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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자존심

친구의 친구 또는 남편 이야기...-..-

  



강용주 “인간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지키고 싶었다”
입력: 2008년 08월 21일 09:33:15
옛날 광부들은 갱에 들어가기 전 카나리아를 먼저 안으로 날려보았다. 먼저 날아들어간 카나리아의 소리가 들리면 갱이 안전하다는 뜻이고, 카나리아가 울지 않으면 유독가스에 중독되어 죽은 것이라 여기고 광부들은 그 갱도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카나리아는 자신의 생사를 걸고 광부들에게 위험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14년 동안의 옥살이에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강용주씨는 인터뷰 동안 2번의 눈물을 보였다. 어린 시절 직접 겪은 ‘1980년 5월의 광주’와 ‘어머니’를 이야기할 때였다. |서성일기자
강용주씨(48)는 스스로를 “뒤집어진 광산의 카나리아”라고 했다. 1985년 구미(歐美)유학생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고문에 못이겨 거짓 자백을 한 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운동권 학생, 14년 동안이나 복역하면서도 준법서약을 거부한 비전향수, 국가보안법을 위반해 출소한 뒤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받는 보안관찰 처분자. 이런 ‘신분’인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될 때 만인의 자유가 똑같이 보장될 것이라는 얘기다. “카나리아가 죽은 탄광에서 광부가 얼마나 살 수 있겠는가.”

최연소 장기수로 14년 동안이나 복역하면서 전향하지 않은 이유를 그는 “전향은 정치적인 신념의 문제만은 아니다”라며 “사상이나 신념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인간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준법서약으로 옷을 갈아입었다가 2003년 폐지된 전향제도를 ‘분단상황에서 최소한의 요구’ 운운하며 정당화하려 했던 주장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반인권적’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답이다.

감옥에서 나와 ‘늙다리 전문의’가 되어 자신의 꿈을 이뤘지만 그는 여전히 “죽어야만 벗어날 수 있는 악법”과 싸우고 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기 때문에 보안관찰 처분자로서 관할 경찰서에 자신의 움직임을 신고하고 3개월마다 주요 활동 사항을 관할 경찰서에 보고해야 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법을 이행하지 않아 불구속기소된 적도 있다. 그래도 그는 “악법에 복종하는 것은 공범이 되는 것”이라며 기꺼이 불복종을 택했다.

-14년 만에 학교에 복학해 입학 22년 만에 전남대 의대를 졸업하고 레지던트 과정까지 마쳤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요즘은 쉬고 있어요. 하루 일과를 말하자면 일어나서 와플 구워 먹고 아내 출근시키고 책보고 일 있으면 나가고 그런 일상입니다. 제가 1999년 2월에 출소하고 그 해 8월에 복학했어요. 그 뒤로 5년 동안 의대 공부하고 졸업하고 인턴 1년, 레지던트 3년을 한 뒤 올해 2월말에 전문의를 땄어요. 출소해서 한 번도 안놀았더라고요. 저도 안식년을 갖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냥 쉬는 것은 아니고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활동은 아니고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에서 하는 고문피해자 치유모임을 하고 있어요. 민가협 회원과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등과 함께 1주일에 한 번씩 합니다. 몇십년이 지났는데도 5, 6공 또는 박정희 때 조작 사건이나 정치적인 사건들로 인해 고문을 당했던 분들이 고문의 후유증에 아직도 고통당하고 있거든요. 정신과 의사들과 심리학자 등이 그분들을 치유하고 재활하도록 돕는 게 잘 되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4년간의 수감 생활에 대해 물어보고자 합니다.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입니까.

“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입니다. 말 그대로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을 간 학생들이 간첩단의 배후가 됐다는 그런 사건이죠.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야생초 편지’로 유명한 황대권씨 등입니다. 이분들이 유학가서 우리나라 민주화 문제, 통일 문제 등을 연구했나봐요. 저는 당시 전남대에서 학생운동을 하고 있었고 학내 조직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과 저를 엮어버린 겁니다. 유학을 갔던 사람들의 지도를 받아 간첩활동을 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죠. 그때는 2·12 총선 이후에 야권이 신장하면서 전두환 정권이 위기에 몰리게 되고, 학원안정법을 만들려고 하는 중이었거든요. ‘이렇게 학생운동이 극렬 과격화된 것은 배후에 불순세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시나리오에 따라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만들고 저를 집어넣은 것이었죠.”

-고문과 강압에 의해 당시의 진술이 조작됐다고 밝히셨습니다. 끔찍한 공권력에 의한 폭력을 직접 경험하셨는데요.

“저는 다른 사건 연루자들보다 한 달 늦게 잡혀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먼저 들어간 분들보다는 고문을 덜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빼고 다 받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잠 안 재우고, 옷벗기고, 때리고, 성적 수치심도 주고요. 85년 9월9일 1시간짜리 TV 방송을 통한 수사결과 발표에서 제가 범행을 인정하는 진술을 합니다. 수사관들이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하지 않겠다고 하니까 때렸습니다. 수사관들은 제가 발표할 내용을 불러주고 저는 외우죠. 그리고 지하실로 데리고 가서 테스트를 합니다. 옷을 제대로 입히고 또 한 번 얘기해 보라고 하더군요. 안한다고 하면 때리고, 반복적으로 훈련시키고, 그 뒤에 테스트까지 한 뒤 그 사람들이 오케이할 때까지 외운 답을 읊어야 하는 것입니다. PD 한 분이 저한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서 ‘이 사건이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강용주씨의 표정이 당시 화면에 너무도 밝게 나왔다’고 합디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스톡홀름증후군이라고 아시죠? 납치를 당했을 때 납치범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동화되는 현상 말입니다. 그래야 한 대라도 덜 맞고, 욕이라도 덜 먹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고문을 받다 보니까 그 사람들이 안 시켜도 저절로 웃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고문은 국가권력에 반항하는 사람을 정신적·육체적으로 파괴하고 다시는 저항할 힘을 갖지 못하도록 개인의 인간성과 정체성을 근원에서부터 깨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단테가 ‘신곡’에서 지옥에 들어가는 문을 언급했는데 저는 인간이 지옥에 들어가는 문을 상상한다면 바로 그건 고문의 고통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고문 등 국가에 의한 폭력에 대한 배상은 받으셨나요.

“참 이상한 것이 고문을 당한 피해자는 있는데 고문 가해자는 없어요. 우리 정부가 95년에 고문방지협약에 가입한 뒤 함주명 선생 등 국가에 의해 고문받았던 사람들과 함께 고문 수사관들을 상대로 소송을 낸 적이 있어요. 우리 사건이 고문에 의해 날조된 것이니까 우리를 고문한 수사관들을 찾아 처벌하고 재심을 통해 명예회복을 시켜달라는 내용이었죠. 국제사회에서는 고문은 반인도적 범죄라 시효를 두지 않거든요. 그런데 공소시효 소멸로 기각됐고 헌소도 각하됐죠. 함 선생이 ‘고문 기술자’로 불린 이근안씨에 의해 간첩 누명을 썼던 것이라고 재심을 통해 무죄가 밝혀졌고 국가 배상 판결도 났어요. 그게 지난해입니다. 그것도 이근안씨가 잡혀 자백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에요. 만약 95년에 국가가 의무를 다했다면 그분의 억울함은 10여년 전에 해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개인이나 국가도 고문은 잘못됐다고 하지만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고, 시효를 이유로 가해자들은 처벌을 받지 않고 있어요.”

“카나리아가 죽은 탄광에서 광부가 얼마나 살 수 있겠나”


강용주씨는 “고문피해자 치유 모임 등을 진행하고 있고, 요즘 대부분의 시간은 마음이 평온하다”며 “앞으로 더 의미 있고 대안이 될 수 있는 의료 활동을 하기 위해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서성일기자
-전향과 준법서약서 서명을 끝까지 거부하면서 14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셨습니다. 특히 98년에 전향제도가 준법서약서제도로 대체된 것에 대해 ‘내가 준법서약을 안쓰는 이유’라는 옥중편지를 통해 양심의 자유는 보장한다며 한편으론 서약서를 쓰라는 우리 사회를 ‘야만스러운 사회’라고 꼬집은 것이 많이 알려지기도 했는데요. 왜 전향과 준법서약서 서명을 거부하셨습니까.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광주항쟁이 있었습니다. 저는 광주에 살았고 5월18일 광주항쟁이 시작된 날부터 27일 새벽 도청이 함락될 때까지 다 지켜보았습니다. 80년 5월을 얘기하면 저도 모르게…(이때 그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도청이 함락되던 그 마지막 날 26일 저는 도청 앞 수협 건물에 있었습니다. 시민군이 함락되고 그 장면을 보면서 저는 들고 있던 총을 버리고 도망갔어요. 당시 죽어갔던 사람들과 총을 버리고 도망갔던 나. 그것 때문에 대학에 들어가서도 학생운동을 한 것입니다. 이후 85년에 사건에 연루됐고 고문을 받고 거짓 자백을 하고, 교도소에선 계속 잠만 잤어요. 그렇게 3~4개월이 지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 정권에 굴복해서 거짓 자백을 하고.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80년 5월에 총을 버리면서 절대 다시는 이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5년이 지나서 또 이렇게 해버린 것이야?’ 그런 내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광주에서 죽어간 열사들과 제 모습이 겹치면서 영혼과 정체성이 다 망가져버린 거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버린 나, 전두환 정권의 요구대로 방송에 나와 주절거렸던 나, 권력에 시중들며 짓뭉개지고 쓰레기통에 처박혀버린 내 영혼. 그것을 일으켜세우고 싶었어요. 거기서 할 수 있는 것은 전향하지 않겠다고, 이 사건은 조작이라고 선언하는 것뿐이었죠.”

-사건을 조작하고 엄청난 폭력을 가할 수 있는 국가에 저항한다는 것이 한 인간으로서 두렵고 불안하지는 않았나요.

“비전향의 삶이라는 것이 참으로 공포스럽고 절망스럽고 슬프죠. 분노도 합니다. 저녁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어요. 그런데 어찌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울어도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사실 처음에는 비전향이라는 것이 그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 내일이 구형하는 날인데 검사가 저를 검찰청으로 불렀어요. 한 번 간첩으로 찍히면 벗어날 수 없으니 혐의를 인정하라고 하더군요. 그러면 구형을 줄여준다고요. 거부했습니다. 다음날 재판에서 반성하지 않는다면서 사형을 구형했어요. ‘아, 내가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남이 하는 연극을 보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나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대전교도소로 갔습니다. 거기에 비전향 장기수들이 있었어요. 그분들을 보면서 그때서야 ‘아, 전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평생 징역을 사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분 중에 최주백 선생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그분이 위암 판정을 받았는데 전향을 하면 치료를 해준다고 하는데도 전향을 거부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신념보다 목숨이 중요하지 않느냐. 치료를 왜 안받으시냐’고 여쭤봤어요. 그랬더니 최 선생은 ‘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는데 전향을 했더니 수술을 한 뒤 다른 교도소로 이감했을 뿐 변한 것이 없다. 더럽게 사느니 죽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다 혼수상태가 됐고 병사에서 돌아가셨죠.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그 이후였어요. 전향을 담당하는 교회사가 ‘이 빨갱이들아, 너희들은 죽더라도 전향할 수밖에 없어’라며 종이 한 장을 보여주더군요. 거기엔 돌아가신 최 선생님의 지문이 찍힌 전향서가 있었죠. 그 현장에서 제가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전향이 사상과 신념의 문제만은 아니란 겁니다. 비전향을 고집한 분들 중에 이른바 신념에 따른 분도 있지만,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거짓 자백을 하라고 해서 끝까지 거부하신 분들도 있어요. 사상이나 신념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그것은 재산과 학력, 지식과 관계가 있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폭력과 야만에 굴복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그것을 이겨내려고 합니다. 거기에 인간의 오묘함이 있지요. 그게 왜 하필 저냐고요? 그건 우연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준법서약서제도가 폐지됐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많이 변한 것 같습니까.

“전향제도나 준법서약은 똑같이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니까 폐지를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촛불집회 때 연행된 중·고생들에게 경찰이 반성문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뭐가 달라진 것이죠? 헌법 제1조를 외치는 그 아이들에게 국가권력이 반성문을 받고 내보내면 그 아이들이 양심과 영혼에 어떤 상처를 받겠습니까. 많이 바뀌었지만 변함없는 지점이 있습니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이야기하는데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닌 것이 너무 많아요. 제가 98년 감옥에서 유엔에 전향제도와 그로 인한 차별에 대한 개인통보를 신청했습니다. 전향이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을 냈으나 각하된 이후입니다. 2003년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전향을 강요하거나 전향에 의해 차별한 것은 양심의 자유와 개인의 평등권, 행복추구권을 위배한 것이라며 배상하라는 통보가 옵니다. 그런데 당시 노무현 정권에서부터 지금까지 국가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어요.”

-보안관찰법 문제도 꾸준히 제기한 것으로 압니다. 이를 위반해 체포된 적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사람들이 ‘지금도 보안관찰법이 있냐’고 묻더라고요. 보안관찰법에 따르면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실형을 살고 나왔을 때 보안관찰 대상자가 됩니다. 그 중에 재범의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보안관찰 처분을 내려요. 만약 그 위험이 없다고 판단된다면 처분을 해제할 수가 있어요. 보안관찰 처분자가 되면 사생활을 경찰에 신고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사를 가도 관할 경찰서에 신고해야 하고 새벽에도 불쑥 경찰이 전화를 합니다. 보안관찰 처분에서 해제가 됐다고 해도 다시 재범의 우려가 있다면서 얼마든지 다시 처분을 내릴 수 있어요. 보안관찰법에서 벗어나는 길은 죽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신분 사회가 아니라고 하는데 보안관찰법은 또다른 신분법 아니겠어요? 죽지 않고서는 신분을 벗어날 수 없잖아요. 보안법으로 이미 처벌 받았는데 또 보안관찰법을 적용하는 것은 이중처벌입니다. 또 이미 일어난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재범을 할 우려가 있다고 해서 처벌하겠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저는 악법에 대해 복종하는 것은 악법의 공범이 되는 것이고, 타협해선 안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출소 신고도 안하고 관할 경찰서에 신고도 거부하고 3개월마다 한 번씩 해야 하는 동향 보고도 안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2001년에 학교를 가려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오전 7시30분에 신고 의무 불이행으로 연행됐어요. 연행됐을 때도 묵비권을 행사했습니다. 지금도 제 주거지 관할 경찰서에서 소환 통보가 와요. 불이익이 있더라도 얼마든지 감수하고 보안관찰법에 불복종할 생각입니다. 저를 링 위로 불러내면 또 싸워야죠. 잠수함을 탈 때 토끼를 데려가거나 탄광에 카나리아를 갖고 가잖아요. 제 상황이 뒤집어진 상태의 카나리아라고 봐요. 나같이 국가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 비전향수, 보안관찰 처분자의 자유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보장될 때 다른 사람의 자유도 보장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아니라 카나리아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별 문제 없다고 생각하지만 카나리아가 죽은 탄광에서 광부가 얼마나 살 수 있겠어요?”

-‘내가 준법서약을 안쓰는 이유’라는 편지에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심정이 묻어납니다. 어머니는 어떤 의미입니까.

“80년 5월26일에 도청을 지키러 가겠다고 하니까 어머니가 처음엔 못가게 막으셨어요. 그래도 계속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니까 나중에 ‘밥이나 먹고 가라’며 따뜻한 밥을 해주시고 담배 한 갑을 사주셨어요(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85년 사건을 겪고, 그때 비전향수는 특별면회가 없었는데 어머니가 교회사를 만나서 특별면회 한 번 하게 해달라고 조르셨나봐요. 교회사가 아들을 만나면 전향하라고 설득하라는 조건을 달고 특별면회를 하게 했죠. 어머니가 저한테 오셔서 눈을 꿈뻑꿈뻑 하면서 전향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제 상황이 강팍하고 영혼 자체가 바짝바짝 말라버린 황무지 같은 상태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가버렸어요. 그 뒤로 어머니는 전향하라는 말을 안하셨어요. 면회 오시는 길, 기다리는 동안 내내 울었다고 하는데 면회 신청하면 화장을 다시 고치고 늘 웃으셨어요. 저한테는 웃는 얼굴만 보여줘야 한다면서요. 제가 감옥에 있는 동안 어머니와 항상 같이 했다고 생각합니다. 비전향은 불가촉천민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이었어요. 어머니가 저를 면회하러 오다가 제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가 고개를 싹 돌리고 그냥 모른 척하더랍니다. 전향 문제가 그런 거예요. 빨갱이라고 낙인 찍어 버리면 끝으로 아는데 사실은 인간의 내면과 관련한 본질적인 문제죠.”

-지금은 어머니와 함께 사시나요.

“어머니는 광주에 계시고 아내와 둘이 삽니다. 사실 저는 비혼주의였어요. 그런데 강릉 아산병원에 레지던트로 있을 때 혼인신고를 했습니다. 저랑 아내는 혼인신고를 한 것을 자본에 굴복했다고 농담을 하는데요. 레지던트로 있을 때 미혼한테는 원룸, 기혼자에게는 26평짜리 아파트를 숙소로 쓰게 해줬어요. 그런데 미혼이니까 원룸을 봤는데 교도소의 조금 큰 방과 너무 똑같은 거예요. 제가 감옥 경험이 있어서 거기서는 못살겠더라고요. 아내한테 얘기했더니 혼인신고를 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26평짜리 아파트에 살게 됐습니다. 그래서 비혼주의 신념이 26평 아파트라는 자본에 굴복했다고 농담을 하는 것이죠.”

-학생운동을 한 입장에서 요즘의 촛불시위와 거기에 참가한 학생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많이 변했습니다. 제가 학생운동을 할 때는 비합법 시대였고, 대중항쟁의 시대가 아니었어요. 저로서는 이런 현상을 광주항쟁에서 본 이후 처음 본 것이지요. 14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시대로부터 유폐되고 기존 운동방식에서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었던 것이 오히려 이번처럼 발랄한 집회에 쉽게 동화될 수 있게 한 것 같아요. ‘명박산성’을 쌓아놓은 곳에 돌을 던지고 올라가버리면 그게 전선 또는 권력이 쌓은 벽이 되지만 거기 올라가서 그림 그리고 노래하는 순간 우리들의 무대가 되어버리잖아요. 그런 재기발랄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 계획인가요.

“향후에 대해서는 아직 고민 중입니다.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을 보면, 건강에 대해 도달 가능한 최고 수준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향유할 모든 이의 권리라고 규정했어요. 건강은 끊임없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이지 목표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도달 가능한’이라는 말이 멋있긴 하지만 어려운 일이거든요. 지금 제가 취직을 하게 되거나 병원을 내도 현재의 시스템대로, 관성대로 살게 될 수밖에 없는데 좀더 의미있고 대안이 되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아직까지는 그게 뭔지 잘 잡히지 않네요.”

-요즘은 편안하신가요.

“편안해요. 그런데 보안관찰법에 따라 신고를 안했다고 집으로 소환통보가 날아오면 저도 모르게 정서적으로 불안해져요. 고문이나 국가폭력의 피해자는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가 없어요. 몸이나 육체는 여기 있지만 정신은 고문 현장에 있거든요. 그날 그곳에 있는 정신이 지금의 자신을 자꾸 왜곡시키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허물고 하는 것이죠. 지금처럼 경찰의 소환통보 문자 한 통이 제 평온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고문 희생자들은 그날을 재경험한다고 해요. 그 경험이 되살아나면 자신도 모르게 과도하게 흥분하고 편안해지지 못하는 것이죠. 그게 낙인처럼 영혼에 있는 거죠. 저도 마찬가지에요. 다만 짓눌리고 찢겨버린 낙인이 아니라 내 삶의 추동력이 되고, 긴장하게 하고, 날서 있게 하는 그런 작용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강용주는 누구인가
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 연루 무기징역…전향서·준법서약서 쓰기 거부 14년 복역

1985년 안기부가 발표한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전남대 의대 2학년이던 24세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고등학교 선배에게 당시 학생운동을 하고 있던 강씨가 ‘학생운동의 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등의 책자를 빌려준 것이 빌미가 됐고 간첩단의 핵심으로 몰렸다. 2개월여에 걸친 고문 끝에 거짓 자백을 했지만 이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정체성에 상처를 입고 전향서와 준법서약서 쓰기를 거부하며 감옥에서 14년을 보낸다. 98년 그가 어머니에게 보낸 ‘내가 준법서약을 안 쓰는 이유’라는 편지가 사람들 사이에 알음알음으로 읽히면서 ‘한국 대표적 양심수’ ‘세계 최연소 무기수’ 등으로 알려지게 됐다.

99년 3·1절 특사로 나와 다니던 의대에 복학, 22년 만에 졸업하고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흰 가운을 입게 된다. 현재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에서 운영하는 고문 피해자 치유 모임을 진행하는 한편, 국가보안법 등 위반으로 실형을 살고 나온 사람들에게 덧씌워진 족쇄인 보안관찰법에 저항하고 있다.

<이지선기자 j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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