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밴드 첫 무대 1999년 미얀마공동체 행사.
나의 첫 음악생활 ‘유레카’
나는 1995년에 한국에 들어와서 김포에 있는 한 박스공장에서 일했다.
매일 14~15시간 긴 노동을 하면서 지내게 된 나의 첫 한국생활은 정말 힘들다.
나는 기계 사이에서 내 삶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기 어려운 삶을 멋지게 한번 살아보려고 한국에 왔다.
그래서 나는 이런 힘든 생활 속에서도 항상 즐거움을 찾는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것처럼.
나의 피로를 풀어주는 것은 음악이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해도 일 끝나고 통기타를 치며 노래 한 곡을 부르면 피로가 풀렸다. 주말이 되면 내 주변에 일 하고 있는 버마친구들과 우리 공장 에서 모여 통기타 라이브 쇼를 했다. 우리공장은 주택가가 없는 산 위에 있어서 주말이면 맘껏 노래를 소리 질러 불러도 된다. 나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2003년도 농성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8년 동안 그 공장에서만 일했었다. 주말이 되면 우리 공장은 항상 음악 스튜디오로 변신하고 우리도 노동자에서 음악인으로 변신했다. 이렇게 우리는 음악으로 온몸과 마음을 충전시켜 힘겨운 노동생활을 가동해왔다.
1998년 12월 부천외국인노동자센터에 있는 미얀마공동체에서 활동하는 내 친구가 나에게 찾아왔다. 성탄절 기념으로 이주노동자들이 교회에 가서 어린이들에게 노래 불러주는 잔치가 있는데 기타 치는 이주노동자가 필요하니 내게 도와달라고 했다. 내가 반갑게 응하고 잔치전날 센터 가서 함께 노래할 네팔, 스리랑카, 버마친구들과 연습을 했다. 잔치 때 부를 노래를 연습한 후에도 우리는 팝송, 한국 노래, 미얀마노래를 새벽까지 신나게 불렀다. 나의 기타 연주 소리, 이주노동자들과 센터 실무자들의 노랫소리가 성탄 전날을 아름답게 환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 모두를 하나로 통합시키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음악의 힘을 확실히 알게 됐다.
예상대로 이주노동자들의 노래에 어린이들이 즐겁고 어린이들의 즐거움에 성탄절이 완벽했다. 잔치가 끝나자 센터 실무자분이 나에게 이주노동자들이 일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 노래를 사랑하며 노래도 부를 줄 안다는 것을 한국사회에 보여주고자 하는 의미로 밴드를 결성
하자고 했다. 기다렸던 기회다. 나는 그 의견에 기쁘게 응하고 버마, 네팔, 스리랑카, 한국 등 여러 나라 사람과 구성된 밴드를 결성했다. 밴드 결성 후 한 달 안에 일이 힘들어서 절반의 팀원들이 밴드를 떠났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말대로 거대한 음악의 힘을 버릴 수 없기 때문에 주말마다 나와 노래를 불렀던 친구들과 같이 밴드 활동을 계속했다. 내 친구들도 일이 힘들어서 연습하러 꾸준히 나오기가 무리였다.
그런데 추석 때 미얀마공동체가 하는 행사 때 전체 프로그램을 노래공연으로 해주기를 나에게 부탁했다. 그래서 나는 미얀마공동체의 도움으로 밴드 연주자를 빨리 모집하고 노래 부를 친구들도 초대했다. 3개월 동안 매일 새벽까지 일하면서 점심시간에 10분 안에 밥을 빨리 먹고 나머지 50분을 친구들이 부를 노래 곡들의 악보를 땄다. 그리고 일요일마다 센터에서 마련해준 풍물실 에서 하루 종일 합주를 하며 ‘유레카’라는 밴드 이름으로 1999년 9월 추석 때 첫 단독 공연을 가졌다. 뜨거운 햇빛을 버티며 낮 12시부터 저녁 5시반 까지 노래 45곡을 연주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리했다고 생각이 들지만 그렇게 무리한 결과로 그 공연
으로 인해 6년 동안 ‘유레카’밴드와 함께할 맴버들을 얻었고, 2003년 해체될 때 까지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인생이 무엇인가’라는 음반을 낼 때까지 이주민 역사 속 문화운동의 한 부분에 기여할 수 있었다.
유레카밴드 첫음반"인생이 무엇인가?" 기념공연
미누와 나의 인연
나는 ‘유레카’밴드 결성 당시 첫 공연부터 여러 이주민행사 공연을 할 때 마다 ‘강라이, 미누’라는 네팔 노래패와 무대에 자주 만났다. 이주노동자로서 한국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노래를 부르며 힘찬 박수를 받고 즐겁게 살고 있는 우리 서로 만날 때 마다 반갑게 인사했다. 그때부터 나는 미누라는 친구가 정말 노래도 잘 부르고 인사도 잘 하고, 성격도 좋은 것 같고, 무대 매너도 좋고 해서 함께 음악활동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미얀마공동체가 주최하는 행사 때 미누를 공연 초대한 적이 있었다. 2000년도 KBS 노래자랑 때도 나와 함께 무대에 함께한 적 있다. 백인들과 전문음악인 유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미누는 대상을 받았다.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 대신 대상을 받는 것이고 3D업종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대상을 받는 역사를 미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미누와 나의 인연은 항상 무대에서 이루어졌다. 유레카밴드 음반 기념 공연 때도 초대 가수로 우리의 공연을 빛내줬다. 나는 유레카밴드와 미얀마공동체에서 활동하면서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 상황, 노동환경, 노동권리에 대해 알게 됐고 정당한 권리를 얻기 위해 여러 이주노동자 권리 투쟁 집회 에 참여했었다. 그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고 있었던 미누와 만났고 서로 인사하며 함께 집회를 했다. 우리는 음악을 사랑하는 것도 같았고 자기의 권리를 위해 나서 싸우는 것도 같았다. 이런 식으로 만나고 지내 왔던 우리는 하나가 되는 날이 왔다.
>>>계속
(이글은 경기문화재단 "다문화의 현장"에서 실린 글입니다.)
글이 참 좋네요. 재밌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