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트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5/08/27

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8/27
    뭐가 되고 싶니
    만주개장수
  2. 2005/08/27
    폭력적인 남성 우위 사회
    만주개장수
  3. 2005/08/27
    절대 평화주의인가, 힘에 의한 사회정의인가
    만주개장수
  4. 2005/08/27
    인권
    만주개장수
  5. 2005/08/27
    민주주의
    만주개장수

뭐가 되고 싶니

...작업 중인 마지막 장편소설 ’안녕 나의 책이여’에 그 같은 질문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 소설을 많은 사람들이 못 읽었을 것이다. 더구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른다.

내가 자란 마을에는 전설이 있다. 숲에 들어가면 자신의 나무가 있다. 70세 할아버지가 나타나, 아이와 이야기한다는 전설이다. 미래의 할아버지가 나타나 “뭐가 되고 싶니”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나는 소설가가 됐다. 여러 나라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에게 내 얘기 들려주는 것이 좋았다고 나무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마을에는 해외에 나가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마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젊은 독자들이 계속 줄고 있다. 이런 상황이 슬프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내 연배의 사람이 내 책을 읽는 것은 의미가 없다. 내가 죽고난 뒤 일본, 아시아, 세계를 이끌 젊은이들이 이 이야기를 읽었으면 한다.

또 한 가지는 민주주의에 대해 늘 생각하고 지금도 생각한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 어느 선생이 “오늘부터 민주주의야”라고 말했다. 그는 “똑바로 서서 거짓말 안하고 살면 민주주의”라고 말했던 것이 좋았다. 이때부터 민주주의자, 민주적인 인간이 되자고 마음먹었다.

 아들은 마흔한 살인데 말을 잘못해 네 살 수준의 아이같다. 사람 많은 신주쿠 걸어가면 아들이 미아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때 아들은 똑바로 가만 서 있다. 그러면 지나는 사람들이 “너, 오에 겐자부로 아들이지”라면서 도와준다. 사람들은 아들과 닮았다고 한다. 아들은 핸섬하다.

나는 다음 세대가 민주주의적인 사람으로 자라나길 간절히 바란다. 숲속에서 아이를 만난다면 민주주의적인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전설 속의 70세 노인, 내가 딱 그 나이가 됐다.

동생이 하나 있는데 일본 표현으로 ’웃기는 놈’이다. 동생은 숲속 나무에 갈 때 주머니에 돌을 가져갔다. 할아버지가 나타나면 돌을 던지려는 것이다. 더 나은 할아버지가 나타나길 바라는 것이다. 나무와 관련해 재미있는 얘기가 많다. 나는 민주주의자로 살아가라고 아이에게 끝까지 전하고 싶다.

 

- 2005. 5. 23 오에 겐자부로 방한시 기자회견 중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폭력적인 남성 우위 사회

'남성 우위 사회'는 오직 성을 잣대로 삼아서 남성이 여성보다 우수하다고 판단하고, 남성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같은 직업이라도 남성이 높은 임금을 받는 사회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남녀 성의 역할에 대한 차별을 사회적으로 용인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남성의 지배가 통하는 체제, 남성이 여성보다 큰 권력을 쥐고 남성과 여성의 성격까지 구별하면서 '남자다움, 여자다움'을 요구하는 사회를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전의 교육에서는 남자다움을 특히 강조했다. 남자다움이 군국주의를 떠받치는 힘이었던 셈이다. 당시에는 전쟁터에서 남자답게 전사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겨졌다.

일상생활에서의 폭력은 전쟁으로 통하는 길을 용납하는 기초가 된다. 작은 폭력은 점차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남성이 여성에게 행하는 폭력은 전쟁의 폭력과 뿌리가 같은 것이다.

 

- 아키 유키오 '비폭력 교과서' 중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절대 평화주의인가, 힘에 의한 사회정의인가

기독교의 일파인 퀘이커교도는 절대 평화주의와 비전주의(非戰主義)를 신조로 삼고 있다. 라인홀트 니부어는 퀘이커교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개인적 윤리로서 살인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비폭력주의는 폭력을 써서라도 사회 정의를 지켜야 할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절대 평화주의에 의한 평화는 약자가 강자에게 굴복함으로써 생기는 평화이며, 신의 나라의 평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전제적 평화일 뿐이다. 사회 정의를 확립하려면 사랑뿐만 아니라 힘이 필요한데, 절대 평화주의자는 힘에 호소하기보다 불의를 견디는 것을 선택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퀘이커교도는 '힘에 호소하기보다 불의를 견디는 것'이 아니라 '불의를 견디든가, 불의를 가하든가'라는 문제라고 대답했다."

 

- 이시다 유 '평화의 정치학(平和の政治學)' 중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인권

...... 人權의 存在와 正當性은 무슨 運星 같은 데에 쓰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人間 相互間의 行爲와 바람직한 社會 構造에 關한 理想은 歷史의 흐름 속에서 開明된 個人들이 생각해 내고 가르쳐 온 것입니다. 歷史的 經驗과 아름다움과 造和를 渴求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이런 理想과 信念은 理論으로서는 선뜻 받아 들여졌지만 動物的 本能에서 벗어나지 못한 같은 人間에 依해 恒常 蹂躪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人類 歷史의 많은 部分은 人權을 爲한 싸움으로 點綴되어 있으며, 이런 鬪爭은 한番도 窮極的 勝利를 爭取하지 못한 永遠한 鬪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싸움에 싫증을 낸다면 그것은 곧 그 社會의 破滅을 意味합니다.
오늘날 人權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主로 다음과 같은 것을 指稱합니다. 他人이나 政府의 任意的 權利 侵害로부터의 個人 保護, 勞動權과 勞動을 通해 適當한 收入을 얻을 수 있는 權利, 討論과 敎授의 自由, 政府 構成에 對한 個人의 適切한 參與 等이 그것입니다. 오늘날 이 같은 人權이 理論的으로는 保障되고 있지만 數많은 形式主義的, 法的 策略에 依해 한 世代 前보다도 훨씬 더 甚하게 蹂躪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주 言及되지는 않지만 앞으로 대단히 重視될 것으로 보이는 한 가지 다른 人權이 있습니다. 옳지 않거나 破壞的으로 判斷되는 活動에 協力하지 않을 個人의 權利 또는 義務가 그것입니다.
이와 關聯해 첫째로 軍 服務를 拒否해야 합니다. 나는 道德性과 誠實性이 非凡한 사람들이 바로 그런 性情 때문에 國家 機關과 衝突을 빚는 境遇를 알고 있습니다. 獨逸 戰犯을 다룬 뉘른베르크 裁判은 政府의 命令에 따라 行動했다고 하더라도 刑事 訴追를 免除받을 수 없다는 原則을 默示的으로 認定하는 바탕에서 進行되었습니다. 卽 良心이 國法의 權威를 代替하는 것입니다.
-後略

 

-아인슈타인 '나의 世界觀'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핵심은 '다수결'이 아니라 그 사회가 얼마나 <소수자에게 열려> 있는지, 소수자의 권리가 얼마나 보장되고 있는지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