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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탱크

싱크탱크의 붐을 넘어 싱크탱크 백화제방시대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제까지의 싱크탱크운동은 연구자네트워크 수준이었다면

박원순님이 준비하는 희망제작소와

손석춘님이 준비하는 새사회전략연구원은

10여명의 상근 연구자와 10여명의 연구지원체계를 갖춘 어엿한 싱크탱크로 준비되고 있고

이와 더불어 통합논의 또한 활발해지고 있다.

 

안민정책포럼-국가경영전략연구원-평화포럼-평화네트워크-대안정책연대-미래전략연구원-동아시아연구원-뉴라이트싱크넷-코리아연구원 등이 있었지만 다들 구멍가게 수준에 머물러 온 게 사실이다.   예산을 퍼부어 온 정당연구소와 기업연구소들은 다른 존재의 근거가 있었다.  정부의 예산을 받는 연구기관들은 연구자율성에 기반하여 중장기비전을 다루기보다는 부처의 부속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생각이다.

 

싱크탱크 또한 우리 사회의 지형을 반영하는 거라지만 

거대담론을 다루던 좌우로 나뉘어 이념논쟁을 주로 하던간에.....

거대담론에 머물거나 포지셔닝에 머무는 단계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양보하여 거대담론이나 추상화된 이념문제를 다루더라도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출발하면 의미가 있을 것이다.

 

특히 상호간에 너 죽고 나 살기가 아니라면

(과연 가능할것인지는 모르겠으되.....)

논거와 사실적 근거에 기반하여 토론하고 대안제시를 위해 경쟁한다면

이른바 '반동수구'에서 '빨갱이할애비'까지 모여 앉더라도

생산적인 뼈다귀 하나라도 건질 수는 있지 않을까?

 

싱크탱크운동을 지향한다면...문제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르게 인식하고

각각의 케이스별로 사람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과 기대효과가 있을 것인지를

이를 위해 예산이 어떻게 소요되며 줄이거나 늘릴 부분은 무엇인지

그리고 정책이 미칠 단기적 장단점과 중장기적인 장단점은 무엇인지 등을 타산한 가운데 

실천적 정책대안과 중장기 전략을 만들어내고 제시하려는 진지한 노력에 있다.



<문화 초대석>

“사회 미래 그리는 ‘설계자’가 천직”

‘희망제작소’ 3월 창립 추진 박원순 변호사


 그는 원래 인권변호사로 불렸다. 제도개혁을 집요하게 외치는 시민운동가로도 유명하다.‘1%나눔운동’을 선도한 기부문화의 전도사로도 자리매김된다. 이쯤 열거하면 그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박원순 변호사.


그가 또한번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새로운 구상 가다듬기를 끝내고 그것의 실천에 나섰다. 이른바 ‘희망제작소 운동’이 그것이다. 문화일보는 4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동일빌딩 4층 아름다운재단 사무실에서 박변호사를 만나 새로운 구상 등을 들어봤다.


―‘희망제작소’운동이란 뭘 말하는 것입니까.


“오는 3월 창립 목표로 하나씩 하나씩 준비중입니다. 크게 보면 우리 사회의 미래를 그리는 일이지요. 체계적이고 중장기적이면서도 작은 영역들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미국에 있을 때 독립 이후의 팔레스타인을 디자인하는 내용이 뉴욕타임스에 한 페이지 넘게 나온 것을 보고 감명받았습니다. 우리도 지금 누군가는 통일 이후의 평양을 디자인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에 미쳤습니다. 독일통일이 50년대 동방정책부터 시작됐는데도 아직까지 혼란과 불안이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미래사회의 디자인운동이라 부를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자기 지역을 잘 만들어보려는 시장, 군수 등 단체장들과 함께 평생교육타운, 예술타운 같은 도시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도시를 새롭고 좋게 만들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사회적 공헌은 없을 것으로 봅니다. 한호림이라는 캐나다 교민이 전세계를 다니면서 간판만 찍은 책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간판이 얼마나 엉망입니까. 외국에 다니면서 이런 아이디어들을 모아 체계화하고 공유하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시민들의 아이디어를 모아 좋은 정책으로 만들어내면 사회가 한층 업그레이드되지 않겠습니까. 단지 지방분권과 행정수도 이전만으로는 지역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문화, 예술, 교육이 함께 따라가야 하는 것이지요. 노무현 정부에 기대보다 실망이 많은 이유는 정부를 맡았던 사람들의 아이디어 준비가 덜 돼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나라당도 마찬가지이고요. 정당연구소를 보면 국고보조로 30억~40억원씩 쓰는데 거기서 생산되는 게 뭐가 있습니까. 서울시 시정개발연구원이 연간 150억원을 씁니다. 그 10분의1만 있어도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


―변호사님께서는 워낙 다양한 일을 해오셨습니다. 직업을 무엇으로 분류해야 됩니까.


“(웃음)공무원도 잠깐 했죠. 검사, 등기소장도 했고. 다양한 직업과 직위를 가져온 것 같습니다. 지금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지도위원이고, 포스코 사외이사입니다. 본의는 아닌데 자꾸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최근 외국에 많이 다니면서 ‘진짜 내가 원하는 직업이 뭘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외국의 제도나 경험을 반영해서 한국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회 설계자(social designer)’가 나한테 맞는 일 아닌가 싶습니다. 독일에 가 보니 어린이 놀이터 하나에도 창의력을 키워주려는 고민이 들어있었습니다. ‘사회적 창안’이야말로 21세기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우리의 교육은 창안적 수요를 감당 못하고 오히려 획일화시킨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결국 진리는 현장에 있습니다. 지방의원이 외국에 나가면 시민단체에서 시비를 걸곤 하는데, 전 많이많이 나가봐야 한다고 봅니다. 아이디어 하나 얻어온다면 여행경비를 따질 수 있겠습니까.”


―시민운동의 활동공간을 넓혀오면서도 새로운 영역에서마다 성공했습니다. 무슨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80년대 ‘정의와 양심을 표현하다 감옥 간 사람들을 돕는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인권변호사 활동을 했습니다. 87년 6·29선언이 나왔지만 하루아침에 사회가 바뀌지 않더군요. 회의가 들어 2년간 영국유학을 갔었고, 거기에서 점진적이지만 끝없는 노력이야말로 민주주의와 인간적인 사회를 만든다는 생각에 천착하게 됐습니다. 돌아와 시작한 것이 참여연대 활동입니다. 제도개혁에 매달렸습니다. 15대 국회 때 참여연대 사무처장 하면서 78개 법안을 청원해서 절반 정도가 발의됐습니다. 그 중에 부패방지법과 국민기초생활보장법 두 가지는 정말 중요한 법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혼신의 힘을 다했고, ‘비슷한 운동을 또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어 의식개혁운동을 생각했습니다. 의식개혁이 제도개혁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생활 속에서 쉽게 참여할 방법을 고민하다 ‘아름다운 재단’의 ‘1% 나눔’ 운동이 나왔고, 그 다음이 ‘아름다운 가게’였습니다. 헌 물건을 기증받아 판매하는 운동이지요.”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슈를 끄집어내 사회운동 테마로 조직하는 모습을 보면 카피라이터의 감수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공익을 고민하는 사람이 돼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때부터 선비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유구한 전통이 있습니다. 독립운동, 민주화운동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지금 사회는 그런 저항적 지식인의 역할과 더불어 사회를 긍정적으로 바꿔나갈 대안제시가 중요합니다. 카피라이터처럼 되려고 노력합니다. 운동도 재미있어야하고요. 같은 유인물을 내더라도 ‘삐라’처럼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가 잘 되고 나면 재미가 없어져서 다시 새로운 것 찾아나서곤 합니다. 잘 안되는 것을 찾아가서 하는 게 재미있습니다.”


―“추상적 담론과 이념적 갈등을 접어야 한다”는 주장을 해오셨지요.


“우리 사회 전체가 지나치게 명분, 허상, 거대담론, 추상적 논리에 매달리고 있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새로 생겨난 ‘뉴라이트’가 제시하는 것에 실체가 있습니까. 첨예하게 대립되는 북한인권이나 국가보안법 문제에 과연 답이 없을까 하고 국회에서 모든 영역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다놓고 논의한 적이 있습니까. 쓸데없이 싸우다가 어떤 날은 한 줄도 안 고치고 법안 100개씩 통과시킵니다. 한꺼번에 통과시킨 날 의원들에게 몇 개나 기억하는지 한번 물어봐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달라도 미시적으로는 의견을 공유할 부분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미시적·실증적 접근을 하는 구조와 풍토를 만드는 것이 희망제작소가 할 일인 것 같습니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한국사회의 비전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통일이후 평양을 어떻게 디자인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논의하는 데 무슨 싸움이 필요하겠습니까.”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할 생각은 없습니까.


“DJ 정부때부터 요청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민정수석, 감사원장, 최근에는 과거사위원장 해달라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는 다른 분이 들어가도 됩니다. 성철스님 돌아가신 직후 언뜻 생각해보니 그분은 산 속에만 계셨는데도 ‘도’의 경지만으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줬습니다. 아직은 자유롭게 시민운동을 하는 것이 사회에 기여하는 길인 것 같습니다.”


―갈수록 심해지는 양극화 현상을 ‘나눔운동’이라는 소극적 방법으로 풀 수 있겠습니까.


“양극화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기술, 정보 격차로 인한 시대의 추세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투자를 통해 격차를 메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분배냐, 성장이냐의 고전적 논쟁은 얼마나 한심합니까. 분배를 포기하고 성장으로 나갈 수도 없고, 성장동력 없이 사회의 후진성을 지켜만 볼 수도 없는 일입니다. 민간이 민간을 돕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지요. 아름다운 가게 올해 매출액이 65억원 정도 됩니다. 재활용과 나눔에 관한 한 정부보다 우리가 훨씬 더 투자하는 셈입니다. 자발성이나 열정에 있어 공무원과 민간이 비교가 안됩니다. 민간을 잘 활용해서 공공 이익으로 환원시키면 지금 사회복지 예산의 몇십%는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가게’도 변화를 모색중지요.


“‘대안무역’이라고 해서 제 3세계 어려운 사람들이 생산하는 커피를 직접 사 옵니다. 아름다운 가게에서 별도로 ‘아름다운 무역’ 부서를 만들었습니다. ‘아름다운 커피’를 지속적으로 사 주는 것만으로도 제3세계 사람이 취업을 유지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수익이 남으면 그쪽 지역에 학교를 짓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다시 지원할 계획입니다. 잘만 하면 ‘스타벅스’에 도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에티오피아 커피를 팔아 다시 현지에 한국전 참전용사 마을 지원에 사용할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유병권·김성훈기자 ybk@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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