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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아그들의 이야기와 아그들과 살아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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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05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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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9/09/09
    [펌:민족화해] 강 건너 외국땅에서 우리나라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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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매
    ㅍㅅ

눈물

도서관 참고열람실에서

우는 소리가 나서 보니

강풀의 만화 '바보' 를 보던 원의 우는 소리였다나...

"너무 불쌍해서 울었다"는 데...

 

그날 밤

이 만화책을 빌려와서

거실에서 읽던 쏭이도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다음 날

마눌이 다시 이 만화책을 읽었는 데

낮에 읽은 탓인지 맹숭맹숭했다나.

 

흠~

난 아직 그 책을 못 봤으니

어떨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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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민족화해] 강 건너 외국땅에서 우리나라를 보았다

신의주에서 중국을 바라봐야 할 나는 강건너 외국땅에서 우리나라를 보았다

김채원 청심국제고 1학년

압록강, 두만강 따라 1,295km

북한이라는 단어 자체는 귀에 박힐 정도로 들어봐서 지겨울 때도 됐지만 북한의 실체는 내게 언제나 미지의 세계였다. 심지어 처음 ‘조중 접경지역 답사’의 안내지를 볼 때는 “북한이 여기 있었지!”하고 지도를 보며 새삼 놀라기도 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지도를 그릴 때 마다 아무 생각없이 한반도 형상을 그려왔고 그 위쪽은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것을 거의 느끼지도 못했다. 더구나 우리 집은 서울보다 판문점이 가까운 일산이다. 이렇게 북한을 “코 앞에” 놔두고도 북한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해보고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이런 나에게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동해로 흘러가는 505km의 두만강을 따라, 그리고 서해로 들어가는 790km의 압록강 끝까지 조선-중국 접경지역 답사는 뜻밖의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두만강과 압록강을 따라 중국 땅을 이동하면서 강 건너편의 북한 주민들을 불과 몇 미터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 북한과 통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국경지역의 제일 흔한 풍경은 강을 따라 계속되는 평범한 농촌마을의 모습이었다. 굴뚝 달린 허름한 집들이 줄지어 모여 있고 그 주변으로 옥수수밭과 보리밭이 이어졌다. 중국 쪽과 달리 북한 쪽은 평지가 아닌 민둥산 꼭대기까지도 다락밭이 많다는 점이 특별한 구경거리였다.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농부들의 모습은 멀리서 보기에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낚시하는 사람은 인형으로 착각할 정도로 몰입하고 있는 게 신기했고, 자전거를 타고 양을 돌보는 소년의 모습도 놀라웠다. 물가에서 빨래하는 아주머니들도 자주 볼 수 있었고 물가에서 고기잡이하는 아이들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국경 지역 북한주민들의 평범한 일상을 모두 볼 수 있었다.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집들이 허름하고 옷들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굶주리는 단계를 벗어난 것인지 어느 정도 표정과 걸음걸이에서 여유가 느껴지기까지 했다.

강을 따라가 보니 허름한 농촌만 있는 것은 아니라 상당히 큰 공장들과 중소도시들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산봉우리에서 내려다 본 무산시엔 수많은 굴뚝이 있어서 한눈에 보기에도 공업도시로 보였다. 무산시는 철광석을 캐는 광산도시라고 했다. 그런데 공업도시인데도 집들은 농촌마을과 거의 똑같아 보였다. 중국의 집안시에서는 물안개 낀 압록강 건너 만포시의 제련소를 보기도 했다.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오고 있었고, 굴뚝 주변의 산은 황량해 보였다.


튜브 끼고 물놀이 가는 아이들

장백현에서 압록강을 따라서 산책하면서 바라본 혜산시도 꽤 큰 도시였다. 강가를 따라서 허름한 집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거대한 공사현장도 보였다. 그곳이 “150일전투”를 하는 곳이라고 했는데, 붉은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강을 따라 조금 더 가다보니 보천보전투기념탑도 선명하게 보였다. 이 때 신기한 풍경이 강 건너에 펼쳐졌다. 약 백 명도 넘는 아이들이 물놀이를 가는지 튜브를 모두들 하나씩 어깨에 메고 두 줄로 걸어가고 있었다. 망원경으로 보니 신나게 장난치며 걸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강변에는 한 무더기의 아이들이 튜브를 한 쪽에 쌓아두고 놀이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북한 아이들은 굶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분명 신기한 광경이었다. 조선족 가이드선생님은 국경지역은 그나마 식량사정이 괜찮은 편이라고 귀띔해주셨다.

중국의 단동에서 본 신의주는 공장도 보이고 바닷가에 작은 배들도 많이 세워져 북한의 다른 마을보다 훨씬 발달된 도시 같았다. 강변에는 압록강각 이라는 큰 건물이 있고, 그 앞 강가에서 수영하며 공놀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신의주도 강 건너의 중국의 단동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압록강에서 유람선을 타면 양쪽에 너무도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한 쪽은 거대한 신도시, 또 다른 쪽은 북한의 작은 도시가 보인다.


외국 땅에서 바라보는 우리나라

그러나 이때쯤 나는 이미 북한의 국경지역 마을들과 사람들을 충분히 봐서 더 이상 신비감은 없었고 머릿속은 이런 생각으로 차있었다. 나는 무엇을 보려는 걸까? 이번 답사에서 난 뭘 봐야할까? 그러다가 그제야 무엇이 중요한 건지 깨달았다. 우습게도 이번 여행에서 나는 외국 땅에서 우리나라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가 강대국들에 의해 왜곡되지 않고 온전히 흘렀다면 어쩌면 나는 저기 압록강의 신의주에서 중국을 바라보면서 신기하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지러운 한자가 여기저기 써 있는 이곳은 명백한 외국인 중국이었다. 내가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신이 나서 멀리서 망원경으로 쳐다보는 저쪽이 알고 보니 우리 땅인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뿐만 아니라 나는 내가 배웠던 고대사와 조선시대 그리고 근대사를 북한의 아이들도 배울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역사를 공유했던 한민족이 서로 분단되어 있다는 것이 그제야 실감나게 다가왔다. 이번 답사에서 방문했던 역사의 유적지들이 생각났다. 항상 자부심을 안겨주는 광개토대왕비, 아쉬움으로 남는 조선 건국의 시발점이 된 위화도, 우리 민족의 정신을 보여준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쏘기 직전 4개월 간 거주한 생가, 윤동주가 다닌 용정중학교와 혜란강, 압록강에 끊어진 채 남은 단교. 우리 민족이 겪은 고난들이 역사의 흔적들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었다. 항상 나의 가슴을 짓눌렀던 답답함과 아픈 민족 수난의 현장을 보는 듯 했다.

특히 백두산 서쪽으로 올라서 천지를 보지 못해 아쉬워하다가 결국 남쪽으로 다시 올라 천지를 기어코 보면서 이런 생각도 했다. 천지의 반대편 북한의 땅에서도 천지를 바라보고 있겠지. 이거 뭔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상황인데.... 은하수를 사이에 둔 견우와 직녀 같구나. 안개 너머 천지 저편에는 북한이 있겠지.

하지만 통일을 해야 되는 이유가 견우와 직녀처럼 반드시 감정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통일은 분쟁을 평화로 되돌린다는 의미, 또 강대국들과 냉전에 흔들린 역사를 되돌린다는 의미에서 꼭 실현해야 할 가치인 것 같다. 통일이야말로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이 세계평화에 가장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한반도는 몇 안 되는 분쟁지역으로서 전 세계인이 주시하고 있다. 통일문제는 비단 우리 민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의 문제다.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워서 나중에 한반도에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에 평화가 찾아올 수 있도록 나도 뭔가 도울 수 있다면 좋겠다. 물론 그 전에 통일이 되면 더더욱 좋겠고....

<민화협의 민족화해에 기고한 글>

http://www.kcrc.or.kr/?doc=bbs/gnuboard.php&bo_table=z_column_2&wr_id=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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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자리

쑝마저

기숙학교로 옮겨가 버린 후

일요일부터

달랑 둘 만 남았다.

 

엉~ 이게 얼마만인가?

갑자기

텅 빈 자리가 허전하고

자전거를 처음 탈 때처럼

자세를 잡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빈 마음을 어찌할지 모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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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고교생

'원'이 이제 고교생이 됐다.

중학생과는 또다른 느낌이랄까!

거의 모든 일에 대해

스스로의 생각으로 풀어나가는 나이에 이르른 것이다.

아마도 나도 중2쯤에..."다 컸고 알만큼 안다"는 생각을 했듯이...

 

아이가 이미 자신의 삶을 스스로 그려가고 있긴 하지만

문득문득 '노파심'이랄까? 이런 느낌을 실감하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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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호수공원

호수공원이 얼어붙었다.

얼음이 깨질 염려가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얼음쪽으로 접근하기만 해도

호루라기를 불며 내쫓던 아저씨들도 아예 보이지 않고...

결국

아그들은

눈싸움에 지치고 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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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울 뿐이고 ^^

 

기말고사 끝나고

우루루 집으로 몰려온 아그들...

멋지고 기발한 피켓들 만들어...

늦잠꾸러기들 아침마다 

추운 교문 앞에서...

신나는 파티를 즐긴다는 데...

당락은

단지 그 다음의 결과일뿐이고...

모여서 아이디어를 모으며 즐겁고,

교문 앞과 학교에서 선거운동놀이하듯

신나고 즐거우니 마냥 좋다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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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커 대디' (?)

오늘은 아침부터 쌀쌀한 겨울날씨였다.

아이와 아이의 친구를 태우고 가평중으로 갔다.

가평군 청소년길거리농구대회에 가기 위해서였다.

지난 봄에는 아이만 보내고 참석하지 못해서 이번엔 가기로 한 것이다.

 

가평중의 실내체육관은 추웠고...운동장은 일부 얼음이 있었다. -..-

실내체육관에서는 고교생의 경기를...

시멘트 바닥의 운동장에서는 중학생들의 4강까지의 경기를 진행했다.

이 녀석들은 기숙사에서 틈만 나면 농구를 즐기는 농구광들이고

요즘은 거의 자정이 지나서까지 작전을 짜고 실력을 갈고닦은 모양이다.

 

평균신장 180이 넘는 아이들의 팀이 5경기만에 

방심한 준결승을 빼고는 가볍게 우승했다.

경기가 끝나고....

마음 속으로라도 양쪽 팀을 모두 응원하지 못한 것이

괜히 미안했고...^^

또 지난 봄 농구대회에 오지 못한 것도 미안한 마음이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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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숙제

달콤한 방학이 끝나면 개학을 앞둔 숙제의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다.

나를 힘들게 했던 숙제는 한달치 일기를 벼락치기로 쓰는 기억의 재구성이었고

이보다 한 수 더 뜨게 만드는 FM라디오 고전음악 감상평 쓰기였다.

70년대 후반의 중학교 때 TV도 흔치 않던 시절이고, 인터넷도 모르던 시절이니

이미 지나간 라디오 방송을 어떻게 재생한다 말인가?

개학 후에야 착실한(?) 감상평을 대강대강 베끼고 섞어찌게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부전자전이라 했던가?

쑝이 한달치 일기를 기억의 재구성을 통해 고통의 창작을 하고 있었다.

(쑝은 창작은 아니라고 우겼다. 사실로 지나간 기억의 퍼즐이라 하던가?)

그제 밤 늦게..그리고 어제 아침에도...

밥 먹을 시간도 없이 글쓰기에 몰입한 쑝을 위해

옆에 앉아 계란후라이에 밥을 떠먹여 주었다.

(옛날 생각을 떠올리며 속으로만 킥킥거리며...)

 

그런데 오늘 아침에 물어보니

선생님께서 반 친구들에게 전체적으로

"일기 다 썼지?"

"녜(일제히)"

"좋아..!!!"

일기 검사도 없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냈다 하던가...

혹시 선생님께서도 나처럼

방학의 달콤한 추억(?)을 기억한 때문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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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떨결에

덤으로, 쑝이 일본여행에 나섰다.

일본에 있는 둘째고모댁으로 여행가는

세째고모댁 가족여행에 살짝 발을 들이민 것이다.

여행 출발을 불과  5일을 남겨 둔 시점에서

"여권은 있으니 후쿠오까행 배에 자리가 있으면 함께 갈래"라는

약간은 외교적인 고모님 말씀을 불쑥 낼름 받아 먹은 것이다.

 

하긴, 일본여행은 벌써 두번째이긴 한 데...

겨우 걸음마를 뗄 무렵에 다녀왔으니

...사진은 일본방문을 증거하고 있으나

정작 자신의 기억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으니

호시탐탐 기회를 엿볼 수 밖에 없었겠지만.....

...일본 갈 때, 독도는 우리땅 티셔츠라도 입을까 고민하던 소녀는

지금쯤 싸악 잊고서 막내둥이로 열씨미 종횡무진 재롱떨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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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매

집에 가보니

쑝이

십자매 두 마리를

친구에게서 받아와서

배란다쪽에 둥지를 모셔두었다.

 

그리고 십자매의 이름을

윤과 진으로 붙여두었다.

머리에 검은 반점이 있는 놈과 아닌 놈으로 구분한다나.

두 마리 모두 수컷이었고

이름 또한 베베프 중 남자친구들의  이름을 차용했다는 데. (-..-)

 

십자매의 이름을 언제까지 바꾸지 않고 유지할 지

귀여운 십자매지만 그 부산물과 배설물들을 언제까지 즐겁게 치울 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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