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 양태삼 | 입력 2011.05.08 07

 

"외국인 차별보다 사람 차별 없애야"

(서울=연합뉴스) 양태삼 기자 = "한때는 간절히 한국인이 되고 싶기도 했어요.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김치 없인 밥을 못 먹으니 한국인 같은데 버마(옛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일하니 버마인이기도 하거든요."

미얀마인 소모뚜(36)씨는 체류 외국인이 120만 명에 이르는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신분이 독특하다며 이렇게 정체성을 설명했다.

 

                          < 인터뷰 중인 소모뚜씨 >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 체류하는 외국인, 한국에 살러 온 이주민 등으로 나누자면 그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4월 말 현재 243명인 난민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소모뚜씨는 2004년 낸 난민 신청을 법무부가 2009년 기각하자 바로 소송을 제기, 최근 대법원 최종심에서 이겨 3월25일자로 외국인등록증과 난민인정서를 받았다. 난민은 인종이나 종교, 정치적 의견 등을 이유로 차별과 박해를 받아 고국을 떠난 사람으로 1992년 유엔(UN) 난민협약에 가입한 한국은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난민으로 인정된 게 한국에서 가장 기뻤던 때냐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첫 월급을 타서 고향에 송금했던 때"라고 꼽았다. 경기도 김포의 한 박스 제조업체에서 새벽 1시까지 일해 75만 원을 받은 뒤 64만 원을 보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당시 19세였던 그는 "온갖 죽을 고생을 해 번 돈이 무엇보다 반가웠고 깨끗한 것이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며 "내 힘으로 해냈다는 성취감에 감격했다"고 말했다. 그 공장이 가끔 꿈에 보이면 지금도 식은땀을 흘린다고 술회했다.

미얀마의 어머니에게 집을 사드린 게 두 번째로 기뻤던 때라고 말했다. 김포 공장에서 8년을 일하고 소송 끝에 받은 퇴직금 600만 원에 친구들에게 꾼 돈을 보태 1천200여만 원을 만들어 보냈다. 그의 모친은 창문을 열면 미얀마에서도 이름난 쉬다공 사원을 바라보고 절할 수 있는 집에 사는 게 평생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고향을 떠난 지 15년 만인 지난해 여동생을 만났다. 그가 보낸 돈으로 영국에서 공부한 여동생은 영국 시민권을 얻자마자 오빠부터 찾았다. 그간 가장 노릇을 한 보답으로 여동생은 오빠 노후를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고 소모뚜씨는 전했다.

가리봉동 소화기 제조공장에서 착실하게 일하며 월급을 송금하던 그에게 2009년은 고비였다.

그는 "돈을 벌려고 내가 태어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이주민 활동을 저버린다면 생을 마칠 때 나를 용납하지 못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2003년부터 이주민 밴드인 '스톱 더 크랙 다운'(Stop the Crack-down)의 멤버이자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단체인 '버마행동' 회원으로 활동했다. 버마행동은 주한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매달 시위를 벌이며 민주화를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1988년 집권한 미얀마 현 정부가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자 이에 반대하고 정체성을 지킨다는 뜻에서 '버마'라는 이름을 고수한다.

아울러 2009년 재정 위기로 난파 직전인 이주민방송(MWTV)의 공동대표를 맡아 후원금 배가 운동을 펴 위기를 넘겼다.

그는 당시 200만원의 월급을 받고 휴일과 퇴직금이 보장되던 공장을 그만두는 게 몹시 아까웠다면서 "지금 강연료 등의 수입으로 그 때만큼 버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돈을 벌 팔자인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리봉동의 월세 12만 원짜리 쪽방에 산다. 이주민방송에서 일한 활동비에다 여러 곳에서 받은 강연료로 여전히 한 달에 200여만원 수입을 올린다.

최근 한국이 직면한 다문화 바람에 대해 그는 할 말이 많았다.

그는 "다문화 활동가는 점점 사라지고 다문화 사업가, 다문화 사기꾼이 늘어난다"고 꼬집으며 "정부와 관련한 다문화 단체가 200여 개로 급증했는데 정부의 재원이 이주민뿐 아니라 한국인 활동가에게도 골고루 돌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주민방송이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주는 인권상 단체상 수상을 거부하자 '고맙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많이 받았다면서 "건전한 비판정신이 있어야 지금 걸음마 단계인 다문화 운동이 제대로 자리잡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불법체류 노동자 때는 단속을 피할 수 있도록 한국인처럼 보이길 간절히 바랬고, 지금은 김치 없인 밥을 먹질 못한다"고 말한 뒤 "하지만 미얀마 젓갈이 반찬으로 나오면 밥을 두 그릇이나 비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온종일 한국인과 만나고 한국어로 얘기하다 보면 한국인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다"면서 "어느 사회든 차별이 없을 수 없지만 '미얀마인 또는 난민에 대한 차별'이라기보다 '사람에 대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tsyang@yna.co.k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05/08 14:44 2011/05/08 14:44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01/19 18:49 2011/01/19 18:49

 "독재와 배고픔의 고통 아는 대한민국 아닌가요?"

[인터뷰] 인권재단 ‘인권홀씨상’ 수상한 소모뚜 이주노동자방송국 대표   

 

2010년 12월 23일 (목)                                                                                    김수정 기자

 

한국 인권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했기 때문에 결정은 어렵지 않았어요. 상을 거부하는 것은 상을 받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소모뚜(35·사진)는 올해 상복이 많았다. 최근 한국인권재단이 주는 ‘인권홀씨상’을 받았고, 국가인권위원회가 시상하는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하지만 소모뚜는 인권위가 주는 상은 거부했다.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간단했다. “상을 받지 않음으로써 한국의 인권 상황을 알릴 수 있다면 거부해서 한국 인권에 보탬이 되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우리가 이주민의 인권뿐 아니라 한국 인권에도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해요. 장애인이나 성적소수자뿐 아니라 버마인, 한국인 따질 것 없이 인권은 통하니까.”

 


▲ 세계인권선언 제62주년 기념일이었던 지난 10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열린 ‘현병철 위원장 사퇴촉구 및 인권상 수상거부’ 기자회견에서 소모뚜 이주노동자방송국(MWTV) 대표가 “우리가 원하는 건 상이 아니라 인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치열 기자

 

지난 20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에서 만난 소모뚜는 자신이 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자신과 같은 이주민에 대한 무관심의 벽을 깰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는 생각에 더 기뻤다고 했다. 그는 “이주민은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같이 웃기도 하고, 울 줄도 아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준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지난 1993년 한국에 처음 왔을 때 그는 20살이었다. 가족을 위해 3~4년 일하고 버마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랬던 그가 올해로 15년 넘게 한국에서 살고 있다. 처음에는 외국인노동자였지만 지금은 인권활동가, 이주노동자방송국(MWTV) 대표, 버마행동 총무, 밴드 ‘스톱크랙다운’의 리더 등 하는 일도 많아졌다. 그가 한국에서 이 같은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인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면서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잖아요. 마찬가지였어요.”  인권활동을 시작한 계기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가 처음 한국에 올 때는 막연하게 ‘잘사는 나라’, ‘민주화 국가’, ‘김대중이 있는 나라’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들어와 보니 달랐다. “도대체 일이 너무 힘든 거예요. 하루 15~16시간씩 일을 했어요. 같이 일하는 한국 사람도 그렇게 일했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불쌍하다는.”

그러다 한국 이주노동자의 상황이 열악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월급을 얼마 주는 지, 일이 힘든지 보다 ‘월급은 주는 것인지’부터 알아봐야 하는 이들이 많다는 얘길 들은 것이다. 자신은 좋은 사람들과 일하고 있지만,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많은 이주노동자가 차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열심히 배워둔 한국어 덕에 그들의 입이 돼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는 그러면서 행복을 느꼈다.

“일해서 부모님께 돈을 보내는 것도 행복한 일이지만, 언어라는 열쇠상처받은 이들의 답답함을 해결해 주면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죠.”

밴드와 버마행동 일을 하면서 그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처음에는 외국인이니 당연히 차별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의식 있는 분들을 만나면서 불법체류자도 노동권을 가질 수 있고, 퇴직금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 함께 임금 삭감하며 허리띠 졸랐고, 2002년 월드컵 때는 한국을 응원하며 ‘대한민국’을 외쳤던 우리예요. 그런데 추방한다는 얘길 들으니 필요할 때만 쓰고 버리는 휴지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진짜 친구라면, 이주민이 많아지면 제도를 만들어 함께 잘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거잖아요.”

2003년 정부의 이주노동자 강제 추방에 맞서면서 그의 결심은 굳어갔다. 그러면서 인권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주노동자에게도 노동자의 권리가, 사람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공존에 대해 이야기했다. “서로 필요해서 함께 사는 거잖아요. 우리는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서, 한국도 우리가 필요해서. 서로 도움이 되는 사람끼리 왜 도움을 주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아직 인식과 제도의 부족한 부분이 있어요.”

그는 전보다 살림이 나아진 한국에 한 가지 부탁을 했다. “한국도 독재시대를 거쳐 피땀 흘려 민주주의를 이뤘잖아요. 그때의 아픔과 배고픔을 아는 민족인데, 왜 힘들어하는 나라 사람들에게 손길을 내밀지 않는지 안타까워요.” 공존을 위한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터뷰를 끝내며 그에게 인권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소모뚜는 ‘인권’보다는 ‘사랑’을 먼저 얘기했다.

“사랑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남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남도 그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원해요. 이주민에게도 가족이 있고, 모두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지요. 그런 서로를 위해 배려하고 사는 것, 그게 인권 아닐까요?”

소모뚜를 만난 날은 그가 다니는 성공회대 노동대학 수료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는 노동자의 삶이 정치·경제적으로 사회와 분리된 게 아니므로 우리 삶을 배웠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 상반기 노동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대학원 공부도 할 생각이다. 지금 하는 활동을 더 열심히 하기 위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12/27 21:54 2010/12/27 21:54

MWTV 이주노동자방송국 소모뚜 대표

고단한 이주노동자의 삶을 통해 사람의 향기를 느끼다

 윤보중 기자    bj7804@nate.com

이주노동자의방송 MWTV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만든 방송국이다.

2004년 고용허가제 도입을 앞두고 한국 정부는 외국인 이주노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강제추방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에 많은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명동성당과 성공회성당을 거점으로 농성 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여기에 참여했던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만든 방송국이 MWTV이다.

당시에는 시민방송 RTV 제작진이 이주노동자들에게 함께 활동할 것을 권유했고, 촬영이나 취재 경험이 부족한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누비며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는데 주력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점차로 실력도 향상되고,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위한 전문방송의 필요성을 절감한 이들은 이주노동자 목소리를 전달하고 한국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전문방송국 설립에까지 이르게 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MWTV 이주노동자방송국은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한국 사회의 이질감을 허물고, 소수자의 인권 향상과 불평등을 철폐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버마 출신 이주노동자 소모뚜는 버마 출신의 소띠하와 네팔 출신 강라이, 미누 등과 함께 ‘스톱 크랙 다운’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활동하는 한편, 버마인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조직된 사회단체 버마행동에서도 활동했다. 그의 활동 영역은 문화 운동에서 인권 운동까지 외연을 넓혀갔고, 지난 2009년에는 MWTV의 대표직을 맡아 방송국 운영도 하게 되었다.

과정에서 그의 친구, 동료들이 표적 단속 등으로 강제 추방되는 일이 빈번했고 그 때문에 초창기에 함께 활동했던 이들도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됐다.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스톱 크랙 다운의 리드 보컬이었던 미누도 강제추방 되었다. 소모뚜는 그동안 마웅저, 아웅틴 툰과 같은 유명한 버마 출신 활동가들과 함께 난민지위 획득을 위한 법적 투쟁을 전개했고 2심까지 승소한 상태지만, 여전히 정부의 완고한 태도 때문에 대법원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주노동자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버마 출신의 아웅틴 툰의 소모뚜의 생일을 맞아 자신의 요리 솜씨를 선보이고 있다. 닭뼈를 제거하고 마늘과 양파, 찹쌀을 이용해 튀긴 통닭은 고소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민중의소리

소모뚜는 12월 10일 세계 인권 선언 62주년을 맞아 국가인권위로부터 인권상을 수여 받을 예정이었다. 그가 한국사회의 인권 향상에 기여한 공로는 크다. 그는 주류 방송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불평등한 처우와 비인간적인 현실을 노래와 방송 등으로 고발하고 폭로하는데 앞장서 왔다. 이는 대외적으로 ‘다문화 사회’를 표방하고 여러 민족, 인종과 어울려 살아가려는 한국 사회의 노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에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이질적인 존재로 남기 보다는 서로 이해하고 벽을 허물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데 주력해왔다. 그는 인권위와 함께 이주노동자 순회상담에 참여하며 실무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현장에서 오랫동안 쌓아온 그들만의 소통 법은 인권위 직원들이 이주노동자를 상담하는데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그의 이런 활동이 인정됐기 때문에 국가인권위 또한 그에게 상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국가인권위와 협력하며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위한 활동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동안에도 상황은 이상하게 꼬여만 갔다. 이주노동자 영화제를 지원했던 국가인권위원회 관계자들이 어느 날은 그들에게 한국 사회에 너무 간섭하지 말라는 투의 상식 밖의 발언을 하고 나섰다. 사실상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사회활동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낸 셈이었다.

그를 인권상 대상자로 추천했던 인권위 관계자는 더 이상 인권위에 존재하지 않았고, 인권위 상임위원과 전문위원들이 대거 사퇴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마저 발생했다. 논란의 중심에 선 현직 국가인권위위원장의 태도를 비판하는 인권운동가들의 요구는 정치권과 전 사회로 확대돼 국가위원장 사퇴를 촉구하는 목소리는 압도적인 여론으로 형성됐다.

결국, 소모뚜는12월 10일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열리는 인권위 시상식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외국인 이주노동자에게 처음으로 주어지는 인권상이었다. 더욱이 12월 9일은 소모뚜의 생일이기도 했다. 수유너머 건물에서 같은 층 식구들과 모여 조촐한 생일파티를 열었던 소모뚜는 생일 케이크를 나눠먹던 중에 자신을 바라보는 동료와 지인들에게 말했다.

“제가 내일 인권위에서 수여하는 인권상을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저는 한국에 인권위가 있다는 사실이 부럽습니다. 왜냐면 나의 조국 버마에는 그런 기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정치상황이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버마의 인권 상황은 정말 열악하죠. 저도 하루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 인권위를 만들고 우리 국민의 인권 향상을 위한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국가인권위의 상을 거부하는 것은 국가인권위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원하는 것, 그리고 인권위가 주는 상이란 것도 결국은 우리의 인권을 증진시키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인권상을 거부하는 것은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그것이 우리의 인권을 옹호하는 것이고, 우리는 상을 받기 위해 인권운동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와 통하고 싶었던 지난 15년의 세월이 소모뚜의 말 속에 담겨 있었다. 즐겁고 유쾌하던 생일 파티에서 잠시나마 숙연한 분위기가 흘렀다. 하지만 상을 거부하는 행위가 인권을 증진시킬 거라는 그의 확신만큼, 다시 즐거운 시간이 계속됐다. 그리고 그는 생일파티에 참석한 여러 사람들에게 내일 꼭 참석해달라는 당부를 빠뜨리지 않았다.

12월 10일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열린 인권시상식에는 많은 수상자들이 상을 거부하고 불참했다. 심지어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이 상을 수여하려 하자 그의 사퇴를 촉구하는 현수막을 펼쳐 보이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국가인권위원회 건물에서는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유인물이 뿌려졌고, 국내의 저명한 인권운동가들이 모여 그의 사퇴와 인권위 정상화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자리에서 소모뚜는 인권상 수상 거부자로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국가인권위 위원장의 양심에 호소하면서 “한국민의 요구가 무엇이고 인권 향상을 위해 애써온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무엇인지 거기에 귀 기울이면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여전히 국가인권위에 대한 애정과 지지를 피력했다. 그는 상을 거부하는 그 순간이야 말로 국가인권위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국가인권위 인권상 거부한 이주노동자방송국 소모뚜 대표

이주노동자방송국 대표인 소모뚜가 국가인권위의 인권상 수상을 거부한 사연을 전하고 있다. 세계인권선언 62주년에 맞추어 진행된 국가인권위 인권상 시상식은 많은 수상자들이 상을 거부하며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국내의 많은 인권운동가들은 물론, 정치권까지도 국가인권위 현병철 위원장의 부적절한 언행과 행동때문에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민중의소리


MWTV는 방글라데시, 네팔, 버마, 몽골,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러시아, 베트남 등지에서 온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모여 한국인과 함께 운영하는 방송국이다. MWTV는 2011년에는 고발과 폭로만이 아니라,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는 방송도 늘려나갈 예정이다. 이외에도 그 동안 꾸준히 벌여온 이주노동자 미디어 교육, 이주노동자 영화제와 같은 문화 활동도 확대할 계획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정부에 비판적인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지원금이 대폭 줄었고, 이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MWTV도 영향을 받았다. 겨우 후원금으로 유지되고 있지만, 사무실 임대료나 방송 제작 비용에 들어가고 나면 활동가들에게 활동비를 지급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자원활동가들의 참여가 점차로 중요하게 제기되고 있지만, 내실 있는 방송국의 운영을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후원과 관심이 절실한 실정이다.

소모뚜는 올 한 해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손이 잘려나갔지만 농장에서 일하기 때문에 산재 인정이 되지 않는 한 우즈베키스탄 노동자의 이야기와 고용허가제의 폐단으로 인해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채 비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베트남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소모뚜의 15년. 한국 사회는 참 많이 변했다. 농촌에는 이주결혼여성들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그들이 나은 자녀들이 성장해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해가고 있다. 북에서 온 주민들도 점차로 그 수가 증대하고 있고, 외국에서 온 동포들도 꾸준히 그 수가 늘고 있다. 외국인 이주노동자 사이에서 태어나 피부색은 다르지만 엄연히 한국인으로 자란 외국인 이주노동자 2세대도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살과 피를 가진 인간, 꿈과 사랑을 간직한 이들이 단지 피부색이 다르거나 언어나 문화적인 이질감 때문에 언제까지나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해 우리 사회는 이제 진중한 답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 여기 그들과의 벽을 허물려는 소모뚜의 작은 노력을 남겨본다.

“우리는 자신이 보낸 돈을 쓰며 잘 지내고 있다는 행복한 모습이 담긴 가족의 사진을 보고 불법체류자로서 타국에서 겪고 있는 다양한 고통을 견딥니다. 가족들도 서로 못 보지만 가족을 위해서 고생하는 불법체류 이주노동자에게 늘 감사하며 늘 건강하기를 매일 기도해주며 삽니다. 서로를 위해서 서로가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입니다. 서로를 감사하며 서로를 더 그리워하며 서로를 더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에게서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과 책임지려는 의지를 배울 수 있고 남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려는 인간다운 사람의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윤보중 기자 bj7804@nate.com>민중의소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12/14 14:11 2010/12/14 14:11
Tag //

[김석종이 만난 사람]버마출신 이주민 인권운동가 소모뚜

 

‘이주노동자의 방송’ 대표이자 이주 노동자밴드 ‘스톱 크랙다운’의 리더인 소모뚜는 “항상 나 자신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인권’이라고 말한다. | 김세구 선임기자 k39@kyunghyang.com

ㆍ“이주자가 평화로워야 한국도 성숙… 상이 아닌 인권을 달라”

“너무 너무 창피합니다.” 버마 청년 소모뚜(35)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자가 “버마 독재자 탄슈웨가 영국의 축구팀 맨체스터유나이티드를 인수하려고 했던데…”라고 말을 꺼냈던 것이다.

소모뚜는 40년 넘게 군사독재와 정치적 탄압이 이어지고 있는 ‘최악의 인권국가’ 버마에서 온 미등록 이주노동자다. 그런 그가 2010년 말 대한민국 정부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와 대표적인 민간 인권단체인 한국인권재단에서 동시에 인권상 수상자로 뽑혔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주는 대한민국인권상 ‘인권표창장’은 거부해버렸다. 한국인권재단이 주는 ‘인권홀씨상’만 받겠다고 했다.

그는 지난 8일 약속시간보다 1시간 늦게 신문사에 나타났다. 그가 순박하게 웃으며 내민 명함에는 여러 개의 직함이 적혀 있다. ‘이주노동자의 방송’ 대표 겸 PD, 버마 민주화를 요구하는 ‘버마행동’ 한국 총무, 다국적 노동자밴드 ‘스톱 크랙다운’의 리더(보컬·작곡·기타리스트), 이주민 인권강사….

‘바쁘다’는 그의 말은 빈말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는 이주노동자들의 ‘스타’다. 부르는 곳이 너무 많다. 다문화 행사장, 축제현장, 시민단체의 공연행사, 다문화교육현장 등에서는 기타, 마이크, 카메라를 든 소모뚜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날도 그는 두 곳의 방송국과 인터뷰를 했고, 자신이 진행하는 방송프로그램을 녹화했다. 이주노동자의 방송 제작회의까지 참석하느라 서울과 인천을 두 번이나 오갔다. 올해 들어 처음 서울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한국 사회와 이주자 사이의 벽을 없애 보자는 거죠. 피부색과 문화가 달라도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희망으로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말을 아주 잘했다. 발음과 종결어미가 약간 부정확하긴 해도 말뜻을 조리 있게 전달할 줄 아는 데다 어휘력도 상당했다. 

-‘인권홀씨상’ 수상을 축하한다. 상금은 어떻게 쓸 계획인가.

“이 상을 개인적으로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 옆과 뒤에, 많은 동지들과 단체, 조직이 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더 많은 사람들이 외국인 노동자 인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기쁜 마음으로 상금 전액을 소수자 인권운동에 쓰려고 한다.”

-인권위의 상까지 받았으면 더 많은 상금을 좋은 일에 쓸 수 있지 않나.

“상은 누가 주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인권위원장(현병철 위원장)이 주는 상은 인권상다운 인권상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아쉽지만 받지 않기로 했다.”

-그동안의 활동을 인권상으로 평가받은 소감이 어떤가.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면 난민 지위가 인정될 텐데 왜 한국정부 미움을 받느냐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보고 외면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단속 과정에서 이주노동자가 죽거나 다치고 있다. ‘노동권’이 보장되지 못하고 임금체불도 줄어들지 않았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일은 나를 위해 싸우는 일이다. 그것이 내 양심이고 사상이다. 그런 점을 인정받고, 평가받았다고 생각한다.”

소모뚜는 15년 전 관광비자로 한국에 왔다. 스무 살 때였다. 김포의 박스공장에서 8년 동안 일했다. 열심히 한국어를 익혔다. 5개월 만에 웬만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하루 15시간의 고된 노동을 묵묵히 견디며 주임까지 승진했다. 늦게 입사했지만 먼저 계장이 된 한국인이 ‘미안하다’고 사과할 정도로 숙련된 일꾼이었다.

-외국인 노동자로 어떤 고통을 받았나.

“나는 운이 좋았다. 한 번도 단속반에 붙잡힌 적이 없다. 심지어 단속반원들이 다른 친구들을 잡아가면서도 나는 그냥 지나쳤다. 내가 한국사람처럼 생겨서 그런가. 아니면 전생이 한국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하하.”

-그런데 왜 활동가로 나서게 됐나. 

“우리가 한국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아무도 하지 않는 밑바닥 일을 하고 있다. 1997년 외한위기 때는 우리도 월급을 반만 받아가며 일했다. 2002년 월드컵 때는 ‘대한민국~’을 목 터져라 외쳤다. 그런데 2003년 한국정부가 이주노동자를 강제추방하겠다고 발표했다. 불법체류자 단속이 시작되면서 목숨을 끊는 친구들이 있었다. 충격을 받았다. 내가 차별당하지 않고, 크게 다친 적 없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서울 태평로 성공회대성당 농성장으로 갔다.”

소모뚜는 당시 인천지역의 버마 동료들과 함께 최초의 ‘이주노동자 밴드’인 ‘유레카’를 결성해 음악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멤버 가운데 몇 명은 단속에 걸려 추방당했고, 몇 명은 직장으로 숨어버렸다. 그는 혼자 남았다. 쫓겨나더라도 싸우다가 쫓겨나자는 결심을 했다. 농성장에서 유레카의 게스트로 자주 노래를 불렀던 ‘미누형’을 다시 만났다. 지난해 10월 강제 추방당한 네팔인 이주노동자 미누, 바로 그 미노드 목탄이다.

농성이 1년 동안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밴드를 만들었다. 멤버는 미누(보컬)와 소모뚜(기타), 소띠하(버마·베이스), 해리(인도네시아·키보드), 그리고 한국인 송명훈(드럼)이었다. 농성장에서 목 터져라 외쳤던 구호, ‘스톱 크랙다운(Stop Crackdown·단속을 멈춰라)’은 그대로 밴드 이름이 됐다. 그 후 미누와 해리는 강제출국됐다.

-언제부터 기타를 치고 음악을 했나.

“버마 젊은이들은 누구나 기타를 칠 줄 알고 노래를 잘 부른다. 한국에 와서도 휴일이면 버마 친구들과 기타를 치며 어울렸다. 어느해 부천외국인근로자센터에서 이주민을 위한 크리스마스 잔치를 열었다. 버마, 네팔, 인도네시아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해 인기를 끌었다. 센터 사무국장이 권해서 만든 밴드가 유레카다. 스톱 크랙다운은 지금까지 2집 앨범을 냈다. 1집 앨범의 ‘와’와 2집에 실린 ‘월급날’이 꽤 알려졌다. 음악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이주노동자의 방송은 어떻게 시작했고, 어떤 방송을 하고 있나.

“2003년 농성 당시 시민방송 RTV에서 ‘무한자유지대’라는 제목으로 이주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그 후 시민방송에서 이주민들이 직접 이주노동자의 목소리를 내는 방송을 제안했다. 시민방송 사무실 안에 책상을 내줬다. 방송을 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의 어려운 현실과 노동의 권리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지금까지 이주민과 관련된 다큐멘터리와 이주민 뉴스 등을 제작, 방송하고 있다.”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현 정부 들어 시민방송에 대한 정부 지원금이 끊겨 상황이 어렵다. 그래도 시민방송이 제작비 일부를 지원해준다. 사무실은 후암동 수유너머 연구소에 의지하고 있다. 이런 지원과 정기 후원자들의 후원금으로 운영하지만 항상 적자다. 언제까지 방송을 계속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미등록 이주자인데 어떻게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나.

“버마 민주화운동으로 조국에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한국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다. 아직 난민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재 ‘인도적 지위 체류허가’ 비자를 받은 상태여서 당장 추방당할 염려는 없다. 지난달 3일에는 ‘난민인정 결정 불허결정처분 취소’ 청구소송 2심에서 승소했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그 이유가 뭔가.

“보통 2심에서 승소하면 난민 지위가 인정된다. 그런데 법무부에서 대법원까지 가겠다고 한다. 3년 전 여수외국인보호소에 화재 사망사고 때 다른 인권단체들과 함께 성명서를 냈다. 법무부 인권 담당자와 난민실 관계자가 ‘버마 민주화운동에 전념하지 않고 한국정부를 반대하고 한국 사회를 흔드는 활동을 하기 때문에 난민 신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이주민이 인권침해당하는 것을 보면서 침묵할 수는 없다. 난민 자격보다 인권이 먼저다. 앞으로도 일이 생기면 항상 앞장설 거다.” 

그는 “얼굴에 오물이 묻어 있다고 알려주는 사람에게, 그것을 닦지는 않고 말해준 사람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격”이라고 비유했다. 

-버마 민주화를 요구하는 ‘버마행동’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버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한국의 단체들과 함께 ‘프리버마’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매월 마지막주 화요일 한남동 버마대사관 앞에서 집회와 기자회견을 한다. 버마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단체들과도 연결돼 있다. 2007년 샤프론 민주항쟁 때는 한국의 도움으로 우리가 재정적 지원을 많이 했다. 우리는 한국의 민주화 역사를 존경하고,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배우고 있다.”

소모뚜는 15년 동안 한 번도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한국에서 돈을 버는 대로 모두 부모님께 송금을 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어머니는 아들의 송금 덕분에 양곤 시내 셰다곤 사원 근처에 살고 싶은 평생 소원을 이뤘다. 두 여동생도 모두 대학을 마쳤다. 지금은 영국과 말레이시아에 살고 있다.

-가족들을 한 번도 못 만났나.

“항상 부모님이 보고 싶다. 마음이 약해질까봐 사진도 잘 보지 않는다. 영국에 사는 동생이 지난 4월 한국에 다녀갔다. 동생을 경복궁에 데려가 한복을 입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동생은 시민권까지 받았고, 영국 생활이 행복하다고 했다. 나는 너무 창피하고 부러웠다. 그날 나는 한국에서 소수자가 행복하게 사는 날을 만드는 데 앞장설 것이라고 동생에게 약속했다.” 

-네팔로 떠난 미누와 연락은 하고 지내나.

“페이스북, 전화, 인터넷으로 소식을 주고받는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하나다. 미누형은 네팔에서 외국인으로 살고 있다고 농담을 한다. 한국에서 18년을 살았기 때문에 오히려 네팔 생활이 낯설다는 뜻이다. 그만큼 한국을 그리워한다. 요즘은 네팔코리아닷컴이라는 사이트를 만들어서 한국과 네팔 사이에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시작했다. 잘됐으면 좋겠다.”

소모뚜는 농성 후 서울 가리봉동 소화기 부품 공장에서 6년을 일했다. 지난해 미누가 추방될 때 해고됐다. 지금은 이주노동자의 방송 상근자로 월급 90만원을 받는다. 집은 가리봉동의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11만원짜리 ‘쪽방’이다. 다행히 강연이나 공연으로 조금씩 돈을 받기 때문에 버마에 계속 송금도 하고 있다.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돈 쓸 일이 거의 없다. 그래도 노래방에 가면 진짜 잘 논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를 즐겨 부른다. 가사가 너무 좋으니까. 나는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부자라고 생각하며 산다.”

-한국 생활이 행복한가, 불행한가.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조금 더 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 기쁘다. 부당하게 월급을 못 받는 친구, 사업장에서 폭행당하는 친구들이 도움을 요청하고, 그런 문제를 해결했을 때 행복하다. 강연이나 노래를 듣고 한국분들까지 호응해줄 때 눈물이 날 만큼 행복하다. 지금의 활동을 하지 않았으면 행복하지 못했을 거다.”

-당신이 생각하는 인권은 무엇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도 싫어한다는 것,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인권이다. 항상 나 자신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문화’가 중요한 키워드가 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 하고 싶은 말은?

“동남아 이주여성들이 한국 농촌의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해주고 있는 것 아닌가. 그들은 단순히 출산하기 위해 한국에 온 사람들이 아니다. 서구인은 동경하고, 동남아인은 무시하거나 범죄자 취급하면서 무슨 다문화사회인가. 관청이 주도하는 축제나 행사도 필요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다양한 사람이 함께 어울려 서로의 꿈을 감싸줄 때 다문화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주자의 삶이 평화로워야 한국 사회도 성숙해질 거라고 믿는다.”

-언제 버마로 돌아갈 것인가.

“버마가 변했을 때. 나는 한 번도 내 조국을 잊은 적이 없다. 내가 한국에서 배운 것들을 조국에서 실천하고 싶다. 버마 반정부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돌아가면 체포되어 감옥에 가게 될 것이다. 민주화가 되지 않으면 못 돌아간다.”

-당신이 꼭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

“건강한 몸과 건강한 정신으로 활동을 계속하고 싶다. 내 활동이 헛된 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러면 어떤 시련에도 실망하거나 지치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이 가장 큰 희망이다. 버마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돌아가서 복지와 관련된 분야에서 활동하고 싶다.”

“밍글라바!” 그가 ‘축복받으세요’라는 뜻의 버마어 인사말을 남기고 함박눈을 맞으며 돌아갔다. 

(소모뚜는 인터뷰 이틀 뒤인 10일,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상 시상식장에서 당당하게 인권표창장 ‘수상거부 소감’을 밝히고 있었다. “우리들이 원한 것은 상이 아니라 인권입니다”라고.)


▲ 소모뚜는 누구

버마의 엘리트 학생… 다문화 인권 활동가로 변신


소모뚜는 버마 수도 양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국영제지회사 공무원, 어머니는 학원의 교사였다.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다. 소모뚜는 7세 때부터 해마다 3개월씩 일곱 차례나 삭발하고 출가했다. 그는 “출가해서 불교 경전 공부를 했는데, 인간답게 사는 길과 선행의 가르침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며 “한국에 오지 않았으면 스님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8년 8월8일 전국적으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13세이던 그도 부모님을 따라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로 나갔다. 군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선거를 치렀다. 선거에서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겼지만 정권은 이양되지 않았다. 시위에 참가한 시민·학생들은 검거되고 학살됐다. 그의 아버지는 해직됐고, 가족은 삼엄한 감시를 당했다.

그는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버마는 성적 순으로 의대, 공대생을 선발한다. 그는 “내가 그만큼 공부를 잘했다”며 웃었다. 그러나 집안형편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밥값도 못하면서 학교에 다니는 것이 부끄러웠다고 한다. 그는 “부모님과 두 여동생을 위해 이번 생은 없는 것으로 하겠다고 결심하고 학교를 그만뒀다”고 말했다.

당시 그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스님이 있었다. 1995년 3월 세미나 참석차 한국에 오게 된 스님을 따라왔다. 그도 한국에 대한 동경과 호감을 갖고 있었다. 먼저 와서 자리를 잡은 버마 사람들의 도움으로 불법체류자 생활을 시작했다.

2003년 정부의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에 맞서 농성을 벌인 이후 ‘활동가’가 됐다. 지금은 이주노동자와 다문화 인권 강사로 각종 집회, 행사의 강단에 서고 있다. 경인방송에서 매주 금요일 방송되는 <다문화 톡톡>을 진행한다. EBS 라디오에서는 버마 음악을 소개하고 있다. 위클리수유너머에 칼럼 ‘밍글라바코리아’를 연재한다. 매주 월요일에는 성공회대 민주사회교육원이 운영하는 노동대학에서 강의를 듣는 학생이기도 하다.


<김석종 문화에디터 sjkim@kyunghyang.com>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12/14 13:08 2010/12/14 13:08
Ta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