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년 사개월. 찬드라는 행색이 초라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고를 당했다. 한국인과 닮은 네팔인 찬드라는 한국말을 하지 못한다. 경찰은 찬드라가 의사소통이 어려운 정신병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정신병원으로 보낸다. 그리고 육년 사개월, 찬드라에게 관심을 가졌던 한 재활병원의 선생님에 의해 네팔인임이 알려져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주민에게 말을 건네는 소리

 

이주민 100만명 시대. 이제 한국은 더 이상 단일 민족 국가가 아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외국인을 만날 수 있고, 많은 이들은 이주민이고 동시에 이주노동자이다. 이제는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할 때. 그들이 한국에 살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일까?

찬드라의 이야기는 다큐멘터리와 에세이집 <말해요, 찬드라>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야기는 그들이 한국에 처음 와서 겪게 되는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말, 언어의 문제다. 이주노동자의 방송 MWTV는 한국이 낯선 이주민들에게 말을 건넨다. 그리고 그들의 소리를 직접 카메라에 담아 전한다.

 

 

 

 

MWTV는 한국의 뉴스와 이주민들의 고국에서 일어나는 뉴스 그리고 한국의 이주민과 관련된 법이나 생활에 대한 정보들을 그들의 언어로 전달한다. 총 10개국의 언어로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다국어뉴스를 제공하고, 그 밖에 소식들은 한국말을 통해 수시로 뉴스를 제작한다. 2005년 8월부터 RTV를 통해 <다국어 이주노동자뉴스>와 <이주노동자 세상>을 제작해왔지만, 작년 방송통신위원회의 제작 지원 중단으로 올해는 인터넷 뉴스만을 제작하고 있다.

 

 

 

 맛있는 짬뽕의 축제, 이주노동자 영화제

 

MWTV는 독립 언론으로서 역할을 함과 동시에, 이주민들을 위한 교육과 행사도 함께 하고 있다.

영상 아카데미를 통해 이주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카메라에 담고 편집할 수 있는 영상 교육을 꾸준히 해 오고 있다. 교육생들은 직접 뉴스 영상을 제작하는 교육을 받고, 영상은 MWTV홈페이지에 소개된다.

 

 

이주노동자 영화제는 올해로 4회를 맞이했다. 이주노동자 영화제는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주노동자의 삶을 이야기하고, 해외의 이주민 이야기도 함께 전한다. 이번 영화제의 슬로건은 ‘짬뽕이 좋아!’이다. 어느 한 나라만의 문화나 특징을 뛰어넘어, 이주를 통해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고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즐거운 에너지를 내뿜는 ‘짬뽕’의 축제를 만들겠다는 것! 7월 17일부터 3일간 서울 명동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다. 이달 26일부터 9월 13일까지 두 달에 걸쳐서는 진주, 마석, 부천, 익산, 안산, 김포를 잇는 지역상영전이 열릴 예정이다.

 

 

100만 이주민의 소리를 전하는 기자들

 

오늘도 MWTV의 기자들은 카메라를 들고 전국을 누빈다. 이주노동자이기도 한 이들은 평일에는 각자의 일터에서 일을 하고, 일이 끝난 저녁이나 주말이 되면 카메라를 들고 기자가 된다. 열정과 희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 여기에 4명의 무급 상근활동가도 이들과 함께 한다. 이들의 열정에 힘차게 박수를, 그리고 지지의 후원을 ~!
 


 


 

 

 

 제4회 이주노동자영화제 ‘짬뽕이 좋아’가 궁금하다면

 * 누리집 방문 : http://www.mwff.org/

 

 * 영화제는 올해, 정부의 지원 중단으로 재정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후원을 위한 다음 아고라 서명은 이 곳에서 하실 수 있습니다.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donation/view?id=76442

 

 

 * 후원: 우리은행 1005-501-291537(이주노동자의 방송)

 

 

 

 MWTV에서 1기 기자단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자, 이곳으로~! 

 

 http://www.mwtv.kr/bbs.html?Table=ins_bbs17&mode=view&uid=37&page=1&section

 


 

[이주노동자의 방송 MWTV]

* 주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2가 1-206(4층) (140-833)

* 전화 : 02-776-0416

* 팩스 : 02-776-0455

* 이메일 : mwtv@hanmail.net

 

* 누리집 : http://www.mwtv.kr/

 

 

* 후원방법: http://www.mwtv.kr/etc_info.html?etc_ui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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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3 20:27 2009/07/13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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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노래는 멈추지 않는다
이주노동자 밴드 스탑 크랙다운(Stop crackdown)

 

강곤 | 기자

토요일 저녁시간에 비까지 한차례 쏟아진 터라 도심교통은 말이 아니었다. 급한 마음에 택시를 잡아타고 홍대로 가자고 했더니 기사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오늘 내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곡예운전을 시작한다. 생각해보니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도 있고 외국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기도 하는데 나는 아직껏 이주노동자가 모는 택시를 타본 적이 없다. 짐작컨대 택시운전이 아직은 괜찮은 직종이어서가 아니라 이 땅 이주노동자들의 처지가 빠리나 뉴욕 같은 데에 비길 바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솜씨 좋은 기사 덕분에 약속시간에 얼추 맞춰 홍대전철역 근처 삼겹살집에 도착했다. 다행이 스탑 크랙다운 멤버들도 하나 둘 모이고 있는 중이었다.



5인조 다국적 이주노동자 밴드


Stop crackdown! 흔히 ‘단속추방 반대’로 번역된다. 이주노동자의 집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어쩌면 세계에서 ‘Stop the war!’와 함께 가장 널리 애용되고 있는 이 만국공용의 구호를 당당하게 단체이름으로 걸고 있는 이주노동자 밴드, 스탑 크랙다운은 네팔에서 온 미누와 인도네시아에서 온 해리, 버마 출신 소모뚜와 소띠아, 그리고 한국인 송명훈으로 구성된 5인조 다국적 밴드다.


굳이 이주노동자 집회가 아니어도 다양한 투쟁현장에서, 그리고 각종 문화제에서 이들을 만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공연을 제외한 일로 다섯 명을 한 자리에 불러 모으기란 쉽지 않았다. 오늘의 만남도 겨우 자투리 시간을 얻어 마련한 자리다.


“지난 11월 4일 울타리 없는 노래콘서트에서 ‘버마를 위한 기도’라는 공연을 했어요. 오늘은 그날 수고해준 사람들과 같이 밥도 한 끼 하고, 그날의 공연 수익금을 버마국민운동촉진위원회에 전달하는 날이죠. 또 지난주가 소띠아 아들 돌이었어요. 늦었지만 축하도 해줘야지요.” 드럼을 맡고 있는 명훈은 막내이자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본의 아니게 밴드에서 매니저 역할을 맡고 있다.
‘울타리 없는 노래콘서트’는 스탑 크랙다운이 매년 해오고 있는 정기공연으로 “군부독재와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버마 민중들을 위해 힘닿는 대로 뭐든지 해야겠다”는 멤버들의 생각이 모아져 기획된 콘서트였다. 기타를 맡은 소모뚜는 버마 출신일 뿐만 아니라 이번 버마 민주화운동 상황을 한국에 널리 알리고 다양한 지지, 지원을 조직했던 단체, 한국에 있는 버마출신 이주노동자들의 모임인 ‘버마민중학살규탄과 민주화운동지지 긴급행동(버마액션)’에서 활동하고 있다. “버마 민주화운동은 끝나지 않았어요. 지금 나서면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잠시 움츠리고 있는 거죠. 버마 민주화 운동은 계속 될 거예요. 결국 버마는 승리할 겁니다.” 버마 상황을 전하며 소모뚜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끝을 맺는다.
왼쪽부터 베이스 소띠아, 기타 소모뚜, 건반 해리, 드럼 송명훈, 보컬 미누. 사진 | 강곤



농성장에서 지어진 이름, 스탑 크랙다운!


스탑 크랙다운은 2003년 겨울, 정부의 광기어린 단속과 강제추방에 맞서 이주노동자들이 농성을 했던 서울 태평로의 성공회대성당에서 결성되었다. 한국에 온지 14년째인 보컬 미누는 농성 중에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노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민중가요도 부르고 공연도 하는데 우리 이주노동자들에게 딱 맞는 노래가 없어요. 몇 명이 모여서 우리가 직접 연주도 하고 노래도 하자고 했죠. 소모뚜도 그 전에 유레카란 밴드를 했었고. 그래서 밴드가 그 자리에서 결성이 되어버렸어요. 이름을 뭐로 할까 하다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가장 절실한 문제였으니까 강제추방 중단하라! 스탑 크랙다운으로 되었죠.”


다섯 명의 멤버들은 락(Rock)이라는 공통분모 위에 있지만 약간씩 음악적 취향이 다르다. 출신국가가 다른 만큼 문화적 차이도 있을 것이다. 명훈은 그것이 스탑 크랙다운만의 장점이라고 한다. 나이는 비밀이라는 밴드의 맏형 미누도 “우리 음악이 락이지만 뭐랄까, 냄새가 좀 달라요. 말할 수 없는 독특함이 있어요. 동양적인 냄새를 풍기는 락이라구 해야 하나?”라며 거든다.


지난 2004년 그 말 많았던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 20주년 기념공연에 참여해 부른 ‘손무덤’은 스탑 크랙다운의 대표곡이 되었다. 당시 노동자 문예운동을 박제화하고 상품화했다는 비판이 들끓었던 이 공연에 그나마 20년 전 한국 노동자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함께 했기에 면피가 되었다는 평을 읽은 적이 있다. “밴드 이름이 워낙 강하다보니 방송국에서 섭외를 하면서도 어려워해요. 너무 강한 노래는 부르지 말아달라고 대놓고 주문을 하는 경우도 있고. ‘손무덤’은 안 된다고 해서 출연을 접은 적도 있어요.” 명훈은 그와 같은 검열과 개입은 절대 용납할 수 없지만 사실 1집 앨범이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대변하다보니 무겁고 대중적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 그래서 더욱 정성을 기울인 2집 앨범이 지난 6월 제작되었다.


사실 공연도 그렇지만 음반 제작도 쉬운 일이 아니다. 미누와 함께 작곡을 하고 있는 소모뚜는 “이메일로 작곡한 것을 보내면 서로 의견을 말하고 덧붙이고 해서 노래를 만든다”고 창작 과정을 설명한다. 연습도 공연 당일 리허설에서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꽤나 유명하다는 대중음악 밴드들도 살림이 어려워서 해체와 결성을 반복하고는 한다는데 이들이야 오죽할까. 명훈은 “2집 앨범은 그동안 공연에서 받았던 출연료를 걷어서 만들었어요. 많이 팔아서 그 수익금을 다시 나눠야죠.”라며 그나마 밴드활동에 개인적인 비용 부담이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한다.



가장 인상 깊은 건 한국사람?


10년 동안 봉제공장 등에서 한 번도 쉬지 않고 일을 해온 미누는 현실에 저항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은 물론 “이주노동자의 현실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쉽게 다가설 수 있을까”하는 것이 요즘 고민이다. 그는 밴드 활동 외에 캠코더 촬영에 열심이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직접 발언하기 위해 만든 ‘이주노동자의 방송(MWTV)’에서도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2005년 밴드에 결합하여 건반을 맡고 있는 해리는 다니던 공장에서 해고된 뒤 노동운동의 소식통인 노동네트워크에서 웹디자인을 하고 있다. 스탑 크랙다운의 홈페이지도 해리의 작품이다. “웬만한 일은 다 자급자족”이라는 소모뚜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베이스를 담당하고 있는 소띠아는 컴퓨터 조립판매를 하고 있으니 밴드 구성원 모두 한 가닥씩 하는 재주꾼들인 셈이다.


2003년 농성장에서 자원활동을 하던 우선주 씨와 결혼한 소띠아는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이란 뻔한 질문에 “모든 공연은 다 감동적이죠. 특히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공연은 더….”라는 대답과 함께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공연장에서 한국인 스텝들이 자신들을 무시하고 차별할 때라고 한다. “야, 이리와 봐.” “이거 맞춰봐.” 그러면 한 ‘성질’ 하는 미누와 소모뚜는 “아저씨, 우리 반말하는 거 존나 싫어하거든.”하며 정색을 한단다. 그러면 대부분은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우거나 말을 돌린다. “안 그래도 시끄러운데 왜 남의 나라에까지 와서 그래?”하는 비아냥거림은 이미 익숙해졌다.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활동을 하니까 좋은 한국 사람을 많이 만나죠. 하지만 공장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다 못 된 사람인 줄 알아요.”라며 해리는 “한국 사람들은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 이미지 관리를 잘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한편 소모뚜도 버마액션에 몸담고 있기는 하지만 “사장이 좋은 사람”인 탓에 지금도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주말에 밴드 활동할 시간을 보장해주는 대신 평일에 작업을 더 해주는 조건이니 사장이 크게 선심 쓰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음반이 나오면 구입해서 직원들에게 선물까지 한다고 하니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에서는 부러움을 듬뿍 살만한 행운이다.



어느새 삼겹살집은 하나 둘 모여든 버마 민주화운동 단체 사람들, 이주노동자 영화제에서부터 자원활동을 했던 대학생들, 스탑 크랙다운의 팬클럽이자 후원인들로 들어차 왁자지껄하다. 무슬림이어서 삼겹살을 못하는 해리의 주 메뉴인 계란말이가 늦자 소모뚜는 아주머니가 닭 잡으러 간 모양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한다.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 소띠아의 애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자 미누는 다들 소개를 시켰는데 애기는 왜 차별을 했냐고 사회를 보는 명훈을 타박한다. 버마 민주화를 위해, 스탑 크랙다운을 위해 건배가 잇따른다. 이미 12월 내내 주말마다 공연이 잡혀 있다. 밴드 이름을 바꾸는 날이 오기 위해 노래를 한다는 이들은 오늘의 힘으로 다시 무대에 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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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1 22:39 2009/06/01 22:39
[다문화가정] 우리가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   기본 처우부터 국적취득까지… 한국은 ‘좁은 문’   최영진 기자 yj7401@paran.com
 
올해로 13년 째 한국생활을 하고 있는 사누 파라자파티(39)씨는 네팔이 고향이다. 그는 현재 경기도 부천에 위치한 인도·네팔 전통음식점 ‘안나푸르나 레스토랑’을 한국인 부인 이금옥씨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빨간 티셔츠를 입은 두 사람이 밝게 인사를 한다. 피부색과 생김새는 다르지만 한눈에 부부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네팔에서 사업 실패로 많은 빚을 져 결국 돈을 벌기위해 한국행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누씨. 그는 96년에 산업연수생의 신분으로 한국에 들어와 주로 원단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36시간동안 잠 한숨 안자고 일했던 적도 있어요. 그렇게 일해도 사장은 월급을 잘 안 줬어요. 3개월 넘게 밀리기도 하고, 일부만 주기도 하고.” 지금은 괜찮다면서도 속상했던 이야기들을 계속 내어 놓는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를 많이 무시했어요. 입에 욕을 달고 살았고요. 툭하면 ‘야, 이 새끼야’했죠. 참 속상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오히려 우리가 그 욕을 그대로 배우기도 했어요.” 한숨 쉬며 말하는 사누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막말로 무시하고, 각종 차별 대우에 생존의 위협까지. 이주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또 다른 사례를 들었다. “택시를 타는데 외국인이라 그런지 일단 반말부터 하더라고요. ‘어디서 왔냐? 돈 많이 벌었어?’기분이 나빴지만 처음엔 그냥 넘어갔죠. 그런데 기사가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지도 않고 중간에 내리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가 아니라고 해도 시끄럽다며 내려서 걸어가라 하더군요. 그래서 세게 항의를 했죠. ‘당신 신고하겠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함부로 하지 마라’ 한국말을 꽤 하는 모습을 보곤 아무 말도 못하더라고요.”
 
 
그들이 한국에서 결혼 못한 이유

결혼생활이 궁금해졌다. 2000년에 아는 사람의 소개로 만났다는 사누씨와 금옥씨는 2003년에 네팔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으로 다시 왔단다. 당시 한국에서는 미등록 상태인 사누씨의 신분 때문에 혼인신고를 할 수 없었는데, 6개월 출국했다 들어오면 다시 올 수 있다는 어느 신문기사를 보고, 네팔로 나가 결혼해서 7개월을 살고 왔다고 한다. 한국에 다시 돌아와 2004년 11월에 레스토랑을 내고 5년째 살고 있다면서 결혼과정을 설명한다.
앞으로도 한국에서 계속 살아갈 거라는 사누씨는 아직 한국 국적이 아니다. 한국인과 2년 이상결혼생활을 하면 국적 취득을 신청할 수가 있어서 2년이 지나 신청을 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단다. 아직 자녀가 없는 탓에 위장결혼 의심을 받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은 자녀가 있어서 그런지 한국 국적이 나왔어요. 아이가 없다고 우리가 거짓으로 함께 사는 것도 아닌데….”
현재 사누씨는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되고 한국말이 서투른 사람들을 대신해 통역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자신이 겪었던 억울함을 다른 사람이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또 지역 내 단체와 함께 한 초등학교에서 네팔을 소개하는 교육을 맡기도 했단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누씨와 금옥씨 부부의 행복을 빌어 본다.
 
 
당신에게 소중한 자유는 우리에게도 소중하다

두 번째로 만난 소모뚜씨는 올해 34살이다. 그는 이주노동자 밴드 ‘스탑 크랙다운(stop crack down band - 탄압을 중단하라)’에서 기타를 치면서 버마행동 총무도 맡고 있다. 일터에서 퇴근하고 나온 그를 만났다. 인사를 하며 건네는 명함 위 ‘자유를 위해 노력하는 우리에게 당신의 자유를 나누어 주세요’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1995년, 스무살 때 한국에 들어왔다는 소모뚜씨에게 어린 나이에 한국에 오게 된 계기를 물으니 버마 군사정권하의 정치상황을 전한다. 숨도 쉴 수 없는 감시, 탄압 속에서 버마(미얀마)를 벗어날 기회만 엿보다가 한국으로 오게 됐단다.
소모뚜씨는 처음 8년 동안 김포에 있는 박스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는 군사정권하에서 살아와서 처음에는 노동이라는 것이 법에 의해 보장받는다는 생각을 못했단다.  “근무시간은 6시 반까지였는데, 매일 밤 10시까지는 거의 연장근무를 했어요. 사장 맘대로 새벽 1, 2시까지 일을 시키기도 했죠. 그런데 시급이 4,000원이라면 연장근무 할 때는 3,000원만 줬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 같지만 그때는 몰랐죠.” 그렇게 8년을 일하고 2003년 서울에서 있었던 이주노동자 농성 투쟁에 결합했다는 그는 지금은 다른 회사에서 5년째 일하고 있단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 싫어서 일을 배우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면서 지금은 실력도 있고, 인정도 받고 있다고 자부심을 내비쳤다.
소모뚜씨도 처음에는 다른 이주민들처럼 얼토당토않은 질문들을 많이 받았단다. “너희 나라 사람들은 옷은 입고 다니냐? 너희 나라에 해는 있냐? 달은 몇 개냐? 이런 식의 질문을 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농담으로 나뭇잎으로 옷 만들어 입는다고 그랬더니 진짜로 믿더라고요….” 그의 눈에 한국 사람이 어떻게 보였을까?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무시하고, 영어 쓰는 서양인들은 다가오기만 해도 겁내며 손사래를 치는 한국인들의 이중성이 느껴져 씁쓸했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불법과 합법의 경계

그는 지금 어떤 신분일까. “2005년 난민신청을 했는데 지난 9월에 난민신청을 받아줄 수 없다는 결과가 나왔죠. 물론 그렇게 나올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버마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는 거예요. 다만 버마 상황이 불안하니까 인도적 체류허가는 하겠다고는 했어요. 근데 버마상황을 누가 판단을 한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버마 상황이 호전되었다고 정부가 판단하면 우리는 쫓겨나겠죠. 우리는 여기서 쫓겨나면 정말 위험해요. 우리 입장을 누구 기준에서 판단한다는 건지….”
소모뚜씨는 현재 사귀고 있는 한국여성이 있다고 한다. “바빠서 만나지도 못해요. 지금 하는 활동도 열심히 해야 하고…”라며 계면쩍게 이야기 한다. 버마에 있는 가족과는 전화만 하고 14년 동안 만난 적이 없다는 그에게 한국은 앞으로 얼마를 더 살아야 할 지 모르는, ‘두 번째 고향 같은 나라’가 돼 가고 있다.
소모뚜씨는 고용허가제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그도 9년 동안 미등록인 상태로 생활했는데 예전에는 등록, 미등록의 차이가 그렇게 없었단다. 2003년 고용허가제가 실시되면서 살인적 단속, 인간사냥이 자행된 것이다.
고용허가제는 노동허가제와 달라서 회사와 1년 단위로 계약을 하고, 회사의 동의 없이는 직장을 옮길 수 없다. ‘입 닥치고 일이나 하라’는 식이다. 못 견디고 나오면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돼 버리고, 바로 ‘불법’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그 후엔 살인적인 단속, 그에 따르는 추방밖에 남지 않는다. 단속을 피해 도망가다 추락사 하는 등 죽어나가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지난 9월28일에는 버마 노동자가 출입국사무소에서 심장통증을 호소했지만 조치를 제대로 취해 주지 않아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고용허가제가 계속되는 한 한국사회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다. 그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부모에게 붙은 ‘불법’ 딱지는 바로 아이들에도 붙어버린다. ‘불법’이 되어 교육, 의료 등 모든 것이 사각지대에 내몰린 그들에게 삶은 전쟁이다.
 
 
피부색 다르지만 피 색깔은 모두 같아요

두 명의 이주민들에게 각각 한국인들에게 바라는 점을 물어보았다. 사누씨는 “지킬 건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월급 제대로 안 주는 사장들이 많아요.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지킬 것은 지켜야 하지 않나요? 한국 사람들 중에는 이주노동자들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 등이 더 심각해지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생각해 보세요. 한국 사람들, 대학생들 힘든 일 안 하려고 하지 않아요? 이주 노동자들, 한국 사람들이 안하는 정말 더럽고 위험한 일을 하고 있어요. 처음부터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 사람들을 부른 거 아닙니까. 싼 임금에 일 시키려고요. 외국 사람이라 피부색과 얼굴은 다르지만 피 색깔은 모두 같아요. 차별하고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많이 바뀌긴 했지만 인간답게 대우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소모뚜씨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인의 인식이 나빠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과 탄압이 심해서 그런지 한국인들에 대한 인식이 별로 안 좋아요. 한때 한국의 이주노동자 활동가가 네팔을 방문했는데 네팔사람들이 한국인이 왔다고 굉장히 분노했다고 해요. 그때 같이 있던 사람들이 나서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우리를 도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다’고 수습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인식이 안 좋아요. 배 타고 돌아다니는 선원들 사이에는 이런 이야기도 떠돌아요. 선원들이 러시아 등 현지에서 결혼하려고 하다가도 한국인이라면 결혼을 거절하더래요. 인정하고 싶건 아니건 이제는 정말 따로 살 수 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해요. 지금뿐 아니라 앞으로는 더욱 서로 도움을 줄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될 거에요. 우리 모두 서로 존중하고 이해했으면 좋겠어요. 서로 진정으로 친구가 되어야 해요. 한국인들도 이제 시야를 넓혀야 해요. 오히려 그게 한국을 위해서도 좋은 일 아닐까요?” 그의 마지막 물음에 대한 답을 내려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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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1 22:33 2009/06/01 2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