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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회주의자

험한 세상을 살다 보면 때로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꾸미는 일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는 험한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에 대한 두려움보다 꾸밈으로서 자신을 보호하는 일에 더 큰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 꾸밈에 아주 익숙해질 때 그 꾸며진 나의 모습이 어느새 나의 실체가 될 수도 있으며 나의 삶은 위선의 덩어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써 놓고 고백하건대 나는 사회주의자다. 어린 시절 나에게는 작은 '커밍아웃' 사건이 있었다. 재일 한국인 2세로 일본에서 태어나 유소년기를 일본에서 보낸 나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박해받는 소수자로 사는 일의 슬픔을 알았다. 당시 나를 둘러싼 일본인들의 대회 속에서 '조선'은 모든 열등한 것, 야비한 것, 난폭한 것, 냄새 나는 것을 가리키는 대명사이다시피했다. 침묵으로써 나의 정체성을 가리는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중학교 3학년, 나는 비겁했던 나의 침묵과 눈치보기를 깨고 수많은 일본인 학우들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조센징'임을 고백했다. 16살 소년에게 그 '커밍아웃'은 분명 가혹한 시련이었다. 이제 나이 쉰을 넘긴 나는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고백하면서 다시 '커밍아웃'을 감행한다. 사회주의에 대한 온갖 오해와 왜곡이 판을 치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이 작은 '커밍아웃'이 40년 전의 그것보다 더 가혹한 시련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실은 나는 김만제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의 '사회주의' 발언이 나왔을 때 이 고백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닥치는 대로 정적을 '사회주의'로 몰아 대는 소리들과 핏대를 세우며 자신이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소리들이 소용돌이쳐 순식간에 집단 히스테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그 때, "너 사회주의자!"라는 말은 사실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었다. 그것은 '사회주의'라는 언어가 갖는 본래 의미와 아무런 상관없는, 차라리 미운 놈에게 증오와 공포의 이미지를 한꺼번에 뒤집어 씌우기 위한 저열한 욕설에 가까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광기 속에서 나는 나의 어린 시절보다 더 비겁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사회주의는 자유, 평등이라는 인권의 근본 이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근대 시민혁명을 거쳐 인류에게 보편적인 가치로서 제시된 자유, 평등 이념은 시민혁명의 귀결인 초기 자본주의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보편적인' 것이 아닌 '재산과 교양이 있는 시민'의 전유물로 낙착되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당시 재산도 교양도 없었던 민중과 그들 편에 선 진보적 지식인들은 '혁명에 대한 배신'이라며 신랄한 비판을 가했으며, 시민혁명의 이념을 완성시키고 보편적인 자유와 평등을 이루기 위한 대안적 시스템을 모색하게 되었다. 사적 소유, 시장, 임노동, 이윤 등으로 상징되는 시스템 대신에 여러 가지 형태의 협동사회에 대한 모색이 그것이다. 근대적인 의미의 사회주의운동은 바로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고, 그 운동의 핵심을 이루는 이념은 다름 아닌 인권의 근본 이념인 '보편적 자유와 평등'이었다. 인권운동가가 동시에 사회주의의 꿈을 꾸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사적 소유, 시장, 임노동, 이윤으로 상징되는 시스템 내에서 '보편적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권의 이념이 실현되지 않는 이상 온갖 종류의 사회주의적 희망은 지구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실패를 거듭해도 역사 속에서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사회주의를 언제나 꿈꾼다. 억압된 소수자는 한 사회에 잠재된 평가와 폭력성을 그 핍박 받는 몸으로써 직접 드러내 보여 준다. 그러기에 역사적으로 모든 소수자의 '커밍아웃'은 정당한 행동이었다. 이국에서 인종차별과 싸우며 스스로 '조센징'임을 고백했던 16살 소년의 행동이 그랬듯이, 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사상의 자유가 억압되는 이 한국 사회에서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밝히는 나의 행동 또한 병든 사회의 광기에 맞서는 자유로운 인간의 책임 있는 행동이라고 믿고 싶다. 누가 이렇게 묻는다. "너 사회주의자냐?" 나는 대답한다. 자연스럽게, 담담하게 그리고 어깨에 힘을 빼고 "그래, 나 사회주의자."이런 사회가 빨리 오기를 소망한다. - 서준식 '서준식의 생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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