지도 아직 결정을 못한듯 싶다. 아쉽다.

불만도 많고 했지만 나를 이곳에 몸담게 꼬시고 술사주고 했던 사람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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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무방비 도시>

<영화 무방비 도시>

후배의 좁은 자취방에서 나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영화 마니아’들 틈에 끼어 앉아 영화 『무방비 도시(Open City)』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영화의 뒷부분 절반은 이탈리아 지하군 포로에게 가해지는 나치 친위대의 무자비한 고문과 그에 대한 숭고한 저항이 그 내용의 중심입니다. 화면 가득 폭력이 난무하고 비명이 넘쳤습니다. 같은 인간이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 영화를 보고 나서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마치 공포영화로군요.”

“웬만한 공포영화보다 더 무섭군요.”

그러나 우리나라의 ‘흔해빠진’ 운동권 출신들에게 영화 『무방비 도시』에 나오는 고문은 그렇게 낯선 장면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7, 80년대 십수년 세월 동안 줄잡아 수만 명이 그런 고문을 당했습니다. 경찰서에서, 대공에서, 안기부에서, 보안사에서… 잡혀간 운동권들에게 가해진 가공할 고문은 그야말로 우리나라에서 ‘흔해빠진’ 일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며 사람들은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라고 혀를 찼지만, 인간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습니다. 1981년, 20대 후반의 팔팔한 사내였던 내가 말로만 듣던 ‘비녀꽂기’, ‘통닭구이’를 당하며 사흘 밤 동안 거의 거꾸로 매달려 있다시피 했을 때 ‘인간의 탈을 쓴’ 수사관들은 손 털고 뒤돌아서면 딸아이의 대학입시 걱정을 했고 운전면허시험에 떨어진 마누라 걱정을 했습니다. 그들도 집에 돌아가면 여느 인자한 아빠나 자상한 남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 그 짓을 했던 사람들 중에 한 명의 이름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해 여름, 장마철이 되었을 때, 나는 팔이 쑤셔서 우산조차 들 수 없었습니다. 가슴에 생긴 검은 멍 자국은 몇 개월 동안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고문을 견디어 내고 ‘죽지 않고 살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우리에게 들었던 생각은 일종의 자신감이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 우리에게 그만큼 큰 고통은 다시 없으리... 그러니까 우리가 앞으로 이기지 못할 고통은 없다.” 과연 그랬습니다. 그날 이후, 그 고통의 절반쯤 되는 어려움도 아직까지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죽지 않고 살아났을 뿐이지, 우리가 그 고문을 이겨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문을 이기는 것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나보다 먼저 잡혀 며칠 동안이나 고문을 당했던 후배는 “나는 모르지만 하종강 선배는 알지도 모른다.”고 말해버렸고, 그래서 잡혀간 나는 사흘 만에 아끼는 후배의 이름들을 수사관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뒤 며칠 동안 나는 후배들이 차례차례 잡혀 들어오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후배들은 내 얼굴을 보고는 “2년짜리 수련회에 왔다고 생각하지요. 뭐.”라고 말하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지만, 그날 밤부터 나는 복도에 울려 퍼지는 후배들의 비명을 들어야 했습니다. 깊은 밤, 어두운 복도에서 후배들이 “종강이 형”을 부르며 질러대는 비명을 듣고 있어야 하는 절망감을 아십니까? 그 절망감은 분노가 되어 나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결의를 다지면서 머리띠를 묶어 매야 하는 노동자들과 번화한 거리 뒷골목에서 단속반과 숨바꼭질을 벌여야 하는 노점상들과 포크레인 삽날에 무너져 내리는 삶의 터전을 지켜보아야 하는 철거민들과 썩어 문드러진 논밭을 바라보며 이를 가는 농민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진솔한 ‘우리’입니다. 최소한 그들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내가 죽어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내 무기의 최저값입니다.


<버티는 쪽이 이긴다>

그때 영문도 모르고 수사기관에 잡혀간 저는 수사관들에게 따졌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건 때문에 내가 잡혀온 겁니까? 도대체 나를 왜 잡아온 거요?”

수사관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이 새끼야, 여기는 니가 물어보는 곳이 아니야. 우리가 너한테 물어보는 곳이야.”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절반 이상은 욕지거리였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욕을 한꺼번에 들어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죄는 지은 놈이 가장 잘 알 거 아니야. 니 죄는 니가 가장 잘 알 거 아니야? 왜 잡혀왔는지 잘 생각해보면 알 거 아니야?.”

수사관들은 불문곡직 뚜드려 패면서 그렇게 다그쳤습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내가 지은 죄가 한두가지가 아니니까... 그 중에서 어떤 일이 들통 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유인물이 걸린 걸까? 어떤 대자보가 걸린 걸까? 어떤 집회가 문제가 된 것일까? 저도 열심히 “짱구를 굴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수사관들이 모든 범죄인들을 다루는 수법입니다. 현행범이 아닌 한, 어떤 사건 때문에 잡혀왔다고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절도범이나 강도범들이 잡히면 그 경찰서 관내의 미해결 사건들이 한꺼번에 여러 건씩 해결되는 겁니다. 절도범이나 강도범들이라고 해서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순순히 자백할 리는 없습니다. ‘도대체 어느 집에서 훔친 물건 때문에 잡혀온 것일까?’ 열심히 짱구를 굴리며 ‘혹시 그 집에서 훔친 시계 때문일까?’ 그렇게 고문을 당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얘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관철되는 원칙이 있습니다. “버티는 쪽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수사기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며칠 째, 수사 내용에 진전이 없으면 수사관들도 초조해합니다. 매일 아침 회의할 때마다 상관에게 혼나고 와서는 나에게 화풀이를 하기도 합니다. 때로 고문은 그들의 화풀이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고문을 직접 당하는 것 못지않게 고문을 준비하는 과정 역시 사람의 피를 말립니다. 밤이 되면 철창문을 열고 들어와 “하종강, 오늘도 우리하고 같이 고생 좀 하자.” 말하며 저를 데리고 가서 고문에 필요한 도구들을 하나씩 챙기는 과정 역시, 직접 ‘통닭구이’나 ‘비녀꽂기’ 고문을 당하는 순간 못지않게 사람을 위축시킵니다. 그, 심장이 멎고 피가 마르는 듯한 순간은 당해본 사람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3일째 되던 날, 수사관 한 명이 흘리듯 말했습니다.

“하종강, 네가 예언자야? 네가 어떻게 미리 알고 있어?”

그때 저는 감을 잡았습니다. 제가 후배들에게 미리 말했던 사건은 하나밖에 없었거든요.

“몇 월, 몇 일, 몇 시에 어느 건물 앞에 후배들 데리고 가 있어. 그날 그 건물 옥상에서 유인물이 뿌려질 거야. 하늘에 흩날리는 유인물을 보는 것, 땅에 떨어진 유인물을 직접 집어 들어서 읽어보는 것, 그것이 후배들에게는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유인물 한 장을 가방 속에 넣고 다니다가 불심검문에라도 걸리면 ‘이적표현물 소지 죄’로 구속되던 살벌하고 한심한 시대였습니다. 유인물을 뿌리는 것은 물론, 그것을 집어 읽는 것조차 가슴 떨리고 용기가 필요했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아, 그 사건이구나...’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됐습니다.


<구원의 끈>

공범들은 수사가 끝나야 합방이 됩니다. 저보다 며칠 먼저 잡혔다가 “하종강 선배가 알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해버린 후배를 며칠만에야 철창 안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지경까지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는데, 후배는 얼마나 심하게 매달려 있었는지 양쪽 손목이 모두 새까맣게 죽어 있었습니다. 그냥 매를 맞고 있는 것이 오히려 편할 지경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잡혀 와서 매를 가장 많이 맞았던 한 후배는 나중에 옷을 벗겨 보니, 등에서부터 허리, 엉덩이, 다리, 발목에 이르기까지 온통 까맣게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군데군데 멍이 든 것이 아니라, 마치 커다란 붓으로 검은 먹을 칠하거나 들이부은 것처럼, 몸의 뒷부분이 모두 까맣게 변해 있었습니다. 제대로 살색이 남아 있는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신구타’라는 비교적 강도가 약한 고문의 결과입니다.

그렇게 붓고 멍이 들었을 때는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수사관들은 그 후배의 퉁퉁 부은 몸에 쇠고기 로스 조각을 갖다 붙였습니다. 손바닥만한 쇠고기 조각들을 후배의 몸에 붙이고 미이라처럼 붕대로 둘둘 감싸 맸습니다. “피는 피로 풀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우리들은 그 와중에도 “먹기에도 귀한 소고기 로스를 살에다 붙이냐?”고 후배를 놀리며 농담을 했습니다.

더 웃기는 건, 그 후배를 나중에 수사관들이 위로한답시고, 그 무렵 여의도에서 열리고 있던 ‘국풍81’ 축제에 데리고 간 것입니다. 기억하십니까? 국민들을 수백명씩이나 죽이고 집권했던 전두환 정권이 자신들의 죄를 감추고 젊은이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마련한 행사가 바로 ‘국풍81’이었습니다. 그 행사의 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사람이 바로 가수 이 용씨입니다. 그 가수의 노래 ‘바람이려오’를 들을 때마다 저는 그 무렵이 생각나 목이 메입니다.

양쪽 손목이 새까맣에 죽어버린 후배에게 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내 이름을 얘기했냐?”

후배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며칠 동안, 고문을 당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하종강 선배는 지금쯤 징역 가는 게 어쩌면 인생에 보탬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팍 드는 거야. 최소한... 형 인생에 마이너스는... 안 될 거라고 봤어.”

그 말이 맞습니다. 그 경험은 저의 인생에 결코 손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후배를 원망해 본 적은 없습니다. 지난 겨울, 충청권에 폭설이 내려 고속도로가 며칠이나 막혔을 때, 제가 바로 그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몇 시간이면 길이 뚫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도 길은 뚫리지 않았습니다. ‘아, 이건 며칠 걸리겠다. 하루 이틀만에 길이 뚫리지는 않겠다.’라고 판단했을 때, 바로 떠오른 생각이 20여년 전에 당한 고문의 기억이었습니다. ‘그래. 그때 내가 사흘 밤 동안 거의 거꾸로 매달려있다시피 고문을 당하고도 살아났는데, 여기서 사흘을 못 버티냐.’ 그런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차에서 내려, 막힌 고속도로에서 눈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보더니 내 차 앞에 서 있는 대형 트럭의 운전기사 청년도 자기 트럭 짐칸에 쌓인 눈으로 눈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주변에는 어려 개의 커다란 눈사람들이 세워졌습니다. 고문의 경험은 그렇게 저의 인생에 도움이 됐습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에 빠져본 사람은 압니다. 자기가 그 고통으로부터 도망쳐도 욕먹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자기도 모르게 열심히 찾게 된다는 것을... 자기에게 언제 그렇게 풍부한 상상력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수 많은 생각들이 교차한다는 것을... 열심히 활동해온 노동자들이 고통에 빠졌을 때 우선 그 노동자를 유혹하는 함정은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나 지금까지 해 볼만큼 해 본 거야. 내가 지금 여기에서 포기한다고 욕할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그런 생각부터 시작해서 자기가 그 상황으로부터 도망쳐도 욕먹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자기도 모르게 찾게 됩니다. 후배가 그런 생각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종강 선배의 이름을 말해도, 하종강 선배에게는 손해가 안 될 거야. 오히려 인생에 보탬이 될지도 몰라.’ 오죽했으면 후배가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그 생각이 후배에는 고문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구원의 끈’이었던 것입니다.


<송영수를 살립시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20년이 지난 2001년 가을, 다른 후배가 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선배님, 송영수 살립시다. 그 놈이 신부전증으로 다 죽게 생겼소. 그런데 81년 5월에 선배가 송영수랑 같이 잡혀서 고문당했을 때, 그 놈이 피오줌을 쌌던 걸 선배님이 봤다고 하지 않았소. 우리가 송영수 민주화운동보상신청 해주려고 하는데, 선배가 증인 좀 해 주시오.”

20여년 전에, 고문을 당하다가 “하종강 선배는 알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그 후배의 이름이 바로 송영수입니다. 그때 얼마나 심하게 고문을 당했는지 콩팥의 핏줄이 다 터져서 오줌 속에 씨뻘겋게 피가 섞어 나왔습니다. 20년 전에 콩팥의 핏줄이 다 터지도록 고문을 당한 것이 그의 신부전증과 어떤 의학적 관계가 있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에서 활동하는 한 의사의 말로는 “의학적 상관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신부전증을 앓는 후배 송영수는 하루에 피를 네 번씩 투석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얼마나 열심히 활동하는지 어떤 노동운동가도 그의 앞에 서면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지역일반노조’를 창안하고 조직한 사람이 바로 송영수입니다.

‘일반노조’란 역설적이게도 ‘일반적인 노동조합에 가입하기 어려운’ 노동자들이 주로 모인 조직입니다. 환경미화원, 마을버스 기사, 금융기관이나 호텔의 계약직 노동자, 사회복지시설의 사회복지사, 정화업체 종사자, 용역회사의 파견 노동자, 규모가 작은 공장이나 개인병원에 근무하는 사람 등 “기업단위 노동조합을 간신히 만들어도 어용이 되어 살아남거나, 맞서 싸우다가 박살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업종과 기업 구별 없이 모여 서로 돕고 살자는 것이 바로 ‘지역일반노조’입니다. 그와 같은 형태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2000. 4. 1. 부산에 설립되었고, 송영수는 ‘부산지역일반노조’의 사무국장과 공동대표를 역임했습니다.

송영수가 ‘일반노조’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은 그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운동 단체에서 경험을 쌓는 동안 그는 우리 노동운동이 가지는 문제점을 보았고 그때마다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해대는 통에 ‘운동권 내의 운동권’으로 불리면서 스스로 많이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

신부전증을 앓는 사람들은 투석하기 직전에는 온 몸이 거의 ‘그로기’ 상태가 되어, 손 하나 들어 올릴 힘도 없어집니다. 송영수는 사무실에 투석 장치를 갖다 놓고 활동했습니다. 내가 한번 가서 보니까 사무실 한 쪽 구석에서 피곤에 지친 얼굴로 자신의 몸에 달린 파이프에 투석 장치를 연결해 놓고 투석 작업을 하는 40분 내내 거의 끊임없이 전화가 왔습니다. 송영수는 투병하느라고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린 얼굴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서 상담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기 저쪽의 상대방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껄껄 웃기도 하면서 노동조합 활동과 단체교섭에 대한 설명을 했습니다.

송영수가 첫 번째 징역을 살고 83년 년 출옥한 뒤, 공장에 취업하기 위해서 건강진단을 받으면서 신장이 안 좋다는 진단을 처음 받았지만, 그 뒤 현장 활동하랴, 수배기간 동안 도망다니랴, 87년 노동자대투쟁 치르랴, 이래저래 건강을 챙길 여유가 없었습니다. 87년 6월 항쟁 무렵부터 부산지역에서 거의 모든 노동자집회의 ‘판을 짠 사람’이 바로 송영수였고 그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노동조합이 100여개가 족히 넘는다는 건 자타가 모두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자기 몸 돌 볼 여유도 없이 뛰어 다니던 그에게 “건강진단이라도 좀 제대로 받아보라”고 채근을 했던 대동병원노동조합 부위원장이 바로 현재 그의 부인 최애심(38) 씨입니다. 89년 그가 두 번째 징역을 살았을 때에는 징역을 산 날짜 수와 그 기간 동안 최애심 씨가 보낸 편지의 수가 같았다던가... 두 사람은 91년에 결혼했고 아들에게는 승혁(勝革)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혁명을 계승할 것도 없이, 너는 승리하라”는 뜻입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

송영수는 작년에 기어이 피를 토하며 쓰러져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습니다. 주차장 바닥이 그가 토한 피로 흥건했다고 합니다. 담당 의사가 “오늘을 넘기기가 힘들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식구들에게 말했을 정도로 그의 상태는 위중했습니다. 송영수가 피를 토하며 쓰러져 동아대병원으로 실려 갔을 때, 그 소식 듣고 응급실로 달려온 노동자들이 순식간에 15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동아대병원 응급실 역사상 그런 일은 처음이었답니다.

송영수가 46시간만에 깨어났을 때, 온 몸이 멍 투성이였습니다. 노동자들이 교대로 지켜서서 송영수 깨어나라고 이틀 동안 몸을 계속 꼬집었기 때문입니다. 송영수에게 자신의 간과 콩팥을 주겠다고 줄 선 사람도 아마 150명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은 수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송영수도 웃으며 말하더군요. "그동안 많이 뿌렸으니까, 이제 좀 거둬야지..." 그 말이 전혀 교만하게 들리지 않을 만큼 송영수는 성실한(이것보다 열배쯤 더 강한 표현 없나?) 활동가입니다.

송영수는 21시간이나 걸리는 대수술을 받고 살아났습니다. 지금 그의 몸 안에는 부인 최애심시의 간 가운데 65%가 이식돼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의 부인 최애심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답답하고 막막하죠. 그래도 수술을 받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거 아세요? 남편이 10년만에 오줌을 누게 됐어요. 그동안 하루 4번식 반복되는 복막투석 때문에 소변으로 나올 액이 없었거든요. 가슴이 뭉클합니다.”

어느새 그녀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수술을 받으러 서울아산병원에 올라와 있는 송영수를 방문했을 때,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온 사람이 나를 만난 짧은 시간에도 온통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에 대해서만 얘기했습니다. 열심히 설명하는 그의 말을 듣다가 나는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너는 일찍 죽으면 안 되겠다.”라고 했습니다. 송영수가 나의 후배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2년쯤 전, 부산에서 송영수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헤어질 무렵 그가 나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하 선배나 나나 모두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는데, 형은 그 일을 20년 넘도록 계속하고 있는 이유가 뭐요?”

나는 조금 생각해 보고 진지하게 그러나 폼 나게 답했습니다.

“나는 아직 세계관이 바뀌지 않았거든. 나는 내 철학을 바꾸지 않았거든.”

그는 내 말을 듣고 픽 웃더니, 잠시 시간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것들 때문이었다면 나는 운동을 벌써 포기했을 거예요. 나는... 하 선배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어요. 그거 아세요? 그때 나 때문에 고문당했던 사람들, 나 때문에 징역 산 사람들, 그 사람들과의 인연이 나를 이 일에서 떠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 내가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자꾸 형 생각이 나는 거야. 그런 사람들의 얼굴이 자꾸 나를 붙드는 거야. 그동안 내가 만났던 노동자들의 얼굴이 나를 이 일에서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거야.”

송영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이론가였습니다. 후배지만 사상적으로는 저를 지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후배가 자신을 20년 세월 동안 지켜온 원칙이 ‘인간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송영수와의 인연이 나를 이 바닥에서 떠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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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정, 드디어 그만의 공간을 획득하다!

드디어 나의 공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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