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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이 약속한 시간에 안 나와서 근로감독관이 회사로 전화했다.

사장님이 전화를 받았다. 근로감독관이 왜 오늘 안 나왔냐고 하니

사장님이

“내가 일이 바쁜데 거기 갈 시간이 어디 있냐, 그리고 당신들이 왜 외국인 편이냐고, 내가 나라 세금도 잘 내고 있는데 왜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등등

근로감독관한테 소리를 질러서 답했다.

몰론 매일 늘 밥 먹는 듯이 사용해 온 쌍시옷 관련 단어들을 섞어서 하면서.

그 때 사장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아주 신 레몬 10개를 한꺼번에 씹어 먹게 되는 것처럼 얼굴이 찌그러진 근로감독관에게 나는 그 때도 그렇고 지금도 생각만하면 너무 미안했다.

그분이 목소리를 아주 부드럽게 해서 사장님에게

노동부는 누구의 편이 아니라 고용주와 근로자 간에 문제를 같이 해결해주려고 노력하는 기관이라서 여기 오셔서 근로자와 함께 이야기하고 누구의 말이 맞는지만 확인 해보자고 한다 등 등 설명을 해줬다.

하지만 그 부드러운 설명이

불법체류자한테 퇴직금을 줄 수 없다, 주기 아깝다는,

나라에 세금을 잘 내주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인 자기의 손을 들어 주지 않는 노동부에게 불만이 많은 사장님의 화를 풀러주지 못 했다.

쌍시옷의 주인공 사장님에게 말하다가 지친 근로감독관이 이제 마지막 무기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가 사장님에게 공무원을 욕하면 근무방해로 처벌 할 수 있다. 노동부에 오지 않으면 이문제가 검찰까지 올라가 더 악화 될 것이고 회사도 블랙리스트가 될 거니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 이제야 겁이 난 사장님이 다음번에 가겠다고 답했다.

근로감독관이 한숨을 크게 쉬면서 전화를 끊고 나를 보면서 사장님이 원래 욕이 많은 사람이냐고 물어봤다. 내가 그게 우리 사장님의 인사말입니다 라고 답하자 그분이 아주 미안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그리고 나에게 공장에 들어가서 일하게 된 것부터 그만둘 때까지의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처음에 월70만원만 주고 매날 밤11시,12시까지 어떤 때는 새벽2, 3시 까지 야근 수당 없이 일을 시켰다.

3개월 후에 내가 야근수당을 달라고 했을 때야 사장님이 나를 보면서 너도 이제 알 것을 알게 되네 라고 말 하면서 할 수 없이 나에게 야근 수당을 주게 됐는데 그 야근 수당이 평균수당보다 작았다. 매날 일이 끝나야 할 시간보다 30분 늦게 일을 끝내줘서 그 30분을 야근시간으로 적었는데 동전이 없어서 그30분 더한 것을 야근 시간으로 적지 말라고 했었다.

그리고 공장에 아무도 일하러 오지도 않고 오래있지도 않아서 내 친구들을 불러 같이 일하게 하고 일이 아주 힘들어서 친구들이 일하러 안 나올 때마다 사장님이 나를 친구들을 데고 오라고 늘 부탁했다.

같이 밴드활동을 하면서 나랑 가까이 지내면서 음악을 배우고자 내 공장으로 들어 온 내 친구들은 노동 강도가 아주 센 내 공장에서 뛰쳐나가고 싶어 해도 우리가 안 해주면 이 공장이 문닫아야한다. 나도 안 죽고 일하고 있는데 너네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라는 내말에 한숨을 쉰 내 친구들은 그 공장에서 또 다시 일하러 나왔다.

새벽에 일 끝난 후 사장님이 나에게 “소모뚜야 고맙다 , 고맙다, 우리 정을 끊지 말자고 얘기 했고 언젠가 내가 고향에 들어갈 때 사장님이 나한테 뭘 해줄 테니까 다른데 가지 말고 여기 끝까지 있어라 라고 여러 번 약속 했었다.

하지만 이제 내가 일을 그만 둬야 할 상황이 생길 때 사장님이 나를

내가 불법체류자라서 퇴직금을 받을 권리가 없다고 얘기하고 그동안 정을 끊지 말자는 말을 먼저 한 사람이 정도 없이 나를 이렇게 배신 한 것을 나는 퇴직금을 못 받는 것 보다 더 화가 나서 이렇게 노동부에 신고하게 됐다고 답해 주면서 사장님을 못 믿기 때문에 8년 동안 꼬박 모인 나의 월급봉투들을 근로감독관에게 보여 줬다.

나의 긴 얘기를 눈물 굴성 하면서 듣고 있는 근로감독관이 8년 동안 모인 내 월급봉투들을 하나하나씩 보면서 한숨을 쉬고 내가 받아야 할 퇴직금을 계산 해주면서 2주후에 또 오라고 얘기 했다.

2주 후.

나는 다시 노동부에 약속 시간 전 30분에 도착했다.

늦어서 내 잘못으로 나에게 탓하고 문제제기 할까 봐 걱정 돼서.

왠지 이제 세상이 좀 두렵고 아무도 안 믿겨지는 내가 되 벌렸나봐.

약속한 시간에 사장님은 안 나타나고 처음 본 노무사라는 분이 내게 다가와서 사장님의 위임자로서 왔다고 인사 했다.

법을 배운 노무사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나는 그 노무사라는 분을 보면서 한숨을 크게 쉬면서 내 스스로에게 말 했다.

“소모뚜야 힘내라! 정의라는 것이 이 세상에 아직도 있을 것이라고…”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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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5 00:11 2011/02/15 00:11

어떠한 “도카”도 없다고 하는 법무부

소모뚜
1951년 유엔난민협약에 따르면, 난민이란 "인종, 종교, 국적, 특정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자신의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 를 의미한다.

난민을 버마어로 “도카대”라고 한다. “도카”는 “운이 나빠서 여러 고통, 위험, 열악한 상황 등을 겪고 있다”는 의미이고, “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난민을 버마어로 “운이 나빠서 여러 고통, 위험, 열악한 상황 등을 겪고 있는 사람”을 뜻하니 “도카대”란 단어는 버마인들에게는 아주 듣기 싫은 단어임에 틀림없다.

위 사진:<삽화: 윤필>

난민 인정에 인색한 한국

나도 역시 그 단어 자체를 싫어하고 내가 언젠가 “도카대”가 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었다. 그리고 오늘날에 우리를 “도카대”라고 인정해달라고 대법원까지 호소하고 있는 상황과 너네는 “도카대”가 아닐뿐 아니라, 어떠한 “도카”도 없다고 하는 법무부의 태도는 참 재미있다.

난민의 인권에 대한 관심도, 노력도 없는 한국사회에 사는 일반 한국인들에게는 난민이란 단어는 아주 생경한 것이다. 그저 전쟁을 피해 도망쳐서 파란 천막에 노란 옥수수를 먹고 생활하는 사람들이라고만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번 글에는 나를 포함해 한국에 있는 난민들의 상황을 이야기하려 한다. 한국에 있는 난민들의 상황을 다 담아내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족하겠지만 이 글에 담긴 내용을 통해서라도 한국 내 난민들의 인권이 개선되기를 희망한다.

버마.
내가 난민이 된 이야기를 하기 전, 나의 나라 버마의 정치 상황을 이야기하겠다.
100년 가까이 영국식민지로 강국의 노예로서 살아 왔다 1945년도에 아웅산 장군(아웅산 수지 여사의 아버지)과 독립투사들이 “우리는 노예가 아닌 주인”이라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 주고 다양한 활동으로 벌여 버마는 독립했다. 독립 후 10년 동안 민주주의 국가로서 경제적, 교육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버마출신의 유엔 사무총장이 있는 등 세계사회에서도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정치인의 목표는 권력”이라는 말대로 버마정치인들 서로 밥그릇을 챙기려는 싸움 때문에 내전이 생겼고, 결국 버마의 아름다움은 군사독재 네이윈(Ney Win) 장군에 손안으로 빠져 1987년도 유엔에서 세계 최빈국으로 발표할 정도로 추락했다.

독재 정권 장악 한지 26년 후 1988년.

내가 13살 때, 우리 모두 세계적으로 유명한 88민중항쟁으로 네이윈 정권을 쫓아냈다. 일어서지 못 하는 아이들을 빼고는 온 국민이 일어나서 시위에 참여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호소한 결과다. 그 때 군부는 인권과 자유를 애타게 호소한 국민들을 총으로 쏘고 진압을 해서 초․중․고․대학생, 승려들과 일반 국민 3,000명을 희생시켰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도 학교 선배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었다. 매일 시위에 나가니까 다리도 아프고 구호를 열심히 외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기도 했지만 그때 깃발을 들고 자유를 요구하는 수십만 명의 시위참가자들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80년도 한국에서 일어났던 5․18민중항쟁의 영향이 88민중항쟁의 뿌리라는 것을 5․18민주화 운동하신 한국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88항쟁으로 네이윈(Nay Win), 세인루잉(Sein Lwin), 마웅마웅(Mg Mg) 등 세 정권을 연속 쫓아낸 후, 서마웅(Saw Mg) 정권이 치른 1990년 대 선거를 통해 국민을 대표하는 민족민주 동맹당(NLD)이 압도적으로 이겼지만, 약속을 지킬 줄 모르는 비양심적인 야만인 서마웅(Saw Mg) 군사정부 때문에 버마 민주화의 봄날이 아직도 멀기만 하다.

버마의 인권 상황은 탄압, 학대, 질병

“마약 판매는 용서할 수 있어도 정치활동은 용납 안 해” 라는 군부의 외침대로 정치 활동가들에게 최소 15년형부터 200년형까지 중형을 내리는 과도한 정치탄압, 4살짜리 여자 아이부터 할머니까지 집단으로 강간을 해서 소수민족 여성단체에서 “강간의 허가”(License to Rape)라는 소수민족 여성들의 피와 눈물이 묻은 보고서까지 나올 정도로 아주 잔인한 군인들이 장악한 나라이다. 그들의 집단 학대와 그들이 지른 불 때문에 마을에 살지 못하고, 아주 깊은 숲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수만 명의 소수민족들이 있다.

매일 언론에서 장관들이 사원, 절에 가서 기부를 하고 있는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아주 신앙심이 깊은 지도자들이라는 이미지가 넘친다. 하지만 그들은 국민들의 어려움을 평화적으로 해결 해주고자 평화 행진을 한 승려들을 죽이고 강에다 갖다 던져 벌인 종교탄압을 일삼았다.

한 가족 당 한 명이 도로공사에 봉사하러 참여해야 하고 안 나오면 벌금을 내리는 강제 노동, 미얀마 반정부 해외 사이트에 있는 정부를 풍자하는 만화를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서 12년 형을 받는 21살 한 청년. 4월에 하는 버마 새해 물 축제 때 터진 폭파 사고 현장을 사진 찍었던 기자에게 13년 형을 내린 언론탄압, 학교 갔다 집에 오는 길에 군인들에게 끌려 가 군인이 된 아동군인 7만 명, 국민건강을 위한 국가 예산을 쓰지 않아서 현재 10만 명이 넘는 에이즈환자들. 버마-태국 국경지대에 생활한 100만 명이 넘는 버마난민들.

위 사진:<삽화: 윤필>

한국 정부에게 바라는 것

그런데도 한국을 포함한 중국, 인도, 태국 등 이웃 나라들은 자유와 평화를 잃어 어렵고 힘들게 생활한 버마국민들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한 채, “국익이 우선”라고 하면서 미얀마군정부와의 다정한 인연을 맺고 있는 비양심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5․18민중항쟁으로 버마인들에게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멋진 선배의 모습을 보여줬던 한국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미얀마 군사 정부를 위한 무기 공장을 만들어 준 대우인터내셔널의 비양심적 행동이 버마인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2007년 승려들의 혁명 “샤프론 민중 항쟁” 때 승려들과 국민들에게 군인들이 쏜 총알이 대우인터내셔널이 만들어준 무기 공장에서 나온 따끈따끈한 총알들이라는 최악의 역사로 기록하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버마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는 우리들에 대한 한국의 제도와 태도가 일관되지 않다는 점을 짚고 싶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버마민주화를 위한 한국정부의 이미지도 다양하다. 한국 내 버마민주화 활동가들을 대하는 한국정부의 태도는 한국이 자유와 민주주의에 얼마나 넓게 관심을 보이고 인권의 가치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버마민주화와 한국의 민주화는 떨어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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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0 17:59 2011/02/10 1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