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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돈이나 권력은 못 드려도 머리는 드립니다

*** 얼떨결에  ^^

 

돈이나 권력은 못 드려도 머리는 드립니다
[진보싱크탱크⑥] 정치·외교의 싱크네트 '새로운 코리아 구상을 위한 연구원'
출처 : 오마이뉴스
09.11.18 10:18 ㅣ최종 업데이트 09.11.18 11:24 김동환 (heaneye)

 
집권 초기 '강부자 정권'이란 비아냥을 들었던 이명박 정권은 감세나 반값 아파트, 친서민 등 실제 서민들에게는 별다른 이익을 주지 않는 보수적인 정책들을 친근감 있는 언어로 포장해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이른바 '무늬만 친서민' 프레임이다. 

'대안없는 진보'. 이것 역시 잃어버린 10년을 외쳤던 보수진영이 정해놓은 프레임이다. 진보진영 내에서도 이에 일정 부분 수긍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오마이뉴스>는 최근 5차례에 걸쳐 우리시대 진보의 대안을 만들고 있는 싱크탱크들의 활동을 소개한 데 이어 2차 기획을 내놓는다. <편집자말>
 
"북한이랑 서해에서 또 붙었다며?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지난 13일 남북 장성급군사회담 북측 대표단 단장은 남측 단장에게 경고성 통지문을 보냈다. 10일 일어난 서해교전과 관련 "서해에는 오직 우리가 설정한 해상군사분계선만이 있다"며 "지금 이 시각부터 그것을 지키기 위한 우리의 무자비한 군사적 조치가 취해지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북측의 표현은 강경하지만 최근 남북 간의 대화가 재개되고, 얼어붙었던 민간 분야의 교류가 천천히 녹고 있는 분위기라는 점에서 이번 발표가 남북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언론에서 나름대로 분석 기사를 통해 남북 정세를 보도하지만 대부분의 대중들은 신문에 나오는 '6자회담'이니 '그랜드 바겐'이니 하는 외교 개념을 제대로 챙겨 아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런 사정이지만 여전히 궁금함은 남는다. 이제 북한과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지난 2005년부터 활동 중인 '새로운 코리아 구상을 위한 연구원(아래 코리아 연구원)'은 이런 의문들을 풀어주는 가장 권위 있는 국내 싱크탱크 중 하나다.    

적은 운영비로 생존하는 특별한 방법

  
코리아 연구원 홈페이지
ⓒ 코리아연구원
코리아 연구원

 

 


코리아 연구원의 가장 큰 특징은 단체의 이름에 어울리는 넓은 연구 범위와 다양한 연구 인원이다. 현재 대학교수급 연구원 40여 명이 정치-외교, 경제-통상, 사회통합 부문에서 실증적 분석에 기초한 정책 대안 및 국가전략 제시를 목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나라 민간 싱크탱크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규모의 인력구성이다.

코리아 연구원의 김경순 사무처장은 "출발할 때부터 국가의 전략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서 생각했다"고 설명한다. 연구소가 만들어질 당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가져야 할 국가 전략이 정치-외교, 경제-통상, 사회통합의 세 부문이라고 판단했다는 얘기다. 코리아 연구원은 이 분야들 중 특히 안보 문제를 포함한 정치-외교 부문에서 압도적인 연구실적을 내고 있다. 북한 관련 문제가 터지면 본질을 꿰뚫는 관련 논평이 이곳에 거의 실시간으로 올라올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정치-외교 분야를 담당하는 정치외교연구센터에서 지난 5년동안 생산해 낸 게시글의 숫자는 약 1만 500여 건.   

재미있는 것은 이런 규모나 활동에 비해 코리아 연구원의 운영비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코리아 연구원의 1년 예산은 대략 1억원 정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코리아 연구원에는 월급 받는 사람이 행정 관련 업무를하는 사무처장과 직원 한 명뿐입니다. 연구원들은 모두 무급으로 자기 생업을 가지고 있고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수준입니다. 각각의 연구원들이 자기 분야를 가지고 있는 전문 지식인들이기 때문에 어떤 분야의 글이 필요하다 싶으면 그때마다 사무처에서 글을 청탁하는방식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코리아 연구원 김경순 사무처장
ⓒ 김동환
코리아 연구원

 

"이런 개념을 '싱크네트(Think Net)'라고 한다"고 덧붙이는 김경순 사무처장. 상근 연구 인력을 유지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한데 우리나라는 싱크탱크에 기부하는 문화가 아직 정착되지 않아서 이런 싱크네트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싱크네트 방식은 연구 환경에 크게 제약을 받지 않으며 사안마다 유연하게 협업이 가능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싱크네트 방식은 비용이 적게 드는 대신 모든 연구원이 한 공간에서 연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연구의 시의성과 효율성을 위해 중앙에서 전체 연구를 조절해주는 역할이 필요하다.
 
코리아 연구원에서는 '연구기획위원회'가 조정탑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연구기획위원회는 총 8명의 연구기획위원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무엇에 대해 연구하고 어떤 내용의 보고서를 발간할 것인지를 정하는 회의를 갖는다.

미국 뉴딜과 MB 뉴딜은 뭐가 다른가?

이런 과정을 거쳐 생산되는 코리아 연구소의 보고서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가 원고지 50매에서 100매 사이의 분량으로 작성되는 '현안진단'. '현안진단'은 재보선이나 한·EU FTA, 개성공단, 비정규직 문제 등의 개별적인 사안에 대한 분석 보고서다. 두 번째는 현안진단 분량의 글 3~4개가 한 주제로 묶여있는 '특별기획'으로 '오바마 시대의 한반도 전망' 등 거시적인 현실 진단과 더불어 정책에 대한 제안이 곁들여진다는 것이 특징이다.

코리아 연구소에서 지금까지 생산된 현안진단은 154개, 특별기획은 27개다. 평균을 내 보면 지난 5년동안 매주 1개씩 50매에서 100매 사이의 보고서를 만들어온 셈이다.

최근 나온 코리아 연구소의 현안진단 중에는 북한의 정책 변화와 남북관계를 보는 5가지 논점(이정철), 현 구역개편론 평가와 바람직한 방향(허훈), 오늘 다시 선거를 생각 한다: 정치공학의 그림자(홍재우)가 반응이 좋았다.
 
'북한의 정책 변화와 남북관계를 보는 5가지 논점'은 북한 관련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다섯가지 요점을 잡아 어렵지 않게 풀어낸 글이다. 북한의 최근 변화가 우리 정부의 주장처럼 제재의 효과가 아니라 협상 전술이 변화한 것이며, 그러한 북한의 대외 강경행보 중단은 중국이 상당부분 관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현 구역개편론 평가와 바람직한 방향'은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구역개편 논의에 허점을 짚고, 구역개편이 결국에는 지방자치 및 분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 다시 선거를 생각한다 : 정치공학의 그림자'는 요즘 이명박 정부가 왜 선거제도의 변화를 추진하는지를 친이계와 친박계로 나뉘어져 있는 한나라당의 구조를 통해 분석한 글이다.
 
'하토야마시대 일본과 동아시아, 전망 및 제언'은 장기 집권해온 자민당이 왜 2009년에 무너졌는지, 그로 인해 한일, 한미관계에는 어떤 변화가 올 것인지를 다각도로 다뤘다. '미국의 뉴딜과 MB의 녹색뉴딜 비교분석 및 제언'에서는 미국의 뉴딜을 루스벨트 대통령이 추진했던 것과 최근 오바마가 추진 중인 정책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이를 이명박 정부의 뉴딜정책과 비교하고 있다. 김종걸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이 글에서 왜 오바마의 뉴딜이 '그린 뉴딜'이고 이명박 정부의 뉴딜은 '그레이 뉴딜'인지를 '토건경제'와 '역주행'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한다.
 
'2009년, 4대강국 정세 전망과 한국의 정책방향'은 미국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의 동북아정책들을 각각 분석해서 그 정책들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을 정리했다. 또한 네오콘적 환상 속에서 출발한 이명박 정부의 외교가 어떤 모습인지, 그런 방향의 외교에서 왜 남북관계의 출구를 찾을 수 없는지를 분석했다.
 
인지도 높이고, '시민 후원형 싱크네트'로 거듭나야

  
주변 4강의 변화 속에서 한국은 어떤 새로운 정책을 내놓아야 할까?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6월 16일 정상회담을 진행하는 모습.
ⓒ 청와대 제공
한미정상회담

 

정책연구가 가치를 가지려면 해당 정책이 전문가는 물론 일반 국민과 정책담당자에게 영향을 미쳐 연구 결과가 정책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상식이다. 그러나 '대북 압박정책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하는 코리아 연구원의 진보성향 정책 제안이 이명박 정부에서 정책으로 채택되기란 사실상 어렵다.

매주 생산되는 양질의 보고서에도 불구하고 코리아 연구원이 일반 대중에게 비교적 덜 알려져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코리아 연구원의 보고서는 일반 대중이 읽기에는 다소 어렵고 현재 정책에 직접적으로 반영되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정부 지원금 없이 대부분의 재정을 시민들의 후원금으로 충당해야 하는 한국의 진보 싱크탱크에게 낮은 인지도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코리아 연구원의 고민 역시, 낮은 인지도와 부족한 재정 사이에 있다.  지금은 한 달에 만원씩 후원하는 200명도 채 안 되는 후원회원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상황. 익명의 독지가가 모자라는 대부분을 도와주지만 그렇게 언제까지나 지속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시민 후원형 싱크네트'로의 체질 변환이 시급하다. 

"어느 싱크탱크나 재정적인 문제가 가장 어려울 거예요. 우리 연구소 같은 경우는 연구의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는 상근자를 좀 늘렸으면 하지만 그게 잘 안 되니까 고민입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좀 더 연구가 정교해 지겠지요"

연구기획위원장인 동국대 박순성 교수도 재정 확충의 필요성에 동감한다. 그러나 시민들의 후원 참여가 절실한 상황과는 달리 코리아 연구원의 홈페이지에는 아직 시민 참여와 소통을 위한 구조적인 기능들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다. 이런 조건으로는 빠른 시일 내에 '시민 후원형 싱크네트'로 변모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부자감세·4대강 뛰어 넘을 대안 찾아라
 
정치가가 혼자서 자신의 정책을 만드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복잡한 현대사회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중앙 정계에 진출한 지 4년밖에 안 되는 짧은 정치경력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미국진보센터(CAP)의 정책 지원이 있었다. 오바마가 대선 때 공약으로 내걸었던 미국진보센터의 정책들은 미국 유권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고 지금 차근차근 실현되고 있다. 

상근직원 125명, 1년 예산 2000만 달러, 미국 내 영향력 10위 안에 드는 싱크탱크인 미국진보센터와 코리아 연구소를 직접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의 지식인들이 유연한 네트워크를 활용해 자신의 전문 지식을 기여하는 형태로 사회참여를 하고 있는 싱크네트가 적절한 기회를 만났을 때 어느 정도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는 섣불리 단정 짓기 어렵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상징적인 구호로 집권에 성공한 이명박 정부는 낮은 지지율에 시달리다 결국 무늬나마 서민정책을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지역주의와 이념정치로 일관해왔던 우리 정치에서도 어떤 정책을 제시하는지, 어떤 의제를 제시하는지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4대강, 부자감세 등 정책 설정의 중요성을 상기시켜주는 화두들이 언론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야당들은 여당의 정책을 비판할 뿐 대안이 될 만한 자신들의 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지식인들로 구성된 싱크네트인 코리아 연구원은  다가올 2012년 대선에서 진보진영에 어떤 정책을 제시할 수 있을지, 그들의 발간할 다음 보고서가 기대되는 이유다.
     

"이명박 정부 정책 수정 위해서는 진보 싱크탱크 연대 필요"

[인터뷰] 코리아 연구원 박순성 연구기획의원장

급여가 나오지도, 권력으로의 길이 보장되지도 않는데 그들이 정부 정책 연구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코리아 연구원을 통해 민간 싱크탱크 활동에 참여한 지 올해로 6년째인 박순성 연구기획위원장에게 들어보았다.

 

 

  
코리아 연구원 박순성 연구기획위원장
ⓒ 김동환
코리아 연구원

- 코리아연구원은 어떤 목표를 지향하고 있습니까?

"정책 보고서를 통해 공익을 지향하는 바람직한 국가 의제를 설정하고 정책 대안을 만들어 나가는 게 목표입니다. 요즘에는 우리가 만드는 정책이나 정책 대안이 현 정부에 의해서 수용되기가 사실상 어려운 현실이지요. 현 정부 정책을 잘 비판해서 방향을 선회하는 것에라도 기여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장기적으로 바라는 것은 한국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국가가 필요한 정책대안을 생산하고 싶습니다. 더불어 지식인들의 사회참여, 자기발전에도 도움이 되는 전문연구 네트워크가 되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싱크탱크 운동을 하며 보람있었던 부분과 아쉬웠던 부분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보람있었던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코리아연구원을 통해서 대안적 정책은 어떻게 짜며 협동 프로젝트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깨달았습니다. 사회과학적 지식을 현실과 접목시키는 방법적인 면에 대해 많이 배웠고요. 연구원을 시작한 지 5년이 되었는데 코리아연구원이나 다른 싱크탱크들이 지식인들이 좀 더 큰 사회적 발언을 할 수 있는 하는 터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쉬운 점은 요즘 들어와서 상대적으로 젊은 연구자들의 참여가 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저희 연구원만 해도 90년대 학번이 좀 적어서 보완이 필요한 실정입니다. 코리아 연구원에 와서 글을 쓰면 자기 글에 대한 피드백도 받고 사회참여도 되지요. 앞으로 젊은 연구자들이 더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 지금 우리사회의 진보싱크탱크의 수준과 가장 주력해야 할 부분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진보싱크탱크들이 역할분담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코리아연구원이 외교-안보쪽에 집중한다면 새사연은 경제쪽에 집중하는 식으로 역할 분담과 경쟁이 활발하게 이뤄졌으면 좋을 것 같아요. 원래 역할분담을 위해 진보 싱크탱크끼리 심포지엄도 하고 했는데 이게 잘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시민들 상황에 맞게 교정하기 위해서는 진보 싱크탱크들의 연합,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 코리아연구원 연구기획위원장으로서 시민사회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코리아연구원이 주로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자극을 주는 글을 쓰다 보니 글의 주제나 글쓰기 방식이 다수의 시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는 어려운 감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전문적인 식견을 담으면서도 충분히 쉬운,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다만 대중들의 관심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것이 싱크탱크기 때문에 시민사회에서 코리아 연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많이 참여해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김동환 기자는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 재학생입니다.

 

 

<오마이뉴스 기사 보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60384&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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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근칼럼]비핵·개방, 그리고 거짓말

북한의 대화 메시지를 받아든 이명박 정부는 여전히 엉거주춤이다. 전술적 변화일 뿐이라는 판단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이 신중함을 탓할 생각은 없다. 북한의 행보에 의심스러운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차 공세를 위한 숨고르기일 수도 있다. 문제는 신중함이 아니라 신중함을 통해 드러나는 이명박 정부의 자세, 즉 교착국면을 돌파할 의지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전술적 변화든 뭐든 변화는 변화다. 움직여야 한다. 고민해야 한다. 이명박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가. 얼마전까지 이명박의 고민은 ‘북한이 통미봉남(通美封南), 통민봉관(通民封官)하면 어떻게 하나’였다. 그런데 정작 그런 전술을 구사한 쪽은 북한이 아닌, 남한이었다. 한·미공조는 확실히 하면서(통미) 북한과의 대화는 스스로 봉쇄했다(봉남). 또 대북 민간 교류를 허용하면서도(통민) 북한 당국과의 대화는 기피했다(봉관). 그런데도 이명박이 유화 공세와 위협의 혼란스러운 신호를 받고 있다고 고백할 정도로 북한은 변하고 있다. 이쯤 되면 이명박은 이런 상황 변화에 상응하게 섬세하고 정교한 대응을 할 태세를 갖춰야 한다. 그런데 그는 연합뉴스·교도통신 인터뷰에서 느닷없이 최근 북한 움직임은 위기 탈출을 위한 유화책이라고 ‘폭로’하고, 핵보유 기정사실화를 목표로 한다고 ‘고발’하고, 핵포기 진정성이 없다고 ‘분석’하면서 대북 제재를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미묘한 정세와 어울리지 않는 무디고 거친 발언이다.

8·15경축사와 다른 행동의 정부

분위기 탈 줄 모르는 이 남자의 무감각증은 어디서 온 것일까. ‘북한이 밀리고 있다, 조금만 더 밀면 완전히 무릎을 꿇릴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그게 성공만 한다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역대 어느 정권도 이루지 못한 위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판타지다. 그게 가능했으면, 과거 정권이, 주변국이 지금까지 비핵화에 실패했을 리 없다. 상상은 자유이지만, 최소한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해야 한다. 이명박의 분석대로 유화 공세가 북한의 전술적 선택이라면, 제재와 압박을 지속적으로 강화할 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북한의 굴복이 아니라 3차 핵실험이나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같은 강력한 반격 가능성이다. 그렇게 되면 북한의 핵능력은 더 향상되고, 북한은 더 위험해지고 북핵 문제는 물론 남북관계도 악화되고 복잡해져 풀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 것이다. 그렇게 안될 수도 있지만, 그건 운 좋은 경우이다. 이명박은 운을 믿는가.

북핵은 적대적인 외부 환경에 반응한 결과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한·미 연합전력, 핵우산, 북·미 적대관계를 그대로 두고는 절대 북한 스스로 무장해제하지 않는다. 개혁·개방도 마찬가지다. 외부 환경의 변화 없이 북한 홀로 결단할 수가 없다. 사실 북한이 아니더라도 가만히 기다리면 혹은 겁을 주면 알아서 비핵화하고 개혁·개방할 체제는 지구상에 없다. 이것이 바로 북한이 도발·위협할 때 북한을 포위하고 제재하는 일이 불가피하다 해도, 해결책이 못되는 이유이다. 진정 비핵·개방을 원한다면 북한에 대한 적극적 관여, 북한과 주변국의 관계 개선을 촉진해야 한다. 비핵·개방은 북한이 불안해할 때가 아니라 안전하다고 느낄 때 시작된다. 그러나 이명박은 이런 노력을 포기함으로써 핵능력 및 내부통제의 강화라는, 비핵·개방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북한을 유도, 자기 원칙이 남북관계 개선·북핵문제 해결이라는 목표와 충돌하는 지점에까지 몰리고 있다. 북핵문제가 악화되고 남북관계가 파탄나더라도 북한에 큰 소리 한 번 쳐봤다는 소박하고도 소심한 업적을 손에 쥐는 것이 목적이라면 상관없다.

북 핵포기 진정 바라는지 의문

그러나 ‘비핵·개방 3000’이 진짜 목적이라면, 대북정책의 원칙 및 수단들은 북핵문제 해결, 남북관계 발전과 조화되도록 수정해야 한다. 물론 아직 그런 기미는 없다. 그래서 이런 의심이 고개를 든다. 혹시 비핵이니 개방이니 하는 것이 말과 달리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인내의 축적을 요구하는지 잘 알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 문제에는 관심을 갖지 않기로 한 것 아닐까. 그렇다면, 비핵·개방을 지난 10년 정권보다 잘 할 수 있다는 장담은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북한이 핵을 포기할 수 있는지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고 한 8·15 경축사는 거짓말이었다고 사과해야 한다.

<이대근|정치·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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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환히 웃으며 돌아오세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셨다. 90을 바라보는 나이이니 장수하셨다. 그런데 슬프다. 너무 슬프다. 더 오래 사실 수 있었는데 … 더 오래 사셔야 하는 건데 …. 지난 5월 몸의 반쪽이 무너지는 일을 당하시고, 남은 반쪽으로 무리를 하시다가 … 몇 년 일찍 보내드린 아픔은 그래도 견딜 수 있다.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게,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좋은 꿈이 아니었다. 편안하게 가셨다는 병원 당국의 설명과는 달리, 그분은 악몽을 꾸고 울면서 가셨다.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인터넷에서 ‘서거’라는 두 글자를 본 것은 마침 그날 저녁 한겨레신문사 특강에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기간의 역사를 다루기로 하여 강의안을 작성하던 중의 일이다. 멍한 머리로 기억을 애써 더듬어가며 그분이 걸어온 길을 정리하려 하였지만, 그의 삶은 곧 한국 현대사였다. 그 굽이굽이에 남긴 참으로 많은 업적과 깊은 발자취를 어찌 90분 짧은 강의안에 다 기록하겠는가? 박정희를 위협한 박빙의 대통령 선거, 납치에서의 기적 같은 생환, 다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내란음모 조작 사건, 양김의 분열과 선거의 패배, 대통령 당선, 남북 정상회담, 노벨평화상 수상 등 하나하나가 장편소설로 써도 모자랄 진한 이야기들로 점철된 것이 그의 생애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삶에서 가장 빛나고 오래 기억될 모습은 입원하시기 직전의 마지막 두 달이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10년간의 민주정권을 지내면서 사람들은 다 싸우는 법을 잊어버렸다. 촛불이 꺼진 뒤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충격과 슬픔과 분노를 겪고도 겨우 시국선언이나 했을 뿐, 우리의 근육은 살아나지 않았다. 현재진행형으로 숨 돌릴 새 없이 세상은 거꾸로 가는데, 우리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때 중심을 잡아주신 분은 단연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역주행을 처음 지적하고, 현재의 문제를 민주주의의 위기, 서민경제의 위기, 남북관계의 위기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이명박 정권의 본질을 독재정권이라 규정하고, 민주당, 진보정당, 시민사회 등 민주연합세력의 대동단결이라는 방안을 제시한 것은 다름 아닌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터뜨린 오열이 보여주듯 가장 깊이 슬퍼하면서, 가장 치열하게 싸운 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행동 없는 양심은 악의 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처절하도록 간단한 진실을 온몸으로 보여준 분은 바로 그분이었다.


위기는 이명박 정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말씀처럼 악의 세력과 다퉈서 이기는 것도 아주 쉽고, 지는 것도 아주 쉽다. “아무것도 안하면 지니까.” 사람들이 다 싸우는 법을 잊어버렸을 때, 그분은 꼭 각목을 휘두르지 않고도, 고문당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법을 제시하셨다. 답은 복잡하지 않다. “공개적으로 정부에 옳은 소리로 비판”하고, “그렇게 못하는 사람은 투표를 해서 나쁜 정당에 투표를 하지 않으면” 되고, 나쁜 신문 보지 않고, 집회에도 나가고, 인터넷에 글 올리고, “하다 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을 할 수도 있다”고 연부역강한 젊은이들이 “하루도 쉬지 말고 민주화, 서민경제, 남북화해를 위해 힘써 달라”고 부탁하셨다. 특별한 유언이 따로 없으셨다고? 그분은 온몸으로 유언을 쓰고 간 것이다. 그분은 가만히 계시기만 해도 비바람을 막아주고 뙤약볕도 막아주는 지붕 같은 분이었다. 이제 우리는 지붕 없는 한데에 나앉았다. 부디 그분이 남긴 정치적 유산을 탐하지 말고, 유지를 잇도록 하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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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근칼럼] 김정일과 오바마의 스마트 파워

< 경향신문>

[이대근칼럼]김정일과 오바마의 스마트 파워


기사입력 2009-02-18 18:23 |최종수정2009-02-18 23:44 


이제는 북한이 대포동 2호 미사일을 발사할지 내기 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쏘지 않는 쪽에 판돈을 걸 사람이 별로 없는, 김빠진 게임인 줄 대부분 눈치를 채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내기는 꽤 흥미 있는 일이었다. 한 달 보름 남짓 기간 북한이 과연 쏠 것인가를 놓고 전 세계는 점을 쳐야 했다. 미사일을 발사대에 장착했거나, 미사일에 연료 주입을 했을 때 쏘지 않을 것이란 기대는 이미 무너진 것이었지만, 많은 이들은 2006년 7월5일 발사가 확인되고 나서야 현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걸 탓할 수는 없다. 쏘지 않으리라는 비합리적 믿음은 당시 정세에서는 나름의 합리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북한은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와 관련한 금융 제재 외에 유엔 제재 경고까지 받아 놓은 상황이었다. 북한은 얻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북한이 쏘자 유엔은 제재를 했고, 이에 핵실험으로 맞받아쳤다. 유엔은 다시 제재를 했다. 이런 악순환의 결과, 모든 게 파탄이 났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다. 4개월 뒤 6자회담이 재개되고, 2·13 합의가 나왔다. 북한은 미사일 발사, 핵실험으로 궁지에 몰리기는커녕 미사일 기술을 개선하고 핵보유국을 자처하게 되었으며, 협상 국면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미사일 발사로 곧 부딪칠 北·美


3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외교를 우선하고, 직접 대화를 하고 김정일과도 만나겠다는 오바마 행정부가 대북정책을 확정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북한에 이익이 될 수 있다. 섣부른 도전으로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 방향을 오도하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나아 보인다. 대화도 해보지 않고 대결부터 하는 게 올바른 순서 같지도 않다. 그러나 그것은 외부의 시선일 뿐이다. 북한에 오바마는 부시보다 까다로운 상대이다. 부시는 힘만 믿고 밀어붙이다 제풀에 떨어진 이후 내내 북한에 끌려 다닌, 쉬운 상대였다. 부시는 부드럽지도 않았지만 터프하지도 못했으며, 분명한 유인책도 내놓지 않았지만, 효과적인 제재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스마트 파워를 구사하겠다고 했다. 부시처럼 힘만 쓰는 게 아니라, 상황에 맞게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를 적절히 배합하고, 확실한 유인책과 확실한 압력을 동원하겠다고 했다. 북한에게 부시와 오바마의 이런 차이가 중요하다. 남들이 말하는 차이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북한으로서는 이 만만치 않은 오바마의 페이스를 흔들기 위해 먼저 치고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상대를 가리지 않는 이런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물론 핵도, 미사일도, 핵폭탄보다 더 강력하다는 북한 인민의 일심단결도 아니다. 그건 다름 아닌, 비핵화·한반도 평화에 대한 북한의 공약이다. 비핵화라는 탄두를 가진 미사일에 사람들은 헷갈릴 수밖에 없다. 북한의 비핵화·평화 다짐 때문에 세계는 북한의 도발에 대해 제재도 하지만, 참기도 하고, 양보하고 타협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김정일의 힘은 핵·미사일의 하드 파워를 비핵화 및 평화라는 소프트 파워와 적절히 배합한, 스마트 파워의 구사 능력에 있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로 위협하기 전후 항상 비핵화 목표를 제시하든가 비핵화를 한 단계 진전시켜왔다. 2005년 2월 핵보유 선언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고는 비핵화가 수령님 유훈이라며, 전례없는 비핵화 의지를 과시하고, 곧 9·19 공동선언을 도출했다. 비핵화가 의심받을 때마다 실질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다. 비핵화를 빈말로만 했다면, 김정일의 힘이 이렇게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 1월에도 김정일은 비핵화 노력을 강조했다. 아마 그 다음 순서는 인공위성으로 명명된 대포동 2호 발사일지 모른다.


겨우 ‘하드 파워’ 대책 뿐인 南


 이런 김정일의 스마트 파워가 오바마의 스마트 파워라는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났다. 곧 두개의 힘이 부딪치며 한반도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그러나 두 힘 사이에 남한이라는 존재는 없다. 최근 미사일 발사뿐 아니라 남북 군사적 충돌 우려도 높아지고 있지만, 정부 대책이라는 것이 서해 현지 군지휘관에게 작전권을 위임했다느니, 자주포로 대응할 준비를 해 두었다느니 하는 것뿐이다. 충돌을 막는 대책이 아니라, 충돌하는 대책이다. 하드 파워면 충분하다는 발상이다. 나머지는? 오늘 서울에 오는 클린턴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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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le1_Woman in the Big League

 

"2007년 12월 27일, 40대 미혼녀에게 ‘어머니’라고 불렀다가 뺨을 맞는 사건이 발생했다. R씨는 옷 가게 점원이 미혼인 자신에게 어머니라고 부른 것에 화가 나 손찌검을 했다고 한다. 그 R씨의 마음은 단지 R씨만의 것이 아니고, 그 마음의 다른 이들은 단지 품위를 지키기 위해 실행에 옮기지만 않은 일이었다.


결혼을 선택해야만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던 전통사회의 관성에 이끌려 결혼을 위한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던 싱글우먼들은 단지 운명적인 인연을 만나지 못해 결혼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삶이라는 게 끊임없는 선택으로 점철되어 있다면 그녀들은 존재의 방식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선택한 결과로 얻은 것이 그녀의 직업이다.


값싼 임금 때문에 여성근로자가 생기기 시작한 것을 기화로 여성의 직업 영역은 점차 확대되어 간다. 싱글우먼은 밖으로는 부계사회의 기득권을 가진 남성과 경쟁해야 하며, 안으로는 존재방식에서 오는 고독을 다스려야 한다.


인간이 살기에 척박한 환경인 티벳에서는 한 집에서 한 명은 승려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독신을 지키며 사회적으로는 존경을 받는다. 싱글우먼의 대부분은 이 사회의 소중한 인력이다. 사회적 존경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그녀들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 - 백지순 작가의 작업노트 중에서

 

***백지순 작가 관련 기사

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81023003344&subctg1=&subctg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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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순'

학교를 떠난 후

그의 이름을 내내 잊고 지냈다.

최근 우연히...

그의 사진전을 연다는 소식을  알게 되어.

오늘 용주형이랑

점심을 먹은 후 인사동 아트비트로 사진전 구경을 갔다.


"알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꽃이라도 들고 가야 하는 거 아닐까"

"아냐 작가 선상님이 없을지도 몰라"

두런거리며 갤러리에 들어섰는데

엉! 서로를 금새 알아보았다.

사진에는 소양이 없으므로 자세한 내막은 관심이 없고

반가운 후배님을 만났고...

문제의식을 확장하여 자신의 작품세계를 열어나가는

후배가 자랑스럽고 좋아 보였다.


나는 다 잊어버린 기억의 한토막을 후배님이 떠올렸다.

00소식지 편집팀으로 일할 때

"글을 너무 쉽게 쓴다"고 타박을 했다나...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으로 추정은 되는 데...

하얗게...

나는 왜 생각이 나지 않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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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자존심

친구의 친구 또는 남편 이야기...-..-

  



강용주 “인간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지키고 싶었다”
입력: 2008년 08월 21일 09:33:15
옛날 광부들은 갱에 들어가기 전 카나리아를 먼저 안으로 날려보았다. 먼저 날아들어간 카나리아의 소리가 들리면 갱이 안전하다는 뜻이고, 카나리아가 울지 않으면 유독가스에 중독되어 죽은 것이라 여기고 광부들은 그 갱도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카나리아는 자신의 생사를 걸고 광부들에게 위험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14년 동안의 옥살이에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강용주씨는 인터뷰 동안 2번의 눈물을 보였다. 어린 시절 직접 겪은 ‘1980년 5월의 광주’와 ‘어머니’를 이야기할 때였다. |서성일기자
강용주씨(48)는 스스로를 “뒤집어진 광산의 카나리아”라고 했다. 1985년 구미(歐美)유학생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고문에 못이겨 거짓 자백을 한 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운동권 학생, 14년 동안이나 복역하면서도 준법서약을 거부한 비전향수, 국가보안법을 위반해 출소한 뒤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받는 보안관찰 처분자. 이런 ‘신분’인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될 때 만인의 자유가 똑같이 보장될 것이라는 얘기다. “카나리아가 죽은 탄광에서 광부가 얼마나 살 수 있겠는가.”

최연소 장기수로 14년 동안이나 복역하면서 전향하지 않은 이유를 그는 “전향은 정치적인 신념의 문제만은 아니다”라며 “사상이나 신념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인간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준법서약으로 옷을 갈아입었다가 2003년 폐지된 전향제도를 ‘분단상황에서 최소한의 요구’ 운운하며 정당화하려 했던 주장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반인권적’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답이다.

감옥에서 나와 ‘늙다리 전문의’가 되어 자신의 꿈을 이뤘지만 그는 여전히 “죽어야만 벗어날 수 있는 악법”과 싸우고 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기 때문에 보안관찰 처분자로서 관할 경찰서에 자신의 움직임을 신고하고 3개월마다 주요 활동 사항을 관할 경찰서에 보고해야 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법을 이행하지 않아 불구속기소된 적도 있다. 그래도 그는 “악법에 복종하는 것은 공범이 되는 것”이라며 기꺼이 불복종을 택했다.

-14년 만에 학교에 복학해 입학 22년 만에 전남대 의대를 졸업하고 레지던트 과정까지 마쳤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요즘은 쉬고 있어요. 하루 일과를 말하자면 일어나서 와플 구워 먹고 아내 출근시키고 책보고 일 있으면 나가고 그런 일상입니다. 제가 1999년 2월에 출소하고 그 해 8월에 복학했어요. 그 뒤로 5년 동안 의대 공부하고 졸업하고 인턴 1년, 레지던트 3년을 한 뒤 올해 2월말에 전문의를 땄어요. 출소해서 한 번도 안놀았더라고요. 저도 안식년을 갖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냥 쉬는 것은 아니고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활동은 아니고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에서 하는 고문피해자 치유모임을 하고 있어요. 민가협 회원과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등과 함께 1주일에 한 번씩 합니다. 몇십년이 지났는데도 5, 6공 또는 박정희 때 조작 사건이나 정치적인 사건들로 인해 고문을 당했던 분들이 고문의 후유증에 아직도 고통당하고 있거든요. 정신과 의사들과 심리학자 등이 그분들을 치유하고 재활하도록 돕는 게 잘 되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4년간의 수감 생활에 대해 물어보고자 합니다.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입니까.

“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입니다. 말 그대로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을 간 학생들이 간첩단의 배후가 됐다는 그런 사건이죠.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야생초 편지’로 유명한 황대권씨 등입니다. 이분들이 유학가서 우리나라 민주화 문제, 통일 문제 등을 연구했나봐요. 저는 당시 전남대에서 학생운동을 하고 있었고 학내 조직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과 저를 엮어버린 겁니다. 유학을 갔던 사람들의 지도를 받아 간첩활동을 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죠. 그때는 2·12 총선 이후에 야권이 신장하면서 전두환 정권이 위기에 몰리게 되고, 학원안정법을 만들려고 하는 중이었거든요. ‘이렇게 학생운동이 극렬 과격화된 것은 배후에 불순세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시나리오에 따라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만들고 저를 집어넣은 것이었죠.”

-고문과 강압에 의해 당시의 진술이 조작됐다고 밝히셨습니다. 끔찍한 공권력에 의한 폭력을 직접 경험하셨는데요.

“저는 다른 사건 연루자들보다 한 달 늦게 잡혀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먼저 들어간 분들보다는 고문을 덜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빼고 다 받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잠 안 재우고, 옷벗기고, 때리고, 성적 수치심도 주고요. 85년 9월9일 1시간짜리 TV 방송을 통한 수사결과 발표에서 제가 범행을 인정하는 진술을 합니다. 수사관들이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하지 않겠다고 하니까 때렸습니다. 수사관들은 제가 발표할 내용을 불러주고 저는 외우죠. 그리고 지하실로 데리고 가서 테스트를 합니다. 옷을 제대로 입히고 또 한 번 얘기해 보라고 하더군요. 안한다고 하면 때리고, 반복적으로 훈련시키고, 그 뒤에 테스트까지 한 뒤 그 사람들이 오케이할 때까지 외운 답을 읊어야 하는 것입니다. PD 한 분이 저한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서 ‘이 사건이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강용주씨의 표정이 당시 화면에 너무도 밝게 나왔다’고 합디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스톡홀름증후군이라고 아시죠? 납치를 당했을 때 납치범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동화되는 현상 말입니다. 그래야 한 대라도 덜 맞고, 욕이라도 덜 먹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고문을 받다 보니까 그 사람들이 안 시켜도 저절로 웃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고문은 국가권력에 반항하는 사람을 정신적·육체적으로 파괴하고 다시는 저항할 힘을 갖지 못하도록 개인의 인간성과 정체성을 근원에서부터 깨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단테가 ‘신곡’에서 지옥에 들어가는 문을 언급했는데 저는 인간이 지옥에 들어가는 문을 상상한다면 바로 그건 고문의 고통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고문 등 국가에 의한 폭력에 대한 배상은 받으셨나요.

“참 이상한 것이 고문을 당한 피해자는 있는데 고문 가해자는 없어요. 우리 정부가 95년에 고문방지협약에 가입한 뒤 함주명 선생 등 국가에 의해 고문받았던 사람들과 함께 고문 수사관들을 상대로 소송을 낸 적이 있어요. 우리 사건이 고문에 의해 날조된 것이니까 우리를 고문한 수사관들을 찾아 처벌하고 재심을 통해 명예회복을 시켜달라는 내용이었죠. 국제사회에서는 고문은 반인도적 범죄라 시효를 두지 않거든요. 그런데 공소시효 소멸로 기각됐고 헌소도 각하됐죠. 함 선생이 ‘고문 기술자’로 불린 이근안씨에 의해 간첩 누명을 썼던 것이라고 재심을 통해 무죄가 밝혀졌고 국가 배상 판결도 났어요. 그게 지난해입니다. 그것도 이근안씨가 잡혀 자백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에요. 만약 95년에 국가가 의무를 다했다면 그분의 억울함은 10여년 전에 해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개인이나 국가도 고문은 잘못됐다고 하지만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고, 시효를 이유로 가해자들은 처벌을 받지 않고 있어요.”

“카나리아가 죽은 탄광에서 광부가 얼마나 살 수 있겠나”


강용주씨는 “고문피해자 치유 모임 등을 진행하고 있고, 요즘 대부분의 시간은 마음이 평온하다”며 “앞으로 더 의미 있고 대안이 될 수 있는 의료 활동을 하기 위해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서성일기자
-전향과 준법서약서 서명을 끝까지 거부하면서 14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셨습니다. 특히 98년에 전향제도가 준법서약서제도로 대체된 것에 대해 ‘내가 준법서약을 안쓰는 이유’라는 옥중편지를 통해 양심의 자유는 보장한다며 한편으론 서약서를 쓰라는 우리 사회를 ‘야만스러운 사회’라고 꼬집은 것이 많이 알려지기도 했는데요. 왜 전향과 준법서약서 서명을 거부하셨습니까.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광주항쟁이 있었습니다. 저는 광주에 살았고 5월18일 광주항쟁이 시작된 날부터 27일 새벽 도청이 함락될 때까지 다 지켜보았습니다. 80년 5월을 얘기하면 저도 모르게…(이때 그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도청이 함락되던 그 마지막 날 26일 저는 도청 앞 수협 건물에 있었습니다. 시민군이 함락되고 그 장면을 보면서 저는 들고 있던 총을 버리고 도망갔어요. 당시 죽어갔던 사람들과 총을 버리고 도망갔던 나. 그것 때문에 대학에 들어가서도 학생운동을 한 것입니다. 이후 85년에 사건에 연루됐고 고문을 받고 거짓 자백을 하고, 교도소에선 계속 잠만 잤어요. 그렇게 3~4개월이 지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 정권에 굴복해서 거짓 자백을 하고.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80년 5월에 총을 버리면서 절대 다시는 이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5년이 지나서 또 이렇게 해버린 것이야?’ 그런 내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광주에서 죽어간 열사들과 제 모습이 겹치면서 영혼과 정체성이 다 망가져버린 거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버린 나, 전두환 정권의 요구대로 방송에 나와 주절거렸던 나, 권력에 시중들며 짓뭉개지고 쓰레기통에 처박혀버린 내 영혼. 그것을 일으켜세우고 싶었어요. 거기서 할 수 있는 것은 전향하지 않겠다고, 이 사건은 조작이라고 선언하는 것뿐이었죠.”

-사건을 조작하고 엄청난 폭력을 가할 수 있는 국가에 저항한다는 것이 한 인간으로서 두렵고 불안하지는 않았나요.

“비전향의 삶이라는 것이 참으로 공포스럽고 절망스럽고 슬프죠. 분노도 합니다. 저녁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어요. 그런데 어찌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울어도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사실 처음에는 비전향이라는 것이 그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 내일이 구형하는 날인데 검사가 저를 검찰청으로 불렀어요. 한 번 간첩으로 찍히면 벗어날 수 없으니 혐의를 인정하라고 하더군요. 그러면 구형을 줄여준다고요. 거부했습니다. 다음날 재판에서 반성하지 않는다면서 사형을 구형했어요. ‘아, 내가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남이 하는 연극을 보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나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대전교도소로 갔습니다. 거기에 비전향 장기수들이 있었어요. 그분들을 보면서 그때서야 ‘아, 전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평생 징역을 사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분 중에 최주백 선생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그분이 위암 판정을 받았는데 전향을 하면 치료를 해준다고 하는데도 전향을 거부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신념보다 목숨이 중요하지 않느냐. 치료를 왜 안받으시냐’고 여쭤봤어요. 그랬더니 최 선생은 ‘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는데 전향을 했더니 수술을 한 뒤 다른 교도소로 이감했을 뿐 변한 것이 없다. 더럽게 사느니 죽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다 혼수상태가 됐고 병사에서 돌아가셨죠.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그 이후였어요. 전향을 담당하는 교회사가 ‘이 빨갱이들아, 너희들은 죽더라도 전향할 수밖에 없어’라며 종이 한 장을 보여주더군요. 거기엔 돌아가신 최 선생님의 지문이 찍힌 전향서가 있었죠. 그 현장에서 제가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전향이 사상과 신념의 문제만은 아니란 겁니다. 비전향을 고집한 분들 중에 이른바 신념에 따른 분도 있지만,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거짓 자백을 하라고 해서 끝까지 거부하신 분들도 있어요. 사상이나 신념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그것은 재산과 학력, 지식과 관계가 있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폭력과 야만에 굴복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그것을 이겨내려고 합니다. 거기에 인간의 오묘함이 있지요. 그게 왜 하필 저냐고요? 그건 우연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준법서약서제도가 폐지됐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많이 변한 것 같습니까.

“전향제도나 준법서약은 똑같이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니까 폐지를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촛불집회 때 연행된 중·고생들에게 경찰이 반성문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뭐가 달라진 것이죠? 헌법 제1조를 외치는 그 아이들에게 국가권력이 반성문을 받고 내보내면 그 아이들이 양심과 영혼에 어떤 상처를 받겠습니까. 많이 바뀌었지만 변함없는 지점이 있습니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이야기하는데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닌 것이 너무 많아요. 제가 98년 감옥에서 유엔에 전향제도와 그로 인한 차별에 대한 개인통보를 신청했습니다. 전향이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을 냈으나 각하된 이후입니다. 2003년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전향을 강요하거나 전향에 의해 차별한 것은 양심의 자유와 개인의 평등권, 행복추구권을 위배한 것이라며 배상하라는 통보가 옵니다. 그런데 당시 노무현 정권에서부터 지금까지 국가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어요.”

-보안관찰법 문제도 꾸준히 제기한 것으로 압니다. 이를 위반해 체포된 적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사람들이 ‘지금도 보안관찰법이 있냐’고 묻더라고요. 보안관찰법에 따르면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실형을 살고 나왔을 때 보안관찰 대상자가 됩니다. 그 중에 재범의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보안관찰 처분을 내려요. 만약 그 위험이 없다고 판단된다면 처분을 해제할 수가 있어요. 보안관찰 처분자가 되면 사생활을 경찰에 신고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사를 가도 관할 경찰서에 신고해야 하고 새벽에도 불쑥 경찰이 전화를 합니다. 보안관찰 처분에서 해제가 됐다고 해도 다시 재범의 우려가 있다면서 얼마든지 다시 처분을 내릴 수 있어요. 보안관찰법에서 벗어나는 길은 죽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신분 사회가 아니라고 하는데 보안관찰법은 또다른 신분법 아니겠어요? 죽지 않고서는 신분을 벗어날 수 없잖아요. 보안법으로 이미 처벌 받았는데 또 보안관찰법을 적용하는 것은 이중처벌입니다. 또 이미 일어난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재범을 할 우려가 있다고 해서 처벌하겠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저는 악법에 대해 복종하는 것은 악법의 공범이 되는 것이고, 타협해선 안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출소 신고도 안하고 관할 경찰서에 신고도 거부하고 3개월마다 한 번씩 해야 하는 동향 보고도 안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2001년에 학교를 가려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오전 7시30분에 신고 의무 불이행으로 연행됐어요. 연행됐을 때도 묵비권을 행사했습니다. 지금도 제 주거지 관할 경찰서에서 소환 통보가 와요. 불이익이 있더라도 얼마든지 감수하고 보안관찰법에 불복종할 생각입니다. 저를 링 위로 불러내면 또 싸워야죠. 잠수함을 탈 때 토끼를 데려가거나 탄광에 카나리아를 갖고 가잖아요. 제 상황이 뒤집어진 상태의 카나리아라고 봐요. 나같이 국가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 비전향수, 보안관찰 처분자의 자유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보장될 때 다른 사람의 자유도 보장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아니라 카나리아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별 문제 없다고 생각하지만 카나리아가 죽은 탄광에서 광부가 얼마나 살 수 있겠어요?”

-‘내가 준법서약을 안쓰는 이유’라는 편지에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심정이 묻어납니다. 어머니는 어떤 의미입니까.

“80년 5월26일에 도청을 지키러 가겠다고 하니까 어머니가 처음엔 못가게 막으셨어요. 그래도 계속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니까 나중에 ‘밥이나 먹고 가라’며 따뜻한 밥을 해주시고 담배 한 갑을 사주셨어요(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85년 사건을 겪고, 그때 비전향수는 특별면회가 없었는데 어머니가 교회사를 만나서 특별면회 한 번 하게 해달라고 조르셨나봐요. 교회사가 아들을 만나면 전향하라고 설득하라는 조건을 달고 특별면회를 하게 했죠. 어머니가 저한테 오셔서 눈을 꿈뻑꿈뻑 하면서 전향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제 상황이 강팍하고 영혼 자체가 바짝바짝 말라버린 황무지 같은 상태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가버렸어요. 그 뒤로 어머니는 전향하라는 말을 안하셨어요. 면회 오시는 길, 기다리는 동안 내내 울었다고 하는데 면회 신청하면 화장을 다시 고치고 늘 웃으셨어요. 저한테는 웃는 얼굴만 보여줘야 한다면서요. 제가 감옥에 있는 동안 어머니와 항상 같이 했다고 생각합니다. 비전향은 불가촉천민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이었어요. 어머니가 저를 면회하러 오다가 제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가 고개를 싹 돌리고 그냥 모른 척하더랍니다. 전향 문제가 그런 거예요. 빨갱이라고 낙인 찍어 버리면 끝으로 아는데 사실은 인간의 내면과 관련한 본질적인 문제죠.”

-지금은 어머니와 함께 사시나요.

“어머니는 광주에 계시고 아내와 둘이 삽니다. 사실 저는 비혼주의였어요. 그런데 강릉 아산병원에 레지던트로 있을 때 혼인신고를 했습니다. 저랑 아내는 혼인신고를 한 것을 자본에 굴복했다고 농담을 하는데요. 레지던트로 있을 때 미혼한테는 원룸, 기혼자에게는 26평짜리 아파트를 숙소로 쓰게 해줬어요. 그런데 미혼이니까 원룸을 봤는데 교도소의 조금 큰 방과 너무 똑같은 거예요. 제가 감옥 경험이 있어서 거기서는 못살겠더라고요. 아내한테 얘기했더니 혼인신고를 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26평짜리 아파트에 살게 됐습니다. 그래서 비혼주의 신념이 26평 아파트라는 자본에 굴복했다고 농담을 하는 것이죠.”

-학생운동을 한 입장에서 요즘의 촛불시위와 거기에 참가한 학생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많이 변했습니다. 제가 학생운동을 할 때는 비합법 시대였고, 대중항쟁의 시대가 아니었어요. 저로서는 이런 현상을 광주항쟁에서 본 이후 처음 본 것이지요. 14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시대로부터 유폐되고 기존 운동방식에서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었던 것이 오히려 이번처럼 발랄한 집회에 쉽게 동화될 수 있게 한 것 같아요. ‘명박산성’을 쌓아놓은 곳에 돌을 던지고 올라가버리면 그게 전선 또는 권력이 쌓은 벽이 되지만 거기 올라가서 그림 그리고 노래하는 순간 우리들의 무대가 되어버리잖아요. 그런 재기발랄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 계획인가요.

“향후에 대해서는 아직 고민 중입니다.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을 보면, 건강에 대해 도달 가능한 최고 수준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향유할 모든 이의 권리라고 규정했어요. 건강은 끊임없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이지 목표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도달 가능한’이라는 말이 멋있긴 하지만 어려운 일이거든요. 지금 제가 취직을 하게 되거나 병원을 내도 현재의 시스템대로, 관성대로 살게 될 수밖에 없는데 좀더 의미있고 대안이 되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아직까지는 그게 뭔지 잘 잡히지 않네요.”

-요즘은 편안하신가요.

“편안해요. 그런데 보안관찰법에 따라 신고를 안했다고 집으로 소환통보가 날아오면 저도 모르게 정서적으로 불안해져요. 고문이나 국가폭력의 피해자는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가 없어요. 몸이나 육체는 여기 있지만 정신은 고문 현장에 있거든요. 그날 그곳에 있는 정신이 지금의 자신을 자꾸 왜곡시키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허물고 하는 것이죠. 지금처럼 경찰의 소환통보 문자 한 통이 제 평온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고문 희생자들은 그날을 재경험한다고 해요. 그 경험이 되살아나면 자신도 모르게 과도하게 흥분하고 편안해지지 못하는 것이죠. 그게 낙인처럼 영혼에 있는 거죠. 저도 마찬가지에요. 다만 짓눌리고 찢겨버린 낙인이 아니라 내 삶의 추동력이 되고, 긴장하게 하고, 날서 있게 하는 그런 작용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강용주는 누구인가
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 연루 무기징역…전향서·준법서약서 쓰기 거부 14년 복역

1985년 안기부가 발표한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전남대 의대 2학년이던 24세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고등학교 선배에게 당시 학생운동을 하고 있던 강씨가 ‘학생운동의 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등의 책자를 빌려준 것이 빌미가 됐고 간첩단의 핵심으로 몰렸다. 2개월여에 걸친 고문 끝에 거짓 자백을 했지만 이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정체성에 상처를 입고 전향서와 준법서약서 쓰기를 거부하며 감옥에서 14년을 보낸다. 98년 그가 어머니에게 보낸 ‘내가 준법서약을 안 쓰는 이유’라는 편지가 사람들 사이에 알음알음으로 읽히면서 ‘한국 대표적 양심수’ ‘세계 최연소 무기수’ 등으로 알려지게 됐다.

99년 3·1절 특사로 나와 다니던 의대에 복학, 22년 만에 졸업하고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흰 가운을 입게 된다. 현재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에서 운영하는 고문 피해자 치유 모임을 진행하는 한편, 국가보안법 등 위반으로 실형을 살고 나온 사람들에게 덧씌워진 족쇄인 보안관찰법에 저항하고 있다.

<이지선기자 j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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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18대 총선 결과와 선거제도 변화의 필요성

정해구 교수의 글...

"18대 총선 결과와 선거제도 변화의 필요성-통합민주당을 중심으로-"

...일독을  ^^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1525539?RIGHT_BEST1=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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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촛불시위와 새로운 민주주의

**촛불시위에 대한 해석과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해

쓴 글로 읽고 생각해 볼만한 글입니다.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1457107



 

[현안진단124] 촛불시위와 새로운 민주주의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Ⅰ.
문제제기


  2008년 봄 촛불시위는 한국 정치에서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역사적 사건이다. 대선과 총선에서 압승을 한 보수정권의 집권 초기에 발생한 촛불시위는 정권의 무능함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한국 정치의 한계와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속성을 드러냈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으로 시작된 촛불시위는 세 가지 점에서 한국 사회의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첫째, 2008년 봄 촛불시위는 노동조합, 시민단체, 정당이나 사회단체와 같은 기존의 조직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초중고 학생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사회운동들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전의 사회운동들은 주로 사회운동가들에 의한 조직적 동원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노동조합, 학생단체, 시민단체 등에 의해서 조직적인 방식으로 시위가 주도되었다. 이와는 달리, 촛불시위는 다양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인터넷 동호회를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이루어지면서, 전통적인 조직 중심의 참여와 차이를 보였다. 그 결과, 촛불시위에서 기존의 시민사회 단체들의 역할은 대단히 주변적이고 제한적이었다. 반면, 인터넷 커뮤니티의 사회적·정치적 영향력이 가시적으로 드러났다는 점에서 대단히 새로운 현상이었다.


 둘째, 촛불시위는 2007년 대통령 선거와 2008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사회과학계에서 받아들여진 한국 사회의 보수화 명제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도가 급락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도는 대단히 취약한 것이며, 총선에서 나타난 한나라당의 지지도도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인기는 노무현 정부와 열린 우리당의 실정으로 인한 반사이익의 결과이며, 유권자들이 한나라당에 표를 던진 것이 단순히 정치적 차원의 보수화가 아니라 복합적인 사회정치적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셋째, 촛불시위를 통해서 기존의 정치권, 더 나아가 한국의 대의제 민주주의가 한계를 드러났다. 광우병 쇠고기 문제와 관련하여 여당과 야당을 포함한 제도권 정당들이 문제의 해결에 기여하지 못하였고, 국민의 요구를 수렴하지 못하면서 기존 정당들의 무기력함이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신뿐만 아니라 기존 정당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증폭되면서, 대안적인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갈망이 커지고 있다.   


 단적으로, 2008년 봄 촛불시위는 한국사회의 심층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 변화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대안적 정치의 탄생을 촉진시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Ⅱ. 인터넷이 만든 새로운 한국사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촛불시위는 21세기 한국 사회가 과거와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두 가지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는 여론형성 방식의 변화다. 90년대 말부터 인터넷의 보급이 폭발적으로 확대되면서, 기존의 매체와는 다른 과정을 통해서 정보가 공유되고, 집합적으로 지식이 축적되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전통적으로 정보와 지식은 전문가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신문기자와 대학교수들에 의해서 독점되었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은 언론과 대학과 같은 기존의 전문가 집단이 독점했던 정보와 지식이 대중에 의해서 공유되고 더 나아가 보다 다양한 정보수집과 축적이 대중에 의해서 집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집합적 지성”이라고 불릴 수 있는 집합적인 정보 공유와 생산된 지식의 공유 그리고 인터넷 토론을 통한 의견 교환과 수렴 등 새로운 형태의 정보, 지식, 여론 형성 과정이 등장하였다. 광우병에 관한 해외의 정보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네티즌들에 의해서 수집되고, 실시간으로 인터넷 커뮤니티에 축적되었다. 이러한 정보의 유통 속도는 일간지나 주간지와 비교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이루어져서 기존 언론 매체들을 압도하고 있다. 실시간으로 유통되는 인터넷 정보가 하루 단위나 일주일 단위로 전달되는 느린 정보를 압도하면서 기존 언론매체의 영향력을 급격하게 약화시켰다.


  인터넷 커뮤니티들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는 네티즌들의 집단은 아니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인터넷 커뮤니티들은 그 성격이 대단히 다양하고 이질적이다. 기존의 신문이나 방송과는 다른 인터넷 포털인 다음의 아고라와 같은 인터넷 토론 모임을 통해서 다양한 정보와 의견이 소통되면서, 기존의 매체에 영향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점차 기존의 매체와 대립적인 성향을 지니는 새로운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관심 있는 다양한 네티즌들이 직접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면서 토론을 벌이는 인터넷 커뮤니티는 집단 지성의 등장을 보여주는 예이다. 여기에서 유통되는 정보 가운데 부정확한 정보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의견들은 점차 네티즌들에 의해서 가려지면서, 참여를 통한 여론 형성이라는 새로운 사회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촛불시위에서 드러난 또 다른 새로운 변화는 기존의 사회운동 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회운동 방식의 등장이다. 기존 시민단체들은 촛불시위를 주도하지도 못했고, 시위참여자들을 동원하지도 못했다. 촛불시위 참여자들은 기존의 시민운동 조직이 아니라 인터넷 동호회를 통해서 시위에 참여하였다. 정치적인 목적을 갖지 않은 다양한 인터넷 동호회들 내에서 광우병 쇠고기 문제가 논의되면서 대단히 이질적인 네티즌들이 촛불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촛불시위에 참여한 인터넷 동호회들은 주부 요리 동호회인 82cook(www.82cook.com), 20-30대 남성들로 이루어진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 동호회인 mlbpark(www.mlbpark.donga.com), 성형수술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나누는 다음 카페인 쌍코, 인테리어 동호회인 레몬테라(www.lemonterrace.com), 옷 패션 인터넷 동호회인 소울드레서(http://daum.cafe.www.souldress.com)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이 촛불집회에 참여한 것은 촛불집회 토론회에서 한 참여자가 언급한 것처럼, "황당한 정책에 어의가 없어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매우 단순한 이유였다. 이들은 촛불시위 참가뿐만 아니라 모금을 하여, 촛불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김밥과 생수를 공급할 뿐만 아니라, 광우병 쇠고기 반대 신문광고와 조선, 중앙, 동아일보 불매운동을 벌이는 등, 적극적인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운동의 중심에 다양한 인터넷 동호회가 자리를 잡고 있다. 기존의 운동 조직과는 다른 가상 세계의 사이버 커뮤니티가 현실 세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Ⅲ. 정치적인 것과 정치의 의미 변화


 정치와는 무관할 것이라고 여겨졌던 인터넷 동호회들이 촛불시위의 방향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광우병 쇠고기 반대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먹거리 안전”이라는 단순한 생활상의 요구였다. 이들 동호회들은 한마디로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동호회들이다. 이것은 경제발전이나 사회진보의 실질적인 내용과 다르지 않다. 먹거리 안전 문제는 잘 먹고 잘 살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다. 광우병 소고기 문제는 바로 삶의 기본을 위협하는 사안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것은 흔히 생활정치라고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변화다. 삶의 안전과 질 문제는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는 점에서 촛불시위는 21세기 한국정치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을 계기로 민주주의의 문제가 곧 생활과 직결된 문제라는 새로운 인식이 일반 사람들에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80년대는 사회의 진보와 체제 변혁을 내세웠던 변혁운동의 시대였다. 그리고 90년대 한국의 민주화가 시작되면서 시민사회의 의제들을 중심으로 하는 시민운동이 등장했다. 시민단체들이 주도하는 시민운동은 환경, 경제정의, 반부패, 인권 등 민주주의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은 일반 시민들의 일상과 관련된 의제라는 점에서 이전의 쟁점들과 다르다. 2008년 촛불시위는 생활상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드러내는 생활정치의 등장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현상이었다. 생활정치의 주체는 남성 노동자가 아니라 생활을 책임지는 가정주부라는 점에서 생활정치의 등장은 여성의 정치적 주체화를 함의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21세기 진보 정치의 내용이 무엇을 포함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이것은 시사IN과 진보신당이 공동으로 주최한 토론회에서  레몬테라스의 30대 주부의 주장에 압축되어 있다: “앞으로 진보신당의 갈 길은 바로 주부를 포섭하는 길이 아닐까.”


  촛불시위를 계기로 시민들의 일상생활의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라는 새로운 인식이 확산되었다. 촛불집회 기간 동안 다양한 형태의 집합적 경험을 통해서 체득된 시민의 힘은 향후 다양한 계기를 통해서 분출될 수 있는 새로운 잠재력이 되었다. 그리고 일상의 정치화로 요약되는 새로운 정치의 등장은 정치의 주변에 놓여있었던 여성들을 핵심적인 정치적 주체로 만들었다.


  다음 아고라와 같은 인터넷 공론장은 다양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여론이 형성되는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치의 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은 인터넷 정당과 인터넷 국회와 같은 제도권 정치조직과는 다른 대안적인 정치조직이 가상공간인 인터넷에서 실험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아직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지만, 참여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인터넷의 속성을 적극적으로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실험도 가능하다는 것을 이번 촛불시위가 확인시켜주었다. 물론 이러한 인터넷 정당과 인터넷 국회는 선거와 같은 현실 정치에서 그 영향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 정치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2008/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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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라미

 

동그라미        /    이대흠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오느냐 가느냐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라는 말은 장가 상가가 된다

나무의 잎도 그저 푸른 것만은 아니어서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지고

밭에서 일 하는 사람을 보면 일 항가 댕가 하기에

장가 가는가 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애기 낳는가 라는 말은 아 낭가가 된다

 

장가 낭가 당가 랑가 망가가 수시로 사용되는 어머니의 말에는

한사코 ㅇ 이 다른 것들을 떠받들고 있다

 

남한테 해꼬지 한 번 안하고 살았다는 어머니

일생을 흙 속에서 산,

 

무장 허리가 굽어져 한쪽만 뚫린 동그라미 꼴이 된 몸으로

어머니는 아직도 당신이 가진 것을 퍼주신다

머리가 발에 닿아 둥글어질 때까지

C자의 열린 구멍에서는 살리는 것들이 쏟아질 것이다

 

우리들의 받침인 어머니

어머니는 한사코

오손도손 살어라이 당부를 한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이대흠

 

1967년 전남 장흥 출생

1994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 <상처가 나를 살린다>,<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물속의 별>

현대시 동인상, 애지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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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하나

지난 주

내일신문 기자로 일하는 후배를 만났을 때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한 죄로

끄적거려본 부끄런 글 하나...^^



 

미국이 유연하게 화답하라!


영화 ‘밀양’에서 하나 뿐인 아들을 유괴범에게 살해당한 전도연이 열연한 ‘신애’의 슬픔에 그만 전염되고 말았다. 영화 속 그 슬픔은 비록 허구라지만 내내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 즈음 지하철로 출퇴근할 때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었다. 치욕의 병자호란을 자초한 주전파와 주화파의 대안없는 말싸움에 정작 전쟁에 내몰린 민초들의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와 눈물겨운 삶에 가슴 저렸다. ‘신애’의 깊은 슬픔과 민초들의 비극적인 죽음이 채 잊혀지기도 전에 벌어진 아프간 인질사태는 현실 속에서 그 아픔이 몇 배로 증폭되어 다가왔다.


우리 국민들은 지금 피말리는 인질사태를 지켜보며 가슴 졸이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아프간 인질사태 발생 후 일부 논자들은 "아프간에 대한 사전 입국금지 조치가 없었다"거나 "아프간, 미국 등과의 외교관계를 강화해야 했다"고 정부를 질타하고 있다. 한 보수언론은 “원칙대로 하자면 탈레반에 대한 ‘개전(開戰) 사유’”라며 섬뜩한 적의까지 드러냈다. 그러나 인질 석방에 대한 해법과 성찰에 근거한 외교안보정책의 대전환이란 근본대책에는 눈감고 만다.


주지하듯 미국은 아프간에서 텔레반을 지원하여 소련군을 철수시키고 텔레반은 정권을 장악한 바 있다. 9.11 직후 미국은 빈 라덴과 알카에다를 비호했다며 탈레반정권을 전복시키고 다시 카르자이정권을 세웠다. 현재 아프간평화유지군도 미군 주도 아래 텔레반 소탕작전을 전개한다. 결국 인질 석방이란 대반전의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인질 석방을 위한 한국정부의 노력을 지지하며, 텔레반은 인질들을 무사히 석방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만을 밝힐뿐 “테러조직과의 협상은 있을 수 없다”는 강경입장을 고수한다. 자유와 인권을 최고 가치로 추구한다는 미국은 존엄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악마와도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고, 모든 평화적 구출노력에 현명하고도 유연하게 화답해야 한다.


노무현정부는 ‘자주’의 레토릭을 구사해왔다. 그러나 미국의 요구대로 6자회담의 반 발짝 뒤를 따르며 남북관계를 파행시켰고, 아프간과 이라크전쟁에 파병하는 등 수직적 한미동맹과 근시안적 국익론의 달콤함에 안주했다. 이번 인질사태는 미국에 편승한 낡은 외교안보 패러다임의 위험성과 실패를 입증하고 있고, 김선일-윤장호-배형규 님에 이어, 한국인들이 증오와 테러의 표적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화하기 시작하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비전투부대로 아프간과 이라크의 재건을 위해 노력해 왔다.”고 변명할 뿐 인질석방과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해 파병정책 재검토 등의 메시지를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은 전쟁-가난-독재가 없는 민주공화국에서 자란 새세대가 투표권을 행사하는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 우리 헌법은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전문에 명시하고 있다. 헌법정신과 경제규모 세계 11위 중견국가의 위상에 걸맞는 ‘새로운 외교안보 패러다임’을 국민적 합의로 성안할 때다. 첫째, 영구적 한반도평화체제를 위해 방어충분성에 입각한 외교안보전략을 근간으로 국가발전전략을 재정립해야 한다. 둘째, 수직적 한미동맹을 수평적으로 전환하고 동북아다자안보협력체제 구축에 집중해야 한다. 셋째, 한반도의 비핵․평화통일 달성, 공적개발원조의 증대, 유엔의 평화유지활동에만 선택적 파병 등 평화협력외교를 일관되게 전개하여야 한다. 비로소, 대한민국은 새로운 외교안보패러다임을 정립해야 할 때다.

김경순(코리아연구원 사무처장)

***내일신문 NGO칼럼(2007/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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