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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세상바꾸기에 대한 생각들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세상바꾸기에 대한 생각들

: 새로운 생활 / 새로운 마을공동체 / 새로운 세상

                                                           우리별 초록별(2008.5.7)


1-1. 나는 누구입니까?


- 우리가 처음 ‘민주주의’, ‘노동자’, ‘민중’, ‘환경’, ‘노동해방’, ‘인간해방’, ‘자연’, ‘생명’ 같은 말들에 감동받던 순간들을 떠올려 봅니다. 왜 우리는 이런 험난하거나 순탄치 않은 길에 나서게 되었을까요?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 자신의 삶을 움직인 것은 (분노나 보복, 복수가 아니라) 못나고 연약하고 여린 것들에 대한 살림이나 사랑은 아니었을까요?


- 우리는 자기만을 생각해서는 삶의 목적을 결정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남이야 어찌되든 내 삶의 목표만을 위해 최고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습니다. 나 자신의 행복과 우리의 ‘풍요로운 복지사회’를 위해 지구 어딘가에서 저임금노동과 환경파괴가 이루어진다면 이런 것이 정말 발전이고 진보일까요?


- 우리 각자가 갖고 있는 인간으로서 능력의 한계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뼈저리게 느낍니다.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야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 어찌보면 이 글의 제목을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이라고 쓰기는 했지만, 이러한 노력은 결국 나는 혼자가 아니고 오로지 다른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자각으로 모아지리라 믿고 있습니다.



1-2.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요?


-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활동들 속에서 우리는 어떤 감동을 받고 있습니까?


- 우리 각자가 바라는 참된 삶이란 무엇입니까?


- 좋은 사회나 올바른 민주주의란 사회공동체의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이해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잘 이해하고 사회적 존재로서의 역할과 잘 조화시킬 수 있는 인간혁명의 과정 그 자체가 아닐까요?


2. 지금 나 자신과 우리는 어디까지 와있습니까?


- 그토록 자기헌신적이었던 사람들이 결국은 자신의 정치적 성공을 위해서 그동안의 모든 어려움을 감내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오늘날 운동의 현실은 아닌가요?

젊은이들의 사랑이 지배세력에 대한 날선 분노로 일어서 운동의 대열에 참여하고 나이가 들수록 자신과 가족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 우리 운동의 모습은 아닐까요?

어떤 조직의 대표로 활동하는 분들은 연봉 6천만원입네 8천만원이네 하는 현실에서 어떤 활동가들은 월 몇십만원의 아르바이트를 전전해가며 결혼은 차마 엄두도 내지못하고 단체 사무실에서 기숙하는 생활들을 왜 하고 있을까요?


- ‘경제투쟁’ 혹은 ‘대중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한다’라는 취지아래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몰려다니는 군중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 우리 운동의 한 단면은 아닐까요?


- 민주화운동부터 따지더라도 우리 운동의 역사가 20년 이상 됩니다만, 그동안 의제를 스스로 만들기보다는 눈앞에 닥친 과제를 방어적으로 해결하는 데 급급하다 보니, 어떤 계획도 없이 결국은 남는 것이 없는 그런 운동을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성과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사회는 무엇이며 지금부터 국민들과 함께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하는 공감과 참여를 북돋는 문제에 대해서 비전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로지 저지하고 투쟁하고 반대하는 투쟁으로만 일관했다는, 그런 한계에 대한 평가가 각 운동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3. 우리 사회의 예측가능한 미래를 생각해 봅니다




4-1. 우리는 왜 보통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녹색당을 만드려고 합니까?


- 선거, 국가, 우리들의 삶


  ․ 지금의 선거제도가 우리에게 대안이 되어질 수 있나요?


  ․ 국가 : “우리도 대한민국에서 함께 살고 싶습니다”

   선거제도나 국가 자체가 갖는 가치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국가 정책과 운영을 무시할 수 는 없습니다.


  ․ 압력이나 힘겨루기가 아니라, 이 사회에 꼭 필요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당 그리고

   반대나 저항에 우리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기 보다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지금부터

   묵묵히 만들어 가는 작지만 사회에 꼭 필요한 정당을 만들고 싶습니다


- 국가 혹은 정부가 내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들의 운명을 우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좌지우지 하는 것을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 정치라는 것이 점점 이익집단의 이해라는 그릇된 상식으로 바뀌면서,

우리 자신과 가족, 이웃 그리고 사회공동체의 공동선(共同善)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4-2. 보통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녹색당은 무엇을 하는 공동체인가요?


- 그동안의 힘들었던 삶을 위로하고 치유받을 수 있는 공동체


- 이웃 그리고 세상과 사랑을 나누는 지혜를 나누는 공동체


- 보통사람들이 당원으로 가입하여 지역과 사회의 꼭 필요한 이웃으로 변해가는 작지만 능력있는 정당


- 젊은이들이 선뜻 자신의 오늘을 투자하여 자신의 삶의 사회적 의미와 운동을 이해하고 새로운 친구들과 이웃을 만날 수 있는 대안적 일터


- 대안적 사회에 대해서는 녹색평론이 주관한 '21세기를 위한 사상강좌' 두 번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님의 <세계화에서 지역화로>라는 글의 생각을 참고로 할 수 있습니다.


 


 

[보충자료]

보통사람들이 직접 만드는 대안신당의

초록세상을 만드는 생각의 뿌리

                                                                                                                                         


[생각의 뿌리 1]

다양한 사람들과 생명들 그리고 환경과의 공존(共存)-공생(共生)-공영(共榮)을 전제로 하지 않는 이념/노선/운동은 이미 우리 모두의 현실가능한 대안이 아닙니다


- (보통 ‘신자유주의’라고 말하는) 기득권을 이미 갖고 있는 세계적 독점(금융)자본의 시장독재를 통한, 사회적 약자들과 자연에 대한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대안일 수 없습니다.


- 자신이 속한 집단/계급/민족/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집단이나 계급, 다른 민족이나 국가 혹은 개인 그리고 다른 생명들이나 자연 등의 환경이 피해를 보거나 희생되거나 파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대안일 수 없습니다.


=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남은 판도라의 희망이란,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완전한 대안을 가진 사람이나 사상은 없으며,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즉, 공존 자체를 부정하는 이념/노선/운동이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역사의 복수를 이미 내포하고 있으므로 우리들의 실현가능한 대안이 아니며, 이 부족한 우리 모두가 함께 공존-공생-공영을 대화와 다양한 시도를 통해 진지하게 모색하려는 것 자체가 유일한 대안임을 인정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오로지 온전하게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대해 어떤 분들은 ‘공동체 독재’라고 느끼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이러한 저의 생각 속에는, 다른 사람 다른 생명들 그리고 주위 환경과 공존하려하지 않고 대중의 두려움과 분노를 움직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들기만 하는 민족주의/자본주의/공산주의/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초록생각 들이 혹시라도 있다면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보통사람들의 힘을 모으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우리의 이러한 "운동으로서의, 과정으로서의 혁명인 참된 사회변화"가

근대적 중앙집중적인 형태 즉, (효율성의 논리에 근거한) 조직된 다수의 힘에 의한 압력 정도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좀더 쉽게 설명하면,


현재 전세계적으로 보이는 '자본, 시장, 국가 혹은 집단이나 조직으로부터의 탈주/일탈'을 무리하게 단일한 조직으로 형성시키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그 에너지의 가능성을 오히려 '고정화' 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회주의(정당, 정당정치, 선거 등)의 틀 안에 무리하게 포괄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만들 정당은 가치/메시지에 의한 구심력으로 다양한 원심력과 균형을 이루는 것[양식화]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공존에 동의한다면 다양한 국가/시장 심지어 공동체로부터의 탈주조차 보다 넓은 대화와 축제의 광장에서 그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생각의 뿌리 2]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는 자기자신과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위로에 소박하게 기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엑스트라나 주변인 취급을 받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 되고 싶습니다


- ‘대의 민주주의’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통치하기 위해서만 쓸모 있던 낡은 방법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의 운명을 다른 이들이 쥐락펴락 하도록 입 벌리고 바라보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우리를 대신하고 대표한다며 완장차고 껍죽거리는 관료나 지식인이 아니라, 때가 되면 투표장에 나와 언론에서 가르쳐주는 후보에게 표나 찍으라는 문자메시지나 선거관리위원회의 홍보포스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모습을 지금 있는 그대로 존중하여 우리가 살며 거칠게나마 깨달은 개똥같은 지혜라 할지라도 귀담아 듣고, 이 팍팍한 인생길을 오손도손 함께 갈 수 있는 친구 한 명이 절실한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몇몇 사람들이 어떤 실험적인 체계(시스템)를 만들면 그 틀 속에 갇혀 관찰되고 감시되고 통제되고 조정 받는 대상이 아닙니다.


- 국가던 정당이던 누군가의 자극이나 투쟁, 폭로나 선동으로부터 스펀지처럼 그 생각을 강요받고 싶지 않습니다.


헤게모니(주도권)가 장악되면 그 헤게모니를 장악한 사람들이나 헤게모니에 대해 원심력을 갖는 사람들은 정말로 그 헤게모니의 가치들로 생활의 변화가 있나요?


= 인간의 아름다움은 분명, 팽팽한 젊음을 자랑하다가도 나이들면서 쭈그러져 썩어없어질 물질적 육체에 있지 않고, 타인과 다른 생명들 그리고 우리가 살고있는 이 자연과 다른 사람들과 생명에 대한 배려와 노동과 자기 헌신과 희생의 숭고한 영혼에 있습니다.



[생각의 뿌리 3]

혁명이 개인과 공동체의 생활의 변화를 의미한다면 그러한 꿈들이 현실화 되기 위해서는 보통사람들 스스로가 지금 경험하기 시작하고 현실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 상상을 해 볼까요.

24살 유치원보육여선생님, 정읍 마을두레 농민, 대안학교에 다니는 13세 청소년, 초등학교 1학년 학생, 대구 무슨무슨 구의 경로당 오락부장 할머니가

정당의 리더쉽(지도력)네트워크의 멤버쉽(회원)이 되고

대학이나 각종 연구공동체의 연구자들이 각 부문별 노동자 생산자 소비자들과 함께

정책네트워크의 멤버쉽으로 활동하며

당의 모든 마디와 옹이에 필요한 소통 마다

온라인 공동체 네트워크로 모든 당원들이 필요할 때는

실시간 온라인대화나 다양한 의견 제안이 대화의 안건으로 토론될 수 있는 온라인게시판 등에 컴퓨터와 모바일 등을 이용하여 대화에 참여하거나 정보에 접근할 수 있으며 발언기회를 갖는다면 우리는 이미 실질적인 참된 변화의 큰 물줄기를 이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실험들은 지금 당장 다양한 영역에서 도입되어 성장하고 성숙되어야 하고

우선 보통사람들이 만드는 자신의 정당의 당원들을 중심으로 함께 훈련하고 스스로 단련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보통사람들이 정치의 주인이 되는 실질적인 과정이며,

일순간에 하나의 사건으로 도래한다고 잘못 이해되었던,

"운동으로서의 혁명, 참된 사회변화"입니다.


저는 위에 나열한 분들이 모든 영역에서 지금 당장 참여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도입 초기에는 거짓말이거나 쇼인 줄 알고 긴가민가하며 참여하던

몇몇 평당원들의 성공사례를 보게 되면서 그 참여의 폭은 보다 넓어지리라고 봅니다.


오히려 우리가 더욱 경계해야할 태도는,

평당원이나 노동자 민중 보통사람들에게로의 권력이동을 먼 미래의 혁명의 날에나 가능하고

지금은 자본가들이랑 싸워야 하니까 정치가들을 강력한 권한을 갖는 지도부관료로 인정하라는 식의 반(反)정립적이며 자기모순적인 혁명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변혁이나 혁명 혹은 참된 사회변화가 아름다운 것은

지금 우리 자신의 생활을 진정으로 유쾌한 기쁨으로 바꾼다는 점입니다.


한 지역의 공동체의 실험과 모색들이, 현실 자본주의 사회 속에 어떤 파라다이스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몬드라곤 공동체 등의 경험에서 한계를 분명히 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공동체에서의 모색이 의미를 갖는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아름다움을,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에서 자기 자신의 생활의 변화를 통해 배우고 문제점을 깨닫고 성숙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즉, 과정이 목적을 위배하지 않도록 그 과정 자체가 목적이 갖는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그 본래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생각의 뿌리 4]

상식을 갖고 있는 보통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상식적 대안/정책/노선만이 보통사람들을 정치와 정당 그리고 사회의 주인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 저는 제 글에 앞서 제출된 김현우님의 글을 읽으며 보통사람들의 대중정당을 만드는데 그 모든 것이 준비되는 것이 중요할까 반문해 보았습니다. 오히려 상식적인 정치과제들이 대중정당의 강령이나 정책이 되어야 실질적으로 보통사람들이 이 대화에 참여할 여백이 생긴다고 봅니다.


물론 섬세한 이론적 배경이나 사회구조에 대한 해석과 설계도는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정당 내의 보다 전문적인 정책 이론 연구자들에 의해 당의 다양한 언로들을 통해 논의되고 검토되어 지면서 동시에 보다 치밀하게 준비되는 상식적인 대중언어로 소통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목표와 실현방법들에 대한 단순하고 상식적인 정치가 당원들과 국민들에게 대안정당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당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리라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태여 진보라는 말을 빌어 이러한 생각을 표현하자면

“진보는 복잡한 사회를 보다 단순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이러한 네 가지 생각의 뿌리는, 누구와 함께 <보통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녹색당>을 만들며 어떤 초록세상을 일구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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