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 양태삼 | 입력 2011.05.08 07

 

"외국인 차별보다 사람 차별 없애야"

(서울=연합뉴스) 양태삼 기자 = "한때는 간절히 한국인이 되고 싶기도 했어요.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김치 없인 밥을 못 먹으니 한국인 같은데 버마(옛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일하니 버마인이기도 하거든요."

미얀마인 소모뚜(36)씨는 체류 외국인이 120만 명에 이르는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신분이 독특하다며 이렇게 정체성을 설명했다.

 

                          < 인터뷰 중인 소모뚜씨 >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 체류하는 외국인, 한국에 살러 온 이주민 등으로 나누자면 그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4월 말 현재 243명인 난민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소모뚜씨는 2004년 낸 난민 신청을 법무부가 2009년 기각하자 바로 소송을 제기, 최근 대법원 최종심에서 이겨 3월25일자로 외국인등록증과 난민인정서를 받았다. 난민은 인종이나 종교, 정치적 의견 등을 이유로 차별과 박해를 받아 고국을 떠난 사람으로 1992년 유엔(UN) 난민협약에 가입한 한국은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난민으로 인정된 게 한국에서 가장 기뻤던 때냐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첫 월급을 타서 고향에 송금했던 때"라고 꼽았다. 경기도 김포의 한 박스 제조업체에서 새벽 1시까지 일해 75만 원을 받은 뒤 64만 원을 보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당시 19세였던 그는 "온갖 죽을 고생을 해 번 돈이 무엇보다 반가웠고 깨끗한 것이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며 "내 힘으로 해냈다는 성취감에 감격했다"고 말했다. 그 공장이 가끔 꿈에 보이면 지금도 식은땀을 흘린다고 술회했다.

미얀마의 어머니에게 집을 사드린 게 두 번째로 기뻤던 때라고 말했다. 김포 공장에서 8년을 일하고 소송 끝에 받은 퇴직금 600만 원에 친구들에게 꾼 돈을 보태 1천200여만 원을 만들어 보냈다. 그의 모친은 창문을 열면 미얀마에서도 이름난 쉬다공 사원을 바라보고 절할 수 있는 집에 사는 게 평생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고향을 떠난 지 15년 만인 지난해 여동생을 만났다. 그가 보낸 돈으로 영국에서 공부한 여동생은 영국 시민권을 얻자마자 오빠부터 찾았다. 그간 가장 노릇을 한 보답으로 여동생은 오빠 노후를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고 소모뚜씨는 전했다.

가리봉동 소화기 제조공장에서 착실하게 일하며 월급을 송금하던 그에게 2009년은 고비였다.

그는 "돈을 벌려고 내가 태어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이주민 활동을 저버린다면 생을 마칠 때 나를 용납하지 못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2003년부터 이주민 밴드인 '스톱 더 크랙 다운'(Stop the Crack-down)의 멤버이자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단체인 '버마행동' 회원으로 활동했다. 버마행동은 주한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매달 시위를 벌이며 민주화를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1988년 집권한 미얀마 현 정부가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자 이에 반대하고 정체성을 지킨다는 뜻에서 '버마'라는 이름을 고수한다.

아울러 2009년 재정 위기로 난파 직전인 이주민방송(MWTV)의 공동대표를 맡아 후원금 배가 운동을 펴 위기를 넘겼다.

그는 당시 200만원의 월급을 받고 휴일과 퇴직금이 보장되던 공장을 그만두는 게 몹시 아까웠다면서 "지금 강연료 등의 수입으로 그 때만큼 버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돈을 벌 팔자인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리봉동의 월세 12만 원짜리 쪽방에 산다. 이주민방송에서 일한 활동비에다 여러 곳에서 받은 강연료로 여전히 한 달에 200여만원 수입을 올린다.

최근 한국이 직면한 다문화 바람에 대해 그는 할 말이 많았다.

그는 "다문화 활동가는 점점 사라지고 다문화 사업가, 다문화 사기꾼이 늘어난다"고 꼬집으며 "정부와 관련한 다문화 단체가 200여 개로 급증했는데 정부의 재원이 이주민뿐 아니라 한국인 활동가에게도 골고루 돌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주민방송이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주는 인권상 단체상 수상을 거부하자 '고맙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많이 받았다면서 "건전한 비판정신이 있어야 지금 걸음마 단계인 다문화 운동이 제대로 자리잡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불법체류 노동자 때는 단속을 피할 수 있도록 한국인처럼 보이길 간절히 바랬고, 지금은 김치 없인 밥을 먹질 못한다"고 말한 뒤 "하지만 미얀마 젓갈이 반찬으로 나오면 밥을 두 그릇이나 비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온종일 한국인과 만나고 한국어로 얘기하다 보면 한국인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다"면서 "어느 사회든 차별이 없을 수 없지만 '미얀마인 또는 난민에 대한 차별'이라기보다 '사람에 대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tsy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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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14:44 2011/05/08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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