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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8/29
    나, 사회주의자
    만주개장수
  2. 2005/08/27
    뭐가 되고 싶니
    만주개장수
  3. 2005/08/27
    폭력적인 남성 우위 사회
    만주개장수
  4. 2005/08/27
    절대 평화주의인가, 힘에 의한 사회정의인가
    만주개장수
  5. 2005/08/27
    인권
    만주개장수
  6. 2005/08/27
    민주주의
    만주개장수
  7. 2005/08/19
    자유의지란 피지배자의 환상?(1)
    만주개장수
  8. 2005/08/18
    아기
    만주개장수
  9. 2005/08/18
    축구
    만주개장수
  10. 2005/08/18
    소비는 금욕의 파트너
    만주개장수

나, 사회주의자

험한 세상을 살다 보면 때로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꾸미는 일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는 험한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에 대한 두려움보다 꾸밈으로서 자신을 보호하는 일에 더 큰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 꾸밈에 아주 익숙해질 때 그 꾸며진 나의 모습이 어느새 나의 실체가 될 수도 있으며 나의 삶은 위선의 덩어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써 놓고 고백하건대 나는 사회주의자다. 어린 시절 나에게는 작은 '커밍아웃' 사건이 있었다. 재일 한국인 2세로 일본에서 태어나 유소년기를 일본에서 보낸 나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박해받는 소수자로 사는 일의 슬픔을 알았다. 당시 나를 둘러싼 일본인들의 대회 속에서 '조선'은 모든 열등한 것, 야비한 것, 난폭한 것, 냄새 나는 것을 가리키는 대명사이다시피했다. 침묵으로써 나의 정체성을 가리는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중학교 3학년, 나는 비겁했던 나의 침묵과 눈치보기를 깨고 수많은 일본인 학우들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조센징'임을 고백했다. 16살 소년에게 그 '커밍아웃'은 분명 가혹한 시련이었다. 이제 나이 쉰을 넘긴 나는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고백하면서 다시 '커밍아웃'을 감행한다. 사회주의에 대한 온갖 오해와 왜곡이 판을 치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이 작은 '커밍아웃'이 40년 전의 그것보다 더 가혹한 시련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실은 나는 김만제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의 '사회주의' 발언이 나왔을 때 이 고백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닥치는 대로 정적을 '사회주의'로 몰아 대는 소리들과 핏대를 세우며 자신이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소리들이 소용돌이쳐 순식간에 집단 히스테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그 때, "너 사회주의자!"라는 말은 사실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었다. 그것은 '사회주의'라는 언어가 갖는 본래 의미와 아무런 상관없는, 차라리 미운 놈에게 증오와 공포의 이미지를 한꺼번에 뒤집어 씌우기 위한 저열한 욕설에 가까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광기 속에서 나는 나의 어린 시절보다 더 비겁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사회주의는 자유, 평등이라는 인권의 근본 이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근대 시민혁명을 거쳐 인류에게 보편적인 가치로서 제시된 자유, 평등 이념은 시민혁명의 귀결인 초기 자본주의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보편적인' 것이 아닌 '재산과 교양이 있는 시민'의 전유물로 낙착되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당시 재산도 교양도 없었던 민중과 그들 편에 선 진보적 지식인들은 '혁명에 대한 배신'이라며 신랄한 비판을 가했으며, 시민혁명의 이념을 완성시키고 보편적인 자유와 평등을 이루기 위한 대안적 시스템을 모색하게 되었다. 사적 소유, 시장, 임노동, 이윤 등으로 상징되는 시스템 대신에 여러 가지 형태의 협동사회에 대한 모색이 그것이다. 근대적인 의미의 사회주의운동은 바로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고, 그 운동의 핵심을 이루는 이념은 다름 아닌 인권의 근본 이념인 '보편적 자유와 평등'이었다. 인권운동가가 동시에 사회주의의 꿈을 꾸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사적 소유, 시장, 임노동, 이윤으로 상징되는 시스템 내에서 '보편적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권의 이념이 실현되지 않는 이상 온갖 종류의 사회주의적 희망은 지구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실패를 거듭해도 역사 속에서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사회주의를 언제나 꿈꾼다. 억압된 소수자는 한 사회에 잠재된 평가와 폭력성을 그 핍박 받는 몸으로써 직접 드러내 보여 준다. 그러기에 역사적으로 모든 소수자의 '커밍아웃'은 정당한 행동이었다. 이국에서 인종차별과 싸우며 스스로 '조센징'임을 고백했던 16살 소년의 행동이 그랬듯이, 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사상의 자유가 억압되는 이 한국 사회에서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밝히는 나의 행동 또한 병든 사회의 광기에 맞서는 자유로운 인간의 책임 있는 행동이라고 믿고 싶다. 누가 이렇게 묻는다. "너 사회주의자냐?" 나는 대답한다. 자연스럽게, 담담하게 그리고 어깨에 힘을 빼고 "그래, 나 사회주의자."이런 사회가 빨리 오기를 소망한다. - 서준식 '서준식의 생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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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되고 싶니

...작업 중인 마지막 장편소설 ’안녕 나의 책이여’에 그 같은 질문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 소설을 많은 사람들이 못 읽었을 것이다. 더구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른다.

내가 자란 마을에는 전설이 있다. 숲에 들어가면 자신의 나무가 있다. 70세 할아버지가 나타나, 아이와 이야기한다는 전설이다. 미래의 할아버지가 나타나 “뭐가 되고 싶니”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나는 소설가가 됐다. 여러 나라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에게 내 얘기 들려주는 것이 좋았다고 나무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마을에는 해외에 나가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마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젊은 독자들이 계속 줄고 있다. 이런 상황이 슬프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내 연배의 사람이 내 책을 읽는 것은 의미가 없다. 내가 죽고난 뒤 일본, 아시아, 세계를 이끌 젊은이들이 이 이야기를 읽었으면 한다.

또 한 가지는 민주주의에 대해 늘 생각하고 지금도 생각한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 어느 선생이 “오늘부터 민주주의야”라고 말했다. 그는 “똑바로 서서 거짓말 안하고 살면 민주주의”라고 말했던 것이 좋았다. 이때부터 민주주의자, 민주적인 인간이 되자고 마음먹었다.

 아들은 마흔한 살인데 말을 잘못해 네 살 수준의 아이같다. 사람 많은 신주쿠 걸어가면 아들이 미아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때 아들은 똑바로 가만 서 있다. 그러면 지나는 사람들이 “너, 오에 겐자부로 아들이지”라면서 도와준다. 사람들은 아들과 닮았다고 한다. 아들은 핸섬하다.

나는 다음 세대가 민주주의적인 사람으로 자라나길 간절히 바란다. 숲속에서 아이를 만난다면 민주주의적인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전설 속의 70세 노인, 내가 딱 그 나이가 됐다.

동생이 하나 있는데 일본 표현으로 ’웃기는 놈’이다. 동생은 숲속 나무에 갈 때 주머니에 돌을 가져갔다. 할아버지가 나타나면 돌을 던지려는 것이다. 더 나은 할아버지가 나타나길 바라는 것이다. 나무와 관련해 재미있는 얘기가 많다. 나는 민주주의자로 살아가라고 아이에게 끝까지 전하고 싶다.

 

- 2005. 5. 23 오에 겐자부로 방한시 기자회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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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인 남성 우위 사회

'남성 우위 사회'는 오직 성을 잣대로 삼아서 남성이 여성보다 우수하다고 판단하고, 남성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같은 직업이라도 남성이 높은 임금을 받는 사회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남녀 성의 역할에 대한 차별을 사회적으로 용인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남성의 지배가 통하는 체제, 남성이 여성보다 큰 권력을 쥐고 남성과 여성의 성격까지 구별하면서 '남자다움, 여자다움'을 요구하는 사회를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전의 교육에서는 남자다움을 특히 강조했다. 남자다움이 군국주의를 떠받치는 힘이었던 셈이다. 당시에는 전쟁터에서 남자답게 전사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겨졌다.

일상생활에서의 폭력은 전쟁으로 통하는 길을 용납하는 기초가 된다. 작은 폭력은 점차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남성이 여성에게 행하는 폭력은 전쟁의 폭력과 뿌리가 같은 것이다.

 

- 아키 유키오 '비폭력 교과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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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평화주의인가, 힘에 의한 사회정의인가

기독교의 일파인 퀘이커교도는 절대 평화주의와 비전주의(非戰主義)를 신조로 삼고 있다. 라인홀트 니부어는 퀘이커교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개인적 윤리로서 살인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비폭력주의는 폭력을 써서라도 사회 정의를 지켜야 할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절대 평화주의에 의한 평화는 약자가 강자에게 굴복함으로써 생기는 평화이며, 신의 나라의 평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전제적 평화일 뿐이다. 사회 정의를 확립하려면 사랑뿐만 아니라 힘이 필요한데, 절대 평화주의자는 힘에 호소하기보다 불의를 견디는 것을 선택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퀘이커교도는 '힘에 호소하기보다 불의를 견디는 것'이 아니라 '불의를 견디든가, 불의를 가하든가'라는 문제라고 대답했다."

 

- 이시다 유 '평화의 정치학(平和の政治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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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 人權의 存在와 正當性은 무슨 運星 같은 데에 쓰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人間 相互間의 行爲와 바람직한 社會 構造에 關한 理想은 歷史의 흐름 속에서 開明된 個人들이 생각해 내고 가르쳐 온 것입니다. 歷史的 經驗과 아름다움과 造和를 渴求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이런 理想과 信念은 理論으로서는 선뜻 받아 들여졌지만 動物的 本能에서 벗어나지 못한 같은 人間에 依해 恒常 蹂躪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人類 歷史의 많은 部分은 人權을 爲한 싸움으로 點綴되어 있으며, 이런 鬪爭은 한番도 窮極的 勝利를 爭取하지 못한 永遠한 鬪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싸움에 싫증을 낸다면 그것은 곧 그 社會의 破滅을 意味합니다.
오늘날 人權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主로 다음과 같은 것을 指稱합니다. 他人이나 政府의 任意的 權利 侵害로부터의 個人 保護, 勞動權과 勞動을 通해 適當한 收入을 얻을 수 있는 權利, 討論과 敎授의 自由, 政府 構成에 對한 個人의 適切한 參與 等이 그것입니다. 오늘날 이 같은 人權이 理論的으로는 保障되고 있지만 數많은 形式主義的, 法的 策略에 依해 한 世代 前보다도 훨씬 더 甚하게 蹂躪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주 言及되지는 않지만 앞으로 대단히 重視될 것으로 보이는 한 가지 다른 人權이 있습니다. 옳지 않거나 破壞的으로 判斷되는 活動에 協力하지 않을 個人의 權利 또는 義務가 그것입니다.
이와 關聯해 첫째로 軍 服務를 拒否해야 합니다. 나는 道德性과 誠實性이 非凡한 사람들이 바로 그런 性情 때문에 國家 機關과 衝突을 빚는 境遇를 알고 있습니다. 獨逸 戰犯을 다룬 뉘른베르크 裁判은 政府의 命令에 따라 行動했다고 하더라도 刑事 訴追를 免除받을 수 없다는 原則을 默示的으로 認定하는 바탕에서 進行되었습니다. 卽 良心이 國法의 權威를 代替하는 것입니다.
-後略

 

-아인슈타인 '나의 世界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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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민주주의의 핵심은 '다수결'이 아니라 그 사회가 얼마나 <소수자에게 열려> 있는지, 소수자의 권리가 얼마나 보장되고 있는지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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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란 피지배자의 환상?

고등학교 시절 정동이의 전도에 의해? 교회를 열심히 다닌 적이 있다.
당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중 몇 가지 의문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은 선악과를 왜 만드셨을까?'이다.
에덴 동산 한 가운데에 탐스럽게 매달아 놓고, 다른 건 다 먹어도 되지만 이것만은 먹지 말라고 하셨다.
아무 생각 없다가도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게 사람 아닌가?
엄마 뱃 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다는 정동이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버럭 화를 내며 "그걸 왜 내한테 묻노?"했다.
나에게 전도를 했으면 A/S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러자 무조건 믿어라, 믿으면 된다며 억지를 부렸다.
주일교사 선생님께 조심스레 여쭤보았다.
선생님은 역시 선생님이셨다.
성경 내용에 대한 궁금증은 죄가 아니라 당연한 거라며 이렇게 설명하셨다.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선악을 구분할 수 있게(지혜롭게 됨) 되어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뱀의 꾀임에 빠져 그것을 먹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신 증거라는 설명이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꼭둑각시가 아닌 판단력을 가진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이었다.
그래도 의문은 남았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것은 이미 결정돼 있었던 것인가?'이다.
기독교에서는 선악과 사건을 '원죄(original sin)'라 부르며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채권-채무자의 관계처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말하고 있다.
원죄가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한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고, 결정된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의해 먹은 거라고 한다면 선악과란 것을 대체 왜 만드셨냐는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것도 그러하거니와 노아 식구들만 남았을 때 하나님은 그 이전의 죄를 사하여 주신 것으로 알고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원죄는 계속 남아있다는 것인가?

매트릭스 2에서 아키텍처가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자유의지란 피지배자의 환상에 불과하다'
그 말대로 과연 나의 자유의지라고 생각되는 것이, 실은 내가 의식 못하는 지배자의 결정에 불과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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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누군가 내 걱정을 해주거나 하면 반사적으로 거부감부터 든다.

나에게 인사치레로 애는 언제 가지냐고 묻는 말에도 내 사생활 중 가장 지극히 은밀하고 개인적인 부분을 캐묻는 듯한 느낌이 들어 불쾌감이 불쑥 일어나곤 한다.
그런 질문을 인사치레로 흘려듣지 않고 의미를 따져 들을라치면 기분 나쁜 일이 한 두번이 아니다.
'애는 언제 가질거냐'는 질문은 '결혼한 사람은 아기를 가져야 한다'는 대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보이지는 않으나 엄청난 폭력이다.
보라. 분유값 한푼 보태줄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멀쩡한 사람을 임신 시키려 한다.
이게 폭력이 아니고 뭔가?
그렇다면 결혼이란 건 아기를 낳을려고 하는 건가?
분명 그런 사람도 있긴 있을거다. 그런 사람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살고 싶어서 결혼했지, 설마 나같은 놈을 세상에 한 놈 더 꺼내놓고자 결혼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 부모님의 경우만 보더라도 나를 낳아 키우시느라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여유를 자식 뒷바라지에 쏟아 부으셨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권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은 애초에 본질이 규정되어 있지 않은, 자유의사를 가진 실존적 존재 아니던가.
명절이나 제사 때 친척분들을 만나면 '늙어서 후회한다'고 말씀들을 하신다.
나에게 나름대로 애정이 있어서 하는 말씀이신 것 같으나 지독한 개인주의자인 나로서는 쓸데없는 참견에 불과하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개인을 책임진다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딕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사회보장만이라도 해줘야 애를 낳을 마음이 생길 것 아닌가?
개인에게 질병ㆍ실업ㆍ빈곤 등이 갑자기 닥쳤을 때 이 사회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는 커녕, 담담히 그를 자살바위로 인도한다.
자식 낳는 것만이 노후를 든든히 받쳐주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국민연금을 비롯한 사회보장제도가 내 생활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보다 많을 수밖에 없는 나라에서 아이 가질 생각을 한다는 건 대단한 모험이다.

 

 

명절 때마다 '남자 어른들은 앉아서 놀고 왜 여자들만 몸살 나도록 일하는가'가 항상 불만이었는데, 막상 어른이 되고 나서도 어른들이 하던 행동을 나 자신 그대로 따라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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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94년 월드컵이었을 거다.

친구들이 우리집에 맥주를 사들고 와서 경기를 관람했다.
나는 축구를 비롯한 여러 스포츠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역시 그 중계를 보지 않고 내 방에 앉아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친구들은 '애국자가 아니'라는 둥, '니가 우리나라 사람 맞냐'는 둥 헛소리를 지껄여댔다.
경기가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고 있는 모양인지, 내 친구들은 박자를 맞춰 박수를 치거나 큰 소리로 응원을 하곤 했지만 나는 왠지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게만 느껴졌다.
경기가 끝나고 결과는 예상대로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이 졌다.
그런데 한가닥 기대를 안고 경기를 관람한 나의 친구들은 그 실망감과 상실감을 분노로 승화시키더니 어딘가에서 보상받고자 하다가 급기야 홀로 방에 앉아 있던 나에게 와서 여과 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오늘 경기에 패한 원인은 바로 '내가 경기 응원을 안했기 때문'이란다.
그런 유치한 발상이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지 정말 궁금했고, 또한 나에게 그렇게 커다란 능력이 있는 줄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 후 군대에 갔는데 일요일이 되자 고참들이 축구를 하자고 했다.
뜀박질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는 역시 '안하겠다'고 했다가 순식간에 험상궂게 변하는 고참의 얼굴을 보고는 '저 축구 진짜 좋아합니다. 단결!'이라 외치며 부리나케 운동화를 신고 달려 나갔다.
허나 마음은 열심히 뛰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계속 헛발질만 해댔다.
그 다음 일요일엔 안되겠구나 싶었던지 골키퍼를 시켰다.
군대 축구의 과격성을 아는 사람은 족히 알겠지만 정말 와일드한 경기방식이다.
얼마나 공을 세게 차는지 나는 공을 잡는 골키퍼가 아니라 공을 피하는 피구선수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 후부터 나는 상병 중간 호봉 때까지 응원단장을 했다.
그런데 아까 말했듯이 나에겐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내 친구가 일깨워준 신비롭고 놀라운 능력!
근데 그 능력이란 내가 응원을 한다해서 이기게 되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응원을 안하면 지게 되는 능력이었나보다.

문제는 대부분의 고참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스포츠를 자기들끼리 즐기는 데만 끝나지 않고 후임병에게 동참하기를 강요하고, 꺼려하면 소대 발전의 걸림돌이라느니 이기적이라느니 하며 제멋대로 화를 낸다는 데 있었다.



최신식 무기로 무장된 현대화된 군대에서 박정희 시대 때에도 과다했던 대규모 사병 인원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그러니 휴식을 위해 만들어진 공휴일날 고단한 육신을 뉘이고 싶은 쫄다구에게 축구하러 나오라고 고함을 지를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공격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는 북한을 남침야욕에 불타는 괴물로 그려놓고 사람들을 겁주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지배계급들.
한낱 공놀이에 지나지 않는 축구경기에까지 알량한 '애국심'이라는 만병통치약으로 사람들을 '국가와 민족'으로 묶어 놓아 지배계급의 지배 수단으로 삼으려는 수작과 다를 바 없다.
제도 교육 12년과 보수권 미디어를 통해 애국심을 강요 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군대에 가서는 충성심까지 강요 당한다.

2002 월드컵에서 4강에 들어가려 하니 매스컴에선 이것으로 인해 앞으로 창출될 이익이 몇 십 조원이라 떠들어 댔다.
모든 것을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보는 천박한 버릇도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 창출된 이익이 과연 우리에게 제대로 분배되었나, 아니면 SK와 삼성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나.

필요에 의해 동원되었음에도 자신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은 정말 비참한 일이다.
억지로 끌려갔으면서도 제대하고 나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러 갔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우리에게 국가란 반쪽짜리인 '대한민국'뿐인가?
우리가 과연 학교에서 배운대로 단일 민족인가?
만일 단일 민족이라 치더라도 단지 그 이유로만 통일이 되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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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는 금욕의 파트너

...자본주의가 대마초를 혐오하고 적대시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노동자 계급에게 지나치게(?) 적은 비용으로 과한 기쁨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마초와 대마초가 상징하는 삶의 방식은 금욕적 노동에 기초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것이었다. 또한, 대마초를 통해 얻는 기쁨은 물질적 소비의 기쁨을 희석할 수도 있었다. 소비는 금욕주의가 조장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자본의 축적과정에서는 불가피한 것이었고 금욕과 마찬가지로 노동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즉, 보다 많은 소비를 위해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노동강도를 높이고 노동시간을 연장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소비는 금욕의 파트너였다.
대마초는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위협하는 존재로 비추어졌다. 자본주의는 대마초를 거두는 대신 담배를 내밀었다. 담배는 대마초가 갖고 있는 위험성을 극적으로 완화시키면서도 대마초와 유사한 것처럼 보였다. 담배의 미덕은 대마초보다 훨씬 기쁨이 덜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노동에도 별 방해가 되지 않았다. 담배가 대마초보다 해롭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금욕을 둘러싼 계급 간의 불화는 자본주의 발달의 초기부터 빚어졌으며 부단한 투쟁의 역사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와 시민, 대중의 지위는 향상되었지만 금욕적 억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던 때는 없었다. 대마초는 바로 그 억압과 저항 사이에 위치해왔다.
- 후략


- 유현 '대마를 위한 변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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