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뚜 이주노동자방송 대표 인터뷰

 

-이주노동자 방송이라….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인데요. 최근 어려움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의 눈과 귀와 입이 되려는 방송이에요. 도움이 되는 정보나 교육을 제공하고 한국사회에 우리의 생각과 권리를 발언하고 소통하기 위한 거죠. 한국어 포함해서 11개 국어로 방송도 하고 온라인으로 뉴스레터도 보내고. 상근자 4명이 최저임금보다 낮은 월급으로 일하고 있어요. 저 참 나쁜 대표죠(웃음).
‘퍼블릭 엑세스(필자 주 : 미디어에 대한 대중의 참여를 주장하는 운동)’ 방송국인 시민방송(RTV)을 통해 나가고 있었는데, 그 동안 정부에서 나오던 지원금이 이번 정부 들어 끊겼습니다. 운 좋게도 ‘아름다운 재단’에서 1년 지원금을 받아 운영 중이죠. 이 스튜디오를 쓰게 해 준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도 학생, 학부모들이 지원해주고 있구요. 저도 제 돈 쓰면서 대표하고 있는데, 한계가 있어요. 후원이 많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한국엔 어떻게 오게 되셨어요?

 

미얀마에서는 제 성격을 제대로 펼치기가 힘들었어요. 전 자유롭게 말하고 활동하고 싶고, 제 희망을 자유롭게 추구하면서 노력하고 싶은데 나라가 그런 상황이 아니에요. 돈이 있어도 자유롭게 사업할 수 없고, 국민을 감시하고 엄청난 세금을 거두는 정부는 부패했죠. 미얀마에도 한국처럼 아들이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문화가 있어요. 제가 여동생 둘이 있는 장남이거든요. 큰 아들이 부모님께 효도하고 여동생들 공부시키고 싶은 작은 욕심도 이루기가 힘들었어요.
그 때 찾은 유일한 방법이 외국에 나가 일하는 거였죠. 그래서 대학 1학년이었던 95년, 학교를 그만두고 한국에 오게 됐습니다.

 

-한국 사신지 벌써 14년째시군요. 지나가면서 보면 한국 사람인 줄 알겠어요. 한국말도 정말 유창하신데요?

 

처음 취직한 공장에 저 혼자 외국인이었는데, 정말 답답하더라구요. 일하는 것도,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도 무슨 의사소통이 돼야 말이죠. 사람들이 저기서 뭐 좀 가져오라고 하면 그걸 못 알아들어서, 아예 그분이 가리킨 곳에 있는 물건들을 죄다 갖다 드리곤 했어요. 우리 엄마가 말하라고 입도 만들어주고 들으라고 귀도 만들어줬는데,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 한심했죠. 그래서 일만 끝나면 집에 틀어박혀 중고생 교과서 보면서 닥치는 대로 읽고 썼어요. 신문의 영어회화 코너는 한국말과 영어가 동시에 나오니 도움이 많이 됐어요. 벽에 붙여놓고 무조건 외웠어요. 한국에 친구도 없고 갈 데도 없으니 5시간이고 6시간이고 공부만 했죠 뭐. 그렇게 한 6개월 지나니 좀 살겠던데요(웃음). 

 

-그동안 언론에도 많이 나오셨더군요. 이주노동자 방송도 그렇고, 인권운동에 밴드활동까지 주제도 다양하게. 

 

한국엔 많은 이주민 공동체가 있어요. 미얀마 공동체, 네팔 공동체 등등. 이 공동체를 통해서 서로 돕고 교류하고, 국경일을 함께 기념하기도 해요. 공동체 활동을 하면서 한국 사는 이주민들의 생활에 대해 많이 알게 됐어요. 저도 그렇고, 이주민들은 모두 꿈과 희망을 가지고 한국에 온 사람들이예요. 그런데 그들이 일하던 공장에서 도망 나오고, ‘미등록 노동자’, ‘불법 체류자’가 돼 강제 추방되고, 심지어는 자살하기도 해요. 이건 아니다 싶었죠. 산업연수생 제도, 고용허가제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만든 것인지 고민하고 고민했어요. 한국은 부족한 노동력을 채워야 했고, 우리는 그걸 제공하는 대신 정당한 월급을 받고 기술을 배우고, 결국은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에겐 아무런 힘도 권리도 없었어요.

꿈이 있으면 그걸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죠. 친구들과 모여 앉아서, ‘우리가 일만 할 때가 아니다. 더 많은 사람이 다치기 전에 우리가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얘기했어요. 그래서 8년 동안 일했던 공장을 그만두고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위한 활동에 참가하게 됐죠. 방송도, 밴드도 목적은 하나예요. 이 땅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 얘길 하기 위한 다른 방법들일 뿐이에요. 

 

-산업연수생제도, 고용허가제는 무엇이 문제던가요?
 
사실 투자금이나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저와 같은 단순 노동자들은 한국에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제도가 없어요. 유일한 제도가 산업연수생제도였죠. 당시 연수생으로 들어오려면 브로커를 통해야 했어요. 브로커에게 수수료, 비자비용, 비행기 값까지 지불해요. 그걸 충당하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까지 잡혀요. 그만큼 한국에 희망을 걸고 온다는 거죠. 연수제도는 3년으로 운영되는데, 그 기간 동안엔 ‘연수생’이기 때문에 ‘노동자’로서의 권리가 없어요.

기술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월급은 적고, 제 때 못 받아도 말도 제대로 못하죠. 거의 봉사활동 수준이죠. 어떤 연구결과를 보니 우리 같은 사람들, 하루 평균 노동시간이 11시간이래요. 한국 직원들과 차이가 나죠. 그러다 연수기간이 끝나면 싼 값에 노동력을 쓰는 이점이 없어지니 회사에서 연수생을 정식으로 채용하는 일은 드물어요. 나름대로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 한국까지 왔는데, 돈은 돈대로 못 벌고 기술도 못 배운 상황에서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순 없잖아요. 그렇게 버티다보니 ‘불법 체류자’가 되고, 그런 상황에서 일하다 보니 ‘미등록 노동자’가 되고 하는 거죠.  

 

-그런 폐단을 없애려고 고용허가제가 시행된 건데요.

 

네. 브로커를 통해 들어오는 시스템을 없애고 정부 간의 합의를 통해 인력을 주고받게 됐죠. 한국 경제가 점점 발전하면서 연수제도만 가지고는 노동력이 부족하기도 했구요. 하지만 고용허가제는 고용주에게 보다 많은 권한을 줬어요. 고용주가 정부에게 어떤 인력이 몇 명 필요하다고 먼저 신청하고, 한국에 입국한 외국인 노동자들을 모아놓고 그 중에 맘에 드는 사람들을 필요만큼 골라서 데리고 가요.

그 과정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의 의지는 전혀 반영되지 않아요. 천식이 있는 노동자가 먼지 날리는 가구공장으로 가게 되더라도 방법이 없는 거죠. 일단 고용주에게 선택되면 다른 곳으로 이직할 수 없어요. 하고 싶은 일, 배우고 싶은 기술을 꿈꾼 그들에게 고용허가제는 선택권을 허락하지 않죠. 3년의 기간 동안, 1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는데 고용주가 계약을 연장해주지 않으면 두 달 이내에 다른 직장을 찾아야 해요. 못 구하면 나의 노동력이 한국에선 쓸모없단 의미니, 집으로 돌아가야 하죠.

지금까지 한국에 살면서, 한국 사람들이 ‘우리는 하나’를 외치며 서로 사랑하고 단결하는 모습을 좋아했어요. 뿌리깊은 단일민족주의에서 나온 문화죠. 하지만 그런 민족주의도 ‘인권’이란 가치를 넘어설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주민들은 무엇을 위한 수단도 아니고, 불쌍한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도와가며 함께 사는 사람들일 뿐이죠. 단 한명이라도 그의 권리를 존중받지 못하는 일은 이제 한국에선 없어야 해요. 한국은 이미 민주화, 선진화 된 나라잖아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본인도 ‘미등록 노동자’의 신분이신데 이런 활동을 하는 게 위험하진 않으신가요? 

 

하하. 왜 아니겠어요. 한 미얀마 친구가 고용허가제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기자회견에 초청된 적이 있어요. 그 친구가 한국말을 못해 제가 통역해주기로 했죠. 그런데 출입국관리소에서 전화가 왔어요. 한국은 외국인의 정치활동이 금지돼 있대요. 그래서 제가 그걸 통역해주면 출입국법 위반으로 추방하겠다더군요. 그런데 제 생각엔 아무래도 그 직원께서 정치라는 걸 잘 이해 못하셨던 것 같아요. 우리가 매일 먹고 자고 일하는 모든 활동이 정치 아닌가요? 그런 사소한 활동도 제대로 안되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건데….

 

-다 그만두고 미얀마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많을 것 같아요.

문제가 있을 때 도망가면 참 간단하죠. 그런데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순 없어요.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계속 노력하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우리가 만들 수 있어요. 가고 있으면 언젠간 목적지에 닿는 것처럼. 처음 한국 왔을 땐 ‘3년만 있다 가야지’ 했어요. 그런데 일이 좋고 사람들이 좋아 있다 보니 3년은 훌쩍 지났고, ‘2002년 월드컵만 보고 가야지’ 했는데 아직도 못 갔어요. 한국은 제게 또 하나의 고향이에요. 지금 제가 하는 활동도 한국이 싫고 한국 사람이 미워서 하는 게 절대로 아닙니다. 비판이나 항의를 하는 게 아니라, 정든 내 고향이 더 좋아졌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표현하는 거예요.

나 혼자 잘 살긴 쉽지만, 많은 사람이 다 같이 잘 살게 되는 건 어려워요. 그래도 많은 사람이 잘 살면, 그 안에 나도 포함되니 좋은 거죠. 그게 제 희망이에요.

 

-최근 한국사회도 이주노동자, 다문화 가정 등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죠. 정부 차원에서도 많은 정책이 나오고, 국회에도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가 생기구요. 상황이 많이 나아지고 있는 건가요?

 

우리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건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거죠.  이주노동자 친구들이 겪은 일들, 바라는 점들을 기자회견, 세미나, 시민단체들을 통해 글로, 인터뷰로 표현하려고 노력했고, 지금에서나마 그걸 들어주려고 한다는 게 저희에겐 반가운 일입니다. 지금 다문화 사회를 위한 정책이 나오곤 있지만, 그 대상은 노동자와 국제결혼가정 뿐이에요. 지금 한국에 있는 이주민들이 백만 명 정도 되는데, 정책의 혜택을 받는 건 15만 정도밖에 안 되는 거죠. 나머지 90만 이주민에 대한 배려도 필요해요. 한국 경제에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가정을 배려하는 건 사실 민족주의 성격이 더 강한 거라고 봐요.

하지만 정책의 근본은 정말 그들을 한국 사람들과 동등하게 사랑하고 존중하는 한국 정부의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 정책들은 오래가지 못할 거예요. 

 

-지금은 무슨 일을 하세요?

 

소화기에 압력을 표시하는 계기판을 만드는 일을 해요. 이주노동자 인권 운동하면서 만난 선배님의 동생이 운영하시는 회산데, 5년 째 일하고 있어요. 외국인 노동자는 저 혼자죠.

 

-요즘 경제가 많이 어려운데, 영향은 안 받으세요?

 

얼마 전 한국인 직원 3명이 정리해고 됐어요. 그런데 전 제일 마지막까지 남을 자신 있어요(웃음). 사장님이 “너만 있으면 내가 회사를 비워도 마음이 편하다” 하시거든요.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차별하지 않는 사장님도 훌륭하시지만, 내 자리를 안정적으로 보장받고 싶으면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배우고 정말 열심히 해서 인정받으려 스스로 노력하는 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계획은요?

 

우선 이주노동자방송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게 큰일입니다. 전문 인력도 부족한 상황이라, 좀 더 나은 방송을 만들려고 미디어 관련 공부를 하고 있어요. 방송장비 다루는 법도 배우고 있구요.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은 입국하자마자 산업안전교육을 하루 받게 되는데, 한국어도 서툰 사람들이 하루 배운 것 가지고는 절대 안전하게 일 못해요. 다쳐도 보상받을 권리가 없는 사람들인데. 그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산업안전기사 자격증을 따려고 공부 중입니다.

매년 열고 있는 이주노동자 영화제도 준비 중이예요. 밴드 공연도 해야 하고. 힘들지만 열심히 하면 언젠간 잘 되겠지 하는 희망과 기대를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글 서지영 나라경제 기자
사진 전민규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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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9 14:51 2009/09/19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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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노동자 권리, 합법 불법 따지지 말고 제공되어야

 

- 버마 이주노동자 위한 지역순회 노동법 강의를 가다

 

이현정, 2009-02-09 오후 3:34:07   

 

 

본 기사 내용과 사진을 인용하실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세요. 일과건강 누리집에 놀러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노동인권회관의 김우정 활동가가 노동법을 강의했다. 근로시간, 급여, 퇴직금, 구제 등 이주노동자가 꼭 알아야 할 내용이었다. ⓒ 이현정 

 

일요일 오후 23명의 노동자


버마 이주노동자들에게 노동법과 안전보건을 교육하는 '지역순회 노동법 강의'가 경기도 모처에서 열렸다.


지난 2월 8일(일) 버마국민운동촉진위원회(버마위원회) 주최로 연 이날 교육은 오후 3시부터 6시30분까지 별도의 휴식시간 없이 진행되었다. 버마위원회는 NLD(버마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버마행동?소수민족 단체?한국 내 지역 모임?버마 이주노동자 등으로 구성된 단체이다. 교육에는 23명의 버마 이주노동자들이 참여했다. 이들 중에는 고용허가제 기간 중의 사람도 있었지만 다수는 이미 정부로부터 ‘불법’ 꼬리가 달린 이주노동자들이었다.


노동법 강의는 ∇근로시간 ∇급여 ∇퇴직금 ∇구제방법을 중심으로 한 내용이었다. 교육에 참가한 이주노동자들은 월 120만 원 정도의 급여에 대개는 초과근로수당을 지급받지 않는 것이 질문과 대답 과정에서 드러났다. 또한 급여명세표를 따로 받지 않았다. 은행계좌 입금확인이 대신한다. 그래서 어떤 항목이 급여에서 제공되는지 모른다.


 

 

노동안전을 강의하는 소모뚜 씨. 그 자신도 평일에는 일하는 노동자이다. ⓒ 이현정 

 


“와서 교육해 주니 도움 많이 된다.”


안전보건은 소모뚜 씨가 맡았다. 그 자신도 평일에는 일하는 노동자다. 소모뚜 씨는 2008년 노동환경건강연구소와 노동인권회관이 주관한 ‘이주노동자 안전보건 강사 양성교육’ 수료자이기도 하다.


한국에 1993년에 온 덩풍 씨는 “열심히 일했는데 다치거나 월급을 못 받는 버마 노동자들을 도와주는데, 아는 게 많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다.”면서 “그런데 이렇게 와서 교육을 해주니 도움이 많이 된다.”며 소감을 밝혔다. 덩풍 씨는 1994년의 사고로 오른쪽 두 번째 손가락 한 마디가 없다. 일하다 다친 산업재해였지만 보상은 없었다고 한다.


 

 

노동법 강의가 끝난 뒤 질문하는 한 노동자.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노동자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제대로 제공되지 않는다. ⓒ 이현정 

 


제대로 된 강의는 이번이 처음


통역과 안전보건 강의를 한 소모뚜 씨는 버마위원회 지역순회 노동법 강의는 앞으로 안산, 대구지역에서도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노동법 강의에 관심 있는 버마 노동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지역을 가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교육 참가생 조수아나 씨는 아스팔트 재료를 생산하는 제조업체에 다닌다. 한국에 온 지 8년 되었다. 노동법 강의는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몇 년 전, 월급을 못 받아 이주노동자 지원 단체를 찾아갔을 때였다. 그는 “여기까지 와서 설명해주고 버마 사람이 와서 통역도 해 주니까 너무 고맙다.”며 몰랐던 것을 알게 되어 좋다고 말했다. 조수아나 씨는 한국에서 여러 가지 기술을 배운 다음에 한국과 버마를 오가는 무역업을 하고 싶다는 꿈을 밝히기도 했다. 물론 합법으로.


 

 

한국에 체류하는 버마노동자 부부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대한민국은 이 아이에게 차별없는 인권을 제공할 수 있을까? ⓒ 이현정 


휴일 반납해도 기꺼운 지식 쌓기


합법이든 불법이든 적어도 이주노동자에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법과 안전보건 내용은 제공되어야 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노동으로 지친 한 주일의 피곤함을 씻고 재충전해야 할 일요일에 어디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노동법과 안전보건 지식을 배우려고 그들은 휴일을 반납했다. 버마 노동자들 얼굴에는 비록 휴일에 제대로 쉴 수는 없었지만 일터에서 필요한 내용을 배워 즐거웠다는 표정이 가득이 했다.


 

[덧붙이는 글]

 교육을 마친 뒤 버마 요리를 대접받았다. 오리고기 요리와 마늘과 붉은고추 등을 매콤하게 볶은 것, 국, 밥, 김치. 후식으로 딸기, 배, 껍질을 깐 귤까지. 외지인에게 베푸는 따뜻한 마음은 우리네 인심과 다를바 없었다.(지금은 더 후하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주노동자들이 3D 업종에서 생산을 도맡는 사실은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 현실에 맞게 법과 제도를 고쳐야하지 않을까? 언제까지 그들을 불법이라는 이름으로 검거하고 내쫓을 것인가? 

 2009-02-09 오후 3:34:07   © safedu.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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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9 13:19 2009/08/29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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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나라로부터의 보고 - 「버마 VJ」

 

 


인터뷰 : 소모뚜 (버마행동한국 총무, MWTV 대표)
정리 : 주영 (ACT! 편집위원)

 

처 음 버마라는 이름을 본 것은 한 신문에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님들이 군부에 저항하고 거리로 나와 집회를 하기 시작했다며 한 장의 사진이 조그맣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미얀마가 아니라 버마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민주화와 관련된 이유도 적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당시 버마의 소식은 국제면을 채우고 있는 하나의 기사에 불과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하고 심각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대한민국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무관심을 감출 일종의 핑계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부끄럽지만 아웅산 수지라는 이름은 알면서도 그녀가 버마 사람이고 버마의 민주화와 깊게 관련된 인물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이런 무지, 무관심이 나만의 것일까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다시 버마를 만난 것은 인권영화제에 상영된 영화「버마VJ」를 통해서였다. 군부에 대항하여 민주화를 하려는 버마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그 영상이 버마에서 만들어지지 못하고 안데르스 외스터가르트라는 서양인 감독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부분이었다. 영상들은 버마 안에서 버마인들에 의해 찍혔다. 하지만 자국에서는 그것들을 모아 영상으로 만들 수조차 없을 정도로 안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궁금해졌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한 버마인 활동가를 만나보았다. 함께 「버마 VJ」를 보며 버마의 상황에 대 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30 명의 버마 리포터들로 이루어진 DVB(Democratic Voice of Burma)는 비밀리에 자국의 인권침해 현장을 찍어서 위성으로 오슬로에 보낸다. 2007년 지난여름, 40년간 이어져 온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집회가 군부 정권에 의해 짓밟히자 목숨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세상에 알릴 영상을 촬영한다.

- 제 13회 서울 인권영화제 홈페이지 「버마vj」소개 중에서 -

 

 

영 화의 이야기는 1988년에서부터 시작한다. 군부의 폭압적인 통치에 저항하며 사람들은 거리로 나왔다.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고 그 수는 점차 불어났다. 하지만 군부는 생각보다 강력하고 잔인했다.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진압을 실시했던 것이다. 시민들에게 총을 쏘기까지 하며 진행된 강경한 진압을 통해 3000여명의 사람들이 죽었다고 한다. 군부의 실체는 어쩌면 바로 이 때 가장 잘 드러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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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 (ACT 편집위원) : 한국에서 버마 이야기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어떤 상황인지 말해줄 수 있는가?

 

소모뚜 (MWTV 대표) : 버 마가 48년도에 독립하고 10년 정도는 민주 국가였다. 그런데 그 이후 내전이 일어나고 군부 독재가 시작되었다. 처음 지도자는 독립 운동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말해왔다. 사실 나름 자유도 있었고 상대적으로 괜찮다고 느끼던 시기였다. 그는 버마식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국정을 운영했는데 어차피 민주주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협동조합과 같은 것도 처음에는 국민이 운영을 하다가 국가의 운영으로 바뀌면서 점차 부패하기 시작했고 결국 전체적으로 나라가 가난해졌다. 실제로 1987 년도에는 버마가 세계 최빈국이 되었다. 과거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 집 같은 경우에도 평범하게 살았는데 삼남매가 교육을 마음껏 교육을 받았고 가끔 마을에서 잔치를 열기도 했다. 절에 공양도 드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 역시 시간이 지나며 불가능해졌다.

 

사 실 1988년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국민들이 함께한 커다란 정권 반대 투쟁이 있었다. 나 같은 경우에 1988년에 13살이었는데 사람들과 함께 시위에 나가곤 했다. 선배들이 주도해서 거리로 나가곤 했던 것이다. 그 때 사람들이 바다처럼 몰려오고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좀 재미있기도 했다. 그 안에는 교사들, 학생들, 군인들도 있었고 다양한 국민들이 참여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힘내라고 박수치면서 하루 종일 시위를 하고 그랬다. 직접 나의 눈으로 목격했던 그 시절의 기억이 똑똑히 남아 있다. 물론 진압하던 군인들이 사람들에게 총을 쏘고 그 흔적이 우리 옆집에 남았던 것도 기억한다. 그런 잔인한 기억들의 두려움에서 빠져나오기는 정말 힘들다. 하지만 함께 할 때 용기가 생기는 법이고 정말 참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면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어쨌든 그 해 당시 군부 지도자는 국민들에게 대선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누구나 당을 만들고 그 중 투표를 통해 수위에 오르는 사람에게 정권을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국민들의 강렬한 요구도 있었지만 사실 그들은 자기들이 이길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국민의 90% 이상이 아웅산 수지 여사와 그녀가 속한 NLD를 찍어버렸다. 물론 사람들은 아웅산 수지 여사도 모르고 당도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당시 정권이 너무 싫었기 때문에 반대쪽에 많은 지지를 보낸 것이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군부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정권을 넘기지 않았다. 그 이후에 국회의원도 필요 없다며 구속해버리고 아웅산 수지 여사는 가택연금을 실시해버렸다. 그렇게 지금까지 통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주영 : 영상을 보니까 지금은 촬영도 할 수 없고 사람들이 모이기만 해도 잡아가고 이런 부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1988년 때부터 그런 것인가?

 

소모뚜 : 그렇다. 1988년 싸움 이후에 여러 방면에서 너무 많은 탄압이 있었다. 미디어 쪽에서도 그렇고 사람들의 삶도 그렇고 문제가 많았다. 예를 들어 잡지 같은 경우 군부 마음에 안 드는 얘기가 나오면 출판되기 전에 잉크로 칠해버린다. 어떤 책을 보면 한 페이지가 다 잉크인 경우도 있다. 사실 보면 별 내용도 아닌데 말이다. 출판도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고 신문들도 많이 없어졌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조중동과 같은 신문들만 남게 되었다. 그런 언론들은 항상 정권의 치적만 부각시켰다. 어디에 다리를 짓고 어디에 건물을 짓고 하는 식의 것들을 말이다.

 

지방 같은 경우에는 탄압뿐만 아니라 나라에 봉사하라며 강제적으로 노역을 시키기도 한다. 만약 나오기 싫다고 한다거나 나올 사람이 없으면 5천 짯 의 벌금을 부과한다. 한국 돈으로는 3,4천 원 정도 되는데 버마 보통 사람의 월급이 한국 돈으로 2만 원 정도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큰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 일해 하루를 먹고 사는 인생이기 때문에 벌금을 내지 않기 위해 아이들까지 데리고 일을 하러 가야한다. 이를 보며 군부는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봉사한다고 미화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공사를 위해 외국 기업이 들어오면 군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인력이 있으니 말만 하라고. 그리고는 그 동네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다.

 

 

탄 압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버마 군대의 잔인함을 드러내는 이런 예도 있다. 군대가 지역 무장 투쟁 조직과 싸우기 위해서는 길에 설치된 지뢰를 없애야 한다. 그를 위해 군대는 마을 주민들을 앞세운다. 그들은 걸어가며 자신도 모르게 지뢰를 없애게 되는 것이다. 예전 일제 통치시기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 때는 소 같은 동물을 사용해 지뢰를 없앴다고 들었다. 이처럼 지역의 주민들 또한 항상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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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화 속에서는 큰 집회가 일어나기 전에도 존재했던 용기 있는 시민들의 모습 또한 담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은 거리에서 버마의 민주화를 외치며 군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인지 얼마 되지 않아 시민들 속에 숨어 있던 비밀경찰들은 연행을 시도했다. 거리의 시민들은 경찰들로부터 용감한 이들을 지키고자 했고 더 많은 경찰들이 몰려와 시민들을 모두 데려가곤 했다. 저항하고 연행되고 아무도 모르게 감옥에 갇히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어찌 보면 무의미할 수도 있었다. 때문인지 영화 속의 내레이터도 1988년을 통해 우리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비관적으로 말하곤 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군부 정권은 여전히 그들을 통치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 들은 자신들의 민주화를 향한 욕망을 확인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과 함께 싸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소득들은 2007년 집회로 이어졌다. 영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시작은 스님들에 의해서였다. 수많은 스님들은 절에서 나와 길을 걷고 사람들과 노래했다. "모든 존재들이 두려움과 가난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버마 국민들의 분노는 표면적으로 기름값 인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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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뚜 : 원래 버마가 불교 국가이기 때문에 스님이 부모나 다름없다. 어렸을 때부터 법회에 참여하고 말씀을 듣고는 한다. 여러분이 직접 그 생활을 느껴보면 알겠지만 스님들은 정말 평화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존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스님들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리고 자신의 평화로운 생활을 넘어 직접 집회를 한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본인들이 나서야만 한다는 생각이 섰기 때문에 참여하신 것이다.

 

물 론 1988년에도 스님들이 참여하기는 했지만 주로 주도한 것은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스님들이 주도했다. 그걸 보면서 저희 같은 일반인들은 우리가 잘 못해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부족해서 존경하는 스님들까지 시위를 하셔야 하구나 생각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부모님의 고생을 보며 아파하는 자식의 심정과 비슷한 것이다. 비를 맞으면서도 평화롭게 행진하고 기도하는 모습들 보며 저 같은 경우도 눈물이 났었다. 더군다나 군부가 그런 분들을 죽일 수까지 있다는 사실을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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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회는 무척 크고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힘의 바탕에는 미디어가 존재했다. 실제 「버마VJ」를 위한 영상들도 DVB(Democratic Voice of Burma)라고 불리는 기자들의 조직에 의해 촬영된 것이었다. 길에서 민주화를 외치는 이들을 찍는 순간에도, 스님들이 자유를 외치는 순간에도 DVB의 기자들은 몰래 카메라를 들고 길로 나섰다. 이들 역시 연행의 대상이었기에 항상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가방 속에 카메라를 넣고 때로는 옷 사이에 감추기도 했다. 영상의 초반 제작자가 고백하는 것처럼 마구 흔들리는 영상이 포함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들 DVB의 기자들이 없었다면, 블로그에 사진과 소식을 올리는 블로거들이 없었다면 세계인들이 버마의 상황을 알 수 있었을까? 내가 생각하는 대답은 ‘아니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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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 : 버마 집회에 있어 미디어가 어떤 역할을 했나?

 

소모뚜 : 먼저 인터넷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 좋겠다. 버마의 경우 인터넷이 느리지만 전국으로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많이 했다. 1988년도 같은 경우에는 사람들이 컴퓨터 같은 매체를 잘 몰랐기 때문에 어떤 소식이 외국으로 나가는데 4주나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2007년에는 버마의 소식이 바로바로 전국, 전 세계로 전해졌다. 구글과 같은 사이트의 블로그를 통해서다. 그 안에는 유명한 버마인 블로거들이 있었다. 그들이 영상은 아닐지라도 버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인터넷을 통해 알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도 오늘 버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고 그들이 필요한 도움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블로거,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자신의 핸드폰 카메라를 통해 사진, 영상을 찍고 인터넷에 올렸다. 이들과 블로거들의 활동, 그리고 앞에서 본 영상 속 활동가들의 활동들이 2007년 민주화에 큰 역할을 했다. 누구나 현실을 똑똑히 볼 수 있도록 말이다.

 

특히 DVB같은 경우에 인터넷 신문, 라디오, 위성 방송, TV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버마 전국에 소식을 전하고 있다. 지금도 유투브에 검색을 해보면 그들이 올린 소식들을 접할 수 있다.

 

주영 : 영상 속에서 DVB의 조직이 붕괴되었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지금은 괜찮은가?

 

소모뚜 : 지금도 계속 뉴스가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붕괴되거나 끊기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에는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으니 피해야 했을 것이다.

 

사 실 버마에서 미디어를 통해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미디어를 통제하는 법 때문이다. 예전에 한 블로거가 정부를 비웃는 만화를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그는 앞에서 말한 법의 적용을 받아 12년 형을 받았다. 또한 버마 같은 경우에 여러 가지 죄목을 붙여서 활동가들에게 엄한 벌을 내린다. 미디어 관련 법, 전자기기 관련 법, 나라를 혼란스럽게 한 법, 군부에 대한 명예훼손법. 이런 것들을 합치면 100년형을 받기도 한다. 지금 학생 운동 지도자들이 68년 형, 104년형 뭐 이렇게 형을 받고 감옥에 있는 경우도 많다. 아까 영상의 기자들이 무기 징역을 받은 것도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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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버마의 군부는 무조건 강하게 탄압하면 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들고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으면 때리고 쏴서 그러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존경의 대상이었던 스님들도 자신들의 정권을 위해서라면 몰래 죽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모두 잡아들였다. 그렇게 어딘가로 잡혀간 스님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을 비밀리에 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행동이 방송을 통해, 인터넷을 통해 널리 퍼지자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왜곡이었다. 버마의 경찰청장은 기자들을 모아놓고 DVB를 비롯한 활동가들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오히려 그들이 현재 상황을 왜곡하고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고 말이다. 마치 테러리스트들이나 조직폭력배들을 보여주듯 활동가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멋들어진 도표도 만들어 설명했다. 그들이 바로 이 모든 집회와 혼란의 배후세력이라는 의미였다.

 

나 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너무나 씁쓸한 장면임에도 어디선가 본 것처럼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배후, 혼란, 왜곡. 사건의 본질을 가리기 위해 권력을 가진 이들이 흔히 던지는 말들. 그 모습을 멀다고만 느꼈던 버마의 영상 속에서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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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 : 경찰들이 활동가들에 대해 왜곡된 말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하던데 어떤 느낌이 들었나?

 

소모뚜 : 어이가 없는 일이다. 그들이 그렇게 말해도 판단은 어차피 국민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민들이 그렇게 무식하지 않다. 뭐가 옳은 것인지 판단할 수 있다. 아무리 자기들이 그렇게 말해도 국민들이 믿지 않는다. 실제 버마에서는 저녁 때 정부를 홍보하는 TV 프로그램을 내보낸다. 그러면 사람들은 전원은 끄지 않고 소리만 꺼놓는다. 그 뒤에 우리가 좋아하는 연예인들 얘기나 노래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8시쯤 되면 다시 뉴스가 나오는데 그럼 또 소리를 꺼놓는다. 한국에서 땡전 뉴스가 있었던 것처럼 버마의 뉴스도 군부의 소식만 전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그런 뉴스를 보면서 재수 없어 한다. 그럼에도 소리만 줄여놓는 것은 밤에 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서다. 이제 영화가 시작하면 다들 모여서 영화를 본다. 돈 있는 사람들의 경우 위성 안테나를 사서 DVB처럼 위성을 하는 방송을 틀고 동네 사람들과 모여서 함께 보기도 한다.

 

국민들은 안다. 알아서 잘 판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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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 마와 대한민국. 다르다면 참 많이 다르지만 비슷하다고 말하면 또 무척 비슷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버마VJ」는 여러 가지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특히 그 고민들은 권력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 문제가 있다면 저항해야하는 우리들을 향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뜨겁게 자신의 목소리를 냈는가? 목숨까지는 걸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더 자유로운 세상을 위해 무엇을 걸었는가? 아주 작은 것이나마 그런 사회를 위해 포기할 수 있었던가?

 

사실 영상은 그리 재미있지 않다. 1시간 20여분의 상영 시간은 조금은 길다고도 생각되었다. 하지만 영상이 던져주고 있는 고민들을 되새겨보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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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뚜 : 마지막으로 버마 내에서 집회가 일어날 때에만 전 세계가 집중할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버마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물론 남의 나라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버마의 상황은 더 안 좋아질 것이다. 어떤 조사에서는 버마가 곧 망할 국가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었다. 유엔이나 미국에서 립서비스만 하지 말고 정말 도우려는 마음이 있다면 제대로 도와줬으면 좋겠다. 사실 그 쪽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희망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소 모뚜씨는 현재 이주노동자의 방송 MWTV 공동 대표를 맡고 있으며 주로는 이주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운동을 하고 있다. 또한 버마 민주화 단체 버마행동한국에서 총무로도 일하고 있으며 다국적 밴드에서 기타와 작곡을 하고 있는 음악인이기도 한다. 그와 그의 활동이 궁금한 분들은 소모뚜의 블로그(http://blog.jinbo.net/lovehuman/)를 통해 새로운 정보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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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9 00:59 2009/07/29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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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들 "안전한 작업환경 조성 시급"
의정부경전철 철골구조물 붕괴
(의 정부=연합뉴스) 25일 오후 7시20분께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 드림밸리 아파트 부근 경전철 공사현장에서 교각 상부에 놓여 있던 대형 철골 구조물이 무너져 4명이 숨지고 9명이 부상했다. <<전국부 기사 참조>> 2009.7.25
kyoon@yna.co.kr

근로자ㆍ기업ㆍ정부 3위일체로 사고 예방 나서야



(서울=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 "이주 노동자들은 저승사자를 등에 업고 일하는 것 같습니다."


경기도 의정부시 경전철 공사현장에서 25일 오후 발생한 철골구조물 붕괴사고로 베트남 출신 근로자 2명 등 5명이 숨지고 8명이 부상(베트남 근로자 2명 포함)한 가운데 이주 노동자들은 한목소리로 "작업장의 안전환경 개선이 시급하다"고 강조하고 나섰다.


이주노동자방송(MWTV)의 소모뚜(34.미얀마) 공동대표는 26일 통화에서 "이주 노동자가 주류를 이루는 국내 '3D 작업장'의 안전환경이 극히 열악하다"며 회사와 정부 모두 사고 예방교육 및 안전환경 개선대책을 서둘러 마련해달라"고 촉구했다. 그는 "이주 노동자들의 가장 큰 소망은 체임 문제 해결이 아닌 안전작업 환경 개선이다"고 덧붙였다.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소재 소화기 부품업체의 관리책임자로 있는 소모뚜 대표는 "안전사고의 일차적 책임은 근로자 자신에게 있지만 회사측도 사고 발생을 경고해주는 센서 설치나 근로자가 눈치 보지 않고 위험 상황시 기계작동을 즉시 멈출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정부도 기업에 안전사고 예방 교육을 지속적으로 시키는 등 행정적인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소모뚜 대표는 이주 노동자들과 면담하는 과정에서 "한국어도 능숙하지 못한 데다 기계작동법도 숙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것저것 만져보면서 작동하다 다치는 사례가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포천의 한 식당에서 일하는 헤이룽장성 출신의 동포여성은 "식당에서도 가스폭발이나 끓는 물 등에 데는 등 안전사고가 자주 일어난다"면서 "한국에 갓 입국해 한국어나 식생활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주방 보조원으로 일하는 중국 여성(동포 포함) 중 화상이나 허리 디스크 환자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김해성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공동대표(목사)도 26일 "정부가 이번 사고를 계기로 산업안전법이나 유해사업장의 직업병에 대한 산업안전보건법이 철저히 이행되고 준수되도록 산업안전근로감독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이주노동자에게 산업안전수첩이나 각국 언어로 된 포스터나 표어,전단 등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사고예방을 위한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며 "외국인 노동자 교육시 산업안전과 산재예방 교육을 대폭 강화해 산재를 줄이면 치료비나 보상금으로 나가는 국가비용도 절감된다"고 말했다.



  

duckhw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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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7 21:36 2009/07/27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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