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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깨달음-쓰레빠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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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 전 이른 저녁을 먹고 소화기능이 가장 활발해 진다는 8시가 지나갈 무렵 쭌이 텔레비젼을 보다
'"케잌 먹고싶다"한다. "나도 ..케잌먹을까?"
이후 이모와 할머니에게 케잌먹기에 동참할것을 요구하고 공평하게 사다리를 탔다.
쭌 6000원 나 5000원 이모 4000원 할머니 2000원 당첨금을 들고 히히낙낙 케잌을 사러 나가려고 했다.

 

현관에서 문을 나서려는데 내가 슬리퍼형 구두를 신자 쭌 역시 슬리퍼를 신고 가겠다고 나선다.
"길 두번이나 건너야되 위험해서 안되 운동화 신어"
"엄마도 슬리퍼 신었잖아 나도 슬리퍼신을래"
"싫어"

 

몇번의 실랑이가 오간 후 ..................."나도 엄마도 같이 어른이잖아"
'어른?' 아마도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던게지.
"너랑 나랑 같은 사람이지만 난 어른이고 넌 어린이잖아. 같은 사람이지만 어린이는 못하는 것도 있잖아"
요기까지는 짜식 제법인걸 하면서 나도 어른답게 말했다.

그러나 이미 히히낙낙 즐거운 저녁 이벤트는 한물 간 상황.
쭌이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로 앉아서 운동화를 신으며 나를 째린다.
헉. 이런 표정 처음이야.

 

약간 열받은 나..
"나 안가. 이게 뭐니 재미있게 케잌먹으려고 했는데 기분 망치게"
나의 수준이 쬐금씩 떨어지고 있다..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쭌도 나도 묵묵히 케잌을 사러 갔다.
아무런 대화도 없이, 쭌의 걸음 속도도 무시한 채.

중간쯤 가다가 횡단보도를 핑게삼아 슬그머니 쭌의 손을 잡는다.
자존심 강한 녀석. 늘 그렇듯이 열받은 거 니 문제라는 듯 자기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논다.

빵집에 가서 케잌을 사기 위해 할 수 없이 필요한 몇마디 대화를 주고 받는다.

 

이쯤되면 나도 엄마 체면이 말이 아니기 때문에 슬며시 화해를 해야한다.
헉, 그런데 솔찍하게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까 실랑이를 벌였을때 내가 내세운 난 어른. 넌 어린이의 논리를 들이대며 쭌에게 이해할것을 요구한다.
쭌. 별말없다. 짜식 사실 인정하기 싫겠지.

난 대충 수습모드로 들어가서 다시 평소의 엄마로 돌아와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재잘거리며 집으로 돌아와
케잌을 먹고 그날은 무사히 잠이 들었다.

 

다음날...................................................................................

 

쭌이 유치원에서 그림책을 빌려왔다. 한주에 세번씩 있는 정기대출이다.
이번에 빌려온 책은 [부루퉁한 스핑키]
쭌이랑 한 쪽씩 번갈아 가며 읽었다.
읽다보니 책 내용이 장난이 아님...

 

스핑키는 열이 잔뜩 받아있다. 누나와 형이 와서 사과를 하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누나는 스핑키를 스컹크라고 부르며 놀렸고.
형은 필라델피아가 벨기에의 수도라는 스핑키의 얘기를 왕무시한게 분명하다.
스핑키는 절대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당에서 골내면서 안들어오는 스핑키를 보며 걱정하는 엄마에게 아빠는 "별일도 아닌데 제풀에 지치게 그냥 둬" 라고 말한다.

엄마의 때늦은 뽀뽀도
누나의 사과도
형이 무릎을 끓어도 스핑키는 흔들리지 않는다.

 

집 앞에 서커스단이 들어와도 모른척 하고
친구들이 와서 놀자고 해도 모른척 한다.
아빠가 "니가 나이값을 못한다고 해도 널 사랑해.."라고 하는 소리도 다 허튼소리로 들리고,.

 

스핑키는 이 세상이 스핑키에게 함부로 대했고 그래서 스핑키도 이 세상을 싫어하기로 했단다.
그래서 스핑키는 마당의 해먹에 누워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하루종일 식구들 모두 끔찍하고 친절하게 배려해주었고 그래서 스핑키는 양보할까 말까하는 생각이 쫌 들었다.
대충 화가 풀렸고 식구들이 나한테 그렇게 군게 꼭 식구들만의 잘못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자존심이 있지 갑자기 태도를 바꾸기는 좀 그렇다.

 

밤중에 몰래 부엌에 들어간 스핑키는 식구들을 위해 식탁을 차리고 광대복장을 한채 아침에 식구들을 맞는다.
모두 함께 웃었고 그 다음부터 식구들은 스핑키에게 훨씬 더 세심하게 배려를 해주었다.

 

마지막 귀절은

"그게 그리 오래 못가는게 탈이지만" 으로 끝난다.................................................................

 

그 책을 읽고

일번으로 어저께 쭌이에게 어른으로서의 모든 권력을 휘둘렀던 나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쪽팔렸고.
이번으로 이 책을 손수 골라오신 우리 아드님의 마음과 생각에 한번 더 쪽이 팔렸다.

 

아!!!!!!!!!
그날의 쓰레빠사건에 대해서 쭌이랑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까?

 

일단. 내가 철없이 짜증 낸 것에 대해서는 사과를 해야할 것 같고.
이단. 동등한 인간이라는 것과 어른과 아이라는 것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것 같다.

억울하면 너도 나이먹어라.. 혹은 그럼 니가 나가서 돈 벌어와...류는 좀 넘어서야 하지 않겠나..

 

진짜 고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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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12 01:36 2006/04/12 01:36

5 Comments (+add yours?)

  1. 현현 2006/04/12 03:09

    흐흐...쭌과 스핑키에게 공감 만빵입니다
    고민 좀 되겠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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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lsj 2006/04/12 09:44

    현현/사실은 제가 살면서 쥐꼬리만한 권력을 쥐고 있을 때가 엄마역할 할 때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대부분은 쭌이나 스핑키에 감정이입을 하는데 그 쥐꼬리만한 권력이 사람의 분별을 자꾸만 흐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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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슈아 2006/04/12 19:03

    영화 <쇼킹패밀리> 보니까 엄마의 권력이 장난이 아니더만요. 그 자리가 사람을 그렇게 만든단 생각도 들었어요. 어렵다 어려워. 그래도 이야기 잘 해보세요. 이야기 나누면서 더 서로를 잘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기대해봄. 어렵긴 한데 그래도 쭌! 너무 멋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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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iya 2006/04/13 12:17

    오~~..엄마와 쭌의 심오한 대화가 있어야 겠는데요...하지만 여전히 다른사람을 이해한다는거 참으로 힘든주제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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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lsj 2006/04/13 17:03

    miya/심오한 대화까지는 아니고. 어제 산책길에 제가 사과를 했답니다.솔찍하게, 그날 엄마가 너한테 "안 가"라고 화를 낸건 잘못한거 같다.근데 니가 어린이라서 이건 아직 안돼! 라고 내가 생각한게 맞는지 틀리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랬더니 쭌.."내가 누구 아들인데.."하더라구요. 순간. 이 녀석이 잘못알아들었나 해서. "내가 사과하는 거야" 라고 말했더니. "알아. 받아줄께"하잖아요. 근데 내 느낌은 못내..뭔가 억울하고.찜찜하고..그렇더라니까.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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