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민 삶이 나아지는만큼 한국인 삶도 나아질 거예요”
버마 출신 소모뚜 ‘인권홀씨상’
 
 
한겨레  김민경 기자기자블로그
 
 
 
» 소모뚜
 
 
 
1995년 스무살 때 가족을 위해 돈을 벌러 여행비자로 버마(미얀마)에서 한국에 왔다. 하지만 ‘코리안드림’은 꿈일 뿐이었다. 눈앞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다치고, 하루 15시간 넘게 일해도 월급을 떼이기 일쑤였다. 비인간적인 대우에 맞서려면 ‘입’이 필요했다. 그래서 5개월 만에 한국어를 배워 친구들의 입이 됐다.

15년간 버마 민주화와 이주노동자 인권을 대변해온 소모뚜(35·사진)씨가 3일 한국인권재단이 주는 ‘2010 인권홀씨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인 그는 2003년 정부의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에 맞서 성공회대성당에서농성을 벌인 이후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그는 버마 민주화를 요구하는 ‘버마행동’의 한국 총무, 이주노동자의 방송 대표, 다국적 노동자밴드 스탑크랙다운 보컬, 이주민 인권 강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11월3일에는 ‘난민인정 결정 불허결정처분 취소’ 청구소송 2심에서 승소하기도 했다.

여전히 단속 과정에서 이주노동자가 죽거나 다치고,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 일하는데도 노동권이 보장되지 못한다. “어느 정부도 자국민 우선이잖아요. 이주노동자의 삶이 나아지는 만큼 한국 사람들의 삶도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고 우리 활동을 따뜻한 눈으로 봐줬으면 합니다.”

그는 늘 자신을 ‘버마 인권활동가’가 아닌 ‘인권활동가’라고 소개한다. “내 나라만 민주화되고 인권 신장되면 끝이 아니잖아요. 내가 살고 있는 이 한국도 똑같이 따뜻한 세상이 돼야죠.”

글·사진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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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3 22:20 2010/12/03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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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민도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인권기자단 기사

2010/11/24 13:01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참 좋은 말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분들

꽃보다 아름다우시죠?

우리 모두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은 아름다워 질것입니다."



 

- 강의를 시작하며, 소모뚜

 

유난히 추웠다는 지난 토요일,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추위를 무색하게 만드는 노래 소리가 강의실에 울려 퍼졌다. 11월 13일, 경북대학교에서 대구참여연대가 주최하는 시민학교가 열렸다.

 ‘이주민, 그들의 역사와 인권’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강의는 버마에서 온 이주노동자 활동가 소모뚜(35)씨의 노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로 시작됐다. 

 

이주민, 꿈과 희망을 찾기 위한 도전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소모뚜씨의 고향은 버마이다. 100년 가까이 지속되는 독재정부, 그 정부 아래서 유린되는 인권, 가난에 시달리는 국민들. 아동군인이 7만 명인 나라, 내전으로 고통 받는 소수민족들. 이것이 그의 조국 버마의 현실이다. 공무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버마 민주화를 위한 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직장을 잃게 되었다. 그 후,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가족에게 보탬이 되고자 15년 전 한국으로 와서 '이주민'이 되었다.

 

소모뚜씨는 이주민을 "꿈과 희망을 찾기 위한 도전자"라고 말한다. 그의 첫 도전은 김천의 박스 공장에서 시작됐다. 매일 15-16시간 씩 고된 노동을 했지만, 가족의 생계에 대한 책임과 스스로 한국 경제 발전의 일원이라 여기며 묵묵히 8년을 일했다. IMF때는 월급을 반만 받고 라면을 먹으며 경제 위기 회복을 도왔다.

 

하지만 경제 위기가 닥칠 때면 해고 일 순위는 '이주 노동자'였다. 때로는 범죄자, 테러리스트 취급을 받기도 했다. 얼마 전 끝난 G20 정상회의를 대비한 강화된 단속으로 베트남 이주 노동자가 추락해서 숨지기도 했다. 소모뚜씨는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들에게 테러리스트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돌아온 것은 "그럼, 어디에 있겠느냐"라는 대답 뿐이었다.

 

정부의 단속과 사회의 냉대 앞에서 그의 친구들은 강제 추방되거나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암담했다. 이주 노동자의 현실에 대해 알리려 했지만 정부도, 언론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이주민의 목소리를 들려주고자 '활동가'로의 삶을 시작했다.

 

 

이주 노동자 활동가, 소모뚜

 

'활동가' 소모뚜씨는 무척이나 바쁘다. 이주 노동자의 방송 MWTV 대표와 다국적 노동자로 구성된 밴드, ‘스탑크랩다운(Stop Crack Down, 강제추방중단)’에서 보컬․기타리스․작곡을 맡고 있다. 또 그의 고향 버마 민주화를 위한 '버마 행동, 한국'의 총무를 맡고 있다. 그 외에도 이주노동자의 임금 착불이나 근로기준법과 관련된 노동 상담, 결혼 이주 여성들에 대한 지원 산업까지. 몸이 두 개, 세 개라도 모자랄 정도다.

 

하지만 소모뚜씨는 하나도 힘들지 않다. 오히려 그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어 보람되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물론 어려운 점도 많다. 당장 생계를 이어가는 것도 문제다. 무엇보다 방송이며 밴드를 이끌어 가기엔 인원과 재정은 너무도 열악하다. 처음 방송을 시작할 땐, 기본적인 방송 기술조차 몰랐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이뤄야 할 꿈이 있다. 그는 "방송, 밴드 방법은 다르지만 그 목적은 하나다. 차이로 인해 차별 받지 않는, 함께 사는 다문화 사회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Hero-System의 한국 다문화


현재 한국의 이주민은 120만 명. 곳곳에서 이주민을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시대가 됐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한국 사회와 경제는 이주 노동자와 결혼 이주 여성에 기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턴가 '한국은 다문화 사회'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방송에서는 명절이면 한복을 입은 이주민이 한국 노래를 부르거나, 김치를 담그는 모습이 나오곤 한다. '한국인이 된' 이주민. 그 때서야 한국 사회는 그들을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

 

소모뚜씨는 '한국인이 되어야' 하는 다문화 사회가 마땅치 않다. 그가 느끼는 한국 사회의 다문화는 단지 “결혼한 이주 여성을 한국화 시키거나, 못 사는 나라의 여성이 한국 남성을 만나서 잘 살게 된다는 ‘Hero-System’”일 뿐이다. 소모뚜씨가 희망하는 다문화 사회는 모든 이주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는 사회이다. 그는 “모든 이주민이 한국인이 되면 다문화는 필요 없다”며 “네팔 사람, 필리핀 사람 이렇게 당당히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차별하지 않고 사는 사회가 다문화 사회”라고 말한다. 결국 그가 말하는 다문화 사회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부터 이주민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소모뚜씨가 부른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랫말에 '다문화 사회'로 가는 길이 담겨 있는 듯하다.

 

 

"이주노동자도 또 하나의 전태일이에요"

 

강연이 이뤄진 13일은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지 40년이 되는 날사용자 삽입 이미지이다. 40주기를 맞아 지난 7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전국 노동자 대회'에 소모뚜씨도 참여했다. 한국인은 아니지만 이주 노동자 역시 또 하나의 전태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70만 명이 '이주 노동자'임에도 그들의 이야기를 하려는 소모뚜씨가 설 자리는 없다. 소모뚜씨는 "최소의 인간다운 삶을 지켜주는 근로 기준법의 소중함을 온 몸을 불태워서 보여 줬던 전태일 열사와 수많은 한국인 노동자처럼 이주 노동자도 한국에서 최소 하루 평균 15시간 고된 노동을 하며 저임금, 사업장 폭행 나아가 인종적 문화적 차별까지 당하고 있다"며 "그런데 이주 노동자의 안타까운 죽음은 행사장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고, 이에 대해 발언할 기회도 없었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중에서도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 이주 노동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노동계 내에서도 이주 노동자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많이 미약하다. 소모뚜씨는 "노동자가 서로를 적으로 만들면 안 된다. 모든 노동자는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함께 갇혀있기 때문에 연대해서 싸워야만 한다"고 말한다. 한국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가 서로 반목할 것이 아니라, 노동자라는 동질감을 회복하고 연대를 해나가는 것이 절실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소모뚜씨는 "한국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가 함께 할 수 있는 전략적 프로그램을 노동계에서 많이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한국 노동자에게 다가가서 이주민에 대한 현재 상황, 이주민이 여러분의 일자리를 빼앗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님을 말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연대에는 한국 노동자뿐만 아니라 이주 노동자의 노력도 필요하다. TV속에 왕왕 나오는 한국말을 능숙하게 하며, 한국 문화를 잘 아는 이주 노동자는 사실 드물다. 노동자 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이주민이 한국어를 몰라서 의사소통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생활도 되지 않는다. 자연히 이주민과 한국인의 연대는 어려울 수밖에. 소모뚜씨는 "이주민들도 자신이 월급 못 받는 것만 주장하지 말고 구성원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행동과 고민을 해야 한다"며 "이주민은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에 관심을 가져 함께 발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든 나의 고향, 한국

 

"한 모금이라도 얻어먹어 봤으면 반드시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소모뚜씨가 한국에서 이주 노동자 활동가로 사는 것은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 한다. 버마에서 20년, 한국에서 15년을 보냈다. 그에게 한국은 또 하나의 고향과 같다. 그는 "한국에서 실망스러운 모습도 많이 봤지만, 버마에서는 얻어갈 수 없는 민주주의․자유․평등에 대해 배웠다"며 스승과 같은 고마운 존재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활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한국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 제가 한국에 산 것에 대한 은혜를 갚는 것이죠. 내가 가진 것 없잖아요. 때문에 제 나름대로 외면하지 않고 같이 행동하는 것으로 갚아나가는 것이죠"

 

정든 고향이 더 좋아졌으면 하는 그의 희망. '차이로 인해 차별 받지 않는', '함께 사는 다문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그의 당찬 행보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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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2 00:51 2010/12/02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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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에겐 ‘어깨동무’ 절실해요

[미디어 현장]소모뚜 MWTV 대표

2010년 09월 29일 (수)

 

안녕하세요.

이주노동자의 방송 MWTV대표 소모뚜입니다. 저는 버마사람입니다. 저는 1995년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들어왔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이주노동자 농성을 통해 2005년 만들어진 이주노동자의 방송 MWTV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MWTV는 한국에 사는 이주노동자들이 만들어 가는 방송입니다. MWTV 이주노동자의 방송은 한국에 사는 이주노동자, 이주민(이주노동자, 결혼 이주민가족, 이주아동, 난민)들의 삶과 목소리를 영상과 텍스트 기사로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사람이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를 요구합니다. 차이로 인해 차별 받지 않는 한국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주노동자 농성을 통해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 정말 절실히 필요하고,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카메라 한 대 없이, 더구나 촬영방법도 모른 채 시작한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있는 것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였습니다. 다행히 시민방송 RTV에서 우리에게 부족한 장비와 기술, 장소, 모든 것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주민들의 모든 모습을 담아내려 전국 방방곡곡 이주노동자, 이주민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 어떤 내용 불문하고 달려 나갔습니다. 시민방송 RTV를 통해서 무려 11개 나라말로 ‘이주민 뉴스’를 만들어 방송했습니다.

우리는 드디어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이주노동자 자신이 카메라에 담고, 방송하고, 들었습니다. 이 땅의 방송국과 신문사의 펜과 카메라에서 사라지던 우리들의 비명, 외침, 웃음을 이제 우리 스스로 만든 방송을 통해 알린 것입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시련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함께 활동하던 동료들이 미등록 체류자라는 이유로 하나 둘 강제단속, 표적단속으로 추방당했습니다. 그도 안 되면 회사에서 해고당했습니다. 출구 없는 방에 갇힌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멈추지 않기 위해 이주민을 대상으로 한 미디어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미디어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알리려는 이주민 미디어 활동가들을 키우는 것이지요. 떠난 사람들의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사람들을요. 이주민 미디어 교육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가슴속 꽉 찬 할 말들이 그들을 그리도 열심히 하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쁨도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를 지원했던 미디액트가 재정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결국 미디어 교육은 4기로 끝나게 됩니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의 동반자 시민방송 RTV도 정부지원이 끊겨 재정에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들의 미디어 활동도 위기 상황에 빠졌습니다.

아시듯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르는 법이죠. 아직도 우리는 할 말이 많아 남아 있었습니다. 다행히 정말 많은 한국 사람들이 우리 목소리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고 기꺼이 지지와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자신들의 생활비를 쪼개어 후원금을 내주셨기에 우리는 다시 살아났고 우리들의 목소리는 외롭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힘을 얻어 우리는 한 발 더 내딛기로 했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인원과 재정이지만 영화제라는 발걸음을 시작했습니다. 이주민, 이주노동자가 만드는 영화를 이주민, 이주노동자들이 여는 영화제를 통해 외쳐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꿈은 이루어지고야 말았습니다. 대형 스크린에 보이는 우리들의 모습. 큰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우리들의 소리. 이주노동자 영화제를 치러낸 그 감격스러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영화제를 벌써 5회째 열고 있습니다. 영화제에 참여한 이주민 한분이 “이런 활동들이 있어서 더 이상 우리들의 삶이 외롭지 않고, 우리들의 목소리도 헛되지 않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느낌”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우리들이 요구하는 인간다운 삶, 평등한 삶을 한국 사회가 외면하지 않고 꿈이 현실이 되는 사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간절히 빕니다.
 

지금까지의 발걸음은 한국사회, 한국 사람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이후로의 발걸음에도 바로 한국 사람들의 어깨동무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밍굴라바(축복받으세요라는 미얀마 인사말)’ 축복이 될 것임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해준 한국 사회와 한국 사람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밍굴라바.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기사링크......>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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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6 17:48 2010/10/06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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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원… 공무원… 문화운동가로… 새길을 낸다

 

[따로 또 같이, 다문화 우리문화!]
<1부> 우리 안의 다문화 ⑵ 다문화 리더 시대
이주민의 이익 대변자로 사회 각 분야서 두각
"구색 맞추기·정권 따른 부침 탈피 다양성 기여를"

김청환기자
chk@hk.co.kr                 안산=김창훈기자 chkim@hk.co.kr  

몽골 출신의 결혼이주여성 이라(33)씨는 6ㆍ2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의원 비례대표로 당선돼 1호 다문화

정치인이 됐다. 2003년 9월 한국인과 결혼한 친구의 소개로 당시 여행업을 하던 사업가(50)와 결혼해 입국한 이씨는 2008년 10월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까지 받았던 고난을 다른 결혼이주여성에게는 안겨 주지 않으려고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결혼이민자 네트워크 부회장과 경기 성남시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덕분에 2008년 5월 세계인의날에 법무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한나라당은 이런 그의 이력을 높이 사 비례대표후보 1번으로 공천했고, 선거에서 무난히 당선됐다.

100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다문화인들은 이처럼 한국 사회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킬 정치인을 배출할 만큼 외연을 넓히고 있다.

비록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국민참여당도 충북도의원 비례대표후보 1번으로 몽골 출신의 결혼이주여성 체체그수렌(37)씨를 내세웠다. 1988년 입국해 2008년 한국 국적을 취득한 그는 청주YMCA 등에서 다문화인을 위한 활동을 했으며, 현재는 충북이주여성인권센터에서 다문화 강사를 맡고 있다.

두 사람에게서 보듯 다문화인에 대한 관심은 주로 결혼이주여성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100만여 다문화인의 7할 이상을 차지하는 것은
이주노동자다. 이주노동자를 대변하는 다문화 리더에 주목해야 할 이유다.


95년 정치적 자유를 위해 버마를 떠나 한국에 들어온 소모뚜(35)씨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다국어 방송인 MWTV(이주노동자의방송) 대표로 10개 국어 프로그램을 통해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유용한 정보를 얻도록 하는 일에 열심이다. 그는 이제 다문화인뿐 아니라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유명 인사가 됐다.

시민 사회에서 영향력을 갖게 된 경우도 있다. 35년째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한옥에서 살고 있는 미국인 피터 바돌로뮤(62)씨는 한옥 지킴이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는 지난해 6월 동소문6가 주민 20여명 명의로 시를 상대로 재개발 정비구역 지정 처분 등 취소 소송을 제기해 승소 판결을 이끌어 냈다.

공무원 사회도 다문화인들의 활약은 예외가 아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중앙공무원교육원 행정자치부 교육담당 계약직 나급인 더글라스 빈즈(미국)씨 등 5명이 국가직 공무원으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안토니 우디위스(영국)씨 등 123명이 교육직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전남 광양만권경제자유구역청 계약직 가급인 호셀라몬 로살(미국)씨를 비롯한 35명은 지방직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다.

하지만 다문화 리더의 증가에는 함정이 있다. 특히 정치 분야의 경우 여야가 구색 맞추기용으로 징발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효용성이 떨어지면 바로
폐기 처분된다. 또 정치 권력이 변하면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경우도 많다.

미국이나 영국의 소수민족 공동체도 의회에 자신들의 대표를 진출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실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하지만 이들 사회는 자유방임과 경쟁의 원리가 기본이어서 인위적 지분 배정은 드물다. 다문화 리더의
성공 비결은 사회 구성원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똑같은 조건, 아니 더 열악한 조건에서 스스로 승리를 쟁취한 결과인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계 리더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김창준(53) 전 미 연방 하원의원이 대표적이다. 그는 연세대 법학과 3학년 때인 1961년 단돈 200달러를 들고 혈혈단신으로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미국에서 그는 지방신문 독자부 직원 등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 주경야독해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사업에 성공한 김씨는 시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이어 미국 정치의 꽃인 연방 하원의원이 됐다. 현재 그는 캘리포니아주 다이아몬드바시장으로 일하고 있다.

영미와 달리 주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소수자로서 다문화 그룹에 대한 지분을 배정해 리더를 키운다. 하지만 이들도 그 많은 다문화인 사이에서 확실하게 경쟁력이 검증된 사람만 선택하기 때문에 한국의 부속품형 리더와는 다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다문화 리더라면 한국 사회에서 이주민으로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해 새로운 이주민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 국제적 관점에서 자기 분야의 경쟁력을 갖춰야 함은 물론이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다문화인이 늘고 있지만 아직 귀화자는 7만여명에 불과해 소수자의 이익 대표성을 반영한다는 식의 다문화 리더론은 합리성이 떨어진다"며 "냉정하게 글로벌 리더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공정한 경쟁에서 승리한 다문화 리더들이 나와야 소수자에게도 희망을 주고 문화 다양성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산 거주 필리핀인들의 우상 "적응 힘들겠지만 희망 잃지 않길"


필리핀 출신 귀화인 카스트로 경장

경기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국경없는마을은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외국인 밀집 지역이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꿈을 위해 삶을 공유하는 이 마을에서는 피부색이 다른 이가 대한민국 경찰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필리핀 출신 귀화인 아나벨 카스트로(42ㆍ여ㆍ사진) 경장이 그 주인공.

카스트로 경장은 안산 단원경찰서 외사계에서 근무하고 있다. 다문화인이 많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이들과 소통하고 외국인 범죄를 사전 예방하는 게 그의 임무다. 22일 외사계에서 만난 카스트로 경장은 한글로 문서 작업을 하느라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물론 제가 좋아서 한 일이지만 처음에는 경찰관이 되고 무척 난감했습니다. 업무도 서툰 데다 너무 긴장도 됐고요."

그는 1995년 친구 소개로 지금의 남편(49)을 필리핀에서 만났다. 2년간 교제하다가 결혼한 뒤 한국으로 온 게 13년 전이다. 그는 전남 함평군에서 농사를 짓는 남편과 시부모를 모시며 2남 1녀를 낳았다. 피부색만 다를 뿐 여느 한국인 며느리와 다름 없는 생활을 해 왔다. 그러다 함평경찰서에 필리핀과 관련된 사건의 통역을 도우며 경찰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됐다.

카스트로 경장은 필리핀에서 8년간 고교 생물교사로 근무했다. 모국어뿐 아니라 영어에도 능통해 경찰관이 되기 전까지 함평 지역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이런 능력과 부지런함을 인정한 함평경찰서는 외사 특채에 지원해 보라고 권했고, 2008년 7월 당당히 경찰관이 돼 안산시로 갔다. 시내에는 불법체류자를 포함해 1,500여명의 필리핀이 살고 있다. 그들에게 카스트로 경장은 우상으로 통한다. 하지만 법을 집행해야 할 대한민국 경찰관이기에 그들을 단순히 동포로만 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경찰 업무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직장 때문에 가족과 생이별해야 하는 상황이 무엇보다 어렵다. 현재 남편은 큰 아들과 함께 함평군에서 부모를 모시고 살고 있다. 아나벨 경장은 안산시에서 자녀 둘을 데리고 있다.

그는 주말이 더 바쁘다. 다문화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안산시에서는 외국인 관련 행사들이 주말과 휴일에 많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떨어져 있는 가족을 만나기가 더 어려운 이유다. 그렇다고 경찰관이 된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그는 "경찰관이 돼 필리핀 사람들과 한국인들을 위해 봉사하니 정말 행복해요. 다만 우리 한국인들이 외국인들에게도 우리처럼 똑같은 감정으로 대해 주길 바래요"라고 당부했다. 국내 거주하는 다문화인에들에게는 희망을 강조했다. "한국 문화 적응이 힘들겠지만 시간은 금방 지나가요. 희망을 잃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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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2 23:40 2010/06/22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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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인터뷰- 소모뚜 버마이주노동자활동가

“Stop Crackdown! 끝나지 않는 나의 노래”

버마의 어느 작은 마을, 부챗살로 퍼지던 햇살이 몸을 접는 시간이면 기타를 멘 청년들이 하나둘 거리로 흘러나온다. 저마다 벤치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서 딩딩 기타를 매만진다. 가슴에 고이 접어두었던 오선지가 서서히 펴지고 감미로운 선율이 날개 달고 훨훨 허공으로 떼 지어 난다. 부르고 또 부르고, 여기서 한 소절 저기서 한 소절. 섬처럼 떨어져 노래하던 청년들은 어느새 따로 또 같이 화음을 맞춘다. 어스름 밤공기 타고 골목골목 휘돌아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는 청량한 바람 되어 동네사람들의 마음을 적신다.

# 소모뚜, 노래하다

“버마 젊은이들은 기본적으로 기타를 다룰 줄 알고 노래도 잘해요. 밤새 기타를 쳐도 아무도 시끄럽다고 얼굴 붉히거나 신고하지 않아요. 거리를 지나는 행상은 노래를 불러줘서 덕분에 쉴 수 있다고 생각하죠. 노래 한 곡씩 듣고 가요. 매일 그 자리에서 노래하던 청년이 안 보이면 동네 사람들은 어디 아픈지 안부를 묻고요.”

날마다 새벽 2시까지 하얗게 밤을 지우던 그. 노래책을 탑처럼 쌓아두고 손끝 부르트고 목청 터지도록 노래하던 청년 소모뚜. 그는 스무 살에 정든 고향을 등졌다. 부모님과 여동생들을 위해 ‘이 한 몸’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TV가 필요하면 전자제품 가게에 가고 밥을 먹기 위해 식당을 가는 것처럼” 꿈을 찾는 그에게 ‘아시아의 호랑이’ 한국행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돈 벌어 효도도 하고, 민주화 투쟁의 선배격인 한국에서 버마를 도울 일을 배울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1995년 한국에 온 소모뚜의 첫 일터는 김포의 박스공장. 매일 14-15시간 씩 긴 노동이 반복됐다. 암담했다. “기계 사이에서 내 삶을 희생하는 게 아니라 멋지게 한 번 살아보고 싶었으나 현실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일상이 사막이었다. 물을 찾듯 기타를 찾았다. 주말이면 공장은 연습실로 변신했다. 버마 친구들과 모여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좋은 친구, 좋은 음악으로 피로를 풀고 다음 한 주 동안 살아갈 힘을 얻곤 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소모뚜의 노래는 공장의 담벼락을 넘었다. 어느 성탄절 이주노동자들이 교회에서 노래 불러주는 잔치에 참가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도 아이들도 행복했다. 곁에 있던 아시아인권연대 이란주 대표가 제안했다. ‘이주노동자들이 일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 노래를 사랑한다는 것을 한국사회에 보여주기 위해 밴드를 결성하면 어떨까?’ 흔쾌히 응했다. 소모뚜는 곧장 네팔, 버마, 인도네시아 등 여러 나라 친구들과 유레카라는 밴드를 꾸렸다. 1999년 9월 추석에 첫 단독 공연을 가졌다.

“2003년에 고용허가제 도입을 앞두고 정부의 미등록 이주 노동자 단속이 아주 심해졌죠. 쫓겨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였어요. 강제추방의 공포를 견디지 못한 친구들이 자살을 했어요. 충격적이었죠. 저희는 IMF 때 월급을 반만 받고 사장님이랑 라면 먹으면서 일했고 월드컵에 같이 빨간 티를 입고 응원했어요. 한국의 좋은 친구로 살아왔는데 왜 우리를 쫓아내는 법을 만드는 건가요?”

소모뚜는 답을 찾아 떠났다. 8년 동안 묵묵히 일하던 박스공장 대신 미등록이주노동자 추방에 반대하는 명동성당 농성장으로 출근했다. 투쟁의 현장에서 모두가 재밌게 외칠 수 있도록 구호를 노래로 만들었다. 가장 인기를 끌었던 ‘우리가 원하는 건’의 가사 ‘스탑크랙다운(Stop Crackdownㆍ강제추방 중단!)’은 팬들의 요청에 의해 아예 밴드이름으로 지정됐다. 뮤지션 소모뚜는 전국 방방곡곡 공연을 다녔고, 자연스레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의 처참한 노동환경과 노동 권리에 대해 눈 떠 갔다.

# 소모뚜, 절망하다

“이주노동자들 대부분 아주 영세한 곳에서 일해요. 그런 사업장의 관리자들은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어요. 저희 이주노동자는 당연히 가난한 나라 출신이고 피부색이 시커멓다고 인간취급을 못 받아요. 심지어 너희 나라에도 해와 달이 있느냐 묻는 사람도 있어요.”

천태만상이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냉대는 노골적이고 극심하다. 업무에 대한 제대로 된 실무교육도 안전교육도 없다. 혹여 이주노동자가 일을 더 잘 할까봐 기계사용설명서를 치워버리는 경우도 있다. 부상위험이 따르는 일을 맡아도 누구 하나 ‘조심하라’ 귀띔해주는 이 없다. 우주베키스탄의 한 노동자는 사료기계에 손이 절단됐다. 그런데도 치료비를 못 받았다. 이에 항의하면 담당자는 당연하단 듯 내뱉는다. “농업은 한국사람도 산재 처리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주노동자는 당연히 안 돼!)”

“농업 인력으로 온 이주노동자가 다른 일을 하면 바로 불법이 돼요. 그런데 농촌은 겨울에 두 세 달이나 일자리 없잖아요. 실업급여를 안 줘요. 그 기간에 다른 일을 하면 자기도 모르게 불법체류자가 되는 거예요. 어업은 3년 내내 배에서 일해요. 한국어를 배울 조건이 안 되니까 부당한 일을 겪고도 모르죠. 역시 다른 일터로 옮기면 불법체류자가 되는 거죠. 거기다가 월급도 제 때 못 받잖아요. 그런데도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체불임금을 상담하러 가면 문제 해결은 안 하고 법무부에 신고부터 해버려요.”

법이 아니라 덫이다. 소모뚜는 절망했다. 이주노동자는 곧 불법체류자라고 여긴다. 하지만 불법체류자 20만 명이 왜 생기는지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아무도 알려하지 않는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일반인의 편견은 뿌리 깊다. 정부당국은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오직 단속으로만 해결하려 한다. 민주주의의 절차보다 불도저의 효율성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이주노동자 문제에서도 예외 없다. 그런 한국이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 소모뚜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강한 사람이 약자 편에서 생각한 적이 없잖아요. 고용허가제도도 이주민들을 보호하고 배려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짜낼까 이용할 생각만 해요. 국익과 노동자의 권리를 동시에 생각해야 하는데 그러질 않아요.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싼 값으로 일하잖아요. 현대판 노예허가제가 된 거죠.”

소모뚜와 함께 MWTV에서 활동하는 아웅틴툰은 “버마는 소도 쉬는 날이 있다.”고 한탄했다. 버마에서는 기후조건상 3모작을 할 수 있는데 1모작만 한다. 그래도 가족이 넉넉히 먹고 사니까 고생을 자처하지 않는다. 소 1마리로 충분한 일도 2마리 시켜서 쉬엄쉬엄 일 한다. 오전에 일하고 오후엔 사람도 소도 같이 쉰다. 그런 환경에서 살다가 처음에 한국인들이 불철주야 일만 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저에게 술 안 먹고 어떻게 사느냐 묻지만, 저는 그렇게 일만하고 어떻게 사느냐 물어보았죠.”

# 소모뚜, 행동하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에 맞선 농성은 2003년 11월 15일부터 2004년 11월 26일까지 농성은 385일 간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소모뚜는 이주노동자  ’활동가’로 거듭났다.  일자리를 다시 구해 월~토요일까지 소화기 압력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일요일에는 스탑크랙다운의 기타리스트로 버마행동의 총무로 다문화활동가로 일인다역을 소화했다. 2005년부터는 이주노동자방송 MWTV 제작에도 참여했다. ‘아픈 다리 서로 기댈’ 친구도 여럿 만났다. 이주노동자 밴드 ‘유레카’ 시절부터 함께한 음악적 동지 미누(미노드 목탄)가 대표적인 경우다.

그런데 미누가, 강제추방 당한 이주노동자를 위해 ‘친구여 잘 가시오’란 노래를 무대에서 함께 불렀던 그 미누가, 지난해 18년 간 살아온 한국에서 강제추방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누의 구속이 연일 매스컴을 탔고 소모뚜의 이름도 같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이게 화근이었다. 평소 친절하게 대해주던 사장은 소모뚜에게 ‘외부에서 압력이 들어올까 두렵다며 조용히 나가줄 것’을 당부했다. 하루아침에 친구도 잃고 일터도 잃은 소모뚜는 망연자실 허탈감에 빠졌다.

“미누형 사건 때 희망이 없어 보였어요. 기본적인 것이 보장 안 된 사회에서 내 목터져라 노래 불러도 소용이 없는 일인가. 그 전에도 미누형과 밴드 때려 치자는 얘길 했었죠. 우릴 적으로 보는 이 사회에 기여할 게 있을까.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적 취급은 받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상황이 안 좋다고 도망가거나 회피하면 내 스스로 창피하고 죄를 짓는 거잖아요. 그래도 우리 얘기에 공감하고 듣고자 하는 사람 있으니까 희망을 가져야죠. 제가 아주 초기에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왔기에 후배들이 우리처럼 힘들고 헤매지 않게 길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 책임감이 있어요.”

소모뚜는 ‘해고’를 계기로 MWTV에 대표를 맡았다. “안 그래도 일할 사람이 없었는데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카메라 들고 이주노동자들을 찾아 나섰다. 한국 사람들조차도 입지 않는 한복을 입고 김치를 담그며 활짝 웃는 ‘다문화가족’ 뒤에 가려진 한 인간의 삶을 담아냈다. 온정과 연민 혹은 무시와 혐오, 교육과 상담의 대상이 아닌 저임금과 열악한 조건에 신음하는 노동자, 내면적 풍요를 꿈꾸는 존엄한 인간의 목소리를 날 것 그대로 들려준다.

이밖에도 참다운 소통을 위해 다방면으로 힘쓴다. 취재 차 만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자 매주 월요일 성공회대 민주사회교육원이 운영하는 노동대학에서 강의를 듣는다. 매주 토요일 방송되는 OBS 라디오 <다문화 톡톡>의 진행을 맡고, 위클리수유너머에 ‘밍글라바코리아’를 매주 연재한다. 일주일에 서너 차례 이주노동자 단체의 회의에 참가하는 것은 기본이다.

소파에서 쪽잠을 자며 강행군을 소화하는 그에게 ‘버마행동 한국(Burma Action Korea)’ 활동은 각별하다. ‘버마행동’은 군부독재 하에서 고통 받는 버마의 실상을 한국 사회에 알리고 버마의 조속한 민주화를 위해 노동하며 투쟁하는 버마 이주노동자들로 구성된 단체다. 매달 마지막 주 화요일 종각역 미얀마대사관 앞에서 국제민주연대, 버마민주화를지지하는모임, 인권연대 등의 시민사회단체와 기자회견을 연다.

“지난 4월 말에는 버마군부의 비민주적 선거법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어요. 한국이 독재정권에 탄압받았을 때 해외의 많은 단체들이 힘을 쓴 것처럼 버마에 평화와 민주주의가 하루 속히 정착될 수 있도록 한국도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합니다. 또 한국의 버마 노동자들에게 조국의 상황을 알리기도 버마행동의 중요한 일입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라서 한국어 교육, 산업안전교육, 인권교육이 있을 때 버마의 내부 상황 사진전을 여는 등 간접적으로 알리죠. 직접 나서지는 못해도 후원금을 내겠다는 분들도 있고 관심을 많이 가져줍니다.”

# 소모뚜, 함께가다

소모뚜는 현재 ‘인도적 지위’ 비자를 갖고 있다. 인도적 지위 인정은 난민과는 다르다. 인도적 지위는 난민 요건이 충족되지 않더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일정 기간 체류허가를 내주는 것이다. 법률로 규정된 것이 아니고 법무부 지침으로 시행되는 것이어서 신분이 불안하지만 당장 추방될 염려는 없다.

“처음엔 한국이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사회’라 힘들었어요. 힘 있는 사람들이 탄압할 때 NGO나 조직 활동 못하는 사람은 이웃이라도 알아야 도움을 요청할 텐데 그럴 수가 없잖아요. 약한 사람끼리 힘을 합쳐서 공동체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 그러면 정글에서 호랑이가 작은 동물 다 잡아먹는 것처럼 그런 사회가 되어버릴 테니까요.

버마는 마을이에요. 아들 없는 집에서는 다른 집 남자들이 나서서 도와줘요. 코코넛 나무 높은 곳의 열매를 따주고 물탱크를 청소하죠. 무거운 짐 같이 들고요. 정치는 개판인데 (웃음) 국민들은 서로 돕고 배려하며 살아요. 나눔의 기쁨이 행복이라고 남을 돕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는 교육을 어릴 때부터 받았어요.”

버마는 불교국가다. 마을에 학교는 없어도 절은 있다. 불경을 일상에서 새소리처럼 듣고 자란다. 버마 사람들은 관계와 전체 속에서 사고하는 동양적 가치관이 몸에 배었다. 결초보은, 역지사지. 내가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며, 남에게 밥 한 수저만 얻어먹어도 은인이라고 배웠다. 그렇기에 지난 15년간 한국 밥을 먹고 산 소모뚜는 “한국에 갚을 게 많다”고 여긴다. 그가 한국에 계속 머무는 이유는 바로 이 두 가지다. 정 그리고 책임감.

“길거리에 돌이나 유리가 있으면 모두에게 피해 가지 않도록 치워야 하잖아요. 저희한테 한국을 비판한다고 부정적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암 환자에게 증상과 치료법 알려주는 것처럼, 한국사회에 아픈 일들과 치료법 알려주고 같이 고쳐가자는 거죠. 한 사회의 소수자가 본인 얘기 하려고 나왔을 때 부정적으로 보면 안 돼요. 나쁜 얘기 안 하고 덮어두면 더 좋은 건가요? 한국의 한계 드러내주는 것이 더 나아지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대학에 인권교육을 하러 갔을 때다. 누군가 손을 들고 물었다. “이주민이 요구하는 인권이 무엇이냐”고. 때로는 질문을 되돌려주는 것이 가장 정확한 답이 되는 법. 소모뚜는 되물었다. “이주민 인권과 한국인 인권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이주민인권이 궁금하면 인권이 뭔지를 배우면 돼요. 내가 맞는 거 싫으면 다른 사람도 싫어하고 월급 받고 싶으면 이주민도 받고 싶은 거죠. 나의 입장에 맞추어 생각하면 그게 인권이에요.”

인권이 무언지 알 필요가 없던 나라에 살다가 한국에 와서 인권교육 한다는 게 무척 힘들다며 소모뚜는 멋쩍게 웃었다.

인생의 절반, 그것도 생의 가장 빛나는 청춘시대를 보낸 “한국을 사랑한다”는 소모뚜. 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의 초상은 암울하고 쓸쓸하다. 대접받고 싶은 대로 행동하라는 황금율이 지켜지지 않는 나라. GDP는 높아도 서로 돕고 배려하는 관계적 부가 사라져 가는 나라. 일터의 빈자리를 채워줄 동료시민을 구해 와야 하는데 노예를 얻으려 하는 나라. 87년 민주항쟁으로 군부독재는 내몰았지만 사는 게 여전히 팍팍한 나라. 이름만 민주주의 하고 딴 짓 하는 나라…….

“언제든 제가 버마에 돌아갈 때 한국의 민주화를 교본으로 삼을 수 있겠지요. 한국에서의 경험한 일들이 버마의 미래에 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요. 하지 말아야할 것. 따라할 것이 보이니까요. 또 이주노동자의 문제는 한국사회가 진정으로 민주화 되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기도 해요. 우리가 바라는 것이 함께 사는 세상, 차별 없는 세상이라면 한국도 그것이 싫지 않을 거예요.”

여행자 소모뚜. 그는 여기 아닌 저기의 생을 꿈꾸며 길 떠났다. “열심히 일했고 충분히 인정받았고 더불어 행복했다.” 그러나 우리가 여행자가 되는 순간 기후에 더 민감해지고, 어떤 전조에 더 영감을 받듯이 그는 이 땅에 자욱한 차별의식과 모순투성이 제도에 반응했다. 높은 벽에 부딪히고 모난 돌에 쓰러진 친구들의 처참한 모습을 기억한다. 그래서 더 멈출 수 없다. 벽에 문을 내고 돌멩이를 입김으로 녹일 때까지, “Stop! Crackdown!” 소모뚜의 노래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 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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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0 23:08 2010/06/10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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