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가정] 우리가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   기본 처우부터 국적취득까지… 한국은 ‘좁은 문’   최영진 기자 yj7401@paran.com
 
올해로 13년 째 한국생활을 하고 있는 사누 파라자파티(39)씨는 네팔이 고향이다. 그는 현재 경기도 부천에 위치한 인도·네팔 전통음식점 ‘안나푸르나 레스토랑’을 한국인 부인 이금옥씨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빨간 티셔츠를 입은 두 사람이 밝게 인사를 한다. 피부색과 생김새는 다르지만 한눈에 부부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네팔에서 사업 실패로 많은 빚을 져 결국 돈을 벌기위해 한국행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누씨. 그는 96년에 산업연수생의 신분으로 한국에 들어와 주로 원단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36시간동안 잠 한숨 안자고 일했던 적도 있어요. 그렇게 일해도 사장은 월급을 잘 안 줬어요. 3개월 넘게 밀리기도 하고, 일부만 주기도 하고.” 지금은 괜찮다면서도 속상했던 이야기들을 계속 내어 놓는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를 많이 무시했어요. 입에 욕을 달고 살았고요. 툭하면 ‘야, 이 새끼야’했죠. 참 속상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오히려 우리가 그 욕을 그대로 배우기도 했어요.” 한숨 쉬며 말하는 사누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막말로 무시하고, 각종 차별 대우에 생존의 위협까지. 이주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또 다른 사례를 들었다. “택시를 타는데 외국인이라 그런지 일단 반말부터 하더라고요. ‘어디서 왔냐? 돈 많이 벌었어?’기분이 나빴지만 처음엔 그냥 넘어갔죠. 그런데 기사가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지도 않고 중간에 내리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가 아니라고 해도 시끄럽다며 내려서 걸어가라 하더군요. 그래서 세게 항의를 했죠. ‘당신 신고하겠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함부로 하지 마라’ 한국말을 꽤 하는 모습을 보곤 아무 말도 못하더라고요.”
 
 
그들이 한국에서 결혼 못한 이유

결혼생활이 궁금해졌다. 2000년에 아는 사람의 소개로 만났다는 사누씨와 금옥씨는 2003년에 네팔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으로 다시 왔단다. 당시 한국에서는 미등록 상태인 사누씨의 신분 때문에 혼인신고를 할 수 없었는데, 6개월 출국했다 들어오면 다시 올 수 있다는 어느 신문기사를 보고, 네팔로 나가 결혼해서 7개월을 살고 왔다고 한다. 한국에 다시 돌아와 2004년 11월에 레스토랑을 내고 5년째 살고 있다면서 결혼과정을 설명한다.
앞으로도 한국에서 계속 살아갈 거라는 사누씨는 아직 한국 국적이 아니다. 한국인과 2년 이상결혼생활을 하면 국적 취득을 신청할 수가 있어서 2년이 지나 신청을 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단다. 아직 자녀가 없는 탓에 위장결혼 의심을 받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은 자녀가 있어서 그런지 한국 국적이 나왔어요. 아이가 없다고 우리가 거짓으로 함께 사는 것도 아닌데….”
현재 사누씨는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되고 한국말이 서투른 사람들을 대신해 통역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자신이 겪었던 억울함을 다른 사람이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또 지역 내 단체와 함께 한 초등학교에서 네팔을 소개하는 교육을 맡기도 했단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누씨와 금옥씨 부부의 행복을 빌어 본다.
 
 
당신에게 소중한 자유는 우리에게도 소중하다

두 번째로 만난 소모뚜씨는 올해 34살이다. 그는 이주노동자 밴드 ‘스탑 크랙다운(stop crack down band - 탄압을 중단하라)’에서 기타를 치면서 버마행동 총무도 맡고 있다. 일터에서 퇴근하고 나온 그를 만났다. 인사를 하며 건네는 명함 위 ‘자유를 위해 노력하는 우리에게 당신의 자유를 나누어 주세요’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1995년, 스무살 때 한국에 들어왔다는 소모뚜씨에게 어린 나이에 한국에 오게 된 계기를 물으니 버마 군사정권하의 정치상황을 전한다. 숨도 쉴 수 없는 감시, 탄압 속에서 버마(미얀마)를 벗어날 기회만 엿보다가 한국으로 오게 됐단다.
소모뚜씨는 처음 8년 동안 김포에 있는 박스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는 군사정권하에서 살아와서 처음에는 노동이라는 것이 법에 의해 보장받는다는 생각을 못했단다.  “근무시간은 6시 반까지였는데, 매일 밤 10시까지는 거의 연장근무를 했어요. 사장 맘대로 새벽 1, 2시까지 일을 시키기도 했죠. 그런데 시급이 4,000원이라면 연장근무 할 때는 3,000원만 줬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 같지만 그때는 몰랐죠.” 그렇게 8년을 일하고 2003년 서울에서 있었던 이주노동자 농성 투쟁에 결합했다는 그는 지금은 다른 회사에서 5년째 일하고 있단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 싫어서 일을 배우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면서 지금은 실력도 있고, 인정도 받고 있다고 자부심을 내비쳤다.
소모뚜씨도 처음에는 다른 이주민들처럼 얼토당토않은 질문들을 많이 받았단다. “너희 나라 사람들은 옷은 입고 다니냐? 너희 나라에 해는 있냐? 달은 몇 개냐? 이런 식의 질문을 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농담으로 나뭇잎으로 옷 만들어 입는다고 그랬더니 진짜로 믿더라고요….” 그의 눈에 한국 사람이 어떻게 보였을까?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무시하고, 영어 쓰는 서양인들은 다가오기만 해도 겁내며 손사래를 치는 한국인들의 이중성이 느껴져 씁쓸했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불법과 합법의 경계

그는 지금 어떤 신분일까. “2005년 난민신청을 했는데 지난 9월에 난민신청을 받아줄 수 없다는 결과가 나왔죠. 물론 그렇게 나올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버마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는 거예요. 다만 버마 상황이 불안하니까 인도적 체류허가는 하겠다고는 했어요. 근데 버마상황을 누가 판단을 한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버마 상황이 호전되었다고 정부가 판단하면 우리는 쫓겨나겠죠. 우리는 여기서 쫓겨나면 정말 위험해요. 우리 입장을 누구 기준에서 판단한다는 건지….”
소모뚜씨는 현재 사귀고 있는 한국여성이 있다고 한다. “바빠서 만나지도 못해요. 지금 하는 활동도 열심히 해야 하고…”라며 계면쩍게 이야기 한다. 버마에 있는 가족과는 전화만 하고 14년 동안 만난 적이 없다는 그에게 한국은 앞으로 얼마를 더 살아야 할 지 모르는, ‘두 번째 고향 같은 나라’가 돼 가고 있다.
소모뚜씨는 고용허가제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그도 9년 동안 미등록인 상태로 생활했는데 예전에는 등록, 미등록의 차이가 그렇게 없었단다. 2003년 고용허가제가 실시되면서 살인적 단속, 인간사냥이 자행된 것이다.
고용허가제는 노동허가제와 달라서 회사와 1년 단위로 계약을 하고, 회사의 동의 없이는 직장을 옮길 수 없다. ‘입 닥치고 일이나 하라’는 식이다. 못 견디고 나오면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돼 버리고, 바로 ‘불법’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그 후엔 살인적인 단속, 그에 따르는 추방밖에 남지 않는다. 단속을 피해 도망가다 추락사 하는 등 죽어나가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지난 9월28일에는 버마 노동자가 출입국사무소에서 심장통증을 호소했지만 조치를 제대로 취해 주지 않아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고용허가제가 계속되는 한 한국사회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다. 그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부모에게 붙은 ‘불법’ 딱지는 바로 아이들에도 붙어버린다. ‘불법’이 되어 교육, 의료 등 모든 것이 사각지대에 내몰린 그들에게 삶은 전쟁이다.
 
 
피부색 다르지만 피 색깔은 모두 같아요

두 명의 이주민들에게 각각 한국인들에게 바라는 점을 물어보았다. 사누씨는 “지킬 건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월급 제대로 안 주는 사장들이 많아요.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지킬 것은 지켜야 하지 않나요? 한국 사람들 중에는 이주노동자들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 등이 더 심각해지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생각해 보세요. 한국 사람들, 대학생들 힘든 일 안 하려고 하지 않아요? 이주 노동자들, 한국 사람들이 안하는 정말 더럽고 위험한 일을 하고 있어요. 처음부터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 사람들을 부른 거 아닙니까. 싼 임금에 일 시키려고요. 외국 사람이라 피부색과 얼굴은 다르지만 피 색깔은 모두 같아요. 차별하고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많이 바뀌긴 했지만 인간답게 대우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소모뚜씨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인의 인식이 나빠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과 탄압이 심해서 그런지 한국인들에 대한 인식이 별로 안 좋아요. 한때 한국의 이주노동자 활동가가 네팔을 방문했는데 네팔사람들이 한국인이 왔다고 굉장히 분노했다고 해요. 그때 같이 있던 사람들이 나서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우리를 도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다’고 수습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인식이 안 좋아요. 배 타고 돌아다니는 선원들 사이에는 이런 이야기도 떠돌아요. 선원들이 러시아 등 현지에서 결혼하려고 하다가도 한국인이라면 결혼을 거절하더래요. 인정하고 싶건 아니건 이제는 정말 따로 살 수 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해요. 지금뿐 아니라 앞으로는 더욱 서로 도움을 줄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될 거에요. 우리 모두 서로 존중하고 이해했으면 좋겠어요. 서로 진정으로 친구가 되어야 해요. 한국인들도 이제 시야를 넓혀야 해요. 오히려 그게 한국을 위해서도 좋은 일 아닐까요?” 그의 마지막 물음에 대한 답을 내려야 할 때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06/01 22:33 2009/06/01 22:33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lovehuman/trackback/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