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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인권위의 '일기장 검사 관행'관련 발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설마 아직까지 초등학생의 일기장을 검사하는 구태가 남아있을 줄 몰랐다.
한편 지금까지도 내겐 마음속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5학년 때의 아픈 기억을 다시금 끄집어 내게끔 해준다.
작문을 그다지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하루는 놀다보니 일기 쓰는 것을 까먹어 버렸다. 까짓거 내일 이틀치 쓰면 되지 하고 미뤄뒀는데 다음날이 되니 또 미뤄지게 되었다. 그렇게 하다보니 거의 한달 치를 미루게 되어버렸다.
그럴 즈음, 담임 선생이 '한달이나 일기장을 제출하지 않는 녀석이 있다'고 했다.
음... 오늘 밤을 일기 쓰느라 꼬박 새워야 되겠구나 하며 후회와 번민이 교차하는 순간 '나한중이, 이리 나와'
어이없게도 사전 1차 경고도 없이 체벌이 가해졌다.
아동의 양쪽 볼이 성인 남자의 두터운 손바닥에 좌우로 쉴 새없이 마음껏 유린 당했다. 교탁에서 교실 끝까지. 다시 교실 끝에서 교탁까지...사실상 체벌이라 할 수도 없다. 나는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었다.
피해자가 없는 범죄가 있을 수 있나?
그렇다면 분명 교육 목적은 아니었음이 확실하다.
그건... 포마드 바른 40대 중년 남성의 욕구불만의 더러운 찌꺼기 배설 행위라 할 만하다.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커다란 손바닥으로 한 시간 동안 린치를 가하며 그 사내는 나에게 뭘 원했을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사내는 내 귀를 잡고 옥상으로 끌고 가더니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마음껏 펼칠 수 없었던 초식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즈음엔 구타에도 탄력이 붙어 상대가 조그만 초등학생이란 사실은 이미 문제될 것도 없었다.
내 인생에 그렇게 장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맞아본 일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결코 없으리라 자신있게 장담할 수 있다.
그 사내의 직업이 교사였던 것을 감안해볼 때 그는 과연 나에게 무엇을 깨우쳐 주려 '사랑의 린치'를 가했을까?
그 사내에게 있어 '일기장 검열'이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그 사내가 생각하는 교사의 역할이란 무엇이며 권력 행사의 한계는 어디까지라고 생각했을까?
그 일로 인해 아직까지도 분노를 삭히지 못할 만큼 내 가슴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아로새겨지게 되었지만 그 사건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체험이고, 그런 사내가 교사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지극히 우연이었을 뿐이라 자위하듯 믿고 있다.
하지만 그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던 기저엔 학생의 사생활이 담긴 사적 기록을 공적으로 검열할 수 있도록 장치된 시스템이 분명히 빌미가 되었다.
더군다나 그 사내는 물론, 다른 몇몇 교사들도 일기 검열을 통해 얻어진 정보를 토대로 '너는 어제 학생이 해서는 안될 행위를 했다'며 학생들에게 체벌을 가한 경우도 빈번했다.
이건 바로 '작문능력 향상'이란 허울 좋은 목적 아래 학생들의 사생활을 앉아서 감시하려는 CCTV가 아니고 뭔가?
또한 지극히 은밀하고 개인적인 일은 검열될 일기장엔 기록되지 못한다. 일기를 문학이라고 본다면 교사의 검열에 대비한 자기검열로 창작의욕을 상실케 만드는 폐단이며, 생활의 기록이라 본다면 소중하고 중요한 기억을 검열이란 무식한 제도 덕에 잃어버리게끔 하는 잔인한 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인권위 의견, 전적으로 공감하며 지지한다. 2005.4.7.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서 보람과 긍지를 얻으려 하지 비판적인 생각이나 후회를 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군대에 대해서만큼은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여유가 없는 것 같다.
군대란 태생적으로 살인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국민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목이 있긴 하나 살인은 어차피 살인일 뿐이다. 내 가족과 내 나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 한다면 맞다. 틀린 말은 아니다.
허나 자기 손으로는 절대로 살인할 수 없다는 사람에게까지 억지로 살인 도구를 쥐어 주는 짓은 너무나 야만적이다.
그런 사람을 위해 대체복무제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보다 선행돼야 함과 동시에 또한 중요한 것은 징병제 철폐다.
군생활로 인한 인간성과 사고방식의 변화를 두고 우리는 '사람 됐다'고들 말한다.
한 개인이 국가로부터 인간성 개조를 강제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너무 당연히 여기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군대 다녀왔다는 우월감과 보상심리에 젖어 아직 군대를 갔다오지 않은 이들이 앞으로 겪어야 할 고통에 대해서도 당연하게들 생각한다.
'일당 몇 백 원에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과 의미 없이 힘든 노동과 춥고 더운 날씨와, 소중한 사람들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고독감 등을 감내해야만 하는 고통' 등을 나도 당했으니 너도 당해봐야 한다는 일종의 보상심리, 또한 징병제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군대를 찬양하고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키는 것은 바로 징병제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이다.
개인의 존중 받아야 할 개성보다 민족이나 국가라는 개념의 비중이 이 나라에서 지나치게 확대되어 있는 현상엔 바로 이 징병제가 크게 한몫하고 있다고 본다.
양심의 자유란 것이 그들에겐 전과자 딱지와도 맞바꿀 수 있을 정도로 절박하고 소중한 것임에도 모두들 민족과 국가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혹은 단지 남의 얘기라 여기고 그것을 너무나 가볍게 무시해버린다. 나아가 비웃기까지 한다.
더욱 비참하고 곤혹스러운 것은 우리 국민의 안위도 아닌 미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군을 파병한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한 사실임에도, 그것에 대해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말을 하는 사람과 마주할 때다.
...人權은 처음부터 國家 權力과의 對抗 關係 속에서 태어난 槪念이다. 그리고 나는 階級 社會에서 普遍的인 人權이란 存在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世界人權宣言文의 私有 財産의 權利나 知的 財産權 같은 건 事實 매우 資本主義的인 槪念이다. 人權의 槪念은 歷史的으로 變해 왔고 앞으로도 變해 갈 것이다. 人權 運動의 于先 課題는 資本主義 社會를 爲해 만들어진 人權 槪念을 普遍的인 人權 槪念으로 바꾸는 일이다.
보편이라는 말은 참 폭력적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반드시 힘 센 놈이 강요하게 되어 있다. 서구 자본주의 강국들이 제3세계에 침략해서 자원 같은 걸 막 가져가면서 자본주의의 틀을 잡았는데 이 과정에서 내세운 것이 바로 가톨릭의 보편적 가치다. 보편을 강요하고 보편의 이름으로 자기 정치적 이익을 챙기는 거다. 물론 인권은 보편적이어야 하지만 사회 구성원 간이나 나라들 간에 이해 관계의 대립 조건 속에서는 보편적 인권이라는 게 불가능하다. 이해 관계가 대립되어 있을 때 한쪽 인권을 보장해 주면 다른 쪽 인권은 무시되는 법이니까. 기본적으로 지배 피지배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말은 지배 계급의 기만일 뿐이다. 결국 이해 관계가 같은 방향으로 가는 그런 시대가 와야 하는데 결국 계급의 문제다. 원칙적으로 계급이 없어지고 계급 지배가 없어지지 않는 한 보편적 인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 서준식 인터뷰 중에서
전쟁에서 승리를 획득하기보다는 평화를 얻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일이다...
반군국주의자들이며 반식민주의자들이며, 반종교적인 초현실주의자들은 2차대전 전에 "당신들의 전쟁도 반대" "당신들의 평화도 반대"라는 요란한 제목의 선언서를 발표했다. 그들의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여전히 옳다. 군사적 승리에 힘입어 상대편에 굴욕적인 자세를 강요하는 강제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이라크 전쟁은 이 점을 확인시켜 주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 점을 계속 확인시켜 줄 것이다. 강제로 평화조약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은 쪽은 두고두고 복수할 기회를 노릴 것이다.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여전히 그들이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군사적 수단을 총동원하여 이와 유사한 "평화"를 얻기를 원한다. 이는 정말 한심한 착각이다. 이 두 나라의 정치지도자들은 이런 착각에 빠져 자만해서는 안 된다.
-후략
알랭 쥬프로와_Alain Juffray
자본가들은 신자유주의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라고 한다. 또 고용시장 유연화가 이루어져야 경제가 산다고 한다. 저 놈들은 왜 당당하고 뻔뻔한지 아는가. 왜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는지 아는가. 노동계급에게 혁명의 전망이 없기 때문에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계급의 원칙과 변혁의 열망이 있다는 걸 보여주어야 한다. 노동자 세상을 원하는가. 그러면 단결하고 투쟁하라. 투쟁하지 않는 노동자에게 미래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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