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10'에 해당되는 글 5건

  1. 월급날 (2) 2010/06/10
  2. 전선인터뷰- 소모뚜 버마이주노동자활동가 2010/06/10
  3. 아름다운 고통 2010/06/10
  4. 버마의 문화 이야기 2010/06/10
  5. 이주의 탄생 2010/06/10

월급날

오늘 MWTV사무실로 출근하며 스탑크랙다운 밴드의 월급날노래를 들었다. 오랜만에 우리 밴드의 노래를 mp3로 들어본다. “오~사장님 이러지 마세요…. 그 동안 밀린 내 월급을 주세요”라는 가사을 들으니 또 마음이 아프고 답답해진다. “나를 욕한 것을 참을 수 있어도 내 월급만은 돌려주세요.”라는 노랫말에 지난 날 겪었던 일이 영화라도 보는 듯 떠올랐다.

96년의 어느 달 월급날이 되자 사장이 나를 부른다.

“소모뚜야~ 이리와 월급 줄께!”

그래 갔더니 월급봉투는 없다. 사장은 천원, 5천원, 5백원. 주머니에서 구깃구깃 구겨진 돈과 동전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나마 나의 월급을 다 채우기 전에 주머니 속 돈이 없어졌다. 사장은 마치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얼굴을 하며 “어? 다 떨어졌네! 나머지 거는 나중에 줄게” 한다.

87년 이전에는 한국의 직장에서 이런 일은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한국인에게는 더이상 아니겠지만 이주노동자에게는 아직 흔한 일이다. 욕하고 발로 차고 손으로 때린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이들이 미등록 이주노동자이기에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필요하고 한국의 절차대로 불러온 이주노동자들에게도 임금체불, 욕, 폭행은 다반사다. 일을 시키는 이들의 생각이 일하는 사람을 천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나라에서 일하러 왔기에 돈을 조금만 주어도 자기 나라에 비하면 많이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사장님들만 갖고 있는 생각이 아니라는 것에 놀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미국에 가서 일하고 살면서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만큼 받으라 그러면 살 수 있을까? 고개를 끄덕이던 그들에게 이런 조건을 제시하며 그 좋아하는 미국에 가라면 갈까?

2002년 유레카 밴드 멤버들과 박스공장에서

 

말을 잘 못하기 때문에 무시한다. 심지어 욕하고 때린다. 이주민이라고 다 똑 같은 이주민이 아니다. 일한 만큼 임금을 못 받는 곳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무시해도 되는 이주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일한 것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는 이주민자들은 존경해마지 않는다. 물론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이주민의 국적은 뭐 말 안 해도 뻔하다. 하얀 얼굴에 노랑머리, 미국말하면 만사 오케이 무사통과다. 우리보다 검은 색 피부, 구불구불한 머리카락 미국말과 한국말이 아닌 다른 말 하는 것이 문제다. 미국말은 내가 못 알아듣는 게 문제고 가난한 나라 말은 네가 한국말 못하는 게 문제다. 심지어 노동운동을 하는 유명한 간부에게서도 이런 태도를 보고 마음아파 한 적이 여러 번이다. 이런 분열증 같은 인식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다문화사회를 말하고 노동을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노래하고 싶다. 행복한 세상, 함께 사는 세상을. 그 때에는 주민등록증이 없다고 임금이 낮아지지 않을 것이다. 엄마와 아빠의 국적이 다르다고 놀림 받거나 병원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피부색이 다르고 즐겨먹는 음식이 다르고 말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일터에서 일하고 함께 밥을 먹으며 월급봉투도 받을 것이다. 피부색과 머리칼은 짬뽕이 될 것이고, 서로의 음식을 나누어 먹고, 서로의 말을 가르쳐 주고, 서로 가난하지 않은지 돌아보며 살 것이다. 나의 새로운 노래 ‘월급날’이 이런 노래가 될 때 우리의 코리아는 ‘밍글라바 코리아’가 될 것이다.

– 소모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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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0 23:11 2010/06/10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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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인터뷰- 소모뚜 버마이주노동자활동가

“Stop Crackdown! 끝나지 않는 나의 노래”

버마의 어느 작은 마을, 부챗살로 퍼지던 햇살이 몸을 접는 시간이면 기타를 멘 청년들이 하나둘 거리로 흘러나온다. 저마다 벤치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서 딩딩 기타를 매만진다. 가슴에 고이 접어두었던 오선지가 서서히 펴지고 감미로운 선율이 날개 달고 훨훨 허공으로 떼 지어 난다. 부르고 또 부르고, 여기서 한 소절 저기서 한 소절. 섬처럼 떨어져 노래하던 청년들은 어느새 따로 또 같이 화음을 맞춘다. 어스름 밤공기 타고 골목골목 휘돌아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는 청량한 바람 되어 동네사람들의 마음을 적신다.

# 소모뚜, 노래하다

“버마 젊은이들은 기본적으로 기타를 다룰 줄 알고 노래도 잘해요. 밤새 기타를 쳐도 아무도 시끄럽다고 얼굴 붉히거나 신고하지 않아요. 거리를 지나는 행상은 노래를 불러줘서 덕분에 쉴 수 있다고 생각하죠. 노래 한 곡씩 듣고 가요. 매일 그 자리에서 노래하던 청년이 안 보이면 동네 사람들은 어디 아픈지 안부를 묻고요.”

날마다 새벽 2시까지 하얗게 밤을 지우던 그. 노래책을 탑처럼 쌓아두고 손끝 부르트고 목청 터지도록 노래하던 청년 소모뚜. 그는 스무 살에 정든 고향을 등졌다. 부모님과 여동생들을 위해 ‘이 한 몸’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TV가 필요하면 전자제품 가게에 가고 밥을 먹기 위해 식당을 가는 것처럼” 꿈을 찾는 그에게 ‘아시아의 호랑이’ 한국행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돈 벌어 효도도 하고, 민주화 투쟁의 선배격인 한국에서 버마를 도울 일을 배울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1995년 한국에 온 소모뚜의 첫 일터는 김포의 박스공장. 매일 14-15시간 씩 긴 노동이 반복됐다. 암담했다. “기계 사이에서 내 삶을 희생하는 게 아니라 멋지게 한 번 살아보고 싶었으나 현실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일상이 사막이었다. 물을 찾듯 기타를 찾았다. 주말이면 공장은 연습실로 변신했다. 버마 친구들과 모여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좋은 친구, 좋은 음악으로 피로를 풀고 다음 한 주 동안 살아갈 힘을 얻곤 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소모뚜의 노래는 공장의 담벼락을 넘었다. 어느 성탄절 이주노동자들이 교회에서 노래 불러주는 잔치에 참가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도 아이들도 행복했다. 곁에 있던 아시아인권연대 이란주 대표가 제안했다. ‘이주노동자들이 일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 노래를 사랑한다는 것을 한국사회에 보여주기 위해 밴드를 결성하면 어떨까?’ 흔쾌히 응했다. 소모뚜는 곧장 네팔, 버마, 인도네시아 등 여러 나라 친구들과 유레카라는 밴드를 꾸렸다. 1999년 9월 추석에 첫 단독 공연을 가졌다.

“2003년에 고용허가제 도입을 앞두고 정부의 미등록 이주 노동자 단속이 아주 심해졌죠. 쫓겨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였어요. 강제추방의 공포를 견디지 못한 친구들이 자살을 했어요. 충격적이었죠. 저희는 IMF 때 월급을 반만 받고 사장님이랑 라면 먹으면서 일했고 월드컵에 같이 빨간 티를 입고 응원했어요. 한국의 좋은 친구로 살아왔는데 왜 우리를 쫓아내는 법을 만드는 건가요?”

소모뚜는 답을 찾아 떠났다. 8년 동안 묵묵히 일하던 박스공장 대신 미등록이주노동자 추방에 반대하는 명동성당 농성장으로 출근했다. 투쟁의 현장에서 모두가 재밌게 외칠 수 있도록 구호를 노래로 만들었다. 가장 인기를 끌었던 ‘우리가 원하는 건’의 가사 ‘스탑크랙다운(Stop Crackdownㆍ강제추방 중단!)’은 팬들의 요청에 의해 아예 밴드이름으로 지정됐다. 뮤지션 소모뚜는 전국 방방곡곡 공연을 다녔고, 자연스레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의 처참한 노동환경과 노동 권리에 대해 눈 떠 갔다.

# 소모뚜, 절망하다

“이주노동자들 대부분 아주 영세한 곳에서 일해요. 그런 사업장의 관리자들은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어요. 저희 이주노동자는 당연히 가난한 나라 출신이고 피부색이 시커멓다고 인간취급을 못 받아요. 심지어 너희 나라에도 해와 달이 있느냐 묻는 사람도 있어요.”

천태만상이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냉대는 노골적이고 극심하다. 업무에 대한 제대로 된 실무교육도 안전교육도 없다. 혹여 이주노동자가 일을 더 잘 할까봐 기계사용설명서를 치워버리는 경우도 있다. 부상위험이 따르는 일을 맡아도 누구 하나 ‘조심하라’ 귀띔해주는 이 없다. 우주베키스탄의 한 노동자는 사료기계에 손이 절단됐다. 그런데도 치료비를 못 받았다. 이에 항의하면 담당자는 당연하단 듯 내뱉는다. “농업은 한국사람도 산재 처리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주노동자는 당연히 안 돼!)”

“농업 인력으로 온 이주노동자가 다른 일을 하면 바로 불법이 돼요. 그런데 농촌은 겨울에 두 세 달이나 일자리 없잖아요. 실업급여를 안 줘요. 그 기간에 다른 일을 하면 자기도 모르게 불법체류자가 되는 거예요. 어업은 3년 내내 배에서 일해요. 한국어를 배울 조건이 안 되니까 부당한 일을 겪고도 모르죠. 역시 다른 일터로 옮기면 불법체류자가 되는 거죠. 거기다가 월급도 제 때 못 받잖아요. 그런데도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체불임금을 상담하러 가면 문제 해결은 안 하고 법무부에 신고부터 해버려요.”

법이 아니라 덫이다. 소모뚜는 절망했다. 이주노동자는 곧 불법체류자라고 여긴다. 하지만 불법체류자 20만 명이 왜 생기는지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아무도 알려하지 않는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일반인의 편견은 뿌리 깊다. 정부당국은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오직 단속으로만 해결하려 한다. 민주주의의 절차보다 불도저의 효율성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이주노동자 문제에서도 예외 없다. 그런 한국이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 소모뚜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강한 사람이 약자 편에서 생각한 적이 없잖아요. 고용허가제도도 이주민들을 보호하고 배려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짜낼까 이용할 생각만 해요. 국익과 노동자의 권리를 동시에 생각해야 하는데 그러질 않아요.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싼 값으로 일하잖아요. 현대판 노예허가제가 된 거죠.”

소모뚜와 함께 MWTV에서 활동하는 아웅틴툰은 “버마는 소도 쉬는 날이 있다.”고 한탄했다. 버마에서는 기후조건상 3모작을 할 수 있는데 1모작만 한다. 그래도 가족이 넉넉히 먹고 사니까 고생을 자처하지 않는다. 소 1마리로 충분한 일도 2마리 시켜서 쉬엄쉬엄 일 한다. 오전에 일하고 오후엔 사람도 소도 같이 쉰다. 그런 환경에서 살다가 처음에 한국인들이 불철주야 일만 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저에게 술 안 먹고 어떻게 사느냐 묻지만, 저는 그렇게 일만하고 어떻게 사느냐 물어보았죠.”

# 소모뚜, 행동하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에 맞선 농성은 2003년 11월 15일부터 2004년 11월 26일까지 농성은 385일 간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소모뚜는 이주노동자  ’활동가’로 거듭났다.  일자리를 다시 구해 월~토요일까지 소화기 압력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일요일에는 스탑크랙다운의 기타리스트로 버마행동의 총무로 다문화활동가로 일인다역을 소화했다. 2005년부터는 이주노동자방송 MWTV 제작에도 참여했다. ‘아픈 다리 서로 기댈’ 친구도 여럿 만났다. 이주노동자 밴드 ‘유레카’ 시절부터 함께한 음악적 동지 미누(미노드 목탄)가 대표적인 경우다.

그런데 미누가, 강제추방 당한 이주노동자를 위해 ‘친구여 잘 가시오’란 노래를 무대에서 함께 불렀던 그 미누가, 지난해 18년 간 살아온 한국에서 강제추방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누의 구속이 연일 매스컴을 탔고 소모뚜의 이름도 같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이게 화근이었다. 평소 친절하게 대해주던 사장은 소모뚜에게 ‘외부에서 압력이 들어올까 두렵다며 조용히 나가줄 것’을 당부했다. 하루아침에 친구도 잃고 일터도 잃은 소모뚜는 망연자실 허탈감에 빠졌다.

“미누형 사건 때 희망이 없어 보였어요. 기본적인 것이 보장 안 된 사회에서 내 목터져라 노래 불러도 소용이 없는 일인가. 그 전에도 미누형과 밴드 때려 치자는 얘길 했었죠. 우릴 적으로 보는 이 사회에 기여할 게 있을까.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적 취급은 받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상황이 안 좋다고 도망가거나 회피하면 내 스스로 창피하고 죄를 짓는 거잖아요. 그래도 우리 얘기에 공감하고 듣고자 하는 사람 있으니까 희망을 가져야죠. 제가 아주 초기에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왔기에 후배들이 우리처럼 힘들고 헤매지 않게 길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 책임감이 있어요.”

소모뚜는 ‘해고’를 계기로 MWTV에 대표를 맡았다. “안 그래도 일할 사람이 없었는데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카메라 들고 이주노동자들을 찾아 나섰다. 한국 사람들조차도 입지 않는 한복을 입고 김치를 담그며 활짝 웃는 ‘다문화가족’ 뒤에 가려진 한 인간의 삶을 담아냈다. 온정과 연민 혹은 무시와 혐오, 교육과 상담의 대상이 아닌 저임금과 열악한 조건에 신음하는 노동자, 내면적 풍요를 꿈꾸는 존엄한 인간의 목소리를 날 것 그대로 들려준다.

이밖에도 참다운 소통을 위해 다방면으로 힘쓴다. 취재 차 만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자 매주 월요일 성공회대 민주사회교육원이 운영하는 노동대학에서 강의를 듣는다. 매주 토요일 방송되는 OBS 라디오 <다문화 톡톡>의 진행을 맡고, 위클리수유너머에 ‘밍글라바코리아’를 매주 연재한다. 일주일에 서너 차례 이주노동자 단체의 회의에 참가하는 것은 기본이다.

소파에서 쪽잠을 자며 강행군을 소화하는 그에게 ‘버마행동 한국(Burma Action Korea)’ 활동은 각별하다. ‘버마행동’은 군부독재 하에서 고통 받는 버마의 실상을 한국 사회에 알리고 버마의 조속한 민주화를 위해 노동하며 투쟁하는 버마 이주노동자들로 구성된 단체다. 매달 마지막 주 화요일 종각역 미얀마대사관 앞에서 국제민주연대, 버마민주화를지지하는모임, 인권연대 등의 시민사회단체와 기자회견을 연다.

“지난 4월 말에는 버마군부의 비민주적 선거법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어요. 한국이 독재정권에 탄압받았을 때 해외의 많은 단체들이 힘을 쓴 것처럼 버마에 평화와 민주주의가 하루 속히 정착될 수 있도록 한국도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합니다. 또 한국의 버마 노동자들에게 조국의 상황을 알리기도 버마행동의 중요한 일입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라서 한국어 교육, 산업안전교육, 인권교육이 있을 때 버마의 내부 상황 사진전을 여는 등 간접적으로 알리죠. 직접 나서지는 못해도 후원금을 내겠다는 분들도 있고 관심을 많이 가져줍니다.”

# 소모뚜, 함께가다

소모뚜는 현재 ‘인도적 지위’ 비자를 갖고 있다. 인도적 지위 인정은 난민과는 다르다. 인도적 지위는 난민 요건이 충족되지 않더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일정 기간 체류허가를 내주는 것이다. 법률로 규정된 것이 아니고 법무부 지침으로 시행되는 것이어서 신분이 불안하지만 당장 추방될 염려는 없다.

“처음엔 한국이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사회’라 힘들었어요. 힘 있는 사람들이 탄압할 때 NGO나 조직 활동 못하는 사람은 이웃이라도 알아야 도움을 요청할 텐데 그럴 수가 없잖아요. 약한 사람끼리 힘을 합쳐서 공동체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 그러면 정글에서 호랑이가 작은 동물 다 잡아먹는 것처럼 그런 사회가 되어버릴 테니까요.

버마는 마을이에요. 아들 없는 집에서는 다른 집 남자들이 나서서 도와줘요. 코코넛 나무 높은 곳의 열매를 따주고 물탱크를 청소하죠. 무거운 짐 같이 들고요. 정치는 개판인데 (웃음) 국민들은 서로 돕고 배려하며 살아요. 나눔의 기쁨이 행복이라고 남을 돕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는 교육을 어릴 때부터 받았어요.”

버마는 불교국가다. 마을에 학교는 없어도 절은 있다. 불경을 일상에서 새소리처럼 듣고 자란다. 버마 사람들은 관계와 전체 속에서 사고하는 동양적 가치관이 몸에 배었다. 결초보은, 역지사지. 내가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며, 남에게 밥 한 수저만 얻어먹어도 은인이라고 배웠다. 그렇기에 지난 15년간 한국 밥을 먹고 산 소모뚜는 “한국에 갚을 게 많다”고 여긴다. 그가 한국에 계속 머무는 이유는 바로 이 두 가지다. 정 그리고 책임감.

“길거리에 돌이나 유리가 있으면 모두에게 피해 가지 않도록 치워야 하잖아요. 저희한테 한국을 비판한다고 부정적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암 환자에게 증상과 치료법 알려주는 것처럼, 한국사회에 아픈 일들과 치료법 알려주고 같이 고쳐가자는 거죠. 한 사회의 소수자가 본인 얘기 하려고 나왔을 때 부정적으로 보면 안 돼요. 나쁜 얘기 안 하고 덮어두면 더 좋은 건가요? 한국의 한계 드러내주는 것이 더 나아지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대학에 인권교육을 하러 갔을 때다. 누군가 손을 들고 물었다. “이주민이 요구하는 인권이 무엇이냐”고. 때로는 질문을 되돌려주는 것이 가장 정확한 답이 되는 법. 소모뚜는 되물었다. “이주민 인권과 한국인 인권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이주민인권이 궁금하면 인권이 뭔지를 배우면 돼요. 내가 맞는 거 싫으면 다른 사람도 싫어하고 월급 받고 싶으면 이주민도 받고 싶은 거죠. 나의 입장에 맞추어 생각하면 그게 인권이에요.”

인권이 무언지 알 필요가 없던 나라에 살다가 한국에 와서 인권교육 한다는 게 무척 힘들다며 소모뚜는 멋쩍게 웃었다.

인생의 절반, 그것도 생의 가장 빛나는 청춘시대를 보낸 “한국을 사랑한다”는 소모뚜. 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의 초상은 암울하고 쓸쓸하다. 대접받고 싶은 대로 행동하라는 황금율이 지켜지지 않는 나라. GDP는 높아도 서로 돕고 배려하는 관계적 부가 사라져 가는 나라. 일터의 빈자리를 채워줄 동료시민을 구해 와야 하는데 노예를 얻으려 하는 나라. 87년 민주항쟁으로 군부독재는 내몰았지만 사는 게 여전히 팍팍한 나라. 이름만 민주주의 하고 딴 짓 하는 나라…….

“언제든 제가 버마에 돌아갈 때 한국의 민주화를 교본으로 삼을 수 있겠지요. 한국에서의 경험한 일들이 버마의 미래에 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요. 하지 말아야할 것. 따라할 것이 보이니까요. 또 이주노동자의 문제는 한국사회가 진정으로 민주화 되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기도 해요. 우리가 바라는 것이 함께 사는 세상, 차별 없는 세상이라면 한국도 그것이 싫지 않을 거예요.”

여행자 소모뚜. 그는 여기 아닌 저기의 생을 꿈꾸며 길 떠났다. “열심히 일했고 충분히 인정받았고 더불어 행복했다.” 그러나 우리가 여행자가 되는 순간 기후에 더 민감해지고, 어떤 전조에 더 영감을 받듯이 그는 이 땅에 자욱한 차별의식과 모순투성이 제도에 반응했다. 높은 벽에 부딪히고 모난 돌에 쓰러진 친구들의 처참한 모습을 기억한다. 그래서 더 멈출 수 없다. 벽에 문을 내고 돌멩이를 입김으로 녹일 때까지, “Stop! Crackdown!” 소모뚜의 노래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 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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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0 23:08 2010/06/10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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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고통

얼마 전에 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내용은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들입니다.

여자들은 집안 일을 해야 해서 남자들처럼 밖에 나가서 일을 할 수 없고
또한 밖에 나가서 일을 하게 되면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에 가서도
집안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중부담이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 들어보는 내용은 아니지만 이런 내용을 들을 때 마다 왠지 슬픕니다.
가족을 위한 노력하는 것을 고통이라고 표현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을 고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 문제까지 취급되어 강의까지 하고 있는 상황을 보게 되는 저에게는 슬픔만 남았습니다.

 

강의 내용에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듣고 있는 여성들과 죄인이 되는 기분으로 어두운 표현으로 강의를 듣고 있는 남성분들을 보면서 이주민 입장에서 보는 저는 한숨만 나왔습니다.

 

여기서 제가 하고자하는 말은 남녀 간에 평등, 가부장제, 페미니즘 같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누가 더 고통 받고 누가 더 편하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런 내용들은 워낙 민감한 이야기들이라서 저는 그저 이런 것에 대해 저 같은 이주민들의 생각을 전하고 싶은 뿐입니다.

 

한국인들 포함해 전 세계에 이주하면서 살고 있는 분들 중 대부분이 자기 가족과 멀리 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남자, 여자 모두가 다른 나라로 들어가서 고된 일,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 같은 일, 작은 공간에 반복된 일을 하면서 새로운 것이 뭔지 몰라도 매일 매일 그런 고통을 기쁘게 받아주며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형제들의 미래를 위해 오빠로서, 언니로서 ,또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등 1인 다역으로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그래서 내 자신이 힘들어도 그 아름다운 고통을 내가 먼저 받겠다는 것이 이주민이 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 혹은 아내가 다른 나라로 이주노동자로서 가는 날. 공항에서 서로를 미안하고 서로를 위해 열심히 하겠다며 눈물을 흐리면서 약속을 하는 그 마음. 자신이 그토록 다니고 싶고 꿈꿔왔던 대학을 포기하고 동생들 학비를 위해 해외 나가서 일하겠다는 오빠를 보면서 미안해하는 동생들과 가족을 위해 헌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이를 자랑스러워하는 오빠의 마음. 이런 마음은 “나보다 가족이 먼저” 라는 사랑 또는 책임감에서 나옵니다. 가족 때문에 내가 피해 받는 다라고 생각을 하지 않다는 거죠.

 

내가 힘들게 일해서 버는 돈을 가족에게 보내주고 가족이 그 돈으로 예쁜 옷을 사 입고 나에게 보내준 사진을 자꾸 꺼내어 보면서 기뻐하는 마음이 타국에서 외롭게 생활하는 이주민에게는 아주 효과 만점 보약입니다.

버마독립영운 아웅산장군 가족, 오른쪽부터 아웅산 장근, 어머니, 아내와 아이들 (맨앞에는 아웅산수지여사) 자신의 가족을 포함해 온 국민이 가족이라고 생각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것에 기뻐하셨던 아웅산장군과 아웅산수지여사의 사랑과 책임을 존경함으로서 이사진을 배치합니다.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농부가 자신의 농장에 있는 벼를 먹으러 오는 앵무새들을 잡으러 농장으로 나왔습니다. 농장에 있는 벼들을 맘껏 먹고 있는 수많은 앵무새들 중 아주 크고 통통한 한 앵무새는 맘껏 먹고 난후에도 많은 벼들을 또 가져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는 농부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 통통한 앵무새를 잡으러 결심했습니다. 농부는 손에 집힌 앵무새에게 “너는 다른 새들처럼 배부르게 먹었으면 됐지 왜 또 가져가려고 하냐?” 라고 물어보자 앵무새가 “저는 새로운 빚과 헌 빚을 갚아야 해서 그랬습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농부가 무슨 뜻인지 물어보자 앵무새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헌 빚이란 저를 낳아주신 부모님에게 갚아야하는 빚을 말하고 새로운 빚은 내가 낳는 자식들에게 해야 할 임무를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먹고난후에도 그들을 위해 벼들을 또 가져가는 겁니다.”라고 답하자 농부는 부모님의 은혜와 자신의 가족을 위해 책임을 다하는 통통한 앵무새를 평생 자신의 농장에서 맘껏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줬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여러 가지 책임들을 가지게 됩니다. 책임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 누군가가 시켜서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책임 있다고 생각해서 갖게 된 것입니다. 가족과 멀리 떨러져 살고 있더라도 이를 눈물이 가득한 미소로 받아 주고 살고 있는 이주민들에게는 가족 때문에 내가 피해, 고통을 받는다는 생각 대신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것에 의미, 또한 나에게 주어진 축복이라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고향에 있는 부모님들에게 전화 할 때마다 아버지가 저에게 늘 하시는 말씀은 “고맙다. 네가 나의 역할을 다하고 있어서 정말 고맙다.” 라는 것과 “오빠는 우리에게는 제2의 아버지입니다.”라는 동생들의 목소리가 제 삶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책임을 알고 가지는 것이 축복입니다.

– 소모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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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0 23:05 2010/06/10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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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의 문화 이야기

이번 이야기는 버마의 문화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버마에서는 얼굴 닦는 수건과 허리아래부분 닦는 수건을 구분하여 씁니다. 한국처럼 큰절은 흔히 하지 않습니다. 또한 큰절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허리를 숙이는 것에서부터 상대의 발에 이마를 대어 절하는 것에까지 존경의 차이가 있습니다. 특별히 은혜 베푼 사람이나 부모님, 선생님, 스님들에게 존경의 표시로 발을 닦아드리기도 합니다.

 

나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나의 꿈과 학교를 포기하고 어린 나이에 한국에 왔습니다. 어렵고 위험하면서 더럽다고 하는 일자리에서 임금은 턱없이 낮았지만-사실 이것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하지 않으려 하지요- 그래도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동생들을 학교에 보냈습니다. 때문에 동생들은 나를 제2의 아버지라 부릅니다. 한국의 어떤 사람들은 우리더러 돈 벌려고 한국에 온 것 아니냐며 핀잔하지만 가족들은 압니다. 돈 벌러 온 이유를요.

 

얼마 전 동생이 나를 만나러 한국에 왔습니다. 15년 만에 보는 동생이었습니다. 동생은 영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살며 난민지위를 얻었습니다. 난민인정을 받은 동생이 저를 만나러 한국에 오려 했지만 올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한국에 들어와 돌아가지 않고 ‘불법체류자’로 남아 있을까 염려해주시는 분 덕분이었답니다. 영국 시민권을 받고서야 한국에 온 동생은 꼭 하고 싶은 일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나의 발을 닦아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마를 내 발에 대어 큰 절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오랫동안 일한 오빠에 대한 감사를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지난 주 성공회성당에 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시청광장에 들렀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도 불어 몸에 한기가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큰 화면에 보여주는 영상은 일 년 전에 본 것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올까 걱정했던 나의 생각과는 달리 사람들은 이미 들은 이야기 또 들으면서도 1년 전 그날처럼 울고 있었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그렇게 새겨질 수 있는 것은 그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 버마사람들이 아웅산장군을 기억하듯이 말입니다. 버마사람들이 그토록 아웅산장군을 존경해 마지않는 것은 그가 버마사람들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일했기 때문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고, 행동한 대로 받는다고 배웠습니다. 좋지 않은 나무를 심어놓고 어찌 좋은 열매를 바라겠습니까?

 

다음 달부터 정부가 G20정상회의를 빌미로 대대적인 미등록이주노동자 단속을 벌인다고 합니다. 나의 꿈을 접고 우리의 꿈을 만들려고 낯선 땅에 일하러 온 이들의 이름이 이주노동자입니다. 이들은 일하고 싶고 희망을 갖고 싶고 함께 살고 싶습니다. 이들에게 일할 자유를 허락한다면, 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신다면, 이들에게 생존의 권리를 누릴 기회를 주신다면 이들의 마음에 한국은 발을 닦아드리고 싶은, 발에 이마를 대고 큰절 올리고픈 곳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면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는 것, 이게 축복입니다.

밍글라바 코리아~

– 소모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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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0 23:04 2010/06/10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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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하와이 사탕수수밭에 이주노동자로 간 한국인들이 미국 이주 1세대를 형성했다고 들었다. 이들의 고생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왜 하와이에 사탕수수밭이 만들어 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사람들이 왜 머나먼 하와이까지 갔는지는 잘 알 것 같다. 한국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로 먹고 살기 너무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죽어라 일했을 뿐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써 싸웠다고 한다.

 

당시 그들이 받은 임금이 얼마나 됐을까? 다행히 지금 한국에는 최저임금이라는 참 좋은 제도(?^^)가 있다. 덕분에 우리 이주민들이 한국에 들어와 일을 하면 이 최저임금을 받는다. 한국에 최저임금 또는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4백 5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며칠 전 최저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집회에 노래하러 갔다. 그 집회에 참석한 분들 중 많은 분들은 최저임금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라고 했다. 그런데 노래하러 무대에 올라가는 저에게 한 분이 부탁의 말을 하셨다. 전에 몇 번 들어 본 내용이었다.

 

무대에 선 나는 이렇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공장을 차릴 때 내 공장의 일자리는 돈을 많이 주는 한이 있어도 꼭 우리 국민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힘들어도, 위험해도, 오래 일 시켜도, 군말 없이 일 잘하고, 돈은 조금 받아가는 사람을 원할까요?”

 

지금 한국에는 120만 명의 이주민이 들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거의 모두가 4백 50만 명 중 일부입니다. 이주민들을 붙들고 물어 보십시오. ‘고향과 집을 떠나 올 때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떠나 왔느냐?’ ‘임금은 제대로 받고 있느냐?’고. 우리의 대답은 100년 전 하와이에 간 한국 사람들의 대답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국적이나 피부색이나 언어를 떠나, 일하고도 먹고 살 만큼 받지 못하는 우리 서로는 마음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문제입니다. 일 시키는 사람은 자기나라 사람이냐? 이주노동자냐? 하는 것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다만 자기가 원하는 노동자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주노동자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도 어렵고 한국 노동자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어 오해하지 않고 뭉쳐야만 합니다. 그래야 최저임금을 올리고 생활임금을 받는 데 한 걸음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람들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로 일하러 가면, 100년 전 하와이로 간 사람들이나 50년 전 독일로 간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처지가 됩니다. 한국의 여러 상황이 나아 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주민들도 우리 살던 나라의 상황이 좋다면 이 곳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말 이주노동자가 많아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주노동자들의 나라 정치상황이 좋아지게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그 나라에서 일할 뿐 아니라 도와준 한국 사람들에게 고마워할 것입니다.

 

한국의 5.18은 버마인들을 깨우쳐 88민주항쟁 가능케 하였습니다. 5.18에서 6월로, 오늘의 한국이 이주노동자들의 나라에도 지금의 한국이 될 수 있게 도운다면 얼마나 감사를 받겠습니까? 한국 사람은 축복받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 소모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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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0 23:01 2010/06/10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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